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88화 (88/100)

#88

골목 끝자락,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인영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어두운 곳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콜록, 콜록.”

그 미약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계원의 미간이 와락 구겨진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차에 성가심이 더해졌다.

“끊는다며, 약속했잖아…….”

“이건 또 뭐야.”

아마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 같았다. 으슥한 골목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인영이 비척거리며 계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남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고등학생쯤 되나 싶더니, 가까이에서 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 같았다.

“으응……. 담배 꺼 줘.”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취객이었다.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한심한 류도 계원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피우지 마. 냄새 싫어.”

남자는 대담하게도 계원의 입에 물린 담배꽁초를 빼 바닥에 버렸다. 순간, 눈앞의 남자도 똑같이 바닥을 구르게 만들어 줘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으나 그만두었다. 이유 없이 내키지 않았다. 귀찮음이 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흐응…….”

비틀대던 남자가 이내 제 옷자락을 쥐며 중심을 잡았다. 계원은 남자가 바닥에 버렸던 담배꽁초를 지르밟았다. 취해서 옷자락이나 붙들고 늘어지다니, 되지도 않는 애교였다. 차라리 넘어지는 쪽이 더 볼 만할 거다.

“왜 이제 왔어? 나 계속 기다렸는데.”

이제는 아예 자신을 상대로 술주정이나 부리고 있었다. 옷 끝자락을 잡고 있던 손이 점점 올라와 코트의 중앙을 잡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독한 술 냄새가 확 풍겨 왔다. 번거로워지기 전에 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술에 절인 몸뚱이를 쳐내려 할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형 만나면 진짜 죽여 버리려 했는데…….”

남자의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그건 추위나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죽이지 그래.”

계원이 툭 던지듯 냉정하게 대꾸했다. 누군지 몰라도 남자가 자신과 착각한 상대는, 그에게 원한을 잔뜩 산 듯했다. 그러면 팔다리라도 부러뜨리면 그만이다. 죽이고 싶으면 칼이라도 들고 찾아가야지.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의 옷자락을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붙들고 있을 게 아니라.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죽여 버리려 했다던 대상 앞에서 화를 내는 것도, 주먹질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고개만 푹 수그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옷을 붙든 마른 손이 추위 탓에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 위로 건조하게 마른 피부의 표면이 하얗게 부르튼 게 보였다.

“내가 어떻게 그래…….”

남자는 어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문득 얼마 전 촬영이 끝난 영화의 상대 배우가 떠올랐다. 세상 불행한 서사는 다 갖은 캐릭터였는데, 안타깝게도 그의 연기는 세 살짜리만 못했다. 그 새끼가 이 남자의 반만 닮았어도 덜 괴롭혔을 텐데. 그럼 굳이 수고스럽게 배우를 바꿀 일도 없었을 거다.

“…….”

평소라면 밀어 버리고 자리를 뜰 텐데, 바들바들 떠는 손과 정수리가 꽤 괜찮았다. 처량하고 궁상맞았다.

“흐윽, 어떻게 그래…….”

남자는 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계원에게 머리통을 기대 왔다. 가슴께가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하.”

유난히 동그래 보이는 정수리를 가만 보던 계원이,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여러모로 성가신 인간이었다. 남자는 머리통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제게 온몸을 기대려 했다. 봐주니까 한도 끝도 없었다. 계원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후,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자신의 몸에서 뗐다.

“흑. 아파…….”

수그리고 있던 고개가 들리자 남자의 얼굴이 조금 더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말간 얼굴이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고개가 치 들린 채 계원과 눈을 맞춰 왔다. 골목 밖에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헤드라이트 빛을 받은 흰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서러운 건지 남자는 와중에도 끝없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이봐요. 내가 뭘 했다고 울어.”

“흐윽, 흑.”

그는 살짝 둥근 눈매를 갖고 있었는데, 훌쩍일 때마다 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다음에는 끝이 약간 올라간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가 볼을 타고 흐르기를 반복했다. 물기 때문인지 안 그래도 처량맞은 눈동자가 맑은 빛을 띠어서, 꼭 비 맞은 개새끼 같았다.

“쯧.”

계원이 혀를 차며 머리를 놔줬다. 갑작스러운 짜증이 확 밀려왔다. 손안에 잡혀 있던 머리칼의 부슬거리는 감각이 손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머리를 놔주자 얼씨구나 좋다 하고 계원의 품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방금까지 계원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는 자각조차 없어 보였다. 술 냄새 위로 달곰한 향이 미미하게 스쳤다.

