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2권) (5/15)

4.

유세진은 타고나길 말썽꾸러기에 사고뭉치라 어머니와 형의 염려와 꾸지람 속에서 자라났지만, 그 특유의 발랄함과 싹싹함으로 어디서든 인기가 많았다.

현가에 얹혀사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라, 비록 잦은 말썽으로 현가에 종종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긴 했지만 현가 사람들은 대체로 유세진을 예뻐했다. 아마도 현가 형제들보다 유세진이 훨씬 더 어리다 보니 막냇동생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들 형제의 진짜 막내는 결코 막내답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그러다 보니 유세진이 현가에서 나와 따로 살기 시작한 뒤에도 그는 현가 형제들과―그 막내는 제외하고― 종종 연락하고 지냈는데, 그 형제들은 저 사고뭉치 유세진이 어느새 번듯하게 자라 고위 관리 시험도 합격하여 출세 가도에 들어서자 감동해 마지않으며 여러모로 도와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어 철이 든 유세진은 그들에게 과거의 은혜를 갚겠노라며 철마다 좋은 과일이며 고기 등등을 보내고 그들의 도움은 적절히 거절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태주 형, 태양 형, 제발 이번 한 번만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제가 형님들 곤란하게 한 적 여태 한 번도 없었잖아요. 제발 이번만요.”

유세진은 현가의 둘째와 셋째를 불러다 놓고는―마음 같아선 첫째도 부르고 싶었으나 그는 현재 막내를 대신해 타지방에서 근무 중이었기에 부를 수 없었다― 그 앞에 엎드리다시피 해 울먹이고 있었다.

“그게 말이다, 세진아…….”

현가의 둘째 현태주는 난감한 낯으로 유세진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셋째 현태양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다.

“당연히 우리도 도와주고 싶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진이 일인데 물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지! 그런데…….”

“제발 우리 형 좀 살려 주세요오…….”

“아니 왜 하필이면 그놈이랑 얽힌 거야?!”

곤란해하는 현태주의 옆에서 성질 급한 현태양이 더럭 역정을 냈다. 이미 끊었던 담배를 뻑뻑 피우는 게, 실로 안타깝고 답답하다는 기색이었다.

“으어어엉――.”, 유세진은 상 위에 엎어졌다. 요리 접시들이 달캉달캉 부딪히며 상 구석으로 밀리는 바람에 현태양이 얼른 접시들을 막았고 현태주는 불쌍하다는 듯이 유세진의 빈 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이미 빈 술병이 여럿 굴러다니고 있었고 유세진은 불콰하게 취해 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가 기사 보자마자 태오한테 연락을 했거든.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어떻게 사고를 쳐도 현진이한테 그런 사고를 치냐고 타이르려 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딱 이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무는 거야. 그놈은 그렇게 잘라 버리면 그걸로 끝이거든. 한번 자르고 나면 답이 없는 놈이야.”

“아버지한테 재떨이로 맞아서 머리가 깨지고도 눈 하나 까딱도 안 하는 놈을 우리가 어떻게 하냐. 세진이 너도 알지? 우리 아버지가 열받으면 얼마나 무서운 양반인지? 그 무서운 양반 앞에서 유일하게 눈 똑바로 뜨고 고개 빳빳이 드는 놈이 그놈인데, 그놈이 어디 제 형을 형으로 알던?”

그나마 점잖게 위로하는 현태주의 옆에서, 현태양이 덩달아 술을 콸콸 퍼마시며 혀를 찼다. 유세진 못잖게 얼굴이 불그레하다. 이들이 모이면 늘 가장 먼저 취하는 건 유세진과 현태양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 형 좀 어떻게 좀…….”

으엉으엉 울면서도 유세진 역시 알고 있었다.

그들 형제를 부르긴 했지만 그들이 썩 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제 부모 말도 귓등으로 흘리는 인간이 제 형들 말이라고 들을 리가 없다. 외려 어릴 때부터 형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동생 눈치를 보는 실정이었으니.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고 싶은 게 유세진의 안타까운 우애였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새끼가 진짜 미쳤나 봐요, 형. 술김에 남자를 강, ――다는 게 말이나 돼요? 심지어는 그걸 책임진다고 파혼? 피해자가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 새끼가 먼저 나서서?!”

말하던 도중에 유세진의 눈치를 살폈는지 단어 하나를 입속에서 뭉갠 현태양이 현태주에게 헛웃음을 치며 토로했다. 음, 그러게 말이다…… 하고 무겁게 중얼거리는 현태주의 옆에서 유세진이 맞장구쳤다.

“말도 안 되죠! 우리 형은 애초에 책임지라고도 안 했다니까요? 책임의 ㅊ도 안 꺼냈어요! 그러길 바라지도 않았다구요! 헌데, 술주정뱅이한테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걸로도 모자라서 이게 무슨 횡액이냐고요!”

‘술주정뱅이한테 난데없는 봉변’에서 은근슬쩍 켕기는 기분이 드는 유세진이었지만 빤빤하게 모른 척했다. 애초에 형이 농담이랄까 거짓말이랄까 뭐 그런 걸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이 모두 100퍼센트 형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설령 실제로 술김에 사고를 쳤다 한들, 피해자가 바라지도 않는데 책임을 지겠다며 동네방네 떠들고 나서 이 사달을 낼 건 뭐냐.

“그러니까 말이다. 나도 이해가 안 돼. 이런 일은 서로 간에 이야기가 오간 뒤에 어떻게든 흘러가야 할 텐데 왜 그놈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터뜨리고 봤는지. 그 머리도 좋은 놈이……?”

“난 신문 보고 이 새끼가 정말로 미쳤다고 생각했다니깐요? 그래서 물어보려고 연락했더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니까 형님은 형님 일이나 신경 쓰세요.’, 그러고 딱 끊어 버리더라니까?”

에라이 재수 없는 새끼,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앞통수 뒤통수 옆통수 다 깨져 버려라, 현태양이 담배 연기 대신 불을 뿜을 기세로 동생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리라 짐작은 했지만 역시 친형들이라 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가…….

유세진은 절망했다. 한편으로는 현태오에 대한 원망을 넘어 유현진에 대한 분노마저 피어올랐다.

애당초에 잘못한 걸 따지면 형이다. 유현진이 잘못했다. 애초에, 그 인간한테 반했다고 했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느 날엔가 유현진을 유심히 쳐다보던 제상아가 대뜸 ‘너 현태오 좋아하니?’라고 돌직구를 날리자 순간적으로 반박을 못 하고 당황하며 버벅거리던 그를 보고, 유세진은 늘 반듯하고 똑바르고 정갈하고 존경스럽던 자신의 형이 미친 줄 알았다. 아니 눈이 삐어도 어떻게 그렇게 삐는지, 환장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찌 됐든 짝사랑이고 둘이 마주칠 일도 별로 없고 가능성이라곤 개미 발톱만큼도 없고 하니 내버려 뒀는데.

“그나마 왕실에서 별로 책잡지 않고 파혼 요청을 승인해서 다행이지, 나도 처음에 그 기사 보고 얼마나 식겁했는지 원.”

“그거야 거기도 원하는 게 따로 있으니 그렇지. 애초에 거기서 먼저 넌지시 뜻을 비쳤는데 뭐. 아버지가 그놈 머리통 깬 것도 파혼해서가 아니라 일을 엉뚱하게 터뜨려서――, ……아, 알았어요.”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현태양에게 현태주가 엄한 눈길을 주었다. 현태양은 얼른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조개처럼 다문다. 유세진이 의아하게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그 이상 얘기할 것 같진 않았다.

“내가 보면 말이에요, 형, 착한 여자가 나쁜 놈한테 걸리고 착한 남자는 나쁜 년한테 걸린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현진이도 봐요, 그 착한 애가 하필 걸려도 그 나쁜 놈한테 걸리는 거.”

“아니, 그래도 태오가 좀 매몰차고 차가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나쁜 놈이라고는…….”

“나쁘죠, 배우자로는 나쁘죠! 걔 그 얼음장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 봐 봐요, 밤중에 자다 깨서 보면 심장 떨어질걸요? 아, 맞다, 현진이는 몸은 이제 좀 괜찮은 거지?”

현태양이 별안간 생각났다는 듯 유세진에게 물었다. 유세진은 “예?” 하고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아, 예! 괜찮아요! 그때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태주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왜 2년 전에――아, 그때는 형이 출장 나가서 없었나? 하여튼 2년 전에 웬 미친 새끼가, 밤에 신관 숙소 앞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현진이 붙잡고는 제 심장병 좀 고쳐 달라고 붙들고 늘어져서, 현진이 그 착한 놈이 또 그걸 불쌍하다고 고쳐 주곤 제가 우리 병원에 실려 왔었잖아요.”

“허……? 그런 일이 있었어?”

“예. 그날 제가 학회 자료 때문에 늦게까지 병원에 있다가, 누가 심장 문제로 실려 왔다고 해서 내려가 보니까 그게 현진이였잖아요.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데.”

현태양이 생각만 해도 식겁하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유세진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고는 새삼스럽게 다시 한숨을 쉬었다.

원칙적으로 신관은 자신이 어떠한 이능을 가지는지 외부에는 발설하지 않는다. 그 이능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을 막으려는 건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이능을 가진 경우―특히나 사람 목숨이 관련되어 있는 경우는 더욱― 어떻게든 집요하게 알아내서 몰래 찾아와 협박이나 강요를 하는 사람이 가끔 있었다.

그때에도 그런 경우였는데, 그 일 이후로 신전에서는 신관으로 하여금 일정 수준 이상의 이능을 행할 때에는 언제나 신전의 승인을 받게끔 했고, 그러지 않을 경우 해당 신관뿐 아니라 사취자도 엄격하게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말도 마세요, 그때 우리 형도 퇴원하고 반년 동안 외출 금지에 금언 기도에……,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내가 그 새끼 찾아가서 그놈의 심장에 구멍 하나 새로 뚫어 줄까 보다 했었는데, 하고 눈을 부라리는 유세진이었다.

