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5)

9.

정월도 지나고 새해의 두 번째 달을 맞이했을 무렵, 제양의 왕실에서 올해 안에 혼인이 있으리라고 공표했다.

제양의 막내 공주인 제상아와 송갈의 셋째 왕자인 미사담이 그 혼약의 주인공이었는데, 그 소식이 알려지자 온 제양이 불난 집처럼 떠들썩해졌다. 그것은 송갈도 마찬가지로, 양국 모두 연일 왕실 간의 혼인에 대한 소식들로 온갖 매체에 불이 났다.

제양과 송갈에 사절단이 오가는 상황에 대해 연일 친화와 척화의 목소리가 대립하고 있던 때에 왕실 간의 혼사가 공표되자, 세간의 반응은 그야말로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듯했다.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것은 비난의 목소리들이었는데, 왕실은 나라의 얼굴과 같은데 어찌 그런 중한 혼사를 왕실에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느냐, 중론을 살피지도 않고 이리 급작스럽게 발표하다니 이것은 국민을 무시한 처사다, 하고 척화를 주장하던 이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곧 그에 대응해 찬성과 응원의 목소리도 일었다. 이는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며 양국이 함께 화해하고 협력해 발전해 갈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응원하는 한편, 척화는 젊은이의 앞날에 전운을 드리우는 비극적 행위라는 반격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상 친화 혹은 척화로 확고하게 입장을 굳히고 있는 것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우려를 표하면서도 일단은 중립에 서 있었다. 대통을 이을 것도 아닌 왕실의 일원일 뿐인데 벌써부터 너무 확대해서 볼 것 없다, 일단은 두고 보아야 한다는 논조와 함께, 국혼으로 인한 손익을 계산하는 발 빠른 기사들도 속속들이 나왔다.

그런 가운데, 그간 대립해 왔던 친화와 척화의 목소리가 각각 더욱 첨예해졌다.

그간 중립의 입장에서 침묵해 온 주요 인사들에게 ‘당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라’고 들쑤시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 대상 중 하나가 평항 총독으로 현재는 일시적으로 수도에 머물며 사절단의 보안을 맡고 있는 현태오였다.

송갈과의 숱한 전투에서 승리를 따낸 영웅이자, 분쟁지인 평항을 다스리며 테러나 기습도 여러 차례 받았던 인물이다.

당연히 송갈을 적대시하는 입장에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터라, 그가 이번에 송갈 사절단의 보안 책임을 맡게 되었을 때 의아해하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그러나 그런 우려나 비난, 혹은 본인의 입장을 확고히 하라는 독촉에 대해서 현태오의 대응은 간결했다.

――나라에서 내게 맡기는 일을 충실하게 수행할 따름이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그것이 그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한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제양과 송갈 왕실 간의 혼약이 공표된 바로 그날 밤, 현태오는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보안이 필요한 사안이라 상세한 사정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늦은 시각까지 외부 기관에서 일을 보고 궁궐로 향하던 길이었고, 습격한 자들은 현장에서 거의 사망했으며, 현태오의 부상 여부는 즉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오후에 출근을 함으로써 본인이 무사함을 알렸다.

괴한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송갈인들의 소행이라는 말이 번졌다가, 그 소식이 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들을 사주한 세력이 따로 있다는 말이 함께 퍼져 나갔다. 어떻게 퍼진 말인지, 누가 퍼뜨린 말인지도 알 수 없이 명백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은 채 말들만 떠들썩했다.

뜻을 달리하는 이들 간의 격렬한 대립이 진흙탕 싸움의 양상으로 변해 가는 가운데,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아 왕실 간의 혼사 소식을 덮어 버리며 온 매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기사가 또 하나 터졌다.

송갈과의 전쟁에 물자를 공급했던 제양의 군수업체가 송갈 측의 군수업체와 내통한 정황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양국의 몇몇 고위직 관료를 비롯해 정경계의 유명 인사들이―주로 상대와의 척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연루되어 있다고 했다.

전쟁을 부추기며 그를 통해 이득을 얻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 쇄도하는 가운데, 최초의 인물에서부터 그와 엮인 인물들이 더 누가 있는가, 그들의 죄상이 무엇인가, 하루걸러 하나씩 엮여 나오는데 그때마다 세간의 원성과 지탄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다음 차례로 걸려 나올 관계자가 누구일지 상부에서만 암암리에 말들이 돌며, 그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항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혼약이 공표된 날 오후, 계연군이 정혜궁으로 찾아왔다. 이날 정혜궁은 방문자를 받지 않는다고 궁인들이 가로막았으나 막무가내였다.

왕의 당질인 그를 감히 무력으로 막지 못해 궁인들이 난처해하는 가운데, 계연군이 큰 소리를 내며 정혜궁의 앞뜰까지 들이닥치자 제상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청에 선 그녀를 보고 태도를 좀 가다듬는가 싶던 계연군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건넸다.

‘상아야. 내가 참으로 이상한 말을 듣고 왔다. 어느 미친놈들이, 네가 송갈에서 온 놈과 혼인을 할 거라고 떠들고 다니지 뭐냐. 이런, 이런 몹쓸 놈들은 왕실을 모독한 죄로 때려죽여 마땅하지 않겠냐.’

