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15)

12.

「사아랑하아는 우리 현진 형, 생일 추욱하아하압니다아~」

자정이 되기 무섭게 문자가 날아들었다.

아까 저녁부터 ‘야근만 아니면 갈 텐데 보아하니 오늘도 별 보며 퇴근할 각’이라며 울멍울멍 연락하던 유세진이 기어이 아직도 퇴근을 못 했나 보다. 요즘 공공 기관치고 한가한 데가 없다고, 이게 다 정초부터 나라를 뒤집어 놓은 몹쓸 놈들 때문이라고 욕을 욕을 하며 유세진은 내일 저녁을 같이 먹자고 기약했다.

따지고 보면 그 ‘내일 저녁’이 바로 생일 당일 저녁이니 함께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는 뜻에 딱 부합하고 있었지만, 유세진은 요새 유현진이 못내 마음 쓰이는지 생일이 시작되는 0시가 되기도 전부터 안달이었다.

이 녀석이 올해 따라 유난이다 싶었지만,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자신의 처지가 스스로 생각해도 불쌍했다. 직장도 잃고 터전도 잃고 사랑도 잃고(이건 애초부터 있었던 적도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시무룩해질 유현진을 염려한 게 유세진뿐만은 아닌지, 저 문자가 온 지 1분도 안 돼서 「현진이 생축! 이따 맛난 거 먹자.」라는 용건만 간단한 제상아의 문자가 날아왔다.

이렇게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되는데, 난 지금 아무렇지 않게 잘 있는데, 이 예쁜 것들…….

유현진은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 모아 두었던 먼지 조각을 조금씩 뜯어 나비 앞에 놓아 주며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비도 있고 말야…….

“……너 데려가도 되냐고 물어보면 현태오 씨가 허락해 줄까……?”

윙윙거리며 돌아다니는 나비의 등(윗면)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중얼거렸다. 이 애틋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비는 유현진의 손길을 저버리고 소파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허무하게 허공을 쓰다듬던 유현진은 휴……, 하고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모로 눕고 말았다.

통창 밖으로는 노란 정원등에 비친 나무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지 살랑살랑 흔들리는 마른 가지가 예쁘다. 유현진도 그렇거니와 현태오도 저 정원을 마음에 들어 해, 지금 유현진이 누워 있는 딱 이 자리에 앉아 즐겨 바라보곤 했었다.

“…….”

원래라면 이따 밤에는 현태오와 함께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고대하던 밤을 맞이할 예정이었는데. 꿈과 희망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보고 싶었다.

집에 있는 동안, 혹시 뭔가 작은 소리라도 나면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며 현관 쪽을 보았다. 그러다 바람에 문이 흔들리거나 돌멩이 따위가 구르다 부딪친 소리라는 걸 깨닫고는 시무룩하게 처지곤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가 이 집에 찾아온다면, 그것은 마지막을 고하러 오는 것이다. 유현진과의 관계를 정리할 일과, 비산도로 보내려는 일과, 이제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는 일을 전하러.

그래서 보고 싶었고, 보고 싶지 않았다.

유현진은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현태오를 떠올렸다.

그가 정혜궁으로 미사담을 찾아왔던 날, 유현진 쪽은 쳐다보지도 않던 그 냉담하던 얼굴.

이제 끝났다고 결정해서인지 아예 본 척도 하지 않는 게, 어쩜 사람이 그리 매정한지 모르겠다. 관계를 완전히 끝맺고 나면 두 번 다시 기억에서 떠올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난 하루 스물세 번쯤은 떠올릴 것 같은데……, 유현진은 분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다, 그전에 보았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영빈관에서다. 영빈관에서 무섭게 다그치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차피 멀리 보내 버릴 거였으면서 화는 왜 내.

화내던 얼굴도 쓸데없이 잘생겼었다는 생각을 하며, 유현진은 속이 상해서 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전에 보았던 것은 새벽이었지.

눈을 보러 가자고 했었다. 녹두양갱도 주워다 줬었고. 몹시 기분 좋은 듯이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맞춘 뒤 집에서 나갔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마음이 아파서 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전에도, 그전에도, 그전에도.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 표정도, 몸짓도, 말투도, 같이 있었던 시간도, 일들도.

“…….”

그러는 사이에 정말로 눈물이 날 것 같아진 유현진은 얼른 눈을 감아 참으려 애쓰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면서, 하나람님, 감사합니다, 하고 속으로 속삭였다.

그래, 하나람님께 선물을 받은 거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겠어.

같이 밥도 먹고, 별도 보고, 뽀뽀도 해 보고, 만져도 보고, 안아도 보고.

충분할 만큼 받았다. 그러니 이쯤에서 만족해야지. 이 정도면 넘칠 만큼 받은 거다. 이만하면 됐다.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유현진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린 채 속삭였다. 보고 싶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비록 이제 더는 차지할 수 없다 해도――.

“누굴 말입니까?”

별안간.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느닷없이 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진은 눈을 홉떴다. 팔에 시야가 가려진 채로 깜박, 깜박, 귀신에 홀린 것처럼 눈을 깜박이다 펄떡 일어나 앉았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못 들었는데 거실에 현태오가 서 있었다.

“현……,”

유현진은 아연히 그의 이름을 속삭이다 말을 흐렸다.

현태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가장 먼저 반가움이 달려들었고, 거의 동시에 뒤따라 두려움이 덜컥 일었다.

왔다. 기어이 오고야 만 거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현태오가, 그토록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이끌고 결국에는 왔다.

끝을 고하러.

삽시에 낯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뚫어질 듯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유현진은 현태오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장 바지 위에 셔츠와 넥타이, 그 위에는 코트는커녕 재킷도 걸치지 않았다. 심지어 셔츠는 앞섶이 젖어 있었다.

“……, 안 춥습니까?”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묻자, 현태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날아온 것처럼 침묵하다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추웠을 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그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떠올린 듯 이상한 말이다.

유현진은 의아하게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웃음이라곤 없던 얼굴이 한층 더 서늘해 보였다. 무표정을 넘어서 속이 선뜩해질 정도로 차갑다.

여태 현태오와는 숱하게 마주쳤고 그는 거의 늘 무표정했지만, 이렇게 등덜미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

그런가. 그 얘기를 하러 왔으니까. 이제 끝을 고하러 왔으니까 저런 건가. 더 이상은 일말의 아량도, 배려도 없이.

유현진의 표정도 절로 굳어졌다. 세차게 뛰며 떨리는 심장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힘이 들어 낯까지 딱딱해진다.

또 얼굴이 저따위네……, 문득 현태오가 혼잣말을 툭 내뱉는 듯했다. 뭐든 움켜잡으려다 참은 듯 자신의 얼굴을 한번 훑어내리는 손길이 거칠다.

이상하다. 유현진은 불안스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딘지 몰라도 이상했다. 왠지 좀……무섭기도 하고.

“피곤하신 듯한데, 돌아가셔서 쉬시고 다른 날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긴장으로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굳어 나왔다.

보고 싶다.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곧 저 입에서 흘러나올 마지막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끝을 미루고 싶었다.

유현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태오가 대답했다.

“아니요, 돌아가도 못 쉽니다.”

“――? 그러시면,”

그렇게 일이 많으면 더더욱 다른 날 와야 하지 않겠냐,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현태오가 걸음을 옮겼다.

고작 두어 걸음에 거리가 확 줄어들자 유현진은 무심결에 몸을 뒤로 물렸다. 그걸 본 현태오의 눈동자가 한결 선뜩해졌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현태오가 유현진에게서 대각선으로 놓인 소파에 걸터앉았다. 길게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아주 가깝지도 아주 멀지도 않은 거리다.

결국은 이 순간이 오고 말았구나.

유현진은 체념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자세를 반듯이 하며 현태오를 향해 앉았다.

“예, 말씀하십시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물으려는 걸까. 아니면 비산도로 순순히 가 주겠냐고, 혹은 그 대가로 뭘 바라느냐고.

무엇이든 솔직하게 대답할 결의를 굳히고 유현진은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갑작스레 날아온 물음을 듣고, 처음에 유현진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두어 번 눈을 깜박이는 사이에 그 말이 온전히 귀에 들어왔다. 덜컹, 심장이 떨어졌다.

“…―.”

미처 방비하지도 못한 틈에 허를 찔린 것 같았다.

마음에 아무런 대비도 못 해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입만 연 채로 굳어 버린 사이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목덜미부터 올라온 열기가 금세 뺨까지 붉게 데웠다.

당황해서 도로 입을 다물며 눈길을 떨구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시선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변화를 보는 듯 유현진의 표정을 낱낱이 뜯어보던 현태오의 안색이 기묘해졌다.

“……아아,”

정말이었구나, 현태오의 입술이 달싹였다.

한동안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거실에는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왜. 왜 갑자기 저런 걸 물을까.

어디서 무슨 말이라도 들었나. 뭔가 낌새라도 챘나. 불쾌한 걸까. 추궁하고 싶은 걸까. 유현진은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법 긴 침묵 끝에 현태오가 시선을 들었다.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그러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눈이 유현진을 본다.

“언제부터였습니까?”

“――, ……제가 왜 대답해야 합니까?”

“제게는 들을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냉담히 말했다. 유현진은 다시금 심장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알고서 묻는 걸까. 혹은 모르고서.

모른다면, 그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유현진이 말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만일 알고서 묻는 거라면.

입을 꾹 다문 채 현태오를 마주 보고 있던 유현진은 긴 망설임 끝에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 오래전부터입니다.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

그 말을 들은 현태오가 비스듬히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그 모양은 마치 이를 악문 것과 닮아 있었다. 잠시 유현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물었다.

“지금도?”

유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로 잠자코 있는 것이 긍정이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지금도.”

현태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새까만 빛이 점차 커졌다.

“누굽니까?”

현태오가 나직이 물었다. 그 차분한 목소리의 밑바닥에 거칠거칠한 것이 불안스럽게 어른거렸다.

유현진은 멈칫하며 현태오를 보았다.

모르는 거구나. 알아챈 게 아니었어. 안도와 아쉬움이 뒤섞여 가슴속에 번졌다.

“누군지 말해 봐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습니까.”

현태오가 다시 물었다. 얼른 비밀을 이야기해 보라는 듯, 사탕으로 아이를 꾀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눈매가 선뜩하게 가슴을 찔러, 유현진은 말이 막혔다.

모르겠다. 조금 전부터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얼른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여기면서도 그 사람과 잘되도록 도와주겠다는 저 말이 유난히 귀에 박혀서 서러워진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심 두는 사람도 아닌 주제에, 그런 걸 도와주거나 하는 사람도 아닌 주제에, 그렇게 치워 버리고 싶나. 순순히 비산도로 가 버리지 않고 들러붙기라도 할까 걱정되었던가.

“왜, ……그걸 왜 현태오 씨가 돕습니까.”

“왜냐니,”

현태오가 낮게 웃는 듯했다.

별안간 커다란 손이 뻗어 왔다. 유현진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이 거침없이 끌어당긴다. 얼결에 반쯤 끌려간 몸이 현태오와 가까워져 바로 코앞에서 그를 마주 보았다.

“고마우신 은사로 저를 낫게 해 주셨잖습니까. 은혜를 갚아야지요.”

“――.”

벼락을 맞은 듯 유현진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눈을 크게 뜨고서 현태오를 바라보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차근차근 살피듯이 뜯어보았다.

“나를 대신해서 앓아 주시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난 또, 어디서 얼마나 호되게 접질렸기에 이렇게 안 낫나 했더니, 나 때문이었네. 상당히 아팠을 텐데.”

현태오의 손이 뻗어와 유현진의 오른쪽 허벅지 위를 짚었다. 유현진이 반사적으로 움찔하고 만 것은, 현태오에게서 옮겨 온 부상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참을성이 좋은 편인데도 제법 아팠거든요. 다신 제대로 걷기 힘들 수도 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걸 가져가 주셨네 그래…….”

현태오가 유현진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거침없는 악력이 살갗 위를 파고들었다. 절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유현진을 보며 현태오가 혀를 찼다.

“내가 언제 그러라고 했습니까. 그걸 왜 유현진 씨 맘대로 해요.”

“――, 그렇다고 아무것도 바란 적 없잖습니까.”

유현진은 현태오의 손을 움켜쥐어 떼어 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뛰며 핏기가 발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도.

그러나 확실한 것은, 유현진에게 은사가 남아 있었음을 현태오가 알아 버렸다는 것. 또한 현태오의 기분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

그 앞에서 유현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그를 똑바로 마주 보는 게 고작이었다.

불안하게 떨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유현진을 바로 앞에서 쳐다보던 현태오가 낮게 헛웃음을 웃었다.

“그래요, 어쨌든 낫게 해 주셨다니 감사드려야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떻게 치유가 가능했던 겁니까?”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한 현태오가 나직이, 다시 한번 속삭인다.

“나랑 잤다는 분이, 왜 아직 신성가호가 있을까.”

머리 위에서부터 얼음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유현진은 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들켰다.

기어이 들통이 나고야 말았다.

현태오가 몸을 뒤로 물렸다. 귓가에서부터 코끝을 스쳐 천천히 다시 정면으로 돌아온 그가 한 뼘 거리에서 유현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를 속이셨던 거네요.”

“――, 그것 때문에 파혼한 거, 아니잖습니까.”

유현진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의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한 발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심경일 뿐이었다.

가빠지는 숨을 간신히 다잡으며 유현진은 아무 말이든 한마디 한마디 겨우 뱉어 내었다. 잠시라도 시선을 돌렸다간 그대로 달아나 버리고 싶을 것 같아 유현진은 억지로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피식, 짧게 웃었다.

“당당도 하십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확실히 그 일 때문에만 파혼한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유현진 씨가 날 속이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런 상황이 왔겠습니까?”

유현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부끄럽다. 어설프게 제 잘못을 변호하려 급급했던 치졸함이 마음을 뒤덮었다.

