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이이잉――, 희미한 기척에 유현진은 눈을 떴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나비가 뽀르르 기어와 충전기에 막 안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고프다고 빨간 불을 깜빡이며 전기를 쪽쪽 빨아먹기 시작했다.
“……?”
일어나 앉아 껌벅껌벅 나비를 보는데 창밖에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 차고에서 들리는 소리다.
침대에서 일어선 순간 깨질 듯이 욱신거리는 머리를 움켜쥐고는 아야야……, 하고 중얼거리다가, 차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차고에서 베이지색 소형차가 나가고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방문하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차가 멀어졌다.
“……??”
오시는 날이 오늘이었던가?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지금 가시는 건가? 머리는 왜 또 이렇게 아프냐…….
몇 차례나 사람이 갈린 끝에 겨우 고정으로 오게 된, 벙어리처럼 말이 없는 늙직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현진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걸음을 돌렸다.
거실로 나가자 통창으로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막 금방 환기를 시켰는지 서늘한 공기가 감도는 집 안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말끔한 집의 저편 구석에, 주방의 보조실 문 앞에는 빈 술병 더미가 그득그득했다.
그 술병들을 보고서야 유현진은 이 어마어마한 두통의 원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
두통과 함께 쓰나미처럼 간밤의 기억이 밀려들자 핏기가 발밑으로 뚝 떨어졌다. 갑자기 몸에 힘이 풀려 소파에 풀썩 쓰러지듯이 앉고 말았다.
그랬다.
그랬다. 그랬었다.
간밤에 술을 진탕 먹고는 바로 여기서 뻗어 잠들어 버린 현태오를 내가,
“――! ――!!!”
그 당시에는 자신도 술에 절어 저 멀리 날려 보냈던 제정신과 이성과 부끄러움이 철퇴처럼 그를 후려갈겼다.
소파에 엎어져 몸을 웅크린 채 부르르 떨던 유현진은 한참 뒤에야 새빨개진 얼굴로 주춤주춤 일어났다.
결국 실패했다.
기껏 작정하고 자리를 만들었는데 공든 탑이 무너졌다. 무너뜨린 게 자신이라서 누굴 탓할 수도 없다.
마음속에서 죄책감과 부끄러움과 실망감과 안도감이 미묘한 비율로 뒤섞였다. 어느 순간은 죄책감이 더 커졌다가, 어느 순간은 안도감이, 어느 순간은 실망감이 더 출렁였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제 같은 방법은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영영 날아가 버렸다. 그 생각을 하자 살짝 후회도 들었다.
다 된 밥이었는데. 그때 그냥 눈 딱 감고 앉기만 하면 됐었는데. 앉기만 하면.
불현듯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감촉마저도.
현태오의 허리 위로 올라탄 채로 움켜쥐었던 무지막지한 장대, 벗은 엉덩이골 사이에 맞닿던 두툼한 끄트머리, 기름 때문에 미끈거리던 더운 살덩이가 자신의 입구(아니, 원래는 출구겠지만)를 꾹 누르던 느낌.
“…….”
유현진은 다시 스르륵 쓰러지고 말았다.
애초에 작정하고 술을 들이붓긴 했다지만,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현태오의 셔츠를 풀고, 바지를 풀고, 어쩌고저쩌고를 손에 쥐고선, 그 위에 아랫도리를 벗고 올라탔는지.
얼굴이 빨개졌다. 머리가 아픈데 열까지 올라 유현진은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비어 있는 마룻바닥을 내려다본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가 버렸나. 말이라도 하고 가지.
약간 서운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금방 또 볼 텐데, 그냥 간 게 뭐라고 서운해 해.
그 남자도 어마무지하게 퍼마셨는데 제대로 살아는 있나 안부라도 물어봐야겠다, 유현진은 테이블 위에 얹혀 있던 자신의 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화는 새 문자와 부재중 통화 알림으로 깜빡거리고 있었다.
「형님 살아있어요?」
「살아있는 것 맞죠?」
「형님?」
「형?」
「형!」
「혀어엉!!!! 형아!!!!!」
“…….”
문자들이 시끄러워서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동일인에게서 부재중 통화도 한가득이다.
이러다 이놈 집으로 쫓아오겠다(혹은 이미 쫓아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전화해 줘야겠다 싶어서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 했을 때,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발신인은 제상아였다.
“여보세요.”
‘어머, 받네. 네가 전화도 안 받고 문자에 답도 없다며 현진이가 여기 달려와서 울고 있단다.’
“아니……, 그럴 바엔 그냥 여기로 오지 왜 거기 가서 울고 있대.”
‘혹시라도 자칫 못 볼 꼴이라도 볼까 봐 그런다는데?’
못 볼 꼴은 무슨…… 하고 중얼거리는데 제상아가 스피커폰으로 바꾸었나 보다. ‘혀어엉!’ 하고 목메어 외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어, 현진아. 미안, 지금 깼어.”
‘형님, 살아 있죠? 살아 있는 거죠?!’
“당연하지……, 내가 어디 죽으러 갔냐.”
‘죽느니만 못했을 수도 있잖아요?!’
버럭 외치던 목소리는 제상아에게 떠밀렸는지 살짝 멀어졌다.
‘그래, 그래서 어땠어. 거사는 잘 치렀니?’
태연하게 묻는 제상아의 옆에서 유세진이 긴장한 기색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잠시 괴괴한 침묵이 흘렀다.
“……, 아니……, 못 했어…….”
기어들어 가는 대답에 유세진의 한숨 소리가 뒤따랐다. 안도를 해야 하나 구박을 해야 하나 헷갈리는 그 소리 옆에서 제상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래. 너라면 시도도 못 할 줄 알았어.’
“아냐, 그래도 벗기기까진 했다고!”
발끈하는 유현진이었지만 차가운 코웃음이 돌아왔다.
‘셔츠 단추 한두 개 풀고 그런 소리 하는 건 아니지?’
“아냐! 다 벗겼어! 셔츠도 바지도 속옷도 다 벗겼단 말야!”
‘그런데도 실패했다고?’
그렇게까지 해 놓고서? 하고 되묻는 말에는 다시 스산한 침묵이 감돌 수밖에.
“……하려고 했어. 하려고는 했는데…….”
뭐라고 해야 덜 욕먹을까. 나는 최선을 다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자면,
“절대…… 안 들어갈 것 같았단 말이야……, 그게 얼마나 무자비하게 생겨 먹었는지 알아? 진짜…… 진짜 컸어……. 그걸 넣었다간 지금쯤 난 몸이 쪼개져서 병원에 누워 있었을 거라구.”
‘아악! 악악악악!’
‘아 잠깐, 그런 투머치 인포메이션 필요 없거든? 현 총독 거기 사이즈 따위 내 알 바 아니거든?’
난 못 들었어, 난 아무것도 못 들었어, 안 들은 귀 삽니다! 하고 고함치는 유세진 옆에서 짜증스레 내쏘는 제상아의 말을 듣고서야 유현진은 내가 뭔 헛소리를 지껄였나 아득해졌다.
‘그리고 네 죄책감으로 인한 심약함을 그렇게 포장하지 말아 줄래? 보나 마나 이래도 되나 끝까지 고민하다가 울면서 포기했을 거면서.’
얘가 나 모르게 씨씨티비를 설치해 뒀나……, 유현진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간밤에 그렇게 흘러가 버린 상황을 설명하는 한편 어떻게든 변명을 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막상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는 그 순간까지 갔음에도 결국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줄곧 좋아해 왔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유린할 수는 없었다.
‘네가 실패한 건 전혀 의외가 아닌데, 그 남자가 술 취해 쓰러졌다는 건 좀 많이 의외이긴 하다.’
“정확히는 쓰러졌다기보다 잠들…….”
희한하다는 투로 말하는 제상아에게 유현진이 막 대꾸하려던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현태오가 들어왔다.
땀에 흠뻑 젖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들어서는 현태오와 눈이 마주친 순간, 1초쯤 얼음상이 되어 얼어붙었던 유현진은 다급히 전화에 대고 “이, 이따 다시 전화할게.”라고만 말하곤 끊어 버렸다.
점퍼 퍼스너를 내리면서 들어오던 현태오는 그런 유현진을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별말 없이 주방으로 갔다.
제 집인 양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어 마시는 현태오의 태도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제 발 저린 유현진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중얼거렸다.
“가신 줄 알았는데요.”
“술기운 빼려고 좀 달리고 왔습니다. 늦게까지 주무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일찍 깨셨군요. 어제 많이 드셨는데, 괜찮으십니까?”
술기운 빼려고 좀 달리고 왔다고 하기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트레이닝복을 갈아입고 달린 게 아닌가. 그런데 왜 다시 여기로 왔나. 혹시 뭔가 따지기라도 하러…….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전전긍긍하는 유현진이었다.
“예, 머리 좀 아픈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너는 나보다 다섯 배쯤은 더 마셨는데도 멀쩡해 보이잖아요, 라는 말을 삼킨 유현진이 현태오를 괴물 보듯 훑어보는데, 물잔을 내려놓은 현태오가 “그런데,” 하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정혜궁마마랑 사귑니까?”
“……예?”
유현진의 대꾸가 한 음 올라갔다. 표정도 괴이하게 찌그러졌다.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물음이기도 했거니와, 하필 제상아라니 꼭 ‘너 네 여동생이랑 사귀니?’라는 말이라도 들은 기분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낯을 팍 찡그리는 유현진을 빤히 보면서 현태오가 태연히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통화를 하고, 또 통화하던 도중에 제가 들어오자마자 당황하며 전화를 끊어 버리는 상대라면, 사귀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사귈 사람이 따로 있지 무슨 걔랑……!”
무심코 버럭했다가 “아니, 정혜궁마마요,” 하고 단어를 정중하게 고치는 유현진이었지만 여전히 찌그러진 낯으로 덧붙여 따졌다.
“그리고, 제가 통화하는 사람이 꼭 정혜궁마마라는 법도 없잖습니까? 왜 하필 꼭 집어 정혜궁마마라고,”
“아무리 그래도 유세진 씨와 사귀냐고 묻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이 미ㅊ,”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을 가까스로 삼키고서도 기가 막혀 말을 못 하는데, 현태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다.
“아니면 그 두 분 말고 달리 눈뜨자마자 통화를 할 만한 상대가 또 있으십니까?”
“……, ……, ……없지만요.”
자신의 인간관계가 이렇게 좁다는 게 분했다.
입을 불퉁하게 다물고 억울해하는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던 현태오는 피식하더니 걸음을 옮겼다.
유현진의 옆을 스쳐 가면서 가볍게 들어 올린 손이 유현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지나간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
그러나 돌아보지도 않고 거실로 간 현태오는 점퍼를 벗고 소파에 앉았다. 유현진의 머리 따위 건드린 적도 없다는 듯이,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고 있는 유현진을 되레 왜 그러냐는 듯이 마주 본다.
“……, ……?”
뭐였지, 지금.
공연히 앞머리카락을 도로 끌어내린 유현진은 눈만 껌벅이다 미심스레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
“……, 아닙니다.”
눈 뜨고 꿈을 꿨나, 유현진은 의아하게 자신을 마주 보는 현태오에게서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태오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통창 밖을 내다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무표정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유현진은 느릿하게 다가가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현태오가 눈동자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꼭 머릿속까지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는지 더듬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괜히 낯이 붉어질 것 같아 유현진은 눈초리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유현진 씨에 대해 들은 이야기들을 생각 중이었습니다.”
“……. 누구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길래요.”
“글쎄요, 특정인에게 들은 건 아니고 여러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현태오는 생각을 더듬듯 턱을 문지르며 유현진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부릅 힘을 준 눈매에 시선을 고정시키더니 무덤덤히 말했다.
“단호하고 엄격하지만 다정한 사람이라는 모양인데……, 단호, 엄격은 찾았는데 다정은 어디에 있나 찾고 있던 중입니다.”
“――, 원래 다정한 사람 눈에 다정이 보이고 엄격한 사람 눈에 엄격이 보이는 법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러면 유현진 씨 눈에는 제가 어떻게 보입니까?”
가느스름한 눈매로 던지는 현태오의 말을 듣고 유현진은 움찔했다. 제 손으로 판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야,”
유현진은 떨떠름하게 입을 열며 현태오를 보았다.
잘생겨 보입니다. ――라고는 말 못 할 노릇 아닌가.
“……엄청나게 체력이 좋은 주당으로 보입니다. 술을 그렇게나 드시곤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아침부터 달리기를 하실 만큼요.”
유현진은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현태오는 그 대꾸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지만 순순히 넘어가 주기로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술 마시면 일찍 깨서 땀을 빼는 게 버릇입니다. 게다가 간밤엔 왠지 꿈자리도 좀 사나워서 말이지요.”
또다시 움찔하고야 마는 제 발 저린 유현진이었다.
“무슨 꿈을 꾸셨길래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현태오가 무심히 유현진을 보며 말했다.
“뭔가가 절 잡아먹으려 들지 뭡니까. 저는 가위눌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그런 저를 슬그머니 먹어 치우려 들더군요.”
“그래서요……?”
“한입 먹으려다 뱉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안 먹혀서.”
애써 긴장한 기색을 누르며 묻던 유현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런 유현진을 지그시 쳐다보던 현태오가 짧게 코웃음 쳤다.
“애초에 순순히 먹혀 주지야 않았겠지만, 내가 안 먹히는 것과 상대가 먹다 뱉는 것과는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싸움이나 갈등의 과정 없이 안 먹혔으면 그게 좋은 것 아닌가 싶었지만, 왠지 현태오의 어조가 싸늘하기 그지없어서 유현진은 말을 삼켰다. “그래서,” 하고 말을 이으며 현태오가 혀를 찼다.
“이걸 어떻게 해 버릴까 고민하는 사이에 동이 텄고――일어나서 달리러 나간 겁니다.”
“…….”
“…….”
유현진은 무감정한 얼굴로 쳐다보는 현태오를,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 보다가 말했다.
“개꿈이네요.”
“개꿈입니까?”
“개꿈이죠. 현태오 씨를 먹어 치우려 들 만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유현진은 눈매에 단단히 힘을 주고서 단언했다.
현태오의 눈길이, 유현진의 얼음장 같은 얼굴에서 내려가 무릎 위에서 깍지 껴 맞잡고 있는 손에 닿았다. 서늘한 얼굴 아래로 손가락만 연신 꼼지락거리고 있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오는 피식 짧은 숨을 내쉬었다.
“딴에는 그렇기도 하군요.”
선선히 대꾸한 현태오는 다시 통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매가 어렴풋이 굽는가 싶었지만,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그런지도 몰랐다.
날씨가 좋았다.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아 뜰의 화단과 나무들은 메말라 있었지만 그 위로 구석구석 비추는 햇빛이 예쁘다.
휴일 낮에 이렇게 한가롭게 있는 게 얼마만이던가.
