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새해가 밝았다.
연말부터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기로는 이번 새해가 역술상으로 보아 대단히 복되고 상서로운 해라고 했다. 수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길운을 품은 해라고.
사람들은 섣달그믐부터 평소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정갈히 몸을 씻고 집 안팎을 구석구석 청소해 묵은 것을 치웠다. 그리고 설날이 되자 해뜨기 전부터 일어나 저마다 단장하고서 해맞이를 했다.
과연 좋은 해라 그런지 유난히 화려한 빛깔로 새벽노을이 비치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휘황하게 해가 올랐고, 집집마다 가족과 친척들이, 거리마다 이웃들이 밝게 인사를 나누며 덕담을 나누는 희망찬 설날이었다.
문지기 박상복은 정월 초하루부터 쉬지도 못하고 해도 뜨기 전에 출근을 해야만 했으나 기분이 좋았다. 비록 날씨는 영하인 데다 간간이 바람도 매섭게 불었지만 그래도 그는 하루 종일 기분이 흥성거렸다.
새해 첫날 새벽부터 추운데 출근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정혜궁마마께서 뜨끈한 떡국과 함께 두툼한 금일봉을 내려 주신 것이다.
온갖 프로그램에서 떠들기를 올해가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해라더니 참말인가 보다. 박상복은 안주머니에 곱게 넣어 둔 봉투의 두툼한 감촉을 느끼며 행복해했다.
우리 공주님은 참으로 다정도 하시지. 공주님도 지금 몸과 마음이 지쳐 계실 텐데.
전날의 일을 떠올린 박상복은 애처로운 눈길로 정혜궁을 바라보았다.
송갈에서 온 사절단 중 몇몇 귀한 이들과 더불어 산상에 간다고 나섰던 공주님이 예정보다 일찍 들어왔다. 사고가 터졌다는 모양이었다.
그간 송갈 사절단이 다니는 곳마다 시위대들이 하도 쫓아다니고 떠들어 대서 아슬아슬했었는데 어제 기어이 일이 터졌나 보다. 석간에 바로 기사가 난 걸 보니 분신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했다.
분신한 남자는 위중한 상태로 병원으로 실려 갔고 혼잡한 난리통에 넘어져 밟히거나 부딪혀 다친 사람들이 여럿 있다고 하지만, 우리 공주님과 사절단 일행들은 큰 탈 없이 귀환했단다.
“얼마나 놀라셨을까, 그래…….”
박상복은 눈시울을 꾹꾹 누르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라면 오늘도 그 사절단과 더불어 정초맞이 연회를 하기로 했었으나,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쉬기로 하셨단다.
심신이 지치셨을 공주님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근래 종종 정혜궁을 드나들곤 하던 송갈인들이 안 보이니 한결 마음이 편한 박상복이었다.
요즘 그는 줄곧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도 배울 만큼 배웠고 양식과 상식이 있는 이였다.
송갈과 화해하고 화합하는 게 바람직한 길인 줄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반감이란 것도 만만찮았다. 케케묵은 사연이 오래 쌓이고 쌓인 사이일수록 화해도 어려운 법이다. 어제 결국 벌어진 사고만 해도 알 만하지 않은가.
“아 그러게 송갈 놈들이 산상엘 왜 가. ……에혀, 그래도 잘 지내 보자고 멀리서 온 사람들인데 시위대들도 너무 심하게 굴었지. ……아니 그래도, 그럼 뭐 그 정도도 각오 안 하고 왔나, 쌓인 원한이 얼만데? ……에혀, 하지만 싸우는 것보다는 잘 지내는 게 낫긴 하지. ……낫긴 한데 왜 하필 송갈 놈들이야.”
박상복은 홀로 번민에 빠져 초소 앞을 왔다 갔다 빙빙 돌았다.
요즘 매체들은 송갈과의 향후 관계에 대해 연일 복닥거렸다. 사람들도 만나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는데, 박상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립이었다.
뭐 결국은 나랏일하시는 윗분들이 방향을 잡는 대로 가게 되겠지만, 윗분들도 화합을 주장하는 쪽과 결렬을 주장하는 쪽이 부딪치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언론의 논조도 제각각이다.
