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진문성은 운전석에 앉은 채 태블릿을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점점 통통해져 가는 초승달이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데도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새로운 소식들과 동향들을 정리하느라 쉴 틈이 없다.
그의 집중이 흩어진 것은 차 문이 열리며 현태오가 타고 나서였다.
“식사는 잘 마치셨습니까?”
“음.”
안전벨트를 매며 거울을 보는데, 현태오의 표정이 어딘지 이상했다. 약간 기분이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기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눈살을 찌푸린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진문성이 묻자 손마디에 턱을 괸 채 창밖을 보던 현태오가 흘끔 눈동자만 돌렸다.
“유현진이…….”
“유현진 씨가요?”
거기서 말을 멈춘 현태오는 잠깐 진문성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사이 들어온 소식이나 말해 봐.”
“예. 기사가 난 이후로 저쪽은 아비규환이더군요. 어디까지 밝혀졌는지, 어떤 증거 자료가 넘어갔는지 알아내려고 혈안이 된 한편 몸을 사리기에 급급하니, 한동안은 척화를 떠들 정신도 없을 겁니다.”
“애꿎은 청년들을 전장으로 보내 놓고 물밑에서는 적들과 손잡고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으니, 낯짝이 있으면 입 다물고 목이나 늘어뜨려야지. 놈들이야 어차피 제 죗값을 치르는 거지만, 정말로 본인의 순수한 신념으로 척화를 주장하던 이들이 안됐어. 몇 마리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는 바람에 그들까지 숨통이 막히게 되었으니.”
현태오는 코웃음을 치곤 말을 이었다.
“그쪽은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흐름 봐 가면서 하나씩 자료 흘려. 그리고――송갈 쪽에서 솎아 낼 놈들도 솎아 내야지. 송갈의 삼왕자를 따라온 박쥐부터 털어 봐야겠어.”
현태오의 말에 진문성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 일에 대해 송갈 삼왕자께는 뭐라고 말씀을 드리면 될까요.”
“굳이 말할 것 없어. 똑똑한 양반이니 이미 다 짐작하고 있을걸. 애초에 수상한 줄 알면서도 일부러 달고 왔으면 이쪽에서 어떻게 처리하든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봐야지.”
“잘라 낼 틈을 보려고 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이쪽의 정보력을 알아보려는 의도일 수도 있겠지요.”
“둘 다겠지. 어쨌든 일단은 한배를 탄 사이이니 그 정도는 넘어가 드려야지. 지금 송갈도 내부적인 대립 때문에 속 시끄러울 텐데.”
어젯밤의 기습은 예상된 일이었고, 딱 예상한 만큼의 결과로 돌아왔다.
공표된 사실과 달리 놈들이 원래 습격하려던 자는 미사담이었고, 측근에 있는 이들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일정 중에 습격을 당했다. 실제로 어젯밤의 현장에는 미사담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놈들을 꾀어낼 수 없었을 테니.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길을 가로막고 추돌을 일으킨 차 안에서 미사담뿐 아니라 현태오까지 나왔다는 점이었다.
“궁궐 지척에서 그런 일을 벌일 양이면 왕족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을 텐데……, 계연군께서 마음이 급하셨나 봅니다.”
“글쎄, 이십 년이 넘도록 그놈 나름대로는 정혜궁마마께 순정을 품고 있었으니, 그 성질머리에 설설 기다시피 하면서 비위를 맞춰 줬다 싶었는데 이렇게 되니 눈이 돌 만도 하지. 그렇다고 대뜸 제 꼬리를 드러내 버리다니, 덜떨어진 놈 같으니라고.”
“본인은 드러냈다고 생각하지 않을걸요. 직접적으로 습격해 온 자들도 송갈 쪽 줄이라 계연군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덜떨어졌다는 거지. 지금이라도 꼬리 자르고 달아나도 부족한 판에.”
현태오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저쪽으로서는 초조한 상황일 테니 어쩌면 더 극단적인 방법을 쓸 수도 있겠습니다.”
“타국의 사절단으로 온 왕족을 해치려 드는 것보다 더 극단적인 방법이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현태오가 피식 웃었다.
“어찌 됐든 놈들도 기어이 행동에 나섰고, 그런 만큼 이쪽도 잘 맞춰 드려야지. 일단은 왕자 아래에 있는 박쥐부터, 언제쯤 구제하는 게 좋을지 물어보러 가야겠어. 어제 나한테 칼질하려 들었던 그놈이라면 알고 있겠지.”
안보청으로 가, 라는 짧은 말이 떨어졌고, 곧 차가 출발했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가 달리는 동안 현태오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거울로 현태오를 흘끗 살핀 진문성은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비산도의 신전에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인원 파견의 변경된 일정을 정확하게 알려 달라고 한다는데요. ……각하께서 평항으로 귀환하실 일정이 4월 초이니, 늦어도 두 달 안에는 정해져야 합니다.”
현태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사이를 두고 진문성이 다시 물었다.
“비산도로 보내는 것 자체를 철회할까요?”
“……, 아니……,”
현태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풀기 어려운 난제라도 맞닥뜨린 듯 침묵하던 끝에 입을 뗐다.
“일단은 잠시 더 보류시켜 둬. 모호한 게 있어서 생각을 좀 해 봐야겠는데……, 지금은 일이 많아서 천천히 생각해 볼 틈이 없어. 상황 정리 좀 된 다음에.”
눈동자만 돌려 거울을 쳐다본 진문성은 무어라 말하려다 그만두고 “예.” 하고만 대답하고 말았다.
현태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간에 희미한 주름을 새긴 채 바깥을 노려보던 그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한번 제적되고 나면 다시 신관이 될 수는 없는 거였지.”
“예. 그런 걸로 압니다. 실제로 20년 전에 순전히 사무상의 실수로 정신관 한 명이 서류상 제적되었는데, 5년간 신전 사무청과 다툼이 오갔으나 결국 복적하지 못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 당시 신전에서 신전 측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상당한 금액의 보상도 지급했으나 율법상 제적되었던 자의 복적만큼은 불가한 걸로 결론이 났었지요, 하고 진문성이 덧붙였다. 유명한 사건이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현태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유현진도 어차피 다시 신관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 와서 정결의 의무를 지키려 들 이유는 없겠지.”
“…….”
때아닌 수상쩍은 발언에 진문성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던 현태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자자더군.”
“예?”
“자자고 하더라고. 유현진이. 나더러.”
진문성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길이 일직선이고 차량이 별로 없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사고 날 뻔했다.
현태오도 거울 속에서 진문성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까의 그 이상한 빛이 떠오른 얼굴이다. 과연, 저렇게 이상한 얼굴을 할 만큼 기이한 소리이긴 했다.
당장에 믿어지지 않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으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유현진은 앓고 일어나 기운이 없는지 혹은 입맛이 없는지, 현태오가 그 앞에 놓아 준 죽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드십시오.’
현태오가 맞은편에 앉으며 권하자 그제야 그는 숟가락을 집어 들어 죽을 떴다. 두어 숟갈 먹는 걸 지켜보다가 ‘입에 맞습니까?’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예. 맛있습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렇게 야윌 정도로 아프면 말을 하지 그랬습니까. 잠깐이라도 들러 봤을 텐데.’
‘……왜,’
무어라 말하려다 멈칫한 유현진은 잠시 사이를 두고서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잘해 주십니까?’
시선을 떨군 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원래 남의 신세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요 얼마간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앓고 나더니 도루묵인가 보다. 현태오는 혀를 찼다.
‘유현진 씨와 제 관계에서, 잘해 주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유현진은 말끄러미 현태오를 보다가 도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얌전히 죽을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눈썹을 치켜올린 현태오는 불현듯 손을 내밀어 유현진의 이마를 짚었다.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물리며 쳐다보는 눈이 유난히 커다랗다.
‘얼굴빛이 계속 안 좋은데, 기분 안 좋습니까?’
‘아니, 그런 건,’
‘열은 심하지 않은데……. 아직 많이 아파요?’
‘아니, 괜찮,’
대답을 하다 말고 갑자기 그 커다란 눈에 그렁하고 물기가 도는 듯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는지, 잠깐 고개를 숙였다 다시 든 유현진은 무뚝뚝하게 가라앉은 낯 그대로였다.
‘괜찮습니다. 그냥 좀, 열이 덜 내려서 노곤할 뿐입니다.’
‘얼른 마저 먹고 쉬어요.’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잠자코 숟가락을 놀렸다. 한참을 그렇게 먹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현태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유현진은 한 번 더 ‘맛있어요.’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곤 묵묵히 죽을 퍼먹었다. 삭막한 얼굴을 하고서도 꼬박꼬박 숟가락질은 잘도 한다.
‘잘 드시네요.’
현태오가 말하자 잠시 침묵하던 유현진이 말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지요. ……또 모르잖아요. 갑자기 아파서 맛을 못 느끼게 될 수도 있고, 갑자기 가난해져서 음식을 못 살 수도 있고, 갑자기 이 음식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고……. 그러니까 좋아할 때,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해요.’
할 수 있을 때 해야지요, 하고 혼잣말처럼 속삭이는 게, 꼭 무슨 대단한 결의라도 한 것 같다. 고작 죽 한 그릇을 갖고.
‘또 해 드리겠습니다. 그 맛이 싫어지면, 그때는 그때 좋아하는 다른 걸 해 드릴 테니 그렇게 애쓰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아프거나 가난해지거나 하는 가정은 일단 젖혀 두고요, 하고 현태오가 말하는데 유현진의 낯은 더 시무룩해졌다. 이놈은 아프면 우울해지는 편인가, 현태오는 혀를 찼다.
‘저한테 너무 잘해 주지 말,’
‘?’
‘――.’
유현진은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입에 죽이 가득 차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젓곤 입을 다문 유현진은 말없이 죽만 먹었다.
그새 다 먹어 죽 그릇이 빈 걸 본 현태오는 일어나 빈 그릇을 개수대에 담갔다. 오는 길에 사 온 달콤한 푸딩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돌아오는데, 유심히 그를 보고 있던 유현진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다리는 많이 다치신 겁니까?’
‘예? 아, 차로 들이받힐 때 충격이 좀 있었거든요. 다른 데는 멀쩡한데, 아무래도 고관절 쪽은 한번 다쳤었던 곳이다 보니 다소 무리가 갔나 봅니다. 거의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좀 뻐근하네요. 대단치는 않습니다.’
대수롭잖게 말하는 현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현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 안마 좀 해 드릴게요. 이리 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거실로 나갔고, 현태오는 손에 든 푸딩을 내려다보다가 찻숟가락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유현진은 제법 안마 솜씨가 좋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손길은 어설픈데 효과가 좋았다. 엉성하게 주무르는 손길을 받고 있노라면 이걸 지금 재활 안마라고 하고 앉았나 싶은데, 하고 나면 신기할 정도로 고통이 가셨다.
……하지만 역시, 막상 받고 있을 때에는 참 어쭙잖게 느껴지는 손길이다.
현태오는 소파에 누워 있다 낮게 웃었다. 심각한 낯으로 고관절을 문지르고 있던 유현진이 흘끔 쳐다본다.
‘아니, 앓다가 일어나신 분께 무리를 시키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네요.’
‘……. 그런 것치고는 아주 편안하게 누워 계시는데요.’
‘워낙 능력이 좋으시니 차마 거부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유현진은 묵묵히 쳐다보다가 얼굴을 돌렸다. 그 입술 끝이 아주 희미하게 비죽거리고 있었다. 저 비죽거리는 입술을 잡아당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러려면 몸을 일으켜 저 손길을 멈추어야 하니 관뒀다.
어설픈데도 가만가만 몸 위를 짚는 그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남이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유현진의 진지한 낯을 올려다보던 현태오는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히는 걸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피곤하실 텐데 그만하셔도 됩니다.’
아픈 놈을 오래 부려 먹을 순 없지, 하고 일어나려던 찰나, 유현진이 고개를 젓더니 현태오의 가슴을 밀어 도로 눕혔다.
