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3권) (8/15)

7.

삑, 삑,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현태오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가끔 태블릿을 넘기는 손가락만 까딱거릴 뿐이다.

고관절에서 무릎까지 고정한 기기에서는 기계음에 맞춰 불빛이 깜박였다. 그 옆에서 젊은 의사가 모니터를 보면서 간간이 곁눈질로 현태오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아랑곳도 않고 태블릿만 들여다보는 냉담한 눈길엔 변화가 없었다. 모니터 속의 그래프가 꼭짓점을 찍을 때마다 의사의 입매가 꿈틀거린다.

이윽고 삐익―― 긴 소리가 종료를 알렸다. 그제야 현태오가 고개를 돌린다.

“다 됐습니까?”

“예. 끝났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수고하셨습니다.”

이 정도 강도면 성인 남성이라도 우는 분도 많으신데요, 하고 감탄스레 중얼거린 의사는 기기를 정돈하며 현태오의 무표정한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통각이 없나? 손도 제법 많이 데었는데 처치하는 동안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쇠와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설이 있더니, 정말인지도 몰랐다.

“다행히 이번에는 별일이 없었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전근 손상이 심해 후외측으로 접근해 수술을 한 경우는 탈골 빈도가 높아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의사는 검사 차트를 넘기며 의아한 빛을 띠었다.

“각하께서 원래 회복이 빠르신 편이긴 했는데……, 대퇴부 아래의 복합 골절이 거의 다 아물었어요. 이 정도까지 회복되려면 몇 주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게다가 이쪽 접합 수술을 했던 곳은 흔적이 거의 실금처럼만 남아서…….”

이럴 리 없는데,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의사를 보고 현태오가 냉담히 물었다.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그 반대죠. 너무 이상한――아니 놀라운 속도로 회복을 하셔서요. ……흠흠, 어찌 됐든, 그 덕분에 이번에도 외부 손상 외의 타격은 크게 받지 않으셨지만, 거의 다 아문 상태라도 아직은 충격에 약할 수 있으니 모쪼록 주의하시는 게 좋습니다.”

어제 앞뒤 가릴 경황도 없이 분신한 남자와 부딪친 탓에 몸에 다소 충격이 갔었던 모양인지, 한동안 멀쩡하던 수술 부위가 뻐근했다.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어제 바빠서 제대로 하지 못했던 화상 처치도 새로 하는 김에 오전부터 병원에 와 진료를 받은 현태오는 의사가 치료를 마쳤음을 알리자 자신의 상태를 체크해 보듯 고관절 부근을 천천히 짚어 본 뒤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날 오전부터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각하께서야말로 연말연시에 쉬지도 못하고 노고가 많으십니다.”

의사는 황송한 듯 더욱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며 현태오를 배웅했다. 그간 매체에서나 보았던 젊은 영웅에게 무어라 더 상찬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치료실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좌관이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는 통에 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현태오는 진문성이 건네주는 지팡이를 받아 들고는 앞서 걸었다. 막 치료를 받고 나왔다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거침없는 걸음을 내딛는 그의 뒤를 진문성이 따랐다.

“괜찮으십니까?”

“음, 괜찮아. 소식 들어온 것 있나?”

“분신자의 아들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모친이 사망한 뒤 연락이 끊겼는데 도박에 빠져 온갖 불법 도박장을 전전하다가 빚이 30억이 넘어 작년 초부터 하만군도에 숨어 있었답니다. 그러다 가을에 악질 장기 매매 상인에게 잡혔더군요. 지금 현재 신장은 이미 한쪽밖에 없는 상태고요.”

“눈물 나는 부정이로군. 그래서 제 아들 구하려고 분신을 했다?”

“연결점은 아직 찾고 있는 중입니다. 며칠 안에 소식이 있을 겁니다.”

분신을 한 중년 남자는 부랑자로 떠돌아다니던 이로 연고자가 없다고 알려졌다. 그나마 두꺼운 솜옷의 겉 일부만 기름을 먹어 다행으로, 불길이 높이 치솟은 것에 비해 피해는 크지 않아 중상이긴 했으나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 외에, 시위로 모인 군중들 중에도 떠밀리고 넘어져 다친 이들 몇몇 외 큰 부상자는 없었다.

“다른 놈들은?”

“각기 다른 용역 업체에 고용된 자가 다섯, 고용 내역이 없는 자가 둘―그러나 이쪽은 동일한 중간 업자와 통화한 내역이 확인되었습니다―로, 업체들 간에는 연대가 확인되었고 추가 자료를 모으는 중입니다.”

현태오는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줄은?”

“반송갈 단체 두 군데, 그리고 명목상 건설업, 금융보험업, 사업 시설 관리 및 서비스업에 해당되는 법인 세 군데, 개인 송금 자료는 확보하는 중인데 현재 일곱 명까지 특정되었습니다.”

현태오는 짧게 코웃음 치더니, 숨기려면 좀 잘 숨기시지, 하고 혀를 찼다.

“그리고 어제 전재익 무리가 평항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아하……? 드디어 계연군마마께서 친구를 부르셨군. 총싸움 좋아하는 놈을 수도까지 불러서 뭘 그리 재미나게 노시려고.”

“수도권 내 반입물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어 있는 현재로서는 외부에서 위험물을 들여오기 어려울 테니, 수도 내에 있는 자들과 연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 어찌 됐든 놈들이 온다면 슬슬 과격하게 놀 판을 깔아 봐야겠군. 평항에서야 그렇다 쳐도 수도 안에서 시끄럽게 굴어서야 쓰나. 새해도 됐겠다, 시간도 얼마 안 남았겠다, 마침 놈들이 직접 계기를 만들어 준다니, 이제 쓸어내자, 문성아.”

“예.”

동네 아이들의 전쟁놀이 얘기라도 하듯 대수롭잖게 말을 던지는 현태오에게, 진문성 역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의료 시설에서 나오자마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따라붙었다. “각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산상 사태에 대해 말씀을 좀”, “송갈과 전쟁을 치른 입장에서도 화평에 찬성하십니까?”, “원래 동성과의 관계에 허용적인 입장이셨습니까?” 등등, 왁자지껄하게 온갖 질문을 던져 대는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 빠져나왔다.

뒤에 남겨진 기자들이 투덜거리는 모습이 거울에 비쳤지만 뒤쫓아 오는 차는 없었다. 따라와 봐야 본전도 건지지 못한다는 걸 그들도 익히 아는 탓이다.

“이미 기사를 수십 편이나 내놓고도 더 써 재낄 헛소리가 필요한가 보군.”

현태오는 코웃음 치며 손에 잡히는 대로 신문 한 부를 집어 들었다. 차 뒷자리에는 병원으로 가는 길에 읽다 만 신문들이 몇 부나 쌓여 있었다.

대부분이 첫 소식으로 송갈에서 있었던 사고를 다루고 있었는데 신문의 성격에 따라 논조도 달랐다. 대체로 송갈과의 관계가 쟁점이 되고 있었고 후면에는 시위대의 인터뷰나 학자의 사설 등이 이어졌다.

그러는 한편 그간 기삿거리가 어지간히 없었는지―그렇지도 않았을 텐데― 사회 정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들까지도 덧붙여 놨다. 얼마 전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했던 평항 총독의 개인사가 그것이었다.

현태오의 손에 잡힌 것은 일반 신문보다 작은 판형의 가십지였고 거기에는 아예 일면에 현태오와 유현진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입 맞추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략적인 파혼으로 알려졌으나 아니었던가, 계약설도 있었는데 뜻밖에 사이가 좋아 보인다, 송갈과의 문화적인 교류를 의식한 고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등등 여러 말들 위에, 뒷머리를 움켜잡힌 채 눈을 반쯤 감고 입을 벌리고 있는 유현진의 표정이 클로즈업으로 잡혀 있었다.

“무슨 에로 배우처럼 찍어 놨군. 사진사 능력이 아주 그만이야.”

비스듬히 사진을 내려다보며 현태오가 헛웃음을 웃었다.

실제로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얼어붙어 있었던 게 대부분인데, 이 사진은 보정 처리를 어떻게 한 건지 혹은 그럴싸한 순간을 기가 막히게 포착했는지, 물기가 그렁거리는 눈매에 열에 들뜬 숨결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내새끼들 딸감으로 쓰기에 딱 좋겠어. ……그래도 명색이 전직 사제님이셨는데 이따위 사진이 돌아서야 쓰나. 여기는 소송 진행해.”

사진을 노려보던 현태오가 신문을 내던지며 말했다. 이제 머지않아 이 신문사는 파탄 나게 생겼다.

진문성은 거울을 통해 현태오를 흘끗 쳐다보았다.

기본적으로 늘 무표정하다 보니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 할 일은 빈틈없이 하고 있고, 원래가 밝고 상쾌한 남자는 아니니 평소와 크게 다르다 할 건 없었지만, 생각에 잠긴 그의 미간에 가끔 주름이 졌다 풀렸다 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전화를 내려다본 현태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떨까 할까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다가 연결 버튼을 눌렀다.

‘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내가 몇 번을 전화했는지 알아?!’

전화 안에서 대뜸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렁차고 굵은 목소리는 현태양이다.

현태오는 전화를 귀에서 약간 떼며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아아, 다시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해 놓고선 깜빡했었네요. 무슨 일이세요? 몇 번이나 전화했을 정도면 중요한 일이실 텐데.”

‘네가 깜빡하긴 개뿔! 아 그렇지, 일단 새해 복이나 많이 받고,’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새해 인사를 하는 셋째 형에게 “예, 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현태오는 눈으로는 신문을 훑었다.

‘너 말이다, 내가 기사를 봤는데, 너, 그러니까 말이다, 그, ――현진이랑 도대체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계속 말을 더듬던 현태양이 유현진의 이름을 내민 순간 신문을 넘기던 현태오의 손가락이 멈췄다. 대번에 눈매가 서늘해진다.

“그 멀리서 여기까지 그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죠? 전화한 용건이나 말씀하세요.”

‘내 용건이 이거야, 인마! 너 도대체 어쩌려는 생각이야? 너 괜히 현진이 이용하려는 생각이면,’

뚝.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리고 옆자리에 툭 던지는데 이내 다시 전화가 울렸다. 잠시 전화를 쳐다보던 현태오가 미간에 주름을 한 줄 그으며 받아 들자 또다시 대뜸 고함 소리가 울렸다.

‘이놈이 사람 말하는 도중에 끊어?! 야, 태오야, 너 형 말 좀 들어. 지금 현진이가 얼마나 마음고생하고 있을지 알기나,’

“다른 용건은 없는 거죠? 끊습니다.”

다시 전화가 뚝 끊겼다. 소리를 무음으로 바꿔 둔 현태오는 전화를 옆자리에 내려놓고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그대로다.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나지막이 중얼거린 현태오가 고개를 들어 리어뷰 미러를 보았다.

“문성아.”

“예.”

거울 속에서 현태오와 시선을 마주한 진문성은 운전 속도를 늦추었다.

“너 가끔 셋째 형이랑 술 먹지? 셋째 형 출국하기 전에도 먹은 것 같던데. 이 인간 무슨 일 있어?”

“아니요, 형님들께 특별한 일은 없는 걸로 압니다.”

“그럼 진짜로 그놈 얘기나 하려고 그렇게 전화를 해 댔다고? 미쳤나?”

현태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음……. 세진이가 제 형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워낙 사이좋은 형제지간이니까요. 두 분 형님들과도 따로 만나 뵌 모양이고요.”

진문성의 말에 아아, 유세진, 하고 현태오가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놈도 쓸데없는 데에 힘 빼고 다니는군. 한천에 자리 많이 남아 있다고 귀띔이나 해 줘야겠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애매한 투로 중얼거리는 그를 진문성이 거울 속으로 쳐다보았다.

“태양 형님은 워낙 정이 많은 분이니까 아마 유현진 씨가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그런 상황에 처한 게 안쓰러워서,”

“애초에 그놈이 먼저 시작한 일이야.”

“예, 그런데 태양 형님은 그걸 모르시니까요. 그리고 음……, 어쩌면, 유현진 씨가 달리 마음에, ……아닙니다.”

고개를 기울이며 불확실한 투로 중얼거리던 진문성은 도중에 멈추었다. 현태오는 말을 하다가 마는 진문성을 흘끗 쳐다보았지만, 이야기를 하다가 불필요한 말이라고 생각되면 더 말하지 않는 그 성격을 알기 때문에 굳이 뒷말을 캐묻진 않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남의 일에 관심도 많군, 정초부터.”

현태오는 혀를 차며 신문을 툭 내던졌다.

신문이야 그렇다 쳐도 일단 방금 전의 전화는 ‘남’이 아니었지만, 진문성은 잠자코 있었다. 아마 현태오의 카테고리에선 아침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말들도 ‘남의 일에 관심 많은 자들의 참견’쯤 됐을 거다.

이날 현가의 아침은 미묘한 분위기로 시작되었다. 큰 소리가 나거나 험악하지는 않았지만 새해 첫날 아침에 어울리는 밝은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건 분명하다.

새해 덕담으로 무난하게 시작은 하였으나 어딘지 모를 불온한 공기가 흘렀던 데에는 분명 식당 입구 옆에 쌓여 있던 신문들이 한몫했을 터이나, 아버지는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만 말했을 뿐이다.

어머니 역시 의혹에 젖은 시선으로 현태오를 지그시 바라보기는 했지만 딱히 다른 말을 꺼내진 않았다.

현재 평항에 가 있는 장남 현태원과 해외에 연수를 나가 있는 삼남 현태양의 빈자리를 메우며 함께 식사를 한 차남 현태주가 그나마 뭔가 언급을 해 보려고 시도를 하긴 했다.

‘어제는 산상에서 일이 좀 있었다며. 태오 네가 수고가 많았다. 크게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

‘예.’

무난하게 말을 꺼낸 현태주는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의 눈치를 슬쩍 보곤 말을 이었다.

‘현진이는 괜찮다던?’

‘예, 손과 팔뚝을 좀 데었는데 심하진 않아서 1, 2주면 낫는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오늘 난 기사 말이다. 그거 현진이는 괜찮대?’

현태주가 신문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접어 놓아서 보이진 않았지만 두 남자가 부둥켜안은 사진이 실려 있는 그 신문이다.

현태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식탁 위로 긴장된 정적이 흘렀다.

시선을 들어 똑바로 형을 응시하던 그가 느릿하게 되물었다.

‘안 괜찮을 건 뭡니까?’

‘…….’

현태주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래, 알아서 하겠지.’, 라고 중얼거리고 마는 형을 냉담하게 바라보던 현태오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저 성질머리하곤, 이라는 글자가 현태주의 이마 위로 흘러갔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현가의 새해 첫 아침은 그렇듯 불온하고도 조용히 지나갔다.

설날이라고 한가할 리 없이 일정이 들어찬 현태오는 그나마 시간이 난 오전 중에 병원에 들렀다가, 이제 오후의 일정들을 소화해야 했다.

“다음 약속이 세 시였던가?”

“예. 부원군 자택에서 세 시에 뵙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좀 빠듯하지만 늦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은퇴하신 뒤로 거의 바깥 걸음을 하지 않으시지만 근래에 노의원들과 몇 차례 술자리를 가지신 걸로 압니다.”

“영감님들이 모여서 쓸데없는 얘기나 나누셨나 보군. 내 속이 궁금하신 모양이지. ――어서 평항으로 돌아가야겠어. 귀찮게 구는 인간들이 한둘이라야지.”