“다행히 그 심장 질환이라는 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 망정이었지……, 어휴. 뭐, 덕분에 현진이 이능이 뭔지는 알게 됐네.”

비밀이에요, 비밀, 또 어떤 놈이 밤길에 잠복하고 있을지 모른다구요, 하고 유세진이 부르르 떨었다.

“아, 그랬었구나. 현진이가 참 고생이 많네.”

현태주는 감탄스럽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득달같이 “그런데 그 고생 많고 착한 애를 태오 그놈이!”라고 더럭 외치며 한탄한 현태양은, 또다시 시무룩하게 울먹이려는 유세진을 보고는 얼른 낯빛을 바꾸며 상냥하게 말했다.

“어찌 됐든 말이다, 세진아, 우리도 정말로 진심으로 현진이를 도와주고 싶은데, 태오 그놈이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단 말이야. 우리도 심히 궁금하던 참이거든. 그래서 내가 말이야,”

“늦어서 죄송합니다.”

현태양이 다정하게 유세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하던 찰나였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이 방에 계시답니다, 라며 안내해 주고 물러가는 종업원을 등지고 방으로 들어선 남자는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나마 그놈 속을 좀 알 만한 놈을 불렀지. 그럴 만한 인간은 아무래도 문성이밖에 없지 않겠냐? 어, 어서 와라, 문성아. 여기 앉아.”

현태양이 남자에게 손짓해 가운데 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현태양만 있을 줄 알고 나왔던 진문성은 분위기를 보고는 괜히 불려 나왔다 싶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와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그들에게 꾸벅 묵례하며 현태양이 가리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일 잘 마치고 왔냐? 그놈 뒤치다꺼리하느라 힘들지? 우리 문성이 늘 고생 많다.”

현태양이 내미는 술을 “차를 갖고 와서요.”라고 정중히 거절한 진문성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세 분이 같이 계셨어요? 어쩐 일로 태양 형이 부르시더라니. 저는 또, 다음 주에 태양 형 창만으로 연수 가시면 내년이나 돼야 돌아오시니까 그전에 한번 보려는 줄 알았지요.”

“아냐, 맞아. 내년 설 지나서야 오니까 그전에 우리 고생 많은 사촌 동생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불렀지. 그 김에 형제간 회동도 하고.”

현태양이 변명이라도 하듯 진문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현가 형제들 중 유일하게 국공무와 상관없는 직종을 가진 현태양은 본인의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의료계 종사자였는데, 다음 주부터 석 달간 그가 몹시 존경해 온 해외의 노교수 아래에서 연수할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희희낙락 나갈 준비를 하던 중에 이렇게 유세진에게 소집을 당한 참이었다.

덩달아 소집에 끌려 나온 형편이 된 진문성은 별말 없이 웃었다.

“하하……, 그래요, 어떻게든 얼굴 뵈니 좋네요. 형님들 다들 바쁘셔서 못 뵌 지 한참 됐는데.”

“야, 바쁘긴 우리가 바쁘냐? 네가 제일 바쁘지. 심지어 요즘은 더 바쁘겠지. 그놈이 사고를 뻥하니 터뜨려서. 기자들이 아주 난리던데.”

“그래, 그러고 보니 너 얼마 전에 집 구하느라 고생 좀 했다면서. 태오가 본가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괜찮은 집을 며칠 안에 구해 놓으라고 해서 진문성이가 동분서주하더라는 얘기가 나한테까지 들리더구만. 그게 지금 현진이 들어간 집이지? 그 동네는 매물 나오는 게 거의 없었을 텐데 용케 구했네.”

“아아, 그때는 좀 힘들긴 했죠. 시간이 워낙 촉박해서요.”

형제들의 말에 진문성이 웃으며 대꾸했다. 현태양이 헛웃음을 쳤다.

“아니 집 그거 어딘들 뭐 어떻다고 그 동네여야만 한다고 못을 박아? 무슨 애지중지 끼고 살 처자 모시는 것도 아니고. 야, 야, 문성아. 말 좀 해 봐라. 진짜 그놈 왜 그런대? 수도로 돌아오기 전에 평항에서 머리라도 크게 다쳤어? 알고 보면 수술한 게 다리가 아니라 머리였던 거지?”

현태양이 닦달하듯 물었지만 진문성은 글쎄요, 하고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물잔을 들다가 그 옆에서 뚫어질 듯이 노려보고 있던 유세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문성 혀엉.”

“……그래, 세진아.”

그럴 이유라곤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조금 켕기는 낯으로 진문성이 대답하자, 여태 그렇게까지 친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세진은 진문성에게 매달렸다.

“우리 형 좀 구해 주세요오오…….”

“음? 으음.”

진문성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유세진은 그가 현태오이기라도 한 듯 더럭 성내며 외쳤다.

“아니 대관절 왜? 왜?! 우리 형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습니까? 우리 형이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

“그리고 막말로, 그 양반이 뭐 우리 형이랑만 잤어요? 딴사람이랑 잔 적 없어? 왜 우리 형한테만 그러냐고요?!”

“그러게 말이다.”

별다른 변명이나 설명 없이 조용조용 맞장구만 쳐 주는 진문성을 보며 두 형제는 ‘보아하니 물 건너갔구만.’ 하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진문성이 구세주가 되어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 대신 현태주가 물었다.

“문성아, 그런데 진짜로 태오 그놈 무슨 생각이래? 파혼까지야 뭐 그래, 거기까지는 어떻게 이해한다 치는데, 왜 갑자기 현진이야? 그놈이 술김에 누구를 덮쳐서 책임을 진다는 게 내가 좀 이해가 안 가서 그래.”

그 차분한 물음에 진문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야, 말해 봐. 이 방문 밖으로 말 새어 나갈 일 없으니까 그냥 터놓고 말해 보라고.”

“정말로 모르겠어요.”

현태양이 추궁했지만 진문성은 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차피 다들 형제다. 그리고 현가의 형제들은 사촌인 진문성까지 포함해 매우 우애가 좋은 편이었다―현태오만 자발적으로 따로 놀긴 했지만―. 진문성이 말해선 안 될 일이라면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즉, 정말로 모른다는 뜻이었다.

“계획했던 일도 아니고 예정된 일도 아니라,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저한테도 난데없이 ‘책임질 사람이 생겼으니 파혼을 해야겠다’고 하시더니 그날 바로 터뜨리신 거예요.”

“아니, 그놈 원래 현진이랑 친하게 지냈었어? 그것도 아니잖아?”

“절대 아니죠! 친하다면 되레 형들이랑 더 친할걸요!”

유세진이 눈을 부릅뜨며 단언했다.

실상 유현진과 현가 형제들의 사이는 매우 소원했다. 강아지 같은 붙임성을 지닌 유세진만 현가 형제들(막내 제외)에게 귀여움받으며 잘 지냈을 뿐, 유현진은 몇 년을 같은 집에 살면서도 한결같이 그들에게 반듯이 예의를 지키며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래도 현가 형제들(역시나 막내 제외)은 다들 성격이 좋아 유현진까지 어여뻐하긴 했지만, 그들의 친분이라고 해 봐야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먼 친척 정도의 거리감이 고작이었다.

“그래, 현진이는 우리한테도 거리 두고 낯가리는 애잖아. 기억 안 나요? 걔 우리 집 들어오고 몇 년이나 지나서도 제대로 말을 안 섞어서, 태원 형이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에도 한참 동안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입도 못 열던 놈이잖아요.”

“아, 기억난다. 그때. 태양이 너까지 덩달아 신나서 형이라고 불러 보라고 강요해서 현진이가 되게 곤란해했었지. 늘 쌩하니 표표한 얼굴로 다니던 놈이 그 큰 눈을 도록도록 굴리면서 진땀 흘리던 게 생각나네.”

현태주가 옛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제각기 바빠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없는 현가의 형제들이 명절을 앞두고 집안의 연례행사로 선산 벌초를 하고 돌아와 응접실에서 잠시 쉬며 차를 마시던 때였다.

그들 사이에 넉살 좋게 끼어 간식을 먹고 있던 유세진을 찾으러 왔던 유현진이, ‘그러고 보니 현진이랑은 별로 얘기해 본 적이 없네. 잘 지내고 있지? 학교생활은 어때?’ 하고 말을 거는 장남 현태원에게 붙들렸다.

유현진은 반듯한 자세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선배님.’이라고 대답했는데―같은 주소지인 그들은 모두 같은 학교 출신의 선후배이기도 했으므로―, 거기서 현태원이 ‘어? 그래. 그런데 그냥 형이라고 불러, 현진아. 세진이도 형이라고 부르는데.’라고 가볍게 말한 게 시작이었다.

현태양이 냉큼 ‘그래, 거리감 느껴지게 선배님은 무슨 선배님이야. 그냥 형아― 해 봐, 형아―.’ 하고 장난스레 맞장구쳤고, 일시에 그들 형제의 눈길을 한 몸에 받게 된 유현진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멈칫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냥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무슨 소리야, 우리가 안 괜찮다니까? 현진이 우리 싫어해?’

‘……, 그렇지는…….’

장난기가 돈 현태양의 강요 아닌 강요에 유현진은 한참을 쩔쩔매다 간신히 ‘……형.’ 하고 속삭이고서야 풀려났다.

“그때 현진이 좀 귀여웠는데. 얼굴이 살짝 빨개져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누가 보면 ‘여보’나 ‘자기’ 하고 부르라고 한 줄 알았을걸요.”

현태양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랬어, 하고 맞장구치며 웃던 현태주가 문득 웃음을 지우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태오한테만 끝까지 ‘선배님’ 하고 호칭을 고수하지 않았나?”

