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네가 오래도록 마음을 다해 기도한 단 하나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 주신단다. 그러니 원하는 게 있다면 꾸준히 간절하게 기도하렴. 반드시 이루어질 거야.
어머니가 유현진의 뺨을 쓰다듬으며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나람님의 신실한 신도였던 어머니는 그분의 품으로 돌아갔다.
열두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열일곱 살에는 어머니마저 잃었다. 의지할 친척도 없이 고아가 된 마당에 그가 돌봐야 할 동생은 그의 팔을 붙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유현진은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닥쳐온 불행들을 떠올려 보았다.
변경에서 터진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두 눈이 시뻘게지도록 울며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을 잃은 세 모자가 졸지에 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관이었던 준장이 그들을 가엾게 여겨 자신의 본가에 들어와 더부살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대대로 권문세가였던 준장의 본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던 어머니가 병으로 앓아누웠다.
바닥을 구르며 숨이 멎도록 우는 동생 옆에서 유현진도 피를 토할 듯 애타게 기도했지만 어머니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준장―그때는 이미 소장―이 그들을 가엾게 여겨 두 형제를 계속 그곳에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어머니가 들어 두었던 보험금으로 두 형제는 당장의 학비나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유현진의 유일한 피붙이인 동생은 타고난 말썽꾸러기라 수도 없이 그의 속을 태우며 그를 식겁하게 만들었다. 혼자 버티기도 힘들 고아의 삶에 철없는 골칫덩어리까지 하나 얹혀, 유현진은 딱 죽고 싶었다(혹은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동생이 구김살 없는 명랑함과 특유의 애교로 그의 마음을 붙들어 주었던 건 몇 번이던가.
그래, 그렇게 따져 보자면 하나하나의 불행들 자체를 돌이킬 수는 없었어도 그때마다 솟아날 구멍 하나쯤은 생기곤 했다.
불행이 연거푸 닥쳐오더라도 짤막한 동아줄도 하나씩 내려왔던 셈이니, 하늘 위의 그분이 유현진을 아예 내버려 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유현진은 자신이 원하는 것, 혹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불행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이제 하나의 불행이 남았다.
그러나 이 불행은 외부에서 닥쳐왔던 다른 불행들과는 달리 유현진의 마음속에서 싹이 터서 그런지 도통 무마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았다. 계속 마음속에 도사리고 앉아 유현진을 괴롭혔다.
그렇다면 별수 있나.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을 수도 없고 마음에서 없앨 수도 없다면, 단념하고 그 불행을 마음에 품고 가는 수밖에.
달리 원하는 것도 없었던 유현진이 신실했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그리고 그가 가진 유일한 욕심을 다스리고자 신학교로 들어가 사제의 길을 가고자 한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년의 수양이 다 소용없다, 소용없어…….”
신학생 때부터 시작해 이제 9년, 한두 해만 더 지나면 정식 신관으로 서품도 받게 될 유현진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앞에서 잠들어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니, 아마 꿈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그의 눈앞에서, 요리점 뒤꼍에 딸린 좁은 방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늘어져 있을 만한 남자가 절대 아니었으니까.
비록 온 방에 감도는 지독한 술 냄새를 환기시키느라 조금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시퍼렇게 파고든 겨울바람이 유현진의 벗은 몸을 몰아붙이며 정신도 일깨우고 있었지만, 그래도 꿈이겠지. 아니면 너무 추운 나머지 머리가 몽롱해져서 헛것을 보고 있거나.
꿈이든 헛것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유현진의 눈앞에는 그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아무리 두터운 이불을 덮고 있다 해도 목덜미며 발치로 이불 틈새 곳곳에 스며드는 얼음 바람 때문에 유현진은 덜덜 떨고 있는데, 유현진과 마찬가지로 실올 하나 남기지 않고 홀랑 벗은 알몸인 채 어깨도 발도 드러내고서 이불도 대충 덮고 있는 남자는 추운 기색도 없었다. 잠결에도 몸을 옹송그릴 만한데 그 후리후리하고 훤칠한 체구로 온 방을 가득 채우며 편안히 늘어져 있다.