‘아직 조금 더 해야 합니다.’
‘재활 안마에는 정해진 시간이라도 있는 겁니까?’
유현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불쑥,
‘할 수 있을 때 해야지요. 이제는 거의 안 아프시겠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드리려고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흘끔 눈동자만 돌려 현태오를 보더니, 받을 수 있는 것도 다 받을 겁니다, 하고 불퉁하게 덧붙였다.
‘예, 많이 해 주시고 많이 받아 가십시오.’
현태오는 피식 웃었다.
한동안 말없이 무릎 부근을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현진이 문득 조용히 말했다.
‘몸조심하십시오. 다치지 마시고요. 계속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저보다는 유현진 씨나 건강을 좀 챙기셔야겠습니다. 저는 감기 같은 걸로 앓아누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원래 저 같은 사람이 골골백세하고, 현태오 씨 같은 사람이 한순간에 가는 겁니다.’
‘음……, 가야 합니까?’
‘……. 가지 마세요.’
눈을 부릅떴다가 도로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유현진이었다.
살짝 튀어나온 입술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 보드라워 보이는 입술을, 현태오는 하마터면 무심결에 찔러 볼 뻔했다. 유현진이 갑자기 입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두 달 뒤엔 평항으로 돌아가시겠네요. ……저는 함께 가게 됩니까?’
시선을 자신의 손등에 떨군 채 유현진이 나직이 물었다. 현태오는 짧은 침묵 뒤 대답했다.
‘평항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고 아직 위험하기도 하니 같이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어떻게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죠.’
유현진은 잠깐 현태오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한 틈이 지난 뒤,
‘저 곧 생일입니다.’
유현진이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현태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꾸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날, 광장호텔의 식당에 저녁 예약을 해 뒀습니다. 현태오 씨에게 늘 받기만 하니까 저도 사 드리고 싶기도 하고, 또 원래 생일인 사람이 생일상을 대접하는 법이니까요.’
유현진치고는 제법 사치를 부렸다. 전형적인 ‘신경 좀 쓴’ 데이트 코스 아닌가.
현태오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고 그날, 방도 잡았습니다.’
현태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일순 웃음기도 사라진 얼굴로 빤히 유현진을 보았다.
낯을 붉힌 채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표정, 현태오의 무릎을 감싸고 있는 떨리는 손.
자신이 잘못 듣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지도.
‘싫으십니까?’
제 손등을 노려보며 유현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놈이……?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뱉으려던 현태오는, 들릴락 말락 하게 속삭이는 그 입술을 본 순간, 별안간 속이 훅하고 뜨거워졌다.
이런 유치하고 어설픈 유혹이라니. 요즘 같은 세태에는 어린애들이라도 코웃음을 치고 말 엉성한 수작이다.
그런데도,
‘그럴 리가요.’
이놈이 대관절 무슨 꿍꿍이일까, 생각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손이 나갔다.
저 입술을 물고 싶어졌다.
빌어먹을, 너무 오래 굶었나. 요즘 종종 예상치 못하게 허기가 일 때가 있었다. 이런 허기를 억누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는데, 머릿속 어디선가 속삭이는 것 같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상반신을 일으키며 유현진의 머리를 끌어당긴 현태오는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일순 멈칫하며 얼어붙은 유현진은,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순순히 응해 왔다.
이놈은 아무래도 입술에 뭔가를 바르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달 리가.
‘――.’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유현진의 허리를 아예 끌어안고 당겨 버렸다. 현태오의 몸 위로 넘어지듯이 엎어져 버리는 그에게 각도를 달리해 더욱 깊이 입술을 겹쳤다. 유현진이 숨을 삼키며 움찔거리는 기색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 새끼는 쓸데없이 반응이 야해.
공연히 속이 끓어 혀를 씹었다. 놈이 품속에서 펄쩍 뛰며 바르작거린다. 그 팔팔하게 뛰는 것을 그대로 눌러 버리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만일 놈의 체온이 평소보다 훨씬 높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눌러 버렸을지도 몰랐다.
‘몸이 뜨겁습니다.’
입술을 거의 맞대다시피 한 채 현태오가 으르렁거렸다. 유현진이 몸을 뒤로 물려 조금 더 거리를 벌리며 숨을 허덕였다.
‘열, 열이 아직, 다, 안 내려서,’
‘다행인 줄 아십시오.’
잇새로 내뱉은 현태오는 유현진을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흐트러진 숨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물러나 앉는 유현진을 보며 현태오는 아주 느리게 주먹 쥐었던 손을 폈다.
떨어져 앉은 거리 사이로 정적이 맴돌았다. 무더워졌던 공기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희미하게 이맛살을 찌푸린 채 유현진을 보고 있던 현태오가 흠, 하고 짤막한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
‘저는 체력이 아주 좋은 편입니다.’
현태오는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팔짱을 꼈다.
‘이 정도로 숨을 헐떡일 양이면, 그날 제 체력 못 따라가실 겁니다.’
‘――, 노력할 겁니다.’
유현진이 결의를 다지듯 다부지게 말했다. 노력이라, 현태오는 손가락 끝으로 제 팔뚝을 툭, 툭 두드렸다.
‘노오오오오력쯤은 하셔야 될까 말까 할 듯한데…….’
가벼운 조롱에 유현진이 눈에 힘을 빡 주며 노려본다. 그런 유현진을 마주 보며 현태오가 피식 웃었다.
‘뭐, 어디 한번 봅시다. 그때까지 몸이나 말끔히 나아 두십시오. ――자, 일단 지금은,’
현태오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것을 집어 들었다. 찻숟가락과 함께 가지런히 놓인 푸딩이다. 유현진의 눈이 살짝 반짝였다.
‘열량이나 좀 보충하십시오, 단것 안 좋아하시는 유현진 씨.’
“이번에는 어떻게 할 작정이실까……. 호텔 식당에서 먼저 보는 거라면 또 술을 들이붓지는 못할 텐데.”
목적지에 가까워져 가는 창밖 경치를 보며 현태오가 느른히 중얼거렸다.
“신성가호가 남아 있다는 걸 내게 들키지 않으려면, 흠……, 눈이라도 가리시려나.”
특이한 취미가 있다고 오해받을 위협을 무릅쓰고 말이야, 하고 옅게 웃었다.
“아니면 들키지 않을 다른 방법은―….”
무심히 읊조리던 현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미간에 사나운 주름이 졌다 사라졌다. 짧게 혀를 차곤 “아냐, 그건 아니지.” 하고 언짢게 중얼거리고 만다.
진문성은 거울에 비친 현태오에게 시선을 주었다. 현태오는 시트에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손마디에 턱을 가볍게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말했다.
“오늘 그놈 느낌이 좀 이상하지 않았어?”
“유현진 씨 말입니까? 글쎄요, 저는 잘…….”
현태오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따라 다른 때보다 가라앉아 있다고 해야 하나, 좀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원래 늘 차분한 편이지 않습니까.”
아니, 알고 보면 그렇게 늘 차분하지만은 않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현태오가 가만히 턱을 쓸었다.
“그놈이, 눈을 피했어.”
“예?”
“눈을 좀 마주치고 있는가 싶으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면서 시선을 피하는데…….”
현태오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제 와서 딱히 켕길 만한 일이 생기진 않았을 테고, 그렇다고 도박이나 돈 문제 같은 게 생기지도 않았을 테고. 아니면 가족 문제……. ……유세진이 또 뭔가 사고라도 쳤나?”
“그런 이야기가 들려온 바는 없습니다만, 일단 확인은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아닐 거다. 공식적으로 현가와 얽혀 있는 유현진의 친동생이다. 뭔가 문제가 생겼더라면 이미 진문성의 귀에 들어왔을 터였다.
“하지만, 각하를 바로 직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놈은 늘 나를 똑바로 봤어. 언제나, 오만할 정도로 거침없이 쳐다봤었지.”
비록 그와 한자리에 있게 되면 금세 자리를 떠 버리곤 했지만, 적어도 함께 있는 그 짧은 동안에는 늘 그를 쳐다보았었다.
“아니면 앓다 일어난 직후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 그래, 그럴 수 있지.”
진문성의 말에 현태오는 석연찮은 투로 대답했다. 잠시 더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딱히 그럴 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아 혀를 차고 말았다.
“혹시라도 그놈 신변에 무슨 일은 없나 알아봐. 그리고 보약도 한 재 지어 오고. 그놈은 성질머리가 대찬 것치고는 몸이 영 부실하단 말야.”
마뜩잖은 듯 시트에 머리를 기댄 현태오는 잠시 자동차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다 불쑥 중얼거렸다.
“제대로 했다간 한 시간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질 놈이, 그 체력으로 배포도 좋게 나랑 자겠다고.”
헛웃음을 웃는 현태오를 진문성이 거울 속으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주무실 겁니까?”
현태오가 눈동자만 돌려 진문성을 마주 본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잘까.”
“…….”
“어차피 다시 신관이 될 수도 없을 노릇인데.”
느릿하게 중얼거리던 현태오는, 거울 속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는 진문성과 눈이 마주치자 낯을 찌푸리더니 “농담이야.” 하고 잘라 말했다.
“자긴 뭘 자. 밥 정도나 같이 먹고 그 뒤는 거절해야지. 계속 데리고 살 놈이면 모를까, …….”
“…….”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제법 길게 이어진 그 침묵을 끊으며 진중하게 입을 연 것은 진문성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만에 하나라도 주무신다면, 차후에 비산도로 보내실 때에 망종 소리를 들으셔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셔야 하는 입장이…….”
“알아, 나도 아니까 쓸데없는 헛소리는 이쯤에서 집어치우고 그놈 생일날 저녁 일정이나 비워 놔.”
현태오가 사납게 눈을 치뜨며 내뱉었고, 진문성은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선물은 정하셨답니까?”
“아직.”
진문성은 몇 초쯤 사이를 둔 뒤 조심스레 말했다.
“뭐든 원하는 것이라니, 너무 과한 제의를 하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미리 알았더라면 진문성은 그를 만류했을 터였다. 그러나 현태오는 느닷없이 상상조차 못 해 본 말을 꺼냈고, 진문성이 놀랐을 때에는 이미 그의 입 밖으로 말이 나온 뒤였다.
물론 본인이 결정을 내린 일은 누가 뭐라 하든 번복하는 법이 없는 남자였고 뜻밖의 결정을 내리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그때는 정말로 놀랐다. 위험할 만큼 과한 제안이었다.
“그놈이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
별말 없이 창밖을 보던 현태오가 말했다.
“갑자기 궁금해지더란 말이야. 이놈이 어디까지 과해질 수 있을지. 도통 짐작이 안 가거든. 뭐를 바라는지. 어디엘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말하던 도중, 현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혀를 찬 그는 “됐어. 두고 봐야지.”라고 냉랭하게 이야기하고 말았고, 진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목적지 가까이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진문성은 “그러고 보니,” 하고 말을 꺼내었다.
“유현진 씨 생일 바로 전날이 총리님 생신인데, 총리님 선물은 어떻게 할까요.”
“아. 그랬지. 아버지 선물이라……. 요즘 과실주에 맛들이신 것 같던데, 적당히 귀한 거 한 병 구해 둬.”
아버지 생일 선물에 대한 고민을 1초 만에 끝내고 대수롭잖게 말하는 현태오를 진문성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내심 켕기는 데가 있었는지 현태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어차피 웬만한 선물로는 특별히 기뻐하시지도 않아. 그날 일정이나 비워 놔. 아버지는 가족들 다 모아 놓고 저녁 식사나 하면 그걸로 만족하시는 분이니.”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원하는 걸 뭐든 들어드리겠다고 하면 아주 기뻐하실 텐데요, 라는 말은 조용히 삼키는 진문성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차는 목적지에 이르렀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 멈추자 초소에서 경비병이 나왔고, 방문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무섭게 정중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며 현태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 그리고 병원 예약해 둬. 유현진이 티를 안 내려고 애는 쓰는데, 그놈 계속 다리가 안 나아. 병원에 갔다 왔다는 놈이 어디서 돌팔이를 만나고 왔나……, 데려가서 제대로 검사를 받아 봐야겠어.”
