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97화 (97/100)

#97

* * *

“촬영 끝났습니다!”

사진 감독의 마지막 셔터를 끝으로 계원이 코트를 벗어 던졌다. 스타일리스트가 그걸 받으며 머리를 정돈해 줬다.

“됐어요.”

계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 손을 쳐냈다. 촬영도 다 끝난 마당에 무슨.

옆에서 김건이 스타일리스트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살짝 웃고 자리를 떴다.

“수고했다, 계원아.”

“당분간 아무것도 잡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마세요.”

아까 스타일리스트가 만졌던 자리를 탁탁 터는 손길이 신경질적이었다. 모든 게 성가시다는 듯한 말투에 건이 혀를 내둘렀다.

“나는 수고했다고 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말이 너무 매정하지 않니?”

이번 시즌 차계원의 스케줄은 이게 끝이었다. 여름에 있을 영화 촬영을 위해 다른 스케줄은 잡지 않았다. 아직 두세 달 남은 터라 다른 스케줄을 소화하기에 무리한 일정은 아니었으나, 차계원의 의사가 강력하게 반영됐다.

‘대표님이랑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겠지.’

건이 속으로 생각하며 혀를 끌끌 찼다.

장근호 감독이 제작하는 미스터리 누아르 영화는 원래 봄 촬영으로 기획했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여름으로 미뤄졌다. 제작사 측에서 촬영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주연 배우는 차계원으로 하겠다며 피력한 덕이었다.

‘진강 씨는 어떻게 됐으려나.’

영화를 생각하자 불현듯 이진강이 떠올랐다. 차계원과 대표님의 계약이 다시 성사된 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캐스팅이 무산되었다 했던 영화는 다시 그대로 진행한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회사에서 쫓아내기까지 했으면서 그건 그대로 되돌려 놓은 차계원의 저의가 궁금했다.

‘이 새끼 설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진강 씨 앞에서 대표님이랑 꽁냥대는 거 보여 주고 싶어서?’

조금 비약 같기는 하지만 차계원이라면 그런 생각으로 되돌려 놓았을 수 있다.

“숙소 제대로 예약된 거 맞죠?”

생각에 빠져 있는 건을 차계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깨웠다. 네 할 일은 제대로 하고 넋 놓고 있느냔 듯한 눈빛이었다.

“맞아. 맞다고! 벌써 열 번도 넘게 물어본 거 아냐? 예약 내역도 보여 줬잖아.”

건이 핸드폰을 보여 주며 지긋지긋하다는 발을 굴렀다. 영화 촬영 날짜가 확정되면서부터 차계원은 몇 날 며칠 차 안에서 이동할 때도, 촬영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도 스페인에 있는 명소들을 찾았다.

“촬영이 아니라 여행 가는 줄 알겠다.”

그뿐만 아니라 야경이 잘 보이는 유명 호텔을 예약해 놓고, 매일같이 제대로 예약된 게 맞느냐고 물어 왔다. 그는 이번 촬영이 꽤 기대되는 것 같았다.

십 몇 년을 같이 지냈어도 차계원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처음 보는지라, 건은 숫제 뿌듯한 마음까지도 들었다. 좋은 마음으로 숨겨진 명소 같은 걸 찾아 주기도 했다. 막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학생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자신이 출근하지 않는 날에도 전화를 걸어 물어대니, 이제 예약의 ‘예’ 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내려가서 시동 걸고 계세요. 바로 집으로 갈 거예요.”

계원이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건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의상을 갈아입으러 쏙 들어가는 그를 보며, 건은 뒤에서 꿀밤 때리는 시늉을 했다.

“대표님은 쟤랑 어떻게 노는 거야.”

아주 사람 성질 긁어대는 데는 1등인데.

건이 구시렁거리며 지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계원이 옷을 갈아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게 평화로웠고, 만족스러웠다. 백이서는 자신의 집에서 지내는 생활에 무난히 적응했으며 바쁜 일도, 신경을 건드는 사건도 없었다.

오늘 촬영까지 끝났으니 이제 남은 날들은 백이서와 스페인에서 뭘 할지 계획하며 보내면 된다. 백이서는 아닌 척하면서도 꽤 설레 하는 게 티 났다. 자신이 맛집이나 명소 등을 찾고 있으면 은근슬쩍 옆에 와서 목을 죽 뺐다. 그걸 무릎에 앉혀두고 여기저기 찾다 보면 하루가 다 갔다.

“몇 명 더 고용할까.”

아무래도 회사 인력을 더 뽑을 필요가 있었다. 백이서는 평일이면 매일 출근했다. 계원의 압박 덕에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하는 것, 둘 중 하나였으나 썩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서 멈췄다. 계원의 차는 한 층 더 아래에 주차돼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익숙한 장신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진강이었다. 계원은 더 볼 것도 없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이진강은 계원을 발견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반쯤 닫히자 버튼을 누르고 들어왔다.

