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연초부터 온갖 사건 사고 및 소식들로 조용할 틈이 없이 연일 들썩였던 매체들의 훤소는 송갈의 사절단이 제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날 정점을 찍었다.
그것은 동시에, 달포가량 전부터 줄곧 이어졌던 각계 고위 인사의 비리 폭로 기사가 정점을 찍는 날이기도 했다.
송갈의 사절단이 국경에서 제양의 송별을 받고 헤어지려던 찰나, 제양과의 결렬을 외치는 어느 송갈 청년의 습격을 받은 송갈의 삼왕자 미사담이 중상을 입는 한편 송갈 쪽 영토에서 들이닥친 의문의 차량에 제양의 이공주 제상아가 납치되었다. 그 납치극은 평항 총독 현태오의 활약으로 단시간 안에 끝이 났으나, 이로 인해 제상아는 다소의 부상을, 그리고 현태오는 치명상을 입었다.
최초의 속보가 났을 때 제양에서는 이 모든 참상이 송갈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여겨 송갈에 대한 분노와 비난이 쇄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재차 보도된 진상에 모든 것이 뒤바뀌고 말았다.
계연군 제상민이 제양 내의 군수업체나 반송갈 단체는 물론, 송갈의 군수업체 및 그들을 지원하는 송갈의 각종 단체나 인사와도 은밀하게 연락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 심지어는 이번 일에 있어서도 송갈 내의 극렬한 척화 단체를 이용해 송갈 왕자의 모살을 유도했을 뿐 아니라, 폭력 단체를 동원해 제양 공주의 납치 살해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 일에 연관된 청탁이나 뇌물 수수, 여타 부정한 야합에 대해 수년간 쌓인 증거도 제출되어, 관련 인원도 어마어마하리라고 예측되었다.
이 사건은 송갈에 대한 반대 시위를 하던 단체들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단체 내에서 활동하면서 제 사리사욕을 채운 이들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쇄도해 그들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토록 잡음이 많고 사건 사고가 많은 화평은 진행하지 않는 편이 옳다, 차차 시간을 두고 보아야 한다, 지금이 화평의 때가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등등, 여러 여론들이 치열하게 부딪쳤는데, 그럼에도 분명히 세간의 여론은 예전보다 훨씬 화평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
유현진이 처음 눈을 떴을 때에는 모든 것이 몽롱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눈을 뜬 게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나절 전에 처음으로 의식을 되찾고 눈을 떠 옆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고는 다시 잠들었다는데, 그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꼬박 한나절 동안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에는 기억이 사고에서 바로 이어져, 눈을 뜬 유현진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어, 별로 안 아프네.’였다.
하얀 침상에 누워 하얀 천장을 껌벅껌벅 쳐다보며, 이상하다, 다 꿈이었나, 꿈인 것치고는 여긴 병원 같은데, 하고 가물가물한 머리로 생각하다가 옆을 보니 제상아가 우는 듯 웃는 듯 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제상아의 퉁퉁 부은 얼굴에 붕대와 거즈가 붙어 있는 모습도 어딘지 꿈결 같은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상아야……, 너 괜찮아?”
목이 몹시 갈라져 공기 반 소리 반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알아들을 만은 했는지, 제상아는 이번에는 우는 듯 웃는 듯 화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안 괜찮아. 얼굴이 멍들고 부었어. 그런데 너보단 백배 나을걸.”
“뭘 백배씩이나……, 나 별로 안 아파. 살짝 욱신거리긴 하는데.”
“지금은 진통제가 돌고 있으니까 안 아프지, 바보야.”
총구멍 세 개를 옮겨 와서 수술을 했는데 안 아플 리 있니, 너 이제 좀 있어 봐, 아파 죽을걸, 하고 제상아가 심술궂게 말했다. 아, 이제 보니 화가 난 거구나.
“너 좀 전까지만 해도 아프다고 아프다고 하면서 계속 울었던 거 기억 안 나?”
“내가 그랬어?”
“넌 사람 복장을 뒤집어 놓고 기억도 못 하니?!”
제상아가 기어이 화를 냈지만, 유현진은 기억이 안 났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눈이 좀 뿌옇고 뻑뻑한 것 같긴 하다.
어쨌거나 지금은 머리가 몽롱해서 이것저것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진통제가 세게 돌고 있나 보다.
유현진은 제 몸에 연결되어 있는 여러 튜브들을 흐릿하게 훑어보곤 다시 병실 안을 보았다. 아니 저 귀하신 공주 마마께서 계시는데 왜 아랫것들은 아무도 없나. 궁인이라든가, 경호원이라든가, 아니면 현……라든가.
보고 싶은 얼굴이 더 있었는데.
아주 조금 아쉬워질 것 같았지만, 지금은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일단 눈을 감아야 했다. 그리고 눈을 감자마자 의식은 도로 까무룩 떨어지고 말았다.
두 번째로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나중에 들은 말로는 그 사이사이 몇 번 더 눈을 떴었다고는 하지만― 어어어엄청나게 아팠다.
제상아의 저주대로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유현진은 아프다고 울부짖을 수가 없었는데,
“혀어어어어엉――어어어어어엉――.”
하고 병실을 다 채우는 성량으로 한발 먼저 울부짖기 시작한 유세진 때문이었다.
고막이 울려서 고통이 배가되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간호사가 달려와서 실내 정숙을 강조했고 그런 간호사를 붙든 유세진이 우리 형 너무너무 아파 보인다고 진통제 좀 써 달라고 매달린 덕분에, 유현진은 정숙과 고통 경감이라는 일거양득을 거둘 수 있었다.
눈부신 의학의 발달로 진통제가 투여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유현진은 고통을 좀 잊을 수 있었는데, 고작 그 몇 분 동안에도 어찌나 아팠던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픈 사람에게서 병이나 상처가 옮겨 올 때에는 그래도 퍽 많이 줄어든 상태로 옮겨 오는데, 그래도 이렇게 아프다니.
현태오 본인이 앓았더라면 이보다 훨씬 더 아팠을 텐데 차라리 자신이 요만큼 앓아서 잘됐다고 유현진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데, 옆에서 눈물을 닦으며 그를 내려다보던 유세진이 왠지 모르게 불량스러운 기색을 띠더니 물었다.
“형님 지금 무슨 생각 해요?”
“어, ……어?”
“아니, 지금 딱 형님이 뻘생각할 때의 표정을 하고 있길래. 또 뭐 현 총독 대신 내가 다치길 잘했다, 그런 생각이나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 아…… 아니지, 무슨…….”
다른 의미의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거리는 유현진을 요렇게 노려보던 유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은 표정이 너무 읽기 쉬워요. 이래 갖고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사기꾼이라도 만나면 안 될 텐데.”
“내 얼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던데.”
“그거야 형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겠죠.”
유세진이 끌끌 혀를 찼다.
그나마 유현진이 정신도 들고 고통도 가신 듯하자 유세진도 진정되었는지, 울음을 그치고 침상 옆 의자에 십 년쯤 늙은 얼굴로 앉았다. 그리고 유현진의 물음에 따라 늘어놓은 말들은 이러했다.
유현진은 앞으로 한 달은 정양을 한 뒤에야 정상적인 사람처럼 생활할 수 있을 것이며, 지금 바깥세상은 끓던 가마솥 엎은 양 난리가 났고, 여론은 치열한 다툼을 거듭하면서 점차 친화론 쪽이 우세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상아가, 그리고 미사담 님이 바라던 방향에 이롭게끔 흘러가고 있구나. 그들의 앞날에 앞으로 어떤 풍랑이 더 올지 몰라도 당장의 파도는 넘긴 거로구나.
다행이다, 하고 안도하던 유현진이 불현듯 물었다.
“상아는? 아까 잠깐 눈 떴을 때 상아를 봤었는데, 괜찮아? 다친 것 같던데.”
“마마요? 마마는 안면 타박상이랑 왼팔의 총상, 손목 발목 좀 삐고 군데군데 멍든 것 말고는 괜찮으세요.”
“……. 괜찮다고 하기엔 그것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중상인 것 같은데…….”
“형님처럼 목숨 오락가락할 정도는 아니니 형님에 비하면야 괜찮으신 거죠.”
지금 누가 누구더러 중상이래요, 하고 유세진이 불퉁하게 말했다. 유현진은 그런 동생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상아 얼굴이 엄청 부었더라…….”
“그야 어마어마하게 울었으니까요.”
“상아가 울었다고?! 그렇게 아팠대?”
유현진이 놀라 물었다. 유현진이 제상아를 만난 이래 그녀가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임금에게 뭔가를 호소할 때 가짜 눈물 몇 방울을 찍어 내는 건 봤어도, 아주 어릴 적 자갈밭에서 넘어져 무릎이 왕창 깨어져 피가 철철 났을 때에도 얼굴만 울긋불긋 구기곤 약한 소리 한번 내지 않은 강인한 아가씨였다.
“형님 수술하는 동안 우리 현진이 잘못되면 어떡하냐고 수도꼭지 콸콸 틀어 놓은 것처럼 울었어요. 국경에서부터 우셨다던데, 궁인들 말로는 마마께서 그렇게 우시는 거 처음 봤다나. 난 형님 아픈 와중에 마마까지 말라 죽으면 어떡하나 싶었네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던 유세진이 문득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유현진에게 상체를 기울이며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형님. 마마랑 연애하는 건 어때요? 마마도 저렇게나 형님을 아끼시는데.”
“…….”
감동적인 마음으로 듣고 있는데 갑자기 그 감동이 얼어 버렸다. 유현진의 눈빛도 어둑해졌다.
“너 그렇게 사람을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
“아무 데라니? 왕실의 배필이 어떻게 아무 데예요? 가문의 영광이지!”
“미사담 님은 어쩌고?!”
아니 그전에 떡 줄 사람 생각은?! 하고 유현진이 되묻자 유세진은 잊고 있었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다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맞다……, 거기가 아직 살아 있었지…….”
몸만 멀쩡했더라면 저놈의 볼을 꼬집어 줬을 텐데 아직 침상에서 몸을 일으킬 수도 없어 분하다. 유현진은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함부로 했다간 크게 경 친다. 입조심하고 다녀.”라고 점잖게 꾸짖어 주곤, 그제야 떠오른 인물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미사담 님은 괜찮으시대?”
“예, 다행히 수술 무사히 마치고 그다음 날 아침에 눈 뜨셨대요. 좀 위험할 뻔은 했었나 보던데, 거기도 한동안은 병원 신세 져야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나 봐요. 좀 안정되고 나면 사절단 귀국 관련 기자 회견을 할 거라던데, 상황이 이래서야 사절단 귀국이 아니라 암살범 조우에 관한 기자 회견이 되겠지, 뭐.”
그렇구나, 하고 유현진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서부터 배를 뚫고 비죽이 나왔던 칼날을 떠올린 유현진은 다시금 등줄기가 서늘해져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처연하게 얼어붙었던 제상아의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그녀는 오히려 그때는 울지 않았다. 얼음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악물었을 뿐. 그때 그녀는 울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
다행이다.
그 끔찍했던 날은 결국 잃는 이 없이 끝났다. 많은 이들의 크고 작은 희생이 있었지만, 소중한 이들은 아무도 잃지 않았다.
유현진은 유세진만 달랑 앉아 있는 병실을 괜히 한번 눈으로 훑었다. 그래 봐야 없던 사람이 생겨날 리도 없는데, 사방 구석까지 살펴본 다음에야 슬쩍 물었다.
“현……, 현 총독님은?”
현태오의 부상은 자신에게로 옮겨 왔다. 그러니 그는 다친 데도 상한 데도 없겠지만, 필경 아주 바쁠 터였다. 유세진에게 몇 마디 말로만 들었어도 지금 저 바깥세상이 얼마나 발칵 뒤집혀 있을지 상상이 갔고, 그런 상황의 중심에 있는 현태오가 얼마나 정신없이 바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안 보이는 거지. 너무너무 바빠서 여기에는 올 겨를조차 없을 테니.
사실은 눈을 뜨자마자 그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목숨 구해 줬다고 젠체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얼굴쯤은 보여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는 어마무지하게 바쁠 테고, 언제나 사적인 일보다는 공무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유현진은 억지로 서운함을 눌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진의 물음을 듣지도 못한 척 유세진은 여전히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미사담 님만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형님이랑 마마를 엮어서 신분 상승을 노려 보는 건데…….” 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저놈을 한 대 쳐야겠다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끙끙대는 유현진을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 눌러 눕히며 “아, 농담이에요, 농담!” 하고 외치고 만다.
“너는 만날 출세 출세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 형을 장가보내서 출세할 심산이냐?”
“시집보내서 출세하는 것보단 낫죠, 뭐.”
“이놈이 아까부터 왜 자꾸 헛소리야. 너 병원 온 김에 검사 좀 받아 봐야겠다.”
이불을 정돈해 주느라 침상에 가까이 와 있던 유세진의 볼을 꾸욱 꼬집어 당긴 유현진이었지만, 동생은 어쩐 일인지 아프다고 소리도 안 지르고 볼을 집힌 채 시무룩하게 유현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정말로 어디가 아픈가, 아니면 뭔가 나쁜 소식이라도……, …….
“세진아.”
갑자기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유현진이 푸르스름해진 낯을 굳히며 물었다.
“현 총독님은? 현 총독님은 어디 계셔? 무사하신 거지?”
그러나 유세진은 대답 대신 여전히 우울한 눈길로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세진아?!” 하고 유현진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들었을 때에야 그는 시선을 툭 떨구더니 무겁게 내뱉었다.
“형님, 진짜로 시집가려고요……?”
“아니 헛소리 좀 하지 말고, 현 총독님은 어떠냐니까?!”
“현 총독님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유세진은 어깨를 늘어뜨리곤 어둑하게 유현진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형님 수술하고, 생명에 지장 없다는 말 들을 때까지, 수술실 앞에서 꿈쩍을 안 하더라고요…….”
“……, 어?”
순간 유현진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 무사한지 안부가 궁금했는데, 수술실 앞에 있었다는 건 일단 무사하다는 뜻이겠지만…….
“회복실로 옮겨서도, 계속 형 머리맡에 앉아서 움직이질 않았어요.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먹고 계속 그러고 앉아 있는데……, 그 표정이, 꼭,”
유세진이 별안간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울멍울멍 쳐다보았고 유현진은 기묘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뭐지, 뭐랄까, 그 말은 마치,
“혀엉, 진짜로 그 남자랑 막 연, 연애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죠? 그 남자랑 막, 막, 그러는 거 아니지?”
유세진이 거의 울 것처럼 말했다. 그런 유세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현진의 시야에 문득 뭔가가 들어왔다.
냉장고 옆의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는, 리본이 달린 작달막한 상자. 매일매일 다른 형태의 포장으로 바뀌었지만 이제는 저 작은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짐작할 수 있는,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상자다.
“저 상자는 뭐야?”
“아? 저거, 아까 문성 형이 놔두고 갔어요. 뭐, 단거라던데.”
유현진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본 유세진은 붉어진 눈시울을 문지르며 말했다. 언제부터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매일 사다 놓으라고 했대요, 라고 덧붙인다.
유현진이 손짓을 하자 유세진은 “아직은 이런 거 먹으면 안 될 텐데.” 하고 중얼거리며 상자를 갖다주었다.
리본을 풀자 달달한 냄새가 확 번졌다. 상자 안에는 포슬포슬한 계란이 얹힌 타르트가 딱 하나.
유현진은 물끄러미 그 노란 타르트를 내려다보았다. 한입 베물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묵직하게 차는 것 같다. 목구멍 속이 더워지며 심장이 뛰었다.
“현 총독님은 언제쯤 오셔?”
타르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유현진이 조그맣게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유세진이 움찔하더니 머뭇머뭇 유현진의 눈치를 살폈다.
“한동안은……, 못 오실 텐데…….”
유현진은 타르트 대신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 상자마저 건드리는 것조차 아까워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나는, 현 총독님한테 물어볼 게 있어.”
유현진이 속삭였다.
“그리고, 할 말도 있어.”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깨어나고 나면 현태오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 물어봐야 할 말도.
비록 무슨 대답이 돌아오든, 어떠한 결과가 나든, 현태오에게 전하기로 결심했던 말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물어볼 것이다.
왜 그랬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
이제는 그가 무엇을 바라든 얌전히 그가 원하는 대로만 해 주지는 않겠지만―자칫하면 악성 스토커의 길로 들어서게 될지도 모르지만― 유현진은 알아야 했다. 그리고 알려야 했다.
타르트처럼 포슬포슬하게 부푼 마음은 동시에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게 그을었다.
심장이 뛰었다.
어서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그와 약속했던 대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바쁘실 테지만, 밤늦게쯤에는 오실 수 있으려나.”
유현진은 아직 이른 오후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러나 기다릴 수 있다. 한나절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당장 목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가 와 주기만 한다면.
“아니, 못 오실 거예요, 한동안은. 적어도 다다음 주까지는…….”
