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현진은 뽑기 운이 나빴다.
부신관이 되고 얼마 있지 않아, 부신관의 의무 사항인 지방 사목을 떠나기 위해 목적지를 추첨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 가기 싫어하는 곳은 대체로 비슷해서 제비뽑기로 결정하는데, 유현진은 평항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다.
24개 행정구 중 하나인 평항이 걸릴 확률은 24분의 1.
그러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현진의 행선지는 평항으로 결정되었고, 유현진은 속으로 이건 사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결과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평항에는 현태오가 있었다. 공식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려면 미리 공공 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데다 이번 사목 일정 중에는 매우 중요한 제례 행사도 끼어 있다. 그의 얼굴을 안 볼 수가 없는 셈이다.
그가 수도를 떠난 4년 동안 겨우 마음을 다스려 놨는데 다시 그 얼굴을 봐야 하다니, 긴장돼서 평항으로 가는 길 내내 심장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6년의 신학교 생활 끝에 이제 부신관이 되었다. 수습 신관과 달리 이제는 정식으로 신관으로 인정받았고, 하나람님의 특별한 은총도 받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에 담고 있는 남자는 흐려지지 않았다. 떠올릴 때마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 동안 나아진 거라곤, 그나마 평소 떠올리는 빈도수가 줄었다는 것뿐이다.
하나람님, 신성한 가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차라리 이 마음을 가져가 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신관으로서 특정인에게―심지어 남자에게― 불순한 애정을 품고 있다니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도 성화 속 하나람님은 자애롭게 웃어 주신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혼자 좋아하는데 뭐 어때. 하나람님은 그렇게 속 좁으신 분이 아니야.’
‘네가 나보다 그분에 대해 잘 알아?’
남의 깊은 고민을 대수롭잖게 쓸어내 버리는 제상아에게 유현진이 삐딱하게 말했다. 갓 지어 입은 부신관 사제복을 쓰다듬으며. 제상아가 눈을 치떴다.
‘그럼 내 말이 틀렸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당장 쪼그라드는 유현진이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얘는 왜 따라오나 한숨을 쉬었다.
유현진이 평항으로 사목을 떠나게 되자 제상아가 당장 함께 가겠다고 들러붙었다. 그녀가 댄 핑계는 함께 순례를 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진짜 이유는 그냥 유람을 하고 싶은 거다. 원래부터가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지만 귀하신 몸이라는 입장상 거의 수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유현진이 간다고 하니, 친구의 사목길에 동행하며 순례해 은총을 받겠다고 우겼단다.
그래도 전하께서 안 보내 주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 쉽게 허락해 주신 모양이었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제상아만 없으면 현태오도 꼭 필요할 때에만 잠깐 보고 말 수 있는데, 그녀가 같이 가면 싫어도 그 얼굴을 봐야 할 터였다. 어쨌거나 멀리 사는 그녀의 정혼자를 방문하는 셈이었으니까.
유현진은 벌써부터 보고 싶다고 기대로 들썩이는 마음을 억누르며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몇 년이나 못 봤는데도 잊히지를 않냐.
아냐,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해 보자.
4년간 제대로 못 봤다. 가끔 현태오가 수도로 돌아와도 먼발치에서만 보고 얼른 피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예전엔 사흘이 멀다 하고 꾸던 꿈도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쯤이나 꿀까 말까.
그러니까 이제 내 감정도 무뎌졌을지 몰라. 얼굴 마주쳐도 뜻밖에 고요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도.
……라는 기대를 품고 갔으나.
무뎌지긴 개뿔.
제상아를 마중하러 나온 현태오의 모습을 멀찌감치에서 발견하는 순간부터 심장이 뛰었다. 유현진은 절망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더 벅차고 설레었다.
티 내면 안 돼. 들키면 안 된다.
제상아와 먼저 인사를 나눈 현태오가 유현진에게 돌아섰을 때, 유현진은 거의 숨조차 멈추다시피 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신세 지다 가겠습니다.’
원래라면 신전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 묵으면 될 것을, 제상아가 붙어 오는 바람에 총독부의 공관 별관에 머물게 되었다. 너 혼자 거기서 자라고, 나는 신전으로 가겠다고 우겼지만 공주님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현태오가 서늘한 시선을 떨구어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부신관의 복장을 한 유현진을 주욱 훑어본 그가 언뜻 입끝을 올리는가 싶었다.
‘드디어 부신관이 되셨나 보군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부신관이 되셨으니 제게 기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가능은 합니다만, 제가 굳이 말입니까?’
평항은 경전에도 나오는 성지 중 한 곳이라 중요한 신전도 있었고 훌륭한 신관들도 많았다. 다른 지역보다 정신관도 더 많다. 그런데 이제 겨우 부신관이 된 내가? 나보다는 정신관의 기도를 받는 게 그를 위해 더 좋을 것이다.
유현진은 겸양하며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현태오의 관자놀이에 은근히 힘이 들어가는 성싶었다.
‘여전하시군요.’
‘……? 각하께서도요.’
이 새끼 봐라…… 라는 글자가 그의 이마 위로 스쳐 가는 듯했다. 그러나 착각이겠지.
‘안으로 드시지요. 모처럼 뵈었으니 차라도 드시며 수도 소식도 전해 주십시오.’
현태오는 선뜻 돌아서 그들을 공관 쪽으로 안내했다.
유현진은 그의 뒷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안간힘을 써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게 너무 좋아서, 목소리 듣는 게 너무 좋아서, 이러다간 오늘에야말로 속마음을 다 들키고 말 것 같았다. 유현진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먼저 숙소로 들어가 있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걸음을 멈춘 현태오가 유현진을 돌아보았다. 그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마주 보았다.
그렇게 똑바로 유현진을 응시하던 현태오는 ‘예,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입매가 어렴풋이 비틀려 올라가는 게 어쩐지 몹시 사나워 보였지만, 그것마저도 오랜만에 보는 눈에는 아름다워 보일 따름이었다.
평항은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었다. 송갈과의 오랜 전쟁 때문에 옛날에 비하면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데도 늘 산물이 풍부한 평항만과 항구를 끼고 있는 그 땅은 변함없이 비옥해 사시사철 풍요로웠다. 과연 두 나라가 기를 쓰고 차지하려 들 만하다.
송갈국과 맞닿아 있는 데다 오랜 옛날부터 송갈과 제양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던 곳이다. 역사적으로도 엎치락뒤치락, 어느 때에는 송갈의 땅이었고 어느 때에는 제양의 땅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송갈에서는 원래 평항이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며 종종 분쟁이 터지기도 했지만, 현재 총독이 온 이후로는 분쟁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했다.
대륙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랜 역사를 가진 평항은 선지자가 하나람님의 계시를 받은 곳이라 하나람님의 신자들이 평생에 한 번은 꼭 찾는 성지이기도 했다. 평항의 신전에서는 매년 가을이면 하나람님께 올리는 제례를 성대하게 치렀는데, 이는 평항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식이라 각계 인사들이 빠짐없이 참석하곤 했다.
이번 사목 일정에 그 제례일이 포함되어 있어, 유현진은 매일 해 뜰 녘부터 해 질 녘까지 신전에서 나가질 못했다. 그렇게 바쁜 유현진을 한가한 제상아가 종종 찾아가곤 했는데…….
‘야, 유현진.’
제례 바로 전일, 하루 종일 신전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늘어져 버린 유현진을 노려보며, 의자에 턱 버티고 앉은 제상아가 으스스하게 말했다.
아까 이른 오후에 신전에 딸린 숲에서 헤어진 뒤 처음 얼굴을 마주치는 거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현태오도 있었다.
‘너 그렇게까지 해서 숨겨야겠어? 그냥 티만 안 내면 되잖아. 꼭 싫어하는 척까지 해야 해?’
‘……싫어하는 척한 적 없는데.’
‘야, 그 태도가?!’
일순 어이없는 낯을 한 제상아가 바락 외쳤다. 침대에 파묻히고 싶어 몸을 꾸물거렸던 유현진은 제상아에게 등짝을 맞고 일어나고 말았다. 유현진은 화끈거리는 등을 문지르며 억울한 눈으로 제상아를 보았다.
