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5)

11.

눈 가리고 아웅은 끝났다.

좋은 시절도 끝났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서 나 홀로…….

“야, 정신 차려, 정신!”

작은 손바닥이 날아와 헤드 쿠션을 야무지게 후려쳤다. 그 충격이 헤드 쿠션을 통과해 거기에 기대어 있던 뒤통수까지 두들겼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유현진은 충격파로 푹 꺾인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끝났어……, 다 끝났어…….” 하고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야, 너 나 결혼 준비하는 데 따라다니면서 계속 불길한 말로 초 칠 거야?!”

제상아가 바락 성질을 내고 난 뒤에야 유현진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럴 순 없다. 사랑도 청춘도 끝나 버린 건 나 하나로 족하다. 내 친구는 오래오래 행복해야지.

지금도 제상아와 미사담은 혼례복을 위한 옷감을 고르러 두 손 꼭 잡고 포목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원래라면 포목점 주인이 원단을 산더미처럼 싸 들고 정혜궁을 찾았겠으나, 미사담이 제양의 옷감들을 두루 보고 싶다며 직접 찾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보안 허가를 받고 보호 차량 일곱 대를 대동하고서 포목점에 방문해, 두 시간 동안 가게를 전세 내고 온갖 원단들을 다 둘러본 다음에야 돌아오는 길이었다.

제양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하긴 하지만 포목 관련의 용어들까지는 다 익히지 못한 미사담을 위해 유현진도 따라갔고, 하나 그릇된 것 없이 깔끔하게 통역을 잘 마치고서 귀가하는 참이었으나…….

“네 얼굴이 그 모양 그 꼴이니까 포목점 주인이 날 수상쩍게 쳐다보잖아! 대관절 얼마나 아랫사람을 혹독하게 부려 먹으면 눈이 붕어처럼 퉁퉁 붓고 볼살은 퀭해져 있냐는 그 비난의 눈길, 너 제대로 보긴 봤어?”

“자기 전에 라면 먹고 부은 거라니까…….”

“라면 좋아하네, 소금을 퍼먹고 자도 그렇게는 안 붓겠다!”

유현진은 스윽 고개를 돌려 바로 그 퉁퉁 부은 얼굴로 제상아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너는 친구라는 것이, 자비심도 없어? 친구의 인생 마지막 봄날에 종지부가 찍혀 버렸는데 가엾지도 않아?”

“마지막 봄날은 무슨, 길 잃고 뻘밭에서 허우적거리던 어린양이 이제야 돌아온 거지.”

제상아는 유현진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는 듯 코웃음 쳤다.

“야, 끝났다니까 하는 말인데, 너 진짜 하늘이 도운 줄이나 알아. 당장 요 며칠 현 총독 손에 작살 난 인생이 몇인 줄 알아? 신문에까지 난 이름만 한 트럭이야.”

“그 사람들은 작살 날 만한 짓을 했으니까 작살이 났지! 새벽부터 밤까지 쉬지도 못하고 비리 인사를 캐내느라 고생하는 사람을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넌 이 와중에도 현 총독을 편들 마음이 드니?”

글렀다, 넌 글렀어, 하고 제상아는 손을 살래살래 내저었다. 그녀의 옆에서 포목점에서 받아 온 원단 샘플북을 즐겁게 넘겨보고 있던 미사담이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통역사님도 평항 총독이랑은 참 운때가 안 맞나 봐요. 어쩌면, 하필 그날 그때를 골라서 그렇게 딱 마주친답니까.”

“…….”

저 말을 제상아가 했더라면 불난 집에 기름 붓냐고 성질이라도 냈을 텐데, 아직 별로 안 친한 미사담이라 차마 막말을 못 하겠다. 심지어는,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으나 미사담은 제 보좌관에게 부탁까지 해 가면서 유현진을 도와주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한편으로는 저 말이 또 사실이기는 한지라 유현진은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 어쩌면 하필 딱 그때 그렇게 들이닥쳤을까.

미사담의 보좌관이었던 거루가 송갈의 극단적인 척화파에 비밀리에 몸담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야 들었다. 삼람교의 제식을 빌미로 그 과격파와 접촉한 그날이, 현태오가 그 증좌를 찾아내고 현장을 잡아내는 날이었다는 사실도.

그런 일이 생길 줄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게 정확히 그날이 될 줄은 몰랐다며, 나중에 미사담이 호웅과 더불어 난감한 얼굴로 사과해 왔다. 사실상 난데없이 험한 꼴을 당한 호웅에게는 유현진이 사과해야 할 처지인 성싶어 되레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지만.

그러나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봐야 소용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거짓말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던 그 밧줄은 끊어져 버렸다.

다음날 초췌한 낯으로 출근한 유현진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제상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차라리 잘됐어. 계속 그렇게 마음 졸이느니 이렇게라도 끝낸 게 잘된 거야.’라고 위로해 줬고, 유현진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래도 마음속 한구석에 계속 맴도는 생각은,

“……말하지 말걸.”

“또 그 소리니?”

“그래도, 어차피 멀리 가 버릴 거라면 가기 전에 최대한 더 차지해 두고 싶었단 말이야.”

현태오의 몸이든, 시간이든, 비록 거짓 위에 쌓아 올린 친절이든.

그날 호웅과 함께 있던 방 안으로 현태오가 들이닥쳤을 때, 유현진은 얼어붙고 말았다. 머릿속까지 얼어 버린 느낌이었다.

비단 꺼림칙한 상황에서 맞닥뜨려 제 발 저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태오의 기세가, 유현진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무시무시하게 두려웠다. 그 기세에 짓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마치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무섭게 화를 내며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 아득한 공포에 짓눌리면서, 불안과 죄책감에 짓눌렸던 마음이 점차 억울해졌다.

나만의 잘못인가 하는 빗나간 분노와 함께, 결국 마음을 잠식한 건 서러움이었다.

이렇게까지 화내지 않아도 되잖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지 않아도. 어차피 곧 멀리로 보내 버릴 거면서, 너무나 갖고 싶은 나머지 내가 잘못된 욕심을 품은 게 이렇게까지 비난받을 일인가.

이렇게 날 비난하는 것도, 정말로 나를 파트너로 여겨서가 아니잖아. 나를 아껴서도, 나한테 마음을 주어서도 아니다.

불현듯 서럽고 슬픈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쳐서 유현진은 가슴속에서 응어리져 맺혀 있던 슬픔을 저도 모르게 더럭 뱉어 버렸다.

그 순간 얼어붙던 현태오의 얼굴을 보고는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말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호웅이 말했던 것처럼 그저 그에게 요령을 좀 배우러 갔던 것뿐이라고 우겼더라면. 혹은 잠자코 사과만 했더라면.

그러면 다만 며칠이라도 더 현태오와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현 총독한테는 그날 그 연락 이후로는 아무 소식 없어?”

제상아가 흘끔 유현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고, 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후로 현태오는 유현진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뿐 아니라 전화도, 문자도, 모든 연락이 딱 끊겼다.

유일하게 딱 한 번 온 연락은, 영빈관에서 마주쳤던 그다음 날 새벽에 온 무미건조하고도 정중한 문자였다.

「어제는 바쁜 와중이라 실례했습니다. 조만간 시간이 나는 대로 다시 찾아뵙고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 짓는 걸로 하겠습니다.」

마무리.

그 단어가 유난히 눈에 박혔다.

그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명확하게 문자로 확정되자 심장이 퉁하고 떨어졌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맥이 탁 풀렸다. 그리고 그날 뒤로 계속 현태오가 언제 찾아올지 마음 졸였다. 그가 찾아오면 그때야말로 정말로 확고하게 마침표를 찍게 되는 것이다.

안 오면 좋겠다.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매일같이 당연한 습관처럼 늘 만나던 사람과 갑작스럽게 단절된 상실감에 매분 매초 가슴이 저몄다.

“애초에 말야, 난 그것도 맘에 안 들어. 둘이 뭐 그렇게 얽히고설킨 게 많다고 꾸물거려, 사람 속만 상하게? 마무리 짓는 데에 천년만년 걸린대? 그냥 후딱 와서 후딱 얘기하고 끝내고 말 것이지. 일이 더 중요하니까, 남의 감정 상하는 건 별것도 아니라 이거야?”

유현진의 퉁방울 같은 눈을 흘겨보던 제상아가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쟤는 저렇게 사사건건 현태오가 맘에 안 들면서 어떻게 그 남자랑 정혼자로 십수 년이나 지냈던 걸까…….

유현진이 속으로 의아해하던 때, “그런데 어쨌든,” 하고 단번에 낯빛이 싹 바뀐 제상아가 대견하다는 눈길로 유현진을 보았다.

“그럼 지금은 너만 그 남자를 속이고 있는 거네. 그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제가 술김에 실수로 너랑 자 버려 놓고는 거치적거리니까 널 몰래 멀리로 보내 버리려 했다가 들켜 버린 상태로 마무리를 짓겠다는 건데. ――음, 잘했어. 상대만 나쁜 놈 만들고 빠져나오는 데에 잘 성공했네.”

“……. 그거 나를 까는 거냐, 현태오를 까는 거냐, 둘 다 까는 거냐?”

“어느 쪽이면 어때, 까일 만하니 까이는 거지.”

새침하게 말하는 제상아를 요렇게 노려보는 유현진이었지만, 이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얄밉게도 늘 맞는 말만 하는 제상아가 아니던가.

“이렇게 된 김에 너도 차근차근 마음 정리나 잘해. 어차피 그 남자가 어마어마하게 바빠서 한동안은 못 볼 텐데.”

제상아의 말에 유현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태오가 몹시 바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영빈관에서 그 남자와 헤어진 바로 그날 밤, 밤새도록 무시무시한 피 잔치가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날 삼람교의 탈을 쓴 과격파는 물론, 그 무리에 연계되어 있던 폭력단과 군수업체 핵심 인물 몇몇까지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쓸어버렸다고 한다.