현태오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긴 했지만 근래에는 늘 바빠서 밤에 잠깐씩 머물다 갈 뿐이었다. 이렇게 햇살 아래 나란히 앉은 건 오랜만이다.
기분이 좋아져 나른하게 뜰을 바라보는데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울긋불긋 작은 새 두 마리가 포르르 날아갔다. 그 모양새가 귀여워서 유현진은 저 예쁜 것들을 현태오도 봤나 싶어 돌아보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현태오는 석상처럼 꿈쩍도 않고 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나 움찔한 유현진이었지만 시선이 미묘하게 비껴 나 있다. 유현진의 앞쪽으로 자라난 아담한 동백나무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
동백나무가 뭔 잘못이라도 했나 흘끔 그쪽으로 눈길을 주는 찰나,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던 현태오가 잇새로 내뱉듯이 말을 던졌다.
“이리 와 봐요.”
“……예?”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미처 알아듣지 못한 유현진이 되물었다. 현태오는 짧게 혀를 차더니 서슴없이 몸을 일으켜 유현진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유현진의 두 뺨을 그러쥐곤 곧바로 입술을 겹쳤다.
“――.”
유현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대로 눈이 마주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도 현태오가 유현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걸 알겠다.
아연하게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는 유현진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혀는 노크를 하듯 끈질기게 입안을 두드렸다. 정중하게,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평화로운 휴일 낮, 밝은 햇살 아래서.
이런 안온하고 화창한 대낮에.
느닷없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유현진은 시선을 떨구었다. 어차피 눈이 마주칠 만한 거리가 아닌데도 겸연쩍어서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시선을 떨군 채로 아주 살짝, 아주 약간, 입속을 두드리며 쓰다듬는 현태오의 혀를 조심스레 빨아 보았다.
그를 닮아 철근처럼 딱딱할 것 같았던 혀는 뜻밖에도 말캉하고 부드러웠으며, 또한, 몹시 달았다. 너무 달아서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빨아먹어 보았다.
현태오가 나직이 웃는 듯했다. 목구멍 저 안에서부터 흘러나온 듯 나직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그는 유현진을 품에 안으며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깊고도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좀체 떨어지지 않아 점점 숨이 차오르다 못해 심장이 거세게 마구 날뛸 즈음,
불현듯 이를 가는 듯한 짤막한 신음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더니, 현태오가 고개를 숙여 유현진의 목덜미에 이마를 대었다.
아쉽다. 조금만 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현태오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대려던 유현진은 그 직전에야 정신을 차리고 멈추었다. 어느새 호흡이 목까지 차올라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불만에 찬 짐승 같은 나직한 소리를 삼킨 채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던 현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입맞춤만큼 부드럽지는 않은, 위험스러워 보이는 사나운 눈매가 유현진을 본다. 그러나 가만히 유현진의 뺨을 문지르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유현진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는 그 표정이 황홀할 만큼 예뻐서,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넋 놓고 그를 마주 보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불쑥 중얼거리는 현태오의 목소리가 살짝 쉬어 있었다. 흠, 하고 한 번 헛기침을 한 현태오는 자세를 반듯이 하며 손을 내렸다. 그제야 다시 평소의 낯빛과 평소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유현진 씨와 저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덩달아 자세를 바로잡으며 유현진이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현태오는 사무적이고도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간 어떻게 지내 왔는지, 어떤 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야……, 예…….”
“그러다 보면, 혹여 그동안에는 서로 잘 몰라서 싫어하거나 기피했던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알아 가는 사이에 좋아지거나, 호감이 생기거나, 그럴 수도 있잖습니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현태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유현진은 멈칫했다.
알아 가는 사이에 좋아지거나, 호감이 생기거나. ……그렇다면, 혹시라도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일도 가능하다는 걸까. 서로에 대해 더 알게 되면. 나에 대해 더 알게 된다면.
갑자기 희망이 부풀어 오르며 마음까지 둥실둥실 들뜬다. 그러나 그때,
――하지만, 이 관계의 시작은 거짓말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돌이킬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 떠올라 희망과 기대는 삽시에 찬물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후회와 아쉬움, 죄책감이 뒤섞여 피어올랐다.
말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고 이대로 계속해서 속일 수는 없을 텐데.
유현진은 떨구었던 시선을 들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긴장한 기색으로 눈을 부릅뜬 유현진을 보고 현태오는 의아한지 한쪽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지만 할 말이 있으면 들어 주겠다는 듯 잠자코 있었다.
유현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고,
――꾸르륵…….
“…….”
“…….”
소리는 입 대신 배에서 흘러나왔다.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유현진의 목덜미에서부터 천천히 얼굴 위쪽으로 붉은 기가 올라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현태오가 입매를 꿈틀했다. 피식 휘어지려다가 도중에 굳게 다물린 입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드셔야겠군요. 그럼 저희 집으로 갈까요.”
“예? ……지금요?”
“여기엔 식재료가 없잖습니까.”
어제 다 썼잖아요, 라는 말을 듣고서야 유현진은 그의 말마따나 현재 이 집 냉장고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뒤져 보면 먹을 게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그럴싸하게 먹을 만한 걸 만들 만큼은 아니다.
“아니,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댁으로 찾아가기엔,”
유현진은 당황했다.
현가가 어떤 집인가. 당대 총리의 집안이자 유서 깊은 명문이다. 이 남자야 제집이니 그렇다 쳐도, 정식으로 초대도 받지 않은 남이 갑작스레 들이닥쳐 밥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집이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여러모로 제 발 저린 상황에서는 더욱이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번 주말 동안엔 총리 관저에서 돌아오지 않으셔서 집에는 안 계십니다.”
아 그럼 좀 안심……이 아니라,
“하지만 아무래도,”
“제 배우자 될 사람이 제집에서 저와 밥을 먹는데 따져야 할 문제가 그렇게 많습니까?”
유현진이 재차 거절하려던 때, 현태오가 더 언쟁하기 싫다는 듯 말을 잘랐다. 그 순간 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말도 막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여전히 마음속에 죄책감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 와중에도 머릿속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배우자 될 사람……, 배우자 될……, 배우자……, 현실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아주 지극히 매우 낮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말 자체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유현진이 꽁꽁 얼어붙어 눈만 깜박이는 가운데 창밖으로 잠깐 시선을 던진 현태오는 흠, 하고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평연한 낯으로 돌아보았다.
“밥 먹고 나서는 모처럼 휴일이니까 같이 미술관에라도 갈까요. 근교에 드라이브를 하러 가도 좋고.”
뭐지……, 뭔가 굉장히 고리타분하고도 정석적인 데이트 코스를 늘어놓는 듯한……. 하지만 데이트라니, 설마. 이 남자는 제상아와 정혼하고 있었던 때에도 간혹 서로의 집(혹은 궁)을 방문해 다과를 나누는 정도의 만남 외에는, 신년 연주회나 후원 화가의 전시회 등의 반(半)공식적인 행사에나 동행하던 사람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유현진이 차분히 고민해 볼 틈은 없었다.
“일단은 밥부터 먹고 생각해 보지요.”
더 이상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한 현태오가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그 손에 붙들린 유현진도 곧 끌려가다시피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
‘저놈은 못하는 게 뭐냐?’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현가 형제들(막내 제외)이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진문성을 불러 앉혀 놓고 했던 말이다.
테이블 위에는 현태오가 이번에 북부 전선에서 돌아오면서 받은 무공 훈장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는 핥아먹은 것처럼 말끔하게 비어 있는 큰 접시가 놓여 있었다.
‘동네 돌멩이 주워 오듯이 훈장 가져오는 거야 뭐 이제 그러려니 하겠는데, 와……, 이 새끼 파테 구운 거 완전히…….’
현태양이 입맛을 다시며 빈 접시를 노려보았다. 그 접시에는 원래 환상적인 맛을 자랑하는 파테 앙 크루트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앞으로 그들의 생에서 영영 먹어 보지 못할 파테였다.
현태오는 머나먼 북부 전선의 험지에서 8개월을 보낸 뒤 바로 일주일 전에 귀경했다. 물론 진문성도 함께였다.
북부 전선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불쑥 ‘갈바니아식 파테를 먹고 싶군.’ 하고 중얼거렸는데, 한창 교전 중인 전지에 이역만리 타국식 파테도, 그 요리사도 있을 리 만무했다. 잠시 고민하던 현태오는 결국 재료를 구해 와 본인이 구웠고, 그 맛은 정식 요리사 뺨칠 수준이었다.
현태오는 매우 드물게 직접 요리를 하곤 했다. 갑작스럽게 뭔가가 먹고 싶으나 그 음식도, 만들 수 있는 사람도 없는 상황일 때에만 그는 직접 요리했는데 몇 년에 한 번이나 벌어질까 말까 한 일이었다.
그 소문이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현가 안주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나도 우리 아들이 구운 파테를 먹어 보고 싶구나.’
‘그냥 사 드세요.’
어머니의 요청을 귓등으로 듣는 척도 안 하고 단칼에 거절한 현태오였으나,
‘너는 몇 년째 엄마 생일도 넘겨 버리는 애가, 엄마가 모처럼 이렇게 부탁을 하는데도 그러니? 내가 너 전장에 있는 동안 널 위해 금식 기도를 일주일씩 여덟 번을 하느라 제대로 먹고 지내지도 못해서 살이 8킬로나 빠졌는데, 너는 그 8킬로의 고작 일부만이라도 좀 채워 줄 수 없다는 거니?’
그녀의 원망 같은 애원에 못 이기고 결국은 파테를 한 덩이 굽고야 말았다. ‘더는 안 합니다.’라는 단호한 전제를 달고서.
전쟁통에 구운 파테도 그렇게나 훌륭했는데, 제대로 재료들을 갖추고 제대로 설비가 된 주방에서 구워 낸 파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미식에 단련된 현가의 안주인이 감탄해 마지않으며 한 조각 썰어 먹고 아껴 둔 나머지 파테는 우연히 모여 있던 현가 형제들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황홀하고도 아쉽게 빈 접시를 바라보며 부른 배를 두드리던 그들은 마침 또 지나가던 진문성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이거 태오가 만든 거 아니지? 만드는 척만 하고 어디 전문 요리사한테 몰래 특별 주문한 거지?’
현태양이 의심스럽게, 한편으로는 제발 그러길 바란다는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직접 구우셨습니다.’
썩 좋아하지도 않고 스스로 원하지도 않은 요리를 하는 내도록 심사가 사나웠던 현태오를 떠올리며 진문성이 대답하자 현태양은 아아, 하고 절망적으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럼 이제 내 인생에 다시는 못 먹어 보겠군. 아오……, 맛만 보여 주고 말 거면서 그놈은 왜 이따위로 맛있게 구워선…….’
한 번 더 구워 내라고 어떻게 구슬릴 방법 없을까? 아니면 협박할 방법이라든가? 하고 음침하게 중얼거린 현태양이었지만, 저놈 상대로는 어림도 없다고 손을 내젓는 형들의 반응에 실망스런 기색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현태주가 포크로 빈 접시를 아쉽게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정말로 맛있네. 저 녀석은 군인 그만두고 식당을 차리는 편이 훨씬 대성하겠어.’
‘뭘 한들요. 저놈은 색종이 접기 학원 같은 걸 차린다 해도 떼돈을 벌걸요.’
한숨을 쉰 현태양은 구석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무공 훈장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다가 진문성에게 툭 물었다.
‘야, 문성아. 저놈은 못하는 게 뭐냐? 넌 계속 저놈 옆에 있어 왔으니까 알 것 아냐.’
진문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는 한은 없습니다.’
‘없어? 정말로?’
‘예. 안 해 보신 일들이라면 있지만, 못하시는 일은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너마저도 모르냐, 하고 현태양이 혀를 찼다.
진문성이 아는 한 현태오는 국가적 중대사에서부터 딱지치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잘했다. 해 본 적이 없거나 본인이 싫어해서 안 하는 일은 있었지만 일단 하면 뭐든지 잘했다. 심지어는 처음 해도 웬만큼 숙달된 사람보다 잘해, 천재라는 건 아마도 이 남자를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내 동생이지만 그놈은 사람 같지 않다니까.’
‘음――아니다. 그놈도 못하는 게 있긴 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현태양의 옆에서 잠깐 생각해 보던 현태주가 말했다. 읭? 하고 현태양이 귀를 쫑긋했다.
‘그놈은 사람들이랑 잘 지내는 걸 못하잖아.’
‘아――맞다, 맞아! 그러네, 그걸 못하네!’
본인 동생의 단점을 찾아낸 게 그렇게 기쁜지 현태양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러나 그때 현태원이 장남답게 막냇동생을 역성들어 주었다.
‘그건 아니지. 그놈이 좀 살갑지 못하긴 해도 인간관계로 문제 일으킨 적은 없잖아.’
‘그거야 아무도 그놈한테 덤빌 엄두를 못 내니까 그렇지 사람들이랑 잘 지내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형님.’
‘그렇다 한들 인간관계 정도로 일 못 할 놈도 아니고, 남이 저를 어려워하거나 싫어한다 해서 타격받을 놈도 아닌데 뭘.’
현태양은 무어라 반박하고 싶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어물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어쨌든 어디서 당하고 올 놈은 아니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난 걱정이라고요, 형님. 저놈 저렇게 사람 감정 헤아리지 않고 목적 지향적으로 살다가 큰코다치지나 않을까.’
가끔 보면 저놈은 제 감정도 모르는 놈 같다니까요? 하고 혀를 차는 현태양에게, 현태원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살다가 한 번쯤 큰코다쳐 보는 것도 괜찮지 뭘.’
‘그러다 혹시나 애먼 사람이 피해라도 보면 어쩝니까.’
그러면 혼쭐을 내야지, 내 동생이 못된 짓 하는 꼴을 두고 볼 순 없지, 하고 형제 넷 중 가장 태도가 거칠지만 또한 가장 잔정이 많은 현태양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다 불현듯,
‘――그렇지, 연애!’
현태양이 눈을 번쩍였다.
‘그놈이 연애는 못할 거야! 사람 감정이라곤 골목길의 돌멩이 보듯 하는 놈이 연애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태오가 연애할 일이 뭐 있어. 정혜궁마마랑 결혼할 놈인데.’
‘보라고요, 정혜궁마마랑도 밍숭맹숭하게 정해진 날짜에만 딱딱 얼굴 보며 지내지, 그게 어디 남녀 간에 알콩달콩하게 연애를 하는 느낌입니까!’
팔짱을 끼고서 듣고 있던 현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나도 동의해. 그놈이 누구를 살뜰하게 챙기고 아끼고 하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
너그러운 장남 현태원은 어떻게든 막내를 보듬어 주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은 듯 주저했다.
‘그거는 또 모르지. 그놈은 뭐든 하려고 작정을 하면 잘하잖아. 그러니까 연애도, 아직 할 마음이 안 들어서 그러는 거지 막상 하려 들면 잘할 수도 있어.’
‘퍽이나요?’
‘아니야, 할 수 있을 거라니까.’
‘아니라고 봅니다.’