상황에 따라 그보다 더 오래 못 오실 수도 있고……, 라고 유세진이 말을 흐렸다. 그제야 유현진은 유세진이 조금 전부터 자신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유현진이 의아하게 깜박깜박 쳐다보자 유세진은 더더욱 시선을 돌리며 외면했다. 그 순간 가슴속에 시커멓고 불안한 느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세진아.”
“……예, 형님.”
엄하게 동생을 부른 유현진은 단호하게 물었다.
“현 총독님, 지금 어디 계셔?”
*
계연군은 검거 당시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컨테이너에 짓눌린 차량의 트렁크 안에서 발견된 그는 어깨와 손의 총상, 비골 골절 외에 차량의 충돌로 인한 상처는 없었으나, 위병에게 인도되어 보안서로 옮겨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날뛰며 제양 왕실과 송갈, 평항 총독 등등에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본인의 죄상을 스스로 인정하는 발언도 다수 있었는데, 변호사 측에서는 약물에 의한 심신 미약이라고 주장하며 얼버무리려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약을 했는지, 언제부터 해 왔는지에 따라 다소의 참작이 있을지는 몰라도, 현 상황에서 그가 중벌을 피할 방도는 없었다. 혹자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본보기는 보이지 못할망정 큰 내우를 일으켰으니 사형으로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고 하나, 임금이 집무를 보는 대정전 앞에 의양군이 노구를 이끌고 나가 엎드려 이마가 깨어져 피가 나도록 머리로 바닥을 찧으며 용서를 빌자 임금이 그를 달래어 돌려보냈다 하니, 극형까지 가지는 않으리라고들 추측했다.
그러나, 대죄를 범했다 해도 명확하게 형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왕족의 신분이다.
따라서 그를 폭행한 현태오는 왕족상해죄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현진과 현태양이 만나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었다.
최근에 현태양이 이유 모르게 자주 유현진에게 연락하거나 문자를 보내긴 했으나, 그들은 원래 새해나 명절에 안부를 묻는 것 말고는 딱히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현태양은 원래가 호쾌하고 활달한 성격인 데다 또 나름대로 근래에 몇 차례 문자를 주고받기도 했었으니, 비록 오랜만에 얼굴을 본다 해도 어제 만났던 듯이 쾌활하게 대할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어어, 현진아. 좀 괜찮으냐……?”
유현진의 병실로 들어선 현태양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침상 위에 기대어 앉아 그를 쳐다보는 유현진을 발견하고는 왠지 모르게 움찔하며 거북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예, 태양 형님. 돌봐 주신 덕분에 편하게 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현진은 반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수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형 병원의 특실을 차지한 건 다른 이들의 도움 덕분이겠지만, 적어도 의료진들이 그를 조금 더 꼼꼼하게 살펴 주는 데에는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현태양의 입김이 작용했을 터였다.
“아니, 뭘. 나야말로 고맙다고 해야지, 내 동생을 살려 줬는데. 상처 옮겨 와서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고맙다, 현진아.”
현태양은 유현진을 둘러싼 기기들을 습관처럼 둘러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요.”
난처한 빛으로 손을 젓자 현태양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랑 아버지도 오고 싶어 하셨는데, 너 좀 안정된 뒤에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오지 마시라고 했어.”
“예.”
감사합니다, 라고 조그맣게 덧붙이면서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그들까지 찾아와서 저런 이야기를 하면 거북할 것 같았다. 지금도,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데 은인인 양 대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가 그렇게 다치게 되었던 이유는 유현진과 제상아를 구하러 온 탓이 아니었던가.
“헌데 현진아, 너 말이다…….”
“예?”
그때 현태양이 어딘지 모르게 거북스러운 낯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유현진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자 한동안 머뭇거리던 현태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다. ……여튼 수술은 잘되었으니 더 걱정할 일은 없고, 한 며칠은 많이 아프겠지만 곧 나아질 거야. 몸 관리 잘하고, 응?”
현태양은 어물거리며 슬그머니 물러나려 했다.
그답지 않게 뭐가 불편하기라도 한 듯 어딘지 켕기는 얼굴을 하고 슬며시 뒷걸음질 치려는 현태양의 기색을 알아챌 겨를도 없이, 유현진은 그가 물러나려 하자 얼른 그를 붙들었다.
“태양 형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 어어어, 뭐, 뭔데?”
달아나려다가 타이밍을 놓쳐 버린 사람처럼 낭패한 낯으로 목을 뒤로 빼는 현태양에게 유현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현 총독님께서 감옥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현태양이 멈칫하며 유현진을 보았다.
유현진은 현태양의 입만 쳐다보았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라며.
유세진이 현태오의 현 소재지를 말해 주곤 도망치듯 돌아간 이후, 유현진은 한동안 아연히 넋을 놓았다. 그러다 휴대 전화를 붙들고 이리저리 검색을 해 보았으나, 현태오에 대한 기사는 국경에서 벌어진 사건의 해결에 큰 몫을 했다는 기사 이후로는 다른 소식이 뜨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 지옥 같은 상황을 단신으로 해결해 낸 남자를 감옥에 넣다니, 너무나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였다.
설마 유세진이 뭔가를 잘못 알았거나 혹은 내게 심술을 부리려고 헛소리를 한 거겠지, 유현진은 초조하게 손가락을 놀려 「현 총독님 감옥 갔다던데 정말이야?」라고 제상아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한참이 지나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진문성에게 전화했지만 그 역시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기사에도 뜨지 않는 걸 보면 일반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뜻일 텐데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고민하던 때에 유현진의 병실에 고개를 들이민 사람이 현태양이었다.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잔뜩 긴장한 기색을 띠었던 현태양은 유현진이 직구로 던진 질문을 듣고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지 약간 허를 찔린 얼굴을 한 그는, 그러나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어, 감옥이 아니라 구치소…….”
“――! 감옥에 갇혔다는 말이 정말이었어요?”
“아니지, 엄연히 다르지. 감옥이라 함은 통상적으로는 교도소를 말하는데, 교도소는 형이 확정된 뒤에나 가는 곳이고 구치소는,”
“말도 안……, 그날 현 총독님이 아니었더라면 정혜궁마마가 그렇게 무사하시지 못하셨을 텐데, 큰 공로를 세운 분을 어떻게 포상은 못 할망정 감옥에 가둡니까.”
유현진은 기가 막혀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아니, 잠깐만 현진아, 내가 가둔 게 아니고,” 하고 얼른 달래며 곤란해하는 현태양을 보고서야 유현진은 그에게 화낼 일이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쳐 속상함을 꾹꾹 누르며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억울했다.
“그날은 현 총독님이 계연군마마께 총을 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혜궁마마를 납치하려던 도중에 저지당하자 도리어 죽이려고 공격을 하는데, 달리 방도가 없었어요. 아무리 왕족에게 손대선 안 된다 해도 그 상황에서 손 놓고 죽을 수는 없잖습니까. 정혜궁마마도 위험한 상황인데.”
“아니, 그래, 알겠는데 그 변호도 나한테 해 봐야 소용없고,”
현태양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다 고통 때문에 창백해지며 도로 쓰러지는 유현진을 반듯하게 눕혀 주며 머리맡의 의자에 앉았다. 인사차 얼굴만 비추고 얼른 나가 버리려 했는데 이래서야 안 될 것 같았다.
“물 줄까, 물?”
현태양은 마른기침을 하는 유현진에게 빨대 달린 컵을 건네주었다. 목이 바싹 말랐었는지 얌전히 받아 마시는 유현진을 보며, 현태양은 이 순하고 침착한 녀석도 화를 낼 때가 있긴 하구나, 하고 내심 감탄했다. 동시에, 억지로 모른 척하려 했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마음이 무거워졌다.
현태양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 상황이야 당연히 참작이 되지. 하지만 태오가 갇힌 건 그것 때문에 아니라, 수도로 돌아온 뒤에 계연군마마께 상해를 입혀서야.”
“수도로 돌,”
“음. 계연군마마도 치료를 받느라 우리 병원에 계셨는데, 그때 일이 좀 터졌어. 너 정신 차리기 전에.”
현태양은 눈을 크게 뜨는 유현진에게서 컵을 도로 받아들며 그날의 참상을 떠올렸다.
국경에서의 참사가 벌어진 그날, 그 근처에는 마땅한 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의 부상자들은 대부분 수도에서 처치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유현진은 긴급으로 수도로 실려 와 이 병원으로 들어왔다.
유현진과 함께 발견된 계연군도 마찬가지로, 왕족의 생명은 일차적으로 보호받는다는 규율에 따라 검거에 앞서 부상 처치를 받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유현진의 부상은―정확히 따지자면 현태오가 입었어야 할 부상은― 다행히도 목숨이 경각에 달릴 만큼 위중하지는 않았다.
원래 현태오가 입었을 당시에는 생명을 위협할 수준이었을 터이나, 신관의 이능으로 상처가 완화되어 옮겨 간 덕에 그나마 중상이긴 하나 목숨은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깨와 다리, 몸통 세 군데에 총상을 입은 부상은 한나절을 꼬박 넘기는 긴 수술을 요했고, 유현진의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게 확실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현태양은 그 수술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이다 보니 틈나는 대로 상황을 알아보며 그 앞을 기웃거렸다.
그러는 동안 줄곧 현태오는 수술실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치명상은 유현진에게로 옮겨 갔다 하나 자잘한 상처들은 여전히 숱하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국경에서 돌아온 직후라 그 역시 너덜너덜하게 지쳐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현태오는 수술실 앞 의자에 앉은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눈 한번 붙이지 않았다. 그저, 여태 현태양이 보았던 어느 때보다 시커먼 낯빛으로 수술실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다.
간신히 수술실의 불이 꺼지고 의사가 나와 유현진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하자 그제야 현태오는 겨우 전기가 들어온 기계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현태양은 그가 누군가에게 그만큼 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회복실로 옮긴 뒤에도 현태오는 유현진의 침상 머리맡에 앉아 해쓱해진 유현진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보다 못해 현태양이 그에게 더 이상 위험할 일은 없으니 가서 눈 좀 붙이라고 권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문제가 벌어진 것은 유현진이 마취가 풀린 뒤였다.
여전히 의식을 잃고 있는 가운데서도 통증을 견딜 수 없었는지 유현진은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프다고 호소하며 울었다.
목소리를 낼 기력조차 없어 바싹 마른 입술 모양으로만 아프다고 연신 속삭이면서 꼭 감은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현태양은 얼른 진통제 처치를 하고는 혀를 차며 물러나다가, 심장이 뚝 떨어질 뻔했다.
아까부터 깊이 가라앉은 낯으로 석상처럼 묵직하게 앉아만 있던 현태오가 소름 끼치도록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야, 야, 금방 괜찮아져. 약 금방 돌 거야. 진정해.’
창백해 보일 정도로 서슬이 퍼런 그를 보고 가슴속이 써늘해진 현태양이 얼른 그를 다독였다.
이놈이 오늘 대관절 왜 이렇게까지 이상하게 구는지 내심 의아해하면서도 계속 현태오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에, 다행히 약이 들어 유현진이 다시 잠잠하게 잠들고 나서야 그의 낯이 조금 누그러지는 걸 보고 현태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도의 숨을 내쉬어선 안 되는 거였다.
평온해진 유현진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현태오는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회복실에서 나갔고, 그제야 이 귀신같은 놈이 돌아가서 좀 쉬려나 보다 하고 현태양은 마음을 놓았다.
설마 회복실에서 나간 현태오가 그 길로 계연군이 누워 있는 병실로 찾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계연군의 병실 앞을 지키고 섰던 위병들도 물론 몰랐을 것이다.
당연히 마음 놓고 출입을 허락한―이랄까 애초에 누구보다도 자유로이 출입할 권리가 있는― 평항 총독이,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가 버리고 계연군을 반죽음시켜 놓을 줄은.
‘다치게 해선 안 되는 사람도 구분 못 하고 함부로 휘둘러 대는 멍청한 손을 멀쩡하게 둘 필요가 있나.’
자다 깨어 얼떨떨하게 쳐다보는 계연군에게 현태오가 무표정히 내뱉은 말이었다고 한다.
수건으로 입을 틀어 막힌 채 끔찍한 신음을 흘려 내는 계연군의 기척에 놀란 위병들이 잠긴 문을 부수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그리고 양 손목과 양 팔꿈치가 바사삭. ……그냥 두 팔이 끝장나 버린 거지.”
뭐 팔뿐만 아니라 다른 데도 그렇고, 하고 현태양은 새벽에 잠도 못 자고 호출당했던 외과의의 비명 같은 회고를 떠올리며 무거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현진은 핏기 가신 얼굴로 말을 잃었다.
“아무리 계연군이 중죄를 저지른 상태라 해도 아직 형이 떨어지기 전인 데다 왕족은 왕족이거든. 사적 보복을 그렇게나 해 놨으니, 아무리 태오라고 해도 일단은 어디든 안 들어갈 도리가 있겠냐.”
“……. 그렇긴 하네요…….”
유현진은 그제야 납득하겠다는 듯 창백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태양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사실 숨이라도 붙여 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회복실에서 나갈 때 태오 그놈 분위기가 아주, 사람 여럿 잡고도 남을 것 같았거든.”
살갗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흉흉했던 공기를 떠올린 현태양은 새삼스럽게 오한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의 동생이 여차하면 괴물처럼 무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몸소 체감한 건 그놈이 철들기 전 속내를 숨기지 않았던 무렵 이후로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그럼 현 총독님은 감옥에서 어떻게……, 언제까지 계셔야 하는 겁니까?”
“상황이 복잡하게 됐잖아. 공은 공이요 과는 과인데, 허물에 비해 세워 놓은 공이 훨씬 크니까 그리 중한 처벌은 받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사건 현장이 아닌 곳에서 왕족을 그렇게 다치게 해 놨으니 왕실 규범에 따라 재판은 받아야지. 그런데, 그래 봐야 약식으로, 형식적으로 가볍게 끝날 테니까 별로 걱정할 것 없어. 외려 그놈은 이참에 그 안에서 편하게 쉴 수 있어서 좋을걸. 지금 다른 사람들이 그놈 대신 뒤처리하느라 아수라장이지. 아마 보석으로라도 나올 텐데, 그놈 상황이나 입장을 생각하면 아무리 길어 봤자 3, 4주?”
어쩌면 한동안 겁나게 바쁠 게 뻔하니까 일 안 하고 쉬려고 일부러 사고치고 들어갔는지도 모르지, 하고 중얼거리던 현태양은 잠시 생각하다 제풀에 고개를 저었다. 평소 일 중독인 현태오의 성향을 생각하면 그건 아니겠다.
현태양의 이야기를 듣던 유현진은 힘이 빠진 듯 침대에 늘어졌다. 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유현진을 현태양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래도록 알아 온 동생이었다.
자주 만나거나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알고 지낸 시간이 오래되는 데다 속사정도 속속들이 아는 만큼 더 마음이 가, 현태양은 나름대로 제 친동생만큼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지겠다고 늘 애쓰던 어린 시절부터 알아 왔으니, 이 성실하고 건실한 청년이 더 이상 고된 일 없이 잘살길 바랐다.
게다가 그가 예뻐하는 동생인 유세진까지도 엉엉 울며 매달리지 않는가.
현태양은 당연히 유현진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 두 발 벗고 나서 도와줄 요량이었다.
그런데.
“현진아.”
현태양이 묵직하게 입을 떼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유현진이 고개를 돌렸다. 아픈 와중에도 단정한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처연해 보이는지 한층 더 마음이 아팠다.
“세진이가 말이다, 네 걱정을 많이 해.”
“아, 예. ……세진이가 형님께도 괜한 소리를 해서 걱정을 끼친 것 같던데……, 죄송합니다.”
곧 난처한 얼굴로 사과하는 유현진에게 현태양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외려 사과는 내가 해야지, 내 못난 동생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탄식하는 현태양에게 유현진은 이상한 얼굴을 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는 유현진을 보며 현태양은 다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말이다, 어떻게든 우리 현진이를 도와주고 싶었거든. 내가 비록 너랑 그리 자주 보거나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어도 늘 내 친동생처럼 마음이 쓰였단 말이야. 그래서 너 힘든 일 생기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 예, 감사…….”
“아니, 아니다, 감사하지 말어! 감사하면 안 돼!”
현태양은 솟구치려는 눈물을 삼켰다. 그것은 사나이의 부서진 양심과 깨어진 결심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었다.
“너 힘들어하는 거 뻔히 아니까, 내가 어떻게든 태오한테서 널 도와주려고 했어. 어떻게 해서든 태오를 설득해서 너 편안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예……?”
“그런데……, 아무래도……, 내 능력으로는 못 도와줄 것 같구나. 미안하다, 현진아. 못난 형을 용서해 다오!”
현태양이 침상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유현진이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한사코 만류하며 현태양은 뼈저린 무력감에 탄식만 흘렸다.
그날부터 낌새가 이상했었다.