그의 말이 맞다. 애초에 잘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애초에 그런 잘못을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현태오가 그에게 거짓말을 할 상황도 생기지 않았다. 모든 시초는 유현진의 거짓말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그가 거짓말을 했다 해서, 그걸로 유현진의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지요. 진실을 말하지 않았던 건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유현진 씨를 먼 벽지의 신전으로 보내려 했으나 말하지 않았고, 유현진 씨는 나와 자지 않았으나 내 오해와 그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바로잡지 않았지요.”

낯빛이 푸르러진 유현진을 차근히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그를 위로라도 하듯, 그 거짓말을 감싸 주기라도 할 듯 말을 이었다. 유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면, 이제라도 바로잡으면 됩니다. 유현진 씨가 비산도로 가기로 했던 것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

“자, 그럼, 유현진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현진 씨가 했던 거짓말은 어떻게 바로잡으시겠습니까?”

유현진은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곧바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유현진을 비산도로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거짓말을 바로잡겠다고.

그러나 유현진의 거짓말은, 어떻게.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나.

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지나간 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모든 잘못은 드러났으니 그 잘못은 속죄해야 한다.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 죄송합니다.”

유현진은 현태오를 마주 보던 시선을 천천히 떨구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자신도, 현태오도 이렇게 마음이 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몇 달 전에 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뭐든 현태오 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떨리는 혀를 간신히 억누르며, 유현진은 띄엄띄엄 참담하게 말을 잇는다.

결국은 이렇게 끝나 버릴 것을.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하게 끝나 버리고 말 것을.

“원하신다면 제 말이 거짓이었다고, 제가 현태오 씨와 잤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공표하겠습니다. 매체를 통해서든, 기고를 통해서든, 혹은 회견을 하든, 현태오 씨가 원하시는 방식으로 사실을 밝히겠습니다.”

어떠한 처분이 내리든, 어떠한 비난을 받든.

유현진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또한 지고자 했다.

그러나,

“그건 곤란한데요.”

지그시 유현진을 바라보던 현태오의 냉담한 대꾸가 고개를 떨군 유현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유현진은 멈칫멈칫 고개를 들어 현태오의 무표정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애초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내 얼굴에 먹칠을 하는 상황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이제 와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술에 취해서 속아 넘어간 얼간이’라는 칭호를 얻는 게, 제대로 바로잡는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납득해 주시겠습니까?”

현태오가 유현진을 내려다본다. 새까만 눈에 심장 속까지 서늘해졌다. 뭘 생각하는지, 뭘 바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거짓말이 진실이 되면. ――그게 제일 손쉬운 방법이겠군요.”

“거짓, ……진,”

현태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없었다.

당혹스레 그의 말을 되풀이하는 유현진을 내려다보며 현태오가 말을 이었다.

“실제로 자 버려서 ‘현태오가 유현진을 술김에 덮쳤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게 되어 버리면 문제없지 않겠냐는 말입니다――얼마 전에 유현진 씨가 시도했던 것처럼.”

이번에야말로, 유현진은 숨도 쉬지 못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심장까지 얼어 버린 듯했다.

모든 것이 다, 모든 부끄러운 일들이 하나씩 다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마저 알고 있었던가.

그날, 현태오를 집으로 불러 술을 권하고서 잠들었던 그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의 추하고 못난 행위가 이렇게 번연하게 제 앞에 파헤쳐져 드러났다.

“그렇지, 지금 마침 저는 아버지 생신이라 그 자리에 갔다가 술을 마시고 온 참입니다. 딱 좋은 상황 아닙니까?”

창백하게 질린 유현진을 내려다보며 현태오가 넥타이 매듭을 당겼다. 풀려 나가는 넥타이 끝에서 술 냄새가 났다. 아아, 저 젖어 있는 게 술 때문이었구나, 유현진은 여전히 아연하게 굳은 채 머리 한구석으로 막연히 생각했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넥타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목부터 셔츠 단추를 툭, 툭 풀어내는 손가락이 세 번째 단추에 닿았을 때에야 유현진은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이게 아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현, 현태오 씨, 잠시만, 지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신 유현진 씨보다 제가 더 잘 알 테니까요. 치료해 준 은인이신데, 잘해 드릴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실 필요 없――. 잘, 잘해 주실 것 없습니다. 현태오 씨가 잘해 주는 거, 원치 않습니다.”

유현진이 얼결에 다급히 말하며 현태오의 손을 붙들었다.

단추를 풀던 손이 멈칫 멈추었다.

일시에 주위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등줄기가 소름이 돋는다.

현태오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번들거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그가 헛웃음을 웃었다.

“내가 잘해 주는 건 원치 않는다? ……그럼 뭐, 좆같게 해 드릴까요?”

뒷말은 악문 잇새로 비어져 나왔다.

커다란 손이 유현진의 가슴을 떠밀었다. 소파 위로 나뒹구는 유현진의 위로 현태오가 올라앉았다. 숨 막히는 무게감이 단숨에 움직임을 가로막는다.

마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선이 뚝 끊어져 버린 것 같았다.

입맞춤이라기보다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처럼 현태오가 유현진의 입술을 깨물었다. 유현진의 신음마저 그가 삼켜 버리고 만다.

“그러면, 누가 잘해 줬으면 좋겠습니까.”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현태오가 내뱉었다.

“말해 봐요, 누가 잘해 줬으면 좋겠는지. ――어떤 새끼가 그렇게 오래전부터 좋았는지 말해 보라니까.”

나직이 시작된 말은 끝에 가서는 거의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거칠게 욕설을 지껄인 현태오는 그대로 유현진의 입을 물어뜯었다. 입술도, 혀도, 입안 어디고 할 것 없이 잡아먹을 것처럼 탐한다. 유현진이 호흡을 고를 여유조차 없이, 현태오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유현진을 먹어 치웠다.

대체 뭘 먹었길래, 무슨 단걸 그렇게 많이 먹어서 이렇게 달아, 어렴풋이 현태오가 내뱉는 거친 혼잣말이 귓가를 스친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뗀 현태오는, 바로 위에서 유현진을 내려다보며 마치 그 자체가 설탕 과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뺨을 느리게 핥아 올렸다.

유현진은 숨을 허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쓰러질 것만 같아, 겨우 숨통이 트인 사이에도 숨쉬기에 급급해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현태오와 마주 보기만 할 뿐.

“왜 그렇게 봅니까. 또 사람 헷갈리게 하려고?”

현태오가 내뱉었다. 손을 들어 유현진의 눈을 덮어 버린 그는 고개를 떨어뜨려 유현진의 목덜미를 물었다.

“얼마 전부터 말입니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거든. 계속 좀 이상하더란 말이야……. 날 쳐다보는 그 눈을 볼 때마다, 나한테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를 건드리고 스칠 때마다, 내 근처에 있을 때마다――기분이 말입니다, 영 이상했거든.”

현태오가 입술로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속삭였다. 그 나지막한 말소리가 저릿저릿한 감각으로 살갗을 데운다.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릴 때마다 목덜미의 살갗을 깨무는 입술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아 혹시, 이놈이 어쩌면, 나한테 마음이 좀 있는 게 아닌가――했는데,”

느릿하게 중얼거리던 현태오는 어느 순간 사납게 유현진의 목덜미를 짓씹었다. 잇자국이 선명히 남을 정도로, 꽉. “아!”, 외마디 소리를 치며 유현진이 움찔 요동쳤다.

“너는 원래 날 싫어하던 놈이, 좋아하는 놈도 따로 있는 놈이, 그러면 끝까지 날 싫어하는 대로 지내지 왜 마음 있는 척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듭니까.”

이를 갈며 내뱉은 현태오가 유현진의 위로 올라갔다.

퍼득이는 유현진의 몸을 제 무게로 지그시 누르며 목덜미에서 쇄골로, 그 아래로 입술을 떨어뜨리던 현태오는 하나씩 풀어 내리던 단추마저 초조한 듯 그대로 옷을 뜯어내 버린다.

“――! 현, 잠깐,”

유현진이 퍼뜩 놀라 몸을 일으켰다. 현태오의 아래에서 허둥거리며 빠져나오려는 몸을, 현태오의 굵은 팔이 어렵잖게 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위로 단단히 올라타 짓누른다.

유현진의 몸 위로 현태오가 뒤덮였다.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유현진의 가슴까지 입술을 미끄러뜨린 현태오가 유두를 깨물었다.

“학……!”

낯선 감각이 저릿하게 번져,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쇳소리 섞인 나직한 신음에 제 귀를 의심하는 동시에, 낯이 확 붉어졌다. 그토록 명확하게 욕망이 스민 목소리라니.

그 찰나의 목소리가 제발 현태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기를 빌었으나, 글렀다.

멈칫한 현태오가 고개를 들어 유현진을 보았다. 새빨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눈길을 돌리는 유현진을 빤히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문득 허, 하고 거칠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유현진 씨.”

“――.”

“이 새끼가 지금, 대놓고 사람을,”

잇새로 내뱉는 현태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유현진의 가슴을 다시 짓씹으며, 다른 쪽 돌기를 엄지로 짓누르며, 흉포하게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허벅지 위에 엎드려 있던 현태오의 성기가 어느새 뻣뻣하게 일어나 있었다.

“안, 어, 잠까, 아, 안,”

유현진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외마디 소리들만 나올 뿐 아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유두를 빨며 깨무는 입에,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제 목소리 같지 않은 신음만 연이어 나오며 몸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신음이 나올 때마다 현태오의 우악스런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어렴풋이 철걱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옷가지가 내려가 아랫도리가 서늘해진다.

그런데도 머릿속이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더워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 왜, ……그마, 안 ㄷ,”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덕허덕 간신히 말하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가느스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유현진의 턱을 가볍게 빨면서 속삭인다.

“왜요. 유현진 씨도 하려고 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유현진 씨는 해도 되고 나는 안 됩니까? 왜, 술 먹이고 재워 놓지 않아서?”

“――.”

유현진은 물기가 배어 나오는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유현진의 죄는 현태오의 무기가 되었다. 자신이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를 속이고 그를 몰래 차지하려 했던 죗값이다.

현태오를 갖고 싶었다.

현태오의 말 한마디를, 손짓 한 번을, 숨결 한 번을, 시간 약간을 얻고 싶었다. 멀리 떠나기 전에 적어도 한 번만이라도 이 남자를 안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를 속이고 몰래 가지려 했다.

그러니 죗값을 치름과 동시에, 어쩌면 이것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지만,

“――.”

정말로 이것이 자신이 원하던 것일까? 이 당혹스럽고도 서러운 것이?

별안간 아랫도리를 움켜쥐는 손아귀가 느껴졌다.

펄쩍 뛰며 시선을 떨구자, 유현진은 어느새 웃옷은 떨어져 나가고 바지는 발목까지 내려가 거의 알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위에 엎드린 현태오가 유현진의 가슴을 깨물며 성기를 그러쥔다.

유현진은 소파 밖으로 굴러떨어질 듯이 몸을 젖혔다. 자신을 뒤덮은 건장한 몸 아래에서 헤어나려 버둥거렸지만 억센 힘이 끌어당겨 도로 소파 위로 끌려가고 만다.

“생각해 봤는데 말입니다, 유현진 씨.”

유현진을 품에 단단히 안으며 현태오가 그르렁거렸다.

“애초에 내가 생각을 잘못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멀리로 보내 버리려고 한 게 잘못된 판단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언제든 멈출 수 있는 거였거든. 내가 원하면. 설령 당신이 어느 땅끝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다 해도, 도로 찾아오면 되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현태오가 사납게 유현진의 볼을 깨물었다.

“네가 딴 데를 보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잇새로 내뱉는 거친 목소리에 초조함이 밴다.

제 능력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던 자가 처음으로 제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을 발견하고 다급해진 듯이.

누구와 싸워서 쟁취할 수도, 훔쳐 올 수도 없이 그저 손 놓고 빼앗겨야만 하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은 것처럼.

“유현진 씨.”

유현진의 몸을 끌어안은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쓰다듬는 손길이, 문질러 대는 살갗이 뜨겁다. 머릿속까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딴 데 보는 거 아닙니다. 설령 여태 어디를 봤든, 얼마나 오랫동안 봤든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그래, 이미 지나 버린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사납게 이를 가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잘 들으라고, 유현진. 너는 딴 데 보면 안 돼.”

이상한 말이다. 유현진은 현태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무엇에 화를 내고 있는 건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현태오 자신도 정확히 모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유현진에게 전해지는 것은 그가 이성을 놓을 만큼 화가 났다는 것과, 그 화를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부딪쳐 오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말을 하고 싶었다. 이 엉망진창으로 뒤얽힌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어 제대로 정리해 집어넣고 싶었다.

그런데도 이 느닷없이 닥쳐 버린 상황에 짓눌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무엇이든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게 무슨 말이든 막아 버리려는 듯 현태오가 유현진에게 입 맞추며 그 말을 집어삼켜 버렸다.

“현, ――,”

온몸의 어디든 현태오의 손이 닿지 않은 데가 없는 것 같았다. 곳곳을 깨물려 잇자국이 새겨진다.

엎어진 유현진의 등 뒤로 현태오의 가슴이 바싹 닿았다. 허리 아래로 뜨겁게 솟구친 성기가 닿아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아래로, 유현진의 엉덩이 사이로 손이 들어왔다. 골 사이로 파고들어 그 안쪽을 쓰다듬는가 싶던 엄지가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 하지, 하지 말, 거기,”

유현진이 눈을 크게 홉뜨며 얼어붙었다. 더듬거리며 돌아보려 했지만, 현태오는 숨 막힐 정도로 단단히 끌어안으며 유현진의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입을 맞추었다. 나오려던 말이 먹혀 버리고 만다.

“쉿. ……공부 열심히 했다면서요. 제대로 안 풀고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

본인도 힘겨운 듯이 낮게 억눌린 목소리였다. 유현진의 허리며 엉덩이, 허벅지 근처를 느릿하게 문지르고 있는 성기는 아까부터 뻣뻣하게 서서 그 끝을 적시고 있었다.

