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태오는 커다랗게 트인 창으로 비쳐드는 눈부신 햇살 아래 눈을 감은 채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느른하게 누워 있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소파에는 집으로 찾아온 그의 학우들 서넛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는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때,
‘아……, 씨발…….’
잠들어 있던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온 순간 청년들은 언제 떠들었냐 싶게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로 몰리는 시선들 속에서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침묵하던 현태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중얼거렸다.
‘작작 좀 때려, 아프다고…….’
짜증스럽게 내뱉는 말에 그 자리가 씻은 듯 고요해진 것도 잠시, 이내 청년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현태오! 너 지금 무슨 꿈 꾸는 거야?!’
‘이야, 아무리 꿈속이라도 천하의 현태오를 때리는 인간이 다 있단 말이야?’
‘현태오가 얻어맞는다고? 진짜?! 그 꿈 나도 좀 구경하고 싶다!’
커다랗게 웃으며 떠드는 소리에 단잠에 빠져 있던 현태오는 눈을 떴고, 진문성이 건네주는 물컵을 받아들며 그 시끄러운 무리들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뭐야, 사람 자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만 자고 일어나. 친구들이 전장으로 떠나게 된 널 환송해 주겠다고 찾아왔는데 언제까지 잠만 잘 거야?’
‘그보다 꿈 얘기나 좀 해 봐. 누구한테 맞은 거야? 사관 학교 교관쯤 되면 널 구타할 수 있는 거냐?’
‘정신 나갔나, 무슨 헛소리야.’
현태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컵을 단숨에 비웠다. 현태오를 향해 의자에 거꾸로 걸터앉은 하얀 셔츠의 청년이 칵테일 잔을 까닥거리며 웃었다.
‘너 좀 전에 잠꼬대했다고. 너답지 않게 욕까지 하면서 작작 좀 때리라고 그러던데. 무슨 꿈을 꾼 거야?’
‘내가?’
현태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잠시 허공을 보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 안 나는데.’
‘야아, 그러지 말고 잘 기억해 보라니깐?! 천하의 현태오가 언제 또 얻어맞겠――어윽!’
낄낄거리던 하얀 셔츠는 현태오가 내던진 쿠션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푹신한 쿠션도 얼마든지 흉기로 만들 수 있는 게 저 남자였다.
코 부러질 뻔했잖아! 하고 외치는 하얀 셔츠의 아우성을 듣는 둥 마는 둥 현태오는 시계를 보았다. 오래 잔 것 같은데 한 삼십 분 잤나 보다.
나흘 뒤에 동북부 국경으로 출정이다. 그간 국경 지역 일부에서 송갈과 다툼이 끊이지 않더니, 지난달 기어이 분쟁이 크게 터지고 말았다.
출정을 앞두고 마지막 휴일을 보내고 있는 현태오를 환송하겠답시고 찾아온 옛 학우들은 대낮부터 테이블에 술병을 깔아 놓고 떠들고 있었다.
‘어찌 됐든 태오 너도 문성이 너도 몸 성히 갔다 와라. 이김에 송갈 놈들 판판이 깨 놓고 와.’
‘그래, 아주 확실히 깨 버려. 이제 그만 좀 싸우게. 지겹다, 지겨워.’
웃으며 시시덕거리는 청년들에게 대꾸하는 대신 현태오는 그들 중 누군가 따라 주는 맥주로 목이나 축일 뿐이었다.
송갈과의 분쟁은 이미 오래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송갈보다는 제양이 조금씩 유리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송갈은 큰 나라였다. 오래전부터 크고 작은 전쟁은 줄곧 있어 왔고, 이번 전쟁이 끝난다 한들 앞으로도 계속 분쟁은 되풀이될 터였다.
‘화평 조약이 맺어지면 좋을 텐데.’
남색 니트를 걸친 청년이 불쑥 중얼거렸다. 다른 청년들도 판판이 깨 버려라 어떻게 해라 말한 것치고는 그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장기간의 분쟁으로 양국 모두 피로도가 쌓일 만큼 쌓였다. 이 나라에서나 저 나라에서나 화평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화평 좋지. 양국 왕실 간에 혼사라도 이루어지면 얘기가 좀 쉬워지지 않을까?’
‘말처럼 쉽냐. 게다가 설령 그렇게 하려 한들 지금 우리 왕실엔 마땅히 결혼을 시킬 만한 왕족이 없잖아. 대군마마들과 선혜공주님은 모두 결혼을 하셨고 유일하게 미혼이라고 해 봐야 정혜궁마마인데――.’
거기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현태오에게 시선이 모이는 이유는 그 정혜궁마마가 그의 정혼자인 탓이다. 현태오는 별말 없이 어깨만 가볍게 추어올렸다.
‘안 되지, 아무리 화평도 좋지만 ‘제양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을 깨뜨려 놓아서야 쓰나.’
청남방을 입은 청년이 짐짓 진지하게 외치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렴, 그렇지, 맞장구치는 목소리들이 뒤를 따른다.
몇 년 전 왕실 소식을 전하는 사교 잡지에 실렸던 문구는 그대로 굳어져 현태오와 제상아를 가리키는 수식어가 되었다. 집안으로든 외모로든 기량으로든 여러모로 조건을 맞추어 봤을 때 그만큼 완벽한 한 쌍은 없을 거라고들 했다.
‘난 이놈 다른 건 하나도 안 부러운데, 정혜궁마마만큼은 진짜 부럽단 말야. 내 이상형인데.’
하얀 셔츠가 반쯤 진심을 담아 현태오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이번에도 현태오는 고개만 까닥할 뿐 반응이 없었다. 그러든 말든 별 관심 없다는 기색으로, 접시에 놓인 육회로나 젓가락을 뻗었다. 그의 취향대로 양념을 거의 안 해 생고기에 가까운 안주다.
‘야야, 말 좀 해 봐. 실제로 봐도 그렇게 예뻐? 자주 만나긴 해? 이 집에도 자주 오셔?’
하얀 셔츠는 현태오에게 몸을 내밀며 물었다. 현태오는 심드렁하게 육회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올걸. 나랑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건 아니지만.’
‘뭐? 너랑 만나는 게 아니면 왜 오셔?’
‘우리 집 별채에 살고 있는 놈이랑 친하거든.’
‘……? 뭐? 별채?’
무슨 영문 모를 소리냐는 얼굴로 하얀 셔츠가 눈을 껌벅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길게 설명을 덧붙이기 귀찮아하는 현태오 대신 진문성이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전장에서 이모부님을 구하고 돌아가신 중위님 가족분들이 몇 년 전부터 이곳 별채에서 지내고 있는데, 그 집 큰아들이 정혜궁마마와 동갑이에요. 마마께서 그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셔서 가깝게 지내시거든요.’
‘그랬어? 오――, 고마운 가족이잖아, 잘해 줘야겠네. 마마랑 친하게 지낸다고 너 걔 막 괴롭히고 그런 건 아니지?’
현태오를 쿡쿡 찌를 기세로 말하는 하얀 셔츠에게 현태오는 여상하게 대꾸했다.
‘글쎄……, 잘 대해 주려고 마음은 먹고 있는데 저쪽에서 별로 안 내켜 하더라고.’
자주 마주치지도 않고, 하고 무심히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청년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저놈이 잘 대해 주려고 마음먹었다고 했냐……? 반어법 아냐……? 하고 눈짓으로 수군거리는 그들 사이에서, 청남방이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아, 혹시 얼마 전에 정혜궁마마랑 같이 연주회 갔다가 사진 찍힌 그 남자앤가? 그 예쁘장하게 생긴?’
접시에서 육회를 집어 들던 현태오가 그를 보았다.
‘사진? ……예쁘장하다고?’
미심쩍게 묻는 현태오에게 청남방은 휴대전화를 꺼내어 툭툭 두드리더니 검색 결과를 내밀었다. 정기적으로 왕실 소식을 알려 주는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사진 중 하나였다. 아름답게 단장한 소녀가 한 소년과 국립극장의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얘 말하는 거 아냐?’
청남방이 물었지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현태오는 사진을 쳐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뒤에서 슬쩍 화면을 들여다본 진문성이 ‘예, 맞네요.’ 하고 대신 대답한다.
‘봐. 반듯하니 곱다랗게 생겼잖아. 왜, 실물은 달라? 사진빨이냐?’
청남방이 화면을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그때까지 사진을 보고 있던 현태오는 느릿하게 대꾸했다.
‘아니, 이렇게 생긴 건 맞는데, 이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 예쁘다기보다는――돼먹잖게 생겼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가 단정 짓는 그에게 청남방은 엉? 하고 눈을 껌벅였다. 도로 휴대전화를 건네는 현태오에게서 하얀 셔츠와 남색 니트가 전화를 받아 돌려보는 동안 그가 말을 덧붙였다.
‘버릇없고 되바라진 얼굴이잖아.’
‘왜, 이 정도면 순하고 예쁘게 생겼구만…….’
현태오의 단정에 어물어물 중얼거리는 말이 돌아갔지만 굳이 그 이상 반박하진 않았다.
현태오가 뭔가를 딱 잘라 단정 지을 때 반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친구라는 것이 곧 대등한 관계를 뜻하지는 않았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태오의 옆에는 언제나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와 대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선을 넘지 않는 곳에서 장난처럼 주고받는 농담이 그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끔 해 줄 따름이었다.
‘야아, 현태오 혹시 정혜궁마마랑 얘가 친하다고 질투하는 거 아냐?’
남색 니트가 웃으며 던지는 말에 현태오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그래, 친해 보이긴 하더군.’
‘어떤 놈이야? 간도 크게 현태오의 정혼자 옆에 기웃거리는 게.’
‘글쎄. 별로 얘기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질투라……, 아, 그래서 그놈이 날 볼 때마다 인상 쓰면서 자리를 피했던 건가.’
‘뭐, 그랬어?’
청년들이 또 한바탕 왁자하게 웃었다.
혼자서 납득한 양 중얼거리던 현태오는 언뜻 시선을 돌렸다.
열어 놓은 창문 저 너머에서, 뜰에 줄지어 심어 놓은 나무 그늘을 따라 걸어오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별채의 그놈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지 책 보따리를 지고 있는 그놈은 더운 듯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걸어오고 있었다.
‘호랑이가 오는군요.’
현태오를 따라 창밖을 내다본 진문성이 말했다. 그 말에 청년들도 덩달아 창문 쪽으로 고개를 뺐다.
‘저기 오는 저놈이야? 어디 보자……, 사진보다 더 낫네.’
‘정혜궁마마랑 동갑이면 내년엔 성인이겠네. 아직 보송보송하니 귀여운데? 착해 보이는구만.’
무심히 소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옆에서 지껄여대는 청년들에게 께름한 시선을 보냈다.
‘이것들은 단체로 눈이 삐었나…….’
헛웃음을 웃으며 그들을 한심스럽게 쳐다본 현태오는, 놈들이 한심스러운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기에 그냥 내버려 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청년들의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뜯어보려고 하니, 그들의 말마따나 겉가죽이 쓸 만하게 생기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긴 처음 보았던 때에는 현태오도 비슷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몇 차례 마주치는 사이에 생긴 것과 달리 건방지고 오만한 놈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바로 얼마 전에도 그랬다.
외출했다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제상아가 녀석을 찾아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었다. 별 관심은 없었지만 어쨌든 정혼자가 찾아왔으니 인사를 건넬 겸 잠시 동석했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매를 곱게 접고서 제상아와 속살속살 얘기 잘하던 놈이 갑자기 낯을 굳히며 입을 꾹 다물곤 현태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동그란 눈에 반들반들 힘을 주고서, 노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놈 봐라……? 싶어 현태오가 마주 쳐다봤더니 놈은 금세 시선을 돌리고 자리를 떠 버렸다.
가끔 마주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랬다. 딱히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주칠 때마다 저놈은 현태오로 하여금 ‘이 새끼가……?’ 싶은 마음이 치밀게끔 행동했다.
별 이유 없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했다) 현태오를 싫어하거나 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쓸어다 버릴 정도로 많지만 대놓고 그렇게 노려보는 놈은 거의 없는데, 조그만 놈이 제법 배짱도 좋은 데다 되바라졌다.