늘 티 한 점 없이 완벽하고 허술함이라곤 없던 남자가 설마 이렇게 만취해서 인사불성으로 늘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남자가 일시적으로나마 수도로 귀환한 기념으로 이 요리점의 가장 큰 방을 꽉 채우도록 모여든 그의 부하와 동료 및 각계 인사들이 작정을 하고서 그에게 술을 권해 댔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조리 다 나가떨어질 때까지 버틴 남자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며 그를 물고 늘어지던 참모가 결국 상을 엎으며 정신을 잃자 술 한 동이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남자는 자신밖에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그 술자리의 한구석에 있다가 일찌감치 쓰러진 동생을 데리러 그곳에 찾아왔던 유현진은 그 상황을 보고는 당황해 눈만 껌벅이다가 도미노처럼 와르륵 엎어진 상 밑에 깔려 온갖 남은 술과 음식 따위를 뒤집어썼다.
요리점 주인은 혹시라도 높으신 분들께 경을 칠까 봐 얼른 요리점 뒤꼍에 있는 방을 내주었고, 유현진은 남자와 더불어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러워졌던 옷가지가 말끔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요리점 주인은 이 깊은 밤중에도 옷가지들을 귀신같이 재빨리 세탁해 와 바로 조금 전 방문 앞에 가지런히 걸어 두었으니, 이제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챙겨 입고 나가면 된다. 주인장의 노련함으로 보아 동생은 쓰러진 사람들 사이에 나란히 누워 이불자락이라도 덮고 있을 게 분명했다.
슬슬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만 나가 보아야 할 텐데, 이 따뜻한 이불 속에서 벗어나고픈 기분이 들지 않아 계속 주저주저 앉아 있는 참이었다.
아니, 아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에게 넋 없이 시선을 붙박아 두고 있느라 옷가지를 걸쳐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왜냐면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평생에 두 번 다시 돌아올 리 없을 시간이었으니까.
유현진의 마음속 불행의 원인인 이 현태오라는 남자는 하늘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연이 닿아 이 남자의 집에 칠여 년 동안 더부살이를 했으니 얼굴이야 숱하게 마주쳤었지만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
기백 년이 넘도록 권세를 틀어쥐었던 명문 현가의 자손으로, 그 집안 어른들마저도 두려워하며 몸을 사릴 정도로 기상이 대단한 남자다. 어릴 때부터 험한 전장을 누비며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가 급기야는 이십 대에 지방 총독에 올랐으니, 수재를 여럿 배출하기로 유명한 현씨 가문에서도 툭 튀어나온 송곳 같은 기린아였다.
그러니, 언제나 벼린 칼날같이 냉철하고 흐트러짐이라곤 먼지 한 톨만큼도 없는 남자가 이렇게 의식을 잃고서 친하지도 않은 사람 앞에 널브러져 있을 일은,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실 확률만큼이나 일어나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꿈이 틀림없는 게지. 아무리 찬바람이 피부를 생생하게 들쑤셔도.
유현진은 이불에 턱을 파묻으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더라.
그가 송갈국과의 전쟁에서 대승한 직후 국경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했던 기록적인 사건 이후 7년이니, 7년 만인가.
아니다, 그 사이에 유현진이 선교 수행으로 그쪽 지방으로 갔을 때 함께 따라갔던 제상아와 더불어 얼굴을 봤었으니, 3년 만인가 보다. 그 사이사이 가끔 이 남자가 큰 행사가 있을 때 수도로 돌아오거나 해 우연히 가끔 마주칠 때는 있었지만 제대로 말을 섞은 적은 없으니 못 본 셈 치고.
“…….”
제상아를 떠올린 유현진은 살짝 우울해졌다.
‘얘, 너 가져, 너 가져. 줄 수 있음 주고 싶다, 정말.’
하얀 손을 내저으며 말하던 그녀의 미간에는 주름이 한 줄 그여 있었다. 부럽다고 하자마자 대뜸 돌아온 그 대답이 그녀의 진심이란 뜻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누군가는 애타게 원하는 것을 누군가는 내다 버리고 싶어 한다.
모든 이가 찬탄하며 선망하는 남자를 아기 때부터 정혼자로 둔 여자는 놀랍게도 그를 원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놀랍지는 않다. 그녀는 아주 현명한 여자였다.
‘사람들이 그 남자를 동경하는 건 이해해.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춘 남자라고 하는 말도 납득할 수 있어. 하지만 말이야, 평생 살 맞대고 살 남자에게는 더 중요한 게 필요하잖겠어?’
‘이를테면?’
‘상냥함. 따뜻함. 온유함. 그 남자한테는 매우 결여된 인간미지. ……너 지금 그 무엄한 눈초리는 뭐니? 네가 좋아한다는 남자한테 좋은 소리 안 해서 마음 상했나 본데, 가슴에 손 얹고, 내 말 틀렸어?’
