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촘촘한 문살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이 어둑한 실내를 적당하게 밝히고 있었다.
차향만 감도는 고요한 정적을 뒤뜰의 새소리가 이따금 흩어 놓았다.
고요하고 나른한 늦오후, 궁중의 아늑하고 아담한 편전 안에는 찻주전자와 찻잔 세 조만 놓인 좌탁을 가운데 두고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평온한 오후의 다향을 둘러싼 이들은 제양의 상징인 왕과 정사를 다루는 총리, 그리고 총리의 아들이었다.
이미 머리가 허옇게 센 두 남자는 임금과 신하인 동시에 험하게 휘몰아치는 젊은 날의 물살을 함께 헤쳐 온 벗이기도 했다. 어쩌면 거기에 사돈이라는 관계가 더해질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제양의 오래 묵은 범 같은 노인들과 동석한 젊은 남자는, 그들을 앞두고도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주눅이 든 기색이라곤 없이 담담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앞에 누가 있건 말건 아랑곳 않고 차 냄새를, 혹은 새소리를 즐기는 듯했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곧 송갈에서 친선 사절이 올 게다.”
잔을 들어 입술을 축인 왕이 말을 꺼냈다.
그제야 젊은 남자, 현태오는 시선을 들어 왕을 보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한 노인의 얼굴을 한 왕은 대수롭잖은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송갈의 셋째 왕자가 사절단을 이끌고 와 석 달간 머무를 텐데, 그 사이에 상아와 혼약을 할 게야. 그리고 평항에서부터 협력을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내년 안에 이루어질 게야.”
현태오는 얼핏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양 내에서 친송갈파와 반송갈파가 맞서고 있는 현재.
송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자는 친송갈파가 서서히 우위를 점하고 있긴 하지만, 반송갈의 목소리도 만만찮았다. 그런 와중에 저 모든 과정을 고작해야 일 년 남짓 만에 마치겠다니,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어도 이보다는 여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노도처럼 몰아쳐서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자 하는 이 방법은 아마 아비의 제안일 것이다. 중립인 양하는 노인네가 은근히 능구렁이다.
지금도 낯빛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비, 총리 현상원이 여상하게 물었다.
“큰 잡음이 나지 않게 잘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든 말든, 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닙니까?”
현태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 거침없는 대꾸에 노인들이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벌집을 쑤신 듯한 소란이 일 게 불 보듯 뻔하다. 그 모든 소란 속에서 최초의 협력 시도를 하는 평항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을 것이다. 지금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곳인데, 아무도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이 남자가 아니라면.
“이놈이 이렇게 대답하는데, 맡겨 둬서 큰 낭패야 보겠습니까.”
총리가 왕에게 말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항이 늘 시끄럽다 하나 이제 막바지였다. 현태오는 평항으로 간 이후로 전장 한가운데 있는 것보다 더 가열하게 그 땅을 다잡아 왔다.
이제 그 땅이 시끄럽도록 멀리서 들쑤시는 무리만 잡아 버린다면, 그곳을 돈줄 삼아 제 잇속을 채우는 놈들만 치워 버리고 나면 평항은 곧 완연한 안정세에 접어들 터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해 현태오는 제 목숨을 미끼로 걸었고, 살아남았다.
“그래, 몸은 좀 괜찮으냐. 큰 사고였다고 하던데.”
왕이 물었다. 현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적당히 다닐 만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지만 실상은 목숨이 위험한 사고였다. 살아난 게 천만다행이라고도 했다.
“신전엔 도통 가지도 않는 놈이 하나람님의 가호는 잘도 받는 모양입니다. 어릴 때부터 희한하게 악운에 강했지요.”
성질머리가 이 모양이라 악운도 비껴가나 봅니다, 하고 허허 웃는 총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현태오는 툭 던지듯 대꾸했다.
“그래서 아들을 그리 험지로 막 굴리셨습니까.”
“이놈 봐라. 될 만하니 굴렸지 안 될 놈을 굴렸겠느냐.”
총리가 눈을 부릅뜨며 현태오를 보는데 왕이 껄껄 웃으며 관두라는 듯 손을 젓는다. 총리는 잠자코 시선을 거두며 찻잔을 들었다.
“화친의 뜻을 널리 알리고 나면 한동안 떠들썩할 겁니다. 반대하는 이들의 항의도 몹시 거세겠지요. 허나 가장 시끄럽게 나서는 무리를 제압하고 나면, 그들이 아예 뜻을 꺾지는 않더라도 한동안은 조용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만큼의 시간은 생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끄러워지면 꺾고, 다시 꺾고……, 그리 계속 시간을 만들어 가며 터를 닦아야지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그렇겠지. 어디 당장에야 되겠는가. 오래 걸릴 일이야. 그저 내 대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놓고 다음 대에 물려주어야지.”
“그래, 좀 어떻겠느냐.”
총리가 현태오에게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현태오는 담담히 대답했다.
“이미 증좌는 차고 넘칩니다. 이제는 그들이 해 왔던 일의 대가를 치를 때임을 직접 그들 자신의 몸으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허허, 이 녀석 얼마나 파죽지세로 몰아치려 그러누.”
너털웃음을 웃는 왕에게 현태오가 무람없는 시선을 주었다.
“크게 심려하실 것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전하께서 다소간 마음 불편하실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 불편할 일이라……. 무엇을 이르는 말인가?”
“대단치는 않으나, 왕실의 어르신 한두 분 이름 좀 더럽히고 왕실 체통에도 금이 좀 가기는 할 것입니다.”
“태오 이놈!”
총리가 차마 임금의 앞에서 큰 소리는 내지 못해 악문 잇새로 외치며 아들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왕은 이번에도 호탕하게 웃기만 했다.
잠잠한 미소를 띤 채 한동안 침묵하던 왕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선왕께서는 호전적인 분이시라 그 시절 많은 피가 흘렀어. 작은 숙부모님께서도 국경의 성채를 지키다 송갈군에게 포위되어 비참하게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부모를 잃은 의양군이 송갈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게 어찌 잘못된 일이겠는가.”
“허나 그분이 물러나지 않는 한 척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래서야 안 되지.”
짤막한 침묵 뒤, 왕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오래도록 바라 온 일이다. 잘되어야만 해.”
그간 무익한 피를 너무 흘렸어, 묵직한 말이 한숨처럼 흩어졌다.
왕은 오래전부터 전쟁의 종식을 바랐다. 그것은 총리의 꿈이기도 했다.
젊은 날 전장을 누볐던 총리는 피도 눈물도 없다 일컬어지는 무서운 맹장이었다. 허나 그가 밤마다 피 냄새와 신음 소리, 숨죽인 울음소리가 가득한 캄캄한 들을 응시하며 수도 없이 마음을 칼로 베어 냈음을 현태오는 알고 있었다.
왕의 숙원이자 아비의 숙원이다.
오랜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 왔던 노력은 이제 그 형태가 보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딱 한 걸음, 첫발을 뗄 수나 있기만을 바라야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총리는 크게 염려하는 빛 없이 덤덤했다. 왕 역시 마찬가지다.
“수백여 년 동안 패어 온 골인데 이를 말인가. 수십 년의 시간을 두고 메워 가야지. 우리는 그저 물꼬만 트고, 나머지는 다음 대에서 잘 알아 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행히 세자마마께서 영민하시니 크게 염려치 마십시오.”
“허허, 그놈이 좀 부족한 데가 있어도 자네 아들들이 잘 도와주지 않겠나. 안 그러냐, 태오야.”
제 아들처럼 허물없이 부르는 왕에게 현태오는 대답 대신 고개만 깊이 숙였다.
“네가 참으로 공이 크다. 이번에도 네가 아니었으면 어찌 흉한 자들의 단서를 잡았겠는가. ……허나, 너무 무모하게 나서지는 말아라. 이번에 네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눈앞이 아찔했다.”
“조심하겠습니다.”
소홀하게 느껴질 만큼 간단한 대답이었으나 왕은 기꺼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너희들이 반석이 되어 주어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걸음씩 차근히 나아가도록 해라.”
왕은 몸을 기울여 현태오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나긴 시간을 아들처럼, 조카처럼, 가족처럼 두터운 정을 쌓아 왔다. 군신 관계인 동시에 숙질 관계와도 같은 지 오래되었다. 고개를 숙이는 현태오의 옆에서 총리도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기울어져 가는 오후의 햇빛처럼 그들의 삶 역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이 온화한 시간 속에서 그들은 끝까지 그들이 원하는 일들을 해 나갈 터였다.
“헌데,”
빈 잔에 새로 따른 차를 들던 왕이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 신관 청년과의 일은 어찌 된 것이냐?”
그 말이 나온 순간 총리는 얼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평연한 낯으로 침묵하는 까닭은, 그는 이미 아들에게 달려가 벌컥 야단을 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태오는 대수롭잖은 투로 말했다.
“어찌 된 일도 저찌 된 일도 아닙니다. 잠시 있다가 원래대로 둘 것입니다.”
다른 변명도 설명도 없이 그 말만 하자 왕은 기이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더 묻지 않았다. 그만큼의 믿음과 애정이 쌓여 있는 탓이다.
그러나 잠자코 있던 총리는 못내 속이 불편했는지, 태연한 얼굴로도 불퉁하게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무어, 어차피 화친을 앞두고 있으니 제양의, 특히나 평항의 총독이 송갈의 문화를 이해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인다는 면모를 보여 주는 건 나쁘지 않겠지요. 하지만 하필 그 아이를…….”
“그 신관이라는 청년이 자네도 아는 사람인가?”
“오래 전 갈량에서 치렀던 전투에서 저를 구하고 목숨을 잃은 부하의 아들입니다.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판국에 이놈이 몹쓸 짓을…….”
총리는 기어이 언짢은 내색을 드러내었으나 왕은 재미있다는 듯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 하지만 나는 그 소식을 듣고는 참으로 놀라웠다네. 태오가 술에 만취해 실수를 다 하다니,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더니 이제 보니 인간적인 데도 있지 않은가.”
총리는 미심쩍게 현태오를 보았고, 현태오는 태연자약한 기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이라 겁간을 다 한답니까. 못난 놈!” 하고 욕을 들어 먹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여상하게 말을 건넸을 뿐이다.
“두 분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은 제가 수습할 것이며, 그 청년은 말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두었다가 지방 신전의 괜찮은 자리를 물색해 보낼 예정입니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잘 마무리할 테니 염려 마십시오.”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그 청년은 이제 속인이 되었으니, 좋은 혼처라도 찾아 주고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면 되지 않겠는가.”
왕이 흔흔히 웃으며 말하자 현태오가 보일 듯 말 듯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나 “제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때에는 도로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 어찌 되었든 이번에는 태오 너에게 미안하게 되었다. 원래 파혼은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으나 그 책임은 네가 혼자서 진 셈이니. 내 잊지 않고 기억해 둘 것이야.”
“황공합니다.”
현태오는 다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왕은 웃으며 손을 저어 그가 고개를 들게끔 했고, 그의 빈 잔에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훈훈하게 피어오르는 김이 오후의 느른한 햇빛에 흩어졌다.
*
제양의 왕실에서 송갈의 친선 사절단을 맞이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났을 때 온 제양이 떠들썩하게 들끓었다. 전해지기로는 송갈 또한 비슷한 반응이라고 했다.
기나긴 세월을 적국으로 지냈던 두 나라다. 근래까지도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으며 국경을 따라 분쟁 지역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오랜 전쟁으로 쌓인 피로와 비극을 불식하고자 하는 목소리들도 점차 커져 가고 있던 터였다.
비록 이번 발표가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닌 왕실 간의 교류라고 한정 짓고 있었으나, 정부에서도 향후의 나아갈 방향을 화친으로 잡았음을 암시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 발표에 친화의 목소리도 척화의 목소리도 한꺼번에 뒤섞여 끓어올랐다. 공공 게시판에는 논조가 다른 글들이 매일같이 수없이 게재되었다.
그러나 친선 사절을 맞아들이고자 하는 왕실의 뜻은 확고했고, 송갈 왕실의 제3왕자를 필두로 하는 서른 명 남짓한 사절단은 엄중한 호위하에 예정된 날에 제양의 수도에 도착했다.
새해까지 얼마 남지 않은 연말의 맑은 날이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 송갈과 제양의 분쟁에 대한 최초의 사례는 950년 전입니다. 그때 제양이 송갈 남단의 마을을 침략해 곡물을 수탈해갔다고 하지요.”
“그때는 현 왕조가 시작되기도 전의 일 아닌가요. 그때의 책임부터 묻는 건 이치에 안 맞죠. 그렇게 따지자면, 1400년 전 아바단 산맥의 분쟁 기록이 최초 아닌가요? 그때 송갈 영역에 있던 부족이 제양의 영역을 침략해서 마을 하나가 통째로 궤멸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거야말로 억지스러운 말씀이지요. 그때는 왕조는커녕 송갈이라는 왕국 자체가 이루어지기도 전인데요.”
“좋아요. 그러니까 송갈 측이나 제양 측 모두, 지금의 왕조가 세워진 이후부터 따져 보자고요.”
정혜궁의 응접실에서는 널찍한 원탁을 가운데 두고 두 남녀의 열띤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역사적인 기록들을 줄줄 늘어놓으며 서로를 잡아먹을 양 정색을 한 그들을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며, 유현진은 생각했다.
저렇듯 유창하게 제양의 말로 갑론을박하는 두 사람 사이에 통역이 왜 필요한 걸까. “와, 진짜 못 해 먹겠네.” 같은 구어까지 혼잣말로 구사할 줄 아는 남자가 왜 굳이 통역사를 요구한 걸까.
그들이 싸우거나 말거나 조용히 응접실로 들어온 나인이 차를 따라 주었다.
“눈 속에서만 움트는 귀한 꽃을 덖은 차랍니다. 올겨울의 햇차라서 아주 향이 좋아요.”
나인이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유현진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 두 남녀를 가운데 두고 장식처럼 앉아 있는 나머지 두 명의 남자들에게 그 말을 송갈어로 전해 주었다.
그래, 저들을 위해 통역이 필요했던 게지. 왕자가 대동하고 온 보좌관들은 저 왕자만큼 제양어가 유창하지는 않았으니.
너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멀쩡한 길목에 금을 그어 놓은 게 잘못, 그렇게 따지자면 너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멀쩡한 공터를 제 것인 양 개간한 게 잘못, 점점 유치하고 격렬해지는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남녀는 저래 봬도 최고 학술기관에서 교육받은 일국의 왕족이었다.
송갈의 친선 사절단을 이끌고 온 셋째 왕자 미사담이 바로 저 청년이었고, 그를 안내하며 제양의 문물을 알려 주고 교우 관계를 돋울 역할을 맡은 제양의 막내 공주 제상아가 지금 저기서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처녀였다.
친선을 위한 자리인가, 분란을 위한 자리인가.
아마 유현진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듯, 왕자의 보좌관인 두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머쓱하고도 예의 바른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유현진은 마주 웃으며 「차 맛은 어떠신지요? 송갈에서는 어떤 차를 주로 드시나요?」 하고 저 싸움꾼들을 내버려 둔 채 그들과의 대화에 나섰다. 그들 역시 친선 사절로 온 사람들답게 부드럽고 온유한 태도로 「우리 송갈에서는 잎차보다는 볶은 콩을 갈아서 끓여 낸 물을 더 많이들 마십니다. 그러잖아도 이번에 조금 가져와 봤는데…….」 하고 말을 받았다.
쟤들은 싸우라고 놔두고 우리라도 우호를 다져 봐야겠다, 암암리에 뜻을 모은 그들이었다.
송갈에서 보낸 친선 사절단이 제양의 수도에 도착한 것은 닷새 전이었다.
그전부터 연일 아주 떠들썩했다. 날마다 온갖 매체에서 친화파와 척화파가 어찌나 싸워 대는지, 사설들만 읽어도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친선 사절단은 무사히 수도에 이르렀고, 서른의 인원들이 각자의 전문 영역으로 흩어져 볼일을 보는 가운데 그들을 이끌고 온 왕자는 왕족인 제상아가 손수 안내하기로 했다고 한다.
유현진이 그들과 인사를 나눈 것은 사흘 전이었다. 원래라면 첫날부터 왔어야 하나 첫날과 둘째 날은 왕실과 정부 요직에 앉은 주요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들에게 딸린 통역 담당이 따로 있어, 사흘째에야 유현진은 그들과 만나게 되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미사담이라고 합니다. 상아 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유창한 제양어로 인사를 건네는 송갈의 셋째 왕자 미사담은 밝고 긍정적인 인상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왕족인데도 소탈하고 허물없어 마치 이웃집 청년 같다. 심지어 제상아와는 동갑이라 더 편해서 그랬는지 서로 굳이 딱딱한 경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었다.
상아가 친해지고 나면 터놓고 지내는 성격이긴 하지만 아무한테나 막 편하게 굴게끔 두지는 않는데, 잘 맞았나 보네……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며 유현진은 미사담을 보았다.
그 빤한 시선을 느낀 미사담이 ‘왜요?’ 하고 웃었다.
‘아니요, 왠지 모르게 좀 낯익어서……. 제양에는 처음이시던가요?’
유현진이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미사담은 아아, 하고 웃었다.
‘수도에는 처음입니다. 하지만 평항에서 뵌 적이 있죠.’
‘……, 저를요? 평항에서……?’
유현진은 갑작스레 날아온 뜬금없는 말에 눈을 껌벅이며 미심쩍게 고개를 기울였다.
‘예. 3년 전 평항에 갔던 적이 있거든요. 비공식이었지만. 그때 처음 상아 님과 만났는데, 현진 씨와도 아주 잠깐 마주쳤었어요. 찻집에서. 그때 저 친구도 같이 있었는데, 기억 안 나시려나요?’
미사담이 싱글싱글 웃으며 보좌관 중 하나를 가리켰다. 덩치가 큰 보좌관이 덤덤하게 고개를 꾸벅했다. 유현진도 얼결에 덩달아 고개를 꾸벅하곤 얼떨떨하게 미사담을 보았다.
3년 전 평항이라면 사목 갔을 때를 말하는 것 같은데, 하고 껌벅껌벅 그를 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당시 제상아가 송갈에서 왔다는 웬 정체 모를 외간 남자들과 노닥거리길래 조심 좀 하라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그때 그 남자들이 제법 멀끔하게 잘생겼었던 것 같다. 그래서, 상아 이 계집애가 세상 위험한 줄 모르고 얼굴만 밝힌다고 걱정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남자들이……?!
유현진이 제상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아무렇잖은 얼굴로 차를 마시다가 눈이 마주치곤 ‘왜?’라는 표정으로 마주 본다.
‘그때 마주쳤던 분이 미사담 님이었어?’
유현진이 묻자 제상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 그때 벌써 아는 사이였어?’
‘아니. 그때 처음 봤지.’
‘?? 그럼 그 뒤로 계속 알고 지냈던 거야?’
‘응. 어쩌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됐지 뭐니?’
그렇게 우연히 만날 수도 있구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유현진은 감탄했다.
‘그렇게 알게 된 사이였구나……. 몰랐었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그런가, 하고 유현진은 눈을 껌벅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말끄러미 유현진을 쳐다보던 제상아가 웃는다. 이 맹하고 사랑스러운 것, 하고 말할 때와 같은 눈빛으로.
그때 이미 안면을 텄기에 그런지, 혹은 둘이 동갑이라 그런지, 혹은 그저 성격이 잘 맞는 건지, 제상아와 미사담은 마치 오래도록 알고 지낸 친구들 같았다. 둘이 나란히 앉아 한도 끝도 없이 조잘거린다. 가끔 아무 말도 없이 시간이 흘러도 그다지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친해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의견의 대립이 생기면 살벌하게 맞섰다. 이러다 친선이 결렬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다가, 갑자기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꿉친구처럼 까르륵거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무섭게 말로 주먹질을 할 때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본 유현진이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적어도 저들의 싸움을 무시하고 왕자의 두 보좌관과 사이좋게 차를 마실 수 있을 정도로는.
「볶은 콩을 가루 내어 끓인 물이라……. 그러고 보니 송갈에서 흔히 마신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 원래는 삼람교의 제식에서 제사장이 꼭 마시는 건데, 그게 세간에도 퍼져서 지금은 모두가 흔히들 마십니다. 송갈에는 삼람교 신자들이 많거든요.」
「그렇다지요. 저희 제양에서는 국민들 대부분이 하나람님을 믿습니다만, 송갈은 반 이상이 삼람교 신자라고 들었습니다.」
「예, 여기 있는 거루도 독실한 삼람교 신자예요. 매주 한 번씩 기도하는 제식에도 절대로 빠지지 않지요. 삼람교는 밤에 제식을 치르기 때문에 피곤할 텐데도 절대 안 빠져요.」
「하하, 여기가 수도라서 다행이네요. 제양에는 수도에만 삼람교 신전이 딱 한 군데 있거든요.」
거루 너 여기까지 와서도 꼬박꼬박 제식에 참석하려고?, 당연한 소리, 하고 말을 주고받는 보좌관들과 나란히 앉아 유현진은 차분히 그들을 관찰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언어가 다르다는 점과 문화적으로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외양도 거의 비슷하다. 세세하게 뜯어보면 광대가 좀 더 나왔다든가 하악이 더 발달했다든가 하는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송갈인과 제양인이 입 다문 채 뒤섞여 있으면 국적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다 함께 더불어 잘 지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하나람님.
유현진은 마음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차를 마셨다.
그때 저 멀리 궁궐 담장 밖에서 뭔가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어라 구호를 외치는 것 같았다. 저 소리는 크게 작게, 아까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입궁하면서 저 무리들 옆을 스쳐 지나왔기 때문에 유현진은 저 웅웅거리는 소란이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반송갈파가 궁 밖에서 시위를 하며 화친 반대를 외치는 소리다.
그리고 저들을 어디선가 현태오가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송갈에서 친선 사절단이 오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지 얼마 있지 않아, 그들을 호위할 위병들의 총괄 관리를 현태오가 맡기로 했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그때에도 여기저기서 들썩였다.
이 인선에 대해서는 친송갈파에서도 반송갈파에서도 썩 좋은 소리는 안 나왔는데, 송갈에서 경원시하는 인물인 평항의 총독에게 그런 역할을 맡기는 게 옳겠는가, 송갈인에 의해 큰 부상을 입고 수도에 와 있는 이에게 그런 일을 맡겨서야 되겠는가 등등 여러 논조로 왁자지껄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임무가 호위가 아닌 감시일 것이라는 설도 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선에 변경은 없었고, 지금도 현태오는 어디선가 그가 맡은 바 임무를 보고 있을 터였다.
“…….”
그를 떠올림과 동시에 유현진은 우울해졌다.
바로 엊그제, 유현진이 처음으로 이들 사절단을 만났던 날, 유현진이 그들과 첫인사를 나누고 차분하게 이런저런 사교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때 현태오가 찾아왔다. 현태오 역시 임무에 앞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 첫 만남 자리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그와 딱 맞닥뜨렸을 때.
정식 제복을 입고 부관 몇몇과 더불어 삽상하게 들어서던 현태오의 그 서늘한 무표정이, 그들과 함께 앉아 있던 유현진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의 미간에 얼핏 ‘저놈이 왜 여기에?’ 싶은 주름이 졌다 사라지는 것을 유현진은 분명히 보았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통역 맡기로 했던 거 얘기 안 했었지. ……근데 꼭 일일이 다 얘기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저 남자도 딱히 본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는데.