‘희한하네. 현태오가 누구를 못마땅해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러게. 맘에 안 들면 일찌감치 치워 버리고 말지, 남한테 관심이라곤 없는 놈이.’
‘쟤가 보기보다 아주 크게 될 인물인가 본데.’
청년들이 시시덕거리든 말든, 현태오는 점차 가까워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위층에서 내려오는 시선들을 깨닫지 못한 소년은 여상하게 걷고 있었다. 현태오와 마주칠 때처럼 낯빛을 굳히지도, 입을 꾹 다물거나 사납게 눈을 치뜨지도 않았다.
그래도 되바라지게 생긴 얼굴은 여전하다. 어찌나 얄망궂게 생겼는지 멀리 있어도 한눈에 확 들어온다.
‘문성이 너도 오래 봤을 거 아냐. 어때?’
‘음……, 저도 자주 얘기해 보진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확실히 그냥 겉보기처럼 순하지만은 않죠.’
남색 니트가 묻자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진문성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별안간 하얀 셔츠가 외쳤다.
‘어, 이제 보니까 다리를 절잖아. 어디서 맞았나? 야, 태오 네가 때린 거 아니냐? 아무리 애가 못마땅했던들 저렇게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패서야 쓰겠,’
농담처럼 웃으며 떠들던 하얀 셔츠는 그를 흘끔 쳐다보는 현태오의 시선을 받고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일순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조용한 경고가 담긴 서늘한 눈길 앞에서 하얀 셔츠는 ‘아니 그냥 농담한 거지…….’ 하고 우물우물 얼버무렸다.
현태오는 그제야 눈길을 거두며 냉랭히 말했다.
‘저놈이 제 손으로 때린 거야.’
‘스스로 저랬다고? 왜?’
남색 니트가 물었다.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 맥주를 들이켜는 현태오 대신 시선을 받은 진문성이 웃으며 ‘그러니까 겉보기만큼 순하지만은 않다니까요.’라고만 말했다.
현태오는 맥주를 마시며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떨어뜨렸다.
소년이 절뚝거리며 별채로 가고 있었다. 이렇게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잘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절름거리는 걸음은 그래도 며칠 전보다 많이 나아진 거다. 며칠 전에는 혼자 걷는 게 불안정해 보일 정도로 절뚝거렸었다.
소년에게는 사고뭉치인 동생이 한 놈 있었다.
개구지고 기운찬 놈인데, 현태오는 관심을 두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말썽깨나 부리고 다니는 성싶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도 또 한바탕 저질렀던가 보다. 면허도 없는 놈이 친구들과 어울려 누구네 형 바이크를 빌려 타다가 사고를 냈는데,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었으나 사람이 좀 다쳤다는 모양이다.
그날 밤 별채에서 동생 놈이 엉엉 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재에 있다가 시끄러워서 내다봤더니, 내려다보이는 별채의 유리창 안에서 소년이 동생을 앞에 앉혀 놓고는 회초리 한 단을 갖다 놓고 제 종아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그걸로 제가 얻어맞을 줄 알고는 때릴 테면 때려라 하고 있던 동생 놈은, 소년이 일언반구 없이 자신의 종아리를 치기 시작하자 사색이 되었다. 동생이 엉엉 울며 차라리 자기를 때리라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울부짖건 말건, 소년은 회초리 한 단이 다 부러질 때까지 제 종아리를 후려갈겼다. 피투성이가 되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앉아서도 회초리를 휘두르는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우연찮게도 그 모습을 보게 된 현태오는 팔짱을 낀 채 창가에 서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기어이 회초리의 마지막 한 자루까지 다 부러뜨리고야 만 소년은 그대로 쓰러졌고, 며칠 앓아누웠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말썽부리던 동생 놈이 좀 얌전해졌다고 하니 헛고생은 아니었던 셈이지만…….
작작 좀 때릴 것이지.
‘제 모친이 죽고 나더니 더 독해졌어.’
현태오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누군가 ‘응?’ 하고 되물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못되지는 않은 것 같던데요. 가끔 인사하고 얘기하다 보면 성실하고 괜찮아요. 세진이도 철이 좀 없다 보니 말썽을 부려서 그렇지 못된 애는 아니고.’
창 아래로 지나가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진문성이 말했다. 흘끔, 진문성에게 눈동자를 돌린 현태오가 한쪽 입매를 올렸다.
‘너랑은 그래도 말하고 지내나 보지?’
‘넌 안 해?’
남색 니트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고 현태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싹 무시하던데. 멀리서라도 눈에 띄면 빙 돌아가. 어쩌다 한자리에 있게 되면 슬그머니 가 버리고.’
‘네가 하도 무섭게 굴어서 그런 거야.’
‘아무 짓도 안 했거든?’
‘야, 넌 존재 자체만으로――, ……아니다.’
키득거리며 말하던 하얀 셔츠가 현태오와 눈이 마주치더니 얼른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낯을 가리나 보더라고요. 같은 집에 사니까 좀 잘 지내 볼까 싶긴 했는데 마땅히 그럴 만한 계기도 없고 쉽진 않아서요.’
진문성이 선선히 말하자 합죽해졌던 하얀 셔츠가 장난질의 화살을 그리로 돌렸다.
‘오, 진문성이, 저 예쁜이한테 관심 있냐?’
‘관심이 있다기보단 같은 집에 살고 얘기도 가끔은 하니까…….’
창밖을 보며 여상하게 말하던 진문성은 시선을 돌리다 말을 멈추었다. 현태오와 눈이 딱 마주친 채 껌벅껌벅 눈을 깜박이던 진문성은 살짝 의아하게 허공을 쳐다보는 눈치이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뜬금없는 말에 현태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
‘아니,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서요.’
‘무슨 실수.’
진문성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난처한 웃음만 띠었다. 글쎄요, 저도 잘……, 싶은 얼굴이다.
현태오는 갑자기 생소리를 하는 진문성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실없는 녀석,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로 해 두지요. 신관이 되실 분께 너무 삿된 소리를 많이 하면 벌 받을 테니까요.’
진문성은 화제를 수습하듯 말했고, ‘신관? 갑자기 왜, 신학교라도 간대?’ 하고 의아하게 되묻는 목소리들 속에서 현태오도 희한한 눈길로 진문성을 보았다.
‘예. 전해 듣기로는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얼마 전에 결정했다더군요.’
진문성의 말에 청년들이 오오, 하고 소리를 높였다.
‘예쁘게 생겨선 힘든 길을 선택했네. 신관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던데.’
‘그래? 그거 뭐 그냥 기도 좀 열심히 하고 봉사 좀 열심히 다니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니었어?’
‘아냠마! 신관치고 장수하는 사람 없다잖아. 신력을 쓰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몸에 부담이 엄청나다더만.’
그것도 어떤 이능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 다르다며, 아니 일단 매일같이 새벽 다섯 시에는 기상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부담이 엄청나지, 청년들이 떠드는 가운데 현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쑥,
‘신학교는 여기에서 다니기엔 멀 텐데.’
혼잣말인 양 중얼거리는 현태오에게 진문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올 연말에 집을 구해서 나갈 거랍니다. 동북부 전선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르게 될지는 몰라도, 아마 저희가 돌아올 때쯤에는 저 형제들은 없겠지요.’
잠시 진문성을 바라보던 현태오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소년은 모퉁이를 돌아 별채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군.’
현태오는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막 집어 들던 육회를 도로 내려놓은 그는 맥주를 주욱 들이켰다.
동북부 전선이라, 나가면 최소한 몇 달은 있게 되지 않을까, 어쨌든 다치지 말고 무사히 돌아와라, 청년들이 건네는 말들이 귓등에 닿았다.
그는 전장으로, 소년은 신학교로.
이제 이 집에서 마주칠 일은 없을 터였다.
*
머리맡에서 울리는 자명종을 끄고 일어났을 때 창밖은 아직 어둑한 새벽이었다. 겨울이 찾아든 시기라 날이 밝으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
현태오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묵직하던 머리에서 금세 잠기운이 사라졌다.
침실에서 나가자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서재에는 이미 진문성이 테이블에 커피와 신문을 놓아두고 있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하고 인사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소파에 앉았다. 평소와 똑같은 시각이다.
종류별로 놓여 있는 신문들의 제일 위에는 가장 구독자 수가 많다는 신문이 놓여 있었고, 그 첫 면은 오늘도 왕실의 파혼 상황에 대해 읊어 대는 기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요 며칠째 계속이었다. 오늘은 드디어 왕실에서 파혼을 정식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과 함께, 평항 총독의 향후 행보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내용으로 기사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요즘 나라가 참 평화로운가 보군. 기삿거리가 어지간히도 없는 모양이지, 별 중요하지도 않은 기사가 계속 1면을 차지하고.”
신문을 펼치며 현태오가 중얼거리는 말에 진문성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간밤에 따로 들어온 소식들을 훑고 일과표를 체크하면서 보고한다.
“김찬영 쪽은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윤 검사님께 따로 소식 드리고 필요한 문서들도 다 보내 두었습니다. 부서 개편은 예상하셨던 대로 외무청 쪽으로 변동이 클 것 같고요. 석 총감님께서 연락주셔서 다음 주 중에 뵙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평항 복귀 후의 인사 개편에 대해 말씀하실 것 같은데…….”
진문성이 간략하게 말하는 동안 현태오는 보는 둥 마는 둥 신문을 넘겼다. 이야기도 듣는지 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진문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오래지 않아 진문성은 이야기를 마쳤고, 오디오 방송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현태오는 시선도 주지 않고 신문들을 읽어 나갔다. 제법 두툼하게 쌓여 있던 신문들은 금세 줄어들었고, 가장 아래에 깔려 있던 송갈의 외자 신문을 읽으며 현태오는 코웃음 쳤다.
“송갈도 어지간히 일 없는 모양이야, 이웃 나라 파혼담에 이렇게 열성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파혼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각하를 씹을 거리가 생겨서 신난 것 같던데요.”
“원래 송갈은 날 싫어하니까. 죽이겠다고 찾아오는 놈들도 가끔 있잖아.”
“적국의 전쟁 영웅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신문 마지막 장을 넘긴 현태오는 커피를 마시며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잠시나마 숨 돌릴 여유를 주려는 듯 그가 커피 잔을 반쯤 비울 때까지 기다리던 진문성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이모님께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현태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일어나시면 연락 달라고 하시더군요.”
“드디어 돌아오셨나? 먼 길 오셨으면 푹 쉬시지 일찍도 일어나셨군.”
현태오는 시계를 보며 혀를 찼다.
파혼담이 터진 것은 현태오의 모친이 온천 지방의 별장에 가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여행 가 있는 동안은 부부 동반일 때가 아니면 편안히 쉬고 싶다며 신문이나 뉴스를 안 보는 어머니다. 어젯밤에 귀성하신다고 했으니, 이제 드디어 소식이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식 들었다.’
신호가 한 번 울리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예. 잘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그래. 잘 다녀왔지. 헌데 잘 다녀온 게 다 허사가 되었지 뭐니. 속 시끄럽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응? 너, 에미 쓰러뜨려서 병원에라도 보낼 작정이니?!’
늘 소녀 같고 우아한 어머니는 머리끝까지 성이 나서 열불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미 재떨이로 본인의 분노를 터뜨린 아버지가 그 옆에서 뭐라고 다독거리는 모양이었지만 통하지 않는 눈치였다.
무심히 그 말들을 들으며 커피를 다 마신 현태오가 눈짓하자 진문성이 소리 없이 다가와 새로 커피를 따라 주었다. 그 커피마저 다 마실 즈음이 되자 그제야 어머니는 속에 있는 것들을 그럭저럭 다 쏟아부은 것 같았다. 화를 내다 내다 기운이 빠진 듯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니?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무슨 생각이고 뭐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강간을 해 버렸다는데 어쩝니까. 책임을 져야지요.”
답답한 듯이 묻는 어머니에게 현태오가 느긋하게 대꾸하자 어머니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발칵 소리쳤다.
‘어쩜, 어떻게 나한테서 너처럼 못된 애가 다 났을까! 내가 정말 널 잘못 낳았지 뭐야! 이 천하의 망나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이래서 죄송합니다, 어머니.”