“우리 공주님은 화해하려는 쪽에 선 듯하니 나도 마땅히 우리 마마 뜻을 좇아야겠지. ……에잉, 송갈 놈들 맘에 안 들어.”
박상복은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 중얼중얼거렸다.
그가 모시는 정혜궁의 공주님은 송갈에서 사절단으로 온 왕족의 안내를 맡고 있었다. 송갈의 셋째 왕자라던데, 박상복은 그가 마음에 안 들었다.
딱히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고 또 마주칠 때마다 서글서글하게 인사도 잘하고 예의도 잘 갖추는 인물이었으나, 그래도 맘에 안 들었다.
정혜궁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거야 일 때문이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아니 그럼 일하는 동안에만 만나면 그만이지 업무 시간 다 끝난 저녁나절에까지 찾아와선 편히 쉬는 공주님을 끌고 나와 후원을 산책하고 차도 마실 건 또 무어냐. 비록 우리 공주님이 싫은 내색은 안 하시지만 얼마나 귀찮으시겠냔 말이다. 심지어 둘이 함께 있는 것도 선남선녀처럼 썩 그럴싸해 보여 더 맘에 안 들었다.
“젊은 남녀를 저리 붙여 놓으면 안 되는데. 아무래도 그놈이 우리 공주님 보는 눈초리가 심상찮단 말이야……. 에잉, 맘에 안 드는 송갈 놈 같으니.”
주절주절 혼잣말로 투덜거리느라 너무 넋 놓고 있었나 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야에 누군가의 구두 끝이 들어와 있었다.
한 박자 늦게 화들짝 고개를 든 박상복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경비대장이나 다른 웃전이었더라면 한눈팔고 있었다고 크게 경을 칠 뻔했는데, 이분은 좀 엄격해 보이긴 하나 이 정도는 눈감아 주실 분이었다.
“사제님 오셨습니까.”
습관대로 부르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서야 ‘아, 지금은 사제님이 아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혜궁마마의 친구분이자 이번 송갈 사절단의 통역을 돕고 있기도 해 요즘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전직 신관님이었다. 공주님의 부름을 받고 왔는지 초대장을 내밀며 단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예, 사제님! 아니 이제 사제님은 아니시지, 유, 유, 유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 무난하다 싶은 호칭을 붙이자 그는 약간 미묘한 낯을 했지만 그 역시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잠자코 고개 끄덕였다.
공주님이 쉬시는 와중이라도 새해 첫날이다 보니 각별한 친우들만 몇몇 불러 새해를 축하하시나 보다. 좀 전에 이 사제님, 아니 유 선생님의 동생분도 들어가시더니, 형제분들과 더불어 사이가 참 좋으시다.
얼른 시동을 시켜 안에 기별을 올리라 보낸 문지기는 다시금 그를 돌아보았다. 손에 두툼하게 감고 있는 붕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찌,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어제는 큰일이 났었다면서요. 그 와중에 유 선생님이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에 빠진 자를 도우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정말로 탄복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분신한 사람을 살리려 불길로 뛰어드셨다지요. 하나람님의 축복이 있으실 겁니다. 비록 지금은 신관직을 내려놓으셨다 하나 그 어느 사제님 못잖은 희생과 헌신이 아니십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일반인인 전직 사제님이 당혹스레 손을 내저었으나 박상복은 그런 겸양을 듣지 않았다.
어제 산상에서의 일이 아침 신문에 대대적으로 실렸다. 그 기사에 덧붙은 토막 기사에 이분의 이야기가 있었다. 불길이 일자 다들 피하는 와중에 분신한 사람의 곁에 남아 제 몸 다치면서까지 그를 도우려 애썼다는 게 그 골자였다.
그 훌륭한 인물이 여태 숱하게 보아 왔던 인물임을 안 박상복은 크게 감탄했다.
평소 행동거지가 반듯한 이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늘 볼 때마다 냉담냉정한 분위기라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타인의 재난에 이렇게 망설임 없이 나서는 분이었다니.
