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력 4100년이 얼마 남지 않은 때, 제양력은 1100년을 맞았다.
역사와 함께 이어진 숱한 전쟁과 더불어 그 이름과 형태를 바꾸어 오던 나라들 속에서 제양은 대륙 동부의 작은 나라로 시작되었다.
그 땅이 비옥해 숱한 외침을 받는 와중에도 천 년이 넘게 이어진 제양은 여섯 번의 왕조가 바뀌어 현재의 제 왕조에 이르는 동안 그 덩치를 키워, 이제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부국으로 자리 잡았다.
삼백 년 전 시작된 제 왕조는 제양이 생겨난 이래 가장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는 왕조였는데, 군주는 의회에 모든 것을 위임해 실질적인 정치적 권한과 책임은 의회가 가지고, 군주의 영향력은 극히 적었다. 그러나 제양의 국민들은 나라가 환난을 겪을 때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제 왕실을 사랑하며 존경해, 왕실의 권위가 적다 할 수 없었다.
제양에는 몇몇 손꼽히는 명문가가 있어 제 왕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왕가를 모시고 정사를 돌보며 번영해 왔는데, 정치, 군부, 경제 등 여러 곳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그들 가문 중 군부와 정계에서는 현씨 가문을 빼놓을 수 없었다.
북쪽 국경이 닿아 있는 송갈국과의 수십 년에 이르는 전쟁으로 나라가 위태로웠던 때, 21년 전의 대규모 전란에 크게 활약을 한 가문이 현가였다. 당시 현가 성을 가진 자라면 모두 사활을 걸고 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북부 전선에서 활약해 기어이 위대한 성과를 올린 그들은, 제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현재 총리를 위시해 숱한 인재들을 각계에 두고 있는 현가였지만, 그중에서도 지금 가장 세간의 주목을 모으고 있는 인물은 제양의 총리이자 현가의 가장인 현상원의 아들, 현태오라 할 수 있었다.
총리의 네 아들 중 막내인 그는 하나같이 명석하다는 형제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수재였다. 두뇌만 명철한 것이 아니라 신체적 능력도 탁월해 사관생도 때 이미 그를 넘어설 학우가 없었고, 그 와중에 성격마저 강하고 거침이 없어 가문의 어른들조차 당해 낼 수 없었다.
7년 전 재차 분쟁이 있었던 송갈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대승을 이끌어 낸 현태오는 수도로 개선한 그 해 바로 송갈과의 접경 지역이자 분쟁 지역인 평항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나이가 고작 스물다섯이라 세간이 떠들썩했는데, 관리들이 거칠고 드세기로 유명했던 그곳에서 스물다섯의 애송이가 굳건히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고 그들을 발밑에 두는 데에는 몇 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그곳에서 머무르는 7년 동안 평항의 분쟁은 눈에 띄게 줄고 원래 비옥했던 그 영토는 차차 그 풍요를 늘려 가고 있었는데, 올해 가을이 시작될 무렵 터진 폭탄 테러로 인해 그는 치료와 재활을 위해 반년 예정으로 수도로 돌아왔다.
그동안 임시로 평항 총독직을 맡게 된 제 큰형과 교대해 수도로 귀환한 현태오는 돌아오는 순간부터 여러모로 모든 이의 주목과 관심을 받았는데, 생명에 지장 없이 무사히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현재 그에 대한 세간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과연 그가 언제쯤 결혼을 할 것인가였다.
누구와 결혼할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까마득히 어릴 때부터 이미 정해진 혼약자가 있었던 것이다.
각계의 젊은 인재들 중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그 정혼자는 왕실의 귀한 몸, 국왕의 삼남이녀 중 막내딸인 제상아였다.
왕실 바깥에서 딱히 활동을 하지 않아 세간의 이목에 자주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매년 연초마다 신문의 1면에 실리는 왕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그녀는 뭇 처녀들이 시샘하도록 아름답게 자라났고, 그녀를 가르치는 학자들마저 감탄하도록 재기도 뛰어났다. 하물며 정기적으로 불우한 이들을 살피며 돌보는 인품까지도 더할 나위 없어, 어떠한 면에서든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저만한 남자 곁에는 저만한 여자가 걸맞지.
저 정도 여자 곁에 서려면 저 정도 남자는 되어야지.
누구 하나가 더 넘치고 처질 것 없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훌륭한 한 쌍이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이어진 정혼 끝에, 지방에 가 있던 남자가 임시로나마 수도의 그녀 곁으로 돌아왔으니 이참에 그들이 가정을 이루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평항에서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해도 될 걸 굳이 수도에서 반년이나 머무르는 이유는 혼사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말도 떠돌았다.
그렇게 그 둘은 이제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맺어질 그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그런 때였다.
“호외요~ 호외~!”
새벽부터 날이 흐리더니 기어이 싸락눈이 흩어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 때아닌 황색 종잇장이 매서운 칼바람에 날리며 수도에 흩뿌려졌다.
*
문지기 박상복은 하품을 쩌억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금세라도 그칠 것처럼 찔끔찔끔 내리는 싸락눈은 뜻밖에도 계속 그치지 않고 있었다.
초소 안에는 난로도 있어 춥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흐린 하늘과 눈발을 보면 마음이 추워졌다.
이런 날은 뜨끈한 국물이나 한 사발 해야 하는데.
혹시나 오늘은 뭔가 하사해 주시는 게 없으려나, 박상복은 담장 안을 흘끔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퇴근 시각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기별이 없는 걸 보니 오늘은 별것 없으려나 보다.
그가 지키고 선 정혜궁의 주인인 제상아는 아랫사람에게 관대해 무더운 여름날이면 얼음 화채 따위를, 매서운 겨울날이면 뜨끈한 보양탕을 종종 보내 주곤 했다.
지난주에 내려 주셨던 탕국도 맛있었는데.
박상복은 입맛을 다시다 시계를 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퇴근이다. 가는 길에 설렁탕이나 사 갖고 가야겠다. 감기로 쿨룩거리는 마누라도 한 그릇 사다 주고.
퇴근이 가까워지자 기분이 좋아진 박상복은 초소 밖으로 나왔다. 당장 찬바람이 밀려들었지만 난로에 데워진 몸으로는 충분히 견딜 만했다.
“역시 바깥공기가 좋구나~. ……?”
숨을 크게 들이쉬며 팔을 휘젓던 박상복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깥 담장 쪽을 쳐다보았다.
정혜궁의 바깥 담 너머는 시정 거리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라 해도 그리 시끄러운 길목은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오늘은 기척이 좀 부산스러운 느낌이었다.
박상복은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기분 탓인가.” 하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어째 좀 수선스러운 것 같긴 했지만 딱히 별다른 큰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초소에 있는 자신에게도 연락이 왔을 터였다.
그냥 기분 탓인가 보다. 아마도 조금 전에 정혜궁으로 들어간 손님이 워낙 평소랑 다르게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 그런 기분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손님은 평소에도 종종 찾아오곤 하는 공주님의 학우였다. 늘 쾌활하고 발랄한 그 청년은 장난기가 가득한 태도와는 달리 그래 봬도 고위 관리 시험에 합격한 준재라 지금은 정부 기관에서 그 나이치고 제법 높은 직위로 일한다 들었다. 그런 인재가 어찌 이리 정혜궁에 자주 놀러 올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지만, 여하튼 청년은 늘 밝게 웃는 낯에 성격도 소탈하고 개구져 박상복뿐 아니라 궁에서 일하는 이들 모두 그 청년을 좋게 보았다.
헌데 그 청년이 오늘따라 아주 삭막하게 굳은 얼굴로 찾아오더니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정혜궁 안으로 힁허케 들어가 버렸다. 늘 문지기에게도 살갑게 인사하며 농담 몇 마디 던지곤 하는 청년인데, 대관절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박상복은 고개를 기웃기웃하다가 바지춤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었다. 워낙 따분하기도 하고 세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궁금도 해서 들여다볼 요량이었지만, 그전에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혹시라도 이쪽으로 순찰을 온 상관에게 걸리면 경을 칠 테니까.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다시 초소 안으로 발걸음을 들여놓으며 휴대 전화로 막 시선을 떨구던 차, 하필 바로 그때 저편에서 사박사박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휴대 전화를 집어넣은 박상복은 얼른 자세를 반듯이 했다.
이런 느지막한 시간에 정혜궁을 찾아온다면 외부인은 아니고 궁내 사람이겠거니 했던 예상을 깨고, 이번에 찾아온 사람도 낯익은 외부인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하얀 사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관이었는데, 저 젊은 사제님은 정혜궁 공주님의 절친한 친구로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찾아와 머물다 가곤 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한발 앞서 정혜궁으로 들어간 고위 관리 청년의 친형이기도 했다.
형제 둘 다 정혜궁 공주님과 절친해서 셋이 만나는 때도 종종 있었는데 아마 오늘도 그런 날인가 보다.
헌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제님. 마마를 찾아오셨는지요?”
이분도 표정이 안 좋으시네…….
박상복은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생각했다.
신관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종잇장을 내밀었다. 왕실에서 사사로이 사람을 부를 때 보내는 초대장을 확인하고는, 박상복은 담장 안쪽으로 서 있던 시동을 시켜 손님이 오셨음을 안에 알리라고 보냈다.
맞이하러 나올 사람을 기다리며, 박상복은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신관을 몰래 곁눈질했다.
오늘도 여전히 잘생긴 양반이다. 워낙에 반듯하고 단정하게 생긴 양반이라 저분이 올 때마다 정혜궁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반색을 하며 몰래몰래 훔쳐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질투에 젖은 남자들이 ‘그래 봤자 사제님인데 뭐 어쩌려고?! 정결한 분께 그렇게 불경한 시선을 보내서야 되겠어, 엉?!’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녀들은 들은 척도 않았다.
헌데 그 잘생긴 얼굴이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어둑해 보였다. 아니, 외려 허여멀거니 창백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평소와는 좀 달랐다. 동생과는 달리 평소에도 늘 행동거지가 진중하고 침착한 분이라 어디가 다르냐고 하면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여하튼 달랐다.
평소라면 맞이할 사람이 나올 때까지 한두 마디쯤 나눌 만도 한데 너무도 깊이 생각에 골몰한 눈치라 말을 못 붙이겠다.
그렇다고 눈치 없는 척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하고 들이대기에는, 사실 박상복은 이 사제님이 좀 대하기 껄끄러웠다.
아까 먼저 들어갔던 그 동생도 젊은 나이에 출세 가도에 들어선 관리이지만, 이 사제님도 출세 가도 위에 있는 신관이었다. 누가 하는 말로는 지금 벌써 부신관인데 내년쯤엔 정신관으로 서품받을 예정이란다. 어쩌면 십 년 내에 가장 젊은 나이의 대신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있다고 했다.
박상복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성호를 그었다.
형제 둘 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출세 가도에 있으니 하늘에 계신 부모님도 흐뭇해하시겠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장하기도 하시지.
어찌 되었든, 그렇게 뛰어난 분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제님은 왠지 모르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잘 웃지를 않아서 그런지, 늘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은근히 까칠한 구석도 있어서 그런지, 좀 범접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박상복보다 궁에서 오래 일한 일꾼 하나에게 얘기한 적도 있었다.
‘그 사제님, 사람은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왠지 좀 대하기 어렵지 않아? 그 앞에 서면 괜히 좀 주눅 들기도 하고 말야,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야단맞을 것 같고……. 사제님이라 그런가?’
‘에이, 사제님이라고 다 그렇진 않지. 그냥 그 사제님이 좀 어려운 사람인 거지.’
‘그렇지?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아무렴, 저분이 어떤 분인데. 저분이 저래 봬도 대단한 양반이야. 못 들었어? 평항 총독 각하 앞에서도 눈 하나 까딱 않고 대들었던 거?’
그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났다.
그랬다.
한때 소문이 짜하게 돌았었다.
발톱을 감춘――이라기보다 번득이는 발톱을 늘 까닥까닥거리는 천년 묵은 호랑이 같은 젊은 총독.
송갈과의 전쟁에서 대승한 젊은 영웅이 평항 총독으로 부임해 가기 직전, 그 정혼자인 제상아에게 인사를 할 겸 정혜궁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정혜궁에는 저 신관도 와 있어서 세 명이 한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로는 저 사제님은 저 젊은 총독을 싫어하는지 어쩌다 같은 자리에 있게 되면 무뚝뚝한 얼굴로 있다가 금세 나가 버린다고 하던데, 그때도 그랬었던 모양이다.
딱 인사말만 하고 불퉁하게 침묵하며 나갈 채비를 하는 사제님에게 공주님이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제 곧 먼 길 떠나 한동안은 돌아오지 못하실 분인데, 이분을 위해 기도라도 해 주시겠어요?’
아마도 의례적으로 건넨 별 뜻 없는 말이었겠지만, 사제님은 흘끔 공주님을 보고 이어 젊은 총독을 보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단다.
‘아니요.’
딱 그 말뿐.
정혜궁의 넓은 응접실이 삽시에 썰렁해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겉옷을 걸쳐 입는 사제님을 제외한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시퍼런 발톱을 까닥거리며 느긋하게 앉아 있던 그 천년 묵은 호랑이의 눈매 역시 삽시에 스산해졌다고.