아주 잠깐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본 현태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사담 및 그 보좌관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그 옆으로 다가서 말을 전해 주는 유현진을 보고서야 그 역할을 짐작한 듯했다.
평범하게 의례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환영한다. 체재하시는 동안 안전을 책임지게 되었다. 잘 지내다 가시길 바란다.
미사담도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지한 기색으로 현태오를 대했다. 그 얼굴은 좀 왕족답게 보였다.
차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때, 본국에서 연락이 왔다며 미사담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숨 한 번 들이쉴 만큼의 침묵 뒤에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만큼이나 서늘한 시선이 유현진에게 꽂혔다.
‘왜 유현진 씨가 여기 계십니까?’
‘통역을 맡았으니까요.’
‘통역은 왜 맡았습니까?
‘……, 맡으면 안 됩니까?’
반쯤은 의아하게, 반쯤은 어이없게 유현진이 되물었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양 몰아세우는 투였다.
눈살을 찌푸린 현태오가 막 무어라 하려는 찰나 제상아가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보다 유현진 씨가 함께 있어 주는 게 마음 편해서 제가 부탁드렸답니다. 총독님께 폐가 될 일은 아니지 않은가요?’
‘얼마 전까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지라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어머, 염려 마세요, 총독님. 외려 국빈과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눈에 안 띄고 안전할 테니까요. 아니면, 굳이 구태여 반대할 이유라도 있나요?’
충분하고도 명백하게 납득할 이유를 대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 제상아를 냉랭하게 바라보던 현태오는 시선을 유현진에게 돌렸다.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그 눈길을 마주 받는 유현진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썩 내키지는 않는 듯 짧게 혀를 차더니 말했다.
‘언제든 그만둘 마음이 들면 말씀하십시오. 대신할 만한 사람은 바로 찾아 드리겠습니다.’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긴 현태오는 얼마 있지 않아 돌아온 미사담과 여상한 대화 몇 마디를 더 나누곤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는 어제 미사담과 제상아에게 보안 관련으로 몇 마디 당부를 하러 잠깐 찾아온 것 외엔 현태오와 마주치지 못했다. 몹시 바쁜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어? 차가 그렇게 맛이 없어?”
조금 전까지 살벌하게 말다툼을 벌이고 있던 제상아가 어느새 맞은편 자리에 앉아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서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언제 싸웠냐는 듯 미사담도 사이좋게 찻잔을 기울이고서 “흠. 제가 느끼기에는 아주 맛이 좋은데요.”라며 생글거리고 있다.
“아니, 바깥이 좀 시끄럽구나 싶어서.”
왜 바퀴벌레 한 쌍이 앉아 있는 것 같을까, 유현진은 차를 호로록 마시며 중얼거렸다. 제상아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그러게.” 하고 심상하게 동의했다.
“좀 어수선하긴 하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이 왔나 봐.”
“음……, 별일 없겠지? 시위하는 분들이나, 아니면 위병들이 위험할 만한 일이 벌어진다거나…….”
“평화 시위가 자리 잡은 시대에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니.”
제상아는 어이없다는 듯 유현진을 쳐다보더니 문득 콧잔등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왜, 다리도 불편하신 어느 분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래?”
“으음?”
유현진은 화들짝했다. 곱게 노려보는 제상아의 눈매가 매서웠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그 다리 불편한 분이 외무관리청 담당자한테 한 소리 했다더라. 정혜궁마마가 독단으로 일반인을 공무에 임시로 임용했던데 그걸 그냥 뒀냐면서. 얼마나 닦아 세웠으면 담당자가 사색이 돼서 나한테 연락해선 통역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부탁하는 거 있지?”
물론 딱 잘라 거절했지만, 하고 코웃음을 치는 제상아의 말에, 낙하산으로 채용된 유현진은 “그, 그랬어?” 하고 어물거렸다.
“별꼴이야, 정말. 집에 고이 모셔 놓은 안주인이 밖으로 나도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심술이람?”
제상아가 짜증스레 투덜거리는 동안 유현진은 차만 꿀꺽 삼켰다.
어제 여기 잠깐 들렀을 때에도 쌀쌀맞은 시선만 한번 던지고 나간 걸 보니, 현태오는 유현진이 여기에 있는 게 못마땅한 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시금 우울해졌다.
“그런데 상아 너는 껄끄럽지 않겠어? 현태오 씨가 안보를 맡으면 사절단이 머무르는 동안 계속 마주치게 될 텐데?”
그래도 한때―라기보다 아주 오랫동안― 정혼자였다가 깨어진 옛 남자를 계속 마주치게 되면 불편하지 않으려나 했지만, 제상아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빛이었다.
“? 내가 그 사람한테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껄끄러워?”
그렇긴 하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유현진은 미사담과 눈이 마주쳤다.
보좌관들은 제양의 말을 못 알아들으니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 싶은 눈치였지만 왕자는 눈알을 대록대록 굴리며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너무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나 싶어서 유현진이 입을 다물자 왕자는 괜찮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을 거들었다.
“현태오 총독님이 현진 씨를 많이 아껴 주시나 봐요.”
이 남자는 여태 뭘 들은 거지……, 제양어를 잘 알아듣는 게 아니었나……?
유현진은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글쎄요…….”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물었다.
“송갈에서는 현태오 총독을 싫어하는 분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분이 사절단의 안보를 맡게 되셔서 미사담 님은 괜찮으신가요?”
“예? 아아. 아무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송갈을 침략하는 데에 활약한 사람이니 호감이 갈 수는 없지만, 어찌 됐든 지금은 친선을 위해 와 있으니까요. 제양의 인선에 우리가 뭐라고 할 수는 없죠. 게다가 어쨌든 유능한 분임에는 틀림없고요.”
미사담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이미 현태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현태오라는 남자가 전쟁에서 얼마나 활약했는지, 평항을 다스리면서 어느 정도의 업적을 이루었는지, 아마도 유현진이 막연히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면밀하고 정확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에 감탄과 분노, 탄복과 경계가 교차하던 미사담의 진지한 낯만 봐도 알겠다.
“제게는 과거보다 미래의 일이 더 우선입니다. 비록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으나 서로 청산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청산해 가면서 미래도 함께 도모해야지요. 그리고 그것이 송갈 왕실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다고는 못하지만요, 하고 미사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곳이라고 제양과 크게 다를 리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복잡다단한 상황들 속에서 차근차근 앞날을 더듬어 나아가야 했다.
왁자한 소리들이 아련하게 들려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미사담은 아, 하고 생각났다는 듯 유현진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현태오 총독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유현진 씨라면서요.”
풉――, 유현진은 마시던 차를 뿜었다. 다행히도 탁자가 워낙 넓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맞은편의 보좌관이 낭패를 볼 뻔했다.
“아, 예, 일단은……, 그런데 어떻게…… 거기까지 소문이…….”
안 났을 리 없지. 모를 리 없다. 적국의 일반인도 아니고 요주의 인물인데. 심지어 왕실과 명문가 사이의 오랜 혼약이 하루아침에 깨어진 사건이었는데.
“우리나라의 매체에서도 비중 있게 보도되었거든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파혼하시게 될 줄은…….”
말을 하다 말고 제상아와 눈이 마주친 미사담은 그제야 사뭇 정중하게 “아, 죄송합니다. 불편한 이야기이시겠군요.”라고 사과했고, 제상아는 “아니에요, 상관없답니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미사담은 차를 마시면서 유현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양에서는 동성 간의 혼인이 불가능하지 않았던가요?”
“예, 그렇죠…….”
“아, 하지만 평항에서는 특별 조례가 적용된다고 했었지요? 그렇다면야 두 분 사이에도 별문제는 없겠군요.”
“아니, 그렇게까지는…….”
요즘 세상에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제도적 장치로 보호를 받는 것과 아닌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하고 빙긋이 웃는 미사담에게 유현진은 이미 삼켰던 차까지 뿜어낼 것 같은 심경으로 더듬거렸다.
이 웬 앞서간 이야기인가 싶은 생각보다도, 거기까지 간 상황을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괴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별안간 심장이 두근하고 뛰었다.
아니, 설마 그럴 리야. 교제라고만 해도 혼란스런 판국에, 결ㅎ……, 아냐, 생각하지 말자, 더 생각하지 말자. 기분이 너무 기괴해진다. 유현진은 내심 고개를 부르르 내저었다.
“그런데 유현진 씨 입장에서는 느닷없는 봉변이셨겠네요.”
“예, 뭐…….”
켕기는 과거이다 보니 저절로 대답이 흐려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미사담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일각에서는 현태오 총독이 송갈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송갈의 관습에 우호적임을 보여 주려는 게 아니냐고도 하던데…….”
슬쩍 떠보는 듯한 미사담의 말에 유현진은 멈칫했다. 아,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그래, 그렇다면 이 괴담 같은 이야기가 좀 그럴싸해지긴 한다.
“시초야 어찌 되었든 지금 잘 만나고 있으면 된 거죠.”
제상아가 유현진을 거들듯 말했다. 그러자 미사담도 말이 앞서갔다고 생각했는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잘 만나고 계시면 좋은 일이지요. 상상이 잘 안 가긴 하는데, 어때요. 현태오 총독은 잘 대해 주십니까?”
“글쎄요, 잘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남자끼리의 교제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라서요.”
유현진은 이 화제가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낯으로 유현진을 쳐다보던 미사담은 곧 깨달았다는 듯이 아하, 하고 웃었다.
“그럴 수 있겠네요. 우리 송갈에서는 동성혼이 이성혼과 다를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보니 어색해하시는 게 외려 신기해 보이긴 하지만요. 남자끼리의 교제를 잘 모르겠다, 라…….”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미사담이 말했다.
“유현진 씨께서 원하신다면 남자끼리 어떻게 관계를 갖는지 상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가 매우 선선하게 웃으며 제안한 순간, 그곳에는 침묵이 흘렀다. 알아듣지 못한 보좌관들이야 그렇다 해도, 적어도 그 자리에 있는 제양 사람들은 모두 침묵했다.
태연한 것은 오직 미사담뿐, 제상아마저도 미묘한 시선으로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미사담은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다 뒤늦게 더럭 정색을 했다.
“아니, 제가 아니라요! 물론 못 알려 드릴 건 없지만 저는 좀 그렇고요. 저어, 제가 직접 알려 드리길 원하신다면, 죄송하지만…….”
아연하게 얼어 있던 유현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설마 제가 미사담 님께 직접……, 절대 아닙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유현진이 서둘러 손사래를 치자 그제야 미사담은 안심했는지 웃음을 되찾았다.
“예, 저는 곤란하지만, 제 보좌관들은 잘 알려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미사담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보좌관들을 돌아보자,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알아듣지 못한 보좌관들은 의아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여기 유현진 씨가 남자끼리 어떻게 관계를 갖는지 궁금하다고 하셔서 말이야. 제양에서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다 보니까 잘 모르시나 봐.」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니요, 그게 아닌데요, 하고 유현진이 미사담을 만류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보좌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 중에서, 가만있자……, 호웅이 남자랑 종종 만났지?」
「그렇긴 합니다만…….」
두 보좌관 중 오른쪽에 앉아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흘끔 유현진을 보았다.
「원하신다면 알려 드리긴 하겠습니다만…….」
몇 번 본 적도 없는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계면쩍은 건 그 나라나 이 나라나 비슷한지 머쓱한 낯으로 머뭇거리는 그에게, 유현진은 아득해지던 정신을 겨우 다잡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필요하면 그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보좌관도 정중히 「예.」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도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했었는지 좀 안도하는 눈치였다.
“언제든 원하실 때에 말씀해 주세요. 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지, 나중에 가실 때 남색과 관련된 책자도 좀 챙겨 드릴게요. 몸으로 직접 익히는 것보다는 덜하지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실 겁니다.”
본인이 직접 할 것도 아니면서 부하의 정조를 마음대로 떠넘기겠다고 약조하는 미사담은 호의를 담아 말했다. 아니,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하고 진땀을 흘리며 더듬거리는 유현진의 대답은 귀담아듣지도 않는 듯했다.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제상아는 그쯤 되자 유현진을 좀 도와줘야겠다 싶었는지 미사담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직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제양에 와 보시니 어떠신가요. 송갈과는 많이 다르겠죠?”
“글쎄요. 아직은 충분히 둘러보지를 않아서 무어라 말하기 어렵네요. 분명히 좋은 부분도 있고 나쁜 부분도 있는데…….”
순순히 화제에 따라온 미사담은 생각에 잠겼다. 형식적인 대답을 할 수도 있을 텐데 진지하게 숙고하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들을 종합해서, 결국은 좋아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마 상아 님도 송갈을 찾아 주신다면 분명 송갈을 좋아하시게 될 거예요.”
미사담이 제상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말이 끊겼다.
안온한 침묵 속에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저 멀리에서는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이곳의 고요함을 깨지는 못했다.
유현진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그들은 어딘지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보기 좋아, 유현진은 그저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
줄곧 신관으로 살아온 유현진은 정결했으나 순진하거나 무지한 건 아니었다.
키보드 몇 번만 두드리면 온갖 정보들이 다 튀어나오는 세상에서 아무리 신전 담장 안에서 지낸다 한들 머릿속까지 순진무구할 수는 없었다.
또한 하나람님의 가호 아래 신관은 정결이 의무였으나, 신자들에게 금욕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욕망 자체를 죄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유현진 역시 몸뚱이만 정결했을 뿐 머리로는 또래 젊은이들만큼 알 것 다 알고 있었으나.
“…….”
유현진은 거실 한가운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 앞에 쌓아 놓은 예닐곱 권의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일 위에 얹혀 있는 책의 표지에는 두 남자가 헐벗은 채 미묘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아래 깔려 있는 책들도 대체로 마찬가지. 표지로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책들이다.
이미 머리로는 알 만큼 안다고 하나 저 안에는 내가 아직 모르는 미지의 것들도 잔뜩 있을 테지. 왠지 돌아올 수 없는 강에 발을 들이미는 기분이라 책장을 들추기가 두려웠다.
팔짱을 낀 채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던 유현진은 큰맘 먹고 제일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살색이 난무했다.
사람이 이런 자세가 가능한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책장을 넘기느라 정신을 팔고 있던 때,
“이게 다 뭡니까?”
어깨 뒤에서 쑥 뻗어 나온 팔이 다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지금 유현진이 읽고 있는 것보다 표지가 한층 더 살색으로 현란한 책이었다.
헉.
분명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던 집에서 느닷없이,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현진은 앉은 채로 1미터 정도 튀어 올랐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거기엔 언제 왔는지 현태오가 서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책장을 팔락팔락 넘기던 그가 흘끗 눈동자만 돌려 유현진을 보았다.
“――나, 남의 걸 함부로 보시면 안 되죠.”
유현진은 얼른 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며 정색했다. 한편으로는 집에 오자마자 황망히 거실 바닥에 책들을 내려놓았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아무 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 남자가 있었는데 어쩌자고 이럴 가능성을 잊고 있었을까.
하지만 송갈의 사절단이 온 이래 바쁜지 계속 이 집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남자였다. 하필 오늘따라 이렇게, 이 캄캄하게 늦은 시각에 찾아올 줄은 몰랐다.
“왜요? 흥미로워 보이는데 같이 보죠.”
평연한 투로 말은 하는데, 어렴풋이 비웃음을 띤 눈매가 왠지 ‘요 맹랑한 놈 봐라?’ 하는 것 같다. 야한 동영상을 보다가 들통 난 열서너 살짜리 어린애라도 보는 듯한 눈이었다.
여기서 낯이라도 붉혔다간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아서 유현진은 안간힘을 다해 무뚝뚝한 얼굴을 덮어쓴 채 고개를 저었다.
“제 게 아니라서 안 됩니다. 혹시라도 상할지 모르니까 조심스럽게 보고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얼른 책더미를 끌어안았다. 한 권이라도 뺏길세라 한쪽 손으로 단단히 뚜껑도 덮었다. 가소롭다는 시선이 흘끗 손등에 닿았지만, 다행히 현태오는 우격다짐을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대신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코웃음 쳤다.
“남의 거? 그런 걸 빌려주는 사람이 있다고요?”
“미사담 님이 알아 두면 좋을 거라고 빌려주셨습니다.”
현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기묘한 낯으로 쳐다보며 침묵하는 사이 유현진은 재빨리 그 책들을 침실에 옮겨 놓고 문을 꼭 닫고 나왔다. 아직껏 심장이 쿵쿵거리고 있었다.
나쁜 짓 하다가 들킨 것도 아니고 뭐 어떠냐고 생각하며 얼굴에 힘 딱 주고 나가자, 현태오는 여전히 미묘한 눈길로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미사담 님과 친합니까?”
“? 친하다고 하기는 어렵죠.”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데다, 따로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다. 갑자기 뜬금없는 물음을 던지는 현태오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유현진은 ‘아. 보호 대상에 대한 부차적인 정보가 궁금한가.’ 하고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성격적으로 친화력이 좋은 분이긴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3년 전에 평항에 갔을 때 잠깐 마주치기도 했었어요.”
“평항에서요?”
“예. 미사담 님이랑 그 보좌관 중 호웅이라는 키 큰 분이랑요.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상아, 아니 정혜궁마마랑 우연히 만났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좀 더 편하게 대해 주시긴 합니다.”
말을 듣고 있던 현태오가 피식 웃었다.
“아아, 우연히, 요.”
“예. 놀라운 일이죠?”
다시 생각해도 신기해서 유현진은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빤히 쳐다보는 현태오의 시선을 깨닫곤 웃음을 흐리며 의아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예, 정말 놀랍네요.”
이놈이 지금 진심으로 저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 뚫어져라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헛웃음을 내며 말했지만, 그 비아냥도 알아채지 못한 듯 유현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정말 신기했어요.”
“…….”
뚫어져라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도중에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짧게 내뱉고는 별말 없이 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갔다.
늘 그렇듯 익숙하게 차를 끓이기 시작하는 그를 보고 유현진은 얌전히 거실에 앉아 그가 갖다줄 맛있는 차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한참 늦은 시각이었다. 그간 느지막이 찾아온 적은 있었어도 이렇게 늦게 온 건 처음이다. 귀가하는 길에 바로 들렀는지 차림새도 정장이었다.
“많이 바쁘십니까?”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묻자 찻잔을 데우던 현태오가 흘끗 시선을 주더니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일이 좀 많긴 합니다.”
두 손에 찻잔만 덜렁 들고 온 현태오는 유현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미세하게 절면서도 잔에 가득 찬 차는 용케도 흘리지 않았다.
며칠 만에 보는데도 아주 오랜만인 것 같다. 그새 좀 야위어 보였다.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쉬셔야 하지 않아요?”
“틈틈이 재활도 제대로 다니고 있습니다. 어차피 쉬는 게 성에 안 맞기도 하고, 일도 어려울 건 없어요. 신경 쓸 부분들이 많을 뿐이지. 그보다, 유현진 씨는 통역 계속하실 겁니까?”
“예.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차로 목을 축인 현태오가 잠시 침묵하다 “상황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냉담하게 말했다.
그 경고 같은 말에 유현진은 떠들썩하게 시위를 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동시에 미사담과 그 보좌관들, 그리고 제상아까지. 위험하다면 누구보다도 그들이 가장 위험할 터였다.
“……위험하지 않게 해 주세요.”
곰곰이 생각하던 유현진이 말하자 현태오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는 별안간 짧게 웃었다. 표정도 함께 느슨해진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렇게 해 드려야지요. ……하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니 늘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피하세요.”
이번에는 유현진이 웃고 말았다. 그 입매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현태오가 “왜요.” 하고 묻는다.
“분위기가 이상하거나 위험하다 싶으면 제일 먼저 위험한 곳으로 달려드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우스워서요.”
현태오는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부친을 따라 참전했다. 그중엔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이 위험한 곳도 많았다. 그가 두각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그의 유능함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는 더욱더 위험한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출정을 거절하거나 몸을 사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유현진은 늘 기도했었다. 지금도.
언뜻 눈썹을 치켜올리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현태오에게 유현진은 다시 물었다.
“현태오 씨야말로 괜찮으십니까? 일은 어렵지 않다 해도, 적절한 인선이냐며 말이 많은 모양이던데요.”
“뭐, 말이 많을 만은 하지요. 전장에서 송갈인을 수도 없이 해치고, 현재는 분쟁 지역을 맡고 있고, 한편으로 그들에게 죽을 뻔도 한 인물에게 친선 사절의 안전을 살피는 역할을 맡기면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평연하게 말하는 현태오는,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좀 귀찮다는 듯 몇 올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래서 생각보다 바쁘긴 합니다. 까다롭게 구는 인간들이 있으면 일이 더 번거로워지는 법이라서요. 그러다 보니 여기에도 좀처럼 못 오긴 했네요. 오늘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갈까 하다 불이 켜져 있어서 잠깐 들러 봤습니다.”
고작 며칠 만인데도 이렇듯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라니, 언제 이렇게 익숙해졌을까.
늦은 시각에라도 와 줘서 좋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유현진은 너무 반가워하는 기색이 대놓고 드러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유현진을 지그시 쳐다보던 현태오가 소파에 기대었다. “그런데,” 하고 입을 여는 목소리가 왠지 슬쩍 뒤틀린 어조였다.
“송갈의 왕자님께서는 갑자기 저런 책들을 왜 빌려주셨답니까?”
움찔.
유현진은 꼭 움켜쥔 찻잔을 노려보며 우물거렸다.
“제가, 음, 남자 간의 일들을 잘 모른다 했더니, 송갈의 문화 중 하나이니 알아나 두라고, ……좀 공부해 둬야 할 것 같기도 해서 빌려 왔습니다.”
“아하, 공부.”
현태오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웃는 듯 마는 듯 말을 이었다.
“좋은 자세이십니다. 저도, 경험을 해 놓고도 기억을 못 하니 외려 저야말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 생각을 못 하고 있었군요.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지요.”
유현진은 소파에서 다시금 펄쩍 뛸 뻔하다 간신히 참았다. 잔등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함께 공부라니, 이 양반이 지금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린가. 농담인가 진담인가. 아니 그보다 왜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태연하게 저런 말을 하는가.
온갖 번뇌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별안간 뇌리에 떠오르는 건,
――그 남자도 평항에 가 있는 동안 남자 맛에 눈을 떴을지도.
언젠가 제상아가 흘렸던 말이었다.
하긴, 그렇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취중이라 정신이 없었다 해도 남자를 안(았다고 믿)을 리가 없잖은가.
“그, 현태오 씨는 혹시,”
유현진은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찻잔을 꼭 움켜쥔 채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시선도 마주치지 못했다.
“남자랑, 자 보셨습니까?”
어디 말해 보라는 듯 잠자코 기다리던 현태오가――어떤 얼굴을 하는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뚫어져라 유현진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알겠다. 얼마나 지났을까, 헛웃음을 내뱉는 짧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건 유현진 씨가 아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 말은, 현태오 씨가 기억하고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유현진은 다급히 덧붙이며 얼결에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까만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저 눈매가 이렇게 심술궂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현태오는 잠시 유현진을 바라보다가 선선히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딱히 거부감이 들거나 싫은 건 아니지만, 해 보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어서요. 그러니 남자와 잔 건 유현진 씨가 처음입니다.”
“……아, 예……, 그러시군요…….”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몰라 괜히 차만 한 모금 삼키는 유현진이었다. 저 심술궂어 보이는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현태오는 잔을 내려놓더니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사실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 아무리 만취했다곤 하지만 남자분을 강제로 취하다니, 기억도 안 나고 정사의 흔적도 딱히 보이지 않아서 미심스럽긴 했어요. 하지만 설마 사제님이 거짓말을―특히나 그런 종류의 거짓말을― 하실 리는 없을 테고…….”