그날 이후부터 전쟁이라도 터진 것처럼 연일 신문에서는 내밀히 얽힌 비리 의혹이 감자처럼 줄줄이 엮여 나오고 있었고, 그 감자 하나하나마다 현태오의 공이 들어 있다고 제상아가 스치듯 귀띔했었다. 심지어 지금은 삼람교의 내부 비리까지 드러나 감자가 트럭 수준으로 쏟아져 나오는 판이니, 온갖 부서가 다 동원되어 아비규환으로 마비될 지경인데 그 와중에 현태오가 눈코 뜰 새 없는 건 당연했다.

따라서 한동안은 유현진을 찾아오지 않을 테니 그나마 당장 결별 통고를 받지는 않겠다고 안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보고 싶다.

“마음 정리나 잘하라니까!”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대관절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제상아가 야멸차게 쏘았다. 얘는 귀신인가, 유현진은 속으로 의심하며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옆에서 별안간 미사담이 웃음을 터뜨리며 “통역사님 얼굴……, 한번 보이기 시작하니까 엄청나게 투명……, 투명한 유리구슬…….” 하고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이 양반도 오래 곁에 둔 보좌관이 자기를 배신하고 연행된 상황이라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유현진은 마음을 다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신 차려야지. 이제 비산도에 가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새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데, 힘내 봐야지. ……너랑 세진이 보고 싶어서 처음엔 힘들겠지만…….”

현태오도 너무너무 보고 싶겠지만, 하는 말은 삼켰는데도 역시나 제상아는 독심술을 한 것 같았다. 가느스름한 눈으로 지그시 유현진을 쳐다보던 그녀는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더니 “그러고 보니,” 하고 말을 꺼냈다.

“세진이가 비산도로 전출 신청 낼 모양이던데.”

“뭐?!”

유현진의 머릿속에서 한순간에 현태오고 뭐고 다 날아갔다.

화등잔만 하게 눈을 부릅뜨며 제상아를 돌아본 유현진이 급하게 되물었다.

“걔가 거길 왜?!”

“왜긴, 너 따라가려는 거겠지. 너 외롭게 둘 순 없다고, 비산도 공공 기관에 언제쯤 자리 나나 알아보고 있던걸.”

“무슨 소리야?! 안 돼!”

유현진은 펄쩍 뛰며 외쳤다.

비산도로 전출이라니, 자발적 좌천이나 마찬가지다.

수도로 오려 하는 지원자는 많지만 지방으로 가려 하는 지원자는 적어서, 원칙적으로 일대일 교환인 사무관은 한번 지방으로 내려가면 다시 수도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대도시나 중소 도시도 아니고 저 머나먼 산간벽지 비산도라니, 한번 가면 못 온다고 봐야 한다.

출세해서 떵떵거리고 살 거라며 출세 출세 노래를 부르던 유세진이 그 출셋길을 놓아 버리겠다고 하고 있었다.

“절대 안 돼, 못 가!”

“나도 말려 봤는데, 안 듣던걸. 벌써 집 내놓으려고 부동산 중개인 알아보고 있더라.”

“뭐?! 누구 맘대로?!”

유현진은 당장 전화를 꺼내어 들었다. 그러나 부리나케 전화를 해도 연결은 되지 않고 ‘회의 중입니다.’라는 자동 메시지만 날아왔다.

이놈 자식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하고 유현진이 전화를 노려보며 식식거리는데, 그런 유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상아가 툭 던지듯 말했다.

“너 나랑 갈래?”

“뭐?”

“송갈에 말이야.”

유세진에게 욕 문자를 쓰느라 정신이 팔렸던 유현진의 귀에, 한 박자 늦게야 그녀의 말이 들어왔다.

「이 생각 없는 놈 같으니, 너 비산도 따라오면 죽을 줄 알」까지 치던 손가락을 딱 멈추고, 유현진이 시선을 들어 멀거니 제상아를 보았다.

차분하게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농담을 하는 빛도, 충동적으로 말한 빛도 아니었다.

“아직 정확한 날짜가 정해진 건 아니지만 아마 가을쯤, 늦어도 올해 안에 혼인을 치르고 송갈로 넘어가게 될 거야. 나와 함께 정혜궁의 궁인 열두 명이 가게 될 건데, 그녀들은 아직 송갈 말을 잘하지 못해. 그래서 처음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한 몇 년……, 4, 5년 정도만. 그때쯤이면 나도 궁인들도 그곳에 자리 잡고 익숙해질 테고, 너도 다시 조용히 이곳으로 돌아오면 별일 없이 지낼 수 있을 거야.”

제상아의 제안은 유현진을 위한 배려였다.

그녀의 측근 궁인들은 하나같이 총명한 이들이었고, 유현진이 굳이 송갈에서 그녀를 도울 만한 일은 없었다. 또한, 아무리 통역이라는 구실을 붙인다 해도 타국의 왕실로 결혼해 들어가는 공주의 일행에 남자가 포함되어 좋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마따나 송갈에 가서 4, 5년을 보내고 오면 그때쯤엔 세간의 기억도 희미해져 있을 테고, 통역관으로서 송갈에 간다면 비산도로 가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녀는 여러 번잡한 일들을 감수하고서라도 유현진에게 또 다른 해결책을 내어 주겠노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 ……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해법에 유현진이 눈을 껌벅이며 당황했다. 그러나, 당연히 비산도와는 비할 수도 없이 나은 길이었다. 외롭지도 않을 테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게다가, 세진이도 네가 날 따라간다고 하면 얌전히 여기서 기다릴걸.”

“어……, 그치만 네가 번거로,”

“나도 친구랑 같이 가면 덜 외로워서 좋고. 또, 4, 5년이면 그렇게 긴 것도 아니잖니.”

제상아는 유현진이 머뭇거리며 꺼내는 말까지 잘라 버렸다. 그런 부분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이.

갑작스러운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유현진에게, 미사담이 여전히 원단 샘플북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거들었다.

“막상 가서 살다 보면 안 돌아오고 싶을 수도 있어요. 내 나라라서가 아니라, 송갈은 정말로 아름답고 좋은 곳이거든요. 게다가 미남미녀도 지천에 깔려 있고.”

“……, 그건 좀 혹하네요.”

“그렇죠? 혹시 그때 가서 귀화하고 싶다면 도와드릴게요.”

미사담이 빙긋이 웃었다. 그 얼굴을 보며, 유현진은 이미 제상아가 미사담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녀는 유현진을 홀로 먼 곳으로 보낸 채로 내버려 둘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가슴속이 뭉클하고 부풀었다. 눈동자도 울컥하고 부푼다.

“어머, 얘 봐! 야, 울지 마, 궁에 다 왔단 말야! 네가 울면서 차에서 내리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거기서 눈 더 부으면 너 눈 못 떠!”

……그렇게 야단치며 다시 등짝을 야무지게 후려치는 바람에 나오려던 눈물도 쏙 들어가고 말았지만. 그래, 지금 내가 울면서 차에서 내리면 그건 너한테 맞아서 우는 게 맞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의 말대로 차는 무사히 정혜궁 앞에 다다랐고, 제상아는 “생각해 보고 알려 줘.”라고 말을 맺으며 차에서 내렸다.

유현진도 고개를 끄덕이곤 뜨끈해진 눈두덩을 누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눈두덩만큼이나 마음도 뜨끈해졌다.

이렇게 자신을 염려해 주고 배려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까짓 현태오 따위 평생 안 본들――.

“마마, 조금 전 평항 총독이 방문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사담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다 합니다.”

덜컹.

제상아의 측근인 궁인이 다가와 고하는 말을 들은 순간, 용감하게 부풀어 올랐던 유현진의 마음이 단번에 내려앉았다. 핏기가 가시며 발밑이 떨렸다.

보고 싶다.

보고 싶지 않다.

상반된 감정 속에서 며칠이나 지내 오던 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아, 그럼 어서 뵈어야지요.”

미사담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 나섰다.

비록 그가 의사소통에 거의 문제가 없을 정도로 제양어가 유창하지만, 업무 시간 내의 면담에는 언제나 통역이 동행했다.

제상아가 흘끗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어떡할래? 그렇게 묻는 듯했지만, 유현진은 말없이 미사담의 뒤를 따랐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공사를 혼동할 수는 없다. 또한,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동시에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제상아와 그녀를 모시는 궁인들, 미사담과 그 보좌관인 호웅, 그리고 통역사인 유현진이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현태오는 응접실 벽에 걸린 산수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는 기척에 응접실 기둥 옆에 서 있던 진문성이 먼저 그들을 보았고, 이어 현태오가 돌아섰다. 무심히 사람들을 훑는 시선이 유현진을 스친 순간 유현진은 가슴속이 움찔했으나, 현태오는 아무런 내색도 없었다. 아무런 기색도, 아무런 알은체도 없이,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두 분 마마를 뵙니다.”

현태오는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한 낯으로 제상아와 미사담에게 인사를 올렸다. 한 치 빈틈도 없는 ‘평항 총독’의 얼굴이다.

“어서 오세요, 총독님. 기다리실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돌아왔을 텐데요.”

“아닙니다. 미사담 님께 고해 드릴 일이 조금 전에야 끝나, 미리 알리지도 못하고 갑자기 찾아뵈었습니다.”

“하하,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니, 무엇일까요?”

제상아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은 현태오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맞은편의 미사담 앞에 놓았다.

미사담의 얼굴에서 웃음이 흐려졌다. 천천히 주머니를 거두어 그 안의 내용물을 손바닥 위에 쏟아 내었을 때에는 더 이상 웃음이 없었다.

그것은 송갈의 전통 문양이 새겨진 남성용 목걸이였다. 오래도록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낡았지만 망가진 데 없이 반들거렸다. 미사담의 뒤에 있던 호웅도 그것을 보고 낯이 무거워졌다.

“……. 거루는 죽었습니까?”

미사담이 목걸이를 가만히 그러쥐며 물었다. 현태오는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라고 무심히 대답했다.

“살려서 돌아가실 수도 있고, 작은 상자에 담아 편하게 들고 가실 수도 있습니다. 굳이 살리기를 권해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미사담 님께서 데려온 사람이니 어찌하실지 여쭈러 왔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말이나 그 속뜻은 무섭다.