제상아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다 조용히 대답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옳은데 누구를 벌하겠어요?’

‘뭐?’

‘올해가 지나기 전에 저와 미사담 님의 국혼이 있을 것입니다.’

순간 정혜궁 앞뜰에는 얼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 고요한 가운데 눈을 부릅뜨고 얼어붙어 제상아를 올려다보던 계연군이, 악다문 턱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시꺼멓게 희번덕거렸다.

‘너 미쳤어? 어? 저 송갈 천한 놈이랑, 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터뜨린 그는 별안간 낯빛을 싹 바꾸어 억지로 웃는 얼굴을 꾸며 내더니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네 잘못이 아니지. 당숙부께서, 전하께서 명령하셔서 그렇게 된 게로구나. 응? 전하께서 널 이용하려고……. 전하께서 너무하셨지, 어떻게 너한테 그러실 수가 있느냐. 그래, 내가 지금 바로 찾아뵙고 말씀 올려 주마. 너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라. 이 오라비가 있지 않으냐.’

계연군이 고양이 꾀듯 말하며 막 섬돌 위로 올라서려 할 때, 소란을 듣고 찾아온 진문성이 그를 막아섰다.

‘마마의 허락 없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놈이……!’

계연군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뺨을 얻어맞은 얼굴이 휙 돌아갔으나 진문성은 별로 아픈 기색도 없이 그를 돌아보며 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변함없이 부드러운 낯으로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소란을 부리시면 안 됩니다.’

‘이 천한 놈이……?! 내가 상아를 보겠다는데 네까짓 천한 놈이 어딜 나서!’

계연군이 다시 주먹을 휘둘러 진문성의 반대쪽 얼굴을 후려갈겼을 때였다. 그의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면, 저는 격이 맞겠습니까?’

그러면서 계연군의 팔뚝을 움켜쥐고 섬돌에서 끌어내린 것은 미사담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계연군은 눈을 까뒤집으며 주먹을 휘둘렀고, 가볍게 고개를 젖혀 그 주먹을 피한 미사담은 빙그레 웃으며 계연군의 아랫배를 후려갈겼다.

듣는 사람이 절로 낯을 찌푸릴 만큼 호쾌한 소리가 울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을 홉뜬 계연군이 욱, 하고 속에서 치받아 오른 뭔가를 가까스로 참는 듯 부풀어 오른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오늘은 상아 님께서 조용히 쉬시겠답니다.’

‘이……, 이 천박한, 개 같은 송갈 잡놈이……!’

계연군이 비틀거리며 핏기 어린 눈으로 미사담을 쳐다보았다. 이를 드러내며 일그러뜨린 얼굴에 핏줄이 불거졌다. 별안간 그 근처에 서 있던 위병에게 달려들어 허리춤에 매단 곤봉을 우악스럽게 빼앗아 든 계연군이 미사담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잡놈아, 지 에미랑 붙어먹을 새끼야, 주제도 모르고 어딜 감히……! 죽어라, 죽어! 뒈져 버려라!’

마구잡이로 곤봉을 휘두르며 미친개처럼 달려드는 계연군에게, 미사담이 난감한 기색을 띠며 그를 피했다. 진문성이 계연군의 팔을 붙들자 계연군이 ‘이 종놈아, 방해하면 때려죽여 버릴 테다!’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

‘오라버니.’

제상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고함 소리를 가르며 끼어들었다.

찬물을 맞은 듯 움찔한 계연군이 돌아보았다.

‘상, 상아야, 내가 금방 이놈에게서 널 구해 줄,’

‘주제넘으십니다.’

제상아가 말했다. 계연군이 일순 그 말을 이해 못 하고 끔벅끔벅 제상아를 쳐다보았다.

제상아는 대청 위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단정한 자세로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계연군을 바라보는 눈길이 소름 끼치도록 찼다.

‘제가 결정한 제 혼사입니다. 아바마마도, 그 누구도 제게 강요하지 않았어요. 오라버니께서 제양의 부마가 될 사람을 이렇게 모욕하실 수 있나요?’

‘상……, 하지만 너는, 네가, 어떻게,’

‘어떻게라니요.’

불쾌감이 깃든 경멸 어린 시선이 계연군의 위로 떨어졌다.

‘그러면 설마 제가, 제 분수도 모르고, 예의도 범절도 없이, 보잘것없는 위세나 믿고 횡포를 부리는 무뢰한과 걸맞으리라는 생각이라도 하셨나요?’

계연군이 번개를 맞은 듯 멈추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제상아를 쳐다보던 그가 부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너,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제가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아들으시는 모양이지요?’

계연군의 핏발 선 눈이 제상아를 아연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 눈이 점차 새까만 유리알처럼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너, 내가 여태 너한테 어떻게 대해 줬는데,’

‘매 순간순간 불쾌하기 그지없게 대해 주셨었지요.’

‘이, 이, 이년이……!’

계연군의 눈에서 불이 났다.

제상아에게로 달려드는 그를 붙들어 후려갈긴 것은 미사담이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계연군을 뛰어넘어 곧바로 제상아 곁으로 간 미사담은 보호하듯이 그녀를 막아서며 염려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제상아는 그제야 표정을 누그러뜨리곤 되레 걱정스러운 듯이 미사담을 차근차근 살폈다. 그 부드러운 시선 끝에서 미사담이 웃었다.