아니 애초에 현태오가 술김에 유현진을 덮쳐 공주와 파혼하고 그를 책임지겠노라 했을 때부터 이게 뭔 일인가 싶긴 했지만, 정말로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이 온 것은 그날이었다.
아버지 생신 때 놈이 난데없이 상을 뒤엎어 버리고 나갔던 그날.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봐도 그날의 대화에 별 이상한 부분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저놈이 대관절 유현진과의 관계에서 무슨 꿍꿍이가 있었길래 갑자기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나가나 어안이 벙벙했다. 한편으로는 저 감정 표현 희박한 놈이 저렇게 대놓고 불침 맞은 호랑이처럼 화를 드러내기도 하는구나, 여러모로 놀랍고 두렵고 이상했었다.
어찌 되었든 너무 사태가 이상해 급히 유현진에게 연락을 해 보았는데 여전히 유현진은 연락이 안 되지―설마 차단 상태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현태오는 전화를 받을 리 없지, 저놈 저렇게 열화를 내며 나간 걸 보니 사람 잡고도 남을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현태양은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도, 그날 밤새 혹시 어디서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거 아닌가 오돌오돌 떨었던 시간이 무색하게 별다른 흉한 소식은 들리지 않아 일단은 안도한 현태양이었지만, 그 뒤로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현태오를 예의 주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놈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으니.
원래부터 일 중독이긴 했지만 제 몸을 해칠 정도로 일 더미에 파고드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던 놈인데, 현태오는 여유 시간이라곤 1초도 남겨 두지 않고 없애 버리려는 것처럼 무섭게 일을 파고들었다. 나날이 사람이 바싹바싹 말라 가는 게 보였지만, 놈이 숨 쉴 때마다 뿜어내는 공기조차 어찌나 서슬이 퍼런지 말 한마디 붙일 도리가 없었다.
저놈이 왜 저러나.
이상해진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현진에 대한 몇 마디 말을 건넨 그날 저녁부터인 것 같은데, 그렇다고 유현진이 원인――……일 리는 없지.
현진이가 그렇게 남 화나게 만들 정도로 처신을 잘못하는 녀석도 아니고, 무엇보다 태오는 사람 때문에 감정을 그만큼이나 드러낼 놈이 아니었다. (예전에 형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 새끼는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이나 흘리기는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삭막하고 무거운 얼굴로 침묵이나 좀 하겠지.’라고 진심으로 말했던 바 있다.)
그러니 뭔가 그들로서는 모를 다른 이유가 있나 본데, 그 이유가 무엇이든 현태오는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저놈이 혹시 머리에 문제가 생겼나 심각한 의심마저 들어 지금의 상황이 해결되고 나면 검사를 좀 받아 보게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상황이었다.
국경에서 대형 사고가 터져 부상자들이 잇따라 실려 온 것은.
심지어 그 부상자들의 면면이 무려 공주 마마에 계연군, 평항 총독 등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었으니, 병원은 한때 비상이 걸렸었다.
다행히도 공주 마마와 계연군은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상은 아니었고, 평항 총독은 원래라면 목숨을 걱정할 정도의 치명상이었으나 그 상처는 마침 한자리에 있었던 유현진에게로 옮겨 가 그 역시 무사했다. 가장 심각한 상황에 빠져 바로 수술실로 옮겨진 것은 유현진이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현태양은 ‘엉? 현진이한테 이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하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워했으나, 한편으로는 유현진에게 신성가호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사실이라면―유현진과 현태오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거라면― 그들의 관계는 손쉽게 끝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진이를 놔줘라 어째라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을 보러 내려갔다.
그리고,
수술실 앞에 석상처럼 굳어 앉아 있는 현태오를 본 순간, 현태양은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시커멓게 죽어 버린 낯에서 유일하게 번들거리며 빛나는 눈은 오로지 수술실만 보고 있었다. 누가 불러도, 좀 쉬라고 해도, 눈길도 주지 않고 ‘괜찮습니다.’라고만 딱딱하게 대꾸하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현태오를 보면서, 현태양은 몹시 기묘한 기분에 빠졌다.
그리고 그제야, 어쩌면 자신이 여태 뭔가를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스쳤다.
마침내 수술이 끝나고 의사가 나와 유현진은 괜찮을 거라고 말했을 때, 현태오의 악다문 턱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면서도 현태양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것을 보는 심경이었고, 회복실로 옮겨서도 침상 머리맡에 앉아 유현진만 묵묵히 내려다보는 현태오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제 두 손을 꾹 맞잡은 채로―혹시라도 제 손을 자유로이 두었다간 당장 잠든 이에게 손을 뻗어 무슨 짓이라도 할까 두려운 것처럼― 앉아, 그 대신 한시도 떼지 않는 눈길로 유현진을 더듬고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건 여태 현태양이 일평생 알아 왔던 동생이 아닌 것 같았다. 눈길 한번 떼지 않고 유현진만 바라보는 저런 얼굴을 현태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천천히, 그러나 확연하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니었구나.
나는 애초에 유현진을 도와줄 수 없는 거였구나.
유현진을 편안하게 잘 놔주라고 현태오를 설득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런 눈을 하고 상대를 바라보는 놈이, 그 상대를 놓아줄 리 없었다.
어째서,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현태양이 유현진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유현진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을 터였다.
신성가호가 남아 있건 말건, 그들 사이에 책임져야만 할 사실이 실제로 있었건 말건, 이제 와서는 그 누구라 해도 이 가엾은 아이를 현태오에게서 구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현태양은 유현진에게 가슴 깊이 죄책감을 느꼈다.
비록 자신이 잘못한 바는 없었지만 가족이 저지르는 일이다 보니 심적으로 연좌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불쌍해서 어쩌나. 못 도와줘 미안해서 어쩌나.
현태양은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유현진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태양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유현진이 애틋하게 말한 그 순간 현태양은 가슴이 덜컹했다.
아까부터 유현진이 이 말을 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 마음 아픈 말을 할까 봐.
현태양은 쓰라린 마음을 딛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현진아, 정말 미안하다……. 내가 말했다시피 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정말 간절한데, 내가, 내 힘으로는 태오를 설득해 낼 수가 없을 것 같,”
“저, 현 총독님이랑 만나고 싶습니다.”
현태양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의 말은 듣지도 않은 듯 도중에 말을 자른 유현진은 간절한 눈으로 현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요. 저 언제쯤 퇴원할 수 있을까요? 현 총독님이 계신 곳은 면회가 되는 곳입니까? 안 된다 해도 어떻게든 뵐 수 없을까요? ……도와주세요.”
*
현태양은 난색을 표했다.
‘아니, 감옥에 어떻게 함부로 들어가냐…….’
‘구치소는 면회 가능하잖아요.’
‘그놈은 지금 특별 구금 상태라 면회 아무나 안 돼. 그리고 너 지금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당장 오늘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을 만큼만 나으면 세진이나 누구에게든 도와달라고 할 테니까. 오래도 안 걸릴 거고 딱 한 시간만이라도 외출할 수 있으면…….’
‘에이, 안 돼, 안 돼.’
몹시 곤란한 얼굴로 손을 내젓는 현태양을 간절하게 바라보던 유현진은 삽시에 어두워진 낯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힘없이 어깨까지 늘어뜨리는 유현진을 현태양이 거북한 눈길로 흘끔 쳐다보았다.
‘저는……, 태양 형님 아니면 도움을 청할 데가 없어서……, 태양 형님만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어떻게든 버텨 왔는데…….’
처연하게 속삭이며 망연히 이불 자락만 내려다보는 유현진을 보고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현태양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은 그게 말이다……, 태오가 너 절대로 병원 밖으로 내보내지 말랬어.’
그놈 자기 말 안 들어주면 나중에 얼마나 지랄하는지 너도 알잖냐, 하고 애원하듯이 말하는 현태양에게 유현진이 잠시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지금 바깥이 많이 위험합니까?’
‘위험보다는, 너 싹 낫기 전에는 절대로 퇴원시키지 말고 아무 데도 보내지 말라더라고. 자기 나올 때까지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 나아 있어야 한다고…….’
그놈이 경찰한테 붙들려 가는 와중에도 날 협박하고 가더라, 형을 뭣같이 아는 새끼가, 하고 현태양이 툴툴거렸다.
유현진은 현태양을 바라보며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가슴속이 다시금 욱신거렸다.
‘당장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몸이 좀 나아질 때까지는 기다릴게요. 하지만 현 총독님께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물어봐야 할 말도 있고요. 그러니까, 한 시간만……, 안 되면 삼십 분, 아니 십 분만이라도 좋아요.’
유현진이 간절하게 호소하자 현태양은 아이참, 이걸 어쩌나, 싶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런데 진짜로, 아무나 면회 안 돼. 가족과 변호사 외에는 특별히 허락받은 관계자만 갈 수 있는 데다 태오도 네가 면회 신청하면 거절할걸.’
‘그러니까 부탁드리는 거예요. 태양 형님 말고는 아무도 절 도와주실 분이 없어서……. 제발 이번만 도와주세요. 다시는 이런 부탁 안 드릴게요.’
유현진은 깊이 허리를 굽히며 애원했다. 상처가 땅겨 아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금세 낯빛이 하얗게 질리는 유현진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는 현태양이었지만, 결국 그는 유현진의 고집과 본인의 죄책감에 지고 말았다.
알았다고, 너 스스로 걸어 다닐 만큼 낫고 나면 그때 방법을 알아봐 줄 테니 일단 몸부터 나으라고, 그렇게 꺼질 듯한 목소리로 약속한 뒤 휘적휘적 병실에서 나가는 현태양을 보며 유현진은 너무 억지를 부린 듯한 기분이 들어 미안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보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고, 묻고 싶었다.
오래도록 유현진은 한 번도 헛된 희망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릴 적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도하며 바랐던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는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기도를 하면서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하나 불안해하고 아쉬워하는 게 너무도 괴로워 어떠한 희망을 품는 것은 그만두었다.
그러나, 딱 한 번만.
이번에 딱 한 번만 더.
유현진은 조금이라도 빨리 낫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의료진이 하라는 대로 먹고, 몸을 움직이고, 상처를 돌보며 시간을 세었다.
그러는 동안 진문성이 매일 점심때마다 들렀다 갔는데, 바쁘기가 그지없는지 얼굴만 보고 가는 정도였지만 언제나 그의 손에는 작고 달콤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간호사에게 듣기로는 매일같이 유현진의 상태를 꼼꼼하게 체크하고 간다고 했다.
그 와중에 바깥세상은 정신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의양군은 은퇴뿐 아니라 가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왕족으로서의 권리도 일체 포기하고서 지방 시골로 아예 옮겨 가겠다고 하며 아들의 구원을 청하고 있었지만, 쉽지는 않을 듯했다.
국내에서의 비리뿐 아니라 송갈 측의 군부에까지 뇌물을 건넨 정황이 드러나 계연군은 내우외환을 모사했다 하여 사형까지 거론되고 있었다. 심지어 법리적 해석에 따라서는 역모 사건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왕족의 경우 본인과 그 비속까지 사형이었다.
어느 쪽이든 왕의 허가만 떨어지면 사형까지도 갈 수 있는데 임금이 그렇게까지 처벌하지는 않으리라는 예측이 분분한 가운데, 이 와중에 오히려 척화파에서 본인들의 처지가 급급해지자 꼬리 자르기를 할 요량으로 계연군의 사형을 은근히 바라는 상황이라,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태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여론이 대부분이라 형식에 지나지 않는 처벌을 받고 평항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현태오에 대해 가지 치고 나온 소식 한 토막에 유현진이 있었는데, 국경에서 동행했던 유현진의 이능 덕에 현태오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어 ‘신성가호를 잃었을 그가 이능을 쓸 수 있었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에 초점을 둔 의혹들이 불거졌다. 기사화가 되는 것은 눌러 놓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을 아예 막을 수는 없어, 현태오의 정치적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둥, 현태오가 다칠 일이 많으니 치유 능력을 지닌 유능한 신관을 사적으로 고용한 편법일 거라는 둥, 그냥 유현진이 특이 체질이라는 둥,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여러모로 시끄러울 것 같은데 형님, 진짜로 그냥 송갈에 가서 한 몇 년 있다 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착한 스토커로 살아갈 꿈을 꾸고 있었는데…….”
“스토커가 되기 전에 형님이 먼저 스토킹을 당하게 생겼다고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유현진에게 유세진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며 다그쳤다. 그러고도 잔소리를 더 퍼부으려는 눈치였지만, 때마침 그때 담당 교도관이 그들을 맞이하러 나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유현진이 그럭저럭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뒤로도 이래저래 회피하려던 현태양을 딱 붙들고 다시금 눈물겹게 호소한 결과, 유현진은 보름도 더 지나서야 겨우 병원에서 외출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구치소로 오는 길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기자로 보이는 차량 두어 대가 따라붙었는데, 어떻게든 그들을 피해 무사히 구치소 안으로 들어서긴 했으나 이미 저들이 구치소 밖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으니 돌아가는 길도 험난할 성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때는 돌아갈 때이고, 유현진은 구치소 내부의 삭막한―그러나 생각보다는 밝고 깨끗한― 복도를 걸어가며 아까부터 세차게 뛰는 심장 위를 가만히 억눌렀다.
그동안 현태오와는 아무런 연락도 닿지 않았다.
현태양이 워낙 기를 쓰고 유현진을 피하는 통에 유현진이 개인적으로 구치소에 면회 신청을 해 봤는데 얄짤없이 거절당했다. 구치소 측에서의 거절일 수도 있겠지만, 그다음 날 찾아온 진문성이 ‘완치되실 때까지는 병원에서 이동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넌지시 말하는 걸 보니 현태오가 거절한 성싶었다.
만나고 싶지 않은 걸까.
유현진은 마음에 자신이 없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시무룩해지려는 기분을 심호흡으로 몰아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의 마음은 변함없다. 그의 뜻을 존중해 주겠지만 그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본 뒤의 일이다.
이야기를 나눠 보고 결론이 나면――혹여 슬픈 결론이 나면, 그럼 그때 가서 스토커가 되더라도 피해는 안 입히는 착한 스토커가 되어야지…….
“이쪽입니다.”
담당 교도관이 복도 모퉁이의 안쪽을 가리켰다.
외진 복도 끝에 딱 하나 있는 육중한 철문을 본 순간 심장이 뛰었다.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무엇부터 물어보고, 무엇부터 말해야 하나. 숱한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었는데, 지금 당장 문을 눈앞에 두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보고 싶다는 것.
“아, 정말로 바빠서 죽겠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바쁜 것보다, 여기저기서 연락 오는 데가 많아서 힘들어요. 면회 요청하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인데, 또 그 대부분을 거절해야 하는데 거의 다 까마득한 윗사람이잖아요. 소장님이 진짜 진땀 빼고 있다니까요.”
어딘가로 연락을 한 교도관과 함께 문 앞에서 잠시 대기하는 동안, 교도관은 유세진과 아는 사이인지―예전에 업무상의 볼일로 식사를 몇 차례 같이 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한숨을 쉬며 고충을 토로했다. 어디서나 놀라운 친화력을 자랑하는 유세진은 덩달아 한숨을 쉬며 친구처럼 맞장구쳤다.
“그렇죠. 게다가 총독 각하가 어디 또 보통 인물입니까. 이건 뭐 수감자가 아니라 상전 모시는 기분이시겠어요.”
“맞아요, 맞아! 사실상 수감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총독 각하가 독방을 쓰시는데 그 안에 전화며 노트북이며 다 들어가 있거든요. 몸만 저기 있지 그냥 자유로운 분이에요. 저 안에서도 필요할 때에는 계속 바깥이랑 연락은 하시는데, 지금 바깥 분들만 속이 타나 봐요. 당장 제일 중요하게 제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이 이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면회 신청을 하다가 안 되니까 애꿎은 우리들만 닦달하는데, 어휴…….”
“쯧쯧, 알 만한 분이 처신 좀 잘하시지 왜 하필 이렇게 바쁠 때에 이런 데에 들어오셔선.”
“그러니까요. 얼른 보석이든 뭐든 좀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저 양반이야 노 났지 뭐. 지금 바깥에 있었더라면 겁나게 바빴을 텐데 이 안에서 느긋하게 쉴 수 있고. 다른 사람들만 똥줄 타는 거죠.”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두 사람을 흰 눈으로 쳐다보는 유현진이었다. 그러나 그 말들을 들어 보니 현태오가 저 안에서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는 모양이라 안심했다. (이 말을 들었더라면 저 교도관은 펄쩍 뛰며 ‘험한 꼴은 우리가 당하고 있다니까요?!’라고 했을 성싶지만.)
그때 안에서 문이 열리며 다른 교도관이 나왔다.
“현태양 씨, 들어오십시오.”
유현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저 문 안에서 현태오와 만날 수 있다.