보낼 때 보내더라도 건강은 챙겨서 보내 드려야지, 하고 말하는 현태오에게 진문성은 군말 없이 예, 하고 대답했다.
이윽고 차는 건물의 정문 앞에 멈추었고, 현태오는 시트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러 가 볼까. 일단 언제 어디로 가면 박쥐 날개를 움켜쥘 수 있을지부터 시작해서, 놈이 알고 있을 만한 건 모조리 들어 봐야지. ――각성제랑 지혈제 넉넉하게 챙겨 둬. 도중에 기절이라도 하면 시간 아까우니까.”
차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안보청의 정문이 있었고, 문 앞에는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청장이 휘하의 직원들과 함께 서 있었다.
이미 차 안에 느른히 앉아 있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감정 하나 묻어나지 않는 평소의 얼굴을 한 현태오는 그들을 향해 삽상하게 걸어 나섰다.
*
유현진의 말실수로 시작되었던, 현태오와의 이 꼬인 상황에 대해 제상아가 제시했던 해결책은 셋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 꼬인 상황을 잘 풀어야만 한다는 목적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말았지만, 어찌 되었든 애초에 유현진의 말실수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현태오와의 거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그 셋 중 마지막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딴 사람이랑 먼저 자서 신성가호를 풀어 버리는 것.
“자, 네가 제시한 방법이고, 또 너는 내게 협조할 도의적 의무가 있으니, 나랑 잘 사람을 구해 줘.”
병석을 털고 일어나자마자 제상아를 찾아간 유현진은 매우 뻔뻔하고도 당당하게 요구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제상아에게 그럴 의무는 없었지만, 유현진에게 내심의 미안함이 빚처럼 남아 있었던지 그녀는 애매모호한 기색을 떠올릴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정말 하려고? 네가?”
“할 거야. 현태오 씨한테도 말했어. 내 생일날 자자고. 그러니까 그전에 신성가호를 풀어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제상아는 굳게 결심했다는 듯 눈을 부릅뜬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다 으음, 하고 입매를 찌푸렸다.
“도와줄 만한 사람, 너도 모르겠어……?”
유현진이 눈을 부릅뜬 와중에도 불안스레 묻자 어딘지 마뜩잖게 유현진을 보고 있던 그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있기야 하지. 전에 말했었잖아. 말도 안 통하니 새어 나갈 일도 없고, 또 어차피 금방 떠날 사람이니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인물.”
“……!”
기억을 떠올린 유현진은 낯익은 면면들을 떠올리곤 멈칫했다. 복잡미묘한 기색을 띠는 유현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제상아가 재차 물었다.
“정말 할 거니?”
“――할, 할 거야.”
그래, 그럼, 하고 제상아는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고하게 대답을 들었으니 산뜻하게 마음 정한 눈치였다.
그러나 유현진은, 설마 그러자마자 그녀가 문밖에 서 있던 궁인을 불러 미사담을 불러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설마 그러자마자 십여 분도 지나지 않아 미사담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절 찾으셨다고요, 상아 님. 아, 통역사님도 같이 계셨군요.”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미사담을 보며 유현진은 거북이 목처럼 움츠러들었다. 거북함도 목까지 차올랐다.
그야 송갈인의 도움을 받으려면 당연히 그에게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그러나 미사담 역시 결론을 내리고 나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실행해 낼 일만 염두에 두는 제상아와 마찬가지였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주제에 부창부수다.
제상아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은 미사담은 별 대수롭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러나 진지하게, “정말 괜찮으시겠어요?”라고 유현진의 의사를 확인했다. 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두 번 묻지도 않고 “그렇다면야 도와드려야죠.” 하고 산뜻하게 대답했다.
아주 성격 비슷한 사람들끼리 잘 만났네, 잘 만났어……, 속으로 살짝 눈꼴시다고 생각하는 유현진의 앞에서, 미사담은 실행력이 어찌나 좋은지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를 꺼내었다.
「어, 호웅아.」
어디로 전화를 하는가 했더니 그의 보좌관 중 하나였다. 심지어 멀리 있지도 않은지, 문 너머 멀찍이서 어렴풋이 보좌관이 통화에 응하는 기척이 들려왔다.
「있잖아, 뒤탈 없고 깔끔한 딱 하룻밤만의 육체관계에 네 도움이 좀 필요하거든. 어, 맞아, 남자야.」
미사담이 전화를 꺼내는 순간부터 긴장해 움츠러들어 있던 유현진은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저렇게 노골적이고 명료한 제안이라니……, 아니 구구절절하면 그게 더 이상한가.
막연하던 계획에 너무도 급작스럽게 현실감이 입혀지자 심장이 졸아붙는 듯했다.
삽시에 해쓱해진 유현진에게 흘끔 시선을 준 미사담은 왜 그런 얼굴인지 알겠다는 듯 전화의 송화구를 손바닥으로 막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보좌관 중에서는 이놈 말고 다른 놈은 남자랑 자는 걸 그렇게 즐기지 않아서요. 아니면 우리 사절단 중에 혹시 통역사님이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면 얘기해 볼게요. 누가 좋을 것 같으세요?”
“예? 아니요, 그분이면 좋을 것 같습,”
「응, 그래, 호웅아. 어, 맞아. 통역사님. 네가 좋겠대.」
이번에야말로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라기보다 의자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전달되는 말의 생략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와 봐. 응, 상아 님 응접실.」
억?!
유현진이 이 급격한 흐름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는 사이에 미사담의 보좌관이 정혜궁 응접실로 들어왔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 제상아에게 사람을 구해 내라고 요구한 지 고작 이십여 분 만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무덤덤하게 인사하는 그 호웅이라는 송갈의 보좌관에게 유현진도 마주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송갈의 사절단이 온 뒤로 공적인 자리에는 줄곧 함께 다니며 시간을 보냈던 터라 이제 제법 친근하게 지내고는 있었지만, 이런 입장에서 떡하니 마주치니 거북했다. 여태 이야기도 잘 나누고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었는데, 말이 잘 안 나온다.
반면 이 보좌관은 아주 선뜻했다. 잘 모르는 사람과의 잠자리가 그렇게 거북하거나 대수로울 일은 아니라는 듯, 혹은 상관의 지시를 받은 일이니 업무의 연장이기라도 하다는 듯 평연한 기색이다.
「호웅아, 통역사님이 좀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남들에게는 비밀로 하룻밤만 깔끔하게 놀고 말 사람을 찾으시거든.」
호웅은 썩 내키지도, 안 내키지도 않는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예, 뭐 저는 괜찮기는 합니다만……, 통역사님은 괜찮으십니까?」
「――예.」
대답하기 직전의 1초 동안 온갖 갈등과 잡생각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지만, 유현진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떠올리곤 대답했다. 호웅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그렇게 하지요. 언제 하시겠습니까?」
부창부수만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이쪽도 그 상관에 그 부하다. 돌직구에 쾌속질주 성향이, 둘이 아주 죽이 잘 맞겠다.
「예? 아. 어. 그, 내……일? 아니면 모레나, 글피……, 아니면 그글피…….」
너 그래 갖고 정말 하긴 하겠다는 거니? 하고 제상아가 한심스럽게 쳐다보았지만, 이 거침없는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유현진은 당황해서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글피가 좋을 것 같네요. 그날 거루가 제식을 올리러 가거든요. 옆방이라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옆방에도 아무도 없는 게 더 마음 편하실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면, 따로 장소를 잡아 만나는 것보다는 통역사님께서 제 숙소로 오시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일 테고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호웅이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유현진은 망연히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송갈 사절단 중에서도 왕자와 그 보좌관의 숙소는 따로 마련되어 더욱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는 데다 통역사라면 별 의심을 사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일사천리로 상대와 날짜와 장소가 결정되었다. 아무 문제도 불만도 없는 매끄러운 진행이었다.
그럼에도 유현진은 왠지 마음이 턱 하니 가라앉으며 힘이 빠져서 의자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런 유현진을 어딘지 좀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보던 호웅이 물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잠자리는 처음이신 거죠?」
「예? 예.」
「그럼 좀 힘드실 겁니다. 아플 수도 있고요.」
「많이 아픕니까?」
「아무래도, 평소에 한 번도 삽입하는 용도로는 써 본 적이 없는 기관을 쓰는 거니까요.」
호웅의 이 무미건조한 대응이 그나마 구원이었다. 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차라리 덜 민망하다.
「아픈 건 싫은데……, 안 아프고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글쎄요, 근육 이완제를 쓰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후처리가 번거로워서 썩 권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뭇 사무적인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미사담과 제상아는 그새 옆에서 사이좋게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차는 맛이 어떠네, 저번 차는 맛이 어땠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호웅과 유현진의 대화는 다 듣고 있었는지, 미사담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그 신성가호라는 게, 요는 육체적인 관계를 맺기만 하면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리고 통역사님은 신성가호를 깨뜨기리만 하면 되고요. 그럼, 통역사님이 넣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예……?」
천진하게 제안하는 미사담의 말을 일순 알아듣지 못해 유현진이 되묻자, 미사담은 한층 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타인과 몸만 섞으면 되는 거잖아요? 그럼 통역사님이 박히는 입장이 아닌, 박는 입장이 돼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하면 아프지도 않을 테고.」
위험한 단어를 천진난만하게 입에 담는 미사담의 말에 잠시 아연해졌던 유현진이 ‘아, 그런가……?’라고 멍하니 생각할 때, 호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전 안 됩니다. 저는 애초에 그쪽 포지션이 아니기도 하고, 또 타국에서 업무 중인 상황에서는 컨디션 관리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까요.」
「음. 하지만 박는 입장이라면 상대를 굳이 남자 중에서 택할 이유는 없겠네요. 여자라면 훨씬 선택의 폭도 넓어질 테고.」
미사담의 산뜻한 말은,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왕족쯤 되시는 분이시니 어휘 선택을 좀 다르게 해 줬으면 싶었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이고.
“그러고 보니 그러네……. 굳이 상대가 남자일 필요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유현진에게, 차를 호로록거리던 제상아가 “그런데,” 하고 물었다.
“너와의 일회성 잠자리에 동의를 하되,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비밀 지켜 줄 만한, 절대로 뒤탈이 없을, 아는 여자 있어?”
“…….”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거의 반평생을 신관으로 살아온 유현진은 알고 지내는 여자 자체도 거의 없었을뿐더러, 심지어 저런 조건까지 붙어 버리면 그 수는 0에 한없이 가까이 수렴했다.
넋을 놓고 껌벅껌벅 제상아를 쳐다보던 유현진은 그녀가 별안간 눈살을 찌푸리며 “나 쳐다보지 마. 난 절대 안 할 거니까.”라고 말하는 바람에 단숨에 발끈하고 말았다.
“야, 나도 싫어! 네가 무슨 여자야?!”
“이런 무엄한 놈을 보았나……? 너 현 총독만 사람을 한천으로 보내 버릴 수 있는 줄 알아?”
새침하게 눈을 부라리는 제상아에게 곧바로 “사죄드리옵니다, 공주 마마.” 하고 꼬리를 만 유현진은, 잠시 골머리를 끙끙 앓으며 고민을 해 보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파도…… 해 보겠습니다.」
죽지야 않겠지. 게다가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다.
굳게 마음먹은 유현진이 호웅에게 단호하게 말하자, 호웅은 「좋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미사담이 오, 축하드립니다, 하고 박수 치는 시늉을 하는데, 무슨 일생일대의 협상이라도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때 문득, 그린 듯한 웃음을 환하게 짓고서 박수를 쳐 주던 미사담이 “그런데 말입니다.” 하고 진지한 기색으로 유현진에게 말했다.
“정말로 괜찮으신 게 맞겠죠?”