하긴 그 정도로 단호하고 강단이 있으니 저 평항 총독과 얽히고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또한, 또한, 또한…….”
박상복은 그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덧붙였다.
“그, 평항 총독 각하와도 각별히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 참으로 보기가 좋습니다. 잘되었습니다.”
축하하려 한 말이었는데 삽시에 그의 표정이 무거워지는 걸 보고 박상복은 얼른 덧붙여 말했다.
“그것이, 사실 처음에는 사제님께서, 아니 유 선생님께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참담한 일을 겪으신 것 같아 몹시 애석하고 안타까웠습니다만, 그래도 이제 보니 두 분이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마음 놓았습니다. 아무렴요, 유 선생님께서 잘 지내시는 게 무엇보다도 잘된 일이지요.”
“예…….”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 무거운 낯을 보고 자신이 뭔가 헛말을 했나 슬쩍 염려가 된 박상복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이상하다, 하지만 아까 보았던 신문에는…….
“유현진 님, 뫼시러 왔습니다. 마마께서 들라 하십니다.”
그때 시동이 낭랑하게 외치며 마중을 나왔고, 그는 무거운 낯으로 시동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박상복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참, 이 좋은 날에 표정이 어두우시다. 하긴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놀라기도 하셨을 테고, 다치기도 하셨고, 기운이 없으실 만도 하지.
박상복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 되었거나 한시름 놓았다.
얼마 전 저 사제님이 평항 총독과의 사이에 변고가 생겨 신관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자신을 비롯해 궁에서 일하며 그와 낯을 익힌 사람들은 다들 놀라며 안쓰러워했다.
사고를 치긴 쳤으니 일단 책임을 지겠다고는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설마하니 저 평항 총독이 정말로 남자를 제 짝으로 들일 리는 없으니 적당히 말들이 가라앉고 나면 슬그머니 떼어 놓겠지,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멀쩡히 신적에 있던 사람을 그리 만들어 놓았으니 헤어지더라도 사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도록 한몫 떼어 주긴 할 터이나, 저 앞날 창창하던 사람이 아까워 어쩌나. 저 범 같은 남자와 악연으로 잘못 얽혀도 단단히 잘못 얽히셨구나. 저 사제님도 사람이 조용해 보이기는 하나 은근히 보통 강단이 아니고 평항 총독이야 말할 나위 없을 정도로 강성이니, 그저 무난히 헤어질 때까지 큰 탈이나 안 나면 좋겠다.
그리 염려했는데, 뜻밖에도…….
“……흠, 흠.”
박상복은 초소 안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그 안에 툭 던져 둔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거기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는 사진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낯을 붉히며 혀를 끌끌 찼다.
“거참 남우세스럽기도 하다……. 뭐 사이는 몹시 좋으신 모양이니, 어쨌든 다행이네, 다행이야.”
*
전날 있었던 사고 때문에 이날 송갈 사절단의 모든 일정은 다 취소되었다.
제양의 고관대작들과 더불어 새해를 축하하려던 연회도 취소되고, 대신 송갈에서 온 이들끼리 모여서 단란하게 새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갖기로 했다.
덕분에 송갈의 귀빈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제상아도 휴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도 설날 오전에 친족들과 한자리에 모여 인사를 나눈 뒤에는 오후 내내 정혜궁에서 한가롭게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런 때에는 가까운 친구 몇몇을 불러 단란하고 즐거운 다과 시간을 가지면 딱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벗을 불렀다.
새해 처음으로 벗들과 나누는 다과 시간이니 단란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덕담들이 오가는 좋은 자리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
“…….”
“…….”
그나마 평범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건 제상아뿐이었다.
맞은편 자리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서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 유현진을 그 대각선 자리에 앉은 유세진이 뱀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어찌나 집요하게 노려보는지 정말로 비단구렁이 같은 게 거기 똬리 틀고 앉아 있는 것 같다.
“다친 데는 괜찮으세요?”
그래도 일말의 인정은 있었는지, 비단구렁이가 유현진을 노려보면서도 불퉁하게 물었다. 유현진은 팔뚝부터 손끝까지 붕대에 친친 감겨 있는 두 팔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좀 아프고 물집이 잡히긴 했는데, 그래도 심각하진 않대. 1, 2주 정도면 다 나을 거래.”