살짝 자신 없이 막내를 감싸 주는 장남에게 코웃음 치며 꿋꿋이 개기는 삼남이었다.
그리고 그런 형제들의 대화를 늘 그렇듯 아무 주장 없이 잠자코 듣기만 했었던 진문성이었으나…….
“…….”
기둥 옆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은 진문성은 평소처럼 보일 듯 말 듯 한 웃음을 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서, 아까부터 창가의 테이블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그의 상관이자 사촌 형인 현태오였고 하나는 그의 ‘공식적인’ 연애 상대 유현진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간소하지만 정갈하고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는 지리탕과 도미구이, 그리고 레어로 구운 쇠고기는 현태오의 솜씨였다.
“도미는 찌는 게 더 맛있지만 그건 시간이 걸리니까 다음에 해 드리겠습니다.”
현태오는 평연히 말하며 도미 살을 한 덩이 큼직하게 발라내어 유현진의 밥그릇 위에 얹어 주었다. 유현진은 그의 젓가락 끝을 흘끔 쳐다보았을 뿐 별말 없이 생선살을 밥술로 떠 받아먹었다.
“잘 구워졌네요. 지리탕도 아주 시원하고.”
세상 맛없는 얼굴로 중얼거리면서도 유현진은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기도 좀 드시겠습니까?”
“아니요, 전 육고기는 덜 익은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애초에 이건 제 몫으로 구운 거니까요, 하고 현태오는 금세라도 피가 뚝뚝 흐를 듯한 쇠고기를 씹었다.
그리고 그 시종일관을 진문성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간밤에 외박을 한 현태오가 새벽녘에 잠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조깅을 나가는가 싶더니 몇 시간 뒤 뜬금없이 유현진을 데리고 돌아온 게 조금 전이었다.
테라스가 딸려 있는 2층의 보조 주방으로 온 현태오는 냉장고에 있던 몇 가지 재료를 끄집어내어 요리를 시작했고, 근처에서 불안정하게 서성거리다 현태오에게 한소리 들은 유현진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테라스가 내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 뚝딱 차려져 나온 음식들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고, 진문성은 별일이 없는 한 언제나 상관 근처에 머무르는 습관대로 널찍한 보조 주방 안쪽의 기둥 옆, 그들에게서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만 있자……, 고기보다는 생선을 좋아하고. 탕보다는 지리. 디저트류는요? 단걸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아닙니다. 단것 안 좋아합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2킬로짜리 쿠키 틴 케이스가 2주 만에 다 비던데.”
“……, ……이가 쉽게 썩는 편이라서 안 좋아하려 합니다. ……그러게, 얼른 먹어서 없애려 했는데 왜 자꾸 도로 채워 놓으십니까.”
“아아, 이가 약하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단것은 안 드시는 걸로 하지요.”
“――아니, 아예 안 먹을 것까지는 없고요,”
“그러면 밥과 빵 중에서는 어느 걸 더 좋아하십니까?”
“빵……, 아니 그보다 단것 말인데요, 저는 치아 관리를 아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적당히는 먹어도 괜찮습니다.”
“빵이라. 단것을 줄여야 하니 페이스트리류보다는 식사빵 위주로 드시는 게 좋겠군요.”
“먹어도 된다니까요? 식사빵보다는 당연히 페이스트리가……!”
무덤덤한 낯으로 식사를 하는 동안 여상하게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주로 대답을 하는 편인 유현진은 조금 전부터 머리 위에 보이지 않는 귀 같은 게 쫑긋거렸다가 축 늘어졌다가 바짝 섰다가 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고, 주로 질문 공세를 펴고 있는 현태오는 그 투명한 게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양 유현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현태오의 가느스름한 눈매에서는 은근히 즐거운 심술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유현진의 눈에는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 ……?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평화로운 평소의 표정 그대로 그들을 바라보는 진문성의 눈매가 점점 가라앉았다.
뭐랄까……, 어쩐지…….
왠지 모르게 심란해지는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품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진문성은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전화를 확인했다. 현태양이었다.
“예, 태양 형.”
‘그래, 문성아. 어디냐? 뭐 해?’
“집입니다. 잠깐 쉬고 있습니다.”
‘그럼 태오도 집에서 쉬고 있겠네. 그런데 왜 그놈은 내 전화는 안 받아?!’
진문성은 대답 대신 애매하게 웃기만 했다. 왕실과의 파혼이 결정된 뒤로 현태오가 현태양의 전화를 제대로 받지 않기는 했지만 아예 안 받는 건 아니었다. 현태양이 유현진의 이름자라도 꺼낼 성싶으면 가차 없이 끊어 버려서 그렇지.
‘그놈 요새 뭐 해? 바빠?’
“송갈에서 온 사절단의 보안 관련 일을 맡으셔서 일이 좀 많긴 합니다.”
아 맞다, 그랬었지, 하고 중얼거리던 현태양이 혀를 찼다.
‘하여간 그놈은 다쳐서 재활하러 귀경한 놈이 쉬지는 않고……, 몸 상태는 좀 나아졌고?’
“예, 병원에서 재활 일정을 예정보다 크게 단축시킬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평항으로 돌아가기 전에 거의 완치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겠다고요.”
‘뭐?! 와……, 그놈 회복력 좋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괴물 같은 놈.’
현태양은 욕을 하면서도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진문성은 전화 너머로 보이지 않을 텐데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아닌 게 아니라 현태오는 정말로 괴물 같은 속도로 낫고 있었다. 원래부터 건강 체질에 다쳐도 남들보다 금방 낫곤 했지만, 이번에는 유난하다. 특히나 요 근래 들어서는 병원에서 다시 검진해 보자고 미심쩍어할 정도였다.
“태양 형은 별일 없으시죠? 언제 귀국하세요?”
‘다음 주. 들어가면 술이나 한잔하자. 여기선 도무지 양놈들 술 입에 안 맞아서 못 먹겠어. 편육 떠다가 우황백주 한잔하면 딱 좋겠다.’
“…….”
진문성은 저도 모르게 창 쪽을 흘끔 보았다.
고용인에게 듣기로는 술병이 다 비었더라고 하던데, 독주 한 궤짝을 다 비운 두 명은 지리탕으로 해장을 하며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자신은 타고나기는 약하게 타고났지만 워낙 관리를 잘해서 아주 건강한 치아를 가지고 있다며, 유현진은 본인의 이가 건치라고 아까와는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었고, 그 앞에서는 현태오가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런 유현진의 얼굴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심술궂고 기분 좋아 보이는데, 인생의 낙 하나를 빼앗길 위험에 처한 유현진만 혼자서 심각했다.
그런 유현진의 불편한 심사가 머나먼 이국땅까지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현태양이 목소리를 낮추더니 물었다.
‘그런데 요즘 현진이는 어떠냐. 좀 괜찮아 보여?’
“예, 통역사 일로 바쁘긴 하지만 잘 지내십니다.”
‘바빠? 그래, 차라리 바쁜 게 낫지. 마음이 힘들 때에는 몸이라도 바쁜 게 나아.’
현태양은 혀를 끌끌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진이도 참 가엾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눈물을 머금고 신관이 됐던 애가 그게 무슨 날벼락이냐. 에휴……. 그래, 그래서 태오 그놈은 언제쯤 현진이 일 마무리할 거래? 워낙 떠들썩했으니 당장에야 못 하겠지만, 평항 돌아가기 전에는 대충 말로라도 정리해 두고 가는 거지? 애 마음고생 오래 시키면 안 된다.’
현태오가 전화를 받았더라면 그에게 했을 당부를 진문성에게 대신하는 현태양이었다. 그래 본들 진문성이 현태오에게 그 말을 전하지 않을 줄은 그 역시 알고 있을 텐데도, 어지간히 마음이 쓰였나 보다.
그랬다.
유현진에게는 남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유세진이 술에 취해 눈물 콧물 훌쩍이며 주절거린 말이니 거짓말은 아닐 거다.
진문성은 현태오에게 말을 해 둘까 하다가, 누가 누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게 정치적으로 기억해 둘 만한 건수가 아닌 한 ‘쓸데없는 보고’를 매우 귀찮아하는 현태오의 성격을 떠올리고는(그는 심지어 과거 제 둘째 형과 셋째 형이 한 아가씨를 사이에 두고 결투를 벌여 떠들썩했던 때에도 ‘그런 쓸데없는 얘기는 할 필요 없어.’라고 일축한 바 있다), 별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성싶어 넘겼었다.
그랬었는데…….
유현진이 밥술을 비울 때마다 도미 살을 발라 밥 위에 얹어 주는 현태오와, 그럴 때마다 겸연쩍게 눈을 깜박이면서도 군말 없이 잘 받아먹고 있는 유현진을 지켜보며 진문성은 왠지 모르게 심란해지는 심정으로 “예……, 그래야죠…….”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말이다, 문성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별안간 현태양이 좀 기분이 살아난 어조로 말했다.
‘현진이가 남자를 좋아해서 혼자 속앓이하다가 신관이 된 거라며.’
“음, 세진이가 정확하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아니라고 하지도 않긴 했지요.”
‘그래그래, 그런데 말이야, 현진이가 지금 공식적으로 남자랑 파트너가 되어 버렸잖아.’
“예, 일단은 그렇지요.”
‘그럼 기왕 이렇게 된 마당이니, 이제라도 그 상대 남자한테 고백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누가 또 알아, 그 상대가 뜻밖에 열린 마음의 소유자일지? 현진이가 남자와 파트너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건 이미 전국적으로 다 알려진 셈이니, 밑져야 본전이잖아.’
그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진문성은 잠시 침묵했다. 테이블과는 이미 제법 떨어져 있는 거리였는데도 몇 발짝 더 떨어지며 등을 돌렸다.
“아, 예에, 하지만 그러기엔 지금 유현진 씨의 입장이 좀,”
‘아니 아니, 물론 당장은 안 되겠지. 하지만 태오가 현진이랑 계속 그러고 있을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 뒤에 말이야.’
“어음……, 하지만 그 상대 남자가 남자와도 되는 사람일 확률이 과연 그리 높을까요?”
‘말해 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기왕 버린 몸인데 뭐 어때.’
졸지에 기왕 버린 몸이 되어 버린 유현진을 흘끔 쳐다보던 진문성은 문득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가끔(종종) 감이 비상하게 좋을 때가 있는 저 남자가 뭔가 언짢은 소리라도 들은 양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문성아, 누구야.” 하고 물어본다. 진문성이 막 대답하려 했을 때 유현진이 젓가락 끝으로 도미 머리를 집적거리자 “볼살 먹어요, 볼살. ……있어 봐요, 발라 줄 테니까.” 하고 시선을 돌려 버렸지만.
‘야, 그런데 말이다, 내가 또 생각을 해 봤는데,’
진문성의 귓가에 현태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살짝 어두워진 목소리였다.
‘현진이가 신관 되기 전이면 아직 우리 집에 살고 있었을 때잖아. 그러면 현진이가 좋아한다는 게 우리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혹시 말이다. 혹시……, 그게 나라면 어떡하지?’
“……예?”
‘생각해 봐. 그 당시에 우리 집에서 제일 성격 좋고 친화력도 좋았던 사람이 나 아니었냐. 실제로 세진이랑은 종종 같이 놀아 주기도 했고, 현진이도 나름대로 나를 잘 따랐거든.’
“…….”
‘그래, 물론 걔가 학교나 다른 데서 누굴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잖아. 혹시나 나라면……, 물론 내가 현진이를 참 아끼고 또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그 녀석이 혹시라도 나를 좋아한다면 그 마음에 응해 줄 수는 없을 것 같거든.’
아……, 그러면 안 되는데……, 하고 현태양이 걱정스레 탄식했다.
“……. 굳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놈 봐라? 야, 모르는 일이야. 혹시라도 현진이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너라면 어떡할래?!’
유현진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진문성은 움찔했다. 삽시에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아니, 남자라서 싫다거나 그런 이유라기보다는, 왠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문성아, 누구 전화냐니까.”
그때, 저편에서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던 현태오가 물었다. 가끔 현태오는 감이 귀신같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도 뭔가 수상쩍은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아, 태양 형이 전화하셨습니다.”
진문성이 대답하자 현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을 텐데, 적당히 끊어.”
‘이놈아, 다 들리거든?!’
전화 속에서 현태양이 버럭 외쳤지만 그 소리는 저기까지 들리지 않을 터였다. 욕설과 함께 구시렁구시렁 덧붙이는 말도.
‘어찌 됐든 태오 저놈만큼은 아니야. 절대 아니지.’
“예……, 뭐……, 그렇긴 하지요…….”
진문성은 얼버무리듯 대답하며 유현진을 흘끗 살폈다.
이제는 생선살을 발라 아예 젓가락을 입에 대 주고 있는 현태오의 앞에서 유현진은 거북스러운 낯으로 앉아 있었다.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채 삭막하게 굳어 있는 얼굴로만 봐선, 꼭 무슨 수치플……까지 생각하다가 진문성은 얼른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 내고 말았다.
떠올려 보면 오래전부터 유현진은 늘 현태오를 기피해 왔다.
원래부터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현가 형제들 중에서도 현태오를 유난히 불편해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그렇다고 이상할 건 없었던 게, 어차피 현태오를 어려워하는 사람은 태산처럼 많았다――라기보다 안 어려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와중에 좀 신기했던 점이라면 그 싫어하는 기색을 너무도 숨김없이 단호하게 드러내었던 터라, 저놈 지금 싸움 거는 건가, 저 배짱은 뭐지, 하고 감탄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고 보면 현태오도 저 성격에 신기할 만큼 오래 참아 줬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번에 ‘그래, 너 잘 걸렸다’ 하고 유현진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도 납득할 만은 하지만…….
‘여하튼 다음 주엔 귀국하니까 들어가면 술이나 마시자.’
“예, 조심히 들어오십시오.”
에이태오그놈새끼형님도몰라보는새끼, 하고 툴툴거리는 욕설을 마지막으로 현태양은 전화를 끊었다.
진문성은 전화를 품에 넣으며 다시 기둥 옆으로 가 앉았다.
창가 테이블에서는 식사를 다 마쳤는지 유현진이 수저를 내려놓고 있었다. 현태오도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부족하진 않으십니까?”
“아니요, 충분합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접시가 거의 비었으니 유현진의 평소 양보다는 많이 먹었다. 현태오도 더 권하지 않았다.
“매일은 힘들지만 주말에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현태오가 여상히 말하며 엄지로 유현진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눈동자만 올려 현태오를 쳐다본 유현진은 도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런데,”
그때 유현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줄곧 혼란스러운 듯 음식을 받아먹으며, 물어볼까 말까 고민스러운 눈치로 눈동자를 굴리던 유현진이다. 현태오는 “예.” 하고 말해 보라는 듯 선선히 거들었다.
“왜 이렇게 저한테 잘,”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유현진은 멈칫했다. 그 뒷말을 붙이기가 쑥스럽기라도 한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다른 말을 꺼낸다.