“음? 그랬나? 근데 뭐, 태오는 애초에 현진이한테 형이라고 부르라는 얘기 자체를 안 했잖아요. 그때도 그냥 혼자 따로 떨어져 앉아서 신경도 안 썼던 것 같은데?”

외려 그놈은 누가 친한 척 형이라고 부르면 입에다 진흙을 처넣을 놈 아니에요? 하고 현태양이 콧잔등을 찡그리는데, 유세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기억나요, 그때! 우리 형이 형들한테 차례대로 ‘형’이라고 부르고 나서 마지막으로 총독님을 쳐다보니까,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을 하곤 곁눈질로 째려봤다구요. ‘그따위 호칭으로 부르기만 해 봐라’ 싶은 눈으로!”

그래서 우리 형도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고개 돌린 거란 말이에요, 우리 형 잘못 아니에요, 라고 열렬히 제 형을 변호하는 유세진이었다.

“그래, 걔들 사이가 딱히 좋진 않았지. 현진이도 낯 많이 가리고, 태오 그놈이야 누구랑 사이좋을 일 자체가 없는 놈이고. 현진이가 그나마 우리랑은 몇 마디 얘기라도 했는데, 태오랑은 거의 얘기도 안 했을걸.”

“맞아요. 그랬죠. 그런데 왜 뜬금없이 이런 일이 터진 거냐구요? 어쩌다 하필 현진이가 엮여 들어가서? 대관절 일이 어떻게 흘러갔길래 그놈이 현진이를 덮치고서 책임 운운하냐고?”

현태주에게서 고개를 돌려 진문성을 닦달하다시피 하는 현태양의 물음에 진문성은 난처한 기색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뭔가 유현진 씨가 타이밍이 좀 안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타이밍.”

“글쎄요…….”

아 이놈이 왜 이렇게 말을 알아듣기 어렵게 해?! 하고 현태주와 현태양이 동시에 버럭했지만 일부러 뭘 감추는 것도 아닌 진문성은 그 이상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왜냐면 진문성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여태까지 진문성은 줄곧 현태오의 곁에서 함께 일해 왔다. 진문성에게 뭔가 일을 맡길 때마다 현태오가 상세하게 설명을 잘해 준 적은 없었으나 대부분은 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왜 시키는지 모르겠다 싶은 일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 결과가 나빴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항의하거나 반문해 봤자 당연히 현태오에게는 안 먹힐 터였고, 진문성은 쓸데없는 노력을 할 만큼 힘이 넘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현태오가 뭔가를 시키면 묵묵히 그 말을 따를 뿐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그럼 그냥 괜한 변덕인가?”

“흠……, 노리는 게 따로 있을 수도 있지. 뭔지는 몰라도 사람들 눈가림용으로 현진이를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고…….”

“왜 하필 우리 형이냐고요?!”

“진정하고 기다려 봐. 그러면 조금 지나서 태오가 노리는 게 해결되고 나면 현진이도 별 탈 없이 몸 뺄 수 있을 테니까.”

두 형제는 울멍울멍하는 유세진을 다독거려 주었고, 그들의 옆에서 젓가락을 들어 요리를 집어 먹으며 진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현태오의 명을 받아 유현진의 집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기자들을 쫓아내고 오느라 배가 고프기도 했거니와, 그들의 저 희망이 이루어지기가 어쩐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었지만.

요즘의 현태오는 기분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이 왔다 갔다 했다.

그것부터가 일단 현태오답지 않은 일이었다.

진문성이 알아 온 한, 현태오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었다. 딱히 기뻐하는 일도 슬퍼하는 일도 화내는 일도 없이, 늘 무덤덤하고 냉담하게 일과를 해치우곤 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진문성으로서는 편했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미묘하게 까다로워졌고, 그 까다로움에는 기준도 정확하지 않아 진문성은 애를 먹고 있었다.

이를테면 바로 며칠 전에도 그렇다.

산책을 갔다 오겠다고 훌쩍 집에서 나갔던 현태오가 돌아왔을 때, 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유현진에게 갔다 왔구나.

산책을 간다던 사람이 산책로에서 가까운 정문이 아니라 아랫동네에 더 가까운 서문 쪽으로 나가길래 짐작은 했었지만.

현태오는 매일 한 번씩은 유현진에게 가고 있었다. 가끔은 진문성이 볼일 보느라 외출해 있는 동안 한 번 더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왜냐면, 외출했다 돌아온 진문성에게 뜬금없이 ‘그 집 로봇 청소기가 좀 시끄럽더군. 조용한 모델로 새로 들여놔.’라고 한다든가, ‘그 집 처마에 말벌이 집을 짓기 시작했던데. 얼른 없애.’라고 갑작스레 말하곤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현태오는 서재의 소파에 깊이 몸을 묻으며 혀를 찼다.

‘아니……, 그놈 싫어하는 꼴이나 보자 하고 한 짓인데, 갑자기 사내놈 상대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는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그가 혀를 찼다.

‘좀 짜증이 나서.’

‘짜증 날 정도면 안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굳이 이유는 묻지 않고 해법을 권하는 진문성이었지만, 흘끔 쳐다보는 눈매를 보아하니 그 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됐고. 사람은?’

‘아, 예. 알아봤습니다.’

진문성은 책장 한 켠에 꽂아 두었던 파일을 꺼내었다.

유현진이 새로 들어간 집에는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럴 만한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30대 후반의 여성으로 경력은 물론이고 여타 신변 문제도 깔끔합니다.’

순간 현태오가 눈살을 찌푸리는 듯했다. 의아해하는 진문성에게서 파일을 받아 든 현태오는 말없이 그 내용을 주욱 훑어보더니 진문성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진문성이. 넌 생각이 없나?’

대뜸 힐난하는 현태오를 진문성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쳐다보았다.

뭐가 문제인가. 이력이든 뭐든 문제없다.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인데 여타 특별한 능력이 필요할 리도 없었다.

고심하는 진문성에게 현태오가 파일을 툭 던지며 혀를 찼다.

‘바로 얼마 전에 신전에서 쫓겨난 젊은 사제가 사는 집에 젊은 여자가 들어가 산다니, 이게 될 말 같아?’

‘……아.’

아, 라곤 했지만 납득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어서 중얼거린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데다 또 유현진이 그만큼 손 빠른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까지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진문성은 순순히 다음 후보를 물색했다. 다행히 파일첩엔 몇 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그러면, 50대 여성도 있습니다. 이분도 경력이나 신변에 흠잡을 데 없고, 게다가 이미 결혼하셔서 가족분도 계십니다. 이혼은 하셨으나 딸과 아들을 둔,’

‘그 딸은 나이가 몇인데.’

‘음, 기록상으로는 스물하나입니다만.’

‘관둬. 50대 여자면 오지랖 넓게 중매를 서겠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할 공산이 높아. 그놈은 생김새도 멀끔한 편인 데다 전직 신관이면 과거도 깔끔하니 여자들이 더 눈독 들일 가능성이 크지.’

‘…….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떨까요. 앞선 여성분들만큼 경력이 길지는 않지만 힘도 좋고 꼼꼼하다며 평가가 좋은 30대 후반의 남자분도 있,’

진문성은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사나운 시선이 날아온 탓이다.

‘문성아.’

‘예.’

‘지금 그 집에 젊은 남자를 밀어 넣겠다고?’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어 대답하지 못하는 진문성이었다. 그 앞에서 현태오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파일을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언제 눈 돌아 버리면 범죄를 저지를지 모르는 게 인간이야. 그런데, 한창 힘 좋은 나이의 남자가 거기 들어가 살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막말로 그놈이 강도로 돌변이라도 하면 유현진이가 그 허약해 빠진 몸으로 당해 낼 수나 있을 것 같아?’

‘…….’

반박할 말이 당장 열 가지쯤은 떠올랐지만 진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현명했으므로.

‘그러면 좀 더 나이대가 있는 남자분으로…….’

‘나이 든 남자는 잘못 들이면 귀찮아져.’

진문성은 처음으로 현태오에게 마음속으로 욕을 건넸다.

진문성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현태오도 제가 무슨 말을 늘어놓고 있는지 알기는 했는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다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입주 말고 출퇴근으로 알아봐. 남자보단 여자, 나이대는 좀 있는 입 무거운 사람으로. 사적인 이야기는 절대로 나누지 않는 걸로 단서를 붙여서.’

‘……예.’

진문성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미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진문성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진문성에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현태오가 다시 물었다.

‘그놈 보낼 만한 신전은 알아보고 있나?’

‘예, 지방에 사람 손 부족한 곳으로 몇 군데 물색 중입니다. 내년 초여름 정도쯤 비는 자리로 알아보면 되겠지요?’

현태오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쯤이면 넉넉하겠지. 너무 힘들지는 않은 곳으로 알아봐. 밭일 같은 거 안 시키는 데로.’

진문성은 예, 하고 대답했다.

오늘은 웬일로 좀 너그럽다.

간혹 너무 산간 오지에 있는 신전으로 가면 온갖 잡일들을 다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못 버티고 나오는 사람이 태반인 곳도 있다. 그럭저럭 한적하고 일은 적고 살 만한 곳으로 알아봐 드려야지. 어쨌거나 본인도 예상치 못했을 액운에 휘말린 상황일 텐데.

‘새집에서 지내기는 괜찮으시답니까?’

‘글쎄, 아직 남의 집 쓰는 것처럼 오도카니 있던데. 내가 먼저 익숙해지겠어.’

하긴 진문성이 보아하니 그 집에 갈 때마다 현태오는 차도 직접 끓이고 뭘 하든 다 본인이 하는 눈치였다. 누가 보면 유현진이 손님인 줄 알겠다.

‘그놈은,’

생각에 잠겨 있던 현태오가 혼잣말처럼 느릿하게 말문을 열었다.