여전히 평연한 낯으로 대답한 현태오는 시계를 보았다. ……3, 2, 1.
정확히 예상한 시간이 지나자 전화 너머에서 침묵하던 어머니가 긴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속이 상해서 내가 심한 말을 했어. 네가 그렇게 못된 짓을 했어도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란다.’
“아닙니다. 속상하실 만하죠.”
현태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기실 그 자신도 인정하며 궁금해하는 바였다. 어떻게 저런 마음 약한 어머니에게서 자신 같은 아들이 태어났는지.
그의 부모님은 매우 도덕적이고 인품도 훌륭한 분들이었다. 심지어 다른 형제들도 건실하고 좋은 청년들이란 걸 생각하면, 그가 돌연변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한동안 고생하고 뒷말 들을 건 각오해 두고, 또, 너 현진이한테 진심으로 사죄하고 잘해 줘. 현진이 아버지가 네 아버지 대신 돌아가시는 바람에 힘들게 자란 앤데, 그런 애한테 그렇게 몹쓸 짓을 하니. 고생고생해서 신관이 되었더니 그것도 소용없게 됐고……. 네가 정말 나빴어. 너 현진이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고 잘해야 한다.’
현태오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졌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염려 마세요, 어머니. 제가 제일 잘 대해 주는 사람이 그 사제님이에요.”
‘네가? 별로 친하지도 않았잖니?’
“가깝게는 지내지 않았지만 아주 잘 대해 줬죠. 다른 사람들 대하는 것보다 훨씬.”
어머, 그랬었니? 하고 어머니는 미심쩍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다소 안심하는 눈치였다.
아무렴, 볼 때마다 되바라지게 구는 놈을 손도 안 대고 얌전히 놔둔 것만 해도 그렇지, 현태오는 송화구 너머로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몇 마디 더 타박하는 소리를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현태오는 전화를 내려놓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십 년 치 잔소리는 다 들은 기분이로군. 오늘은 좀 느긋하게 쉬어야겠어. 다른 소식 더 있나?”
“정혜궁마마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시간 날 때 정혜궁으로 한번 찾아 주십사 하신답니다.”
진문성의 말에 현태오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는 한번 가 봐야지. 오후로 시간 잡아 봐.”
“예. 오늘 말씀드릴 것들은 이 정도입니다. 아, 그리고――.”
썩 중요하지는 않은 일을 덧붙인다는 듯이 잠시 사이를 띄운 진문성이 말했다.
“유현진 사제님의 파문이 결정되었답니다. 오늘 0시부로 유현진 사제님은 신적에서 이름이 빠졌고, 지금 계시는 사택에서는 이레 안에 퇴거하셔야 한답니다.”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손이 멈추었다.
진문성에게 시선을 주며 짧게 침묵한 현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 안에 퇴거라. 당분간 머무실 곳을 알아봐 드려야겠군. 적당히 멀지 않은 데로 알아봐. 사설 경비가 있는 한적한 곳으로.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고 싶으실 테니.”
“예.”
“그리고……, 그래, 이따 정혜궁으로 가는 길에 신전의 사택에 들러 봐야겠군. 파문이 결정되었다니 오늘은 신전 기도실에 틀어박혀 있지도 못하실 텐데, 과연 얼굴이라도 보여 주시는지 봐야겠어.”
현태오가 입매를 틀어 올리며 웃었다. 진문성은 아무 말도 안 했다.
바로 어제 현태오는 신전 근처를 지나가는 길에 유현진을 찾아갔다가 문전 박대를 당했다. 기도실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에 임해야 해서 못 나온다며,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고 눈치를 보며 말을 전해 주는 어린 수습 신관에게, 잠시 침묵하던 현태오는 ‘곧 파문당하실 텐데도 참 신실하십니다. 그런 분을 제가 방해할 수는 없지요.’라고 비죽이 웃고는 돌아섰다.
그 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걸 본 건 말없이 그 뒤를 따르던 진문성뿐이었다.
“참 재미있는 놈이야. 희한하게 사람 긁는 재주가 있거든.”
현태오가 느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이 새끼 봐라……?’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마주칠 때마다 그랬다.
그렇다고 별짓을 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는데도, 표정이며 눈빛이며 말투며, 묘하게 사람을 긁었다.
그래서 그날,
――간밤에 각하께서 저를 덮치셨습니다.
그날도 놈이 그 미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 눈길로 뚫어져라 바라보다 그런 개소리를 했을 때.
현태오는 바로 그때 기회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다.
기회――무엇에 대한 기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불현듯 바로 이때라고.
지금 가만히 되짚어 보면 드디어 이 이유 모르게 사람 긁는 새끼의 숨통을 움켜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성싶지만, 현태오는 서슴없이 그 기회를 붙들었다. 그는 여태 자신의 감에 따라 움직였다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 감은 돌이켜보면 그날 밤부터 이미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렇게까지 술을 마실 게 아니었다. 혹은 아무리 술을 마셨더라도 그렇게 쓰러질 건 아니었다.
오늘 좀 많이 마시긴 했군, 집에 들어가 속을 좀 게우고 자야겠어, 라고 생각하며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의식이, 그때 마침 요리점 안으로 들어서던 놈과 눈이 마주친 순간 흐려졌다. 남 앞에서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현태오였지만, 이유 모르게 그 순간만큼은 그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뇌리를 스쳤던 것도 같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서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놈과 시선이 마주친 현태오는, 그럴 리 없음에도, 일순 실수했나 싶었다.
두어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심지어 한 이불 속에서 놈을 마주한 그 황당한 당혹감이라니. 말로만 듣던 당혹감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내 몸을 일으키면서는 금세 도로 찾아온 이성으로 아무 일도 없었음을 알아차렸으나, 그때까지 여전히 그는 얼마간 당황하고 있었다. 놈이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기억 안 나십니까? 간밤에 각하께서 저를 덮치셨습니다.’
삽시에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현태오는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아니면 못 본 새 인간이 바뀌었나. 이걸 지금 농담이랍시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도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 말씀은 제가 사제님을 강간했다는 뜻입니까?’
그때, 놈이 웃었다.
아주 희미하게 바람 소리를 내면서.
놈의 눈매가 휘었다. 딱 입매가 휘는 만큼만, 아주 어렴풋이.
놈이 현태오의 앞에서 그렇게 웃은 건 어쩌면 처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 비수처럼 날아든 어떠한 감이 현태오의 가슴속을 꿰뚫었고, 그는 그것이 ‘놓치지 말아야 할 어떤 순간’임을 깨달았다.
……하하.
웃어?
‘예. 덕분에 저는 이제 신적에 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각하께서 책임지셔야겠는데요.’
현태오는 여전히 웃으며 말을 잇는 유현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무슨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되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면서도 놈의 눈매에는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래. 웃었단 말이지.
그러면――그간 오만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되바라지게 굴기도 했겠다, 급기야는 입까지 함부로 놀렸으니 그 대가도 받아 내야겠다.
‘알겠습니다.’
현태오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기가 그대로 멈춰 버리는 유현진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관 되신 분을 강제로 취하다니, 아무리 술김이라 해도 용서받지 못할 짓을 했습니다. 마땅히 책임져야지요.’
유현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가는 걸 낱낱이 지켜보며 현태오는 못을 박았다.
‘저 현태오의 이름을 걸고――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삽시에 노르스름해지던 낯빛, 하얗게 핏기가 가시며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얼굴은 아직도 현태오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현태오가 기억하는 한, 그날이 요 몇 년 통틀어 가장 유쾌하게 맞이한 아침이었다.
“처음에는 실수로 농담을 잘못한 거라고 치더라도 말이야, 그 뒤에 이곳으로 찾아왔던 때에는 명백하게 그놈이 날 속였다고 봐야지. 사실을 덮어 둔 채 돌아가 버렸으니.”
현태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진문성은 잠깐 시선을 주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라고만 대꾸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겠지만, 상관없었다. 진문성은 대단히 눈치가 빨랐고 근 삼십 년 가까이를 현태오의 곁에서 버틸 만큼 똑똑했다.
요전에 그가 했던 말대로 어느 정도는 현태오가 유도한 바가 있긴 하겠지만, 어쨌든 속인 건 속인 거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내가 얼마나 그놈한테 관대하게 잘 대해 주고 있는지. 날 속이려 드는데도 머리카락 한 올 건들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내 부모한테 하는 것보다도 더 잘 대해 주는 거라고 해도 좋을걸. 하물며 거처까지 챙겨 드린다는데.”
어머니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신단 말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현태오에게 이번에도 진문성은 “예,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하고 아무렇잖게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별채는 개축하실 겁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현태오도 머릿속에서 화제를 바꾸었다.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괜찮은 업체로 알아봐.”
“……, 내실로 개축 의뢰를 하면 되겠습니까?”
잠깐 망설이던 진문성이 묻자 현태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이놈이 갑자기 돌았나 싶은 눈길이다.
“진문성이, 밤새 뭐 잘못 먹었나? 무슨 헛소리야?”
“아, 그러면――.”
“별채는 크게 개축해서 집무관으로 쓸 거야. 그러잖아도 서재가 좁다 싶던 참이거든.”
“그럼 유현진 사제님은,”
“거기야 물론 책임져야지.”
현태오는 선선히 말했다.
“신관을 그만두게 한 데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거야. 지방의 작은 신전은 일손이 부족한 곳이 많으니, 이미 파문당한 마당에 이제 정식으로 신관직은 못 맡겠지만 속가사제로 지낼 수는 있을 테지.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으로 알아보도록 해.”
진문성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태오가 어떻게 하려는지 의아해하던 것 중 하나가 풀렸다는 기색이다.
일반인의 신분이지만 신전에 기거하며 일을 돕는 속가사제 일이라면 그야 정식 신관까지 지낸 유현진이 하기에는 누워서 떡 먹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좋은 의미로 책임진다기보다는 어디 먼 지방으로 좌천을 보내 버리겠다는 게 아닌가……라고도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현명한 그는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미심스러운 눈치로 현태오를 보던 그는 결국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분간은…….”
“당분간은 천천히 구경이나 해야지.”
현태오는 피식 웃었다.
“그 당돌한 사제님이 이제 파문도 당했겠다, 제 입으로 뱉은 말을 수습도 못 하겠다, 어떻게 나오실지 구경이나 하자고. 마침 한동안은 어디 출퇴근할 일도 없으니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겠군. 늘 얼음장 같던 얼굴이 당황하니까 제법 볼만하던데, 적당히 찔러 가며 구경이나 하다가 지방으로 보내 주면 될 테지.”
잠자코 고개를 숙이는 진문성의 앞에서 현태오는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었다.
“헛짓만 안 하면 날 속인 것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넘어가 드릴 생각이야. 아주 잘해 드릴 거거든. 그러니 이 정도 여흥쯤은 즐겨도 되겠지.”
*
열어 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불어 들고 있었다. 옷을 한 겹 더 껴입어도 싸늘했지만, 구석구석에 쌓인 오래된 물건들을 끄집어내다 보니 먼지가 날려 문을 닫아 둘 수가 없었다.
유현진은 짐을 정리하다 말고 침대 끝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아까 책상 위에 두었던 차는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먼지가 창밖으로 폴폴 날아가며 햇빛에 반짝반짝하는 게 참 어여쁘구나……, 멍하니 생각하다 한숨을 쉬고 말았다.
신학교 입학 때부터 여태까지 계속 이 방에서 살았다. 내년이면 십 년을 채울 참이었는데, 이렇게 쫓겨나게 될 줄은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 이제 일주일의 유예 기간만 지나고 나면 이 방과는 정녕코 이별이다.
“정신관, 대신관까지, 출셋길을 걸을 줄 알았건만…….”
신관과 출세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평생 신관으로서 잘살 줄 알았다. 사실 출세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신관도 그저 흐르는 대로 살다 보니 이 길로 왔던 터라 신적에 큰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파문이 결정되고 보니 마음이 우울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공으로 돌아갔는데 그럴 만도 하다.
하루아침에 삶이 이렇게 뒤바뀌다니,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였는가.