혼잣말처럼 나직이 읊조리는 말마디가 하나하나 가시처럼 유현진을 쿡쿡 찔렀다. 낯빛이 하얗게 굳어지는 유현진을 보고 현태오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아, 죄송합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해서 면목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유현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망했다. 이 화제를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한동안 단꿈에 취해 잊고 있었던 양심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부 얘기가 나온 김에 말인데요.”
“예?”
“저는 잘하던가요?”
현태오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잘하다니 뭘…… 하고 눈을 껌벅이던 유현진은 다음 순간 얼어붙었다.
“남자와는 해 본 적이 없는 데다 기억도 나지 않다 보니 좀 자신이 없어서요. 핏자국이 없었던 걸 보면 다치게끔 하지는 않았던 것 같긴 한데…….”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굳어 있던 유현진은 얼결에 더듬거렸다.
“아……, 예……, 그야 뭐……, 잘, 잘하시던데요.”
“흠, 그래요?”
잘한다고 했는데도 현태오는 뭔가 미진한 눈치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가 잘못 여쭤본 것 같군요. 잘하고 못하고는 비교의 개념인데, 유현진 씨가 다른 사람과 해 본 적 있는 게 아니라면 제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을 리 없지요. 사제님이셨으니 그전에 해 보셨던 적이 있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 그렇죠.”
“하지만, 그래요, 제가 그렇게 못했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그날 새벽에 괜찮아 보이시기도 했고.”
“예, 뭐…….”
“그래도 역시, 언제든 다시 해야 할 텐데 저도 익숙하지 않아서 다소 불안하긴 하군요. 노력하겠습니다. 일단은 익숙해지도록 연습이라도 해야겠지요?”
“예, 뭐……, ……예?”
조금 전부터 반쯤 넋이 빠져 있던 유현진은 뒤늦게 찬물을 촤악 뒤집어써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습이라니 뭘, 어디까지, 어떻게…….”
“어차피 우리는 이미 할 것 다 하지 않았습니까? 새삼스럽게 거북해할 필요 있을까요?”
유현진이 당황해서 더듬거리자 현태오는 외려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요, 하고 말을 흐리는 유현진의 등은 축축하게 젖어 갔다.
이상하다. 기분 탓이겠지만 아까부터 왜 저 남자의 눈매가 저렇게 심술궂어 보일까. 누굴 닮았는지 우리 막내는 심보가 참 못돼 먹었다고 종종 토로하곤 하던 총리 부인의 말이 머리 한구석에 되살아나 어른거렸다.
유현진은 급히 정신을 다잡고 최대한 정색을 했다.
“하지만 현태오 씨는 기억 안 나시잖습니까. 그럼 안 한 거나 마찬가지죠.”
현태오는 유현진의 부릅뜬 눈을 마주 보며 입매를 비스듬히 올렸다.
“유현진 씨는 기억하잖습니까. 아닙니까?”
“……맞, 맞습…….”
“그런데 이제 와서 그렇게 곤란해하실 것 있습니까?”
이상하다. 왜 자꾸 궁지에 몰리는 기분일까.
뭔가 제대로 대꾸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하얘져서 적절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유현진은 어물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울고 싶어졌다. 이래서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데, 애초에 단추를 잘못 끼워도 너무 잘못 끼웠다.
진땀을 흘리며 우울하게 시선을 떨구는 유현진의 귓가에 피식,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얼결에 고개를 들자 유현진을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던 현태오가 말했다.
“뭐……, 오늘은 이 정도로 해 두죠. 시간도 늦었고.”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차를 마시는 현태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집에 들어왔을 때에는 좀 피로한 기색이더니, 지금은 더운물에 몸 푹 담그고 나온 것처럼 몹시 개운해 보인다.
그리고 그 피로는 모조리 유현진에게로 옮아 온 것 같았다. 유현진은 십 년은 늙은 듯한 기분으로 찻물을 들이켰다.
“모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니 좋군요.”
현태오가 불쑥 말했다. 평소라면 가슴이 두근거렸을 발언인데도 ‘너는 좋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보니 제대로 식겁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유현진이 흘끔 시선을 들어 보자, 현태오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무표정한 건 여전했지만 어딘지 느슨해진 분위기다. 유현진을 바라보는 눈매도 어렴풋이 휘어 있었다.
……얼굴만 잘생기지 않았으면 당장 돌아가라고 쫓아냈을 텐데……. 기어이 심장은 또다시 두근거렸고, 유현진은 한숨을 내쉬며 지친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찌 됐든 이 화제는 그만둔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생각에 잠긴 듯하던 현태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책들을 송갈의 왕자가 빌려줬다, 라……. 그들은 동성 간의 관계에 아주 너그럽지요.”
“? 예, 그렇죠.”
흘끗, 현태오가 유현진을 보았다. 느슨하던 눈매가 어느새 다시 서늘해져 있었다.
“지금 유현진 씨는 저와 공식적인 관계인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 예?”
“바람피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유현진은 찻물을 뿜을 뻔했다.
“바, ……예?”
손등으로 마른 입가를 훔치며 쿨룩거리던 유현진은 당혹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근데 너도 술 취해서 딴 사람이랑 자(버렸다는 전개가 되)는 바람에 파혼한 입장이잖아요, 라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보다는 저렇듯 진지한 얼굴로 하는 저 말이 지금 농담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갔다.
유현진은 낯이 붉어졌다.
바람이라니, 그건 정말로 사귀는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단어일 텐데. 정말, 진심인가? 정말로……?
“전 남자를 그런 대상으로 본 적이 없는데요. 현태오 씨 말고는,”
당혹스레 현태오를 보다가 무심코 말하던 유현진은 순간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태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저요?”
“아니, 현태오 씨랑…… 잔 거 말고는요.”
서둘러 덧붙이곤 정색을 하며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전혀 켕기는 것도 거리끼는 것도 없다는 낯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다듬고 있는데, 유현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현태오가 얼핏 고개를 기울였다.
“유현진 씨가 그쪽 취향이 아닌 건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가끔 보면 유현진 씨는…….”
“?”
“아닙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현태오는 말을 끊었다. 뒷말이 궁금했지만 켕기는 게 많다 보니 함부로 묻지도 못하고 유현진도 입을 다물었다.
그때 파삭, 바깥에서 뭔가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세찬 바람결에 뭐가 날아오기라도 했나 보다. 새카만 겨울밤의 마른 가지들이 윙윙 매섭게 울었다.
“차 한잔 더 드시겠어요?”
노란 정원등 하나만 밝혀 놓은 캄캄한 정원을 바라보던 유현진이 물었다. 마찬가지로 바깥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현태오가 “그럴까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져올게요.”
유현진은 무심결인 양 오른 다리를 주무르는 현태오를 보며 일어났다.
잘됐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거절하고 이만 가 보겠다고 일어나면 아쉬울 것 같았는데.
그러나 현태오는 느른하게 앉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고, 유현진은 차통이 빈 걸 보고 새 차통이 어디 있더라 찬장을 뒤적였다.
그때 거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유현진은 잠깐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으나 찬장을 뒤적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 없어 의아하긴 했지만 나중에 연락하면 되겠지. 지금은 현태오가 생각이 바뀌었다며 일어나기 전에 얼른 차를 끓이는 게 먼저였다.
다행히 현태오는 유현진이 새잎을 담은 찻주전자를 통째로 들고 와 빈 잔을 채울 때까지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별말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현태오가 무심히 말했다.
“조금 전에 전화 오던데요.”
“예? 아, 예.”
유현진은 그제야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전화를 집어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 하고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현태오가 다시 심드렁하게 물었다.
“태양 형이랑 친해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유현진은 액정에 찍힌 ‘현태양’이라는 글자를 난감하게 응시하다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냥, 잘 지내느냐고 가끔 연락을 주세요. 귀국하고 나면 얼굴 보고 얘기나 하자고…….”
“무슨 얘기요?”
“잘 모르겠습니다. 약간 좀,”
위로해 주시려는 느낌이긴 했는데……, 라는 뒷말은 입 밖으로 나오다가 기어들어 갔다.
“원래 연락하던 사이입니까?”
“아닙니다.”
“나한테 전화해도 안 받으니 여기다 연락하고 있었나 보군……. 연수하러 갔다는 인간이 시간이 남아도나……. 무시해도 됩니다. 그거 이리 줘 봐요.”
코웃음 치며 중얼거린 현태오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눈짓하는 대로 얼떨결에 그 손에 휴대전화를 넘겨주자, 현태오는 전화를 몇 차례 만지작거리더니 돌려주었다. 남의 전화로 뭘 했나 슬그머니 봤더니 현태양의 번호를 차단시켜 놨다.
“생전 연락 안 하던 인간이 얼마 전에 갑자기 전화를 하더니 쓸데없는 소리나 늘어놓으려 하길래 그냥 끊고는 그 뒤로는 연락 와도 안 받았거든요. 유현진 씨 일과 관련해서 잔소리를 하고 싶은 모양이던데, 제가 안 받으니 이쪽으로 연락을 하나 봅니다. 신경 안 써도 돼요.”
제 형의 전화를 씹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현태오에게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만 마셨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가족이고 뭐고 안 내키면 가차 없는 인물이다.
가족한테도 이러는데 남한테야 말해 뭣할까.
유현진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차를 삼켰다. 현태오도 그 이상은 별다른 말 없이 정원을 내다보며 차를 마셨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던 때, 문득 유현진은 다리를 주무르는 현태오를 보고는 물었다.
“다리 계속 아프신 겁니까?”
무심히 다리를 주무르던 현태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알아차린 듯 손을 뗐다.
“아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지팡이 없이도 걸을 만하고 약간이라면 뛸 수도 있는데, 기온이 내려가면 평소보다 뻐근해져서요.”
현태오는 결코 약한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미성년일 때 전장에 나섰다가 허리춤에 총구멍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다 나을 때까지 아프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말하는 ‘뻐근함’이라면, 아마도 일반적으로 말하는 ‘뻐근함’ 정도는 아닐 것이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덜어 주면 안 될까. 아주 조금.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내가 나눠 받으면.
“……, 좀 주물러 드릴까요?”
결심보다도 말이 먼저 나왔다. 짧은 망설임 끝에 말한 유현진은 현태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는 걸 보고는 얼른 덧붙였다.
“신학교에서 들었던 교양 과목 중에 재활 개호가 있었습니다. 척박한 지방 같은 곳으로 사목을 가면 아픈 사람들을 도와줘야 할 때도 있어서 흔히들 이수하는데 그 과정 중에 기초 안마도 있어요. 초보적인 수준이라 실제로는 큰 도움이 안 되지만요.”
핑계이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이 손대는 걸 내켜 하지 않는 현태오라 거절하려나 싶었는데, 유현진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뜻밖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현태오는 긴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렸고 유현진은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벅지 위에 두 손바닥을 올리고 천천히 누른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근육을 풀듯이 느리게, 힘을 주어 누르며 아파하지는 않는지 표정을 가늠했다. 티끌만큼도 변화가 없는 무표정이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덜어 오자. 들키지 않을 만큼만.
그의 허벅지 위를 천천히 누르는 사이에 유현진 본인만 알 만큼 손바닥이 더워졌다. 허벅지와 맞닿아 있는 손바닥에서 일렁이는 흐릿한 빛은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소리 없이 그의 살갗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주 천천히 유현진의 고관절 안쪽이 뻐근하게 저려 오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묵묵히 손을 움직였고, 현태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느릿한 움직임 속에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러고 보니, 다친 이를 낫게 하는 은사를 받으셨었다고요.”
현태오가 불쑥 말했다. 유현진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아무 내색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쉽군요. 신력을 여전히 갖고 계셨더라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현태오가 무심히 하는 말에 유현진은 새삼스럽게 후회가 들었다.
아직껏 신력을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마음 편히 그의 상처를 옮겨 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미 해 버린 거짓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유현진은 몇 번째인지 모를 후회를 다시 곱씹었다.
“헌데, 신관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셨던 것치고 안마는 정말로 초보적인 수준이군요.”
현태오가 유현진을 흘끗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이 양반이, 그야 재활 개호에서 낙제점을 받았으니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일껏 애쓰고 있는데 저런 소리를……?! 슬그머니 눈매에 도끼날을 세우는 유현진에게 현태오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재활 전문의와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전문 인력이 아닌 걸 백번 감안하더라도 정말로 실제로는 도움이 전혀 안 되겠습니다.”
“…….”
“그러니 딴 데 가서 애먼 사람 함부로 주무르지는 마시고, 저한테나 하십시오. 아픈 데에는 도움이 안 돼도 피로는 풀리는 것 같으니까요.”
막 손을 멈추려던 유현진에게 “계속하세요.”라는 말을 던진 현태오는 몸을 소파에 더 느른하게 기대며 눈까지 감아 버린다.
미묘하게 얄미운데 수술 부위를 콱 움켜쥐어 버릴까 했지만 정확한 수술 부위를 몰라서 관뒀다. 그러나 신력을 쓰는 것도 멈춘―꼭 얄미워서라기보다는, 욱신거리기 시작한 고관절의 통증이 심상치 않아 이 이상 계속하면 들킬 것 같았다― 유현진은 묵묵히 손을 놀렸다.
그러는 사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칼날처럼 몰아치던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다. 나뭇가지 대신 마른 잔디가 바삭바삭거린다. 쓸쓸하고 추운 소리다.
“왜 신학교에 간 겁니까?”
별안간 현태오가 물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며 유현진은 기억을 더듬었다.
“글쎄요. 어릴 때부터 하나람님을 따르는 게 워낙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었으니까요. 학비도 공짜였고. 게다가,”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잠시 그대로 침묵하자 현태오가 가늘게 눈을 떠 눈동자만 흘끔 돌렸다.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기도하면 소원 하나는 꼭 이루어진다고 해서요.”
“소원.”
“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든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지만, 그래도 제 모든 것을 온전히 다 신께 바쳐 기도를 하면, 하나는 반드시 이루어 주실 테니까…….”
유현진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오랫동안 현태오를 봐 왔다. 비록 가까이 지내지는 않았지만 줄곧 그와 한집에 살며 그가 살아가는 방식을 보았다.
무섭도록 냉철하고, 때로는 잔인하도록 거침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완수했다. 그것이 아무리 위험하고 과중한 일이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발을 뺄 수 있을 텐데도 그는 약한 소리 하나 없이 사지로 앞장서 나섰다.
――그걸 왜 굳이 네가 해야 해? 이제 다른 놈들 좀 시켜도 되잖아?
언젠가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가장 위험한 곳으로만 나도는 그를 보다 못해 말한 적이 있었고,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굳이 내가 할 필요는 없어도, 누구든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굳이 내가 아닐 필요도 없잖아요.
별 대수로운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툭 던진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유현진은 제 삶에서 딱 하나 품고 갈 소원을 정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그것이, 달리 탐나는 것도 욕심나는 것도 없었던 유현진의 유일한 소원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가며 바랄 만한 소원이 뭡니까?”
오래전의 기억에 잠겨 있던 유현진을 다시 현실로 불러낸 건 현태오의 물음이었다.
유현진의 표정 하나하나를 낱낱이 살피듯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유현진은 움찔하고 말았다.
말할 수 없었다. 늘 위험한 곳에 있는 그가 무사하길, 그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길 매일같이 기도했다고는.
“현태오 씨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유현진은 무뚝뚝하게 잘라 말했다.
순간 느른하던 숨소리가 멎었다.
움직임을 뚝 멈춰 버린 현태오의 턱에 희미하게 힘이 들어갔다. 깜빡, 천천히 감았다 뜨는 눈이 얼음처럼 식었다.
“유현진 씨는 참 재주가 좋으시단 말이에요.”
사람 기분을 한순간에 잡쳐 놓거든……, 잇새로 나직이 뇌까리는 혼잣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예?”
제대로 듣지 못해 유현진이 되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싸늘하게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는 그대로 더 있다간 사람 하나 곤죽을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서슴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너무 늦었어요.”
“아, 예.”
유현진은 아쉽게 손을 거두었다. 두 손을 가득 채웠던 체온이 사라지자 허전해졌지만 외투를 집어 드는 현태오의 뒷모습에서 칼바람이 돌아 아무 말도 못 했다. 갑작스레 돌변한 듯한 느낌에 당황스러웠지만, 원래 표정도 없고 살갑지도 않은 남자라 분간하기도 힘들다.
“……? …….”
걸음을 떼던 현태오는 잠시 멈칫하며 자신의 다리를 의아한 눈치로 내려다보았지만, 솟구쳐 오른 성질이 더 먼저였는지 이내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현태오를 배웅하려고 한 걸음 내딛던 유현진은 자신의 고관절에서 허벅지에 걸쳐 욱신하고 뻗치는 통증에 일순 아찔해졌지만, 숨을 다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두를 신고 그대로 현관문을 열려던 현태오가 멈춰 섰다. 그대로 잠시 서 있다가 돌아보는데, 여전히 시선이 삭막했다.
원래 표정을 읽기 힘든 남자이다 보니 잘은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빠 보인다. 조금 전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차근차근 그의 낯을 살피는 유현진을 뚫어질 듯 쳐다보던 현태오가 별안간 손을 뻗어 유현진의 뺨을 감쌌다.
“그러고 보니, 손잡는 데에는 이제 좀 익숙해지셨지요? 헌데 언제까지고 손만 잡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성인들이 교제하는 건데요.”
“――.”
느닷없는 말과 동시에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깝게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유현진은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렸다. 어……? 잠깐, 거기서 더 다가오면…….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얼어 버린 유현진을 뚫어질 듯 내려다보며 가까워지던 현태오가, 체온까지 느껴질 만큼 가까이서 멈추었다. 입술 바로 위에 더운 입김이 끼친다.
일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정적 끝에, 그대로 멈춰 있던 현태오가 문득 혀를 차더니 손아귀에 힘을 주어 유현진의 뺨을 꼬집듯이 움켜쥐었다. 아주 밉살스럽다는 듯이, 꽈악.
“아!”
유현진이 반사적으로 외마디 소리를 냈을 때 이미 현태오는 손을 거둔 뒤였고, 그대로 인사 한마디 없이 돌아서 나가 버렸다.
*
주선미 여사는 유서 깊은 귀족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평생토록 우국하며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에 온 힘을 다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운 그녀는 늘 타인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려 애썼다.
어린 나이에 현가의 청년과 결혼해, 젊은 날부터 위험한 전장을 돌며 사선을 넘나드는 남편과 함께 반듯한 가정을 꾸리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힘을 다했고, 이제 환갑에 이르러 인생을 돌아볼 때 그녀는 결코 아쉽거나 후회를 남기는 일이 없었다.
늘 가열하게 최선을 다했던 젊은 날은 지나가고 이제 노년으로 접어 들며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남편은 자신의 일을 잘해 나가고 있었고, 그녀 본인도 마찬가지였으며, 장성한 아들들도 아픈 데 없이 반듯한 심성으로 잘 자라 각각 제 몫을 하며 잘살고 있었다. ……한 놈 빼고는.
그래, 그 한 놈이 문제였다.
주선미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문제의 한 놈은 막내였는데, 실상 똑똑하고 능력이 빼어난 걸로 말하자면 제 형들보다 그 아이가 뛰어났다. 제 형들도 어디 가서 빠지는 데 없는 아이들인데 막내는 어릴 때부터 그런 형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신께서 그 아이를 만들 때에 능력치에만 모든 것을 퍼부어 주신 모양이었다. 그 아이에게는 다정다감함, 따뜻함, 온순함, 그런 것들이 몹시 부족했다.
다행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잘 구분해 한 번도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 적은 없었지만―혹은 그녀가 곤란해지기 전에 제 선에서 해결을 잘했지만―, 어릴 때부터 아이답지 않게 이성적이고 냉정한 아들을 볼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
못되지는 않았지만 냉정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이성적인 판단하에’ 난폭해지는 아들은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본질적인 성품이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서는 덜 드러내며 그녀의 잔소리를 피해 가는―혹은 무시하는― 요령만 더 좋아졌을 뿐이다.
잘 키우려고 애썼는데 어떻게 저런 애가 났을까. 제 형들은 모두들 착하고 건실하게 잘 자랐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그래도 이유 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못된 짓은 안 하잖소. ……게다가 늘 위험한 곳에 있으니 나쁜 짓을 할 틈도 없고…….’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줬고, 그녀도 그럭저럭 납득했다. (남편이 다른 아들들보다 유독 막내아들만 더 위험한 곳으로 보낸 이유가 단지 그 아이의 능력이 훨씬 더 빼어나기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막내도 그녀의 사랑스러운 자식이었고, 그녀는 매일같이 그 아이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행복을 바랐다. 한편으로는, 인정머리는 좀 부족해도 저렇게 똑똑한 아이이니 어쨌든 허튼 사고를 칠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며 안심도 했다.
그런데.
시정잡배도 함부로 저지르지 않을 잘못을 그 아이가 저지를 줄은, 세상에 꿈에도 몰랐다.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 가운데의 외진 기도원에서 하루 꼬박 기도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도 주선미의 마음은 썩 밝아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는데 잠도 오지 않아, 돌아오는 길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창밖만 보았다.
어느덧 익숙한 길로 접어들어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왕궁 앞을 지나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길에 위병들이 많이 보이는구나.”
“시위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늦은 시각까지? 고생들이 많구나.”
운전을 하던 수행원의 대답에 그녀는 놀란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늦은 시각이다 보니 왕궁 앞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돌아갔고 위병들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하는 듯했다.
송갈에서 사절단이 온 뒤로 연일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구호를 외치며 서 있기만 할 뿐이라 큰 사고는 없었지만, 남편은 평소보다 바빠 보였다.
막내아들도 마찬가지였다.
평항에서 크게 다쳐서 돌아왔으니 좀 쉬게 둘 것이지, 또 위에서 일을 맡긴 모양이었다. 그러잖아도 보기 힘들던 아이가 더 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보기 힘든 건 꼭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낮에는 그녀도 총리 부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저녁쯤에나 아들 얼굴이나 좀 볼까 하고 연락을 해 보면, 산책 나가서 집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고용인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최근 본가 근처에 구입한 작달막한 집에 종종 드나든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는 뭔가 기분이 상해서 돌아온 눈치였는데.
바로 조금 전에 막내의 차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주선미가 거실에서 나갔을 때 이미 막내는 층계를 올라가고 있었다.
‘그 새끼는 도대체가 곱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어. 진짜 확 죽여 버릴까.’
사납게 내뱉는 말소리에 이어 쾅! 서재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층계 위에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람.
즐거워하는 일도 별로 없지만 마찬가지로 짜증 내거나 화내는 일도 거의 없는 아들이다. 하물며 저렇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아예 없었다. 주선미가 놀라서 계단 위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위에서 진문성이 내려왔다.
‘얘, 문성아. 무슨 일이니? 태오가 왜 저러니?’
‘아, 이모님. 별일 아닙니다.’
‘별일 아니긴.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데. 태오가 누구 해친 건 아니지? 응, 문성아?’
주선미는 말을 아끼는 조카를 곱게 흘겨보며 다그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문성은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유현진 씨한테 다녀오셨는데, 두 분이 가끔 좀 안 맞을 때가 있거든요. 유현진 씨한테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십니다. 전혀 다치거나 하지 않으셨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현진이한테……?’
뜻밖의 말에 주선미가 놀라 중얼거리는 사이에 진문성은 재빨리 자리를 피해, 그녀가 다시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을 때엔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완만한 오르막 길목을 바라보던 주선미는 운전석의 수행원에게 불쑥 말했다.
