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100화 (100/100)

#100

그는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모든 스케줄을 정리했는데, 그 바로 다음 날부터 이서가 출근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퇴근 후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카페에 가면 거기도 따라왔고, 산책하러 나갈라치면 이서보다도 먼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서는 어느새부터 차계원과 온종일 붙어 다니게 됐다. 얼떨결에 취미도 공유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는 찻잎을 고를 때도 그와 상의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차계원은 의외로 찻잎도 블랜딩 할 줄 알아서 이서의 입맛에 딱 맞는 차만 쏙 쏙 골라 줬다.

어차피 인간관계도 좁아 약속도 없고 특별한 취미도 딱히 없지만 이건 아니었다. 모든 생활의 시작과 끝이 차계원이 되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난 분명히 말했어. 안 가.”

“대표님 간다니까요.”

계원은 여유롭게 웃으며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간다면 안 가는 거지 이걸로 이리 오래 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 계약에서는 스케줄에 같이 동행하기로 한 게 맞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일전 계약은 무효가 된 지 오래였고.

“그래, 알아. 예전에 간다고 했었는데, 그건 우리 지난 계약 때 그런 거잖아. 계약도 새로 했고,”

“아니, 그거 말고 간다 했다고요.”

“너, 너 자꾸 우길래……? 내가 언제?”

이서가 답답함에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그를 바라보던 계원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파일을 건넸다. 파일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아니,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었다.

“이게 뭐야?”

“읽어 봐요.”

모서리가 구깃구깃한 종이를 이서가 떨떠름한 얼굴로 집어 들었다. 종이를 슥 내미는 차계원의 얼굴이 너무도 환해서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종이에는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꼬불꼬불한 글자들이 무슨 해학적인 그림마냥 쓰여 있었다. 이서는 찬찬히 그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 백이서는 을, 차계원의 해외 촬영 스케줄에 동행한다……. 이는 천재지변이나 본인 사망 외에……. 이거 뭐야!”

이서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이 뭉치가 팔랑이며 발치에 떨어졌다.

“그날 강지묵이랑 술 마시고 나서 나랑 계약 조항 몇 개 더 썼잖아요. 지금 대표님이 첫 번째로 읽은 게 우리 스케줄 같이 가기로 한 내용이고.”

차계원이 바닥에 날리는 종이를 차곡차곡 정리해서 파일에 넣었다. 그리고 뺏기기라도 할세라 품 안에 숨긴다.

“이거는 반칙이지! 취해서 한 계약은 효력도 없어! 그거 취소야, 취소.”

이서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태 웃기만 하던 차계원의 표정이 단박에 싸늘해진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술 취한 대표님은 대표님이 아니에요? 어디 지나가는 개새끼인가?”

그가 한껏 비꼬며 몰아붙였다. 이서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그날 일을 다시마 우려먹듯 툭하면 꺼내 사람 창피하게 했었으면서, 어떻게 그날 쓴 것들은 오늘이 될 때까지 한마디도 안 할 수 있을까.

“나, 나는 몰라. 네가 썼지! 그거 내가 쓴 거 아닌 거 같아. 어떻게 믿어?”

결국,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대로 넘어가면 안 된다. 비단 촬영에 동행하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까 슬쩍 보니 종이가 다섯 장은 넘어갔다. 이서가 모르는 허튼 내용이 얼마나 들어 있을지 모른다.

“대표님이 직접 쓰고 지장도 찍었어요.”

계원이 얄밉게 지장을 가리키며 이서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나는 안 물러 줄 거예요.”

“씨……. 내, 내놔!”

이서가 씩씩거리다 계원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긴 팔과 한참 사투한 끝에야 파일을 뺏을 수 있었다. 이서는 파일을 손에 넣자마자 종이를 꺼내 쫙쫙 찢었다. 안의 다른 내용은 읽어 볼 것도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을 구르는 종이를 보며 이서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즈음 계원이 입을 열었다.

“대표실에 가면 똑같은 거 또 있을 거예요. 코팅돼서. 스캔해서 파일로도 저장해 놨고.”

“뭐……?”

허탈함에 이서의 어깨에 맥이 탁 풀렸다. 차계원처럼 용의주도한 놈이 저 종이 한 부만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였다.

“오늘은 출근 안 하고 열심히 짐 싸면 되시겠어요. 그죠.”

파일을 들고 가벼운 걸음으로 주방 쪽으로 가는 차계원을 보며 이서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 * *

“칫솔도 챙겼고, 옷은 차계원이 챙겼고, 여권도 차계원한테 있고, 신분증도…….”