그나마 방열 코트를 휘감은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다. 노출되었던 군데군데는 좀 많이 데긴 했지만 그래도 찻잔도 들 수 있고 어설프게나마 젓가락질도 할 수 있다. 그렇군요, 하고 비단구렁이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직 신관의 희생정신 운운하는 토막 기사를 보고 큰 부상인가 걱정했는데, 크게 안 다쳤다니 다행이네요. 마음 놓고 할 말 할 수 있겠어요.”
그 위험스런 발언과 동시에 그가 탕!! 하고 탁상을 두들겼다. 유현진이 움찔했다.
“뭡니까, 이게?”
“…….”
“형님?”
“…….”
“아 이게 뭐냐고요!”
기어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탁상을 탕탕 두드리는 유세진의 손바닥에 신문이 얻어맞고 있었다.
새해 첫날의 신문이다.
길하고 희망 가득한 소식만 실려 있어도 모자랄 판에, 그나마 일면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문장들이 블라블라 실려 있었으나 딱 바로 그다음 장을 통째로 차지한 것은 바로 전날 산상에서 벌어진 사고에 대한 기사였다.
송갈의 사절단을 반대하는 시위대의 과격한 시위 내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그 기사는―다른 신문에서는 ‘우리 제양의 성스러운 유적지에 발을 들여놓은 송갈 사절단의 무람없는 행보’에 초점을 두기도 했다―, 제 몸에 불을 질러 항의한 남자의 사진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그보다는 약간 작은 사진이 하나 더 실려 있었는데,
“아니 이 신문사 미친 거 아냐?! 무슨 황색 타블로이드지도 아니고 간판급 신문사가 이딴 사진을 싣고 있어?! ――아 이게 뭐냐고요!!!”
의자가 들썩거릴 정도로 펄펄 뛰던 유세진이 홱 고개를 들어 잡아먹을 듯 유현진을 노려보며 코앞에 신문을 들이대었다.
유현진은 눈의 초점을 흐려 그 사진을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 윤곽은 싫어도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물에 풍덩 빠졌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쭐떡 젖은 채로 부둥켜안고 입 맞추고 있는 두 남자. 정확히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왜, 그래도 간판급 신문사라서 점잖은 편이야, 그건. 진짜 타블로이드지에 실린 사진은 훨씬 더 적나라한걸.”
무표정히 차만 마시고 있던 제상아가 어디서 꺼냈는지 B4 사이즈의 누런 종이 묶음을 탁상에 툭 내려놓았다. 거기에는 새해 첫날이고 뭐고 아랑곳없이 당장 첫 페이지에 두 남자의 혀와 혀가 섞이는 클로즈업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 정도쯤은 돼야 타블로이드판 기자를 하나 봐. 어쩜 이렇게 야동의 한 장면을 캡처한 것처럼 찍어 놨담.”
공주님 주제에 말 좀 예쁘게 안 쓸래?! 라고 꾸짖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유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더 숙였다. 그러다 이마가 바닥까지 닿겠다.
매체에서 떠들 건 자명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도 각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송갈에서 온 친선 사절단의 일정 중에 제양의 시위대가 이토록 과격한 행보를 보였다는 중차대한 주제나 집중적으로 다룰 줄 알았지, 이런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까지 지면에 실을 줄은 몰랐다. 실려 봤자 가십지 같은 데에 조그맣게 나고 말 줄 알았는데.
고개를 푹 숙인 유현진의 머리 위로 괴괴한 침묵이 흘렀다.
폭발하던 화산이 갑자기 가라앉은 것처럼 고요해지자 유현진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래서,”
유세진이 활화산을 억지로 누르며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고 뭐고……, 난 그냥 불길에 휩싸인 사람한테 휘말려서 도우려고 했는데, 그때 현 총독님도 같이 도우러 와서……,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는 뭐냐구요?!”
“그보다 현 총독도 ‘같이 도우러’ 온 건 맞아?”
