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91화 (91/100)

#91

* * *

“흐아아아.”

차가 잠시 신호에 걸린 틈을 타 김건이 팔을 쭉 뻗으며 하품했다. 새벽부터 차계원을 픽업해 스케줄 장소에 갔다가, 밤까지 현장에 대기했다. 피곤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계원아. 영덕 대게가 이름이 영덕 대게인 거지 영덕에서만 파는 게 아니거든.”

게다가 차계원은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영덕으로 가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대표님과 뒤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몰라도, 다시 계약하게 된 후로는 집에만 붙어 있던 놈이었는데.

“알아요, 나도.”

“아는데 거기까지 가야겠어? 이 피곤한 나를 끌고?”

김건이 제 좌석의 헤드를 붙잡고 뒤로 몸을 돌려 토로했다. 분명 힘들기는 스케줄을 소화해낸 차계원이 더 힘들 텐데, 다리를 꼰 채 건들건들한 폼으로 앉아 있는 그는 갓 나온 사람처럼 쌩쌩해 보였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니. 핸드폰으로 주문하면 이거 봐. 어? 아침에 집 앞까지 가져다줘. 현지 직송 생물들도 하루면 와! 하루가 뭐야, 반나절이다.”

건이 자신이 애용하는 어플 몇 개를 촤르르 넘기며 보여 준다. 물론 차계원은 시선도 두지 않았다.

“신호 바뀌었어요.”

건이 울컥하는 심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액셀을 밟았다. 그는 핸들을 돌리면서도 계속해서 불만을 성토했다.

“그리고 지금 철도 아니야. 며칠 있으면 봄인데 무슨 대게야 대게는!”

“뭘 먹지를 않는데 어떡해, 그럼! 음식을 해다 바쳐도 새 모이만큼 먹고 마는데.”

차계원이 버럭 성을 냈다. 건은 그제야 자신이 이 야밤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영덕까지 내려가는 이유가 대표님 때문임을 알았다. 미친 새끼가 따로 없다.

“배가 안 고프신가 보지, 배가. 너 왜 남 먹는 거까지 간섭하니? 그러는 거 아니다 진짜.”

“매니저님 배 태워서 잡아 올까요?”

차계원이 눈을 휘 번뜩하게 뜬다. 아니, ‘부라린다.’라는 표현이 더 걸맞았다.

“야, 나 뱃멀미 있는 거, 아, 알면서 그러네…….”

백미러로 그를 확인한 건은 목소리를 줄이며, 핸들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꼭 잡았다. 혹시나 차계원의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까 싶어 잔잔한 재즈도 틀었다. 그에게는 평온이 필요했다.

계원이 느릿한 선율을 들으며 신경질적으로 창문에 몸을 기댔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이 선명히 보이는 걸 보니 밤은 밤이었다.

자신이라고 이 야밤에 생전 가 본 적도 없던 영덕을 가고 싶은 건 아니다.

“진짜 새 새끼인가.”

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예전에 한번 백이서를 보며 어미 잃은 새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생각이 아니라 진짜였다.

그는 정말인지 음식을 잘 안 먹었다. 아침은 무조건 걸렀고, 늦은 점심으로 먹는 첫 끼가 백이서가 하는 식사의 전부일 때도 많았다. 하루에 한 끼, 많으면 두 끼를 먹었다. 주면 먹기는 하나 딱히 배고파하지도 않았고, 예의상 쥐똥만큼 먹고 마는 게 다였다. 먹고 싶어 하는 것도 없는 눈치였다. 차계원의 기준에 그건 새 모이였다.

‘입에 가져다 넣을 수도 없고.’

한 말이 있으니 강제로 먹일 수도 없었다. 그러다 예전에 해산물, 그중에서도 갑각류를 좋아한다고 스치듯 한 말이 떠올랐다. 한 번 얻어먹어 본 대게가 정말 맛있었는데, 돈이 아까워 사 먹지는 않았다고.

“야, 계원아.”

계원의 귀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꿍얼거리던 건이 생각에 빠진 그를 불렀다. 물론 차계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표님은 원래 소식하시는 것 같은데 그냥 두면 안 돼?”

이제 혼자 부르고 혼자 말하는 게 익숙해진 건이 물었다.

“살이 빠지잖아요.”

“그게 어때서. 요즘은 슬림한 게 유행이래.”

건이 며칠 전 본 대표님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짝 마른 편이긴 해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뼈대가 곧은 덕에 왜소해 보이지도 않았고, 보통 성인 남자보다 심하게 못 먹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차계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섹스할 때 죄책감 들어요.”

끼익.

“쿨럭, 쿨럭.”

순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려 차체가 차선을 넘을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건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얼굴을 구겼다. 설마설마하기는 했다. 아니, 속으로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놀란 이유는 차계원의 단어 선택 탓이 컸으니까.

이상하다 싶은 지도 솔직하게 따지자면 꽤 됐다. 그 차계원이 남하고 붙어 산다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니까. 애당초 그와 함께하겠다는 회사가 널린 판국에, 계약 하나 하겠다고 건물을 사는 것도 정상은 아니었다.

