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93화 (93/100)

#93

시무룩해 보이는 이서와 달리 계원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인력은 충분하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 전해 줘요. 쉴 때 쉬어야죠.”

아예 안 올라오면 더 좋고. 계원은 덧붙이고 싶은 말을 속으로 생각하며 오늘 중 제일 환하게 웃었다.

“응…….”

그러나 이서의 어깨는 힘없이 처졌다. 휘준과는 아직 대화가 더 필요했다.

휘준 또한 알고 있었다. 차계원과 다시 손을 잡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는 걸. 그러나 이서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서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제게 뭐라 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진강은 회사를 나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서가 서울로 올라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휘준의 고모댁에 있을 때 이서는, 진강이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되는 걸 걱정했었다. 그는 연락이 안 됐던 이유가 회사를 옮기는 걸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서는 여기에 차계원의 입김이 어느 정도 닿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감이었다. 이진강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서의 회사에 남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던 이였으니까.

하지만 이서는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이진강에게도, 차계원에게도 그 이상의 것을 묻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제대로 된 케어도 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를 데리고 있는 게 계속 미안했고, 진강이 마음을 고백한 후부터 껄끄러웠던 것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서는 이번에 정확히 알았다. 차계원에게 대항하려는 건 대책 없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이건 자신에게 가장 그럴싸한 타협이었다.

* * *

톡. 톡.

의자에 나른하게 걸터앉은 계원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느리게 두드렸다. 그가 핸드폰 화면을 천천히 내렸다.

[계원이 오늘 엄청 성질부렸어요. 예민하니까 자는 척하세요.]

[고마워요, 건 씨. 근데 계원 씨는 제가 자는 척하면 바로 알아요. 왜 그렇죠……. 저 진짜 감쪽같이 연기하는데.]

[그거 그냥 걔가 귀신같아서 그런 거예요. 대표님 탓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회사 일찍 오실래요? 맛있는 거 먹어요.]

[좋아요.]

“얼씨구.”

계원이 손가락을 멈추고 헛웃음을 쳤다. 요즘 둘이 좀 친해졌다 싶더니 이런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다.

“매니저까지 갈아 치워야 하나.”

십몇 년이면 이제 교체할 때도 된 것 같다. 그 위로도 둘이 주고받은 문자가 수두룩했다. 제가 문자 하면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백이서가 이모티콘을 쓴 흔적도 있었다. 좁쌀만 한 스마일 이모티콘이었다.

계원이 다른 문자를 확인했다. 서휘준이나 이진강과 나눈 문자는 마지막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백이서는 인간관계가 좁아서 그 외에 경계할 사람은 특별히 없었다.

“음.”

계원이 이서에게 새 핸드폰을 들려 주기 전에 한 일은 핸드폰 복제였다. 백이서에게 오는 전화나 문자 모두 계원의 핸드폰으로 볼 수 있었다. 가끔 가다 찍는 사진이나 위치도 마찬가지였다.

“참나.”

김건과 백이서가 나눈 문자를 다시 하나하나 뜯어보던 계원이 다른 어플로 들어가더니 피식 웃는다. 화면 위에 빨빨 움직이는 초록색 점이 보였다. 위치를 보니 최근 집 근처에 생겼다던 찻집이었다.

원래 음료를 좋아하는 백이서는 요즘 따라 차에 맛을 들렸는지,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여러 종류의 찻잎을 구매해 오고는 했다. 보고 있자면 꼭 식량을 모아 놓는 다람쥐 같은 게, 쳇바퀴라도 하나 사 줘야 할까 싶었다.

간혹 우려낸 차가 본인의 입맛에 안 맞는다 싶으면 계원에게 가져왔다. 백이서는 자신이 모르는 줄 알겠지만, 병신이 아닌 이상 모를 수 없다.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네모꼴로 만든 채 가져오는데.

“데리러 갈까.”

외투를 걸치려던 계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몇 번 우연을 빙자해 마주쳤더니 이제 살짝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계원은 이번에 백이서와 지내면서 깨달은 게 있다. 백이서는 본인에게 다정한 사람을 좋아했다. 부드럽게 대하면 대할수록 헤헤거리며 경계심을 풀었다.

그래서 계원은 생각했다. 제 욕망이나 그릇된 행동들은 그 어떤 것도 알려 주지 말자고. 차라리 뒤에서 옭아매 놓자고. 백이서 본인은 자신이 옭아매졌는지도 모를 만큼.

“오늘은 무슨 차로 사 오려나.”

어제 시원한 걸 찾았으니 박하 잎을 골라 오려나. 새로 생긴 찻집이 마음에 드는지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초록색 점을 보며 계원은 만족스럽게 턱을 괬다.