“김 실장. 유현진 사제님이 지금 지내는 집 어딘지 알고 있지?”
수행원이 리어뷰 미러로 뒤를 쳐다보았다. 주선미가 똑바로 그 시선을 마주 보자 수행원은 시선을 돌리며 “예.” 하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지금 잠깐 들렀다 가도록 해.”
“지금 말씀이십니까?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바로 돌아가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오늘은 쉬시고, 약속을 잡아서 밝을 때 방문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야. 어차피 가는 길이니 잠깐 들러 봐.”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 생각난 김에 들러 봐야겠다.
그간 유현진과 한번 보려고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번번이 약속을 잡는 데에 실패했다. 선약이 있다거나 볼일이 있다거나 하는 이유였지만, 아무래도 피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하다. 상황이 상황인데 뭐 그리 보기 편할까. 주선미도 마음이 무거워 굳이 억지로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계속 못내 신경 쓰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선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하여,
“――아, 아주머님.”
얼마 만인지도 모르게 유현진과 만날 수 있었다.
밤늦은 시각에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쳐 초인종을 울린 주선미의 방문에 유현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당장 눈앞에서 피할 만한 핑곗거리도 없는 마당에 차마 문전 박대를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그녀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깜짝 놀라 대문으로 달려 나와 직접 문을 연 유현진은 당혹스런 낯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이 늦은 시각에 어쩐 일로…….”
“응, 연락도 없이 와서 미안해. 지나가던 길에 갑자기 우리 유 사제님, 아니, 우리 현진이 얼굴 보고 싶어서 잠깐 들렀어. 한동안 못 봤잖아.”
“예에. ……어, 어서 들어오세요.”
유현진은 거북하고 안 내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한 걸음 물러서 그녀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주선미는 돌계단을 올라가 아담한 정원을 거쳐 집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세심히 둘러보았다.
“집이 아담하고 예쁘네.”
“예. ……저기, 현 총독님께서 구해 주셔서 신세 지고 있습니다.”
“아, 그랬었지. ……걔는 좀 더 널찍한 집을 찾아보잖고, 어쩜 이렇게 좁은 데를 구해 줬다니?”
현관으로 들어서며 상냥하게 말하던 그녀는 유현진의 말을 듣고는 대번에 태세를 바꾸어 역정을 냈다. 못된 짓을 저지른 아들을 떠올리자 속이 상하고 화가 났던 것이다.
“아니……, 절대로 좁지는…….”
유현진은 잊고 있었던 거리감을 느끼는 듯 아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주선미를 거실에 앉힌 유현진은 차를 내오겠다며 부엌으로 갔다. 아직 부엌을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차를 한 번도 끓여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서투르게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선미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좁긴 하지만 혼자서 한동안만 지내기에는 괜찮겠다. 그래도 나름대로 세심하게 마련해 놓은 세간살이들을 차근차근 둘러본 주선미는 한숨을 쉬며 유현진을 보았다. 차를 끓이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하얀 얼굴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솟았다.
친아들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친아들처럼 가까이서 봐 왔던 아이다. 반듯하고 착한 아이였다. 어머니와 제 동생을 건사하려고 어릴 때부터 애쓰는 게 참 기특했다.
어머니가 죽은 뒤로는 내 자식처럼 여겼는데, 금세 나가서 아쉬웠다. 그래도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관이 되어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못돼먹은 아들놈이 저 착한 아이의 거룩한 앞날을 망쳐 놓았다. 심지어는 지금도 종종 찾아와 못살게 구는 눈치였다.
주선미는 왈칵 눈물이 났다.
“아주머님, 아주머님. 왜 그러세요.”
쟁반에 차를 받쳐 오던 유현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주선미를 보고는 당황해서 얼른 옆으로 왔다. 염려를 담고 있는 커다란 눈을 마주 보자 더 눈물이 났다.
“현진아, 미안해. 우리 아들이 너무 못돼서……, 너한테 참 잘못했어.”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주머님.”
유현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되레 미안한 듯 쩔쩔맸다.
어릴 때부터 상냥해서 남이 제게 잘못을 해도 흔흔히 용서해 주곤 하는 아이였다. 하나람님이 사랑해 마지않을 아이다. 이런 아이를, 그 나쁜 놈이.
“태오는 여기 자주 오니?”
주선미는 유현진이 건네주는 휴지로 눈가를 누르며 물었다.
“예, 종종 와서 살펴 주세요.”
“걔가 찾아와서 못살게 굴고 그러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 설마 때리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전혀 안 그래요! 그냥 잠깐씩 얘기만 나누다 가세요. 저기, 청소나 음식이나 그런 것들도 다 챙겨 주시고, 고마운 분이세요.”
“고맙긴! 그 정도는 마땅히 해야지! 잘못을 저지르고도 입 싹 다물면 그게 사람이니?”
“……. 그…… 그러게요…….”
유현진은 어두운 낯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 유현진을 보니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 아주 쪼끔은 안심했다. 그래도 현태오가 와서 정말로 생양아치처럼 행패를 부리고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기가 강간해 놓고 거기다 행패까지 부리면 그게 금수지 인간이겠는가. 제 자식이 그런다면 어미로서 입에 칼 물고 엎어질 각오도 되어 있는 주선미 여사였다.
“현진아, 내가 그 아이를 잘못 키워서 미안해.”
“정말로 아니에요, 아주머님.”
유현진은 낮은 숨을 내쉬며 차분하게 말했다. 다시금 주선미를 바라보는 눈이 슬퍼 보여서 그녀도 슬퍼졌다.
“저는 전혀 총독님이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요. 되레……, 이렇게 돼 버려서 제가 죄송해요.”
“무슨 소리니,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네가 뭐가 죄송해. 태오 그놈이 모두 다 갚아야지. 죄지은 사람이 뉘우치고 속죄해야 하는 법이다.”
“……예…….”
유현진의 낯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순한 얼굴이 창백해 보일 지경이다.
그 가엾은 얼굴을 보다 주선미는 눈물을 닦고는 찻잔을 들었다. 일단 속부터 차분히 가라앉혀야겠다 싶어 한 모금 머금은 차는, 맛이 없었다. 당황할 정도로.
찻잎은 좋아 보이는데. 얘가 차는 잘 못 끓이는구나.
아무렴 어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애만 착하면 그만이지.
제가 마시고도 당황한 듯 난감한 낯을 하는 유현진을 보며 주선미는 “향이 참 좋구나, 얘야.”라고 얼른 다독였다. 빈말인 줄 알았는지 유현진은 민구한 낯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했다.
참 순하고 착하기도 하지.
……헌데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 이런 착한 아이에게, 태오 그놈은.
주선미는 다시금 아들에게 분노를 느끼면서, 한편으로 의아해했다.
헌데 어쩜 그 아이가 술 먹고 그런 실수를 했을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실수를 할 애가 아닌데.
……설마, 일부러?!
그 가능성을 생각한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마터면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렇게까지 악한 아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일부러 누구를 겁탈할 만큼 비열하고 못된 인간은 아닐 터였다. 애가 정은 좀 없어도 그렇게 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번 의심이 들자 생각이 일파만파 번져 갔다. 잊고 있었던 기억의 단편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막내는 이 아이에게는 좀 이상하게 굴긴 했었다.
그래, 기억을 되짚어 올라가면 이 아이가 현가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막내아들이 느닷없이 제 서재를 옮겨 달라 했을 때부터 의아했다.
원래 조용한 데가 좋다며 제일 안쪽에 있는 넓은 방을 제 서재로 썼었는데, 어느 날엔가 갑자기 ‘좀 더 바깥 풍경이 탁 트인 데를 서재로 쓰고 싶어요. 2층 서쪽 가운데 방이 좋겠네요.’ 하고 한 방을 콕 짚어 말했다. 그 방은 별채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는데, 고용인들이 종종 오가는 길목 위라 바깥 기척이 너무 많다며 싫어하더니 웬일인가 싶었다.
어찌 되었든 막내아들은 그 방으로 제 서재를 옮겼고, 주선미의 염려와는 달리 도로 서재를 옮기겠다고 청하지는 않았다.
주선미가 가끔 그 방으로 찾아가면 막내는 종종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늘 표정 없는 애가 희한하게도 미간에 슬며시 주름이 가 있다 싶으면 으레 그 시선 끝에 현진이가 있곤 했다.
그래,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적도 있었다.
하루는 한가로운 휴일 오후에 날씨가 워낙 좋아 남편과 셋째 아들과 함께 정원에 자리를 펴 놓고 차를 즐겼다. 장남과 차남은 외출했고 막내는 거절해서 셋이서만 마시는데, 그때 마침 현진이가 지나가길래 잠깐 앉았다 가라며 붙들어 앉혔다.
조금 어색해하면서도 순순히 동석한 현진이와 더불어 차를 마시고 있는데, 얼마 있지 않아 꼭 어디서 보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막내가 나왔다.
‘어머, 태오야. 책 읽을 거라더니?’
다과 자리를 거절한 아들이 나타나자 주선미가 반갑게 불러다 앉혔다. 다시 거절하고 가 버릴 줄 알았는데 막내는 선선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교대하듯이 현진이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일어났다. 그만 가 보겠다며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아이를 보낸 뒤 주선미가 돌아보자 막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 있었다.
‘우리 막내 왜 그러니?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어? 네가 그렇게 인상을 쓰니까 현진이가 가 버리잖니.’
주선미가 농담 삼아 말하자 주름이 두 줄로 늘어났다.
‘인상 쓴 적 없어요.’
‘지금 쓰고 있잖아. 그런 얼굴로 노려보니까 애들이 무서워하지.’
막내는 혀를 차더니 말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전후 관계가 틀렸어요. 저쪽이 먼저 저를 노려보는 거라고요.’
‘원, 현진이가 그럴 리 있니.’
긴장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나 막내 앞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어른들조차도 긴장하는데 하물며 또래나 더 어린 애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뻥치지 마. 누가 널 노려보는데 네가 그냥 놔둔다고?’
셋째가 헛웃음을 웃으며 반박하자 막내가 사납게 형을 쳐다보았다.
‘그럼 뭐, 저 쪼그만 걸 건드려?’
건드릴 데가 있기나 해야지, 짜증스레 말하며 차를 들이켜는 막내를 보며 주선미는 얘답지 않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현진이도 그랬다. 주선미가 보아 온 한 현진이는 온순하고 착하긴 하지만 은근히 담이 커서 누구 앞에서 이유 없이 겁먹거나 긴장하진 않았다. 남편 앞에서도, 자신의 앞에서도 늘 예의 바르고 공손했지만 움츠러드는 기색은 없었다. 그런데 막내만 있으면 이상하게 좀, 뭐랄까, 긴장한달까, 기운이 곤두선달까, 그런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런 태도 때문에 막내가 제 딴에는 건방지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는 걸까? 늘 그렇게 현진이랑만 얽히면―딱히 얽히지도 않았지만― 막내는 기분이 나빠 보이곤 했다.
의아해하던 주선미가 하루는 유현진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현진아, 우리 태오가 좀 불편하지?’
‘예? …….’
주선미의 뜬금없는 물음에 유현진은 당황한 듯 눈만 깜박였다. 얼른 말을 못 하는 그의 옆에서 동생인 유세진이 과자를 먹다가 대뜸 ‘예! 그 형 무서워요! 원래도 눈매가 이렇게 막 사나운데, 옆을 지나갈 때면 사람을 곁눈으로 노려보고 그래요. 수틀리면 개 멱따듯 목을 딱 따 버릴 것 같아요!’ 하고 외치다가 유현진에게 허리춤을 꼬집혔다.
‘아니에요, 안 그래요. ……좋, 좋은 분이에요.’
그답지 않게 말도 더듬거리는 유현진을 보며, 얘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주선미는 별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유현진도 현태오를 썩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유현진이 그러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았다. 현태오를 불편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안 불편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현태오는…….
‘아들들. 너희 막냇동생이 남들한테 시비 걸고 그러니? 딴사람이 맘에 안 들면 막 노려보고 겁주고 그래?’
아들들과 외출 나갔다 돌아오던―이때도 막내는 거절하고 안 갔다. 도통 뭔가를 함께하는 일이 없는 막내였다― 주선미가 문득 생각나 묻자 아들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태오요? 하하, 설마요.’
‘걔가요? 걔가 뭐 이유 없이 누구 노려볼 만큼 남들한테 관심이나 있는 앤 줄 아세요? 우리가 맘에 안 드는 말을 해도 그냥 개무시하고 제 할 일 하는 앤데.’
‘태오는 누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누구한테든 먼지 한 톨만큼도 신경을 안 쓰는 애예요, 어머니.’
‘그리고 누가 먼저 건드리면, 노려보고 겁주는 단계를 굳이 거치지 않고 그냥 바로――. 아시잖아요.’
세 아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에 주선미는 ‘그래, 그렇지?’ 하고 맞장구치며 안도했다. 생각해 보면 절대로 칭찬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안도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현진이랑 태오는 그냥 서로 안 맞나 보다.
원래 사람이란 아무 이유가 없어도 서로 잘 안 맞고 거북한 상대가 있는 법이니까.
싸우거나 부딪치지만 않으면 됐지.
그러는 사이에 막내는 평항으로 갔고 현진이는 신학교로 갔다. 더 이상은 마주칠 일도 없어졌다.
그래서 주선미도 잊고 있었다. 서로 좀 안 맞는다 한들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현진아. 그 애가 못되게 굴면 꼭 말하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만큼은 네 편을 들어 줄게. ……가엾은 것.”
주선미는 조용히 차만 삼키고 있던 유현진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당혹스러워하는 유현진을 재빨리 훑어보았는데 다행히 맞거나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정신 바짝 차려. 겁먹지 말고. 원하지 않는 일은 억지로 할 것 없어. 응?”
“아, 예, …….”
주선미의 당부에 유현진은 점점 더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마음 약하고 순한 것 같으니.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동생이랑 어머니 돌보느라 철이 일찍 들었다. 볼 때마다 짠하고도 대견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곧 어머님 기일 아니니? 차 보내 줄 테니 편하게 갔다 오렴.”
“아니에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세진이 차로 가기로 했어요.”
“그래.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다시 성인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마저 잃었는데, 엉엉 우는 동생 옆에서 울지도 않고 꿋꿋하던 얼굴이 주선미의 뇌리에 떠올랐다.
어머니의 유골함을 묘소에 모시고 돌아오는 길 내내 제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만이 그 어린 얼굴에 가득했다. 유현진 역시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 울지도 못하고 꾹 참고서 더 어린 동생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괜찮아, 세진아, 형이 있잖아, 그렇게 동생을 연신 타이르며 별채로 걸음을 옮기는 그들 형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선미는 절로 탄식이 나왔었다.
‘저 어린것들을 어쩌나…….’
주선미가 혼잣말을 하자, 그날 어쩐 일로 주선미의 기사 노릇을 하겠다며 함께 장례식장까지 따라갔다 온 현태오가 묵묵히 있다가 불쑥 말했다.
‘다른 데 안 보내요?’
‘뭐?’
‘계속 이 집에 둘 거예요?’
냉담하게 말하는 아들을 주선미는 정색하고 쳐다보았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여태 계속 여기 살았던 애들을 이제 와서 어딜 보내라고?’
‘보호자가 될 만한 사람한테 가야 할 것 아니에요.’
‘친척도 없는 아이들이야. 다 클 때까지 돌봐 줘야지 애들 둘만 남은 걸 어딜 보내?’
‘……흠.’
더 이상은 별말 없이 그저 못마땅한 듯 눈썹만 치켜올리는 아들을 주선미는 둥그렇게 홉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태오야, 너 저 아이들이 같이 있는 게 싫으니?’
‘싫다기보다.’
현태오는 웬일인지 저답지 않게 잠깐 말을 끊더니 짜증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럼 이제 쟤들 밥은 누가 챙겨요?’
‘뭐?’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남은 애들 밥 챙겨 먹일 사람이 없을 것 아니에요.’
툭 내뱉듯이 말하는 아들을 주선미는 껌벅껌벅 쳐다보았다.
밥……, 밥 챙겨 먹…….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는 들었는데 못 알아들었다. 입을 여는 일도 별로 없는 데다, 입을 열면 딱딱하고 까다로운 얘기만 몇 마디 꺼내곤 하는 애가 갑자기 무슨 밥에서 훈김 나는 소리를 하는 걸까.
‘얘 좀 봐. 너더러 챙기라고 할까 봐 그러니? 주방 아주머니가 챙겨 주기로 했어.’
주선미가 어이없어하며 말하자 아들은 ‘다행이네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며칠 새 비썩 말라서 꼴 보기 싫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별채에 마른 눈길을 주곤 그대로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선미는 우리 막내가 왜 이렇게 못돼졌을까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부모 잃은 아이를 두고 꼴 보기 싫다니. 애가 만사에 무관심하긴 해도 못되게 굴진 않았었는데.
어쩌다 우리 아들이 저렇게 매정해졌나 당황하던 주선미 여사였으나, 마침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 오는 겨를에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 뒤로는 아들이 그렇게 이유 없이 못되게 구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아예 잊고 있었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좀 삭막하고 냉정한 우리 막내……, 이 정도로만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는데.
“…….”
주선미는 상냥한 눈매를 내리깔고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무리 어미라지만 잘못된 일은 잘못된 거고 지켜야 할 일은 지켜야 한다.
이렇게 된 바엔 못돼먹은 막내아들 따위는 내다 버려 버리고 이 착한 아이를 알뜰살뜰 잘 챙겨 줘야…….
눈이 마주치자 마치 제가 죄짓기라도 한 것처럼 곤혹스럽게 시선을 떨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더 짠했다.
“현진아. 우리가 얼마나 알고 지냈지?”
“? ……17년이네요.”
유현진은 갑작스런 물음에 의아한 눈치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고 대답했다.
“그래. 현진이가 어릴 때부터 우리 함께 지냈잖아. 현진이랑 세진이가 자라는 모습도 다 봐 왔고. 비록 내가 현진이 부모님만큼은 안 된다 해도, 그래도 이모만큼은 된다고 생각하거든. 내가 우리 현진이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를 거야.”
“……예…….”
유현진은 낯을 살짝 붉히며 겸연쩍게 고개를 꾸벅했다. 주선미는 그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정말이야. 난 현진이가 참 예뻐. 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거든. 그러니까 우리 현진이는 복 받으면서 잘살아야 해. ……설령 벌 받을 나쁜 사람이 내 아들이라 해도.”
“……, 아니……,”
“현진아. 아줌마가 전에 말했었지? 아줌마를 엄마처럼 여기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말하라고. 잊으면 안 돼, 응? 아줌마는 현진이 편이니까, 억울하고 분한 일 있으면 말해야 해. 꼭 도와줄 테니까.”
주선미는 유현진의 핏기 가신 얼굴만큼이나 하얀 손을 꼬옥 붙잡았다.
바로 그때다.
별안간 철컹하고 급하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호쾌하고도 묵직한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나 버티고 선 남자는 현태오였다.
“어머니, 여긴 왜 오셨어요?”
거실 안을 둘러본 현태오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주선미에게 말했다.
집에 있다 달려왔는지 편한 옷차림이었다. 샤워라도 하다 말고 온 듯 머리카락까지 슬쩍 젖어 있다. 뭐 그리 급하게 올 일이라고.
깜짝 놀라 현태오를 쳐다본 주선미가 시선을 돌리자 정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비서가 눈길을 피했다. 괘씸하게, 내 비서면서 아들에게 그새 이른 모양이다. 그를 곱게 흘겨본 주선미는 다시 아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데에 왔니?”
“이 늦은 시각에 남의 집엘 왜 와요.”
“넌 온다며.”
“저랑 어머니랑 같습니까?”
“어머, 뭐가 그렇게 달라서?”
주선미가 눈에 힘주고 대답하자 현태오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이없다는 듯 허, 하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아들을 주선미는 희한한 눈치로 쳐다보았다. 얘답지 않게 왜 이런담?
현태오의 마땅찮은 시선이 흘끗 유현진을 향했다. 두 손에는 찻잔을 꼭 붙든 채 새 손님을 맞아 어정쩡하게 일어난 유현진은, 현태오를 이렇게 막 대하는 사람을 처음 봤는지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주선미와 그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주선미가 얼른 유현진의 옷자락을 끌어당겨 도로 앉히자 그제야 유현진은 “어서 오세요…….” 하고 조심스레 중얼거리며 현태오에게 인사했고, 그런 유현진을 냉랭하게 보고 있던 현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을 떨어뜨린 현태오는 테이블 위의 찻잔들을 보더니 혀를 차곤 주방으로 갔다. 거실에서 바라다보이는 주방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주선미는 쟤가 뭘 하려고 저러나 수상쩍은 눈치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 끝에서 현태오는 유유히 제집인 양 익숙하게 차를 끓여 내왔다.
새 찻잔 세 조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이게 더 맛있을 거예요. 이걸로 드세요.”
쌀쌀맞게 말하는 아들을 흘끔 쳐다본 주선미는 슬그머니 찻잔을 바꿔 들었다. 유현진도 잠자코 새 잔을 든다. 그 말마따나 이번에는 풍부한 차향이 잘 살아나 있었다.
“……웬일이니, 네 손으로 차도 끓이고.”
“여기선 제가 끓여요. 이 사람이 못 끓여서.”
쿨럭, 기침을 한 유현진이 얼른 손끝으로 입가를 닦았다. 주선미도 사레들릴 뻔했다. 호칭이 미묘하게 친근하다. 이상한 눈으로 아들을 보던 그녀는 다시 짐짓 쌀쌀하게 말했다.
“잘 못 끓이면 핀잔을 주지 말고 연습할 기회를 그만큼 더 줘야지.”
“연습은 왜요. 그냥 제가 끓이면 되지.”
“너 없을 때 혼자 마실 수 있잖아.”
“이 사람 혼자서는 차 잘 안 마셔요.”
“손님이 올 수도 있고.”
“이 집에 나 말고 누가 와요.”
오긴 어딜, 하는 표정이 미간의 주름 위로 스쳐 간다.
주선미는 잠자코 차를 마셨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의문 부호가 수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뭘까, 어쩐지 생각했던 거랑 좀 다르다. 많이 다르다. 적어도, 그들이 이렇게 별일 없이 한자리에 앉아서 나란히 찻잔을 기울이는 그림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말 없는 가운데 차만 마시던 세 사람 사이에서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현태오였다.
“왜 말도 없이 찾아오셨어요.”
“어머, 내가 누굴 만나든 네게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니?”
“저랑 관련 있는 사람이라서 오신 거잖아요.”
“어머, 얘 좀 봐. 현진이가 너랑만 관련 있어? 만나도 너보다 나랑 훨씬 더 자주 만났지? 그리고 뭐, 정혜궁마마 때는 너한테 일일이 말하고 만났었니?”
“정혜궁마마랑은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니? 그리고 설령 달라도, 네게 미리 얘기하고 만나야만 할 차이점은 없잖니?”
주선미는 한마디 한마디 오갈 때마다 더더욱 눈을 부릅떴다. 그런 주선미를 옆에서 유현진이 감탄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낯으로 어머니를 쳐다보던 현태오가 혀를 찼다.
“어머니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면 이 사람이 불안해하잖아요. 지금도 봐요, 계속 눈치 보고 있잖습니까.”
“어머, 얘가? 내가 현진일 괴롭히니? 눈치를 본다면 너 때문에 보겠지, 이 못된 녀석아!”