계연군이 바닥에 엉거주춤 누운 채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얼어붙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까맣게 일렁이는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던 계연군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정혜궁에서 나가 버렸다.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제상아가 입매를 찌푸렸고, 한발 늦게 다가간 진문성이 깊이 허리 숙여 사죄했다.

‘소란을 막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계연군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제상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실수했어요. 그러잖아도 신경 쓸 일들이 많은데 괜한 원한을 사 버렸네요. 저 사람이 지나치게 어리석지 않기만을 바라야죠. ……이게 다 미사담 님이 괜히 나서서 그래요.’

왜 불에 기름을 끼얹고 그래요? 하고 미사담을 곱게 노려보며 힐책한 제상아는 그와 더불어 궁 안으로 들어갔고, 짧은 소란으로 어수선하던 정혜궁은 곧 다시 잠잠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그곳에는 불온한 정적만이 감돌다 사라졌다.

*

유세진은 앞날이 창창하고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본인은 고위 관리 시험을 거친 출세 꿈나무로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친형은 정신관 서품이 예정된 신관이었다.

비록 어릴 때 부모를 잃어 고아처럼 자라긴 했으나 그 와중에 명문 현가와의 연줄도 있었고, 또한 부모나 일가친척이 없다는 것이 요즘 아가씨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단점도 아니었다. 심지어 성격도 밝고 쾌활해 주위에 사람도 많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남편감, 사윗감, 선후뱃감, 지인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만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늘 밝고 맑게 살아왔던 유세진이었으나 근래에는 그의 기색에서 먹구름이 가실 날이 없었으니,

“아 무슨 사람이 감기 좀 앓았다고 며칠 사이에 반쪽이 돼요…….”

누에고치처럼 온몸을 이불로 친친 감고서 손에는 뜨거운 차가 담긴 머그 컵을 들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제 형을 앞두고 유세진은 타박을 놓았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요즘같이 추운 날 제대로 챙겨 입지도 않고 온 길거리를 싸돌아다니다가 감기에 된통 걸려 버렸다고 했다.

“쉬는 날이면 그냥 집에 돌아와서 뜨뜻하게 보일러 틀어 놓고 배 깔고 누워서 귤이나 까먹지 왜 일없이 돌아댕겨요?!”

“아니 그냥, 속이 좀 답답하고, 걷고 싶어서…….”

“속이 왜 답답한데요?!”

유현진은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 꼴을 보며 유세진은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바로 엊그제다. 엊그제 오후에 제상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세진아. 오늘 괜찮으면 일 끝나고 현진이 좀 돌봐 줘.’

‘? 형님이요? 무슨 일 있었어요?’

‘현진이가 마음이 많이 상했을 거야.’

‘?? 왜요?’

‘일이 좀 있었어.’

난데없이 유현진이 마음 상할 일은 무엇이고, 그걸 제상아에게서 귀띔 들을 사유는 무엇인가 의아했지만 그녀는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말았다. 정확하게 말하기 애매한 일이라도 있나 보다.

어찌 됐든 그녀가 굳이 연락한 걸 보니 심상치는 않은 모양이었고, 유세진은 정시에 퇴근하자마자 유현진을 찾아갔다.

그때 이미 유현진은 고열로 끙끙거리며 이불 속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열이 39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유세진이 깜짝 놀라 병원에 데려가려는데 유현진은 해열제를 먹었으니 곧 나아질 거라며 기를 쓰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얼굴 꼴을 보니 어디서 사흘쯤 얻어맞은 양 퉁퉁 부어 있어서 유세진은 또 한 번 기함했다.

눈이 퉁방울 붕어가 되어선 고열로 반쯤 넋을 놓고 끙끙거리는 유현진을 보고 유세진은 부랴부랴 죽이며 약이며 사 들고 와서 그 옆에 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감기야 그렇다 쳐도 저 새빨간 눈과 퉁퉁 부은 눈두덩은 웬일인가. ……웬일은, 현태오 때문이겠지!

유세진은 아파서 쓰러져 있는 사람의 프라이버시 따위는 챙기지 않고 당장 유현진의 전화를 뒤졌다. 그러나 별다른 건 나오지 않았다.

어제 본 하늘이 예뻤다는 둥, 얼른 기운 차려야 드라이브를 가지 않겠냐는 둥, 생일 선물이나 고르라는 둥, 같이 저녁 먹자는 둥, 토가 나올 만큼 달착지근한 문자들의 향연이라 못 볼 꼴을 본 기분에 부르르 떨기만 했다.

그 문자들의 끝은 ‘오늘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습니다. 저녁은 다음에 먹는 걸로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유현진의 문자와,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돌아온 ‘졸릴 만도 하지요. 그러면 오늘은 들르지 않을 테니 푹 쉬십시오.’라는 현태오의 답문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바늘 끝도 안 들어갈 저 냉혈한이 보낸 문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그 문구를 보고 경악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한 문자들이었다. 마음 상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럼 왜.

