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96화 (96/100)

#96

“사실 고모가 계원이 걱정을 많이 하거든요. 아시잖아요, 계원이 까다로운 거.”

“까다롭기는……. 하죠.”

이서가 그의 말에 수긍했다. 끄덕거리는 둥근 얼굴은 영락없이 세상 물정 모르는 20대처럼 보였다. 그 하얗고 말간 얼굴을 보며 지묵은 잠시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악의 구렁텅이에 떨어진 어린 양을 목도하는 기분이랄까.

“가족끼리 안부 좀 알자는 건데, 그리 까탈스럽게 구니 참 속상하네요.”

지묵이 한껏 불쌍한 척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백이서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시끄럽고 집이나 가고 싶다는 뜻으로 보였다.

“……어디 가는 길이었는데요?”

결국 지묵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아, 찻잎 좀 사러요. 차 우리는 걸 좋아해서.”

“아아.”

지묵이 앞의 찻집을 가리키는 하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밖에서 봐도 인테리어가 세련된 게 생긴 지 얼마 안 된 가게 같았다.

“제가 잘 아는 곳 있는데, 그리로 가실래요? 차 종류도 많고 티팟도 많아요.”

“아니요. 저는 여기서 사 갈게요.”

“음…….”

단호한 대답에 입이 다물렸다. 차계원처럼 인내심이라고는 쥐뿔 없는 놈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꾀어냈을까.

“일단 가 보기나 해요. 그다음 집에 데려다 드릴게요. 계원이도 별말 못 할걸요.”

“아, 아뇨. 제가 알아서 가고 싶은데.”

강지묵이 능청스레 웃으며 이서의 손을 잡고 끌었다. 이서는 어느새 어영부영 그의 차에 올라타 있었다. 보면 볼수록 차계원과 닮은 사람이었다. 하는 행동이나 말투 같은 것들이 그랬다.

정말 차계원이 별말 못 할까. 갖은소리로 속을 뒤집어 놓을 것 같은데. 이서가 출발하는 차를 보며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렇게 강지묵이 이서를 데려온 곳은 찻집이 아니라 한식당처럼 생긴 정갈한 술집이었다. 이서는 전통 무늬가 그려진 창호지 문을 열고 들어가 방에 앉을 때까지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방을 안내했던 종업원이 잠시 뒤 찻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접시들을 가져오는 걸 보고 이곳이 술집임을 알아차렸다.

“이거…….”

“다과예요, 다과.”

접시 위의 음식은 참 정갈했지만 아무리 봐도 다과보다는 술안주에 가까워 보였다.

“아니…….”

“여기가 술집이기는 한데 정말 차를 잘 우려내거든요.”

이서의 의심스러운 기색을 읽었는지, 지묵이 말을 채 갔다. 때마침 다른 종업원이 반 원구 모양의 나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그 위에는 정말 흰색과 푸른색이 섞인 찻잔 두 개와 도자기로 된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자, 여기요.”

종업원들이 나가고 지묵이 찻잔 하나를 이서의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유려한 몸짓으로 차를 따랐다. 백색의 맑은 찻물이 쪼르르 찻잔에 담기며, 향긋한 향이 흩어졌다.

“아, 감사합니다.”

이서가 꾸벅 인사하며 찻잔을 받아 들었다. 섣불리 의심부터 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차계원이 저더러 의심만 늘었다고 나무랄 때마다 부정했는데, 이제 그러지도 못하겠다.

“정말 별 뜻 없어요. 계원이 이야기나 들을까 해서 그런 거예요.”

지묵이 부드럽게 말하며 제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차계원의 안부 따위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의심해서 죄송해요.”

“하하,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차계원이랑 지내다 보면 의심이 늘죠.”

어느새 경계를 풀고 호록호록 차를 들이켜는 이서를 보며 지묵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자신도 굳이 제 시간을 할애하며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엔 정말 고모님 말도 전할 겸 안부 차 찾아간 것이다. 차계원이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것마냥 집에만 있는 이유도 궁금했고.

그러나 차계원은 문만 안 열어 준 게 아니라, 지묵의 연락은 물론 집안에서 취하는 연락도 모조리 무시했다. 결국 지묵은 답장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이서 씨는 잘 지내냐는 문자를 넣었다.

그러자 차계원은 단박에 전화를 걸어와 으르렁거렸다. 할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병원 이사장에게까지 연락을 넣었다. 대체 뭐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묵은 근무 태만을 명목으로 응급실을 돌게 됐다. 그때 내려온 눈 그늘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실습 온 학생들이며 환자들까지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한마디로 자신은 지금 약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다. 차계원이 열 받는 꼴을 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제가 백이서를 데려온 걸 알고 길길이 날뛸 걸 상상하니 벌써 신났다.

“두 분은 사촌이신 거죠?”

조용히 차만 마시던 이서가 물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담백했다.

“네. 저 계원이랑 닮았죠?”