“새로 간 회사는 마음에 들어요?”

계원이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진강이 몸을 움찔했다.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진강의 귀에는 비꼬는 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양심이라는 게 없으십니까.”

독기 가득 찬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흩어졌다.

연예계에서 차계원의 입지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밥줄이 끊긴 채 그 회사에 남느냐,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기느냐, 그 둘밖에 없었다. 고작 두 개의 선택지가 제 턱 밑에 들이밀어졌을 때, 진강은 그가 얼마나 악랄한 인간인지 몸소 깨달았다. 진작 자신을 쳐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본인 뜻대로만 될 거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빠드득 갈리는 잇새로 딱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예인으로서 가치가 사라진다면 그 회사에 남을 수 있는 명분도 없다. 그렇다고 백이서에게 연락해 사정을 말하는 건 더 안 될 일이었다. 비겁하게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이 차계원보다도 더 싫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힘이 되어 주겠노라 한 약속이 그저 치기라는 걸, 제 입으로 고할 용기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진강은 다짐했다. 어떻게든 이 더러운 바닥에서 힘을 키우리라. 그 후에 꼭 백이서를 빼내 오리라.

그러나 그의 다짐이 무색하게 계원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마치 귀찮은 날파리라도 내쫒듯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내 뜻대로 된 거 별로 없는데?”

조소를 머금은 차계원의 목소리가 그를 비웃었다. 제 뜻대로만 했으면 자신은 지금쯤 백이서랑 뒹굴고 있었어야 한다.

“촬영 때 뵙죠.”

사납게 노려보는 이진강의 눈빛과 잘게 떨리는 주먹을 가볍게 무시한 계원이 등을 돌렸다.

* * *

한 개, 두 개, 빈 주전자가 점점 늘어났다. 지묵은 방 옆에 작게 난 창으로, 장식용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조금 전에는 저 속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훨씬 느리게 느껴진다. 흐르는 물의 표면이 춤추는 것처럼 보였다.

“받으세요, 가득. 잔은 가득, 가득!”

누군가 지묵의 손에 술잔을 쥐여 준다. 살짝 걸쭉한 액체가 잔 안에서 찰랑거렸다.

“이게 뭐…….”

지묵이 몽롱한 정신으로 고개를 들었다. 백이서의 얼굴이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맞다, 백이서. 그와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후드득.

팔에 힘이 빠지며, 잔의 술이 손과 바지 위로 떨어졌다. 축축한 느낌에 그가 얼굴을 찌푸린다.

“우리 지금, 지금 얼마나 마셨어요?”

혀가 어눌하게 움직이는 게 저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혀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나름대로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 티 내지는 않았으나 결벽증도 조금 있었다. 그런 자신이 남 앞에서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이는 건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얼마 안 마셨어요.”

신난 음성이 노래를 부르듯 말에 음정을 넣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술을 쏟아 비어 버린 제 잔에 다시금 술이 채워졌다.

“아니…….”

술잔이 가득 차서 찰랑거린다. 지묵은 허벅지를 때리며 놔 버릴 것만 같은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어, 그러면 아픈데.”

백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올려 뜨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다고? 자기가 먹여 놓고? 지묵은 순간 울컥 화가 났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백이서를 취하게 만들어 차계원을 열 받게 하려 했는데 다 틀렸다.

사람이 순둥순둥해 보여 술도 약할 줄 알았는데, 백이서는 그 순진한 얼굴로 말술이었다. 정말 끝없이 들이켰다.

주전자 네 개까지는 얼핏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그때까지 무슨 대화를 했더라. 차계원 욕을 하고, 술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또.

“으.”

지묵이 옆 이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편두통이 온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대화도 드문드문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나는 대화가 드문드문했다. 기억나지 않는 게 태반이었고.

“많이 아프세요?”

어느새 옆으로 온 백이서가 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따듯한 체온에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예? 괜찮습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안 좋으면 마셔야죠.”

조금 풀어지던 지묵의 얼굴이 경악으로 변한다. 백이서는 헤실헤실 웃으며 술잔을 제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아뇨, 이서 씨. 저 지금 토할 것 같…….”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속에서 위액 같은 것이 올라왔다. 체면만 없었으면, 여기서 조금만 더 취했으면 테이블 위에 오물을 뱉어냈을 수도 있다.

“안 죽어요오.”

누구보다 맑게 웃으며 술잔 밑바닥을 받쳐 먹여 주는 술을 지묵이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저렇게 살살 웃으며 술을 따라 주니 안 마시려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한 병 더 주세요, 사장님!”

백이서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퍼지는 걸 들으며 지묵은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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