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 * *
집에 도착한 밴이 차고에 들어갈 때까지, 조수석에 앉은 이서는 한 번도 계원 쪽을 보지 않았다. 기분이 상했을 때 백이서가 하는 최대의 반항이었다.
“그러다 목 꺾이겠네.”
“…….”
계원의 웃음기 어린 음성에 이서의 목이 반대쪽으로 더 돌아간다. 이제 계원의 시선에서는 동글동글한 머리통밖에 보이지 않았다.
콕. 콕.
계원이 이서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그의 맑은 웃음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심통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머리통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너, 너는 진짜……!”
홱 계원을 돌아본 이서의 얼굴이 벌겋다. 무언가 불만을 말하고 싶은 듯 더듬거리던 입이 다시 꾹 다물렸다.
쾅.
벨트를 푼 이서가 먼저 차에서 내리며 크게 소리 나도록 문을 닫았다. 계원은 커진 심통만큼 매정하게 닫히는 문을 보며 한 번 더 웃고 그를 따라 내렸다.
“쌀쌀맞기도 해라. 우리 사이에 그렇게 정 없이 구는 거 아니에요. 운전도 내가 했는데 두고 가는 게 어디 있어요?”
툴툴대는 척하는 계원의 눈치를 슥 본 이서가 등을 돌려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사이’라는 그의 말에, 둘의 관계를 ‘좆도 비빈 사이’라 칭하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사람도 많았는데 어떻게 부끄러운 것도 모를까. 그러다 이상한 기사라도 나면 어떻게 해결하라고.
“이건 경우가 아니죠, 경우가.”
계원이 평소처럼 타박하며 이서 뒤를 따랐다. 그러나 말의 내용과 달리 그는 음색도, 발걸음도 즐거워 보였다.
“이리 와요.”
마당 중간 부분까지 걸어갔을 무렵, 계원이 걸음을 뚝 멈추더니 나긋한 목소리로 이서를 불렀다.
“…….”
이서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쉰다. 그냥 무시하고 집에 들어가면 될 텐데 그게 안 됐다. 마치 어떤 학습의 결과처럼 발을 더 떼는 게 머뭇거려졌다. 차계원은 이제 제 머리채를 휘어잡지도 않고, 목을 조르지도 않는데.
“빨리요.”
“…….”
그가 이서를 재촉했다. 그러나 이서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걸음은 멈췄으나, 또 쪼르르 차계원의 앞에 가기는 자존심 상했다.
저벅. 저벅.
뒤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서가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읏차.”
앞으로 온 그가 이서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안아 들었다. 차계원의 품에 폭삭 안기게 된 이서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꾸만 이런 게 자연스러워졌다. 엉덩이를 받친 팔이 단단했다.
탁.
그대로 집에 들어선 계원은 신발을 벗고, 이서의 신발도 벗긴 다음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계원이 계단을 밟을 때마다 몸이 살짝살짝 떴다 가라앉으면서 그의 체향이 훅 끼쳐 왔다.
“향수 냄새…….”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의상 담당이 뿌린 향수의 잔향이 약하게 남아 있었다. 은은한 난초 향과, 비누 향.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별로예요? 다음부터 뿌리지 말라고 할까요?”
차계원이 이서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하며 소곤소곤 물었다. 이서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체향 자체가 센 편이라, 웬만한 향은 희미해졌다. 차계원은 강한 향이 어울렸다. 우디 향이나 씨 쏠트 향 같은.
“흐음.”
계원이 이서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기분 좋게 숨을 들이마셨다.
“촬영장 일 신경 쓰지 마요. 그런 애들은, 어차피 들어도 떠벌리고 다니지 못해요.”
그가 고개를 약간 올려 귓가에 속삭였다. 숨결이 닿는 근처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래도 조심하면 좋잖아…….”
이서가 웅얼거렸다. 차계원이 상황 신경 안 쓰고 나오는 대로 말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외설적인 말까지 아무 데서나 막 하니, 언젠가 한 번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난 별로 안 좋은데요?”
방에 들어서서 이서를 침대 위에 앉힌 계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조심해서 제게 돌아오는 이득이 뭐가 있다고. 화들짝 놀라 기겁하는 백이서도 못 보고, 심통 부리는 백이서도 못 보는데.
웃통을 벗은 계원이 침대 위로 올라와 그대로 이서를 끌어안았다. 등 뒤로 맨 상체가 닿자 이서가 몸을 빼려 했다.
“비, 비켜.”
“쯧.”
그러나 계원은 비키기는커녕 얼굴을 있는 그대로 구기며 혀를 찼다.
“나 대표님이 끌고 나오는 바람에 옷도 못 갈아입고 왔어요. 반팔 그대로 나왔잖아요. 추워 죽겠는데 그깟 몸뚱이 잠깐 못 빌려줘요?”
“그, 미안……. 놀라서 그랬어.”
계원이 이서의 손을 붙들어 제 팔을 만지게 했다. 서늘한 체온에 이서가 고개를 숙이며 얌전히 안겼다. 차계원은 원래도 체온이 낮은 편이라 손에 와 닿는 체온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반팔만 입고 나오기에는 아직 추운 날씨였다.