‘……. 하나람님의 가호 아래, 아무리 겉으로 냉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속에 흐르는 피까지 차가운 사람은 없는 법이야.’
차마 신관 된 몸으로 대놓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알량한 변호나 우물거리는 유현진에게 제상아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말마따나 겉으로 냉정해 보여도 속마음은 따뜻한 그녀는 그 이상 유현진을 몰아세우진 않았다. 천 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이 위대한 제양국의 사랑스러운 막내 공주님은 그렇게 몰인정한 분이 아니었다.
기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에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현태오는 태연한 기색으로 심지어 웃음까지 띠고 있다가도 그 웃는 얼굴 그대로 어느 순간 갑자기 상대의 목을 꺾어 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
아무리 가까이 지내지 않았어도 칠여 년을 한 담장 안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유현진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니 근데 너는 대체 그걸 모르지도 않는 애가, 그 남자가 왜 좋니?’
‘……, ……, ……잘생겼잖아…….’
그녀의 시선이 삽시에 싸늘해질 줄 알면서도, ‘너는 병이야, 병, 이 얼빠 또라이야!’ 하고 공주님답지 않은 언행에 팩트 폭행을 당할 줄 알면서도, ‘야, 그래도 그 사람 앞에서 티는 안 내니까 됐잖아…….’ 하고 어설픈 변명이나 하게 될 줄 알면서도 유현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잘못된 줄 머리로 알았으니 마음도 같이 싹 정리해 버릴 수 있었더라면 유현진은 굳이 성직자의 길을 걸어 마음을 다잡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이라도 했으니까 지금 그나마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고 제자리걸음이라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남에게 들키지 않고, 불순한 감정은 마음속에만 넣어 두고, 신실한 사제의 길을 걸으려 애쓰는 유현진이었다.
눈치가 귀신같은 제상아에게는 일찌감치 들키고 말았지만, 그녀는 친구의 어리석은 마음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조용히 입 다물어 주었다. 심지어는 자기 정혼자를 좋아한다는데도,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 속마음을 숨기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며 서로를 기만하느니 차라리 터놓고 얘기하는 게 낫다며 선선히 이해해 준 것이다.
조목조목 속내를 이해하고 나누는 것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대하는 그녀의 방식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유현진이 그녀를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더라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부러운 일 아니라니까!’ 하고 그녀가 아무리 아우성을 치더라도 어쨌든 부러웠다.
그 고귀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은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머잖아 이 남자를 차지할 터였다. 어느 한쪽이 넘치지도, 처지지도 않는 완벽한 한 쌍이 되겠지.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한들――그녀가 이 남자를 갖지 않는다 한들, 뭐가 다르겠는가?
유현진에게는 다를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남자의 몸으로, 평생 하나람님만을 섬기며 정결한 사제의 삶을 살아갈 유현진에게는 이 남자가 지구 반대편보다도 더 멀리 있는 존재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순간을 혼자서나마 실컷 즐겨야지.
이부자리 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유현진은 살그머니 몸을 눕혔다. 남자의 얼굴이 정면의 각도에서 보였다.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조심조심, 소리 없이 거리를 좁혔다.
세상에. 이렇게 가까운 데서 마음껏 쳐다볼 수 있다니.
오래도록 신실하게 살고자 애썼더니 하나람님이 선물을 주셨나 보다. 이렇게 고마운 꿈을 꾸게 해 주시다니, 내일 일어나면 사흘 동안 감사 기도를 올려야겠다.
유현진은 흘끗 시선을 떨구었다. 남자의 몸은 이불에 덮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리를 몹시 심하게 다쳤다고 들었다. 임지에서 돌아온 이유도 재활이 필요할 정도로 크게 다쳐서였다.
남자가 현재 총독으로 있는 평항 지방은 오래전부터 송갈과의 갈등이 심한 곳이라 테러나 폭동이 빈발하곤 했다. 그나마 남자가 그곳에 부임한 뒤로는 퍽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매해 한두 번씩은 뉴스에 나올 만한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얼마 전에도 청사 부속 건물을 통째로 날려 버린 대규모 테러가 있었는데, 거기에 휘말린 남자가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치곤 치료와 재활을 위해 잠시 수도로 돌아온 게 두어 달 전이었다. 회복은 순조로워 이제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거의 다 낫고 지금은 재활 중이라고 들었다.