“고작해야 세 달쯤입니다.”

진문성이 웃으며 대답하자 현태오는 “그래, 고작해야 세 달쯤이지.” 하고 비스듬히 턱을 괴며 창밖을 보았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무표정해진다.

새해 첫날의 도로는 거의 막히지 않았다.

기온은 낮았지만 날씨는 화창했고 길을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런 가운데 현태오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도 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로서는 드문 일이다.

거울로 그의 주름진 미간을 살피던 진문성이 물었다.

“피곤하시면 당분 있는 음료라도 좀 사다 드릴까요?”

그제야 창밖에서 시선을 돌린 현태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좀 거슬리는 게 있어서 그래.”

“거슬리는 거라면,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확실치 않아. 아무리 따져 봐도 위협이 될 만한 여지는 없는데…….”

현태오가 석연찮은 투로 중얼거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진문성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계연군 쪽으로 더 알아봐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

“아냐. 그쪽이 아니라,”

현태오가 손을 저으며 말을 멈추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손가락으로 천천히 제 팔을 두드렸다.

“나는 감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거든.”

“……?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문성이 동의했다. 이미 수십 년을 줄곧 곁에서 지켜봐 온 진문성은 현태오에게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전장에서는 오로지 감만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여러 번이었는데, 그게 감이 아니라면 천운을 타고났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유현진이…….”

그런 남자가 예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말을 꺼냈다.

현태오는 굳이 진문성에게 말한다기보다는 혼잣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이거 낭패다, 싶은 느낌이 왔는데……, 이유를 명확히 모르겠단 말이야.”

“낭패……요.”

진문성은 그의 말을 되풀이하며 현태오를 보았다. 그러고 보면 저 미간의 주름은 엊저녁쯤부터 틈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드문 일이었다. 이 남자가 여태 살아오면서 실수하거나 낭패를 겪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고, 어떤 문젯거리가 생겨도 그 이유나 해법 때문에 한나절 이상 고심하는 모습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

“어제, 바로 눈앞에 뭐가 있길래 무심결에 충동적으로 맛을 보긴 했는데, 아 이거 좆됐는데……, 싶은 느낌이 확 들었거든.”

애매하게 중얼거리는 그 말에는 저 남자답지 않은 단어가 세 가지나 들어가 있었다. 진문성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그럴 일까지야 있겠습니까? 신문에서 좀 떠들어 대긴 하지만 딱히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아니, 그런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머릿속이 좀 통제가 안 되는 느낌인데……, ……됐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현태오는 혀를 차며 말을 맺었고 진문성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는가 싶었다. 그러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런데 말이다, 문성아.”

“예.”

“요즘 들어 아주 가끔씩, 잠깐잠깐 좀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

“네가 보기엔 말이야,”

단어 하나하나마다 생각에 잠겼다 꺼내는 것처럼 느릿하게 말하던 현태오가 조금 더 오래 사이를 두었다가 중얼거렸다.

“혹시 그놈이 나를 좀 좋,”

거기서 말이 목에 걸린 듯 더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멈춰 있던 현태오는 미간에 주름을 하나 더 새기는가 싶더니, 다시 “아니야.”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뒤로 제법 오랫동안 차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부드럽고 고요한 승차감을 자랑하는 이 자동차의 엔진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현태오가 어느 순간 목을 좌우로 가볍게 꺾더니, 입을 떼기가 그다지 안 내킨다는 듯이 물었다.

“그놈은 지금 뭐 하고 있어.”

“한 시간 전에 정혜궁으로 들어가셨답니다.”

물어볼 줄 알고 있었던 양 진문성이 서슴없이 답하자 현태오가 낯을 그었다.

“다친 놈이 정초부터 거기는 왜 가. 일정이 취소되었으면 가만히 쉴 것이지. 몸 상태는?”

“어제 병원에서 처치받은 뒤로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일 오전에 진료가 예약되어 있습니다.”

유현진의 상태는 손과 전완에 부분적으로 2도 화상으로, 현태오와 비슷하거나 덜한 상태다. 1, 2주 안에는 나을 거라고 했다.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주는 현태오를 바라보던 진문성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그러고 보니,” 하고 입을 뗐다.

“유현진 씨가 지내기에 적합한 지방 신전 몇 군데가 추려졌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아주 짧은 찰나, 정적이 흘렀다.

거울 속으로 무표정히 진문성을 보던 현태오가 물었다.

“어디 어디야.”

“일곡과 비산도, 그리고 정천입니다. 수도에서 멀고 외지긴 하지만 기후 온화하고 조용히 살기 좋은 곳들입니다.”

“일곡은 빼. 거기는 차후년에 도로 계획 발표되고 나면 시끄러워질 거야. 비산도와 정천 중에서는…… 비산도가 낫겠군.”

사람들도 별로 오가지 않고, 딱히 개발될 일도 없고, 당장 낙후될 일도 없는 그럭저럭한 섬이다. 진문성도 그곳이 가장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유배되어 간 사람이 조용히 남은 평생을 보내기에는.

“비산도에 있는 신전에는 늙은 사제님 한 분만 계십니다. 신전의 규모는 작지만 노사제님 한 분으로는 일손이 부족해서 힘드신 것 같더군요. 비산도의 인구가 줄어 새 사제님을 더 보낼 조건도 안 된다고 하고요. 그래서 신관이 아니라도, 신전에 머무르며 일을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맞아들이겠다고 한답니다. 절차도 간단해서, 비산도의 신전에서 대상자의 서류를 확인한 뒤 그 대상자가 적을 두었던 신전으로 청원서만 넣으면 끝입니다. ……절차 진행에 두세 달 걸린다고 하는데, 각하께서 평항으로 귀환하실 시기를 고려하면 지금 비산도에 서류를 보내 두어야 합니다만.”

진문성이 잠시 기다렸으나 현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문성은 거울 속으로 그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휴일이 지난 뒤 서류를 보낼까 하는데, 진행할까요? ……아니면 굳이 지방으로 보내지 않고 그냥 수도에 남겨 두시겠습니까?”

조심스레 말을 덧붙이자 현태오가 삭막한 시선을 던졌다.

“너까지 농담하나? 남겨 둬서 어쩌려고, 정말로 그놈을 평생 옆에 끼고 살라고? 쓸데없는 소리 치우고 정신 차려.”

진문성은 예,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현태오는 변덕으로 원래의 예정을 변경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작전상의 변경이나 혹은 예정을 바꾸는 게 더 나은 결과를 얻겠다는 철저하게 계산된 의도가 있지 않고서는 늘 면밀하게 계획을 세워 그대로 나아갔다.

그러니까 이건 지극히 현태오다운 답이다.

……그렇게 납득하면서도 진문성은 공연히 거울을 살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현태오의 눈매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

“진문성이, 갑자기 왜 그래. 그놈 수도에 남겨 놓고 싶어? 왜. 그놈이 맘에 들기라도 했나?”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서슬이 퍼런 물음에 딱 잘라 대답하자 지그시 노려보던 현태오가 혀를 차며 언짢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비루먹은 들개도 사흘 밥을 주면 정이 붙게 마련인데, 그놈도 보다 보니 그렇게 밉살스럽기만 한 놈이 아니란 건 알겠어. 보고 있으면 나름대로 하는 짓이 웃기기도 하고, 그놈을 예뻐라 하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알 것도 같은데,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현태오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난 마당엔 멀리 보내 버리는 게 제일 깔끔하고 손쉬운 정리 방법이야.”

“예.”

그 단호한 대답에 진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휴일이 끝나는 대로 비산도에 서류를 보내겠습니다.”

이제 저 전직 사제님은 수도에서 1200킬로미터 떨어진 남쪽의 외딴 섬에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좀 심심은 하겠지만 그래도 사람 살기에는 나쁘지 않으니 한천 형무소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는 유현진을 생각하니 좀 짠하기는 했지만, 진문성은 여태 늘 그랬던 대로 상관의 명에 충실히 따랐다.

“……아니, 일단은 보류를…….”

“예?”

창밖을 응시하던 현태오가 불쑥 말했다. 진문성이 되묻자 잠시 그대로 있던 그가 혀를 차곤 고개를 저었다.

“아냐. 됐어. 보내.”

진문성은 기묘하다는 눈길로 현태오를 본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참 더 기다려도 번복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간의 주름만 더 짙게 새겨졌을 뿐이다.

그 뒤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차는 목적지에 이르렀다. 다행히 약속 시간에 딱 맞게 도착했다.

저택 돌담 바깥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문지기가 그들을 확인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손님이 오셨음을 안채에 알리는 듯했다.

차의 시동을 막 끄던 때, 진문성의 전화가 딱 한 번 울리더니 끊어졌다.

하루에도 걸려 오는 연락이 수십 통이다. 전화를 걸려다가 도중에 마음을 바꿔 버리는 실없는 전화에는 응답하지 않는 진문성이었으나, 수신자 확인이나 하고 말려던 그는 휴대 전화를 보고 멈칫했다.

신경도 쓰지 않고 차에서 내리려던 현태오는 진문성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곤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 아닙니다. 유현진 씨가 연락을 해서요.”

누구에게 연락이 왔는지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었지만 진문성은 얼결에 대답했고, 막 차 문을 열던 현태오는 움직임을 멈춘 채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그놈이 너한테 전화를 왜 해.”

“모르겠습니다. 전혀요.”

느릿하고 평연하지만 취조라도 하듯이 말꼬리가 사납다. 진문성은 변명하듯 대답했다.

“금방 끊으신 걸 보니 별일은 아니신가 봅니다. 나중에 연락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서 가시죠.”

물끄러미 진문성을 쳐다보던 현태오는 도로 차에 앉았다. 전화를 꺼내어 버튼을 누르는 그를 멀거니 쳐다보던 진문성이 “각하, 약속 시간이,” 하고 말했으나 쳐다보지도 않아 할 수 없이 잠자코 대기했다. 전화를 귀에 대지도 않는 걸로 보아 심지어는 화상통화다.

몇 번의 신호 끝에 상대가 받았다. 당혹감과 긴장감이 뒤섞인 유현진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전화하셨더군요.”

현태오가 그 표정을 훑으며 말문을 열었다.

‘예? 예……, 하지만 진문성 부관님께 했는데요.’

“지금 운전하느라 바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현태오의 앞에서 진문성은 말없이 운전대를 만지작거렸다. 차는 아주 얌전히 멈춰 있었다.

‘중요한 일은 아니고 그냥, 여쭤볼 게 있어서요.’

“예, 말씀하십시오.”

‘……, 아닙니다. 바쁘시면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도 바쁩니다. 전화한 김에 지금 말씀하세요.”

현태오가 삭막하게 다그치자 영상 안의 유현진이 침묵했다. 평소처럼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눈 깜박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동공도 살짝 흔들린다. 머뭇거리던 유현진은 시선을 떨구더니 들릴락 말락 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병원에 가신다고 하셔서, 좀 어떠신가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현태오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희미하게 입매를 당긴 그는 곧 여상한 낯으로 대꾸했다.

“병원이요? 진문성 부관이 말입니까? 그는 아주 멀쩡합니다.”

‘아니요, 진문성 부관님 말고, 현태오 씨가 어떠신가 하고요.’

“제 소식을 묻는데 왜 문성이한테 전화를 합니까?”

‘……, 현태오 씨는 바쁘시니까요.’

“전화도 못 받을 만큼 바쁘지는 않습니다.”

태연하게 그렇게 지껄인 남자가 조금 전 타국 땅에 있는 제 형에게서 온 전화를 몇 초 만에 끊어 버린 줄 모르는 유현진은 눈만 깜박이며 침묵했고, 무표정 위로 드러나는 당혹감을 현태오는 느긋이 구경했다.

‘……병원은 다녀오셨습니까?’

이윽고 유현진이 물었다.

“예, 조금 전에 나온 참입니다.”

‘좀 괜찮으십니까? 뭐라던가요?’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현태오가 되묻자 유현진은 말이 막힌 듯 어물거렸다.

‘……어제……, 저를 도와주시다가 무리하시지는 않았나 마음에 걸려서 그렇습니다.’

“아아, 어제요. 도와드리자마자 돌아보지도 않고 허둥지둥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자리를 뜨시더니 신경은 써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도와드리자마자’가 아니라 정확히는 ‘입맞춤을 마치자마자’겠지. 진문성은 어제의 상황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끝도 없을 듯이 이어지던―심지어 점점 대중들 앞에 놔두기 위험스러운 분위기가 되어 가던― 입맞춤 끝에 겨우 현태오가 입술을 뗐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며 얼어 있던 유현진이 별안간 ‘상아가 기다릴 테니 얼른 따라가 봐야겠다’며 달아나듯 자리를 떴다. 그 순간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기묘해지던 현태오의 얼굴을 진문성은 기억 속에 떠올렸다.

“…….”

지금 아무리 봐도 심술을 부리는 것만 같은 저 남자가 정녕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럽게 거울을 들여다보던 진문성은 거울 속으로 눈이 마주치자 얼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계를 가리켜 보였다.

시간이 없다는 그 손짓을 본 척도 하지 않고 현태오는 다시 전화로 시선을 돌렸다. 서늘한 얼굴에 눈동자만 흔들리고 있는 유현진을 낱낱이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화상은 별것 아닌데 다리에 좀 문제가 생겼답니다. 재활하던 데가 잘못되어 영구적인 장애가 생길지도 모른,”

태연하게 심술궂은 거짓말을 늘어놓던 현태오가 별안간 말을 멈추었다.

뚫어져라 전화를 들여다보던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정색했다.

“농담이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정말입니까?’

유현진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낮았다. 순식간에 핏기가 가셔 버린 얼굴이란 것을 목소리로 표현한다면 딱 저런 음색일 터였다.

“정말입니다. 간 김에 늘 받던 물리 치료를 받고 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몸 상태는 아무렇지 않아요.”

‘…….’

현태오가 혀를 차더니 갑자기 전화를 진문성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얼떨결에 마주 본 유현진은 목소리만큼이나 딱딱하고 창백한 얼굴로 의심스럽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문성은 흘끔 현태오를 곁눈질하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 정말입니다. 위험할 뻔했지만 다행히 큰 이상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문성의 말은 믿을 만했는지 유현진이 그제야 굳은 낯빛을 좀 풀면서 화면 속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든다.

‘그런데 지금 운전 중이시라고…….’

유현진이 의아하게 묻기 무섭게 현태오가 도로 전화를 가져갔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용건은 마치셨습니까?”

‘예. ……별일 없으셔서 다행입니다. 어제는 고마웠습니다.’

“아아, 예.”

고개를 끄덕인 현태오가 다시 보일 듯 말 듯 입매를 당긴다.

“어제 일이라면 외려 제가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할 줄 알았는데요. 고맙다고 해 주셔서 기쁘군요. 괜찮으시다면 그쯤은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어제 일’이라는 단어를 미묘하게 늘려서 말하는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어떠한 명백한 뉘앙스를 유현진도 알아차린 듯했다.

표정 없이 눈만 깜박이는데, 이번에는 눈에 띄게 보일 만큼 동공이 흔들린다.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마는 듯 몇 차례나 달싹이는 입술 옆으로, 목부터 귓불까지 차차 핏기가 올랐다.

그 낯을 느긋이 바라보던 현태오가 무심결에 피식 짧은 숨을 내쉬었다. 눈매가 느슨해진다. 진문성이 다시 시계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자 그 눈매는 도로 삭막해지고 말았지만.

“더 말씀 나누면 좋겠지만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정혜궁에 불려 가셨다던데, 피곤하실 텐데 푹 쉬십시오.”