‘나름대로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놀리는 재미도 있는데, 조금만 건드리면 대번에 표정이 확 굳어 버린단 말야. 아주 사람 싫어하는 티를 풀풀 내는데, 그걸 보면 짜증이 나서 더 건드리고 싶어지거든.’

‘……성희롱은 좋지 않습니다.’

예전에 잠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진문성이 말하자 현태오가 낯을 찌푸렸다.

‘성희롱은 무슨 성희롱이야. 살짝 입만 대도 울멍울멍하는 놈한테.’

‘입을 대셨습니까?’

‘손. 손에만. 그냥 아주 살짝 스쳤을 뿐이야.’

‘여태 신관으로 살아오셨던 분인데,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남한테 취중 강간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건 괜찮고?’

‘……따지고 보면 그렇군요.’

코웃음을 치는 현태오에게 진문성은 한발 물러섰다. 비록 상황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긴 했지만 애초에 그 단초를 만든 건 유현진이다. 그것만큼은 비호를 해 줄 수가 없었다.

‘걱정 마. 아무리 그래도 사제님께 그런 쪽으로 못된 짓은 안 할 테니.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차피 파문당했는데 이제는 속인이니 신관도 아니잖아.’

‘속인이든 아니든 성희롱은 안 되지요.’

‘아직 손밖에 안 건드렸다니까.’

현태오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아직……. 진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의 말이 어느 부분에서 이상했는지 현태오도 알아차린 듯했다. 이맛살에 생긴 주름만 봐도 알겠다.

‘그냥 손잡아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별 뜻 없이 농담 한마디 던져 본 진문성은, 그러기 무섭게 되돌아오는 얼음장 같은 눈매를 보곤 얼른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하고 덧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추궁할 생각은 없었는지 현태오는 혀만 한 번 차곤 입을 다물었다.

진문성은 좀 수상쩍다고 생각했다. 뭔가 감이 올락 말락 했지만 그 이상은 더 생각하길 관뒀다. 생각해 봤자 지금 당장 별 뾰족한 결론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시키는 일이나 하며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볼 밖에.

“……거 듣고 보니 그럴싸하네요. 사람들 눈가림용으로 이용이라…….”

진문성이 생각에 잠긴 사이 세 사람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머리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태양이 그제야 납득하겠다는 듯 중얼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표면에 드러내기 곤란한 처자랑 연애라도 하나? 그래서 겉으로는 방패용으로 현진이 세워 놓고 뒤에서는 다른 여자랑…….”

“관둬라. 그놈이 뭘 숨기고 남들 눈치 보고 할 놈이냐.”

“왜요, 또 모르죠. 남 눈은 신경 안 써도 귀찮고 떠들썩한 건 싫어하는 놈이잖아요. 톱클래스 연예인이랑 만나서 그 여자 비밀 보장을 해 줘야 한다든가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왜 하필 그 방패가 우리 형이냐고요! 게다가, 만나는 사람이 있는 인간이 왜 술 먹고 딴 사람이랑 자?!”

유세진이 술을 아예 병째 움켜쥐고 부르짖었다. 이미 술이 머리꼭지까지 찬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그래, 그거다. 그렇지 않고선 그놈이 뜬금없이 신관이랑 자서 책임을 지느니 어쩌니 하는 뻘소리를 할 리가 없지. 그놈은 다 계획이 있는 놈이니까!”

유세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 빛깔을 한 현태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 옆에서 현태주도 유세진을 툭툭 두드렸다.

“조금만 기다려 봐라, 세진아. 적당히 조용해지면 태오 그놈이 알아서 잘 무마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봐.”

정말요? 정말이겠죠? 유세진은 불안스레 형님들을 둘러보았다. 진문성은 허공을 쳐다보며 잠깐 생각해 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우뚱기우뚱 기울어지는 몸으로 술병을 끌어안은 유세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우리 형이요, 어릴 때부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물론 형님들네 집에서 신세 진 덕분에 몸 고생이야 덜했지만요, 어릴 때부터 마음고생은 엄청 했거든요. 겉으로 티만 별로 안 냈을 뿐이지…….”

어느새 저렇게 마셨는지 유세진의 앞에는 빈 술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취기가 잔뜩 올라 느릿한 목소리엔 울먹거리는 빛이 섞였다. 그러자 현태양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공감해 주었다.

“그래, 현진이가 고생 많이 했지. 현진이 참 성실하고 착하다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얼마나 칭찬하셨는데. 그 어렵다는 신학교에도 한 번에 딱 들어가고 말이야. 어릴 때부터 참 똑똑하고 어른스러웠어. 안 그래요, 형?”

“음, 그랬지. 어릴 때부터 절도를 잘 지키고 행동거지도 어김없고. 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깐깐하고 똑 부러지는 아이였어.”

“……아니……, 우리 형이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여하튼 고생 많이 했거든요.”

그럼 그럼, 특히나 너를 동생으로 둬서 현진이가 참 고생 많았지, 학교에도 수없이 불려가고, 하고 위로랍시고 말하는 걸 보니 현태양도 술이 엄청나게 들어가긴 들어간 모양이었다. 술을 병째로 마시던 유세진도 그렇죠, 맞아요, 하고 맞장구친다. 가관이었다.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철없는 동생 건사한다고 고생한 우리 형……, 좋아하는 사람 있어도 그 마음 꾹꾹 억누르면서 신관으로 한 점 부끄럼 없이 반듯하게 잘 살아왔는데 어쩌다 한순간의 실수로……. 어이구, 불쌍한 우리 형…….”

슬슬 혀까지 꼬이기 시작한 유세진이 불쑥 중얼거리더니 상 위에 엎어졌다. 훌쩍이는지 어깨까지 들썩이는 그를 현태양이 다독다독 위로했다.

“그러게 말이다, 불쌍한 우리 현진이……. 그런데 현진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있었죠. 그래도 어디 가서 말도 안 하고 벙어리 냉가슴처럼 혼자서만 좋아하면서 성실한 사제님으로 잘 지냈다구요.”

“어이구,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환속해서 오순도순 잘살아 보지, 왜 신관을 해.”

“좋아할 사람을 잘못 골랐으니 그렇죠. 사람을 잘 골랐어야지. 아니, 애초에 좋아하질 말았어야지!”

유세진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다시 제 형을 감싼다.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는 거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꼭 운명이 이렇게 가혹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요?”

그래그래, 하고 그들 둘보다는 술에 덜 취한 현태주가 유세진을 다독이며 눈을 껌벅였다.

“아니 그럼, 현진이는 좋아하는 여자도 있는 상황에서 태오한테 당했다는 거냐……?”

“아이고 세상에. 태오 그 쳐죽일 놈이!”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두 형제 앞에서 유세진이 별안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입술을 비죽거리더니 울먹였다.

“좋아하는 여자……, 좋아하는 여자……. 여자였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반대는 안 했지……. 나도, 나도 웬만하면 우리 불쌍한 형 응원해 주고 싶었다구요.”

“엉? 그럼 남자야?! ……헐. ……아! 그래서! 이룰 수가 없는 사랑이라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눈물을 머금고 신관이 된 거였어?!”

머릿속으로 사실을 재구성한 현태양이 상을 두드리며 탄식했다. 상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빈 술병 여러 개를 재빨리 받아 낸 진문성이 놀란 눈치로 유세진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유현진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으어어엉, 그러니까 우리 형 좀 도와줘요. 우리 형이 얼른 거기서 벗어나야지, 지금 형이 하필 거기 엮여서 차마 말은 못 하고, 얼마나 힘들겠어어…….”

유세진은 엎어져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힘들겠지, 하고 술에 떡이 된 현태양도 유세진의 등 뒤에 엎드려 통탄한다.

진문성은 그들을 보다가, 허공을 보다가, 주름진 미간을 주물렀다. 왠지 모르게 골치 아프고 난감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렇구나……. 현진이가 남자를……. 그래, 그래서 신관이 됐던 거구나……. 그런데 느닷없이 술 취한 태오한테 그런 일을 당한 거라면, 마음이 많이 힘들겠네.”

두 마리 고주망태가 된 남자들을 내려다보던 현태주가 놀랐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문성은 물만 꿀꺽 삼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제양에서는 남색이 드물었으나 이웃 나라인 송갈은 오래전부터 동성혼을 인정해 왔던 나라라, 전쟁 와중에도 문물이 오가는 사이에 이제는 이곳에서도 동성 간의 관계에 대해 크게 낯설어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아직은 이곳 제양에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이 흔치는 않은 일이라 마음고생은 제법 했을 터였다.

“엉엉엉……, 난 형무소 가기 싫어요……, 엉엉, 한천 싫어어……. 우리 형도 가면 안 돼요, 어어엉…….”

유세진은 아무래도 떡이 된 모양이었다. 이제는 술주정을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형무소? 한천? 뭔 소리야, 이게? 하고 현태주가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그대로 고꾸라져 잠들어 버린 유세진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에 현태양도 냅다 고꾸라져 잠들어 버린다.

“?? 웬 한천 형무소? 이놈 뭐 죄지었나?”

현태주는 헛웃음을 웃으며 담요를 끌어다가 두 동생들을 덮어 주었다. 그 옆에서 진문성은 물로 목만 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사람을 불러 빈 술병들과 테이블 위를 정돈시킨 현태주는 먹을 만한 음식 두어 가지와 술을 새로 시킨 뒤 진문성과 마주 앉았다. 진문성의 잔에는 차를 따라 주었다.

“세진이 이놈이 제 형 때문에 속깨나 썩이는가 보다. 문성이 네가 태오한테 잘 말해 봐.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진이 너무 오래 방패로 세워 놓지는 말라고.”

“음……, 예.”

진문성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술잔을 내려놓은 현태주가 “그러고 보니,” 하고 느릿하게 말끝을 끌었다.

“조만간 송갈에서 친선 사절이 올 모양이던데. 너희 쪽으로도 얘기는 들어갔지?”

“예.”

진문성의 대꾸에 현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혀를 찼다.