이상하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도우러 왔다기보단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바보멍청이를 두들겨 패러 오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제상아가 차를 홀짝였다.
“어찌 됐든 그건 아무래도 좋아. 문제는,”
시종 무표정하던 제상아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운 눈을 들어 유현진을 본다.
“너 현 총독이랑 정말로 사귀니?”
“어, 어, 어, 뭐?”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유현진을 두 사람이 동시에 반들반들한 눈매로 쳐다보았다. 비단구렁이가 두 마리로 늘어났다.
“아니, 사귀는 건 아닌데, 근데 아예 남남도 아닌 것 같고, 그러니까……, ……잘 모르겠어.”
한참 허둥거리던 유현진이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끝에 제상아가 신문의 사진을 내려다보곤 한 손으로 뺨을 감싸며 미심쩍게 고개를 기울였다.
“현 총독이 널 책임지겠다는 게 진심이었나……? 난 분명히 그 인간이라면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야. 방패막이로 삼으려 한다든가.”
“그렇겠죠! 연예인이랑 열애설도 있었잖아요! 눈속임을 하려는 의도일 가능성도 크다고요!”
유세진이 열렬하게 맞장구치자 유현진이 눈을 당그랗게 떴다.
“연예인이랑 열애설이 있었어……?”
“한두 번이었어요?! 물론 그땐 마마랑 정혼한 상태였을 때니까 가십지에 이니셜로만 실리고 말았지만.”
유현진은 아연한 얼굴로 눈을 껌벅였다. 그런 유현진에게 제상아가 여상하게 말했다.
“뭐, 확인된 바는 없어. 아예 아니 땐 굴뚝은 아니었을 것 같긴 하지만. 현 총독을 사랑한다면서 현가 대문 앞에서 모 여배우가 자살 소동을 벌였다는 가십은 진짜였거든.”
내 서예 선생님의 친동생이 그 여배우의 빠돌이 사생팬이라 그 사태를 직접 목격하곤 집에 와서 울며불며 사흘을 앓아누웠다나, 하고 제상아가 별꼴을 다 본다는 투로 중얼거리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난 이 남자가 널 방패막이로 삼으려는 거든 뭐든, 다른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단 말야. 틀림없이 뭔가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있겠죠! 분명히 있겠죠, 꿍꿍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다른 속셈! 봐요, 이 기사에도 놀랍다고 적혀 있잖아!”
사람 보는 눈이 비슷비슷하다니까요?! 하고 외치며 유세진이 누런 종잇장을 펄럭였다.
현 총독이 실수로 신관과 하룻밤을 보내고 공주와 파혼한 것은 양심적인 희생 혹은 정략적인 방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뜻밖에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인다, 그러나 송갈과의 관계를 생각해 그들의 문화에도 우호적임을 보여 주려는 고의적인 제스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운운하는 문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사진을 내려다보며 미심쩍다는 듯 생각에 잠겼던 제상아가 흘끗 유현진을 곁눈질했다.
“현진이 너 이러다 정말로 잡아먹히는 거 아니니? 이렇게 공공연한 장소에서 대놓고 찌인하게 입맞춤을 할 정도면, 분위기만 잘 타면 섹스까지도 일사천리겠어. 너, 남자끼리라고 해도 콘돔은 잘 써야 한다?”
“섹, ……콘, ……야! 넌 공주님이 할 말 못 할 말,”
“내가 뭘? 섹스가 왜? 콘돔이 못 할 말이야? 너 그게 인류의 발전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 알아? 뭘 그런 걸로 얼굴이 새빨개지고 그래?”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유현진과 태연자약한 공주님 옆에서, 유세진은 그들의 중간쯤 겸연쩍어하며 애써 아무렇잖게 끼어들었다.
“아니, 그건 됐고요. ……아니, 된 게 아니라, 농담이 아니라 형님, 그 남자랑 이렇게 진도 빼서 어쩔 작정이에요? 이러다 그 남자가 끝까지 가려고 들면 어쩌려고요?”
“너까지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그럴 리 없잖아.”