지묵이 일부러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이목구비를 뜯어봤다. 확실히 행동이나 말투만 놓고 보면 닮기는 했다. 그러나 생김새는 아니었다. 어딘가 닮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정확히는 분위기가 달랐다. 똑같이 잘생겼어도 차계원은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진 분위기가 나는데, 눈앞의 강지묵은 단정하고 잘 다듬어진 분위기가 났다.

“물론 차계원이 훨씬 잘생겼기는 하지만요.”

지묵이 너스레를 떨며 주전자와 다 마신 찻잔을 쟁반 위에 올렸다.

“예? 아, 아니에요. 잘생기셨는데요.”

확실히 차계원은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만큼 잘생겼다. 그러나 지묵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서 씨도 잘생겼어요. 이쁘장한 거에 더 가까운 것 같기는 하지만.”

지묵이 주전자와 빈 찻잔을 올린 쟁반을 들어 문 쪽으로 옮겼다. 창호지 문이 스륵 열리더니 바깥에서 쟁반을 가지고 나갔다.

“술이나 한잔할까요? 술 잘하시죠?”

“네? 그건 또 어떻게…….”

지묵이 자연스럽게 술을 권했다.

“그냥 찍은 건데 진짠가 봐요. 좋은 술이 많아요. 내일 주말이잖아요.”

부드럽게 눈웃음치는 지묵에게 넘어갈 뻔했으나, 이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빨리 가 봐야 해요. 일이 있어서요.”

이서가 주섬주섬 겉옷과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설마 차계원이 주말에도 일하래요? 이야. 완전 개차반이다. 제가 전해 줄게요. 이서 씨가 계원이 주말에도 일시키는 개차반이라 짜증 난다 했다고.”

지묵이 화들짝 놀라는 척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이서가 그를 말리며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 아니요! 안 되는데요! 그런 말을 왜 하세요. 짜증 난다고까지는 안 했는데…….”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지묵은 메뉴판을 펼쳐 보였다. 나무로 된 메뉴판 안에 한지가 붙어 있었다.

“저 저번에 이서 씨 팔도 치료해 드렸는데 치료비도 안 주셨잖아요. 그거 퉁 친다고 생각해요.”

머뭇거리는 이서를 보며 지묵이 예전 일을 끄집어냈다. 하도 차계원이 난리를 쳐 오밤중에 그의 집에 갔던 일을. 사람은 미안할수록 거절하기 힘든 법이다.

“네? 그거 차계원 씨가 드린 거 아니었어요?”

이서가 놀라 되물었다. 그때도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그래요? 저는 못 받았는데.”

지묵이 이상하다는 양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받았다. 그것도 아주 두둑이. 사실 받든 말든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놨다.

“어, 제가 지금이라도 드릴게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아이, 괜찮아요. 그냥 술친구나 한번 해 주세요. 이 집이 막걸리도 직접 담그거든요.”

지묵이 능글맞게 너스레를 떨며 메뉴판을 가리켰다. 이 집만의 자랑이라는 수제 막걸리 세 종류가 있었다.

“담그는 분이 장인이에요. 매달 한정 수량만 항아리에 빚는데, 목 넘김도 좋고 향도 좋거든요. 이서 씨한테 맛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래요.”

이서가 장인이라는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 이서는 술도 잘 마셨고, 그만큼 술을 좋아했다. 기억도 안 나는 4년 전에 차계원과 사고 친 걸 빼면 취한 적도 손에 꼽았다.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이서가 입술을 꾹꾹 깨물며 중얼거렸다. 예전에 심찬 형네 바에 갔다가 끌려 나온 이후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그게 벌써 겨울에 있던 일이니 벌써 반년 넘게 술을 입에도 못 댄 거다. 꼭 차계원 때문에 안 마신 건 아니었다. 그동안 정신이 없으니 술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그러나 술을 앞에 두니 그의 당부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이. 마시고 말고는 이서 씨 마음이죠. 계원이를 뭘 신경 써요.”

그 말에 이서가 저도 모르게 턱을 주억거렸다. 술 먹는 것까지 그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어디 있나. 생각해 보니 그가 앞으로 술은 못 마신다고 한 건 예전이었다. 다시 계약하고 난 후로는 딱히 마시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계약 조항에도 그런 건 없다.

게다가 강지묵은 사람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차계원이 왜 그렇게 치를 떨며 싫어했는지 모를 만큼 예의 있고 편한 사람이었다.

“자, 한번 먹어 봐요.”

언제 주문했는지 종업원이 주전자와 막걸리 잔이 올려진 쟁반을 갖고 들어왔다. 그를 받아 든 지묵은 푸딩처럼 생긴 막걸리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모양이 신기하죠? 떠먹는 건데 맛만 봐 봐요.”

푸딩과 요거트의 중간처럼 생긴 하얀 막걸리는 언젠가 한번 먹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거였다. 이서는 술 중에서도 막걸리처럼 고소한 맛이 나는 걸 좋아했다.

“그럼 딱 한 잔만…….”

결국, 이서는 입맛을 다시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