사람들의 낯빛이 굳어지는 가운데 미사담은 묵묵히 현태오를 보다가 씁쓸하게 말했다.

“굳이 죽이기까지 해야겠습니까.”

“그날 미사담 님을 습격한 이들의 목표는 협박이나 납치가 아닌 암살이었고, 그 상황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한 거루는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삼람교의 제식날 미사담 님의 곁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들 측에 합류해 재차 일을 꾸밀 예정이기도 했습니다.”

“――.”

미사담은 입을 다물었다. 꿈틀, 일그러지는 낯은 분노인지 슬픔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현태오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가 그렇게 하리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서 여기까지 데려오신 게 아니었습니까.”

미사담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묵직한 한숨이 씁쓸한 말과 함께 흘러나왔다.

“호웅과 더불어 아주 어릴 때부터 제 곁에서 지냈던 친구인데, 언제부터, 어째서 내게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서도 행여나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결국은 아니었나 봅니다.”

늘 밝고 쾌활하던 미사담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이미 더 이상은 곁을 줄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이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 나왔다.

냉담하게 그를 지켜보던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미사담 님은 지금 적진 한가운데에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그 적이 비단 제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송갈에도, 미사담 님의 지척에도 있을 수 있으며, 한순간의 무른 마음이 그들의 목숨과 미사담 님의 목숨을 맞바꾼다는 것도 잊으셔선 안 됩니다.”

일말의 주저도 위로도 없이 단호하게 말한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미사담 님이 그를 살리길 원하신다면 숨을 붙여 놓은 채로 신병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로 인해 다시 어떠한 위험이 생기더라도 제양 땅에 있는 한 저는 두 분의 안전을 책임질 것이고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내에는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 이제 선택은 오롯이 미사담의 몫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미사담은 시선을 들어 현태오를 보았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기어이 저버리고 말았으니 어쩌겠습니까. 처분은 현 총독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현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보내올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형태 대신 작은 상자에 담긴 형태로 돌아올 것임을 그곳에 있는 이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에게서 알아낼 만한 것은 모두 알아내었고, 이번에 함께 온 사절단 인원들과 송갈의 미사담 님 궁에서 일하는 자들 중 걸러 내야 할 인물들의 명단도 곧 따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용건을 마친 현태오는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듯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상아과 미사담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무심히 시선을 돌리던 찰나, 유현진과 눈이 마주쳤다.

“――.”

냉막하게 가라앉은 무심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현진은 움찔했다. 무심결에 입을 꾹 다문 외에는 긴장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현태오의 눈길이 그 입매에 닿았다. 다시 유현진과 마주치는 시선이 한층 서늘하게 식었다.

유현진은 들뜨는 호흡을 애써 억눌렀다.

아주 짧은 찰나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심장이 뛰었다. 고작 며칠 만인데도 몇 년은 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며칠간 자신이 이 남자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순간에도 숨 막히게 그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저 무섭도록 무표정한 낯에 마음이 툭 내려앉고 만다.

아. 그렇구나. 정말로 끝나 버린 거구나.

이제는 거짓된 친절도, 꾸며낸 다정함조차도 없이 서로의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던 때로 돌아가 버렸구나. 아니, 외려 그때보다 더욱 멀어져 버리고 말았구나.

마음이 저 깊고 차가운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유현진은 차마 더 이상은 그를 마주 볼 수 없어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그래서 현태오의 눈매가 일순 험악하게 얼어붙는 것도 보지 못했다.

“현 총독님께서 요즘 노고가 많으십니다. 워낙 바쁘셔서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되니, 나중에 댁으로 삼이라도 한 궤 보낼게요. 모쪼록 바쁘신 와중에도 몸과 주변을 잘 챙기시면 좋겠어요.”

제상아가 현태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 부드러운 말속에는 은근한 가시가 담겨 있었지만 현태오의 무심한 표정은 털끝만치도 변하지 않았다.

현태오는 유현진을 응시하던 얼음 같은 시선을 돌려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하고 제상아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서슴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현진과는 인사 한마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손끝조차도 스치지 않았다.

업무로 찾아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유현진은 그저 맥이 풀리고 마음이 가라앉아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

왕의 종형제인 의양군은 왕실의 일원으로서 오래도록 정계에 있으며 자신의 입지를 잘 쌓았다.

사람을 대할 때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그에 걸맞은 예를 갖추고, 특히나 제 사람에게는 더욱 관대하고 넉넉하게 대해, 두루 인망이 있는 편이었다.

본디 출중한 학자였던 그는 젊어서부터 제 학당을 열어 후학을 길렀는데, 그 학당에서 배출한 인재들 여럿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 그의 면을 세우며 그의 세력이 되어 주었다.

그러니 그는 상원 의원 자리를 아들인 계연군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뒤에도 여전히 권세를 누리고 있었는데, 그 세력의 근간이 그의 학당 출신이라는 학연으로 이어진 고위 관료들 무리이며, 그 학당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청송당이라 이름 붙인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들은 구름같이 많았으나 의양군은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아 한 해에 고작 여남은 명의 제자를 받을까 말까 했는데, 매해 이른 봄마다 입당을 희망하며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들로 인해 의양군은 또 한 번 이름을 높이곤 했다.

제자는 물론이거니와, 면학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린다는 이유로 방문객도 거의 받지 않는 그 청송당에, 이날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의양군의 초청을 받고 와 사랑채에 앉은 남자는 평항 총독을 지내는 현태오였는데, 평소 의양군이 그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은 그의 방문을 의아해했다.

아담하고도 푸른 소나무 여러 그루가 보기 좋게 자라난 뜰을 내려다보며 현태오가 사랑채에 앉아 있은 지 십여 분, 곧 문이 열리며 의양군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현태오에게 마주 인사하며, 의양군은 문밖에 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가서 일 보거라.” 하고 그들을 물렸다.

곧 간소하게 차린 다과상이 들어오고, 방 안에는 두 사람만이 마주하고 앉았다.

주름진 얼굴을 단단히 굳히고 앉은 의양군은 심사가 편해 보이지 않았으나, 별다른 말 없이 “들게.” 하고 먼저 찻잔을 들었다.

차로 목을 축인 현태오는 “좋은 차군요.”라고만 말하고는 더 입을 떼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니는 소리들이 바깥에서 들려왔을 뿐, 실내는 그저 조용했다.

그 정적을 기어이 먼저 깨뜨린 사람은 며칠 새 바싹 야위어 버려 까칠해진 얼굴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의양군이었다.

“자네가 요새 궂은 일로 치다꺼리하느라 바쁘다 들었네. 고생이 많구먼, 그래.”

“고생이랄 것 있습니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지요.”

현태오는 별 기색 없이 덤덤히 대답했다. 그런 현태오를 지그시 살피며 의양군이 느릿하게 말했다.

“해야 할 일이라……. 그래, 임금의 뜻을 받드는 것이 신하의 본분이지. 허나 그것이 모든 경우에 다 옳지는 않을 수도 있네.”

현태오가 시선을 들어 의양군을 보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오래 끌지는 않으려는 모양이다.

피차 이곳에 앉아 있는 목적이 빤하고 서로 그다지 편한 얼굴이 아닌 바에야 그편이 좋다. 현태오는 선선히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마마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요.”

“나는 젊어서부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지로 나아가 송갈과의 전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분투하며 혁혁한 공로를 쌓아 온 자네를 매우 좋게 보고 있네. 분쟁이 그치지 않는 평항으로 젊은 나이에 부임해 가서 그곳에서 날뛰는 송갈인들을 압제하며 잘 다스리는 것을 보고 감탄했지. 그래서 나는 응당 자네가 송갈과 대적해 우리 제양을 지켜 내는 데에 앞장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

“헌데 요즘 자네의 행보를 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던가, 석연찮아져서 자네와 이야기를 좀 나누어 보고자 불렀네.”

“그러셨습니까.”

현태오는 별반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요도, 불안도, 흥미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의양군은 못마땅한 기색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우리 제양과 송갈이 어떠한 역사를 쌓아 왔는지 잘 알고 있을 게야. 나는 자네의 부친과 뜻을 달리해 자네와도 가까이했던 적은 없으나, 자네야말로 제양을 지켜 나아갈 젊은이라고 생각했네. 자네만큼 송갈을 치는 데에 앞장서며 용맹무쌍하게 나선 자가 또 누가 있겠는가.”

“저는 그때그때 제양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할 따름입니다. 내 근본적인 뜻이 어디에 있든, 당장 전장에서 내 나라 사람이 죽어 가는 걸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평연히 대꾸하는 현태오를 앞두고 의양군은 말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혀를 찼다.

“내 보아하니 자네도 아직 뜻이 굳지 않아. 잘 생각해야 해. 놈들에게 유린당한 역사가 얼마이고, 그들의 손에 흐른 제양의 피가 얼마인지.”

“마마, 제 뜻이 굳고 말고는 마마께서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현태오가 잘라 말했다. 의양군의 볼이 실룩하고 움직인다. 이 새파랗게 어린 눔이……, 하고 치뜨는 눈이 사납다. 그러나 일문을 호령한다는 노인의 험악한 기세에도 현태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담히 그를 마주 보았다.

“피로 얼룩진 역사는 그들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그들은 세월에 따라 각기 번갈아 흥망의 흐름을 타며 서로를 누르고, 눌려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원한과 목숨이 태산처럼 쌓였습니다. 허면, 얼마나 더 쌓을 것입니까? 얼마나 더 쌓아야 더 이상 쌓지 못할 지경까지 가겠습니까?”

“허허, 이보게, 현 총독. 그래서 자네가 아직 굳지 않다는 게야. 그래, 이제 놈들과 손잡고 화해하는 양 지내기 시작하면, 그것이 오래오래 잘 흘러갈 것 같은가? 이런 일은 역사에 없었던 것 같은가? 송갈은 이리 떼와 같아 빈틈을 보이면 언제든 공격할 이들이야. 저들은 언제고 제양이 등을 보이는 순간 뒷덜미를 물어뜯을 이들이라고.”