“예. 결심했습니다.”
“통역사님 측 결심도 그렇지만, 현 총독 측도 정말로 괜찮은 거겠죠?”
유현진은 멈칫했다. 미사담이 말하는 의미를 알 수 없어 잠시 그를 마주 보다가 열없이 말했다.
“현 총독님 얘기가 여기서 나올 이유가 없는데요. 그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이런 일을 하는 건데…….”
“어찌 되었든 통역사님은 현재 공식적으로 현 총독님 파트너이고,”
“정확히는 파트너인 양 눈속임하는 상대이지요.”
시무룩하게 정정하는 유현진에게 미사담은 어딘지 석연찮은 듯 “그렇긴 합니다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 꼬이면 좀 골치 아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말이죠.”
“왜요?”
물어본 것은 제상아였다. 미사담은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리며 대꾸했다.
“현 총독님, 생각보다 더 무섭더라고요.”
“현 총독이 무서운 분인 건 맞는데……, 갑자기 왜요?”
제상아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사담은 찻잔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는 눈치이다가 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밤에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받았을 때 말이죠…….”
그날 미사담과 현태오는 같은 차를 타고 있었다.
그날, 미사담은 궁에서 몇 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장소에서, 제양에서 송갈인 상인협회의 협회장을 맡고 있는 친한 친구와의 개인적인 약속을, 고작해야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의 일정으로, 당일 저녁에 아주 급작스럽게 잡은 바 있었다.
최측근들에게만 알린 비공식 일정이었고, 친밀한 상대와 돌연히 약속을 잡아 가까운 곳에서 잠깐만 만나는 안전한 일정이므로 보좌관도 대동하지 않고 경호원 둘만 데리고 외출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받았다.
외진 귀갓길의 앞을 대형차로 가로막고, 막혀서 멈춰 선 미사담의 차를 뒤에서 또 다른 차가 들이받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공격해 왔다.
송갈의 왕자가 제양을 방문 중일 때에 해를 입으면 이득을 볼 누군가가 은밀히 정보를 알아내어 오차 없이 실행한 그 습격에는, 그러나 한 가지 예상치 못한 패착이 있었다.
그 차 안에는 미사담과 경호원 둘, 그리고 현태오가 함께 타고 있었다.
마치 정확히 그 시각에 그 장소에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차가 들이받힘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귀청을 찢는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당황한 그들이 미처 총을 제대로 겨누기도 전에, 이미 총을 꺼내어 들고 있던 현태오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그들의 머리가 퍽, 퍽, 퍽,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그러던 차, 그중 하나가 틈을 노려 미사담에게 달려들었다.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던 듯 직접 달려든 괴한이 코앞으로 닥쳐와 미사담이 품에 넣어 뒀던 총을 막 꺼내었을 때,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지는가 싶었다.
어느새 미사담의 뒤로 다가온 현태오가 괴한의 입에 총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각도를 올리더니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퍼억, 놈의 머리가 터지는 순간 커다란 손이 미사담의 얼굴 앞으로 나와 후두둑 튀는 피와 살점을 가로막았다.
‘마마께서 굳이 손쓰실 것 없습니다.’
여상하게 말하는 서늘한 목소리에는 아무런 불안도, 동요도 없이, 따분하게까지 들리는 여유만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람들은 하나씩 죽어 나갔고, 삽시에 바닥에 널리는 시체들을 둘러보던 미사담이 낯을 찡그렸다.
‘저들을 모두 죽이는 겁니까?’
‘입은 하나만 남겨 두면 충분합니다.’
느른하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눈으로 훑던 현태오가 한 곳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그들을 가로막았던 대형차에 막 올라타려 하는 남자가 있었다.
처음부터 직접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던 자다. 이 무리의 책임을 지고 있을 만한 자가 누구인지 순식간에 가려낸 현태오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히 심장 바로 아래를 꿰뚫린 남자가 쓰러졌다. 현태오가 성큼성큼 그리로 다가가자 남자는 현태오에게 총구를 겨누었으나, 현태오가 다시 내지른 총탄에 손을 맞곤 총을 떨구었다. 그러나 현태오도 그것이 마지막 총탄이었던 듯 두어 번 방아쇠를 철걱거리더니 도로 집어넣었다.
남자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발악이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고, 그 남자의 손목째 움켜쥔 현태오는 그대로 남자의 허벅지를 찔렀다.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마는 남자를 향해 허리를 굽히더니, 그의 발목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입에는 발이 달리면 안 되지.’
느릿하고 아무렇지 않은 중얼거림이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뚜둑――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이렌 소리가 지척에서 멎었다.
그때까지도 들리던 총성 따위는 곧 진압되었고, 상황도 금세 마무리되었다.
이쪽에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고, 상대 쪽은 현태오가 두 발목을 부러뜨린 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즉사했다.
“차라리 현 총독이 사람을 죽이면서 즐거워하거나 기뻐했다면 외려 덜 무서웠을 거예요.”
미사담은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치는지 등을 움츠렸다.
“그 과정 속에서 내내 아무런 동요가 없더라고요. 두려워하거나 긴장하는 것도 없고, 심지어는 화내거나 흥분하지도 않았어요. 냉정하고 담담한 태도가 티끌만큼도 흐트러지지 않는데…….”
어휴, 하고 미사담이 한숨을 내쉬자, 제상아가 나름대로 두둔해 줄 요량인지 말을 건넸다.
“그날 일이야 모두 현 총독의 예상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정말로 무서웠다고요. 절대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남자였어요.”
제양이랑 전쟁을 하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일 먼저 없애 버려야 하는 남자…… 하고 중얼거리다가 제상아가 “뭐라고 하셨죠?”라고 스산하게 말하자 당장 “아닙니다! 아니죠! 길이길이 사이좋게 지내야죠!”라고 빠릿하게 외치는 미사담이었다.
“그 사로잡힌 남자는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러 사람을 보냈는데, 안보청에 구금된 상태로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하게 막혀 있더군요. 현 총독이 그자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긴 한 모양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요.”
“이쪽에서 모른다는 건 저쪽에서도 모른다는 뜻이니, 기다려 봐요. 현 총독은 유능한 사람이니.”
고개를 기울이는 미사담에게 제상아가 말했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호웅이 낯을 찌푸렸다.
“확실히 유능한 남자이긴 합니다. 어째서 그 남자가 나선 전선에서는 우리 송갈이 번번이 패하고 돌아왔는지 알 것도 같아요.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능성을 높이고 상대의 반응을 유도해 실현시킨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내는 것이다. 매우 손쉽게. 분명히 놀라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방식이 위험합니다. 애초에 이번 일도, 마마를 미끼로 삼는 발상부터가 지나치게 대담하고, 또 참람한 일이 아닙니까.”
“아니, 그거야 뭐 설마 죽기야 하겠냐 싶어서 협력하긴 했는데,”
태평하게 대꾸하는 미사담도 은근히 보통 담력은 아니었다. 호웅은 뭐라고 욕이라도 하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현 총독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그는 유능하기도 하거니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인간적으로 좋아지지 않는 건 둘째치고.”
제상아가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말했다. 현태오가 어디가 어때서, 라는 항의의 말을 꾹 삼켜 버린 유현진을 흘끔 쳐다보는 게, 유현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빤히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예. 그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 남자의 화를 돋울 만한 일은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아서――.”
미사담이 말꼬리를 늘이며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지금 이렇게 통역사님의 사정에 협조해 드리는 게, 뭔가 동티라도 날 만한 일은 아닌가 괜한 노파심이 좀 드네요.”
진지한 낯으로 유현진을 바라보며 말하는 미사담에게 “기껏 인물, 날짜, 장소 다 받아 놓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하고 제상아가 가볍게 핀잔을 준다.
반듯하게 앉아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현태오 씨에게 이 사실을 말할 일은 없고, 또,”
일순 속이 뜨끔하게 아파서 말을 멈추었던 유현진이 이어 말했다.
“혹여 뭐가 잘못돼서 들통이 난들, 제가 현태오 씨와 잤었다고 거짓말을 했었던 것 말고는 문제가 될 일도 없으니까, ……저는 그의 진짜 파트너도 아니고 두 달 지나면 다시는 얼굴 볼 일도 없게 될 사람이라 이게 불륜도 부정도 아니니까, 다른 분들에게 피해가 가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멀리로 치워 버리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유현진은 순순히 그의 바람을 들어줄 터였다.
그의 뜻대로 잠자코 저 먼 곳으로 가 줄 거고, 결론적으로는 현태오가 원하는 대로 될 테니까, 잘못될 일도 없다.
설령 현태오와 잤었다는 거짓말이 들킨들, 애초에 그는 그 사실 때문에 제상아와 헤어졌던 것도 아니고 어차피 유현진이 얌전히 떠나 주면 그만 아닌가.
잘못될 일이라고 해 봐야, 생일 전에 이 꿍꿍이가 들통이 나면 현태오와 못 자게 되어서 유현진이 아쉬워질 일 정도다.
“아니, 제가 염려하는 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게 아니라 혹여 통역사님이 위태로워지지는 않을까 해서 드린 말씀이지만…….”
저나 상아 님이야 이 신분에 무슨 해를 입겠습니까, 호웅이야 뭐 보시다시피 멍석말이를 당해도 거뜬할 풍채고, 라며 미사담이 호쾌하게 웃었다. (호웅은 또다시 왕자에게 눈으로 욕을 하는 듯했지만 입은 다물고 있었다.)
“그러시다면야 원하시는 대로.”
미사담은 더 이상은 나서지 않겠다는 듯 말을 맺었다.
그렇게, 유현진 일생일대의 협상은 끝나고, 실행만이 남게 되었다.
*
그리고 바로 그 결행 당일.
유현진은 큼직한 상자가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호웅과 마주 앉아 있었다.
이미 7시가 넘어 날은 저물어 있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그렇고 그런 목적으로 남남끼리 한방에 모여 앉아도 되는 걸까……, 매우 고루한 생각을 하고 있는 유현진이었다.
「방이 좋네요…….」
당장에라도 도로 나가 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유현진은 방을 둘러보며 인사를 건넸다.
궁궐에서 도보로 10여 분가량의 거리에 있는 영빈관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대접하는 귀한 방문객이 있을 때에만 이용하는 이곳에 유현진이 들어와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건물 외부에는 제양의 경비병들이, 건물 내부에는 송갈의 호위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송갈 사절단을 위해 고용된 통역사인 유현진조차도 안으로 들어올 때 세 차례나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영빈관 내부는 과하게 사치스럽지는 않되 널찍한 공간에 잘 갖춰져 있는 가구며 물건들마다 다 좋은 것들이라, 과연 귀빈을 대접하는 곳이라 할 만했다.
복도의 제일 안쪽이 미사담이 쓰는 방이라고 하고, 두 보좌관들의 방은 왕자의 방을 사이에 두고 복도의 양옆에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미사담은 제상아와 환담을 나누느라 아주 늦게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고―짐작건대 유현진을 배려해 주는 듯싶었다―, 다른 보좌관 거루도 오늘이 삼람교의 제식이라 자정 넘어서야 온다고 했다.
심지어는 거의 밤마다 유현진의 집에 들르곤 하는 현태오도 이날 밤에는 늦게까지 볼일이 있어 들르지 못할 거라고 했으니, 그야말로 하나람님이 보우해 주시는 듯 모든 상황이 다 받쳐 주는 좋은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고 싶다……, 이대로 그냥 가 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유현진은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고 있었다.
그런 반면 호웅은 별반 대수롭지도 않은 듯 무덤덤한 기색이었다.
「예, 뭐. 그런데 이건 뭔가요?」
유현진이 가져온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어본 그는, 유현진이 열어 보라고 손짓으로 권하자 뚜껑을 열었다.