유현진도 현태오 앞에서는 자신의 태도가 살짝 뻣뻣해진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살짝이 아니라니까! 하고 제상아는 외쳤다.) 하지만, 안 그래도 현태오와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몇 초간 멍하니 시선을 빼앗기고 마는데, 신경 써서 조심하지 않으면 금세 속마음을 들키고 말 터였다.
들켜선 안 될 이유는 오만 가지쯤 된다.
남의 남자지, 그냥도 남자지, 으리으리한 신분이시지, 성격은 또 어떻고. 아무리 반해서 눈에 콩깍지가 꼈다 하더라도 그가 무서운 남자라는 건 유현진도 알고 있었다. 유현진도 저 남자가 두려웠으므로.
그래서 더더욱 조심하는 건데, 그 태도가 제상아가 보기엔 유난히 뻣뻣했나 보다.
‘하지만 아깐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그리고 아까는 네 탓도 있다, 뭐.’
‘어머, 얘 봐? 왜 내 탓이야?’
‘나무 아래 잘 앉아 있던 애가, 제 담요만 남겨 두고 딴 데 갔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게다가 만날 바빠서 총독부 공관에서조차 마주칠 일이 없는 현태오가 뜬금없이 거기에 앉아 있었을 줄 내가 어떻게 짐작이나 했겠냐고?’
유현진은 억울했다.
오전에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신전으로 찾아간 제상아는 신전 부지의 숲에 있는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았다.
평항에는 제양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아담한 오두막집보다도 훨씬 굵은 몸통의 3천 년 된 나무는 하늘까지 아득하게 자라나 있는데 그 아래에는 노오란 나뭇잎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오전의 잠깐 비는 시간에 제상아와 둘이 나란히 나무 밑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던 유현진은 기도 시간이 되어 자리를 떴다. 한 시간 반 뒤에는 점심시간이라 다시 쉴 수 있다고 했더니, 제상아는 그때까지 계속 여기 있을 테니 기도 마치고 오라며 유현진을 보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차에 마침 수도의 동생에게서 걸려 온 안부 전화를 받고 평소처럼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은 유현진은, 제상아의 친구이기도 한 동생의 소식을 그녀에게도 전해 주러 흥겹게 숲으로 뛰어갔다. 멀리서도 보이는 아름드리나무 뒤편에는 여전히 그녀의 돗자리 끄트머리가 보였다.
흙바닥 위로 울룩불룩 솟아오른 굵다란 나무뿌리를 조심조심 피해 가면서 나무 기둥 뒤에 가려지듯 앉아 있던 인기척 옆에 탈싹 주저앉았을 때에는 잔뿌리에 걸려 신발 끈이 풀려 있었는데, 하마터면 끈을 밟고 넘어질 뻔한 유현진은 신발 끈을 도로 꽁꽁 묶는 데에 집중하며 토달토달 말했다.
「아, 진짜, 세진이 잔소리 엄청 많아. 기도 끝나자마자 세진이한테 연락 왔거든. 세진이가 너더러 모처럼 유람 나갔으니 즐겁게 다니다 오라고 전해 달래. 그리고 나더러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현태오 총독 만났다고 기분,」
――좋다고 넋 빼놓지 말고 정신 잘 챙기고 다니라고 하더라, 라고 여상하게 말을 이으려던 유현진은, 신발 끈을 다 묶고 옆에 앉은 제상아에게로 고개를 돌리다가, 뚝하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제상아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제상아가 깔아 놓은 담요 위에, 현태오가 홀로 앉아 있었다.
유현진은 몸과 머릿속이 한꺼번에 얼어붙었다.
늘 바빠서 저녁 식사 때 외에는 얼굴 보기도 힘든 남자가, 평일 낮에, 신전 숲에 있는 나무 아래, 이렇게 덩그러니 앉아 있다니.
「……, 상아는……어디…….」
어찌나 정신이 없었던지 무엄하게도 그 정혼자 앞에서 공주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달싹거리며 중얼거리는 유현진에게, 서늘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대답했다.
「정혜궁마마는 조금 전까지 여기에 계시다가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각하께서는 왜 여기…….」
「내일 있을 제례 때문에 신전에 들렀다가 지나가는 길에 정혜궁마마를 뵈어서요.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해서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시군요…….」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저 위에서 나뭇잎들이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따름이었다.
유현진은 묵묵히 찻주전자를 들고 자신의 빈 잔에 차를 따랐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싶었)는데, 바싹바싹 마르는 목을 막 축이려 한 순간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헌데 동생분이 사제님께 뭐라고 하셨나 보군요. 절 만난다고 기분이……?」
사레들릴 뻔했다.
쿨룩, 겨우 숨을 참은 유현진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현태오 총독 각하를 만난다고,」
들키면 안 되는데. 자칫 말을 잘못해서 들켜 버리면 절대로 안 되는데.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유현진은 찻잔만 노려보며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하고 보니 이건 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게다가 어쨌든 들키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유현진은 애써 시선을 들어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거짓말이라는 게 표정에서 드러날까 봐 얼굴도 최대한 무표정을 덮어썼다.
현태오는 묵묵히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절 만난다고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예. 하지만 여기선 각하와 거의 마주칠 일이 없으니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유현진은 차를 삼켰다. 차가 무슨 맛인지, 목으로 제대로 넘어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마셨다. 최대한 태연하게. 설령 그가 뭔가 말을 더 시키더라도 차를 마시는 척하며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게끔.
아주 묵직한 침묵이 오래 흘렀다. 체감상으로는 영겁쯤 지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현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유현진을 바라만 보았을 뿐이다. 그 시선 앞에서 유현진은 꿋꿋이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점점 저릿저릿해진 손끝이 덜덜 떨리기 직전에야 제상아가 돌아왔고, 어머, 사제님 오셨군요? 라고 환하게 말을 거는 그 밝은 목소리에 얼어붙은 공기가 겨우 그럭저럭 흩어졌다.
늘 바쁜 현태오가 이내 자리를 떴기 망정이지, 그대로 1분만 더 있었더라면 아마 유현진은 그대로 굳어 석상이 되었다가 풍화되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너도 정말 배짱 좋다. 현태오 총독이 서슬 퍼렇게 널 쳐다보고 있던데 그 앞에서 차가 목으로 넘어가던?’
‘……그랬어?’
‘이 맹한 것! 넌 배짱이 좋은 거니, 진짜로 어디 문제가 있는 거니?!’
제상아가 머리를 쥐어뜯을 기세로 소리쳤다. 지은 죄가 있는 유현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좋아한다는 내색만 안 하면 되지, 왜 굳이 그렇게 싫은 티를 내냐고?! 그것도 저 현태오한테? 보는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알아? 너 저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남잔지 몰라?! 설령 왕족이라 해도 수틀리면 그냥 밀어 버리는 인간인 줄 모르냐고?! 예전에 우리 재종 오라버니 나대다가 개 맞듯이 얻어맞고 입원한 거 기억 안 나?!’
다락다락 외쳐 대는 그녀의 앞에서 유현진은 눈 찔린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아니 나는 정말로 싫은 티 낸 적 없다니까……. 그냥 좋아하는 내색만 안 하려고 노력할 뿐…….’
‘――!!!!!’
제상아의 표정에서 오만 쌍욕이 날아왔다. 유현진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평항 소식과 함께 현태오가 나오고 있었다. 어딘가 시찰 중이었는지 거리를 걷는 현태오를 측면에서 잡은 화면을 유현진은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실물이 화면보다 나았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화면이 나았다. 이렇게 마음 놓고 편하게 쳐다볼 수 있으니까.
그런 유현진을 어이없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던 제상아가 갑자기 온 힘이 다 빠진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냥 여태 하던 대로 해라……. 그래야 되겠네. 눈에서 꿀이 흐른다, 흘러. 아주 그냥 양봉하셔도 되겠어요.’