“본디 역사적으로 국경이 맞닿아 있는 나라치고 관계가 우호적이었던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하물며 긴 세월을 두고 본다면야 어떻게 평화인들 영원하리라 바라겠습니까만,”

잠시 말을 멈추고 찻잔을 매만지던 현태오는 의양군을 보았다.

“허면 마마께서는 싸움이 영원하기를 바라십니까?”

“――.”

“싸움과 평화 중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이 얼마나 갈지 세상 누가 알겠습니까? 하루가 갈 수도 있고 천 년이 갈 수도 있으니, 이 불투명한 가운데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양군은 가느스름한 눈으로 현태오를 노려보다가 혀를 찼다.

“이렇게 생각이 어리다니…. 내가 자네를 잘못 본 모양이네. 자네는 아직도 한참 어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마마.”

현태오는 대수롭잖게 말하며 시계를 보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양군이 못마땅히 지켜보는데, 그가 고개를 들며 더 오래 눙치고 있을 생각은 없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마마, 제가 요즘 많이 바쁩니다. 지금도 강만형 의원님이 안보청에서 절 기다리고 계신 터라 이리 의미 없는 이야기나 나눌 여유는 없으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분명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현태오의 말에 의양군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강만형이……, 강만형 의원이 왜 거기 가 있나.”

“왜겠습니까? 엊그제 조사를 받으신 김재덕 교수님과 이필동 행정부국장님, 이인용 의원님과 더불어 뇌물 수수 혐의가 함께 엮여 있으니 그렇지요.”

의양군이 말을 잃었다. 일순 넋을 놓고 아연히 있던 그가 입을 꾹 다물며 현태오를 노려보았다. 그의 이마에 슬며시 떠오르는 핏대를 보며 현태오가 여상히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제자분들을 참 잘 두셨습니다. 요즘 청송당에서 배출한 분들이 신문지상에서 심심찮게 보여 감탄하고 있습니다.”

의양군의 얼굴에 삽시에 노기가 번지며 눈이 벌게졌다. 여태 꾹 누르고 있었던 분노와 불안이 울컥 넘쳐 악문 턱이 부르르 떨린다.

왕실의 일원이라는 신분도, 상원 의원으로 오래 지냈던 이력도 의양군이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얻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송당은 한 학자로 세워 낸 그의 능력과 노력의 결정체였고, 그렇기에 청송당이야말로 그가 쌓아 올린 진정한 자랑거리였다.

“배움을 멀리하면 눈이 흐려지게 마련이라, 아무리 밝은 데 있었어도 그곳에서 멀어지면 구덩이에도 빠지게 되지. 그놈들은 더 이상 내 문하가 아니야.”

“아, 예.”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키워 낸 제자라며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었던 노인은 수염을 부르르 떨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고, 현태오는 그 또한 별 개의치 않는 듯 무심히 대답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는 심지어 조소조차 없었다.

의양군은 분이 서린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다 입을 꾹 다물고 차를 마셨다. 그런 그에게 현태오가 말을 잇는다.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도 청송당에서 쫓겨날 제자들이 제법 있을 텐데, 문하가 줄어 마마의 일신이 더욱 한가로워지시겠습니다.”

“무어……! 또 어떤……!”

눈을 부릅뜨며 버럭 노기를 드러내던 의양군은 담담히 바라보고 있는 현태오와 눈이 마주치자 아차 싶은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험하게 낯을 일그러뜨리는 의양군을 물끄러미 보던 현태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마. 지금 마마의 제자들만 위험한 줄 아십니까.”

“――.”

“이를테면 김재덕 교수는 좀 억울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는 본디 출처가 수상쩍은 뇌물을 받고서 송갈과의 주요 협력 단체를 해산시키는 데에 가담하기를 꺼려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가 그 일을 왜 했겠습니까? 그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인물이 그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현태오는 의양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의양군의 낯빛이 차차 굳으며 창백해진다.

“강만형, 이필동, 이인용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욕심만 많고 머리가 나빠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청송당 출신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을, 과연 누가 그렇게 끌어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

“마마께서도 그걸 아시니 지금에 와서 급히 저를 청하신 게 아닙니까.”

현태오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의양군을 바라보았다. 분노와 불안, 노여움으로 눈을 형형하게 빛내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노인의 낯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하면서도,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속내를 떠보려 했던 노인의 속셈은 애초에 현태오를 이리로 부를 때부터 이미 탄로 나 있었다.

“이번에 전재익이 붙잡혔습니다.”

현태오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순간 노인의 눈이 번뜩이는 걸 빤히 지켜보며 말을 잇는다.

“본디 평항에 근거를 둔 폭력단의 머리인데, 송갈 쪽 군수업체에 몰래 줄을 대고 평항 치안을 몹시 흐리던 놈입니다. 지난가을에 제 다리를 날려 먹은 놈이기도 한데, 마마께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런 놈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십니까? 아드님이신 계연군께서 절친히 여기는 인물인데요.”

현태오의 말에 의양군이 입을 딱 다물었다. 꾹 다문 입술이 부들거린다.

“바로 어제 계연군께서 제게 연락해 무고한 사람을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막 잡아들여도 되냐고 항의를 하시더군요. 그간 몰래 쌓아 온 친분을 그렇게 드러낼 만큼 마음이 급하셨나 본데, 설마 제가 아무 근거도 없이 사람을 붙들었겠습니까? 증거가 차고 넘칩니다. 놈이 누구와 친분을 쌓아 어떤 도움을 받았으며 어떤 보답을 했는지.”

의양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옇게 굳어진 얼굴로 그저 막막히 현태오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식은땀마저 비어져 나오는 노인을 앞두고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은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마마. 마마께서는 마음에 차지 않는 인물과는 결코 겸상도 하지 않으시지요. 마마께서 저를 탐탁잖아하신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헌데 굳이 이렇게 저를 부르시면서까지 마마께서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제양입니까, 청송당입니까, 아니면 아드님입니까?”

의양군이 벼락을 맞은 듯 눈을 홉떴다. 부르르 떨리는 수염이 그의 속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현태오는 그를 바라보며 냉랭히 말했다.

“마마께서는 부를 사람을 잘못 고르셨습니다. 제가 아니라 아드님을 불러 처신을 잘 단속시키셨어야 합니다. 이미 8년 전에요.”

홉뜨고 있던 눈이 더욱 커진다.

아, 알고 있었군. 몹쓸 늙은이.

현태오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의양군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망나니 아들이 가장 최초에 송갈 측 군수업체와 연락이 닿았던 것이 8년 전이다.

그것은 고작해야 밥 한 끼 먹고 헤어진 아주 사소하고 내밀한 접촉이라, 바로 그때가 계연군이 길을 잘못 든 최초의 순간이었음을 아는 자는 본인, 그리고 본인과 아주 가까운 두셋 정도였다.

과연 의양군은 제 아들이 어찌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었을지가 궁금했는데, 그 의문이 이제 풀렸다.

아마 그때 바로 알지는 못했더라도 어느 시점에서는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노인의 성격에 아예 못 본 체하지는 않았을 터이나, 아들을 제대로 잡도리하기에는 지나치게 무른 아비였던 것이다.

이 어리석은 아비는 그 망나니를 결국은 단속하지 못하고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안일하게 눈을 감은 채 그저 오냐오냐 덮어 주기에만 바빴다. 쌓이고 쌓인 고름이 어떻게 터질지, 어느 가까운 자의 입이 다른 데서 열릴지도 모르고.

“자네가――.”

현태오를 손가락질하며 더듬거리던 의양군은 말을 맺지 못했다. 더 이상 말을 해 봐야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을 만큼은 현명했던 것이다.

계연군이 본격적으로 잘못된 길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5, 6년 전이고, 8년 전에는 그저 그들과 밥 한 끼 먹으며 얼굴을 텄을 뿐이었다.

그런 사소한 시초까지도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면 다른 것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손을 떨구며 분노로 숨을 헐떡이는 의양군을 무심히 바라보던 현태오가 문득 옆에 놓아두었던 봉투를 집어 상 위에 올렸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두툼했다.

의양군의 부릅뜬 눈에 불안이 깃들었다. 뚫어져라 그 봉투를 노려보는 그에게 현태오가 여상하게 말했다.

“계연군께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헌데, 한편에서는 송갈을 타도하기를 부르짖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과 돈을 주고받으니,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도통 헷갈리지 뭡니까. 그 와중에 우리 제양 사람들까지 희생되었으니, 아무리 뜻이 고매한들 방식이 이래서야 누가 납득하겠습니까?”

“――!”

푸르스름하게 질린 의양군의 이마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뚝, 뚝, 얼굴을 타고 흐른 땀이 부르르 움켜쥔 주먹 위로 떨어진다.

현태오는 한결같이 냉정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마. 저는 비록 저와는 방향이 다르다 하나, 켜켜이 쌓여 온 역사를 기반에 두고 송갈과의 적대를 주장하는 마마의 뜻은 존중하고 있습니다. 헌데 아드님께서도 마마처럼 결벽한 마음으로 뜻을 함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양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현태오를 무섭게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 의양군에게 현태오는 조용히 말했다.

“그만 물러나십시오, 마마.”

“――.”

의양군이 일순 숨을 멈추는 듯했다. 그를 차분히 바라보며 현태오가 말을 이었다.

“마마의 뜻이 그릇되지는 않았으나, 마마께서 계속 척화를 주장하시며 사람들을 이끄시기엔 그 뜻을 왜곡해 제 이익을 챙긴 아랫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마마의 참된 뜻이 어디에 있는지와는 별개로 이 잘못은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왜 그들의 잘못을 짐작하시면서도 덮어 두셨습니까?”

조용하지만 준열한 꾸짖음이었다. 의양군은 아무 말을 못 하고 현태오의 앞에 그저 굳어 버린 듯 앉아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이미 상황이 마마께 안 좋습니다. 계연군께서도 그간 쌓아 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 이번에 그 대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가실 수는 없습니다만, 마마께서 물러나시면 계연군에 대한 처분도―그리고 청송당에서 연루되어 있는 제자분들에 대한 처분도― 어느 정도 참작될 것입니다.”

의양군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핏기가 오른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다가, 움찔 떨리는 입을 열었다.