현태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여기저기 손을 써서 제 이름으로 면회 신청을 해 준 자리였다. 뻔히 유현진의 얼굴을 아는 교도관도 눈 가리고 아웅으로, “들어가시지요.”라고 손짓으로 안내한다.
“동행분도 같이 들어가셔도 됩니다.”
“어……, 아니요, 저는 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
교도관이 유세진에게 말했지만, 유세진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더니 거절했다. 현태오와 유현진의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궁금은 하지만 굳이 제 귀로 듣고 싶지는 않은 듯한 기색이었다.
유현진은 홀로 문 안으로 들어섰다. 교도관이 바깥에서 문을 닫고, 그 안에는 유현진만 혼자 남았다.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하얗고 좁은 방이었다.
한쪽 벽면에 성긴 철창으로 가로막힌 창문이 있었고, 그 창문 너머에 빈 공간과 문이 있었다.
유현진이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낯설고 삭막한 공간을 둘러보는 사이에, 맞은편 공간의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인기척이 다가왔다. 통화를 하며 오는지 어렴풋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럼 그건 아버지께 넘겨. 어떻게 처분할지 당신이 알아서 하시겠지. 아, 금고 카드. 저녁에 들러. 아니면 지금 태양 형님이 면회 오셨다니까 태양 형님 통해서 전해도 되고. 그래, 지금 면회 왔다는데. 갑자기 어쩐 일로 왔나 몰라. ……그놈한테는 별일 없겠,”
문이 열리면서 목소리가 뚜렷해졌다.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문 안으로 들어서던 냉담한 목소리가 별안간 뚝 끊겼다.
내부로 들어오다 멈춰 선 현태오가 유현진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
철창 너머에서 현태오의 멈춰 있던 얼굴이 이상해졌다. 다문 턱이 꿈틀하고 움직인다.
저 표정이 뭔지 모르겠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얼굴로 현태오는 뚫어질 듯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어느 순간 입술이 뭐라고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모양이 욕설인 건 알겠다.
현태양 이 새끼가……,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현태오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런 뒤 다시금 천천히 유현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살피듯 바라본다. 드러난 손목이며 발목 같은 데에 붕대가 감겨 있는 걸 보곤 눈썹이 꿈틀한다.
“다 나을 때까지 병원에 꼼짝 말고 있으랬더니……, 진짜 말 안 듣네…….”
현태오가 험한 낯으로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저는 그런 말 들은 적 없습니다.”
유현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리고 제가 왜 꼭 각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까?”
현태오가 눈썹을 틀어 올렸다. 빤히 유현진을 쳐다보던 그가 철창 앞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흘끔 시계를 보는 얼굴이 화난 것 같았다.
유현진은 보고 싶은 얼굴을 드디어 만나 가슴이 벅찬 와중에도 무섭고 주눅이 들었다. 그럴수록 더 정색을 하고 똑바로 쳐다보는 유현진을 말없이 쳐다보던 현태오는 조금 전보다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요.”
“…….”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어서 와서 앉아요. 철창도 있는데 내가 뭐, 철창 뚫고 나가서 잡아먹을까 봐?”
혀를 차며 말하는 현태오에게 유현진은 주춤주춤 다가섰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도, 지금도 이토록 가슴 뛰게 반가운데도, 왠지 모르게 무서웠다. 숨죽인 짐승한테 다가서는 기분이다.
현태오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늘 단정하던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수염도 자라나 있다. 그러나 딱히 아픈 데는 없어 보이는 모습을 차근차근 살피며 유현진이 철창 앞으로 다가선 순간, 철창 사이로 현태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불시에 목덜미를 잡아 끌어당기는 억센 손에 끌려간 유현진이 철창에 부딪히기 직전에야 멈추었다. 바로 코앞으로 현태오의 얼굴이 다가온다.
그러나 얼결에 끌려간 통에 철창을 붙들다가 상처가 배긴 유현진이 “으……,” 하고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기 무섭게 현태오가 멈칫했다. 험악한 얼굴로 살피는 그에게 유현진이 손짓으로 괜찮다는 시늉을 하면서도 급격한 통증에 숨을 삼키자, 현태오는 움켜쥐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씨발,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 내보내지 말라고 했었는데, 잇새로 욕설을 지껄인 현태오는 도로 의자에 털썩 앉으며 성질을 냈다.
“여기가 어디라고 옵니까? 하루하루 얌전히 치료나 받아도 모자랄 판에 어딜 돌아다녀요? 그 꼴로도 부족해서 어디 상처 더 옮겨 올 놈 없나 찾아보기라도 하시려고?”
욱신거리는 통증이 가라앉길 견디며 유현진은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저렇게 화를 내니까 서러워져서 울컥했다.
“――고맙다는 소리 들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낫게 해 준 은인인데 꼭 그렇게 못되게 말씀하셔야 합니까?”
“고맙다는 소리 못 들을 줄은 알고 계신가 봅니다.”
“……. 왜 들으면 안 됩니까?”
원망스레 노려보던 유현진이 불쑥 따지자 현태오는 기가 차다는 듯 쳐다보다 “뭐요?” 하고 되물었다.
“각하께서 원하신 것도 아니고 제가 제 맘대로 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각하께 도움이 되었는데 왜 겉치레 말로나마 고맙다는 소리 한마디 들으면 안 됩니까?”
현태오가 유현진을 아주 빤히 쳐다보았다.
철창이 있어서 다행이다.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게, 저러다 어느 순간 냅다 멱살을 쥐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유현진은 슬그머니 철창에서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별일 없어 다행이다. 야위긴 했지만 기운은 있어 보였다. 아프진 않아 보여서 다행이다. 그에게 큰일이 없어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화는 내지 않아도 좋잖아.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지만 괜찮냐는 말 한마디쯤은 할 수도 있을 텐데.
유현진은 기대한 적은 없었음에도 서운해졌다. 또다시 자신이 없어진다. 할 말도 있고 물어볼 말도 있지만 그 말들이 가슴속에서 졸아들어 버린다.
우울하게 입을 다물어 버리는 유현진을 뚫어져라 보던 현태오가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화를 삭이기라도 하는 듯 낮은 숨을 삼킨 뒤 다시 시선을 떨어뜨린 현태오는 억누른 목소리로 나직이 내뱉었다.
“그날 컨테이너에 처박혔을 때, 유현진 씨가 내 상처를 본인한테로 가져가고 있다는 걸 번연히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 가는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유현진은 무섭게 눈매를 번득이는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불현듯 그때 현태오가 속삭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건드리지 말라고, 고치지 말라고, 고통 속에 잠겨 가면서도 초조하게 화를 내던 목소리.
그 애타는 말을 유현진은 듣지 않았다. 다시 그 상황이 와도 듣지 않을 것이다.
“유현진 씨가 수술받고 누워 있는 꼴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목숨이나 부지할까 싶도록 긴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워 깨지도 못하고 앓는 유현진을 보면서.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의식도 없는 상태로 아프다 아프다 우는 걸 보면서.
현태오는 마주 보는 유현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씩 말을 뗐다.
“그날, 머리꼭지가 돌아서 한밤중에 들이닥쳤던 그때, 울면서 애원을 하든 말든 멈추지 말고 그냥 그대로 이 새끼를 덮쳐 버렸어야 했는데.”
“――.”
“이 새끼가 울면서 싫어할 게 겁나든 말든, 그날 그냥 내 욕심껏 쑤셔 박아서 그 빌어먹을 신성가호를 깨뜨려 버렸어야 했는데. 그러면 이 새끼가 남 대신 아파하는――나 대신 아파하는 그런 거지 같은 꼴은 보지 않았을 텐데.”
유현진은 아연히 현태오를 보았다.
언젠가 폭풍이 몰아친 듯 지나갔었던 밤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칫하면 신성가호를 잃었을지도 몰랐던 날이다. 그날 포악하게 날뛰던 현태오는 흐느끼며 애원하는 유현진을 앞두고 멈칫한 채 지켜보다가 그대로 나가 버렸었다. 그 사납고도 고통스럽던 얼굴.
문득 유현진은 가슴속에서 몹시 이상한 기분이 스며 났다.
저릿하고 아픈 듯한, 기쁜 듯한, 괴로운, 무어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기분이다.
눈만 껌벅거리는 유현진을 뚫어질 듯 쳐다보던 현태오는 낮은 숨을 내쉬며 자세를 반듯이 했다. 그제야 치밀었던 화가 좀 가라앉은 듯―혹은 어떻게든 억누르는 듯―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 돌아온다.
“왜 왔습니까.”
“――, 국경에 사절단을 배웅하고 돌아온 뒤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간신히 숨을 억누르며 대답하는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냉담하던 얼굴을 구겼다.
“지금 그 몸을 해 갖고선 고작 그것 때문에 오셨다고요?”
“고작 아니라서 왔습니다. 해야 할 말을 더 이상은 미뤄 두기 싫습니다.”
유현진을 지그시 노려보던 현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사나운 얼굴이었음에도 왠지 그답지 않게 뭔가 자신이 없는 것처럼, 혹은 어딘지 불안하기라도 한 것처럼 벽을 응시하다가 혀를 찼다.
“유현진 씨 몸부터 다 나은 다음에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지요. 저도 여기에서 나가고 상황 좀 정리가 되면,”
“아니요. 지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유현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현태오의 미간에 왈칵 주름이 지며 거친 시선이 꽂혔다.
“유현진 씨 몸 상태 안 좋다고 해서 저는 제 의견을 굽히거나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아픈 사람 붙들고 제 의견 관철시키는 게 유쾌하지는 않으니, 다 나은 다음에 이야기해요.”
유현진의 심장이 불안하게 떨렸다. 결코 봐주지 않으리라고, 듣기 싫은 말을 할 거라고 경고하는 눈길 앞에서 유현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도 얘기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저는 그 말씀이 내키지 않으면 따르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플 때 얘기하든, 건강할 때 얘기하든.”
유현진은 이미 어떻게 할지를 정했다.
이곳에 남을 것이다. 수도에 남아 꿋꿋하게 현태오와 같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가 평항으로 가면――그를 기다려야지. 여태 그랬듯. 그러다 못내 보고 싶으면 몰래 찾아가 먼발치에서 보고 돌아와 다시 기다릴 것이다.
그를 볼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는 가지 않겠다.
유현진이 똑바로 바라보자 현태오가 화를 누르는 듯 무섭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하던 그는 결국 턱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원하신다면 지금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유현진 씨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유현진 씨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해서 제가 그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제 마음입니다. 어떻게 할지도 제 뜻대로 할 겁니다.”
미리 방어선이라도 치는 것처럼 딱 잘라 말하는 현태오에게, 유현진도 그만큼이나 잘라 말했다.
“저는 비산도에 안 갈 겁니다. 송갈에도 가지 않습니다. 저는 수도에 남을 겁니다.”
유현진이 무슨 말을 하려나 경계하듯 쳐다보던 현태오는 문득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다가―마치 당장 반대하려고 마음먹고 있다가 허라도 찔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수도에서, 제가 오래전부터 계속 좋아해 왔던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낼 겁니다.”
현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삽시에 낯이 얼음처럼 굳어지는 그를 유현진은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마음에 담아 왔다. 계속 보고 싶었고 매일매일 점점 더 좋아졌다. 이제는 그가 평항에 있을 동안 보고 싶어 어쩌나 벌써 걱정될 만큼.
더는 담아 놓을 수 없었다. 아무리 꾹꾹 누르려 해도 마음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저는 아주 옛날부터 좋아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철들기도 전부터 계속, 그리고 신전에 들어가서도.”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도 있는 겁니다.”
도중에 현태오가 딱딱한 음색으로 말을 잘랐지만 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애써도 바뀌지 않아요.”
“――.”
“그 사람에게 어떠한 강요도 부담도 주고 싶지 않고 폐를 끼칠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하고 싶어졌습니다. 전하기만이라도. 계속 자신을 위해 기도해 온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아주기만이라도 하면,”
“유현진 씨.”
현태오가 다시 딱딱하게 말을 잘랐다.
“역시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요. 유현진 씨가 다 나은 뒤에, 이런 데서 말고요.”
얼음처럼 싸늘한 말이 더 듣기 싫다는 듯 유현진을 가로막는다.
유현진은 문득 초조해졌다. ……혹시나 미리 알고서 그러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서, 듣기 싫어서.
“아니요, 저는 말만이라도, 그냥 말만이라도 꼭 하고 싶,”
“나중에 해요.”
안 된다. 지금이 아니면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각하, 저는,”
“유현진 씨는!”
억눌려 있던 현태오의 목소리가 별안간 사나워졌다. 유현진을 쳐다보는 눈초리도 그만큼 사나웠다.
“유현진 씨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유현진 씨의 처지가 어떤지 알아야 하고, 유현진 씨가 해야 할 일이 뭔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뭔지, 똑똑히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거친 노성에 유현진은 얼어붙었다.
자신의 처지, 해서는 안 되는 일.
숨조차 멈춘 채 현태오를 바라보는 유현진을 마주 보다가, 현태오가 낯을 일그러뜨렸다.
“저는 유현진 씨가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사고로 의식을 잃어 가면서, 유현진 씨는 분명 내게――.”
거칠게 뭔가를 따져 물으려던 현태오는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유현진을 응시하던 그는 험한 낯을 애써 누그러뜨렸다.
“그래, 저도 명확하게 말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있습니다.”
현태오는 유현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과거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떤 마음이었든, 무슨 일이 있었든, 예전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도 않을 거고 생각도 하지 않을 겁니다. 현재 바로 지금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난 유현진 씨도 그럴 거라고――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단하게 굳은 목소리는 그 시선만큼이나 엄격했다. 치밀어오르는 속에 뚜껑을 덮어 버리기로 결론을 내리고, 그 아래에서 여전히 끓고 있는 화도 잘라 내겠다고 약속이라도 하는 것 같다.
망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짧게 침묵하며 유현진을 노려보던 현태오가 못을 박듯 말했다.
“그날 유현진 씨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
유현진의 머릿속에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날 유현진이 의식을 잃기 전, 쓰러진 현태오를 부둥켜안고서 그에게 호소했던 말이었다.
한 푼의 거짓도 없이 오로지 진실로만 했던 그 말이 그에게도 들렸었던가.
현태오는 뚫어질 듯 유현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 속에 숨어 있는 몹시 중요하고 소중한 뭔가를 필사적으로 찾는 것처럼 낱낱이 바라보며, 그가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그렇게 말하면서 저를 살려 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유현진 씨는 책임을 져야 해요. 유현진 씨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죽었을 테니.”
그렇게 설득하듯 말하는 사이 스스로 그 말을 납득한 것처럼 현태오가 말을 이었다.
“목숨 빚은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저는 빚을 지면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사람인데, 유현진 씨가 멋대로 제게 빚을 지워 버렸습니다. 그러니 유현진 씨는 그 책임을 지고, 제가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저에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줘야 합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은혜를 갚으라고 구해 줬던 게 아니다.
유현진은 망연히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은혜라니, 빚이라니, 그런 걸 지우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정세가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입니다. 당장은 상황이 상황이니 척화파에서도 숙이고 있겠지만 시일이 지나면 다시 적의를 드러내기 쉬운데, 유현진 씨는 저나 정혜궁마마와 가까운 입장이라 본의 아니게 세파에 시달릴 겁니다. 시한 없이 계속해서 유현진 씨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저뿐인데, 그러려면 유현진 씨는 저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인의 의무라고 현태오가 사무적으로 말한다. 그의 무뚝뚝한 시선이 유현진을 짓누르고 있었다.
“저는 평생을 두고 유현진 씨에게 제 목숨 빚을 갚을 겁니다. 유현진 씨는 현가의 일원으로―제 배우자에 해당하는 자격으로 지내실 것이며, 그러므로 유현진 씨는 그 책임을 지고 다른 구설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다른 누구도 마음에 둬서는 안 되고, 오직 제 곁에만 있어야 합니다.”
반론을 허용치 않는 강압적인 말이 떨어졌다.
유현진은 말을 잃은 채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얼마나, 자신이 바라 왔던 결론인가.
그의 곁에 계속 있을 수 있다면. 그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하지만,
“저는 보은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유현진은 서늘하게 핏기가 가시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각하께 아무런 부담도 줄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각하께서 그러길 바라지 않습니다.”
현태오의 낯이 굳었다. 뚫어질 듯 유현진을 바라보던 그는 단단히 턱을 악물며 단호하게 말했다.
“유현진 씨의 바람과는 상관없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저이고, 저는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제 목숨값은 결코 싸지 않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희생하며 빚을 갚으며 살라고 그를 구했던 게 아니다.
고백하려 했던 말이 얼어붙어 버렸다. 지금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했다간 더욱 부담을 주기만 할 터였다.
불현듯 눈 속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유현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유현진의 반들거리는 눈을 본 현태오는 멈칫했다.
어딘지 초조하고 성마른 기색으로, 치밀어오르는 걸 억누르기라도 하는 듯 유현진을 세차게 쳐다보던 그는 억지로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유현진 씨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 드릴 겁니다. 다른 누구보다 더 제가 잘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싫습니다. 저는 각하께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면,”
별안간 현태오의 목소리가 얼어붙었다.