어느새 출국 날이 다가왔다. 옷까지 다 챙겨 입은 이서는 현관에 세워 둔 커다란 캐리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을 하나씩 굽히며 안에 들어 있는 짐을 떠올렸다. 분명 다 챙겼는데 무언가 빠진 것 같았다.

“뭐 해요? 조금 있으면 출발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계원이 캐리어 앞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서의 정수리를 콕콕 찔렀다.

“어? 아, 아니야.”

이서는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캐리어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뱅뱅 맴돌았다. 한 시간 뒤면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서가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은 채, 한참이나 턱을 괴고 있을 무렵이었다.

“대표님.”

“어…….”

이서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거 안 챙겨요?”

“응?”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던 이서가 화들짝 놀라 어버버거렸다.

그래, 선물. 차계원한테 줄 선물을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여태 잊고 있을 수 있을까.

“그, 그거…….”

차계원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는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의 하늘색 상자를 보며 이서가 울상이 됐다.

김건의 말을 듣고 이서는 몇 날 며칠을 고민했었다. 선물을 고를 때도 오래 고민했었으나 주기로 결심할 때만큼은 아니었다.

김건의 의견처럼 데뷔 15주년인 것 때문도, 팬 사인회를 부탁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그보다 한 번쯤 그에게 무언가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친구 선물이야. 줘.”

이서가 최대한 들키지 않기 위해 침착한 척하며 손을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편지도 없었다. 말하지 않으면 본인 것인 줄 모를 것이다. 그래도 이왕 선물로 주는 거 서프라이즈 느낌 정도는 내고 싶었다.

“친구? 대표님 친구 없잖아요.”

계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있거든?”

이서가 얼굴이 벌게지며 상자를 뺏으려 했다.

“아!”

그러나 뺏으려다 뚜껑이 분리된 상자는 이서의 손에 안착하는 대신, 바닥으로 처박혔다. 상자안의 내용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서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허겁지겁 그걸 주우려 했으나 차계원의 행동이 더 빨랐다.

“이쁘네요.”

파란 원석이 박힌 커프 링크스 한 쌍을 손바닥에 올린 계원이 곱게 눈을 휘며 웃었다. 누가 봐도 손안의 물건이 자신의 것임을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선물 준비한 거 알고 있었어?”

“네. 기대하고 있는데 놓고 가셔서 서운할 뻔했어요.”

계원이 커프 링크스를 소매 한쪽 끝에 달며 대답했다. 그렇게 티를 내는 데 모르면 병신이었다. 백이서는 뭔가를 숨기려 하면 오히려 티가 났다. 숨기는 게 있으면 숨 쉬는 것마저 부자연스러워지는 게 바로 백이서였으니까.

“가서 주려 했는데……. 뭔지도 알았어?”

이서가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물었다.

“뭔지는 몰랐어요. 수갑이나 딜도 같은 걸 상상하기는 했는데.”

이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계원 꼭 잘 나가다가도 이야기가 저런 쪽으로 빠졌다.

“다시 내놔.”

이서가 뾰로통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줬다가 뺏어 가는 게 어디 있어요.”

계원이 커프 링크스 채운 팔을 반대쪽으로 쭉 뻗었다. 그 모습이 꽤 즐거워 보여 이서는 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

이서가 그를 떠보듯 물었다.

“뭐, 그저 그래요. 못하고 다닐 정도는 아니고.”

차계원은 즐거워 보이면서도 심드렁해 보이기도 했다.

‘좀 더 좋은 걸 샀어야 했나.’

“너 마음에 안 들면…….”

“할게요. 팬 사인회.”

“어?”

“이뻐서.”

그가 다른 쪽 소매에도 커프 링크스를 마저 채운 후 손목을 흔들었다. 그가 하니 꽤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사실 캐주얼한 스타일을 선택한 오늘 차계원 의상에, 잘 어울리는 액세서리는 아니었다.

“그, 꼭 그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도 조금 있어.”

“……조금이요?”

그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보다는 많이?”

이서가 수치를 재듯 손가락을 넓히며 눈을 도록 굴렸다.

“알았어요. 빨리 가요. 비행기 놓치겠네.”

현관을 열며 이서를 뒤돌아보는 계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서려 있었다. 여름의 강렬한 햇빛이 눈을 찔렀다.

“응.”

이서가 작게 대답하며 계원을 따라 현관 밖을 나섰다.

비도덕적 안락함 외전 마침.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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