“조금 더 기다렸다 받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미 일이 결정된 거야 어쩔 수 없지. 전하께서 화평으로 뜻을 기울이신 지는 오래되었으니. 대세가 그쪽으로 흘러가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반대파가 꽤나 시끄럽게 굴 테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평항도 그쪽에서 계속 들쑤시는 모양이던데. 어찌 됐든 어떤 치들은 분쟁이 있어야만 돈을 버니까.”

진문성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는 해야 할 말과 아닌 말을 잘 구분했고, 피차간에 뻔히 아는 일도 적당히 입 다무는 요령이 있었다. 현태주도 그런 줄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의양군마마께서 비록 은퇴는 했다지만 아직 권세가 쟁쟁한 인물이야. 그분만 뜻을 좀 굽혀도 화친이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갈 터인데, 그분이 워낙 강경하게 척화를 주장하시니…….”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뜻도 바뀔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분도 연세가 많이 드셨습니다. 아드님도 자리는 보전하셔야 할 테고요.”

차분하게 대꾸하는 진문성을 보던 현태주가 피식 웃었다. 그의 낯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하, 그래, 그 말이 맞다. 네 말을 들으니 내 마음도 좀 가벼워지는구나. 그러고 보니 이번에 혼약이 깨어지니 계연군이 신이 난 모양이던데. 정혜궁에 혼담을 넣으려 한다는 말이 자자하더라.”

“그분이야 워낙 예전부터 정혜궁마마한테 가슴앓이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야말로 기회다 싶으셨는지 벌써부터 거금을 들여 온갖 귀한 예물거리를 사들이고 계시다더군요.”

“쯔쯔, 제 목숨줄 저당 잡힌 줄도 모르고 두둑하게 뒷돈 받아 놓은 걸 소용도 없는 일에 쓰시는구먼.”

현태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혀를 차곤 술잔을 들이켰다. 진문성도 담담히 웃으며 술 대신 찻잔을 든다.

“어찌 됐든 조심해라.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하고.”

“예, 감사합니다.”

진문성은 순순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누가 말 안 해도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테지, 하고 현태주도 굳이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술과 함께 안주를 몇 점 입에 넣은 현태주는 술에 절어 쓰러져 있는 두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혀를 찼다.

“헌데 말이다. 태오 그놈이야 무슨 일을 하든 철두철미한 거야 알고 있으니 그놈에 대해서만은 걱정을 할 게 없다만, 참 속 모를 놈이란 말이야. 아니 그래, 이번 일은 어차피 깨어질 혼약이긴 했고 그럴 만한 사유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적당히 무난한 이유를 지어내면 될 것을 왜 뜬금없이 이렇게 당혹스럽게 터뜨려?”

진문성은 미묘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조용히 목만 축였다. 현태주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제 마음 내키는 대로 굴어도 해야 할 일은 빈틈없이 해내는 놈이니 입을 댈 데도 없지만, 너무 그렇게 속 모르게 굴지는 말라고 해. 뭐가 좀 짐작이라도 가야 여차할 때 도와줄 수도 있을 것 아니냐. ……톱클래스 연예인이든 뭐든, 혹시라도 그놈이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기만 하면 그게 누구든 도와줄 테니까.”

진문성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넌지시 말하는 게, 현태양이 ‘유현진 톱클래스 연예인 방패설’을 제시했을 때에는 그럴 리 있겠냐는 투로 핀잔해 놓고, 본인도 속으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진문성은 다시금 기억을 되짚어 보곤 미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아는 바로는 없습니다만……, 사생활까지는 제게 일일이 다 말씀하진 않으시니까요.”

물론 말 안 한다 해도 바로 곁에 붙어서 보좌를 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을 알게 되긴 한다.

톱클래스 연예인과의 비밀 연애설도 딱 잘라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게, 굳이 엮어서 생각하자면 엮일 만한 과거의 인물들이 몇몇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누구를 방패 삼아 보호할 만큼의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고작해야 몇 번 만나고 마는 정도.

그나마 평소와는 다른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라면, 외려…….

“…….”

“누군가 있긴 한 거지?”

진문성의 표정을 보고 알아차렸다는 듯이 현태주가 슬며시 물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진문성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현태주는 혀를 찼다. 그러나 워낙 입이 무거운 진문성이니 술술 불지는 않을 줄 이미 알았다.

“그래, 어찌 됐든 네가 있어서 안심이 된다. 태오 잘 챙겨 주고,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그래, 현진이도 잘 돌봐 주고.”

술에 늘어져 있는 유세진을 보고는 안쓰러운 듯 혀를 끌끌 차는 현태주의 옆에서, 진문성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잘 지내고 있어? 별일은 없는 거지? 형이 가까이에만 있었어도 만나서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줄 텐데……. 귀국하면 꼭 보자. 힘든 일 있으면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전화라도 하고. 알았지?」

“…….”

유현진은 뭐라고 답을 해야 하나 고민스레 문자를 노려보며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 했다가 결국 ‘예, 잘 지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잘 지내시다 오세요.’라고, 지난번과 비슷한 답을 보냈다.

현태양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걸려온 건 얼마 전이었다.

애초에 유현진과 현태양은 서로 연락할 만한 사이가 전혀 아니었다. 그야 같은 집에서 살았었으니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는 하지만, 따로 만나거나 연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현진이 아는 한 현태양은 좋은 사람이었다. 현가 사형제 중 셋째인 그는 매우 쾌활하고 활달한 남자로,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로 텐션이 높을 때도 있었지만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의리남이었다.

그런 현태양이 생전 처음 유현진에게 전화를 하더니 땅속으로 꺼질 듯 무거운 목소리로 ‘내 동생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로 미안하게 됐구나. 만나서 얘기라도 해야겠는데 내가 곧 창만으로 떠났다가 내년 초에야 돌아오거든. ……그래, 오늘이라도 만날까? 아니면 내일은 뭐 하니?’라고 말했을 때, 유현진은 하마터면 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전혀 미안해하실 필요 없고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고 또 요즘 이런저런 일로 몹시 바쁘다고 한사코 사양해 겨우 그 위기는 넘겼지만, 현태양은 외국으로 떠난 뒤에도 가끔 유현진에게 저런 문자를 보내곤 했다.

신경 써 주는 건 고맙지만, 부담스럽다……. 부담스럽고 죄책감이 들어 위장이 쿡쿡 쑤실 정도였다.

전화를 붙들고 한숨을 푹 내쉬던 유현진은 저만치서 사람들이 와르륵 웃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저기 모여 있는 무리들 중 하나가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예배일이면 늘 그렇듯 신전 앞은 평소보다 북적거렸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까지 신전 앞뜰의 양지바른 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유현진은 기둥 그늘 안에 옹송그리고 있었다.

날씨가 추우니 신전 안으로 들어가 있어도 좋을 테지만 안팎으로 아는 얼굴들이 너무 많았다. 파문당한 뒤로 신전에 처음 온 입장이다 보니 마음이 쪼그라들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후딱 예배만 보고 돌아갈 요량이었다.

어서 예배 시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 신전 입구 앞에 크고 하얀 자동차가 멈췄다. 운전해 온 내관의 부축을 받으며 우아하게 내린 사람은 제양의 공주 제상아였다.

다가서는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던 그녀는 한차례 인사를 다 마친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듯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기둥 뒤에 서 있던 유현진을 발견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일찍 와 있었네. 세진이는?”

제상아는 으레 마주치곤 하는 또 하나의 얼굴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술병 나서 못 온대.”

“걔 요즘 술 자주 먹네. 연말이라 그런가? 지난 예배일도 빼먹더니. 다음번 예배일엔 좀 나오라 그래, 전직 사제님.”

“그래야……, 아, 아니, 그날은 나도 못 와. 어머니 기일이라 묘소 갈 거거든.”

“아,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렇게 됐구나.”

제상아는 날짜를 꼽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께 안부 전해 줘.”라고 덧붙이는 게 꼭 산 사람 대하는 것 같다. 유현진은 웃고 말았다.

그런 유현진을 빤히 훑어보던 제상아가 중얼거렸다.

“근데 신전에서 너 사복 입은 거 보니까 되게 낯설다.”

“어, 나도 낯설어.”

사제님들도 낯설어하고……, 유현진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하필 이 지역구의 관할 신전은 원래 유현진이 적을 두었던 신전의 자매 신전이라, 이곳의 신관들은 모두 합동 교리 공부나 기도회 같은 데에서 숱하게 마주쳤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신관들뿐 아니라 예배를 보러 온 신자들 중에도 낯익은 얼굴이 많아 유현진은 아까부터 그늘진 곳에 웅크리고 있던 터였다.

그나마 왕궁을 비롯해 고관대작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구라서 표면적으로나마 점잖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다행이다. 아까부터 흘끔거리는 시선들은 따가웠지만 대놓고 쫓아와서 이것저것 캐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현태오 총독은 왜 안 보여?”

제상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멈칫한 유현진은 우물거리듯 대꾸했다.

“안 왔으니까 안 보이지.”

이번엔 제상아가 멈칫했다. 믿어지지 않는 듯 유현진을 바라보던 그녀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눈을 치떴다.

“안 왔다고? 널 혼자 보냈어, 오늘 같은 날? 이런 자리에?”

“아니, 그 사람이 날 혼자 보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혼자 온 거지.”

화내려는 기색을 내비치는 제상아를 보고 유현진이 얼른 다독이듯 말하자, 그녀는 다시 기이하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말도 없이 그냥 혼자 와 버렸다고? ……마중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중……, 안 오지 않았을까? 원래 예배 보러 거의 안 오는 사람이잖아. 아마 오늘이 예배 날인 줄도 모를걸…….”

유현진이 어물어물 중얼거렸다. 애써 태연한 낯을 하고는 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상아의 눈길이 어이없다 못해 싸늘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다.

유현진도 알고 있었다.