‘예. ……그런데,’

뭔가 말을 하려던 유현진이 머뭇거렸다. 얼마간 어물거리던 유현진은 호흡까지 정돈하며 입을 꾹 다물더니 결심한 듯 재빠르게 말했다.

‘이번 주말이 어머니 기일이라서 묘소에 다녀올 예정입니다. 새벽에 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올 건데, 혹시 그날 시간 되신다면 술이라도 한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현태오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긴장한 기색으로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는 유현진을 말없이 마주 보았다.

“……이번 주말 밤 말씀이십니까?”

현태오가 되물으며 진문성을 보았다. 그새 수첩을 뒤적인 진문성은 고개를 저으며 ‘동영의 강 회장님과 석찬 약속이 있습니다.’라고 속삭였고 현태오는 전화로 시선을 떨구었다.

“좋습니다. 몇 시에 뵈면 될까요?”

‘음……, 일고여덟 시는 되어야 돌아올 것 같은데, 아홉 시쯤은 어떨까요. ……너무 늦은 시각입니까?’

“아홉 시. 아닙니다. 좋습니다.”

현태오는 눈을 부릅뜨며 곤란한 빛을 띠는 진문성을 아무렇잖게 무시하며 유현진과 약속을 잡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날 아홉 시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다니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마무리한 유현진과 통화를 끊고는 새카매지는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술이라……. 유현진이……?”

턱을 문지르며 미심쩍게 중얼거리는 현태오에게 진문성이 재차 확인하듯 말했다.

“각하. 그날은 강성구 회장님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셨습니다.”

“취소해.”

간결한 대꾸였다.

피치 못할 일 아니고는 일정을 바꾸지 않는 남자다. 게다가 당장 중요한 안건이 있어 만나는 게 아니라 해도 낯을 익혀 두는 편이 유리할 약속이었다.

그러나 현태오의 대꾸는 두말할 나위 없이 단호했고, 진문성은 더 이상은 설득하지 않았다.

현태오는 꺼져 있는 액정을 엄지로 문지르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늘 불편한 낯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으려 애쓰던 놈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술을 마시자고 하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입매를 올렸다. 그 입술에서 다시 피식, 헛바람이 새어 나온다.

“대관절 무슨 속셈인지 봐야겠거든.”

둥그스름하게 휜 눈매로 새까만 액정을 내려다보는 현태오를 진문성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현태오가 그새 무표정해진 그 특유의 낯으로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 마주 보았다.

각하, 정말로 비산도에――, 라고 혀끝까지 나온 말을 도로 집어넣은 진문성은 잠자코 차에서 내려 서슴없이 걸어가는 현태오의 뒤를 따랐다. 상관에게 결코 토를 달지 않고 지내 온 세월의 습관이었다.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칠 때까지 며칠간의 기억은 안개가 낀 것처럼 어렴풋하다.

그럼에도 어머니를 장지에 모신 날의 기억은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날은 하루 종일 흐려, 눈은 오지 않았지만 매섭게 추운 하루였다.

아직 하늘이 캄캄하던 새벽에 장지를 향해 출발하는 유현진과 유세진을 현가의 형제들이 배웅해 주었다. 장남은 목도리를 둘러 주고 차남은 장갑을 챙겨 주고 삼남은 핫팩을 주머니에 쑤셔 줬다.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 전화에는 장례식에 누구보다도 먼저 찾아왔었던 제상아가 보낸 ‘어머님 잘 모셔다드리고 와.’라는 짧은 문자가 그 이른 시각에 도착해 있었다.

일가친척도 없이 당그라니 고아로 남은 유현진과 유세진을 장지까지 직접 데리고 간 건 현가의 안주인이었다. 아버지와 합장을 하는 과정 내내 다 돌봐 준 그녀는 하루 내도록 양손에 각각 유현진과 유세진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날 어머니의 차를 운전해 장지까지 동반한 현가의 사남은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가 줄곧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서 있어 준 것을 유현진은 알고 있었다.

그 고마운 이들의 기억을 유현진은 지금도 묘소에 갈 때마다 떠올리곤 했다.

부모님의 묘소는 아버지의 고향 땅에 있었다.

시골 출신이었던 아버지의 고향은 수도에서 차로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데, 워낙 작은 마을이라 변변한 숙박 시설도 없는 터라 그들 형제는 부모님의 기일이면 늘 새벽같이 출발해서 당일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 지 벌써 십 년도 더 됐다.

“아이고, 아부지어무니, 자갈길 운전하다 아들내미 병 들겄소~. 아니 이놈의 동네는 왜 이렇게 개발이 안 돼?!”

산어귀에 차를 세워 두고 묘소로 올라가 두 분을 합장한 무덤 앞에 앉자마자 유세진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초반에 대중교통으로 오가느라 새벽에 별 보면서 출발해서 한밤중에 별 보면서 귀가하던 때보단 낫잖아.”

“그건 그래요.”

기일마다 손 꼭 붙들고서 대중교통으로 오던 형제가 그나마 재작년에 유세진이 차를 사면서는 오가기가 훨씬 편해졌다.

유현진은 무덤 비석 앞에 앉았다. 겨울이라 잔디는 버석버석 말랐지만 해가 잘 들어서 좋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가을 녘에 한 번, 어머니 돌아가신 정초에 한 번, 해마다 두 번씩 찾는 이곳은 올 때마다 변함없었다. 도통 개발이 안 돼서 오가는 길이 험하다고 유세진은 투덜거리지만, 옛 모습 그대로 멈춰 있는 것도 좋을 성싶었다.

유현진은 비석 앞에 맑은 술을 치고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유세진도 그 옆에 앉아 기도한다.

십여 년이 지나고 보니 처음의 그 하늘 아래 형제 둘만 남아 버렸던 서러운 고아의 마음도, 애통하게 보고 싶던 마음도 잔잔해졌다. 이제는 아스라한 그리움과 호시절의 자잘한 기억들만이 잔향처럼 남았다.

아버지, 어머니, 잘 계시지요. 저와 세진이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아니 요즘은 다소 애로 사항이 많지만요―. 수십 년 지나 다시 만날 날까지 그곳에서 편안히 기다려 주세요. 저희도 잘 지내다 갈게요. ……모쪼록 그럴 수 있게 돌봐 주시면 더 좋구요…….

마음속으로 인사를 올리다 보니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해진 유현진은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그러다 옆에 비스듬히 앉아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유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

“아니……, 넉 달 전에 아버지 기일에 왔을 때만 해도 신관의 예로 기도를 드리던 형님이 지금은 그렇게 일반인이 돼서 기도를 하니까 좀, 마음이, …….”

유세진이 시무룩하게 말을 흐렸다.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삽시에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기색이다.

“넌 십여 년을 신관 동생으로 살았던 놈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기도는 누가 올리든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아. 하나람님이 뜻을 이루기 위해 사제들을 조금 더 쓰실 뿐, 일반인을 덜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어머니는 아쉬워하실걸요. 신실한 분이셨으니까.”

“그거야 뭐……, 하는 수 없지.”

“형님은 안 아쉬워요?”

“아쉽지 않다……기는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쉽냐고 하면 딱히 그것도…….”

유현진은 제 눈치를 흘끔 보며 묻는 동생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허세도 거짓말도 아니라, 정말로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신관에 뜻이 있어서 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길로 흘러갔다.

그러다 별안간 부자연스럽게 길이 엇나가서 당황스러울 뿐, 원하던 걸 빼앗긴 기분은 아니다. 그저 지금 당장 길을 잃었을 따름이다. 어쩌면 애초에 하나람님께서 내게 마련해 주셨던 게 신관의 길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잃어버린 길을 유현진보다 유세진이 더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아오, 그 양반 진짜 옛날부터 맘에 안 들더니만 기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설을 내뱉는 그 상대가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다. 죄인의 심경이라 차마 그 상대를 두둔해 주지는 못하고, 이번엔 유현진이 슬며시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넌 현태……, 현 총독님이 왜 싫어?”

“왜 싫으냐니! 형님이 지금 이 꼴이 된 게 누구 탓인데요!”

“(따지고 보면 내 탓이 아주 없진 않지만 지금 이 말을 했다간 벼락 맞을 것 같으니까 일단은 삼키자)……옛날부터 싫다며.”

“아 일단 성격이요! 그 성격을 어케 좋아해?! 좋다는 인간이 있으면 그게 제정신이 아니지!”

두 명을 동시에 일타쌍피로 까 내린 유세진은 유현진이 의기소침해하자 제 딴에 조금 미안해지긴 했는지, 낯을 그은 채 불퉁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양반도 나 싫어한단 말이에요.”

“너를? 설마. 그럴 이유가 뭐 있다고?”

“나야 모르죠! 하지만 날 볼 때의 눈빛이 얼마나 쌀쌀맞은데요!”

“그분이야 모든 사람에게 다 공평하게 쌀쌀맞잖아.”

“아니, 난 특별하다니까요? 옛날부터 그랬어! ……그래, 맞아, 옛날부터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특별했던 것만 같아…….”

진지하게 검지를 치켜들고 말하던 유세진은 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지그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홱 고개를 돌려 유현진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형님, 형님은 기억 안 나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안 돼서 말이에요. 형님이 신학교 진학하기로 결정하고, 나 데리고 그 집에서 나오기로 했을 때에요. 그때가 아마 그 양반이 출정 나가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

“아주머님이 찾아와서 형님은 신학교에 들어가더라도 나는 그냥 그 집에 계속 지내도 된다고, 힘들게 나가서 고생하지 말고 학업 다 마칠 때까지 나만이라도 그 집에서 지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었잖아요.”

“그랬지.”

유현진이 동생을 데리고 현가에서 나가기로 했을 때, 현가의 안주인이 찾아와 그들 형제를 타일렀다. 그녀의 제안은 고마웠지만 거절했다. 아무리 그것이 그녀의 진실된 선의라 해도 언제까지고 남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유세진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아껴 아껴 버틸 만도 했다.

“그때, 내가 태양 형한테 빌렸던 책들 돌려주느라 본채에 갔었는데, 그때 마침 태양 형 방에 그 양반이 찾아왔었단 말이에요. 내가 태양 형한테 그동안 책 잘 봤다고 인사하는 걸 이―렇게 삭막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혼잣말을 툭 중얼거리는데,”

유세진이 말을 하다 말고 입매를 실룩거렸다. 기억을 떠올리다가 다시 부아가 치민 듯했다.

“‘한 놈은 제 몫도 제대로 못 하고 제 형 등골만 빼먹는 망나니고, 한 놈은 제 몫도 빠듯한 주제에 망나니까지 들쳐 업고 나가려 드는 멍청이고…….’ 하고, 무슨 거치적거리는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리더라니까요?!”

유현진은 눈을 껌벅였다.

“잘못 들었겠지.”

“진짜라니까요! 아주 한심스럽고 언짢다는 눈길로 요―렇게 내려다보다가 휙 지나가 버린 것까지 다 기억난다니까!”

제 눈초리를 두 손가락으로 확 치켜올리는 동생을 유현진은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현태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 게 아니라―워낙 말을 독하게 하는 인간이니 그쯤이야 하려면 할 수도 있겠거니 했다―,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냈다는 게 상상이 안 됐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면 또 모를까.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었나 보네. 너 나 몰래 그때 현가에 뭐 사고라도 쳤던 거 아냐?”

“아니거든요!”

유세진이 억울하다며 펄쩍 뛰었다.

“내가 그때 얼마나 이를 갈았는데! 두고 봐라, 내가 반드시 출세해서 우리 형 업고 다닐 테다, 하고 내가 얼마나 피 터지게 공부했는데! 그래서 내가, 어?! 재학 중에 고위 관리 시험 합격해서, 어?! 이렇게 앞날이 탄탄대로잖아요!”

“결과적으론 고맙게 된 거 아니냐.”

한껏 뻐기는 기색으로 아무렴요,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도중에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눈을 부릅뜨며 “무슨 소리예요, 결과보다는 과정이지!!” 하고 외치는 유세진이었다.

“그 탄탄대로에 내가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한천 형무소라든가……, 유현진이 어둑한 낯으로 중얼거리자 유세진도 덩달아 시무룩해졌다.

아버지, 어머니, 한 잔 더 드세요, 하고 두 번째 술잔을 치는 유현진을 우울하게 보고 있던 유세진이 불쑥 중얼거렸다.

“난 그 양반이, 무소불위에 저 잘난 줄만 알고 남의 감정은 신경도 안 쓰는 인간으로 평생 그렇게 살다 죽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저주할 정도로 싫었어?”

“저주가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아주머님도 만날 다른 형들 죄 제쳐 두고 그 양반을 제일 걱정했잖아요?!”

그 말도 맞다.

현가의 안주인은 다들 자기 자리에서 한가락씩 하는 아들들 중에서도 제일 탁월한 막내아들을 누구보다 염려했다. 늘 험지로 다녀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성격 때문이었다.

막내아들을 위한 그녀의 단골 기도문은 ‘그 아이가 어디서든 건강하길, 안전하길, 그리고 따뜻한 아이가 되길’이었고, 언젠가 한 번은 신전으로 찾아와 유현진을 붙들고 기도하다가 ‘걔가 그 성질머리 때문에 부하들 중 누군가한테 칼 맞지는 않겠지……?’ 하고 진지하게 걱정한 적도 있었다.

친어머니도 그럴 정도인데 하물며 남들 눈에야 어찌 비치겠느냐만,

“그래도 난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들던데……. 못된 짓은 한 적 없잖아.”

“못된 짓 안 한다고 착한 것도 아니잖아요.”

“……. 너무 그렇게 싫어하지 말아 주면 안 되겠니……?”

이번엔 유현진이 시무룩해졌다. 악악 고함을 질러 대려던 유세진이 그 얼굴을 보자 어물어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으로 유현진을 지켜보던 유세진은 겁먹은 듯이 중얼거렸다.

“형님……, 정말…… 정말로…… 그 남자랑 사귀, 는, 건, ……아닌 거죠? 그렇게, 그렇게 막 뽀뽀하고 그럴 정도로, 그런, 사이는, 아닌 거 맞죠……?”

순간 유현진은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 유현진을 보고 더럭 눈을 부릅뜬 유세진이 숫제 멱살까지 잡을 기세로 어깨를 붙들고 “형님?!” 하고 짤짤 흔드는데도, 유현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다. 아닐 거다. ……그런데 정말 아닐까?

생각이 뒤쪽으로 흘러갈수록 스스로 희망회로를 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슬그머니 마음이 주책맞게 흥성거리긴 했지만, 더불어 불안감도 함께 흥성거렸다.

유현진은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마음 심란한 때가 없었다. 동시에, 요즘처럼 마음이 달게 욱신거리는 때도 없었다.

근래 들어 유현진은 하루에 이백사십 번씩 현태오의 진심이 뭔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진지하게 ‘교제’해 책임질 작정일 리는 없다고, 이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적당히 조용히 떨궈 내겠거니 싶었다. (죄책감으로 인한 공포에, 그날이 하루빨리 오길 빌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으로는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현태오를 대할 때마다 ‘혹시 설마 정말 계속 책임지려는 걸까’, ‘이 남자랑 내가 지금 정말로 교제를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싹튼 의심이 나날이 커져 갔는데, 그럴 때마다 헛생각 말고 쓸데없는 희망회로 그만 돌리라고 스스로의 뺨을 치며 애써 고개를 저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정말로 진짜일까. 정말로 계속 곁에 둘 마음으로 대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사라지지 않았다.