유현진의 저 퉁퉁 부은 눈과 얼굴이 대관절 어느 놈 때문인지, 무슨 일 때문인지 열불이 솟는 유세진이었지만 끙끙 앓는 사람을 흔들어 깨워서 다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첫날은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하고 밤새 간병을 했다.

해열제가 효과가 있어 열이 얼마간 내리긴 했지만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는 형을 옆에서 지켜보니 속이 탔다. 의식이 혼미한 와중에 또 ‘엄마……,’ ‘아빠…….’ 하고 우는 걸 보니 속이 상해 죽겠다.

유현진은 유세진에게 있어 형이자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 속에서 유현진은 순하고 보들보들한 형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엄격해졌다. 유세진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형 또한 어렸는데도 더 어린 동생을 지켜야 한다고 너무 일찍 어른이 되었다.

그래도 사람이 속까지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음 터놓은 가까운 사람들이랑만 있을 때에는 여전히 염려스러울 정도로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평소에는 늘 어른스럽고 단정한 유현진이었다.

그런 유현진이, 아무리 감기로 앓아누웠다지만 이렇게 약하게 웅크린 채 더 이상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한 방울씩 떨궈 대니, 지켜보는 유세진은 속이 상할 대로 상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밤새 앓은 유현진만큼이나 유세진도 퀭해졌다.

‘나 출근……, 해야 돼…….’

그새 열 조금 내렸다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는 유현진을, 유세진은 멱살을 붙잡아 짤짤 흔들었다. 저런 소리나 지껄일 만큼 기운이 솟았으면 좀 잡아 흔들어도 되겠고나 싶었다.

‘그 꼬라지로 출근은 무슨 출근?! 거울이나 봐요! 붕어가 형님 하겠다!’

‘얼굴? 내 얼굴이 왜…….’

짤짤 흔들리는 채로 거울을 쳐다보던 유현진이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어디서 오백스물두 대쯤 얻어맞은 양 퉁퉁 부어 있는 얼굴이, 제가 보기에도 사람 얼굴처럼 안 보이긴 했을 거다. 게다가 간밤보다는 열이 떨어졌다 해도 아직 38도 언저리였다.

‘그 상태로 출근하면 민폐예요, 민폐. 딴 사람한테 감기 옮기면 어쩌려고?’

유세진은, 어쨌든 본인은 출근을 해야 하니, 출근하는 길에 외무관리청에 들러서 유현진의 병가를 내 줄 테니 잔말 말고 꼼짝도 말고 오늘은 침대에서 나오지도 말라고 당부하곤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정혜궁에도 따로 연락해서 유현진의 병가를 내겠다고 하자 두말없이 허락이 떨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제상아는 여전히 대답 대신 유현진에게 직접 들으라는 말만 했다.

그 직후, 유세진은 의아할 틈도 없었다.

그날 오전에 제상아와 미사담의 혼약이 공표되어 온 사방이 발칵 뒤집히는 통에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유세진의 업무와 직접 연관된 사안은 아니라 어찌어찌 정시 퇴근을 할 수는 있었지만, 정시 퇴근해서 유현진에게로 가는 도중에는 또 ‘평항 총독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사건이 터져 전화통에 불이 났다.

오늘 왜 이래, 오늘 대체 무슨 날이길래 이래, 유세진은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울고 싶어졌다. 아직까지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혹시나 그 작자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또 금쪽같은 우리 형님이 소금 맞은 달팽이처럼 물기 쪽쪽 빼며 울 게 아닌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날 유현진이 그 소식을 듣는 일은 없었다. 워낙 저녁 늦게 터진 일이기도 한 데다 계속 열 때문에 앓아누운 탓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도 형님이 잠깐 정신 차리고 인터넷이라도 뒤적이다가 소식을 알면 어쩌나 유세진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밤 느지막한 시간에 전화가 울렸다.

순간적으로 설마 부고인가 싶어 심장이 철렁했으나,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현태오 본인이었다.

마침 잠깐 정신을 차리고 있던 유현진은 왠지 모르게 침울한 얼굴로 전화를 내려다보다가 느릿느릿 전화를 받았다.

‘예.’

「잘 쉬고 있습니까? 일이 좀 생겨서 오늘은 못 갈 것 같습니다.」

전화 속에서는 유세진에게도 들릴 만큼 멀쩡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유세진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밉살스러운 양반이지만 그래도 다쳐서야 쓰나.

‘예, 몸조심하십시오.’

유현진이 대답하자 짧은 침묵 뒤 험해진 목소리가 돌아왔다.

「목소리가 왜 그렇습니까. 어디 아파요?」

‘아니, 감기가 좀 심하게 들어서요.’

전화 속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공백이 뜨는 게, 뭔가 시간이라도 가늠해 보는 눈치다. 유현진이 얼른 덧붙였다.

‘지금 세진이가 와서 챙겨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너무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볼일 보십시오.’

「유세진이?」

저 못마땅하고 못 미더워하는 목소리는 뭐지?! 곁에서 엿듣고 있던 유세진의 눈초리가 매서워지건 말건, 짧게 혀를 찬 현태오는 그나마 안심이라는 듯 「그래요, 그러면 푹 쉬십시오. 혹시라도 필요한 일 생기면 연락하시고요.」라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유현진은 새까맣게 액정이 꺼지는 전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또렷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넋을 놓는 걸 보고 유세진은 가슴이 덜컹했다.