“감각도 없지. 이따위 걸 입히고 스타일링이라니.”
짜증 난다는 듯 일어나 청바지를 벗어 던진 계원이 다시 침대로 올라와 이서를 껴안았다.
“으앗!”
그리고 이번에는 아예 이서를 안은 채 드러누웠다. 오늘 촬영 의상은 흰 반팔 티와 청바지였다. 깔끔하고 단정해서 공익 광고에 잘 어울리는 의상이라 생각했는데.
“괜찮았는데.”
이서가 작게 중얼거렸다. 차계원은 워낙 비율이 좋고 몸도 탄탄해서, 그렇게 입혀 놓아도 보기 좋았다. 차라리 멋들어진 의상보다 그런 심플한 스타일이 그의 장점을 더 극대화시켰다.
“괜찮았어요?”
그가 이서의 머리통에 잇자국을 내며 물었다. 짐승도 이갈이는 유년기에만 한다던데, 차계원은 허구한 날 이런다. 이러다 탈모가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앗! 아, 아파!”
생각에 빠진 이서에게서 돌아오는 말이 없자 계원이 어깨를 아플 정도로 세게 물었다.
“물었잖아요. 정말 괜찮았냐고.”
“아, 응.”
이서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보니 어깨에 잇자국이 꽤 깊숙이 남아 있었다.
“얼마만큼이요?”
“뭐, 많이 괜찮지. 너 잘생겼잖아.”
괜찮으니까 촬영장에서의 그 많은 스텝이 차계원만 주시하고 있었겠지. 배우들마저도 그를 힐긋거렸다.
“저 잘생겼어요? 반할 만큼?”
“어…….”
대답을 망설이던 이서가 눈을 굴렸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가 뻘뻘대며 커피 심부름을 했던 게 떠오른 탓이다. 나중에야 그게 자신을 골려 주려고 일부러 보낸 거라는 걸 깨달았다.
“혹시 아니라고 하면 나 또 커피 사 와야 해?”
이서가 낑낑거리며 뒤를 돌아 계원과 마주하며 물었다. 눈앞에 맨가슴이 있어 당황했으나 애써 티 내지 않았다.
“네.”
산뜻하게 웃는 계원을 보며 이서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시간이 늦어 커피를 사 오려면 한참 고생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양심을 잠깐 파는 게 낫지.
“반할 만큼 잘생겼어.”
빠르게 결정을 내린 이서가 군더더기 없는 어투로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줬다.
“오늘 거기서 제일?”
그러나 차계원의 질문을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심지어 오늘 단체 촬영에서 남자 배우는 그밖에 없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제일 잘생긴 사람이 맞았다. 이서가 눈가를 긁적였다.
“어, 응……. 거기서 제일 잘생겼더라.”
사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 자리에서 차계원만 눈에 들어온다고.
“읏, 흐응……!”
이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술을 겹쳐 물은 차계원이 능숙하게 입술 틈새를 벌렸다. 따듯한 숨이 타액과 함께 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흣, 으응.”
이서가 끙끙대며 그를 밀어내려 했다. 차계원과의 키스는 항상 벅찼다. 숨을 다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촉.
계원이 달래듯 콧잔등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의 혀가 곧장 다시 이서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커다란 손은 이서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뒤통수를 붙잡고 있었다.
“후응…….”
계원의 다른 쪽 손이 옷 위로 이서의 유두를 간지럽혔다. 그러다 점차 밑으로 내려오더니 손쉽게 바지 버클을 풀었다.
“후.”
계원이 이서를 제 위에 올려 겹쳐 안으며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렸다. 뽀얀 엉덩이가 그를 반기듯 제 모습을 드러냈다. 계원은 그 탐스러운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한 손에 틀어쥐었다. 제 손 아래로, 어젯밤의 손자국이 그대로 붉게 남아 있었다. 백이서가 아픈지 미간을 찡그린다. 계원이 그 미간에도 입을 맞추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으응…….”
“하.”
가끔 생각한다. 차라리 이 인간의 이름이 갑돌이나 개똥이처럼 아주 우스운 이름이라도 됐으면 어땠을까. 이서라는 이름을 가진 이는 너무 많았다. 성까지 모르니 더 찾을 수 없었다.
“시, 싫어. 오늘 안 할래.”
숨을 몰아쉬던 이서가 계원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려가려 했다. 계원은 이서의 양 손목을 한 손에 쥐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턱을 틀어쥔 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 꼬셔 놓고.”
계원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이서를 봤다. 모든 책임이 제게 전가되자 이서는 그보다 더 억울한 얼굴이 됐다. 계원은 마치 이서에게 몹쓸 짓이라도 당한 양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놔, 놔. 나 그런 적 없어.”
눈꼬리를 죽 내리며 울상 짓는 걸 본 계원이, 놀리듯 이서의 귓바퀴를 핥았다.
“아까 나보고 제일 잘생겼다고 키스해 달라면서요.”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이서가 몸을 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