산상에 갔던 그날, 그 시끄럽고 사나웠던 때.

사람들을 거침없이 헤치며 다가와 더럭 끌어안던 완강한 팔, 다친 곳은 더 없는지 살피던 심각한 눈길, 화가 치민 것처럼 유현진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시선, 그리고 숨 막히게 입속을 파고들던 더운 숨결까지.

“――.”

정말로 그것들이 단순히 의무감이었을까. 책임감만으로 정말 그렇게까지 했을까.

심장이 저 아래로 퉁 떨어졌다 공처럼 튀어 올랐다.

들뜬 기대와 희망, 달콤함이 죄책감, 불안감, 두려움 따위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정말로 진짜일까. 정말로. 정말로……?

“현 총독님이 정말로 형님이랑, ……거라고 그래요?”

유세진이 울멍울멍하며 물었다. 불안스럽게 처진 눈초리에는 저러다 눈물이라도 맺힐 것 같았다.

“……몰라. 모르겠는데, 그래도, ……아니지 않을까.”

“근데 그날 뽀뽀는 왜 했대요?”

눈초리를 도로 치켜올리며 묻는 유세진에게 유현진은 다시 합죽해졌다.

그것은 현재 유현진에게도 가장 큰 의문이었다.

왜 했을까.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이렇게 마음이 희망회로를 돌리며 둥실둥실 부풀진 않을 텐데.

유현진도 몹시 알고 싶었다. 그래서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날, 그, 산상에 갔던 날이요. 그날 왜, ……그러셨습니까?’

비록 그렇게 물어본 게 그로부터 며칠은 더 지나서였고, 조용히 차를 마시다가 뜬금없이 꺼낸 말인 데다, 심지어 주제 또한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분명 알아들었을 터였다.

근래 산상에서의 사고 때문에 연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현태오는 밤늦게 잠시라도 매일 유현진의 집에 들렀다 갔다. 그러나 뭔가 일이라도 있는지 기분이 별로 안 좋은 듯 늘 미간에 주름을 새긴 채 생각에 잠겨 있다 가곤 했다.

엊그제도 피곤한 기색으로 자정 넘어 찾아와 자신이 집주인인 양 거실에 앉아 문젯거리라도 있는 듯한 낯으로 차를 마시던 현태오는, 유현진의 느닷없는 물음에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주었다.

유현진은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은 와중에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모르겠다. 저 무심한 눈길이 뭘 생각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유현진을 응시하던 현태오가 잠깐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는가 싶었다.

‘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우리 사이에요?’

그 여상하고 대수롭잖은 반문에 순간 말이 막혔다.

‘안 되는 건…… 아니……ㄴ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유현진 씨가 익숙해지도록 하나씩 단계를 밟아 가자고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요. 유현진 씨와 저는 손을 잡았고, 몸도 쓰다듬었지요. 그러면 그다음은 뭐겠습니까?’

‘그야, ――.’

몸을 쓰다듬었다고 그렇게 당당히 말하기에는 몹시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아예 그런 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반박도 할 수 없다. 그의 말마따나 단계로 따지자면 확실히 그다음 순서는, ……그게 맞았다.

‘그러면, 뭐가 이상하거나 잘못된 점이 있습니까?’

‘……없…… 죠.’

그럼 문제없지 않냐며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린 현태오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다시 차를 마셨고, 유현진은 그 이상 따지지도 캐묻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쩐지 말려 넘어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하고 유현진이 미심쩍게 생각하던 때, ‘그리고’ 하고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이후로도 아직 남아 있는 단계들이 더 있는데 이 정도로 당황하셔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기억을 못 할 뿐 이미 밟았던 단계들이긴 합니다만.’

‘…….’

그 이야기만 나오면 양심이 쿡쿡 찔려 딴말을 할 수가 없는 유현진은 그대로 합죽이가 되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서 뚫어질 듯 유현진을 쳐다보는 눈매도 마주 볼 수 없었다. 눈을 마주쳤다간 찔리는 심정을 들켜 버릴 것 같아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차만 홀짝였다.

그때 별안간 현태오가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그 손짓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지만 유현진은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조금 더 느리게, 그만큼 더 위압적인 손짓이 한 번 더 탁, 탁, 탁 옆자리를 두들긴다. 그제야 유현진은 개미보다 약간 빠를까 말까 한 속도로 그 옆으로 가 앉았다.

‘……그때,’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미간에 희미한 주름이 서렸다.

‘갑자기 그렇게 했던 건 죄송합니다. 저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라, …….’

정중하게 사과한 현태오가 턱을 쓰다듬으며 저쪽을 본다. 그럴 리 없는데, 그 당시를 떠올리고 곤혹스러워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눈살을 찌푸리고 정원을 내다보던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 불쾌라고 할 건 아니고요.’

불쾌인지 뭔지 구분도 못 할 만큼의 당황과 놀람이 가장 컸다. 그러나 그 직후에 닥쳐온 것은 분명히 벅찬 기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유현진은 저절로 낯이 확 달아올라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지그시 보고 있는 시선에 그런 낯을 보여선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떨어뜨리고 만다.

불현듯 현태오가 손을 뻗어 유현진의 뺨을 그러쥐었다. 얼굴을 들어 올리려는 손길에 저항하듯 턱에 꾹 힘을 주었지만,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손은 기어이 유현진의 얼굴을 들고 말았다.

엉겁결에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마치 팽팽하게 견디던 밧줄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현태오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유현진의 머리를 당겼다.

사납게 입술을 빨며 잘근거리던 혀가 입속 깊이 파고들었다.

아주 작은 숨결 하나라도 새어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겹쳐진 채로 모든 것을 낱낱이 다 발라먹으려 드는 탐욕스런 입이었다.

얼마나 이어졌는지 모를 입맞춤은, 현태오의 팔을 움켜쥔 유현진이 어느 결에 혀를 씹히곤 그 주먹을 움찔 움츠리고서야 끝이 났다.

움직임을 멈춘 채 잠시 그대로 있던 현태오가 천천히 입을 뗐을 때, 유현진은 제대로 호흡을 하지 못해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당혹스레 쳐다보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구석구석 내려다보았다.

‘고작 손잡는 데에도 이제야 간신히 익숙해질 참인데, 보아하니 이것도 한참 걸리겠습니다.’

나직이 내뱉은 현태오는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돌아갔고, 유현진은 배웅할 생각도 못 하고 아연히 앉아 있기만 했다.

……어떡하지.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 가득 찼다.

어떡하지. ……좋잖아.

너무 좋았다.

근 삼십여 년을 육욕에 대해서는 별로 떠올리지도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그 숨결과 체온, 제 혀와 겹쳐지는 그 혀의 농밀한 느낌까지, 모든 게 다 달콤하고 좋았다.

“형님, 부탁인데요…….”

기억에 빠져 있던 유현진은 유세진이 목구멍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유세진이 퀭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이 그 양반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는데……, 나랑 이런 얘기를 하는 상황에서 너무 그렇게 대놓고 티 내진 말아 줄래요……?”

정말로 울어 버릴 것 같다구요, 하고 유세진은 무릎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어느새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유현진은 얼른 얼굴을 문질렀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요. 이렇게 가다가 그 양반을 속여서 이 사달이 났다는 게 들키게 되면, 정말로 곱게 끝나진 않을 거라구요.”

“……그래서 말이야, 오늘, 하려고.”

유현진은 굳게 결심한 낯으로 비장하게 말했다. 유세진의 말이 뚝 멎었다. 입을 벌린 채 유현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세진의 낯이 점점 창백해졌다.

“……뭘요.”

“그때 상아가 말했던 두 번째 방법.”

“정혜궁마마가 말했던 두 번째 방법, 이라면,”

그 남자한테 술을 퍼먹여서 인사불성으로 만든 뒤 그 틈에 잠자리를 가져 버려서 거짓말을 사실로 만든다.

“…….”

“…….”

유세진은 멍하니 유현진을 쳐다보다가 화들짝 뛰어올랐다.

“혀, 혀, 혀, 혀, 형님?!”

“오늘 밤에 같이 술 마시기로 약속 잡아 뒀어.”

정색을 하고서 단호하게 말하는 유현진을 유세진은 아연히 쳐다보았다.

그 직후 유세진의 반응은 볼만했다. 일인무언극을 하는 듯 얼굴 위로 수백 가지 표정이 지나갔다. 버럭 고함을 지르려다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고, 그 자세 그대로 뭔가 곰곰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내 머리를 홱홱 내저었다. 그리고 처량하게 애원할 것처럼 유현진 쪽을 돌아보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듯 고개와 어깨를 툭 떨구며 한없이 지면과 가까워졌다.

“형님……, 정말 그래야겠어요……?”

그게 결코 좋은 해결책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는 상황이라는 건 둘 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어영부영 흘려보내 현태오가 이대로 조용히 유현진과 작별을 고할 때까지 버틸 수만 있다면 그게 최선일 테지만, 왠지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찮아 보이기도 했다.

결국에 그 결말이 어떻게 되든 당장의 위험 가능성은 없애고 싶기도 했고 또 어차피 이미 신관도 아닌바에야 까짓것 누구랑 잠자리 좀 갖는 게 대수로울 일은 아니다.

아니긴 한데,

“혀어엉…….”

유세진은 유현진이 저승사자에게 잡혀갈 날을 받아 두기라도 한 양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세진아, 세진아. 그러지 마. 난 괜찮아. 정말이라니까? 난 외려 좀 설레기도 하,”

허겁지겁 유세진을 달래려다가 진심이 담긴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싹 거둔 유세진이 스산하게 유현진을 노려본다. 유현진은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형님. 그런데 현 총독님 완전 말술이에요. 밑 빠진 독이라구요. 그건 알아요?”

“응. 그래서 독주로만 궤짝으로 사다 뒀어.”

술 궤짝을 배달해 준 아저씨가 ‘이 많은 걸 가정집에서, 대체 몇 명이 마시려고요? 이거 다 마시면 황소라도 거꾸러지겠는데.’ 하고 껄껄 웃고 갔다.

“그리고, 술에다 이온 음료를 타면 더 잘 취한대. 술 종류를 섞어도 금방 취하고. 그래서 독주도 여러 종류로 사고, 이온 음료도 사 뒀어. 그리고 상아가 성공을 기원한다면서 정동반도에서 나는 찻잎을 줬는데, 그 차가 술기운을 더 돋워 준대.”

나는 숙취 해소제를 미리 정량보다 넉넉히 먹어 둘 거야, 라고 제 계획을 고하는 유현진의 말을 들으며, 유세진은 몹시 미심쩍은 눈치로 “글쎄, 그 양반이 그렇게 호락호락 거꾸러질까…….” 하고 중얼거렸다.

이온 음료에, 폭탄주에, 심지어 술에 미친 술꾼들이나 천금을 주고 구해 먹는 정동차까지 마련했다면 이 형님도 준비를 할 만큼은 한 셈이지만…….

“게다가 설령 어찌어찌 거꾸러진다 한들, 정말로 할 수 있겠어요, 형님이? 쓰러진 양반 붙들고? ……그걸……?”

괴괴한 침묵이 흘렀다.

버석거리는 잔디를 내려다보던 유현진은 고집스레 고개를 들어 유세진을 보았다.

“이론적으로는 정확하게 알아 뒀어. 그리고,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해야지.”

계속 위험한 다리 위로 걸을 수는 없다. 자칫하다간 본인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동생까지 싸잡혀서 형무소로 끌려갈 판인데, 이대로 요행만 믿고 어물거릴 수는 없었다.

눈에 번뜩 힘을 준 유현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세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움츠렸다.

“형님이 그렇게 결심했다면야……, 기왕 시도를 할 바엔 성공을 빌어 드릴게요.”

몹시 안 내키지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더듬더듬 말하던 유세진은, 그렇게 말하는 것까지가 한계였던 듯 그대로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더니 메마른 풀밭에 털푸덕 누워 버렸다.

“왜 그래, 세진아!”

“아니……, 갑자기 정신적인 타격이…….”

내가 어쩌다 친형의 정조를 두고 고뇌하게 되었나……, 성공해도 싫고 실패해도……, 하고 중얼중얼하며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유세진은 그렇게 돌돌 말린 채 한참 동안 풀릴 줄을 몰랐다.

유현진은 그런 동생과,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부모님의 묘와, 해가 기울어 가는 푸르른 하늘을 천천히 번갈아 보며 묵직한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

곰곰이 따지고 보면 범죄가 아닌가.

아니, 그냥 대충만 따져 봐도 범죄다.

파문되다 못해 급기야 범죄를 획책하는 몹쓸 (구)신관 유현진은, 이제 설령 모든 진실이 다 밝혀지고 만사가 순조롭게 마무리된다 한들 양심이 시커메져서 다시는 신전으로 못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글퍼했다.

“그래, 토막 난 양심이 아픈 데에 비하면 육체의 고통쯤은…….”

유현진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육체의 고통보다는 정신적 자괴감으로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탓이다.

간신히 얻은 기회이니 기왕 마음먹은 바엔 어떻게든 성공해야 했다. 술도 부엌 창고가 가득 차게 여러 궤짝 들여놓았고 안줏거리도 마련을 다 해 놨다. 뿐인가, 계획의 최종 성사에 필요한 피임 기구나 윤활유 등등까지도 빠짐없이 갖추어 두었다.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는 유현진은 막상 기회가 현실로 다가왔을 때 지식과 기술이 부족해서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미사담이 빌려준 책들을 머리 싸매고 탐독하며 탐구했다.

물론 부분부분, 아무리 생각해도 죽어도 할 자신이 없는 몇몇 취향 및 자세 등등은 흐린 눈으로 쳐다보며 후루룩 넘겨 버리긴 했지만, 자신은 이제 남성 간의 육체관계에 대해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성실하게 그 지식대로 이행한 유현진은,

“……. ……. …….”

그 첫 단계로 몸 안과 밖을 말끔히 씻어 내는 작업을 마치고 욕실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 나올 때 이미 몸과 마음이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이…… 이 정도는 괜찮아.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욱신거리는 엉덩이와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다독이기 위해 스스로를 타이르듯 중얼거리며, 유현진은 아직도 배 속이 꾸룩거리는 듯한 느낌을 끌어안고서 소파에 널브러졌다. 이래도 되나,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가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현실적인 타격감을 어떻게든 잊어버리려 몸부림치며.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다. 생각보다 차가 많이 막혀서 귀가가 늦어져 버렸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슬슬 일어나서 주방에 쌓여 있는 안줏거리들을 다듬어서 상도 좀 차려 놓고, 저 책들도 한 번 더 훑어봐서 복습도 해 놓고 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 사흘에 한 번씩 출퇴근하며 집안일 봐 주는 아주머니에게 저녁 술상거리를 좀 사다 달라고 했더니, 술 쌓인 걸 보고 무슨 잔치라도 열 줄 아셨는지 재료를 산더미같이 쌓아 두셨다.

청소도 좀 해 놔야 하는데. 일단 나비나 돌려 놓자.

멀리 묘소를 향해 새벽같이 출발했다가 저녁 느지막이 되어서야 돌아오자마자 준비물들을 확인하고, 몸을 씻고, 예상했던 시간과 노력보다 세 배는 더 들여 몸 안쪽까지 씻어 내고 났더니 온몸이 기진맥진 늘어진 유현진은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몸뚱이를 부여잡고 겨우겨우 로봇 청소기를 켰다. 그러나 그런 뒤 다시 소파에 털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하루 종일―며칠 전부터― 바작바작 긴장했던 그 시간이 다가오니 신경 줄마저 나달나달한 상태였다.