아까부터 안간힘을 다해 억눌러 왔던 것이 끝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온 듯, 현태오의 꾹 다문 턱이 부들 하고 떨렸다.
“그러면, 왜 구했습니까.”
목구멍에서 기어이 사나운 말들이 밀려 나온다.
“구하지 말았어야지, 죽든 말든 놔뒀어야지, 왜 멋대로 사람을 살려 내고 대신 누워서 사람 속을 그렇게 태웠습니까.”
무시무시한 눈매가 유현진의 시선을 움켜쥐었다.
억지로 붙들고 있던 인내의 선이 기어이 끊겨 버린 양, 거칠게 날뛰는 울분이 터져 나왔다.
“싫다고? 그럼, 왜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습니까. 왜 나한테 마음이 있는 양, 내게 조금쯤은 호감이 있는 양 그렇게 헷갈리게 굴어서――아 그럼 나도 욕심내도 되나 보다, 내가 넘봐도 되나 보다, 그렇게――내 욕심을 풀어놓게끔 했어요! 한번 풀어놓고 나니 걷잡을 수가 없는데, 도무지 수습을 해 볼 도리가 없는데, 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느냔 말입니다!”
고통과 불안에 절어 미친 듯이 고함을 내지르는 이 낯선 남자는 누구인가. 유현진은 숨 쉴 생각조차 못 하고 얼어붙어 홉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풀어놓지 않았더라면, 인식해 버리지를 않았더라면 이 욕심 사나운 걸 가슴 밑바닥에 그대로 가둬 둔 채 모른 채로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흔들어 놨어요!”
맺힌 원망을 타는 듯이 호소하는 현태오의 시꺼멓게 번들거리는 눈매가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다.
유현진은 미동조차 없이 굳어 버린 채 현태오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그가 무엇을 호소하는지, 그 의미가 아주 먼 길을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보일 것도 같은데 보이지 않는, 혹여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를 어렴풋한 그림자만 아른거렸다.
당혹스럽게 눈만 깜박이는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의 낯이 일그러졌다.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던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뭐든 다 해 줄게요.”
이제 더 이상은 아무런 도리가 없는 남자가, 위협도 분노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남자가 무엇이든 붙들어 보려는 듯 호소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애원밖에 없었다.
“원하는 건 뭐든,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다 들어드릴 테니, 유현진 씨는――계속 지금처럼 있어 주십시오. 내 옆에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협박과 설득이 뒤섞인 보잘것없는 간청이었다.
그 기묘한 호소를 들으며 유현진은 뚫어져라 현태오를 바라본다.
문득 심장이 떨렸다.
……하나람님. 하나람님. ……무서워요.
기대가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넘쳐 무서웠다.
그의 말은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결론을 도통 확신할 수 없어 심장이 뛴다. 한 번도 자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 환희가 거기에 있는데, 손을 뻗어 확인하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유현진은 눈 속이 뜨거워지는데도, 숨 막히게 심장이 떨리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며 한참 동안 그저 현태오를 바라보기만 했다.
“……저는, 각하께 물어봐야 할 게 있습니다.”
멈춰 버린 목구멍에서 그 소리를 가까스로 끄집어낸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낯빛이 시커멓게 바랜 현태오가 눈동자만 들어 유현진을 본다. 유현진은 그런 그의 낯을 구석구석 바라보았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제가 처음에 각하께 거짓말을 했던 줄 아셨으면서, 왜 제게 그렇게 잘해 주셨습니까?”
현태오가 움칫 입술을 움츠렸다. 그러나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지 형형한 눈빛만 유현진을 본다. 유현진은 그런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저는 각하께서 해 주시는 것 하나하나마다 좋았습니다. 매일 찾아 주신 것도, 제가 좋아하는 찻잔을 기억해 제게 건네주신 것도, 제가 별 대수롭지도 않은 말을 할 때마다 제게로 고개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않고 들어 주시는 것도, 별을 보는 동안 머플러가 흐트러지면 금세 꼭꼭 여며 주셨던 것도, 헤어질 때마다 입 맞춰 주셨던 것도.”
현태오가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빤히 유현진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유현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되짚어 보며 멈추어 있었다.
“제가 각하의 다리 부상을 제게로 옮겨 왔다는 걸 아시곤, 왜 그렇게 화를 내셨습니까?”
현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유현진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제겐 별것 아니었는데요. 저는 각하의 부상을 제가 나눌 수 있어서 좋기만 했습니다. 각하께서 다치지 않길, 탈 없이 지내시길, 오래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해 왔으니까요.”
“――.”
“만나서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고 하고선 왜 계속 안 오셨습니까? ――저는 매일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절대로 오시지 않기를 바랐어요.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 그걸로 모두 다 끝나 버리고, 다시는 각하를 뵐 수 없을 줄 알았으니까요.”
그랬었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했던가. 그 모든 시간이 자신의 삶에 주어진 고마운 선물이었다.
“국경에서는 왜, 당신 목숨을 걸면서까지 저를 구하셨습니까?”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것은 불안에 쫓기는 맹수처럼 자신에게로 달려오던 그 얼굴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위협들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제 몸보다도 유현진의 안위를 살폈었다.
그래, 지금 이렇게,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는 바로 저 눈으로.
“저는 각하께서 위험해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저는―설령 상아가 다치더라도, 각하는 무사하길 바랐어요. 제가 죽더라도.”
유현진은 현태오를 보았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마주 보고 있는 그는, 몹시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혹은 알아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듯, 그 아래에서 몹시 강렬하게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는 듯.
“왜 그러셨어요?”
유현진이 물었다.
뚫어져라 유현진을 바라보던 현태오의 굳게 다물린 턱이 문득 꿈틀, 떨렸다.
“유현진 씨,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습니까?”
나직이 억누른 목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와 함께 희열과, 불안과, 환희, 공포가 뒤섞여 함께 새어 나온다.
유현진은 기묘한 기분으로 현태오를 보았다. 저 남자의 얼굴에서 저런 불안을, 공포를 볼 줄은 몰랐다.
이 숨 막히는 환희가 혹시 착각이면 어떡하나, 환희라는 환상에 선뜻 발을 디뎠다가 그 아래 시커먼 절망이 끝도 없이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저 남자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불안에 떨고 있다니.
“좋아합니다.”
그 말은 툭, 무상히 떨어진 빗물처럼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예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처음 봤을 때부터, 각하를――현태오 씨를 좋아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고 차분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눈앞에서 미동조차 없이 굳어 버린 채 침묵하는 남자가 그 모든 격렬한 동요를 다 가져간 탓인지도 몰랐다.
현태오가 뚫어질 듯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표정도, 소리도, 호흡조차 없이 유현진을 본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의 입매가 움칫, 떨린 것 같았다.
“유현진 씨.”
쇳소리처럼 거칠게 눌린 소리가 입속에서 으스러져 새어 나왔다.
“저는 거짓말을 싫어합니다. 유현진 씨가 처음에 제게 했던 거짓말 외에는――그 어떤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농담도, 장난도, 실언도 듣지 않을 겁니다.”
금세라도 달려들 것처럼 사납게 노려보는 그 번들거리는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유현진이 말했다.
“저는 현태오 씨를 좋아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그러니까, 이제는 당신이 알려 줄 차례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왜 그렇게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지.
왜 그렇게, 금세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유현진.”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기라도 하는 듯한 딱딱한 목소리가 악문 잇새로 흘러나왔다. 현태오가 몸을 내밀어 철창을 움켜쥔다.
“너는――책임져야 해. 나중에 가서 무르려 해도 안 돼.”
유현진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바싹 다가선 성마른 남자를 보았다.
불안, 환희, 기쁨, 의심, 두려움, 황홀감,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얼굴. 아마 지금 자신의 얼굴도 거울을 보는 듯 저와 같겠지.
“현진아.”
현태오가 다시 불렀다. 숨을 허덕이는 듯 바싹 마른 목소리다.
유현진은 손을 뻗어 철창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억센 손이 꿈틀하는 게 손바닥 아래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현태오가 철창 밖으로 다른 손을 뻗었다. 천천히 다가온 손이 유현진의 뺨에 닿는다.
믿기지 않는 양 아주 느리게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유현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다 뒷머리를 붙들어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불시에 끌려간 유현진이 철창에 아주 살짝 이마를 부딪힌다. 그러나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고 있는 형형한 눈빛을 보았다.
철창 틈새로 입술이 닿았다.
메마른 입술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유현진의 입술 위를 쓰다듬다가, 어느 순간 둑이 터진 듯 입술을 먹어 치웠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무덥고 가쁜 호흡이 밀려들었다. 꿈틀거리는 혀가 이제야 겨우 사막에서 샘을 찾은 양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맛보고, 삼킨다.
차가운 철창이 뺨을 짓눌렀지만 조금도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뜨겁기만 했다. 맞닿은 입술도, 열이 오른 머리도, 미칠 듯이 심장이 뛰는 가슴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꿈이면 어떡하지. 이 더운 감각이, 뛰는 심장이, 아득한 머리가 모두 꿈이라면.
“이게 혹여 꿈이라도……, 꿈에서 깨더라도, 넌 책임져야 해. 절대로 안 물러 줄 테니까.”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혹은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현태오가 잇새로 신음하듯 내뱉었다.
“――제발.”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유현진이 속삭였다.
현태오가 짧은 동안 호흡을 멈추는 듯했다. 이내 다시 유현진을 끌어당기며 입맞춤에 탐닉한다.
철창에 가로막혀 제대로 끌어안지도 못한 채 한정된 체온만을 맛보는데도, 이토록 뜨겁게 가슴이 가득 차다니.
영원히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머릿속이 몽롱해져 마치 취한 듯한 기분이었다.
“현진아. ……현진아.”
그 말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현태오가 이름을 부르며 연신 입술을 깨문다. 유현진 역시 그 무더운 숨결을 삼키느라 급급했다.
아득하게 멀고 긴 길을 지나, 마침내.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던 길 끝에 이제야 겨우.
“……현진아.”
이름조차 아까운 것처럼 띄엄띄엄 부르는 현태오의 그 한마디 한마디가 고백 같았다. 유현진이 가쁘게 내쉬는 숨결 하나하나 역시 고백이라는 걸 현태오도 알 것이다.
그곳에는 오로지 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둘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온전한 전부였다.
그렇게, 그 벅차고 애틋한 것을 탐하고 또 탐하던 때,
“시간 다 됐습니다.”
별안간 현실로 이끌고 오는 소리가 있었다.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로의 입안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혀가 동시에 멈칫한다.
차마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그대로 얼마쯤 멈춰 있던 입술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떨어졌다.
“…….”
“…….”
“……이래서 내가 여기서 나간 뒤에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현태오가 잇새로 울분을 섞어 내뱉었다. 그 앓는 듯한 혼잣말에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현태오가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반사적으로 웃음을 지웠지만, 그런 유현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현태오가 손을 내밀어 유현진의 입가를 살며시 꼬집는다.
그러다 다시 뺨을 어루만지던 커다란 손은, 곧 달아나듯 떨어졌다. 그대로 더 있다간 또다시 붙들어 삼켜 버리고 싶어질 것이 뻔하기에.
철창을 사이에 두고 유현진은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숨이 아쉽게 허덕이고 있었지만, 차라리 잘됐다. 꿈을 꾸는 것처럼 계속해서 일렁거리는 마음을 좀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이러다 심장이 멈출지도 몰랐다.
현태오는 무표정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환희와 두려움이 뒤섞인 그 얼굴은, 아마도 유현진 역시 똑같을 터였다.
“나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유현진은 애써 흐트러진 숨결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유현진을 바라보던 현태오는 그제야 조금 더 평소에 가까운 기색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나갈 때까지는 깨끗이 다 나아 있어야 합니다.”
“……. 더 빨리 나오셨으면 좋겠는데요.”
깨끗이 다 나으려면 한참 더 걸릴 것 같은데, 하고 유현진이 말을 흐리자 현태오가 묵묵히 바라보다 언뜻 낯을 찌푸렸다. 다 나은 뒤에 나가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미묘한 고뇌에 차 있다.
그때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리며, 이번에는 목소리 대신 교도관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간 다 됐습니다. 그만 나오셔야 합니다.”
교도관의 뒤에서 유세진도 고개를 비죽이 내밀며 걱정스레 안을 기웃거린다.
열린 문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던 현태오가 유현진에게 말했다.
“이리 와요.”
유현진은 일순 어리둥절했지만 곧 순순히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성긴 철창 사이로 가까워진 입술은 더 이상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당연한 듯이 겹쳐진다. 따뜻한 숨결도, 다정한 체온도 함께 포개진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명확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제 그들 사이에 오가던 모든 사혹들이 명료해졌으며, 앞으로 오갈 모든 일들도 확고해졌다.
그 긴 시간들을 지나, 드디어.
호흡 몇 번을 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물러선 유현진은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돌아서 나오며, 유현진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돌아보고야 말 것 같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저 눈길을.
두 사람을 머쓱하게 번갈아 보다 길을 안내하는 교도관의 뒤를 따라 나오며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 유세진의 눈총을 온몸에 뒤집어썼지만, 그런 것들은 유현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도록 벅차, 그곳에서 나오자마자 눈앞이 그렁그렁 부옇게 흐려진 탓이다.
*
제양을 공식 방문했던 송갈 사절단의 대표인 송갈의 삼왕자 미사담이 기자 회견을 한 것은 그가 귀국한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화평을 반대하는 자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뒤로 한 달이 지나서이기도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이 치유에 전념한 그가 완치 판정을 받고 공식 석상에 선 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날의 회견은 송갈뿐 아니라 제양에도 방송이 되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소감이며 송갈과 제양의 향후 관계에 대한 의견, 국혼의 취소 여부 등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가 조금의 동요도 불편한 내색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한 말들은 다음과 같았다.
「저는 송갈의 왕자로서, 또한 송갈의 한 국민으로서, 내 나라의 오랜 번영과 평화를 바랍니다.」
평연하지만 힘 있는 울림이 담긴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좌중은 조용해졌다. 왕자는 어떠한 거짓도 과장도 엿볼 수 없는 눈으로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 제양 방문에서 저는 그 가능성을 보았고, 제 뜻에도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귀국 길에 있었던 일은 그저 생각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불행한 사고일 뿐입니다.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 사이에서도 제양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각각 다를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다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생각의 차이일 뿐, 역사적으로 언제나 옳고 그름은 훗날 이긴 자가 정해 왔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으나, 다만, 오로지 제 이익만을 따지며 나라의 앞일을 그르치는 자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근하고도 엄격한 그 말에 기자들 사이에서는 어렴풋한 동요가 일었다.
제양과 마찬가지로, 척화를 주장하며 그 아래에서 본인들의 이익을 도모한 무리에 대한 수사가 송갈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된 탓이다.
왕자는 흥미로운, 혹은 불만스러운, 혹은 반기는 면면들을 가만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기원하지만, 제양과의 관계에 있어 당장의 급진적인 화해를 바라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긴 세월 동안의 아픔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다시 필요할 것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살아 있는 동안 화해로 나아가는 한 단계, 한 걸음을 얻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거기서 잠시 침묵한 뒤, 왕자가 말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올해가 지나기 전에 저 미사담과 제양의 왕녀 제상아의 국혼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그녀는 평항으로 가 함께 더불어 그곳의 정무를 보며, 송갈과 제양의 평화 협력을 위한 교두보로 삼을 것입니다.」
그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 시각 회견을 보고 있던 이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얼어붙은 듯한 침묵 직후, 둑이 터진 듯이 기자들이 아우성치며 그 의미에 대해 상세히 알려 달라고 외쳤으나 자세한 사항은 추후 따로 알려 드리겠다고 하며 회견은 그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날 저녁 제양과 송갈의 모든 매체에서 이 일에 대해 대대적으로 다루며 보도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타이밍을 잘 맞췄다면 잘 맞춘 거지. 원래라면 척화파에서 벌떼처럼 들고일어났을 텐데, 지금 그들한테는 그럴 겨를도 없을 테니.”
“들어 보니까 송갈에서도 상황은 비슷한가 봐요. 언제 철퇴 맞을까 목 움츠린 인사들이 한둘이 아니라던데요.”
현태주의 말에 현태양이 대꾸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실 재판을 참관하러 온 면면들을 살펴보니, 으레 올 법한 인물들이 여럿 안 왔다. 의양군이나 계연군이 관련된 일에는 얼굴도장이라도 찍으러 꼭꼭 오던 인물들이 함부로 얼굴 내밀었다가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봐 몸을 사리는 모양이었다.
“권세라는 게 이렇게 보면 참 허망해. 안 그러냐, 현진아?”
“예? 예, 그야…….”