하긴 태어날 때부터 남들 머리 위에서 걸어 다녔던 남자가, 자신의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며 벌벌 떠는 사람들만 봐 왔을 젊은 영웅이 어디서 이런 푸대접을 받아 보았겠는가.
당황한 듯 잠시 눈을 깜박이던 공주는 ‘아아, 맞아, 아직 부신관으로 서품을 받지 않으셨죠. 그러면 신전 밖에서 사사로이 축복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어요.’ 하고 그 대신 변명하듯 말해 주었다. 그런 그녀의 체면을 챙겨 주려 했음인지, 총독도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사제님을 보았다.
‘큰 상관 있겠습니까? 타인을 위한 기도야 보통 사람들도 다 하는 것인데, 굳이 사제님으로서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짧게나마 기도해 주시면 좋겠군요.’
‘싫습니다.’
‘…….’
‘…….’
이번에야말로 응접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시립하고 있던 시녀들은 왠지 모를 오한이 느껴져 옷깃까지 여몄다고 한다.
호랑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별다른 표정이 없는 건 여전했지만, 그대로 앞발을 휘둘러 사냥감의 목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눈길이었다.
웃음 띤 얼굴 그대로 멈춰 있던 공주님이 악문 잇새로 ‘유현진 사제님……?’ 하고 스산하게 이름을 부르자, 공주의 위신을 깎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사제님은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신적에 오르기로 한 이상 저는 일반인과 다릅니다. 이 정도로 사사롭게 규율을 어기는 일이 흔하기는 하다지만, 또한 자애로우신 하나람님께서는 그 또한 넉넉히 감싸 주시겠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한번 아니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아닌 사제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공주님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분위기 더 망치지 말고 얼른 가 보라는 듯.
그러나 겉옷을 걸친 사제님이 까닥 묵례를 하고 막 걸음을 돌리려 했을 때,
‘저는 꼭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호랑이가 말했다.
말투와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 나직한 목소리는 매우 또렷했고, 그 음색은 그 자리에 있던 누가 들어도 이건 협박이로구나, 협박이야, 하고 알아들을 만큼 섬뜩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늘 태연자약한 공주마저 낯을 살짝 굳혔다고 하니.
그러나,
‘안 됩니다. 싫습니다.’
아주 평연한 얼굴로, 이번에는 두 번이나 연거푸 면전에 대고 거절한 사제님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해진 정혜궁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돌려 나가 버렸다고 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따귀 맞은 호랑이는 묵묵히 그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그 뒤로도 별달리 사제님을 해코지하는 일 없이 평항으로 떠나 7년간 돌아오지 않았다지만, 그 일은 시녀들의 입을 타고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여담으로 훗날 공주님이 그 일을 두고 사제님을 쥐 잡듯 잡으며 나무랐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박상복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평항의 젊은 총독이라면 왕족들조차도 예의를 갖추는 인물이다. 박상복도 그를 본 적이 있는데, 흘끗 쳐다보는 눈길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뻔했다. 정말로 천년 묵은 호랑이가 사람 꺼풀을 뒤집어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사제님 참 대단하시네……. 안 그렇게 생겼는데 보통 양반이 아니야.’
박상복이 혀를 내두르자 같이 얘기하던 일꾼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지.’ 하고 맞장구쳤다.
‘헌데 소문으로는 원래부터 평항 총독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하더라고.’
‘그건 또 왜? 싸웠대?’
‘싸우긴, 평항 총독 같은 인물이랑 누가 어떻게 싸워. 계란으로 바위를 치지.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한자리에서 마주쳐도 둘이 거의 말을 안 섞는다네. 서로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예전부터 그랬대.’
‘뭐? 아니 왜?’
‘모르지. 어릴 때 같은 집에서 지냈다니 뭐가 쌓였을 수도 있고. ……그게 또, 정혜궁마마를 사이에 두고 서로 사이가 안 좋다고도 하던데……, 평항 총독은 어릴 때부터 마마의 정혼자이신데, 사제님은 마마랑 워낙 친해서 자주 정혜궁을 드나드시니까 아무래도……. 헌데 이런 얘기는 함부로 떠들었다간 경을 치지, 암.’
일꾼은 도중에 목소리를 바싹 낮추어 박상복의 귓가에 주둥이를 갖다 대고 속살거렸고, 박상복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꼭 다물었다.
말마따나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경을 쳐도 아주 단단히 칠 얘기다.
이미 정혼자가 있으신 공주님인데, 하물며 염문의 상대가 성직자라니.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도 천벌이 내리지 않을까 두려울 판이다.
박상복을 비롯해 제양의 국민들 대부분이 믿는 하나람님은 ‘살아 계신 분’이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와 기적은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신관들만 해도, 사제로 서품을 받고 축성받는 순간부터 그분들은 하나람님의 특별한 은사와 가호를 받는다. 특히나 정식으로 신관이 되면 다들 크건 작건 이능을 얻어, 어떤 분은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어떤 분은 불모지에 풀이 돋아나게 하셨다. 그야말로 하나람님의 살아 계신 증거라 하겠다.
동시에 또 하나, 신관이 되는 순간부터 그분들은 하나람님의 가호를 받는다는 증거를 얻는다고도 하던데…….
그러니, 평생 순결을 지키며 정결해야 하는 신관이 공주님과 부정한 관계일 리는 없었다. 하물며 그녀를 사이에 두고 총독과 다투어 사이가 안 좋다니 터무니없는 헛소리다.
어디에나 삿된 혀를 놀리며 헛소리를 지어내는 간악한 무리들이 있는 법이니, 천벌을 받을지어다.
어찌 되었거나.
저 천하의 맹호 같은 총독 앞에서도 눈 하나 까딱 않던 양반이, 늘 차분하고 꼿꼿한 분이,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눈에 띄게 낯빛이 안 좋은가. 이건 보통 일이 아닐 게 틀림없다.
궁금했다. 궁금해 견딜 수 없는 박상복이었다.
“그으러고 보니이……, 조금 전에 사제님 동생 되시는 관리님도 오셨던데에…….”
수도 없이 신관의 눈치를 살피던 박상복은 하늘을 보고 딴청을 피우면서 기어이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 순간 신관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세진이까지 와 있습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신관은 아주 잠깐 고뇌에 휩싸이는 눈치이더니 얼른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나중에 다시 찾아뵙는 편이 좋을 것 같,”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시동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현진 사제님, 뫼시러 왔습니다. 마마께서 들라 하십니다.”
덜컥. 발목을 붙들린 듯 신관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러다,
“아니, 급한 볼일이 생각이 나 차후 다시 찾아뵙겠노라고 전해 주…….”
라고 서둘러 말하며 그가 급히 걸음을 떼려던 차.
덥석.
번개처럼 다가와 그의 어깨를 꽈악 움켜쥐는 손아귀가 있었다.
“형님, 어딜 가십니까……?”
악문 잇새로 흘러나오는 으스스한 목소리가 어깨 너머로 넘어온 순간, 신관은 삽시에 얼음조각처럼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아무리 급한 볼일이 있으셔도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얼굴은 보고 가셔야지요. 제가 형님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시동의 뒤를 쫓아 나와 신관의 어깨를 붙잡은 청년은, 그린 듯한 웃음을 띤 얼굴 그대로 신관을 질질 끌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
유현진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은 원래 잘 웃는 아이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표정이 풍부했다. 잘 웃고 잘 화내고 잘 떠들고 심지어 울기도 잘 운다.
그런데, 저렇게 얼굴에 그림을 그려 놓은 것처럼 웃는 모양새를 지우지 않고 있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웃는 게 웃는 것도 아니다. 그 증거로, 빙그레 곡선을 그린 입 위에서 번쩍거리고 있는 저 눈을 보아라.
“형님……? 하실 말씀이 있지 않으십니까?”
유현진은 이를 악물고 말하는 동생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진이 네가 여기엔 왜 있어.”
동생의 웃는 입매가 더 올라간다. 관자놀이에 핏대도 섰다.
“왜 있냐고요? 내가 엊그제 고관대작들 술자리에 불려가 술을 하도 퍼먹어서 어제 하루 꼬박 쉬고 오늘 오전까지 반차를 쓰고 오후에 느지막이 출근했거든요. 헌데 출근했더니 웬걸, 세상에 원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소리가 들리기에 당장 형님을 뵈어야겠다 싶어 신전으로 갔더니, 형님이 정혜궁으로 출타하셨다지 뭡니까. 그래서 저도 냉큼 이리로 달려왔지요. 어찌나 눈썹 휘날리게 뛰어왔던지 제가 형님보다 더 일찍 도착했네요, 그려.”
그렇겠지. 유현진은 정혜궁으로 당장 오라는 호출을 받고도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꾸물꾸물 기어 왔으니.
우울하게 시선을 떨군 유현진의 앞에서 동생의 서슬 퍼런 말마디는 이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날 형님이 분명히 날 데리러 오기로 하셨었는데, 눈을 떠 보니 난 여전히 요리점 뒷방에 널브러져 있지 않았겠어요? 어찌 된 일인가 했지요. 왜 형님이 날 안 데려가셨나, 이상타 이상타 하면서도 도저히 술이 안 깨서 일단 아무 생각 안 하고 집으로 돌아가 곯아떨어졌는데……, 설마하니 그사이에 이런 변이 다 터졌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변이라니…….”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우물우물 말을 씹는 유현진을 앞두고, 드디어 동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처얼썩――!
바닥을 호되게 후려갈기는 얇은 종잇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색 신문이 뿌려 댄 고약한 소식지다.
‘왕실 파혼?!’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아래로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모자이크를 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아래로 깨알같이 늘어선 글자들.
왕실과 명문가 사이의 삼십여 년 가까운 정혼이 깨어지게 되었다는 소식에 온갖 억측과 추측이 뒤섞인 글월은, 그 이면에는 어떠한 성직자가 깊이 관여되어 있는 듯하다는 애매모호한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형니임?!”
“……, 이게……, 나라는 법은 없잖아……, 어차피 이름도 뭣도 안 나와 있는데…….”
개미 기어가는 소리 같은 유현진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대청을 울리는 고함 소리로 뒤덮여 버렸다.
“지금 그게 문젭니까?! 어차피 이름도 안 나와요? 안 나오긴?! 여기에 안 나오면 뭘 해?! 현태오 그 작자가 ‘신관 유현진이랑 자서 그 책임을 져야 하니 공주님과 파혼해야겠다’고 왕실에 청원문을 올려서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유현진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머릿속에서 띠잉―하는 소리가 들리며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린 건, 아까부터 잠자코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제상아와 눈이 마주쳐서였다.
“상, 상아야,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애초에 내가 잘못한 건 맞는데,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약간, 아니 큰 오해가,”
유현진이 다급하게 말을 주워섬기자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던 제상아는 천천히, 보란 듯이 팔짱을 꼈다. 어디 한번 떠들어 보시지, 라는 태도로 한 손에 든 부채를 살랑살랑 부친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친구에게―심지어 남자에게― 정혼자를 빼앗긴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유현진은 머리채를 잡혀도 할 말이 없을 천하의 몹쓸 놈이었다.
“아니야. 난 정말, 정말 난 그냥, 농담이나 한마디 던져 본 거였어. 물론 그 농담이 나답지도 않고 신관답지도 못한 말이긴 했지만, 정말 얼결에 그냥 나온 말인데, 나도 왜 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 그래도 설마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이렇게 받아들일 줄 어떻게 알았겠느냔 말야!”
횡설수설하는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면서 제상아는 어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거의 울먹이다시피 그녀를 보던 유현진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날의 자초지종을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본인이 기억하는 대로 대사 하나, 토씨 하나까지 최대한 정확하게 전하려 애쓰며 기나긴 말을 늘어놓은 유현진은, 마지막으로 남자가 그곳에서 나가 버리고 자신은 넋 놓고 쓰러져 버렸다는 이야기까지 마친 뒤 입을 다물었다.
“…….”
“…….”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말하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시간이 1분쯤 흘렀다.
땅 파고 들어갈 기세로 고개를 떨군 유현진은 금세라도 울 것 같았다.
“……무엄하게도 총독 각하를 상대로 주제넘은 농담을 했으니 단단히 혼날 줄 알아라……, 그런 뜻인 줄 알았는데…….”
유현진의 뇌리에 방에서 나가기 직전 현태오가 아주 잠깐 입가에 띠었던 웃음이 떠올랐다.
어쩐지 소름 끼치게 무섭더라니, ‘건방지게 날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제 너는 좆됐다. 어디 두고 봐라’, 이 의미였을 줄이야.
오늘, 장담컨대, 유현진보다 더 혼비백산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아주 그냥 영혼을 탈곡기로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어제 새벽, 그 뒤로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신전의 사택으로 돌아와―동생을 데리러 갔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예 까맣게 잊었다― 하루 종일 이불 덮어쓰고 침대에 웅크린 채 나오지 않았다.