몸을 바르작거리며 무어라 하려는 유현진을 세게 끌어안고 입을 틀어막은 채로, 현태오는 몸속으로 밀어 넣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아래를 벌리며 드나드는 낯선 감각에 흠칫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온 힘을 다해 그의 밑에서 나오려 퍼덕였지만 마치 바윗덩이에 깔린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손가락이 또 하나 늘어났다. 그리고 한동안 더 드나든 다음에, 또 하나.

언제부터인가 유현진은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그저 몸을 웅크린 채 움찔거리며 떨 뿐이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현태오는 입맞춤을 그치지 않았다.

손가락이 몸을 벌리며 끈질기게 드나들었다. 어느 결에 유현진의 성기도 반쯤 일어서 있었다. 몸속의 어딘가를 손가락이 느릿하게 누를 때마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일며 욕망이 굼실거렸다. 뚝, 뚝,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는 여린 성기 끝에 맑은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때.

일렁――하고, 유현진의 피부 위로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는가 싶었다.

처음에는 부연 수증기처럼 희미하던 그것은 차차 진해지며 은은한 빛가루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현태오가 감탄하듯 짤막하게 내뱉었다.

유현진 역시 현태오에게 시야가 가로막혀 있었음에도 스스로의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스며 있던 어떠한 것이, 그에게서 떠날까 말까 고민하듯 일렁이고 있었다. 귀한 분께서 내려 주신 은총이.

“――.”

더럭 겁이 났다.

아니, 겁이 아니다. 그것은 줄곧 자신을 지켜 주었던 가호를 잃는 아쉬움이었다. 계속 함께해 온 소중한 벗을 떠나보내는 허전함이다.

“말로만 듣던 게 이거였군요. 하나람님께서 선사하신, 특별한 은사. ……제 몸을 희생해서 남을 돕는.”

현태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였다. 희미하게 빛나는 안개는 살아 있는 듯 유현진을 둘러싼 채 흐르고 있었다.

감탄스러운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태오는, 하지만, 하고 나직이 말했다.

“이것 때문에 네 몸이 상한다면 그따위 은사는 없애야지.”

유현진을 바투 끌어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를 드나드는 손가락이 더욱 거침없어졌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메웠다. 여린 성기에서 계속해서 뚝뚝 물이 떨어졌다.

유현진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여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인데도, 이 생전 처음 맛보는 욕망이 온몸을 다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욕망에 잠식당하는 것과 동시에 일렁임이 거세어졌다. 유현진의 몸을 감싼 안개는 금세라도 떠나 버릴 것처럼 흐려졌다 진해지기를 거듭한다.

그 아슬아슬한 일렁임을 바라보며,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는 낯선 욕구 속에서, 그리움과 아쉬움이 다급하게 솟았다. 동시에, 서러움도.

“으, …―.”

유현진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현태오의 입속으로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뱉어 내고 만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마치 벌을 받는 것 같았다.

현태오를 얻고 싶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그를 기억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유현진은 어린애처럼 울며 고개를 움츠렸다. 현태오의 입술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며 버둥거렸다. 서러운 흐느낌이 터져 나오자 현태오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시 굳어 있던 현태오는 기묘한 얼굴로 유현진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당황한 것 같은, 낭패한 것 같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유현진은 역시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안 되겠다.

멀리로 떠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갖고 싶었지만, 더는 안 된다.

좋은 기억만 가져가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그만둬야 했다.

“미안합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며 흐느끼는 가운데, 유현진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거짓말해서 미안합니다. 속여서, ……몰래 나쁜 짓을 해서 미안합니다. 이제 그만, 제발, 용서해 주세요.”

온 뺨을 적시며 호소하는 유현진을, 현태오는 기이하게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유현진을 부둥켜안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마치 놓아주지 않겠다는 것 같아서――그 애원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것 같아서, 유현진은 현태오의 팔을 움켜쥐었다.

“제가――제가 원하는 것 하나는, 뭐든 들어준다고 하셨잖아요.”

현태오의 억센 손이 멈칫했다.

그것이 바로 이날이다.

지금 이 모질고 사나운 날이 유현진의 생일이었고, 현태오는 그가 바라는 것은 뭐든지 하나는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대로 저를 그냥 놔둬 주십시오. 이대로 놔두면, 그럼 현태오 씨가, 각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멀리로 가겠습니다.”

유현진은 현태오의 팔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 유현진을 안고 있던 팔이 일순 그를 도로 끌어당기려는 듯했지만, 그 굳은 팔에서는 조금씩 천천히 힘이 빠졌다.

유현진은 소파 위에 일어나 현태오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러나 차마 눈을 마주치지는 못한 채, 허덕허덕 간신히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기 전의 관계로. 그냥 총독 각하라고 부르던 때로.”

마주칠 일도 없고, 혹여 우연히 마주쳐도 무심히 스쳐 지나치던 그때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뺨을 적시고 있는 유현진의 앞에서, 현태오는 조그만 움직임조차 없이 앉아 있었다.

유현진의 주위로 일렁이던 빛안개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천천히 갈무리되어 피부 속으로 도로 스며들듯이 사라지고, 그곳에는 정적만 남았다.

묵묵히 유현진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태오는, 금세라도 유현진의 말을 잘라 내며 거절할 듯 삭막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은 당장에라도 유현진을 움켜쥐고 끌어당기기라도 할 듯 그러쥔 주먹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결국은,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유현진을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현태오는, 어느 순간 낯을 일그러뜨리는가 싶더니 움켜쥔 주먹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유현진에게서 물러나 몸을 일으킨 그는 옷가지를 걸치곤 말 한마디 없이 그곳에서 나가 버렸다.

*

“너는 올해 삼재인 게 분명해. 그것도 날삼재에 악삼재.”

그렇게 말하는 제상아를 앞두고, 유현진은 하나람님께 감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는 심장이 닳아서 죽어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 고마운 친구의 막말 덕에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너는 하나람님께 예배드리러 와서 할 소리냐, 그게……?”

어디서 근본 없는 미신을 듣고 와선, 하고 제상아를 흰 눈으로 흘겨보긴 했지만,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겠다고 전직 신관 유현진은 몰래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일이 이렇게까지 독하게 꼬일 리 있어? 아무래도 네가 살풀이굿을 한번 해야,”

“어허, 쓸데없는 소리 치워 두고, 아까부터 정여경 관장님이 차를 기웃거리는 게 널 기다리는 것 같은데, 안 나가 봐도 되겠어?”

“됐어. 어차피 결혼 축하한다는 둥 그런 인사나 하려는 거지 뭘. 지겨워 죽겠어. 나중에 그냥 결혼식에서 한꺼번에 들을래.”

제상아는 차창 밖을 살피며 말하는 유현진에게 고운 손을 내저었다. 축하 인사를 해 주려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날마다 그 용건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두 자릿수에 이르면 진저리가 날 만도 했다. 유현진은 납득하고는 제상아의 차를 흘깃거리는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현재 신전 정문 앞에 당당히 차를 세워 두고 예배가 시작될 때까지 그 안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이유는 위와 같다.

한 달에 한 번인 공식 예배는 이 교구 사람들의 사교의 장이었고, 이 차 안에서 나가는 순간 제상아는 ‘공주님’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체면치레를 해야 했다. 평소라면 기꺼이 의무를 다하는 그녀였지만, 그 의무가 너무도 과중하게 이어지는 요즘은 잠시 잠깐이라도 쉴 수 있을 땐 쉬기를 택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 미사담 님이 에스코트 안 해 주고 어디 갔어.”

제양에서, 배우자나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 정식 예배에 따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곧 헤어질 게 아니라면 아무리 사이가 안 좋더라도 예배만큼은 함께 오곤 했다.

그러나 제상아는 씩씩하게도 혼자 왔고, 유현진의 물음에도 매우 당당하게 대꾸했다.

“하나람님을 믿지도 않는 외국인이 예배엘 왜 오니?”

“그 말이 아주 온당하긴 하다만, 저번 예배 땐 같이 왔었잖아?”

“그땐 제양에서 하나람님께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가 궁금하다고 그랬으니까 온 거지.”

그래, 하고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유현진은 아쉽게 덧붙였다.

“그래도 다다음 주엔 송갈로 돌아가시는데, 그러고 나면 몇 달 뒤 결혼식에서나 다시 볼 수 있을 텐데, 조금이라도 같이 있으면 좋잖아.”

“그 몇 달 뒤부터는 평생 얼굴 볼 건데 지금 몇 시간 같이 있고 말고가 뭐 중요하다고. 그리고 그 사람 짐 싸느라 바빠. 여기서 산 온갖 기념품들 짐 상자에 챙겨 넣느라 정신없어.”

제상아는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그 말투에는 조금도 예의상이라거나 겸양 같은 뉘앙스는 섞여 있지 않아, 유현진은 그제야 가뿐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밤샘 기도는 다음 주말에 할 거지? 그때 같이 있을게.”

“응, 고마워. 아침 먹고 자고 가.”

“……젊은 외간 남자가 공주님 궁에서 잤다가 무슨 경을 치라고?”

“네가 경 칠 짓을 할 수는 있고?”

“…….”

왠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살짝 깎이는 느낌이었지만, 맞는 말이었으므로 유현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송갈 사절단이 석 달간의 체류를 마치고 돌아갈 날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여러모로 다사다난했던 석 달도 끝날 날이 가까워진 것이다.

먼 길을 떠나는 약혼자를 둔 이의 관습으로 일주일 뒤에 제상아가 철야 기도를 하고 나면, 그걸로 모든 공식적인 일정은 끝이었다. 그 뒤로 사흘 더 지나면 미사담 일행은 송갈로 떠나, 몇 달 뒤 결혼할 때에나 제상아를 맞이하러 다시 제양으로 돌아올 것이다.

제상아와 미사담이 나란히 재깔재깔하며 다니는 모습이 은근히 보기 좋았는데 이제 한동안은 못 보겠구나……, 공연히 제가 아쉬워하며 한숨을 내쉬는 유현진이었으나,

“그리고, 에스코트가 뭔 의미가 있어? 신전까지만 딱 데려다 놓고는 휭하니 제 볼일 보러 가버리는 남자랑 오느니 그냥 혼자 오고 말지.”

“……. 너 왜 또 나 까냐.”

“널 까는 게 아니라 현 총독을 까는 거야.”

제상아가 흰 눈을 뜨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저 멀찍이, 신전 정문의 기둥 옆에서는 현태오가 수도보안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현진과 함께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제상아와 인사를 나누는 유현진을 내버려 두고 그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저리로 가 버렸다.

싸우기라도 했냐고 호사가들의 입을 탈 행동이긴 했지만, 유현진은 ‘그래도 같이 오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현태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근 이레만이었다.

유현진의 생일날 새벽 갑자기 찾아왔던 현태오가 그렇게 돌아간 이후로 계속 얼굴을 못 봤다. 그 이후로는 업무 관련으로조차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마치 스치면서라도 보고 싶지 않은 듯, 미사담이나 제상아에게 일 관련으로 볼일이 있을 때면 진문성이 찾아와 대신 전하곤 했다.

그런 나날이 거듭되면서, 유현진은 그들의 관계가 끝났음을 되새겼다.

끝난 거다.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자고 유현진이 청했던 대로.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얕고 무른 것인지, 자신이 그렇게 청했음에도 정작 이렇게 관계가 뚝 끊겨 버리게 되자 마음이 못내 힘들었다.

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보기가 겁이 났다.

자신의 잘못이 부끄러웠고, 무섭도록 험악했던 현태오의 모습이 두려웠으며, 다시 보는 순간 확고하게 끝을 고할지도 모르리라는 것이 겁이 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었다.

그러는 가운데 오늘 아침, 한 달에 한 번인 예배일이 다가왔고 유현진은 다시금 고민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혼자 가면 필경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 보고는 입방아를 찧을 텐데, 그냥 빠져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문자가 왔다.

「데리러 가겠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처음 온 연락이다. 딱 그 여덟 글자뿐, 더 이상의 설명도 없었다.

어떤 얼굴로 보면 되나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정확히 시간에 맞춰 집으로 마중을 온 현태오는 평소와 한 치의 다름도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며칠 새 날카롭게 야위어 버린 얼굴로, 그는 무표정히 고했다.

‘제가 평항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표면적이나마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는 걸로 하지요.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입을 탈 일은 없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당장 모든 관계가 다 단절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구나.

유현진은 한편으로는 단 얼마만이라도 더 마주칠 수 있으리라고 안도하고, 한편으로는 이 욱신거리는 고통이 아직 더 이어지리라는 것에 두려워하며 그에게 말없이 동의했다.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진을 흘끗 내려다보았을 뿐, 현태오도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침묵은 줄곧 이어졌다. 거북하고 어색했다.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그나마 진문성이 운전대를 잡고 같이 있지 않았더라면 유현진은 너무 어색한 나머지 차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정말로, 별 대수롭지도 않은 말마디를 나누던 그 소소했던 시간들은 끝났구나. 하긴 원래 현태오는 필요한 말이 아니면 안 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의 관계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현진은 아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를 마음을 억지로 다잡느라 딱딱하게 굳힌 얼굴에 나중엔 경련이 날 것 같았다.

다행히 신전에 도착했을 때에는 제상아가 먼저 와 있었고, 그녀의 차를 발견하고 다가가 인사를 한 유현진에게 그녀는 ‘추우니까 들어와서 문 닫아. 더 있다 나갈 거야.’라고 권했다. 그러자 현태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은 볼일이 있어서 잠시 실례하겠다며 돌아서 버렸고, 유현진은 시무룩해지는 마음으로 차에 올라 앉았던 것이다.

“역시 그냥 눈 딱 감고 자 버렸어야 했나……, 하나람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였는데…….”