정말 이래도 되나. 지금이라도 취소하면 안 될까.

몇 번이나 전화로 뻗었던 손을 도로 거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마음속의 속삭임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없애 버릴 수 없는 욕심이었다.

이렇게 구차하고 비겁하게나마 저 남자를 가져 보고 싶다는 욕심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러 버리는 듯한 죄책감도 따라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음습하게 몰래 좋아하다가 흉계를 꾸며 손에 넣는 게 아닌가.

좋아하는 사람을 상대로 범죄라니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가슴이 뛰어서 더 괴로웠다.

하나람님, 전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하나람님, 제발 제게 길을 알려 주세요. 하나람님… 님 …… 님 ……….

그렇게 아주 잠시 잠깐 소파에 엎드린 채 눈 감고서 기도했을 뿐인데, 뭔가 이상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선가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온갖 신선하고 구수하고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긴장해서 뭘 제대로 먹지를 못했는데.

근데 이게 갑자기 무슨 냄새지, 하고 고개를 든 유현진은 주방에서 소매를 걷고서 돌아다니고 있는 현태오를 보았다.

“…….”

저건 뭐지. 갑자기 왜 환각이 보이나.

비몽사몽으로 눈만 끔벅거리며 멍하니 쳐다보는데, 매우 빠르고도 능숙한 손길로 도마에 대고 칼질을 하고 있던 환각이 유현진의 시선을 알아챈 듯 돌아보았다.

“깼습니까?”

“……예?”

“돼지는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건지는 몰라도 그냥 수육을 했습니다. 해물과 생선은 선도가 좋아서 회로 떴고요. 소는 육회거리인 것 같아서 육회로 무쳤고.”

“……예?”

소파에 엉거주춤하게 무릎 꿇고 앉은 유현진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대관절 뭔 일인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 거실 테이블 위에는 접시들이 놓여 갔다. 마련해 두었던 안줏거리들이 곧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로 탈바꿈해서 차곡차곡 놓인다. 테이블 옆에는 어느새 술도 궤짝째로 놓여 있었다.

“묘소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예.”

여전히 주방에서 뭔가를 하면서 묻는 현태오에게 유현진은 그제야 겨우 대답했다.

얼떨떨한 머리를 한 번 세게 흔들고 시계를 보니 그가 집에 오기로 약속했던 시간에서 한 시간도 넘게 지나 있었다. 눈만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순식간에 두 시간이 증발해 버렸다.

아연히 시계를 보던 유현진이 허둥지둥 일어나 주방으로 갔지만, 현태오는 한 손에는 수육을 담은 접시, 한 손에는 술잔 두 개를 들고 “다 됐습니다. 나가죠.” 하고 거실로 나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유현진도 할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깜빡 잠들었었나 봅니다.”

“예. 불러도 안 깨셔서 안주는 재료 있는 거 보고 제가 그냥 적당히 만들었습니다.”

‘그냥 적당히’라기엔 놀랍도록 호화찬란한 음식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남자가, 이걸 혼자서 다, 라는 경이로움과 동시에 사람을 초대해 놓고 잠이나 퍼질러 자면서 손님에게 일을 시켜 버렸다는 곤혹감이 솟구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오늘 같은 날, 시작이 좋아도 모자랄 판에 초장부터 웬 망조가 이렇게 들었지.

당혹스러워하는 유현진을 내려다보는 현태오는 여느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저 무표정한 얼굴가죽 아래에 담겨 있는 게 분노인지 경멸인지 짜증인지 뭔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유현진이 흘끔 그의 눈치를 살피는 건 또 귀신같이 알았는지, 현태오도 마찬가지로 흘끔 유현진을 보더니 평연히 말했다.

“화 안 났습니다. 외려 신선했지요.”

“예?”

“약속을 잡아 불러 놓고서 편안히 잠자리에 들어 절 기다리게끔 하는 사람이 이 제양에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처음 있는 일이라 신선했습니다.”

어디서 뺨이라도 맞았다간 ‘내 뺨은 때린 건 네가 처음’이라며 구혼할 양반일세…… 하고 어이없이 생각하던 유현진은 다음 순간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니구나. 비아냥이구나.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유현진이 깊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현태오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경고를 알아먹은 유현진의 정중한 사과를 받아는 주는 모양이다.

일단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 이래서야 과연 오늘의 거사에 성공할 수는 있을까 암울해지는 유현진이었다.

현태오의 맞은편에 앉은 유현진은 그제야 테이블 위를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보기 좋게 접시에 담긴 음식들은 냄새도 그만이라, 허기진 위장이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요리 잘하시네요.”

“예, 잘합니다.”

진심으로 감탄하며 중얼거리는 유현진에게 현태오는 당연한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약간 재수 없었다.

“음식하시는 거 한 번도 못 봤던 것 같은데요.”

“그야 본가에 있을 때는 제가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런 걸 잘 못 하는데…….”

“예, 그러시겠지요. 차 끓이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갑니다.”

“…….”

많이 재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불러 놓고 그가 상을 다 차려 놓을 때까지 퍼질러 자 버린 입장에서는 잠자코 있는 수밖에.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구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오는 그쯤에서 심술은 그만 부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느슨해진 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먼 길 다녀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나 봅니다. 음식이 다 되어 가도록 미동 한번 없이 그대로 계셔서, 잠든 게 아니라 죽은 건가 싶던 참입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현태오는 본인도 젓가락을 집어 들며 유현진에게 권했고, 그러잖아도 먹음직스런 냄새에 두근거리는 위장을 달래고 있던 유현진은 순순히 젓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현태오가 만든 그 음식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야들야들하게 완벽한 식감으로 잡내 없이 잘 삶긴 수육을 비롯하여 혀에 착 감기는 두께감으로 균일하게 썰린 회,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감칠맛으로 고기 본연의 맛이 살아 있는 육회와, 담백하고도 얼큰하게 생선의 맛을 살린 지리, 아삭하고 새콤달콤하게 무친 겉절이 등등.

놀라웠다. 훌륭했다. 감탄스러웠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는 것 같다. 아니, 아마 배가 안 고팠더라도 엄청나게 맛있었을 거다.

눈을 둥그렇게 뜬 유현진은 눈앞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입만 오물거리며 먹는 데 집중했다.

그러는 유현진과는 대조적으로 현태오는 회나 한두 점 천천히 집어먹으며 눈앞의 걸인을 지켜보기만 했다.

좀 우습기도 하고 어이도 없다는 눈길로 보고만 있던 그는 접시에 쌓여 있던 음식이 줄어들고 유현진의 젓가락질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할 즈음에야 툭하고 말을 건넸다.

“묘소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가까운 곳은 아니라 피곤하셨을 텐데요.”

먹느라 행복하게 넋을 놓고 있던 유현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예. 차가 막혀서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잘 다녀왔습니다.”

수면도 체력도 기력도 다 부족해서 하루 만에 심신이 초췌해진 느낌이긴 했지만 어쨌든 무사히 갔다 왔다. 유현진을 천천히 훑어보던 현태오가 말했다.

“듣기로는 그곳에도 더 이상 혈연이나 아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던데, 그러면 차라리 가까운 곳으로 이장해서 모시는 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늘 고향을 그리워하셨거든요. 나중에 나이 들면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내고 싶다고 말씀하셨었어요.”

그러니 그곳에서 쉬게 해 드려야지요, 하고 유현진이 말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열몇 살에 혼자 수도로 일을 하러 왔다고 했다. 몇 안 되던 가족들은 몇 년 새 뿔뿔이 흩어져 소식도 모르게 되었다고 했다.

수도에서 고아로 자랐던 어머니와 만나 가정을 이룬 그들은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고작 십수 년의 힘들었던 기억만 남아 있는 고향을 그리워한 아버지와, 본 적도 간 적도 없는 그곳을 제 고향인 양 그리워한 어머니.

이제 그들은 그곳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다.

“그래도 당일치기로 다녀올 만한 거리이니까요. 가끔 기분에 따라 훌쩍 갔다 올 수도 있고……, 저 멀리 어디 섬 같은 데에 떨어져 있어서 웬만해선 가기 힘든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유현진이 선선히 말하자 현태오는 말없이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썹이 얼핏 꿈틀하는 듯했지만 별다른 내색은 없었다.

“두 분은 사이가 좋으셨던 모양이지요.”

“예. 일하는 시간 말고는 거의 늘 함께 계셨어요. 저는 두 분이 싸우시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두 분은 언제나 서로 정다워서 보기가 좋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저도 꼭 그렇게 지내고 싶었어요.”

유현진은 당연히 자신도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부부가 사이좋은 건 당연한 일이고, 자신도 당연히 그렇게 살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행복한 부부 관계란 어느 순간 느닷없이 깨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한 현태오라는 남자에게 반하면서는, 애초에 사이좋은 부부라는 관계를 갖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분이 왜 신학교엘 가셨습니까?”

“……저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현진 씨가 굳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는 현태오에게 유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 뒤에 다른 말을 던졌다.

“현태오 씨의 양친께서도 사이가 좋으시지요.”

현태오는 유현진을 가만히 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에 따라왔다.

“예, 사이좋으십니다. 자주 다투긴 하시지만요.”

“아아, 하지만 두 분은 다툰다기보다는 의견을 나누시는 것에 가까워 보이던데요.”

유현진은 예전 현가에 살았던 때에 종종 보았던 총리 부부의 언쟁을 떠올렸다. 어떠한 쟁점에서 견해가 다르면 그들 부부는 거침없이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그 다툼들은 언제나 원만하게 마무리되었고, 한 번도 감정 소모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현가의 아들들이 누군가와 싸울 때 쉽게 감정적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 덕분일 거라고 유현진은 생각했다.

“예, 그래서 저는 예전에는 두 분이 부부라기보다는 인생이라는 사업을 함께 꾸려 가는 동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배우자를 얻어도 그렇게 될 줄 알았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던 현태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다 한 번은 어머니가 크게 앓았던 적이 있는데, 며칠이나 고열에 시달려 자칫하면 큰 장애가 남을 수도 있다고 의사가 말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가 우는 걸 처음 봤어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그저 옆에 있어만 달라면서 어머니를 붙들고 우시는데, 그걸 보고 좀 당혹스러웠었지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머님 앞에서 아버님이 우시는 게요?”

이런 비인간적인 아들을 보았나,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허연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자 그제야 현태오는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면 나와 배우자는 두 분 같은 관계는 되기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건조하게 말하는 현태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 당시 현태오는 제상아의 정혼자였다. 그 말은 예전에 제상아가 했던 말과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남자라면 최선의 동료는 될 수 있겠지만’, 하고 뒷말을 흐리던 그녀를 떠올리며 유현진은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사이좋다’라는 건 한 가지 모습으로 정해진 게 아니니까요. 겉으로 보이는 게 다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요.”

현태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젓가락으로 회를 집어 들다 말고 흘끗 눈동자를 들어 유현진을 보았다.

“어떻습니까. 유현진 씨와 나는,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노력해 봐야지요.”

일순 움찔한 유현진은 짧은 침묵 뒤 대답했다.

잊고 있던 죄책감과 긴장감이 다시 솟아올랐다.

유현진은 잠자코 음식만 꾸역꾸역 씹었고, 현태오도 그 이상 별말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음식들이 워낙 맛있어서 젓가락이 멈추지 않는 게 얄궂다.

어떻게 수육을 이렇게 야들야들 보들보들하게 삶았지……, 지리는 또 어쩜 이렇게 국물 맛이 깊고. 한 점 한 점 한 모금 한 모금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무심코 열중해서 먹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접시가 반 넘게 비었다. 그러는 동안 현태오는 거의 젓가락을 움직이지 않고 유현진만 무슨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빤히 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유현진은 그제야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저 혼자서만 먹었네요.”

“아닙니다. 양은 충분히 많으니까요. 저는 지금은 별로 배고프지 않아서 천천히 먹어도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드시는 건 못 본 것 같은데 많이 시장하셨나 봅니다.”

“예, 좀…….”

“그러게 아무리 먼 길을 오가도 끼니는 제대로 챙겨 가며 다녀야지 왜 하루 종일 굶으셨습니까.”

“예? 아니, 아예 굶은 건 아니고 좀 먹긴 했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짐짓 정색을 하고 부정하려다가 그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찔려서 조심스레 되묻고 마는 유현진이었다.

“아까 유현진 씨 전화로 유세진 씨가 문자를 보냈는데, 팝업창으로 뜨는 걸 우연히 봤습니다.”

“……??”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현태오의 말을 듣고 유현진은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소파 구석에 뒹굴고 있던 휴대 전화를 급히 집어 들었다. 유현진이 잠든 사이에 유세진이 문자를 보낸 모양이었다.

우연히 봤다고 하기엔 이미 확인한 문자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하고 얼른 문자를 열어 보았다.

「형님, 저녁 꼭 챙겨 먹어요! 속 안 좋다고 굶으면 안 돼요! 오늘 내내 거의 안 먹어 놓고 빈속에 술 마셨다간 백퍼 그 양반 쓰러뜨리기 전에 형님이 먼저 쓰러짐!」

잘 씹어 삼켰던 수육이 갑자기 식도에 걸리는 것 같았다.

“저랑 술 내기라도 하시려고요?”

어느새 뚜껑을 딴 술을 자신의 술잔에 부으며 현태오가 무심히 물었다.

휴대전화를 두 손에 쥔 채 얼어붙어 버린 유현진의 귀에, 그가 “저 술 셉니다.” 하고 여상하게 덧붙이는 말이 이어 들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유현진은 삽시에 진땀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어떻게든 굴려 보려 애쓰며 최대한 태연한 낯으로 말했다.

“그간 현태오 씨에게 여러모로 신세를 많이 졌고, 또 요즘 일이 많아서 고생도 많으시니, 쉬는 날 한 번쯤 술이라도 대접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쓰러지셔도 좋을 만큼 편안하게 드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른 뜻은 없습니다.”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는 현태오의 침묵이 백만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계 초침은 고작해야 두세 번 움직였을 뿐인데도 그 고요함이 무섭도록 길었다.

이윽고 현태오의 눈매가 가늘어지는가 싶더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챙겨 주시니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내일은 휴일이기도 하니 모처럼 맘 편히 마셔 볼까요. 그런데 술은 이게 답니까?”

황소라도 거꾸러뜨리겠다며 배달원이 껄껄 웃었던 술 궤짝을 하찮다는 눈길로 훑어본 현태오는 “이 정도로는 쓰러질 만큼이 안 됩니다.” 하고 말하곤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어, 문성아. 우황백주 한 짝쯤 필요한데. 그래, 지금. 아니, 직접 올 필요는 없고 그냥 술만 보내.”

유현진은 쿨럭하고 밭은기침을 내뿜었다.

우황백주라 하면 세 가지로 유명한 술이 아니던가.

첫째로는 향이 훌륭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둘째로는 구하기 어렵고 비싸기로 유명하고, 셋째로는 한 병으로 일반 성인 남성 셋은 충분히 보내 버린다고 할 만큼 독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술을 한 짝…….

유현진은 두려워졌다.

이 남자가 스스로 독주를 먹고 쓰러져 주겠다고 하니 일은 계획대로 아주 잘 되어 가고 있는 셈이긴 한데, 점점 더 이 남자를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해졌다. 희생자가 스스로 그 함정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걸 보니 더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짧은 통화를 마친 현태오는 낯빛이 거무죽죽한 유현진을 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 아닙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우황백주를 드디어 마셔 보는구나 싶으니 긴장이 돼서…….”