(그때 마침 다른 뉴스로 넘어가 더 이상 현태오가 화면에 안 나오기도 해서) 유현진은 흘끔 제상아를 쳐다보았다. 계속 구박만 받자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슬쩍 솟구쳤다.
‘그보다 상아 넌 여기 왜 온 거야?’
‘순례.’
신전에는 가끔 유현진을 보러 놀러만 왔다 가는 제상아가 아주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것치고는 신전에 거의 안 있잖아. 뭐 하고 다니는 거야?’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신전에 있는 유현진이다. 그러나 신전에서 기도하는 제상아의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여기저기 구경. 평항엔 처음 와 보잖아. 송갈이랑 문화가 섞여서 건축도 풍속도 특이하고 볼 게 많아.’
‘막 다니지 말고 얌전히 좀 있어. 위험하잖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상아에게는 당연하게도 호위가 붙어 있었다. 전하께서 특별히 붙여 준 호위란다. 원래라면 현지에서 총독이 그녀에게 호위를 붙여 줄 테지만, 바쁜 평항 총독을 굳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임금님이 특별히 딸려 보내셨다고.
그 덕에 평항 총독은 그녀에게 따로 호위를 내주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 없다고 거절하자 잠시 그녀를 보다가 선선히 ‘알겠습니다.’ 하고 호위를 물렸단다.
하지만, 아무리 호위가 붙어 있다곤 해도 너무 겁 없이 다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제례 참석 문제 때문에 급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 제상아를 찾으러 나갔더니, 그녀는 번화가의 찻집에서 낯선 남자들과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고 둘이랑.
움찔해서 둘러보자 구석 자리에 호위가 앉아 지켜보고 있어서 일단 마음은 놓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공주님이 낯선 데에서 낯선 남자들이랑 저렇게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다니.
유현진이 경계 서린 눈으로 다가가자 그를 발견한 제상아는 「어머, 현진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반갑게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남들 앞에서는 경칭을 쓰지만 차마 이런 자리에서 공주 마마 하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유현진은 머뭇머뭇 「어……상아야…….」 하고 말을 붙이며 다가갔다.
「이분들은……?」
「응. 여기서 만났어. 송갈에서 여행 오셨대. 같이 차 한잔 마시자고 해서 얘기 나누는 중이야.」
날더러 생전 처음 보는 미인이라지 뭐니? 이따 밤엔 여기서 제일 분위기 좋은 선술집엘 데려가 주시겠대, 하고 기쁜 듯 까르르 웃는 제상아를 유현진은 아연히 쳐다보았다. ……아니 이 공주님이 미쳤나.
「친구분이세요? 설마 남자 친구는 아니죠?」라며 붙임성 좋게 웃으며 말을 붙이는 그 남자들에게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유현진은 이를 갈며 그녀를 질질 끌고 나왔다.
「야, 너 미쳤어?! 어딜 겁도 없이 외간 남자―심지어 적국의 정체 모를 남자―들과 차를 마셔, 마시길! 그리고 뭐, 선술집? 이게 정신이 나갔나, 너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나 알아?!」
유현진이 펄펄 뛰었지만 제상아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눈이 세모꼴로 돌변한 제상아가 「내가 무슨 불륜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원나잇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행지에서 미청년이랑 차 한잔 정도의 추억이나 쌓겠다는 건데 왜 그래?!」 하고 되레 성을 냈다.
너 나 못 믿냐, 너 지금 울 아버지가 붙여 준 내 호위 못 믿냐, 하고 총탄처럼 다다다닥 쏘아붙이던 그녀는 급기야는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았다.
「난 이렇게 멀리 여행 나온 건 처음이란 말야……. 모르는 사람들이랑 얘기를 나누는 것도, 이런 곳에 다니는 것도 처음이라구……. 이제 수도로 돌아가면 다시 평생 이런 데엔 와 보지도 못하고 지내야 할 텐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린애처럼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는 그녀를 앞두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유현진은 결국 두 손 들고 말았다.
마음이 약해져서 생각해 보니, 그래, 그렇긴 하다.
어릴 때부터 엄격한 궁중에서 새장에 갇힌 새처럼 자라난 그녀다. 어디 한번 가려고 해도 제약이 많았고 일거수일투족 다 남들 시선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번에 어쩐 일로 전하께서 허락해 줬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먼 곳에서 자유로이 다니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전하께서도 그런 딸이 측은해서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며칠이나마 자유롭게 놀다 오라는 마음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알았어……. 그래,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하게 놀아……. 하지만 늘 조심하고. 응? 자, 울지 마.」
유현진은 손수건으로 제상아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번 달래 놓고 보니, 그 뒤로도 매일같이 어디를 쏘다니는지 신나게 돌아다니는 그녀에게 뭐라고 할 도리가 없었다.
어째 아무래도 내가 얘한테 뭔가 속아 넘어간 것 같은데……,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매일매일 즐겁게 상기된 얼굴로 다니는 그녀를 보노라면 유현진도 마음 한구석이 흔흔해지긴 했다.
‘오늘은 뭐 했어?’
유현진이 침대 위에서 그녀 쪽을 향해 다가앉으며 묻자 막 방금까지 서슬 퍼렇게 잔소리하던 제상아는 금세 사랑스러운 낯으로 돌아왔다.
‘시장에 갔었어! 재밌더라. 사람들 엄청 많은 거 있지?’
‘조심해서 다녀. 여긴 송갈 사람도 많으니까. 모르는 사람이랑 함부로 막 어울리지 말고.’
‘송갈 사람은 뭐 아무나 공격하고 다닌다니?’
‘넌 공주님이잖아!’
‘그걸 누가 알아?’
유현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이번엔 자신이 잔소리를 퍼부으려다가 가만, 하고 눈을 깜박였다.
‘……하긴 네가 평소에 나 대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아무도 네가 귀하신 공주님인 줄 모르긴 하겠다.’
‘너 지금 나 욕했겠다? 내가 작정하고 쌍욕 한번 해 줘?’
‘욕인 줄 알면 그러지 좀 말라고!’
잔소리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유현진을 곁눈질로 보며 눈웃음을 지은 제상아는 ‘걱정 마. 안심할 만한 사람이랑 다니고 있으니까.’라고 대꾸했다. 안심할 만한 사람 누구, 라고 유현진이 막 물어보려던 차에 그녀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내일 제례 준비는 다 됐어?’
‘어? 아, 응. 너 내일은 꼭 와야 해. 순례하러 온 사람이 제일 중요한 제례까지 빼먹을 생각하지 마.’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현진은 단단히 못을 박았다.
내일은 사목의 마지막 날이자 평항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가장 중요한 제례였다.
평항의 각계 주요 인사들이라면 대부분 참석하는 행사다. 수도에서 여기까지 순례를 온 공주님이라면 참석해야 마땅했다.
이 제례만 마치고 나면 이번 사목 일정은 끝나고 수도로 돌아가게 된다.
‘…….’
아쉽다.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비록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습관처럼 무심코 현태오를 떠올린 유현진은 얼른 생각을 흩어 버리려다 한숨을 쉬고 말았다. 어차피 안 된다. 이미 수도 없이 시도해 봤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지울 수 있을까.
기어이 평생 품고 갈 수밖에 없는 걸까.
‘내 감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제상아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아까부터 문득문득 생각에 잠기는 듯하는 그녀를 유현진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금세 시선을 알아차리곤 ‘뭐? 왜?’ 하고 되묻는 그녀는 다시 평소처럼 반짝거리는 표정을 하고 있어, 유현진은 고개만 잠깐 갸웃거리고 말았다.
제례는 정확히 예상되었던 시각에 치러졌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는데, 제례를 앞두고 끊임없이 신전으로 들어오던 인파들 가운데 현태오 평항 총독이 들어섰을 때, 누군가가 폭탄을 던졌던 것이다.
전날부터 미리 신전의 입구에서부터 본당 및 별관에 이르기까지 안전 점검을 하고 대비를 마친 덕에 그 급조된 폭탄은 위력이 크지 않았고, 또한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총독의 근처에 있던 호위들이 방호막으로 엄폐해 피해는 크지 않았다.