자신도 그 남자의 그 말이 고스란히 진짜인 줄 알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냥 마음에 안 드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한테 따끔하게 혼쭐이나 내 준 거겠지, 그 남자한테 단단히 미운털은 박혔겠지만 무슨 일이야 있으려고, 그런 생각을 곱씹는 사이에 하루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유현진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곤, 그래도 아예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으니 좀 험한 일을 당할 건 각오하고 있어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잠들었는데.
그 바로 다음날인 오늘, 설마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하게 판이 깨질 줄은 몰랐다.
현태오가 정말로 그날 돌아가자마자 왕실에 파혼 청원을 넣었을 줄은, 이 난데없는 청원에 왕실도 발칵 뒤집혀 그 청원이 진심인지 세 번이나 거듭 확인 절차를 밟았을 줄은, 현가에서도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을 줄은, 그 와중에 냄새를 맡은 황색 언론들이 쾌재를 부르며 달려들었을 줄은, 진정코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정말 어떻게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현태오 그 작자는 미쳤대요?! 어떻게 그런 일을 이런 사태로 전개를 시켜 버리냐구요?!”
아연히 유현진을 쳐다보던 동생이 더럭 소리치며 탁자를 내리쳤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아무 데나 두들긴 주먹에 찻잔 받침이 깨어지며 살갗을 그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걸 보고서야 정신을 차리는 동생의 손을 유현진이 얼른 감싸 쥐었다.
“하지 말고 이거 놔요. ……아, 하지 말라고!”
동생이 성질을 부리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유현진은 그 손을 놓지 않았고, 곧 유현진의 손바닥에서 안개처럼 은빛이 일렁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동생의 주먹에 그였던 상처는 씻은 듯 사라졌고, 그 대신 똑같은 상처가 유현진의 손에 나타났다.
“하지 말랬잖아요!”
화를 내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유현진의 손에 둘러 주는 동생의 곁에서, 아까부터 부채만 살랑살랑 부치며 잠자코 있던 제상아가 툭 던지듯 중얼거렸다.
“신력은 멀쩡한 걸 보니 안 잔 건 맞나 보네.”
“안 잤어! 안 잤다고! 정말로 안 잤단 말이야! 손가락 하나 안 건드렸다니까!”
재빨리 약상자를 가져와 다친 곳을 돌봐 주는 시녀에게 손을 맡긴 채 유현진이 억울한 듯 외쳤다. 질세라 동생도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설령 잤다 쳐도 그렇지, 현태오 그 양반은 제정신이래요?! 딴 사람이랑 잠 좀 잤다고 파아호온? 왕실이랑? 삼십 년이 다 돼 가는 정혼을? 그것도, 부정을 저지르고서 파혼을 당하는 거면 또 몰라, 본인이 요청한다고?!”
머리에 총이라도 맞은 거야 뭐야?! 머리를 쥐어뜯으며 포효하는 동생에게 제상아가 대수롭잖은 투로 말했다.
“본인이 말한 의미 그대로일 수도 있지. 남이 자기한테 저지른 잘못에는 가차 없지만, 자기가 남한테 저지른 잘못에도 분명히 책임을 질 것 같은 사람이긴 하잖아. 그러니 신관의 정결을 깨뜨려 버린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만큼의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것도, 그 남자라면 할 법한 일이긴 해.”
그녀의 말대로다.
현태오가 누군가에게 부당한 잘못을 저질러서 그 죗값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허물을 숨기거나 속이려 들 것 같지는 않았다.
유현진은 더더욱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사람은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침울해지는 유현진을 곁눈으로 쳐다보던 제상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말을 그렇게 순순히 믿었다고? 잤는지 안 잤는지를 그 남자 본인이 모른단 말야?”
“어……, 그러게……? 그날 술을 많이 마셔서 의식이 없긴 했는데……, 그 상태로는 누구랑 잠자리를 같이해도 그다음 날 모르나?”
내가 누구랑 자 본 적이 있어야 알지, 정결하게 살아온 사제님은 흘끔 동생을 보았다. 귀신같은 눈매로 형님을 흘겨보고 있던 동생은 시선이 마주치자 더더욱 눈을 번쩍였다.
“왜 날 봐요? 나는 알까 봐?!”
내가 그런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을 것 같아요?! 하고 뻐기듯 고개를 치켜든 동생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기억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런데 그날 현 총독님 진짜 어마어마하게 마시긴 했어요. 내가 진짜 그날 보고, 저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그날 현 총독님 귀성 기념 및 완쾌 기원이라고 사람들이 엄청 많이 왔단 말이에요?! 대청을 꽉 채웠을 정도니까 못해도 서른은 넘게 왔을걸. 그런데, 그날 사람들이 작정을 하고 현 총독님 만취시키려고 술을 들이부었는데, 결국 다 나가떨어질 때까지 그 양반만 멀쩡히 앉아 있었다니까?! 우와, 진짜 사람 아냐, 사람 아냐.”
그래, 그 정도로 마셨으면 어디서 오입질을 하다 사람을 죽였다 해도 기억 못 할걸, 하고 동생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얼른 도로 눈을 부릅뜨고는 유현진을 닦달한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오해라고 말하고 풀었어야지요?! 그 양반이 거기서 나가기 전에 농담이었다고, 그냥 한 말이었다고 얘기를 했어야지?!”
“말하려 했는데…….”
진짜 무서웠다.
원래 앉아만 있어도 위압감이 어마어마한 남자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지른 죄가 있어서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평항 총독 현태오가 눈이라도 부릅뜨면 부처 전체가 숨소리 하나 못 낸다더니, 과장된 말이겠거니 했는데 아니다. 정말로 몸속부터 덜덜 떨렸다.
“어쩔 거야? 현진이 넌 이제 신관도 못 돼. 공식적으로 순결을 잃었으니 신관 자격 상실이야. 파문이라고. 너 이제 어쩔 거니?”
“어쩌긴……,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사과하고 진실을 밝히고 수습해야지.”
유현진의 무거운 대답에 제상아가 한숨을 쉬었다. 동생도 한숨을 쉰다. 이제 보니 그냥 한숨만 쉬는 게 아니라 아주 한심스럽다는 눈길로 쏘아보기까지 한다. 제 가슴을 퍽퍽 두들기는 동생 옆에서 제상아가 유현진을 노려보았다.
“유현진. 정신 차려.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어? 아예 공식적으로 말했다고, 현태오 총독이. 너랑 자서 널 책임져야겠으므로 파혼하겠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농담? 그 사람이 자기 이름까지 걸고, 네 앞에서 고개까지 숙였다면서. 너 현태오 얼굴에 먹칠하고도 사지 멀쩡히 목숨 부지할 자신 있어?”
“먹칠도 아니지. 똥칠이지, 똥칠. 똥도 그냥 똥이 아니라 뒷간에서 삼 년은 푹 썩은…….”
옆에서 동생이 침을 튀겨 가며 거든다.
유현진은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 현태오가. 왜 굳이 이렇게까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왜.
“어찌 되었든 난 파혼당한 여자가 되었고.”
제상아가 던지는 말에 유현진은 아득해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아야, 그게, ……미안. 정말 미안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미안해.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현태오 총독님을 찾아가서 얘기할게.”
“그 한마디로 이렇게 될 줄 꿈에라도 알았다면 그게 귀신이지 사람이겠어? 됐어, 알겠으니까 그건 됐고.”
제상아는 성가시다는 듯 살래살래 부채를 내저으며 유현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죄책감을 덜어 내고 싶어 하는 건 네 자유지만, 잘 생각해.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제 와서 현태오가 속았다는 게 밝혀져도 그의 얼굴에는 먹칠만 더하는 셈이고―외려 지금 세간에서 평가는 더 좋아졌나 봐, 중요한 걸 포기하면서까지 사내답게 책임진다고―, 속았든 어쨌든 그런 추문이 생겨 버렸으니 새삼스럽게 혼약 파기를 무르기도 애매해졌고, 무엇보다,”
제상아의 부채질이 멎었다. 그녀의 고운 검지가 유현진을 딱 가리켰다.
“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야. 장담할 수 있어. 그런 똥물을 뒤집어쓴 현 총독 본인은 설령 손을 쓰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그의 추종자들은 틀림없이 손에 손잡고 뒷골목에서 널 기다릴걸. 그리고 보름 안에 네 시체가 강물 위에 떠오르겠지. 내기해도 좋아.”
“…….”
현태오의 열성적인 추종자 및 부하들을 떠올린 유현진은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워낙에 영웅적인 업적을 자랑하는 현태오다. 각하의 명예를 위해 이 한 몸 감옥에 들어가는 것쯤은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나설 이들이 시청 앞 광장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럼 어떡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애초에 네 탓인데 네가 생각해야지. 그리고 말야, 유현진. 상식적으로, 정혼자를 빼앗아 가 놓고 그 가해자가 피해자한테 그런 걸 묻는다니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 안 드니?”
유현진은 움찔했다. 그 말엔 그저 고개를 푹 숙이며 “미안…….”이라고 사과하는 수밖에.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어 흘끔 눈동자만 들어 쳐다보자 부채 너머로 그녀의 가느스름한 눈매가 보였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눈으로 본바, 저건 어이없고 한심스러워하는 눈매다. 적어도 화난 빛은 아니었다.
“내가 널 부른 건 말야,”
제상아가 부챗살로 테이블을 탁 두드렸다.
“일단은 너한테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다 싶어서.”
제상아의 뜬금없는 대꾸에 유현진은 엉? 하고 눈을 껌벅였다.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보다 의아해하는 줄 알아차렸는지, 제상아는 어깨를 추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진심이야. 너도 알잖아, 나 그 남자랑 결혼하기 싫어했던 거. 설마 이런 식으로 파국이 올 줄은 몰랐지만 나로선 잘된 일이지 뭐니. 게다가 어쩌면 이걸 빌미로 한동안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 김에 비운의 여인인 척 궁에 틀어박혀서 식사 좀 줄이면 아바마마도 날 가엾게 여겨서 몇 달 여행쯤은 흔쾌히 보내 주실지도 모르고, 제상아는 즐거운 듯 중얼거리며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러잖아도 예전부터 멀리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왕의 딸이라는 입장 때문에 합당한 이유 없이는 아무 데도 마음껏 다니지 못하고 살아온 그녀였다.
“여하튼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또 나는 진심으로 그 남자를 너한테 떠넘겨 버리고 난 발 빼고 싶은데, 그런데도 내가 널 부른 또 하나의 이유는 말야, 현진아.”
“……?”
“친구로서 네 앞날이 몹시 염려가 되어서란다.”
제상아는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그 곁에서 화를 내다 내다 지쳤는지 의자에 푹 걸터앉아 있던 동생이 한풀 꺾인 기색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어쩔 거예요, 진짜. 지금쯤은 이미 신전에도 알려졌을 거고, 당연히 형님은 파문이니 이제 신전의 보호를 받지도 못할 테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진실을 공개하면 진짜로 목숨이 위험하고, 또 어찌어찌 목숨은 부지한다 한들 현씨 가문도 적으로 돌릴 거고. 왕실에서도 곱게 안 볼 거고.”
어렴풋하던 암울한 앞날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유현진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쩌냐, 진짜…….”
“어쩌긴, 입 다물어야지. 죽을 일 있어?”
제상아는 유현진에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낯빛이 사뭇 진지하다.
“현진아, 난 정말로 널 사랑하는 친구로서, 네가 그 남자랑 얽히는 거 반대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처럼 겉으로만 까칠하지 속은 맹해 빠진 헛똑똑이가 그 남자를 감당할 것 같지가 않거든. 그래서 난 정말로 이 일이 네 인생 최악의 패착이요 악수라고 생각을 하는데――일이 이 지경이 된 바엔 다른 수 없지. 뭐든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제상아가 혀를 차더니 유현진의 손을 꼭 움켜잡았다.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친구야. 세상이 그렇게 정의롭지도 않고 호락호락하지도 않아. 그 인간이 왜 이 사달을 냈는지 알 수 없어도, 어쨌든 이미 강은 건너 버렸고 돌이킬 수 없어. 못 먹어도 그냥 가는 수밖에 없다고. 알겠어? 현 총독한테 무조건 책임지라고 해. 신관의 길은 포기해. 이렇게 된 이상 넌 그냥 그 남자한테 매달리는 게 그나마 살아남는 길이야. 알았어?”
유현진은 눈을 번쩍이며 다그치는 그녀의 기세에 밀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앉았다. 제상아는 언제 그렇게 무섭게 굴었냐는 듯 다시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말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생각을 바꿔 보자구. 넌 원래 현 총독 좋아했잖아. 그럼 생각하기에 따라선 잘된 일일 수도 있잖겠어?”
“잘되다니…….”
“안 그래도 좋아하던 남잔데 이유야 어쨌든 파혼을 하면서까지 널 책임지겠다니, 너로선 횡재라면 횡재랄 수 있잖아.”
“엉……?”
순간적으로 ‘아 그런가?’ 하고 멍하니 생각하던 유현진은 얼른 고개를 부르르 내저어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래, 난 좋아했어. 좋아했지만, 그 남자는 아니잖아. 그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만 좋아하면 됐지. 책임지겠다고 한 건 그 남자잖아. 게다가 또 어떻게 알아? 그 남자도 평항에 가 있는 동안 남자 맛에 눈을 떴을지도.”