재빨리 시선을 떨구어 아무랑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유현진을 흘끔 쳐다본 현태오는 앓는 소리를 삼키며 미간을 주물렀다. 머리끝까지 성질은 나는데 차마 어머니에게 성질대로 막 나가지는 못하는 그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듯했다.
“――물론 어머니가 괴롭히지야 않겠지만, 지금은 어머니가 뭐라고 위로하고 다독여도 스트레스받을걸요. 그만 돌아가시지요.”
모시러 왔다는 듯 정색하고 말하는 현태오를 주선미는 빠안히 쳐다보았다.
“너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쓰는 애였니?”
“……. 어서 가시자고요.”
드디어 인내의 실이 끊어졌는지 현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선미의 팔뚝을 붙잡아 같이 일으켰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그 손아귀에 반강제로 일어나며 주선미는 얼결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들, 아파!”
“안 아프게 잡았어요. 어서 나오세요.”
억지로 잡아당기지는 않지만 몹시 확고하게 팔을 붙들고 있는 아들을 노려본 주선미는 못마땅한 한숨을 내쉬곤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유현진이 그녀의 웃옷을 가져다주었다. ……얼른 가져오는 걸 보니 불편하긴 했던 모양이다.
현태오는 주선미가 웃옷을 걸치자마자 끌고 가다시피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얘, 천천히 좀 가, 천천히.”
주선미가 타박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걸어가던 현태오가 갑자기 걸음을 뚝 멈추었다.
뒤따라오던 유현진을 의아하게 쳐다보는가 싶더니, 그의 찌푸린 시선이 유현진의 발치로 떨어졌다. 주선미도 얼결에 아들의 시선을 따라갔고, 몇 발짝 뒤에 있던 유현진은 그들의 시선을 받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
“다리는 왜 그래요. 다쳤습니까?”
현태오가 난데없는 말을 던졌다. 고개를 갸웃하는 주선미 옆에서 혀를 찬 현태오는 그녀의 팔뚝을 놓고 유현진에게 다가갔다.
“다리 절고 있잖아요. 어쩌다 다친 거예요?”
현태오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알사탕이라도 잘못 삼킨 아이처럼 휘둥그렇게 눈을 굴리고 있던 유현진은 왠지 모르게 눈치를 보며 어물거렸다.
“아니……, 아까 좀 접질려서……. 괜찮습니다. 금방 나아질 거예요.”
“어머, 현진이 다쳤니?”
“아니에요. 그냥 살짝……. 찜질하고 자면 나을 거예요. 별것 아니에요.”
정말요, 하고 웃으면서 유현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찬다. 눈살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현태오는 쓴 숨을 내쉬곤 다시 주선미에게로 돌아왔다.
멀쩡해 보였는데, 얘는 날 끌고 나가는 와중에 또 언제 그걸 다 봤담. 주선미는 아들의 관찰력에 감탄하며 유현진을 살펴보았다. 과연, 자세히 보니 아주 약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아주 조금 두 발의 걸음 속도가 다르긴 했다. 하지만 정말 미세한 차이였는데, 잘도 알아차렸다.
현관에 다다른 주선미는 유현진의 어깨를 한번 다독여 주고는 현태오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너, 현진이 괴롭히면 안 된다.”
“제가 언제――, ……안 괴롭혀요.”
순간 이마에 핏대가 솟은 현태오였으나 여기서 언성을 높여 봐야 더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나직이 대꾸했다.
“아니에요, 잘해 주세요.”
유현진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러자 제 입으로 안 괴롭힌다고 해 놓고선 현태오는 무슨 거짓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낯으로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서 외려 유현진이 당황하는 듯했다.
“얘 표정 봐. 이게 잘해 주는 사람 보는 얼굴이니?”
주선미는 현태오의 등짝을 철썩 후려쳤다. 아들이 이를 꽉 다무는 게 보였지만, 그래 봤자 어쩔 건가. 만일 이놈이 제 어미도 못 알아보고 날뛰는 놈이라면 망설임 없이 연을 끊어 버리고 말 터였다.
다행히 그러지 않을 만큼은 양심이 남아 있었는지 현태오는 입 꾹 다물고 완강하게 주선미를 밖으로 내보냈고, 주선미는 반쯤 억지로 문을 나서면서도 유현진을 돌아보았다.
“현진아, 나 이만 가 볼게. 문단속 잘하고. 몸조심해서 잘 지내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응? 꼭이다.”
다짐받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현태오가 그녀를 완전히 문밖으로 이끌었다.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그녀의 매몰찬 눈총을 받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가운데, 현태오는 현관 한 걸음 밖에서 유현진을 돌아보았다.
“…….”
피곤한 듯 이맛살을 찌푸린 현태오가, 이 현관을 나설 때의 습관이기라도 한 양 언뜻 유현진의 손을 보았다. 그 시선은 곧 유현진의 입술로 옮겨 온다.
가라앉은 시선이 분명하게 입술에 닿았다. 유현진은 별안간 당황한 기색으로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입술을 가리듯 문질렀다. 그러자 시선이 다시 눈에 닿는다. 눈이 마주쳤다.
유현진을 바라보던 현태오가, 그 반응이 마음에 들기라도 했는지 처음으로 눈가에 희미하게 웃음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아들, 뭐 하니? 괴롭히지 말라니까!”라는 바깥의 외침에 금세 사라지긴 했지만.
“늦은 시각에 실례했습니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냉담한 말투였다. 자칫 잘못 들으면 ‘너 내일 두고 보자.’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현진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주선미는 “오긴 뭘 와! 애 좀 쉬게 내버려 둬!”라며 아들을 붙잡아 끌어내었고, 입을 꾹 다문 현태오는 순순히 모친을 따라 걸음을 돌렸다.
주선미는 행여나 아들이 거기서 행패라도 부릴까 그의 손을 꼭 붙들고 계단을 내려와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얼른 차에 떠밀어 넣고 그 옆에 올라탔다.
곧 조용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머잖아 저만치 집 대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주선미는 차분히 말했다.
“현진이 착한 애야.”
“…….”
“너 평항 가서 없는 동안 신전 가면 늘 나 붙들고 같이 기도해 줬어. 너 무사히 잘 지내라고 현진이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해 줬는지 몰라. ‘매일 기도드리고 있어요. 괜찮으실 테니 안심하세요.’ 하고 나 안심시켜 주고. 너 그런 애 괴롭히면 안 돼.”
“기도요? 저놈이요?”
현태오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주선미를 돌아보더니 속을 것 같냐는 투로 말했다. 그런 아들을 주선미는 기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하고 되묻는 아들을 뚫어져라 보던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꼭 뭐에 토라진 것 같은 투였는데…… 그런 귀여운 짓을 할 리 없지.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 때도 하지 않던 짓이다. 아니나 다를까, 냉랭하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저놈은 걱정해 주는 사람도 참 많네요. 저 말고 모든 사람한테 다 잘해 줬나 봐요.”
“……?”
“염려 마세요. 못살게 굴지 않을 테니까. ……저놈이 날 더 긁지만 않으면.”
“어머, 얘 좀 봐. 긁는다고 긁히기나 하는 애니, 네가?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할 녀석이.”
긁으려고 작정하고 달려든들 긁히기나 할까. 긁으려 든 상대만 판판이 부서지겠지.
현태오는 어깨만 가볍게 추어올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다는 뜻이다. 아들이 아니라 상전이다.
주선미도 지치기도 하고 머릿속도 복잡해 잠자코 창밖만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강제적으로 폭력을 써 괴롭힌다고 하기엔, 유현진이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몹시 괴롭거나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외려――.
주선미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흘끔 현태오를 본다. 창밖을 보고 있는 그는 여전히 무표정해서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한참 아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한 번 더 고개를 갸웃하곤 수상쩍은 기운이 뭉글뭉글 올라오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
사절단의 일정표를 주욱 훑어 내리던 현태오의 손가락이 한 곳에서 멎었다.
“말일에 산상 방문이라…….”
“체재 중 한 번 방문할 줄은 알았지만 올해 마지막 날 일정으로 잡았더군요.”
진문성이 말하자 글자 위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던 현태오가 느른히 중얼거렸다.
“일 터지기 알맞은 장소로군. 날짜도 연말 선물 받기에 딱 좋은 날이야.”
수도에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산상은 매우 오래된 유적지 중 한 곳이다. 3백 년 전까지만 해도 송갈에 속한 땅이었던 산상은 그 당시의 전쟁에서 양국의 전설적인 장수들이 목숨을 다해, 송갈과 제양 양국에서 모두 신성하게 여기며 기리는 오랜 도시였다.
“계연군은.”
“산상 일정이 결정 난 날 바로 그쪽으로 연락하더군요. 정확히는 그쪽에서 먼저 예정을 알고서 연락을 했습니다만.”
“정신 나간 놈. 뒷돈을 받을 데가 없어서 적군과 야합한 군수업체한테 돈을 받아?”
“야합했다는 것까지는 모를 겁니다.”
“뒷돈 주는 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돈을 받는 게 정신 나간 거야.”
현태오는 코웃음 쳤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잠시 턱을 문지르던 그가 말했다.
“산상에서는 쓸 만한 수가 뻔해. 소방방위청이랑 보안관리청에――, 문 사무장이랑 정용일 책임감한테 따로 조용히 연락해. 그날 수색은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 주고.”
틈을 좀 내줘야 선물을 받지, 하고 말하며 현태오는 일정표를 내려놓았다.
“이미 증거는 충분한데 더 잡으시려고요?”
“굳이 주겠다는데 마다할 것 있나. 그 선물까지 받고 나면 이제――쓸어내야지.”
진문성은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단 솎아 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알아보는 중입니다.”
“내통하고 있는 놈들이 두셋은 더 섞여 있을 테니 잘 찾아봐. 왕자가 데려온 놈 말고도 말이지.”
“예.”
진문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송갈에서 오신 마마도 보통은 아니십니다. 뻔히 박쥐인 줄 알면서도 측근으로 데려와 미끼로 쓰려는 걸 보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협력을 해 볼 만하지.”
의자에서 일어난 현태오는 창가로 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궁내 근위청의 담장 밖에서는 오늘도 시위대가 구호를 외쳐 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날이 흐린 데다 기온도 영하로 떨어져 다른 날보다는 소리가 작았다. 게다가 지금은 저녁나절이라 몇몇은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금세라도 눈이 올 듯한 날씨였는데, 근위청에서 내려다보이는 후원 안쪽으로는 아담한 소나무들이 작은 숲처럼 자라나 있어 이런 날에도 정취가 있었다. 그래서 겨울에도 사람들이 간간이 그 길로 산책하곤 했는데, 지금도 정혜궁의 공주와 그녀의 귀빈이 그곳을 거닐고 있었다.
상냥하고 온화한 인상이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다. 겉모습과는 달리 둘 다 속은 매운 생강 같다는 점에서도 잘 어울린다.
몹시 느린 걸음으로 소나무 아래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는 제상아와 미사담의 뒤로는 여남은 걸음쯤 떨어져서 따라가는 나인 두엇과 미사담의 보좌관들, 그리고 유현진이 있었다.
“저놈은 옷이 왜 저 모양이야.”
그들을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옷 말입니까?”
현태오의 뒤로 다가서 창밖을 내다본 진문성은 의아하게 되물었다.
보좌관들과 나란히 걷고 있는 유현진은 단정한 코트와 면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많이 수수하긴 했지만 딱히 이상한 차림은 아니었다.
“이 날씨에 얇은 코트 하나만 입고……,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나.”
“…….”
오전 내내 겨울 재킷 하나만 입고 외부 업무를 돌아다녔던―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하나 안 써주는 상관을 모시고 다녔던― 진문성은 물끄러미 현태오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러고 다니니 손이 트지. 장갑도 필요하겠어. 보들보들하게 생겨선 막상 만져 보면 까칠하단 말이야. 누가 유현진이 손 아니랄까 봐.”
“……요즘 손 자주 잡으시더군요.”
근래 들어 공적인 장소가 아닌 한은 함께 있으면 늘 손 한쪽쯤은 잡고 있던 모습을 떠올린 진문성의 말에 현태오는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반응이 재밌거든. 무슨 뱀이라도 닿는 것처럼 굳어 버리는 게. 그렇게 잡아도 도통 익숙해지질 않는 모양이지.”
“그렇습니까? 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데요.”
“손잡으면 알아. 얼굴 내색은 그대로 얼음장 같은데 손은 멈칫하거든. 손바닥이라도 긁으면 움찔하면서 진저리를 친단 말야. 그렇다면야, 언제까지 그렇게 치를 떠는지 느긋이 봐 드려야지.”
“……싫어하는 사람 손바닥을 긁는 건 명백히 성희…….”
진문성은 사나운 눈길이 날아오는 걸 알아채곤 입을 다물었다. 현태오가 못마땅하게 진문성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겨우 손 건드리는 걸로 무슨 성희롱이야. 그렇게 따지자면 저놈이 더해. 아픈 데를 재활 안마해 주겠다면서 겁도 없이 미묘한 데까지 주물거린다고. 어제는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면서 손등으로는 내 고환을 건드려 대서, 설 정도였단 말이야.”
“……. 섰습니까?”
현태오는 대답 대신 냉소가 서린 시선만 흘끗 던지곤 다시 아래를 보았다. 그곳에는 평소와 같이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현진이 있었다.
일단 이 상관은 남 앞에서 어쩌다 발기를 했다 한들 수줍어하거나 부끄러워할 남자는 아니지만……, 진문성은 떠름한 내색을 삼키며 유현진을 편들어 주었다.
“신관은―특히나 치유를 은사로 받은 신관은― 다친 사람을 돕는 게 의무라서 습관적으로 손을 내민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유현진 씨도 별생각은 없으셨겠지요.”
“더 이상 신관이 아니면 생각을 하고 살아야지. 그렇게 함부로 자극해 대다 자칫 누가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덮치실 겁니까?”
진문성이 최대한 무심한 투로 묻자 현태오가 멈칫하더니 진문성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이놈이 정신 줄을 놨나……, 저 뻣뻣하게 구는 사내새끼를 미쳤다고 건드려?”
“계속 희롱하시길래 그러시다 자칫 불경한 일을 벌이시진 않을까 염려가 돼서요.”
진문성이 반은 농담, 반은 우려를 섞어 말하자 현태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저 싹퉁머리 없는 면상 끄트머리만 봐도 기분이 싹 식어 버릴 지경인데, 덮칠 데가 어딨다고 저걸 덮쳐?”
“음……, 하긴 취향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유현진 씨는 신관일 때 인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엄격하고 금욕적인 인상이 더 매력적이라고, 일부 신도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인기 높으셨다고요.”
현태오가 어이없다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들어 본 적이 있을 터였다. 이번 일이 터졌을 때 온갖 기사들을 적당한 선에서 수습하던 도중에 들어왔던 소문 중 일부다.
“정신 나간 작자들 같으니.”
“그렇습니까? 이해할 만은 한데요.”
예전부터 외모는 단정했던 유현진이다. 제상아의 절친한 친구로 그녀와 함께 간간이 기사 사진에 실릴 때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그가 신학교로 진학하자 아쉬워한 처자들이 여럿이었다.
그런 과거를 떠올리며 무심히 중얼거리던 진문성은, 다음 순간 물끄러미 와 닿는 시선을 느끼고 멈칫했다.
“문성아.”
“예.”
“너 저놈 그런 눈으로 본 적 있었어?”
진문성은 이유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얼른 정색하며 “아닙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하자 그를 지그시 쳐다보던 현태오가 못 박듯이 말했다.
“그러면 개소리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
“……예.”
현태오는 그러고도 몇 초쯤 더 진문성을 노려보다가 시선을 물렸다. 진문성은 알 듯 말 듯 한 의문 부호를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현명하게 침묵했다.
현태오는 불편한 심사를 완연히 드러낸 채 후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군데군데 살얼음이 얼어 있는 연못의 다리를 건너는 제상아와 미사담의 뒤를 따라 유현진도 다리로 오르고 있었다. 계단 몇 단을 조심조심 오르는 바지 자락 아래로 붕대를 둘둘 감은 발목이 보였다. 현태오는 낮게 혀를 찼다.
어젯밤까지도 여전히 다리를 절뚝이길래―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긴 했지만― 같이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오늘 아침에 그냥 혼자 갔다 왔다고 했다.
좀 심하게 접질리긴 했지만 그대로 놔둬도 저절로 나을 거라고 했다며, 사실 붕대를 감을 필요까지도 없는데 그냥 보호대 삼아 감았단다.
“바늘 끝도 안 들어갈 것처럼 딱 부러지게 생겨 먹은 놈이 다치기는 또 저렇게 허술하게 다쳐선.”
공연히 짜증스런 기분이 치솟는 걸 억누르며 현태오가 중얼거리자 진문성도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오르고서 가벼운 한숨을 내쉬는 유현진이 무심결인 듯 허리 언저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많이 접질리셨나 봅니다. 골반 쪽까지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며칠 보다가 계속 저러면 병원에 데려가서 자세히 검사받아 봐야지.”
“…….”
한창 전장에서 뒹굴던 무렵 팔목 뼈가 분질러져도 ‘붕대 단단히 감아. 밤에 기습전 나가야 하니까.’라고만 했던 상관을―상관 본인도 골절상을 입은 상태였으므로 억울하지는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본 진문성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각하께서는 상태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은데요.”
진문성이 오전 중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현태오를 보고 문득 머릿속에 떠올렸던 생각을 말하자 현태오 본인도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기온이 내려가면서는 치료를 받아도 계속 뻐근했었는데, 요 며칠 좀 편해졌어.”
“꾸준히 재활을 받으셨던 효과가 이제 좀 제대로 나나 봅니다.”
음, 하고 현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좀 아쉬운 일이네요.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유현진 씨에게 신력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저분이 신력을 쓰려야 쓸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됐어. 신력을 쓰면 많이 지친다는데, 그러잖아도 빌빌거리는 놈이 픽 쓰러지기라도 하면 낭패야.”
현태오는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진문성은 고개만 끄덕이곤 굳이 더 말하지 않았다.
피곤한지 목을 가볍게 좌우로 툭툭 꺾던 현태오가 불쑥 물었다.
“저놈도 가지, 산상?”
“예. 별다른 언급은 없었으니 동행하시겠지요.”
목덜미를 주무르던 현태오가 입을 다문 채 눈살을 찌푸렸다. 그를 흘끔 쳐다본 진문성이 물었다.
“이번 산상에서는 애초부터 그들이 손쓸 수 없도록 처리해 둘까요?”
잠시 생각하던 현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차피 어디서든 한 번은 터질 일이야. 보안 대상의 안전은 확보해 둘 테니 상관없지. ……그리고, 저놈이 뭐라고 예정을 바꿔? 진문성이 너 저놈한테 뭐 빚졌어?”
현태오가 눈을 치뜨자 진문성은 얼른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그저 올해 마지막 날이니까, 연말은 평화로우면 좋을 것 같아서요.”
몇 년 내도록 연말을 전쟁처럼 치러 온 그의 급조된 대답에 현태오는 뭔 개소리냐는 눈길로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별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언짢은 듯 혀를 차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놈 보낼 신전은 잘 추리고 있나?”
“예. 적합한 곳을 몇 군데 골라 타진 서류를 보내 두었습니다. 확인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현태오는 잠시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지나치게 외진 곳으로는 말고. 근처에 쓸 만한 병원 정도는 있는 곳으로 해.”
“예.”
진문성은 선선히 대답했고, 현태오는 후원을 내려다보았다.
유현진은 다리 난간에 팔을 걸치고 연못을 내려다보면서 바로 옆에 선 송갈의 보좌관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처럼 웃음기라곤 거의 없는 얼굴은 뭔가 심각한 대화라도 나누는 듯했는데, 대조적으로 송갈의 보좌관은 여상한 낯으로 웃기도 하고 눈살을 찡그리기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이어셋을 꺼내어 장착하더니 스위치를 켰다. 보호 대상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옷깃에 달아 둔 송신기에서 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 회사는 캔보다 파우치가 기호성이 좋아요. 고양이들이 아주 정신 놓고 달려들더라고요. 손가락까지 물어뜯기는 줄 알았어요.」
「근데 그거 간식으로 주는 거 아니에요? 성분은 괜찮아요?」
「성분은 보통이긴 한데, 우리 애는 벌써 스무 살이라 이제는 그냥 뭐든 잘 먹는 걸로 주고 있어요.」
송갈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잠시 침묵하던 현태오는 떨떠름하게 진문성을 보았다.
“유현진이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나……?”
“? 어젯밤 들르셨을 때 못 봤으니, 오늘 새벽에 데려온 게 아니라면 그 집에 고양이는 없을 텐데요.”
그렇지, 하고 현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간밤에 유현진의 집에 들렀을 때에도 고양이 따위는 없었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로봇청소기 앞에 먼지 조각을 떨궈 주며 ‘나비야, 자, 이거 먹어.’라고 말을 거는 유현진만 있었다.
소파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미리 방구석을 싹싹 닦아 모아 놓은(그럴 거면 로봇 청소기는 왜 돌리는지) 먼지를 조각조각 떼어 주던 유현진은, 잠자코 팔짱을 낀 채 뒤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던 현태오의 존재를 뒤늦게 깨닫고는 펄쩍 뛰었었다.
‘언, 언제……, ……기척 좀 내고 들어와 주시면 안 됩니까?’
가슴을 쓸어내리던 유현진이 눈매에 힘을 주었다. 그래 봤자 여전히 둥그스름한 그 눈매를 내려다보며 현태오는 태연히 대꾸했다.
‘냈습니다.’
‘거짓말 마세요.’
‘냈습니다. 유현진 씨가 나비한테 밥 주느라 정신이 팔려 못 들으셨나 보지요.’
‘…….’
유현진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슬그머니 일어나 ‘나비’를 안아 들더니 방 안에 넣어 놓고 돌아오는데, 화난 듯 딱딱한 표정임에도 피부 빛깔은 불긋불긋했다.
그러는 사이 현태오는 으레 그렇듯 차를 끓여와 거실에 앉았고 유현진은 제일 멀찍한 의자에 앉아 현태오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날―현태오가 유현진의 뺨을 우악스레 움켜쥐고 나갔던 날 밤― 이래 유현진은 현태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희박해서 잘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이제 조금쯤은 알겠다. 무뚝뚝한 눈길로 찻잔을 내려다보다가 흘끗 한번 현태오를 쳐다보곤 도로 시선을 떨궈 버리는 유현진은 그날 갑자기 그가 왜 성질을 부리고 나갔던 걸까 의아해하는 듯했다.
어쩌면 성질부린 게 아니었던 걸까 생각하려 해도, 그 직후 며칠간 현태오는 이 집에 발걸음을 뚝 끊었었다. 만일 현태오의 어머니가 불시에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현태오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안 왔을지도 모른다.
안 오려 했었다. 적어도 얼마간은 더.
그날은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놈은 여전히 표정이라곤 없이 딱딱한 낯을 하고 있었지만 그리 긴장한 기색도 없었고 말마디도 곧잘 던졌다. 이제는 현태오에게 좀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현태오도 이 집에, 혹은 놈에게 익숙해졌는지 제집에 있는 것처럼 놈의 옆에서 느른하게 늘어졌다. 놈의 조용조용한 목소리도, 느릿하고 뜻밖에 부드러운 손길도, 다 괜찮았다.
놈이 대뜸 ‘너와 나는 상관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기 전까지는.