신전에서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건 한 달에 한 번이다.

제양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었으나 국민 대부분이 하나람님을 믿는 신자였고, 신전에 적을 올린 신자들은 보통 예배일마다 신전에 나오곤 했다.

그렇기에 이날은 같은 지역구의 신자들이 한 달에 한 번 얼굴 마주치고 서로 안부를 묻는 사교의 자리이기도 했는데, 배우자나 약혼자가 있는 경우엔 같이 오는 게 관례였다.

특히나 고위층의 경우는 피치 못할 상황―한쪽이 아프거나 멀리 있거나 한 때― 외에는 한 사람만 오거나 따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 공공연히 애인을 따로 둔 부부라도 이런 자리는 함께 오곤 했다.

따로 온다면 그건 공개적으로 ‘우리 사이 안 좋아서 조만간 헤어질 것임’이라고 소문내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로, 심하게는 ‘나는 저 새끼랑 더 이상 같이 지낼 생각 없어요’, 혹은 ‘나는 그 여자 소박 맞히기로 했음’과도 같았다.

“너랑 정혼했을 때도 둘이 같이 잘 안 왔잖아…….”

점점 더 싸늘해지는 제상아의 눈길을 견디다 못한 유현진이 변명처럼 웅얼거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 눈길보다 더 싸늘했다.

“그때 나는 미성년이었고, 내가 성년이 된 이후엔 현 총독이 평항에 있었잖아! 게다가 너랑 현 총독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몰라? 불화설의 ㅂ만 나와도 온 매체에서 눈에 불을 켜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기사를 써 댈 판인데!”

어쩐지 아까부터 기자들이 신전 문 앞에서 계속 안쪽을 흘끔거리더라, 제상아는 지금도 멀리서 흘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악문 잇새로 다그쳤다. 이 와중에도 눈매는 웃고 있는 게 무섭다.

“지금 내 귀엔 현태오 총독이 너한테 엿 먹었다는 소리로 들렸거든? 배짱 좋다, 유현진? 지금쯤 너 데리러 갔다가 허탕 치고 한 방 맞은 기분일 텐데, 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야,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고 그래. 같이 오기로 약속한 적도 없다니까. 아무 연락도 뭐도 없었다고. 원래 공식 행사 아니면 신전에는 안 오는 사람이니까 난 당연히 안 오는 줄 알았지.”

“네가 먼저 물어볼 수도 있었잖아, 같이 가겠냐고?”

유현진은 일순 석상이 된 듯 굳었다. 제상아는 그런 유현진을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일부러 피하니?”

그 순간 움찔한 유현진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야. 여기를 따로 온다 한들 어차피 집으로 찾아오는데, 일부러 피할 수 있는 줄 알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어 하는 거 맞는 거 같은데?”

제상아가 한 번 더 다그치자 다시금 움찔한 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시무룩하게 침묵하던 그의 입에서 마지못해 본심이 흘러나왔다.

“……무섭단 말야.”

요즘 유현진은 현태오를 자주 만났다.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현태오는 유현진의 집에 종종 들렀다 가곤 했다.

심지어 처음에는 차 한 잔 마시고 가던 게 점차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어제는 낮잠까지 자고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유리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 아래 기분 좋게 낮잠을 자던 유현진이 문득 깨어 보니, 소리도 없이 언제 왔는지 현태오가 바로 지척에서 소파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꼭 유현진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깜빡 잠들기라도 한 것 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는데, 바로 한 뼘 거리에 있는 그 얼굴을 맞닥뜨린 유현진은 자다 말고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숨을 삼킨 유현진은 아직도 꿈을 꾸는지 헷갈려 하며 깜박깜박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만 굴려 살짝 기울어진 해를 보면서 꿈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다시 현태오에게 눈길을 주었다.

……언제 왔지. 왔으면 깨우지 않고. 근데 봐도 봐도 잘생겼구나…….

넋 놓고 시선을 주는데, 갑자기 현태오가 귀신처럼 눈을 떴다. 눈이 딱 마주쳤다. 유현진은 그대로 얼어서 꼼짝도 못 하고 현태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뭐 합니까.’

언제 잤었냐는 듯 맑게 갠 눈으로 유현진을 보던 현태오는 얼핏 눈살을 찌푸렸다. 유현진은 쿵쿵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대꾸했다.

‘보고 있었습니다.’

‘왜요.’

유현진은 일순 말이 막혔다.

너무 잘생겨서 시선을 빼앗겼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 눈을 떴더니 청하지도 않은 손님이 자리 잡고 있는데 안 보겠습니까?’

그럴싸한 변명이 즉시에 떠오르지 않은 유현진은 제발 더 캐묻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얼굴이 뜨거운 건 햇볕 때문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유현진을 보던 현태오는 코웃음처럼 짧은 숨을 내쉬곤 ‘어찌나 사납게 노려보시는지 누가 날 죽이러 왔나 싶었습니다.’라고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유현진의 두 손을 한꺼번에 붙들었다.

‘아무 짓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난 조금 더 쉴 테니.’

그러곤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설마하니 정말로 해칠 거라고 생각지는 않을 테지만, 두 손목을 그러쥔 손은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현진은 손을 붙들린 채로 당혹스레 현태오를 보았다.

정말로 자는지 나직하고 규칙적인 숨을 내쉬는 그를 보면서 유현진은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본인이 붙들고 있는 거니까 이렇게 지척에서 쳐다본다 해도 뭐라고는 못 하겠지. 그렇게 맘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마냥 좋아서 두근거리던 마음이 차차 무서워졌다.

어떡하지.

더 좋아진다. 욕심이 그칠 줄 모르고 더해만 갔다.

괜찮나. 여기까지는 손을 뻗어도 되나. 요만큼쯤은 허용되는 걸까.

그렇게 헷갈리는 사이에 욕심이 더욱 불어 나, 그게 무서웠다.

정상적인 상황도 아니고 켕기는 구석도 있는 마당이라 더욱.

그래서, 신전에 같이 갈 거냐고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같이 가야 하는 관계인 게 정말로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같이 안 간다고 하면 실망할 게 무서웠고, 같이 간다고 하면 비 온 뒤 죽순처럼 자라날 욕심이 무서웠다.

“……무서워. ……보면 볼수록 계속 더 좋아져. 좀 덜 봐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

고해성사라도 하는 심경으로 우울하게 더듬거리는 유현진을, 제상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질렸다는 듯 혀를 차며 절로 주름지려는 미간을 살짝 눌렀다.

“보면 볼수록 무서워지면 또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네 취향이 빻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지만,”

제상아는 눈동자만 들어 이 가엾고 한심스러운 소꿉친구를 바라보았다. 안쓰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 울상을 한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그랬다. 반듯반듯 차가워 보이는 낯 한 꺼풀 아래로, 이 소꿉친구는 늘 한결같고 사랑스러웠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유현진을 쳐다보던 그녀는 한풀 꺾인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 취향이 새삼 낫지도 않을 거고, 그럼 차라리 지금을 즐겨.”

“응……?”

“앞일을 누가 알겠니? 당장 내일 네 거짓말이 들통 나서 변방의 수용소로 쫓겨날지, 아님 그 남자가 또 어디서 술 먹고 실수해서 딴사람을 책임져야겠다고 널 팽개칠지. 지금 상황이 얼마나 갈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그럴 바엔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둬야 나중에라도 덜 억울하지 않겠어? 더 좋아지면 더 좋아지는 대로, 욕심나는 대로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거 다 해. 지금 넌 그 남자한테 뭘 요구해도 되는 위치에 있다구. 알아듣겠니? 못 하게 되기 전에 뭐든 다 해 둬.”

딱 부러지게 말하는 제상아를 유현진은 아연히 쳐다보았다.

얘는 늘 맞는 말만 한다. 맞는 말만 하는데, 실행하기 쉬운 말은 아니었다.

‘뭐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솔깃해하다가, ‘아냐, 그래도 사람을 속인 상태에서 욕심부리는 건 나쁜 짓인데,’ 하고 다시 고뇌하는 유현진을 지켜보던 제상아는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하고 혀를 끌끌 차곤 손을 내저었다.

“됐어, 해 봤자 소용도 없는 얘긴 일단 됐고, 그보다 너 일할 거리는 구했어?”

“어? 아니.”

신전에서 파문당해 속인이 된 유현진은 현재 백수 상태였다.

신학교 학생, 수습 신관, 부신관으로 성직자의 길만 걸어온 유현진은 먹고사는 재주라곤 없어, 이제부터 뭘 배워서 일자리를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자비로운 이 몸께서 시급 좋고 대우 좋은 임시직 일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지. 너 통역이나 하렴.”

“통역?”

유현진이 어리둥절하게 묻자 제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식 발표는 안 났지만 내달 중에 송갈에서 친선 사절단이 올 거야. 석 달 머무르다 갈 건데, 송갈이랑 우리는 나랏말싸미 달아 서로 사맛디 아니하잖겠어? 그런데 너는 마침 송갈어를 할 줄 알고 가르치는 재주도 있으니, 그들과 함께 다니며 통역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우리말이랑 문화도 좀 알려 줘.”

신관은 교육 수준이 높다. 경전의 원전을 익히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대어를 배우는데, 제양과 송갈의 말은 본디 같은 언어에서 파생된 터라 어느 정도 직책 이상의 신관들은 대부분 송갈어를 할 줄 알았다.

“왜. 싫으니?”

“아니! 할래! 할게! 고마워, 상아야!”

새침하게 되묻는 그녀가 혹여나 마음을 바꿀까 유현진은 얼른 그녀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다행이다. 그러잖아도 통장이 바닥을 보여 어쩌나 하던 참이었는데, 당장의 고민 하나는 덜었다.

“그런데 왜 외무관리청에서 공고를 안 내고 네가 직접 구해?”

“나랑 가까운 사람이면 좋겠다고 따로 부탁을 받았거든. 오는 사람한테서.”

