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 * *
“더 밟아요. 더. 매번 이렇게 말을 해 줘야 해요?”
뒷좌석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계원이 긴 다리로 앞 좌석의 등받이를 누르며 닦달했다.
“넌 뭘 그렇게 집에 갈 때마다 재촉하니. 그렇게 굴다 대표님 도망가겠다.”
그 짜증을 다 받고 있던 김건이 보다 못해 한 소리 했다. 제가 알기로 차계원은 운동 갈 때만 빼면 내내 집에만 붙어 있었다. 스케줄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닐진대 촬영에 나오는 족족 이러니 운전대를 잡은 저로서는 한숨만 나왔다. 속력은 이미 빠르고, 차가 막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차계원은 마치 무언가에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아, 아니야! 안 도망가겠다!”
차계원이 순식간에 운전석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건의 목덜미를 잡았다. 건은 목덜미에 소름 끼치게 와 닿는 서늘한 체온에 바로 말을 바꿨다.
“헛소리하지 마요.”
“안 해. 안 하면 되잖아! 사고 나. 손 치워, 인마! 사고 나면 나만 죽어? 너도 죽어, 너도!”
건이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애써 모른 척하며 정면만 봤다. 피부에서 느리게 떨어져 나가는 손아귀에 한기가 들었다. 귀신도 저놈 손에서는 못 도망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한낮인데 재촉을 그렇게…….”
촬영 시작이 새벽이었던 터라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걸어가도 집에 도착하면 저녁이 안 될 것 같은 시각이었다.
“입에서 재촉 안 나오게 팍팍 좀 밟아요, 그러니까.”
“왜. 대표님이 너 기다리고 계신대?”
김건이 히죽 웃으며 농을 던졌다.
“네. 나 기다린대요.”
그리고 차계원은 진심으로 사르르 웃으며 맞받아쳤다. 건은 방금 제 목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소름이 끼쳤다. 건이 무서운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흔들어 털었다. 안 그러면 부정이라도 탈 것 같았다.
등받이를 누르던 다리를 거둔 계원은 등받이에 기대 핸드폰을 들었다. 역시 백이서에게는 문자 하나, 전화 한 통 안 와 있다. 딱히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은근 심술이 났다.
“자려나.”
2시에 퇴근했으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거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힘들어했으니 자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침대에서 고이 자고 있을 백이서가 떠올랐다. 백이서는 혼자 잘 때면, 이불을 둘둘 말아 동굴처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가끔 퇴근하고 그 이불 뭉텅이를 안으면 뜨끈뜨끈한 기운이 제게까지 퍼졌다.
“음.”
계원은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습관처럼 어플을 먼저 열었다.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는 사람이니 그게 빨랐다.
“뭐야, 이거.”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백이서의 위치가 집이 아닌 회사로 잡히고 있었다. 계원이 몇 시간 전 데스크 직원에게서 온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문자에는 백이서가 지금 막 나갔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핸드폰 두고 갔나?’
계원이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형용할 수 없는 화가 확 솟구쳤다. 회사에 핸드폰을 두고 갔을 수도 있다. 백이서는 덜떨어졌으니까.
“그랬으면 찾으러 갔어야지.”
너무 귀찮았나? 아무리 덜떨어졌어도 한 번도 두고 다닌 적 없던 핸드폰을 두고 가는 게 말이 되나? 자신이 연락할 걸 뻔히 알면서? 지도 위의 움직이지 않는 초록색 점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
한번 물꼬를 트기 시작한 가정은 끝을 모르고 뻗어 나갔다. 깜빡한 게 아니라면? 일부러 다른 데로 새기 위해 핸드폰을 두고 간 거라면? 자신의 백이서의 위치를 매번 감시하는 걸, 백이서가 사실 알고 있었다면?
일전에 빚쟁이의 계좌가 실은 계원의 것인 걸 알아차리고 병든 닭처럼 굴다 집을 나가려 했던 백이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몸 안의 피가 손끝으로 싸아 빠져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씨발…….”
계원이 차게 욕을 읊조렸다.
* * *
백이서는 아무 데도 없었다.
김건을 아무 역에서 내려 준 계원은 차를 몰고 백이서가 다닐 만한 곳은 전부 가 봤다. 심찬네 지하 바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사진만 잔뜩 찍히기도 했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백이서의 옛날 집 주차장이며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나 뺑뺑 돌았다.
그러나 백이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혹시나 싶어 자신의 집 근처 길목과 찻집 근처까지 뛰어다닌 계원은 대문 앞에 서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선선한 봄바람도 들러붙는 것처럼 느껴져 짜증이 났다.
“서휘준…….”