반들반들하던 캔을 와작 밟아 버린 것처럼 삽시에 기분이 우그러졌다. 욱하고 화가 치밀어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이, 혹은 가슴속이 부글거렸다. 더 화가 나는 건 스스로의 그 짜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한편으로,
현관에서 돌아서기 직전 이걸 확 물어서 뜯어 발겨 버릴까 치밀어 오른 폭력적인 충동에 놈을 끌어당겼을 때,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멈추었던 입술.
희미하게 떨리는 체온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던 그 거리에 그 하얀 얼굴이 멈춘 순간.
현태오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일순 무섭도록 거세게 밀려오던 충동과, 그 충동을 아슬아슬하게 붙들던 기이한 거부감.
물어뜯고 싶었다. 간절히. 아주 조금만 고개를 내밀면 그 입술을 물어뜯고 낱낱이 발라먹어 버리고 싶은 욕망은 쉽게 이루어질 터였다.
그러나 동시에, 결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그 순간 뭔가가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끊어져서는 안 될 어떤 것이.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상반된 생각이 이토록 강하게 충돌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
제풀에 흠칫한 현태오는 그 하얗고 보드라운 볼을 움켜쥐고 떠밀어 버렸다.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그 집에서 나오며, 그는 기묘한 혼란 속에서 놈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자신이 지금 평소답지 않은 건 분명했고, 그런데 그 이유도 명확지 않다면――일단은 물러서서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는 게 나을 터였다.
그래서 그 뒤로 며칠, 일부러 멀찍이 돌아갈지언정 그 집 앞으로도 지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밤늦게 귀가 중이던 어머니가 그 집에 예고도 없이 들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갓 샤워를 마치고 나왔던 현태오는 머리에 물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선량하고 마음 약한 모친이 그놈한테 못되게 굴지야 않을 테지만, 그분이 뭐라고 하든 그놈은 잔뜩 긴장하고 움츠러들어서 어쩔 줄 몰라 할 게 뻔히 보였다.
하얀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겠지. 야단맞은 어린애처럼 기가 죽어서, 그 커다란 눈매를 처량 맞게 껌벅거리며, 그러면서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있을 것이다. ……보기 싫게.
오밤중에 때아닌 뜀박질로 들이닥친 자리에서 현태오는 예상했던 것과 똑같은 얼굴을 한 유현진을 보았고, 난생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화가 치밀었다.
만일 현태오를 본 유현진의 얼굴이 안도한 것처럼 느슨하게 풀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결에 이유 모르게 맥이 탁 풀리며 속이 이상하게 뜨끈해지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에게 버럭 소리를 쳤을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저놈은 왜 저따위 얼굴을 하는 거지.
저래선 내가 꼭 이 집에 와야 할 것 같잖아.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어머니를 끌고 나가다시피 돌아간 현태오는 결국 그다음 날부터 도로 그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술을 끊었던 알코올 중독자가 다시 술에 입을 댄 것처럼, 예전보다 더 자주.
시간이 없어 오래 머물진 못했지만 늘 밤 느지막이 들러 차 한 잔은 마시고 귀가했다.
어제도, 놈은 늘 그렇듯 정떨어지게 쌀쌀맞은 얼굴을 한 주제에 자신이 끓여 준 차를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보다 보니 은근히 심술이 일었다.
‘어머니가 안부 전하시랍니다. 조만간 본가에 한번 들르라더군요.’
현태오가 툭 내뱉자 유현진이 더럭 긴장했다. 쌀쌀맞은 표정 대신 불안스러운 눈치가 감도는 걸 보고 현태오는 좀 흡족해졌다.
‘그렇게 긴장할 것 있습니까? 현 상태를 굳이 따지자면 제가 가해자이고 유현진 씨는 피해자인데, 당당하시면 됩니다. 꾸중을 들어도 제가 들을 테니까요.’
‘……그럴 것 같아서, 그게 안 내키는 겁니다.’
찻잔을 입에서 떼지도 않고 우물거리는 유현진을 보며 현태오는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얼씨구. 귀여운 소리도 하네. 하긴 원래 책임감은 있는 놈이었으니 죄책감이 들기도 할 테지.
유현진의 주름진 미간을 즐겁게 구경하던 현태오는 내친김에 한마디 더 심술을 부렸다.
‘우리 어머니가 싫으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저 없는 동안에는 우리 어머니랑 잘 지내신 것 같던데. 매일 아침마다 절 위해 기도해서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기도 했다면서요.’
현태오는 느른하게 말을 꺼내며 유현진을 보았다.
모친에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했다고 굳이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를 위로하는 선의의 거짓말쯤이야 뭐 어떨까. 그저 놈이 슬쩍 찔리는 얼굴로 우물거리는 꼴이나 보려 했을 뿐인데,
‘――, 그건, 그래도, 크게 신세를 진 댁의 아드님이니까……, 게다가 전쟁은 위험하기도 하고 어린 나이부터 나가셨으니 무사하게 잘 돌아오시면 좋으니까요. 또, 새벽 기도야 늘 하는 일이니까 그때마다 따로 잠시 더 기도를 올리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유현진이 당황한 얼굴로 변명을 주워섬겼다.
현태오는 언뜻 눈썹을 치켜올렸다. 웃음기 없이 빤히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정말 했습니까?’
‘그야, 하루 한두 시간 정도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냥 평범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여전히 진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뚫어져라 보았다.
……이건 예상 밖인데.
‘아주 신실한 사제님이셨군요.’
현태오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곤 차를 마셨다.
필경, 신관의 박애 정신으로 아는 사람들 일일이 다 기도를 하다가 그 끄트머리에 전장에 나간 아는 사람 하나쯤 마지못해 더 기도를 덧붙인 정도겠지만, 그래도 뜻밖이었다. 누가 가볍게 뒷덜미를 때리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감사합니다. 이제 보니 유현진 씨 덕분에 제가 무사히 잘 살아 돌아왔나 봅니다.’
‘그렇지야 않겠지만, 어쨌든 잘 돌아오셨습니다.’
현태오가 다소 믿기지 않는 심경으로 말하자 한층 더 냉랭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겉치레로 억지로 말하는 듯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 절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을 기세로 시선을 내리깔고 차만 마시는 유현진이었다.
‘그리고, 뭐, 제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 중에 전장에 나가 있는 사람은 현태오 씨뿐이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겠죠.’
‘…….’
잠깐 뭉실뭉실 솟아오르는가 싶던 고마운 마음이 싹 가셨다.
그래. 그렇겠지. 현태오는 코웃음 치고 말았다.
‘아무렴요. 나비를 위해 손수 먼지를 챙겨 주시는 마음 따뜻한 유현진 씨인데, 누구를 위한 기도인들 못 하겠습니까.’
방 안에서는 여전히 나비가 달캉거리고 있었다. 안에 넣어만 두고 전원도 안 껐나 보다.
삽시에 낯이 더 붉어진 유현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차만 두어 모금 더 마시다가 제풀에 사레들린 듯 쿨룩거렸다.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히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현태오는 슬쩍 비틀렸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안마나 해 드리겠습니다.’
울긋불긋거리는 낯을 무표정하게 굳힌 유현진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무뚝뚝하게 말했고, 조금 더 놀려 볼까 어쩔까 고민하던 현태오는 곧 선선히 소파 위에 누웠다.
비록 서투르긴 했지만 놈의 손길은 기분이 좋았다. 상처 부근을 살필 때면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리는 듯한 진지한 낯도.
저런 얼굴로 기도를 했던 걸까.
그 상대를 떠올리며, 매일의 시간을.
기이한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기분이었냐면――설명할 수가 없다. 느껴 본 적이 없는 기분인 탓이다.
현태오는 자신의 고관절 근처를 살피며 자분자분하게 누르고 있는 유현진을 보았다.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해서 현태오의 시선조차도 안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고관절과 허벅지 근처를 짚던 유현진의 손길이 허벅지 안쪽에서 멈추었다. 마치 원하던 곳을 찾아낸 것처럼, 손가락 끝이 그 근처를 천천히 눌렀다 떼길 반복했다.
현태오는 낯을 찌푸렸다.
아팠다. 근래 통증이 많이 줄었었는데, 거기를 짚으니 잊고 있던 통증이 살아났다. 마치 숨죽이고 숨어 있는 상처를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곳을 거듭해서 주무르는 사이에 통증은 차차 옅어졌다. 동시에 뻐근한 근육이 풀리는 것처럼 개운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통증이 가시면서, 뒤늦게, 현태오는 또 다른 감각을 깨달았다.
허벅지 안쪽 깊숙이 손을 넣어 주무르는 손길은, 동시에 그의 고환을 슬쩍슬쩍 건드리고 있었다.
‘…….’
현태오는 눈동자만 들어 유현진을 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제 손만 내려다보고 있는 유현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고관절이 거의 통째로 나갔었던 만큼, 재활을 다니면서 그 근처는 어디고 할 것 없이 숱하게 만졌다. 그러나 현태오는 치료 도중에 벌어지는 접촉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고 한 번도 의식한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 반복되는 손길은 한번 의식하고 나자 계속 신경을 건드렸다.
곤란한데. 이거 아무래도…….
내심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아래가 묵직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현태오는 여전히 진지하게 상처 쪽을 살피고 있는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려 입을 열었으나――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사이에 미묘하게 비틀린 흥미가 생겼다. 늘 냉담하게 사람을 내려다보는 이분께서는 과연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유현진은 둔하게도 계속 그곳을 주물러 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반응은 점점 더 부풀어 났고, 이놈이 이미 알아채고서도 태연한 게 아닌가 싶을 즈음,
‘……, ……? ――!’
불현듯 유현진의 얼굴 위로 의아한 빛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다음 순간 덜컥 당황하는 기색이 번졌다. 손이 멎어 버리며 석상이 된 것처럼 얼어붙는다.
유현진이 멍한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당혹스러운 듯 무어라 하려는지 달싹거리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
그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과, 움찔거리는 입술과, 삽시에 핏기가 오르는 하얀 살갗 같은 것들을 눈에 담은 순간,
그때까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자극 때문에 생리적인 반응으로 일어섰던 것이, 별안간 욱신하고 힘을 더했다.
갑자기 갈증이 치받으며 목구멍을 긁고 올라왔다.
가슴속까지 타들어 가는 듯한 그 기이한 감각.
그것은――.
「아. 눈이 오네요.」
그때, 이어셋 안에서 조그맣게 감탄하듯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현진의 목소리다.
현태오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연못의 다리 난간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현진의 옆에서 보좌관이 아, 그러게요, 하고 맞장구쳤다.
말갛게 하늘을 보는 유현진의 얼굴 위로 하얀 먼지 조각처럼 눈송이가 한 올 떨어졌다. 느리게 띄엄띄엄 떨어지는가 싶던 눈발은 점차 잦아지기 시작해,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한겨울에도 눈이 내리는 날이 많지 않은데……. 송갈에는 눈이 많이 온다면서요.」
반가운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현진이 옆에 선 보좌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많이 옵니다. 지금도 아마 쌓여 있을걸요. 겨울에는 그늘진 곳에는 눈이 녹을 새가 없을 정도입니다.」
「눈이 예쁘긴 한데, 그렇게 계속 내린다면 불편하기도 하겠어요.」
「예, 하지만 워낙 대비도 잘되어 있고, 송갈 사람들은 눈을 좋아하거든요. 눈이 오는 날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미신도 있어서, 눈 내리는 날에는 거리에 사람들이 더 북적거려요. 연인들끼리는 별일이 없는 한 꼭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기도 하고요.」
여상하게 대답하는 보좌관에게 유현진은 진지한 얼굴로, 딴에는 사적인 화제로 친근감이라도 도모해 보려는 양 말했다.
「이럴 때 먼 곳으로 출장을 오셔서 연인분이 아쉬워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제양으로 오기 직전에 헤어졌거든요.」
졸지에 남의 아픈 일을 파헤치게 된 유현진이 당황한 듯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다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고개만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좋은 분 만나실 겁니다.」
「그러면 좋겠네요.」
보좌관이 괜찮다는 듯이 빙긋이 웃었다. 그 부드러운 낯을 보고서야 유현진은 미안한 듯 움츠렸던 입매를 조금 폈다.
“이번에 송갈 왕자의 보좌관으로 온 둘 중에 동성과 관계를 가진다는 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저놈인가?”
냉담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던 현태오가 불쑥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어셋을 켜고 있던 진문성이 곧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통역사님은 얼마 전까지 신관이셨으니 데이트는 해 본 적이 없으시겠네요.」
「아니요, 있습니다.」
“뭐?”
현태오가 짤막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든 말든 유현진은 저 아래에서 평연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인데, 같은 반이었던 여학생이 방과 후에 같이 놀자고 한 적이 있어요. 평소에 별로 친하지 않았던 동급생이라 의아했지만 같이 서점도 가고, 공원에도 가고, 간식도 사 먹고 했는데, 그다음 날 전학을 가서 다시는 보지 못했어요.」
「하하, 꼭 청춘 연애소설 같은 이야기네요.」
「예. 나중에 생각해 보니 데이트가 그런 것 아니었나 싶어요. 같이 맛있는 걸 먹고 같이 어딘가를 다니고 산책하고.」
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그런데,」 하고 말을 이었다.
「굳이 어디를 가지 않아도,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어디서 뭘 하든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데이트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혼잣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린 유현진은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시선을 떨구며 처음으로 약간 겸연쩍은 듯 웃었다.
삭막하던 눈매가, 무뚝뚝하던 입매가 느슨해졌다.
그것은 아주 작은 변화였는데도 그 서늘하던 인상이 놀랄 만큼 바뀌었다.
현태오는 이미 몇 번이나 보았던 변화였지만 그 옆의 보좌관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빤히 유현진을 보던 그는 덩달아 웃음 짓더니 말했다.
「그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유현진의 얼굴이 대번에 다시 딱딱해졌다. 얼음장 같은 낯을 얼른 도로 뒤집어쓰는 그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게 우스웠는지 보좌관이 웃음을 터뜨리며 유현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현진이 당황하기도 하고 겸연쩍기도 한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그리고,
“퇴근해야겠어.”
냉랭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현태오가 별안간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평소의 퇴근 시각보다 한 시간쯤은 이른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의아한 빛을 띤 진문성이었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담당관에게 연락해서 보안 대상의 나머지 일정을 맡아보도록,”
“저들의 일정도 오늘은 끝이야.”
현태오가 코트를 집어 들며 잘라 말했다.
보안 대상―사절단 중 왕자 일행―의 정규 일정이 끝난 뒤에는 기본적으로 현태오 역시 퇴근을 하고 부담당관이 이후 보안을 맡아본다. 부득이하게 현태오가 일찍 자리를 비울 때에는 부담당관이 그 자리를 메우곤 했다.
오늘은 사절단에 특별한 일정이 없었으니 아마도 저 한가로운 산책을 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겠지만, 어찌 되었든 한 시간쯤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태오는 코트를 걸치며 말했다.
“눈까지 오는 추운 날에 귀하신 분들이 밖에 오래 계시다가 건강을 해치면 큰일이니 그만 들어가시라고 해야지.”
보안 총책임자인 현태오가 그렇게 말한다면 저들이야 따를 수밖에 없을 테지만……. 진문성은 당혹스레 현태오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각하께서는 어디로……?”
이유 없이 그냥 조기 퇴근할 남자는 아니다. 뭔가 볼일이 있을 테지만, 부관인 진문성이 까맣게 모를 볼일이 있었다니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곧 당황한 기색을 지우고 어디로든 즉시 연락을 하기 위해 전화를 꺼내는 진문성의 귀에 삭막한 대꾸가 돌아왔다.
“저놈 옷이나 사 입혀야지.”
“예?”
순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진문성이 되묻자, 막 문을 열고 나서던 현태오가 짜증스런 눈길로 흘긋 돌아보았다.
“쓸데없는 소리나 하며 노닥거리는 걸 보니 굳이 통역이라는 업무가 필요할 상황은 아니잖아. 저 꼴로 더 있다간 얼어 죽을 것 같으니 외투라도 하나 입혀 둬야지.”
“……, 아, 예.”
잠시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던 진문성이었지만, 서슴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현태오의 발소리를 듣고서야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고 그 뒤를 따랐다.
*
산상은 현재 인구가 몇만 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도시였으나 그 역사는 웬만한 대도시보다 더욱 오래되었다. 지금은 긴 전쟁 동안 황폐해져 가난한 이들이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중요한 사적 몇몇 군데는 옛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3백여 년 전까지는 송갈의 땅이었던 산상은 송갈과 제양의 역사적인 유적이 둘 다 남아 있어 양국 모두가 중요시하는 곳 중 하나였다.
한창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었던 시기에도 산상으로 참배를 오는 송갈인들이 끊이지 않았으니, 하물며 송갈의 사절단이 제양을 방문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수도에서 멀지도 않은 이곳에 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날 송갈에서 온 사절단 몇몇이 산상을 방문한다고 하자 예상대로 시위대에서는 큰 원성이 터져 나왔다. 송갈과의 전쟁에서 우리 조상들의 피가 흐른 곳인데 그런 곳에 감히 송갈의 후손들이 발을 들이다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주 요지였다. 우리 조상들 또한 그곳에 잠들어 있고 원래는 송갈의 땅이었다는 사절단 측의 주장은 그들 시위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공식적으로 방문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시위대는 이곳에서도 진을 치고 있었다.
산상의 유적지로 가는 하나뿐인 외길을 올라가는 동안 위병들의 호위를 받는 그들의 뒤로 시위대가 꾸준히 따라오며 구호를 외쳐 댔는데 그 기세가 자못 사나웠다.
“오늘은 분위기가 한층 더 험하네.”
“그런가? 그냥 시작이 안 좋아서 그런 것 아냐?”
유현진의 중얼거림에 제상아는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대꾸했다.
늘 어딜 가든 사람들의 환성만 들어 왔을 테니 이런 거친 분위기에 움츠러들 만도 한데 그런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녀를 유현진은 감탄스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시작이 안 좋긴 했다.
높다란 고지대에 있는 유적지로 올라갈 수 있는 길목은 승용차 두 대가 간신히 스쳐 갈 수 있을 만한 폭의 도로 하나였는데, 그들이 도착했을 때 그 길목에는 일찌감치 도착해 있던 시위대의 차량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상황을 보자마자 현태오가 제일 먼저 한 말은 ‘모두 치워.’였다.
그 한마디에 당장 달려온 견인 차량들은 길목에 주차하듯 멈춰 있는 개인 차량들을 거침없이 옮기기 시작했고, 시위대에 있던 차주들이 아우성쳤으나 현태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차주들의 불만 신고를 받고 출동한 담당 공무원이 난처한 낯으로 호소해도 마찬가지였다.
‘이 길은 원칙적으로는 주차가 금지되어 있지만, 근방에 주차장이 없어 통상적으로 차를 대곤 하는 곳으로…….’
‘이 좁은 길에, 이런 날에 말입니까?’
‘저어, 하지만 상부에서 시민들의 이동에 불편이 생기면 안 된다고 지시가 내려와서…….’
‘그 상부가 어딥니까.’
당황해서 어물거리던 담당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개발관리청이라고 합니다.’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고, 현태오는 진문성을 돌아보았다.
‘개발관리청에서 공문 넘어온 거 있나?’
‘어제 오후 5시 58분에 협조 요청 공문이 왔습니다.’
‘하하아. 업무 종료 시간 2분 전까지 기다렸다 보내느라 고생 많았겠군. ――치워.’
담당 공무원의 만류에 따라 그들의 결정을 기다리던 견인 차량들에게 단호하게 지시를 내린 현태오는 울상을 짓는 공무원에게 ‘공문 다시 보내라고 하십시오. 명령 이행 독촉 공문 같은 걸로 보내면 될 겁니다.’라고만 말하곤 진문성에게 ‘안전 방재 차량 대기시켜 둬. 그 앞뒤로 누가 차 대면 그냥 밀어 버리고.’라고 덧붙였다.
거침없는 처치에 곳곳에서 아우성이 일었고 시위대에서도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다.
‘당신들 뭐야, 이렇게 제멋대로 해도 돼?’
시위대 뒤편에 있던 남자들 서넛이 나와서 거칠게 외쳤다. 2미터에 가까워 보이는 덩치 크고 험상궂은 남자들이 고개를 바싹 들이밀며 을러대자 위병들이 다가와 그들을 막아섰다. 삽시에 분위기가 험해진 가운데,
‘문성아, 네가 가서 얘기 좀 나누고 와라.’
현태오의 말에 진문성이 군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쪽에서 따로 긴하게 말씀 좀 나누시죠. 하고 진문성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네자 사내들은 흘끗 서로들 시선을 맞추더니, 뭔가 기대라도 하는 기색으로―여전히 험악한 태도를 철갑처럼 두르고서― 진문성을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현태오는 계속해서 보고가 들어오는지 이어셋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렸고, 기자들이 따라온 듯 곳곳에서 들려오는 카메라 소리에도 돌아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시작부터가 그랬던 마당이니, 분위기가 평소보다 더 험하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상을 방문한 사절단은 크게 위축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미사담과 그 보좌관 둘, 송갈의 사학자 셋과 그들을 돕기 위한 제양 측의 사학자가 둘, 사적에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통역관이 하나, 그리고 그들의 안내를 맡은 제상아와 유현진.
원래부터 간담이 컸던 제상아는 물론이고 그녀의 옆에 선, 이 자리에서 저 악의에 찬 목소리들의 가장 큰 목표물이 됨직한 미사담 역시 시위대들의 외침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초연했다.
그들 뒤를 따르는 사학자들도 길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나타나는 유적들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길목에 이어져 있는 반쯤 무너진 담장을 보면서도 ‘이 조각 양식은 그 시절에 가장 유행했던 바로 그!’, 드문드문 솟아 있는 돌탑들을 보면서도 ‘그 시절 삼층 돌탑의 의미는 이러이러했고 오층 돌탑을 쌓는 건 이러이러한 뜻이고!’ 하고 흥분해 떠들기 바빴다. 그들을 위해 사학에 정통한 통역까지 따라붙었는데, 모두 열렬히 유적들을 살피며 토론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도 없어 보였다.
왠지 오늘은 통역할 일도 없이 공돈 받는 기분인데…….
유현진은 한가로이 그들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그나마 그의 몫으로 보좌관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들도 원래 그렇게 말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보좌관을 쳐다본 유현진은 이 추운 날씨에도 그의 콧잔등에 땀이 맺혀 있는 걸 보곤 의아하게 물었다.
「더우십니까?」
「아, 조금요. 송갈은 워낙 제양보다 기온이 낮으니 그러잖아도 별로 춥지 않은데, 방열 코트까지 껴입으니 좀 덥네요. ……그냥 들고 가면 안 되나.」
보좌관은 산상으로 출발할 때 보안 위병에게서 나눠 받은 방열 코트를 펄럭였다.
확실히 재질이나 두께감이 있긴 했지만 워낙 추운 날씨이다 보니 덥지는 않은데, 하고 유현진이 자신의 방열 코트를 내려다보는 사이 보좌관이 방열 코트의 단추를 풀었다.
그때,
『방열복 벗으시면 안 됩니다.』
귓가에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귀에 낀 이어셋에서 들려온 소리는 그 보좌관을 향한 것이었는데, 이어셋을 끼고 있는 모두―사절단 일행 전원―에게 들리는 소리라 사람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막 방열 코트를 벗으려던 보좌관은 머쓱해하며 도로 옷깃을 여몄다.