“남자 ㅁ……, 야, 제상아! 너 말 곱게 안 할 거야?!”
정결한 신관 유현진은 낯을 붉히며 더럭 소리를 질렀다. 왕실의 귀한 공주님 제상아는 태연한 얼굴로 “어머, 실수.” 하고 중얼거리더니 되레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러잖고는 남자를 상대로 책임지겠다는 소릴 했겠어? 심지어 농담이랄 수도 없이 파혼까지 해 가면서? 게다가 내가 뭐 틀린 말 했니? 우리 제양이야 동성 간의 혼인이 법률로 금지되어 있지만 송갈은 아니잖아. 그래서 송갈 접경 지역이라 워낙 송갈 사람도 많고 혼혈도 많은 평항에서는 특별 조례로 동성혼을 인정하고 있고 그만큼 남색도 자유로운 곳인데, 거기서 7년을 있다 왔으니 취향이 좀 관대해졌을 수도 있지 뭘?”
또다시 순간적으로 ‘아 그런가?’ 하고 생각하던 유현진은 얼른 재차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말로 이긴 적이 없긴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정신이 혼미하다.
“그야, 내 귀에 여태 아무 소리도 안 들어온 걸 보면 현 총독이 남색 취향은 아닐 것 같고, 널 책임진다 해 봤자 형식적으로만 책임지고 다른 데 가서 딴살림을 차릴지도 모르겠지만―그럴 가능성이 크겠지만―, 지금 당장은 별수 없지. 일단 네가 살고 봐야지.”
제상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내쉬는 한숨에 진지한 빛이 어렸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해가 안 가. 그 남자가 그리 호락한 남자가 아닌데 이런 난데없는 돌발 행동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거든. 그래서 불안하지만……, 어찌 됐든 넌 말려들었고, 네 살길을 찾아야 하게 생겼다고. 알겠어? 그러니까 이렇게 된 이상 꼭, 꼭 책임지라고 해.”
그러면 어쨌든 이미 뱉어 놓은 말도 있으니 죽이지는 못하겠지, 제상아는 유현진의 손을 움켜잡으며 못 박아 말했다. 유현진은 당혹스레 그녀를 마주 보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워낙 정신적인 타격이 크다 보니 이제 판단이 제대로 안 될 지경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너무나 비상식적이다.
그래, 술김에 잤다 치자. 저 남자의 입장상 분명 스캔들감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사태가 커질 수도 있을 거다. 상대가 남자인 데다 심지어 신관이기까지 하니 제아무리 현태오라 해도 타격이 아예 없진 않겠지.
하지만, 차라리 협박이라도 해서 입막음을 한다면 모를까, 대뜸 파혼하고 책임지겠다니.
아주 책임감 있고 정의로운 남자라 할 수도 있겠지만, 세간의 상식으로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남자가 무슨 생각이든, 제상아의 말마따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유현진에게 큰 희생이 따를 성싶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거나 등등.
“그럼 정말로 이대로 입 다물고 모른 척, 책임지라고 하라고……?”
유현진은 아연히 중얼거렸다.
신관 자리는 아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신관이 간절히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어머니가 워낙 신실하셨기에, 또한 자신의 굴곡진 욕망을 어떻게든 다스려 보고자 이 길로 흘러온 것이었으니.
또한 자신이 오래도록 그 남자를 마음에 두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이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방편일 수 있겠지만.
그런데, 그래도 되나. 이대로 정말 ‘책임’지라고 모른 체한다면, 그런 걸 두고 세간에서 일컫기를 사기 결ㅎ…….
“그래요, 그럴 수 있다면야 그래도 좋겠지만, 문제가 하나 있잖아요.”
그때다.
옆에서 팔짱 낀 채로 듣고만 있던 동생이 코웃음을 치며 이죽거렸다.
“어……? 뭐가……?”
유현진이 어벙하게 되묻자 동생이 대번에 눈을 부라렸다.
“잊었어요? 형님은 신관이잖아요! 하나람님의 신성가호를 받은 몸이잖아요! 그러면 나중에 가서 혹시라도 형님이 그 인간이랑 진짜로 잠이라도 자게 되면(여기서 동생은 차마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 싫은 듯 살짝 낯이 창백해졌다) 신성가호가 풀리면서 형님이 동정이란 걸 당장 들키게 될 텐데, 그때 가선 어쩌려구요? 잤다는 게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들키게 되잖아요?!”
아.
맞다.
그랬었다.
유현진은 신관으로 지내며 너무나 당연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곤 말을 잃었다.
신관은 그 자체로 살아 계신 하나람님의 증거가 된다.
서품을 받고 축성을 받는 순간부터 ‘눈에 띄는 가호’를 받게 되는데, 부신관 서품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적에 오르며 가호를 받는다. 저마다 하나씩 크고 작은 이능을 갖게 되어 그들이 하나람님께 모든 것을 바치며 순결하게 살아가는 이라는 증표를 얻는다.
그 증표는 그들이 신관으로서의 자격을 잃으면 사라지고 마는데,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타인과 동침하게 되면 그 순간 아지랑이처럼 옅은 안개가 신관의 몸을 부옇게 뒤덮었다가 사라져, 신관에게만 주어지는 신성한 가호가 깨어졌음을 알려 준다.
이 역시 하나람님이 분명히 살아 계신다는 증거 중 하나로 종종 일컬어지는, 세간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실제로 신관 서품을 받았다가 환속한 이들이 빠짐없이 겪는 일이기도 하다.
“술에 쩔어서 정신도 제대로 없는 채로 해 버려서 기억을 못 한다면 또 몰라도, 제정신인 상태로 동침한다면 못 알아챌 리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거짓말했다는 게 들통날 텐데, 그럼 어쩌려고요?!”
동생이 따박따박 지적하는 말에 유현진의 낯이 창백해졌다.
여러 가지 의미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 안 자면 되잖아.”
잔다는 부분에 대해선 여태 생각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는 유현진이었다.
저 남자랑?
여태 평생 저 남자를 마음에 두고 지내 오면서도 육체적인 어쩌고저쩌고는 생각도 안 해 봤다. 사실은 관계를 어떻게 하는지도, 대충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몰랐다.
이렇게 돌이켜 보니 자신은 정녕 신관으로서 정결하게 살아왔구나.
“책임진다고 했다면서요. 그런데 안 잔다고요?”
“책임진다고 해서 꼭 그런 의미는 아닐 수도 있잖아.”
“책임진다며 원래 정혼자와 파혼까지 했는데요?”
눈을 부릅뜨고 을러대는 동생의 앞에서 유현진은 다시금 머릿속이 띵하고 울렸다.
“물론 그래요, 현태오가 남색을 한다는 말은 못 들어 봤으니 아닐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만약 맞으면요? 남자답게 책임지겠답시고 그쪽 방향으로 마음먹고 달려들면 어떡할 건데요?”
유현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제상아 역시 그 경우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둔 바가 없는 듯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겠죠, 물론 아닐 거예요. 그냥 형님을 책임지는 형태만 갖춰 놓고 육체적인 욕구야 딴 데서 풀겠지만, 하지만! 가능성은 있잖아요, 가능성은! 그게 설령 0.0001%라 하더라도!”
애꿎은 테이블을 퍽퍽 두들기던 동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유현진 앞에서 기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복잡한 상황을 만들었냐고요오?!”
*
결국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유현진은 옷깃에 고개를 푹 파묻은 채 돌담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걸어가고 있노라니 세상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싸락눈은 한층 더 굵어져서 더더욱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니 그래, 내가 다 떠나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구요. 설령 파문을 당하든 남의 애인을 빼앗든 남자랑 뒹굴든 어쨌든 내 형이니까, 마음에는 안 들어도 다 감싸 줄 수 있어. 그리고 뭐, 그래, 힘들던 시절에 그 집안에서 자랐으니 같은 공간에서 지내던 사람 중 누가 다정하게 대해 줬다면 끌릴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 인간은 아니잖아! 어?! 차라리 그 집안 다른 아들들이면 몰라, 왜 하필 현태오냐고요!’
정혜궁에서 함께 걸어 나오며, 조곤조곤 탄식하던 도중에 말하다가 다시 성질이 북받쳤는지 버럭 외치며 머리를 감싸 쥐는 동생을 보고 유현진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다른 아들들이면 괜찮아?’
‘괜찮진 않지만! 그래도 그 형제들 중 그 인간이 제일 이력도 상황도 성질머리도 복잡하잖아요! 아니 진짜, 형, 왜 하필 고르고 골라 현태오예요? 현태오랑 딱히 뭐 좋은 기억으로 남을 만한 일도 없었잖아?’
성질이 나면서도 진짜로 의아하다는 기색으로 묻는 동생에게 유현진은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고르고 고른 적 없어…….’
고를 수 있었더라면 유현진이라고 저 남자를 골랐을 리 없다. 현태오가 결코 마음에 품기에 바람직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을 버릴 수 있었더라면 진즉에 버렸을 것이다.
왜 그렇게 오래도록 애썼는데도 버릴 수 없는지. 차라리 다른 사람이라도 눈에 들어오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안 되는지.
매일같이 신전에서 숱한 사람들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 주면서도 스스로는 그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응원도 받지 못하는 마음을 몰래 끌어안고서 사는 삶을, 나인들 바랐을까.
고개를 숙여 발끝만 보며 걷는 유현진을 보고, 동생은 복잡하고 답답한 낯으로 입만 뻐끔거리다가 결국 입 다물고 말았다.
대궐 초입에서 동생과 헤어지고 홀로 돌담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으며 유현진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현태오가 눈에 들어온 게 언제부터였는지, 왜였는지.
그러는 사이 발길이 익숙한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차량이 줄어들고 인적이 뜸해지는 한산한 길엔 높은 담장을 두른 널찍하고 아름다운 저택들이 띄엄띄엄 이어져 있었다.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그 저택들은 더욱 크고 넓어진다.
낡은 외투를 걸치고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이라곤 유현진 말고는 하나도 없는, 꽁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깔끔하고 고즈넉한 길이다.
몇 년 만에 오는데도 변한 데라곤 없이 여전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것 같다.
십여 년 전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매일같이 걸어 다녔던 길목이다. 이 길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저택들도 드문드문해지면서, 이윽고 산자락 아래 담장이 끝도 없이 이어진 거대한 집이 나온다.
제양에서 손꼽히는 권문세가, 수백 년의 전통과 위용을 자랑하는 현씨 문중의 본가가 거기 있었다.
현재 현씨 집안의 가장은 이 길로 걸어가는 도중에 스쳐 지나게 되는 총리 관저에서 머무르고 있지만, 그들 총리 부처도 주말에는 본가로 돌아와 지냈고 제각기 독립한 아들들과 여타 친척들도 명절이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모여들곤 했다.
유현진이 열두 살이었던 해의 늦가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준 것은 그 상관이었던 준장 현상원, 지금은 제양의 총리인 남자였다.
아버지는 전장에서 현상원을 감싸 그 대신 빗발치는 총탄을 맞고 죽었고, 아버지 덕분에 목숨을 건진 현상원은 그들 세 모자를 자신의 본가로 들여 돌봐 주었다.
유현진이 어머니, 동생과 함께 현가로 들어갔던 날에도 이 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날도 싸락싸락 눈이 내렸다.
부옇게 내리는 싸락눈 아래 그 담장은 얼마나 길었던지, 저택은 얼마나 거대했던지.
육중한 나무 대문 앞에서 세 모자는 기가 질려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마도 경비원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 모자의 머리카락과 옷자락 위로 싸락눈이 쌓이기 시작할 즈음에야 돌아온 경비원이 그들을 보고 다가오려던 차, 그는 산 쪽에서 내려오는 사람의 기척을 깨닫고는 그쪽으로 먼저 돌아섰다.
‘오셨습니까.’
정중히 인사하며 문을 열어 주는 경비원에게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사람은 키가 훌쩍 큰 소년이었다.
산책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편한 차림을 한 소년은 열린 문으로 들어서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현진은 자신들을 쳐다보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화살이 꽂히는 것 같았다.
일직선으로 날아와 똑바로 쳐다보는 시선에 덜미를 붙들린 것처럼 유현진은 얼어붙었다.
유현진보다 네댓 살쯤 많을까, 열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생겼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만큼 인상이 강한 소년이 뚫어질 듯 유현진을 응시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
여태 한 번도 누군가를 무서워하거나 겁내 본 적이 없었던 어린 유현진은 그때 처음으로 정체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를 마주 보는 유현진을, 소년 역시 그대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실제로는 고작해야 몇 초였겠지만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 시간 끝에 소년은 이윽고 어머니와 동생에게까지 눈길을 주었고, 곧 시선을 돌려 경비원에게 무어라 말했다. 세 모자에게 시선을 준 경비원이 뭔가 대답을 하자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비원은 사전에 연락을 받았었는지 그들에게 다가와 ‘유진철 중위님 가족분들 되시죠?’라고 묻고는 안으로 안내해 주었고, 별채로 안내받은 그들은 그날부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것이 유현진이 현태오를 처음 보았던 순간이었다.
아흔아홉 칸짜리 넓은 집이라 같은 담장 안에 살아도 좀체 마주칠 일이 없었던 그 소년은 그 순간부터 유현진의 기억에 뚜렷하게 남았다.