“원래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잘,”
그 말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지, 하고 혼란한 와중에도 이성적인 답을 스스로 찾아낸 유현진을 보고 진문성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더 망설이던 유현진은, 이윽고 굳게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물더니 현태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얼마 전에, 현태오 씨가 연예인과 비밀리에 사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니, 따지려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냥 좀 헷갈려서, 확인은 해 둬야겠다 싶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하려나 느긋하게 바라보던 현태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원래도 눈에 띄는 웃음은 없긴 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눈치로 유현진을 바라보던 눈매가 굳어 버렸다. 그 대신 화가 난 듯한―혹은 당황한 듯한― 기세로 눈을 치뜨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매우 단호하게 즉답한 현태오는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듯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는 유현진 씨와 이렇게 된 뒤로 아무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개소리를 지껄입니까?”
“아니 그냥, 어디서 우연히 들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소립니다. 괜히 과거 일을 파헤쳐서 잘 지내는 사람들을 들쑤셔 놓으려는 비꼬인 인간들이 있는데, 쓸데없는 이간질이니 곧이들으실 것 없어요. 저는 유현진 씨 말고는 이렇게 개인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기만 하면 당장 쫓아갈 기세라 유현진이 되레 움츠러들었다. 현태오는 어이없고 억울하다는 듯 못 박아 말했다.
“그러니 헷갈릴 것도, 확인할 것도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예.”
유현진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선 더 혼란스러운 듯 연신 눈을 깜빡이는 그를, 현태오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헷갈리는 겁니까?”
현태오가 묻자 유현진은 움찔하더니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닙니다.”
“별것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별것 아니에요.”
유현진이 이것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끝에,
“유현진 씨. 우리 무슨 사입니까?”
현태오가 대뜸 물었다.
불시에 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유현진은 말이 턱 막힌 듯 현태오를 보았다. 그 낯이 조금씩 천천히 달아올랐다. 시선도 조금씩 천천히 떨어진다.
“……교제하는 사이요.”
“알면 됐습니다.”
유현진의 기어들어 가는 대답에 현태오는 담담하게 쐐기를 박았다.
유현진은 목이 타는 듯 물을 마셨다. 무뚝뚝한 표정인데 얼굴 빛깔은 붉었다. 컵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양 꼼지락거린다.
유현진은 한사코 시선을 떨군 채 눈만 연신 깜박거렸고, 현태오는 그런 그를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럽게 뜯어보았다.
그리고 진문성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미심스럽게 그 시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씻고 나올 테니까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미술관이나 가죠.”
현태오가 일어나며 말했다. 덩달아 일어나려던 유현진은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걸음을 돌리려던 현태오가 유현진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불쑥 고개를 숙여 촉,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눈의 깜박임마저 멈추고 얼어 버린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유현진의 미간을 손끝으로 꾹꾹 눌렀다.
“인상 찡그리지 말고요. 또 그러면 더할 겁니다.”
유현진이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려다 멈칫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희한한 얼굴로 당황한 어린애처럼 쳐다보는 유현진을 내려다보며, 현태오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걸음을 돌렸다.
……, ……???
흔들리는 동공을 억지로 붙들어 두고서 미심스레 그를 지켜보던 진문성에게, 문 쪽으로 다가오던 현태오가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낯으로 말했다.
“15분 뒤에 내 방으로 와. 옷 갈아입는 동안 들을 거니 중요한 것만 추려서.”
간밤에 들어온 소식들을 보고하는 것은 휴일도 없이 매일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과였다.
예, 알겠습니다, 하고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하는 진문성을 돌아보지도 않고 현태오는 나가 버렸고, 그곳에는 유현진과 진문성 둘만 덩그러니 남았다.
진문성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테이블에 홀로 남아 있던 유현진의 무뚝뚝하던 얼굴이, 현태오가 문을 닫고 나가기 무섭게 삽시에 허물어졌다. 고개를 숙이며 주먹으로 입술을 훔치는데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 ……미쳤나……?”
유현진이 아주 조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다 뒤늦게 거기에 진문성도 있다는 걸 알아차리곤 얼른 다시 표정을 가다듬는다.
순식간에 무심한 낯을 뒤집어쓰는 걸 보며 진문성은 내심 감탄했다. 뜻밖에 표정 관리를 아주 잘한다. 빛깔은 여전히 빨개서 효과가 반으로 깎이긴 했지만.
흠, 하고 헛기침을 한 유현진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다가 진문성에게 물었다.
“현태오 씨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진문성이 즉답하자 유현진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진문성의 진심이었다.
“그런데 유현진 씨는 괜찮으십니까?”
원래라면 불필요한 질문은 거의 하지 않는 진문성이었지만, 조금 전 현태양과 통화한 직후라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럼에도 차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괜찮냐’라고까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유현진은 짧은 침묵 뒤에 “아니요.”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렸고, 진문성은 턱을 문지르며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다 그만두고 말았다. 이 이상은 더 이야기해서 좋을 일이 없을 성싶었기 때문이다.
사과 같은 얼굴로 석상처럼 굳어 있는 유현진을 홀로 남겨 두기로 하고 진문성은 자리를 떴다.
일부러 복도를 길게 돌아 정확히 15분의 실내 산책을 한 뒤 진문성이 현태오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초침을 맞추기라도 한 듯 현태오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막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진문성은 별달리 덧붙는 말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송갈에서 평항과의 접경 지역 책임자를 바꿀 예정입니다. 당생과 을영대가 후보에 올랐는데, 내부적으로는 당생으로 결정할 듯합니다.”
“무난한 인사로군. 유능하고 인망 좋고 세력도 적절하고.”
왕자를 받쳐 주기에 좋겠어, 하고 중얼거리며 현태오는 옷장을 열었다. 평소에는 서슴없이 옷을 골라내는데 오늘은 잠시 옷장 안을 둘러보며 고심하는 기색이었다. 드레스셔츠 앞에서 망설이던 손가락이 “아냐, 정장은 과하지.” 하고 중얼거리며 물러난다. 그런 현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문성이 보고를 이었다.
“이기호 사무장이 병으로 사직서를 제출할 모양입니다. 이번 연휴가 끝나는 대로 제출할 것 같은데, 제출 후 곧바로 지방으로 내려갈 듯합니다.”
그 외에 조승호, 박철우, 윤우명도 자리를 뺄 타이밍을 재는 것 같고요, 하고 이어지는 말에 현태오가 짧게 코웃음 쳤다.
“바로 엊그제 계연군과 술자리에서 기천을 쓴 놈이 병으로 사직? 개가 웃겠군. 겁 많은 놈이 눈치는 빨라선.”
이미 꼬리는 잡혔는데 이제 와서 도망가 봐야 늦었지, 하고 현태오가 내뱉었다.
“괜한 소리나 안 돌게 해. 이제는 돌아 봐야 소용없지만, 놈들이 괜한 말 듣고 몸 사려서 쓸데없이 질질 끌게 되면 귀찮으니까.”
“예. 그리고 어제 전재익이 계연군과 접촉했습니다. 정운태도 동석했답니다.”
정운태라, 하고 현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써먹어도 하필 그런 지저분하게 막사는 깡패 새끼를……. 그렇게까지 질 낮은 놈을 쓰면 곤란한데. 그런 놈들은 머리가 나빠서 약이나 빨아 대고 아무 짓이나 막 한단 말이야. 예측하기가 어려워.”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아, 연휴 중에 전하께서 미사담 왕자를 정안원으로 불러 독대하시고, 찻잔을 두 조 하사하셨다고 하더군요.”
현태오가 흘끔 진문성을 쳐다보곤 도로 옷장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음에 드셨나 보군.”
“산상 일도 있고, 사절단이 머무를 날도 오래 남지 않았으니 차라리 이르게 진행하시려는 모양입니다.”
“속전속결이라. 나쁘지 않지.”
“결혼 발표가 나면 많이 시끄러워질 텐데요.”
“뭐, 세간에서 떠드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놈들은 못 떠들게 만들어 드려야지.”
현태오는 간결하게 말을 맺었다. 진문성도 고개를 끄덕이곤 보고를 마무리했다.
몇 차례 옷가지를 만지작거린 끝에 현태오가 골라낸 것은 차분한 색깔의 울팬츠와 니트였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본인에게 잘 어울릴 만한 옷을 귀신같이 골라냈다.
옷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속옷을 다른 걸로 갈아입는다. 이미 입은 속옷을 굳이 왜 다시 갈아입는지 모를 현태오를 여전히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는 진문성이었다.
“오늘은 급한 일 아니면 굳이 연락할 것 없어. 웬만하면 네 선에서 처리해.”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어딘지 기분이 선선해 보이는 현태오를 보며 “예.” 하고 대답한 진문성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어제 술자리는 어떠셨습니까?”
바지를 입던 현태오가 멈칫했다. 그러나 여상하게 옷을 꿰입으며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고, 뜻밖이라면 뜻밖이고.”
느른하게 중얼거리는 입매는 슬슬 웃는데 눈매는 사납다. 그럼에도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진문성은 천천히 그의 낯을 살피며 말했다.
“산상 일과 관련되어 두 분의 기사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호의적인 편입니다. 중장년층 이상에서는 거부감을 보이는 목소리도 적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산상에서의 사고에 몸을 사리지 않고 나선 유현진과 현태오의 모습이 세간의 눈에 우호적으로 비친 덕에, 그들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논하던 목소리도 한풀 줄었다. 지금은 그들의 관계를 자칫 잘못 비난했다간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보수층에서도 말을 삼가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다 한들 남의 평가를 신경 쓸 성격은 아니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혹여 두 분의 관계가 이대로 진행된다 해도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듯합니다. 혹시 그럴 생각이 있으시다면 말입니다만.”
현태오는 아무 말도 없이 니트를 뒤집어썼다. 소매를 약간 걷어 올리고 어깨를 털어 옷태를 잡으며 거울을 보는 표정도 무심하다. 그러다가 툭,
“진문성이, 농담하나?”
짤막한 헛웃음을 웃었다.
“나더러 뭐, 저놈이랑 정말로 결혼이라도 하라고?”
“음……, 그러기에도 손색없이 대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려 봤습니다.”
현태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계를 손목에 감으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돌아서는 그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가 있다.
“그놈이 어떻게 나오는지 어디 한번 맞춰 줘 봐야겠다고 기왕 작정을 했으면 제대로 해 봐야 하지 않겠어? 끝을 보기 전까지는 어쨌든 내 공식적인 파트너로서 아주 자알 대해 드려야지.”
“……, 예.”
아, 예에……, 하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최대한 무덤덤하게 대답한 진문성이었지만, 그 모호한 뉘앙스를 저 귀신같은 남자가 금방 알아챈 모양이었다. 무슨 억울한 비난이나 의심이라도 산 사람처럼 눈살을 구기며 눈초리를 치켜올렸다.
“이것 보라고, 나도 적당한 선에서 겁이나 좀 주다가 말려고 했는데, 저 맹랑한 놈이 겁도 없이 날 희롱하려 드는데 그럼 제대로 어울려 드려야 하지 않겠어?”
“유현진 씨가 그러셨습니까?”
“간밤에 저 새끼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줄이나 알아? 이 현태오가 하마터면 정조를 잃을 뻔했어요――, 유현진이가 날 덮치려 들었다 이 말이야.”
진문성은 일순 말을 잃었다. 아연히 현태오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잠깐 누워서 눈 붙이고 있는 사이에 내 위에 올라타 옷을 벗겨 내더니 내 성기를 꺼내 움켜쥐고 그 위에 앉으려 들었는데도 오해란 말이지.”
진문성은 또다시 말을 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침묵했다.
현태오는 이런 농담을 하는 남자가 아니다. 과장하는 남자도 아니다. 아마 저 말은 고스란히 사실일 터였다.
차근히 되짚어 생각해 보자면, 일단 유현진이 현태오를 술자리에 초대한 이유는 저것인 모양이었다.
술 먹고 자빠뜨려서 거짓말을 참말로 만든다.
……다른 사람이 다른 상황에서 했더라면, 그것도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이라고 해 줬겠지만…….
“그래서, 잃으셨습니까?”
“‘뻔’했다고, ‘뻔’.”
이 새끼는 왜 또 헛소리야, 슬쩍 짜증이 이는 목소리로 현태오가 대꾸했다.
진문성은 다시금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전후 관계를 따져 보았다.
즉, 술에 취해 자칫 몹쓸 일을 당할 뻔했으나 무사히 그 마수에서 풀려나서――아침을 차려 줬다. 생선살을 발라서 밥 위에 얹어 주고. ……. ……. ……?
“음……, 그러면……, 이렇게 된 김에 그냥 몸까지 갖고 놀, 아니, 육체관계까지 갖고 지내다 지방으로 보내시려고요?”
진문성이 확인차 묻자 ‘이 새끼가……’ 싶은 눈길이 돌아왔다. 입을 다무는 진문성에게 짜증 섞인 한숨을 쉰 현태오가 말했다.
“진문성이, 아침에 뭐 잘못 먹었나? 저게 누군지는 알아? 유현진이야, 유현진.”
“……. 예, 그렇죠.”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라는 질문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전해졌나 보다. 현태오가 혀를 찼다.
“문성아. 내가 그렇게까지 막살진 않거든. 애초에 난 저 오만한 꼴이 꺾이는 거나 보려 했지,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놀다 말 것도 아닌데 무슨 놈의 육체관계야.”
“여태 놀다 말 사람들이랑 잘하셨잖습니까?”
진문성의 물음에 현태오는 기어이 버럭하고 말았다.
“저건 유현진이잖아! 나야 함부로 굴러다녀도, 아무리 저놈이 밉살스럽게 군다 한들 저놈을 함부로 굴려서야 안 되지!”
“……?”
그러니까 그 사이의 연관성을 잘……, 미심쩍게 생각하는 진문성의 앞에서 현태오가 미간의 주름을 주무르며 사납게 내뱉었다.
“게다가 말이야,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하나람님을 성실히 섬겨 왔는데 내가 망쳐 놓을 순 없지 않나? 어찌 됐든 저놈은 하나람님이 아끼는 자인데. 저놈은 고생하거나 함부로 구르면 안 되는 놈이야.”
전에는 그렇게 말씀 안 하셨던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지금 저 남자를 제일 고생시키는 사람이 누구신데……, 라는 말 역시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나 현태오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좀 못되게 굴어도 되지. 나는 피해자니까. 저놈이 나한테 거짓말을 해서 날 속여 먹으려 들고 건방지게 굴었으니 나는 그래도 돼. 하지만 나 말곤 안 돼.”
“……. 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진문성은 더 이상 질문하는 걸 관두고 그렇게만 대답하고 말았다.
잘 모르겠지만 그 와중에도 왠지 모르게 이제야 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그리고, 비산도로 보내는 거.”
현태오가 다시 거울 속의 제 모습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아, 예. 안 그래도 가능하면 일찍 보내 달라고 연락이,”
“일단 보류해 둬.”