“안 드셔 보셨습니까? 향이 아주 좋은 술입니다. 그 정도로 독한 술이 그만큼 향이 좋기가 쉽지 않지요. 하지만 저도 자주 마시진 못합니다. 과하게 마시면 어느 순간 정신을 놓게 되어서, 오늘처럼 확실하게 안전이 보장된 자리가 아니면 안 마시지요.”

아니다.

이 자리가 가장 위험한 자리다.

이 자리야말로 당신의 정조를 노리는 흉계가 도사리고 있는, 가장 흉악하고 위험한 자리였다.

유현진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켜켜이 쌓였다.

그만둘까. 지금이라도 그만둬 버릴까.

……아니, 아니다. 지금 그만둔다면 이 방법을 쓸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자. 기왕 악업을 저지르기로 결심한 것, 망설이지 말아야지. 하나람님, 지옥으로 떨어질 저를 가엾게 여기사 부디 제발 오늘 밤 무사히…….

아무것도 모르는 오늘의 희생(예정)자 현태오가 여상하게 꺼내는 세상 이야기를 유현진은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고 흘려들었다. 뭔가 평범한 대화들을 띄엄띄엄 나누고 있긴 한데 머리에 잘 안 들어온다.

그러는 사이에 우황백주 한 상자는 도착하고야 말았다.

이 오밤중에 저 귀한 술을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구해서 보냈을까. 현태오의 부관은 모래 바다 한가운데서도 물을 구해 내는 재주가 있다더니.

물끄러미 술 상자를 쳐다보는 유현진의 어두운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태오는 두 사람의 술잔에 독주를 채웠다.

“드십시오. 한입에 털어 넣으면 취기가 갑자기 오를 수 있으니 천천히 드시는 게 좋습니다.”

그러고서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단숨에 비워 버린 현태오는 다시금 제 술잔을 채웠다. 유현진이 술을 퍼먹이려 안간힘 쓸 필요도 없이 본인이 술술 들이켠다.

아니 저렇게 물처럼 마셔도 되나, 저러다 급성 알코올 중독 같은 걸로 실려 가면 어쩌지, 유현진은 때아닌 염려를 하며 고양이처럼 핥다시피 술을 몇 방울 입에 머금었다. 과연 그 유명세만큼이나 향기롭고 독해, 그것만으로도 식도가 뜨거워졌는데도 향이 워낙 좋아 조금씩 조금씩 계속 홀짝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유현진 씨는 술을 잘 드시던가요?”

“자주 먹지는 않는데, 아주 못하지는 않습니다. 술에 취해서 실수한 적은 없어요.”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기를 맡으며 무심코 중얼거린 유현진은 말을 끝낸 직후에야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술에 취해서 실수라…….”

현태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켕기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유현진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술잔을 다시금 단숨에 비워 낸 현태오는 웃는 것처럼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접었다.

“그렇다면 편하게 드셔도 되겠군요. 어차피 유현진 씨와 저 사이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더 이상 벌어져서는 안 되는 실수도 없을 테고요.”

“……예, 그렇죠.”

유현진은 입술에 술잔을 문 채 웅얼거렸다.

현태오는 편안한 기색이건만 유현진은 마음이 어두워져만 갔다.

안 되겠다.

일단은 마시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술을 별로 마시지도 않고 외견도 해사하니 알코올 알러지라도 있을 것처럼 생긴 유현진은 뜻밖에도 제법 잘 마셨다. 거무죽죽하게 죽상을 하고 있던 낯이 조금 불그레해졌을 뿐, 그 깔끔하고 냉담한 인상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술이 들어가면 저 꽉 막힌 입이 좀 열릴까 했더니,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모양이다.

상관없었다.

현태오는 내로라하는 주당이었고,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런 흥미로운 기분도 얼마 만이던가. 저 얼음장 같은 낯이 고민에 잠긴 듯 어두워져 있는 모습은 제법 쏠쏠한 구경거리였다.

‘자, 과연 그놈이 무슨 속셈으로 불렀을까…….’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차 안에서 현태오가 중얼거리자 진문성이 흘끗 시선을 주었다. 이제 이날의 남은 일정은 저녁에 유현진을 방문하는 것밖에 없었다. 사실 굳이 일정이랄 것도 없이 거의 매일같이 밤마다 들르곤 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약속을 잡고서 만나는 건 처음이다.

‘일단 신전에서 나오신 뒤의 행적을 살펴본 결과로는, 이미 알고 계신 이외 인물과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진문성의 대답에 현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선 현태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캐내기 위해 누군가 그놈을 매수하거나 속였을 가능성은 제외해도 되겠다.

타인의 일로 현태오에게 청탁할 게 생겼을 가능성도 제외다. 그놈이 만난 인물이라고 해 봐야 제상아나 유세진, 혹은 송갈의 사절단 정도인데 제상아라면 청탁할 일이 생겼다면 현태오에게 직접 얘기했을 테고, 유세진은 근래에 사고를 쳤다는 소식은 안 들어왔으니 사고 수습을 위해 청탁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설마 승진이나 영전시켜 달라고 할 리는 없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송갈 쪽일 텐데,

‘사절단과의 대화는 체크하고 있지?’

‘예. 별달리 이상한 부분은 없습니다.’

공적인 업무상 사절단과 통역과의 대화는 모두 녹취되고 있었고, 유현진과 사절단과의 관계에서 수상쩍은 부분은 현재로서는 없었다.

‘그래, 애초에 그놈이 청탁에 이용될 가능성은 낮지. 그놈은 그 낯이랑 화법부터 뜯어고치지 않는 한 그런 류의 일에는 못 써먹을 놈이거든. 어디 보자, 그렇다고 외부인과 결탁해 암습하거나 납치, 여타 상해 시도를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놈 본인의 볼일 때문에 날 불러냈을 가능성이 크겠군.’

현태오가 중얼거렸다. 잠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던 그는 희미한 조소가 어린 눈으로 진문성을 보았다.

‘문성이 넌 어느 쪽일 것 같아. 첫 번째, 유현진이 개인적으로 내게 청탁할 일이 있다. 두 번째, 내게서 원하는 정보가 있거나 나를 떠보려 한다.’

운전대를 잡은 채 앞만 바라보며 생각하던 진문성이 대답했다.

‘글쎄요……, 사람이란 게 워낙 의외의 측면이 많다 보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유현진 씨의 성격으로 보아선 둘 다 썩 느낌이 오진 않는데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모든 진실을 다 털어놓고 사과를 하려는 거라면 모를까.’

‘이제 와서 흥을 깨 버린다면 한천으로 보내 드려야지. 외롭지 않도록 사랑스런 동생과 함께.’

‘음……, 역시 그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세 번째 가능성으로는,’

막 입을 열려던 진문성은 거기에서 말을 멈추었다.

턱을 쓰다듬는 현태오에게서도, 운전대만 움켜잡은 진문성에게서도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입을 연 채로 몇 초쯤 눈만 깜박이던 진문성이 얼버무리듯 말을 이었다.

‘뭐, 워낙 서먹하게 지내는 상황이니 이제는 슬슬 친목을 도모해 봐야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지요.’

현태오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현태오를 거울 속으로 보며 진문성이 덧붙였다.

‘며칠 전에 상당한 양의 술을 집으로 주문하셨다고 하더군요.’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현태오가 잠시 사이를 두고서 코웃음 쳤다.

‘왜, 술을 먹여 놓고 자빠뜨리기라도 하려고?’

‘하하, 설마 그러지야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과음은 조심하십시오.’

웃어넘기는 와중에도 사뭇 진지하게 뒷말을 덧붙이는 진문성의 옆통수를 보며 현태오는 실소를 흘렸다.

‘우황백주 같은 걸로 한 궤짝쯤 들이켜야 실수하는 척이라도 하지, ……됐어. 어차피 이제 곧이니까 어디 한번 보자고, 우리 전직 사제님께서 무슨 속셈이신지.’

현태오는 흥미롭게 중얼거리며 화제를 그쳤다.

그래, 흥미로웠다. 대관절 늘 불퉁하고 거북한 내색이나 하는 놈이 무슨 바람으로 술을 먹자고 하는지.

그래서 약속 시간에 일분일초도 어김이 없이 찾아왔는데.

들어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엎어져 시체처럼 잠들어 있는 유현진을 발견한 현태오는 우두커니 멈춰 서 어이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평항 총독 현태오를 불러 놓고서 보란 듯이 제 할 일만 하며(잠이나 처자며) 그를 무시하는 이런 배짱 좋은 인사가 다 있나.

‘……유현진 씨? ……유현진 씨.’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쓰러졌는지, 편한 실내복 차림에 아직 머리도 축축한 채로 늘어진 유현진은 불러도 깨지 않았다. 숨이나 쉬고 있나 싶을 정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이 시간 딱 맞춰 왔더니 이놈이……, 현태오는 헛웃음을 내뱉곤 재킷을 벗어 안방으로 걸어 두러 갔다.

방이 여덟 개쯤 되면 적당히 옷 걸어 두는 방 하나쯤 따로 둘 만도 한데 저놈은 아래층의 제일 큰 방 하나에 제 짐을 모두 넣어 두고 그 방만 쓰고 있었다. 꼭 언제라도 여기에서 나가기 쉽게 준비라도 해 두고 있는 것처럼.

그래봤자 짐도 거의 없는 방을 무심히 둘러보던 현태오의 눈에 방구석에서 충전 중인 나비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 침대 아래에 숨겨 놓듯이 쌓아 둔 책더미에서 흘러내려 있는 책자.

남자들이 엉켜 있는 표지만 봐도 뭔지 짐작이 가는 그 책에는 인덱스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누가 보면 무슨 성실한 고시생이 붙들고 공부하는 수험서인 줄 알겠다.

현태오는 책을 끄집어내어 대충 펼쳐 보았다.

동성애에 관심이라곤 없었던 현태오조차도 이미 알고 있을 만큼 기초적인 내용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나 실질적으로 필요할 만한 부분에는―행위 전 관장하는 방법이라든가 전립선의 위치를 찾는 방법이라든가 등등― 무슨 실기 시험이라도 앞둔 양 색연필로 밑줄까지 그어 가며 연구한 흔적이 있었다.

‘…….’

거실에 누워 있는 시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현태오는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곤 책자를 바닥에 툭 던져 두고 나왔다.

곁으로 다가서 유현진을 내려다보았지만, 그 정도 기척에는 눈꺼풀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시트가 푹 꺼지는데도 미동조차 없다.

어깨라도 흔들어 볼 양으로 뻗던 손을 도중에 멈춘 현태오는 유현진을 비스듬히 내려다본다.

‘자는 얼굴은 그래도 제법…….’

늘 단단히 힘이 들어간 얼굴 위에 얼음까지 한 겹 덮어쓴 것 같은 유현진의 낯짝이, 자는 동안에는 그래도 좀 순해 보였다. 유세진이나 제상아와 함께 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비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유현진을 묵묵히 내려다보는데, 놈의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동시에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현진의 전화도 부르르 떨렸다. 현태오는 전화를 집어 들어 남의 문자를 아무렇지 않게 확인했다.

『형님, 저녁 꼭 챙겨 먹어요! 속 안 좋다고 굶으면 안 돼요! 오늘 내내 거의 안 먹어 놓고 빈속에 술 마셨다간 백퍼 그 양반 쓰러뜨리기 전에 형님이 먼저 쓰러짐!』

‘…….’

현태오는 문자를 내려다보던 눈동자를 힐끔 돌려 유현진을 보았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가 도로 유현진을 내려다본 그는 걸음을 돌려 욕실로 갔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욕실에서 서슴없이 욕실장을 열어젖힌 현태오는 제일 아래 칸의 구석에 가지런히 들어 있는 물건들을 집어 올렸다.

용도가 따로 있는―일반적이지 않은― 오일, 포장도 뜯지 않은 콘돔, 포장이 뜯긴 채 한 칸이 비어 있는 관장제, 그리고 쓰레기통 안에 버려져 있는 빈 관장제 통.

현태오는 하마터면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새끼 봐라……?’

제일 유력할 것 같았지만 제일 뒤로 돌려 놨던 세 번째 가능성이 대뜸 눈앞에 디밀어졌다.

이 현태오를 술로 쓰러뜨려 놓고 덮치시겠다.

실소가 터질 만큼 어이가 없어지는 한편 흥미가 솟았다.

늘 고고하기 짝이 없게 구는 양반이 이 허술해 빠진 계획을 대관절 어떻게 달성할 예정이신지.

거실로 돌아가, 여전히 꿈쩍도 않고 누워 있는 유현진을 지그시 바라보던 현태오는 주방에 쌓여 있는 식재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굶으셨다고 했던가.

주방으로 들어선 현태오는 선선히 팔을 걷어붙이곤 냄비에 물을 올리고 도마와 칼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된 바엔 어디 한 번 맞춰 줘 보자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공리에 성사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을 것 같은데, 과연 어떻게 하려는지.

조미료 따위를 꺼내려다 발견한, 서랍 한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정동반도산 차통도 흘끗 쳐다보기만 하고는 제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 준비는 한 모양인데, 그럼 성공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 드려야지.

어이없는 비웃음과 함께 밀려든 것은 뜻밖에도 유쾌함이었다. 요 며칠 줄곧 이유 모르게 언짢고 불편했던 기분이 삽시에 가시는 듯했다.

그래. 줄곧 속이 편치 않았었다.

산상에서 돌아온 이후로 계속해서 언짢았다.

뭔가 크게 실수를 해 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를 알 수 없는, 어딘지 모르게 제어가 잘되지 않는 듯한 낯설고 불쾌한 기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공개적인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저자와 입을 맞추어 그들의 표면적인 관계를 쓸데없이 공고히 해 버렸다――라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나중에 원만하고 조용하게 그를 떨궈 내기가 좀 더 번거로워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불편하게 널뛰는 기분이다.

유현진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한 낯선 불편함이 솟았다.

그렇다고 해서 보이지 않으면, 또 뭔가 위험물이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신경을 갉작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그 생경한 불쾌감이 더해 가던 차에 모처럼 유흥거리가 하나 생겨난 셈이다.

그러잖아도 계속 거슬리던 참인데, 그래, 과연 어쩌시려는지 보자.

“생각보다 잘 드십니다.”

우울한 얼굴로도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리는 유현진을 지켜보던 현태오가 말하자 유현진은 멈칫하는가 싶더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예, 잘 먹습니다.”

“생각보다 술도 잘 드시고요.”

“예, 잘 마신다니까요.”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하는 유현진의 눈동자에는 슬며시 붉은 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썩 잘 마시기는 하는데 슬슬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칭찬하는데 왜 노려보십니까.”

현태오가 느긋하게 묻자 유현진은 다시금 멈칫하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이제 놈의 표정을 좀 알겠다. 늘 무표정하고 쌀쌀맞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은근히 그 밑에 다른 표정들이 알아채기 힘들 만큼 미세하게 깔려 있었다. 이를테면 난감하거나 좀 억울할 때면 보일락 말락 오물거리는 저 입술이라든가.

“노려보는 것 아닙니다. ……그리고 칭찬도 아니시잖습니까.”

“왜 칭찬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현태오를 빤히 쳐다보던 유현진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매우 냉랭한 낯으로 이죽거린다.

“현태오 씨야말로, 생각보다 요리를 잘하십니다.”

“……과연, 알겠습니다.”