유현진은 돌이켜 보았다.
그 남자를 찾아갔을 때 어떻게든 진실을 밝혔어야 했다. 아니 그전에 그 남자에게 그런 농담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전에 그 남자한테 반하지를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전에 태어나지를 말았어야……, 아니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유현진은 정신을 다잡았다.
모은 돈도 없고 배운 재주도 없는데 앞으론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 당분간은 세진이에게 빌붙어 살아야겠지만, 호구지책도 강구해야 한다. 언제까지고 동생 집에서 신세 지며 살 수는 없으니.
그나마 쓸 만한 재주라면 다친 사람 고쳐 주는 재주인데, 하나람님께서 내려 주신 은사를 돈벌이에 써선 안 되겠지. 설령 된다 해도 그걸로 먹고살기엔 몸이 못 버텨 날 거다.
유현진은 부신관으로 서품을 받았을 때 자신에게 내려진 은사를 떠올려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받은 이능으로 타인의 병이나 상처를 아물게 해 줄 수는 있었으나 그 병이나 상처를 유현진이 대신 떠안아야 했다.
신관으로 있는 동안에는 정도를 조절해 가며 신력을 썼지만, 그걸 돈벌이로 삼았다간 제 명의 반의반도 못 살고 하나람님 곁으로 갈 게 틀림없었다.
아니, 일단 무엇보다도, 현재 공식적으로 ‘하나람님의 특별한 가호를 잃은’ 유현진으로서는 신력을 쓸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 자칫 현태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해서 거짓말이 들통나면――.
유현진은 등줄기가 서늘해져 부르르 어깨를 움츠렸다.
됐다, 그 방법은 젖혀 두고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지, 유현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서늘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실을 마련해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사제님을 모시겠습니다. ……사제님이 이 집에 들어와 머무르실 내실 말입니다.’
“――.”
유현진은 어마 뜨거라 하고 호다닥 고개를 내저었다.
그 단호한 목소리가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도 안 된다. 설마 진짜로 한 말은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 진심이라면.
‘잘됐잖아, 얘.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안방쯤은 내놓는 게 당연한 거 아니니?’
아까 통화했던 제상아의 짜랑짜랑한 목소리가 덩달아 떠올랐다. 유현진은 또다시 호다닥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대관절 어째서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아주 작은 농담이었을 뿐인데. 그럴 의도라곤 조금도 없었는데 어쩌다 현태오를 속인 게 되었는지. 농담과 거짓말의 경계는 어디인가.
깊은 사유에 잠겨 있던 유현진의 귀에 묵직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진의 방문이 아니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리는 사택 건물 1층의 두꺼운 나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왔나 보다. 신전에 딸린 공동 사택이라 여기 사는 사람만 수십 명이다 보니 외부에서 찾아오는 손님은 드물지 않았다. 점심때가 막 지난 시각이니 사람들이 많이 오갈 때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오후에 세진이가 짐 정리하는 거 도와주러 오겠다고 했는데. 하지만 점심 약속이 있다고 했으니 벌써 오지는 않았을 거다. 그럼 내 손님은 아니겠거니. 유현진은 짐을 분류하던 손을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분을 찾아오셨나요?”라고 수습 신관이 나무 문을 열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유현진 사제님을 뵈러 왔는데, 계십니까?”
나직하고 서늘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유현진은 책상 밑에서 끄집어내던 책을 툭, 하고 떨어뜨렸다. ……이 목소리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고 자박자박 계단을 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어 수습 신관이 유현진의 방문을 두드리며 낭랑하게 외쳤다.
“현진 사제님, 현태오 평항 총독님께서 찾아 오셨,”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기도를……, 아주 중요한 기도를 하는 중이라 뵐 수 없다고, 추후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낭랑한 목소리가 더 길게 울리기 전에 얼른 문을 연 유현진은 어제와 똑같은 변명을 했다. 변명이 너무 허술하고 궁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도무지 현태오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빤한 거짓말을 전해야 하는 수습 신관은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오늘 새벽 정식으로 파문을 당한 유현진이 가엾었는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도로 내려갔다.
곧 아래층에서 유현진이 말했던 대로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유현진 사제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기도를 하는 중이시라……, 나중에 연락을 드린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유현진은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고, 잠시 뒤, “그렇습니까?” 하는 담담한 대답이 들렸다.
“그러면, 기도가 끝나면 말씀 전해 주십시오. 이 사택에서 퇴거하신 뒤 당분간 지내실 거처는 임의로 계약해 두겠습니다. 이레 뒤에 퇴거하신다고 들었으니 그날 옮기시는 걸로 알고 오전 중에 이사 도울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럼 이만.”
“――!”
유현진은 등덜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된다. 이대로 보냈다가는 나중에 정말로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았다.
유현진은 구르듯이 계단을 내려갔다. 맞은편에서 올라오고 있던 수습 신관을 젖히고 그가 나무 문 밖으로 뛰어나갔을 때, 현태오는 느릿하게 절뚝이며 안뜰에서 막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각, 각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유현진이 외치자 현태오는 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마치 나올 줄 알고 있기라도 했던 듯 평연히 서서 유현진이 다가와 멈춰 설 때까지 기다린다.
몇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 멀찍이 멈춰 선 유현진은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제야 이 남자를 거북스러워하는 자신의 현재 상황이며, 어제도 찾아왔었으나 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던 일이며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나,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춥지 않으십니까?”
그때, 유현진이 하는 양을 지그시 보고 있던 현태오가 물었다.
“창문을 열어 두시고 기도하시기엔 공기가 찬데요.”
어렴풋한 냉소가 서린 말을 듣고 유현진이 무심결에 돌아보자 사택에서 자기 방 창문만 열려 있었다. ……어느 방인 줄은 어떻게 알았지? 유현진은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기도할 때는 늘 심두멸각의 마음가짐으로…….”
입에서 무슨 헛소리가 나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순 어이없이 쳐다본 현태오의 입가가 꿈틀했다. 비웃으려다 참기라도 한 것 같다.
“예, 물론 마음을 다해 기도하시니 추위인들 느껴지시겠습니까만, 그래도 속인으로서는 염려가 되는군요. 게다가 이제부터는 제가 잘 살펴 드려야 할 분인데.”
현태오가 느릿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느린 걸음에도 금세 거리가 줄어든다.
거의 티 나지 않게 절뚝이는 발길이 바로 한 걸음 앞에서 멈춰 유현진이 움찔한 순간, 현태오는 아무렇지 않게 코트를 벗더니 유현진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이러실 것 없,”
급하게 뛰어나오느라 겉옷도 없이 나왔던 유현진은 당황하며 말했으나, 흘끗 떨어지는 서늘한 시선을 정면으로 맞고는 찍소리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틀 연속 문전 박대하려다 걸려 버린 죄가 있다 보니 마음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안 그래도 지은 죄가 있는 판에……. ……그런데 따뜻은 하구나.
유현진은 뒤늦게 찾아드는 한기를 느끼며 슬그머니 코트 깃에 목을 파묻었다. 그제야 서늘하던 현태오의 시선이 조금 느슨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다리는…….”
유현진은 현태오가 단단히 짚고 있는 지팡이 옆,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현태오도 따라서 시선을 떨구더니 대수롭잖게 “아, 평항에서 좀 다쳤습니다.”라고만 말했다.
알고 있다. 당시 온갖 매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했었고, 그 소식을 들은 순간 몸에서 힘이 풀리던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많이 아프셨을 텐데요.”
“견딜 만했습니다.”
여전히 대수롭잖게 대꾸한 현태오가 “염려해 주셨습니까?” 하고 농담처럼 덧붙이는 말에 유현진은 “아무래도…….” 하고 얼버무렸다.
재활은 잘돼 가고 있는지, 몸에 무리는 없는지, 이젠 아프지 않은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삼켰다. 어쨌거나 살아만 있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고, 게다가 저 서늘한 무표정에 대고 그런 걸 물어볼 만큼 강심장은 아니었다.
유현진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보다, 조금 전에 하셨던 말씀 말인데요. 이곳에서 나간 뒤의,”
“아아, 예. 오늘부로 결국 파문이 결정되었다고요. 사택에서도 이레 안에 퇴거하셔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유현진 사제님의 순결 서약을 제가 깨뜨리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그……,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요…….”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때늦은 후회는 돌이키기 어렵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이 남자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건데…….
시선을 떨구고 마는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선선히 말을 이었다.
“지나간 일이라도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지고 그 결과를 감당해야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발아래가 자꾸 푹푹 꺼지는 것 같다. 지옥이 저 아래인가.
“이곳에서 나오신 뒤 머무르실 곳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이레 안에는 마련될 겁니다. 시간이 빠듯해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한 편안히 쉴 수 있을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이레 뒤 오전에 이사를 도와드릴 사람들을 보낼 테니, 그들을 따라오시면 됩니다.”
“각하, 그 말씀 말입니다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유현진은 서둘러 단호하게 말했다. 안 그러면 계속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유현진은 현태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계속 내려다보고 있던 현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할 뻔했지만, 꿋꿋이 마주 본다. 다시 봐도 잘생…… 에라, 이 천치야. 유현진은 속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유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 지금 사제님을 모시기 위해 개축 중인 내실보다는 불편하실 겁니다. 허나 더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서는 개축에 시간이 걸려서요. 두어 달만 기다려 주실 수 없을까요? 어디 보자, 내년 봄 정도까지요.”
“내실을 개축하다니 왜, ――아니, 어차피 평항으로 가실 거잖아요? 그런데 왜 본가에 내실을 개축합니까?”
“평항까지 함께 가 주시려고요? 저는 사제님이 먼 타향에 가기 싫으실 것 같아서 한동안은 장거리 관계를 가지려고 했었습니다만, 함께 가 주시겠다면 평항에 집을 알아봐야겠군요.”
뜻밖이라는 듯 덧붙인 현태오가 황망히 눈을 홉뜨는 유현진을 보며 얼핏 웃는 것 같았다. ……아닌가? 다시 보니 여전히 무표정하다.
“아니요, 각하,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애초에 각하와 저의 관계가 그렇게 될 필요가 전혀 없,”
“유현진 사제님.”
문득 현태오의 음색이 한 톤 낮아졌다. 호랑이가 목구멍을 열고서 저 안쪽 깊숙이에서 나지막한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책임져야 할 일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은 저와 제 집안의 명예에 흠이 남는 일입니다. 제가 사제님께 큰 잘못을 한 것은 알지만, 저와 현가에 그런 모욕을 주지는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심지어 사제님과 현가는 깊은 인연도 있지 않습니까?”
“모욕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책임지실,”
“제가 사제님을 품어서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유현진은 순간 말이 막혔다. 그런 유현진을 빤히 내려다보며 현태오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그날 밤 사제님을 안고 관계를 가져서 이렇게 된 게 아닙니까. 사제님이 저와 몸을 섞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제가 사제님을 붙들고 강제로 성교를 하는 바람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각, 각하!”
다행히 아무도 주위를 지나가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누구든 오갈 수 있는 사택 안뜰 문 앞이다. 혹은 사택 안의 어느 누가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쏘일지도 몰랐다.
물론 유현진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이 사택에 아무도 없었지만, 저렇게 노골적인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자 유현진은 식겁해서 달려들었다. 그의 말을 막고자 부지불식간에 그를 더럭 움켜쥐었는데,
“…….”
“…….”
“……아니, 이게, 그러니까,”
“이 손은 놓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남한테 한 번도 잡힌 적이 없는 곳이라 어색하군요.”
바로 눈앞에서 현태오가 말했다. 평소처럼 말하는 것 같은데도 살벌한 기운이 풀풀 흘렀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유현진을 잠시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자신의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유현진의 손을 붙잡아 떼어 냈다. 슥, 손에서 그의 옷 목깃이 빠져나갔다.
“일이 이렇게 되어 사제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는 아주 잘 알겠습니다.”
현태오는 냉랭하게 말하며 한 손으로 자신의 멱살 부근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말마따나 아무에게도 잡혀 본 적이 없었을 곳이다. 현태오는 다소 언짢은 듯 옷깃을 털어 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계속 유현진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이대로 괘씸죄를 물어 연행이라도 할 것 같다.
