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돌아가 생각하니 괘씸해서 휘준이네 고모님께까지 해코지한 거라면?’
“선배? 형!”
이서가 맨발로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차계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간 후로, 이서의 불안정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타닥.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대문을 떠밀듯 열고 나오자, 차계원의 차와 그 바로 앞에 선 차계원이 있었다.
“너, 너.”
이서가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차계원은 가만히 그 손에 자신의 멱을 내줬다.
“네가 그랬지. 네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나 아니에요.”
살짝 얼굴을 찌푸린 차계원은, 멱살을 잡은 이서의 손을 아주 쉽게 풀어냈다.
“그럼 왜 여기 있는데?”
이서의 머리에는 혼란만 가득했다. 어제부터 쭉 이 상태였다.
“온다고 했잖아요?”
어깨를 으쓱이는 그가 참 천연덕스럽다고 느껴졌다.
“나, 나 안 간다고 했잖아. 네가 무슨 말로, 들쑤시든 네 집에서 안 지낼 거야.”
“……들쑤셔지기는 했나 봐요?”
차계원이 입매를 끌어올린다. 그의 시선이 이서의 맨발로 향했다.
“아무튼, 그 이야기 하려던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아니야. 몰라. 안 궁금해. 네가 설마 휘준이 고모…….”
다가오는 팔에 이서의 말이 끊겼다. 차계원이 이서를 들어 본인의 검은 구두 위에 올렸다. 바닥이나 그의 신발 위나 시린 건 마찬가지였다.
“비켜. 필요 없어.”
“나랑 다시 계약해요.”
이서가 팔을 버둥거리려다 뚝 멈췄다. 제가 바보도 아니고 기껏 해지한 계약을 무슨 이유로 다시 하겠는가.
“하? 내가 미쳤어?”
“형!”
그때 휘준이 이서를 따라 마당 밖으로 나왔다. 그는 차계원을 발견하고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윽. 잠깐……!”
그러나 휘준을 발견한 것도, 행동을 취한 것도 계원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차문을 열어 이서를 집어넣고, 자신도 올라탔다.
탁.
문이 닫힘과 동시에 휘준이 탕, 탕. 차 문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서가 차 문의 잠금장치를 여는 버튼을 찾는 새에 차는 출발했다.
“차계원!”
점점 멀어지는 휘준과 골목을 보며 이서가 소리쳤다. 차계원은 시끄럽다는 듯 귀 부근을 막더니 속력을 높였다.
“계약도 안 하고, 네 집도 안 간다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알지만 달리는 차에서 이서가 할 수 있는 건 제 의견을 피력하는 것뿐이었다. 계원이 속도를 늦추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더라고요. 나라면 좀 더 멀리 도망갔을 텐데 고작 여기 있는 게.”
그가 자신의 신발을 벗어 이서의 좌석 밑에 놓는다. 신으라는 뜻 같았다.
“사실 대표님도 알죠. 어디로 가도 소용없다는 거.”
“…….”
“어제 내가 찾아왔을 때 안 놀랐잖아요.”
이서가 조용히 그를 노려봤다. 모를 리 없다. 그게 자신이 이곳에 온 뒤로도 계속 불안해했던 이유니까. 골목을 반쯤 빠져나온 차는 멈췄으나, 이서는 내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소용없을 걸 알았다. 또 지금 같은 상황만 반복하겠지.
“소송하겠다고 했을 때 놀랐어요. 당신도 알 텐데. 정말 소송에 들어간다면 내가 이길 거라는 걸. 그렇게 안 돼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라는 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휘준과 진강은 계속 우리가 유리하다며 이서를 안심시켰지만, 이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가 먼저 계약을 해지한다고 했을 때 차라리 다행이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초조했다. 그걸로 끝이 아닐 것 같아서. 그리고 결국 이서의 예상이 맞았다. 차계원은 지금 자신을 잡아 두고 다시 계약하자고 하고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었어요?”
“…….”
침묵하는 백이서를 보며 계원은 오늘 아침 했던 결심을 다시 되새겼다. 계원은 자신이 해 볼 만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은 다 동원했다. 애원해도 안 통해, 우는 것도 안 돼. 그렇다면 이제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솔직한 속내를 보이는 것. 비록 그 속내가 썩어 문드러졌더라도.
“내 집에서 지낼 때. 사실 편했죠.”
이서가 움찔한다.
“화나고 이해도 안 갔지만 편했잖아요. 독촉하는 빚쟁이도 없어, 사무실도 좋아. 이진강이 찾아와서 빼내지만 않았으면 대표님, 어물쩍 눌러앉았을걸.”
계원은 그런 이서를 힐긋 보고 말을 이었다. 이서는 제 손톱을 탁, 탁, 부딪혔다. 자신도 모른 척 묻어 뒀던 치부를 들킨 기분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제법 편했다. 제멋대로 구는 차계원 탓에 마음 편한 날은 없었어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춰 가는 회사를 보며 마음 한편에서는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커녕 회사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 보내는 호의적인 시선을 마주할 때면,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어깨가 으쓱하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사무실 월세도, 직원들 월급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인정하는 순간 자존심도 상하고, 도의적으로도 아닌 것 같으니까.”