한눈에 시선을 빼앗긴 그 선이 굵고 잘생긴 얼굴도, 꿰뚫는 듯하던 시선도.
그러나 그 선명한 인상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집에 들어간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동생 유세진이 사고를 쳤다.
그 당시 저택에서는 도사견 몇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 철없는 소년은 묶여 있는 도사견을 놀리며 까불거리다 목줄을 끊고 공격한 개에게 죽을 뻔했다.
마침 그때 유현진은 동생이 하도 기척이 없기에―보통 이런 때에는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있기 때문에― 찾으러 나섰다가 사색이 되어 개에게 쫓기는 동생을 발견했다. 워낙 발이 빠른 아이였지만 삽시에 거리가 줄어 금세 물어뜯길 판이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유현진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집채만 한 투견 앞에 뛰어들어 동생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바로 눈앞으로 닥쳐드는 시뻘건 목구멍을 보며 얼어붙은 찰나.
핑――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곧이어 퍽, 섬뜩한 타격음이 울렸다. 시야에 뭔가 번득이는 것 같더니 코앞까지 닥쳐왔던 투견의 아가리가 사라졌다.
‘――.’
털썩, 바닥에 나뒹구는 개의 목에 어른 손가락보다 굵은 쇠 화살이 박혀 있었다. 삽시에 피 웅덩이가 고이며 그 가운데서 개가 꿈틀꿈틀 경련했다.
동생을 등 뒤에 숨긴 채 아연히 개를 내려다보던 유현진은 멀리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제 몸만큼 거대한 활을 들고서 그 소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왔던 첫날 대문 앞에서 보았던.
무심한 시선이 흘끗 유현진을 스친 듯했다. 소년은 유현진 앞을 지나쳐 개를 살폈다. 그 뒤를 따라온 다른 소년이 ‘어때요?’ 하고 묻자, 그는 마음에 안 드는 듯 중얼거렸다.
‘정중앙을 노렸는데 좀 빗나갔어. 이만큼 빗나가면 역시 단번에 죽지는 않네.’
소년은 건조하게 중얼거리며 화살통에서 새 화살을 꺼내어 개의 목 한가운데, 원래 꿰뚫으려 했을 곳에 박아 넣었다.
푸욱, 굵은 쇠 화살이 한 번에 박혔다. 개는 이번에야말로 절명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곧 어디선가 달려온 일꾼이 개의 시체를 끌어냈고, 소식을 듣고 온 어머니가 그들 형제를 다시 별채로 데려갔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얻어터지고서 엉엉 우는 동생에게 약을 발라 주며, 유현진은 계속해서 그 소년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날 보았던 그대로 유난히 까맣던 눈. 죽어 가는 개를 살피던 그 무감정하고 건조한 눈길. 무심한 목소리.
그제야 유현진은 왜 사람들이 넷째 아드님은 무서운 분이니 조심하라고 일러 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도.
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 그가 떠나지 않았다.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의식하며 떠올리는 사이에 어느새 유현진은 눈으로 그를 좇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 강렬하던 감정에 다른 빛깔이 섞이기 시작했고――지금에 이르렀다.
나 혼자서 마음속으로만 좋아하는 거라면 뭐 어떠랴 했다.
혼자만 좋아하면 그만이고 이 마음도 혼자 끌어안고 가면 그만이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고 그의 인생도 흘러가고 자신의 인생도 흘러가면서 아무 접점도 없이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면 마음도 서서히 묻히게 되려니,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
유현진은 육중한 나무 대문이 저만치 보일 때쯤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해가 진 고요한 길목에 가로등만 불을 밝히고 있어서 그런지 어둑어둑한 그늘이 진 대문이 유난히 거대해 보였다.
유현진은 마음이 쪼그라들며 추워져 옷깃을 한 번 더 꼭꼭 여몄다.
동생과 헤어진 뒤 한동안 발걸음이 정처 없이 헤맸다.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거니와, 신전으로 돌아간들 신전도 지금쯤 난리가 났을 터였다. 가자마자 대신관님께 불려갈 게 뻔한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누구를 만난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갈팡질팡하기 때문이다.
제상아는 그냥 눈 딱 감고 모른 척하라고 했다. 그를 속인 채, 그가 하자는 대로 하라고.
동생도 불만과 불안이 가득했지만 딱히 다른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될까? 정말로?
내 마음과 내 양심을 속이고 잠자코 있어도 괜찮을까?
아무리 파문될 게 뻔하다 해도, 성직에 큰 미련은 없다고 해도, 그래도 여태 신관으로서 진실됨을 설파하며 살아왔으면서?
그때 불현듯.
――본인이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현태오가 속삭였던 말이 귓가에 되살아났다.
순간 정신이 찬물을 맞고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아니다. 이래선 안 된다.
그 남자는 잘못한 게 없다. 그렇다면 그는 마땅히 진실을 알아야 했고 그 뒤에 그가 어떻게 하든 유현진은 그 처분을 달게 받아야 했다. 말실수를 한 건 자신이었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만 하므로.
그래서 유현진은 남자를 찾아가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제상아와 동생의 염려와 아우성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지만 애써 지워 버렸다.
자신의 결심이 흐려질까 봐 유현진은 부지런히 현가의 본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궐에서 현가 저택까지는 좀 멀긴 하지만 걸어서 갈 수 있을 거리에 있었다.
그 부지런한 걸음은 현가에 가까워질수록 느려지다가 이제 저 육중한 대문이 눈앞에 드러나자 땅에 딱 붙어 버리고 말았지만, 어쨌든 여기까지는 왔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사죄한 뒤 차라리 감옥에 가둬 달라고 부탁해 볼까. 그편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니까…….
유현진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스산하게 추워져 잔뜩 몸을 움츠렸지만, 얼른 고개를 휘휘 내저어 불안과 두려움을 털어 버리려 안간힘 썼다.
어찌 됐든 진실을 밝혀야 한다.
이미 상황은 탈 없이 깔끔하게 수습하기는 어려울 지경에 이르러 있었지만 그래도 더 늦어 버리기 전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해야 했다.
아직은 어떻게든 돌이킬 수 있을지도 몰라.
비록 현태오에게는 분노를 사겠고 세상은 한동안 시끄럽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감옥에 가거나 목숨마저 잃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직은 돌이킬 수 있을지도.
뚜벅, 뚜벅, 유현진은 천근만근 같은 발을 질질 끌고 겨우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경비 초소 안에 있던 경비원이 그를 알아채고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오셨습, ……아, 사제님.”
삼엄한 태도로 가까이 오던 경비원이 유현진을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경계를 풀고 인사를 건네는 그의 표정이 몹시 복잡미묘한 걸 보니 이미 소식을 들었나 보다. 그야 호외까지 뿌려졌을 지경인데, 알겠지.
유현진은 경비원에게까지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어 무거운 낯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늦은 시각에 실례합니다. 혹시 현태오 총독 각하께서는 돌아오셨는지요?”
“예에, 지금 계시긴 하십니다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초소로 돌아간 경비원은 어딘가로 통화를 하더니 금방 다시 나와 대문을 열어 주며 유현진에게 손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서재에 계신다고 합니다. 지금은 손님이 계셔서 볼일을 보시는 중이라고 하는데, 곧 끝나신답니다. 응접실로 가셔서 기다려 주시면 되실 듯합니다. 혹시 안내해 드릴 사람이 필요하시다면…….”
“아닙니다. 혼자 찾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현진은 서둘러 손을 내젓고는 잰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이 저택의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이미 훤히 알고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워낙 집이 넓고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니 본채까지 다다르는 동안 몇몇 사람들과 스치고야 말았지만, 최대한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거의 달리다시피 응접실에 이르렀다.
저택을 통틀어 응접실만 해도 세 군데나 있었지만 현태오가 있을 응접실이라면 그의 개인 서재에 붙어 있는 방이다. 다행히 현관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아 번개처럼 재빨리 응접실로 간 유현진은 그 앞에서 마지막 관문을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어서 오십시오, 유현진 사제님.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각하께서는 볼일을 보고 계시니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주 정중한 태도로 말하며 손수 응접실의 문을 열어 주는 남자는 현태오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알아 온 그의 부관이자 사촌, 진문성이었다. (소년이었던 현태오가 개를 쏘아 죽였을 때 같이 따라온 그 소년이기도 했다.)
현상원의 처조카인 그는 원래 지방 호족 가문의 아들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큰물에서 자라야 한다며 현가에 맡겨져, 아장거리던 나이 때부터 이 집에서 현가 형제들과 함께 자라나 사촌 형인 현태오를 바로 곁에서 도우며 일한 지 오래되었다.
유현진은 현태오와는 다른 의미로 이 남자도 왠지 모르게 대하기 어려웠다. 현태오처럼 눈에 확 들어오거나 발톱을 드러낸 맹수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한 걸음 뒤에서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수도 적고 태도도 부드러운데, 그럴 이유도 없는데 왠지 약점 하나쯤 잡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처럼, 불편한 마음으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서재 문을 바라보던 유현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주 짤막하게 웃음을 짓는 이런 때면 더욱.
“잘 지내셨습니까? 요전에 뵈었을 때엔 미처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예, 그간 먼 곳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유현진은 진문성이 건네는 인사에 정중히 대답했다.
요전에 뵈었을 때가 언제인지는 금방 떠올랐다. 두어 달 전 그가 7년 만에 평항에서 수도로 돌아온 이후 마주쳤던 자리는 한 번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집의 안주인인 총리 부인, 현태오네 어머니의 생일날이었다.
비록 지금은 따로 산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청소년기의 여러 해를 신세 지며 함께 지냈던 터라 유현진은 그녀의 생일이면 늘 찾아와 간소한 선물을 건네곤 했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그녀가 좋아할 듯한 스카프를 들고 찾아왔을 때, 거기서 마주쳤다. 이 부관과 함께 있는 현태오를.
평항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얼굴을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다. 이른 오후 시각이라 외출했을 줄 알았는데 설마 모친과 사이좋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보는 순간 덜컹 심장이 뛰었다.
얼마 만이더라. 그렇게 오랜만에 보았는데도, 그간 좀 사그라들었으려니 싶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생하게 부풀어 올라 스스로도 당황할 만큼 반가운 기분이 더럭 치솟았다.
‘어머, 현진이 왔구나. 어서 오렴.’
‘……예, 아주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쩜 매년 이렇게 잊지도 않고 와 주니. 친아들도 오늘이 내 생일인 줄 아까 오전에 말해 줄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던데, 남인 네가 더 낫구나. 고맙다, 현진아.’
부인은 곁에 앉은 아들을 흘겨보곤 유현진에게 웃으며 손짓했다. 주름진 손이 유현진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태오 돌아오고 둘이 만난 적이 있던가?’
부인이 돌아보며 묻자 말없이 차만 마시고 있던 현태오가 ‘처음입니다.’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머니와의 티타임에 방해꾼이라도 온 것처럼 삭막한 목소리라, 유현진은 부풀었던 마음이 금세 꺼지고 말았다.
‘그랬어? 현진아, 태오가 얼마 전에 평항에서 큰 사고를 당해서 한동안 수도에서 지내게 되었단다. 바로 엊그제 퇴원해서 집으로 온 참이야.’
앞으로도 한동안은 재활을 해야 하는 상태이거나 말거나 부인은 오랜만에 막내아들을 곁에 두고 기꺼운 기색이었고,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래, 사고 소식을 듣고 나도 까무라쳤지 뭐니. 그동안에도 평항이 위험하다 위험하다 해서 마음 졸였었는데 기어이 이런 변이 벌어졌어. 지금은 이 아이 대신 얘 큰형이 가 있는데 매일같이 걱정돼서 내가 죽을 지경이야.’
현태오 대신 임시로 가 있는 장남을 떠올린 부인은 흐려진 낯으로 한숨을 내쉬다가, 그래도 손님 앞이라는 걸 떠올렸는지 얼른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건물이 통째로 무너질 만큼 큰 사고였는데 그나마 다리를 다치는 걸로 끝났으니 천만다행이야. 그간 신전에 갈 때마다 우리 현진이 붙들고 기도했었는데, 현진이가 같이 기도해 줘서 목숨에 지장 없이 잘 돌아온 것 같아. 듣기로는 우리 현진이가 매일같이 기도해 줬다면서. 고맙다, 현진아.’
유현진은 속으로 움찔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현태오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냥 무심히 쳐다보는 건 줄 아는데도, 깊이 숨겨 놓은 속내라도 들킨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타지에 가 있는 사람을 위한 기도쯤이야 특별할 이유도 없는데 당황한 건, 유현진이 신관으로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사심을 담아 더욱 간절히 기도했던 터라 괜히 제 발이 저린 탓이다.
‘설마요. 아주머님께서 워낙 정성껏 기도하신 덕분이지요. 제가 이분을 위해 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색한 유현진은 ‘아무것도’에 강세를 두어 단호하게 말하며 흘끔 그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설마 다른 낌새라도 챈 건 아니겠지. 유현진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머, 무슨 소리니. 현진이 네가 얼마나,’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주머님.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오후에 볼일이 있거든요.’