어차피 신관으로 오래 지냈던 유현진은 세속의 권세를 의식할 일이 없었다. 그저 저 앞에 하얗게 머리가 세어 고개 숙이고 있는 의양군과 그 옆에서 시커먼 낯으로 앉아 있는 계연군을 보니 속이 무거울 따름이다.
엊그제 있었던 송갈 왕자의 기자 회견으로 이곳 제양까지 시끌시끌했다.
평항은 오랜 분쟁 지역으로 수백 년에 걸쳐 줄곧 송갈과 제양 사이로 영역이 오갔다. 대립이 극심할 때에는 몇 년 단위로 통치자가 바뀐 적도 있었다.
원래부터 비옥한 지방이라 정국이 안정되기만 했더라면 더없이 풍요롭게 번영했을 곳이다. 그곳을 공동 통치 지역으로 삼아 거기에서부터 화합을 도모해 보겠다는 결정에 대해, 공식적인 소유권이나 세출에 대한 분배 등등 향후 여러 조건들이 다시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그 결정 자체에 반대는 크지 않을 터였다. 총독으로 가는 이마다 죽거나 다쳐서 돌아오곤 했던, 골치 아프지만 손에서 놓을 수는 없는 분쟁 지역이었던 것이다.
화젯거리가 넘쳐나는 시기이다 보니 사람들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던 가운데, 왕이 들어왔다. 삽시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왕실 재판은 일반 사법 체계와는 별개로 운영되어 허가받은 자들만 입회할 수 있었고, 실내에는 기자도 들어올 수 없이 서기관만이 그 내용을 기록했다.
원래라면 유현진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을 터이나 현태주가 입회 허가를 받아 주어 참관석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너 다 낫지도 않았는데 구치소 보냈다면서 내가 태오한테 욕을 얼마나 들어 처먹었는지 모른다’며 현태양은 반대하려 했으나, 이제 유현진도 무리하지만 않으면 일상생활 정도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 나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는 형님밖에는 절 도와줄 분이 없다고 호소하는 유현진의 애원을 끝내 물리치지 못했다.
개정을 알리는 북이 울렸고, 다들 왕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시오.”
왕의 허락과 함께 사람들은 자세를 반듯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왕을 가운데에 두고 한쪽에는 의양군과 계연군이, 그리고 그 맞은편에 현태오가 각각 대변인을 대동하고 앉아 있었다. 뒤편에 마련된 자리에는 제상아가 궁인과 함께 앉아 있었고, 그 외에 유현진이 잘 모르는 얼굴들과 법리청의 관원 몇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태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구치소에서 만났던 이래 처음이었다.
멀찍이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는 있는 거리에서 유현진은 현태오를 살펴보았다.
다소 야위어 보이긴 했지만 구치소에서 보았던 때보다는 훨씬 나은 안색이다. 그의 처결이 결정되는 이 자리에서도 그는 움츠러들거나 긴장한 기색이라곤 없이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지난달 초하루, 송갈에서 제양을 방문했던 사절단이 귀국하는 길에, 정혜궁의 이공주께서 그들을 배웅하러 국경까지 동행하셨다가 큰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이 사고에 의양군의 장자 계연군 제상민이 연루되어 있어 그날 바로 검거를 하였는데 그 이튿날 평항의 총독을 맡고 있는 현태오가 그를 찾아가 아무런 법적인 절차 없이 사적으로 그를 폭행해 중상을 입힌즉, 이에 따른 처결을 청하는 바입니다.”
왕실의 법리대부가 말문을 뗐다.
그 이후로는 대변인들이 각각의 입장에 대해 호소하고 관련된 증거들을 드는 지리한 시간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왕실 재판에서 당사자는 원칙적으로 최종 판결을 내리는 임금이 허락할 때에만 발언할 수 있었는데, 현태오는 반듯한 자세로 고개를 든 채 시선만 약간 내리깔고 있었고, 계연군은 시커멓게 죽은 낯으로 현태오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의양군이 옆에서 눈치를 주어 다잡았고, 그럴 때마다 계연군의 눈매는 더욱 벌게져 갔다.
각각의 정황 및 그 증거들을 들 때마다 본인에게 확인하고 까닭을 묻는 시간들이 길게 이어졌다. 그럼에 따라 계연군은 점차 참을성이 떨어지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던 때,
“……이와 같이, 그 당시에는 군경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터라 평항 총독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바, 상대와의 무력 차가 워낙 커 본인의 보신뿐 아니라 정혜궁마마의 호신을 위해서도 다소의 강압적인 무력행사는 어쩔 수가 없었던,”
증거 확인의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현태오의 대변인이 말을 할 때, 기어이 계연군이 조급한 분노를 더럭 터뜨리고 말았다.
“이보시오, 아까부터 계속 왜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소? 지금 여기서는 그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니오! 이미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고, 충분히 반성하고, 또 처벌을 받아들일 각오요! 지금 이 자리에서 논의해야 할 것은 왕족을 함부로 상해한 자에 대한 처벌이니, 쓸데없는 소리나 늘어놓지 말고 저자의 잘못이나 조목조목 털어놓고 벌을 구하시오!”
아까부터 눈을 희번덕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이던 계연군은 대변인에게 고함을 치면서도 눈으로는 현태오를 노려보았다. 벌겋게 핏발이 선 눈이 귀신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그를 마주 보는 현태오는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갑작스럽게 끼어들며 큰 소리를 내는 계연군의 말에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의양군이 눈을 부릅뜨며 아들을 돌아보고 법리대부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때,
“충분히 반성하셨다는 말씀치고는 정작 제게 사죄를 청한 적조차 없지 않으신가요?”
뒤편에 앉아 있던 제상아가 말했다. 그리 높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조용한 장내에는 뚜렷하게 울렸다.
벼락 맞은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본 계연군이 별안간 붉으락푸르락 낯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번들거리더니 벌컥 외쳤다.
“왕실의 체통도 지키지 못하고 송갈 잡놈과 붙어먹은 것이 무슨 사죄를 말하느냐! 그 주제에 가증스럽게도 나를 홀리려 온갖 교태스러운 짓을 다해 왔으니, 너는 내게 벌 받아 싸다!”
장내는 얼음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곧이어,
“이놈!!!”
계연군의 대변인이 대경실색해 그를 말리려 하는 것보다 한발 앞서 의양군이 호통을 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이 막말을 하느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면 조용히 목을 늘이고 기다리지 못할망정 이런 망종을 보았나!”
수염을 떨며 노성을 지르는 의양군에게조차 계연군은 시뻘건 눈을 부라렸지만, 잇새로 흘러나오는 욕설을 삼키는 듯 부들거리는 입술을 억지로 깨물었다.
“전하, 정혜궁마마, 이놈이 크게 다쳐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놈의 머리에 큰 문제가 있어 오랜 시간을 두고 치료해야 한다고 의원이 진단을 내린바, 부디 너른 마음으로 용서하시고 통촉해 주십시오.”
의양군은 황급히 임금과 제상아를 향해 번갈아 허리를 굽히며 애원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며, “계연군 저자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정신에 문제가 있어 감정을 해야 한다는 게 그냥 이 상황을 어떻게든 면피해 보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만.”,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만요.” 하고 현태주와 현태양이 심각하게 속삭였다. 그 정황을 보며 유현진도 심장이 철렁하며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싸늘해진 정적 속에서도 임금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외려 딸에게 “지금은 네가 함부로 끼어들어 발언을 할 때가 아니다.”라고 자못 엄하게 타일렀다.
제상아는 잘못했다는 의미로 임금에게 묵례한 뒤 물러나 앉았으나, 그녀 역시 별달리 분개하는 기색은 없이 저런 반응이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소리 없이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계연군은 더더욱 눈을 벌겋게 희번덕거리며 이를 갈았다. 저 개년이, 하고 잇새로 내뱉고야 마는 욕설을 들은 자가 여럿이었다.
장내는 얼어붙은 듯 싸늘했다.
이미 지금까지의 증거만으로도 계연군은 대역죄를 지었다.
아직 그에 대한 처결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외딴 귀양지에 위리안치를 당할 것이라는 말들은 아는 이들 사이에 암암리에 돌았다.
이미 임금은 의양군에게도 그러한 요지의 말을 내밀히 전했고, 의양군은 낯이 시커멓게 죽어 버렸으나 결국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제 계연군은 먼 훗날의 어느 날 운 좋게 대사면이라도 내리지 않는 한, 머나먼 변방 외딴 섬의 작은 집에 갇혀 기약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할 터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계연군은 길길이 날뛰며 자신은 가지 않겠노라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처벌을 피할 도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현태오에게 조금이라도 더 흠을 씌우고 가리라고 벌겋게 독이 올라 있었다.
흘러가는 상황을 읽은 의양군이 소용없으니 자중하라 타일렀으나 계연군은 이미 아비의 말조차 듣지 않고 매일같이 임금에게 닿지도 않을 상소를 올리고 있었으니, 더 이상은 정상적인 정신이라 할 수도 없었다.
오늘도 이 자리에 나오기에 앞서 변호인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타이르고 또 타일러 입을 꾹 다물고는 있었으나 기어이 제풀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전하, 전하! 제가 비록 전하와 뜻이 다르다 하나 저 또한 제양을 지극히 아끼고 위하는 마음으로 한 일입니다. 어찌 송갈과 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겠습니까? 전하께서 놈들을 품고 가기로 결정하셨다면 신하된 자로서 따를 수밖에 없겠으나, 그 과정에서 있었던 어쩔 수 없는 충돌이었습니다!”
계연군이 부르짖었다. 법리대부가 눈살을 찌푸리며 “허락지 않은 발언은 삼가,” 하고 말리려 했으나 왕이 손을 들어 그를 만류하고는 계연군에게 말했다.
“그래, 그러나 지금은 네 말대로, 네 잘못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현 총독에 대하여 지금 미리 올린 이 자료들 외에 더 할 이야기가 있느냐?”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현태오는 이미 오래전에 저를 폭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리라 다짐받고 전하께서 너그럽게 처우하셨는데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이는 저자가 왕실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저 무도한 자가 나중에 누차 왕실을 업신여겨 다른 왕족에게도 횡포하게 굴지 않는다 어찌 단언하겠습니까? 저자는 이미 오만무례함이 극에 달아 만인을 눈 아래로 깔아보는즉, 왕실을 하찮게 여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에 엄중하게 단죄하지 않으시면 훗날 더 큰 중죄를 저지르고야 말 자입니다!”
계연군이 분노가 그렁그렁하게 담긴 목소리로 악에 받쳐 고함쳤다. 그런 뒤에도 말을 그치지 않으려 했으나 한동안 듣고 있던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을 들자 그 뜻을 알아듣고 대변인이 계연군을 만류했다. 그럼에도 무시하고 계속해서 떠들어 대던 계연군은 의양군까지 무서운 기색으로 그를 다그친 뒤에야 불만스레 씨근덕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소리가 잠잠해진 다음에야 왕은 현태오를 보았다. 아까부터 시종 별다른 말도 없이 앉아 있었던 그는, 지금 계연군의 시뻘건 시선이 그를 세차게 찔러도 눈 하나 꿈쩍 않고 태연할 따름이었다.
“현 총독은 할 말이 있는가?”
“제양 법에 사적인 제재는 금지되어 있는바, 제가 따로 계연군마마를 찾아가 폭행한 것은 명확한 잘못이 맞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의 말대로 수년 전에 이러한 일이 있었을 때 현 총독은 다시는 이러지 않겠노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현태오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임금을 보며 대답했다.
“십 년 전 계연군마마께서 험한 언동을 보여, 젊은 치기에 잘못된 응수를 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제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 약속드렸었습니다. 헌데 앞날은 모를 일이고 사람이 또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하니, 이번에 또 이와 같은 악연으로 얽혀 제가 제 사람이 다쳐 버린 분을 참지 못하고 과거의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저 스스로가 저를 믿지 못해, 훗날에도 또 그가 제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그때에는 과연 제가 참아 넘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다시는 이러지 않겠노라 함부로 맹세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무덤덤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현태양도 허, 하고 헛숨을 내쉬었다.
“저놈 보게. 배짱일세. 계연군이 다시 저지레를 하면 그때도 또 때리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형님.”
현태양이 혀를 차는 옆에서 현태주도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그 와중에 계연군이 눈을 뒤집었다.
“저 천한 놈이 뭐가 어째?! 네놈이 감히 누구한테 그따위로 지껄이느냐?! 그래, 또 함부로 주먹질이나 해 봐라, 이 천한 놈아! 네놈이 뒈졌어야 할 노릇을 그 신관이었다던가 하는 젊은 놈이 대신 앓은 게 어째서 내 탓이냐?! 그리고, 같은 사내에게 다리나 벌리는 그 지저분하고 하찮은 놈을 좀 해친들 그게 뭐 그리 잘못이란 말이냐?! 높은 자리를 꿰찼다는 것들이 어떤 놈은 사내놈이랑 좆질을 하고 어떤 년은 송갈 잡놈과 흘레붙으니 나라 꼴 아주 볼만하구나!”
“어전입니다. 말씀을 가리십시오.”
법리대부가 엄하게 경고했다. 이번에는 임금조차 눈살을 찌푸렸고 사방에서 얼음 같은 눈길들이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뭐 틀린 말을 했소이까!” 하고 법리대무에게 눈을 부라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계연군이었으나, 관원들이 다가와 억지로 눌러 앉히자 씩씩거리며 강제로 앉으면서도 욕설을 그치지 않았다.
그때다.
낯빛이 백지장이 된 의양군이 별안간 일어나더니 상 위에 놓여 있던 필갑을 집어 들어 계연군의 머리를 후려쳤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일격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필갑에 호되게 얻어맞은 계연군은 억,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굴며 신음하는 그의 머리 아래로 핏물이 서서히 번져 갔다.
“전하, 망극하옵니다! 이놈이 아예 미쳐 버려 어전에서 참담한 짓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응당 백번 죽어 마땅합니다. 허나 나이 들어 얻은 하나뿐인 아들이라 어릴 때부터 물고 빨고만 하여 잘못 키워 낸 이 몸의 죄가 더욱 크오니, 아비인 저를 쳐 죽이시되 이놈은 숨이나마 붙여 주십시오!”
의양군이 임금의 앞으로 기어 나와 울며 엎드려 절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법리대부가 “자리로 돌아가시오.”라고 말했으나 의양군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본인보다 윗사람이라 법리대부가 함부로 하지도 못하고 난처해하는데, 결국 임금이 입을 열었다.
“의양군은 그만 일어나시오.”
“전하!”
“이 자리는 현 총독의 잘잘못을 논하는 자리이지 계연군의 잘잘못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지 않소. 의양군의 심정을 내 감안할 테니, 일어나 앉으시오.”
의양군은 그래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으나 관원들이 다가가 정중하게 팔을 잡아 일으키자 그것까지 물리치지는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늙은 아비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분위기가 괴괴하게 가라앉았다.
왕은 의양군과 계연군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의양군과 계연군은 그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이미 양측의 입장은 다 들었고, 또한 계연군이 크게 다치고 또 흥분해 있으니 본인을 위해서도 안전한 자리로 물러나 치료를 받는 편이 나을 것 같소.”
그러자 계연군은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눈을 부릅뜨며 “저자의, 현태오의 처결이 어찌 되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전하!” 하고 외쳤으나, 의양군은 임금의 말이 옳다 여겼는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현태오를 노려보는 계연군을 데리고 그만 물러나는 데에 동의했다.
관원들의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도 계연군은 “전하! 왕실의 위엄을 세우셔야 합니다. 제가 이래 봬도 제양의 왕족인데 어찌 아랫것에게 험한 꼴을 당하는 걸 두고 보십니까!” 하고 끝까지 악을 쓰며 나갔고, 바깥으로 물러난 뒤에도 한동안 계연군이 무어라 성을 내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의 핏자국과 어수선하게 흩어진 필갑 따위를 정리하는 동안 장내에는 여기저기서 나직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일었고, 그 소리들은 아마 현태양이 헛웃음을 웃으며 “참 별일을 다 보네, 그려. 이 일은 향후 수백 년은 기록에 남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린 말과 별로 다르지 않을 터였다.
장내가 정돈되고 나자 왕은 다시금 조용해진 실내를 둘러보며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현 총독은 더 할 말이 있는가?”
왕이 이만 정리할 셈으로 묻자 현태오는 고개를 저었다.
“신은 전하의 처결에 따를 따름입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록들을 건성으로 넘겨보다가 법리대신에게 물었다.
“이 기록에 근거해 따져 보자면, 현 총독에게는 어떠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 옳겠는가?”
“임금의 사촌 이내 왕족에 대한 폭행은 그가 저지른 폭행의 배에 해당하는 태형에 10년 이하의 징역을 더하며, 오촌을 넘어서는 왕족에 대한 폭행은 그와 동가의 태형에 5년 이하의 징역을 더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계연군은 전하의 당질이시니 관례에 따르자면 30대의 태형에 5년 이하의 징역이 옳습니다.”
유현진은 숨을 죽였다.
