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86화 (86/100)

#86

휘준의 핸드폰으로 봤던 기사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전부 회사 탓이 된 기사들.

“아…….”

이서의 얼빠진 소리가 허탈하게 흩어졌다. 그깟 기사 몇 개, 그가 손쓴 게 아니라 한들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미 더한 짓도 해 왔으면서.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나눌 대화 남았잖아요.”

차계원은 화를 내는 것도, 폭력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여유롭고 태연했다. 마치 집 앞에 잠깐 나온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도망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잡혀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가 나눌 대화가 어디 있어. 집? 무슨 집? 난 안 가. 왜, 왜 찾아왔어?”

“……데리러 온 거죠. 하도 안 와서.”

차계원이 느슨한 입매로 웃었다. 평소보다 힘이 빠져 있는 것 같은 느슨함이 이서에게는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잡혀 있는 어깨가 신경 쓰였다. 빼내기 위해 몸을 돌렸으나 꿈쩍도 안 했다.

“놔, 놔! 계약 없었던 거로 한다며. 너도 합의한 거잖아.”

그와의 계약은 끝났다. 안일하게 지장을 찍은 대가는 이거면 충분했다.

“맞아요. 계약은 그랬죠.”

“으…….”

이서가 차계원의 손을 떼려다 포기했다. 성과 없이 힘만 빠졌다. 게다가 그는 조금도 힘든 눈치가 아니었다.

“우리 채무 관계 하나도 청산 안 된 거 알죠.”

이서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차계원에게 갚을 게 태산 같다는 사실이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매달……. 갚을 거야 조금씩.”

“무슨 수로요?”

웃음 섞인 말투가 비웃음처럼 들렸다. 이서가 고개를 빳빳이 치들었다.

“네가 뭐라 해도 안 가. 내가 빚이 남았다는 게 네 집에서 지낼 이유가 돼? 아니잖아. 왜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내가 너한테 무슨 큰 잘못을 했는데.”

계원이 눈을 살짝 찌푸린다. 바락바락 소리치는 모양새가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제 머리 어디에 나사 하나가 빠진 게 아닌가 싶다. 그와 반대로 백이서가 걸친, 어깨선이 맞지 않는 옷은 거슬렸다. 정확히는 저런 거적때기 같은 걸 주워 입혔을 인물이 거슬렸다.

“이유나 묻자. 너 나한테 왜 이래? 내가 왜 여기까지 쫓겨서 도망 와야 해? 처음부터 우리 회사 들어온 이유가 뭐야? 계약도 끝난 마당에 아득바득 찾아오는 이유는 뭔데. 3년 전 일이 그렇게 억울해? 정말 그거 하나 때문에 이래? 대체 왜! 왜 네 멋대로 휘두르냐고. 왜!”

이서가 숨도 쉬지 않고 씩씩대며 외쳤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화를 내 본 건 처음이었다. 차계원은 한참이나 그 씩씩거림을 보고만 있다가, 이서가 혼자 지쳐 바닥에 주저앉을 즈음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이서의 얼굴이 단박에 굳었다. 못 들을 걸 들은 기분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다시금 울화 같은 게 올라왔다. 차계원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껌 한 통 달라는 듯한 어투로 좋아한다고? 개소리. 세상천지 어디에도 이렇게 성의 없는 고백은 없을 것이다.

“이 방법은 별로죠.”

이서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에게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일그러져 있는 그의 표정이 이서를 불편하게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해 봤거든요. 뭐라고 대표님을 설득할지.”

차계원이 이서의 앞에 천천히 앉았다. 그를 보며 이서는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차계원이 잡고 있던 어깨를 부드럽게 누르며 앉혔다.

“지금 가면 빚 절반을 제해 준다고 할까.”

차계원은 정말 진지하게 고심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쉬지 않고 컹, 컹 짖는 강아지를 봤다.

“이 한 줌 재도 안 될 것 같은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해 볼까. 아니면.”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마당 안쪽의 집을 가리켰다. 이서가 사색이 되며 핏대를 세우려 했다.

“빌어 볼까.”

“……뭐?”

“…….”

얼이 빠져 입을 벌린 얼굴을 계원이 쓰다듬었다. 이서는 그의 저의를 파악하고 싶었으나 그저 약간 일그러져 있기만 한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내가…….”

한참 후, 차계원이 계속 놓지 않던 이서의 어깨를 놔주며 입을 열었다. 이서도 계속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을 뺐다. 적어도 강제로 끌고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왜…….”

밭게 다가오는 모습에 이서가 당황하며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뭐야, 너…….”

차계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기가 떨어져 이서의 뺨을 적신다. 볼썽사납게 일그러진 습기 가득한 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아주 낯설었다.

