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계원이 이번에는 게딱지에 비빈 밥을 한술 크게 더 내민다. 고슬고슬한 밥알에 스며든 참기름 냄새가 고소했다.
“응. 맛있어.”
이서는 해산물을 좋아했다. 회나 구이 전부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갑각류나 조개류에 환장했는데, 비싸서 못 먹던 대게가 눈앞에 산처럼 쌓여 있으니 곳간을 가득 채운 사또가 된 기분이었다.
“진짜 엄청 맛있다.”
이서가 저도 모르게 양다리를 번갈아 가며 흔들었다. 대게도 맛있지만,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라 더 좋았다.
차계원은 요리를 정말 못했다. 간을 못 맞추는 건 둘째 치고, 그 쉬운 달걀부침도 태우는 인물이었다.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해괴한 맛이 나거나 아예 아무 맛도 안 났다. 그래도 대게는 찌기만 하면 돼서 그런지, 야들야들하고 촉촉한 살이 포슬포슬 살아 있었다.
“자요.”
두툼하게 떼어낸 살이 이서의 입으로 들어온다. 담백하고 짭조름한 맛과 게의 단맛이 어우러져 먹어도 먹어도 자꾸 넘어갔다. 자리가 불편한 것만 빼면 완벽했다.
“저기 계원아 이건 정말 맛있는데, 나 내려가서 먹으면 안 돼?”
이서가 다리를 쭉 뻗으며 물었다. 차계원의 무릎 위에 앉은 탓에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차계원은 치사하게도 식탁에 있는 의자를 하나만 빼고 모조리 치워 버렸다.
더 어이없는 건 이상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의 손에 이끌려 앉은 자신이었다. 무릎에 앉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으나 차계원은 이미 잘 발라 놓은 대게의 속살을 내밀고 있었다.
그냥 내려가면 될 텐데 이상하게도 그게 안 됐다. 꼭 그에게 허락을 구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습관적인 거였다.
그리고 차계원은 막상 이서가 그의 바운더리에서 벗어나려 하면 묘하게 날이 섰다. 그 모습은 이서 스스로가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두게 했다.
“되죠. 전부 대표님 마음대로 하라니까요. 우리 계약할 때 그러기로 했잖아요.”
차계원에게서 의외로 쉽게 허락이 떨어지고, 이서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른 의자를 가져오기 위해 몇 걸음 뗄 때였다.
“근데 이제 이건 없어요. 모조리 음식물 쓰레기통행이 되는 거예요.”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나 먹으라며…….”
허탈한 얼굴로 걸음을 멈춘 이서가 멀어지는 대게의 다리를 아련하게 바라봤다.
“내가 산 건데 내 마음이죠. 제 무릎에서 먹으라 했지 식탁에 앉아서 먹으라고는 한 적 없어요.”
뻔뻔하게 어깨만 으쓱거린 차계원이 새로 바른 대게 살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그래도, 아깝게…….”
이서의 시선이 대게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말 오랜만에 맛있게 먹은 음식이었는데.
“저 많은 걸 진짜 다 버리게?”
“네. 전 대게 싫어요.”
“…….”
양옆으로 살살 흔들리는 대게와 차계원의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본 이서는, 결국 쫄래쫄래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허벅다리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계원이 만족스럽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스스로 품에 안착한 새 새끼가 기특하다. 새벽녘에 도착에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사 온 보람이 있었다.
“아.”
계원이 길게 바른 다리 살을 입에 넣어 준다. 고개를 들고 입을 열어 받아먹는 백이서는, 영락없이 먹이를 기다린 새 새끼였다. 어미 새들이 왜 알을 부화시키고 나면 그리도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러 돌아다니는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있잖아. 내 방은 언제 생겨? 한 달도 더 지났는데.”
어느 정도 배를 채운 이서가 잊고 있던 문제를 떠올렸다. 바로 방 문제였는데, 이서가 서두를 꺼낼 때마다 계원이 말을 돌려 제대로 묻지 못했었다.
차계원의 집에서 지낸 지 벌써 한 달여가 넘었다. 그리고 내준다던 방은 내주지 않았다. 예전에 이 집에서 지낼 때 이서 방이라고 만들어 준 곳도 잡동사니를 놓는 창고가 됐다. 물론 그때도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지만.
“수리도 하고 도배도 손을 봐야 해서.”
이서가 입술을 우물거린다. 아무리 봐도 핑계 같았다.
“하지만 한 번도 인테리어 시공업자나 그런 사람은 못 봤는데.”
누가 와야 도배를 할 거 아닌가. 이서가 이 집에 지내면서 집에 발을 들인 사람은 차계원과 자신이 다였다.
“연예인 집에 아무나 들이는 거 아니에요. 어떤 헛소문을 낼 줄 알고요?”
“그럼 방은 대체 언제…….”
“믿음 갈 만한 사람 찾고 있으니까 기다려요. 제가 발이 좁아서 그런가, 오래 걸리네요. 나 이 바닥에서 왕따인가 봐.”