30대의 태형이면 반년은 일어나지 못할 중형이다. 거기에 징역이라니. 유현진이 어깨를 움츠리는 기척을 알아챘는지 현태양이 염려 없다는 듯 등을 툭툭 두드렸다.
“――허나, 이번에 계연군이 지은 죄가 몹시 참람하고 그로 인해 다대한 희생이 있었던 즉, 그 불의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현 총독 역시 타고나길 정의롭게 타고나 불의를 두고 보지 못하는 성정으로 줄곧 나랏일을 도와 왔으니, 그 부분을 감안해 처벌을 감경함이 옳다고 봅니다.”
저놈이 언제 정의로웠었지? 하고 현태양이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렸으나, 한편으로 따져 보면 불의롭게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공공의 일로 그릇된 짓을 한 적도 없었다.
유현진은 현태오를 바라보았다.
이미 이곳에 오는 길에 현가 형제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왕실 재판은 형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현태오는 처결이라 부를 수도 없을 처결을 받을 거라고 했다.
‘지금 제상민이가 저지른 짓 때문에 똥을 뒤집어쓴 인간이 한둘도 아니고 세간의 분노가 들끓는 마당인데, 그놈을 해치는 자에게는 벌이 아니라 상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들까지 나올 정도라고.’
‘그래, 애초에 송갈과 관련된 이 모든 일들이 전하의 뜻이기도 했거니와, 태오 아니면 평항으로 보낼 인물도 없지. 특히나 지금처럼 중요한 때에는. 태오만큼 확고하게 평항의 기틀을 다져 놓을 자가 달리 없으니.’
아마 계연군의 목을 땄더라도 무사히 풀려날걸, 하고 현태주와 현태양이 농담처럼 말을 주고받았었다.
그 말마따나 세간에서 계연군의 평가는 처참했다. 정계에서도 마찬가지라, 그와 가까이 지냈던 자들마저 몸을 사리며 입조심하는 분위기였다.
얻을 게 있을 때는 그토록 쫓아다니던 자들이……, 하고 현태주가 혀를 차는 것도 이해가 갔다. 권력이란 것도 무상한 노릇이다.
유현진은 담담히 앉아 있는 현태오의 모습을 눈으로 덧그리며 생각했다.
그는 무리라고 할 게 없었다. 친한 이들이나 그를 존경하며 주위로 모이는 이들은 많았지만, 누군가와 무리 지어 세력을 이루거나 권력을 도모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묵묵히 제 앞에 떨어진 일들만 해치워 왔을 뿐이다. 그 어느 권위에도 눌리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제 뜻에 따라.
지금도 그는 아무런 중압감이나 위압감 따위는 느끼는 빛도 없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고 태연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떨어질 형이 가벼울 줄 알고 있어서일까.
아니, 중형 선고가 확정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해도 저 남자는 저럴 것이다.
그때 문득 현태오가 시선을 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돌린 그가 유현진을 보았다.
이쪽으론 눈길 한번 준 적이 없는데도 유현진이 거기 앉아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먼 거리를 두고서도 명확하게 시선이 얽혔다.
고작 그것만으로 심장이 뛰었다.
현태오가 얼핏 눈썹을 치켜올리는 것 같았다. 왠지 현태양과 현태주 쪽을 노려보는 듯도 했으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때, 생각에 잠겼던 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왕실법에 있어 왕족을 해치는 것은 큰 죄이다. 허나 왕족이 무엇인가. 왕족은 언제나 언행을 반듯이 해 일반 국민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즉, 그렇지 못하면 설령 왕가에 태어났다 해도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바라서는 안 될 일이다.
계연군은 덕망이 부족하여 처신이 바르지 않았고 심지어는 제 근본을 잊고 나라를 해치는 일에 서슴없이 손을 썼으니, 그 행태에 의분을 일으킨 자가 있다 하여 그를 크게 벌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현 총독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줄곧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헌신해 온 충직하고 성실한 인물인 데다 지금도 평항에서 중차대한 일을 맡고 있으니, 어찌 그의 사소한 허물을 과하게 보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고 왕이 의견을 묻듯이 법리대부를 보았다.
이미 ‘사소한 허물’에서 왕의 뜻은 분명했고 이 자리에서 그 뜻에 반대를 표할 자는 없었다.
“전하의 뜻이 이치에 맞는 줄로 압니다.”
법리대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여타 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좌중을 둘러보았으나 이견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허나 법도는 법도. 지엄한 왕실의 본을 아예 젖혀 놓을 수는 없으니, 10대의 태형에 반년의 징역을 고하되, 다만 그 집행을 1년간 유예해 그로 하여금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유례없는 처결이었다.
반불구에 가까운 중태를 입은 왕족의 상해죄에 대해 왕실 재판에서의 처결이 이토록 가벼웠던 적은 없었다.
허나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사이에는 짧은 눈짓들만 서로 오갔을 뿐, 크게 놀라거나 불만스러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그러리라고 예견이 되었던 결과이기도 했다.
법리대부가 관원들과 좌중을 둘러보고는 왕에게 고개를 숙이려 할 때,
“또한,”
뭔가를 생각하던 왕이 덧붙여 말했다.
“그가 조용히 제 행동을 되짚어 보고 반성할 수 있도록, 그가 평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는 본인의 집에서 연금하며 근신하도록 하라.”
다시금 정적이 깔렸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한층 서늘한 정적이었다.
서로들 눈짓하는 사람들의 낯빛이 미묘해졌는데 그중 난감해하고 곤란해하는 자들이 여럿이었다. 그러잖아도 여태 현태오가 구치소에 있느라 바깥에서 정신없이 바빴던 이들은 하나같이 그가 풀려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가 풀려나도 집에서 나오지 않으리라고 하니, 곤란할 만도 했다.
법리대부도 잠깐 멈칫했으나 어차피 제가 직접 바빠질 일은 별로 없었다. 이내 담담히 고개를 숙이며 “전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고했다.
곧 왕의 시선이 현태오에게로 향했고, 현태오 역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신은 전하의 뜻대로 따를 것입니다.”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계연군에 대한 현태오의 사적 제재에 따른 처결은 끝이 났고, 법리대부가 폐정을 선언했다.
장내의 모든 좌중들이 고개를 숙인 가운데, 왕은 친히 자리에서 내려와 현태오의 어깨를 위로하듯 천천히 두드려 준 뒤―이 또한 유례없는 일로, 왕이 이번 일에 대해 현태오에게 어떠한 마음인지를 모두로 하여금 짐작게 했다― 나갔고, 왕의 뒤를 따르는 궁인들까지 모두 그곳에서 뜬 다음에야 사람들은 고개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수선하게 술렁거리는 장내에서 사람들이 현태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위로나 치하, 상찬 따위가 쏟아지는 가운데 현태오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덤덤하게 그들과 짤막짤막하게 말을 섞었다.
현태주와 현태양, 유현진 역시 참관석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하는 중에 현태주가 허허, 하고 낮은 헛웃음을 웃었다.
“전하께서 태오한테 선물을 주셨네. 평항으로 가기 전까지 가택 연금이라.”
“편히 쉬다 가겠네요. 지금 나갔다간 저놈한테 얹힐 일들이 드글드글할 텐데……. 저놈 나오기만 기다리던 사람들이 날벼락이겠네.”
지금 저기 국정사무장이랑 안보청장 얼굴 썩은 거 봐요, 저놈이 열 사람 몫을 하며 일 처리해 줄 것만 믿고 있었을 텐데 하늘이 노랗겠지, 하고 현태양이 안됐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 말들을 들으며 유현진은 안도했다.
이제 현태오는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게 되었다. 가택 연금이라면 특별히 허가받은 자가 아니고서는 현태오를 만날 수 없을 것이고, 현태오는 평항으로 돌아갈 때까지 숨 돌릴 수 있을 터였다.
이제야 겨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바깥으로 나가는 현태오를 먼발치에서 보던 유현진에게 현태양이 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돌아가자.”
문성이 말을 들으니까 저놈은 이제 법리대부한테 붙들려서 밥 먹으러 갈 모양이던데, 하고 걸음을 돌리는 현태양의 뒤를 따라가며, 유현진은 아쉽게 현태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이곳으로 올 때보다는 훨씬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 나올 수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
아직 세상은 시끄럽고 떠들썩했지만, 뒷일은 시간과 함께 차차 정리되며 흘러갈 터였다.
현태오는 잠시간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평항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일할 것이고, 세상 역시 예전처럼―그러나 명확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물길이 흘러가기 시작하며― 나아갈 터였다.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 것인지,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무슨 일들이 벌어지게 될지, 그것은 앞날을 향해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조금씩 알려 줄 것이다.
이제 유현진은 자신의 앞일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때였다.
“자, 그럼 이제 우린 병원으로 돌아가 봐야지.”
기관에 볼일이 있다며 먼저 간 현태주의 뒤에서 현태양이 유현진에게 말하며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유현진의 상처는 이미 거의 나아 이제 충분히 혼자서도 생활하는 데에 지장이 없었지만, 어차피 지금 퇴원해 봐야 돌봐줄 사람도 없고 집밖에는 기자들만 진 치고 있을 텐데 그냥 아예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병원에 있으라며 현태양이 붙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때 말이다, 내가 저놈한테 욕을 얼마나 들어먹었는지 몰라. 너 그때 구치소 갔다 오자마자, 생전 내 전화는 받지도 않던 놈이 들입다 전화해서는 아픈 놈을 구치소에 보내는 정신 나간 인간이 어딨냐면서 욕을 퍼부어 대는데, 아주 그냥…….”
못내 속에 맺혔는지 했던 말을 또 한 번 툴툴거린 현태양은 자동차 열쇠고리를 손에 걸고 빙빙 돌리며 흘끔 유현진을 보았다.
“흠, 그런데 말이다, 태오가 뭐라고 하던?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말이야.”
여태 유현진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던 현태양이, 이제는 현태오의 처우가 결정 났으니 마음이 좀 놓였는지―혹은 다음 차례의 피해자가 되리라 생각한 유현진이 한층 걱정되었는지― 머뭇거리며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엉?”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유현진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멍하니 그를 보던 현태양은 “허, 아니 그럼 거기까지 가서 뭔 얘기를 했던 거야? 그놈은 왜 그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해?!” 하고 어이없어하며 투덜거렸다. 유현진은 그런 그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날 뒤로 그들 사이에 오간 것은 문자들뿐이었다. 전화조차도 없었다.
그저 매일 몇 차례 문자가 오갔는데 그 내용도 보잘것없었다. 오늘은 몸이 어떤지, 잘 지내고 있는지, 별일은 없는지,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고작이었다.
현태양이 말하는 ‘중요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괜찮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날 모두 나누었고, 아직도 믿기지 않아 불안스럽고 두려운 마음은 나날이 평범한 문자들을 조금씩 주고받으며 가라앉히고 있었다. 문득문득 문자를 볼 때면 ‘아, 어쩌면 이 남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심경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럴 때면 가슴속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벅차기도 한 감정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이제는 더 급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었다.
유현진은 그저 어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다.
현태양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던 도중, 건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느닷없이 앞이 막혔다. 사람들이며 차량 따위가 소란스럽게 북적이며 길목을 막고 있었다.
“어차차,”
재빨리 돌아선 현태양이 유현진의 옷깃을 여며 주고 머플러까지 얼굴 반을 가리도록 둘둘 둘러 준다. 어리둥절하며 당황하던 유현진은 곧 그들이 현태오가 나오길 기다리는 기자 무리임을 깨닫고는 순순히 머플러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 얼른 가자, 얼른 가.”
사람들 뒤를 빙 돌아서 주차장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현태양을 따라간 유현진이 그들 무리에서 조금 벗어나고서 안도하던 때, 별안간 뒤쪽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커져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환성에 가까운 목소리와 카메라 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건물에서 현태오가 나오고 있었다.
구름 떼 같은 인파를 보고서도 눈 하나 까딱 않고 걸어 나오는 그에게 온갖 질문들이 쏟아졌다.
“현태오 총독 각하! 이번 사건에 대해 감회가 어떠십니까?”
“왕족상해죄의 처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현 평항 총독으로서, 송갈과 제양의 공동 통치 결정에 대한 의견은 어떠십니까?”
이러한 정상적인 질문들뿐 아니라 “구치소에 계신 동안 안색이 나아지신 듯한데 식사가 입에 맞으셨는지”, “연금 기간 동안 댁에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실 것인지” 등의 생뚱맞은 질문들도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현태오는 별반 대답하지 않고 그들 사이를 헤쳐 나왔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 목청껏 외치는 소리가 유현진의 귀를 파고들었다.
“현재 파트너인 유현진 씨가 각하의 부상을 치유하고 대신 입원했다고 하는데요! 신관이었을 때 받은 은사라고 하는데, 각하와 관계를 가진 분이 어떻게 아직 이능을 쓸 수 있는 거죠? 그분 때문에 파혼했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었습니까?”
순간 유현진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이미 물밑에서는 한창 떠들고 있던 말 중 하나다. 그에 따른 온갖 억측들도 사실감 있게 재구성되어 소문으로 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당사자는 진실을 알고 있고 맺힌 오해도 풀었으니 이제 와서는 상관없지만, 최초의 거짓말이었던 만큼 들을 때마다 양심이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른 차로 돌아가야지……, 바로 옆에서 ‘차마 물어보진 못했지만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하다’는 기색을 피워 올리고 있는 현태양의 시선마저 외면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유현진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에 촉발되기라도 한 듯 등 뒤에서는 비슷한 질문들이 잇따랐다.
“두 분은 전략적인 파트너였습니까? 그렇다면 각하의 개인적인 파트너 자리는 공석인지요? 모 여배우와의 소문은 사실입니까?”
“신전에 문의한 바로는 파문된 신관이 복직된 전례는 없으나 이번은 국가적 이익에 따른 행동임을 참작해서 다시 유현진 씨의 복직 여부를 논의해 볼 수 있다던데, 이 유례없이 파격적인 결정에 현가의 입김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종교계와의 유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헛소문에 헛질문인 줄은 알지만 가슴은 계속 뜨끔거렸다. 한편으로는 ‘어, 그렇다면 설마 신관으로 복직도 가능한가……?’ 하고 솔깃해졌다가 ‘아냐, 나처럼 불량한 양심의 소유자가 성직에 있을 순 없지.’ 하고 이내 다시 고개를 젓고 만다.
유현진이 복잡스런 심경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때, 별안간 뜻밖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마구잡이로 쌓이는 저 질문들에 결코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던 현태오의 단호하고도 냉정한 목소리였다.
어, 하고 멈칫한 유현진이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 인파 속에 묻혀 있던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들 때문에 시야도 불편했고 거리도 있었음에도, 현태오의 눈길은 그 찰나 분명하게 유현진에게 꽂혀 있었다. 애초에 건물에서 나왔던 때부터 유현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처럼.
곧 현태오의 시선은 기자들에게로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지만 유현진의 눈길은 그에게 못 박였다.
“제 파혼의 원인은 명백히 유현진 씨였고, 또한 이번에 제 목숨을 구해 준 것도 유현진 씨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분과 저는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 결코 저버리지 않고 줄곧 함께할 겁니다. 지금 저는 아주 사적인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현태오의 명확한 발언이 떨어진 순간 사람들이 술렁이는 듯했다. 아주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던 공기는 순식간에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능이 있다는 건 유현진 씨가 여전히 신관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다는, 즉, 사적으로 매우 친밀한 상대는 없다는 뜻일 텐데요?”
“신전에서도 유현진 씨에 대해 몹시 전도유망한 신관이었다며 적극적으로 복직을 논의해 볼 거라고,”
드디어 말문을 연 현태오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질문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현태오는 그 이상은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걸음을 옮기려다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랭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저도 왜 그분에게 아직 이능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그거야 없애면 그만 아닙니까.”
“없,”
“유현진 씨는 신관으로 복직하지 않습니다. 신성가호도 없앨 겁니다.”
그 단호한 대꾸를 끝으로 현태오는 다시 걸음을 옮겼고, 더 이상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귀청이 닳아 버릴 기세로 질문을 퍼부어 댔지만,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대답은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검토 후 적절한 질문에 대해 서면으로 답변드릴 테니 담당 부서로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는 진문성의 말뿐이었다.
각다귀처럼 들러붙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차 안에 올라탄 현태오는 그 자리를 떴고, 사람들은 아쉬운 기색으로 수런거리며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현진은, 어수선하게 흩어지는 이들 중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그제야 얼른 걸음을 돌려 현태양과 더불어 부단히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저도 모르게 힘주어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앞서 걸어가는 현태양이 혀를 차며 무어라 구시렁거리는―아마도 현태오에 대한 군소리인 듯했다―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굴이 무럭무럭 달아올랐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더운 기운을 뿜어내는 것은, 코 위까지 꽁꽁 둘러싼 머플러 때문만은 아니었다.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 되겠어. 난 이 관계 반댈세.”