그것은 본인 왈 착하고 배려심 있는 좋은 친구인 제상아가 전날 유현진을 불러 손수 챙겨 준 것이었고, 받은 자리에서 열어 봤던 유현진은 이미 그 내용물을 알고 있었는데,
「콘돔(심지어 사이즈별로). 오일. 젤. 근육 이완제. 진정제. ……진정제? 흥분제가 아니라요?」
상자에서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며 조금 당황한 듯이 품목을 읊조리던 호웅이 물었다.
「저한텐 그게 더 필요할 거라고 하면서 주더라구요…….」
「아, 현명하게 판단하신 것 같네요.」
호웅은 유현진의 낯빛을 보고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나머지 물건들을 꺼냈다. 하다가 정 안 될 것 같으면 합의하에 잘 써 보라면서 챙겨 준 발기 부전 치료제에, 최음제, 그리고 혹시나 특별한 즐거움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했다며 몇 가지 수상쩍은 장난감들까지. 상자 안에는 유현진이 상상할 수 있는―혹은 상상을 뛰어넘은―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우와…….」
건전지까지 다 완비되어 있는 장난감에 위이잉―― 하고 스위치까지 켜 보며 호웅이 감탄했다.
「역시 상아 님은 섬세하시네요. 우리 마마는 그냥 좋은 시간 보내라는 말만 하고 그만이셨는데.」
「섬세……. 저는 호웅 님네 그 마마가 훨씬 배려심 깊고 섬세한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글쎄요, 뭐 가끔은 그럴 수도 있겠지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한 호웅은 상자를 통째로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상자에서 콘돔과 오일만 따로 꺼내어 옆에 두는 걸 보니 갑자기 현실감이 닥쳐와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먼저 씻으실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씻을까요?」라고 건네는 말을 듣자 현실감이 더욱 짙어지다 못해 비현실 같을 정도다.
「아니, 저는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씻고 왔습니다.」
「예. 그럼 전 잠시 씻고 나오겠습니다. 편하게 계세요.」
그렇게 말하며 호웅이 욕실로 들어간 뒤에야 어지럽던 머리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유현진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스스로가 긴장해 있다는 걸 알겠다.
아무래도 상아가 현명한 게 맞는 것 같아.
유현진은 상자에서 진정제를 꺼내어 한 알 삼켰다. 호웅이 욕실에서 나올 때쯤에는 약효가 돌기를 기도하며.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은 그는 문득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습고 어이없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현태오에게 복수를―그를 덮쳐 버리는 복수라는 허울만 썼을 뿐 실상은 까놓고 보면 그렇게라도 그를 한번 가져 보려는 얄팍한 욕구를― 이루어야 할까.
「…….」
해야겠다.
다시 생각해도, 하고 싶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그를 ‘가졌다’는 느낌을 받아 보고 싶었다. 평생에 단 한 번 있을 만족감을.
이런 상황에서는 우스운 일이지만, 불현듯 현태오를 보고 싶어졌다. 바로 오늘 새벽에 그를 보았던 때는 ‘오늘만큼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생각했었음에도.
그래, 새벽에 어쩐지 서늘한 기척이 느껴져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틀이 부옇게 덮인 걸 보니 간밤에 눈이 온 듯했다.
다시 침대에 파고들려다가 문득 거실 쪽에서 불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 깨달은 유현진은 주섬주섬 실내복을 껴입고 밖으로 나갔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던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달캉, 그를 보자마자 간밤에 머릿속을 꽉 채웠던 사념들이 떠오르며, 잠결에 잊고 있던 고뇌들이 밀려왔다.
오늘이었지. 송갈 보좌관의 도움을 받기로 했던 게 오늘 밤이었다. 오늘만큼은 저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왜 하필 이런 날에 새벽부터 찾아와 마음 심란하게 만드는 걸까.
눈이 옅게 깔린 정원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현태오는 이날따라 쓸데없이 잘생겨 보여서 분했다. 서운하고 원망스러운데 미워지지는 않아서 억울했다.
‘이 새벽에 웬일이십니까.’
유현진은 최대한 심통스럽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태오는 신문을 접으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고, 유현진은 잠자코 옆에 가 앉았다.
‘오늘은 밤에 일이 있어서 못 들릅니다. 그래서 얼굴 보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안 나서요.’
마침 잘된 일이다. 그러잖아도 유현진 역시 오늘 밤엔 볼일 있어서 집에 늦게 올 테니 들르지 마시려고 말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새벽에. 하필 이런 날.
‘오늘도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겁니까?’
‘예, 오늘은 아무래도 다 마치고 나면 자정도 한참 넘을 것 같아서요. 저녁에 쥐약을 좀 챙겨서 박쥐를 구제하려면.’
‘……? 박쥐요?’
뜬금없이? 하고 물어보았지만 때마침 현태오는 전화에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저 서늘한 칼날 같은 표정은 일할 때 늘 습관처럼 떠올리는 표정이다. 이 새벽부터 일과 관련된 연락이 오는 모양이다.
현태오는 요즘 몹시 바빴다.
현태오뿐 아니라 정재계를 가리지 않고 죄다 벌집을 들쑤신 듯 뒤집어져 있었다.
요즘 매체들은 연일 기삿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송갈과의 밀약으로 부정한 이익을 거둔 인사들에 대한 기사가 터진 이래, 거기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반송갈 단체의 시위대와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극단론자들이 따로 나와 폭력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산상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얼마 전에는 사절단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현태오가―이 또한 실질적인 목표는 송갈 책임자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으며, 또 다른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는 소문도 흉흉하게 번졌다.
그러다 보니 수도의 치안도 일시적으로 불안해져 있었는데, 그에 따라 송갈 사절단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현태오의 일도 크게 늘어나 최근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 틈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요.’
‘바쁩니다. 그러잖아도 십 분 뒤면 나가 봐야 해서 오늘은 얼굴을 못 보나 싶었는데, 다행히 떠나기 전에 깨셨네요.’
유현진은 이미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는 현태오를 보고 여기서 바로 출근하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아마도 주차장에서는 진문성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요즘은 전반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사회의 정세도 그렇거니와, 송갈 사절단과 제상아도 바쁘기 그지없었다. 특히나 혼약이 공표된 이후로는 미사담과 제상아를 방문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늘어, 유현진은 하루 종일 통역을 하느라 목이 쉴 지경이었다.
‘언제 깨실지 몰라서 제 것만 끓였습니다.’
현태오는 제가 마시던 찻잔을 유현진에게 건네주었다. 유현진이 한 모금 마시고 돌려주자 아무렇지 않게 받아서 저도 마신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접시에 녹두양갱이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다.
‘오다 주웠습니다. 많이 달지는 않지만, 아직 아무것도 안 드셨으니 한 입만 드세요.’
‘…….’
이 눈 오는 새벽에 어느 착한 양반이 유현진이 좋아하는 걸 일부러 길가에 떨어뜨려 줬는지, 참 고맙기도 하다.
유현진은 양갱을 집어 통째로 입에 넣어 버리곤 보란 듯이 현태오를 마주 보며 우물거렸다. 현태오는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다시 찻잔을 건네주었다. 유현진은 그것도 사양 않고 받아 들어 훌훌 마셔 버렸다.
‘맛있네요. 또 주워다 주세요.’
야무지게 먹어 치우고 말하는 유현진을 빤히 지켜보던 현태오가 손을 뻗어 유현진의 뺨을 움켜쥐었다 놓았다.
‘왜 심통이 났습니까?’
‘그럴 리가요.’
‘났는데.’
‘아닙니다.’
유현진은 정색하며 말했고, 현태오는 그런 유현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는데 희미한 헛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얕은 눈이 쌓여 있는 정원을 내다보던 유현진은 잠시 망설이다 조그맣게 물었다.
‘평항에는 눈이 거의 안 온다고 들었습니다.’
‘예. 기후가 온난해서 겨울에도 온도가 늘 영상이거든요. 80년 전에 눈이 왔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그럼 평항에 돌아가시면 이렇게 눈을 보실 일은 없겠네요.’
그리고 자신 역시 더 이상은 볼 수 없겠지. 비산도는 훨씬 더 남쪽에 있으니까.
현태오의 시선을 느끼며 유현진은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음이 졸아들었다. 평항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에게 소리 없이 요구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해 줘. 더 이상 속이지 말고 말해 줘. 당신은 혼자 그곳으로 갈 거고, 나는 혼자 더 먼 곳으로 갈 거라고. 나를 진실되게 대해 줘.
그러나 결국 이번에도 현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물어봤을 뿐이다.
‘눈 좋아하십니까?’
‘예. 일 년에 서너 번이나 볼까 말까 하니까……. 볼 때마다 신기해요. 예쁘기도 하고.’
제양의 수도에도 눈이 자주 오지는 않는다. 와도 이렇게 밤새 조금 깔렸다가 금방 녹아 버렸다.
‘조금 한가해지면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하루쯤 쉬러 갔다 오지요.’
유현진은 현태오의 말을 들으며 정원의 눈 덮인 바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고개도 애매하게 떨군다.
결국 말하지 않는구나.
나도 속인 주제에. 나도 말하지 않은 게 있는 주제에 상대의 거짓을 탓할 수는 없다. 거짓 위에 쌓여 있는 관계이니 금세 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싫다는 겁니까, 좋다는 겁니까?’
‘……가요.’
가야지. 한순간이라도 놓칠 수 없다. 떠나기 전까지는 한순간이라도 더 현태오의 시간을 차지할 것이다. 빼앗을 수 있는 만큼은 다 빼앗고 가야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유현진은 심호흡을 하며 다짐했다.
그때 현태오의 전화가 다시 신호음을 냈고, 현태오는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 ……예.’
벌써 가는구나.
십 분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하면서 시계를 쳐다보니 칼같이 딱 십 분 지났다. 덤도 없이 야박하게 일 분도 더 안 머물다니.
조금 더 일찍 깨어났더라면 좋았을 걸, 유현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재킷을 집어 들던 현태오가 유현진을 보더니 이상한 얼굴을 했다. 묵묵히 들여다보는 그를 유현진이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
‘유현진 씨. 그런데 지금 본인이 어떤 얼굴 하고 있는지 압니까?’
‘? ……제가 뭘요.’
눈에 힘을 주고 정색하며 되묻는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별안간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서늘하던 눈매가 기분 좋게 휘어져 그 눈가에 시선을 빼앗긴 순간, 입술이 닿았다.
장난스럽게, 그러나 조금 세게 입술을 깨물며 유현진의 입안을 혀로 진득하게 탐색하던 현태오는 다시금 전화가 삑삑거리는 소리를 듣곤 혀를 차며 떨어졌다. 무어라 욕설을 중얼거린 그는 엄지로 유현진의 젖은 입술을 닦았다.
‘단것 좀 적당히 먹어요. 이렇게 단맛이 풀풀 나서야 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계를 확인한 현태오는 걸음을 돌렸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유현진은 그를 덥석 붙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붙잡아서 물어보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다.
왜 그랬는지.
내가 못 미더웠는지.
남자와 잠자리를 해 파혼을 해 버린―형국이 된― 이 상황이 난감하니 조용히 먼 곳으로 떠나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난리라도 치면서 물고 늘어질 것 같았는지.
그럴 거면 왜 이렇게까지 더 마음 빼앗기게 만들었는지.
그러나 결국은 그를 붙잡지도 못했고, 말하지도 못했다.
“――.”
넋 놓고 새벽의 기억을 떠올리던 유현진은 또 가슴이 뜨끔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그때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후다닥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데서 질질 짤 수는 없었다.
호웅이 젖은 머리를 닦으며 다가왔다. 얇은 면 티셔츠에 넉넉한 반바지라 차림새가 당장 민망하지는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유현진은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은 현태오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한잔하실래요?」
유리장에서 술병을 꺼내 온 호웅은 소파에 앉았다. 어물거리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유현진은 작은 잔에 따라 건네주는 술을 받아들었다. 단숨에 마시자 호웅이 조금 놀란 듯했다.
「이거 독한 술이에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저 술 잘 마시는 편입니다.」
그러시다면, 하고 새로 한 잔을 따라 준다.