한번 자 보려고 그렇게 갖은 애를 다 썼으면서 막상 기회가 오니까 그렇게 날려 버리다니……, 뒤늦게 다시 후회에 잠겨 있는 유현진의 등짝으로 찰진 손바닥이 날아왔다.

“야, 정신 차려, 정신! 오밤중에 찾아와서 뜬금없이 성질내며 그딴 짓을 하는 인간은 범죄자야, 범죄자! 버려!”

“아니……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상대의 동의 없이 성추행을 한 건 내가 먼저였지 뭐…….”

“그건 그러네.”

할걸, 그냥 해 버릴걸, 바보 같은 나, 머리를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유현진을, 제상아는 범죄자들끼리 아주 그냥 잘 만났다는 눈길로 한심스럽기 그지없게 쳐다보았다.

“뒤늦게 후회할 걸 그때 왜 찼어? 그냥 눈 딱 감고 해 버리지.”

“……, 눈이 딱 안 감아지던걸.”

유현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막상 신성가호가 그렇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자신에게서 떠나려 했을 때, 그 안개처럼 일렁이며 반짝이는 것을 본 순간, 오래도록 곁에서 지켜 주었던 아주 가까운 이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그 가까운 이가 아예 떠나 버리는 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아쉬움 속에서, 불현듯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밀어닥쳤다.

괜찮을 줄 알았다. 어떤 식으로든 그 남자를 가질 수만 있다면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현태오와 마지막으로 겪는 기억이 폭력과 고통으로 남아선 안 된다. 두고두고 떠올릴 기억들이 그런 것이어선 안 되었다. 차라리 지금껏 얻은 작고 따뜻한 기억들만 가지고 가는 게 나았다.

혀를 차며 유현진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준 제상아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 종알거렸다.

“아니 근데 대관절 현 총독이 너한테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뭐라니?”

“내가 본인이랑 잤다고 속였고, 또……, 술 먹이고 몰래 건드려서……?”

“그걸 그렇게 한참이나 지나서야 화를 낸다고?”

“그날 알았나 보지.”

유현진은 풀 죽어 중얼거리면서도 고개를 기웃했다.

사실 유현진도 그날 현태오가 그렇게 화를 내었던 요점을 정확히 못 잡고 있었다. 다만 워낙 잘못한 게 여럿이고 찔리는 바가 크다 보니 그중 무엇으로 화를 내도 이상하진 않겠다 싶었을 뿐.

하지만 얼핏,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둥 하는 말이 섞였던 것 같기도 한데,

“……. 있잖아, 상아야.”

고민에 잠겼던 유현진은 제상아의 눈치를 보며 말문을 뗐다. 그래 또 어떤 바보 같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해 보렴, 이라는 낯으로 제상아가 턱을 든다.

“현 총독님이 나한테 아주 조금이라도 말야,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나한테 마음이 있다거나, 혹시라도 나를 좋아해 준다거나, 그럴 일이…… 혹시 있을까?”

그러나 김칫국 좀 적당히 마시라며 등짝을 때릴 줄 알았던 제상아는 뜻밖에도 으음, 하고 잠깐 생각해 보는 기색이었다.

“글쎄다, 그건 모르지. 나는 현 총독이 타고나길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사람은 또 모르는 거더라구. 사실 나도 미사담 님 만나기 전에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마음이 들 줄은 몰랐거든. 나는 분명히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겠지만, 누군가에게 그렇게 전폭적으로 따뜻하고 상냥한 마음이 들 수 있을 거라곤 생각을 안 했어. 난 내가 심적으론 수절한 채로 평생을 살 줄 알았단 말야. 그런데…….”

제상아가 말을 흐리며 잠시 기억에 잠기는 듯싶었다. 그녀의 표정이 일순 부드럽게 흐드러진다.

……아.

유현진은 문득 그녀의 마음속 한구석을 본 것만 같았다.

제상아는 언제나 유현진의 좋은 친구였다. 다소 신랄하고 대쪽 같은 데가 있지만, 언제나 속정 깊고 따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타인에게―설령 가족에게라도― 그 속내를 모두 다 열어서 내어 주진 않는 느낌이 있었다. 언제나 마음속 제일 안쪽 문은 굳게 닫혀, 그녀 혼자만 그곳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 일도 없던 평화로운 어느 오후, 미사담과 나란히 대청 끝에 앉아 과자를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그녀의 모습이다. 늘 사람 좋게 웃고 있지만 언제나 다가가기 힘들었던 미사담 역시도, 그때만큼은 여느 소탈하고 순한 청년이 되어 그녀 옆에서 낯을 붉히며 웃고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떠한 막힘도 거리감도 없던 그 밀도 높은 공간.

그렇구나.

그들은 서로를 만났구나. 서로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람을.

“……그런데, 글쎄다……, 현 총독이 널 좋아할 가능성이라…….”

미심스럽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 순간 유현진의 심장이 퉁 뛰더니 어둡게 고꾸라졌다. 머릿속에 흔흔하게 떠올린 저 둘의 모습과 너무나 대비되는 냉랭한 얼굴이 유현진을 짓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제상아도 도무지 희망적인 미래가 점쳐지지 않았는지 웬만하면 친구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안타깝다는 얼굴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인간이 누굴 좋아할 가능성이라니 생각해 본 적이 없긴 한데……, 음…….”

그러던 제상아는 침울해지는 유현진을 보더니 살짝 당황하며 얼른 소리를 높였다.

“됐어, 얘. 거긴 이미 너무 악연으로 얽혔어. 그냥 나랑 송갈 갈 준비나 해. 현태오만 남자니? 거기도 남자 천지야! 우리나라보다 송갈이 더 평균 신장 큰 거 알지? 북방계 미남이 다글거린다고!”

“그래도 현 총독보다 잘생기진 않았을 거 아냐.”

“……. 그래, 현 총독이 좀 쓸데없이 멀끔하게 생기긴 했지……만! 아닌 놈 붙들고 곱씹어서 뭐 해? 다른 잘생긴 놈으로 갈아타!”

제상아는 매몰차게 말해 놓곤, 그래도 우울해하는 유현진을 보자 제가 괜히 속상한지 으이구, 하고 유현진의 볼을 아프지 않게 답삭 꼬집었다.

“이따 예배 마치고 뭐 하니? 괜히 집에서 혼자 우울하게 있지 말고 나랑 같이 수장고 구경이나 해. 나 혼수 골라야 해.”

제상아가 유현진의 소매를 흔들었다. 국보나 보물만 갖다 놓은 수장고는 쉽게 열리지 않을뿐더러 일반인이 둘러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참에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하며 기분 전환이라도 해 보라는 속셈이다.

그 말에는 유현진도 혹하긴 했지만 이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예배 마치면 병원 가야 해.”

“병원? 꼭 오늘 가야 하는 거야?”

“응……, 딱 하루만 미루자고 해도 진문성 씨가 절대로 안 들어줘.”

요즘 유현진은 주 3회씩 강제로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혹시라도 예전처럼 안 가 놓고 갔다고 할까 봐 의심이 되었는지 진문성이 직접 동행했다.

현태오에게서 가져온 부상은 그가 원래 지녔던 상태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최소 몇 달은 꾸준히 재활을 다녀야만 한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유현진은 주기적으로 진문성에게 강제로 병원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하루만, 딱 하루만 쉬면 안 되냐고 애원해도 진문성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음, 그러면 제가 질책을 듣기 때문에요.’라고만 하고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그럼 병원 갔다가 와. 어차피 수장고 늦게까지 둘러볼 거니까.”

“안 돼……, 그 뒤엔 치과 검진 예약 잡혀 있어…….”

유현진은 다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재활 치료만큼이나 싫은 치과 검진은 그나마 양반이다. 한 달에 한 번만 가시면 된다고 진문성이 상큼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치과 검진이 한 달에 한 번이라니 너무 과하다고 유현진은 주장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진문성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현진은 병원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뭐라고 하든 결국은 억지로 질질 끌려가고야 마는 현실과 타협한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재활 치료는 본인에게 지은 죄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고―치유를 해 주고도 죄지은 기분이 들어야 한다는 게 억울했지만―, 그 마지막 이유는,

“요즘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있잖아, 상아야, 냉장고 안에 작은 상자가 꼭 하나씩 있어.”

유현진이 문득 중얼거렸다.

매일 하나씩, 수도 내에서 유명하다는 디저트 가게들의 상자가 번갈아 가며 냉장고에 들어 있었다. 어느 날은 푸딩, 어느 날은 마카롱, 어느 날은 케이크, 어느 날은 구움과자. 더없이 달콤하고 맛있는 것들이 딱 하나씩 주어졌다.

누가 언제 갖다 놨는지도 모르게, 달콤한 상자가 늘 하나씩.

“매일매일 종류가 바뀌는데, 하나같이 다 맛있어. 꼭 내 입에 맞게 고민해서 골라 오기라도 한 것처럼, 다 엄청 맛있어…….”

어제는 파블로바였다.

폭신하고 보드라운 머랭에 시트러스 소스와 과일들이 점점이 올라간, 너무나 예쁘게 생긴 케이크였다. 그리고 그만큼 맛도 황홀했다. 너무 맛있어서 먹다가 울고 말았다.

“야, 너 자랑하는 거야? 자랑하는 거지? 근데 자랑하면서 왜 울려 그래? 울기만 해 봐, 앞으로 한 달간 온 수도 케이크집 영업 금지령이라도 내려 버릴 테니까!”

어느새 눈가가 그렁거리기 시작한 유현진을 보고 제상아가 움찔하며 외쳤다. 그럴 순 없지, 그래선 안 되지, 유현진은 막 나오려던 눈물방울을 꾸역꾸역 도로 밀어 넣었다.

치과를 하루 한 번씩 가더라도, 그 맛있는 것들을 안 먹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한 입까지 모두 다 먹어야 했다. 누군가 매일 하나씩 갖다 놓는 그 사랑스러운 것들을.

……왜.

……왜 이렇게.

이렇게까지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데. 사람 마음만 아프게.

유현진은 두 손으로 가만히 얼굴을 덮었다. 너 그러고 몰래 우는 거 아니지……? 하고 불안스럽게 쳐다보는 제상아의 옆에서 한동안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유현진은, 그 손을 내리고 반듯한 자세로 앉았다.

“상아야, 나, 역시 고백할까 봐.”

제상아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유현진은 그런 그녀를 말갛게 마주 보았다.

며칠 전부터 계속 곱씹었던 생각이다.

밤마다 홀로 주방에 앉아 단것들을 한 입 한 입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어차피 끝나는 거라면 아무런 아쉬움도 남기지 말아야겠다고. 원하는 걸 다 얻을 수는 없다면 적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다 해 버려야 할 것 같았다.

“가기 전에 속 시원하게 털어 버리고 갈래. 이제 다시는 못 볼 텐데, 차라리 말이라도 해 버리는 게 시원할 것 같아. 마음을 정리하기도 더 쉬울 것 같고. 그러니까,”

유현진이 제상아를 마주 보며 제 속으로 한 결심을 막 말하던 때였다.

철컥, 예고도 없이 차 문이 열렸다.

“가기 전에 고백은, ……해 보고, ……가, 려고,”

제상아를 보며 진지하게 말하던 유현진은, 제상아의 옆에서 차문을 연 현태오를 큰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깥바람이 차 안으로 들이닥쳤다.

차 문을 열고 그대로 멈춘 채 그들을―정확히는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던 현태오는 딸따름한 낯으로 돌아보는 제상아를 보고서야 말했다.

“예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가시지요.”

“어머, 벌써 그렇게 됐나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제상아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현태오의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따라 유현진도 시선을 떨군 채로 차에서 내려섰다.

“…….”

“…….”

그래도 예배 시간 되니 신전에 같이 들어가러 데리러는 오는구나.

유현진은 한 걸음쯤 앞서 걸어가는 제상아의 뒤로 현태오와 나란히 걸었다.

이상하다. 그럴 만한 이유도 없는데 뺨 언저리가 굉장히 따갑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옆에서 풍겨 오는 공기도 굉장히 춥다. 겨울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다.

“……?”

슬쩍 옆을 돌아보았지만 거기엔 무표정히 앞만 보고 걸어가는 현태오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만 보는 와중에도 시선을 느꼈는지, 유현진이 아주 살짝 쳐다봤을 뿐인데도 현태오가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움찔하며 최대한 태연하게 도로 눈을 돌리려는데, 잠시 그대로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팔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잡으라는 것 같은데, 잡아도 되나.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현진은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래도 되는 백 가지 이유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자신은 지금 다리 상태가 안 좋으므로 지팡이 대신 붙잡을 것이 필요하고, 이 남자는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파트너이고, 또 제가 먼저 내밀었고, 또 무엇보다도, 아마도 함께 신전에 오는 것은 이게 마지막일 터였다. 현태오가 평항으로 돌아가기 전에 드릴 마지막 예배일 테니까.

왜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닐까, 그럼 몇 번은 더 볼 수 있을 건데, 아쉬워하며 붙잡은 그 팔뚝을 다행히 현태오는 뿌리치지 않았다. 잡으라고 내주었던 게 맞았나 보다.

그렇게 잠자코 현태오의 팔뚝을 붙든 채로 걸어가던 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이 어느 때부턴가 미묘해지는 눈치를 보였다. 그 이유는 얼마 있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신전의 정문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네댓 명의 무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계연군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제상아의 혼약이 공표되었을 때 정혜궁에 들렀다 돌아간 뒤로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딴 사람인 양 낯빛이 시커메진 계연군은 평소 허세처럼 여겨질 정도로 당당하고 오만한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뭇하게 야위어 낯을 굳히고 있는 모습이 음습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아.”

계연군과 더불어 이야기하던 사람 중 하나가 이쪽을 보고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돌아선 계연군이 제상아와, 그 뒤에서 따라가고 있던 현태오를 본다.