동요하듯 흔들리는 눈망울을 계원은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갈 데 없죠. 내 집에 가기는 싫지만, 그게 아니면 하루도 지낼 곳이 없잖아요.”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였다. 백이서 스스로가 본인이 갈 곳은 제 품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
“서휘준네 고모. 내가 잡아 둔 거 맞아요.”
그가 상체를 기울여 이서의 귀에 속삭였다. 안 그래도 하얀 안색이 더 하얗게 질렸다.
“아까, 아까 아니라고.”
“거짓말이죠. 저 거짓말 잘하는 거 아시면서.”
백이서의 얼굴은 시시각각이었다. 하얗게 질리다가도 파랗게 변했다. 저 기겁할 듯한 표정을 보는 게 벌써 수십 번인데도 매번 다르게 느껴졌다. 분명 처음에는 즐거웠던 것 같은데.
“내렸던 기사, 다시 수면 위로 뜨게 할 수 있어요. 법정 공방을 다투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원한다면 해 줄 수 있고요. 이번에는 진짜로 회사가 망하겠지만.”
“갑자기 또 왜 이래……?”
“아, 이미 망했죠.”
계원이 깜빡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이서에게서 시선을 떼고 창밖으로 눈을 고정했다. 자신은 이제 무시하기로 했다. 저 좆같은 표정을. 덜덜 떨며 자신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그 거지 같은 기분을.
“대표님이 회사를 접어도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거예요. 내가 다 막을 거니까. 이진강은 다른 회사를 찾아간다 해도 이 바닥에서 설 수 없어요. 서휘준은……. 그냥 죽일까 봐.”
그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나열했다.
“예전에 받던 빚 독촉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악랄한 방법으로 원금을 받아낼 수도 있겠죠.”
“어제는 미안하다며, 좋아하니 어쩌니 그랬잖아.”
“맞아요. 그래서 안 할 거예요.”
그가 살갑게 웃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사이드미러로 멀리서 서휘준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계원은 한 50미터 정도 거리를 넓혔다.
“지금 말한 거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
노려보는 백이서의 표정이 어울리지 않게 사나웠다.
“이번 계약서는 대표님이 쓰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계원이 서류 봉투에서 백지를 꺼내 내밀었다. 그가 이번에 크게 느낀 것 중 하나는 허점이 없어야 한다는 거였다. 계약을 무효 시킬 수 있을 만한 근거를 주면 안 됐다.
“뭐…….”
“대표님이 원하는 대로 쓰세요. 그게 뭐든 동의할 테니까. 같이 쓰고. 같이 도장 찍어요. 합법적으로.”
이서는 차계원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들지도, 그렇다고 쳐내지도 못했다. 무릎 위에 놓인 걸 내려다볼 뿐이었다.
“편해지고 싶은 마음을 모른 척할 필요는 없어요. 대표님이 상황을 직시할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그가 말하는 시간이 지금을 말하는 게 아닌, 휘준의 고모네로 도망가 있던 시간을 말하는 것임을 이서는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할래요. 내릴래요?”
“내리면…….”
내리면 그냥 가 줄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후에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의 말처럼 회사도 망했고 집도 절도 없는데.
“빚과 망가진 삶을 끌어안고 다시 열심히 사셔야겠죠.”
차계원은 약 올리듯 휘준이 다가올 때마다 거리를 넓히고 있었다. 이서가 서류 봉투를 그러쥐었다.
“다시 계약해요. 어떤 독소 조항이 있어도 좋아요.”
-3년 전.
“계원아, 차계원!”
멀리서 들리는 김건의 외침을 무시하며 부재중이 여러 통 와 있는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지금 계원은 짜증이 날 대로 나 있었다.
“계원아! 어디 있어!”
김건은 멍청하게 자신의 이름을 동네가 떠나가라 부르고 있었다. 그럴수록 사람들이 더 몰려들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귀찮게.”
오늘 스케줄 장소는 도심 한복판이었다. 촬영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간단한 인터뷰였을 뿐인데 사람들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결국, 계원은 인터뷰 중간에 멋대로 빠져나왔다. 인터뷰하기로 한 내용이 절반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계원의 심사가 뒤틀렸음을 직감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변을 서성이던 건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차계원이 멀리 사라진 후였다.
달칵.
가로등 빛이 들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선 계원이 가죽장갑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하얀 입김과 섞여 공중으로 흩어진다.
“후.”
겨울밤의 공기가 살을 스쳤다. 그 차가운 기운마저도 기분 나빴다. 계원은 겨울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그가 싫어하는 것들이야 워낙 많았으나 체온이 낮은 탓에 추운 날은 유독 싫었다.
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짜증 섞인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내뿜을 때였다.
“다, 담배. 담배 좀 꺼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