“이보게, 현,”

“다른 방법으로는 타협할 여지가 없습니다, 마마.”

그러나 현태오는 더 들어 볼 여지도 없다는 듯 도중에 그 말을 잘라 버렸고, 의양군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푸르스름하게 질린 얼굴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미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뒤덮여 있었다.

금세라도 노기충천하여 축객을 할 듯 현태오를 노려보며 숨을 헐떡이던 노인은, 그러나 결국은 앓는 듯한 소리를 삼키며 눈을 꾹 감고 말았다.

*

제양의 총리라는 직책은 무겁고 막중한 법이라, 총리직에 취임한 이후로는 현상원이 사사롭게 남편의 역할이나 아버지의 역할을 이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휴일조차도 아침부터 밤까지 공무 혹은 공무에 비등한 스케줄이 이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일 년에 딱 두 번, 모든 일정을 내려놓고 온 가족들과 마음 편히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하나가 설날이었고, 다른 하나가 그의 생일이었다.

그의 생일에는 저마다의 일로 늘 바쁜 가족들이 모여 반드시 함께 저녁을 먹곤 했는데,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설날 때와 마찬가지로 공무로 평항에 가 있는 장남은 이 자리에도 함께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설날에 해외에 있었던 삼남은 바로 얼마 전 귀국해 아버지의 생일 자리에는 참석할 수 있어, 장남만 빼고는 다 모였다. 비록 막내아들인 현태오가 늦게 오긴 했지만.

술을 좋아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평소 한두 잔밖에 마시지 않는 현상원은 일 년에 한 번인 본인의 생일만큼은 마음 놓고 술을 마셨는데, 뒤늦게 온 현태오가 식사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이미 불콰한 낯으로 술이 올라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의 마무리가 좀 늦어졌습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빕니다. 어머니도 함께 오래 건강하십시오.”

“오, 그래, 태오야. 너도 오래오래 건강하려무나.”

자리에 앉으며 인사하는 아들에게 현상원이 흐뭇하게 웃으며 덕담을 건넸다. 현태오와 함께 들어와 끝자리에 앉은 처조카 진문성과도 “이모부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오, 그래, 고맙다, 문성아.” 하고 인사를 주고받는다.

현태오는 무심히 시선을 돌려 이미 식사를 하고 있던 두 형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형님들도 별일 없으시지요?”

“그래, 나야 뭐 별일 있을 게 있나. 그런데 네가 요즘 많이 바쁜 것 같,”

“태오 이눔 자식! 너 왜 내 연락은 안 받고 계속 씹어?! 받아도 대뜸 끊어 버리고!”

현태주가 점잖게 대답하던 말을 자르며, 현태오가 식당에 들어온 순간부터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던 현태양이 이때라는 듯 벌컥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태오는 무덤덤한 시선을 던지며 대충 대답할 뿐이었다.

“바빴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서른 통이나 씹을 정도로 바빠?!”

“넌 무슨 볼일이 있었길래 서른 번이나 전화를 했어?”

들은 체 만 체하는 현태오 대신 현태주가 질린 낯으로 현태양을 쳐다보았다.

모처럼 아들 셋이 한자리에 모이니 그들이 투닥거리는 것조차 흐뭇하게 보였는지, 현상원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태양이 네가 이해를 해 주어라. 태오가 근래에 정말로 많이 바쁠 게다.”

현태양은 아직 퍼붓고 싶은 말이 한 바가지는 더 남은 듯했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자 차마 그 앞에서는 바로 퍼붓지 못하고 “예, 아버지.” 하고 불만스레 꾸역꾸역 말을 삼키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의양군마마를 뵈었다지.”

현상원의 물음에 현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를 찾으신다 하셔서 청송당으로 가 뵈었습니다.”

현상원은 그들의 사이에서 어떠한 대화가 오갔을지는 짐작이 간다는 듯 그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다 술잔을 들며 조용히 말했다.

“그분이 내일 오전 전하께 알현을 청했다 하더구나.”

“그러셨습니까.”

“음, 아마도 은거의 뜻을 비치실 모양이다. 청송당도 한동안 닫으신다 하던데, 과연 다시 여실지는 모르겠구나.”

그러시군요, 하고 현태오는 별반 놀란 빛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다는 얼굴인 그와는 달리 현태주가 뜻밖이라는 듯 허어, 하고 탄성을 흘렸다.

“설마 청송당까지 닫으려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의양군마마의 가장 큰 자랑거리 아니었습니까.”

“자랑거리면 뭐 합니까, 지금 뇌물이니 야합이니, 청송당 출신으로 얽힌 관료가 몇인데. 부끄러워서라도 닫을 만하지요. 게다가 뭐, 그냥 닫으시겠습니까. 전하께 아드님이나 구명해 달라 청하고 닫으시겠지.”

현태양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현상원은 그리 기껍지만은 않은 숨을 내쉬며 술을 삼켰다.

“그래도 의양군마마가 나와는 뜻이 다르긴 하나 학자로서는 결벽한 데가 있는 분이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야.”

“계연군을 너무 익애하셨습니다. 그래도 이걸로 계연군이 마음을 잡는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현태주가 아버지의 빈 잔에 새로 술을 채워 드리며 말했다. 글쎄요, 그 양반이 과연 마음을 잡을지, 하고 현태양이 비뚜름하게 중얼거린다.

“청송당 문하의 지인에게 듣기로는 엊그제 의양군마마가 처음으로 계연군을 크게 매질했다 하더이다. 예전에도 몇 차례 꾸짖은 적은 있으나 그렇게 대로해 매질한 적은 처음이었다고 하던데, 계연군 그자는 반성은 할 줄 모르고 외려 제 부친에게 역정을 내며 패악을 부렸다지요. 이 와중에 아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매질이냐고 제 부친 멱살을 붙들었다가 흠씬 맞고 쫓겨났다던데, 과연 마음을 잡기나 할지.”

“허……?! 아무리 그래도 계연군이 그토록 무도하단 말이냐?”

“지금 제 수족같이 부리던 놈들 죄다 잡혀가, 어릴 때부터 목매고 쫓아다녔던 여자는 딴 놈이랑 결혼해, 산더미처럼 쌓인 제 비리는 언제 터져 나올지 몰라, 아주 똥줄이 타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텐데 그자가 제정신이겠습니까. 심지어는 정운태 그 약쟁이 깡패 놈이랑 나란히 약도 빤다던데.”

하여간 답도 없는 놈이야, 하고 현태양이 혀를 차는 옆에서, 현태오는 별다른 기색 없이 묵묵히 식사만 했다. 그런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상원이 말했다.

“태오야, 네가 이번에 참 고생이 많다.”

“고생이랄 것 있습니까.”

현태오는 고개를 저었으나, 아까부터 아들을 요모조모 살피고 있던 주선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너 요즘 얼굴이 왜 이러니? 고작해야 1, 2주 못 본 사이에 어쩜 이렇게 말랐어?”

“좀 바빠서 그런가 봅니다. 괜찮습니다.”

현태오가 대수롭잖게 대꾸했지만 현태주가 말을 받았다.

“그래, 너 너무 과로하는 것 같다는 얘기가 내 귀에까지 들어오더라. 요즘 바쁘긴 하겠지만 잠도 몇 시간 안 잔다던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아닙니다. 딱 적당합니다.”

“딱 적당은, 들어 보니까 너 다른 사람한테 시켜도 되는 일까지 네가 한다는 것 같던데. 일부러 일 찾아가면서 더 하는 것 같다고 그러더만. 왜 그래? 문성아, 요즘 사람 부족하니? 사람 충원 필요해?”

말하기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동생 대신 사촌 동생에게로 화살을 돌리자 식탁 끝자리에서 잠자코 식사하고 있던 진문성이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왜 태오가 온갖 사소한 일까지 제가 다 도맡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 잘못된 소문이야?”

“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진문성이 애매하게 대답하며 현태오를 보았다. 옆에서 누가 떠들건 말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양 식사를 하고 있던 현태오가 드디어 미간에 주름을 하나 그었다.

“할 만하니까 하는 겁니다. 제 몸은 제가 잘 챙길 테니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저놈 저거 걱정해 줘도 틱틱거리는 거 보소, 하고 현태양이 혀를 끌끌 찼다. 그 와중에도 아들이 염려된 주선미는, 더 이상 뭐라고 해 봐야 들은 체도 안 할 아들의 성질머리를 떠올리곤 그냥 알아서 챙겨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정혜궁에서 삼을 보내 주셨더라. 아주 좋은 삼이던데, 그거나 고아 줄 테니 마시렴.”

정혜궁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현태오의 눈썹이 꿈틀했다.

“됐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드십시오.”

“그래, 워낙 넉넉하게 보내 주셔서 우리 가족 다 먹어도 되겠어. 그렇지, 너희 아버지 생신이라고 세진이도 꿀을 좋은 걸로 구해서 보내 줬던데, 그 꿀에 삼을 절여서 세진이랑 현진이한테도 좀 나눠 줘야겠다.”

현진이가 단걸 좋아하니까 꿀에 절여 주면 잘 먹을 거야, 하고 중얼거린 주선미는, 어느 결에 낯빛이 삭막해진 아들을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현진이는 잘 지내고 있지?”

“……. 그럴 겁니다.”

현태오가 냉랭하게 대답하자 주선미가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럴 겁니다라니, 무슨 일 있니?”

“아무 일 없습니다. 바빠서 한동안 못 봤어요.”

“어머, 바로 근처에 사는 애를 못 볼 만큼이나 바쁜 거야?”

“예, 그만큼 바쁩니다.”

현태오는 단호하게 잘라 말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간에 진 주름이 사라지지 않는 게, 입맛이라도 떨어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가 좋아하는 육회에도 거의 손을 안 댔다.

아들을 빤히 쳐다보던 주선미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너네 싸웠,” 하고 입을 열려던 찰나, 별안간 때아닌 웃음소리가 식당에 울렸다.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오늘의 생일자 현상원이었다.

“그래, 태오야. 우리 아들, 바쁘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 주렴. 내가 늘 너희들한테 고맙고 미안하구나, 우리 아들들. 어서 나라가 좀 평안해져야 할 텐데……. 그래도 이제 슬슬…….”