‘형님, 좀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참에 얼른 다그치듯 물어봤지만, 유현진은 전화를 내려놓고 도로 누워 버렸다. 아 말 좀 해 보라니까?! 하고 유세진이 닦달하려 했지만 그 짧은 사이에 혼곤히 곯아떨어져 끙끙 앓는 데에야 도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내가 복장터짐사를 당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세진은 또 하루를 뜬눈으로 새웠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사흘째가 되어서야 유현진은 열이 좀 내려 그나마 평열에 가까운 37도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본인이 직접 먹을 것도 챙겨 먹고 책도 뒤적이고 할 만큼 나아졌으나, 하루 더 쉬라고 눌러앉혀 두고 유세진은 출근했다.

여전히 아수라장처럼 바쁜 하루였다. 아무리 정부 기관에서 근무한다 해도 왜 전혀 부서가 다른 자기까지 바빠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공주의 (적국 왕자와의) 결혼과 평항 총독의 습격은 온 사방에 무차별적으로 일 폭탄을 투하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하루 종일 죽도록 일해 겨우겨우 야근의 위협을 넘기고 정시 퇴근해 돌아온 유세진을,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유현진이 “왔어?” 하고 맞아 주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들었나 보다.

유세진은 유현진을 노려보며 스산하게 눈을 번쩍였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심문할 때가.

“자, 얼른 불어요, 뭔 일인지.”

유현진의 바로 앞으로 스툴을 끌어당겨 정면에 앉은 유세진은 두 무릎을 위압적으로 짚고서 을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진은 눈 하나 까딱 않고 차를 호호 불었는데, 창백하니 반쪽이 된 얼굴은 여전히 부어 있었지만 표정은 무덤덤했다.

“아 대체 무슨 일,”

“세진아, 형은 세상이 얼마나 야박한지를 깨달았어.”

참을성 없는 유세진이 막 소리를 높이려 했을 때 유현진이 불쑥 말했다. 주먹을 움켜쥐고 성을 내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유세진이 몇 초 뒤에야 되물었다.

“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으니, 오로지 하나람님께 몸과 마음을 의탁해 궁벽한 시골 신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내 길인 성싶으다.”

“……예?”

형님? 하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유세진의 앞에서 유현진이 별안간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전에 복수할 테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나도 야박해지겠어.”

암팡지게 입을 다물며 허공을 노려보는―그러다가 금방 다시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왜 내가 끓이면 맛이 없지…….’ 하고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유현진을 유세진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복, 복수요? 누구한테요?”

얼빠진 목소리로 묻는 유세진을 스산하게 쳐다본 유현진이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발음한 그 이름은,

“현태오.”

“…….”

눈뜨고 꿈꾸는 양 멍하니 유현진을 쳐다보던 유세진이 어느 순간 물 맞은 강아지처럼 푸르르 고개를 저었다.

“자, 차근차근 말해 봐요, 차근차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복수는 갑자기 왜? 싸웠어요?”

어젯밤까지 문자며 통화며 멀쩡히 잘해 놓고서? 하고 묻는 유세진에게 유현진은 우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아니, 일단 그 양반이 지금 한창 정신이 없을 테니까 뭔 짓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세진이 답답해 가슴을 치며 주절거리던 도중에 유현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지금 정신이 없어. 무슨 일 있었어?”

“아 어제 그렇게 크게 사고가 났는데 무슨 정신이, ……맞다, 형님은 앓아누웠어서 모르죠. 어제 현태오 총독이 괴한한테 습격당해서 난리가 났거든요.”

그러고 보니 정혜궁마마 결혼하시게 된 건 알아요? 하고 덧붙이던 유세진의 눈앞에서 대번에 유현진의 낯빛이 바뀌었다. 치켜 올라갔던 눈초리가 휘둥그레졌다.

“습격? 다쳤어? 얼마나?!”

“예? 아니,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어제 통화도 했잖아요. 통화할 만큼은 멀쩡하겠지.”

삽시에 창백해졌던 낯이 그제야 안심한 듯 잠잠해지는 걸 보며 유세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보세요, 복수하시겠다면서요.

“그런데 갑자기 왜요. 대체 무슨 일인데? 현 총독님이 무슨 짓 했어요?”

유세진이 다그치자 유현진은 삭막한 낯으로 침묵했다. 그 삭막한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는 걸 보고 유세진은 가슴이 또 한 번 덜컥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써 주는 줄 알았는데,”

“예?”

“아니었어.”

싸늘한 표정 위로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아이고, 또 눈 붓겠다, 유세진은 얼른 휴지를 뽑아와 눈 위를 꼭꼭 눌러 주었다.

이윽고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띄엄띄엄 이야기한 것은, 엊그제 오후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이었다. 그가 신전에 찾아갔다가 듣게 된 일들과, 연이어 정혜궁에서 알게 된 것들.