“……손 좀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유현진이 굳은 목소리로 말하자 현태오는 그제야 아직껏 자신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손을 놓지는 않는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아는데, 그럴 상황이 아닌 줄도 아는데, 유현진은 붙들린 손에서부터 전해진 체온이 목부터 후덥지근하게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목덜미부터 빨개지고 있는 걸 스스로도 알겠다.
손 따위는 별것도 아니었다.
여태 매일같이 수십 수백 명과 손을 붙잡아 왔다. 기도할 때마다 신자들의 손을 감싸 쥐고 기도했고, 심지어는 아프고 병든 이들을 위해 그들을 끌어안고 기도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었다.
손이다. 고작 손.
심지어 지금은 좋아서 잡은 것도 아니고 멱살을 잡았다가 붙들린 판이다.
그런데.
유현진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태오와――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예전에 평항에 사목 갔을 때 기도하면서 한 번 잡아 보긴 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미쳤나 보다. 아니 이미 며칠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정신 나간 몸뚱이는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있었다. 이 커다랗고 단단한 손아귀의 감촉이 좋다니. 멍청아, 정신 차려!
유현진은 딱딱하게 낯을 굳히려 안간힘 쓰며 붙들린 손목을 노려보았지만 목덜미의 더위는 얼굴까지 올라왔다.
들키면 안 되는데. 고작 손닿은 걸로 동요하다니, 바보 멍청이 같으니. ……하지만 하나람님, 감사합니다. ……이 구제 불능아.
삭막한 얼굴로 멈춰 있는 유현진을 뚫어질 듯 바라보던 현태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유현진은 얼른 손을 거두어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현태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작 손이 닿았을 뿐인데 그렇게까지 불편해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현태오가 물었다. 유현진은 내심 흠칫했다. 역시 수상했던 걸까.
“불편하다기보다, 좀 놀라서요.”
“놀랐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고, 그런 일이 있은 직후이니,”
유현진은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속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현태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어렴풋이 미간에 주름이 진다.
“혹시,”
현태오가 미심스러운 투로 말을 꺼내는 순간 유현진은 움찔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강제적으로 관계를 가지는 바람에…… 정신적인 외상이라도 남으신 겁니까?”
“――.”
“물론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으니 당연히 그러셨을 테지만, 만일 그래서 지금 이러시는 거라면,”
“그……,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유현진은 덥석 그의 말에 편승했다. 변명거리를 만들어 줘서 고맙게 여기며.
그러나 그 직후 유현진은 자신이 한 걸음 더 수렁 깊이 발을 파묻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거다. 더 이상은 물러설 데도 없었다. 유현진은 절망했다.
현태오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당장 하나람님 곁으로 불려가도 좋을 텐데.
“죄송합니다. 사과로 될 일이 아니겠지만, 제가 정말로 큰 잘못을 했습니다.”
현태오가 고개를 숙이려 했다.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얼른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아니, 아닙니다. 지나간 일이니 더는 사과하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제가, 어서 잊어버리고 싶으니까, 더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를 생각해서도 더 사과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쩐지 점점 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기분이었지만 유현진은 현태오에게 초조하게 말했고, 유현진을 뚫어질 듯 쳐다보던 현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앞으로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현태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신관으로 살아오셨으니 다른 사람과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로는 접촉을 한 적이 없으셨을 텐데 그런 분이 그런 일을 겪으신 뒤이니, 손만이라도 갑자기 닿으면 놀라실 만합니다.”
땅으로 향하는 현태오의 낯이 무거웠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것 같아 유현진의 마음도 같이 무거워졌다. 이게 아닌데……, 하고 심장이 뛰던 때, 현태오가 고개를 들어 유현진을 보았다.
“앞으로는 결코 강제로 사제님을 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제님이 그 기억을 극복하실 수 있도록 하나씩 노력하겠습니다. 일단은 손부터요.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현태오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위로 펼친 채 유현진에게 손을 내민 그는 뭔가를 기다리는 듯 그대로 잠자코 있었고, 유현진은 그 손을 내려다보며 당혹스레 눈을 껌벅였다.
이건, 용서를 하겠다면 이 손을 잡으라는 의미일 텐데.
이렇게 되면 상황상 잡을 수밖에 없는데.
이 손을.
“…….”
유현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금 얼굴이 더워졌다. 고작 손인데도.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아주 천천히, 제발 손이 떨리지 않길 빌며.
이윽고 그 커다란 손바닥 위에 유현진의 손이 얹혔다.
바로 그때.
“형님!”
현태오의 등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유현진이 움찔하며 손을 빼려는 순간 현태오가 그 손을 콱 움켜쥐었다.
어, 저, 하고 유현진이 당혹스레 손을 꿈틀거리며 현태오를 올려다보았지만 현태오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고, 손은 무슨 덫에 걸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님,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어요? 아, 손님이 오셨, 구, …나, ……요.”
쾌활하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 것은 유세진이었다. 썩 그렇게 화창한 기색은 아니었지만―그야 쫓겨나는 짐을 싸러 왔으니― 최대한 활발한 태도로 한달음에 달려오던 그는, 그쪽으로 고개 돌려 시선을 주는 현태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걸음이 급속도로 늦어지며 혀도 뻣뻣해졌다.
“현태오…… 총독…… 각…….”
“유세진 사무관님. 이런 데서 뵙는군요.”
현태오는 유세진이 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손은 붙들고 있다. 유세진의 얼떨떨한 시선이 슬금슬금 그 붙든 손과 현태오와 유현진을 번갈아 보았다.
“예, 저는 형을 만나러……, 그런데 각하께서는 여기엔 어쩐 일로…….”
“유현진 사제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들렀습니다.”
“이야기라니 어떤…….”
유세진의 눈매에 움찔거리는 빛과 경계 어린 빛이 섞였다. 호랑이 앞에서 제 어미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하룻강아지 같다.
“사제님이 제 잘못으로 더 이상 이곳에 계실 수 없게 되어 앞일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습니다. 아시겠지만 얼마 전 형님 되시는 분께 제가 큰 실례를 해서요.”
“아, 예……, 그런 일도 있었지요…….”
유세진은 애매하게 중얼거렸다. 그 속사정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켕기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화도 나는, 복잡미묘한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 유현진은 한 번 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여전히 현태오의 손에서는 힘이 풀리지 않았다.
“저 그런데 각하, 이 손 좀 놓아주시면…….”
몇 번이나 그의 손안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던 유현진이 결국 진땀을 흘리며 속삭였다. 그 순간 유세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재빨리 그들 사이에 끼어들더니, 현태오의 손을 덥석 잡아 악수를 청하는 척 유현진을 떼어 놓았다.
“각하! 어찌 되었든 이렇게 뵈어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여러모로 시끄러워져서 각하께서도 심려가 크실 줄 압니다!”
활달하게 외치며 현태오와 크게 악수를 나눈 유세진은 흘끔 유현진을 훑어보다가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유현진이 걸치고 있는 저 겉옷은, 굳이 옷깃에 달린 배지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품새가 몹시 넉넉한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현태오의 것이다.
아니 이 형님이 미쳤나, 지금 백 리 밖으로 떨어져 거리를 둬도 모자랄 판에, 눈으로 욕한 유세진은 얼른 유현진에게 다가가 겉옷을 싹 벗겨서 현태오에게 내밀었다.
“각하, 공기가 찬데 건강 해치시겠습니다!”
현태오의 팔에 옷을 걸쳐 주고 대신 제 겉옷을 벗어 유현진의 어깨에 걸쳐 주면서, 유세진은 현태오에게는 보이지 않게끔 유현진에게 눈을 부라렸다.
“유 사무관님이 추우시겠습니다.”
유세진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현태오가 느릿하게 말했다.
“저희는 곧 들어갈 테니 괜찮습니다. 각하께서는 가시던 길이 아니신지요?”
해맑게 축객령을 내리는 유세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오가 웃었다. 유세진은 뒷덜미를 부르르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꼿꼿이 세웠다.
“형제 두 분이 이제 보니 닮은 데가 있으십니다.”
나직이 말하는 현태오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서늘하다. 흘끔 유현진을 쳐다보는 눈길도 한결 더 차다.
그러나 시계를 본 그는 더 이상 별말 없이 물러났다.
“그러면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유현진 사제님께는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안, ……왜죠?”
안녕히 가시라고 반갑게 외치려던 유현진은 뒤따르는 말에 멈칫하며 되물었다. 그가 여기 다시 올 이유가 있던가. 현태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야 교제를 위해선 자주 만나야 할 테니까요.”
“교……?!”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른 건 유세진이었다. 그 소리에 묻혔지만 만만찮게 눈을 부릅뜬 유현진이 뚫어져라 현태오를 보았다.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조금 전 유세진도 바로 그 단어를 꽥 외치지 않았던가.
“유현진 사제님과 저는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내실로 들어오시기 전에 먼저 서로 알아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니, 각,”
“게다가 유현진 사제님은 일반적인 교우 관계 이상의 아주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에는 익숙하지 않으시지요. 더욱이, 죄송하게도 제가 강압적으로 첫 관계를 가진 탓에 지금은 불안과 두려움도 크시고요. 그러니 천천히 단계를 밟아 가며 서로에게 가까워져야 할 텐데, 그러려면 자주 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태오가 태연하게 말했고 유현진은 아연해졌다. 말문마저 막힌 채 현태오를 바라보는 옆에서 유세진은 눈꺼풀이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각하, 교제라니, 저는,”
“저는 첩 들이듯 소홀하게 유현진 사제님을 내실로 모실 생각은 없습니다. 대대로 현가에서는 내실에 사람을 들일 때에는 늘 정식으로 예를 다해 모셨고, 저 또한 그럴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만큼 더욱 자주 뵈며 교제를 깊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게 무슨 불도저 같다. 당혹스레 그를 바라보던 유현진은 애써 정신을 차렸다.
“각하, 잠시만요. 저는 그 말씀이 당황스럽고……, 또 불편합니다. 제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현태오는 지그시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그 새까만 눈동자가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 유현진은 숨을 죽였다. 현태오의 눈매가 언뜻 웃는가 싶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하지요.”
선선히 말한 현태오가 옷을 걸치며 막 걸음을 돌리려 하던 때였다.
“각하! 잠시만요!”
아까부터 유현진에게 이게 뭔 소리냐고 눈으로 고함을 질러대던 유세진이, 끝내 자신을 외면하는 형에게서 시선을 돌려 현태오에게 외쳤다.
“이 상황은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유세진의 외침에 현태오는 표정 변화라곤 없이 한쪽 눈썹만 아주 약간 올렸다.
“온당치 않다고요?”
“각하께서 아무래도 저희 형님과, 그, 다소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오해라……. 어떤 오해 말씀입니까?”
현태오가 흥미로운 듯 유세진 쪽으로 돌아섰다. 한층 나직해지는 그 목소리가 유난히 서늘했다.
현태오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친 유세진은 딸꾹, 하고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뚫어질 듯 바라보는 눈길 앞에서 삽시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유세진은 “예, 그러니까, 오해가,” 하고 더듬거린다.
그런 유세진을 자신의 뒤로 휙 떠밀어 버리며 유현진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각하.”
유현진은 더럭 외치곤 동생 쪽으로 돌아섰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바로 어제 자료를 찾아보았던 한천 형무소의 혹독한 사진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넌 아무 말도 말고 가만있어. 형이 또 회초리 들어야겠어?!
유현진이 사납게 눈짓하자 유세진은 억울하고 화가 나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현태오의 시선을 맞고는 입을 불퉁하게 다물고 말았다.
“세진이가, 동생이 속이 많이 상해서 그런 겁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유현진이 다시 현태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현태오는 묵묵히 유현진을 내려다보다가 희미하게 눈매를 접었다. 입가에도 웃음 비슷한 것을 띤다.
“이해합니다. 유 사무관님께도 조만간 자리를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앞으로 더 가까워져야 할 테니까요. ――아, 그렇지. 생각난 김에 하나 더.”