순간 현태오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말투의 문제점을 짚으려는 의도인 줄은 알겠다만, 사람 기분 나쁘게 말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놈이 작정하고 저런 말투로 지껄이니 아주 확 와 닿았다.

이제야 알겠냐는 듯 거만하게 고개까지 한 번 까닥여 현태오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어 놓은 놈은, 그러나 곧 냉랭하던 눈초리를 살짝 누그러뜨리는가 싶더니 다시 젓가락질을 하며 한풀 꺾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진심입니다. 맛있습니다.”

몹시 안 내키는 듯이 떨떠름하게 내뱉는 그 속삭임은 얼핏 붉어진 귓불 아래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붉은 빛깔을 지그시 바라보던 현태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원하시면 언제든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유현진은 잠깐 현태오를 쳐다보았다가 도로 시선을 깔았다. 불퉁한 듯이 입매를 꾹 다물었지만 눈꺼풀이 몇 차례 연이어 깜박였다. 속눈썹이 바스락거릴 것 같다.

그 하나하나를 현태오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현태오 씨는 왜 노려보십니까.”

침묵 속에 음식만 우물거리던 유현진이 기어이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요? 설마요. 그저 살펴보는 것뿐입니다.”

“저를요? 왜요.”

“왜냐니요. 사이좋게 지내려면 좀 더 잘 알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펴보다 보면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부분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겠고.”

유현진의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뭔가 들키지는 않을까 걱정이라도 들었는지 깜박이는 눈꺼풀 아래에서 동공이 죄책감과 불안으로 어렴풋이 흔들린다.

현태오는 그간 이런 눈빛을 수도 없이 보았다. 잘못을 저지르고는 거짓으로 숨기는 자들의 눈빛이다.

늘 비웃고 경멸해 마지않았던 눈빛인데, 희한하게 이놈에게선 한 번도 그런 음습한 불쾌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별 대수롭지도 않은 실수를 해 놓고선 제풀에 크게 겁먹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를 보는 것 같은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좀, 뭐라고 해야 할까, 놀려 주고 싶은 기분도 드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이것도 낯설어서 잘 모르겠다.

현태오가 미간을 찌푸리고 짧게 혀를 차는데, 술이 찰랑찰랑 담긴 술잔을 노려보며 고민하는 기색이던 유현진이 물었다.

“현태오 씨는 술 드시고 실수한 적 별로 없으시죠? ……그때 말고는요.”

“예, 없습니다.”

유현진이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시무룩해졌다.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이제 조금씩 읽히기 시작한 저 얼굴이 좀 우스웠다.

상대에게만 퍼먹여도 모자랄 마당에 제 입에 우울하게 술을 털어 넣는 놈에게 맞추어, 현태오도 본인의 잔을 주욱 들이켜 준다. 아까부터 현태오는 유현진이 한 잔 마실 때마다 서너 잔씩은 마시고 있었다. 가끔씩 놈이 물컵에 슬그머니 이온 음료를 따라 놓는 것도 간간이 마셔 주었다. 그 정도 핸디캡을 받아 줄 만큼의 관대함은 남아 있었다.

거짓말을 했으면 들키기 전에 그 거짓말을 진실로 바꾸어 놓는 게 그나마 좋은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 봐 가면서 될 만한 상황에서 해야지.

어느새 술 상자가 반 넘게 비었고 그 대부분을 현태오가 마시긴 했지만, 여기 있는 술병들을 모두 비워도 정신을 놓을 리 없는 현태오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현진은 이따금 초조한 눈길로 술병과 현태오를 번갈아 보곤 했다. 놈의 얼굴에는 이미 술기가 오른 지 오래였다.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현태오가 술잔을 입에 댄 채 중얼거렸다. 유현진이 잘 못 들었다는 듯 “예?” 하고 되물었지만 현태오는 고개만 젓고 말았다.

유현진이 염려하고 있는 일은 벌어질 리가 없었다.

현태오는 여태 살아오면서 남자와 성교를 한 선상에 놓고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내놈과 몸을 섞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고, 그가 놈을 덮치기라도 해서 놈이 아직껏 순결 서약이 깨어지지 않은 몸이었음이 들통날 상황은 결코 오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유현진이 저렇듯 불안해하며 이런 허술한 계획을 꾸밀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놈은 그걸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저 어설픈 꼴을 봐서는 계획대로 된다 한들 제대로 덮칠 줄이나 알까 싶었지만.

“그런데 공부는 열심히 하고 계신가 봅니다.”

“공부요?”

현태오가 난데없이 꺼낸 말에 유현진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현태오는 새 술병을 따며 여상히 말을 이었다.

“예. 아까 옷을 걸어 두러 안방에 들어갔다가 봤습니다. 침대 아래에 있던 책들, 책장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줄 그어 가며 열심히 공부하신 흔적이 있던데요.”

“푸――――.”

“…….”

“…….”

졸지에 얼굴에 술을 뒤집어쓰고 만 현태오였지만, 이번만은 봐주기로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걸레를 붙잡아 얼굴을 닦아 주려 하는 걸 보니 당황하긴 당황한 모양이었으니. (일부러 걸레를 찾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은 일단 제쳐 두기로 했다.)

“공부를 했다기, 보다는,”

유현진이 더듬거리며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단숨에 술기가 올랐는지 얼굴이 온통 빨갛다. 현태오는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겸연쩍어하실 필요 있습니까? 본인이 모르는 분야를 알고자 하는 건 부끄러울 일이 아니지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빈 잔에 술을 붓던 유현진이 어떻게든 체면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엄숙하게 말했다.

“현태오 씨도 필요하시다면 빌려드릴까요? 미사담 님께서 저더러 그냥 가지라고 하셔서, 원하신다면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놈이 어딜 나를 제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현태오는 코웃음 쳤다.

“글쎄요. 대충 봤습니다만 딱히 모르는 내용은 없어서, 굳이 제가 그 책들로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 그러시구나…….”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진은 담담한 표정인 채로 빛깔만 울긋불긋했다. 자세 역시 조금 전에 술을 뿜은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반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손끝이 술잔을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런 유현진을 느긋하게 구경하던 현태오는, 한편으로는 신기해질 지경이었다. 자신보다 몇 살 어리지도 않은 사내놈이 이럴 수가 있나.

“예전에 제가 있었던 전선에 젊은 군종 신관이 왔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분이 아마도 지금의 유현진 씨와 비슷한 나이였을 것 같은데, 전장 한복판이다 보니 체면이고 뭐고 가리지 않는 놈들이 많아서 그 사제님과도 다들 허물없이 지냈었습니다.”

유현진의 불그스름한 얼굴을 안주 삼아 술을 털어 넣으며 현태오가 입을 열자, 유현진은 그 갑작스런 화제에 의아한 빛을 띠면서도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하루는 젊은 놈들이 음담패설을 나누다가 그 사제님께도 ‘신관은 정결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런 얘기를 들어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냐’ 하고 짓궂게 물었는데, 그 사제님은 ‘타인과의 직접적인 경험만 없을 뿐 알 건 다 알지요. 야동도 보고 자위도 하는데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시더군요. 그냥 육체만 동정일 뿐 머릿속은 일반적인 남성과 다를 것 없다고요. 어떻습니까, 그게 보통입니까?”

현태오의 물음에 유현진은 잠시 눈을 껌벅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물론 악하고 못된 방향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씁니다만, 성욕 자체가 악하지는 않으니까요.”

“흠……. 그 순결 서약이란 건 반드시 타인과 몸을 섞어야만 깨어지는 모양이지요. 자위도 한다는 걸 보면.”

“……, 예.”

유현진이 뻣뻣한 낯으로 대답했다.

현태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뜻밖에 애매하게 말을 흐리지 않고 대답을 제대로 한다.

이놈도 자위쯤은 한다는 건가.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 없는 일인데도 어쩐지 의외라는 기분이 들어 현태오는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턱을 문지르던 그는 “그러면 말입니다,” 하고 말을 이었다.

“타인과 몸을 섞는다는 건 정확히 기준이 뭡니까? 설마 입맞춤이나 애무 정도는 아닐 테고, 성기의 삽입입니까? 아니면 체내에 사정까지 해야 서약을 깨뜨리는 겁니까?”

말을 하면서도 실소가 새어 나왔다. 성기를 삽입해도 사정만 하지 않으면 순결하다고 한다면 그것도 웃긴 소리다.

유현진은 당황한 듯, 혹은 난감한 듯 눈을 깜박거리다가 “글쎄요, 그건……, 제가 정확히 겪지를 않아서 잘…….” 하고 어물거렸다. 그러다가 얼른 “아니, 그때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 깨졌는지 기억을 잘 못 합니다.”라고 고쳐 말한다.

그 얼굴이 여태 본 적 없을 정도로 잘 익은 사괏빛이었다.

한 입 베물고 싶을 정도로 잘 익은 빛깔이다.

현태오는 유현진을 뜯어보았다.

시답잖은 농담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다. 사내놈과 음담을 나누는 취미도 없다. 그럼에도, 그 말은 저도 모르게 불쑥 입에서 나갔다.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예?”

“저한테 박혔을 때 말입니다.”

얼떨떨해하던 기색도 찰나, 유현진이 아연해졌다.

얼굴 빛깔이 더는 익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거기에서도 더 익어 불쌍할 정도로 빨개졌다.

시시한 말장난질은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말해 봐요. 기억이 안 나니까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어땠습니까?”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린 유현진이 연신 눈을 깜박였다. 한참을 어쩔 줄 몰라 하던 입술이 “그야,” 하고 달싹였다.

“좋, ……좋았습니다.”

낯을 가리고 싶은지 손등으로 애꿎은 얼굴을 문지르며 유현진이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현태오는 내심 비웃으려 했다. 멋모르는 동정 같으니, 사내가 사내를 뒤로 받는 첫 경험이 좋을 리 있나. 다음날 어기적거리며 기어 다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게 비웃으려 했으나,

“――.”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확 무더운 게 솟구쳤다. 목구멍까지 바작거린다.

빌어먹을. 이제 보니 나도 어지간히 취했군.

“와 봐요.”

유현진에게 손짓하며 부르는 목소리가 바싹 낮아져 있었다. 유현진이 당혹과 경계가 서린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주춤주춤 다가왔다.

사내놈과 뭘 어쩔 생각 따위는 없다.

이놈도, 속이나 좀 태워 놓다가 적당히 떨구고 말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쯤이라면.

이 정도쯤은 머리에 피 안 마른 꼬맹이들도 다 하는 별것 아닌 장난에 지나지 않으니까,

“――.”

그 아담한 머리통을 붙들어 끌어당긴 현태오는 아까부터 사람의 눈길을 묶어 두고 있던 붉은 입술을 삼켰다.

입술과 입술이 겹치는 순간, 바로 얼마 전 새겨졌던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일어나는 것 같은.

그래――바로 그 ‘좆됐다’ 싶었던 감각.

현태오는 품에 담긴 유현진이 바르작거리는 기색에 거침없이 그를 바싹 당겨 안았다. 움직이게끔, 떨어지게끔, 달아나게끔 두지 않도록. 그리고 그 지독하게 달고 짙은 맛에 탐닉하며 머릿속 한구석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빌어먹을.

그래.

이걸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어.

“…―응,”

사납게 집어삼키는 사이로 유현진이 아주 짧은 소리를 흘렸다. 신음인지 호흡일지 모를 소리가 들려온 순간, 그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현태오의 손이 움찔했다.

“……하,”

현태오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어이없는 새끼가,

“이따위로 사람 호리는 소리는 어디서 배워 와서,”

잇새로 나직한 말을 씹어 낸 현태오는 더 이상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도록 유현진의 입술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한 올의 숨결도 흘러나가지 않도록 먹어 치워 버린다.

품속에 있는 몸뚱이를 무작정 끌어안고 통째로 잡아먹을 것처럼 놈의 입술을 빨고, 이를 핥고, 혀를 씹었다. 그 탐닉이 어느 결에 놈의 뺨으로, 귀로, 목덜미로 이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였고, 현태오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놈의 손이 덜덜 떨며 멈칫멈칫 현태오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것도 바로 그 직후였다.

어린 짐승이 매달리는 것 같은 그 몸짓과 함께, 허벅지에 닿는 놈의 사타구니가 어렴풋이 단단해진 감촉이 느껴졌다. 별안간 현태오의 속이 훅하고 더워진 그때,

“잠, 잠깐,”

놈의 옷을 끌어 내리며 쇄골에 이를 세우던 현태오를, 유현진이 허덕이며 떠밀었다.

“차――, 차라도, 마시고,”

명백하게 열에 달뜬 낯으로 더운 숨을 몰아쉬면서도, 술과 열이 함께 오른 유현진의 눈에 두려움이 어른거렸다.

이, 이대로는, 안, 불안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품에서 빠져나가는 그를 반사적으로 도로 붙들어 끌어오려던 현태오는, 그러나 그 불안스런 눈매를 보고는 손을 멈추었다.

머릿속을 휘저었던 열기가 잠깐 걷히는 듯했다.

차? 갑자기?

……아.

그랬었다.

놈은 현태오가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로는 이대로 순순히 몸을 맡겨 올 리가 없었다.

순결 서약 따위가 남아 있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다 알고 있단 말이다, 이 멍청아.

현태오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욕을 삼키는 사이 유현진은 주방으로 달아났다. 차를 끓이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현태오는 조금 더 정신이 들었다.

……허.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미쳤나. 아니면 술에 머리가 절었나. 이따위로 취한 적은 없었는데.

“정신 차려, 현태오.”

잇새로 나직이 중얼거린 현태오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물병을 들어 병째로 찬물을 목구멍에 들이붓자 정신이 좀 더 돌아왔다.

정신 차려.

진문성이가 시시덕거린 잡소리처럼 정말로 성희롱을 할 것도 아니고, 사내새끼랑 쓸데없는 농탕질을 할 것도 아니다. 그저 저놈이 전전긍긍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꼴이나 좀 즐기다 말 작정이다. 선 넘지 마.

사람의 머릿속은 갖고 놀아도, 몸을 갖고 논다는 발상은 한 적도 없었다. 그런 것은 현태오가 경멸하는 부류다.

“술이 돌아도 더럽게 돌았어……, 뭐 이따위…….”

현태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혀를 찼다.

그때 유현진이 돌아왔다.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돌아오는 그는 평소와 비슷하게 무표정했지만, 얼굴 빛깔은 여전히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다시 목구멍 속이 더워지는 기분이 들어 현태오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이상할 정도로 술이 잘 받는 날이다. 놈이 바라는 대로 정신을 잃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머릿속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어지러웠다.

원래라면 이 정도 술에 정동차 따위로는 끄덕도 하지 않는 현태오는 유현진이 그에게 건네주는 찻잔을 잠자코 받아 들어 마셨다.

하지만 놈은 어떻게 할까. 만일 이걸 마시고 내가 고꾸라져 잠들어 버린다면, 뭘 어쩌려고? ――내가 잠든 사이 이놈이 벌이는 짓이라면, 내가 잘못하는 건 아니잖아.

“씨발, 진짜 취했나.”

현태오는 머릿속이 떠들어 대는 개소리에 짜증이 치밀어 저도 모르게 나직이 내뱉었다. 멈칫하며 현태오를 올려다보는 유현진과 눈이 마주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지, 욕설을 지껄이는 현태오를 유현진이 켕기는 낯으로 살폈다.

“취하셨습니까? 오늘 많이 드시긴 했습니다. ……괜찮으세요?”