‘뭐? 지금 막 와 놓고서?’
유현진은 무어라 입을 여는 부인에게 재빨리 고개 숙여 인사하고 몸을 일으켰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부인의 곁에서, 기분 탓인지 현태오가 언뜻 웃는 것 같았다. 빨리 가 버린다니 좋은가 보다.
사실은 여기에 좀 더 앉아서 함께 있고 싶은데, 굳이 이야기는 나누지 않는다 해도 한자리에 앉아서 얼굴도 훔쳐보고 목소리도 듣고 싶은데, 그랬다간 어느 순간 낯이 헤실헤실 풀어져 버릴지 몰라 두려웠다. 게다가 저 남자는 썩 탐탁해하지 않는 낯인데 눈치도 없이 눌러앉았다고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도 않았다.
부인에게 묵례한 유현진은 현태오에게는 살짝 눈인사만 하고 돌아서 나왔다. 뒤에서 언뜻 ‘저 사제님은 여전하시군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지만 서둘러 문을 닫고 나오느라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그래, 그때, 이 부관도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
현태오의 몇 걸음 뒤에서 창 옆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던 이 남자와는 그때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겸연쩍은 일이다. 어찌 되었든 오랜만에 마주치는 얼굴이었으니 말마디라도 나누었어야 했는데.
“그날은 제가 바삐 나오느라 경황이 없어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유현진이 뒤늦게나마 사과하자 진문성은 선선히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저야말로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역시 거북하다.
생각해 보면 이 남자와도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다. 유현진이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이미 그는 여기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이 남자와도 여러 해를 함께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현태오의 부관을 맡고 있는 지금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거의 늘 현태오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자연히 유현진과는 가까워질 일이 없었다.
세진이는 그래도 이 남자와는 형님 동생 하면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난 이 사람도 왠지 모르게 불편하단 말이야……. 가끔 이렇게 같이 있으면, 뭐랄까, 시선이 어딘지 사람을 낱낱이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 세진이는 집에 잘 들어갔습니까? 그날 세진이도 과하게 마시는 것 같던데요.”
“예? 엊그제……, 아, 예, 아까 만났는데 괜찮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부관님은 어쩐 일로 각하와 함께 안 계시고, 각하 혼자 술자리에 남,”
홀로 숨죽인 채 긴장하고 있던 유현진은 갑작스럽게 진문성이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다가 도중에 굳어 버렸다.
그게 바로 그날이었다.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된 그날.
“아아, 그날 재정총감님이 축하하러 와 주셨다가 만취하셔서, 제가 직접 댁까지 모셔다드리느라 먼저 자리를 비웠었습니다. 유현진 사제님이 오실 줄 알았더라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을 텐데요.”
네가 와서 그 사달이 날 줄 알았더라면 내가 그 자리를 지켜 미리 방비했을 텐데――라고 들리는 건 죄책감 때문일까.
유현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딱히 화를 내는 기색은 아닌 것 같은데 표정이 희박해서 잘 모르겠다.
“이번에……,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면목이…….”
유현진이 더듬거리며 말할 때였다.
갑자기 서재 안에서 쾅!! 하고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결에 단단히 닫혀 있던 서재 문이 끼익하고 반쯤 열리더니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찬영 서기관님, 일을 이렇게 해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대수롭잖은 투로 말하는 느른한 목소리에 흐느끼듯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뒤따랐다. 유난히 후덥지근한 공기에 피비린내가 섞여서 문밖으로 흘러나온다.
“가, 가, 각하, 제, 제가 잘못, 제가 죽을죄를 지었,”
“아……, 죽을 줄 알고 하신 일이군요.”
허덕거리며 울먹이는 목소리 뒤에는 다시 그 아무렇잖고 무덤덤한 목소리. 그 직후,
“끄아아아――!”
처참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현진은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 안락하고 안전한 저택에 이런 끔찍한 소리라니.
삽시에 낯빛이 싹 굳어지는 유현진의 맞은편에서 진문성은 이런……, 하고 혀를 차며 응접실 문 앞에서 걸음을 옮겼다.
“사, 사, 살려 주십, 가, 각하, 제, 제가 한순간 욕심에 눈이 멀어 그만, 다시는 이러지 않겠, 흐으으으으,”
울부짖으며 머리를 바닥에 찧는 듯 쿵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순간이라…….”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뚜걱, 하는 발소리가 그 앞으로 다가선 것 같았다.
“한순간이라기엔 5년은 너무 길지 않습니까? 어디 보자, 5년 동안 서기관님이 횡령한 금액만 오십억에, 부하 공로를 가로챈 건 여기에 적힌 것만 일곱 건이고, 부녀자 겁탈에, 살인 모사에, 저지른 잘못은 헤아릴 수도 없고……, 심지어는 저와 함께 수도로 온 지 고작 두세 달밖에 안 됐는데 그사이에도 남몰래 청탁을 여럿 받으셨습니다, 그려.”
능력도 좋으십니다, 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웃다가, 막 서재 문을 닫으려고 다가서던 진문성을 보고는 “문성아, 골프채 하나 다른 걸로 줘. 이건 잘못 맞아서 휘어 버렸어.” 하고 말했다. 뎅그렁, 하고 뭔가를 내던지는 소리가 난다.
서재 문을 닫으려던 진문성은 유현진 쪽을 흘끔 쳐다보곤 잠깐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잠자코 응접실 반대쪽 끝에 있는 장식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현진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고개만 돌아가지 않아서 몸을 통째로 돌리려니 삐걱삐걱 고장이 난 것 같다.
반쯤 열려 있는 서재 문으로 바닥에 드러눕다시피 널브러져 있는 땅딸막한 몸통이 보였다. 오줌이라도 쌌는지 사타구니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보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옷자락이 눈에 더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반들반들한 구두 끝이 보인다. 구두에 딱 한 방울 튀어 있는 피가 유난히 섬뜩했다.
구두 주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생각해 보십시오, 서기관님. 제 아래에서 일하시는 분이 수도에서 임시로 직무를 맡고 있는 상황에 이래서야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경무청에서 높으신 분이 찾아와 귀띔해 주시는데 제가 참 난감했습니다.”
짐짓 곤란하다는 투로 말하는 그에게 진문성이 골프채 하나를 들고 들어가 건넸다.
“처음에 제 아래에 발탁되셨을 때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상황을 만든다면 안락한 삶은 끝나는 줄 알아야 할 거라고.”
커다란 손이 진문성에게서 골프채를 받아들었다.
“실수는 상황에 따라 용납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의는 그렇지 않지요.”
빠각.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발 늦게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움찔하며 고개를 돌린 유현진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심장 위로 얼음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고의로 얼굴에 먹칠……, 안락한 삶은 끝…….
“제가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인 줄 전쟁 때 이미 잘 아셨을 분이, 고작해야 몇 년 평화로웠다고 그걸 그새 잊으시다니. ――문성아, 김찬영 서기관님 한천 형무소로 보내 드려.”
끌끌 혀를 차던 그가 여상하게 말을 맺었다.
서재에서 나와 막 문을 닫으려 하던 진문성이 다시 손을 멈추었다. 그때, 죽어 가는 목소리로 신음만 흘리고 있던 남자가 그 말을 듣고 기겁을 했다.
“가, 가, 가, 각하, 한천이라니, 부, 부디 용서를, 가, 각하, 재,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 제양은 법치주의 국가인데,”
발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음에도 안간힘을 써 애걸하는 남자에게 담담한 목소리가 피식 웃는 기척이 났다.
“물론 정식으로 재판을 받으실 겁니다. 결과는 제가 말한 대로 될 거고요. ――끝났어. 내보내.”
“예. 그런데 각하, 손님이 기다리십니다.”
서재로 도로 들어가 피투성이로 쓰러진 남자를 부축해 세운 진문성이 조용히 말한다.
골프채를 툭 내던지듯이 내려놓던 남자가 돌아보았다.
서재 문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유현진의 눈이 마주쳤다.
유현진은 남자, 살짝 앞머리카락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어디서 다쳤는지 이마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관자놀이 부근에는 핏자국이 까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왠지 봐서는 안 될 걸 본 것 같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서운 인간인 줄은 알고 있었다. 개가 죽어 나갔던 그날 이후 그런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들었다. 평항 총독이 작정하고 손을 쓰면 사람 죽어 나가는 건 예사라고. 심하게 수군거리는 말로는, 인간 백정이 따로 없다고도 했다.
“……아.”
현태오도 뜻밖이었는지, 뚫어지게 유현진을 보다가 몇 초쯤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한쪽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간다.
“오신 줄 모르고 오래 기다리시게 했군요. 실례했습니다. 들어와서 앉으십시오.”
진문성이 남자를 부축해 나갔다. 남자가 끌려간 자리를 따라 핏자국이 질질 이어졌다. 진문성이 나가자마자 금세 일꾼이 들어와 곳곳에 튀어 있는 핏자국을 말끔히 닦고 나갔다.
저 안으로 정말로 발을 들이기 싫었지만 다른 일꾼이 들어와 서재에 따뜻한 차를 내려놓는 바람에 유현진은 억지로 주춤주춤 서재로 들어가 앉았다.
그동안 현태오도 자신의 손에 묻어 있는 피를 씻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셔츠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유현진의 시선이 그리로 가자 알아차린 모양이다. 옷자락을 내려다본 현태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 이건 제 피 아닙니다.”
그야 압니다. 조금 전에 직접 봤으니까요……라는 말은 꿀꺽 삼켰다. 그의 이마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며, 저 까맣게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은 본인 피가 맞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도 삼켰다.
“그런데 지금 나가신 분은…….”
유현진이 어두운 낯으로 묻자 현태오는 맞은편에 앉으며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평항에서 제 밑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초반부터 조금씩 문제가 있긴 했는데 맡은 일은 잘해서 그냥 두고 보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선을 넘어서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렇게 사적으로 제재하셔도 괜찮습니까?”
유현진의 질문이 우스웠는지 현태오는 약간 웃는 듯 마는 듯 했다.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제가 지금 임시로 쉬고는 있으나 소속지는 여전히 평항으로 되어 있어 괜찮습니다. 그쪽에서는 상황에 따라 사적 제재를 일부 허용하고 있거든요.”
아시겠지만 평항에는 제양 법과 다른 특별 조례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고 태연하게 대꾸한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눈 하나 까딱 않고 골프채를 휘둘렀을 것 같다……고 유현진이 생각한 줄 알았는지, 현태오가 말을 이었다.
“저자는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숱하게 뽑아낸 자입니다. 저는 그런 자에게 굳이 자비로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요. 게다가 무엇보다 전 저를 속이는 자를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저자는 그래도 몇 년 함께 일한 정이 있어 가볍게 처우한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며 유현진은 다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가만있자,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이번에 부정 청탁을 받으며 제 이름을 팔려고 한 모양인데, 마지막 온정으로 그 전에 선을 그어 준 겁니다. 제 이름까지 팔아서 제 낯에 먹칠을 했다면 식솔까지 모조리 함께 한천으로 가야 했을 테니까요.”
오소소소……, 유현진은 등덜미에 소름이 돋아 몸을 움츠렸다.
한천 형무소. 영하 40도의 북녘 끝에 위치한 악명 높은 형무소다. 그 안에서는 법이 통하지 않고, 거기에 들어가면 죽어서 나오는 수밖에 없다고들 했다.
“그, 그 정도로 식솔까지는……,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과하다니요. 제 낯을 깎은 것에 대한 대가로 말입니까?”
“가족들에게는 죄가 없잖습니까.”
“가족이 잘못을 저지르도록 방치한 것도 잘못입니다. 게다가, 가족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면서도 입 다물고 있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 가족은 그랬습니다, 라고 현태오가 말했고 이번에야말로 유현진은 말을 잃었다.
차가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 없어 찻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내려놓는 손길이 떨리는 걸 들킬까 두려웠다.
눈앞이 깜깜했다.
내 동생. 우리 세진이.
나 하나 감옥 가거나―그래도 한천으로 가고 싶진 않았다―, 죽거나 하는 것까지는 각오했다 치더라도, 죄 없는 내 동생은.
“그래도……, 가족은……, 용서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유현진이 웅얼웅얼 중얼거리자 현태오가 이상한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길로 유현진을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건 제 철칙입니다. 헌데, 사제님이라 자애로우신 줄은 알겠지만 오늘은 유현진 사제님답지 않게 신경을 많이 쓰시는군요. 유현진 사제님이 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 정도로 말씀을 많이 하신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요. 뭔가 유난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유현진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심장이 꼬집힌 것처럼 뜨끔거렸다.
그렇긴 하다.
생각해 보면 이 남자와 독대해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이만큼이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처음이다.
여태 홀로 남몰래 공상하며 꿈꿔 왔던 ‘현태오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는 결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건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죄 없는 자들이 안됐잖습니까.”
“사제님께야 세상 모든 이가 가엾고 안됐을 테지만, 그 말씀은 못 들어드립니다. 저는 제 낯을 구긴 이들에게는 그 대가를 철저하게 받아 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현태오는 단호했다. 두말할 여지 없이 잘라 버린다. 더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고 외려 의심만 살 것 같았다.