현태오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이제 유현진 사제님께서는 더 이상 신관이 아닌데 사제님이라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 일입니다. 호칭을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덧붙여 저 역시, 사적으로 가까운―혹은 가까워져야 할― 사람에게 공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건 자연스럽지 않은 기분이 들어서요. 유현진 씨가 저를 각하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호칭으로 부르시는 게 낫겠습니다.”
갑자기 호칭이 바뀌었다. 유현진은 순간 말이 막혔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글쎄요……, 유현진 씨가 원하시는 대로 불러 주십시오.”
“…….”
유현진은 다시 말이 막혔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껌벅껌벅 쳐다만 보는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언뜻 웃는 듯했다.
“다음에 뵐 때부터 생각하신 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순순히 물러나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찰나, 유현진은 손을 내미는 현태오를 보고 멈칫했다.
그 커다란 손이 유현진을 향해 악수를 청하듯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붙잡았던 그 손이.
“――.”
유현진은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이고 그 손을 잡았다. 자칫하다간 다시 목덜미가 달아오를 것 같아서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유현진의 손을 넉넉하게 감싸 쥔 손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문득 그 손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아주 단단하게, 덫에 걸린 짐승을 움켜쥐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천천히 그 손은 떨어져 나갔다. 떨어지면서 손가락 끝이 유현진의 손바닥을 느릿하게 문지르고 간다.
그것은 ‘아주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는 유현진으로서도 확연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떠한 의도’였다.
움찔, 어깨를 움츠린 유현진은 시선을 들었다.
현태오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낯으로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유현진을 보고, ‘의도’를 알아차렸음을 알아본 그가 얼핏 웃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기색 없이 정중히 묵례하곤 돌아섰고, 유현진은 당혹스레 눈을 껌벅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형님……? 저한테 할 얘기가 있지 않으신가요……?” 하고 으스스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덜미를 잡혀 방으로 끌려 들어갈 때까지.
*
“그렇게까지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하룻강아지가 거슬리게 굴어서……, 쯧.”
생각에 잠겨 있던 현태오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그의 뒤에 서서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던 진문성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신전의 사택에서 나와 정혜궁으로 오는 동안 내내 생각에 잠겨 거의 말이 없던 현태오다.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이 새겨져 있어 진문성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문성아. 너 교제해 본 적 있어?”
하지만 이렇게 뜬금없는 물음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하고 생각하며 진문성은 되물었다.
“어떤 교제 말씀이십니까?”
“진지한 미래를 전제로 두고 특정인과 매우 가깝게 지내는 교제 말이야. 보통은 이성 교제라고들 하는.”
진문성은 현태오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할 시간이나 주셨습니까? 라는 말은 삼키고 대답한다.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진지한 미래’가 전제라면 아직 없습니다.”
“그래, 나도 그래. 굳이 할 생각도 없고.”
여태 공주의 정혼자로 사셨던 분이 무슨 말씀을, 이라는 말도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해 버렸다 싶어서. ……됐어. 어차피 여러 번 볼 생각이었으니 하는 셈 치지.”
“……. 교제하기로 하셨습니까?”
진문성이 물었다. 누구냐고는 굳이 묻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진문성이 어디에 차를 대 놓고 현태오를 기다렸는지를 생각하면 물을 필요도 없었다.
현태오는 시선도 주지 않았고 아무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진문성은 뭐라고 말하려 하다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는 현명한 보좌관이었으므로.
정혜궁 응접실에서 내다보이는 안뜰에는 오후의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갈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빈틈이 없는 느낌이 궁의 주인을 닮았다.
정혜궁마마는 무슨 일인지 늦어지고 있었다. 미리 내어 온 차를 이미 반쯤 마셨다.
그러나 거기엔 아랑곳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현태오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뭔가를 쓸어내리듯 느릿하게 까닥이던 그가 또 갑자기 불쑥 엉뚱한 소리를 했다.
“누가 성희롱이란 걸 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런 이도 저도 아닌 헛짓거리를 왜 하나 했는데…….”
“……하셨습니까?”
“하려고 한 건 아닌데, 무심결에 하고 뒤늦게 생각해 보니까 성희롱이 아니었나 싶어서.”
“성희롱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변명합니다.”
“아니, 내가 하려고 한 건 악수였어. 그저 악수였는데, 그 표정이――.”
현태오는 입매를 찌푸렸다.
아직껏 손에 남아 있는 듯한 감각이 기억과 함께 떠오른다.
손을 움켜쥔 순간, 놈의 목덜미가 불그스레한 빛을 띠는 게 보였다. 처음 손을 쥐었을 때에도 보았던 그 빛깔이다.
유난히 그 빛깔이 눈에 서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놈이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여전히 얼굴은 냉담한 무표정이었는데 속눈썹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바삭거렸다. ……아, 당황한 거로군, 그제야 깨달았다. 꼭 무슨 말 못 할 짓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얼굴에까지 붉은빛이 번졌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손바닥의 감촉. 어린 짐승의 약하고 보드라운 배를 문지른 것 같은.
“저 새끼는 대체 뭐가 문젤까.”
다시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현태오가 중얼거렸다.
“예?”
“생각해 보면 나는 유현진이한테 아무것도 못해 준 게 없거든. 한 번도 나쁘게 대한 적도 없고. 외려 잘해 주면 잘해 줬지. 그런데도 처음부터 나를 싫어하는 눈치였었단 말이야. 어릴 때부터.”
“그야……, 보통은 각하를 두려워하니까요.”
“두려워하는 놈이 마주칠 때마다 그렇게 눈을 치뜨고 뚫어져라 노려볼 리는 없지. 늘 불편해하면서 피하려 들기도 하고.”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현태오를 진문성은 기이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진문성이 아는 한 현태오는 타인에게 관심이 아예 없는 남자다. 남이 자신에게 품는 감정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가진 적이라곤 없었다. 거슬린다 싶으면 깔끔하게 시야에서 치워 버리고 끝이었다.
“글쎄요. 싫어할 때뿐 아니라 두려워할 때도 그런 반응을 보이긴 하는데……, 아니면 또 모르지요. 오히려,”
잠깐 천장을 올려다보던 진문성이 막 말하려던 때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며 제상아가 들어왔다.
현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진문성은 멀찍이 물러나 벽 근처로 가서 반듯하게 섰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제가 오래도록 기다리던 연락이 있었는데 그 연락이 하필 조금 전에 왔지 뭐예요.”
“아닙니다.”
제상아는 현태오의 맞은편에 앉으며 생긋이 웃었고 현태오도 미소를 되돌려 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파혼 이야기가 나온 뒤 그들이 함께하는 자리는 처음이다. 그러나 서로의 사이에 불편한 화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태연하게 마주 앉아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별일 없이 잘 지내셨죠? 예, 덕분에, 얼마 전 누구누구를 만났는데 총독님 칭찬을 그렇게 하시더군요, 하하, 제게는 아름다운 분을 뵈러 간다며 자랑을 하더니, 블라블라블라블라…….
날씨는 청명했고 실내는 밝고 따뜻했으며 분위기는 훈훈했다.
“좋은 차로군요. 향도 좋고 맛있는데요.”
“예, 총독님이라면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평항의 특산품이랍니다. 총독님을 위해 구해 왔어요.”
“감사합니다. 좋아하는 차입니다. 그러고 보니 3년 전 평항에 들르셨을 때 마마께서도 이 차를 아주 좋아하셨던 게 기억나는군요.”
“맞아요, 그때 처음 마셔 보고 감탄해서 매년 철마다 꼭 구해 마신답니다.”
제상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현태오도 차를 마시며 빙긋이 웃었다.
제상아는 가냘프고 여려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대단히 똑똑하고 야망도 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막내만 아니었더라면 진지하게 오라비와 왕위를 두고 다투었을지도 몰랐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똑똑하고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녀를 보며 현태오는 그녀와 자신이 짝으로 알맞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호감이 생기거나 별다른 관심이 가지는 않았지만 파트너로 잘 살아갈 수는 있을 터였다.
제상아 또한 현태오에 대해 비슷하게 느끼는 듯했고, 내키든 내키지 않든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입장과 의무대로 별일이 없으면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암시를 제일 처음 받았던 것은 현태오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평항 총독으로 부임해 갈 때였다.
혼사는 급할 것 없으니 느긋이 있다 오라고, 따로 만난 자리에서 국왕이 흘리듯이 이야기했을 때 어떠한 감이 움직였다.
이미 정혼한 지는 오래되었고 제상아는 성인식이 지났다. 평균보다 일찍 결혼하는 왕실의 관습을 생각하면 슬슬 결혼 이야기가 나와야 할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아마 그 당시에는 아직 확고한 계획은 없었다 한들 막연한 생각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전쟁은 짤막짤막하게, 그러나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송갈은 약해지고 있었으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만만해지지는 않았고, 제양도 피로도가 극에 달할 즈음이었다.
화해를 하고 싶은 마음은 양측 다 있었을 테지만 당장은 전쟁이 끝난 직후다. 작은 분란은 여전히 산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 화해의 증거로 삼기에 가장 편리한 것은 혼인이었다.
두 번째 암시는 3년 전 그녀가 평항에 들렀을 때다.
그때, 막 부신관이 된 유현진이 부신관의 의무 사항 중 하나인 지방 사목을 위해 평항에 왔었는데 친구인 그와 함께 순례를 하겠다고 제상아도 따라왔었다.
왕실의 정혼자가 왔으니 당연히 현태오는 그녀를 맞이했는데, 일주일 예정으로 왔던 그녀는 당초의 예정보다 더 긴 보름 동안 평항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동안 송갈의 삼왕자가 비밀리에 평항에 와 있었다는 걸 현태오는 알고 있었다.
보름간의 체재 후 떠나기 전 제상아가 은근히 ‘송갈과 새로운 방식의 화평도 생각해 보아야 할 때예요.’라고 말을 흘리거나, 혹은 ‘아버지끼리 친해서 이루어진 정혼이기는 하나 총독님은 반드시 왕실과의 정혼을 바라시는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드네요.’라고 애매하게 떠본 것도, 현태오는 당시에 이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벌써 이 정혼이 어그러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사실 그때는 제상아보다는 그녀와 함께 왔던 유현진이 여태 줄곧 그랬듯 미묘하게 그의 성질을 갉작거려서 그쪽이 더 신경에 거슬린 탓에 그 암시 따위는 별로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현진이 아니었다 해도 별반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부터 본인이 원했던 정혼도 아니었고, 왕실과의 인연이나 혼인으로 인한 권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정혼이 마음에 들어서 유지했던 게 아니라,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내버려 뒀을 따름이다.
그러니 지금 정혼이 깨어져 버린 이 상황을 진심으로 곤란해하고 불쾌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의 인연이란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오래 알아 왔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서 참 안타깝지 뭐예요.”
제상아가 짐짓 한숨을 쉬며 허울 좋은 말치레로 운을 뗐다. 현태오 역시 정해진 대로의 대사를 읊었다.
“갑작스럽게 안 좋은 소식을 드려 죄송합니다. 어떤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어머, 그렇지 않아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라고 아쉽긴 했지만, 자신의 잘못에 분명히 책임을 지고자 하시는 총독님께 감동했답니다. 정말 훌륭하세요.”
제상아는 두 손을 맞잡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상심하셨지만 충분히 총독님을 이해하시며, 외려 총독님의 책임감과 결단력에 감탄하셨는걸요. 이번에도 아쉽게 되었지만 다른 좋은 일로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에요. 아마 아바마마께서 곧 따로 부르실 텐데, 염려는 마셔요. 평항에서의 오랜 노고를 치하하시고, 이번 일에 대해서도 격려해 주실 요량이실 테니까요.”
“깊은 아량과 너그러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어머, 무슨 말씀을요.”
짜 맞춘 듯이 아름다운 인사들이 오갔다.
그들의 사이는 언제나 이러했다.
평화롭고 예의 바르며 곱고 바른 관계였고 대화들이었다. 이대로 정혼이 이루어졌더라면 앞으로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데,”
하얀 손으로 한쪽 뺨을 감싼 제상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수심 어린 눈으로 현태오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본론이다.
“현진이가, 아니, 유현진 사제님이 많이 당황하신 듯하던데, 현 총독님 같으신 분이 어쩌다 이런 일을…….”