이야기를 마칠 즈음엔 눈가가 말라 있었다. 유현진은 제 입으로 이야기하는 동안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는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찻잔만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좋아지지는 않았을 텐데. ……조금은 덜 아파하면서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형님,”

“가면 되지. 현 총독이 보내기로 작정한 거라면 내가 싫다 한들 피할 도리도 없을 테고. 비산도 괜찮아. 난 한적한 곳도 좋아하고, 또 하나람님을 모실 수 있다면 그것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그곳의 신전으로 가는 건 좋아. 좋은데,”

담담하게 중얼거리던 유현진이 말을 멈추었다.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온 듯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다가 말을 잇는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보내지는 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한테 아주 조금만이라도 진실됐었더라면.”

무덤덤한 목소리인데도 우는 것 같다. 메마른 얼굴인데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유현진을 바라보던 유세진의 얼굴이 차차 일그러졌다.

여태 유현진이 현태오를 얼마나 좋아해 왔는지 유세진은 알고 있었다. 근래 얼마나 가슴 뛰어 했는지, 얼마나 설레어 했는지도.

평생을 책임지겠다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었지만 설마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지, 하고 고통스레 중얼거리는 유현진을 바라보던 유세진이 “그, 그 나쁜……!”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유현진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니까, 가기 전에 복수하고 갈 거야.”

단호하게 내뱉는 그 굳어진 얼굴을 앞두고 유세진은 멈칫했다.

“복수, 라면…….”

“적어도,”

잠깐 생각하던―이미 마음속의 결론은 있으나 선뜻 말하기 고민되는 듯 망설이던― 유현진은, 스스로의 마음에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얻어 내고 갈 거야. 현 총독에게서 받아 낼 수 있는 건 다 받아 내야지.”

“……, 위자료요……?”

그래, 현가는 부자지. 어마어마한 부자지. 그러면 위자료도 아주 톡톡히 받아 낼 수는 있을 거야, 하고 유세진이 멍한 머리로 생각하는데,

“현 총독이랑 반드시 자고 말 거야.”

이어지는 말을 들은 순간 머릿속이 공백이 되었다. 유현진은 사나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덮쳐 버리고 말 거야. 몸이라도 가져 버려야지. 울며불며 저항해도 빼앗고 말 거야.”

아니 형님, 잠깐, 이 형님이 고열로 앓는 동안 머릿속에 살짝 문제가 생기셨나 누구한테 뭘 빼앗고, 누가 울며불며 저항……, 유세진이 여전히 새하얀 머리로 버벅거리는데, 잠시 침묵하던 유현진이 “그래야,” 하고 속삭였다.

“그래야 멀리로 가 버린 뒤에도, 계속 되새기며 떠올릴 기억이 하나라도 더 남지.”

그것은 땅 아래로 떨어질 듯 힘 빠진 혼잣말이었다.

“하나라도 더 가져가야지. 뭐든 오래 기억할 만한 것들을 하나라도 더.”

들릴 듯 말 듯 읊조리는 유현진을 보는 사이에, 유세진의 머릿속에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며 뒤늦게 화가 올라왔다.

“현태오 나쁜 놈…….”

유세진이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나도, 나도 복수할 거예요. 반드시 출세해서, 그놈보다 훨씬 더 출세해서 복수할 테다……!”

말을 하면서도 ‘그런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싶은 의심이 떠올랐지만 모른 척했다.

현태오에게 화가 났고, 유현진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책임지겠다면서, 말은 번드르르하게 해 놓고, 알고 보면 멀리로 보내 버릴 심산이었던가. 사악하고 못됐다. 그 남자는 복수당해 마땅했다.

“하, 하지만 함부로 서두르다간 자칫 동티가 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형님. 비산도 대신 한천으로 가게 되기라도 하면 절대로 안 되니까…….”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다. 악당을 상대할 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유세진이 분연히 주먹을 움켜쥔 채 조곤거리자 유현진도 덩달아 고개를 기울이며 조곤조곤 대답했다.

“음, 그런데 그건 방법이 있을 것 같아.”

“방법?”

“현 총독님이 약속했거든. 설마 자기 입으로 꺼낸 말을 뒤집진 않겠지.”

“약속이요?”

“응. 내 생일 선물로,”

거기까지 말하고 유현진이 잠깐 머뭇거렸다. 복수 운운해 놓고서 선물을 끄집어낸다는 게 다소 켕기는 눈치였지만 마음을 단단히 다잡은 듯 말했다.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댔어.”

“엥?”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준다고……, 잘 생각해 보래.”

유세진은 다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런 문자를 봤던 것 같기도 하다. 생일 선물 잘 생각해 보라는 둥 어쩐다는 둥. 하지만……, 엉?

“설마요. 잘못 들으셨겠죠.”

“아냐, 정말이라니까. 여러 번 들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현진 본인 또한 자신 없는 투였다.

그럴 리 없다.

그 정도 되는 거물이 제 입에서 떨어지는 말의 무게를 모를 리가 없다. 제 입으로 한 말을 번복한다는 건 제 체면을 구겨 버리겠다는 소리였고,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추문이었다.

그러니 그만한 지위에 있는 인물들은 사소한 말이라도 늘 입조심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는데, ‘뭐든’ 들어주겠다니.

믿기지 않았다. 분명 잘못 들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그 양반 미쳤대요?!”