보내는 거야 언제든 보낼 수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단호하게 중얼거린 현태오는 꼭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문성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뭐가 맘에 안 드는지 입매를 찌푸린 그는 시계를 보곤, “너무 오래 기다리게 뒀잖아.” 하고 혀를 차더니 걸음을 돌렸다. 금세 방 밖으로 나간 그의 걸음 소리가 삽상하게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그의 방에 홀로 우뚝 서 있던 진문성은 뒷짐을 진 채 그가 떠나간 문을 우두커니 쳐다보며, 저분도 못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어쩌면, 아주 형편없이 못하는 게.
*
“열두 번째야.”
“응?”
유현진은 젓가락을 집어 들던 손을 멈추고 제상아를 보았다.
오전에 찾아온 각료들과의 간담을 마치고 정혜궁으로 자리를 옮겨 막 점심을 먹으려던 때, 입을 막고 하품을 하는 유현진을 유심히 보던 제상아가 말했다.
“업무 시간 두 시간 동안 하품을 열두 번이나 하는 통역사라니, 일 제대로 안 할래?”
“야, 하품은 해도 일은 제대로 했잖아? ……근데 열두 번이나 했어? 간밤에 잠을 별로 못 자서…….”
그걸 넌 또 다 세고 그러냐, 유현진은 머쓱하게 중얼거리며 젓가락 끝을 입에 물었다. 제상아 옆에 앉아 있던 미사담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밤에 누구랑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셨길래 잠도 못 주무셨어요?”
“얘 주변머리에 무슨. 하늘을 봐야 별을,”
“예? 아, 현태오 씨랑 별을 좀…….”
코웃음을 치는 제상아와 쑥스러운 빛을 띤 유현진이 거의 동시에 말하다가 거의 동시에 말을 그쳤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빤히 유현진을 쳐다보던 제상아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누구랑 별을 따? 현 총독이랑?”
“엉? 아니, 따지는 않았고, 영암산에 별 보러 갔다 온…….”
유현진이 당혹스레 말하자 제상아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 쉬었다. 그래, 술을 그렇게 퍼먹이고도 아무 짓도 못 한 애가 이제 와서 무슨……, 혹시나 한 내가 바보지, 하고 중얼거리고는 그래도 새삼스럽게 뜻밖이라는 눈길로 쳐다본다.
“근데 영암산까지는 갑자기 어쩐 일로?”
“그냥, 저녁 먹다가 어릴 때 영암산 천문대에서 은하수를 봤던 얘기가 나와서, 그 길로 갔다 왔어.”
“편도로 네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그냥’ 별 보러 갔다 왔다고? 현 총독이랑?”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상아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쳐다보는 옆에서 미사담이 흔흔히 웃었다.
“좋을 때네요. 나도 첫사랑에 눈멀어 있던 무렵에는 다음날 국정 회의가 있어도 밤을 새서 바다까지 드라이브 갔다 오곤 했는데…….”
아련한 눈으로 얘기하던 미사담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보좌관에게 테이블 밑으로 발을 툭툭 차이고서야 얼른 제상아의 눈치를 살피며 흠, 흠,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상아는 미사담에게는 신경도 안 쓰고 유현진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갑자기 거기까지 왜 갔다 온 건데?”
“그러니까, 별 보러…….”
제상아가 미심스럽게 유현진을 보았다. 그 인간이 그럴 인간이 아닌데,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수상스러워하는 눈치다.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훌쩍 갔다 올 수도 있지, 넌 왜 그렇게 현태오 씨를 이성과 계획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으로 생각해?”
“그런 사람이 맞으니까 그렇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왜 모르니? 사람이 근 삼십 년을 한결 같았는데. 내 말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일화가 단 하나라도 있어?”
어떻게든 현태오를 옹호해 주고 싶었던 유현진은 말이 막히고 말았다. ……없었다. 유현진이 아는 한 현태오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한 인간이었다.
“그것 보렴.” 하고 제상아가 보란 듯이 말하는데도 반박을 할 수가 없어서 분했다.
유현진 역시 이상하긴 했다. 너무나 이상하고, 요 근래 들어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제도 그렇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다가―일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거나 짬이 나지 않을 때를 제외하면 저녁을 함께 먹곤 했는데, 그러지 못해도 밤늦게 꼭 들렀다 갔다― ‘오늘은 그믐이라 정원이 평소보다 어둡다’고 말한 게 시초였다.
‘그믐이라……, 전장에서 그믐은 편히 잘 수 없는 날이라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야습이 있기 쉬워서 더 경계해야 하는 날이지요.’
‘저도 그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겨울의 그믐밤은 더 춥고 어두운 느낌이라서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유현진은 정원에 켜 놓은 노란 등을 보다가, 하지만, 하고 중얼거렸다.
‘딱 하루 좋았던 날이 있긴 합니다. 아주 어릴 땐데……, 아버지와 어머니와 영암산에 별을 보러 간 적이 있었거든요. 춥고 맑은 그믐밤이라 은하수를 보기 쉽다며, 딱 오늘 같은 날 밤에 갔었어요.’
‘아아, 영암산. 그쪽 지역은 개발이 되지 않아 별 보기 좋은 곳이긴 하지요.’
‘예. 정말로…… 정말로 별이 많았어요. 은하수가 이렇게 길이 나 있는데……, 그렇게 선명하게 은하수를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정말 별이 많았어요.’
몹시 추운 날이었다. 꽁꽁 싸매고 갔는데도 어린 몸이 달달 떨렸다. 그 추위와 함께 기억에 새겨진 것은 달도 없이 새까만 하늘에 눈부시게 빛나던 별들의 향연. 도도하게 흐르는 강처럼 아득히 뻗어 있던 별들의 줄기.
‘정말, 정말 많았어요.’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그렇게만 중얼거리는 유현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태오가 느닷없이 ‘그러면 다시 가 볼까요.’ 하고 말했다.
‘마침 오늘 습도도 낮고 날씨도 맑으니 딱 좋을 겁니다.’
‘예? ……지금요?’
‘예. 지금요.’
‘하지만 내일은 쉬는 날도 아니고, 거기 갔다 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텐데요. 돌아오면 거의 새벽…….’
‘유현진 씨는 차에서 좀 주무십시오.’
대수롭잖게 말한 현태오는 그 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떨한 상태로 현태오에게 끌려가다시피 그의 차에 올라앉아 네 시간을 달려 영암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뜻밖에도 네 시간의 드라이브는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하게 오가는 대화도 끊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 가끔씩 흐르는 침묵도 편안했다.
영암산 천문대 뒤의 작은 샛길로 조금 더 올라간 차는 외진 흙길에 멎었고, 그곳에서 캄캄한 숲길을 십여 분쯤 걸어 올라가자 아무도 없이 그저 새카맣기만 한 곳에 갑작스런 공터가 나타났다.
별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는 밤하늘이 머리 위에 있었다.
까만 하늘을 은은하게 가르는 별들의 무리는 어릴 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흘러가고 있었다.
유현진은 마치 그 어렸던 날로 돌아간 양, 숨결처럼 하얗게 흘러나오는 조용한 감탄을 내쉬며 머리 위만 마냥 올려다보았다. 목이 아프도록 넋을 놓고서.
‘어릴 때,’
저도 모르게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도 시선은 하늘에만 꽂고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왔었습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어릴 때 딱 한 번. ……아버지는 휴일엔 늘 우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정적인 분이셨지만 언제나 바쁘셨어요. 그래서 제대로 휴일을 쉬는 날이 많지 않아서, 집 근처의 공원이나 근교 나들이는 가끔 다니곤 했지만 멀리까지 여행을 한 적은 거의 없어요.’
현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위에 걸터앉은 채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그때쯤 저는 좀 우울했어요. 세진이가 아기 때 몸이 약해서 종종 앓곤 했거든요. 그래서 세진이가 태어난 뒤로 한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진이를 더 많이 보살폈고, 저는 두 분이 원하시는 대로 착하고 의젓한 형처럼 굴었지만 내심은 서운했는데……, 그걸 두 분도 알고 계셨나 봐요. 한번은 먼 친척 아주머니가 수도에 볼일이 있어 찾아와서 며칠 머무르셨는데, 세진이를 워낙 예뻐하셔서 같이 주무시곤 하셨어요. 그날도 일찍부터 아주머니와 세진이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곧 우리 현진이 생일인데, 우리끼리만 별 보러 갔다 올까?’ 하고 눈을 찡긋하시더니, 그대로 차를 달려서 여기로 왔거든요. 그래서, 그때가 유일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와 저만 함께 있었던 기억인데…….’
정말 아름다웠다.
추워서 손이 곱아도, 어린 뺨이 얼어도 계속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저기에 까만곰자리가 보이는구나, 저 별이 남태성이야, 저기 저 사냥꾼자리에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있는데……, 하고 속삭이는 두 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 위로 언제까지고 끝없이 흘러가는 별들을 보았었다.
넋 놓고 기억 속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현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꽁꽁 언 손에 머플러를 둘러 주는 손길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시선을 떨구자 현태오가 무덤덤하게 머플러를 풀어 유현진의 손을 감아 주고 있었다.
‘……세진이한테는 한 번도 말한 적 없어요. 셋이서만 왔었다고 하면 서운해할 테니까. ……저 혼자만 알고 있는 보물 같은 기억입니다.’
유현진은 얌전히 손을 내맡긴 채 중얼거렸다.
말한 적이 없다 보니 기억 속에서 꺼내 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 아주 가끔 도시의 흐린 밤하늘을 보며 기억 속에만 있는 별하늘을 되새겼을 따름이다.
‘그 뒤로는 계속, 한 번 더 가 보고 싶다, 가 보고 싶다, 생각만 하면서 못 왔는데…….’
이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별들은 변함없었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한순간인 양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오길 잘했네요.’
현태오가 무심히 말했다. 흘러가는 일상 얘기라도 하듯이 여상한 투였다. 유현진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안간 눈가가 울컥 뜨거워졌다.
그렇게까지 슬플 것도, 그리울 것도 없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왈칵 눈물이 맺혀 스스로도 놀랐다.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라 어, 하고 눈을 깜박이다가, 현태오를 보고는 더 놀라고 말았다. 멈칫하며 유현진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 왜 웁니까.’
‘안 우는데요.’
‘그럼 이건 뭡니까.’
얼른 없애 버려야겠다는 듯이 커다란 손바닥이 서둘러 유현진의 눈가를 문질렀다.
‘웃으라고 데려왔더니 울기나 하고……, 이러면 제가 손해 아닙니까.’
현태오가 곤란하다는 투로 혀를 차며 유현진을 들여다본다. 갑작스런 눈물에 스스로도 당황해서 껌벅껌벅 현태오를 마주 보던 유현진은, 이유 없이 왈칵 솟구친 눈물방울만큼이나 이유 없이 더럭 우스워졌다.
‘손해일 건 또 뭔가요.’
유현진은 무심결에 짧은 숨을 터뜨리며 웃고 말았다. 현태오는 뚫어져라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허물어진 얼굴을, 눈매를, 입가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듯이.
그런 현태오를 유현진 역시 구석구석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팔을 뻗고 말았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먼저 몸이 움직였다.
손을 둘둘 감은 머플러 바깥으로 삐져나온 손가락으로 현태오의 멱살을 잡았다. 남한테 한 번도 잡힌 적이 없다는 그 멱살을 붙들고 끌어당기자 현태오는 어이없을 정도로 순순히 끌려왔다.
입술이 닿았다.
이제는 처음도 아닌데 처음처럼 달았다. 몸이 떨려 오도록 추운데 입술은 유난히 따뜻했다. 그 온기가 마음에 스며서 핥고, 또 핥았다.
유현진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묵묵히 입술을 내주고 있던 현태오가 어느 순간 앓듯이 으르렁거렸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
‘이렇게 사람 없고 어두운 데서, 이런 거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줄 모릅니까?’
여전히 고개를 들지도 않고 비키지도 않으면서 엄하게 나무라는 현태오를 유현진이 할끔 올려다보았다.
‘……해도 되잖습니까. 저는. 현태오 씨한테는.’
현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가볍게 머리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뚫어져라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그런 끝에,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눈초리를 아주 부드럽게 접으면서.
‘아닙니까?’
유현진은 떨려 나오려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당연한 것을 확인하듯이 되물었다. 한동안 웃고 있던 현태오가 ‘아니, 맞습니다.’ 하고 소리 낮추어 속삭였다.
‘맞아요. 해도 됩니다, 저한테는.’
그 뒷말과 함께 그는 고개를 떨구었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별들만 흐드러지게 빛나는 아래의 부드럽고 따뜻한 접촉이었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길어 봐야 고작 수십 초나 되었을까, 겨울 산의 밤공기는 호흡마저 얼릴 정도로 차가웠고,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다시 차로 내려와 수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길지 않은 시간은 계속해서 그곳에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변함없이 그곳에 흐르고 있을 별 길처럼.
그래서 유현진은 잠들 수가 없었다. 그 따뜻함과 달콤함이 계속 남아, 이른 새벽에 집에 도착해 침대에 들어서도 거의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고 말았다.
……그러니 이렇게 오전 내내 하품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너네 정말 사귀니?”
제상아가 몹시 미심쩍은 눈초리로 유현진을 살피며 추궁했다. 어, 응? 하고 당황한 유현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제풀에 “아냐, 그건 아니겠지. 현 총독이 데이트를 그렇게 풋풋하게 할 리가 없어.” 하고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내젓는다.
발끈해서 ‘할 수도 있지!’라고 외치고 싶은 유현진이었지만, 그 외침은 목구멍에서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이게 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말로, 진짜로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두근거리고, 두렵고, 기쁘고, ……겁이 났다.
이랬다가 어느 순간 ‘아니었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그럴 줄 알았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더라도, 마음이 저 바닥까지 가라앉아 숨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매일매일 더욱더 좋아질수록 그만큼 더욱더 겁이 났다.
“있잖아, 상아야.”
유현진이 불쑥 속삭였다. 제상아는 유현진을 보고는 멈칫하더니 낯을 찡그렸다.
“그러지 마. 너 그런 얼굴 하지 마. 너 그런 얼굴 하면 내가 무슨 말을 못 하겠잖아.”
“매일매일 더 좋아져. 계속 더 좋아져. 이러다 금방 내 마음을 들켜 버릴 것 같은데, 그럼 어쩌지.”
별보다 현태오가 더 반짝거렸다. 그렇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봤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홀린 듯 쳐다봐서 이미 들킨 건 아닐까, 마음이 요동쳤다.
“그런데, 들키면 왜 안 됩니까?”
그때, 어느새 밥그릇을 싹 비우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먹으면서 미사담이 물었다. 눈동자를 굴리며 얌전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미사담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포크로 접시를 톡톡 두드렸다.