크고 작게 다친 사람들은 몇몇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었고 정작 범인이 노린 총독은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다. 다친 곳이라곤, 범인이 한꺼번에 투척한 몇 개의 폭탄들 중 발밑으로 굴러와 연기를 피워 올리는 불발탄 하나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워 올린 총독이 그것을 달아나려는 범인의 뒤통수로 던지는 와중에 손바닥에 입은 화상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붙들린 범인은 송갈의 청년이었고, 송갈과의 전쟁에 임했던 현태오에 대한 보복이라고 인정했다.
그 소식은 당연히 신전 안에서 제례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제례 시각을 연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일었지만 총독의 명에 따라 한 걸음 먼저 도착한 위병이 ‘제례 시각까지는 올 테니 연기할 필요 없다’고 알려 제례는 예정대로 이행되었다.
현태오 총독에게 송갈의 청년이 폭탄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현진은 온몸에서 핏기가 가셨다. 곧이어 ‘부상자가 몇 명 발생했으나 현 총독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했지만, 그럼에도 쿵쿵거리며 뛰는 심장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해마다 한두 번쯤은 벌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현태오가 평항으로 온 뒤로 다섯 번째라고. 그나마도 현태오가 부임한 뒤로 퍽 줄어서 그 정도라고 했다.
……하나람님.
제례가 시작되고 신관들 모두가 본인의 위치에 섰다. 유현진 역시 단상 위의 끝자리에 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제일 앞줄 가운데에 막 들어와 앉는 현태오의 모습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현태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서늘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반듯하게 앉아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 사람과 짤막하게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다시 단상 위의 대신관에게 시선을 주는 몸짓도 평소와 같다.
‘――축복의 기도를.’
제례가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신관이 말하자 제일 앞줄에 앉아 있던 이들 열 명이 일어선다. 그들은 단상으로 올라와 줄지어 선 열 명의 사제들을 마주 보고 섰다.
신자들의 대표로 선 열 명이 돌아가며 축복의 기도를 받는다. 각계 인사에서 뽑은 그 열 명 중에는 제상아도, 현태오도 있었다.
한 사람이 가고, 또 한 사람이 가고, 차례로 한 사람씩 돌아가는 와중에 유현진의 앞에 제상아가 섰다. 왕실의 일원으로서 엄숙하게 자리한 그녀의 맞잡은 두 손을 그러쥐고 축복의 기도를 드린다. 모든 제식과 모든 기도문은 정해져 있었다. 유현진은 정해진 기도문을 낮게 읊조리며 그녀를―그녀로 대표되는 세상의 신도들을― 축복했다.
그녀 또한 옆으로 넘어가고 그다음으로 현태오가 유현진의 앞에 섰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무심한 얼굴로 유현진의 앞에 선 현태오가 정해진 대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맞잡았다. 이제 유현진 역시 정해진 대로 그 손을 감싸 쥐고 축복의 기도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원래는 다른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아까부터 불안스럽게 일렁이는 심장이 기어이 속삭이듯 말을 뱉어 내고야 만다.
옆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한, 짧고 무뚝뚝한 물음이었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정중한 자세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현태오가 뜻밖이라는 듯 눈을 들었다.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이 뚫어져라 유현진을 보았다. 그 얼굴에 혹시 아프거나 고통스러운 빛이 숨어 있지는 않은지 유현진은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던 현태오는 이윽고 ‘없습니다.’라고 낮게 되속삭였고, 그제야 유현진은 그를 낱낱이 살피던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막 그의 손을 감싸 쥐려 할 때, 그제야 그의 손바닥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두 손을 느슨하게 그러쥔 틈새로 엿보이는 벌건 화상 자국.
이미 다른 신관들은 기도를 시작했고, 잠시 그 상처를 내려다보던 유현진도 서둘러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기도문을 속삭였다. 현태오의 손등을 감싼 유현진의 손바닥에 은은하게 빛이 맺힌 것은 아무도 몰랐다.
태초에 노래는 기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 또한 기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노래와 시는 하나람님을 위한 찬미이며, 이 순간에는 현태오를 위해 올리는 간청이었다.
그가 아프지 않기를.
그가 다치지 않기를.
오래도록 마음을 다해 기도한 단 하나의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기도해 왔다. 신학교에 발을 들이던 날부터 계속.
오랜만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듯 오랜만에 보아도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이 사람이 좋았고, 계속 보고 싶었고, 계속 목소리를 듣고 싶고, 계속 옆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하나람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가 가질 수는 없다 해도,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늘 그가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하나람님. 부디 이 사람을 보살펴 주세요.
늘 전장 속을 누비며 살아온 이 사람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지낼 수 있기를.
또한,
이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유현진이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줄곧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까맣고 거침없는 눈이 유현진을 향하고 있었다.
달캉, 심장이 내려앉았다.
유현진은 굳은 얼굴로 시선을 떨구며 얼른 손을 놓았고,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현태오는 옆 사람의 머뭇거리는 재촉을 받고서야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다음 차례의 사람이 유현진의 앞에 섰다.
그 옆의 신관에게로 걸어가던 현태오가 불현듯 멈칫하더니 기묘하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손바닥을 응시하던 그는 의아한 낯으로 그를 기다리는 신관의 기색을 알아채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현진은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느새 자신의 손바닥으로 옮겨 온 상처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끔, 다음 사람의 손을 조심히 감싸 쥐며 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드넓은 신전 안에는 신관들의 정갈한 기도 소리만 고요하게 울려 퍼졌고, 제례는 아무 탈 없이 끝났다.
무슨 변덕인지 일주일 더 있다 가고 싶다는 제상아의 고집에 따라 유현진은 사목 일정이 끝났음에도 평항에 조금 더 머물렀지만, 그 뒤로 유현진이 현태오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평항의 총독은 그러잖아도 몹시 바쁜 자리였는데, 가장 중요한 행사가 끝난 직후인 데다 심지어 테러 사건까지 벌어진 바에야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쁠 터였다.
결국 수도를 향해 출발하는 날, 출발하기 직전에야 제상아를 배웅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낸 현태오와 마주칠 수 있었는데, 헤어지는 게 못내 서럽고 아쉬웠던 유현진은 그 기색을 들킬까 봐 그에게는 짧은 눈인사만 남기고 한발 먼저 돌아서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친 제상아와 함께 다시 수도로 돌아오며, 유현진은 백 년쯤은 더 늙어 버린 기분이 들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런 유현진의 맞은편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제상아가 속삭였다.
‘좋은 곳이었어.’
‘그래? 좋았어?’
유현진은 묻자 그녀는 잠시 더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았어. 꼭 다시 돌아오고 싶을 정도로. 너는?’
유현진은 창밖을 보았다. 멀어져 가는 평항을 보며 조용한 한숨을 쉬었다.
‘응, 나도.’
그러고는 눈을 감아 시야에서 평항을 밀어내며, 이번 사목을 마치는 마지막 기도를 했다. 오로지 현태오를 위해.
그가 늘 무사하기를. 또한,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이라고.
*
완연한 겨울에 접어들었는데도 뜰에 내리쬐는 볕은 마치 봄볕처럼 보송보송했다.
집 안에선 로봇 청소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뭔가가 바닥에서 싹싹거리며 움직이는 게 영 익숙지 않아서 유현진은 청소기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앞뜰에 나와 있었다.
햇볕은 따뜻했으나 겨울 공기는 싸늘했다. 무릎을 끌어안고 뜰의 의자에 앉아 있던 유현진은 스르륵 의자에 모로 누워 버렸다.
신전에서 쫓겨나 일반인이 된 유현진은 주체할 수 없이 시간이 남아돌고 있었다.
신관이었을 때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신전 청소와 정리를 하고, 아침을 먹고, 교리 공부를 하고, 찾아오는 신자들을 응대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신자들을 응대하고, 사목이며 공공 행사 등등 그날그날의 일을 보고, 저녁을 먹고, 다시 기도를 드리는 걸로 하루 일과가 꽉 차 있었다.