어……, 어쩌지……, 세진아…….
등덜미가 흥건히 젖어 가는 유현진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태오는 고양이 쥐 생각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조금 너그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나 사제님께서 크게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여태 살아오는 동안 제게 먹칠을 한 이들은 거의 없었거든요. 앞으로도 딱히 그렇게 있을 것 같지는 않고요.”
“…….”
유현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목이 바싹바싹 말라서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찻잔을 집어 들어 목을 축일 따름이었다. 그런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
몸보다는 정신이 안 괜찮긴 한데, 하고 멍하니 생각하며 유현진은 삽시에 퀭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늘 무표정하고 냉담하던 현태오가 어쩐 일인지 아주 잠깐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평소처럼 서늘한 저 태도를 보면 그럴 리는 없는데, 마치 약간 계면쩍기라도 한 것처럼 눈길을 돌렸다가 말을 꺼냈다.
“그날 저도 놀라고 경황이 없어서 그대로 혼자 돌아와 버렸습니다. 뒤늦게 생각나서 다시 모시러 갔는데, 그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더군요.”
“예……?”
“처음이셨던 데다 또 강제적인 관계였으니 몸에 무리가 많이 가셨을 텐데, 그런 분을 그냥 두고 왔다니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사제님께 면목 없는 짓을 여러 번 저지르는군요. 죄송합니다.”
현태오가 테이블에 손을 짚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다시금 뚝 떨어졌다.
이러다 한천 형무소가 아니라 한천 형무소 할애비로 가겠다. 있지도 않은 아들손자며느리 다 모여서…….
“아니, 아닙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안 이러셔도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유현진이 당혹스레 말하자 현태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때, 이마에 감겨 있던 붕대에서 고정핀이 떨어졌다. 데구르르 구른 핀이 유현진의 찻잔 옆에 멈춘다.
“실례했습니다.”
핀을 주워 든 현태오는 굳이 다시 붕대를 고정하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말라붙은 핏자국 때문에 붕대는 끄트머리만 살짝 풀리려다 말았다.
“이마는 어쩌다가…….”
그러잖아도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참이라 유현진이 묻자 현태오는 대수롭잖게 말했다.
“아, 간밤에 아버지가 오셔서 재떨이를 던지셔서요.”
“……. ……무슨 일로…….”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지만,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유현진은 스산한 기분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공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확인하고 말아야만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들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아버지가 화내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현태오의 대꾸는 여전히 대수롭잖았고, 유현진은 그 이상은 물어볼 수 없었다.
유현진은 주먹을 움켜쥔 채 침묵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까부터 혀끝에서 말만 맴돌고 있었다.
분명히 진실을 밝히고 죗값을 치르려고 이곳에 온 거였는데.
한천 형무소…… 식솔까지 모조리……
발밑이 아득히 꺼지는 듯하며 식은땀만 흘렀다.
하나람님. 하나람님.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유현진 사제님이 와 주시다니 놀랐습니다. 저를 불편해하시니 먼저 오시지는 않으실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일단 우선 해결해야 할 일들을 해결한 뒤에 제가 찾아뵈려 했었습니다.”
그때 현태오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느른하게 말했다.
유현진은 멈칫하며 시선을 들었다.
현태오가 유현진을 빤히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 유현진은 무심코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역시 잘생겼구나.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조금만 더 쳐다보고 싶었지만 이러다 넋 놓고 볼 것 같아 유현진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시야 끝에서 얼핏 그의 입매가 비틀리는 것 같았지만, 다시 잠깐 쳐다보았을 때엔 여전히 그는 무표정할 뿐이었다.
“어찌 됐든 기왕 와 주셨으니, 오신 김에 먼저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소 곤란해하시긴 했으나 결국은 납득해 주셨고요. (여기서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피 묻은 붕대로 눈길을 주었다가 도로 떨구었다) 왕실에도 파혼의 뜻을 전달했고, 정식 절차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저, 각하……!”
유현진이 듣다가 황망하게 외쳤다.
“예, 말씀하십시오.”
현태오는 선선히 칼자루를 양보하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현태오는 지루해하거나 짜증스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기다렸고 유현진은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말을 해야 한다.
실수였다고. 얼결에 잘못 나온 말이라고. 우리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내가 잘못했노라고.
말을 해야 한다. 해야 하는데…….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유현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말았고 현태오는 잠시 유현진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예, 말씀드린 절차가 끝난 뒤에 사제님이 이 집에 들어오시면 되는데, 내실을 새로 마련해야 할 텐데 이참에 별채를 아예 크게 개축하면 더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이 좀 걸려도 그렇게 할까 합니다. 혹시 원하는 구조가 따로 있으십니까?”
“예?”
“사제님이 이 집에 들어와 머무르실 내실 말입니다.”
“제가 이 집에 왜 머무르지요?”
“왜냐니,”
현태오야말로 왜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제가 향후 사제님을 책임지게 될 테니까요.”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다시 심장이 철렁 떨어지고 만 유현진은 이번에야말로 고개를 들었다.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되지 않나.
“사실 그날, 그, 엊그제 밤에 만취하셨던 때,”
유현진이 핏기를 잃은 입술을 열어 말을 꺼낸, 그때였다.
정원 쪽으로 열어둔 창밖 어딘가에서 별안간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마도 조금 전 끌려 나간 그 남자인 듯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금세 사라져 바깥은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창밖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싸락눈만 내리고 있을 뿐.
현태오의 시선이 잠깐 창밖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왔다.
“실례했습니다. 조용히 해 두라고 미리 말해 뒀어야 했는데……. 아마 더는 시끄럽지 않을 겁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엊그제 밤에 제가 만취했을 때요?”
“……그때…….”
꺼내려던 진실이 도로 혀끝에서 기어들어 가 목구멍을 턱하니 막았다. 그 안에서만 빙빙 돌던 말은 조금씩 조금씩 도로 가슴속으로 기어들어 간다.
세진아……!
“……그, 불의의 사고가 있기는 하였으나, 저는, 각하께 책임을 물으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비록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각하께서는 제게 신경 쓰지 마시고 원래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고장 난 축음기를 돌리는 것처럼 삐걱삐걱 말하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까맣게 가라앉은 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유현진이 마른침을 삼키던 때, 현태오가 웃었다. 눈매만 아주 약간 가늘어지는 서늘한 웃음이다.
“우리 현가는 말입니다. 예로부터 매우 신실한 집안이었습니다. 현가의 시조가 대신관이었다고 하지요.”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유현진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총리 부처는 매주 신전에 찾아와 기도를 드리고 갔다. 아무리 바쁜 상황이라도 빼먹는 법이 없었다. 뿐 아니라 유현진이 이 집에 살았던 때에도 현태오의 부모는 늘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었다.
“그래서, 대를 이어 내려오는 동안 현가는 당대 가장이 하나람님 앞에 신실하면 그 대가 번성하고, 불경하면 그 대가 쇠퇴하였다고 합니다. 우연이랄 수도 있으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삼백여 년의 과거를 짚어 보면 늘 그랬습니다. 가장과 안주인이 신실하면 번성하고, 삿되게 굴면 망조가 들었지요. 그래서 우리 가문은 늘 가장이 단정하게 지내고자 했고 그릇된 일을 하지 않고자 했습니다.”
현태오가 새로 붕대를 갈려는지 이마의 붕대를 풀었다. 관자놀이 위로 흉측하게 푹 패어 찢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왕실과의 오래된 약속을 깨어 버린 셈인 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관인 분께 죄를 범했으니. 아버지 성격이라면 재떨이가 아니라 책상을 던지셔야 했는데 이쯤에서 그친 건 그나마 제가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제님을 책임지겠다고 해서입니다. 하나람님 앞에 죄는 지었으나 그 보속을 하기 때문이지요.”
유현진의 얼굴이 푸르스름해졌다 다시 하얗게 질렸다. 무어라 말하려 입이 뻐끔거렸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현태오는 그런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
“굳이 그런 연유가 없다 하더라도, 사제님께서 여태 신관으로서 귀하게 지켜 온 결백을 제가 깨뜨렸는데, 사람 된 도리로 제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러길 원치 않는데도요……?”
유현진이 가까스로 말을 꺼내자 현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유현진을 바라보며 침묵하던 그가 어렴풋이 웃는 듯했다.
“사제님께서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정혼은 깨어졌고 무를 수 없습니다. 정혼이 깨진 이유는 제 잘못 때문이고 그 잘못의 결과로 정결했던 사제님도 파문을 당하게 되었지요. 여기서 제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설령 사제님이 원치 않아서 그랬다 하더라도―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 것 같습니까?”
유현진은 낯이 창백해지며 말을 잃었다.
그의 뇌리에 불현듯 아까 자신을 바라보던 제상아와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끝나 버린 인생을 보는 듯하던 그 시선들. 답답하고 난감해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답을 주지 못하던 그 영민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그 태도를 유현진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세상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는 길은 진문성이 배웅해 주었다.
본채에서 대문까지 이르는 기나긴 정원 길을, 유현진은 걸음걸음 땅속으로 푹푹 파묻히듯이 걸었다.
“정말로 안 모셔다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예, 안 그러셔도 됩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좀 걷고 싶거든요.”
진문성이 염려스레 묻는 말에 유현진은 몇 번째인지 모를 단호한 거절을 거듭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마음으로는 얼른 대문에 다다라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십니까. 그래도 눈이 그쳐서 다행이군요. 쌓이지도 않아서 돌아가시는 길이 불편하시지는 않겠습니다.”
싸락눈이 그치고 까맣게 드러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진문성이 말했다. 무심결에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본 유현진은 그제야 찬 공기가 머리에 닿아 숨을 돌렸다.
언뜻 진문성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의례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이 제법 인간적이라 유현진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다.
이 남자와도 딱히 오래 말을 섞거나 한 적은 없지만, 현태오의 부관이라 불편하긴 해도 불쾌한 느낌을 주는 남자는 아니었다.
“오늘은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모로 힘드셨을 텐데 여기까지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문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을 때 진문성이 조용히 말했다.
별것 아닌 말에도 까닭 없이 위로받은 느낌이 드는 건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유현진은 마음이 울컥 치밀어 어깨를 움츠렸다.
“진 부관님은 총독 각하 곁에서 오래 지내셨지요.”
유현진의 말에 진문성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말도 배우기 전부터 함께 자랐으니까요.”
“대하기가 쉽지 않은 분이던데, 오래도록 곁에서 잘 지내셨네요.”
진문성은 웃었다.
“엄격하고 무서운 데가 있지만 이해심도 넓으신 분입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요령이 생기면 함께 지내기에 크게 어렵진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조금 더 알게 되면 분명히 뜻밖이라고 여기실 부분도 있을 겁니다. 겉보기와는 다른 부분도 있는 분이거든요.”
“그렇군요…….”
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럴까. 그래, 조금씩 더 알다 보면 나아질지도 모르지. 알고 보면 그렇게까지 무섭고 무정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차근히 살피다 보면 다른 해법이 보일 수도 있지.
진문성의 상냥한 말을 들으며 유현진은 마음에 약간의 희망을 품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쯤은 가뿐해진 걸음으로 대문에 다다랐을 때 진문성이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예, 생각보다 융통성도 있고 합리적인 분이라 많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잘 지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단 하나, 그분을 속이지만 않으면 됩니다.”
경비원이 열어 준 대문으로 막 나서던 유현진은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돌아보는 유현진의 눈앞에서 진문성은 여상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그건 정말로 싫어하시거든요. 아주,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그것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 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울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유현진은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모처럼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라는 다정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철그렁……, 어디선가 희망의 문이 닫히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유현진은 가로등이 곱게 내리비치는 인적 없는 밤길을 흐느적흐느적 내려가다가 현가 저택이 안 보일 만한 거리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가로등을 붙들고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얻고자 한 건 얻지 못하고 되레 가슴에 쐐기만 잔뜩 박히고 돌아가는 유현진이었다.
*
진문성이 유현진을 대문까지 배웅하고 서재로 돌아왔을 때 현태오는 책상에 두껍게 쌓인 온갖 책자들과 서류 더미를 넘기고 있었다.
평항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좀 넘은 현재, 치료 및 재활의 명목으로 쉬고 있는 현태오는 쉰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바빴다.
평항에서 그토록 대규모의 사건이 터진 것은 오랜만이다.
원래 평항은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분쟁지로, 예부터 제양과 송갈이 서로 빼앗고 뺏기던 땅이었다. 제양과 송갈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고 인구 구성도 거의 반반이다. 대륙의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데다 대양으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일 뿐 아니라 땅 자체도 비옥해, 늘 평항을 두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곳에 현태오가 부임하면서 정세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되었다. 그 사이 잠시 현태오를 다른 곳으로 부임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나 지금 평항을 송갈로부터 지키면서 상황을 안정세로 유지할 만한 인물이 달리 없어 그가 7년이나 그곳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동안에도 사소한 테러 시도나 분쟁이 종종 있었지만, 이번은 컸다. 청사 하나가 통으로 무너지고 사상자도 숱하게 나왔다.
당연히 그 뒤로 처리해야 할 일들은 쏟아졌고, 지금 수도로 돌아와 있다고 해서 현태오가 손 놓고 쉴 도리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손 놓고 쉴 리도 없었다.