“……네가 죄책감이 뭔지는 알아?”

건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계원이 죄책감을 배우는 것보다 개가 글을 배우는 게 빠를 것이다.

“오른쪽으로 트세요.”

건이 핸들을 틀며 자신도 내비 정도는 볼 줄 안다고 하려다가 참았다. 차계원에게 걸린 불쌍한 대표님도 있는 판국에, 자신의 처지쯤은 양반이지.

“근데 계원아 네가 안 괴롭히면 살이 안 빠지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님이 야위어 간다면 그건 차계원 때문이었다. 자신도 차계원과 처음 일을 시작한 직후에 살이 쭉쭉 빠졌었다.

“그게 안 되니까 그런 거라도 사다 바치려는 거 아니에요.”

계원이 귀찮다는 어투로 손을 휘휘 내젓는다.

차라리 백이서가 여자라면 어땠을까. 그럼 임신이라도 시켜서 단단히 발목 잡을 수 있을 텐데. 그 핑계로 집에만 눌러앉힐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덜 전전긍긍해도 되지 않을까.

‘괜찮네.’

그가 턱을 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둥근 배를 감싸고 뒤뚱뒤뚱 걷는 백이서를 상상하니 짜증스럽던 기분이 풀리는 것 같다. 상상으로만 끝날 게 아쉬울 만큼 아주 잘 어울렸다.

백이서의 도망 아닌 도망은 그에게 새로운 경계심을 가져다주었다. 어디 있는지 아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결국 설득해 오기는 했으나, 계원은 백이서가 도망갈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건 계원의 경각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럼 둘이 대체 뭐야? 파트너 이런 거야?”

한참 동안 백미러로 차계원의 눈치만 보던 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묻지 않으려 했는데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듣고도 몰라요? 사귀는 사이요.”

차계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대표님의 생각도 그럴까?”

건은 문득 예전에 대표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다 그런 대화가 나왔더라.

‘아주 만약에 잤다고 해도 사귀거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 거로 사귈 필요도 없고.’

대화의 흐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때 의외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은 있었다.

“혹시 그 육체적 관계를 했기 때문에 너만……. 그러니까 음……. 네가 조금 뭐랄까 크게 여기는 거 아닐까? 대표님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건은 최대한 차계원이 기분 상하지 않을 만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차계원이 누구한테 상처받을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해는 바로잡아야 하니까.

건은 절대 이 둘이 서로 동의해서 사귄다고는 판단되지 않았다. 분명 차계원 혼자 멋대로 정한 것일 터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사귀는 거 맞으니까.”

“아니지, 아니지. 상관없지가 않지. 사귀는 건 둘이 같이 정하는 건데. 예를 들어 대표님이 네 생각하고 다르게 쿨한, 그런 분일 수도 있잖아. 사귈 필요까지는 없다거나 그렇게 여기는…….”

“제가 며칠 전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거든요.”

주저리주저리 길어지려 하는 건의 이야기를 차계원이 뚝 끊었다. 조곤조곤한 어조가 괜히 사람을 섬뜩하게 했다.

“갑자기 다큐……?”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차계원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뉴스만 보는 놈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와는 공포 영화가 더 잘 어울렸다. 그것도 잔인하고 악인이 나오는 공포 영화.

“백이서 그런 거 좋아해요. 다큐멘터리, 시사 고발 프로그램, 그런 거.”

“오. 그래?”

그제야 건이 수긍했다. 대표님이라면 왜인지 잘 어울렸다. 예를 들면 잔잔한 자연 다큐 같은 것과.

“그 다큐에서 킹 크랩을 잡는 사람들이 나오더라고요. 추운 러시아 바다에서.”

“……킹 크랩?”

건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영덕 대게를 사러 이 오밤중에 가고 있는데 뜬금없이 킹 크랩이 웬 말인가.

“한 번 조업 나가면 한 달은 기본이래요. 휴가로 딱 좋지 않아요? 바다 좋아하시잖아요.”

차계원이 백미러로 건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는다. 그 뜻을 이해한 건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더 말했다가 강제로 배에 실려 망망대해를 떠돌 것 같았다.

그래 자신이 구태여 남의 연애사에 신경 써서 무엇 하겠는가. 욕만 들어 먹지.

깔끔하게 둘의 이야기에 관심을 접은 건이 액셀을 밟았다.

* * *

향긋한 바다 비린내가 주방을 채운다. 껍질을 잘 발라 놓은 대게 몇 마리가 식탁 위에 놓여 있고, 새로운 대게가 들어가 있는 찜통에서는 김이 폴폴 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먹어도 다 못 먹겠다.”

이서는 계원이 발라 준 대게 다리 살을 한입 가득 우물거리며 양을 가늠했다. 냉장고에도 스티로폼 상자가 가득했다. 삼시 세끼 대게만 먹어도 며칠은 걸릴 양이었다.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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