“현태오 총독이 통역사님을 어떻게 할 심산인지――정말 진심으로 끝까지 책임지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건 이해하겠습니다. 세간의 말들도 그렇고, 사실 제가 봐도, 현 총독쯤 되는 사람이 그런 실수 때문에 남자를 평생 책임질까 의아하긴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현진 통역사님이 그 남자에게 마음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 상황에서 굳이 숨겨야 할 필요가 있나요?”
누굴 좋아한다는 게 잘못도 아니고, 고백을 한다고 해서 무슨 의무 같은 게 생기거나 약점을 잡히는 것도 아니고, 하고 미사담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 제양에서는 동성 간의 관계를 터부시하니까 숨기려 드는 게 이상하지는 않지만, 지금 두 분은 어차피 공공연한 관계가 되어 버린 상황이잖아요? 그러면, 이제 와서 구태여 숨기려 들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요?”
유현진은 눈을 껌벅였다.
음……?
“틀린 말은 아니네.”
제상아가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예전엔 결코 들켜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신세 진 집안의 아들을, 나라의 영웅을, 같은 남자인 자신이 좋아한다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담도, 혐오감도 안기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싫든 좋든 동성 관계라는 배에 올라탄 상황이 아닌가.
그렇다면――설령 거절당할 때 거절당하더라도, 말은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그를 속이고 있다는 마음의 짐을 한 줌쯤은 덜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모든 다른 이유들보다도 그저, 말하고 싶었다.
전하고 싶었다. 어떠한 결과가 돌아오든 그저 전하기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다고. 당신을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알리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마음이 부풀어 오른 지금은 더욱더.
“말해도 될까. ……말해 볼까.”
유현진이 불안스레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두려움 한 줄기가 발목을 감았다.
제상아는 그런 유현진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말은 독하게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상냥했던 그녀의 눈매엔 염려와 걱정 같은 것들이 어른거렸다. 한동안 유현진을 바라보던 그녀는 떨떠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지금은 예전이랑은 상황이 다르니까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 사실 나는 별로 권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넌 말하고 싶은 거지?”
유현진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조용한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래, 그럼 말해 봐.”
그 차분하고도 상냥한 대답에 유현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이번에는 확고한 결심을 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삽시에 마음이 흥분과 불안으로 차올라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래, 말해야겠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라도, 오래도록 가슴속에 담아 두기만 했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혹시나, 만에 하나, 어쩌면, ――웃어 줄지도 모르잖아. 어제처럼.
유현진은 공연히 들떠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그런 유현진을 바라보던 제상아가 문득 콧잔등에 주름을 지었다.
“차이면 언제든 찾아오렴. 따뜻하게 위로해 줄 테니. 친구 좋다는 게 뭐겠니.”
산통을 깨 놓는 좋은 친구다. 저 심술궂고 어여쁜 볼을 꼬집어 주고 싶었지만 뭇사람들의 눈이 있는 마당이니 무엄하게 그럴 수도 없다.
세모눈으로 제상아를 노려보는 유현진이었지만, 그래도 고백을 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벅차 도로 얼굴도 풀리고 만다. 그런 유현진을 보며 제상아가 ‘어휴, 저 어리바리하고 순하기만 한 걸 어쩜 좋니…….’ 하고 한숨을 쉰다.
문득 그들을 지켜보던 미사담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현진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젓는다.
“아니, 전에도 생각했었는데 통역사님 말이에요, 좀 뭐랄까, 복화술을 하는 것 같은……, 아니 뭐랄까,”
저런 어려운 단어까지 알고 있다니 저 정도면 현지인 패치 다 됐는데, 근데 내가 뭐? 하고 미심쩍게 바라보는 유현진의 얼굴을 손가락질하며―제양식 예의범절 패치는 한참 부족했다― 미사담이 말을 이었다.
“겉모습을 보면 딱 엄격근엄 그 자체인데, 말하는 걸 보고 있으면 굉장히 의외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귀염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굉장히 사랑스럽단 말이죠.”
“…….”
“…….”
언어는 현지인 패치 다 됐다는 말 취소. 아직 제양어의 올바른 사용법을 숙지하지 못한 것 같다.
일단은 고맙습니다……, 하고 유현진이 떠름하게 대답하자 미사담은 진짠데, 하고 웃었다. 그러다 흘끔 제상아를 보더니 대번에 진지한 낯빛으로 “그런데 겉과 속이 완전히 일치하는 우리 공주님은 훨씬 더 사랑스러우십니다.” 하고 덧붙인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표정하게 미사담을 보던 제상아는 눈길을 돌리는가 싶더니 폭 웃고 말았다. 그런 제상아를 보며 미사담도 눈매에 흔흔한 웃음을 담는다.
그것은 아주 짧고도 여상한 찰나였지만,
“……?”
일순 유현진은 멈칫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지금 뭔가 미묘한 느낌이…….
그러고 보면 제상아가 들고 있는 찻잔도 수상쩍다.
미사담이 전하께 하사받았다며 백옥 찻잔 두 조를 꺼내 보이더니 ‘예쁘죠? 하나는 상아 님 드릴게요.’라며 나눠 준 물건이다.
보통은 이미 결혼해 배우자가 있거나 혹은 결혼을 앞둔, 즉 짝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릇 종류를 쌍으로 선물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송갈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하고 넘겼다.
또, 선물 받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선물로 주면 안 되는데 싶었지만, 그것도 송갈의 관습으로는 상관없나 보다 하고 넘겼다.
그랬는데, 뭔가 하나가 이상하다 싶으니까 다른 것까지 연달아 이상해 보였다. 임금님께 하사받은 귀한 물건 한 쌍 중 하나를 굳이……?
유현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을 보는데, 제상아가 그런 유현진을 보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맞아. 그러고 보니,” 하고 입을 열었다. 그 통에 유현진의 머릿속에서 흘러가던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통역사 역할은 좀 어떠니. 할 만해?”
“응? 어, 좋아.”
유현진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은 상대의 언어를 잘 알고 있다 한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각 상황에 가장 적절한 단어를 뽑아내는 것도,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읽어 내며 말을 고르는 것도, 다음날의 일정을 위해 미리 관련된 사항들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익혀 두는 것도, 언제 불시에 터질지 모를 사고에 대처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유현진에게는 새롭고 즐거웠다. 사절단이 돌아가면 이 역할도 끝나 버린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외무관리청 담당관도 만족스러웠나 봐. 송갈과 연관된 업무 인원을 충원해야 하는데 너 관심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던데. 조만간 특채가 있을 거라던데 너 생각 있으면 서류 내 보지 그러니?”
“정말?”
유현진은 반색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잖아도 뭘 해서 먹고살지 걱정하던 참이었고, 게다가 일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필요 서류나 떼다 내. 너야 신관이었으니 그 이력 서류만 내면 다른 서류들은 커버되겠네.”
신관이었다는 것 자체가 필요 어학이나 여타 기능 자격 여러 가지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니, 하고 제상아가 말했다.
신학교를 졸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죽도록 공부해야만 겨우겨우 신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일껏 되어 놓고도 허망하게 사제직에서 쫓겨나서 옛 노력 다 소용없다 싶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기는 하나 보다.
어차피 오후에는 다른 일과 없으니까 이대로 퇴근해서 서류나 떼다 내고 쉬어, 라는 너그러운 고용주의 분부대로, 유현진은 기쁜 마음으로 퇴청했다.
「밥은 잘 먹었습니까? 어제 잠을 별로 못 자서 피곤할 텐데 버틸 만해요?」
궁궐에서 유현진이 몸담았던 교구의 신전까지는 걸어서 이십여 분, 정혜궁에서 나와 바로 신전으로 향하고 있던 때 휴대 전화에서 문자 수신음이 도로롱 울렸다. 현태오였다.
“…….”
별것 아닌 안부 문자인데 유현진은 낯이 달아올랐다.
별것 아니지만 별것 아니지 않다. 현태오가 명확한 용건도 없이 연락을 하는 일은 없었거니와, 심지어 볼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지 문자는 보내지 않았다.
즉, 말 그대로 ‘그냥’ 보낸 문자였다. 마치 진짜로 각별한 사이이기라도 한 것처럼.
「오전에 하품을 열두 번 했다고 정혜궁마마께 한소리 듣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어제 본 하늘이 너무 예뻐서 한 달쯤은 피곤해도 되겠어요.」
길 한가운데 오도카니 멈춰 서서 조물조물 문자를 보내고 걸음을 옮기는데, 가게 유리창에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어느 결에 실없이 웃고 있었나 보다.
유현진은 괜히 쑥스러워져서 얼굴을 문지르곤 얼른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다시 도로롱 전화가 울린다.
「한 달씩이나 피곤하면 곤란한데. 그러면 다시 드라이브 가려면 한 달은 더 지나야 한다는 소리잖습니까. 얼른 기운 차리세요.」
마음이 더워졌다. 겨우 그 몇 글자에 마음이 세차게 뛰며 둥실거린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손가락을 꼼질거리는 사이에 연달아 문자가 들어왔다.
「생일 선물은 뭐로 받을지 생각해 봤어요? 얼마 안 남았으니 잘 생각해 봐요.」
생일 선물. 그러고 보니 아침에 그런 말을 했었다.
정혜궁으로 출근하는 길에 궐문 앞에서 현태오와 마주쳤다. 진문성과 위병대장과 더불어 뭔가 이야기를 나누다 막 돌아서던 현태오는 궐문으로 들어서는 유현진을 보고는 말을 건넸다.
‘좀 쉬었습니까? 눈이 빨간데.’
‘그냥 눈이 좀 뻑뻑해서요. ……현태오 씨야말로 피곤하실 것 같은데요.’
‘전 괜찮습니다.’
밤새 운전하고 돌아와 얼마 자지도 못했을 현태오는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함께 차를 탔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그는 몸에 밴 습관처럼 주변 상태와 오가는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물어보려다 깜빡했는데, 생일이 이맘때쯤이라고요? 언제입니까?’
‘예? 아, 이달 말입니다. 다다음 주. 25일.’
‘아. 우리 아버지와 하루 차이로군요.’
‘예, 제가 하루 늦습니다.’
예전 현가에 머물렀던 무렵, 자신의 생일 하루 전날이면 늘 현상원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락들과 선물들 때문에 하루 종일 대문이 열려 있었던 걸 떠올리며 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하고 잠시 생각하던 현태오가 말했다.
‘그러면 선물로 뭐든 원하는 걸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그 담담한 발언에 유현진은 아연히 현태오를 보았다. 그러다 그 뒤에서 눈을 크게 뜨며 제 상관을 쳐다보던 진문성과 눈이 마주쳤다.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낯빛을 지우는 진문성과는 달리 유현진은 얼떨떨한 낯 그대로 다시 현태오를 보았다.
‘뭐든요?’
‘뭐든.’
아무렇지 않은 그 말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 제가 엄청나게 어마어마한 거라도 달라고 하면 어쩌시려고요.’
유현진의 당혹스런 물음에 현태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피식 웃었다.
‘기대하겠습니다.’
어마어마해 봐야 뭐 얼마나 어마어마하겠냐는 듯 선선히 대꾸하는 그를 앞두고, 아니 정말로 어마어마한 걸 바랄 수도 있는데? 하고 외려 유현진이 당황해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현태오는 ‘그럼 뭘 원하는지 잘 생각해 보고 알려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
「너요.」
유현진은 문자 창에 두 글자를 찍었다가 지워 버렸다.
유일하게 원하는 그것은, 그러나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정말로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를 내놓으라고, 약속했으니까 꼭 내놔야 한다고 강요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분수를 모르고 과한 욕심을 부렸다간 결국은 패가망신한다는 교훈이 담긴 수많은 전래 동화들을 떠올린 유현진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생일 전까지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답을 보냈다. 그런 뒤에도 한동안 액정 위에 남아 있는 현태오의 문자들을 눈으로 더듬었다.
이 남자가 좋다.
오래전부터 좋아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로 매일 더 좋아지고 있었다.
한마디씩 말을 건네줄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뻗은 손이 뺨이나 머리카락, 옷깃, 어디든 스칠 때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얼마나 혀뿌리가 떨렸던지.
이제는 말해야겠다.
오래도록 속에 담고만 있었던 마음을 이제는 이야기해야겠다.
그가 좋아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받아 주지 않더라도, 곤란해하더라도, 혹은 화를 내더라도, 언제까지고 눌러 둘 수는 없었다.
숨을 깊이 들이쉰 유현진은 혹시라도 망설일까 봐 숨도 안 쉬고 단번에 문자를 두들겼다.
「오늘 같이 저녁 먹고 싶습니다.」
전송한 다음에야 너무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나 싶었지만,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좋습니다. 일이 있어서 정혜궁으로 마중 가기는 어렵고, 8시에 바로 댁으로 가겠습니다.」
「예, 좋은 오후 보내십시오.」
애써 사무적으로 문자를 마무리한 뒤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그러지 않고는 계속 길에서 전화만 붙들고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이 둥실둥실 뛰었다.
오늘은 말할 것이다. 오늘은 모두 다 말해야지. 더 이상은 속이는 것도, 마음 무거울 것도 없이 말할 테다. 비록 내일 이맘때쯤 자신의 마음이 천당에 있을지 지옥에 있을지 이도 저도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순간 한천 형무소의 무시무시한 정경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건 어떻게든……, 생일 선물로 용서를 해 달라고 빌면……, 적어도 가족만큼은 봐주지 않을까……, 하고 생일 선물을 이용해 먹을 비겁한 궁리를 슬쩍 떠올리자 둥실거리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늘은 말해야지, 오늘은 드디어, 하고 흥성거리던 마음이 조금 더 가라앉은 것은 신전에 다다랐을 때였다.
신전 문 앞에 멈춰선 유현진은 금세 마음이 무거워졌다.
신적에서 제적당한 뒤로 이곳에 온 건 처음이었다.
일반인이 예배를 드릴 때에는 주소지에 해당되는 교구의 신전으로 가기 때문에, 더 이상 신관이 아닌 유현진이 이곳으로 올 일은 없었다. 보통은 제적된 신관은 스스로 삼가 원래 몸담았던 신전에는 가지 않는 게 관례였으므로, 이력 증명서류가 필요한 게 아니었더라면 오지 않았을 터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뒤로 줄곧 몸담아 왔던 곳이다. 앞으로도 별일이 없는 한 늙어 죽을 때까지 머무르리라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반인으로 그 문 앞에 설 줄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다.
“…….”
스스로 간절히 원해서 신관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일반인이 되었다 해서 큰 후회나 고통이 뒤따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신전 앞에 서자 아쉬움과 그리움이 씁쓸하게 맴돌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들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도 좋으련만.
두터운 나무 문을 가만히 쓰다듬던 유현진은 한숨을 쉬고는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처로 가는 길에 홀로 예배를 드리러 온 신자나 잠깐 들른 듯한 외부인 몇몇과 스치긴 했지만 신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가 의아해하다가 생각해 보니, 지금이 연초마다 항례적으로 하는 특별 사목 기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 대부분이 외부 사목을 나갔을 테니 자칫하면 사무처에도 사람이 없을 수 있겠는데, 하고 염려한 유현진이었지만, 다행히 사무처 안에는 사무원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아, 유 사제님. ……아, 아니지, 유――신도님.”