이미 사건의 범인들은 잡히고―평항 내에서 활동하는 반反제양 단체의 극렬분자들로, 그중 젊은이들 몇몇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라는 것이 표면적인 결론이었다― 대략적인 조사는 마무리되었다 하나…….
“과연, 이제 좀 뭐가 잡히는군.”
현태오가 느른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심한 듯하나 그 속에 만족스러운 빛이 감도는 걸 그의 곁에서 수십 년 있었던 진문성은 알 수 있었다.
평항에 있는 내도록 온갖 방도로 살폈으나 도통 꼬리가 잡히지 않았던 놈들이다. 수십 년이 넘도록 암약하며 제 이득을 취해 왔던 무리들이니 쉽게 잡아낼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이번에도 이만큼 큰 규모의 희생을 무릅쓰지 않았더라면, 놈들은 반제양 단체의 어린 것들 몇을 희생양으로 내밀고는 아무런 증거도 자취도 없이 씻은 듯 흔적을 지워 버렸을 터였다.
“죽을 뻔했던 보람은 있었네요.”
진문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난 이 한 살 위의 사촌에게 웃으며 말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상관이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친형제보다 허물없는 사촌 형제인 그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마리를 딱 하나만이라도 잡으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그 하나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현태오는 제 목숨까지 걸고 모험을 했고, 그런 만큼의 보람이 있었다.
“다리를 내준 값은 비싸게 돌려받아야지.”
현태오가 중얼거렸다. 수술은 성공리에 마쳤고 재활도 순조롭게 되어 가고 있지만 이제 그의 오른쪽 다리는 예전만큼 움직일 수는 없을 터였다. 비싼 값을 치렀다.
그러나 그쯤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듯 현태오는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자료들을 넘기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제대로 보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속도로 서슴없이 종잇장을 넘기던 그가 뒤늦게 생각난 듯 불쑥 물었다.
“그놈은?”
“문 앞까지만 바래다 드리고 왔습니다. 차를 내드리겠다고 했는데 굳이 걸어가겠다더군요.”
아주 짧은 찰나 그가 뭘 묻는지 되새겨 본 진문성이 대답하자 현태오는 듣는 듯 마는 듯 음,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건성으로 대꾸해도 모든 걸 다 기억하는 남자다. 진문성은 굳이 더 말을 보태지 않고 싸늘한 밤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창문을 닫았다.
“하나람님이란 게 존재를 하기는 하는 모양이야.”
의자에 앉은 진문성이 수도의 근래 정세를 적어 놓은 보고서를 막 넘기려 하던 때, 현태오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불쑥 말했다. 진문성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그렇게 불경한 소리를 하다가 다음 대에 현가의 가세가 기울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다음 대 가장은 큰형님이지 내가 아냐.”
현태오는 코웃음 쳤다. 그러나 다음 대 가장이 본인이라 하더라도 저런 발언쯤은 무람없이 했을 인간이다.
“현가가 꼭 장자 계승인 것도 아니고, 모르죠, 그건.”
“왕실과 혼담까지 파기된 마당에 굳이 내가 현가를 이을 이유는 더더욱 없어졌지. 게다가 일 때려치울 날도 머잖았는데.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몇 년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쉴 거다.”
과연 주위에서 그를 쉬게 내버려 둘지 미심쩍었지만 진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마무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그간 분쟁을 유발하며 이득을 취해 온 양국의 군수업체들도, 그들의 뒤에서 상황을 이용하며 단물을 빨아먹었던 자들도 털릴 날이 가까워졌다.
전장을 누비던 때보다 더 심신을 소모했던 날들도 슬슬 끝이 보인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한동안 시끄러울 것 같던데.”
진문성은 쓸데없는 물음인 줄 알면서도 말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현태오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무시했다. 얘기할 필요도 없는 일에 대해서는 으레 그러듯.
현태오가 아무런 예고도 조짐도 없이 폭탄을 내던지듯 왕실에 혼약 파기를 요청한 이래, 현재 온 사방이 다 시끄러웠다. 지금도 무음으로 해 둔 진문성의 전화에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쌓이고 있었다.
허나 정작 그 장본인인 현태오는 어디 파리라도 날아다니냐는 듯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긴, 왕실에서는 표면적으로 난색을 표하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기꺼워할 상황이었다. 총리가 찾아와 재떨이를 던지면서 화를 낸 것도 파혼 자체 때문이 아니다. 기실 그들의 파혼은 예견되어 있던 일이었으므로.
“굳이 그렇게 시끄럽게 터뜨릴 필요는 없으셨잖아요. 온 세상이 떠들썩한데, 전통 있는 명문가가 한동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생겼으니 이모부님이 화내실 만도 하지요.”
“이런 집은 원래 밥숟가락 하나만 부러져도 뒷말을 듣는 법이야. 세도를 부리려면 그런 것도 감수해야지.”
현태오는 제 집안일인데도 무심히 대꾸할 뿐이었다. 하긴 그가 나중에 가서 골치 아파질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진문성은 쓸모도 없는 이야기나 늘어놓는 건 관두고 그전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람님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웬일로 갑자기 하나람님의 존재를 믿게 되셨어요?”
“아. 유현진이 하나람님의 특별한 가호를 받는 건 분명해 보여서.”
현태오의 느른한 대꾸에 진문성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 허공으로 시선을 주는 진문성의 얼굴에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빛이 떠올랐지만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어째서입니까?”라고만 물었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고 모두 다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라고 하면 두말없이 한천으로 보내려 했거든.”
현태오는 그제야 서류를 내려놓으며 진문성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그놈이 그렇게 말하려는 눈치일 때마다 타이밍 좋게 방해를 받더라고.”
“그렇게 유도하신 건 아니고요?”
진문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몇 년간 두고만 보고 있던 김찬영이를 굳이 오늘 이곳까지 불러들여서 손보신 것부터가 그렇잖습니까.”
“설마.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까지 미리 딱 타이밍을 맞출 순 없지. 대충 이 시간쯤 되려나 했을 뿐인데 정말로 그때를 딱 맞춰 온 유현진이가 운이 좋은 거지.”
덕분에 한천에 안 갔잖아, 하고 말한 현태오는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으며 발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현태오는 평소대로 서늘한 기색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늘 숨죽이고 조심조심하며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 상태를 가늠할 수 있냐며 진문성에게 묻곤 했지만, 진문성도 딱히 뭐라고 알려 줄 수는 없었다. 워낙 오래 옆에 있다 보니 느낌이 전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굳이 몇 가지 실마리를 말하자면, 평소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가 지금처럼 불필요한 잡담을 던지는 건 제법 기분이 괜찮다는 뜻이다.
“어때. 신관은 파문을 당해도 계속 하나람님의 가호를 받을 것 같아?”
“글쎄요, 유현진 사제님 말씀이라면 파문을 당하긴 하겠지만…….”
진문성은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그의 파문 여부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정말로 그분과 주무셨습니까?”
진문성의 떨떠름한 물음에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허공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현태오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잤다더군.”
안 잤군.
진문성은 일단 자신의 상관이 천벌 받을 짓은 안 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술을 퍼먹은들 술김에 실수를 할 위인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고도 그걸 모를 만큼 천진한 인물도 아니었다. 놀라운 것은 현태오가 그 헛소리를 믿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유현진의 머릿속이다.
“그러면 뭐……, 신성가호를 잃을 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니, 파문은 당해도 하나람님의 가호는 계속 받겠지요. 가엾어진 어린 양이니 외려 더 보살펴 주시지 않을까요?”
“가엾어지다니 듣기 거북하군. 내가 책임을 안 지겠다는 것도 아니고.”
“…….”
진문성은 현명한 젊은이였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고 목구멍까지 나온 질문도 도로 삼켰다.
부친이 찾아와 재떨이를 던지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냐고 펄펄 뛰어도, 태연한 얼굴로 ‘잤다는데 어쩌겠습니까. 잘못했으면 책임을 져야지요.’라고만 대꾸한 현태오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물어 봤자 소용없다.
오늘의 일은 이걸로 마치려는지 현태오는 아예 서류를 덮어 버리곤 창가로 갔다.
창밖에는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 조각이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있었다. 싸락눈이 다시 내리는 것만 같다.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 더는 말하지 않는 그를 보고 진문성도 서류를 정리했다.
“저녁은 뭘 드시겠습니까?”
“글쎄……, 스테이크가 좋겠군. 최대한 덜 익혀서.”
오늘은 기분이 좋은 게 분명한 모양이다.
진문성은 싸락눈이 내리는 양 쌓인 눈이 흩날리는 창밖을 보며 식당으로 전화를 하다가, 불현듯 오래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이미 십오륙여 년이나 지난 일이다.
별다른 사건이 있었던 날도 아니다. 그럼에도 진문성이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원래 진문성의 기억력이 좋기도 하거니와 그날은 ‘참 희한하네.’ 하고 여러 번 생각했던 탓이다.
현태오는 어렸을 때부터 기분이 좋은 날이면 설익은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 했다. 시뻘건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사납게 물어뜯으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싸락눈이 내렸다.
진문성이 기억하는 한 그날 원래 현태오는 기분이 안 좋았다. 그 이유까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모부님―현태오의 아버지―에게 뭔가 꾸중을 들었었던 것 같다.
심사가 사나워져 뒷산이나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나갔던 소년이 두어 시간 뒤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상할 만큼 기분이 나아져 있었는데, 그게 일단 희한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평소 기분의 기복이 거의 없어 별달리 즐거워하는 일도 언짢아하는 일도 드문 현태오였지만, 한번 기분이 나빠지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은 눈초리가 쭉 올라갈 정도로 성을 내며 나갔는데 고작 두어 시간 산책하고 돌아왔을 때엔 기분이 개어 있어서 웬일인가 싶었다.
이모님도―현태오의 어머니도― 그게 신기했는지 산책하다 재밌는 일이라도 있었냐고 물었지만 현태오는 고개를 저었고, 그날 점심으로는 덜 익힌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요구했다. 이모님은 의아해하면서도, 어쨌든 심사가 사나울 때면 감당하기 힘든 아들이 이렇게 금세 기분이 풀려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얼른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생고기에 가까울 정도로 시뻘건 고깃덩이를 거침없이 물어뜯던 현태오는 접시가 거의 비어 갈 즈음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별채 쪽에 누가 새로 들어오는 것 같던데요. 어떤 아주머니가 아이 둘을 데리고 오나 보던데.’
‘응? ……아, 그래, 유진철 씨네 유가족이 오늘 들어오기로 했었지.’
잠깐 눈을 깜박이던 이모님이 이내 기억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는 옆에서,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던 진문성은 다시 한번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현가는 워낙 큰 집이고 일하는 사람도 많아 사람이 들고나며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현태오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이라도 주는 적이 없었다. 하물며 이렇게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들 중 누군가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유진철이라면, 아버지를 구하다 돌아가셨다는 그 중위라는 분이요?’
‘그래. 남은 가족들이 의지할 데가 없다고 해서 네 아버지가 여기로 들어오시라고 했거든. 이제부터 한동안 함께 지내게 될 거야.’
현태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고기를 씹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음……, 그럼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이네요. 잘 대해 줘야겠네.’
그렇게 말한 현태오는 마지막 고깃조각을 입에 넣고는 기분 좋게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진문성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깜짝 놀랄 만큼 현태오답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진문성이 귀를 의심하며 그를 쳐다보거나 말거나 식사를 마친 현태오는 삽상하게 식당에서 나가 버렸고, 진문성은 오늘은 정말로 희한한 날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숟가락을 마저 놀렸다.
그때 문득 현태오의 접시가 눈에 들어왔는데, 벌건 육즙만 남아 있는 빈 접시가 왠지 맹수가 먹잇감을 싹 먹어 치운 뒤 핏자국만 남긴 것처럼 보여, 괜히 으스스해졌다.
“…….”
“왜 그래?”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문성은 뒤에서 현태오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서 물러난 현태오는 식당으로 가려는 듯 걸음을 옮기던 참이었다.
“아니요. 제 스테이크가 얼마나 잘 구워져서 나올지 생각하던 중입니다.”
“스테이크는 덜 익혀 먹는 게 제맛이지. 최대한 날것에 가까운――그래, 이 고기가 아직 제가 요리된 줄도 모르고 있을 것 같을 만큼 생생한 상태가 좋아.”
“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평생 웰던만 먹고 싶지는 않거든요. 레어를 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도 않고요.”
“너는 마음이 너무 약해.”
전쟁 영웅 현태오를 따라 전선에서 눈부시게 활약하여 적진을 휩쓸었던 명장 진문성은 혀를 차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태오는 선뜻한 걸음으로 서재에서 나갔다.
진문성은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그 뒤를 따라가면서, 문득 가로등만 하얗게 비치는 어두운 골목길을 내려가던 젊은 사제님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 …….”
세상에서 현태오의 속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일 거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속속들이 다 아는 건 아니었다.
헌데 지금은 왠지 모르게, 자신보다는 하나람님의 가호를 더 많이 받고 있을―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조금 의심이 가는― 어느 젊은이를 위해 기도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