유현진은 낯익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수십 걸음 뒤에서 현태오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느 틈에 돌아왔는지 현태오의 옆에 나란히 선 진문성―옷깃에 뭔가 검붉은 얼룩이 군데군데 튀어 있는 듯했지만 그 본인은 멀쩡해 보였다―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빈틈없이 주위를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개인 통신으로 말씀하시면 좋을 걸 굳이 공용 통신으로……, 민망하네요.」
보좌관이 겸연쩍게 웃었다. 유현진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귀에 꽂은 이어셋을 만지작거렸다.
쌍방향으로도 통신이 가능하고 선택적으로도 통신이 가능하지만, 통제는 메인 기기―현태오 측―에서만 할 수 있었다. 저쪽에서는 이쪽으로 말할 수도, 이쪽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이쪽에서는 저쪽에서 허용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니 아마 보좌관의 저 한숨 섞인 투덜거림도 들었을 테지만 신경도 안 쓰는 듯 아무 반응도 없었다. ……라고 생각했을 때,
『뒤에 처지지 말고 얼른 가십시오. 정혜궁마마 가까이에 있으라고 했잖습니까.』
귓가에서 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이건 개인 통신인 모양이다.
유현진은 희미하게 움찔했지만 못 들은 척, 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빨리하지도 않았다.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체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현태오에게 말을 거는지 통신 신호음이 다시 끊긴다.
현태오는 아침부터 바빠 보였다. 가깝다고는 해도 수도 바깥으로 나가다 보니 방비할 것이 많은 듯 쉴 새 없이 보고가 들어오는 듯했다. 그런 그가 유현진에게 말을 붙인 건 딱 한 번, 산상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눠 받은 방열 코트를 들고 차에 타려고 할 때였다. ‘오늘은 계속 정혜궁마마 곁에 붙어 있어요.’라고, 딱 그 말만 하자마자 다시 누군가 불러서 가 버렸다.
“…….”
오늘 이렇게 분위기가 험할 줄 예상한 건가. 실제로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것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 보호를 받을 제상아의 곁일 터였다.
하지만…….
유현진은 저만치 앞서가는 제상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미사담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왠지 그 곁으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유현진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녀와 알고 지내 온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저렇게 부드럽고 솔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는.
게다가 무엇보다도 미사담과 제상아는 의외로 걸음이 빨랐다. 이 오르막길을 어렵잖게 성큼성큼 올라가고 있었는데, 현재 유현진은 그렇게 빨리 걸을 상황이 못 되었다.
고관절 쪽이 욱신거리고 저려서 걸음을 서두르면 절뚝이고 말 터였다. 지금처럼 느리게 걸어야 티 내지 않고 평범하게 걸을 수 있다. 발목을 호되게 삐어서 그런 걸로 해 두긴 했지만 되도록이면 아픈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현태오에게서 옮겨 온 통증은 생각보다 심했다. 지금은 거의 낫고 재활을 하는 중이라고 해서 살짝 욱신거리고 말 줄 알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뼛속이 쿡쿡 쑤셨다.
이렇게 아픈데 저 남자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잘 다녔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상처를 다 받아 온 것도 아니고 반 정도밖에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 말인즉슨 지금 저 남자 역시 유현진과 비슷한 정도로 통증을 느낀다는 뜻일 텐데…….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였다. 심지어 지금은 오르막을 오르는데 지팡이마저 장식품인 양 아무렇잖게 선뜻선뜻 걷고 있었다.
“…….”
“…….”
눈이 마주쳐 버렸다.
진문성에게 무어라 말을 하던 현태오는 유현진과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는 듯한 그 시선을 마주보기 무섭게 유현진은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뛰었다. 얼굴까지 더워지는 기분이 들어 손부채질을 하는 유현진을 보고 보좌관이 웃었다.
「통역사님도 더우신가 봐요.」
「예, 아, 아니, ……예, 좀…….」
유현진은 짐짓 낯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얼굴이 엉망으로 흐트러질 것 같았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지만 마음이 더웠다. 머릿속도.
도무지 현태오를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저렇게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눈길은 더욱.
머릿속에서 그 눈길이 얼마 전과 겹쳐지는 탓이다. 소파에 느른하게 누운 채로 유현진을 구석구석 쳐다보던 그 뚫어질 듯한 시선과.
‘왜 그러십니까?’
그렇게 묻는 현태오의 입매가 비뚤게 올라가 있었다. 그제야 유현진은 자신이 멀거니 눈을 껌벅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아직도 자신의 손이 그의 부풀어 오른 국부에 닿아 있다는 것도.
하나람님.
‘……, ……실례했습니다.’
유현진은 말이 막힌 목구멍을 겨우 비집어 열어 그 말만 하고는 손을 거두었다.
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어 있던 상처를 매만져 자신에게로 끌어내느라 집중한 탓에, 자신의 손등이 현태오의 국부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어느 샌지 그곳이 눈에 띄게 두툼하게 일어섰다는 것도.
그 사실을 의식하기 무섭게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계속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연한 낯으로 말하던 현태오는, 유현진의 무뚝뚝한 대답을 듣자 잠시 침묵하다 입매를 틀어 올렸다.
‘왜요. 제가 발기해서요?’
‘――.’
‘치료나 안마를 하다 보면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느릿하게 말하는 현태오는, 서 있는 아랫도리와는 전혀 딴판으로 얼굴도 말투도 평소와 똑같았다. 그러나 눈길만큼은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유현진의 얼굴에 못박여 있었다.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있고 싶지는 않은 일이라서요.’
유현진은 미칠 듯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안간힘 쓰느라 눈살을 찌푸리고 표정을 구기며 대꾸했다.
그런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현태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살짝 일그러지는가 싶던 입매가 이내 피식, 헛웃음을 뱉어냈다.
‘이미 할 것 다 한 사이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한데요. 앞으로 두고두고 해야 할 텐데, 겨우 이 정도로 그렇게 불편해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앞으론 손만이 아니라 더 민감한 데로도 받으셔야 할 텐데, 느리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유현진은 석상처럼 굳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파스슥 부서져 먼지가 되어 버릴 것 같다.
눈만 마주친 채 삭막한 낯으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유현진을 지그시 보고 있던 현태오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바지 위로 불룩 솟아오른 자신의 성기를 툭툭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 좋습니다. 천천히 익숙해지기로 했으니까요.’
현태오가 손을 내밀었다. 유현진은 멈칫했다. 이제는 습관인 양 잡을 수 있던 손인데 어쩐지 선뜻 잡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은 순간, 그가 다른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유현진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낯익은 체온과 낯익은 체취가 훅 끼쳐 왔다.
별안간 유현진은 낯이 확 달아올랐다.
유난히 명확하게 닿아 오는 체온과 체취가 막연하던 감각을 걷어 내 버리며 현실로 닥쳐왔다. 그것은 성감과 몹시도 닮아 있어,
‘――.’
자신의 표정이 흐무러져 버린다고 생각한 찰나,
갑자기 현태오가 뿌리치듯이 손을 놓았다. 손도, 얼굴도 놓아 버린 그는 소파에서 훌쩍 몸을 일으켰다.
‘늦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지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인사말만 남기고 서슴없이 돌아선 그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유현진이 배웅하러 나갈 틈도 없었다.
화라도 났나. 아니면,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았지만 당황하기라도 했나. 혹은 눈치챈 걸까.
대관절 자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
유현진은 무심결에 다시 돌아보려다가 그 직전에 얼른 멈추고 다시 앞을 보았다.
안 되지, 안 돼.
밤새 잠을 설쳐가며 고민하다가 그다음 날 마주쳤을 때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는 현태오를 보고 안도했다. 그에겐 그냥 평소와 살짝 결이 다른 농담이었을 뿐이지 조금도 미묘한 뉘앙스의 말이 아니었던 거다.
그러면, 혼자 계속 신경 쓰면서 흘끔거리면 외려 역효과다. 가능한 한 보지 말아야지. 웃지도 말아야지. 말도 웬만하면 걸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제 치료도 그만해야겠다. 상처를 더 옮겨 왔다간 통증을 티 안 낼 수가 없을 성싶었고, 무엇보다 더 이상은 그의 다리를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굴만 봐도 머릿속이 더워지는데 하물며 만지기라도 했다간 뇌가 익어 버릴 거야…….
유현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때 옆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자 보좌관이 눈매를 접고서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니, 통역사님은 말이죠,」 하고 말했다.
「평소엔 좀 무표정하고 냉담해 보여서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인데, 가만히 보다 보면 표정이 은근하게 잘 바뀐단 말이에요. 가끔 뭘 생각하시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 제가요?」
「예. 언제 한번 천천히 앉아서 얘기하면서 탐구해 보고 싶,」
『일행들 간격이 너무 떨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후미 쪽 분들은 더 서둘러 주십시오.』
이어셋에서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층 서늘해진 음색이었다. 보일 듯 말 듯 멈칫하는 유현진의 옆에서 무심코 뒤를 돌아본 보좌관이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좀 천천히 갈 수도 있지 뭘 저렇게 험하게,」
보좌관이 중얼거리던 때, 마침 저 앞에 가던 다른 보좌관이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유현진의 옆에 선 이를 불렀다. 그는 무어라 투덜거리곤 유현진에게 가볍게 고개를 꾸벅한 뒤 동료를 향해 뛰어갔다.
유현진은 되도록 빨리 걸으려 하며―그래 봐야 평소 걸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오르막을 올랐다. 뒤처져 있는 게 못마땅한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별다른 말이 더 들려오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오르막이 끝나고 산상의 주요 유적지에 도착했다.
옛 성터와 고분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산 중턱의 평지에 이르기 무섭게 사학자들이 눈을 번쩍이며 제일 먼저 움직였다.
드문드문 남아 있는 건축물의 흔적에―지금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반인의 눈으로는 뭐가 뭔지 분간도 안 갈 돌 더미들에― 달라붙어 눈을 반짝이는 그들의 근처로, 제상아와 미사담도 주의 깊게 유적들을 살피며 돌아본다.
무너진 돌무덤 사이를 메우며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이 누렇게 말라 버석거리고 있었다. 수백 년 전에는 이 황량한 곳에 성채가 있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숱한 피가 흘렀던 곳이다. 결국은 이렇게 영락해 버리고 말 것을.
유현진은 부스스 부서진 돌담을 가만히 손으로 짚으며 조용한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입김이 부옇게 흐려지다 사라졌다.
고적한 정취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절단들의 뒤를 쫓다시피 따라온 시위대들이 왁자하게 구호를 떠들어 댔다. 사절단을 감싸듯 둘러싼 위병들을 포위하듯 에워싼 시위대의 기색이 자못 험했다.
유현진은 불안스레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태 외부로 나온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시위대들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보다 더 험악하고 공격적인 분위기다. 그 탓인지 멀찍이 떨어져 선 현태오에게 뭔가 보고가 잦은 것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좀 더 행복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맞이했더라면 좋을 날인데.
유현진이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쉬던 때, 문득 길 아래쪽에서 한 떼의 기척이 수런거리며 올라왔다. 사람들이 구물구물 길을 비켜 주는 가운데로 한 무리가 나타났다. 기자가 여럿 섞였는지 간간이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는 그 무리의 제일 앞에는 계연군이 걷고 있었다.
송갈과의 화친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의원으로 꼽히는 그는 근래에는 종종 시위대를 찾아 그들을 격려하며 뜻을 함께하는 걸로 매체에 실리곤 했다.
그러니 그가 이곳에 모습을 보인 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유현진은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리며 눈에 띄지 않는 데로 슬그머니 물러섰다. 불편한 마음이 솟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그리 호감이 가는 인물도 아니었거니와 얼마 전 신전에서 껄끄럽게 맞닥뜨렸던 일에 더해, 바로 지난주에도 썩 유쾌하지 못하게 마주치고 말았다.
지난 주말, 유현진은 통역 업무 관련으로 서류를 제출해야 할 게 있어 점심시간 이후에 외무관리청에 들렀다가 다시 정혜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심때 잠깐 시간이 난 틈에 미사담과 함께 궁궐 지척에 있는 서책방에 갔다 오겠다고 한 제상아에게 자신의 우산을 들려 보낸 탓에 빈손이었던 유현진은 후다닥 뛰어 정혜궁으로 돌아갔는데, 그때 이미 계연군은 대청에 앉아 제상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약속해 둔 방문은 아니었다.
‘오, 유현진 통역사로군. 잘 지냈는가?’
계연군은 유현진을 보자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다.
바깥이었더라면 본 체도 않았을 테지만 정혜궁 안에서는 늘 사람 좋은 듯이 행세하는 계연군이었다.
신전에서 껄끄럽게 마주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잊어버린 건지 잊어버린 척하는 건지, 어쨌든 넉살은 좋다.
반듯이 고개 숙여 인사한 유현진은 그가 거북했지만 아직 궁의 주인이 돌아오지 않아 하릴없이 그와 나란히 앉았다.
너그러운 윗사람의 얼굴을 하고는 안부 인사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따위를 약간 늘어놓던 계연군이 ‘헌데,’ 하고 은근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상아랑 오래 알고 지냈지. 자네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얼굴은 봐 왔던 것 같은데.’
그렇다. 제법 오래전부터, 계연군은 유현진이 제상아와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내곤 했었다.
계연군은 오래전부터 제상아를 좋아했다.
그녀는 그가 권력 욕심이 나 그런 거라고 했지만, 유현진이 보기에는 그는 어릴 때부터 제상아만 보면 낯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했다.
왕궁에 연회가 있어 모일 때면 짐짓 체면치레하느라 멀찍이 서 있다가도 제상아가 자리를 옮기면 슬그머니 자기도 그 근처로 가서 어정대고, 그녀가 뭘 찾는다 싶으면 남몰래 시종을 닦달해 얼른 챙겨 주라고 성화를 부리곤 했다.
가끔 제상아가 유현진을 데리고 국립 극장에 갔다가 그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는 마주친 것만으로도 헤벌쭉하게 웃으며 좋아 어쩔 줄 모르면서 한편으로 유현진에게는 질투 어린 눈길을 던졌다.
그땐 이미 제가 미워하는 놈이 정혼자로 붙어 있는 상태였는데도 그랬으니, 나름대로 오래도록 이어진 순애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 이번에 현태오와 제상아의 정혼이 깨진 뒤로는 갑자기 기세가 붙어 뻔질나게 정혜궁에 전갈을 넣으며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오려 들었는데, 딱 그 찰나에 제상아가 사절단의 안내를 맡으면서 바쁘다고 거절하자 평일에는 차마 못 오고 주말이나 쉬는 날에 얼씬거리곤 했다.
그래본들 차 한잔쯤 마시면 제상아는 적당한 핑계로―피곤해서 낮잠을 자야겠다거나, 아까 보다 만 책을 봐야겠다거나― 그를 쫓아내곤 했는데도, 고작 이삼십 분 보겠다고 그는 먼 길을 마다 않고 꾸준히도 찾아왔다.
저렇게 좋을까……, 비록 저 남자가 간간이 보여 주는 그 희번덕거리고 선뜩한 시선 때문에 도통 호감이 가지는 않았지만, 제상아를 어지간히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보아라, 어릴 때부터 상아는 예뻤다는 둥, 성품도 고상했다는 둥,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둥 온갖 찬사를 다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 헌데 말이지, 자네는 상아랑 친하고, 또 상아가 자네 말은 은근히 귀담아듣는 것 같더란 말이야.’
별안간 찬사를 뚝 그친 계연군이 곁눈으로 유현진을 보았다.
‘이번에 참으로 안타깝게도 정혼이 파담 나 버렸으니, 이번에야말로 상아가 그 아이를 정말로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를 잘 만나야지. 그런데 상처가 깊었는지 그 아이가 마음을 닫고 있는 듯해. 아무래도 내가 좀 자주 만나면서 위로도 해 주고 좋은 벗이 되어 주어야겠는데……, 자네가 요즘 그 아이와 자주 함께 있으니, 그 아이가 어딜 간다거나 뭘 하려 든다거나 어디에 관심이 생긴다거나 그런 걸 알게 되면 내게 귀띔을 좀 해 주었으면 한단 말이야. 자네도 친구가 어서 마음 열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지 않겠나, 응?’
자못 다정하게 속살거리던 계연군의 음색이 한층 은근해졌다.
‘그래, 날 도와준다면…… 나 또한 자네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겠나. 살기 편안한 거처로 옮겨 줄 수도 있고, 어디 편한 자리 하나 내줄 수도 있고,’
‘저는 정혜궁마마가,’
유현진은 더 듣고 싶지 않아 말을 잘랐지만 한편 끈질기게 구애하는 이 남자가 안쓰럽기도 하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선뜻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응? 상아가, 뭐?’
‘……, 그분이 이번에야말로 본인이 원하는 이를 배필로 삼아 살면 좋겠습니다. 그분이 원한다면 그게 누구라도 저는 온 힘을 다해 도울 것이고, 그분이 원치 않는다면 결코 거들지 않을 것입니다.’
계연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듯.
‘자네,’
기괴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막 말을 하려던 차, 담장 밖에서 인기척이 다가왔다. 말다툼이라도 하는지 토닥거리는 작은 소리가 담장을 돌아 정혜궁 문 안으로 들어온다.
곧이어 비를 피해 한 우산을 쓰고 들어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보세요, 우산이 이렇게 작잖아요. 저 혼자 써도 부족할 판인데 미사담 님이 양보하셨어야지, 기어이 같이 쓰시다니요?’
‘하하, 나라 간에 사이가 좋아지자면 먼저 개인도 사이가 좋아야지요. 어찌 고난을 혼자 피하려 하십니까? 자, 이제 다 왔습니다.’
담장으로 들어서 회랑에서 우산 접는 이는 미사담이었다. 그러곤 손수건을 꺼내더니 반 이상 젖은 저는 아랑곳 않고 그 옆에 붙어 선 제상아의 얼굴을 꼭꼭 눌러 닦아 준다. 말없이 그 손길을 받던 제상아는 그의 흠뻑 젖은 어깻죽지로 시선을 떨구더니, 그의 옷자락 끝에 맺혀 떨어지는 물방울을 톡톡 털어 준다.
이 미묘한――따뜻하고도 느슨한 공기. 둘은 말 없는 가운데 당연한 듯이 서로를 돌봐 주고 있었는데, 그것은 어색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다.
제상아의 목소리를 듣고 낯을 활짝 펴며 돌아보던 계연군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점차 딱딱해지는 낯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들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를 제상아가 한발 늦게 발견하고는 ‘어머, 오라버니가 오셨군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미사담 또한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계연군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미사담을 노려보았을 뿐이다.
미사담은 의아한 눈치였으나 별달리 반응하지 않고, 곱게 접은 우산을 유현진에게 내밀었다.
‘빌려주신 덕분에 함께 잘 쓰고 왔습니다.’
‘아, 예. 우산이 작아서 큰 도움은 못 되어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게 외려 좋았을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미사담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옷을 갈아입고 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계연군이 유현진을 섬뜩한 시선으로 쳐다본 것은 그다음이었다.
적을 돕는 자를 보는 듯한 눈길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회유하려 애쓰던 자이다 보니 더더욱 비위가 상했는지, 뒤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싹 바뀐 낯으로 유현진을 노려보던 계연군이 제상아를 보았다.
‘내가 차를 한잔 마시고 가려고, 지나가다 들렀는데…….’
여전히 편치 않은 기색이나마 그래도 제상아에게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한 계연군이었으나,
‘그러셨어요? 그러면 서둘러야겠네요. 두 시에 외무청감이 오기로 해서 길게는 못 계실 터라서요.’
두 시면 삼십 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입을 꾹 다문 계연군은 잠시 침묵하다 ‘그럼 다음에 다시 오마.’, 딱딱하게 말하곤 걸음을 휙 돌려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그를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산상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한 무리의 사람들과 더불어 다가오고 있는 계연군은 오만한 기색으로 웃으며 주위를 아우르고 있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계연군이 저만치 서 있는 제상아를 보고 눈을 빛냈다. 그 옆에 나란히 선 미사담을 보고는 일순 얼굴에서 미소를 싹 걷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낯으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당장 저들에게 다가설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바른 일 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러분 같은 분들이야말로 우리 제양을 지키는 분들입니다.”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시위대들을 향해 말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계연군에게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그 사이사이 셔터 소리가 터진다.
시찰이라도 나온 양 주위를 두루 둘러보던 계연군이 현태오와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잠깐 멈칫한 계연군은 이내 턱을 치켜들고 다가섰다.
“현 총독 아닌가?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
사뭇 친근한 듯이 다가선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 맞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송갈 사절단의 보안을 맡고 있다지. 참 얄궂은 일이 아닌가. 전장을 누비며 송갈인들을 휩쓸었던 자네가 지금은 그들의 뒤나 돌봐 주는 처지라니.”
은근한 비아냥을 섞어 가느스름한 눈을 빛내며 상대를 살피는 계연군을, 현태오는 무표정히 내려다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이 그저 지루한 듯 “예에.” 하고 건성으로 대꾸하자 계연군은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웃음을 지웠다.
못마땅하게 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그는 자신이 올라온 방향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헌데, 시민들의 차량을 강제로 견인했다지? 시위가 불법도 아닌데 이 자유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에게 불편을 주면 어찌하나? 자네가 아무리 송갈의 보안을 맡았다 한들 저들이 우리 국민보다 중요하다는 건가?”
현태오의 고개가 아주 약간 기울었다. 하찮은 것을 앞두었다는 눈길을 감추지도 않고 계연군을 내려다보던 그는, 점점 낯이 사나워지던 계연군이 막 입을 열려 했을 때에야 툭 내뱉었다.
“의원님 눈에는 지금 이곳에 송갈인 머릿수가 더 많아 보입니까, 제양인 머릿수가 더 많아 보입니까?”
“뭐?”
“누구를 위한 보안인지 잘 생각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구겨진 얼굴로 입을 다무는가 싶던 계연군은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헌데 듣기로는 그 과정에서 개개인에 대한 폭력도 있었다 하던데?”
현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를 대신해 그 옆에 서 있던 진문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지지하는 몇몇이 있어 불가피한 무력 사용이 다소 있긴 했습니다만, 의원님께서 아시는 사람들이었습니까?”
“내 아는 사람이라니! 국민이 공권력에 부당하게 밀려서야 안 될 일인데 그런 얘기가 들리니 묻는 거지!”
“부당했는지 조사 중입니다. 무슨 의도로 그리되었는지, 그들이 그리 나온 데에 다른 연유는 없는지 상세히 조사한 뒤 알려 드리겠습니다.”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이는 계연군에게 진문성이 빙긋이 웃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계연군이 진문성에게 눈을 부라리며 무어라 외치려던 때, 그 옆에 서 있던 비서관이 만류했다. 무어라 소곤소곤 타이르는 비서관의 말을 들으며 현태오와 진문성에게 눈을 희번덕거리던 계연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입씨름을 하러 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상황을 살피듯 주위를 훑어본 그는 신경질적으로 옷깃을 한번 털어내고는 억지로 한풀 가라앉힌 목소리로 현태오에게 말했다.
“자네는 몸도 불편하다면서 여기까지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군. 그러잖아도 바쁠 텐데 말이야. 언제 내가 한번 밥이라도 삼세.”
짐짓 너그러이 건네는 그 말이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현태오는 사절단 쪽을 바라보며 계연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계연군의 낯이 어두워졌다.
“의원님이야말로 여러 일로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내가 언제 네놈에게 말했더냐? 어딜 윗사람 얘기에 함부로 끼어들어!”