유현진을 보고 놀란 듯이 일어난 사무원은 이내 머쓱하게 호칭을 고쳐 불렀다. 유현진이 제적을 당하기 직전에 이 교구로 옮겨 와 일하기 시작했던, 유현진과 서로 얼굴은 알아도 미처 가까워질 만한 시간은 갖지 못한 젊은이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예, 유현진 신도님도 잘 지내셨어요? 가끔 신문에서 소식을 읽기는 했는데…….”
신문……, 신문에 날 만한 소식들이 어떤 거였더라……, 유현진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은 채 예에, 하고 중얼거리곤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모처럼 오셨는데 어쩌죠. 이번 주가 신년 특별 사목 기간이라 하필 딱 오늘 사무처장님이 안 계세요. 아마 저녁 늦게나 되어야 돌아오실 텐데……, 저기, 연락드려 볼까요?”
“아니, 아닙니다. 사무원님이 해 주셔도 됩니다.”
유현진은 전화를 집어 들려는 사무원에게 얼른 손을 저었다.
원래 사무처를 맡아보는 사무처장은 사제직에 있는 정신관이라 특별 사목 기간 동안 적어도 하루는 의무적으로 사목에 참가해야 했다. 그게 하필 오늘인가 보다.
신전 운영 등에 관련된 중요한 볼일이라면 대부분 사무처장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그가 없으면 곤란하지만, 이력 증명서를 떼는 정도는 이 신입 사무원도 할 수 있을 일이다.
그러나 사무원은 곤란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하지만 사무처장님을 통하지 않고는 제가 함부로 처리할 수가 없는데요.”
“예? ……음, 이력 증명서를 떼야 하는데……, 혹시 이력 증명서도 사무처장님 직인이 있어야 발급할 수 있게 바뀌었습니까?”
“아! 이력 증명서요! 아니요, 아니요, 그건 제가 할 수 있죠.”
아직 미처 일이 손에 익지 않은 듯한 신입 사무원은 그제야 도로 자리에 앉으며 노트북을 끌어당겼다. 혼자 사무처를 지키는 동안 일을 처리 못 해 곤란한 상황이 많았는지 노골적으로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알 만하다. 사무처장인 신관은 깐깐하고 섬세한 인물이었고, 성품이 그리 너그럽지도 못해 일에 서투른 아랫사람을 하루에도 여러 번 혼냈을 터였다. 아마 뭘 물어보려고 전화라도 했다간, 전화를 받자마자 ‘이제 웬만하면 혼자서도 일을 처리할 줄 아셔야지요!’ 하고 야단부터 치고 볼 인물이었다. 사무처장 본인은 머리도 좋고 상황 파악도 빨라 일을 맡기면 눈치껏 빈틈없이 잘 처리하는 유능한 사람인데, 아랫사람에게 너그럽지 못하다는 것 하나만이 흠이었다.
그러니 이 신입 사무원은 어지간하면 그에게 연락하지 않으려 끙끙거렸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안 해도 될 실수까지 저지르는 경우도 가끔 있을 터였다. 그의 전임 사무원이 초반에 그랬었듯이.
아직 어린데 기가 죽어 있는 신입 사무원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유현진이 한마디 거들었다.
“일이 많이 힘드시죠? 신전에 워낙 잡다한 일들이 많아서 그럭저럭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일하려면 일 년은 넘게 걸려요. 사무처장님이 나쁜 분은 아닌데 좀 까다로운 데가 있으셔서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힘내세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아차 싶었다.
어린 사무원은 그간 정말로 많이 주눅이 들어 있었는지, 고작 그 정도의 위로에 갑자기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일을 통 못해서, 그래서 야단을 매일매일 맞지만, 그래도 견딜 만…… 견딜 만…… 으흑,”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는 사무원을 앞두고 유현진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다 얼결에 주머니를 뒤적여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사무원은 고맙습니다, 하고 초콜릿을 받아들더니 눈물을 멈추었다. 그러곤 쑥스러운 듯이 헤헤 웃었다.
“유현진 신도님이 여기 사제님으로 계실 때에는 바늘 끝도 안 들어갈 만큼 냉정해 보이셨는데, 뜻밖에 인간미가 있으시네요. 이렇게 간식도 주시고……. 되게 엄격하고 쌀쌀맞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상냥한 데도 있는 분이셨구나…….”
“…….”
왜 이 젊은이가 사무처장한테 주눅들 정도로 야단을 맞는지 알 것 같았다. 해맑고 눈치 없고 말을 잘 못 가리는구나.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법이거늘……. 유현진은 속으로 (현태오가 들었더라면 어이없어하며 ‘저는 어떻고?’라고 말했을) 생각을 하며 침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무원은 초콜릿을 입에 물고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먹이를 준 상대에 대한 친근감도 덩달아 올라갔는지 발랄하게 생글거리며 쓸데없는 말을 붙인다.
“그런데 이력 증명서는 뭐 하시려고요?”
“아, 일을 하게 될 곳에 제출해야 해서요.”
굳이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유현진이 간략하게 대답하자 사무원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신전에서 일하려면 굳이 사제님, 아니 신도님이 직접 제출할 필요 없으시잖아요? 얼마 전에 여기서 바로 비산도로 이력 확인서 보내 드렸었는데. 새로 다시 보내 달래요?”
“비산도요?”
“예. 비산도 신전에 속가사제로 가시기로 결정된 것 아니었어요? 그때 지방 신전들 열……, 열다섯 군덴가 열여섯 군데에 이력 증명서 보내고, 최종적으로 비산도로 가시기로 하신 줄 알았는데? 다른 데로 바뀌셨어요?”
“……? 제가요?”
“예. 평항 총독부를 통해서 요청 들어왔던 거요. 진문성 부관님께서 직접 연락주시고 당부하셔서, 기자들이나 다른 데에 말 새어 나가지 않게 특별히 조심했거든요. 기자들도 여러 번 드나들었는데, 저 입도 뻥끗 안 했어요.”
자랑스레 말하는 사무원의 천진한 얼굴을 유현진은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무원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잠시 보류해 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사무처장님이 좀 난감해하시긴 했어요. 늦어도 5월 전에는 가실 거라고 확정해 주셔서 비산도에도 그렇게 연락을 드렸거든요. 그런데도 비산도에서는 사람이 너무 부족하니까 가능하면 빨리 보내 달라고 매일같이 연락해서 재촉하는데, 갑자기 일단 보류해 달라고 하시곤 언제쯤이면 될지 말씀을 안 해 주셔서……, 그래서 전 오늘 유 사제, 아니 유 신도님이 그 일 때문에 오신 줄 알았죠.”
이상한 얼굴로 말없이 사무원을 쳐다보던 유현진은 가만히 입가를 쓰다듬었다. “그때 하도 이력 증명서를 여러 번 뽑아서, 제가 유 신도님 제적번호도 외웠어요.” 하고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종알거리는 사무원을 바라보던 낯빛이 차츰 흐려졌다.
“진문성 부관님이…… 저 속가사제로 지낼 지방 신전들을 알아봐 주셨어요? 비산도로, 5월 전에 가기로 확정됐고?”
“예? 예. 진문성 부관님 일 엄청 잘하시더라구요. 되게 꼼꼼하게 이것저것 잘 챙기시던데. 심지어 유 신도님 비산도로 가셔서 거기서 받으실 평생지역연금까지 다 직접 처리하시던데요. 그런데 유 신도님, 지역연금은 한번 그렇게 옮기면 다시 철회가 안 될 텐데, 그럼 앞으로 평생 수도로는 안 돌아오시려고요?”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던 사무원이 종알거리다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다. 눈을 깜박깜박하며 유현진을 쳐다보던 천진한 얼굴에서 살살 웃음이 걷혔다.
“유……,”
“……아.”
잠시 미동조차 없이 멈춰 있던 유현진이 짧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도 몇 초쯤 더 말이 없다가,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확정이 된 줄은 몰랐어요. 그냥 부관님께 다 맡겨 뒀던 터라서……, 비산도라……, 좋은 곳이네요.”
사무원은 뭔가 이상했다 싶었는지 불안스런 눈치로 유현진을 할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한 번도 안 가 봤지만, 수도에서 좀 멀고 외져서 그렇지 한산하고 좋은 곳이라고 들었어요. ……저기 그런데, 혹시 거기가 별로……세요? 저기, 진문성 부관님이 다른 곳도 여러 군데 같이 알아보셨거든요. 유 신도님 오래도록 머물며 지내실 곳이니까 최대한 한적한 곳들로……. 혹시 유 신도님이 비산도 말고 다른 데가 더 좋으시다면 옮겨 달라고 하셔도 될 텐데…….”
사무원은 유현진의 눈치를 살피며 어물거렸다.
유현진은 바닥으로 떨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며 여상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비산도 좋네요. 먼 벽지의 신전에서 일해 봐도 좋겠다고 예전에도 생각했었거든요. 더 이상 신관은 아니라도, 속가사제로라도 하나람님을 모시며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예, 그럼요!”
유현진이 웃음을 띠자 사무원은 안심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말의 긴장은 남았는지 할끗할끗 쳐다보며 얼른 이력서를 뽑아 내밀었다.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하고 유현진은 입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별말 없이 받아 넣었다. 그런 뒤 사무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서다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
“사무처장님께는 제가 왔었다는 이야기는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러잖아도 신경 쓸 게 많으실 텐데 공연히 더 신경 쓰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사무원은 머뭇거리다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또 자신이 뭔가 실수를 저질러 야단맞을까 봐 겁이 나는 듯 입을 꼭 다물어 버리는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남긴 유현진은 사무처에서 돌아 나왔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거리를 걸어 다니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이렇게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눈 뜬 채 꿈꾸는 것 같은데도 걸음은 저절로 움직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걸었다.
머릿속의 5%쯤만 맹렬히 돌아가고 나머지 95%는 멀거니 눈 뜨고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역시 그런 거였나.
처음부터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거짓말로 비롯된 잘못된 시작임에도 이렇게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게 이상했다. 하긴 애초에 저 현태오가 진지하게 남자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했을 리 없다. 한동안 좋은 꿈을 꿨다.
혹여 사무처에서 뭔가 오해한 게 아닐까, 현태오의 의도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 보려 해도, 진문성이 직접 나서서 다룰 일이라면 현태오가 모를 리 없다. 아니, 그전에 현태오가 시키지 않은 일을 진문성이 했을 리 없다.
심지어 뭇사람들의 예상과도 맞아떨어지는 일 아닌가. 적당히 상황이 조용해지면 유현진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을까 모두가 예상했었다. 유현진 본인 역시도. ……설마 그렇게까지 멀리로 치워 놓으려 할 줄은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저 현가의, 저 현태오다. 단꿈을 꾼 게 외려 우스웠다.
그러니 놀랍거나 이상한 일은 아닌데도.
……그래도, 파혼까지 했잖아.
왕실과의 파혼이라니 보통 일이 아닌데, 보통 결심도 아니었을 텐데, 파혼까지 감수하면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그래서, 설마 하는 와중에도 혹시나 했다.
……결국 이럴 거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나도 헛꿈에 들뜨지 않고 순순히 협력했을 텐데. 피해자인 네가 껄끄러워서 멀리로 치워 버려야겠다고 솔직하게 말을 했더라도, 나는 그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고 그러겠노라 했을 텐데.
“…….”
유현진은 주머니 속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당장에라도 전화를 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전화를 꺼내 들지 못하는 건, 막연하게나마 느껴졌던 탓이다. 지금 자신이 알게 된 것은 어떠한 오해도 아닌 사실일 터였다.
대놓고 물어보면 현태오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입으로 진실을 듣게 될 게 서럽고 무서웠다. 그래서 하얗게 핏기가 가셔 차가워진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전화를 결국은 도로 밀어 넣고 말았다.
가만있자. 뭘 해야 하지. 일단 무엇부터……. 아, 비산도를 가야 하면 외무관리청 일은 못 하겠구나. 그럼 일단 외무관리청에 가서 못 하게 되었다고 말해야지.
하얗게 빛바랜 머릿속이 허둥거리고 있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유현진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유현진. 차근히 생각해 봐야 하잖아. 정신 차려.
두뇌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머리를 흔들고 나자 조금쯤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어느 결에 그는 정혜궁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외무관리청으로 가려고 했는데 넋을 놓은 사이에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익숙한 곳으로 왔나 보다.
돌아서려던 유현진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차이면 언제든 찾아오렴. 따뜻하게 위로해 줄 테니. 친구 좋다는 게 뭐겠니.
심술궂게 말하던, 그러나 정감 어린 목소리가 떠올랐다.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다. 늘 냉정한 척하지만 속정 깊은 친구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지금은 누구든 마음을 조금이나마 붙들어 줄 사람을 보고 싶었다.
혹은, 지금 당장 머릿속이 너무 엉망이라서 뭔가 자신이 중요한 걸 놓치며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지, 혼자 제멋대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건 아닐지, 보다 객관적으로 말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이 모든 것들이 지레짐작한 오해라고, 현태오가 설마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유현진이 정혜궁으로 돌아서는데, 저만치 반대편으로 내관들이 꼬리를 끌고 가는 게 아득하게 보였다. 이미 멀어져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정혜궁에 전하께서 왔다 가신 모양이었다. 모처럼 딸의 처소로 찾아와 나눌 이야기라도 있으셨나 보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그냥 물러나야 할 뻔했다.
정혜궁 앞의 초소는 비어 있었다.
난로에는 불이 타오르고 펼쳐진 책이 책상 위에 있는 걸로 봐선 문지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전하께서 오셔서 참고 참다가 이제야 화장실에라도 뛰어갔는지도 모른다.
외부인의 방문을 정혜궁 안에 고해 줄 문지기를 기다리고 선 동안에도 여전히 유현진은 머릿속이 푸르고 어둑한 빛깔로 가라앉아 있었다.
초소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성이던 때, 뒤뜰로 돌아가는 길이 눈에 밟혔다. 유난히 눈부신 햇빛이 겨울의 메마른 뜰 위로 쏟아지는 길 끝에 빨갛게 피어난 동백이 보였다.
그 고적하고 쓸쓸한 정경에 저도 모르게 걸음이 떨어져 하얗게 햇살이 쏟아지는 찬 공기를 가르며 천천히 뒤뜰을 향해 걸었다.
근처에 아무런 인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정혜궁 전체에 아무도 없기라도 한 것 같다. 아마도 조금 전에 임금이 다녀가 다들 궁 안팎으로 제 자리를 지키느라 그런가 했다.
뒤뜰에도 아무도 없이 조용한 겨울 정원만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어떠한 아름다운 일이 있어 누구도 방해하지 않으려 소리죽인 듯 고요한 정경의 멀찍이서 까치가 우짖었다.