이제 유현진이 하는 건 기도를 드리고, 아침점심저녁을 먹고,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걱정할 것은 한도 끝도 없이 많았는데, 당장 뭘 해서 먹고살지부터 시작해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그사이에 들키면 어떡하나, 설령 안 들키고 이대로 잘 흘러간다 한들 그건 또 어떡하나 등등, 걱정하다 보면 하루해가 훌쩍 넘어갔다.
일단은 일자리를 구해야 할 텐데.
신관으로만 살아왔으니 검소하게 생활하면서도 돈 걱정은 한 적이 없는데 속인이 되고 나니 당장 먹고살 게 문제다. 신관 노릇만 했으니 취업에 쓸 만한 실용 기술을 알 리 없고, 연줄이라도 이용할까 싶어 얼굴에 철판 깔고 제상아에게 ‘혹시 정혜궁에 사람 쓸 일 없니……?’ 하고 찔러 봤지만 그녀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냉장고에 음식들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으니 굶을 염려는 미뤄 둘 수 있었다. 그보다 지금 당장 당면한 걱정은,
“추운데 왜 밖에 나와 계십니까?”
“…….”
이 남자는 신기할 정도로 기척 없이 오더라…….
유현진은 유령처럼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대문 여닫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느새 현태오가 뜰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진문성이 그 옆에 없는 걸 보니 오늘은 다른 볼일은 없나 보다.
“로봇 청소기가 시끄러워서 잠시 나와 있었습니다.”
“아아……, 지금 문성이가 집안일 봐 줄 사람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 당분간만 기다려 주십시오.”
현태오는 집 안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조그만 기계를 보더니 납득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주택 보수업체 사람과 잠깐 찾아왔던 진문성이 ‘상주하면서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하루 이틀 안에는 들어올 것’이라고 했었는데 그로부터 이미 며칠이 지났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집을 더 작은 데로 옮기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제가 다 알아서 해도 됩니다만.”
“더 작은 데로요.”
유현진의 말에 현태오는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생각 없구나. 표정만 봐도 알겠다.
하긴 처음에 이 집을 보고 ‘아담하고 나쁘지 않군요. 좀 작은 듯은 하지만 혼자 사시기에는 괜찮아 보입니다.’라고 했던 남자다.
대체 혼자서 화장실 네 개와 방 여덟 개, 크고 작은 거실이 딸린 이 층짜리 주택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잠시 동안만 빌려 살 집인 데다 자신이 빌린 집도 아니라―게다가 유현진이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급하게 구하느라 고생을 좀 했습니다. 다시 구하라면 참 힘들 것 같습니다.’라며 진문성이 빙긋이 웃는 바람에― 유현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어차피 내년 봄까지 길어야 서너 달 지내실 건데 굳이 다시 집을 찾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 집도 문성이가 꽤 힘들여 찾은 건데.”
“그러니까 그건 제가,”
찬바람이 휭 불어 유현진이 몸을 움츠리며 말했지만, 현태오는 더 듣지도 않고 일어나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오라는 듯 흘끗 눈길까지 주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유현진도 따라 들어간다.
그새 청소기는 안방으로 들어가 있었고 현태오는 방문을 닫아 버렸다. 저 안에서만 열심히 싹싹거리며 돌아다닐 청소기는 방음 처리가 아주 잘된 문에 가로막혀 조용해졌다.
막 거실로 돌아와 앉으려던 남자는 멈칫하더니, 아, 사람이 없지, 하고 중얼거리곤 주방으로 갔다. 겨우 몇 번 왔을 뿐인데 그는 이미 어디에 뭐가 있는지를 유현진보다 잘 아는 듯 익숙하게 제 손으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아, 제가 드리겠,”
“제가 끓인 게 더 맛있더군요.”
주방으로 다가서려던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잘라 말했다.
맞는 말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 현태오가 직접 끓였는데 유현진이 한 것보다 나았다.
결국 유현진은 주방이 보이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구경을 했고, 현태오는 능숙하게 차를 끓였다. 냉장고에는 진문성이 채워 넣은 각종 음식들이 있었는데, 현태오는 냉장고도 마음대로 열고서 곁들여 먹을 만한 과자류 몇 가지를 접시에 내왔다.
누가 보면 이 남자가 이 집 주인인 줄 알겠다. ……아니, 이 남자가 집주인 맞긴 하지…….
현태오는 이 집에 예고도 없이 종종 들렀다. 이사 온 지 닷새째인데 오늘이 네 번째이니, 이쯤이면 당황할 정도로 자주였다. 애초에 현가 본가에서 고작 걸어서 십 분 거리인 게 문제였다. 그나마 잠시 앉아 있다 금방 가 버리긴 했지만.
이렇게 자주 얼굴 보여 줄 줄은 몰랐는데.
하나람님 감사합니다.
앞날이 어떻게 흘러가든 일단 당장 눈앞에 현태오를 두고 있는 이 시간은 행복한 유현진이었다.
그러나 속내를 티 내선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 유현진은 현태오가 오면 거의 늘 입을 꾹 다문 채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현태오는 왜 왔는지 모르게 유유히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안 된다.
오늘만큼은 이야기해야지.
유현진은 현태오가 손수 끓여 준 차를 행복한 마음으로 마시다 말고 찻잔을 딱 내려놓았다.
“아까 세진이와, 동생과 통화를 했습니다.”
유현진이 단호하게 말문을 열자 차향을 음미하던 현태오가 유현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방은 치워 둔 채로 그대로 두었으니 언제든 그쪽으로 오라고 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아무래도 동생 집으로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마음 써 주셨는데 죄송합니다만, 돌아오는 주말에 옮길까 합니다.”
현태오는 유현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차를 마셨다. 차가 잘 우러났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넘긴 뒤에야 그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는 같은 얘기를 여러 번 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늘 이후로 다시는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현진은 다시금 단호하게, 현태오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세진이도 제게 들어오라고 권하는 데다, 우리가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신세 지기도 불편합니다. 제양의 국민으로서 제게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으니 각하의 명령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고요. 주말에 옮기겠습니다.”
유현진은 도중에 끼어들 여지가 없도록 단숨에 말을 늘어놓으며 정색했다. 현태오와 얘기할 때는 정색을 안 하면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밀리는 기색을 보이면 진짜 인정사정없이 밀고 들어왔다. ……정색을 한다고 안 밀고 들어오는 건 아니었지만.
유현진이 말을 끝내자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두 부분으로 나눠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거봐. 당장 밀고 들어오려고 시동 걸지.
“일단 멀쩡하게 집을 구해 드렸는데 굳이 좁은 동생분 댁으로 들어가 서로 불편할 이유가 있겠냐만, 이 이야기는 지난번에도 했는데 굳이 또 하시는 걸 보니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게 낫겠지요. 구태여 이사를 세 번, 네 번 하실 것 있습니까? 동생분 댁에 가셨다가 다시 이곳으로 오시고, 또 여기에서 다시 현가로 옮기신다면 그것만 해도 세 번인데요.”
“동생 집으로 가면 여기로 다시 올 일은 없,”
“동생분도 언제까지 거기 사실지 모르지 않습니까? 갑작스럽게 아주 먼 지방으로 전출을 갈 수도 있을 테고요.”
유현진은 움찔했다. 어쩐지 지금 뉘앙스가 미묘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요, 동생은 인사 발령을 올해 초에 받았기 때문에 향후 몇 년간은 변동이 없을 겁니다.”
“장담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요?”
“…….”
담담하게 되물으며 똑바로 바라보는 현태오의 기색에 왠지 모르게 등줄기가 살짝 추워지는 게, 어쩐지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말뜻이 무슨 뜻인지 자세히 되짚어 볼 여유도 주지 않고 다시 불도저가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신세 지기 불편하다고 하시는데,”
거기서 현태오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 뚫어질 듯 유현진을 쳐다보던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잘 아는 사이가 되어야 하는 사이 아닙니까? 유현진 씨?”
“――.”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셨습니까? 뭐라고 부르실지?”