“? 송갈에서 오는 사람? 네가 송갈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

“뭐 그냥.”

제상아는 눈길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유현진은 의아해졌지만, 공주님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비록 여태 사이가 안 좋은 적국이긴 했지만 내밀한 외교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배 시간 다 돼 가네. 슬슬 들어가자.”

시계를 보며 막 걸음을 돌리던 제상아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들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제상아를 발견한 그는 낯을 환히 밝히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아야, 벌써 와 있었구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는 제상아의 육촌 오라비, 계연군 제상민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이 근처가 아니라 원래라면 다른 지역구의 신전으로 가야겠지만, 그는 예배일마다 한사코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 상아 오늘도 정말 예쁘다. 네가 이렇게 일찍 올 줄 알았더라면 나도 더 일찍 왔을 텐데.”

제상아의 곁에 바싹 다가서며 허물없이 말을 건네는 계연군은,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늘 친근하게 굴기는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친한 척이다. 제상아는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리 달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계연군이 오래전부터 제상아에게 마음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사촌 이상이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제양이다.

그래 봤자 제상아는 현태오의 정혼자였던 터라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그래서 계연군이 더욱 현태오에게 이를 갈기도 했다―, 이제 정혼이 깨어지자 임자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근래 틈만 나면 제상아의 근처에 얼씬거리고 있었다.

웃고는 있지만 상아 기분 별로구나, 유현진은 가면을 쓴 것처럼 웃는 듯 마는 듯 한 제상아를 보며 생각했다. 유현진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만이라도 친분이 있으면 알아챌 만한데 계연군은 조금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까 아침에 연락했었는데 산책 나갔었다며. 돌아오면 다시 연락해 달라고 했는데, 전갈 못 받았어?”

“아아, 그러고 보니 들었던 것도 같은데 제가 한창 머리 장식 고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네요.”

“다음번엔 내가 정혜궁으로 데리러 갈 테니 같이 오자. 혼자 오는 것보단 동행이 있는 게 낫잖아.”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오라버니. 요즘 바쁘시다면서요.”

“바쁘다 한들 너랑 같이 보낼 시간이 없겠어?”

“어머나, 기뻐라. 그런데 어쩌죠, 저도 당분간 바빠서요. 하나하나 약속하고 시간 맞추고, 그럴 겨를이 없네요. 그냥 예배 드리면서 뵈어요.”

저렇게 노골적으로 거절하는데도 웃음을 약간 곁들여 준 것만으로 입가가 헤벌쭉 벌어진 계연군은 “그래? 그럼 너 시간 될 때 내가 정혜궁으로 갈까? 차라도 마시게. 좋은 차를 구했거든.” 하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제상아의 말로는 부마 자리가 욕심나서 그러는 거라지만 이렇게 보면 짝사랑에 절절매는 가엾은 청년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고 유현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로 가엾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계연군은 여러모로 평판이 최악에 가까운 인물로, 저자 때문에 신세 망치고 피눈물을 흘린 양민들이 숱하다고 했다. 제 아비의 위세를 믿고 방자함이 극에 달해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사람 여럿 쳐 죽였다느니, 남의 재물을 제 주머니 속에 있는 것처럼 써 댄다느니 했는데, 신전에 들어앉아 있었던 유현진의 귀에까지 그런 소리가 들어올 정도면 알 만한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 아들 일이라면 뭐든 오냐오냐 감싸 주던 의양군도 몇 번은 꾸지람을 한 모양이었는데, 알아듣기는커녕 머리가 돈 놈처럼 날뛰며 더더욱 패악을 부리고 다니니 이제는 제 아비도 모른 체하는 듯했다.

그런 인물이 유일하게 비굴할 정도로 눈치를 보며 아양을 부리는 상대가 제상아였는데, 그러면서 또 자존심이 상하는지 가끔 희번덕거리며 쳐다보는 눈매가 소름 끼쳐 유현진은 그가 제상아 근처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 저리로 좀 가 주면 좋을 텐데, 하고 유현진이 생각할 때였다.

화젯거리가 떨어졌는지 어물거리던 계연군이 유현진을 보았다. 유현진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했다. 계연군은 언제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냐는 양 씻은 듯 낯빛을 바꾸더니 오만한 기색으로 유현진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유현진 사제님 아니신가. 아니, 이제는 신전에서 파문당했으니 더 이상은 사제님이 아니시지.”

제상아와 함께 있을 때 마주쳐 두어 번 말을 섞어 본 게 전부인 계연군이 사뭇 친근한 양 말을 걸었다. 이분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나 의아해하며 유현진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그래, 신문에서 봤네. 한동안 떠들썩하더군. 쯧쯧, 현태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지? 촉망받는 신관이라 들었는데, 참으로 안됐네, 그려. 그자가 들리는 소문이 안 좋기는 했지만 그리 무도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지 뭔가.”

상아 네가 그자와 연을 끊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하고 눈치라곤 개나 줘 버린 발언까지 하며 말문을 뗀 계연군은 물 만난 고기처럼 현태오의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간 제상아의 정혼자가 현태오라는 데에 단단히 한이 맺혔던지, 혹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들의 파혼이 취소되기라도 할까 두려웠는지, 제상아를 곁눈질로 살피며 현태오를 욕하는 기세가 대단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현태오 그자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였지. 오만하고 무도하기 그지없어 제 맘 내키는 대로 행패를 부리고 다니기로 유명했거든. 그래도 싸움질에는 재주깨나 있어 공 좀 세워 멀리 변방에 자리 하나 얻어 나가 조용해졌나 싶더니, 수도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못된 짓을 저지를 줄 알았나. 하나람님이 두렵지도 않나 신관을 겁탈하다니, 필경 신벌을 받을 게야. 쯧쯧……, 책임을 지겠다고는 하나 무슨 꿍꿍이인지 누가 알겠나. 자네 조심하게.”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며 위로해 주는 척하는 계연군을 유현진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부터 그가 현태오를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험담을 할 줄은 몰랐다.

속이 상했다.

그 남자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다니.

그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닌데, 이때다 싶어 입방아를 찧어 대는 사람들의 칼날 같은 혀에 마구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비단 계연군뿐 아니라 얼마나 숱한 혓날이 그를 베어 대고 있을까.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그야 제가 조심하지 않아 이리되었다 할 수도 있겠으나,”

유현진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계연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갈 곳을 잃은 손을 허공에 띄운 채 계연군은 냉담히 바라보는 유현진을 끔벅끔벅 마주 보았다.

“제가 알기로 현태오 총독은 능력 이상으로 오만하게 군 적도, 아무 이유 없이 무도하게 군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불운한 사고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그 결과를 당사자인 제가 기꺼이 감당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뭐,”

“그 일에 대해 입댈 자격이 있는 자는 오로지 저와 정혜궁마마뿐인데, 저와 마마는 총독을 탓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마음은 하나람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제가 현태오 총독을 용서한 마음 또한 하나람님께서 이끌어 주신바, 그가 신벌을 받지도 않을 것입니다. 의원님께서는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현태오 총독을 험구하지 마십시오.”

정색한 유현진이 차분히 대꾸하자 계연군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둔 여자 앞에서 면박을 당했다고 여겼는지 이내 낯을 벌겋게 붉히며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놈이, 내 일껏 불쌍히 여겨서 말해 주었더니,”

저거다. 저 눈빛이 거북해.

머리 한구석이 갑자기 돌아 버린 사람처럼 눈알을 희번덕희번덕 굴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계연군을 보며 유현진은 무심코 한걸음 물러났다.

귀신처럼 낯을 구긴 계연군이 유현진에게 다가서 막 주먹을 올리려던 찰나,

――딱.

그들의 옆쪽에 있던 신전 곁문에서 바닥을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가 났다.

뒤이어 뚜걱, 하고 무겁게 울리는 구두 소리.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속에 선명하게 울리는 그 소리 뒤로,

“댁에 안 계셔서 당황했는데 이런 데서 선약이 있으셨나 봅니다. 추운데 안에 들어가 계시지 않고. 한참 찾았지 뭡니까.”

느릿하게 말하며 신전 안에서 나온 것은 현태오였다.

그 뒤로 따라 나온 진문성이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 바깥을 흘끔거리던 호기심 많은 시선들이 가로막혔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흠칫한 것은 계연군뿐만이 아니었다. 유현진도 현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다른 사람이 거기 있든 말든 현태오는 오로지 유현진만 응시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탁, ―뚜걱. 탁, ―뚜걱. 규칙적인 소리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다음에는 먼저 나가실 때엔 제게 미리 말씀이라도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헛걸음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요.”

현태오의 그 냉담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유현진은 그가 제상아의 추측대로 유현진의 집까지 마중을 갔다가 허탕을 치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 같이 오기로 약속한 적도 없고, 또 꼭 같이 올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설픈 변명을 읊조리는 유현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태오가 코웃음 쳤다. 멀리서 사진 찍는 기척이 들려왔다. 신전 안으로 못 들어오는 기자들이 담장 밖에서 기를 쓰고 뭐라도 건지려 애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근래 그 누구보다도 주목받는 한 쌍이 아니던가.

“이런 자리에 혼자 온다는 건 둘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대외적으로 알리는 꼴입니다.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탁, 지팡이가 유현진의 옆에서 멎었다. 바로 앞에 현태오가 선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아 입을 다물고 있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이러시면 곤란하지요. 제가 오해하지 않습니까. 유현진 씨가 어떻게든 ‘헛소문’을 만들어 내 절 떼어 내려고 이러시는 줄로.”

혀를 차며 나직이 뇌까리는 음색은 도무지 오해한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설마 그러진 않으시겠지요?”

속삭이듯이 다짐하는 현태오를 유현진은 당혹스레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분명 포효를 앞둔 범처럼 서늘했는데도 별안간 마음이 울렁거렸다.