그가 사고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는데.
“…….”
돕고 싶다.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 그만두었다. 지금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차마 남자의 몸에 손댈 용기까지는 없었다.
유현진은 뚫어져라 남자의 얼굴 구석구석을 뜯어보았다.
그 사태 직후의 뉴스에서 보았을 때에는 야위고 초췌했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얼굴만 봐서는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역시 아무리 봐도 잘생겼다. 워낙 인상이 날카롭고 서늘해서 그 잘생김을 좀 깎아 먹긴 하지만, 이렇게 차근차근 보면 확실히 깎아 놓은 것처럼 잘생겼다.
웃으면 어떤 인상이 될까. 제대로 웃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웃는 것뿐 아니라 딱히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나한테만 그럴지도 몰라.
종종 신문에 실리는 사진에서나 뉴스에 비치는 영상에서도 늘 비슷한 인상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가까운 사람들과 있는 걸 먼발치에서 볼 때면 조금씩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고 그러던데, 유현진에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딱히 어떤 표정을 지을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긴 했지만 처음부터 이 남자는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 상관이었던 준장이 그들 모자를 거두어 자신의 본가에서 일하며 머무를 수 있도록 해 주었을 때, 거기에 이 남자가 있었다. 어릴 때에도 인상이나 표정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년이었다.
워낙 드넓은 저택이었던 데다 고용인의 아들과 저택 주인의 아들이라는 차이도 있어 딱히 어울릴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몇 년이나 그곳에서 살았으니 여러 차례 맞닥뜨리긴 했었다.
처음엔 원래 표정이 희박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얼마쯤 지나서는 그가 자신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조금쯤 웃다가도 우연히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 금세 무표정해지곤 하는 것이었다.
유현진도 그를 마주치게 되면 낯이 어색해지는 건 마찬가지라, 나중엔 눈치 빠른 사람들에게선 ‘두 사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라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싸웠다거나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그런 일이 있을 만큼 맞부딪힌 적도 없지만―, 여하튼 그랬다.
“…….”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이 남자가 있다니.
유현진은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팔을 꾸물꾸물 꺼내어 남자의 얼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차마 만지지는 못했지만 쓰다듬듯이 남자의 뺨이나 이마 위로 손을 움직여 본다.
한번 쓰다듬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꿈인데 뭐 어때, 하고 만져 보기엔 이불 밖으로 꺼낸 팔에 닿는 공기가 너무 생생하게 차다.
그때 창밖 멀리서 닭이 울었다.
겨울이라 아직은 바깥이 캄캄했지만 슬슬 날이 밝으려나 보다.
더 늦기 전에 일어나야겠다. 꿈에서 깨어야 할 때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남자를 낱낱이 뜯어보며 유현진이 이불 속에서 아주 느리게 부스럭, 하고 움직였을 때였다.
바로 그때.
남자가 눈을 떴다.
아무런 조짐도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현태오가 유현진을 본다.
아니, 유현진을 본다기보다는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유현진이 있었다고 하는 게 옳겠지만, 그 시선이 곧바로 유현진의 얼굴에 꽂혔다.
“…….”
심장이 멈췄다. 동작도, 시간도, 머릿속도 다 멈췄다.
현태오 역시 모든 것이 멈춘 양 미동조차 없었다. 길고 시원한 눈매가 똑바로 유현진을 쳐다보는 채로 멈춰 있다.
이윽고.
깜빡, 그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순간 심장이 철렁하면서, 유현진의 멈춰 있던 것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중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움직인 것이 욕망일 줄은 유현진 스스로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보고 싶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간 억눌러 두었던 욕심이 요동치며 머리를 들이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더, 좀 더 보고 싶었다.
현태오가 일어나 앉았다. 시선을 돌린 그가 낯선 방 안을 천천히 살핀 뒤 마지막으로 시선을 떨군 곳은 이부자리 위, 실올 하나 걸치지 않고서 앉아 있는 그 자신과 그 바로 옆에 누워 있던 유현진이었다.
당황할까. 겸연쩍어할까. 혹은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중 무엇이든 보고 싶었다. 그는 늘 유현진의 시야 안에서는 무표정했으므로.
그러나 이번에도 예상과 달리―혹은 너무나 현태오답게도― 그의 표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 그대로 멈춰 있다가 별안간 이불을 들춘다.