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고민 중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 하나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다른 호칭으로 부르시는 게 낫겠습니다. ……유현진 씨가 원하시는 대로 불러 주십시오.
여태 현태오가 이 집에 찾아올 때마다 어물어물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었는데, 기어이 대놓고 물어보는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어둡게 낯을 흐리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매우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뭐라고 하는지 보자는 듯.
유현진은 자세를 반듯이 했다. 상사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리를 편 유현진은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입니다만, 몇 가지 생각해 봤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현……, ……께서 각하로 불리길 원치 않으신다면, 사회에서 서로 아주 친근하지는 않지만 적절히 예의를 갖추어 쓰는 호칭인, 선생님은 어떨까요.”
“…….”
이건 아닌가 보다. 표정에서 그나마 있는 듯 마는 듯 하던 온기가 딱 멎어 버린 게 한눈에 보였다.
“그러니까, 현 선생님.”
“다른 건 없습니까?”
조심스레 불러 봤지만 현태오는 생각해 보는 척도 하지 않고 곧바로 되물었다. 유현진은 하는 수 없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니면, 보통은 같은 학교나 같은 직장일 경우에 쓰는 말이긴 하지만 인생이라는 차원의 넓은 의미로, 선배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현 선배님.”
“…….”
이것도 아닌가 보다. 입 끝만 살짝 올려 웃는데, 아무리 봐도 저 얼굴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아니면 우리 모두는 하나람님 안에서 한 형제이니, 형제님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고요.”
“신전 안에서 그렇게 부르시는 건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유현진은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게 거의 없었다. 현태오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유현진은 찻잔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현태오…… 씨.”
“저는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씨’로 불린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저를 그렇게 부르는 분은 거의 안 계시지요.”
살짝 눈매가 서늘해진 현태오가 즉답했다. 유현진은 조금 더 오래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현태오 혀…….”
……이건 때려죽여도 못 부르겠다.
입을 연 채 긴 침묵을 하다가 결국 도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어디 계속해 보라는 듯 유유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십시오. 다시,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풀 죽어 중얼거리는 유현진을 가느스름한 눈매로 보고 있던 현태오는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안 되는데. 말해야 하는데. 오늘에야말로 여기서 나가서 동생의 집으로 옮겨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담판을 지어야 하는데. ……그런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물 건너간 것 같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여기서 더 우겨 봐야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것 같았다.
――안 돼요, 당장 나와서 우리 집으로 옮겨 와요! 최대한 거리를 두라고요!
유세진이 외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그날, 이삿짐 싸는 걸 도우러 사택으로 왔던 유세진에게 한천 형무소로 가게 될지도 모를 암담한 미래에 대해 털어놓자 손끝이 싸늘해질 때까지 침묵하던 동생은 손끝만큼이나 창백해진 얼굴로 달달 떨며 말했다.
‘괘…… 괜찮아요, 형님을 위해서라면! 형무소쯤은 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진실을 밝혀도 돼요, 난 참을 수 있습니다!’
‘난 안 돼! 난 못 가!’
‘그래요, 형님은 못 가요! 가면 안 돼요!’
덩달아 외친 유세진은 ‘사실은 나도 못 가요…….’ 하고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숨을 헐떡였다.
두 손을 꼭 붙든 형제가 기나긴 침묵 끝에 내린 결론은, 진실을 밝혀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난관을 어찌하냐며 꺼이꺼이 울던 유세진은 눈물을 훔치며 당부했다.
어떻게든 거리를 두라고. 반드시 거리를 두라고. 최대한 거리를 두라고. 절대로 진실이 알려질 만한 어떠한 계기도 만들지 말라고.
그러니 어서 그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어제도 오늘도 전화로 닦달을 해 대고 있었건만.
무턱대고 여기서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간 되레 동티가 날 것 같아 함부로 우기지도 못하겠다…….
유현진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차를 마셨다. 고개를 돌리자 거실의 통창 너머 뜰에는 그 우울한 마음 따위 알지도 못하는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뜰이었다. 사실 처음 이 집에 들어선 순간 저 뜰 때문에 한눈에 마음에 들긴 했다. 그때 유현진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던 현태오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라고 한마디 던질 정도였으니, 어지간히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마음 편히 신세를 질 수 있는 상황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정말로 저 남자가 술에 취해서 덮쳐 버렸다는 그 설정이 진짜이기라도 했더라면. 이렇게 흘러가는 상황이 모두 다 진실이었더라면.
유현진이 어둑해지는 마음으로 차를 삼킬 때였다.
“이번에 제가 여러 곳에서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태오가 불쑥 말했다. 유현진은 차로 떨구고 있던 시선을 들어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워낙 떠들썩한 일이었으니 여기저기서 연락이 많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유현진 씨를 염려해서 제게 연락 준 분들도 제법 계시더군요.”
“……저요?”
“예. 사제님 몇몇 분들이나 왕실에서도 그렇고, 가까이는 형님들이나 제 어머니도 그렇고요.”
“아.”
유현진은 낯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총리 부인――현태오의 어머니에게서 전갈이 왔었다. 조만간에 얼굴 한번 보자고. 아직 정확한 날짜는 잡지 않았지만 그날이 언제가 될지 유현진은 떨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수년이나 신세를 진 집이다. 현가의 형님들과도, 아주 친근하진 않았어도 나름대로 잘 지냈다. 세진이는 형님 형님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고. 총리 부인도 그들 형제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결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기분이었다.
“놀랐습니다. 의외로 평이 좋으시더군요.”
현태오가 감탄스럽게 하는 말을 듣고, 여태 열심히 잘 살아왔던 유현진은 살짝 욱했다.
“어째서 의외입니까?”
“맡은 일을 잘하는 것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 아니겠습니까?”
“왜 제 인간관계가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시죠?”
“그야――.”
눈을 부릅뜨고 따져 묻는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현태오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말을 흐렸다. 마치 네 과거를 돌이켜보라는 듯이.
내가 뭐. 왜.
가끔 너무 엄격해 보인다는 얘기를 듣는 일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 왔다. 게다가 이 남자에게도, 비록 속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하느라 살갑게 굴지는 못했지만, 내 나름대로 얼마나 예의 바르고 반듯하게 잘 대해 주었던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욕먹(는 기분이 들)자 한층 더 억울해진 유현진은 정색하며 말했다.
“적어도 현―…보다는 제가 더 인덕이 있을 겁니다.”
“아. 비교 대상이 저입니까?”
현태오가 헛웃음을 웃었다. 그 반응에 유현진은 왠지 더 욕먹은 기분이었다. ……랄까 애초에 비교 대상을 이 남자로 잡았다는 것부터가 셀프로 욕한 셈이다. 이 남자는 그 놀라운 업적과 능력으로 찬탄과 외경은 받되, 인간적인 부분에서 좋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나쁜소리험한소리궂은소리라면 또 몰라도. ……본인도 본인이 인성으로 좋은 평가 못 받는 건 아는구나.
그런데도 저놈이 좋아? 응?! ――또 제상아와 유세진이 입 모아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호칭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겠군요. 계속 그렇게 애매하게 부를 수는 없잖겠습니까?”
현태오가 다시 압박해 왔다. ……상아야, 세진아, 이 남자가 좀 덜 좋아질 것 같긴 해…….
“그건, 좀 더 시간을,”
“시간은 이미 충분히 드린 것 같은데요. 지금 불러 보십시오.”
“……현, ……현, ……현,”
유현진은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시야 끝에 비친 그의 입매가 언뜻 휘어지는 것 같았다.
“……태…… 오…….”
한 음절 한 음절 더듬거리는 유현진에게 현태오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까지 끄덕인다.
“……야.”
“…….”
“…….”
웃음기가 그쳤다. 고갯짓도 그쳤다.
다급한 마음에 얼결에 내뱉었던 유현진은 심장이 졸아들었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했더니……, 그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하지만 현태오의 이마에 슬쩍 핏대가 서는 듯싶은 건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나이 차가 나더라도 교제하는 사이에는 반말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유현진은 얼른 변명했다. 어찌나 당황했던지 목소리도 표정도 무뚝뚝하게 굳었다.