부드럽게 말을 받으려 하던 진문성에게 계연군이 눈을 부라렸다. 진문성은 “실례했습니다.”라고 담담히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계연군은 언제까지 모른 체하나 어디 한번 보자는 듯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노골적으로 현태오를 노려보았다. 사절단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현태오는 그제야 무심히 계연군을 보았다.
“의원님도 저도 피차 바쁜 마당에 굳이 밥씩이나 사실 필요 있겠습니까.”
“지금 자네가 내 말을 그리 함부로,”
“안 그래도 바쁜데 개나 소나 겸상하고 있을 여유도 없습니다.”
계연군의 얼굴이 삽시에 굳었다. 악다문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개나 소나 겸상은 안 하겠지.”
부릅뜬 눈으로 현태오를 쏘아보던 그가 잇새로 내뱉었다. 악문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개나 소나 붙어먹을 수는 있어도, 겸상은 안 하겠지, 아무렴. 그 대단하신 총독 각하가 사내놈이랑 붙어는 먹어도, 어디 함부로 겸상이야 하시겠나.”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현태오를 쳐다보며 바싹 다가선 계연군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그래, 아무리 바빠도 장래 마나님이 저기 계신데 지키러 와야지, 안 그런가? 나는 또, 자네답지 않은 실수를 해서 명문 현가에 사내 며느리를 들이게 됐다니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가 했는데, 요즘 매일같이 그 집에 드나들며 사이좋다면서. 자네가 정말로 저 천한 송갈 놈들이나 하는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억누른 목소리가 비아냥거렸다. 이렇게 사람들 많은 데서―기자들도 숱한 데서― 네가 어쩔 테냐, 하는 듯 계연군이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현태오는 어렴풋이 피식, 입 끝만 올렸을 뿐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이마에 핏대를 세운 계연군이 반발짝 더 다가섰다.
“사내놈이랑 자면 어떤 기분이야? 자네쯤 되는 이가 정신 못 차릴 만큼 좋은가? 그래, 저 사제님이, 아니 이젠 사제도 뭣도 아니지, 저놈 아랫도리가 그렇게 좋았나 보지?”
현태오의 서늘한 시선이 닿았다. 계연군이 눈을 번들거리며 멀리 유현진 쪽으로 눈짓을 했다.
“보기에는 수수하니 별것 없어 보이는데, 뜻밖에 살맛이 기가 막혔나 봐. 그래, 다시 보니 보들보들하니 맛깔나게 잘 울 것 같,”
“요즘 갯값은 얼마쯤 하는지 다시 알아보러 왔습니까?”
현태오가 느릿하게 말했다.
평연한 듯하나 얼음처럼 서늘한 음색에 계연군이 일순 흠칫했다. 그러나 곧 그런 스스로를 떨쳐 내듯 곧바로 눈을 치뜨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이놈이……,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나 알아?”
계속 속살거리던 계연군이 별안간 소리를 높이자 시선이 몰렸다. 그가 데려온 기자들의 눈길도 함께 몰린다. 호기심 어린 손길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그들 사이에서, 계연군은 현태오가 침묵하자 한층 기세가 올랐는지 삿대질을 해 댔다.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 꿰찼다고 위아래도 모르나? 현가가 아무리 명문이라 해도 왕실보다 위에 있지는 않아! 왕실의 종복이란 말이다!”
현태오의 코끝에 대고 흔들어 대던 검지를, 현태오가 지그시 움켜쥐었다.
“앞발 그렇게 함부로 놀리다간 부러집니다, 의원님.”
나직이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쥔 손에 현태오가 꾸욱 힘을 넣은 순간 계연군의 낯이 새파래졌다. 화들짝하며 뿌리치려 했지만 뿌리쳐지지 않는다. 손가락이 기괴한 방향으로 휘며 으득,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하, 하지……!”
사색이 되어 외친 순간, 현태오가 손을 놓으며 피식 웃었다.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화급히 움켜쥔 계연군은 그 웃음을 본 순간 낯을 더럭 굳혔다.
“누가 보면 모가지라도 부러질 뻔한 줄 알겠습니다.”
“――네놈 모가지는 언제까지고 무사할 것 같으냐?”
“부러뜨려 보시든가요. 하실 수 있으면. 안 말립니다.”
현태오가 눈앞의 남자에게는 흥미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사절단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하고 무심히 덧붙일 때에야 곁눈질하는 눈길이 계연군을 향했다.
“실패하면 의원님 목은 틀림없이 부러집니다.”
“……!”
평연하지만 농담도 빈말도 아니다.
소름이 끼친 듯 낯이 퍼레진 계연군이 부들거리는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때, 별안간 사절단 쪽에서 소요가 일었다.
사절단 일행이 고분 앞에 이르러 있었다.
고분이라고는 해도 집채만큼 큰 투박한 바위가 하나 놓여 있을 뿐 그 앞에는 비석도 무엇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산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유적이었다.
3백 년 전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장수들이 묻힌 무덤이다. 천지가 피와 비명으로 물들어 누군가의 죽음을 차분히 기릴 여유조차 없었던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무덤을 팔 수도 없어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그들의 시체를 한꺼번에 묻었다.
송갈에서 전해지는 기록에는 그것이 송갈의 장수들이라고 했지만, 현재 산상은 제양의 땅이었고 그곳에 묻힌 자들은 공식적으로 제양의 장수들이었다.
지금도 매년 건국절이면 방송 매체에서 꼭 보여 주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잠든 곳이다.
바로 그 바위 앞에 송갈의 왕자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원수의 자손은 우리 제양의 넋이 잠든 곳에 다가가지 마라!”
한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나서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위병 두엇이 재빨리 다가가 가로막았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여기저기서 “옳다! 원수는 썩 물러가라!”,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들이 발을 들이느냐!” 하고 외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현태오와 계연군 쪽을 불안스레 보고 있던 유현진은 그 소란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았다. 어느새 시위대들이 거대한 반원을 그리고 사절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위병들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하나 분위기가 위태위태했다.
시선을 돌리자 계연군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살피며 옆 사람과 무어라 귀엣말을 나누고 있었고, 현태오는 별 반응이 없었다. 마치 예상된 일이라도 보는 것처럼 아무 동요도 없다.
그때, 눈동자만으로 상황을 둘러보던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시선이 멈춘다.
그 순간 유현진은 긴장으로 차오르던 마음이 느슨하게 가라앉았다. 별안간 든든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여전히 분위기는 험악했고 사람들의 고함과 야유가 들려오고 있었음에도, 저 남자가 저기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깨를 편안히 떨구며 숨을 내쉬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기묘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혀를 차는가 싶었다.
『정혜궁마마 곁으로 가십시오. 어서.』
아, 그렇다.
이런 때야말로 그녀를 가장 곁에서 지켜 주고 위험에서 막아 줄 인물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지.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
비록 그는 위병을 사이에 두고 시위대의 맞은편에 있긴 했지만, 이쪽에도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들을 헤치고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위병들 사이를 헤집고 나아간 유현진은 제상아의 곁에 다다랐다. 자칫 일이라도 터지면 그녀의 앞을 막아서기 좋은 위치에 비스듬히 섰을 때,
『옆에 붙어 있으랬지 누가 앞을 막아 서랬습니까. 쓸데없이 나설 생각 말고 본인 몸이나 간수하십시오.』
혀 차는 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지시했다. 유현진은 얼결에 현태오 쪽을 보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군중들이 설마하니 제상아를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어떤 위험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사소한 위해라도 입어서는 안 된다.
미간에 주름을 그은 현태오가 막 다시 이어셋 마이크를 입가로 당겼을 때, 별안간 큰 소리가 났다.
사절단 쪽으로 달려들던 한 사내가 몸으로 막아서는 위병에게 부딪쳐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람들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친 야유가 한층 더 커졌을 때, 계연군의 옆에 있던 남자가 한 걸음 나서며 “제양의 국민을 다치게 하지 마라!” 하고 외쳤다.
동조하는 소리들이 뒤따랐고, 그 근처에 서성이던 기자들 몇이 계연군에게 다가갔다. 계연군이 점잖은 낯으로 “저들이 임무를 다해야 하는 것은 이해하나 송갈인을 보호하기 위해 제양인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몇 차례 터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군중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와 고함 소리가 점점 높아지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때, 어디선가 돌이 날아갔다.
송갈의 왕자 미사담의 바로 곁을 스친 돌이 고분 바위에 딱하고 부딪혔다 떨어졌다. 돌을 던진 자는 금세 군중 속으로 숨어 버렸다.
조금 전부터 차분히 지켜보고 있던 제상아가 그것을 보고는 눈을 치뜨더니 앞으로 나섰다. 유현진을 밀치고 한 걸음 내디디는 그녀를 가로막은 것은 미사담 본인이었다.
제상아를 가만히 뒤로 밀어낸 미사담이 군중을 향해 돌아섰다.
“이곳 산상을 오래도록 이토록 훌륭히 보전해 주신 제양에 감사를 드립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렸다. 일순 술렁임이 수그러들었다.
거친 군중들 앞에서 움츠러든 기색도 없이 그들을 마주한 미사담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산상은 제양의 유서 깊은 유적지인 동시에 송갈의 소중한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는 우리 두 나라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입니다.”
금세라도 위병들을 밀치고 달려들듯이 몰려 있는 사람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는 미사담의 부드럽고도 힘 있는 목소리가 차차 조용해지는 이들 속으로 번져 갔다.
“제양과 송갈은 일방적인 가해와 피해가 되풀이되었던 다른 이웃한 나라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오래도록 국경을 사이에 두고 각자 번영과 쇠퇴 속에서 다툼을 계속해 왔습니다. 어느 때에는 제양이, 어느 때에는 송갈이 상대를 짓누르고 억압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분노도 원망도 없이, 진실을 담은 목소리가 담담히 울렸다.
“요 백여 년 남짓은 계속 우리 송갈이 제양에 뒤처졌습니다. 영토를 넘겨주고, 더 많은 목숨을 잃고, 더 많은 재물을 빼앗겼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송갈이 설욕을 할 차례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복수를 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뒤에 다시 복수를 받아야 할까요? 언제까지 그래야 합니까? 수백 년, 수천 년? 언제가 되어야 이 불행한 고리를 끊을 수 있습니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그 당당한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씁쓸함과 아쉬움, 그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분노와 안타까움이 배어났다. 그의 뒤에 선 몇 안 되는―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송갈인들의 표정에도,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제양의 공주와 그녀를 따르고 있던 몇몇 제양인들의 낯에도.
“우리는 서로 많은 고통과 원한을 쌓아 왔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 때문에 내 형제와 가족과 이웃, 나아가 내 아들딸들의 무익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송갈은 제양과 더불어 평화로운 번영의 시대를 열어 가고 싶습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간간이 술렁이는 소리들이 있었으나 조금 전과는 다르다. 눈치라도 보듯 아무도 선뜻 무어라 말하지 못한다.
미사담이 제상아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제상아가 어렴풋이 웃는다. 그 웃음을 보고 왕자 역시 흔흔히 웃었다.
팽팽하게 죄어 있던 공기가 느슨해지는 듯하던, 그때.
별안간 누군가 더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봐야 송갈 놈들이다! 믿을 수 없는 놈들이야, 속으면 안 돼!”
그렇게 고함치며 멀리서 돌을 던졌다. 비록 그들의 발치에도 닿지 못하고 떨어지고 말았지만, 다른 쪽에서 “맞다! 송갈 놈들의 교묘한 말에 넘어가지 마!”라고 맞받는 소리가 돌과 함께 날아들었다.
그 외침이 신호라도 되듯 군중의 앞쪽으로 서 있던 사내들 몇이 사절단 쪽으로 달려들었다.
위병들이 서둘러 막아섰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아우성을 치며 밀려드는 힘에 위병들이 몇 걸음 밀리고 만다.
선두에 선 사내들과 위병들이 엎치락뒤치락했다. 고함 소리가 커진다.
『오늘 일정은 중지입니다. 속히 차로 귀환합니다.』
그때 사절단 일행의 이어셋으로 현태오의 지시가 떨어졌다.
동시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특수위병대가 사절단을 재차 둘러싸며 그들의 퇴각로를 열었다. 뒤쪽으로도 시위대들이 빙 둘러싸 좁게나마 길을 내기가 여의치 않았지만, 특위병들은 다소 느리긴 해도 착실하게 진로를 확보해 갔다.
왕자를 둘러싸고 긴장하는 눈치였던 송갈의 보좌관들은 안도한 듯 미사담과 제상아를 앞세웠다. 왕자가 웅변을 하는 와중에 얼마간 거리가 떨어졌었던 유현진은 다시 제상아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는데, 고작 몇 걸음의 거리인데도 사람들의 격렬한 소요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상하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주동하는 사람들 몇몇이 있는 것처럼, 소요가 가라앉을 만하면 반드시 어디선가 험악한 고함 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유현진이 제상아의 곁으로 가려 애쓰면서 사람들을 둘러보던 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현태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벽이 두터워 계속해서 앞이 막히는데도 저 전차 같은 사내는 그들을 거침없이 가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필경 이쪽의 귀한 이들―송갈과 제양의 왕족들―을 위해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일 텐데도, 그 직선의 경로가 꼭 유현진을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유현진은 기묘한 기분으로 그를 보았다. 삭막한 낯으로 무서울 만큼 똑바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현태오를.
“물러가라! 물러가!”
군중들 속에서 계속해서 외쳐 대는 몇몇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가 어영부영하는 사람들까지 몰아붙인다.
인벽을 뚫는 와중에도 현태오는 고함치는 사람들을 시선으로 훑으며 마이크를 향해 무어라 짤막짤막하게 말했고, 거의 동시에 저편에 서 있는 진문성 역시 이어셋에 지시를 내렸다.
그러던 때,
위병들의 방패에 가로막혀 있던 한 너저분한 남자가 돌연 괴성을 질렀다. 몇 걸음이나 떨어져 있는 곳까지 냄새가 풍겨올 정도로 술에 푹 절어 있던 그는 한 손을 치켜들었다.
“우리 제양의 전통과 역사를 저들이 더럽히게 둘 수 없다!”
술 냄새뿐만이 아니다. 어렴풋이 섞여 있는 건 묵은 기름 냄새.
남자의 덜덜 떨리는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불꽃이 튀었다. 남자의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기름을 먹은 옷은 불을 집어삼켰고, 단숨에 치솟는 불길에 사람들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군중이 삽시에 어수선하게 무너졌다.
남자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왕자에게 달려들려다 위병들의 방패에 가로막힌 그는 누구든 잡으려고 버둥거렸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밀치고 넘어지며 멀찍이 떨어져 아무도 그에게 잡히지 않았다.
소화기를, 구급대에 연락해, 고함치는 소리들이 교차했다.
현태오가 냉랭히 그 남자를 보며 막 이어셋을 켜려던 때였다.
불길 속에서 웅크리고 뒹굴던 남자가 고통에 못 이겨 이성을 잃고는 방패를 든 위병들에게 온몸으로 부딪쳤다. 야수처럼 날뛰는 남자의 기세가 어찌나 난폭했던지 그에게 부딪힌 어린 위병이 일순 두어 걸음 밀리고 만다. 그 벌어진 틈으로 남자가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안 돼! 잡아!”
위병 중 누군가 고함을 질렀으나 한발 늦었다. 막 물러나려 하고 있던 사절단 쪽으로 달려간 남자가 가장 가까이 있던―사절단을 먼저 보내고 가장 뒤까지 남아 있으려 하던― 자를 붙들었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에게 닥쳐드는 손길을 얼결에 피하려 했으나 절뚝이는 걸음 때문에 딱 한순간 늦어지고 말아, 남자에게 붙들려 큰 눈으로 돌아보는 청년은 유현진이었다.
당장 특위병이 달려들어 그를 떼어 놓으려 했지만, 불길에 휩싸여 온 힘을 다해 매달리는 남자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유현진의 소매에 닿은 불길은 방열 코트 위로 넘실거리면서도 옮겨붙지는 않았다. 그러나 천 한 장 너머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은 고스란히 전해져 와 유현진의 낯이 일그러졌다.
“놔!”
특위병이 방패로 남자를 후려치자 순간 소매를 놓쳤다. 그러나 남자는 옷자락을 놓치고서도 다시 뭐든 붙들려고 아우성쳤다.
그런 그를 한 발짝 앞에 둔 유현진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온 사방을 가득 채우는 고함과 비명들 속에서 그저 새하얗게 빈 머리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머릿속에 남은 것은 그저 오래도록 배워 오고 익혀 왔던 습관뿐이다.
힘든 자를 도와야만 한다는 의무감, 등 돌릴 수 없는 양심.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는 오랜 가르침만이 하얗게 씻겨나간 머릿속을 차지할 따름이었다.
저 옷, 기름에 절어 불타오르고 있는 저 옷만이라도 얼른 벗겨 낼 수 있다면, 목숨은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버둥거리고 있는 불구덩이를 향해 뛰쳐 나선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몰려드는 공격에만 대응하고 있던 특위병들은 설마 안쪽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인물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어, 하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어이없이 길을 터 주고 만다.
유현진은 방열 코트를 벗었다. 거꾸로 뒤집어 제 팔과 가슴팍을 감싸고서 남자의 옷자락을 붙든다. 천 너머로 불길의 열기가 느껴졌지만 불이 옮겨붙지는 않았다.
“――벗어요! 어서!”
손에, 팔에 닿는 열기에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유현진은 타오르고 있는 남자의 코트를 움켜쥐었다. 방열 코트의 자락 사이로 넘실거리는 불길에 데어 움찔거리면서도 남자의 옷을 벗기려 안간힘썼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남자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불길이 번진 옷을 쉽게 벗길 수가 없었다.
“유현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현태오다.
그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든 유현진은 저만치에서 다가오고 있는 현태오를 보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인파를 거칠게 밀어젖히며 다가오는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몹시 화가 난 것 같은 얼굴이 마치 초조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그러져――.
“오지 마세요!”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더럭 소리쳤다.
얼결에 나간 자신의 목소리도 꼭 화가 난 것처럼 들려, 그제야 어쩌면 현태오의 저 얼굴도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위험한 상황에 처한 유현진을 구해 내는 것이 그의 임무이고, 그는 비할 데 없이 강했고, 또 유현진이 그보다 백배는 더 위험에 취약한데도,
그럼에도 유현진은 그가 가까이 오지 않길 바랐다. 그가 아주 사소한 위험에라도 처하지 않기를, 이 불길이 그의 털끝 하나라도 그슬리지 않기를 바랐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주제에 그렇게 더럭 외치는 유현진이 그가 보기에도 우스웠던 걸까, 일순 멈칫하는가 싶던 현태오가 이를 갈았다.
앞길에 거치적거리는 위병들마저 거침없이 밀쳐 버리고 단숨에 달려 나선 현태오는 패닉 상태로 유현진을 붙들고 늘어져 있던 남자를 후려갈겼다. 주먹이 철퇴인 양 무시무시하게 남자를 두들기는데도 남자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면서 꿈쩍도 하지 않고 유현진에게 무작정 매달렸다.
현태오의 구둣발이 이번에야말로 끔찍한 소리가 나도록 남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제야 남자가 유현진을 놓쳤다. 바닥을 나뒹굴던 남자는 무엇에든 매달려야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이번엔 현태오의 다리를 붙들었다.
현태오의 옷자락에 금세 불길이 옮겨붙었다.
유현진이 남자에게로 덤벼들어 그를 붙들어 당긴다. 이미 방열 코트 따위는 어느 결에 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멍청아, 저리 비켜!”
“오지 말랬잖아!”
현태오의 고함에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버럭 맞고함을 질러 버렸다. 그 찰나 다시 눈이 마주친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처럼 험상궂은 낯을 한 현태오의 앞에서, 유현진은 자신이 어떤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그가 뭐라고 하든 절대로 비키지 않으리라고, 불길이 핥고 있는 손으로 어떻게든 남자를 그에게서 떼어 내려 하며 연신 현태오를 살필 뿐이었다. 그의 옷자락에 옮겨붙은 불길을 털어내려 무력하게 안간힘쓰며.
현태오는 뚫어질 듯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맹렬하게 살갗으로 다가드는 불길조차 잊어버린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본다.
불현듯 현태오가 손을 뻗어 유현진의 팔뚝을 움켜쥔다.
그때.
쏴아아악――.
숨통을 막을 기세로 세찬 물줄기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방에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그들을 때려 댔다.
어서, 어서 꺼! 외쳐 대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비치해 두었던 살수 카트를 모조리 다 긁어 오기라도 한 양, 그들을 향해 퍼부어 대는 물줄기의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뿌연 시야 속에서 현태오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유현진을 끌어당겼다. 품속에 더럭 부딪히기 무섭게 단단히 끌어안는다.
불이 다 꺼지고도 한참 더 쏘아 대던 물줄기가 드디어 그쳤을 때, 유현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채 굳은 듯이 멈추어 있는 현태오를 코앞에서 보았다.
한 뼘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뚫어질 듯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이윽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들어 이어셋을 켰다.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짧게 묻는다.
“진문성. 사절단은.”
『안전 확보하고 물러나는 중입니다. 말씀하신 자들도 억류해 두었습니다. 이쪽은 문제없습니다.』
바로 지척에 있는 그의 이어셋에서 희미한 보고가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듣고 유현진이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래, 짤막하게 대꾸한 현태오는 다시 통신을 끈다. 그리고 마치 뒤늦게 뭔가 아연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다리, 아플 텐,”
유현진이 속삭였다. 벌겋게 익은 제 손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미리 준비해 뒀던 양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가져와 남자를 실어 가는 것조차 이 순간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눈동자를 돌렸다.
일순 그가 사납게 입을 열려는가 싶었다. 뭔가 성이라도 낼 것처럼, 질책이라도 할 것처럼 막 뭐라고 하려던 그는, 그러나 다시 입을 다물었다. 곧 성이나 질책 대신,
“너는.”
꺼질 듯 나직한 목소리로 현태오가 중얼거렸다.
“너는, 괜찮아?”
목구멍을 꽉 메우고 있던 호통 대신 흘러나온 건 한숨 같은 물음이었다.
눈을 크게 뜬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태오는 이를 사리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꾹 감은 눈가에 사나운 주름이 진다.
그리고,
“――.”
유현진의 팔을 움켜쥐고 있던 손길에 갑자기 더럭 힘이 들어갔다. 불시에 끌려간 몸뚱이가 그의 품에 턱 부딪힌다.
동시에, 꾹 다문 입 위로 입술이 겹쳤다.
유현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 결에 입술도 벌어진다.
그 안으로 더욱 깊이 혀를 들이민 현태오는 유현진을 품에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마치 그 순간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유현진을 숨 막히게 끌어안으며 잡아먹을 듯 입속을 파고들었다.
어……?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싹 씻겨 나간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움찔하고 몸이 굳어 버렸을 뿐이다.
그 작은 기척과 동시에 현태오의 입술이 멈칫하더니 떨어지는가 싶었다.
눈이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을 만큼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닿는 숨결과 함께 여실히 느껴졌다.
――빌어먹을. 기어이, …….
현태오가 뭔가 욕설이라도 지껄이는 듯 낮게 그르렁거렸다.
동시에 다시금 입술이 겹쳐졌다.
이번에야말로 조금 전보다 훨씬 거칠고 욕심 사납게, 다디단 꿀물이라도 빨아들이는 것처럼 탐욕스럽게 혀가 감겨들었다.
그제야 유현진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지만 그는 그 떨림마저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집어삼키고 말았다.
불길은 이미 잡혔지만 주위에서는 아우성이 시끄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데에서 번잡한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지는 와중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 가운데서 그런 소리들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양 그들은 오로지 입맞춤에만 골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