유세진이 더럭 말하자 유현진도 미심쩍은지 ‘역시 잘못 들었나…….’ 하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하지만 분명히 들었고, 확인도 했어. 그러니까――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겨도, 적어도 네가 한천에 가는 일은 없을 거야. 가더라도 나 혼자 가고 만다.”

“형님도 가면 안 되죠!”

“내가 너만큼은 꼭 지켜 줄게, 세진아.”

“――혀엉!”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수십 년 전의 신파극처럼 눈물바다가 될 듯 혀엉, 세진아, 하고 서로를 부르며 형제들은 굳게굳게 끌어안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문득 유현진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축 늘어져 유세진의 어깨에 힘없이 얼굴을 묻은 유현진이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런데도 좋아. ……계속 좋아. 어쩌지.”

건조한 목소리인데도 울고 있는 것만 같아, 유세진은 덩달아 서글퍼졌다.

“그래도……, 그래도 복수할 거야…….”

씨이, 하고 어린애처럼 중얼거리며 유현진은 유세진의 어깨에 눈가를 비볐다. 복수라고 거창하게 말하기엔 너무나 별것 아닌 성싶었지만, 그것도 이 형님에게는 정말 크게 마음먹어야 하는 악행인 것이다. 유세진은 저까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어 도닥도닥 유현진의 등을 두드렸다.

그때다.

철컥, 현관 쪽에서 문 열리는 기척이 났다.

냉담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찬바람이 등 뒤로 훅 끼친다.

그 찬바람이 일순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보다 더욱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뭐 하십니까?”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복수의 대상이 나타났다.

굳어 버린 유세진의 품 안에서 움찔한 유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기 무섭게,

“――, 얼굴이 이게 뭡니까?”

사나워진 목소리가 날아오더니, 등 뒤에 서 있던 커다란 남자가 장갑을 벗어 테이블에 내던지며 성큼 다가왔다.

유세진을 떼어 내다시피 밀쳐 낸 현태오가 유현진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움켜쥐었다. 당황해하는 유현진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본 남자가, 창졸간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동자만 굴리는 유세진을 돌아보았다.

“간병을 하러 왔으면 제대로 해야지, 사람을 이 꼴로 만들고 뭐 하는 겁니까?”

“아니, 내가 그런 게, 아니,”

시선이 물리적 형태를 갖출 수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자신은 지금 쇠꼬챙이 같은 시선에 꿰뚫려 쓰러지고 말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세진이 더듬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주방 쪽에서는 “냉장고에 넣어 둘까요.”라는 진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현태오가 “놔둬. 바로 쓸 거야.”라고 저쪽을 향해 대꾸했다.

주방에서 진문성이 음식거리 따위가 가득 찬 상자를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그에게 유세진도 얼결에 고개를 꾸벅했다.

“감기에 걸렸다더니, 이렇게 심하게 앓을 정도면 말을 하지 그랬습니까.”

“다치셨다면서요.”

현태오의 말은 들리지도 않은 양 유현진이 그를 샅샅이 훑어보며 말하자 그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별것 아닙니다. 차로 살짝 들이받아서 좀 부딪힌 정도입니다. ……쯧, 사람이 반쪽이 됐네. 왜 하필 지금 아픕니까, 지금은 일이 많아서 제대로 챙겨 줄 수가 없는데.”

유세진은 이상한 걸 쳐다보는 눈으로 현태오를 보았다.

자신이 알기로 저 남자는 분명 제 부모가 충수염 수술로 입원해 있을 때에도 ‘죽을병도 아닌데.’라며 제 할 일 다 하고 돌아다니던 양반이었다. 왜 저래, 무섭게…….

유현진의 얼굴을 구석구석 들여다보던 현태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

“왜 사람 눈을 피하고 그럽니까.”

그제야 유현진이 떨구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잠깐 현태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젓는다.

“씻지도 못하고, 얼굴도 너무 부어서 좀…….”

현태오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짧은 한숨을 쉬곤 가만히 유현진의 뺨을 쥐었다 놓았다. 유세진은 점점 무서워졌다. 뭔가 괴기스러운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먹을 만한 거 만들 테니까. ……차 새로 끓여 줄 테니 이리 와요.”

주방으로 걸음을 돌리던 현태오는 유세진을 흘끔 보더니, 유현진더러 따라오라고 덧붙였다. 잠시 망설이던 유현진은 이불을 둘둘 두른 그대로 주방으로 따라가 식탁 앞에 오도카니 앉았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유세진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싱크대 앞에 선 현태오와 그 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유현진을 보았다. 뭔가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싸우거나 복수를 하고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

유세진이 미심쩍게 그들을 쳐다보는 사이, 쫓겨나듯이 거실로 온 진문성이 맞은편에 앉았다.

“문성 형.”

“그래, 세진아. 잘 지냈어?”

“어제 현 총독님 부딪혔다는 데가 혹시 머리예요? 왜 저래요?”

유세진이 기괴하다는 눈짓으로 주방을 가리키자 진문성은 쓴웃음을 지을 뿐 별말 하지 않았다.

“넌 어때, 잘 지내고 있어?”

“그럴 리가 있나요. 연일 사건이 빵빵 터져 주시는 덕분에 우리 부서까지 죽을 맛인데.”