현태오가 냉랭한 눈으로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이라도 하는 기색이다.
이윽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유현진 씨와 저는 더 관계가 깊어진 다음에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태오가 경고하듯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군요. 교제하는 사이라……. 하긴 교제하는 사이에는 호칭이 자유로워지는 게 보통이긴 하지요.”
그 누그러지는 목소리에 유현진은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듯했다. 목이 바싹 말라 잠자코 차를 삼켰다.
“좋습니다. 그러면 일단은 ‘씨’로 하지요. 더 적절한 호칭을 생각해 내실 때까지는요. 그게 ‘각하’보다는 낫겠습니다.”
현태오가 특별히 양보해 주겠다는 투로 말했다. 유현진은 아주 느리게 차를 삼키며 한시름 놓았다. 고민 하나가 해결되었구나.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유현진을 바라보는 현태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불러 보세요.”
찻물이 목을 틀어막는 듯했다. 쿨룩, 기침을 하며 입가를 가린 유현진이 현태오를 보았다. 현태오는 어서 해 보라는 듯 가볍게 손짓하며 느긋하게 등을 기대었다.
“……현태오 씨.”
“성은 빼도 될 것 같은데요. 사귀는 사이잖습니까?”
“……, 태, ……태,”
너도 날 유현진 씨라고 불렀잖아요, 라는 말이 튀어 나가지 않은 건, 그러자마자 저 남자라면 선선히 ‘아, 그래요. 현진 씨. 어서 불러 보세요.’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이름을 부르는 건데도 유현진은 목덜미부터 더워졌다. 굳어지는 낯을 빤히 쳐다보는 현태오의 시선이 심술궂다.
그런 끝에,
“뭐, 좋습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가지요.”
봐줬다는 듯 현태오가 말했다. 입가를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 아래로 입매가 얼핏 웃는 것 같았다. 기분 탓만은 아닌 게, 눈매도 희미하게 굽어져 있다.
예……, 천천히요……, 유현진이 찻잔을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그러던 때, 문득 현태오가 무심결인 듯 고관절 부근을 문지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프십니까?”
“아아, 약간 저려서요. 오늘 재활이 좀 과했나 봅니다.”
그제야 자신이 고관절을 주물렀다는 걸 알아차린 듯 현태오가 손을 거두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어쩐지 외출복을 갖춰 입고 왔다 했더니, 재활 센터에 갔다 왔나 보다.
하마터면 목숨도 위험했을 정도로 심각한 사고였다고 들었다. 낫는다 한들 필경 후유증이 남을 것이다.
유현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의 다친 부근을 바라보았다.
내가 대신 아프면 좋을 텐데.
차라리 그 상처를 자신에게 옮겨 오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낫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지만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러면 들킬 테니까.
그와 자는 바람에 신성가호를 잃은 걸로 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신력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현진은 안타까워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현태오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불현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현진 씨는 어떤 은사를 받으셨었습니까?”
“……예?”
“정신관 서품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었다고 들었습니다. 유현진 씨의 나이로서는 상당히 빠른 영진인데, 신력이 뛰어나셨겠습니다. 어떤 능력이었지요?”
머뭇거리던 유현진은 속삭이듯 대꾸했다.
“아픈 분들이 낫도록 도와드릴 수 있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아아.”
애매하게 중얼거린 현태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심쩍은 눈치로 유현진을 보았다.
“혹시 말입니다.”
“……?”
“제게도 그 신력을 쓰신 적이 있습니까? 이를테면 예전에 평항으로 사목을 오셨던 때라든가…….”
“――.”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고 말았다. 별안간 떠오르는 기억에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듯했다. 당혹스런 기분이 솟으며 일순 말이 막혔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굳이 속이거나 숨길 이유는 없었지만 선뜻 그렇다고 하지 못한 건, 켕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자신에게로 옮겨 온 화상이 나을 때까지 시시때때로 그 상처를 들여다보며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음침하게 좋아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예. 은사를 받은 신관으로서 다친 사람을 돌보는 건 의무이니까요. 다친 사람을 보면 습관적으로 힘을 쓰게 됩니다. 그게 꼭 현태오 씨라서 그랬던 건 아니고요.”
유현진은 온 힘을 다해 얼굴에 얼음장을 뒤집어쓰고서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런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현태오가 서늘한 눈길을 돌리며 “예, 그러시겠죠.” 하고 냉소했다.
그러나 유현진의 대답이 뜻밖이긴 했는지, 미묘한 기색으로 턱을 쓰다듬던 그가 다시 물었다.
“예전에 듣기로 사제님들이 정신관이 되기 전까지는 이능을 쓰면 몸에 무리가 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신관 서품을 받기 전까지는 은사로 신력을 갖게 되더라도 거의 쓰지 않는다고들 하던데……, 그때는 괜찮으셨습니까?”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긴 합니다만 저는 그저 조금 지치는 정도라서요. 별것 아니었습니다.”
유현진은 여전히 딱딱한 음색으로 말했다. 몸에 상처가 옮아 오면 지치기는 하고 또 한 보름 정도 손이 아팠던 것쯤이야 정말로 별것 아니었으니 완전히 거짓말을 아니라고 속으로 변명하면서. 이 상황에서 ‘네가 아프느니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고 싶었다’는 요지의 헛소리를 늘어놓지 않을 만큼의 정신머리는 챙겨야 했다.
유현진의 얼음장 같은 낯을 바라보던 현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감사합니다. 그때는 분명히 손에 물집까지 잡혔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어서 놀랐습니다. 특별 제례 때에는 하나람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들어서 그건가 싶으면서도 많이 신기했거든요. ……부신관일 때 그 정도였으니 정신관이 되시면 더 놀라운 신력을 갖게 되셨을 텐데, 하나람님의 가호가 깨어져서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야……, 뭐 어쩔 수 없,”
“제가 유현진 씨를 범해서 순결 서약을 깨뜨리는 바람에 은사를 잃고 마셨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그건,”
“이 책임은 반드시 지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현태오를 앞두고 유현진은 말이 막히고 말았다.
수렁이 또 한 번 깊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어쩐지 현태오의 눈길이 미묘하게 심술궂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별안간 유현진 쪽으로 몸을 기울인 현태오가 손을 내밀었다. 유현진은 보이지 않게 움찔하고 말았다.
유현진의 앞에서 느긋하게 멈춘 그 손의 의도는 분명했다.
“……. …….”
눈만 깜박이며 그 손을 내려다보던 유현진은 멈칫멈칫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 커다란 손이 유현진의 손을 그러쥔다.
유현진이 이 집에 들어온 이래 현태오는 찾아올 때마다 그렇게 유현진의 손을 잡았다.
이미 몇 차례나 겪은 일인데도 익숙해지지 않아, 유현진은 그대로 손을 내맡기고 멈춘 채 숨을 죽였다. 또다시 얼굴이 후덥지근하게 더워지기 시작했다.
현태오가 느릿하게 손을 매만졌다. 천천히 주무르듯이 움직이는 손길에 유현진은 목덜미까지 점점 더 더워졌다.
‘제가 잘못을 저지른 탓에 유현진 씨에게 정신적 외상을 남기고 말았으니, 조금씩 천천히 풀어 가고 싶습니다. 그 또한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일 테니까요.’
바로 요전에, 견디다 못해 손을 빼려 한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한 말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조금씩 익숙해져야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몹시 진지해서, 여러모로 켕기는 데가 많은 유현진은 차마 손을 거둘 수 없었다.
게다가 사실을 말하자면, 좋기도 했다.
당혹스럽고 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만, 좋았다.
좋았지만,
“……그렇게 안 보시면 안 됩니까?”
현태오는 손을 쥐고 있는 내도록 유현진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들키고 말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넋 놓고 그를 바라볼 것만 같았다. 제상아가 ‘꿀 떨어진다’며 핀잔을 줬던 그 얼빠진 얼굴을 하고서.
삭막하게 낯을 굳히는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뭐에 심사가 꼬였는지 한쪽 입매를 틀어 올렸다.