사뭇 염려스레 속삭이는 모호한 말에 현태오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술이 과해 실수를 했습니다.”
“어쩜, 총독님께서 실수라니 믿기지가 않네요. 저는 또, 다른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설마하니 제 친한 벗과 이렇게 얽히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현태오가 툭 털어놓지 않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혹은 애초에 이 상황이 못마땅했는지 제상아의 말끝이 슬그머니 맵다.
어떤 이유를 붙이든 상관없이 어차피 깨지게 될 혼담이었다.
그저 그 이유를 현태오가 스스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순간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충동에 이용했을 뿐이다.
현태오는 상냥한 듯하면서도 은근하게 칼날이 숨겨져 있는 제상아의 눈매를 마주 보다가 웃었다.
“예, 유현진 사제님이 무척 난감해하셔서 저도 안타까웠습니다. 이번 일 때문에 정혼이 깨어졌다고 마마께 몹시 죄스럽게 여기시는 듯하더군요.”
유현진이 죄책감을 느낄 줄 알면서도, 그녀는 어차피 깨질 혼담이었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제상아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이 사라졌다. 정색하는 그녀를 마주 보며 현태오는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송갈과의 내밀한 관계는 아직 외부에 들켜서는 곤란할 것이다. 게다가 현태오의 귀에 들어온 바로는, 그녀와 송갈 삼왕자 사이에는 정략적인 관계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성싶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결국 그녀에게는 유현진과의 우정보다는 그쪽 관계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그쪽도 이쪽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입장은 못 되지 않은가.
현태오는 옅게 웃었다. 그 웃음 띤 입매에 제상아의 매서운 시선이 닿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 사나운 시선이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운 웃음으로 바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어머, 그랬군요. 그분도 참, 나한테 미안해할 것 없다고 했는데. 유현진 사제님이 워낙 마음이 약해서요. 총독님도 아시겠지만, 누가 뭐라든 그분은 제 소중한 친구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좀 차갑고 무뚝뚝해 보여도 사실은 참 좋은 분이에요. 똑똑하고 배울 것도 많고. ……사람 보는 눈이 워낙 없어서 그렇지.”
뒷말은 본심이 담긴 혼잣말이었는지, 어쩜 그렇게 눈이 지하실 바닥에 가 붙었는지, 하고 혀를 차는 소리까지 따라붙는다.
그 생뚱맞은 덧붙임에 현태오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제상아는 자신이 무슨 말이라도 했냐는 양 금세 다시 보드레하게 웃었다.
“물론 총독님께서 충분히 책임을 잘 지시겠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혹여 차후에 마음을 바꾸시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 현진이, 아니, 우리 유현진 사제님 마음 다치지 않게 잘 대해 주시면 좋겠어요.”
현태오는 뚫어져라 제상아를 보았다. 제상아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할 때까지 그녀를 지켜보던 현태오는 입 끝만 올리며 대답했다.
“마마께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정중한 말속에 섞인 서늘한 빛을 알아차렸는지 제상아는 얼굴에서 살짝 웃음을 지우며, 이 남자가 왜 별안간 냉랭한 빛을 띠는지 궁리해 보는 눈치였다. 그러나 현태오는 곧 “차향이 참 좋군요. 한 잔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라며 원래의 분위기를 되돌렸고, 그녀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그럼요.”라며 차를 건네었다.
비록 모든 것을 다 털어놓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제상아가 유현진과 사이가 좋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돼먹잖고 버릇없는 녀석과 이 새침한 공주님이 가까워지다니 신기한 일이지만, 그들은 어느샌가 친해져 있었다.
제상아는 갓난아기 때부터 현태오의 정혼자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현가에 종종 찾아왔다. 현태오가 궁으로 갈 때도 있었다. 어른들이 부추겨서 반쯤은 의무처럼 오가며, 만나면 다과를 먹으며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다 헤어지곤 했다.
그러다 언제였던가, 아마도 유현진이 현가에 들어온 다음 해쯤이었을 것이다.
현태오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제상아가 찾아왔다. 그녀가 현태오의 귀가를 기다리는 동안 또래니까 함께 놀고 있으라고 어른들이 데려다 놓은 게 유현진이었다. 유현진은 당황한 듯했지만 순순히 끌려왔다고 한다.
나중에 진문성에게 듣기로는, 우두커니 앉아만 있던 유현진을 유심히 보던 공주가 ‘얘, 너는 왜 말을 안 하고 쳐다보기만 하니? 벙어리니?’ 하고 대뜸 타박을 주었단다. 그러자 유현진은 그녀를 깜박깜박 쳐다보다가 ‘미안해. 너처럼 예쁜 애는 처음 봐서 구경하고 있었어. 과자 줄까?’ 하고 살갑게 말했다고.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온갖 칭찬과 찬사를 다 듣던 그녀가 그런 구닥다리 수작 같은 말에 넘어갔을 리는 없는데도, 그날 이후로 제상아는 유현진과 가까워졌다. 어느 날엔가는 그녀를 모시는 나인에게 ‘현진이는 예쁜 걸 알아보는 눈은 있는데, 애가 은근히 좀 멍청해. 내가 돌봐 주는 수밖에 없겠어.’라고 했다는데,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 뒤로 제상아는 현가에 올 때마다 유현진을 찾았고, 조금 더 자라 정혜궁을 자기 몫으로 차지하면서는 그를 궁으로 부르기도 했다. 어느 결에 유현진의 동생까지 그녀와 가까워져 셋이서도 종종 만나 어울리곤 했다.
제상아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든 그녀의 교우 관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현태오였으나, 유현진만은 예외였다. 어찌 됐든 그녀 때문에 간혹 한자리에 동석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대번에 얼굴을 굳히고 입을 꾹 다무는 게 한눈에 들어왔으므로.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가면 갈수록 거슬렸다.
자신을 향할 때면 늘 서늘해지는 그 눈매가, 꾹 다물리는 입매가, 냉랭해지는 표정이, 하나하나 거슬렸다.
그러다 결국은 지금에 이르렀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놈에게 매우 관대했다.
현태오는 사람에 대해 호불호가 없어,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싫어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에 차지 않는 것에는 아예 관심도 가지 않았고, 눈에 거슬리면 시야에서 치워 버리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렇다. 눈에 거슬리는 걸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렇게 거슬리게 굴었는데도 놈은 여태 사지 멀쩡하게 그대로 있지 않은가.
실상 유현진의 목을 그냥 콱 따 버릴까 싶은 순간은 몇 차례 있었다. 평항으로 부임해 떠나기 직전 정혜궁에서 놈과 마주쳤던 날, 제상아가 놈에게 그를 위한 기도를 해 달라고 하자 단번에 거절했을 때도 그랬었다. 이놈 봐라 싶어 슬그머니 윽박을 질러도 봤지만, 이유도 말하지 않고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단칼에 ‘싫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대꾸했던 때.
그때는, 이걸 정말로 죽여 놓고 갈까 제법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일정이 당겨져 급하게 평항으로 떠나게 되어 큰맘 먹고 봐주긴 했지만.
놈이 부신관이 되어 평항으로 사목을 왔을 때도 그랬다. 송갈인들이 많이 거주해 상대적으로 하나람님의 신자가 적은 평항으로 왔다가 제상아 때문에 현태오와도 마주쳤을 때, 그때도 현태오는 놈을 어느 나무 꼭대기에 매달아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다른 놈이었더라면 이미 한참 전에 어느 야산에 파묻고도 남았을 텐데 놈은 아직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자신은 그에게 대단히 관대하게 대해 준 셈이었다.
그러니 지금 놈이 곤란해하는 꼴을 보며 약간의 즐거움을 얻는 것쯤은 별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적당히 즐기고 나면 지방으로 (좌천을) 보내 다시 신전에서 일할 수 있게끔 책임도 져 줄 예정이었다.
“유현진 사제님이 그래 봬도 현 총독님을 꽤 좋게 보고 있답니다. 총독님에 평항에 가 계신 동안 총독님을 위해 기도도 많이 했을 거예요.”
현태오를 할끗거리던 제상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조금 전부터 뭘 저렇게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로 머리를 굴리는가 했더니, 입에 발린 소리를 뭐라고 할까 고민했나 보다.
바로 어제 찾아갔다가 문전 박대를 당하고, 바로 오늘도 찾아가 문전 박대를 당할 뻔했던 현태오는 반협박을 듣고서야 겨우 뛰어나와 입을 불퉁하게 내밀고 그와 마주 섰던 유현진을 떠올리며, “그것참 고마운 일이군요.”라며 비뚤어진 웃음을 웃었다. 아무렴, 어련하시려고.
저렇게 빤한 거짓말까지 하다니 이 여자는 유현진이 어지간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종종 찾아뵈며 잘 대해 드려야겠습니다.”
현태오는 차를 마시며 적당히 맞장구쳤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은 시간이 여유롭다. 가끔 찾아가 놈이 정색하며 불편해하는 꼴을 느긋하게 구경해 줄 예정이었다. 그렇다고 때리거나 육체적으로 가학할 생각은 없으니, 이만하면 대단히 관대하고 온건하다.
“그리고 친구로서 부탁을 드리는 건데, 총독님. 술김에 한번 실수를 하셨다고 해서 또 그러시면 안 돼요. 유현진 사제님이 그 일로 많이 힘들어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유현진 사제님께 다시는 그러지 말아 주세요.”
현태오를 살피던 제상아가 두 손을 모으며 애처롭게 말했다.
현태오는 차를 마시다 말고 아연히 제상아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설마하니 내가 정말로 술을 먹고 그놈을 덮치기라도 할까 봐.
“그럴 리가요. 설마 두 번이나 그런 실수를 할 리 있겠습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친구 일이니 마음이 쓰여서요.”
제상아도 새침하게 웃으며 차를 마셨다.
그 뒤로는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적당히 예의를 갖춘 말을 한두 마디쯤 주고받는 사이에 찻잔이 비었다. 그럴 즈음 궁인이 제상아의 곁으로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워낙 거리가 가까워 다 들린다.
“마마, 조금 전의 그 친구분께서 잊은 용건이 있다며 다시 연락을 주셨습니다.”
“……아.”
제상아가 앞에 앉은 현태오를 보며 망설이는 눈치였다. 현태오는 선선히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편한 시간 보내십시오.”
그러자 제상아도 선뜻 일어서 그를 배웅할 채비를 했다.
정혜궁에서 나서는 현태오를 안뜰까지 함께 나와 배웅하면서 제상아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시는 일마다 모두 잘되시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우리 현진이 잘 부탁드려요.”
개인적인 친애를 담아 당부하는 제상아를 마주 보며 현태오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할까. 아까부터 조금씩 거슬리기는 했는데.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현태오는 빙긋이 웃었다.
“정말로 많이 걱정되시나 봅니다. 이렇게나 여러 차례 말씀하시는 걸 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제 유현진 사제님을 더 염려하고 챙겨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닐까요?”
제상아는 눈치가 빨랐다. 현태오의 말속에 담긴 경고를 곧바로 알아챌 만큼은 충분히.
“……그러네요. 제가 실례했어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총독님.”
웃음을 지우고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현태오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다시 궁으로 들어갔고, 현태오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걸음을 뗐다. 그제야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진문성이 한 걸음 뒤로 다가섰다.
“저 여자가 유현진이를 낳았나?”
한동안 말없이 걸어가던 현태오가 불쑥 중얼거렸다. 진문성이 “예?” 하고 되묻자 다시 말한다.
“아니면 둘이 잤든가.”
현태오는 헛웃음을 웃었다.
“어지간히 싸고도는군. 이거야 원, 내가 유현진이랑 사고를 쳐서 파혼한 게 아니라 저 여자가 유현진이랑 사고를 쳐서 파혼했다고 하는 게 더 그럴싸하겠어.”
“각하. 아직 궁궐 안입니다.”
별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진문성이 그렇게 말하건 말건, 현태오는 싸늘히 내뱉었다.
“게다가 저 여자도 빤히 사실을 다 알고 있을 텐데, 술김에 실수했다고 또 그러지 말라니. 내가 그놈을 육체적으로 학대할 것 같기라도 한가? 아니면 내가 진짜 남자를 상대로 발정이라도 할 것 같아서?”