어둡고 음울하던 얼굴이 삽시에 일그러지는가 싶었다. 입가가 경련하듯 떨리며 눈초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간다. 마치 귀신의 형상처럼 비틀리던 얼굴은, 그러나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종잇장처럼 무표정한 낯으로 제상아를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그 무표정에도 알 수 없는 한기가 들었다.

“오라버니, 잘 지내셨나요?”

제상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계연군은 눈동자만 흘끗 돌려 쳐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가느스름한 눈매가 마치 뱀 같아 유현진은 소름이 끼쳤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제상아가 대단하다 싶었다.

얼마 전 계연군의 부친인 의양군이 정계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은거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청송당 역시 기약 없이 문을 닫기로 했단다.

여태 부친을 믿고 청송당 출신의 인사들을 좋을 대로 휘둘렀던 계연군이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는 소리가 유현진의 귀에까지 들렸다. 동시에, 근래 연일 매체에 오르내리고 있는 사건 사고들에도 관련되어 그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소리도, 그리고 그런 소리들이 들어갈 때마다 그가 발작을 하듯 난리를 피운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바로 어제도 궁 앞에서 우연히 미사담과 마주친 계연군이 터무니없는 시비를 걸며 따라오다가 정혜궁 앞에서 기어이 현태오 휘하의 위병들에게 내쫓기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상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를 건넸고,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여전히 태연하게 “그럼 다음에 다시 뵈어요.”라는 말을 건네고 걸음을 옮겼다.

계연군 무리를 지나쳐 걸어가며, 유현진은 뒤통수에 따갑게 닿는 시선을 의식했다.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고 사나운 시선이 그들의 뒤로 따라붙고 있었다.

“주제 모르고 아무 데나 이빨을 들이미는 파수견이 얼마나 잘 지켜 줄 수 있을지 어디 두고 보라지.”

언뜻 계연군이 내뱉는 속삭임이 들린 것 같았다.

무서운 원한과 증오가 스며 있는 그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을 텐데도 제상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뒤에서 무어라 외마디 소리가 거칠게 터져 나왔지만, 유현진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불길한 그림자가 뒤를 쫓아오는 것 같아, 그저 현태오의 팔뚝만 꾹 움켜쥐었을 뿐이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서는 제상아와 갈라졌다. 그녀는 왕족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로 갔고 유현진은 현태오가 이끄는 대로 그의 팔뚝을 붙들고 따라갔다.

현태오는 별일이 없는 한 신전의 예배당 내부가 한눈에 들어오는 메자닌 가운데 자리에 앉곤 했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특별 행사가 있을 때 보안을 위해 감시원들이 지키곤 하는 자리라 일반 예배 때에는 거의 비어 있었다. 오늘 역시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현태오의 팔뚝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반걸음쯤 앞서가던 현태오가 그것을 깨닫고 돌아보았다.

거의 사람이 없는 메자닌에는 조명을 꺼 놓은 탓에 어두워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 무섭게 야위어 보였다. 고작해야 며칠 보지 않았을 뿐인데, 얼굴선이 더 날카로워 보인다.

묵묵히 유현진을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다시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유현진은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없고……, 형식적일 뿐인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형식이니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조하게 말하며 현태오는 손을 조금 더 내밀었고, 잠시 망설이던 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까지 붙잡았다간 그대로 영원히 놓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한번 놓았을 때 손을 거두어야 했다. 다시 잡았다간 놓을 때 더 힘들 테니까.

제 두 손을 맞잡아 버리는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는 별말 없이 걸음을 돌렸다. 그대로 계단을 두어 단 내려가 메자닌 제일 앞자리에 앉는 현태오의 옆에 유현진도 조용히 앉았다.

신전의 예배당이 내려다보였다. 숱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이 자리에는 그들 둘만 있었다.

그날 밤 이후로 한 공간에 둘만 남는 것은 처음이었다.

“…….”

다시 생각해도 현실 같지 않았던 밤이다.

그날 보았던 것은 현태오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험악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도, 또한, 비록 끝까지 하지는 않았다지만 하마터면 신성가호가 깨질 법한 일을 벌였다는 것도.

별안간 난생처음 느꼈던 육욕이 기억 속에서 갑작스럽게 되살아나 유현진은 낯이 붉어졌다.

마치 포악하고 흉맹한 짐승이 아슬아슬하게 한발 뒤에서 쫓아오는 느낌이었다. 자칫 따라잡혔더라면 온몸 구석구석까지 낱낱이 발려 먹히고 말았을 듯한 위태로움.

그때 그 감각들에 쫓기면서 자신은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그 짐승에게 제 모든 감각을 넘겨 버리고 휩쓸리고 싶다는 선명한 욕구를 느꼈었다.

“――.”

유현진은 목덜미까지 훅 끼치는 열기를 느끼고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정신 차려. 예배를 드리러 와서 머릿속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거야.

유현진은 스스로 겸연쩍어 어쩔 줄 모르며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서늘한 실내가 갑자기 더워진 느낌이었다.

괜히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어 흘끗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던 현태오가 시선을 느낀 듯 이쪽을 돌아보았다.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몰래 쳐다보다 들킨 것 같아 움찔했지만 유현진은 애써 태연한 낯으로 시선을 깔며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유현진이 갑자기 말을 건넬 줄은 몰랐던지, 현태오는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여상한 투로 대꾸했다.

“최근에 잠을 좀 못 자서 그런가 봅니다.”

“많이 바쁘시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주무실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쁘신 겁니까?”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로 낯빛이 안 좋다.

그야 바쁘긴 할 터였다. 유현진이 병원을 오가며 진문성이랑 있는 동안에도 그의 전화나 문자가 끊임없이 울렸는데 현태오가 그보다 덜 바쁠 리 없었다.

“바쁜 것도 있고, 일이 많아져서 머릿속이 예민해지면 잠이 깊이 들지를 않아서요.”

“……그러면 안 되는데…….”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태오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현태오가 눈살을 찌푸리는 듯했다. 누구 때문에, 그의 입술이 얼핏 중얼거리다 마는 것 같았다.

“정 잠이 안 오면 수면제를 먹고라도 최소한의 수면 시간은 채우니,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 현태오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언짢은 일이라도 있는 듯 표정이 굳어 있어 유현진은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아래층에서는 예배가 시작되고 있었다. 단상에 정신관이 올라선다. 기도문을 읊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만큼 거리가 있었지만 이미 익히 외우고 있는 문구라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습관처럼 그 기도문을 따라 하며, 유현진은 또 하나의 기도를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짧은 동안이나마 이 사람과 이토록 가까이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을 주신 데에 감사를.

또한 여태 늘 기도해 왔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그가 무사하고, 또한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

담담히 받아들이려 했는데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또 눈가가 뜨거워질 것 같아 심호흡을 해서 억누르려던 때, 문득 옆에서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시려는 겁니까?”

유현진이 돌아보자 현태오는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혹은 혼잣말 같은 걸 한 건가 싶었지만, 유현진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혹시 뭐라고 하셨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답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유현진이 겸연쩍게 고개를 돌리려 했을 때, 현태오가 시선을 주었다. 서늘한 눈길로 유현진을 노려보듯이 바라보다가 말한다.

“그래서, 그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고백하시겠다고요?”

유현진은 움찔했다.

아까 제상아에게 말하던 때, 열린 차 문 사이로 그 말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갔었나 보다.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본인이 도와줄 수도 있다던 현태오의 말. 순식간에 마음이 주눅 들며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서운해지던 그 순간.

“……, 그렇게 할까 생각은 하는데…….”

유현진은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며 중얼거렸다.

만일 말한다면. 지금이라도 현태오에게, 오래전부터 줄곧 좋아했었다고 고백을 한다면.

“고백하지 마십시오.”

그때, 마치 유현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현태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멈칫하며 고개를 들자 현태오가 삭막한 눈길로 유현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보다 골격이 드러난 턱에는 험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예?”

“그 상대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 왜요.”

유현진이 불안스레 되묻자 현태오는 그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예배당을 내려다보며 냉랭히 말했다.

“유현진 씨가 고백을 했다가 혹여 그 상대가 받아들이기라도 하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지금 어쨌든 형식적으로라도 저와 공식적인 관계에 있는 이상은 그러면 곤란합니다.”

“――받아들이다니,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 마음만 밝히고 싶을 뿐인,”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 상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을 합니까. 그러면 유현진 씨는 공식적인 관계고 뭐고 그리로 가 버리는 게 아닙니까.”

나직하게 말하던 목소리는 도중에 성이 난 듯 거칠어졌다.

그 말투에 밀린 유현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쳐다보기만 하자 이내 다시 소리를 억누르며 “그러니까 애초에 말을 하지 마십시오.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결론짓는다.

“그럴……, 저는, 그럴 일은…….”

“그리고,”

유현진이 무어라 대꾸하려 했지만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듯 현태오가 말을 잘랐다.

“비산도로――지방으로 가실 일은 없을 겁니다. 수도에 계십시오. 지금 그 집에서 계속 지내시면 됩니다. 생활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저 때문에 신전에서 쫓겨나신 것은 사실이니 그 부분은 제가 책임질 겁니다. 그리고,”

앞을 내려다보면서 사무적으로 말하던 현태오가 잠시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마치 어떤 겸연쩍은, 혹은 불안스런 내색이라도 감추는 것처럼, 짧게 사이를 둔 그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한동안은 수도에서 지내시면서 지금과 같은 관계를 지속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이 아예 사라질 때까지는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현태오가 말했다.

“그때까지는 제가 매달 수도로 돌아와도 되고, 혹은 원하신다면 유현진 씨가 평항으로 와서 지내셔도 좋습니다.”

유현진은 한동안 말을 잃고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이게 이 남자의 최선의 배려구나. 이것이 그가 유현진에게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형식적이나마 계속 그의 파트너로 지낼 수 있다. 언젠가 사람들의 관심이 흐려져 이 관계를 끝나게 되더라도, 그때 가서 유현진에게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을 터였다.

그때까지는 여태 그랬던 것처럼 지낼 수 있다. 표면적이나마 공식적인 파트너로서 대우를 받으며.

욕심이 났다. 지금까지 얻어 냈던 그의 시간들을 조금 더 얻어 낼 수 있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있을 수 있었다.

그 시간들이 못내 탐이 났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움켜쥐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렇게 하라고, 얼른 그 말을 받아들이라고 들썩이는 심장을 다잡으며 유현진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는 없다.

이미 그 시간들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알아 버린 지금은,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갖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지금은, 더는 억누르지 못할 만큼 욕심이 생겨 버려서 안 된다.

여기서 더 맛보았다간 그 욕심을 억누르지 못할 터였다. 분명히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며 기어이 욕심을 부리고야 말 것이었다.

지금도,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꼭 그 말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힘든데.

“저는 정혜궁마마를 모시고 송갈로 가기로 했습니다.”

유현진이 말한 순간 현태오가 줄곧 앞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유현진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리는 그를 마주 보며 유현진이 주섬주섬 말을 주워섬겼다.

“아마도 오랜 벗을 위해 수도를 떠나기로 했다고 하면, ――그러기 위해 각하와의 관계를 접기로 했다고 하면, 사람들도 얼마쯤 떠들기는 하겠지만 현가에 안 좋은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정혜궁마마께서 혼인해 송갈로 떠나실 때에 동행할 예정입니다.”

현태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유현진을 보았다. 숨도 쉬지 않는 듯 꿈쩍도 않고 있던 그가 어느 순간, 허, 하고 낮은 소리를 내뱉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유현진 씨가 따라갑니까. 왕실 여성의 국혼에 남성이 따라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혀를 차며 잘라 말하는 현태오에게 유현진은 차분히 대답했다.

“함께 따라가는 궁인들을 위해 말을 가르쳐 줄 이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미사담 님께서도 승낙하신 일입니다.”

현태오의 눈초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정혜궁마마께서 화기애애하고 평화롭게 결혼해 떠나는 줄 아십니까. 송갈과의 새로운 관계를 도모하려 한들 아직 마음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국빈이라도 언제든 볼모가 될 수 있습니다.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올 수도 있고, 유현진 씨가 원한다 해서 마음대로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긴 뭘 압니까, 거기가 비산도랑 같은 줄 아십니까? 거기는 네 마음대로 오갈 수도 없고, 내 마음대로 찾아갈 수도 없고, 안 보낼 수도, 데려올 수도 없는 곳입니다.”

현태오가 무서운 기세로 을렀다. 저 아래에서 귀 좋은 사람들이 한둘 이쪽을 올려다보는 듯했다.

그러나 유현진은 현태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얼어붙어 있다가, 한마디 한마디 천천히 말을 뱉어내었다.

“안 보내고, 데려오고……, 그걸 왜 각하 마음대로 하십니까. 제 일은 제가 결정합니다. 비산도는――비산도든 어디든, 각하가 작정하고 절 보내려 하신다면 저로서는 거절할 만한 힘이 없으니 가야겠지만, 저는 원래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어디에도 그래야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뒤늦게 울분이 밀려왔다.

자신의 거취를 제멋대로 정해 버린――심지어는 머나먼 곳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끔 보내 버리려 했던 현태오에 대한 서운함, 서러움, 억울함 따위가 뒤섞여 속이 치밀었다.

“저는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겁니다. 각하께서 정하지 마십시오.”

유현진이 단호하게 고했다. 정면으로 노려보는 유현진을 마주 보며 현태오가 이를 악무는가 싶었다. 각하, 그놈의 각하, 잇새로 나직이 욕설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불현듯,

“유세진이는.”

얼음처럼 낮아진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유현진이 멈칫했다.

“……예?”

“유세진은 생각 안 합니까? 유세진도 송갈까지 따라가요? 그놈은 여기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놈 앞날은 걱정 안 됩니까?”

유현진은 아연히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서늘하고도 명확한 협박이라니.

삽시에 핏기가 가신 얼굴로 무어라 더듬거리던 유현진은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대로 그냥 놔둬 달라고 부탁드렸잖습니까. 처음으로, 이렇게 되기 전의 관계로 돌아가는 걸로. 들어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예, 그래서 지금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놔두고 있지 않습니까.”