“왜요, 또 모르죠. 공식적으로는 이미 ‘한’ 사이이고 현 총독님도 그런 줄로 알고 있잖아요. 그럼 현 총독님 입장에서는, 그럴 마음만 생기면 언제든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겠어요? 게다가, ……정말로 공식적인 연애를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차마 마지막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신문을 흘겨보는 유세진이었다. 제상아도 신문을 내려다보며 말을 거든다.
“이런 느낌으로 입맞춤까지 할 정도면 이러다 어영부영 자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이지?”
“그, 아니, 고작 입맞춤 좀 했다고 그렇게까지,”
“정신 차려, 이 맹추야. 난 그때 네가 현 총독한테 잡아먹히는 줄 알았거든? 어찌나 욕심 사납게 입질을 하는지, 저 남자 저러다가 그냥 저 자리에서 자빠뜨려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됐을 정도였다구!”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제상아의 말에 유현진은 어물어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헤매던 시선이 신문에 닿았다.
확실히 그들의 말대로, 단순한 사진인데도 욕망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더욱 명백했다.
입 맞추는 두 사람이 실린 그 사진에는 그들의 표정까지는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유현진은 그때 현태오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입맞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인사나 형식이 아닌, 정말로 감정이 담긴 것 같던 접촉.
세차게 끌어안던 팔과, 입속 깊이까지 파고들던 혀.
난생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에 당황해 멈칫한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밀어내려 했을 때, 현태오 역시 본능인 양 팔에 더욱 힘을 주었었다. 그 직후에 본인도 어라 싶었는지 멈칫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매우 짧은 찰나였다.
유현진을 품에 단단히 가두고 놓아주지 않는 팔 안에서 입맞춤이 더욱 깊어졌다.
그때 분명하게 느낀 건 욕망이다.
두려움마저 덜컥 치솟을 정도로 명확하고 사나운 욕망이 겹쳐진 입술을 통해 노골적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대로 끝까지 가 버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멍해진 가운데서도 심장이 뛰었다. 심장 소리가 그렇게 선명할 수 있는지 여태 몰랐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정말일까.
정말로,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진짜로 ‘책임지려’ 하는 걸까. 정말로, 자신과 그런 관계가 되겠다고……?
유현진의 낯이 확 달아올랐다. 발밑이 붕 뜨는 것 같다.
“그게, 뭐, 그렇게 되는 것도 나는 싫지는 않은데,”
“그래……,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과 잘된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말야. 뭐, 현태오라는 사람이 나는 썩 그렇게 마음에 안 들지만 어차피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니고. 네가 좋다면 나도 응원해 주겠는데, 그런데 현진아. 너 뭐 잊은 거 없니……?”
어쩔 줄 몰라 하며 더듬더듬 중얼거리던 유현진에게 제상아가 한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낸다. 그 옆에서, 비슷한 눈길로 유현진을 쳐다보던 유세진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혹시 그새 신성가호 풀리셨어요?”
앗.
순간 유현진은 멍해졌다.
맞다. 그게 있었지.
유현진이 아직 신의 특별한 가호를 받고 있는 정결한 몸이라는 증거. 처음에 현태오와 얽히게 된 단초가 다 뻥이었다는 증거.
“이러다 얼결에 그 남자랑 자 버리면 너 거짓말한 게 다 탄로 나는데? 어쩌려고 그러니?”
혀를 끌끌 차는 제상아를 유현진은 창백해진 낯으로 바라보았다. 제상아가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나는 적당히 시간 지나서 여론이 좀 잠잠해지면 그 남자랑 네 관계도 이대로 무마되고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왠지 좀 수상쩍단 말이야.”
그렇다. 이 상황에 마냥 들떠 있을 게 아니었다.
애초에 거짓말 위에서 성립된 관계다. 자신은 그를 속이고 있었다.
유현진의 낯이 거무죽죽해졌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유현진을 한심스럽고도 안쓰럽게 쳐다보던 제상아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바엔 해결책은 셋이야.”
유현진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해결책이라곤 없을 줄 알았는데 셋이나 된다고?! 희망의 빛이 아른거리는 유현진의 눈을 들여다보며 제상아가 말했다.
“첫 번째.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고 용서를 구한다.”