“신관이니까 그렇겠지요. 자칫 실수로라도 그분을 안았다간, 그때야말로 유현진 사제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게 들통날 테니까요.”
“들통나?”
“신관이잖습니까. 신성가호를 받은 부신관.”
“――아.”
현태오는 그제야 신관들에게 주어진다는 증표를 떠올렸다. 순결 서약이 깨지면 신성가호도 함께 깨지면서 드러난다는 현상이 있었다. 현태오는 코웃음 쳤다.
“사내의 순결 서약 따위는 깨지든 말든 관심도 없다고. 사내놈이라니 손가락 하나 건드릴 생각도 안 들,”
가볍게 손을 떨치며 말하던 현태오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제 손을 본다.
유현진과 손을 맞잡았을 때의 감각이 떠올랐다. 손가락 끝에 닿던 그 손바닥의 감촉과 그 순간 움찔하며 떨리던 감각도.
뜻밖에 놀랄 만큼 부드러워 마치 연한 속살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동시에 떠오르는 건 그때 보였던 유현진의 얼굴이다.
대번에 낯빛이 싹 굳으며 붉게 달아오르던 얼굴.
그렇게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다니.
현태오는 차게 웃었다. 신경을 갉작거리는 그 불쾌감이 다시 슬그머니 살아났다.
“그래, 얼마든지 불편해하라지. 그편이 구경하는 재미는 더 있을 테니.”
현태오가 나직이 중얼거리던 때였다.
차를 세워 놓은 궁궐의 동편 정현문으로 나서려는데, 그때 막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왕실의 종친만 달 수 있는 배지를 옷깃에 달고서 문지기의 경례를 받으며 궁궐로 들어오던 늙직한 남자는 현태오를 보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웃는 듯 마는 듯 한 빛이 떠올랐다.
“허허, 이 뉘신가. 현 총독 아니신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의양군마마.”
남자는 왕의 종형제인 의양군이었다. 오래도록 정계에 있으며 상원 의원 원내 대표를 맡았던 그는 일흔이 넘어 물러났는데, 이름난 학자로서 극단적인 국수론자들의 우두머리 격이기도 한 그는 정계에서 은퇴를 하고서도 학당을 운영하며 여전히 예전 못잖은 권세를 누리는 인물이었다.
“그래, 수도로 돌아왔다는 말은 들었네. 평항에서도 아주 일을 잘했다지. 먼 벽지에서 수고 많았네.”
“감사합니다.”
현태오는 정중하면서도 간결하게 대꾸했다. 그런 그를 가느스름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의양군은 흠, 하고 느릿하게 운을 뗐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근자에 묘한 소리가 들리던데.”
“묘한 소리라. 무슨 소식이라도 있었습니까?”
현태오의 평연한 낯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의양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가 젊은 신관을 겁간해 왕실과의 혼담이 깨어졌다는 소리가 들리지 뭔가. 정혜궁마마와 더불어 장차 우리 제양의 앞날을 이끌어 갈 버팀목이 될 이에게 그런 소문이 붙다니, 참 놀랍고도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내가 잘못된 소리를 들었겠지?”
의양군은 현태오를 살피며 의뭉스럽게 말했다. 낯 하나 까딱 않고 그를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옳게 들으셨습니다. 사실입니다.”
의양군은 입을 다물었다가 허허……, 하고 애매한 소리를 흘렸다.
“그래, 하기야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내 일흔이 넘도록 여러 꼴 보아 왔으면서도 아직 미처 깨우치지를 못한 모양이야. 그랬군, 그랬어. 그래, 아버님께서는 괜찮으시고?”
“예, 아주 잘 지내십니다.”
의양군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미묘한 눈길로 현태오를 보다가 짐짓 혀를 찼다.
“아들들 하나같이 잘 키워 냈다고 주위 부러움을 사셨던 양반이, 마음이 안 좋으시겠네, 그려. 왕실과의 파담이 어디 보통 일인가.”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빙긋이 웃었다.
“평생 전장 같은 삶을 살아오신 분이 뭐 이까짓 일로요. 저 말고도 훌륭한 아들이 셋이나 더 있으니 괜찮습니다. 파담 또한 꼭 나쁜 일이라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혹자에게는 기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러고 보니, 계연군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현태오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순간 의양군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세찬 눈길로 쳐다본 것도 잠시, 그는 이내 아무렇잖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자네가 내 아들을 다 염려해 주는가. 잘 지내네. 암, 잘 지내지.”
“잘된 일이로군요. 요즘 여러모로 활동이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모쪼록 하시는 일마다 잘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말해 줘서 고맙네. 자네도 좋은 일 많이 있기를 바라네. 허면 나는 이만 감세.”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을 마친 노인은 얼굴에서 웃음을 싹 지우고 현태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줄곧 그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던 의양군의 비서가 현태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거친 걸음걸음이 멀어졌다.
현태오는 아무렇잖은 눈으로 무심히 의양군의 뒷모습을 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저 늙은이는 여전하군. 다른 일에는 다 점잖은 양반이 제 아들 일에는 똥오줌을 못 가린단 말이야.”
“뭐……, 그도 그렇지만 계연군과 관련해서는 이미 미운털이 박힌 상태이니까요.”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현태오에게 진문성도 여상하게 대꾸했다.
여러 해 전 의양군의 외아들인 계연군이 현태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자식이 없던 의양군이 늘그막에 겨우 얻은 계연군은 타고난 성정이 오만하고 성급해 누차 탈을 일으키곤 했는데, 왕의 당질인 데다 그 아비가 워낙 싸고돌아 다들 쉬쉬하고 피하며 얼버무렸다.
현태오와 동문인 그는 어려서부터 현가 형제들을 시기한 지 오래되었다. 비슷한 연배인 현가 형제들은 각기 혁혁한 공을 세우고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반면 계연군은 의원직을 세습해 상원 의원으로 이름을 올려 두긴 했으나 이렇다 할 이력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계연군이 정혜궁 공주를 흠모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 그녀의 정혼자인 현태오를 더더욱 미워했다.
그런 연유로 계연군은 현가 형제를 마주칠 때면 험악한 기색을 드러내놓곤 했으나, 현태오의 형들은 그가 시비를 걸어 올 때마다 적당히 넘기며 피해 왔다.
그러다 한번은 그가 현태오와 한자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동문회 자리였다.
현태오를 두고 어린놈이 오만하고 건방지다, 마주치면 그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 줘야겠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계연군은, 그러나 막상 현태오와 마주치자 차마 그를 건드리진 못하고 트집을 잡아 현태오와 함께 있던 진문성을 두들겼다.
윗사람을 보고도 정중하게 인사를 안 한다는 둥 어처구니없는 트집이었으나 진문성은 군말 없이 맞았고, 현태오는 간섭하지 않았다.
현태오가 별 반응이 없자 계연군은 아무리 현태오라도 차마 왕의 당질인 자신을 건드리지 못한다 생각하고 기고만장해졌는지, 현태오에게도 아랫사람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놈이라고 삿대질을 하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눈치를 보며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아냥거리다가 숫제 툭툭 치기까지 하는 계연군에게, 현태오의 대응은 복잡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턱을 치켜들고 가슴을 툭툭 손바닥으로 쳐 대는 계연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옆에서 피투성이로도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진문성을 돌아보았다.
‘문성아.’
‘예.’
‘요즘 갯값이 얼마쯤 하지?’
자신을 무시하고 진문성에게 말을 건네는 현태오의 이야기에 어리둥절해하던 계연군이 그 말을 듣고 낯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잠시 생각하던 진문성이 말했다.
‘글쎄요, 한동안 갯값을 물어 본 적이 없어서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 현태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쓸모라곤 없는 개야 잘 쳐 줘 본들 헐값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계연군은 개 맞듯 얻어맞았다.
어찌나 깔끔하고 정확하게 뼈를 부러뜨리고 살을 터뜨리는지, 주위에서 말려 보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계연군은 바닥에 널브러져 일어나지를 못했다.
계연군은 두 달 동안 병원에서 나오지 못했고, 당연히 의양군은 길길이 날뛰며 폭행죄니 왕족모독죄니 소란을 피웠지만, 한창 전쟁 중인 와중에 전장에 나설 때마다 연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현태오가 크게 처벌을 받는 일은 없었다. 왕으로부터 점잖은 꾸지람 몇 마디를 들고 석 달 감봉 처분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계연군의 행실이 딱히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현태오와 마주치면 사납게 눈을 부라리기만 할 뿐 멀찍이 피해 다니게 되긴 했다.
“의양군마마는 그래도 다른 부분에서는 처신도 괜찮고 평판도 나쁘지 않은 분인데 말입니다.”
“본인의 처신과는 별개로, 제 아들이 무슨 짓을 하든 눈을 감아 온 결과는 감수해야지.”
진문성이 중얼거리는 말에 현태오는 크게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걸로 그나마 약간의 관심마저 바닥났는지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궁궐 문을 나서 그 옆 주차장에 이르렀다.
일정이 별로 없을 때엔 늘 직접 운전하는 진문성은 현태오가 차에 타길 기다려 운전석에 앉은 뒤 물었다.
“오후 일정은 더 없습니다만, 바로 댁으로 가시겠습니까?”
음……, 하고 현태오는 가볍게 목을 꺾었다. 뚝, 뚝, 뼛소리가 난다.
“유현진은 뭐 하고 있지?”
잠시 목을 풀던 현태오가 느닷없이 물었다. 진문성은 거울에 비치는 그를 멀뚱히 쳐다보다 “글쎄요…….” 하고 중얼거리며 시계를 보았다.
“각하와 뵙고서 헤어진 지 무려 한 시간 반씩이나 지났으니 그사이에 뭔가 커다란 이변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알아보겠습니다.”
“……아냐, 됐어. 집으로 돌아가지.”
현태오는 차 시트에 깊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곧 소리 없이 차가 움직였고, 그들은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귀갓길에 올랐다.
나른하게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현태오가 불쑥 입을 연 것은 차가 본가로 향하는 뜸한 길목으로 접어들었을 즈음이었다.
“유현진이가 말이야.”
“예.”
“음……, 평소 뭘 좋아했었지?”
진문성은 리어뷰 미러로 뒷자리에 앉은 현태오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 눈길을 알아챘는지 현태오도 흘끔 시선을 돌린다. 거울 속으로 눈이 마주치자 현태오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됐든 교제를 하기로 했으면 뭔가 좀 알아야지. 뭘 주기도 해야 할 거고.”
“알아보겠습니다.”
진문성은 고개를 끄덕였고 현태오는 다시 잠자코 창밖을 보았다. 현가의 대문이 저만치 보일 때까지 미묘하게 침묵하던 진문성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교제하는 사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는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주든가, 보석이나 장신구를 주곤 하는 것 같더군요.”
“유현진은 여자가 아니잖아.”
“남자가 좋아할 만한 것이라면 더 쉽지요. 흔하게는 자동차나 시계, 아니면 예쁜 여ㅈ,”
현가의 차고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배달 트럭을 피하느라 신중하게 핸들을 꺾으며 무심코 중얼거리던 진문성이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보지 않아도 거울 속에서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자동차나 시계, 아니면 뭐?”
“……아닙니다. 제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생각하다가 잠시 착각했습니다.”
“문성아. 정신 잘 차리자.”
진문성은 예, 하고 대답했고 현태오는 굳이 그 이상 캐지는 않았다. 진문성은 의문과 혼란이 뒤섞인 머릿속을 정리하면서도 아주 깔끔하게 주차를 마쳤고, 그와 비슷하게 어딘지 모르게 껄끄러운 기색으로 창밖을 쳐다보던 현태오는 차에서 내리며 짧게 혀를 찼다.
“됐어. 어차피 허울뿐인데 그렇게까지 챙겨 줘야 할 이유는 없지. 그건 됐고, 유현진이 머무를 곳이나 잘 알아봐. 어찌 되었든 어머니의 당부도 있는데 잘 대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 ……그래, 본가에서 가까운 데가 좋겠군.”
“예, 알겠습니다.”
진문성은 순순히 대답했고 그걸로 그 화제는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