너털웃음을 웃으며 아들들을 흐뭇하게 둘러보는 현상원은 슬슬 말이 꼬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얘, 늬들 아버지 이제 그만 드셔야겠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일정도 있는데. 얘, 태주야, 그리고 문성이도 좀 도와주렴.”

주선미가 얼른 현태주와 진문성에게 눈짓을 했고, 둘은 현상원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버지,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쉬세요.”

“응? 아니다, 아니야. 모처럼 이렇게 모였는데 좀 더 같이 있어야지.”

“어머니 피곤하시대요.”

“뭐?! 그래, 그럼 쉬어야지.”

아버지를 움직일 줄 아는 아들의 말에 애처가인 현상원은 두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보, 여보, 그만 쉬러 갑시다, 하고 아내를 부르는 그를 따라 주선미는 남편을 부축하는 두 남자와 함께 걸음을 돌렸다.

“그럼 우린 들어간다. 너희도 일찍 쉬렴. ……태오 너, 현진이 괴롭히면 안 된다.”

아들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들어가면서도 주선미는 노파심이 솟는지 현태오에게 당부했고, 현태오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미간만 구겼다.

총리 부부의 침실은 2층에 있었다. 지금은 총리 관저에 머물고 있어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 정돈해 두고 있었다.

“아휴, 집으로 돌아오면 이제 방도 아래층으로 옮겨야겠어. 나이가 드니 요만한 계단도 오르기가 힘드네. 고생했어, 너희도 가서 쉬렴.”

침실로 들어와 한숨을 내쉰 주선미는 현상원을 침실의 의자에 앉히고 도로 나가 보려는 두 남자를 배웅하다가 “그런데 문성아.” 하고 불렀다.

“태오, 현진이랑 요즘 안 보니?”

멈칫한 진문성은 모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요새 많이 바쁘셔서요.”

“싸운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그냥 좀 사소하게 안 맞으시는 부분은 있을지 몰라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심쩍다는 눈치로 진문성을 쳐다본 주선미는 그 말이 온전하게 믿어지지는 않았는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태오가 맞추기 힘든 애긴 하지……. 사실 태오가 정말로 현진이랑 같이 평생 살 생각도 아닐 테고, 떨어질 때는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현진이 마음 상하게는 하지 않게끔 해. 걔가 누구 때문에 신관도 그만두게 됐는데, 관계 끊을 땐 끊더라도 섭섭하게 만들지는 말아야지.”

“예.”

진문성은 애매하게 웃는 듯 마는 듯 대답했다.

“어쨌든 알았어. 그만 가서 편하게 놀아. 현진이는 내가 따로 좀 챙겨 주든가 해야겠다.”

주선미는 현태주와 진문성에게 손짓해 나가 보라고 했고, 둘은 인사하고 침실에서 나왔다.

“하긴 좀 있으면 태오도 평항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전에 현진이랑도 정리를 해 둬야겠네.”

계단을 내려오면서 현태주가 여상하게 말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 굳이 더 묻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평생 책임지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도 않았고 당연히 예상되었던 결말이라는 투다.

진문성은 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며 현태주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식당으로 돌아왔을 때 현태양은 홀로 자작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고, 현태오는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의자가 반쯤 빠져 있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버지가 나가자 본인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전화가 와서 앉은 듯했다. 조사에 필요한 검사 하나를 맡겨 둔 연구원에게 연락이 온 모양이다.

“오, 문성아. 여기 앉아, 여기.”

현태양이 대각선 빈자리를 두드리며 진문성을 부르더니 새 잔을 집어다가 술을 따라 주었다. 진문성은 그리로 가 앉아 잔을 받아 들었다.

“아이고, 아버지도 이제 늙으셨네, 고작 두 병 드시고 취하시다니. 자, 남은 건 우리가 마시자.”

현태양은 제일 먼저 자신의 잔을, 그리고 형제들의 잔을 이어서 채우더니, 부모님이 떠나자 그제야 좀 숨통이 트인다는 듯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래, 어떻게들 지냈어? 내가 들어오자마자 형님이랑 너희랑 술 한잔하려 했더니 이건 뭐 온 세상 떠들썩하게 바쁘다 하니까 맘 편히 부를 수가 있어야 말이지.”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님도 잘 다녀오셨어요?”

“오, 그래. 좋은 거 많이 보고 듣고 배우고 왔지.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저놈은 얼굴이 왜 저렇게 상했어? 낯도 까칠한 게, 뭐 속 썩는 일 있냐? 일이 잘 진행이 안 돼?”

“아닙니다. 그냥 좀 많이 바빠서 그러신가 봅니다.”

전화하는 현태오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현태양에게 진문성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다소 미묘한 눈길로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바쁜 것은 사실이다.

하루걸러 일이 터지는데 안 바쁠 수 없다. 잠도 서너 시간 눈 붙이는 게 고작이었다.

다만, ‘정말로 잠을 서너 시간도 채 못 잘 만큼 바쁘냐’고 묻는다면, 그 부분은 정확하지 않았다.

현태오는 기본적으로 유능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의 능력에 부칠 만큼 일하는 법이 없었다. 일의 수준과 본인의 능력을 저울질하는 데에도 뛰어났고, 타인의 능력을 파악해 일을 분배하는 데에도 뛰어났기에, 여태 그가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적은 많아도 그가 정말로 무리를 했던 적은 없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시간을 잘 활용해 내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근래 현태오는 진문성이 보아도 이상하다고 여길 만큼 어마어마한 기세로 일을 끌어모았다. 비단 일의 양이 많은 것뿐 아니라 굳이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본인이 한 번 더 손을 대곤 했다. 마치,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모조리 다 써 버려야 하는 것처럼.

얼마 전에도 그랬다. 아무래도 좀 지나치다 싶어서 진문성이 조심스레 제지를 건 적이 있었다.

‘각하, 오늘 해 둬야 할 일은 다 되었습니다. 오늘은 그만 쉬시지요.’

그러자 태블릿에서 시선을 뗀 현태오는 밤 9시를 넘어가고 있는 시계를 흘끗 보더니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주었다.

‘음. 아직. 오전에 김이우 청감이 보내 준 자료나 한 번 더 확인해 보지.’

‘조금 전에 제가 다시 확인 마쳤습니다. ……. 아니면, 아직 시간이 좀 이른데, 차라리 오늘 유현진 씨 댁에 들르시는 건 어떠실까요.’

진문성이 말을 꺼낸 순간 태블릿 위에서 움직이던 펜이 멈췄다.

얼음 같은 눈길이 진문성에게 꽂혔다.

‘……왜. 그놈한테 무슨 연락이라도 왔어?’

목소리마저 삽시에 영하로 떨어진 듯했다. 진문성은 살짝 낭패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시간이 날 때, 미뤄 둔 일을 처리하셔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뚫어져라 진문성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바빠.’

‘하지만 오늘은 더는,’

‘문성아.’

짤막하게 이름을 부르는 서늘한 목소리에는 선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바쁘다니까.’

‘……, 예.’

진문성은 더 이상은 그 화제를 꺼내지 않고, 잠자코 그가 말했던 자료를 다시 넘겨주었다. 그리고 개운치 않은 심경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현태오가 유현진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유세진을 통해서 들었다.

차마 대놓고 현태오 본인에게는 퍼붓지 못한 욕을 진문성에게 둘러 둘러 퍼부어 댄 유세진은, 「그래도 어찌 됐든 이제 곧 끝을 내겠다고 했다니 한시름 놨네요. 후딱 얘기 마쳐 버리고 두 번 다시 안 봤으면.ㅜㅜ」이라고 문자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아, 결국 마무리를 짓기로 하셨나, 진문성은 안도와, 불안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기분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의 결정을 인지했다.

생각해 보면 그간 현태오가 유현진을 대한 태도가 이상한 것이었고, 이렇게 된 마당이면 이 선에서 마무리 짓고 끝을 맺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현태오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도 당연했다.

현태오의 성격에,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네가 속였네 어쨌네 구질구질하고 소모적인 언쟁을 나눌 리가 없었다. 결정을 내리고 나면 단호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실제로, 현태오는 유현진에게 곧 마무리를 짓겠다는 연락을 한 그날 이후로 유현진의 집에 가지 않았다. 늘 매일같이 잠깐씩이라도 들르던 게 거짓말처럼 아예 딱 걸음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계속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제대로 끝을 맺기 위해 찾아가지도 않은 채.

실제로 바쁘긴 했다. 정말로 바쁘긴 했지만, 아무리 바쁘다 해도 며칠이나 계속 2, 30분 시간도 못 낼 만큼은 아니었다.

결론이 이미 나 있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쯤 유현진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애매해하고 있을 것이며, 현태오 역시 해야 할 일을 미뤄 두는 습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 상태다.

‘…….’

밉살스러운 놈 마지막까지 속이나 좀 타 보라는 건가……, 아니면…….

복잡스런 심경으로 현태오를 바라보던 진문성은 문득 엊그제의 일을 떠올렸다.

송갈 보좌관의 처분 때문에 송갈 삼왕자를 찾아갔던 때의 일이다.

그들이 유현진과 마주치지 않은 지 며칠이나 지난 때였다.

포목점에 외출했다가 돌아왔다는 왕자 및 그 일행을 정혜궁의 응접실에서 마주쳤고 그 일행 중에는 통역사인 유현진도 끼어 있었다.

며칠 만이었다. 고작이라면 고작인 시간인데도 그간 워낙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쳐서인지 무척 오랜만에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뜻 눈이 마주친 유현진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진문성은, 왕자의 뒤편에 반듯한 자세로 서서 시선만 약간 떨어뜨리고 있는 유현진을 훑어보았다.

약간 부어 있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유현진은 그다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다소 창백하고 냉담해 보이는 낯에는 거리감마저 느껴졌다. 하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상황이 확실하게 끝나지도 않고 질질 이어지고 있으니 유현진도 마음이 좋을 리는 없을 터였다.