그제야 유현진은 반사적으로 황급히 일어나 앉아 허리 아래까지 막 들춰지던 이불을 눌렀다.
“…….”
이불을 도로 덮긴 했지만, 잠깐 들춰진 사이에 엿보인 아래가 알몸이었음은 뻔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현태오 자신이 알몸인 것도.
그제야 그의 미간이 아주 약간, 여태 뚫어져라 바라본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유현진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 미간에 시선을 빼앗기는 스스로를 속으로 욕하면서도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그냥 선선히 말하면 그만이다.
술을 과하게 드시다가 옷이 다 더러워진 채로 의식을 잃으셨길래 이리로 옮겼다, 저도 비슷한 상황이라 옷이 세탁되어 올 때까지 여기서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상황이 좀 겸연쩍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나 여기서 나가면 그만이다.
마침 첫닭이 울고 날이 밝아 올 기미가 보이기 무섭게 저 바깥에서는 부지런한 일꾼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척이 나고 있었으니, 얼른 나가서 그들에게 간밤의 손님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동생을 데리고 가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꿈에서 제대로 깨지 못해 멈춰 있는 머리 때문에.
이 남자가 짓는 다른 표정은 어떨까, 불현듯 왈칵 밀려든 욕심 때문에.
“기억 안 나십니까? 간밤에 각하께서 저를 덮치셨습니다.”
유현진의 입을 불쑥 비집고 튀어나온 건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곤 헉 내가 미쳤나 하면서도 유현진은 현태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표정에 변화가 없다.
유현진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도 미동조차 없이 그대로였다.
혹시 아직 술이 안 깼나……? 하긴, 벌써 깨면 이상할 만큼 퍼마시긴 했다. 비록 굉장히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앉아 있긴 했지만, 원래는 한 사흘 밤낮을 못 일어나도 정상이었다.
“술이 과하셨나 봅니다. 말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워낙 힘이 좋으셔서.”
내친김에 헛소리를 더 던져 보는 유현진이었다.
이러다 도로 푹 쓰러져 곯아떨어질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유현진 사제님.”
현태오가 불렀다.
취한 사람답지 않은 또렷한 목소리다.
유현진은 속으로 움찔하는 한편 기분이 이상해졌다.
현태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이름을 알고는 있었구나. 하긴 기억력은 귀신같이 좋은 남자였다.
“제가 술로 의식을 잃은 건 처음이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 말씀은 제가 사제님을 강간했다는 뜻입니까?”
위험한 단어를 명확하게 입에 담으면서도 현태오는 여전히 씻은 듯한 무표정이었다. 심지어는 황당하다거나 말도 안 된다거나 화가 난 빛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저렇다니 대단한 남자다,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유현진은 아,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다.
유현진의 말이 턱도 없는 소리라는 건 너무 뻔했다. 우리가 비록 농담할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벗고 한 이불에 있는 상황이 겸연쩍으니 무마시키려고 적당히 농담을 던지는 거라고 여길 만도 하다. 그러니 그 딴에는 농담을 맞춰 주는 모양이었다.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저 하늘의 별만큼 거리가 멀었던 이 남자와 언제 이런 헛소리를 나눠 볼까.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약간 가벼워진 마음으로 농담을 덧붙였다.
“예. 덕분에 저는 이제 신적에 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각하께서 책임지셔야겠는데요.”
이제 마지막으로 잠시만 더 그를 눈에 담은 뒤에 슬슬 농담이었다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유현진은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매를 코앞에 두고 유현진은 왠지 모르게 가슴속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농담인 줄…… 아는 거…… 맞겠…….
저도 모르게 얼핏 떠올렸던 웃음마저 사라진 그때, 처음으로 현태오가 허공으로 시선을 주었다. 눈동자만 올려 아주 잠깐 허공에 닿았던 시선은 곧 다시 유현진에게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 ?”
알겠다니, 뭘.
너무나 갑작스러운 대꾸에 유현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더라, 일순 멍해진 머리로 반추해 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관 되신 분을 강제로 취하다니, 아무리 술김이라 해도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습니다. 마땅히 책임져야지요.”
“……아,”
분명히 농담인데, 그냥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스개처럼 주고받는 농담일 게 틀림없는데, 현태오는 아주 냉담하고 단호한 얼굴로 농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다. 아니면, 헛소리도 도를 넘어선 헛소리라 화가 난 걸까.