얼마 전에 서휘준을 만났다고 했었다. 백이서는 그가 다시 내려간다고 했으나 그 대화가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직접 듣지 못했으니까. 그 새끼가 백이서에게 바람을 넣었을 수도 있다. 백이서를 제 고모네 집에 숨긴 것도 그 새끼였다.
“이 씹새끼가…….”
금붕어 똥마냥 백이서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새끼가 어쩐지 너무 쉽게 내려간다 했다. 그 새끼가 또 백이서를 빼돌린 거다. 또.
아니면 이진강? 며칠 전 마주쳤을 때 그는 모든 게 뜻대로만 될 거라 생각하지 말라며 경고 아닌 경고를 했었다. 그게 이런 뜻이었나?
쾅.
계원이 대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가 빠드득 갈렸다. 진작 다른 방법을 썼어야 했다. 고작 위치 추적 따위에 마음 놓고 있으면 안 됐다. 한 번 도망갔던 사람이 두 번은 못 갈까.
징.
그때 주머니 속에 넣어 뒀던 핸드폰이 울렸다. 계원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했다.
[이서ㅓ씨 데려가 ㅂ빨 ㄹㅣ.]
“……이건 또 뭐야.”
* * *
“너 내가 설치지 말라고 했지.”
계원이 눈을 번들거리며 사납게 중얼거렸다.
문자를 받자마자 술집으로 들이닥친 계원은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강지묵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그는 다리가 풀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백이서 역시 잔뜩 취한 채 헤실헤실 웃어대기 바빴다.
“계, 계원아. 나 좀 살려 줘. 이서 씨 좀 어떻게 해 봐.”
강지묵은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살려 달라며 손을 모았다. 계원이 그를 테이블 위로 내동댕이쳤다. 접시들이 와장창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잔 더! 한 잔 더!”
백이서는 옆에서 눈치도 없이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허.”
계원이 헛숨을 들이켰다. 여기서 재롱이나 떨고 있는 걸 모르고 밤이 다 가도록 그 개고생을 했다.
“자아…….”
백이서가 테이블 위에 대자로 뻗은 강지묵의 얼굴을 부여잡고 술잔을 들이밀었다. 계원이 단박에 인상을 구기더니 이서의 손을 틀어쥐고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서가 들고 있던 술잔을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어? 헤헤…….”
잔뜩 풀린 백이서의 눈이 계원을 응시하더니 곱게 웃는다. 계원은 뭐라 화를 내려다가 참고 애꿎은 관자놀이만 꾹꾹 눌렀다. 불여우처럼 살살 웃어대니 화낼 여력도 없었다.
다시 술잔을 채우려는 백이서의 허리를 계원이 잡고 놔주지 않았다. 백이서는 잠깐 바동거리다가 계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안겨 왔다.
“하아…….”
“우응.”
계원이 선 채로 백이서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술병을 쟁반에 받쳐 가져온 종업원이 당황한 얼굴로 계원과 방의 몰골을 번갈아 본다.
“손님께서 술이 부족하다 하셔서.”
종업원이 난감한 얼굴로 쟁반을 건넸다. 이걸 줘도 되나, 하는 얼굴이었다.
“제가 시켰어요, 제가! 저! 바로 제가!”
술 소리가 들리자 방금 전까지 계원의 품에서 잠들기 직전이었던 백이서가 양손을 번갈아 들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 자신이 취한 백이서보다 더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하며, 계원은 종업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한테 주십시오. 배상은 다 하겠습니다.”
“편히 즐기다 가세요.”
종업원이 마지못해 쟁반을 넘겨주고 방을 나갔다. 계원은 술을 넘겨받자마자 뚜껑을 열고 그대로 지묵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어억, 어프프, 아이 씨, 이거 뭐……. 콜록, 켁!”
마른 땅에서 헤엄이라도 치려는 것처럼 허우적대는 강지묵의 위에 술병마저 던진 계원은 그의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백이서를 둘러업은 채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 * *
“흐윽, 잘못, 잘못했어…….”
이서가 엎드려 이불을 그러쥔 채 흐느꼈다. 계원이 이서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며 뭉근하게 허리 짓을 했다.
“허리 들라고요.”
계원이 이서의 엉덩이를 철썩 내리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백이서는 흐느끼면서도 착실하게 엉덩이를 들었다. 성기를 쑥 빼낸 계원이 한 번에 끝까지 처박았다.
“하앙……! 흑, 으응!”
퍽 소리와 함께 이서가 목을 뒤로 꺾으며 자지러졌다. 살끼리 부딪혀 철퍽거리는 소리와 성기가 들락거리는 질척이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 뺑이 돌려놓고 그 병신 새끼 앞에서 귀염 떨고 있으니까 좋아요?”
“흐읏! 흐응…….”
이서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이불에 문질렀다. 계원이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퍽.
“좋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