현태오가 유현진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느릿하게 씹어 뱉는 그 목소리는 무섭게 가라앉아, 금세라도 끓어 넘칠 용암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제야 유현진은 이 남자가 언제부터인가 어마어마하게 화가 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질대로 했더라면 이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씹어 삼켜 버렸을 겁니다. 이 정도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데, 유현진 씨가 마냥 예뻐서 그냥 내버려 둔 것 같습니까? 그따위 약속만 아니었으면 아까 차에서 내릴 때 벌써 목덜미 붙잡고 끌고 갔어요.”

“――.”

“그래, 그런데 그 빌어먹을 약속 때문에 지금 얌전히 손 놓고 있잖습니까.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리고 얌전히 놔주고 있잖아요, 사람 돌아 버릴 것 같아도! 그래도 아직 이 관계를 끝내자고 말한 적은 없으니 형식적으로나마 이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는 거고! 그러니까 지금 유현진 씨는 싫든 좋든 겉으로나마 이 관계에 충실해야 하는데, 유현진 씨가 자꾸 헛소리를 하고 있잖습니까! 그러면 유세진이라도 끄집어내야지 별도리 있습니까?”

현태오가 유현진을 향해 돌아앉는다. 어둑하고 서늘한 공기 속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현태오의 눈동자가 까맣게 빛났다. 사납게 드러낸 이가 유난히 하얗게 대비된다.

“내가 지금 나 치졸해지는 줄 몰라서 이러는 것 같습니까? 이게 비열하고 꼴사나운 짓인 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법 그럴싸한 인간인 척할 수 있을 만한 여유도 안 남게 만들어 놓은 게 누굽니까? 유현진 씨 아닙니까! 내가 지금 좀 괜찮은 인간인 척하려고 유세진이까지 봐줘야 합니까? 너 하나만으로도 속이 뒤집혀서 잠도 못 자는 판에?”

억눌려 있던 현태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아래층에서 흘끗거리며 올려다보는 시선들이 늘어난다.

그럼에도 현태오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유현진 역시 그리로 시선을 줄 경황도 없었다. 그저 커다랗게 눈을 뜬 채 현태오를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유현진 씨 때문에 일만 들입다 해치우고 있습니다. 뭐든 일이라도 안 하면, 뭐든 딴 걸로라도 머리를 채우고 시간을 채우지 않으면 유현진 씨 때문에 속이 터져 환장할 것 같아서, 피곤해서 기절할 지경이 될 때까지 일만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지경이 돼도 또 잠은 안 와서 사람이 아주 돌아 버리겠습니다! 그런데 뭐, 고백? 송갈? ――씨발, 지금 유세진이 하나 조져 버리는 게 뭐 대수라고.”

“――각,”

“각하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현태오가 드세게 포효했다. 마치 꾹 눌러 왔던 게 터져 버리기라도 한 듯 유현진을 사납게 노려보는 눈동자가 시꺼멓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 성마르고 거친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유현진은 망연히 그를 쳐다보았다.

이상하다. 근래 들어 현태오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현태오 같지 않은 남자가 자꾸 보인다. 그 모습들 하나하나가 낯설고 두려우면서도 끝내 싫어지지는 않는 남자가.

현태오는 알고 있다. 유현진이 정말로 송갈에 가고자 한다면 그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비루하고 치졸한 협박을 하더라도. 그럼에도,

“현진아.”

무시무시하게 유현진을 노려보던 남자가 문득 나직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그 낯설고 고통스런 부름에 유현진은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 손을 뻗은 현태오가 우악스럽게 유현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무런 상냥함도 부드러움도 없이, 그저 조급하기만 하고 어쩔 바를 모르겠다는 거친 손길이 유현진의 두 뺨을 움켜잡는다.

“유현진. 적당히 좀 하라고.”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일그러진 얼굴이 분에 차서 으르렁거렸다. 유현진은 얼어붙은 채로 그를 마주 보았다.

아래층에서는 사람들뿐 아니라 단상 위에 있던 신관까지도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 속에서, 또한 이렇듯 무섭게 다그치는 현태오를 앞두고, 유현진은 당혹스럽고 억울해졌다.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삭막하게 현태오를 노려보고 있던 얼굴이, 너무나 억울한 나머지 어물어물 흐트러지고 말았다.

“내가 뭘, ……내가 뭘 그렇게 잘못, 내가 뭘 어쨌,”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턱 막힌 것 같았다.

속 시원하게 얘기라도 할 수 있으면 그나마 나을 텐데 말도 안 나오니 속이 상해서, 억울하고 분해서, 서러워서, 유현진은 홉뜬 눈으로 현태오를 노려보기만 했다. 커다란 눈동자가 울컥 뜨거워졌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려던 때, 일그러지는 시야 속에서 현태오의 낯도 같이 구겨지는 듯했다.

별안간 볼을 움켜쥔 손아귀가 유현진을 훅 끌어갔다.

입술을 짓씹는 단단한 이가, 그 입술을 벌리며 거침없이 밀어 넣는 혀가 유현진을 잠식했다.

오래도록 굶주려 허기졌던 아귀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현태오는 유현진의 입을 먹어 치웠다. 입술에서 혀, 타액까지 무엇 하나 안 남기고 삼켜 버릴 듯 사정없이 물고 빨며, 그 호흡마저도 모조리 빼앗아 먹을 듯하다가,

어느 순간 현태오는 유현진을 밀어내듯이 놓았다.

그렇게 떠밀지 않으면 놓아 버릴 수가 없는 것처럼 거칠게 떨어져 나온 현태오는, 숨을 허덕이며 넋을 놓은 듯 그를 올려다보는 유현진을 노려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

송갈 사절단이 석 달간의 체류 끝에 귀국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양과 송갈 사이에 교류의 물꼬가 트인 것은 수백 년 만의 일이었다. 이대로 그 물줄기가 순탄하게 흐르게 될지, 다시금 막혀 버릴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머무르는 석 달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다.

원래의 목적대로 다방면에서의 문화적 교류가 시도되었고, 그 과정에 여러 사건 사고들이 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양을―뿐만 아니라 송갈 역시도― 떠들썩하게 뒤흔들었던 것은 사절단을 이끌고 왔던 송갈의 셋째 왕자와 그들의 안내를 맡았던 제양의 둘째 공주의 혼약이라 할 수 있었다. 축하와 질타가 동시에 빗발치며 온 나라가 들끓었다.

그즈음 군수업체와 관련된 비리가 터지면서 거기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고위 인사들이 줄줄이 엮여 나오며 연일 시끄러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절단의 일정은 모든 것이 멈춤 없이 흘러가 예정된 석 달이 다 되었다.

이제 그들은 송갈로 돌아간 뒤 정식으로 혼인 날짜를 받아 올해 안에 제대로 된 채비를 갖추어 다시 제양으로 와 혼인식을 치르고 공주와 더불어 송갈로 넘어가게 될 터였다. 그 이후부터 두 나라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귀국을 사흘 앞두고, 송갈의 사절단은 제양의 왕족들, 그리고 행정 부처 및 국회 요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공식적인 일정을 마쳤다. 이제 사흘간 그간의 일들을 정리하고 휴식한 뒤 귀국길에 오르면 되었다.

그리고 이날 밤, 궁궐의 동편에 딸려 있는 작은 기도원에서 제양의 둘째 공주 제상아는 자정부터 동이 틀 때까지 기도를 올린다.

약혼자나 배우자가 먼 길을 떠나게 되면 행운과 건강을 빌며 밤샘 기도를 올리는 것이 제양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이제는 지키지 않는 이들도 많아져 노인들이나 따르는 고루한 풍습이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제상아는 신전의 권유에 선뜻 응했다. 송갈인과 결혼을 하므로 더더욱 제양의 관습을 지키겠다는 정치적 의도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본인이 진심을 담아 약혼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싶다고 했다.

먼 길을 배웅하기 위한 밤샘 기도를 올릴 때에는 당사자와 함께 한 사람 더, 형제자매나 혹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그 곁에서 더불어 밤을 새웠는데, 그 역할은 유현진이 기꺼이 맡겠다고 나섰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나마 유일하게 반대랄까, 곤란한 얼굴을 한 사람은 진문성이었다.

“일요일 밤이요?”

“예. 그래서 아마 월요일 오전에 예약된 병원 진료는 취소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박사님이 월요일 오후에는 수술이 있다고 하셨고 화요일은 휴진일이고 그럼 수요일이어야 하는데, 금요일에 재활을 받고 수요일이면 날짜가 좀 많이 뜨는데……, 라며 재활 담당의 일정을 떠올려 보며 진문성은 난색을 표했다.

“죄송합니다. 곤란하시게 해서…….”

“아닙니다. 음……, 월요일 좀 늦게라도 봐 주실 수 없는지 한번 타진해 보겠습니다.”

타진하겠다는 건 성사시키겠다는 뜻이다. 진문성은 다방면으로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병원을 다녀오는 것은 물론 유현진에 대한 거의 모든 일 처리를 그가 하고 있었으나, 여태 실수가 있었던 적이라곤 한 번도 없었고 현태오에게 연락할 만한 일도 전혀 만들지 않았다. 모두 다 진문성의 선에서 일이 해결되었다.

그래서 더더욱이나 유현진은 직접 현태오에게 연락을 할 일도, 연락이 올 일도 없었다.

“병원은 제가 혼자 가도 되는데, 바쁘실 텐데 굳이 진문성 씨가 같이 안 오셔도 됩니다.”

이미 몇 번이나 건넸던 말을 다시 꺼냈지만 진문성은 “아닙니다. 이 정도 시간 조율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러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된통 욕이라도 먹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진문성의 휴대 전화에서는 계속해서 문자나 전화 수신음이 울렸다. 종종 운전 중에도 휴대 전화를 확인하는 걸로 봐선 결코 한가하게 다닐 상황이 아닌 건 분명했다.

“많이 바쁘시겠습니다. 곧 사절단도 떠난다고 하고요.”

“아무래도 평균보다는 좀 바쁜 편이긴 합니다.”

“현, ……각하께서도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요.”

사절단이 오기 전에 비해 야윈 편인 진문성을 뒷자리에서 바라보며 유현진은 턱선이 더 날카로워졌던 현태오를 떠올렸다. 동시에 우울해지고 마는 유현진을 진문성이 거울로 쳐다보더니 “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진문성은 유현진이 현태오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은 해 주지만, 묻지 않으면 결코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다시 현태오를 보지 못했다.

그날, 예배 도중 현태오가 나가 버린 뒤로 유현진은 나머지 뒷감당을 고스란히 혼자 짊어져야 했다.

바로 그 예배가 끝나자마자 해당 교구를 담당하는 주신관에게 불려간 유현진은 ‘아무리 지금은 일반인이 되었다 하나 하나람님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경건해야 하는지 알 만큼 아실 분이, 예배 도중에 이 무슨 소란이냐’ 운운하는 꾸지람을 근 한 시간 가까이 듣고 나와야 했고, 신전 안에서 스쳐 지나는 다른 신관들에게도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 덕에 그날로 예정되어 있었던 재활 치료도, 치과 검진도 다른 날로 밀렸다.)

신전에서 나와서는, 평소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슬며시 인사를 건네며 다가와 ‘그런데 어쩐 일이냐, 싸운 거냐.’, ‘싸웠더라도 보아하니 결국은 무사히 화해를 한 것 같던데.’, ‘총독 각하와 다투기도 하시나 보다.’, ‘그래도 은근히 사이가 좋은가 보다.’ 하며 뭐든 한마디라도 얻어들으려는 수작도 버텨 내야 했다.

심지어는 집에 돌아올 즈음에는 대관절 무슨 소문이 그렇게 빨리 퍼져 나갔는지―심지어 무슨 소문이 어떻게 살이 붙어서 불어난 건지―, 친한 이들에게서도 추궁하는 연락을 받아야 했다. 막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세진에게서 전화를 받은 유현진은, ‘형님! 예배 시간 도중에 사람 없는 메자닌 자리에서 현 총독이랑 형님이 음란 행위를 했다는 게 정말이에요?!’라는 벼락같은 고함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뒷감당들은 어떻게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 일들은 대수롭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유현진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언제나 냉담하기 그지없었던 현태오가 성을 내며 언성을 높이던 목소리, 때도 상황도 아랑곳 않고 잡아먹을 것처럼 거침없이 퍼붓던 입맞춤, 그리고 유현진을 떠밀고 나가던 현태오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것만이 계속 반복해서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왜.

어째서.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져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가 없다.

혹시. 혹여나. 어쩌면.

가슴이 떨리는 어떠한 기대가 피어나다가도, 그런 기대들이 일시에 뒤엎였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때의 슬픔과 서러움이 떠올라 희망을 묻어 버렸다.

아니, 현태오가 그럴 리 없지. ……하지만 그래도. 행여나. ……그럴 리가 없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마음이 바싹바싹 말라 가는 것 같았다.

차라리 현태오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붙들고 물어볼 텐데, 그 뒤로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연락하기에는 유현진의 심장이 그렇게 튼튼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명확한 답을 들을 것이. 그 답이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각하께서는, 요즘 잠은 제대로 주무십니까?”

“음……, 평소보다 덜 주무시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진문성이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 까칠하게 야윈 얼굴이 떠오르며 마음이 초조해졌다. 동시에, 다시금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생각들이 불쑥 튀어 올랐다.

왜 그랬을까.

――혹시, 어쩌면.

“저어, 진문성 씨.”

“예.”

유현진은 입을 연 채로 잠시 진문성을 보다가 “아닙니다.” 하고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진문성은 유현진을 흘끔 쳐다봤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진문성은 묻지 않는 한 말하지 않는다. 그가 현태오에 관련해 말하는 거라곤 전달을 지시받은 사항뿐이었다.