정말로 공공연한 관계로 내비쳐도 된다는 건가. 아니 이미 그러고 있긴 하지만, 지금 이 관계가 정말 진짜라고 믿어도 되는 걸까.

망설이던 유현진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유현진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문득 느슨하게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좋습니다.”

가슴속까지 싸늘하게 얼리던 음색도 함께 누그러졌다.

“저는 또, 이런 식으로 엿을 먹나 오해를 하는 바람에 화가 좀 나긴 했었습니다만, 오해가 풀려서 다행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 큰 잘못을 용서해 주신 유현진 씨에게 화를 낼 리야 없지만요.”

느릿하게 덧붙는 말에 유현진은 하마터면 딸꾹질을 할 뻔했다. 등줄기에 차가운 물방울이 도르륵 굴러내리는 것 같았다.

들었구나.

눈동자만 들어 흘끔 쳐다봤지만 현태오는 여전히 무표정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눈매는 살짝 웃는 것 같기도 한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뭐…… 하고 어물거리는 유현진을 느긋하게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 엉거주춤한 기색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던 계연군은 현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낯을 굳혔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현태오가 얼핏 웃는 듯했다. 그 순간 움찔한 계연군은 그런 스스로에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더욱 낯을 굳히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치미는 분노를 자제할 수 없는지 입술이 부들거렸지만 덤벼들지는 않았다.

“의원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얼마 전 의양군마마와는 궁 앞에서 마주쳐 잠시 뵈었었습니다만.”

“아, 그래. 평항에서는 큰일을 겪었다면서.”

흥분해서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차마 성을 부리지 못하고 대꾸하는 계연군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러면서도 눈치를 보느라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른다.

현태오는 무심히 계연군을 보며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듯했다. 굳이 말을 섞는 게 귀찮은 눈치였다. 평소의 현태오였다면 신경도 안 쓰고 스쳐 지났을 터였다.

현태오가 눈동자만 돌려 유현진을 보았다. 하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딱 걸린 유현진은 공연히 켕겨서 슬쩍 시선을 떨구었다. 가만, 내가 뭔가 거슬릴 만한 말은 안 했던가.

불안스런 얼굴로 기억 속을 헤집는 유현진을 지켜보던 현태오는 계연군에게 눈길을 돌렸다.

“의원님께서 제 허물을 이렇게 염려해 주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오만무도하게 지내다 보면 벌을 받을 일도 생기게 되지요.”

크흠, 헛기침을 하는 계연군은 붉으락푸르락한 낯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저는 신의 사랑을 받는 분께 죄를 저지르고도 은혜롭게 용서를 받았으니, 제가 이렇듯 운이 좋은 것이 아마도 의원님 같은 분들이 염려를 많이 해 주셔서 그런가 봅니다.”

이번엔 유현진이 움츠렸다. 현태오는 여전히 계연군을 보고 있는데도, 왠지 유현진은 그가 자신의 기색을 낱낱이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의원님,”

언짢은 기색이라곤 없이 유유히 말하던 현태오가 별안간 음색을 낮추었다.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누구나 다 저처럼 운이 좋을지는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속삭이듯 말하는 현태오를, 계연군은 딱딱하게 굳은 채 마주 보았다. 움칫거리던 입술이 겨우 말을 뱉어냈다.

“지금 자네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린가?”

“제 주위 사람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뜻입니다.”

현태오의 말투는 여상했다. 입을 꾹 다문 계연군은 점점 더 사납게 얼어붙는 얼굴로 현태오를 노려보았다. 그러던 그가 막 “이놈이……!” 하고 말을 뗐을 때, 제상아가 그의 팔뚝에 살짝 손을 얹었다.

“오라버니, 그만 들어가요. 시간이 다 되었어요.”

현태오에게 잠깐 시선을 준 제상아가 계연군을 살며시 밀었고, 계연군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현태오를 노려보았으나 못 이긴 척 물러났다. 되레 고개를 더욱 바짝 치켜들고 홱 돌아서 신전 건물로 들어가 버리는 그의 뒤를 따라, 제상아도 현태오에게 묵례를 건네곤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 다음에 뵈어요. ――유현진 씨에게는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어요.”

우아하게 말을 남긴 제상아는 사뿐사뿐 신전으로 들어갔고, 멀찍이서 뒷짐을 지고 있는 진문성을 배경으로 그 자리에는 현태오와 유현진만 남았다.

유현진은 묵직한 기분으로 현태오를 보았다.

제상아의 뒷모습을 보며 뒤늦게나마 실감이 들었다.

원래라면 현태오가 제상아를 에스코트해서 함께 들어가는 게 당연했을 텐데, 이제는 제상아 혼자 들어가고 있었다. 둘이 한 쌍이었던 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일이었는데.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이 남자는 그녀를 놓았다. 책임과 긍지를 위해 오랜 약혼녀를 포기해야만 하는 마음은 어땠을까. 또한, 그걸 빌미로 이때라는 듯이 공격해 드는 저 비열한 말들은 어떻고.

“……미안합니다.”

유현진이 무겁게 입을 떼자 현태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 미안합니까?”

“…….”

안 잤는데 잤다고 널 속이고 꿰차서 미안……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한다.

침묵하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또 웁니까?”

“안 웁니다. ……그리고 은근슬쩍 거짓말하지 마세요. 운 적 없잖습니까.”

유현진은 눈에 힘을 주며 현태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현태오의 눈매에 느슨한 웃음기가 스며 있는 걸 보았다. 그 스스로조차 모르는 듯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다음에는 연락도 없이 혼자 오지 마십시오. 공식적인 관계는 이런 자리엔 함께 오는 겁니다.”

한 번 더 짚어 두는 현태오는 계연군에게 험한 소리를 들은 건 신경조차 안 쓰는 듯 불쾌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유현진은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나자 살짝 억울해졌다.

일단 공식적인 관계인지부터가 미묘했을뿐더러, 같이 신전에 갈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지 않았던가. 심지어는 휴대 전화에 아무런 기척도 없었던 걸로 봐선 유현진의 집에도 연락 없이 대뜸 찾아갔을 게 분명했다.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원래 현태오 씨는 공식 행사 말고는 예배에 안 오시잖습니까.”

내가 그간 신전에서 일하면서 평소에 널 본 적이 없는데요, 유현진이 빤히 쳐다보며 말하자 현태오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는 평항에 가 있었잖습니까. 여기엘 어떻게 옵니까.”

“평항에서도 안 가셨을 것 같은데요. 도중에 잠깐잠깐 수도로 돌아왔을 때에도 온 적 없으셨고.”

“전직 사제님이었다고 지금 저 꾸짖는 겁니까?”

“아주머님께서는 전직 사제님이라서 현태오 씨를 그렇게 꾸짖으셨던가요?”

독실한 신자인 현태오의 모친은 어릴 때부터 신전에 안 오는 그를 매번 야단쳤지만, 그는 꿋꿋이 오지 않았다. 같이 살았던 시절엔 예배날 저녁마다 야단맞는 그를 여러 번 보았다. 그럴 때면 그는 들은 척도 안 하면서도 뚱한 얼굴을 하곤 했었다.

어머니의 잔소리를 떠올렸는지 슬쩍 짜증스런 얼굴을 하는 현태오를 보던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그때도 저런 얼굴이었다.

그 얼굴 위로 현태오의 시선이 닿았다. 유현진의 눈매며 입가를 천천히 살피던 현태오가 시선을 돌렸다.

“분명히 저는 공적인 볼일이나 행사가 아니면 신전에는 거의 오지 않습니다만, 지금은 다르잖습니까. 귀찮아도 와야죠. 같이 와야 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별 뜻 없는, 의무에 대한 이야기일 뿐인데도 그 말을 들으며 유현진은 괜히 목이 더워졌다. 유현진 역시 시선을 돌리며 잠깐 침묵하다가 중얼거렸다.

“……정 많이 귀찮으시면 한 번쯤……, 몇 달에 한 번쯤은, 같이 빼먹어도 됩니다. 둘이 같이 안 오면, 사람들도 별말 안 할 테니까요.”

“전직 사제님이 그런 말씀 하셔도 됩니까?”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너 때문에요, 라는 뒷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표정으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현태오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그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이렇게 되어 버린 일인데.

유현진은 현태오를 바라보다 불쑥 속삭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미안합니다.”

뭐가 미안하냐는 물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기묘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이 문득 떨어지는가 싶더니 피식, 바람 소리가 났다. 유현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무표정한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때 예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신전 바깥에는 남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만 들어가 볼까요. 오늘은 모처럼 온 김에, 하나람님께 진지하게 기도드려야겠습니다. 유현진 씨에게 용서의 마음을 내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

이제 알겠다. 무표정한 것 같지만 저 슬쩍 가늘어지는 눈매는, 비웃는 거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면 말하더라도, 저 남자가 근처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 말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를 삼키며 불퉁하게 걸음을 떼는 유현진의 옆으로 현태오가 지팡이를 짚으며 나란히 섰다. 평소보다 아주 약간 더 기울어지는 다리를 유현진이 바라보자 그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현태오가 흘끔 시선을 주었다. 은근히 심술궂은 목소리가 날아온다.

“추운 날씨에는 상태가 좀 안 좋아져서 그렇습니다. 이런 날 누굴 마중 갔다가 헛걸음이라도 하면 다리가 아주 아프지요.”

“……, 미안합,”

“그러니까 혼자 다니지 말고, 부축이나 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현태오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었다. 아주 잠깐 멈칫한 유현진이었지만, 슬쩍 시선을 떨구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손을 잡았다.

부축하라는 것치고는 손에 아무런 무게감도 실리지 않고 그저 꾹 움켜쥐는 악력만 느껴졌을 뿐이지만, 유현진은 성심성의껏 부축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에는 한층 더 조심한다.

머리 위에서 한 번 더 희미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 밖에서도 손을 잡을 수 있어서 참 좋다고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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