진문성은 저도 모르게 현태오를 곁눈질했다. 언제 어디서든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는 남자가 유현진의 그 기색을 모를 리 없었으나, 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미사담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아무렇지 않은 기색에 일단은 안도하며, 진문성은 묵직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다.

송갈 왕자의 보좌관으로 함께 동행했던 내통자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유현진은 그저 낯빛만 안 좋을 뿐 별다른 내색도 없이 단정하게 서 있었고, 현태오는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미사담과의 이야기는 끝이 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태오와 함께 진문성도 물러나려고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자신이 이유 없이 긴장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진문성이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숨을 내쉬었을 때,

얼결에 시선을 들던 유현진이 진문성과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진문성이 아니다. 진문성의 앞에 서 있던 현태오와 마주쳤다.

유현진의 눈이 약간 커졌다. 뚫어질 듯 현태오를 보는 말간 유리알 같은 눈이 일순 반들거리는가 싶었다. 그리고 직후, 어렴풋이 그 창백한 낯이 구겨지더니 유현진이 불에 덴 듯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진문성은, 바로 그 순간 숨을 죽이고 말았다. 현태오에게서 일시에 뻗어 나오는 사나운 기세가 발밑을 얼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목덜미를 잡아채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험악한 기운이 그곳을 메웠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였다.

곧 유현진에게서 시선을 돌린 현태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곳에서 나왔고, 진문성도 잠자코 그 뒤를 따랐다.

‘――저렇게까지 싫어하시는데, 호락호락 끝내 줄 수야 있나.’

나직이 이를 갈며 내뱉는 소리가 언뜻 들린 듯했지만, 진문성은 차마 다시 물어보지 못했다.

그 뒤로 비슷한 날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일을 하고, 일을 하고, 또 일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현태오의 기색은 나날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줄곧 옆에서 익숙하게 지내 왔던 진문성조차도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목이라도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오늘도 산더미 같은 일을 끝내고 남의 일까지 끌어다 하다가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식사 자리에 늦고 만 것이었다.

현태오가 지금 막 끊고 있는 전화도 일 관련 전화였다.

저 성격상, 이제 부모님도 들어가셨으니 본인도 일어나서 제 방으로 갈 터였다. 그리고 또 일을 하겠지. 진문성은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계를 보며 생각했다.

“아니 무슨 일 연락을 이 시간에 해. 그러니까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지지. ――가만, 생각해 보니 넌 이 시간까지 전화를 받는 놈이 내 전화만 그렇게 씹었어?”

도끼눈을 뜨며 따지는 현태양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현태오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대로 일어서려는 기색이다.

와, 이제 대놓고 그냥 씹네, 하고 현태양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는 현진이도 연락이 안 되더만, 걔는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

입가를 닦던 현태오의 손이 멈칫했다. 냅킨을 내던지듯 내려놓은 그가 현태양을 쳐다보았다. 어찌나 싸늘한지 현태양이 영문도 모르고 움찔할 정도였다.

“그놈한테는 왜 자꾸 연락합니까?”

“뭐?”

“해외까지 나간 사람이 그놈한테 계속 연락하는 이유가 뭐예요? 형님이 저 모르게 유현진이랑 무슨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그 사나운 기색에 움츠러들었던 현태양은 아연해져 일순 말을 못 했다. 아니 사연이라니, 무슨 내연남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 버벅거리던 현태양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사연은 무슨, 아니, 어릴 때 같이 살았던 내 친동생 같은, 아니 친동생보다 더 살가운 동생을 챙기는 것도 문제냐? 어? 게다가 지금은 너랑도 얽혀 있는 판에? 그럼 친동생보다 더 친동생이라고 봐야지!”

친동생보다 더 친동생은 뭘까, 진문성이 의아한 표정을 짓기 무섭게 현태양이 “그래, 너! 너 같은 거 말야!”라고 진문성을 가리키며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헷갈리는 발언을 했다.

“야, 너도 술 그만 마셔야겠다.” 하고 현태양에게서 술병을 빼앗은 현태주가 혀를 차며 현태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현진이랑 한참 못 봤네. 잘 지내고 있지?”

“저도 한동안 못 봤다니까요.”

현태오의 대답이 오늘따라 한층 험했다.

화내는 법도 없을 만큼 냉정한 놈이 어쩐 일인가 싶어 희한한 듯이 쳐다본 현태주는 “그래, 네가 요새 많이 바쁘지.” 하고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이눔아,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너 얼굴 진짜 안 좋아. 속이 푹푹 썩은 놈 같다. 그러고 보니까 너 재활은? 잘돼 가고 있어?”

현태양이 현태오를 사납게 쳐다보면서도 내심 걱정스러웠는지 불퉁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팡이는 어디 갔어, 하고 새삼스럽게 두리번거린다.

“요즘 안 갑니다. 거의 다 나았습니다.”

“뭐? 무슨 헛소리야, 그게 어떻게 벌써 다 나아. 최소 몇 달은 더 다녀야 지팡이나 뗄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태였는데. 너 네 맘대로 그렇게 재활 막 빠지고 그럼 안 돼.”

현태양이 의사의 면모를 되찾고 엄하게 다그치면서 슬그머니 현태주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왔다. 대꾸도 하지 않는 현태오에게 “야, 이게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니라니까? 너 그러다 평생 지팡이 짚고 다녀, 인마!”라고 더럭 외치곤 진문성을 돌아보았다.

“야, 문성아. 너라도 쟤 좀 챙겨서 데려가. 저놈이 제 회복력 좀 괴물 같다는 것만 믿고 너무 막사는 것 같다.”

“아, 예. 그런데 요전에 병원에 갔을 때 텀을 좀 길게 두고 와도 될 것 같다고는 했습니다. 한 달 뒤에 와서 다시 체크해 보자고…….”

“뭐 한 달?! 그럼 거의 다 나았다는 말인데 무슨 소리야. 정 박사가 정말로 그래?”

현태양이 술을 따르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현태오가 치료차 수도로 왔을 때 자신의 동문이자 국내에서 한 손에 꼽힌다는 외과 의사에게로 동생을 밀어 넣었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정 박사가 그렇게 허술하게 환자를 봐 줄 사람이 아닌데……? 아니, 평생 지팡이 짚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았던 놈이 그새 다 나았다고……? 이놈이 아무리 무쇠처럼 튼튼해도 그렇지 무슨 말도 안 되는…….”

현태양은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로 눈을 껌벅이며 술을 홀짝였다. 이놈 갖고 논문 쓰면 신박한 게 나올 수도 있겠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멍하니 천장의 조명등을 쳐다보다가 불현듯,

“아! 현진이가 낫게 해 줬구나!”

그제야 알겠다는 듯 술잔으로 상을 두드리며 외쳤다.

갑작스럽게 나온 이름에 현태오가 눈썹을 꿈틀했다.

현태양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얼굴로 흔흔히 “그래, 그래, 현진이 능력이면 그럴 수 있지.”라고 중얼거리며 술을 홀짝이다가, 별안간 다시 정색을 했다.

“……아니다. 걔 너랑 잤댔잖아. 그럼 신성가호도 깨졌을 테니 은사도 잃었을 텐데. 그럼 현진이가 고쳐 준 것도 아닐 텐데.”

도로 의문의 구렁텅이에 빠져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쥐어뜯는 현태양을 현태오가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유현진이……? 설마 그럴 리가요.”

“그래, 아니지. 신성가호 없이는 은사도 못 쓰니까. 그럼 넌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을 수 있느냐가 문젠데…….”

이놈을 정밀 검사를 한번 받게 한 뒤에 그 자료를……, 어쩌면 얘는 심장도 되게 특이할지도 몰라……, 하고 현태양은 눈을 빛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던 현태오가 물었다.

“그 은사라는 게, 그 정도쯤 되는 부상도 치유할 수 있을 만큼 효능이 좋습니까?”

“글쎄, 사람마다 다르다고 그러던데. 그런데 현진이는 상당히 능력이 좋았어. 그러니까 그 나이에 벌써 정신관을 앞두고 있었지.”

그걸 네가 판판이 깨 놨지만, 하고 타박을 덧붙이는 현태양이었다. 그 옆에서 현태주가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신성가호를 떠나서 어쨌든 현진이가 낫게 해 준 건 아닐 거야. 엊그제도 송갈 사절단 일행이랑 가는 걸 멀리서 봤는데, 멀쩡히 잘 걸어가고 있었거든.”

현태오의 시선이 현태주를 향했다. 점차 그의 낯빛이 기묘해지고 있었다.

“멀쩡히 잘 걷는 게 절 낫게 해 주었는지 여부랑 무슨 상관입니까?”

“음? 아, 그래, 몰랐구나. 현진이는 이능으로 상대를 낫게끔 해 주는 대신 그 상처를 제 몸으로 옮겨 오거든. 말하자면 병을 없앤다기보다는 제가 대신해서 앓아 주는 거지.”

그래서 그런지 그 녀석이 이능을 얻은 뒤로는 늘 골골거려, 하고 현태주가 혀를 찼다.

그런 현태주를 뚫어질 듯 쳐다보던 현태오가 불쑥 내뱉었다.

“대신?”

“그래. 물어보니까, 그래도 원래 사람이 앓던 것보다는 더 가볍게 앓는다면서 괜찮다고 웃기는 하던데, 현진이 그놈도 은근히 착해 빠져서 고생이야. 생긴 건 얼음 인형처럼 생긴 놈이, 듣자 하니 아픈 사람이 찾아와서 매달리면 신전 눈치를 보면서도 슬쩍슬쩍 치료를 해 줬다지 뭐냐.”

그놈은 차라리 신성가호 없어진 게 잘됐어, 하고 중얼거리며 현태주가 술을 주욱 들이켰다.

그때,

“……아.”

별안간 뭔가 떠오른 듯 진문성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결에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멈칫하며 현태오를 보았다.

현태오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현태주를 보고 있었다.

미동도 없다. 숨 쉬는 것마저 잊은 듯 호흡을 하는 기미조차 없었다.

그저 정적 속에서 멈춰 있을 뿐.