“으응.”

남자는 얼굴을 비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품을 파고들었다. 마르지만 탄탄한 뼈대가 옷 위로 느껴졌다.

“…….”

“뭐요.”

한참 계원의 품에 얼굴을 비비던 남자가 대뜸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춰 왔다. 바라는 게 있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사탕이라도 쥐여 줘야 떨어져 나가려나.

“뽀뽀해 줘.”

“……뽀뽀?”

계원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키스도 아니고 뽀뽀를 입에 올리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 유치한 단어가 눈앞의 남자에게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 헛웃음이 나왔다.

“빨리, 뽀뽀.”

“허.”

정신 줄을 놔도 단단히 놓은 건지, 양손으로 계원의 코트를 꼭 쥔 남자는 까치발을 들며 입술을 들이밀고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어져서일까, 달빛이 유독 밝아서일까, 닿겠다고 낑낑 애쓰는 모습과 붉은 입술이 완연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쪽.

계원이 상체를 살짝 숙여 입술을 붙였다 뗐다. 충동이었다. 아주 잠시 붙였다 뗐을 뿐인데, 부드럽고 뜨끈한 감촉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잠깐 닿은 남자의 숨은 더웠다.

“씨발, 내가 미쳤지.”

술에 취한 건 앞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 같았다. 취객의 장단에 맞춰 입이나 맞춰 주는 게 제정신에 할 일은 아닐 테니까. 생각해 보니 섹스 중도 아닌데 뽀뽀를 해 본 건 제 기억에 없었다.

“또.”

남자는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잠자리에서의 이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여기서 더 울면 어떻게 될까. 문득 작은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다 계원은 머리를 내젓고 남자를 밀었다. 스킨십에 딱히 남녀를 가리지는 않지만 적어도 취객을 상대하는 건 아니었다. 계원이 엄지와 중지로 양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래, 이건 바쁘다는 핑계로 오래 굶은 탓이다.

“……나 또 해 줘.”

남자는 제 속도 모르고 밀려진 상태에서 또 해 달라며 조르고 있었다. 그것도 스프링처럼 통통 뛰면서.

“응? 또.”

아까는 비틀거렸던 주제에 폴짝폴짝 잘도 뛴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인지 팔도 파닥거렸다.

“비켜.”

계원이 남자의 머리를 꾹 밀었다. 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알 바 아니다. 계원은 새로 꺼낸 담배 하나를 입에 물며 걸음을 옮겼다.

“어, 어디 가? 같이 가…….”

남자는 계원을 따라오려 급하게 일어나다가 중심을 잃고 또 넘어졌다. 힐긋 뒤돌아보니 잡아 달라는 듯 팔을 뻗고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목도리도 하지 않아 훤히 드러난 목은 분명 단단한 남자의 목인데, 이상하게 가냘퍼 보였다. 계원은 그를 가볍게 무시하고 골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울먹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너무해, 일으켜 주지도 않고, 뽀뽀도 조금 해 주고.”

“…….”

결국, 계원은 가던 걸음을 돌려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이 남자가 사람을 착각해서 이러는 거든 취해서 정신머리가 나갔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선 지금 좆이 설 대로 섰으니까.

* * *

기껏 데려왔더니 남자는 차 안에 토사물을 잔뜩 뱉어냈다. 차를 폐차시킬 요량으로 소지품과 남자만 들고 호텔로 들어왔다. 그냥 버리고 왔어야 한다는 생각은 호텔 방을 들어오고 나서야 들었다. 아마 자신을 아는 사람이 지금 제 꼴을 본다면 믿지 못할 것이다.

계원은 결벽증이냐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정도로 깔끔했다. 호텔 룸도 최고층의 제일 좋은 방에만 묵었다. 계원을 위해 항상 좋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약속된 룸이었다.

남자의 옷을 벗긴 후 샤워실에 처넣은 계원은 담배를 물었다. 아까 반쯤 피우다 뺏긴 탓이었다. 계원이 불을 붙인 담배 끄트머리에, 불씨가 막 타들어 가려 할 때였다.

“씹.”

계원이 한 모금을 빨기도 전에, 손에 든 담배를 부러뜨렸다. 맛이 안 났다. 신경질적으로 라이터까지 던져 버린 계원은 그렇게 한참 동안 야경이나 봤다.

깜깜한 한강 변과 도로의 불빛들을 얼마나 봤을까. 넣어 둔 지 한 시간은 넘은 것 같은데 남자는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결국, 계원은 참다못해 샤워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그러나 문 너머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원은 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