“저어, 각하. 제가,”
“저 현태오의 이름을 걸고, 유현진 사제님이 신전에 올린 정결한 서약을 제가 강제로 깨뜨려 버리고 만 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왕실에 혼약 파기를 청하고, 서둘러 내실을 마련해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사제님을 모시겠습니다.”
“아니, 각,”
이름을 걸, 아니, 혼약 파기라니, 내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이런 위험천만한 농담을……, 이쯤에서 농담은 접고, 혹시 제가 너무 되바라진 농담을 해서 마음이 상하셨다면 죄송……, 당황한 유현진이 미처 말을 고르기도 전에 현태오가 반듯한 자세로 앉더니 고개를 숙였다.
“취중이라곤 하나 사제님을 강제로 겁탈한 데에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반드시 책임질 것을 약속드립니다.”
“각,”
유현진이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와장창――.
뭔가 그릇 따위가 바닥에 떨어지며 부서지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동시에 끼익, 열리는 방문 틈으로 불어 들어오는 찬 공기.
방문 앞에는 요리점 주인이 사색이 되어 서 있었고, 그녀의 발치에는 깨어진 찻잔과 찻주전자가 뜨끈한 김을 피워 올리며 나뒹굴고 있었다.
“사제님께서는…… 일어나셨을…… 시각이라…… 따뜻하게 목을 축이실 것을 준비해 드리려고…….”
주인은 그 와중에 알몸으로 한 이불 위에 마주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보고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더듬더듬 시선을 피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
“나도 일어나야겠군. 오늘은 하루가 바빠질 것 같으니 서두르는 편이 낫겠어.”
현태오는 훌쩍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오른쪽 허벅지 옆으로 길게 그여 있는 흉터가 드러났다. 아물었다고는 해도 아직 벌겋고 울퉁불퉁하게 드러난 모양새가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인다. 그래도, 비록 테이블을 짚고 일어나고 한쪽 다리를 살짝 무겁게 끌긴 했지만 움직이는 데에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가시기 전에 가볍게 요기하실 만한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주인은 그 말만 남기곤 불에 덴 듯 나가 버렸고, 여전히 이불 속에 넋 놓고 앉은 유현진은 아연하게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꿈이라곤 했지만 사실은 꿈 같은 현실인 줄 알고는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로 꿈이었구나. 이렇게 생생하고도 괴이한 꿈을 보았나.
잠시 얼이 나갔던 유현진은 그새 옷을 다 갖춰 입고 마지막으로 재킷을 집어 드는 현태오를 보고서야 얼른 정신을 다잡고 뒤늦게나마 허둥지둥 말했다.
“각하, 각하! 아닙니다, 그러실 게 아닙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그저,”
아무리 꿈이라도 이렇게 흘러가서야 안 될 말이라 막 입을 여는데, 현태오가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유현진은 말문이 막혔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늘하게 유현진을 내려다보는 현태오가, 무서웠다.
저렇게 무서운 눈은 처음 보았다. 온몸이 삽시에 얼어붙었다.
현태오가 다가왔다. 마치 사신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죽을지도 몰라.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유현진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선 현태오가 몸을 숙였다.
커다란 손으로 이불을 끌어 올린 그는 얼어 있는 유현진의 몸에 천천히 이불을 둘러 주었다. 어깨 위로 푹 덮인 이불을 여며 주는 손길이 마치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고 묵직했다.
“사제님.”
“――.”
“본인이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설령 그것이 고의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저지른 짓이 아니라 해도 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나직나직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유현진은 파리한 낯으로 그를 응시했다.
한 뼘 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해 유현진을 지그시 마주 보던 현태오는 어느 순간 웃었다. 입 끝이 아주 약간 올라가는, 희미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삽시에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부옇게 밝아 오는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는 듯하더니 서슴없이 걸음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요깃거리는 됐어, 차를 불러 주게, 술기운이라곤 씻은 듯이 가신 냉담한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탁, 탁, 지팡이 짚는 소리와 나란히 들리는 구두 소리도 함께 멀어진다.
그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유현진은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천천히 떨기 시작했다.
현태오가 웃는 건 처음 보았다.
부드러움이나 따뜻함이라곤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그의 생경한 표정인데, 보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말도 안……. 꿈이겠지……, 그래, 꿈일 거야, 꿈…….”
이불에 꼭꼭 여며져 있는데도 몸속부터 추워 견딜 수 없어 덜덜 떨던 유현진은 창백해진 입술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스르륵 고꾸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