진정제에 술까지 먹어도 되나 싶었지만, 염려는 밀어 두었다. 그나마 약효가 돈 덕분인지 독하다는 술기운이 금방 돌았는지, 곤두서 있던 신경이 좀 느슨해졌다.
「호웅 님은 미사담 님과는 오래 알고 지내셨습니까?」
뭐든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에 유현진은 가장 무난할 법한 화제를 꺼냈다.
「아, 예. 아주 오래 알았죠. 유아 학습원 때부터 함께 자라다시피 했으니까요. 거루도 같이요.」
호웅이 여상하게 대답하는 말을 듣고서야 유현진은 미사담과 그의 보좌관들이 오래된 또래 친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간 그들과 거의 매일을 마주쳤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정말 오래 알고 지내셨네요. 저랑 상, 정혜궁마마도 오래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세 분께는 대지 못하겠는데요. 그 정도로 오래된 관계면 서로 거의 모르는 게 없으시겠습니다.」
「아……, 그런 줄 알았었는데……, 뭐, 글쎄요. 사람 일이야 알 수 없지요. 남의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호웅은 문득 씁쓸한 낯을 떠올리는가 싶더니 굳이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지 애매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곤 화제를 바꾸듯 유현진에게 되물었다.
「현진 님은 어떠십니까? 상아 님과 아주 친하신 것 같던데요.」
「예. 중등학교에 가기 전부터 알았으니까요. 그때 제가 현가에――현 총독님의 본가에 얹혀 지내고 있었는데, 정혜궁마마께서 현 총독님과 정혼한 사이였던지라 가끔 현가에 들르시곤 하셨거든요. 그때 마마께서 저를 가까이 해 주셔서 아직까지 이렇게 지내 오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하며 그 시절을 떠올린 유현진은 문득 가슴이 저렸다.
그렇다. 그때 현태오는 제상아의 정혼자였다. 원래부터 유현진이 바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벼운 거짓말로 이렇게까지 흘러온 게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성애자를 좋아하면 힘들죠.」
유현진의 얼굴에 속마음이 드러났는지, 호웅이 위로라도 하듯 차분히 말했다.
「송갈도, 동성 관계에 자유롭고 동성애자가 흔하다곤 해도 모두가 동성애자인 건 아니니까요.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반하는 경우도, 그 반대 경우도 종종 있어요.」
여상하게 말하며 술을 넘기는 그의 표정이 어딘지 미묘해서, 유현진은 자신도 술을 넘기며 묻고 말았다.
「호웅 님도 그랬습니까?」
「예, 저도 뭐 한 번쯤은요. 초등학교 때 체력단련원에서 만난 뒤로 계속 친하게 지낸 오랜 친구였어요. 십오 년을 혼자 속으로 삭였는데, 그러다 보니까 내 속이 썩더라고요. 그래서 인연 끊었습니다. 아예 안 봐야 내가 살 것 같아서.」
유현진은 담담하게 술을 따라 주는 호웅을 바라보다 다시 물었다.
「안 보니까 살 것 같던가요?」
「처음엔 안 보니까 죽을 것 같았어요. 당장에라도 보러 가고 싶어서 하룻밤에도 열두 번이나 대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어요. 안 되겠다 싶어서 자원해서 전장에 나가서 한 일 년 있다가 귀환했지요. 그때쯤엔 그래도 좀 정리가 되어서 계속 안 볼 수 있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서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까 잘한 일이더라고요.」
「잘한 일이요?」
「아예 안 봐야겠다고 결정한 거요. 만일 그대로 계속 감정을 질질 끌면서 보고 있었더라면, 결국은 말라서 죽었을걸요.」
유현진은 물끄러미 호웅을 보았다.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천천히 말라 죽어 왔는지도 몰랐다.
순간 가슴이 욱하고 뜨거워지며 눈가까지 뜨거워질 것 같았지만, 유현진은 단숨에 술을 삼켜 그 뜨거움을 달랬다.
울면 안 돼. 여기서 울면 더 금방 말라비틀어지고 말 거다.
적어도 비산도에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두 달만이라도 멀쩡한 얼굴로 현태오를 보려면 말라도 안 마르는 척해야 한다. 마지막 시간이나마 한순간이라도 온전히 다 차지하려면.
「그래서 현진 님을 보고 있자니 그때의 제가 생각나서 좀 안타깝기도 하고……, 이런 거라도 좀 도와드려야겠다 싶기도 하고……, 원래라면 이런 일 안 했을 거예요. 현진 님 별로 제 취향 아니거든요.」
「…….」
다행이다. 뜨거워지던 눈가가 좀 가라앉았다. 전혀 관심 없는 상대에게라도, 자기 취향 아니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좀 싸해지긴 하는구나.
「호웅 님도 제 취향은 아닙니다.」
정색하고 대답하는 유현진에게 호웅은 예, 하고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평항 총독이랑은 아주 조금도 비슷한 데가 없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비슷하면 외려 큰일이라서 안 비슷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지금 제 앞에서 현태오 씨 까시는 겁니까?」
「객관적인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지요.」
짧은 정적 속에서 무표정하게 눈싸움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호웅이 문득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현진 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현진 님은 좋아하는 사람을 안아 볼 기회라도 있으니까요. 모쪼록 성공하시길 빕니다.」
그렇게 말하며 호웅이 술잔을 내밀었다. 유현진은 묵묵히 있다가 거기에 제 술잔을 갖다 부딪치며 「성공할 수 있길.」 하고 조그맣게 읊조렸다.
「자, 술은 이 정도로 해 두죠. 긴장도 그럭저럭 풀린 것 같고, 술을 너무 마시면 잘 안 서거든요.」
그때, 호웅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유현진은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본다.
「잘 안 선다고요?」
「너무 마시면 안 서죠.」
무슨 당연한 소리냐는 듯, 생뚱하게 묻는 유현진을 보고 호웅이 되레 생뚱맞다는 낯으로 자신의 고간을 툭 두드렸다.
아닌데. 현태오는 분명히 우황백주를 궤짝으로 마셔서 쓰러지고도, 만지니까 섰…….
미심스럽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현진은, 그러나, 그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유현진의 손에서 술잔을 슬쩍 빼앗아 내려놓은 호웅은, 「이런 건 오래 끌면 오히려 더 민망해져요.」 하고 속삭이더니 유현진에게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얼굴 위로 그늘이 지는가 싶더니, 자연스럽게 다가온 입술이 입술 위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유현진의 표정을 가늠해 보던 호웅은 미동도 없이 눈만 껌벅이는 유현진을 살피곤 다시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유현진의 몸이 움찔했다.
응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얼어 있는 유현진에게 두 번, 세 번, 느리고 끈질기게 호웅이 입술을 부딪쳤다. 유현진이 꼼짝하지 않는 것도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고 끈기 있는 접촉이 거듭되었다.
커다란 손이 가만히 유현진의 등을 감싸더니 끌어안았다. 바싹 붙는 체온을 선명하게 느낀 유현진이 무심결에 「아,」 하고 곤혹스럽게 입을 뗀 순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
유현진은 반사적으로 호웅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밀어내려던 손을 가까스로 멈추었다. 안심시키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입술 안쪽을 쓰다듬는 감각에, 지금의 상황을 새삼스럽게 떠올린 것이다.
유현진이 가만히 멈추어 있자 호웅은 천천히 혀를 깊이 들이밀었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에도 차차 힘이 들어가, 상냥하기만 하던 손길이 조금씩 농밀해졌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진행되는 거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되 몸으로는 익히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유현진은 옷자락을 부둥켜 쥔 손에만 더더욱 힘을 주었다.
숨이 가빠졌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머릿속은 숨 쉬는 방법마저 까먹은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단 하나 불쑥 머릿속을 차지한 느낌은,
다르다.
이렇게나 다르고 낯설다니.
입맞춤이라면 현태오와 이미 헤아릴 수도 없이 나누었다. 유현진의 집을 찾았다가 돌아갈 때엔 언제나 빠뜨리지 않고 입술을 겹쳤고, 언제부터인가는 별다른 일 없이도 눈이 마주치면 뜬금없이 입술을 맞대기도 했다.
가볍게, 깊게, 짧게, 길게.
입술을 겹칠 때마다 다른 느낌이었지만, 심장은 언제나 미친 듯이 뛰었다. 가슴속이 꽉 찬 듯 더워지고 머릿속이 달게 녹았다.
그러나,
지금의 이 부드럽고 다정한 접촉은 완전히 달랐다.
입술의 감촉. 체온. 체취, 숨소리까지.
모든 것에서.
이 사람은 현태오가 아니었다.
「――.」
별안간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긴장이 풀렸다.
정확히는,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어둑하고 우울한 감정이 진흙처럼 가슴속에 밀려들어, 호웅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던 손마저 놓아 버렸다.
그 느낌은 분명 호웅에게도 전해졌을 터였다. 끈기 있게 유현진의 반응을 기다리던 호웅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몸을 약간 떨어뜨렸다.
「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안 내키신다면 지금이라도 그만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아닌데――, 해야 하는데, ……잠시만요. 조금만 쉬었다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현진은 안 되겠구나, 오늘은 실패하고 말겠구나, 하고 느꼈다.
안 되는 거다. 현태오가 아니면. 가슴이 뛰지도, 체온이 오르지도, 숨이 가빠지지도 않는다.
「…….」
억울하다. 목 놓아 울고 싶어졌다.
왜 그 남자인지. 이렇게까지 막다른 곳에 와서도 왜 그 남자가 아니면 안 되겠는지. 억울하다 못해 원통할 지경이었다.
「……혹시 제가 뭘 실수했나요?」
입을 꾹 다물고 침울하게 허공을 노려보는 유현진을 보고, 긴장 좀 푸시라며 새로 따른 술잔을 내밀던 호웅이 당황한 듯이 물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제가 문제라서, 제가 문젠데――.」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을 하다 보니 더 처량하고 울고 싶어져서 유현진이 입술을 꾹 깨물던, 그때였다.
별안간.
쿵. 쿵. 쿵.
노크라고 하기엔 과격하고, 문을 부숴 버릴 것 같다고 하기엔 다소의 예의가 남아 있는 커다란 소리가 문을 두들겼다.
호웅과 유현진은 거의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몇 초쯤 서로 마주보기만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마마께서 벌써 오신 건 아닐 텐데, 하고 일어난 호웅은 유현진에게 「잠시만요.」 하고 기다리라는 시늉을 하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왠지 모르게 바깥이 어수선한 기색이었다. 몇몇 사람이 부산히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누구십니까?」
호웅이 바깥을 향해 말하며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열린 문 틈새로 번잡스러운 기척이 흘러들어왔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방에서 두세 명의 목소리와 물건들을 뒤적이는 소음 같은 것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기록물이나 저장 장치는 남김없이 수거해, 라고 멀찍이서 지시하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 유현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익숙한 목소리다, 라고 생각한 바로 그때,
“실례합니다.”
보다 가까이, 문 바로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방 안으로 뚜벅, 하고 구두 소리가 들어온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그 소리와 함께 훅 밀려들었다.
방 안으로 현태오가 들어섰다.
빈틈이라곤 없는 정장 차림, 새벽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그러나 표정만은 딴 사람인 양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를 보며 유현진은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 아연히 그를 바라보는 유현진과, 얼음 같은 무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현태오의 눈이 마주쳤다.
현태오가 빤히 유현진을 보았다. 아무 말도 없이, 거기에 있는 것이 유현진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뚫어질 듯 쳐다본다.
이윽고,
「총독 각하께서 여기에 어쩐,」
“여기서 뭐 하십니까?”
호웅이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현태오가 그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 시선은 유현진을 향하고 있었다.
“――, 현태오 씨는, 여기에 왜,”
유현진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서 더듬더듬 묻자, 유현진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현태오가 대답했다.