이를테면 그날 이후 처음 진문성을 만났을 때, 대문 앞까지 바래다준 뒤 잠깐 눈치를 살피더니 ‘송갈은 못 가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때 ‘제가 결정할 문제입니다.’라고 유현진이 대답한 말을 그에게 전달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진문성 씨.”

창밖을 노려보던 유현진은 굳게 결심하고 다시 그를 불렀다. 이번에도 대답은 선선히 돌아왔다.

“예.”

“저어, 현……, 각하께서는,”

왜 그러시는 걸까요.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혹시 그분이 조금이라도, 아주 약간이라도 저를――.

“……제게 많이 화가 나셨습니까?”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고, 유현진은 스스로의 패기 없음에 절망했다.

진문성은 잠시 유현진을 쳐다보더니 되물었다.

“글쎄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제가 속였던 것도 있고, ……몰래 나쁜 짓도 했고…….”

생각해 보면,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낼 일을 꼽아 보자면 여럿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 때문에 화를 낸 게 아니다. 예배당에서 그는 이미 자리에 앉기도 전부터 화가 난 기색이었다. 왜 화를 내는지, 무엇에 대해 화를 내는지, 어째서 그러는지.

알 것 같으면서 알 수 없다. 어쩌면 알 것 같기도 했지만, 혹여 아닐까 봐 두려웠다. 다시 그 서운함과 아쉬움을 맛볼까 봐.

하지만, 어쩌면, 혹시.

수십수백 가지의 생각들이 하루에도 수십수백 번이나 마구잡이로 교차된다.

“음…….”

진문성이 뭔가 말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고민스런 기색으로 잠시 뜸 들이듯 생각하던 그는 결국,

“잘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젓고 말았다. 유현진은 실망스레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리고 만다.

“그런데 유현진 씨는,”

“?”

이번에는 말문을 연 진문성이 잠시 침묵했다. 슬쩍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게, 저 머릿속에도 수십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끝에 그가 불쑥 물어본 것은,

“태양 형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몹시 난데없고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예? ……태양 형님이요? 그야……, 좋으신 분이죠.”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유현진을 지그시 쳐다보던 진문성이 문득 “그렇군요.” 하고 작은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딘지 안도라도 한 듯한 기색이다.

그 영문 모를 질문과 기색에 유현진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운전대를 만지작거리던 진문성이 다시 물었다.

“좋아하신다는 분이랑은 연락은 계속 잘하고 지내십니까?”

순간 가슴이 달캉했다. 그다음으로, 기분이 다시 저 밑바닥으로 기어들어 갔다.

“……,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잘할 수 있을지,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지금도 이렇게, 같은 수도 안에 있으면서도 얼굴을 볼 수 없는데.

송갈로 가고 나면 연락은 완전히 끊겨 버릴 것이다. 그저 남 이야기 듣듯이 어딘가의 기사나 풍문 같은 걸로나 전해 듣겠지.

혹은 설령 그가 제안한 대로 지금처럼 관계를 유지한다 한들, 지금 같은 이걸 연락한다고 할 수 있을까. 진문성을 통해 흔적 정도나 느끼는 그런 것을?

침울하게 시선을 떨구는 유현진을 진문성이 기이하다는 눈치로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차분히 깜박이던 눈이 미심스럽게 유현진을 쳐다본다.

불현듯 눈살을 찌푸리는가 싶던 진문성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 “아,” 하고 입을 열었으나, 그대로 잠시 멈춰 있다가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애매모호한 낯으로 묵묵히 운전만 계속했다.

익숙한 길로 접어드는 차창 밖을 내다보던 유현진이 물었다.

“제가 송갈로 가면 혹시 세진이한테 불이익이 있을까요?”

“……. 각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예.”

유현진이 우울하게 대답하자 진문성은 난감한 듯 음……, 하고 우물거렸다. 그러다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게 원래 그분 방식은 아니긴 한데……, 또 아무 말이나 입 밖에 내시는 분은 아니라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아마 그렇게 되긴 할 겁니다.”

유현진의 낯이 더럭 굳어졌다.

분노와 염려와 울화가 마구잡이로 떠도는 유현진의 표정을 보며 진문성이 당황한 듯 “하지만 형님들이 도와주실 겁니다. 그러니 아주 심각한 상황까지는 안 갈…….” 하고 덧붙였지만, 우그러진 유현진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어떡하지, 우리 세진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런 협박은 너무하잖아. 나쁘고 비열하다. 악독하다. 아주 못돼 먹었어.

울렁거리는 가슴속으로 온갖 욕을 퍼붓는 유현진을, 왠지 모르게 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살피던 진문성이 긴 한숨을 쉬었다. 빨간 신호 앞에서 차를 세운 채 가만히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말했다.

“초반에 유현진 씨를 지방으로 보내려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도중에 각하께서 보류시키셨습니다. 유현진 씨가 아시기 전의 일입니다.”

“――.”

“각하께서는 원래 한번 결정을 내리면 철회하는 일이 없는 분입니다. 적어도 제가 그분 곁에 있는 동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보류를 하셨던 것이니, 아마 별일이 없었더라도 유현진 씨가 비산도로 가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린다 해서 변명이 되지는 않겠지만요, 하고 진문성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각하 옆에 오래 있었던 터라 그분을 제법 잘 알고 있는 편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습니다. 지금도 사실……, 유현진 씨께도 뭐라고 말씀을 해 드리고는 싶은데,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잘 몰라서 말씀을 못 드리는 거고요. 그런데,”

잠시 망설이던 진문성은 다시 액셀을 밟으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각하께서도 못하는 게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잘 모르는 것도 있으신 것 같고.”

아니, 그저 막연한 짐작이지만요, 하고 덧붙이며 그는 다시금 조용한 한숨을 쉬었다.

유현진은 굳어 버린 것처럼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진문성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트에 힘 빠진 몸을 기대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와서는 소용없는 변명이다. 비산도로 보내려 했든 보류를 시켰든, 유현진의 뜻과는 전혀 무관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어차피 마찬가지다.

……하지만.

더욱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하고 싶었는지. 어쩌려고 했는지. 뭘 바라는지.

어쩌면 진문성의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이가 흠잡을 데 없다고 칭송해 마지않는 평항 총독 현태오는,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과――유현진의 생각과도 다를 수 있었다.

생각만큼 냉철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생각만큼 명석하고 총명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의외로 아주 못났거나 무능한 구석이 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나면 저 잘난 외모도 갑자기 역변할지도 모른다. 성격도, 애초에 별로 좋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긴 하지만, 저렇게 남의 동생을 두고 협박하는 비열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현태오도 그렇게 마음에 붙들어 둘 만한 인간은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마음에서 몰아낼 수가 없다.

계속 계속 현태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곤,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 좀 줄었으면 좋겠다. 잠 좀 잤으면 좋겠다. 얼굴 좀 봤으면 좋겠다.

“얼굴 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유현진에게 진문성이 무슨 말이라도 했냐는 듯 시선을 주었다. 유현진은 얼른 손을 젓고는 고개를 돌렸다.

문득 눈가가 뜨거워지는 듯했지만 물기는 배어나지 않았다. 이제는 울 만큼 울어서 더 나올 물기도 없었다. 유현진은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창밖을 보았다.

마침 지나치는 교차로 모퉁이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과거를 지나 공존공영의 미래로」

송갈과의 친화를 주장하는 그 문구 바로 아래에는, 「피맺힌 역사를 기억하라!」라는 문구로 보란 듯이 척화를 주장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상반된 플래카드는 시내 곳곳에 붙어 있어 새삼스럽지도 않은 풍경이다.

송갈 사절단이 제양으로 들어올 즈음만 해도 훨씬 우세했던 척화파는 근래 그 기세가 다소 꺾이고 말았다. 척화파 내부에서 군수업체와 결탁해 이익을 얻은 자들의 비리 문제가 터지면서 그들의 입지가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세간의 정서까지 쉽사리 흔들리지는 않아 여전히 송갈과의 교류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의 상황에서는 극렬하게 척화를 주장하던 이들이 한풀 꺾인 것은 사실이었다. 국경에 접해 있는 지방에서는 이틈을 타 사소한 부분부터 교류를 시작해 보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었다.

적어도 송갈의 사절단이 방문함으로써 아무런 수확도 변화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곧 사절단이 떠나면 조금은 한가해지시겠네요.”

“예, 조금은요.”

유현진의 말에 진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현태오를 볼 수 있을까.

송갈로 가더라도, 혼인한 제상아와 함께 가는 거라면 올 하반기는 되어야 할 터였다. 그때까지는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는데, 그러면 적어도 그가 평항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걸까. 아니면 표면적인 관계이니 지금처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지내는 걸까.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차는 어느새 유현진의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이 있는 경사로로 진입하면서 진문성이 물었다.

“일요일 밤에 밤샘 기도를 하신다면 저녁에 정혜궁으로 가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낮에 세진이랑 만나기로 해서―이 멍청이가 비산도에 가겠다고 집을 내놨는데 그게 홀랑 나가 버리는 바람에 당장 살 새집을 찾아봐야 한다고 해서―, 세진이 만나서 좀 돌아다니다가 바로 정혜궁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귀가할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일 생기면 연락 주십시오.”

관리 대상의 일정을 확인해 두는 습관이 붙은 진문성이 당부했다. 예,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한 유현진은 대문 앞에 멈춰 선 차에서 막 내리려다 멈칫했다.

“아……, 그러니까, 일요일은 제가 하루 종일 집에 없으니까요, 디저트나, 단거나, 뭐 그런 거 없어도 됩니다.”

매일같이 유명한 집만 골라 디저트를 마련해 오는 것도 번거로울 텐데, 하고 유현진이 사양하자 진문성이 선선히 대답했다.

“아, 예. 전해 드리겠습니다.”

“……, ……?”

의아하게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는 유현진에게 진문성이 여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각하께서 직접 골라서 사 오시는 거라서요.”

무슨 생각으로 샀을까.

매일 하나씩, 맛있는 집 것들로만 딱 하나 사 오는 동안, 단것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대관절 무슨 마음으로 그것들을 고르고 가져왔을까.

어느 결에 유현진은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피곤하시죠?”

옆에서 궁인이 말을 붙이는 소리를 듣고서야 유현진은 놓고 있던 정신을 다잡았다.

“아, 아닙니다. ……아, 시간이,”

“시간은 아직 남았어요. 그냥 현진 님이 피곤해 보이시길래요.”

상냥하게 말하는 궁인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목례를 한 유현진은 시계를 보았다. 아직 자정이 되려면 조금 더 남았다.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들여다보자 제상아는 여전히 신관과 독대해 앉아 있었다. 밤샘 기도에 앞서 신관을 불러 그에게 축복의 말을 듣는 것이다.

이제 곧 자정이 되면 그때부터 동틀 때까지 그녀는 유현진과 함께 미사담을 위한 기도를 할 터였다.

유현진이 무사히 정신관이 되고 그녀가 한 해만 더 늦게 결혼을 했더라면 저 신관의 역할을 유현진이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리고 그녀가 결혼할 때에 축복의 말을 읊어 주는 것이 유현진의 소소한 꿈이기도 했지만, 그 희망은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지금 저기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사제님이 더 그녀에게 적절한 축복들을 나누어 줄 수 있을 터였다.

그럼 됐지, 하고 만족스럽게 생각한 유현진은 제상아를 보았다.

신관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는 제상아는 아주 예뻤다.

아끼는 사람을 위해 진심을 담아 기도할 그녀를 보며 유현진은 자신의 하루하루를 떠올렸다.

유현진 역시 그에게 남은 한 가지 바람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그 남자가 어디에서든 다치지 않고 안전하길, 그리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기를.

“이거라도 좀 드세요. 이제 해 뜰 때까지 계속 못 드실 텐데.”

궁인이 유현진에게 아담한 다과상을 내밀었다. 유현진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상을 내려다보았다.

상 위에는 따뜻한 차 한 잔과 작은 접시에 담긴 구움과자 세 조각이 놓여 있었다.

상아도 먹어야 할 텐데, 하지만 차가 한 잔인 걸 보면 이건 유현진의 몫으로 나온 거다. 유현진은 아직껏 신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제상아를 멀리서 살피며 포크를 들었다.

조가비 모양의 구움과자를 집으려던 유현진은 문득 손길을 늦추었다.

매일매일 달콤한 것을 담은 상자가 들어가 있던 냉장고가 오늘은 비어 있겠구나.

만일 오늘도 사려 했었더라면, 오늘의 단것은 뭐였을까.

현태오가 오늘은 무엇을 고르려 했을까.

밀푀유. 수플레. 바바루아. 몽블랑……. 무엇이든 몹시 달콤했을 텐데. 마음까지 푹 저미도록 달콤했을 거다.

“…….”

먹고 싶었다.

그 단것을. 그가 끓여 주는 차를. 그가 해 주는 음식들을.

그 말 없는 배려들을 먹고 싶었다.

구움과자를 먹다가 목이 멘 유현진이 그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이에 기도원으로 들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미사담이 들어오다가 유현진과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은 제양에서의 마지막 공식 일정을 마친 뒤 비공식으로 밤늦게까지 사절단끼리 연회를 한다고 들었다. 심지어 송갈은 연회를 늦게까지 하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중심인물인 남자가 여기 있었다.

“연회가 벌써 끝났습니까?”

“아니요, 그냥 왔어요, 남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잘 마시겠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미사담은 고개를 빼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아하니 연회 도중에 빠져나와서 제상아를 보러 온 거다. 이런 걸 뭐라더라, 팔불ㅊ…….

제상아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흐뭇한 미소를 띠는 미사담을 옆에서 보다가 유현진이 웃고 말았다.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죠.”

“이제 송갈로 돌아가시면 몇 달은 못 보실 텐데 어떡하시려고요?”

가볍게 농담할 셈으로 말했는데, 뜻밖에 미사담이 웃음을 거두며 정색을 했다. 그대로 진지하게 제상아를 쳐다보는 시선에 묵직한 기운이 서린다.