안뜰로 이어진 조그만 나무 문이 열려 있다. 저 나무 문을 사이에 두고 뒤뜰과 이어져 있는 안뜰은 공주의 침전에 면한 뜰이니 함부로 들어설 수 없다.
고요한 햇살 아래 우두커니 서서 동백을 바라보던 유현진은 돌담 밑에 연한 이파리를 틔운 어린 것을 발견하고 웅크려 앉았다. 이런 데에 민들레가 자라고 있었다. 봄이 와 씨앗을 흩날릴 즈음이면 자신은 저 머언 곳에 외따로 떨어져 지내고 있을 것이다.
“――.”
울컥 속이 뜨거워져 손등으로 마른 눈가를 문지른 유현진은 슬슬 다시 돌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쯤은 문지기도 돌아와 있을 테니, 허락도 받지 않고 뒤뜰을 구경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방문을 고해 달라고 해야겠다.
그가 막 일어서려던 때, 어디선가 조그맣게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보니 나무 문 안쪽, 야트막한 돌담 너머의 안뜰에 제상아와 미사담이 앉아 있었다. 기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그들은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리로 걸음을 내디디려던 유현진은 멈칫하고 말았다.
어쩐지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왠지 그 사이로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우아하고 어여쁜 사슴 두 마리가 서로에게 기대어 쉬고 있는 듯, 아무도 그 사이에 들어설 수 없을 느낌이다.
유현진은 망설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어디로 가고 둘만 남겨 두었나, 그가 조심스레 기척을 내어 볼까 하던 때,
“아바마마께서 미사담 님을 무척 좋게 보셨나 봐요.”
제상아가 톡 쏘듯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부드러운 웃음이 깔려 있는 그 말에 미사담이 대답했다.
“전하께 잘 보이려고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안 보이셨습니까? 우리 부모님께도 안 부리는 재롱을 열심히 떨었건만.”
“보이긴 했어요. 아바마마께 관심이 있으신가 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졸라도 우리 아바마마는 못 드린답니다, 이미 우리 어마마마와 결혼을 하셨거든요, 하고 제상아가 말하자 미사담이 낙담한 양 한숨을 쉰다.
“하는 수 없지요, 그러면 전하를 쏙 닮은 따님을 모셔 가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미사담이 손을 들었다. 그제야 유현진은 그들이 손을 깍지 껴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미사담을 보고 유현진은 굳어 버렸다.
제상아는 순순히 손을 맡긴 채 부드러운 눈매로 그를 바라보다 속삭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네요. 당신이 돌아간 뒤에나 정식으로 혼담이 진행될 줄 알았는데.”
“전하의 말씀대로, 상대의 기세를 누를 만한 증거들이 모였을 때 한 번에 밀어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그리고 빠르다 한들, 제가 원했던 것보다는 이미 한참 늦었어요. 저는 3년 전 평항에서부터 이날을 간절히 바라 왔으니.”
미사담을 빤히 응시하던 제상아가 옅게 웃더니 장난스레 속살거렸다.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미사담이 겸연쩍은 듯 턱을 문지르며 웃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잊을 수가 있나요. 사람을 보자마자 무례하게도 인사보다 먼저 내뱉은 첫마디가 그거라니.”
“어쩔 수 없었어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니까. 생각해 보라고요. 내 평생을 강제로 저당 잡혀야 할 여인을 만나기 위해 도살장에 끌려나온 소 같은 심경으로 적국까지 가서 비참하게 앉아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 사람 많은 저잣거리 한가운데서 눈에 확 들어오는 아가씨가 있어서 내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는데, 그녀가 내 짝이 될 사람이라니. 신께 감사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어요?”
“그때는 아직 짝이 될지 어떨지 결정되지 않았었잖아요. 그냥, 어떤지 한번 보고나 와라――그 정도였다고요.”
“아닌데요.”
미사담은 고개를 젓더니 똑바로 제상아를 보았다.
“저는 그때 결심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평항 총독에게서 빼앗아 오겠다고.”
제상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몸짓에는 부드러운 애정이 담겨 있었다.
“평항에서 헤어진 뒤로 제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를 거예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당신 마음이 돌아서면 어떡하나, 일이 어그러지면 어떡하나. 3년간 당신과 연락을 주고받는 내내 제가 얼마나 마음 졸여 왔는지.”
한숨처럼 속삭이는 미사담을 바라보던 제상아가 다른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도 입맞춤 못잖은 상냥한 애정이 담겨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생겨나지는 않았을, 몇 년에 걸쳐 이어진 끈질기고 차분한 애정이.
“이제 우리는 위험한 길에서 함께 싸워야 해요.”
“태어날 때부터 권리를 누렸으니, 이제 태어날 때부터의 의무도 이행해야지요. 당신이 처음 만났을 때 저한테 말했듯이.”
“그 의무를 함께 해 나갈 사람이 당신이라서 하나람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저도.”
제상아가 속삭이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낯을 붉힌 미사담은 짐짓 실망스레 투덜거렸다.
“뺨 말고도 있는데요, 입 맞추기 딱 좋은 데가.”
제상아가 웃었다. 이윽고 구슬 같은 웃음소리가 미사담의 입술 위에 닿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아연히 바라보던 유현진을, 바로 그때 얕은 돌담 너머로 미사담이 발견하고 말았다. 멈칫하는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는 제상아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석상처럼 굳은 채 그들을 바라보는 유현진의 머릿속에, 그들의 저 몸짓들과 말들의 의미가 두서없이 오갔다.
“현진아.”
“―…, 어…….”
일순 놀란 듯, 곤란한 빛을 띠고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제상아가 차분하게 불렀다. 유현진은 당혹스레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어물거렸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아야. 너랑, 미사담 님,”
그렇게만 더듬거리는데,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쉰 제상아가 손짓했다.
“이리 들어와.”
“――.”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던 유현진은 주춤주춤 나무 문을 넘어, 외부인은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정혜궁의 안뜰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 그녀는 이미 저 남자와 함께 있었다. 어쩌면, 몇 년이나 전부터.
제상아가 손짓하는 대로 섬돌을 오른 유현진은 그들의 서너 걸음 앞에서 멈춰 선다. 나란히 앉아 있는 그들에게 어쩐지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나 곧 결혼할 거야. 당장은 아니겠지만, 늦어도 내년이 가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게 되겠지.”
제상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양을 떠나는 혼사.
유현진은 무심코 미사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그녀의 말을 거들듯 말없이 웃음 지었다.
“축하해 주지 않을 거니? 너한테 처음 말하는 거야.”
“……축하해. 정말로 축…….”
유현진은 혼란스레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놓았다.
축하한다. 당연히 축하할 일이다. 그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가 결혼을 한다면. 그리고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듯이 그 상대가 그녀를 더없이 아끼고 그녀 역시 그 상대를 사랑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 않은가.
송갈 왕족과의 결혼이라니 온 나라 안이 벌집을 쑤신 듯 떠들썩해지고 삿된 말들이 숱하게 돌아다닐 것이 번연히 보였지만, 그녀가 행복하다면 유현진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축하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 미사담 님이 이번에 사절로 오시기 전부터 두 사람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유현진이 묻자 제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3년 전이면, 평항에 사목 갔을 때? ……그때부터?”
“그래.”
그녀가 선선히 대답했다. 유현진은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그러면, 현태……, ……평항 총독님은? 네가 먼저 저버린 거야?”
제상아는 말없이 유현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그녀를 보다가 입을 다문 유현진은 무더워지는 가슴을 억누르며 재차 물었다.
“그때부터 계속 그 사람을 속이고 미사담 님과 연락한 거야? 그런데…… 현 총독님이 이렇게 나와, ――내 거짓말 때문에 나와 얽히는 바람에, 그 사람이 허물을 뒤집어쓴 거야? 현 총독님이 부정을 저질러서 파혼되어 버린 것처럼?”
제 것도 아닌 억울함이 솟아올라 속이 뜨거워졌다. 제 것도 아닌 울분을 내는 유현진에게 대답한 것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제상아가 아니라 그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미사담이었다.
“현 총독도 알고 있었습니다.”
유현진의 홉뜬 시선이 미사담에게로 옮겨갔다. 미사담은 담담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평항에서 상아 님과 제가 만날 때부터 이미 이야기는 되어 있었습니다.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거기서 우리가 만나고 난 뒤였지만요. 현 총독도 그때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유현진은 아연하게 제상아를 보았다. 그녀는 그저 차분히 유현진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눈가에 어렴풋이 그늘이 지는 것은 친구에게도 입을 다물어야만 했던 미안함 때문이다.
유현진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부터 이미.
이미 제양과 송갈의 어느 깊은 물밑에서는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고, ‘제양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은 헤어질 것이었다.
“…….”
유현진은 안쓰럽고도 미안한 눈길로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제상아를 마주보며 천천히, 천천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 것은――상관없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한들 그녀에게는 제양의 왕족으로서의 입장이 있었고, 모든 것을 다 나눌 수는 없었다. 하물며 적국인 송갈과의 내밀한 약속이 얽혀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렇다면.
약간의 안도감과, 또한 약간의 억울함이 파문을 그리며 번져 나간다.
현태오와 제상아는 자신 때문에 파혼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현태오가 유현진과 잠자리를 함께한 바람에 그들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헤어지기에 적당한 이유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우연히도 유현진이 그 핑계가 되어 주었을 뿐이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현진아.”
제상아가 조용히 말했다.
아니다. 그녀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현진은 그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굳이 핑계가 나일 필요는 없었는데.”
유현진의 입에서 툭,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현태오가, 굳이 자신을 핑계로 삼을 필요는 없었는데.
적당히 헤어질 만한 구실을 찾던 차에 딱 마침맞게 자신이 거짓말을 했었던가 보다. 파혼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그럴싸한 다른 이유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그런 사유를 이용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어느 정도는 정말이었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술김에 실수를 해 버렸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실제로 현태오는 그 뒤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며 유현진에게도 성심껏 대해 주지 않았던가. ――결국은 멀리로 보내 버릴 거였으면서.
“신전에 이력 증명서를 떼러 갔는데……, 현 총독님이, 나를 비산도의 신전으로 보내려고 하나 봐. 올봄 이후부터 비산도의 신전에 속가제자로 가서 돕는 걸로 이야기가 되어 있더라.”
현 총독님이 평항으로 다시 돌아갈 즈음이니 시기도 딱이지, 하고 유현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뜬금없는 화제에 일순 의아한 빛을 띠었던 제상아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놀람과 분노가 어리는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유현진은 마음이 울컥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화를 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한테 진실을 말해 주며 진실로 대해 준 사람이 없구나.”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도, 현태오도.
하지만 그들 모두 유현진에게 입을 다물고 그들 속에서만 품고 있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입장이 있을 테니, 그에게는 자신이 잘못한 바가 있으니 새삼스럽게 따지거나 비난만 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 왜 이래……. 오늘 무슨 운수 좋은 날이야?”
어쩐지 별하늘이 그렇게 아름답더라니, 하고 허탈하게 중얼거리는데, 기어이 마음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고개마저 떨군 채 땅만 보며 넋을 놓았다.
“현진아.”
“……못됐어.”
그들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화가 났다.
망연히 비어 있던 머릿속에 이 순간 점점 차오르는 것은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다.
유현진은 고개를 들어 제상아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차라리 끝까지 들키지 말지. 그냥, 이번에 만났다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걸로 해 두지. ――현 총독도 못됐어. 이해는 하지만 못돼먹었어. 이럴 거면 잘해 주지나 말지. 사람 헷갈리게나 하지 말지. 그렇게 잘 챙겨 주고, 잘 대해 주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노라 말이나 하지 말,”
글썽,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다. 욱하고 터져 나오던 말들이 목에 꽉 막혀 버리고 만다. 슬픈 듯이 그를 바라보는 제상아의 모습이 일렁거리며 휘어졌다.
“나한테, 왜, ……왜, 이렇게, 내가 뭘 어쨌,”
눈가에 억울함을 듬뿍 담고 애꿎게 원망이나 해 보다가 눈을 한번 깜빡하는 순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뺨 위로, 흙바닥으로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어엉――.”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우는 것이 얼마 만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철든 뒤로 울었던 기억은 없었다.
손등으로 뺨을 훔치고 또 훔쳐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억울함과, 분노와, 상실감과, 원망, 슬픔, 그런 것들이 방울방울 흩어졌다.
정말로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현태오가 무어라고 말하든,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늘 그 말을 의심하며 믿지 않았다. 그러니 막상 이렇게 된다 한들 놀라울 것도 없는데,
그래도 아주 조금쯤은, 적어도 이 눈물방울만큼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가 보다. 마음이 푹 팬 듯 아파 숨이 막혔다.
그러다 문득, 속았다는 아픔보다도 이제 얼마 있지 않아 다시는 그를 못 보게 되리라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욱 슬퍼졌다.
왜 그랬어.
왜 그렇게 다정하게 대했어.
왜 이렇게, 매일같이 더, 더, 더 좋아하게 만들었어.
그러지 말지.
“……복수할 거야.”
주먹으로 눈가를 훔치던 유현진이 불쑥 내뱉었다.
그 앞에 조용히 선 채 유현진이 눈물을 그치길 기다리고 있던 제상아가 눈썹을 얼핏 들었다. 유현진은 빨개진 눈으로 땅바닥을 노려보며 울먹울먹 울음에 잠겨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얌전히 비산도로 가 줄 줄 알아……? 이렇게 된 바엔, 나도 하고 싶은 거 다 해 버릴 테야. 나도 원하는 거 얻어 내고 갈 거야.”
“현,”
“현태오랑 자 버릴 테다. 죄책감도 안 느낄 거야. 갈 때 가더라도, 현태오 덮쳐 버리고 갈 거야!”
유현진은 주먹을 꼭 움켜쥔 채 울먹거리며 외쳤다.
제상아는 무어라 말하려던 걸 멈추고 깜박깜박 그를 바라보았다. 미사담 역시 멀거니 눈을 껌벅인다.
“현태오도 자기 마음대로 굴었으니까, 나도 내가 원하는 것 하나쯤은 가져가도 되잖아.”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된 채로 유현진이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끝없이 솟구치는 눈물을 계속 손등으로 훔쳐내며 훌쩍거린다.
그 정도는 가져가도 되잖아. 그 정도만이라도.
섧게 우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상아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도 되지.”
“그래, 그래도 돼.”
“응, 그래도 돼.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고백도 안 할 거야. 계속 좋아했었다는 말도 절대로 안 해.”
“그래, 하지 마.”
제상아가 담담히 맞장구쳤다. 그제야 유현진은 바닥으로 떨구고 있던 눈길을 들어 제상아를 보았다.
화가 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치켜뜬 유현진에게 손을 뻗은 제상아는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뺨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닦아 주었다. 그러자 잠시 눈물이 그치는가 싶던 눈에서 다시 주룩주룩 홍수가 났다.
제상아는 계속해서 그 눈물을 닦아 주었고, 옆에서 미사담이 건네준 손수건이 흥건하게 다 젖어 버릴 때까지도 유현진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울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