“이 앞방에 볼일이 있어 방문했는데 말입니다. 경비병에게서 외부 출입자 명단을 받았는데, 한 시간 전에 유현진 통역사님이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더군요. 제가 알기론 오늘 미사담 님도 이곳에 안 계시고 유현진 씨가 따로 찾아올 만한 일도 없을 텐데, 왜 여기 계신지 궁금해져서 여쭤보러 잠시 들렀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현태오는 뭔가 냄새를 맡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술 드셨습니까?”
테이블로 시선을 돌린 현태오는 술병과 술잔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그대로 잠시 멈춰 있던 그가 시선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단정하게 잘 정돈되어 있는 평범한 방이었다. 그 방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나 놓치는 것이라곤 없는 눈길로 훑어본다.
무심히 흘러가던 시선이 멎은 곳은 침대 옆의 협탁이었다.
그 위에 놓인 상자와, 옆에 따로 꺼내어 놓은 물건. 그리고 비어 있는 약 포장지.
별안간 현태오의 얼굴에서 씻은 듯 표정이 가셨다. 그리로 다가간 현태오가 그 물건들을 집어 드는 순간, 유현진도 심장이 툭 떨어졌다.
「아, 그건,」
호웅이 낯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그 물건들과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호웅의 구겨진 옷자락에 잠깐 머물렀던 시선이 호웅의 얼굴로 올라갔다.
현태오와 눈이 마주친 순간 호웅이 움찔하며 무심결에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낯에서 설핏 핏기가 가셨다.
감정이라곤 티끌 하나 드러내지 않은 현태오가 무표정하게 호웅을 보다가 천천히 유현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깜박, 깜박,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는 듯 아주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현태오가, 드디어 입력이 끝났는지 “허……?”,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비뚜름한 입매 위로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이것들은 다 뭡니까?”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상자 안에 툭 던져 넣으며 현태오가 물었다. 음색의 고저조차 없는 목소리다.
“…―.”
뭐라도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말이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입을 다물고 마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뚫어질 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깔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굳어진 얼굴로 그들을 보던 호웅이었다.
「통역사님이 아무래도 남자와 관계하는 데에 자신이 없으시다고, 뭔가 요령이나 팁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해서 함께 술이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려던 참입니다.」
“아. 이야기.”
눈동자만 돌려 호웅을 쳐다본 현태오는 다시 유현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더니 입 끝을 올렸다.
“진정제까지 먹어 가면서 해야 할 이야기가 대관절 뭔지 궁금하군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조차 멀게 들린다.
“유현진 씨. 말씀 좀 해 보시지요.”
현태오가 말하며 유현진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거대한 맹수가 발톱을 드러낸 앞발로 터벅, 하고 다가서는 것 같았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긴장된 공기가 파르르 떨린다.
「총독 각하, 통역사님과는 그저,」
위험스러워 보였는지 호웅이 둘 사이를 막듯이 다가섰다.
그를 내려다본 현태오가 가만히 그의 가슴에 손을 짚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양 가로막는가 싶던 그 손은, 그대로 거침없이 호웅을 떠밀었다.
후려갈기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힘에 떠밀린 호웅이 몇 걸음 뒤에 있던 테이블에 부딪히며 넘어졌다. 테이블도 함께 넘어가 그 위에 놓여 있던 술병과 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졌다.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요령이나 팁이라.」
현태오가 중얼거리며 호웅에게로 돌아섰다.
「무슨 요령이나 팁을 그렇게 잘 알려 주실지 궁금한데, 유현진 씨 대신 제게 알려 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남자와――파트너가 있는 사람과 놀아날 때는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뚜걱, 처음으로 호웅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다가간 현태오가 그의 고간 위에 발을 올렸다. 그 구둣발에 지그시 무게가 실린다. 그 순간 그것은 위협도 무엇도 아닌 진심이었다.
호웅의 낯빛이 변하는 것과 동시에, 넘어질 듯이 닥쳐든 유현진이 현태오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지 마십시오.”
억눌린 목소리로 다급히 그를 말리는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이 유리처럼 번들거린다.
“왜 말리십니까? 이게 유현진 씨 거라도 됩니까?”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해치지 마세요.”
창백해진 낯임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속삭이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빤히 내려다보았다.
“상관없는 사람이라.”
나직이 중얼거린 현태오가 호웅을 내려다보았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를 응시하던 현태오는 얼마쯤 지난 뒤에야 천천히 발을 내렸다. 아주 느릿하게, 언제라도 짓밟아 으깨어 버릴 듯 발끝으로 그의 고간을 지긋하게 쓸어내리며.
이윽고 그에게서 완전히 발을 떼고 한 걸음 물러선 현태오는 무표정히 호웅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보좌관님. 아마도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실례했습니다.」
사뭇 정중한 투로 말한 현태오는, 푸르스름하게 질린 호웅의 낯을 뜯어보며 「그런데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하고 나직이 덧붙였다.
「행여라도 좆대가리는 잘못 놀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다가 언제 두 번 다시 못 써먹게 될지 모르거든요. ……안 그렇습니까?」
호웅의 팔뚝을 움켜쥐고 일으켜 앉혀 주면서 현태오가 말한다. 뱀의 껍질처럼 서늘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호웅은 딱딱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더 이상 그에게는 흥미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킨 현태오는 유현진에게로 돌아섰다.
그때, 방 안으로 들어오다 멈칫하는 기척이 있었다.
맞은편 방에서 건너오던 진문성이 방 안의 상황을 보곤 멈춰 섰다. 짧은 사이에 방 안을 둘러본 진문성은 일순 미간을 꿈틀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아무 내색 없이 현태오에게 고했다.
“각하. 수색을 마쳤습니다. 방에 있던 자료는 모두 수습했습니다.”
눈동자만 돌려 진문성을 쳐다본 현태오는 얼마간 더 유현진을 응시하다가 걸음을 돌렸다. “가져가서 살펴보고, 방은 2차로 한 번 더 훑어.”, 짤막하게 지시를 내리며 문으로 걸어간 현태오는 유현진을 돌아보았다.
“나오십시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거부를 허용하지 않는, 조용하고도 강압적인 말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현태오를 바라보던 유현진은 잠자코 따라나섰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호웅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호웅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에 염려스러운 기색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다른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듯 손짓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런 호웅의 시선을 현태오가 가로막았다.
「미사담 님께는 현태오가 들렀다 갔다고 전해 주십시오. 거루 님은 오늘 못 돌아오실 겁니다. 그의 향후 처분에 대해서는 오늘 밤 좀 더 면밀히 알아본 뒤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웅에게 사무적으로 알린 현태오는 방 앞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에게 유현진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먼저 차로 모셔.”
짤막하게 지시한 현태오는 마저 마무리할 일이 남은 듯 거루의 방으로 들어갔고, 유현진은 정중히 안내하는 부하 직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목표물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거루와 그 접촉자, 그리고 보조자까지 총 3인입니다.”
전화를 한 손에 든 채 현태오에게 보고한 진문성은, 거의 차이를 두지 않고 다시 들어오는 연락을 확인하고 재차 말했다.
“전재익 측에서 움직임을 보였다고 합니다. 측근이 상황을 알아보러 나선 듯한데, 이쪽도 확보할까요?”
“그쪽도 소식은 빠르군. 잡아.”
현태오는 간결히 말한 뒤 방 안을 둘러보았다.
색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도 그들이 들어섰을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은 내부를 둘러본 현태오는 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그대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건물에서 나서는 현태오의 뒤로 진문성이 따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는 현태오의 뒤를 따라가며, 진문성도 그의 기색을 살필 뿐 말을 걸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차가운 겨울 공기가 훅 하고 그들을 감쌌다. 정문 앞에서 멈추어 잠시 그대로 서 있던 현태오는 그제야 머리가 약간 식은 것처럼―그러나 여전히 눈앞의 허공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문성아. 담배.”
“차에 있습니다. 가져오겠습니다.”
현태오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간혹 해외의 귀빈과 자리를 함께할 일이 있을 때 그들의 문화에 따라 시가나 물담배 따위를 피울 때가 있긴 했지만, 별일 없이 그가 개인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일은 없었다. 머릿속이 극도로 가파르게 날이 서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여태 현태오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진문성이 본 것은 전장에서 사흘 꼬박 밤을 새운 뒤 야습에 나서던 때, 그리고 그가 한 달간 엎치락뒤치락했던 전지에서 상부의 지시로 물러나야만 했던 때, 딱 두 번뿐이었다.
그러나 진문성은 뜸하게 한 번씩 담배를 피워 차 안에 두고 다니곤 했는데, 진문성이 담배를 가지러 차로 가자 현태오가 그 뒤를 따라와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진문성이 담배를 건네자 현태오는 곧 한 개비를 뽑아 피워 물었다. 진문성은 조용히 차창을 반쯤 내렸다. 고요한 정적만큼이나 싸늘한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맞은편으로 대각선 위치의 주차 라인에는 공무 집행용 차 한 대가 엔진을 켜 놓은 채로 서 있었는데, 그 뒷자리에 유현진이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수색의 뒤처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주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현진의 옆모습이 보였다. 흐리고 어두운 탓인지 창백해 보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미동조차 없이 아주 가끔 눈만 한 번씩 깜박일 뿐이었다.
현태오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없이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빨갛게 타들어 간 담배가 반도 채 안 남았을 즈음,
“그러니까 유현진이 지금, 동정을 떼러 왔다는 거지. 그놈의 신성가호인지 뭔지를 없애시려고.”
현태오가 담배를 문 잇새로 툭 내뱉었다.
그래,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게 자자고 하셨군, 하고 중얼거린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쥐약을 찾으러 왔더니 이 웬,”
웃으며 중얼거리는가 싶었지만 그 웃음은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저 새끼가 미쳤나…….”
나직이 뇌까리는 목소리에 담뱃불만큼 벌건 감정이 맺힌다.
“심적으로 많이 몰렸던가 봅니다. 유현진 씨 성향에, 뭔가를 숨기거나 감추고 있는 상황이 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진문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후우, 현태오가 창밖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하얀 연기가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그래서, 그게 불안하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놈이랑 뒹굴어? 공식적으로 파트너가 있는 놈이?”
“그 파트너가――, ……아닙니다.”
그 파트너와 할 상황도 아니고, 실제로는 파트너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 상황은 그 파트너로 인해 비롯된 일이었다.
진문성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거울 속으로 와 닿는 시선이 칼날처럼 서늘했다.
후우, 다시 연기를 내뱉은 현태오가 꽁초를 던졌다. 그가 내미는 빈손에 진문성은 말없이 새 담배를 쥐여 주었다. 현태오는 새로운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었고, 한동안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맞은편의 차 안에서 유현진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묵묵히 고개 숙이고 앉은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그시 그쪽을 바라보며 말없이 피우던 새 담배도 거의 다 타들어 갈 때쯤, 현태오가 문득 허, 하고 짧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저걸 어디다 파묻어 버릴 수도 없고…….”
두 개비째의 꽁초를 버린 현태오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며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양 가벼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눈매를 흘끗 바라본 진문성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각하. 처음에 유현진 씨가 각하께 거짓말을 한 잘못에 대해, 평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를 곤란하게 만들어 그 반응으로 유희 삼으려 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정도면 그 대가로는 충분한 선이 아닐는지요.”
현태오가 흘끔 눈동자를 돌렸다. 마치 맹수에게 제 위치를 들킨 양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눈길이었다. 그러나 진문성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유현진 씨도 어지간히 막다른 곳에 몰린 심경이었을 텐데, 이제 각하께서 평항으로 돌아가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마무리하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얼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현태오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한 상관이었다. 진문성이 알아 온 세월 동안 그는 아무리 심기가 언짢은 때라도 결코 바른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는 몸은 물론 머리까지 식히기에 충분하도록 싸늘한 공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현태오가 다소 느른해진 투로 중얼거렸다.
“문성이 이놈은 어떤 상황에서든 맞는 말은 잘도 한단 말이지…….”
“송구합니다.”
“담배.”
현태오는 세 개비째의 담배를 물었다.