“그러게요. 그러잖아도 그것 때문에 요새 잠이 안 오는데. ……그냥 납치해서 바로 데려가 버릴까.”

혼잣말처럼 속삭이는 뒷말에 진심이 서려 있었다.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쳐다보자 그 기색을 느꼈는지 미사담은 그제야 빙긋이 웃으며 “아하하, 당연히 농담이지요.”라며 유현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농담이었던 게 맞을까 의심스러워하는데 안에서 신관이 일어섰다. 이제야 축언이 끝났나 보다.

“그래도 올해 안에는 다시 본다는 기약이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로 납치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랬다간 송갈과 제양의 관계는 끝장나는데요.”

“알 게 뭐예요. 당장 내가 죽겠는데.”

미사담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안에서 나오는 신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려 하며 미사담을 보던 유현진도 신관과 인사를 나누었고, 그는 곧 기도원에서 나갔다. 어느새 시각은 자정에 가까워 있었다.

신관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온 제상아는 미사담을 보곤 “왔어요?”라고 자연스레 묻더니 자정까지 5분 남은 시계를 보곤 유현진 옆에 앉아 접시에 남은 구움과자를 냉큼 집어 들었다.

“배고팠어?”

“아니. 하지만 이제 해 뜰 때까지 계속 기도해야 하는데, 그럼 체력 떨어지잖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나머지 하나를 집어 미사담의 입에 넣어 주었다. 미사담 역시 태연하게 입으로 받아 우물거리며 손을 들어 제상아의 입가를 톡톡 털어 주었다.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도.

아. 그렇구나.

그들을 바라보던 유현진은 별안간 깨달았다.

그들은 괜찮을 것이다.

몇 달을 떨어져 있더라도, 혹은 몇 년을 떨어지더라도, 적국에 가서 살아야만 하더라도, 그들은 저렇게 당연하게 같이 있으며 시간을 함께 보낼 터였다.

“시간 됐습니다.”

궁인이 말했고, 제상아가 입에 있던 과자를 차와 함께―이것도 유현진의 것이었지만― 삼켜 버리고 일어났다.

그때,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가 싶던 미사담이 물었다.

“그런데 같이 기도하는 건 꼭 유현진 씨가 해야 해요? 자격이 정해져 있는 거예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기도자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럼 제가 해도 되겠네요. 제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니까.”

미사담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런 미사담을 가운데 두고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제상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당신 무사 평안하라고 기도하는 건데요?”

“그럼 더 좋죠 뭐. 그걸 위해서라면 내가 통역사님보다 훨씬 더 간절하고 진실되게 기도할 것 같은데?”

“하나람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지금부터 믿어 볼까 하는데, 하나람님은 초심자의 기도는 안 들어주시나요?”

“…….”

“그리고, 기도하는 동안에라도 내가 상아 님 곁에 있고 싶은데.”

미사담이 덧붙여 말하며 웃는다. 그 마지막 말이야말로 그의 진심이다.

뚫어질 듯 미사담을 쳐다보던 제상아는 얼핏 달아오른 얼굴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말 대신 흘끗 유현진을 보았다.

유현진은 그들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추어올렸다.

“뭐……, 그러게요, 당사자가 기도해선 안 된다는 법은 못 들어 보긴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유현진이 한 걸음 물러나자 미사담이 아주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뜻으로 눈인사를 한다. 제상아는 그래도 될 것인가 고민해 보는 눈치였지만, 미처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미사담에게 떠밀리다시피 기도원 안쪽의 예배실로 걸음을 옮겼다.

예배단 앞에 나란히 마주 보고 앉는 그들을 문밖에서 지켜보던 유현진은, 그들이 기도를 시작하자 조용히 물러났다.

차량을 불러 주겠다는 궁인을 만류한 유현진은 그대로 예배당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예배당 바로 앞에 있는 동문으로 빠져나가면 그의 집까지는 조금 긴 산책을 하는 셈치고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겨울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또 눈이라도 내리려나 보다.

아주 펑펑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발목까지 푹푹 잠기게, 허리까지, 아니 그냥 머리끝까지 잠겨 버리게 눈이 내리면 좋겠다. 그러면 이 들끓는 머리도 좀 식을 텐데.

궐문 밖 12차로 넓은 길은 자정이 넘어서도 차들이 끊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 큰길 모퉁이 건물 위의 거대한 전광판에서는 심야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바로 어제 또 하나 터진 상원 의원의 비리 관련 뉴스와 함께 현태오가 잠깐 화면에 스치고 지나갔다.

무섭게 야위어 있었다. 거뭇하게 야윈 얼굴은 며칠 전보다도 더 골격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 탓일까, 웃음 하나 없는 얼굴은 섬뜩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건드리면 벨 듯한 흉기가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위험스러운 분위기에 기자들조차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곧 뉴스는 화면이 바뀌며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고, 그런 뒤에도 한참 동안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던 유현진은 어느 결엔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다.

보고 싶었다.

왜 저렇게 야위었는지 화가 났다. 매일 사다 놓는 그 단것들을 저 입에나 부어 넣으면 좋을걸.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 땅바닥만 쳐다보며 부단히 걸었다. 어느새 큰길에서 벗어나 고적한 오르막을 오르며 유현진은 찬바람에 얼어 버린 뺨을 문질렀다.

안 보고 지낼 수 있을까.

송갈로 떠나 버릴 수 있을까.

미사담이 말한 것처럼, 당장 내가 죽어 버리진 않을까.

“난 납치할 능력도 없는데…….”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는 사이에 서글픔이 밀려와 유현진은 걸음을 더 빨리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화내거나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혹은 셋 다 할 것 같았다.

어느 결에 유현진의 걸음은 제집을 지나쳐 오르막을 더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저만치 현가의 본가가 보일 즈음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경비초소에서 내다보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서, 그저 그렇게 우두커니 선 채 현가를 쳐다보기만 했다.

현태오의 방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서재에 있는 걸까. 이 방향에서는 서재 창문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다.

부디 잠들어 있는 거면 좋을 텐데. 깊이 잠들어 있다면.

유현진은 차갑게 얼어붙는 손에 입김을 불며 그 불 꺼진 창을 마냥 바라보았다.

……송갈로 가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이 관계로 계속 간다면.

그건 견딜 수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욕심이 넘치는데 가까이에서 보면서 그 욕심을 견딜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강제로라도 끊어 버릴 수밖에 없게끔 떠나 버리는 게 나았다. 그게 자신에게도, 또한 현태오의 입장에서도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어떻게 견딘다지.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어깨가 축 늘어지며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유현진은 고개를 떨군 채 천천히 걸음을 되돌렸다.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도 않은 자신의 집이 천 리 밖에 있는 것 같았다.

고작해야 몇백 미터 멀어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송갈의 수도로 어떻게 갈까.

안 봐도 괴로워지지 않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

또 눈가가 시큰해져, 유현진은 얼른 눈두덩을 눌렀다.

그러는 사이에 집 앞까지 도착한 유현진은 나중에라도 제상아가 걱정하지 않도록 「집에 도착함. 자고 일어나서 연락해. 하나람님께서 네 기도를 들어주시길.」이라고 문자를 보내며 뜰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힘이 빠져 느릿느릿하지만 쉴 새 없이 걸어온 걸음은,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멈칫했다.

거실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명등이 켜져 있는 듯 노오란 빛살이 집 안을 어둑하게 채우고 있었다.

바깥뜰의 조명등이라면 저녁에 저절로 켜지긴 하지만 이렇게 집 안까지 비출 리는 없는데……, 혹시 아주머니가 들렀다 켜 놓고 가셨나.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고요한 집 안으로 유현진은 의아해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현관 복도를 돌아 거실 앞에 섰을 때,

“――.”

발이 바닥에 붙박인 듯 걸음이 멈추었다. 호흡도 같이 멈춘다.

거실 소파에 현태오가 누워 있었다.

산책이라도 하다가 들른 것처럼 편안한 복장을 하고서, 현태오가 거기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뚫어질 듯 그를 보던 유현진은,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그 옆으로 다가갔다. 잠이 깊이 들었는지 유현진이 바로 앞까지 다가가 웅크리고 앉아도 현태오는 깨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것이라도 보듯,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유현진은 넋 놓고 그를 보았다. 눈앞에 있는 게 정말로 현태오가 맞는지, 크게 뜬 눈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당혹스레 살폈다.

누워 있는 그의 점퍼 주머니에서 빈 약 포장지가 반쯤 흘러나와 있었다. 껍질에는 수면제 이름이 적혀 있다.

어쩌면 이걸 먹고도 잠이 안 와서 산책이라도 나왔던 걸까. 그리고 주인 없는 집에 들러 잠깐 앉았다 가려 했을까.

“…….”

유현진은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고 앉은 채, 성냥불이 꺼지면 사라질 휘황한 선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현태오를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 한번, 뺨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 환상 같은 시간이 깨어질까 봐 차마 손도 뻗지 못한다.

가슴이 욱신거리며 저려 숨쉬기도 힘들도록 벅찼다.

고작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한탄스럽게 깨닫고 말았다.

나는 못 가겠구나.

아무 데도 못 가겠구나.

설령 다시 볼 수 없는 멀리로 가더라도 내 마음은 계속 이 남자 곁에서 맴돌겠구나.

“……왜,”

무심코 불쑥 중얼거리다 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현태오가 깰까 봐 입을 다문다. 하지만 그 다문 입속에서는 수십수백 번을 거듭한 물음이 맴돌았다.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런 목소리로 속삭이고, 그런 손길로 만졌는지, 왜 그렇게 입을 맞추었는지.

――날 쳐다보는 그 눈을 볼 때마다, 나한테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를 건드리고 스칠 때마다, 내 근처에 있을 때마다――기분이 말입니다, 영 이상했거든.

그때 불현듯, 언젠가 현태오가 내뱉었던 말이 유현진의 뇌리에 떠올랐다. 유현진이 멈칫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 나는, 아 혹시, 이놈이 어쩌면, 나한테 마음이 좀 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잇새로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 사나운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유현진은 큰 눈으로 뚫어져라 현태오를 본다.

왜 그렇게 쳐다보았는지. 왜 그렇게 속삭이고, 그렇게 쓰다듬었는지. 왜 그렇게,

“――.”

퉁,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그 무거운 울림은 점차 조금씩 빨라져 가슴속을 헤집으며 뛴다.

혹시나.

혹시라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혹시라도.

“왜 그랬어요?”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불쑥 속삭였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만 감돌고 있던 거실 안에 부드럽게 번졌다.

“나를 조금쯤은, ――.”

그러나 가장 물어보고 싶은 말은 도중에 막히고 만다.

그랬다가 또 아니면 어떡하지. 또 나를 멀찍이 두려 한다면. 난 다시 슬프기 싫은데.

유현진은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괴고 한참 동안 현태오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간도 잊고 계속해서.

노란 불빛만 어둑하게 실내를 비추는 거실에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묵묵히 보고 또 보던 어느 때.

현태오가 아주 약간 몸을 뒤척이는가 싶었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고개를 조금 움츠리던 그가 어렴풋이 눈을 뜬다.

잠에 잠겨 있는 무거운 눈꺼풀이 한 번, 두 번 깜박였다. 졸음에 겨운 새까만 눈동자가 그 사이로 잠깐씩 유현진과 마주쳤다.

유현진을 바라보며 느릿하고 묵직하게 움직이던 눈꺼풀은, 그러나 잠결이었던 양 도로 천천히 감겨 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낮고 고른 숨결이 흘러나온다.

그러다 문득,

“이리 와.”

잠에 취해 저 밑바닥으로 꺼져 버릴 것 같은 무거운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나직한 음색은 반쯤 꿈속에 잠겨 있다.

유현진이 멈칫 움직임을 멈춘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현태오는 눈을 감은 채 무겁게 한 팔을 들었다.

“이리 와, 어서.”

“…….”

유현진은 숨도 쉬지 못하고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그 벌어져 있는 팔을 두렵게, 또한 욕심스럽게 바라보다가 홀린 듯이 그에게 가까이 갔다. 멈칫거리며 그 넓은 팔 안에 가만히 몸을 들이민 순간, 두터운 팔이 유현진을 끌어안아 제 품에 가두었다.

어렵잖게 유현진을 소파 위로 올려 바싹 당겨 안은 현태오는 도닥, 도닥, 느리게 유현진의 등을 두드렸다. 그 손길마저 잠에 늘어져 천천히 힘이 떨어진다.

“그래, 착하지.”

어디 가지 말고, 형이랑 있어.

다시 잠속으로 떨어지기 직전, 희미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친 듯했다.

유현진은 숨을 삼킨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머리 위에서는 곤한 숨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고, 유현진을 단단히 끌어안았던 팔에서는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유현진을 감싸고 있는 품 안에서, 유현진은 한참이나 미동조차 없이 굳어 있다가 아주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이윽고, 멈춘 듯하던 심장까지 다시 퉁, 하고 울릴 즈음,

……훌쩍,

유현진은 물기 어린 숨을 삼키며 그 넉넉한 품 안으로 굼실굼실 파고들었다. 유현진이 움직이자 약간 힘이 들어가는 듯하던 팔이, 그 안으로 파고드는 유현진을 바투 끌어안으며 착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누긋하게 잠 속으로 가라앉은 현태오의 너른 품 안에서 유현진은 살며시 팔을 들어 그를 끌어안아 보았다.

나한테 이렇게 해 주는 거라면.

이 사람이 정말로 나한테 이렇게 해 주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합니다.”

유현진은 곤히 잠들어 있는 현태오의 가슴팍에 대고 속삭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꼭 감은 채 그대로 머물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어느 결에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는지, 캄캄한 밤에 묻혀 있던 정원이 어스름하게 그 형체를 드러낼 즈음에야 유현진은 가만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편안한 낯으로 잠들어 있는 현태오를 한참 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나온 유현진은, 아무도 없는 깊은 새벽길을 엉엉 울며 정처 없이 걸었다.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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