술잔을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고깃점을 집던 현태주가 뒤늦게야 이상한 기미를 알아채고 의아하게 현태오를 보았다. ‘일단 혈액 검사부터’ 운운하며 저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현태양도 뭔가 이상했는지 시선을 돌린다.

“왜 그래. ……태오야.”

현태주가 의아하게 물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인 순간,

석상처럼 그대로 멈춰 있던 현태오가 천천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툭, 머리가 벽에 닿았다.

“……이 정신 나간 새끼가……, 그래서 다리를 그따위로 절뚝거리고…….”

“태오야?”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뚫어져라 허공을 노려보는 현태오의 눈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뭔가를 눌러 참는 듯 입을 악다물고 있던 현태오는, 어느 순간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기어이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이 새끼가 진짜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언제 저더러 대신……!”

“태오야, 야, 왜 그래?”

갑자기 더럭 화를 내는 현태오를 보고 놀란 현태주가 말을 건넸다. 다시 입을 다문 현태오는 험하게 인상을 그은 채 눈을 감았다. 이마에 핏줄까지 불거져 나온 그를 보고 심상찮은 눈치로 고개를 기울이는 현태주의 옆에서 현태양이 큰 눈을 껌벅였다.

“갑자기 왜 그래. 현진이가 뭐 어떻게 했어? 널 낫,”

현태양은 말을 하다 말고 아리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일단 신성가호가 없으면 치유할 수 있었을 리 없고, 설령 했다손 치더라도, 치료해 줬다고 화내는 것도 이상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얼굴로 현태오의 눈치를 살피던 현태양은 일단 그를 다독이듯 술병을 들었다.

“자, 자, 우선 이거나 마시고 좀 진정해 봐.”

술을 따라 건네자 관자놀이를 누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현태오가 그 잔을 받아 한 번에 삼켰다. 한 잔 더 따라 주자 그것도 단숨에 삼킨다.

“야, 무슨 일인지 몰라도, 현진이한테 너무 박하게 굴지 마. 어찌 됐든 한창 잘나가다가 너 때문에 신전에서 쫓겨난 앤데, 그 상황에서 더 괴롭게 만들면 되겠냐.”

현태양이 타이르듯 말했지만 현태오는 쳐다보지도 않고 허공만 노려볼 뿐이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정확히 그 화를 풀 상대를 찾지 못하고 안에서만 분이 맴도는 듯, 단단히 악문 턱에서 힘이 풀리지 않았다.

현태양은 다시 술잔을 채워 주며 혀를 찼다.

“현진이 안 그래도 힘든 애야. 어차피 너도 상황이 그렇게 돼서 현진이 거둔 거지, 네가 정말로 걔랑 살려고 책임지겠다 한 거 아니잖아. 응? 그러니까 애 더 괴롭히지 말고, 사람들 말들 좀 조용해지면 넉넉하게 챙겨서 잘 보내 줘. 그러잖아도 짝사랑하느라 오래도록 마음앓이 해 온 애 더 힘들게 하지 말고.”

술잔을 들던 현태오의 손이 멈추었다.

그때까지 허공을 응시하던 눈이 천천히 현태양에게로 돌아갔다. 빤히 현태양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꿈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나직한 헛웃음을 뱉었다. 씨발,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들릴락 말락 한 혼잣말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놈이 뭘 해요?”

“아 마음앓이 했다고. 사제님 되기도 전부터 짝사랑으로 괴로워했다잖아. 그럼 얼마나 오랫동안 힘들었겠냔 말이야.”

현태양이 술잔으로 상을 탕탕 치며 한탄했다.

그런 현태양을 보며 현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 위로 서서히 기묘한 빛이 번졌다. 그것은 몹시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것 같은, 말이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혹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다시금 되새겨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유현진이요? ……누구를.”

현태오가 나직이 물었다. 바싹 말라 버린 목에 걸렸다가 나오는 것처럼 목소리가 까끌했다.

“그것까진 모르지. 근데 많이 힘든가 봐. 세진이가 울면서 매달리더라, 현진이가 옛날부터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데 너랑 그렇게 엮여 버려서 힘들어한다고, 도와달라면서 애가 울어.”

현태오는 말없이 현태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차차 표정이 사라졌다.

놀람도, 어이없음도, 조금 전까지 어지럽게 들끓던 울분조차도 가라앉아, 거기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씻어 낸 듯 아무것도 없는 무표정.

옆에서 보고 있던 현태주가 흠칫하더니 낯빛을 굳히며 무심결에 몸을 뒤로 물렸다. 술잔을 넘기며 안줏거리를 집어 들던 현태양조차 그 기이한 공기를 느꼈는지 시선을 들다가 얼어붙는다.

현태오가 표정이라곤 사라져 버린 얼굴로 현태양을―혹은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어느 순간 무시무시하게 달려들어 한입에 찢어발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소름 끼치는 공기를 두른 채.

얼음 같은 정적이 깔렸다.

숨 쉬는 소리조차 귀에 걸릴 것 같은 그 고요한 정적 속에서,

“유현진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나랑 엮여서, …―.”

현태오가 느릿하게 되읊조렸다. 머리에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구겨 넣는 것처럼 중얼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들어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현태오가 입을 열었다.

“문성아. 너도 알고 있었어?”

얼음 모래가 들어찬 듯 버석거리는 목소리다. 멈칫 어깨를 움츠린 진문성은 깊이 숨을 들이쉰 뒤 “예.” 하고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유세진 씨가 스치듯이 얘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래.”

짤막한 대답 뒤로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곧 허, 하는 짤막한 헛웃음이 뒤따랐다.

“이 새끼가 이제 보니 골 때리는 새끼네……. 사람을 제대로 돌게…….”

현태오가 벽에 기댄 채로 가볍게 머리를 벽면에 툭, 툭 두드렸다. 한 번씩 벽면을 울릴 때마다 눈매가 번들거리는 빛을 더한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선뜻 입을 열 수 없어 심상찮은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던 현태양과 현태주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만다.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도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누구래?”

여전히 시선은 허공에 고정시킨 채 현태오가 나직이 물었다. 진문성이 곧 대답했다.

“거기까진 듣지 못했습니다.”

현태오의 눈동자가 진문성에게로 향했다. 칼날처럼 저미는 시선이 꽂혔다.

“진문성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알아봤습니다만, 짐작 갈 만한 상황이나 상대가 없었습니다. 유세진 씨의 말에 따르면 꽤 오래전부터 안 남자……인 듯한데, 신학교 입학 전에는 유현진 씨가 딱히 과외 활동을 하지 않아 아마도 같은 학급이나 학교 안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하지만 확실치 않습니다.”

“남자.”

현태오의 관자놀이가 꿈틀, 하고 움직였다. 짧은 침묵 후 헛웃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 새끼가 게이 잡지에 줄까지 쳐 가면서 공부했던 게 이제 보니 헛짓이 아니었나 보네. 언제가 됐든 아주 잘 써먹으시겠어.”

비틀린 입매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천천히 멎어 버리고, 그곳에는 다시 고요한 정적만 남는다.

현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런 끝에, 허……, 하고 나직한 헛웃음을 뱉으며 엄지로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가만있자, 어떻게 찾아내나……, 하고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야, 현태오. 너 왜 그래? 누굴 찾아내려고, 현진이가 좋아한다는 사람? 찾아내서 뭐 하려고?”

숨을 죽인 채 미심쩍게 그를 보고 있던 현태양이 물었다.

뭔지는 몰라도 본인이 말실수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 밟은 것 같지만 일말의 책임은 져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불안스레 현태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말을 이었다.

“너 현진이한테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야, 찾아서 도와줄 거 아니면 괜히 건들지 마.”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현태오가 현태양을 보았다. 일렁거리는 눈동자 위로 어이없다는 빛이 스쳤다.

“도와요? 뭘 말입니까?”

“――, 그러니까, 현진이,”

“그놈을 도우라고요? ……그 마음앓이 한다는 놈이랑 잘되게?”

여상하게 되묻던 현태오가 문득 피식 웃는 듯했다.

그 얼굴을 보고 일순 안심하며 어, 라고 하려던 현태양은 바로 다음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현태오를 바라보는 현태양의 낯빛이 점차 푸르스름하게 질려 갔다. 생전 처음 보는 어떤 두려운 것을 마주친 양, 얼어붙은 현태양이 입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쾅――!!!

육중한 대리석 식탁이 발길질 한 번에 넘어갔다. 접시와 그릇, 잔 따위가 어지럽게 흩어져 깨어지는 소리들이 귀청을 찢을 듯 요란하게 울렸다.

쏟아지는 음식이며 술 따위에 흠뻑 젖어 버린 현태양이 아연히 현태오를 본다. 현태주 또한 마찬가지다.

현태오 역시 가슴 위로 병째 떨어진 술을 뒤집어쓴 채, 식탁을 걷어차 버린 다리를 다른 다리 위에 겹치며 후우――, 긴 숨을 내쉬었다.

“어디 보자……, 그럼 그놈을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느릿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조명등의 불빛을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도 불안정하게 어른거린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현태오가 선선한 투로 말했다.

“딱히 뭐 도와줄 것 있습니까. 그놈이랑 만나서 끝내자고 얘기를 마치고 나면, 그놈은 이제 엮인 상대도 없겠다, 속인이겠다, ……마음에 든 놈 찾아가면 되겠네.”

식당 안은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눈을 부릅뜬 채 현태오를 쳐다보고 있던 현태양이 “태오 너,” 하고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현태주와 눈을 마주쳤을 따름이다.

그 고요함 속에서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현태오가 툭 내던지듯 말했다.

“문성아. 어떻게 생각해.”

“――.”

진문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보았다. 현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진문성을 쳐다본다.

“이것도 내가 몰아세워서 그런 거냐?”

진문성은 입을 열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현태오의 눈이 소름 끼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뭔가 하나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네 말을 듣고, 그래 좀 맞는 말이다 싶기도 해서――내가 그놈을 너무 궁지로 몰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좀 잘못했다 싶었는데,”

한마디, 한마디, 느릿하게 내뱉는 목소리가 마치 시커먼 동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낮고 서늘했다.

“이건 제대로 좀 따져 봐야 될 문제 같거든.”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