뚫어질 듯 응시하는 그의 시선 끝에서, 유현진은 줄곧 혼자 차 안에 앉아 석상이 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현태오가 여전히 그쪽을 지켜보는 채 후우, 연기를 내뿜었다.
“맞아, 따지고 보면 내가 언짢을 이유는 없지. 저놈이 어처구니없이 바보짓을 하려는 게 우스울 수는 있어도, 내가 불쾌할 일은 아니야. 네 말마따나 꼭 저놈 잘못이라고만 할 수도 없고. ――그래, 저 오만한 놈이, 고작 그거 안 들키려고 아무 놈이든 자려고 했을 정도면 속이 오죽 탔을까.”
현태오가 담뱃재를 툭툭 떨어내었다. 누군가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빨갛게 담뱃불이 바작바작 타들어 간다.
“게다가――.”
머릿속을 정리해 보는 듯한 혼잣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저놈은 더 이상 신관도 아니고 속인이겠다, 앞으로 언제든 누구와든 뒹굴기야 할 테고, 내가 간섭할 일도 아니지.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고. 그렇지?”
나른하고 느릿한 목소리가 창을 넘어 들어오는 겨울 공기만큼 차다. 진문성은 입을 다물었다. 아, 이거 어쩐지 좀……, 싶은 기색이 얼핏 흐려진 그의 얼굴 위로 스쳤다.
“그런데 말이다, 문성아.”
느릿하게 담뱃재를 털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아니지. 지금은 엄연히 저놈과 내 관계가 안 끝났잖아. 그런데, 이렇게――내 머릿속에 흙탕물을 뒤집어씌워서야 쓰나.”
담담하게 중얼거리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콰직!!
현태오가 콘솔 박스를 걷어찼다.
묵직한 차체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박스가 통째로 부서지며 조각조각 깨어져 바닥에 파편이 흩어졌다.
“아……. 좀 진정해 보려고 했는데, 안 되네.”
여전히 느릿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현태오는 담배를 집어던졌다.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는 그대로 맞은편에 서 있는 공무 집행용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문성이 혀를 차며 뒤따라 나와 몇 걸음의 거리를 두고 따라붙었다.
유현진은 차 안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쥔 두 손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앉아 있는 그의 낯빛이 한없이 무거웠다.
차 문 바로 바깥에 현태오가 한동안 서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있던 유현진은, 비스듬히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손가락 마디로 차 유리를 톡톡 두드리자 흠칫 고개를 움츠리더니 시선을 들었다. 유리를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친다.
현태오가 눈썹을 꿈틀했다.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주눅 든 기색은 없이, 외려 뭔가 억울하기라도 한 것처럼 형형한 시선이 똑바로 현태오를 보고 있었다.
유현진은 차 문을 열고 나와 현태오의 앞에 섰다.
현태오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25일에 바쁩니다.”
유현진이 희미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며 현태오가 말을 잇는다.
“그래서 그날 유현진 씨랑 못 봅니다. 그 뒤로도 한동안 바쁠 거고요.”
“…….”
무어라 말하려는 듯 유현진의 입술이 달싹이다 멈추었다. 손가락이 곱아드는 건 추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미리 잠자리 요령을 익혀 두겠다거나, 팁을 알아 두겠다거나, 그런 짓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까?”
유현진은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을 억누르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다 잠깐 시선을 돌린 현태오는 기어이 사나움이 스며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유현진 씨 술버릇 아주 안 좋습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술 먹지도 마십시오. 아무 데서나 술 먹고 자칫 실수라도 하면, 유현진 씨야 즐거운 시간을 보낼지 몰라도 제 입장은 우스워지지 않겠습니까?”
“――, 제가,”
유현진이 울컥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도중에 말을 멈춘 그는 도로 입을 다물며 이를 악물었다. 현태오는 그런 유현진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을렀다.
“처신 잘하시라는 말입니다. 본인의 입장을 잘 생각해서, 시끄러워질 일은 만들지 마셔야지요.”
유현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현태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밭은 호흡을 억누르던 유현진의 눈동자가 일순 일렁이는 듯했다.
“제 입장이란 게 뭡니까?”
옥죄었던 목구멍을 비집어 열고 말이 흘러나왔다.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현태오를 거침없이 바라본다. 그 눈빛과는 대조적으로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현태오는 순간 대답할 때를 놓쳤다.
한 박 늦게 미간을 찌푸린 현태오는 혀를 차며 입을 뗐다.
“유현진 씨가 지금 하는 행동이, 파트너가 있는 사람으로서 적절한 행동이라고 보이십니까?”
“파트너요, 현태오 씨와 저는 파트너입니까?”
이번에는 현태오가 입을 다문다.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이해가 안 된 듯한 얼굴로 쳐다본다. 유현진은 그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파트너는요, 서로 아끼고 위해 주는 것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신뢰예요. 설령 싸우거나, 밉거나, 화가 나더라도, 신뢰만 있으면 관계가 지속될 수 있어요. 설령,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요.”
“――.”
“하지만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매일을 보고 아무리 옆에 있고 아무리 상냥하게 대하더라도,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태오의 눈살이 꿈틀했다. 탐색하듯 유현진을 뜯어보는 얼굴이 무표정해진다.
“그러니까 현태오 씨와 저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겁니다.”
유현진의 핏기 가신 입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상대에 대한 힐난만이 아닌, 자책, 혹은 자조처럼도 들리는 희미한 소리다.
“유현진 씨, 지금 하시려는 말씀이,”
“얼마 있지 않아 혼자 비산도로 떠나야 할 제가,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유현진의 입에서 말이 떨어진 순간, 현태오가 입을 연 채 말을 멈추었다.
움직임도, 소리도 멈춘다.
흐르던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그저 마주친 시선만 그대로 서로를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괜한 말을 해 버렸다는 후회가 짧은 찰나 유현진의 얼굴 위로 스쳤지만, 이내 그 후회도 밀어 넣고서 유현진은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어디서 들었습니까?”
눈도 깜박이지 않고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의 입에서 나온 것은 고작 그 말이었다. 그럴 리 없는데 꼭 당황하기라도 한 듯, 혹은 낭패스럽기라도 한 듯 미간에 주름이 진다.
현태오를 물끄러미 뜯어보던 유현진의 어깨가 희미하게 늘어졌다.
“정말이었네요.”
“――.”
“볼일이 있어서 신전에 갔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혹시라도 뭐가 잘못된 건 아닐까 했었는데,”
유현진은 꺼질 듯 속삭이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런 유현진을 굳은 듯이 바라보고 있던 현태오가 어느 순간 혀를 찼다. 초조한 기색이 어렴풋이 스며 났다.
“유현진 씨,”
“현태오 씨는, 현태오 씨 입장 때문에, 시끄러워질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사실을 덮어 둔 채로 제 처우를 진행하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거 처신 잘하신 거 아닙니다.”
시선을 떨군 채로 말하던 유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확연한 서러움이 담긴 눈이 현태오를 노려본다.
“차라리 가라고 했더라면, ――입장이 곤란하니까 조용히 멀리로 가 달라고 말씀을 하셨더라면, 그게 제게는 훨씬 나았을 겁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저는 아무런 불만도 저항도 없이 순순히 갔을 거예요. 그런데,”
속에서 북받쳐 오른 말이 밀려 나왔다.
“굳이 이렇게――, 이럴 필요는, 없었던 것 아닙니까. 서로 알아 가자거나, 가까워져야 한다거나, 굳이 그런 말까지 하면서 속일 필요는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멀리 치워 버릴 거면서 왜……!”
억누르지 못한 용암처럼 꾸역꾸역 밀려 나오던 말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원망이 고여 있던 눈이 그렁하고 부풀었다.
“유,”
현태오가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거의 동시에 유현진 역시 무심결인 듯 움찔하며 물러섰다. 현태오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
그렁거리던 눈은, 그러나 입을 꾹 다물고 견디는 사이에 다시 말랐다. 거기에 안간힘을 쓰기라도 했는지, 유현진은 별안간 힘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말을 할 기력마저 빠져 버린 듯 입을 다물어 버리고, 시선도 같이 떨어지고 만다.
더 이상은 현태오를 보지 않고, 다시는 눈을 마주치지 않을 것처럼 땅만 내려다보면서 유현진은 속삭이듯 말했다.
“언제든 각하께서 원하시는 때에 비산도로 가겠습니다. 수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그걸로 모두 끝인 겁니다. 더 이상은 제게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
“――유현,”
미간에 주름을 그은 현태오가 한 걸음 다가섰다. 움찔한 유현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등 뒤에 차가 부딪치자, 유현진은 달아날 곳이라도 찾는 것처럼 차 문을 열더니 그 뒤에 섰다.
“제가 지금은 좀 마음이 그래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지금은…… 갈래요.”
무뚝뚝하게 속삭이는 말끝이 어렴풋이 떨렸다. 차 문 뒤에 숨듯이 선 유현진은 시선도 들지 않고서 경계하듯이 현태오의 넥타이 언저리만 노려보았다.
현태오는 말없이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유현진은 천천히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려는 듯 안쪽 자리로 들어가 숨듯이 웅크리는 유현진을 보며, 현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정리를 다 마친 듯 건물에서 부하 직원이 나왔다. 현태오를 보고 잰걸음으로 뛰어온 그가 보고했다.
“마쳤습니다. 방 내부에는 빠뜨린 자료가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
현태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씻어낸 듯 표정 없는 얼굴이 부하 직원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유현진 씨 집으로 모셔다드린 뒤에 안보청으로 가 있어.”
현태오가 명령하자 부하 직원은 거수경례를 하곤 운전석에 올랐고, 이내 차가 출발했다. 반듯이 앉은 채 움켜쥔 두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유현진을 태우고서 차는 영빈관을 떠났고, 그곳에는 현태오와 진문성만 남았다.
“…….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현태오가 나직이 말했다. 겨울 공기마저 밀어낼 만큼 얼음 같은 기색에 진문성은 곧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곧 알아보겠습니다.”
현태오는 한동안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서서 허공을 노려보고 있던 그는, 어느 순간 짧게 혀를 차더니 손을 저었다.
“됐어. 이미 이렇게 된 거, 문성이 네 말대로 조만간 마무리했어야 할 일이야.”
이성이 계산해 낸 결론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다 덮어씌우려는 듯, 스스로에게 결론을 내리는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 짚어 말했다.
“그래, 이렇게 됐으니 마무리해야지. ……조금은 더 놀아 보려고 했는데 예정보다는 빨리 끝났군.”
건조한 목소리가 별일도 아니라는 듯 중얼거린다.
깨워 낸 이성으로 다시 검토해 보아도 별것 아닌 일이다. 그저 막간의 유흥으로 삼았던 일이 예상보다 일찍, 뜻하지 않게, 그리고 다소 시시하게 끝났을 뿐이다. 여기에는 아무 위험할 일도 곤란한 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 결과에 썩 기분이 개운치는 않아도 굳이 곱씹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어째서 이렇게 초조한지――왜 이렇게 낭패스러운 기분이 드는지 그걸 알 수 없어, 머릿속이 저 시커먼 바닥 밑으로 뚝 떨어졌다.
“유현진한테는 조만간 따로 찾아가서 마무리를 제대로 맺기로 하고, 일단 지금은――할 일부터 해야지.”
어떻게든 당장의 결론을 내린 현태오는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진문성은 다소 복잡한 낯을 떠올렸으나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뒷자리에 앉은 현태오는 피로감이라도 드는지 눈을 감고 어깻죽지를 주물렀다. 짧은 사이에 낯빛이 꺼칠해진 듯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건 진문성은 거울 속으로 흘끔 현태오를 살피며 물었다.
“각하, 어디로 모실까요.”
잠시 침묵하던 현태오가 눈을 떴다. 서늘하게 식은 눈매가 붉은빛을 띠고 번들거리고 있었다.
“일단은,”
무서울 정도로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희생양이라도 찾듯이 중얼거린다.
“오늘 꼬리가 잡힌 쥐새끼들부터 하나도 남김없이 때려잡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