“…….”
유현진의 눈동자에서 희망의 빛이 어두워졌다.
“그분 성격에 순순히 용서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죠…….”
유세진이 곁에서 회의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되레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입 다물고 있었다고 가중 처벌이나 안 되면 다행이지.”
“한천 형무소에 가기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구요.”
마치 남 말처럼 이야기하는 제상아와 유세진을, 유현진은 어두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방법은 됐어. 두 번째 방법은?”
“그 남자한테 술을 퍼먹이고 인사불성으로 만든 뒤 그 틈에 잠자리를 가져 버려서, 거짓말을 사실로 만든다.”
신성가호도 깨면서 네 욕망도 채울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지, 하고 말하는 제상아에게 유현진은 “야, 그건 범죄잖아!” 하고 외쳤다. 그러나 돌아온 건 치켜뜬 눈매일 뿐이었다.
“지금 네가 범죄 운운할 때야? 형무소에 끌려가게 생겼는데?! 게다가 뭐, 그 남자의 머릿속에선 이미 벌어졌던 일인 걸로 되어 있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들 뭐 어때서?”
너무나 당당한 태도로 범법을 조장하는 이 나라의 공주님을 유현진은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한편으로는 그 말에 혹하기도 해서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곧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냐, 설령 시도해 본다손 치더라도, 불가능해……. 그 사람 애초에 술을 잘 안 먹고, 먹는다 해도 엄청 세단 말야. 그날 그렇게 쓰러졌던 게 기적적인 일이라고.”
“수면제라도 섞어 먹이든가?”
“――, 꼭 그렇게까지 대놓고 막장으로 가야 해?”
거의 울먹거릴 기세로 더듬거리는 유현진을 보고 혀를 찬 제상아는 가느스름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다가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네. 딴 사람이랑 먼저 자서 신성가호를 풀어 버리는 것.”
순간 유현진은 얼음이 되어 버렸다. 유세진도 이 해법에는 당황했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눈만 대록대록 굴렸다.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이 반씩 뒤섞인 얼굴로 제상아를 보던 유현진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딴 사람이라니, 누구랑.”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나랑 자지 않을 건 확실한데.”
“야, 너랑은 나도 싫어!”
“어머 세상에, 복에 겨운 소리 하는 것 좀 봐? 그리고 뭐, 어차피 신성가호만 깨면 그만인데 아무면 어때?”
울긋불긋한 낯으로 소리치는 유현진에게 제상아는 태연하게 코웃음 쳤고, 해결책이 셋이나 된다고 해서 희망을 가졌던 유현진은 절망에 빠졌다.
“일부러 동정을 없애기 위해서 아무나랑 자다니……, 그런 건 싫어.”
“나도 굳이 권하고 싶진 않지만 달리 방법이 있니?”
“게다가 그럴 목적으로 누구랑 잔다 쳐도, 그 상대한테는 뭐라고 설명하라고?”
동정 떼고 싶어서요, 하고 말했다간 뺨 맞기 십상이다.
점점 더 침울에 잠기는 유현진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제상아가 별안간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지, 미사담 님의 보좌관은 어때. 전에 얘기하는 걸 보니 도와달라면 도와줄 것 같던데. 말도 안 통하니 새어나갈 일도 없고, 또 어차피 금방 송갈로 돌아갈 사람이니 깔끔하게 끝낼 수 있고. 음――그래, 다시 생각해도 딱 마침맞은 인선,”
좋은 생각이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속삭이는 제상아의 입에 유현진은 쿠키를 밀어 넣어 버렸다. “그래도 개중 제일 현실성 있는 방안이긴 하네요.” 하고 지껄이는 동생의 입에도 쿠키를 물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는 소리처럼 늘어놓는 저 이야기를 계속 듣다간 머릿속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유현진은 바삭바삭 쿠키를 우물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되짚어 보니, 처음부터였다. 처음부터 꼬여서 시작되어 버렸으니 계속해서 꼬일 수밖에 없다. 다 내 죄로다.
어떻게든 풀어야 하는데 도무지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어영부영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든 하긴 해야 했고, 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