차계원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서는 예전에 건이 했던 말 일부를 떠올렸다. 차계원은 자기 자신 빼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 그에게 믿음 가는 사람이 존재하기나 할까. 그리고 왕따는 무슨.
“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하던데. 너 발도 넓지 않아……?”
일전에 갔던 전시회나 디자이너 쇼룸도 다 그의 지인들에게서 초대받은 거였다.
“무슨 소리예요? 나 외톨이에요. 그래서 대표님 없으면 밥 먹어 줄 사람도 없고 놀아 줄 사람도 없어요.”
차계원이 불쌍한 척 눈을 아래로 깔며 이서의 목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의 머리칼이 스치며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도배를 굳이 새로 할 필요가 있을까?”
“낡았어요.”
계원이 이서의 목에 입술을 댄 채 말했다. 숨결이 자꾸만 피부에 와 닿았다.
“나, 난 괜찮아. 그냥 지내도 돼.”
차계원의 기준이 어떤지 몰라도 이 집은 낡았다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집 자체가 지은 지 얼마 안 된 곳이었고, 집 자체가 공들여 지은 티가 나, 딱히 하자 있는 부분도 없었다. 그리고 차계원의 방만 빼고 다 낡았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몇 번 말했죠. 이 방만 써서 다른 방들은 상태가 안 좋다고. 그런 곳에 손님을 어떻게 재워요. 여린 저는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면 잠도 못 잘 거예요. 마음 아파서.”
차계원은 특유의 뻔뻔함을 이용해 능청스레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서는 꼭 자신의 방을 따로 갖고 싶었다. 그와 계속 한 침대에서 지내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고, 같이 있다 보면 필연적으로 몸을 섞게 됐다.
분명 그러지 않으려고 다짐했었는데, 정신 차려 보면 그의 밑에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차계원은 이서가 힘들다고 하면 들어주는 척하면서 몰아붙였다. 얼마나 능구렁이 같은지, 늘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 탓에 이서의 하루는 매일 늦게 시작됐다. 밤새 괴롭히며 놔주질 않으니 오후가 되어서도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자신을 보는 사람마다 얼굴이 푸석하다며 한마디씩 했다. 똑같이 늦게 자는데 차계원의 얼굴만 점점 반들반들해져서 너무도 얄미웠다.
“그럼 네가 다른 방 쓰면 안 돼? 내가 네 방 쓰고.”
이서가 계원의 눈치를 보다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물에 빠진 거 구해 주면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네요.”
계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비꽜다. 그럴수록 이서의 입이 삐쭉거렸다. 저 삐쭉거리는 입만 보면 왜 그렇게 가만두기가 싫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눈치를 볼 때마다 힐긋거리는 것도 가능한 한 오래 보고 싶었다.
“나는 네가 마음이 불편하다니까…….”
계원이 듣기 싫다는 듯 밥 한술을 떠 넣었다. 먹여 주니 또 우물우물 잘도 씹는다. 어제 살짝 찢어진 아랫입술에 딱지가 말라붙어 있었다. 백이서는 뭐라도 바른 것처럼 유난히 입술이 붉었는데, 그걸 보고 있자면 다른 것도 넣고 싶었다.
“읏……!”
계원이 딱지가 붙은 부분을 손톱으로 지그시 눌렀다. 따끔거리는지 찌푸려지는 얼굴이 어젯밤을 연상시켰다. 상황이 이러니, 보따리는 내줄 수 있어도 방은 따로 내줄 수 없다.
백이서가 거짓말을 했다며 길길 뛰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게 어디 제 잘못인가. 그렇게 당해놓고도 홀랑 속아 넘어온 백이서 잘못이지.
“조개도 있어요. 이따가 조개찜 할 거예요.”
계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냉장고에 넣지 못한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다정함을 흉내 내는 것도 나름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개찜은 간 별로 안 해도 돼 알지?”
이서가 불안함에 슬쩍 당부했다, 한 번은 차계원이 홍합탕을 끓이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홍합탕이 아니라 소금물을 만들었다. 억지로 먹기는 했으나 앞 접시에 담아 준 양의 절반가량을 먹을 때부터는 혀에 감각이 없었다.
“같이 할래요?”
“같이?”
“네. 음식 만드는 거 알려 줘요. 잘하던데.”
잘한다는 말을 듣기에는 예전에 볶음밥 한 번 만들어 준 게 다였다. 이서도 요리에는 자신 없었다. 그냥 사 먹는 게 속 편했다.
“못하는데.”
중얼거리며 남은 게살을 우물거리는 이서의 볼을 계원이 꾹꾹 눌렀다.
“나보다는 낫잖아요. 배워 볼게요.”
“어……. 그래, 뭐.”
이서가 상체를 바깥쪽으로 기울이며 슥 얼굴을 피했다. 계원이 멀어지려는 몸을 잡아당겼다.
“남으면 우리 구이도 해 먹어요.”
“응. 아,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게살까지 싹싹 긁어 먹던 이서가 뭔가 떠오른 듯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휘준이 있잖아. 조금 더 쉬다 올라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