* * *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세트장에서 이서는 구석에 자리 잡고 섰다. 스텝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주변을 오갔다. 김건은 주차 자리를 다시 찾아야 한다며 나갔다.

오늘은 공익 광고를 촬영하는 날이었다. 이서가 차계원의 촬영에 따라온 건 화보 촬영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딱히 따라올 생각은 없었으나 요즘 일정이 바빠진 차계원이 꼬시는 바람에 하는 수 없었다.

차계원은 대표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이러기 있냐는 둥, 어디 다치거나 아파서 나는 펑크는 본인 탓이 아니니 괜찮지 않냐는 둥 아침부터 이서가 신경 쓰일 말만 골라 했다.

“촬영장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어요?”

어느새 분장을 마치고 다가온 그가 이서의 귀에 속삭였다. 차계원은 항상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이서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누가 들을까 부끄러웠다. 차계원은 자신이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고 더 시키는 것 같았다.

“그새 까먹었어요?”

고개 숙이는 이서의 모습을 잘못 이해했는지 차계원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대표님 금붕어예요?’ 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놓치지 말고 따라다니라고.”

결국 이서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차계원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말을 따라 읊었다.

“맞아요.”

사르르 웃은 차계원이 환하게 부서지는 조명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다른 배우들은 다 모인 상태였다. 이번 공익 광고는 여러 명의 배우가 함께 촬영했다. 각자 대사 한 줄을 한 컷씩 촬영해 이어붙이는 거라 합을 맞출 장면은 없었는데, 마지막에 다 같이 서서 간단한 문구와 함께 손을 흔드는 장면이 있었다.

‘뭐지?’

제일 중앙에 서 있는 차계원을 보던 이서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제일 끄트머리에 서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한태미였다.

“아…….”

이서가 작게 신음했다. 반가운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딱 반반씩 들었다. 다시 케이뉴 소속사로 들어오고 싶다는 그녀의 의사를 무시한 전적이 있는 터라, 마냥 반가워하기도 그랬다. 마지막이 그리 좋았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제는 받아 주고 싶어도 받아 줄 수 없었다. 차계원이 그녀를 싫어하는 것도 이유였으나 지금 케이뉴는 거의 차계원 1인 기획사였다. 그 외에는 아무 배우도 없었고 영입할 계획도 없었다.

이건 계약서에 있는 조항이었다. 차계원이 회사 건물과 모든 인력을 투자하는 대신 소속 배우를 들이는 경우에는 그와 상의해야 했다.

도장을 찍은 후에도 이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그러나 영입하려는 배우마다 차계원은 다 트집을 잡았다. 김건이 어쩌다 발굴해 온 연기력도, 인성도 완벽한 배우도 그날 바로 과거 행적이 파헤쳐져 기사로 나왔다.

이서는 몇 번이나 그 비슷한 일을 반복한 후에야 차계원이 그런 계약 조건을 내건 목적은 아무도 들이지 않기 위해서임을 깨달았다.

‘태미가 들어오고 싶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태미는 은근히 집념이 강해서 웬만하면 잘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촬영이 끝나면 달려들어 다시 들어오게 해 달라며 난리를 피울 게 뻔했다.

‘응?’

그런데 이상했다. 태미가 어색하게 자신의 시선을 피했다. 데뷔 전부터 봐 온 사이인 만큼 서로 작은 의중 정도는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이서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왜지?’

“자, 컷! 촬영 끝났습니다!”

이서가 생각에 빠져들려 할 즈음 연출이 외쳤다. 한 큐에 끝이었다. 차계원이 성큼성큼 이서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이서는 태미를 눈으로 좇았으나 계원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 엄청 빨리 끝났네요.”

“원래 이런 컷이 찍는 건 빨라요. 모이는 게 오래 걸려서 그렇지.”

이서는 잠시 그 오래 걸리는 원인이 차계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다른 배우들은 거의 다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개인 컷 안 찍어요?”

“아까 찍었는데 몰랐어요? 단체 컷 찍기 전에 빨리 찍었어요.”

계원이 말하면서 세팅해놓은 머리를 손으로 흩트렸다.

“아…….”

“근데 왜 존댓말 써요?”

고개를 모로 기울인 계원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묻는다.

“어? 그, 그냥. 사람들 있어서. 반말하면 격 없어 보이잖아.”

“좆도 비빈 사인데 격 없는 거 맞죠, 뭐.”

그가 짓궂은 목소리로 소리를 낮춰 말했다. 얼굴이 벌게진 이서는 행여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스텝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런 새 심장이 어제는 어떻게 그렇게…….”

“차계원!”

그의 얼굴에 걸린 질 나쁜 미소를 확인한 이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둘에게 박혔다. 와중에도 차계원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민망함에 몸 둘 바 모르던 이서가 붉게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차계원을 붙들어 세트장에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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