“그거 아십니까? 싫은 티를 너무 내면, 어디 얼마나 더 티를 내나 한번 보자 싶은 게 사람 마음이거든요.”
“……?”
유현진이 의아하게 그를 마주 보았지만 현태오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저 한층 더 세게 손아귀에 힘을 주었을 뿐이다. 그러다 그가 문득 시선을 떨구었다.
“손마디에 못이 박였군요. 어디서 막일이라도 하셨습니까?”
“아.”
유현진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쪽으로 단단히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막일이랄 것까진 아니지만, 신전에서 지내며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은 모두 다 직접 해야 하니까요. ……신관이란 게 책상머리에 앉아만 있는 일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채소 같은 건 직접 기르기도 해서, 주말에는 번갈아 가며 밭일도 합니다.”
“그렇군요.”
현태오는 몰랐다는 듯 중얼거리며 손바닥 군데군데 박인 굳은살을 새삼스럽게 쓰다듬는다. 그러다 손가락 끝이 손바닥을 스쳤다.
움찔, 유현진의 손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 미묘한 움직임을 알아챘는지 현태오가 눈동자만 들어 유현진을 본다. 유현진은 목덜미부터 확 더워졌다.
“유현진 씨는 민감한 편이신가 봅니다.”
현태오가 뚫어질 듯 유현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현진은 무안함과 겸연쩍음을 애써 감추며 정색했다.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요.”
“그런지 안 그런지 어떻게 아십니까? 다른 사람과 이렇게 밀접하게 접촉해 보신 적은 없으실 텐데.”
“――.”
“있으십니까?”
“――그렇지는, 않,”
반박할 말이 없어 유현진이 어물거리던 차, 빤히 쳐다보던 현태오가 갑자기 손을 당겼다. 그리고 유현진의 손바닥에 입술을 댄다.
유현진은 움찔해 저도 모르게 손을 빼 버리려 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현태오는 꾹 움켜쥔 손을 놓지 않고 되레 더욱 단단하게 틀어쥐었다.
손바닥에 입술과 함께 숨결이 훅 끼쳤다. 델 것처럼 뜨거워, 유현진은 당혹스레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대로 머물러 있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며 손바닥을 쓸었다.
“현,”
유현진은 얼결에 입을 열었으나 무어라 부르지도 못하고 말을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감각에 소름이 돋는다. 손가락 끝이 움찔 움츠러들었다. 그 기묘한 느낌은 등줄기를 타고 흘러 배꼽 아래까지 전해졌다.
심장이 철렁 흔들렸다. ……맙소사.
“그것 보십시오.”
피식, 희미한 숨결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렇게 속삭이는 입술이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 명확하게 손바닥을 쓸었다.
그리고,
“――.”
비웃음을 머금은 시선을 들어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손바닥을 짓누르던 입술도 멈춘다.
손바닥에서 얼른 고개를 드는 현태오는, 그답지 않게도, 살짝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울 것까진 없잖습니까.”
“안 우는데요.”
유현진은 떨릴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설마 자기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라도 나왔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여 보았지만, 눈가가 좀 뜨거워졌을 뿐 울지는 않았다.
현태오는 눈살을 찌푸린 채 유현진을 보다가 손을 놓았다.
“그냥 농담을 했을 뿐인데 그런 얼굴을 하면 제가 꼭,”
“제 얼굴이 뭘요.”
역시나 그답지 않게 말을 흐리며 짧게 혀를 차는 현태오를 유현진은 부릅뜬 눈으로 마주 보았다. 현태오는 그 시선을 앞두고 침묵했다.
그러는 사이에 당황했던 듯한 기색은 가시고 도로 무표정해진 현태오는 유현진을 바라보다가 되레 뻔뻔하게 말했다.
“교제하는 사이에 이 정도도 못 합니까?”
다시 반박할 말이 없어진 유현진이었다.
심지어는 ‘교제하는 사이’라는 말이 심장을 두들겨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안 그러면 입가가 비슬비슬 풀릴 것 같았다.
어떡하지……, 너무 좋긴 한데, 계속 저러니까 정말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간다. 설마 정말은 아닐 텐데, 올 때마다 이러니 이제 정말로 정말인가 싶기까지 했다.
“……제가 뭘요.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잖습니까.”
억지로 삭막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악문 턱이 떨렸다. 유현진을 보던 현태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그럼 더 해도 됩니까?”
“――.”
더라니, 뭘.
아니, 모르는 건 아니다. 보통 교제하는 사이에 어떤 단계로 깊어지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신관이라고 해서 머릿속까지 거룩하지는 않았기에. 하지만.
하고 싶은 마음과 불안스런 마음이 뒤섞여 흔들거렸다.
시시각각 낯빛을 바꾸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보기만 하는 유현진을 뜯어보던 현태오가 희미한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진짜로 울겠습니다.”
“안 운다니까요.”
다시금 딱딱하게 대꾸하는 유현진을 구경하던 현태오는 고개를 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간 진짜 울릴 것 같으니 이만 가 봐야겠군요. 차 잘 마셨습니다.”
차는 당신이 끓였는데요……, 라고 말할 틈도 없이 일어나 돌아서는 현태오를 따라 일어나며, 유현진은 서운함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안도가 더 컸다. 이대로는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까지 들킬 것 같았으니까.
뒤를 따르는 유현진을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간 현태오는 현관에 다다라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이래서야 갈 길이 쉽지 않겠습니다.”
불쑥 중얼거리는 현태오의 말을 미처 못 알아들은 유현진이 “예?” 하고 되물었다. 어딘지 언짢은 듯 미간에 주름을 짓고 있던 현태오는 이내 낯을 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하긴 줄곧 신관으로 살아온 분과 교제를 하는데 쉬울 리는 없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그, 렇겠지요. 교제란 어렵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 거니까요.”
유현진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자 현태오가 피식 웃는 것 같았다. 약간 바보 취급 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너무 금방 사라져서 어떤 웃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요. 그러면 교제를 하는 관계답게, 앞으로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 보는 걸로 하지요.”
“예?”
“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으니까요.”
“……예?”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유현진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가볍게 묵례를 한 현태오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는 곧 뜰 아래로 난 계단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이내 철컹, 대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현진은 그 자리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도 없는 현관에서 망연히 서 있던 그는 천천히, 천천히 스르륵 주저앉았다.
뒤늦게 얼굴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덥다. 두 손을――정확히는 손바닥을 꼭 움켜쥔 채 유현진은 움직이지 못했다.
교제라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인가.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도통 모르는 가운데, 진짜로 교제라는 걸 하긴 하는 건가.
저 남자와? 꿈에서조차 바랐던 적이 없는 일을……?
거짓말에서부터 비롯된 상황이다.
말하자면 지금은 언제 뭐가 삐끗해서 일순간에 파사삭 무너질지 모르는 환상 같은 거였다. 심지어 무너지면 그냥 무너지는 게 아니라 캄캄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이 슬며시 들뜨는 걸 억누를 수 없었다. 반대쪽 한구석에서는 ‘정신 차려!’라고 아우성치는 목소리들이 들렸는데도 들뜨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래도 되나.
……기왕 이렇게 돼 버린 거, 그냥 모른 척하고 확…….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현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들뜸과 불안이 뒤섞여 마구잡이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현관 앞에 웅크려 앉은 채 한참 넋 놓고 있던 유현진을 일깨운 건 콩, 콩, 하는 정체 모를 소리였다.
흠칫 놀라 정신을 차린 유현진은 지금 자신밖에는 아무도 없을 집 안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몸이 굳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안방 쪽이었다.
……콩. ……콩.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진 유현진이 약간 물러앉은 찰나,
‘충전이 필요합니다. 충전이 필요합니다.’
안방 안에서 애타게 호소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
그제야 유현진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아까 현태오가 안방에 가둬 버린 로봇 청소기였다.
돌아갈 곳을 잃은 청소기는 배고프다 외치며 애처롭게 방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청소기를 구해 주러 안방으로 걸어가며, 드넓고 텅 빈 집 안에서 유현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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