유세진이 투덜거리자 진문성은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나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 그를 흘끔 쳐다보며 유세진은 말을 이었다.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요. 신원 미상의 불온한 무리가 수도에 숨어들어 와 무장하고 있다나 뭐라나. 어제의 그 습격은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며 조사서 올라왔다면서요.”

“넌 그쪽 관련 부서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잘 알아.”

“제 마당발 무시하시나요?”

그러나 유세진이 슬그머니 찔러 보는 말에도 진문성은 반응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의 입이 술술 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또 자신이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아니므로 유세진은 그쯤에서 관심을 껐다. 그 대신,

“정혜궁마마랑 송갈 삼왕자랑 정혼한 거, 언제부터 정해졌던 거예요?”

유세진이 잠시 뜸 들이다가 묻자 진문성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이번 만남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 젊은 열정으로 단번에 혼담까지 진행되었다고 하던데.”

“날 바보로 알아요?!”

신문 기사에 난 내용을 그대로 읊는 진문성에게 유세진은 눈을 부라렸다. 안 되겠다. 이 양반 입에서는 도통 뭐가 나오질 않는다. 늘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현태오 못잖게 씨알도 안 먹힐 양반이었다.

“상관없는 일에 고개 들이밀어 봐야 좋을 일 없다는 거 알 정도는 됐잖아, 세진아.”

“나도 안 들이밀고 싶거든요.”

유세진은 심통스레 툴툴거리며 주방을 보았다.

주방 의자에 앉아 있는 유현진은 기분 탓인지 조금 뻣뻣해 보였다.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기색이다.

현태오가 돌아보다가 유현진을 보곤 “많이 아파요?” 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유현진이 고개를 젓자 이마를 짚어 보고 혀를 찼다.

다시 조리대를 향해 돌아서는 현태오를 유현진이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우울하게 고개를 떨구곤 현태오가 새로 끓여 준 차를 마시는데, 뺨 언저리가 발갛다.

문득 현태오의 등덜미에 붙은 티끌로 시선을 주더니 가만히 손을 뻗어 떼어 준 유현진은, 어디 부딪혔다더니 살짝 걸음을 저는 현태오를 보고는 낯을 흐렸다.

……저래 갖고 복수를 잘도 하시겠다.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유세진과 얼결에 눈이 마주치자 얼른 얼굴에 뻣뻣하게 힘을 주는 유현진이었지만, 유세진은 끌끌 혀를 차고 말았다.

그보다 지금 더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근데 진짜 총독 각하 왜 저러세요.”

“음?”

“무섭단 말이에요. 말 좀 해 줘요. 저 양반이 저럴 양반이 아닌데 왜 저렇게 답지 않게 굴어요. 무슨 함정을 파 놓고 있는 건지 무섭잖아요.”

유세진은 울멍울멍 진문성을 쳐다보았다.

“우리 형……, 우리 형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건 아니죠……? 사형수 죽이기 전에 최후의 만찬 차려 주는, 그런 거 아니죠……? 문성 혀엉―.”

“어……, 그게,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진문성이 난처한 웃음을 띠더니 얼버무렸다. 유세진은 더럭 겁이 났다.

“형이 모를 리 없잖아요, 문성 혀엉!”

그렇게 외치며 진문성에게 매달렸는데, 그 소리가 시끄러웠던가 보다. 주방에서 현태오의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문성아. 그만 가 봐. 그 김에 사무관님도 댁까지 바래다드리고.”

“저는 아직 안 갈 건데요!”

유세진이 눈을 부릅뜨며 대꾸하자 현태오가 냉담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딱 유현진 씨가 먹을 만큼밖에 음식을 안 했습니다.”

“저는 굶어도 되는데요!”

때마침 주방에서 고소하고 훈훈한 냄새가 풍겨 왔다. 잊고 있던 허기가 갑자기 밀려왔다. 순간 입에서 군침이 흐를 뻔했지만 억지로 입을 딱 다문 유세진이었다.

그러나 그 험악한 공기가 거북했는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유현진이―아마도 어느 쪽이 더 돌려보내기 쉬울지 가늠해 본 눈치였다― 결국은 유세진 쪽을 보았다.

“세진아, 그만 가 봐. 그저께도 어제도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가서 푹 쉬어.”

이로써 유세진의 귀가는 결정되었다. 순순히 돌아가기는 싫었던 유세진이 어물거리며 버티려 했지만 현태오의 시선을 받은 진문성이 일어나 팔뚝을 잡았다. 싫다고 해도 끌고 갈 기세였다.

갈 때 가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우, 우, 우리 형, 고생시키지 마세요!”

“…….”

오자마자 소매 걷어붙이고서 조리대 앞에 서 있던 현태오가 국자를 한 손에 든 채 지그시 유세진을 바라보았다. 이 타이밍에 할 말은 아니었고나……, 유세진은 슬그머니 쭈그러졌다.

“밤길 조심해서 가십시오.”

단호하게 말하는 현태오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밤길에서 칼 들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소리로 들릴 지경이었다.

세진아, 조심히 가, 인사하는 형의 파리한 낯빛을 보니, 진문성에게 질질 붙들려 나가는 유세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나람님, 하나람님, 제발 우리 형님 앞날을 굽어살펴 주세요.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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