“어떻게 해야 돼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건조하다고 느낀 그의 음성이, 너덜너덜 갈라진 채로 이서에게 묻는다.

“제가 어떻게 하면 나랑 갈 건데요.”

그가 이서의 손을 가져가 본인의 뺨을 비볐다. 얼어 있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알려 줘요.”

이서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와락 구겨졌다.

* * *

공격적이던 기사들은 하루아침에 다 사라졌다. 차계원이 직접 한 인터뷰도 있었다.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하다가 합의하에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

이서가 멍하니 널어 뒀던 옷감을 갰다. 되는대로 접자, 옷 귀퉁이가 뭉개졌다. 어제의 차계원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그는 울다가 사과를 하고, 또 애원했다. 미친 사람 같았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이서의 의사를 묻던 게 자꾸만 거슬렸다.

‘나랑 가요. 제발 나랑 가.’

아니, 그것보다 거슬리는 건 눈물을 뚝뚝 흘리던 차계원이었다.

이서는 그가 연기한 작품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우는 장면도 있었다. 그러나 어제의 그 초라하고 처연한 얼굴과는 달랐다. 어제의 차계원은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 하려 했다며 허망한 얼굴로 앉아 있던 그를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불편하고 어딘가 걸리는 기분.

“선배.”

휘준이 이서 앞에 쌓여 있던 옷감을 자신의 쪽으로 가져가며 그를 불렀다.

“어, 어?”

“무슨 생각 하십니까?”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멍하시네요.”

“너무 편해서 그런가 봐. 진강이는 연락 없어?”

“네. 소송도 없던 일로 됐으니 본인 일로 바쁠 겁니다.”

매일같이 연락을 해 오던 이진강은 요 며칠 연락이 없었다. 제집을 드나들듯 하루가 멀다고 내려오더니 안 온 지도 꽤 됐다.

“걱정되십니까?”

“어? 아, 아니.”

주변에 변화가 생길라치면 차계원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 먼저 들었다. 어제 진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휘준은 바빠서 그러겠거니 넘어갔으나, 이서는 자꾸만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계원의 집에 갇혀 있을 때 보다, 그 집에서 도망 나와 지내고 있는 시간이 더 편치 못했다. 내내 긴장 상태였으며, 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의 기분이 이럴까 하는 과한 생각까지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마음이 시끄럽기까지 했다.

‘왜 피해를 보면서까지 기사들을 다시 냈으며,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과를 해 올까. 여기까지 와서 나를 끌고 가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리고 왜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걸까. 이번에는 대체 무슨 수작이지.’

같은 생각들이 번갈아 가며 들었다.

차계원은 또 올 거다. 돌아가면서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어제 그의 모습 중, 다른 데로 숨어도 찾아오겠다는 마지막 협박만 그다웠다.

“식사를 차려야 하는데.”

휘준이 문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그의 고모가 돌아오시기로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차계원이 들쑤신 탓에 잊고 있던 일이었다.

“맞다. 오늘 고모님 돌아오시는 날이라고 했었지.”

“예, 고모 오신 뒤에도 편히 계셔도 됩니다.”

“하하, 슬슬 다시 서울 가야지.”

그러나 말과 달리 서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자 아득함이 밀려들어 왔다. 서울로 올라가면 어떻게 회사를 운영해야 할까. 사무실 먼저 구해야 할 텐데. 일단 지낼 곳부터가 없었다.

“무작정 가서 어쩌시려고요. 당분간만 계시십시오.”

“언제까지나 계속 있을 수도 없잖아.”

이곳에 있는 내내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회피는 잠깐이었다. 아무 소득 없이 더 큰 걱정이 되어 돌아왔다.

“근데 고모 오시면 마중이라도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네요.”

핸드폰을 확인한 휘준은 다시 내려놓고 남은 옷감을 집었다. 연락 온 게 없는 모양이었다.

“어? 몇 시에 오시기로 하셨는데? 언제부터 연락이 안 돼?”

“아침 7시에 출발한다는 연락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중간에 연락 주시기로 했는데…….”

시간은 이미 오후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서울인 딸네 집에서 출발하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었다. 순간 이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때 되면 연락하시겠죠.”

“설마.”

‘이 한 줌 재도 안 될 것 같은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해 볼까. 아니면.’

어제 그가 했던 말 중 하나가 떠올랐다. 어제의 자신은 우는 그를 마구 대문 밖으로 떠밀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했는데 이서는 듣지 않았다. 무력으로 하면 자신을 데려가거나 할 수 있었겠으나 차계원은 다시 오겠다는 말만 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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