현태오는 소파에 기댄 채 비스듬히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유현진은 정말로 염려스러운 듯이 보고 있었다. 그 밉살스러울 정도로 냉담한 표정은 그대로인데, 눈길이 차근차근 현태오를 살피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그랬다.

산상에서, 제 몸 돌보지 않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던 유현진은, 그리로 달려든 현태오와 함께 흠뻑 젖은 채로 저렇게 쳐다보았다. 어디 다치진 않았나, 어디 상하진 않았나 못내 속상한 듯이.

“헷갈리게 구네…….”

“……? 현태오 씨? 괜찮으세요?”

거의 눕다시피 기댄 현태오는 빤히 유현진을 보다가 불쑥 말했다.

“유현진 씨.”

“……? 예.”

“혹시 나 좋아해요?”

빌어먹을. 진짜 취했군.

더럭 낯이 굳어지는 유현진을 보며 현태오는 속으로 스스로를 욕하곤 팔을 이마에 얹고 눈을 감았다. 차라리 수면제라도 듣는 편이 낫겠다. 물어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위가 조용해졌다. 정원에서 바람결에 마른 가지가 웅웅 울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 모든 것이 멎은 듯했다.

술도 더럽게 취하고 눈도 감아 버린 김에 잠이라도 들어 버리면 좋을 텐데 한참 기다려도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현태오가 막 눈을 뜨려던 찰나,

“저도 헷갈립니다.”

망설이는 혼잣말 같은 속삭임이 술 냄새와 함께 귀에 닿았다. 그 뒤로 느린 숨만 내쉬며 잠시 침묵하던 유현진이 다시 속삭인다.

“현태오 씨가 정말 진심으로 이러시는 건지, ……진짜로 계속 절 곁에 둘 생각인 건지, …….”

알고 있었나.

현태오는 천천히 목구멍에서 쓴맛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니, 당연한 일이다. 정말로 ‘평항 총독이 남자를 진지하게 책임지기 위해 동성 배우자를 맞아 평생을 보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유현진을 적당히 잘 대해 주다가 언젠가는 조용히 떨어뜨려 놓을 거라고,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그저 그 기간이 매우 짧을 것이고, 또한 현태오는 그에게 잘 대해 주는 게 아니라 은근히 몰아붙이며 즐기려 한다는 것만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놈이 자신의 앞날이 어찌 될지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히 현태오가 바라는 바인데, 어째서인지 속이 언짢다. 새까맣고 씁쓸한 덩어리가 목구멍에 끈적하게 들러붙는 것 같다.

그대로 굳게 눈을 감고 있는 현태오의 얼굴 위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사이에 떠도는 술 냄새에 다시 취하는 것 같았다.

“현태오 씨.”

나직하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들릴락 말락 부르는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린다.

“주무시는 겁니까?”

망설이는 손이 현태오의 얼굴 위로 오가는지 그림자가 왔다 갔다 했다. 눈을 뜰까 아주 짧게 고민하던 현태오는 관뒀다.

다시 한동안 정적이 깔렸다.

문득 숨소리가 아주 약간 가까워진 듯했다. 현태오의 얼굴 바로 위에서 다시 한번 살그머니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야.”

“…….”

“……야. 현태오. ……야 이놈아.”

이 새끼가…….

하마터면 눈을 뜰 뻔했다. 푹 입바람도 뿜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미간이 움찔했지만 이마에 얹은 팔에 가려서 안 보였을 것이다.

“……. 정말로 잠드셨습니까?”

유현진은 한 번 더 확인하듯이 조용히 불렀다. 그런 뒤에는 한참을 석상이나 된 듯 우두커니 앉아 물끄러미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주춤주춤 뻗은 손가락이 현태오의 뺨에 닿았다. 그 순간 제풀에 놀라 움츠러들었던 손가락은, 이내 천천히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은 어느새 손바닥 전체가 되어 현태오의 뺨을 감싼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술품을 몰래 만져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이 서늘했다.

뺨을 가만히 쓰다듬다 뻗어 온 엄지가 이번에는 입술을 매만진다.

일순 현태오는 그 보드라운 손가락 끝을 깨물 뻔했다. 혀로 감아서 빨아먹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잊고 있던 더위가 속에서 다시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이윽고 아쉬운 듯이 입술에서 떨어진 손길은 몹시 신기한 것이라도 매만지는 양 턱에서 목덜미로 차근차근 더듬어 내려가다가 멈칫했다.

“……. …….”

쇄골에서부터 잠겨 있는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서 망설임이 역력하게 전해졌다.

그러다 천천히 하나, 하나, 단추를 톡톡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슬슬 눈을 떠야 할까. 아무리 그래도 다 벗기게끔 두기는 좀 그렇지. 어디쯤에서 제동을 걸어야 할까.

얇은 옷감 너머로 떨리는 손가락을 선명하게 느끼며 현태오는 실눈을 떴다. 손가락 사이로 유현진이 보였다.

유현진은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취기가 완연히 오른 얼굴이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넋을 놓은 듯 현태오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길, 그 붉은 눈가와, 그보다 더 붉은 입술.

긴장했는지 바싹 마른 입을 축이려 살짝 입술을 깨물며 혀로 핥는다. 하얀 이와 대비되는 붉은 살점까지 눈에 들어왔다.

별안간 가슴속 저 밑바닥이 욱신하며 더워졌다.

――이 새끼가, 전직 사제 주제에 이따위로 야한 얼굴이나 하고.

잊고 있던 술기운이 훅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고 말았지만, 유현진의 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새 셔츠 자락을 다 풀어내고 드러난 가슴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행위 전에는 충분한 전희와 애무로 긴장을 풀어 준 뒤…….” 하고 교과서라도 외우듯 입속으로 중얼거린 유현진이 현태오의 위로 고개를 숙였다.

쇄골 아래에 가볍게 촉, 입술이 닿았다. 현태오의 그러쥔 주먹에 얼핏 힘이 들어갔다.

새끼고양이의 어설픈 꾹꾹이 같은 입맞춤이 너른 가슴과 상복부 여기저기에 아무 데나 정처 없이 닿았다.

이것도 애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실로 형편없는 애무였다. 닥치는 대로 입술만 갖다 댈 뿐, 심지어 그 입술도 손길과 마찬가지로 계속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현진은 제 바지를 풀어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본인의 속옷 저 안쪽까지 깊이 손을 집어넣고서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멈칫거리는 기색이다가,

“――으,”

현태오의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유현진이 움찔했다.

낮은 신음과 함께 움찔거리며 손을 움직이던 유현진이 ‘아파…….’ 하고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문득 몸을 일으키는가 싶던 유현진은 테이블 아래에 있던 기름병으로 손을 뻗어 기름을 손바닥 가득 부었다. 기름으로 흠뻑 적신 손을 다시 제 바지춤 안으로 밀어 넣는다. 고요한 가운데 희미하게 질척거리는 소리가 아주 느리게 들려왔다.

아, ……아파, 울먹이듯 속삭이면서도 유현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질척이는 마찰음이 울릴 때마다 유현진의 몸이 따라 움찔거렸다.

현태오의 위에 엎드린 채 손가락으로 제 몸속을 파헤치며 바르작거리는 몸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현태오는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이쯤에서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몸을 뒤척이든 잠꼬대를 하든, 슬슬 눈을 뜰 테니 이 정도에서 멈추라는 신호를 주어야 한다. 설마하니 진짜로 사내놈과―심지어 이놈과― 몸을 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현태오는 자신의 몸 위에 엎드려 본인의 아랫도리를 쑤석거리는 유현진의 아래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야……, 이 냉철하고 잘난 양반이 이렇게 흐트러지는 꼴사나운 모습을 언제 또 구경하겠는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으, 응,”

유현진이 한 번 더 어깨를 움찔했다.

아, 아파, 하는 울음 섞인 중얼거림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몸속을 헤집는 거북한 욱신거림을 견디는 듯 그렁그렁 젖어 있는 붉은 눈매만이 현태오의 가느스름한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현태오는 어느 때부터인가 뚫어질 듯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흐트러져 달아올라 있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불현듯 아래에서 묵직하게 두들기는 감각이 일었다.

아래에 무겁게 휘감기는 뜨거운 허기와 함께 별안간 타들어 갈 듯 목이 말랐다. 현태오는 숨을 멈추며 이를 악물었다.

미친.

바로 그때 유현진이 몸을 일으켰다.

“이, 이 정도면, 충분하겠,”

제 아래에서 손을 빼고 일어나 앉은 유현진은 혼잣말을 더듬거리며 손등으로 그렁거리는 눈가를 닦았다.

잠시 망설이던 손길이 현태오의 버클을 풀었다. 철걱, 늘 익숙하게 듣던 소리인데도 술 냄새와 더운 체온과 어우러지자 몹시 음란하게 들린다.

지익, 퍼스너가 내려갔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몇 초쯤 멈춰 있다가 속옷을 헤친다. 그리고,

“――으,”

유현진은 움찔하며 작게 숨을 삼켰다.

속옷 속에서 슬그머니 일어날 기세로 고개를 든 성기를, 제가 끄집어내 놓고서도 믿기지 않는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린 듯이 낯빛이 허예지더니, 이내 다시 눈가에 그렁거리며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왜, 서 있, ……아니,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 ……이런 걸, 어떻게, 넣,”

두렵고 황망한 투로 속삭인 유현진은 아연히 쳐다보다가, 현태오의 낯과 성기를 번갈아 본다.

금세라도 울 것처럼 억울한 얼굴로 현태오의 아랫도리를 노려보던 유현진은 울며 겨자 먹는 양 느릿느릿 손을 뻗었다. 묵직하게 굳어지고 있는 성기에 손끝이 닿자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말았지만, 몇 초쯤 망설이다 다시 움켜쥔다.

차마 제 손에 빠듯하게 담겨 있는 성기를 쳐다보지 못하겠는지 시선을 푹 떨군 채로 느릿하게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몇 차례 훑지도 않아 성기는 뻣뻣이 섰다. 무섭게 부풀어 올라 끝부분이 젖기 시작한 성기를 두 손으로 붙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유현진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현태오의 몸 위로 올라와 걸터앉았다.

무게를 싣지 않고 무릎을 세워 앉은 채, 한 손으로 성기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제 엉덩이를 벌린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손뿐 아니다. 현태오를 타고 앉은 몸이 다 떨린다.

유현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지탱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귀두 끝이 엉덩이 사이에 닿는다. 뜨겁고 축축한 감촉에 몸이 움찔했다. 손에 쥔 성기도 덩달아 움찔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앉기만, 하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속삭이는 목소리까지 떨린다.

성기 끝은 이미 입구에 맞닿아 있었다. 연신 움찔거리는 몸에 끄트머리가 비벼져 체액이 끈적하게 묻어났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 앉기만 하면, 무릎으로 버티고 앉은 다리에서 힘만 빼면 흉포하게 솟은 성기는 여린 몸속을 가르며 파고들 터였다.

그렇게, 그 한순간을 앞둔 채로 몇 초,

몇십 초,

아득하게 느껴지도록 멈춰 있던 끝에,

“――.”

유현진은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현태오의 몸 위에서 미끄러져, 바닥 위에.

“……안 돼……, 못 하겠…….”

유현진은 기어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공든 탑을 무너뜨린 아이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소리죽여 훌쩍이며 연신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울면서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푹푹 피어올랐지만, 술의 힘을 빌려서도 도저히 못 할 짓이었는지 한동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유현진은 이윽고 제 옷자락을 추스르고, 이어 현태오의 흐트러진 차림새도 도로 추슬러 주었다.

“……하나람님……, 못 하겠어요……. 엄마아빠……, 세진아, 미안해……, 한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 혼자 갈게. 가더라도 어떻게든 나 혼자 갈 테니까…….”

서럽게 울면서 더듬더듬 중얼거린 유현진은 그런 뒤 한동안 현태오의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눈물만 뚝뚝 떨구며 현태오를 한량없이 쳐다보던 유현진은, 이윽고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미안합니다.”

들릴락 말락 하게 속삭이는 말과 함께 현태오의 뺨 위로 토독,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그와 함께 떨어진 입술이 현태오의 입술 위로 겹쳐진다.

촉, 그리 얕지도 깊지도 않게, 아주 짧지도 그렇다고 아주 길지도 않게, 한동안 가만히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진다.

그리고 유현진은 그대로 현태오의 곁에 누워 버렸다.

히끅거리던 조용한 울음소리가 낮아지더니 잠잠해지고, 그 대신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오로지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와 자욱한 술 냄새만이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때,

“이 개새끼가…….”

현태오는 나직이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이를 세게 악물었던지 턱이 삐걱거렸다. 무섭게 고개를 쳐든 성기가 터질 듯 뻣뻣해져 있었다.

현태오는 유현진을 노려보며 제 성기를 움켜쥐었다. 금세라도 짓씹어 버릴 것 같은 눈길을 그대로 둔 채 성기를 훑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미 아슬아슬할 정도까지 흥분해 있었다. 순간순간 눈앞이 새까매질 정도로 아득하게 달아올랐던 욕구가 절정에 달하는 건 금방이었다.

사실은, 놈이 딱 1초만 더 망설였던들, 그대로 놈의 허리를 움켜쥐고 끌어내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 당장도, 그냥 이 망할 새끼의 구멍에 이대로 처넣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빌어먹을.

술이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욕망이라니.

이렇게 정신 못 차리게 취한 건 처음이었고, 이렇게 끔찍한 인내도 처음이었다.

현태오는 유현진의 눈물 자국 남아 있는 뺨을 노려보며, 젖어 있는 입술을 노려보며, 그 불그스레한 얼굴이며 가지런한 눈썹 따위를 노려보며, 가슴 밑바닥으로 꾹꾹 눌러 참았던 더운 숨을 터뜨렸다. 동시에 거칠게 용두질하던 손안에서 정액이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몇 번이나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동안 현태오는 유현진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욕망을 다 뿜어낸 다음에도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욕망이 잦아들었다.

거칠어졌던 숨도, 무덥게 달아올랐던 공기도 아주 느리게 식어 간다.

그리고,

현태오는 툭하니 그 자리에 머리를 떨구고 말았다.

자괴감에 가까운 허탈한 마음이, 여전히 저 배 속 아래에서 뭉근하게 끓고 있는 기이한 욕구와 함께 머릿속을 채웠다.

허……, 목구멍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이런…….”

어처구니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한동안 욕구를 풀지 않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끔찍할 만큼의 욕망이라니.

아직껏 욕심 사납게 온몸의 감각을 물어뜯는 욕망이 가라앉기까지는 그 뒤로도 한참이 걸렸다.

아주 한참 뒤에야 기나긴 숨을 내쉰 현태오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피로에 지친 듯 얼굴을 한번 훔친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바로 옆에 모로 누워 있는 유현진을 내려다보았다.

삽시에 수십 년 치의 인내를 다 쏟아 낸 듯 거뭇하게 수척해진 낯으로 유현진을 무섭게 노려보는 눈길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하얀 얼굴에 머물렀다.

그 얼굴을 움켜쥐기라도 할 양 사나운 손길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 손길은 아주 잠시 망설이다 도로 멀어지고 말았다.

“…….”

현태오는 긴 한숨을 쉬며 소파에 다시 늘어지듯 기대고 말았다. 수십 년 치 피로라도 몰려온 듯 한동안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는 흘끔 유현진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놈을 비스듬히 바라보다가 툭, 까칠하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고.”

그러나 조용하고 고른 숨소리만 돌아올 뿐 대답은 없었고, 현태오는 소파에 걸친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유현진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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