제상아는 대뜸 어깃장을 놓았다. 책 더미를 끌어안고 걸어가던 유세진도 불퉁하게 “옳소!” 하고 외쳤다.
유현진이 드디어 장기간의 입원을 마치고 퇴원한 날이었다.
그의 퇴원을 축하해 주겠다며 찾아온 그녀는 거실에 놓여 있던 쿠키를 바삭바삭 집어 먹으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상대 의견은 묻지도 않고 저 혼자 멋대로 폭탄 발언을 해서 이제 너 빼도 박도 못하게 상황 딱 고정시켜 버리는 것 봐. 안 되겠어, 몹쓸 남자야.”
“아니, 어차피 난 신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는데……, 게다가 뭐, 내키지 않는 결론도 아니고…….”
“아무리 그렇다 한들, 그런 발언을 하려거든 응당 네게 미리 의사 타진을 해 본 뒤에 해야지? 그렇게 후퇴할 길을 딱 막아 버리는 게 어딨어?!”
아니 나는 애초에 후퇴할 생각이 없었다니까, 라고 말하려던 유현진은 그 말을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 왕실 재판 뒤 재판장에서 나오던 현태오의 발언은 고스란히 보도되어 나갔다.
정치적으로는 전혀 중요한 발언이 아니었으나 현재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만인의 관심사였던 터라, 국내에서 그 발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 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허겁지겁 신전에서 ‘우리는 폐적된 신관의 복귀를 논의한 바 없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 나중에 유현진과 친했던 정신관이 문병을 와서 말하기로는 ‘원래는 신전 대회의에서 특별히 논의해 보려 했는데 평항 총독이 저렇게 말해 버리는 바람에 무산됐다. 평항 총독과 굳이 척을 지지는 말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유현진의 신관 복직 가능성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영영 가로막히고 말았다.
실상 가능했다 하더라도 복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0.001초쯤 아쉽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다.
“그 남자가 선물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쿠키까지 얄밉네. 이 얄미운 쿠키 내가 다 먹어 치워 버려야지.”
제상아는 쿠키 박스를 통째로 끌어안은 채 끊임없이 바삭거렸다. ‘왕실로 납품되는 과자보다 맛있잖아. 현태오 주제에 이런 걸 선물하다니 방자하게.’ 하고 토달거리면서.
“너 그러다 뾰루지 엄청 생긴다……. 곧 결혼하실 분이 그래도 돼?”
“아직 반년도 넘게 남았는걸, 뭘.”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로 박스를 내려놓은 제상아는, 원래부터도 미인이었는데 요 근래에는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온갖 미용 관리를 다 받는 탓도 있겠지만, 밤마다 미사담과 통화하며 별별 사소한 이야기들을 다 나눈다고 말하며 웃는 그녀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예뻤다.
제상아는 미사담과 결혼하면 송갈로 가 그곳에서 얼마간 그들의 관습과 규범을 익힌 뒤 평항으로 갈 것이다. 대략 5, 6년 뒤로 예정되어 있는 때부터 둘은 공동으로 평항을 다스릴 터였다.
매일같이 공부할 게 산더미라 죽을 것 같다고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지만 그녀는 행복해 보였고, 유현진은 그녀가 충분히 잘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 떠나고 나면 이 어리바리한 것 어떡하지? 물가에 애 놔두고 가는 것 같네, 정말.”
“제게 맡기세요. 제가 반드시 입신양명해서 아무도 형 못 건드리게 할 테니까!”
뺨에 손을 대고 염려스러운 듯 말하는 제상아에게 부지런히 책 더미를 나르던 유세진이 기세 좋게 대꾸했다. 올 상반기에 승진이 내정된 유세진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출세하고야 말겠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음, 근데 네가 아무리 빨리 높이 출세한들 현 총독만큼은……, ……아냐.”
늘 팩트로 폭력을 행사하는 제상아였지만 이때만큼은 도중에 말을 삼켜 버렸고, 유세진은 일순 풀 죽어 우울해지려는가 싶었지만 이내 씩씩하게 “사람 앞날을 어떻게 알겠어요?!” 하고 외쳤다.
그 말이 맞다.
사람의 앞날은 모른다.
바로 반년 전만 해도 유현진은 신관으로서 고요하고 평온한 평생을 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고작 그 몇 개월 사이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삶은 얼마든 바뀔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유현진은 스스로 지금 이 위치에 있기로 결심했다.
제상아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혀를 찼다.
“애 얼굴 반짝거리는 거 보니까 더 반대도 못 하겠네……. 현 총독이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쑥스러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진을 지그시 보던 제상아는 더 핀잔을 줄 마음마저 사라진 듯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래, 네가 좋다면 어쩌겠니.”
“나는 그래도 더 반대할 거예요. 계속 반대하고 싶어요.”
옆에서 유세진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러면서도 책 정리를 돕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유현진은 퇴원하자마자 집 정리를 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이 드넓은 집이 도통 낯설기만 해 방 한 칸만 차지한 채로 살았지만, 이제는 이곳이 자신의 집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서 오래오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어, 한 방에 몰아넣었던 짐을 조금씩 나눠 두기로 했다.
침실 한 칸, 옷 방 한 칸, 서재 한 칸, 손님 방 한 칸, 그러고도 남아서 나비 몫으로도 한 칸을 떼어 주었다. 유세진에게도 방 하나 줄까 물어봤다가 ‘집에서까지 그 남자랑 마주치긴 싫거든요?!’라며 대차게 거절당했지만, 그렇게 격렬하게 거부해 놓고도 유세진은 순순히 유현진의 짐 정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유현진이 이 집의 이 방 저 방에 자신의 짐을 부려 놓기로 했다고 말하자 몹시 낙담하고 서글픈 기색을 한 유세진이었지만―훗날 듣기론 ‘아, 이제 형님이 얄짤없이 저 남자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앉기로 결심하고야 말았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유현진 혼자 고생시킬 순 없었는지 부지런히 책 정리, 옷 정리 등등을 도왔다.
얼마 있지 않아 제상아는 교수가 강론하러 올 시간이라며 정혜궁으로 돌아갔다. 요즘 그녀는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며 생활할 정도로 바빠 이제 다시 한동안은 만나기 힘들 터였지만, 유현진은 앞날에 대한 활기와 열정으로 빛나는 그녀를 기꺼운 마음으로 배웅했다.
유세진은 서재 방과 옷 방, 심지어는 나비 방까지 정리를 싹 마쳐 준 뒤에야―나비 방에는 로봇 청소기의 충전기를 꽂아 놓는 게 전부였지만― 손을 털고 돌아갔다. 유현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은 눈치였지만, 해 봤자 소용없겠다고 현명한 판단을 내린 듯 그저 ‘내가 반드시 출세하고야 말 테니까 형님은 안심하고 형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자못 믿음직스럽게 선언하고는 눈물을 훔치며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유현진은 그제야 홀로 남아 거실에 앉았다.
아무 할 일도 없이 고요한 정적 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유현진은 조금 옆으로, 현태오가 늘 앉곤 하던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 자리에 앉아 종종 그가 하던 대로 바깥을 보자, 뉘엿뉘엿 기울어지기 시작한 해가 노랗게 뜰을 물들이고 있었다.
헐벗은 나무와 버석버석한 풀들이 황량하게 차지하고 있던 뜰은 어느새 푸릇푸릇하게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까끌하게 돋아나기 시작한 잔디도, 움트기 시작하며 싹을 틔워 내는 나뭇가지도, 바위 사이에 노르스름하게 고개를 내민 철 이른 꽃송이도, 어느 결에 다가온 봄을 알렸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까.
새삼스럽게 놀라워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유현진이 이 집에 들어온 지는 고작해야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반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쌓였다. 그만큼의 기억과 감정도 함께 쌓였다.
“…….”
유현진은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문자함을 열어 현태오의 메시지를 펼친다.
매일매일 조금씩 쌓여 가는 문자는 별것 없었다. 안부를 묻고 건강 이야기, 날씨 이야기나 하는 게 고작이었다. 오늘도 아침 일찍 「오늘 퇴원이지요? 직접 마중 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조심해서 집으로 가세요.」라는 문자가 왔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아닙니다, 세진이가 와 주기로 했습니다. 댁에만 계시느라 답답하시겠지만 기운 내십시오.」라고 답을 보내고 말았다.
거래처나 업무 상대보다 아주 약간 더 친밀해 보이는 정도인 문자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유현진에게는 몹시 소중하고 애틋했다.
보고 싶다.
문자를 보는 사이에 불현듯 더럭 보고 싶어졌다.
내일쯤 법리청 사무국에 연락해서 방문 허가를 얻어 현태오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공식적인 파트너라는 입장에 있는 유현진에게는 별일이 없는 한 하루 안에 허가가 떨어질 테니, 딱 이틀만 기다리면 현태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들자 감정이 계속 일렁이며 멎지 않았다.
자신의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도, 유현진은 타이르듯이 심장 위를 두드리며 소파에 웅크리고 누웠다.
이틀만 기다리면 된다. 이틀만.
그렇게 되뇌던 때,
딩동──, 새 문자가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리고 액정에 짧은 문장이 떠오른다.
「퇴원 축하합니다. 집에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
현태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오는 듯한 그 문자를 눈에 새기는 것과 동시에, 유현진은 얄팍한 인내가 다해 버려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원래는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다.
현가를 둘러싼 고적한 주택가를 거닐며, 현태오가 머무르고 있을 저택을 그저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고 오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현진이 현가 저택 앞에서 멈춰 섰을 때―분명히 대문과는 거리를 두었음에도― 성실히 일하는 경비원은 웬 수상쩍은 인물이 서 있다고 생각했는지 경비 초소에서 나와 다가왔고, 유현진을 보고는 “아, 사제님, 아니, 유, 유, 선생님,” 하고 당혹스레 인사를 하는 그에게 유현진도 당황하고 말았다.
“예, 안녕하세요.”
“예, 예. 그――, 아시다시피 각하께서는 지금 연금 중이시라……, 혹시 방문 허가는 받고 오셨는지…….”
경비원은 몹시 정중한 태도로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곤란한 기색을 띠었다. 방문 예정자는 미리 경비 초소에 연락이 가기 때문에 유현진의 출현은 예상 밖일 터였다. 그렇다고 그냥 딱 부러지게 거절하고 돌려보내기에는 이미 온 세간에 다 퍼져 있는 소문을 이 경비원만 모를 리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니요, 저는 그냥 근처를 산책하다가……, ……그, ……진문성 부관님이 계신가, 하고…….”
그냥 산책 중이었다고 말하려다 보니 이 길 끝은 막다른 곳이다. 변명이 너무 궁색한 것 같아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는데 그 말을 들은 경비원은 크게 안심한 기색을 띠었다.
“아! 진문성 부관님이요!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으로 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려보내기도 껄끄러워 고민하던 경비원은 유현진이 찾아온 게 진문성이라는 말을 듣고는 적당한 면핏거리가 생겼다고 안도했는지 얼른 초소로 돌아갔다.
유현진이 뒤늦게 당황해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이미 안채에 연락을 넣은 뒤였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그는 환하게 웃으며 초소 밖으로 나왔다.
“예, 부관님이 지금은 각하와 함께 다른 방문객을 맞이하고 계시느라 바로는 못 뵙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뵙겠다고 하십니다.”
선뜻 대문을 열어 주는 그에게 유현진은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결국 겸연쩍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즘도 방문객이 많으십니까?”
“어휴, 그럼요. 듣기로는 신청자 열 명 중 한두 명만 방문 허가가 난다고 하는데도 매일 네댓 분은 찾아오세요. 지금도 바로 조금 전에 보안청장님께서――아, 들어가시지요.”
도중에 너무 말이 많았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문 경비원이 안쪽을 가리켰고, 유현진은 고개 숙여 인사하곤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구나, 편하게 쉬면서 보내는 게 아니었구나.
유현진은 안타까워진 마음을 달래며 본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걸음은 도중에 서서히 느려지고 말았다.
원래라면 응접실로 찾아가겠지만 지금은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기가 계면쩍었다. 필경 저 경비원처럼 지나치게 정중하고도 조심스러운,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대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바로 조금 전에 방문객이 찾아왔다면 제법 오래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냥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던 때, 유현진의 눈에 익숙한 정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살았던 시절 매일같이 오가던 곳이다. 줄지어 서 있는 저 정원수들을 따라 주욱 걸어가면 아담한 안뜰이 나오고, 그 옆에 그가 살던 별채가 있었다.
유현진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유현진은 매일 이 길을 지났다. 그러다가 정원에 접해 있는 본채 2층의 현태오의 서재 앞을 지날 때에는 늘 그를 떠올리곤 했다. 지금쯤 저기서 책을 보고 있을까, 혹은 다른 데 있을까, 서재 창문을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랬다가 만에 하나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황홀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들키고야 말 것 같아서.
그렇게 앞만 보며 걷다 보면 본채를 다 지나 그가 살았던 별채가 나왔다.
그 별채 앞 안뜰에는 종종 어머니가 앉아 꽃가지들을 돌보다가 유현진을 맞아 주었다.
“…….”
유현진은 안뜰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별채 앞의 빈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는 더 이상 어머니도 그때의 유현진도 없었지만, 어김없이 찾아온 봄기운을 맡고서 그때의 꽃들이 망울을 틔우고 있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여전히 그때 그 시절 속에 있는 것처럼 유현진은 그 자리에 앉아 시간을 느꼈다. 그곳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처음으로 유현진은 고개를 들어 본채 2층의 서재를 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으나 한 번도 함부로 쳐다보지 못했던 그 창문을 이제야 반듯이 올려다본다.
거기에 현태오가 있었다.
현태오가 창을 등지고 기대어 선 채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현진을.
“――.”
유현진은 숨마저 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저기서 저렇게 보고 있었던 걸까.
현태오는 뚫어져라 유현진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저곳에 함께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 듯 간간이 멈추었다가 말하길 계속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불현듯,
어쩌면 오래전에도 저랬을까, 하고 유현진은 생각했다.
오래전에도 그는 저기에 있었던 걸까. 그 시절에도 그는 저곳에서 저렇게 아래를 내려다보곤 했을까.
……그때 올려다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현진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한동안 그곳에 있던 현태오가 안쪽에 있는 이들에게로 안 내키는 시선을 돌리고 창가에서 비켜설 때까지, 그리고 그 뒤에도.
조용하고도 예쁘게 날이 저물고 있었다.
늦오후의 노랗고 해설픈 햇빛 아래 봄꽃들이 소리 없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은 공기가 쌀쌀한 그곳에 앉아 유현진은 현태오를 기다렸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결국은 그가 이리로 찾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추운데 왜 계속 여기 있습니까.”
바로 이렇게.
유현진은 본채에서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일주일, 보름, 한 달, 혹은 몇 년 만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주 옛날에 보았던 그 날카로운 인상의 소년이 걸어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두가 그리워서 유현진은 굳어 버린 듯이 앉아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현태오는 그런 유현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라도 눈길을 떼는 순간 달아나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가와 바로 앞에 선다.
그제야 곱은 손을 보고는 혀를 찬 현태오가 유현진의 두 손을 제 큰 손 안에 그러쥐었다. 따뜻하고 넉넉한 손안에서 차가웠던 손이 금세 녹았다.
“문성이 만나러 오셨다면서요.”
현태오가 툭 던지듯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양하지만 은근히 말끝이 심통스럽다.
“어……, ……여쭤볼 게 있어서요.”
“문성이는 지금 손님 접대하느라 바쁩니다. 제게 물어보십시오.”
유현진은 제 앞에 웅크리고 앉은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손은 이미 미지근하게 녹았는데도 가만히 입김을 불어 주고 있는 그를 깜박깜박 쳐다보다가 괜히 멋쩍어져 시선을 떨구었다.
“각하께서는 연금 중에도 편하게 잘 지내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아.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저녁쯤 나가 볼 참이었습니다.”
“……. 외출 계획이 있으셨습니까?”
연금 중인데? 그새 풀렸나? 그렇다면 때를 잘못 맞춰 왔나 보다.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는 유현진을 보고 어이없다는 빛을 띤 현태오가 허, 하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걸어서 한 십 분 거리에 유현진 씨라고, 퇴원하자마자 재까닥 제 애인한테 찾아오지도 않는 고약한 인사가 사는데, 아침부터 사람 기다리는 줄도 모르는 본새가 하도 괘씸해서 저녁까지도 안 오면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려 했습니다.”
“…….”
말이 막히고 말았다. 아니, 숨이 막힌 것 같기도 했다.
깜박, 깜박, 유현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현태오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낯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애쓰느라 무뚝뚝해진 낯으로 입술만 어물거리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쳐다본다.
어쩐지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지만 낯빛만큼은 여전히 냉담한 현태오를 보다가 유현진이 겨우 말마디를 꺼냈다.
“연금 중이신데, 방문 허가 받으려면 이틀은 걸리는데, 어떻게 바로 옵니까.”
“문성이는 찾아오시면서요?”
“……. 세진이랑, 상ㅇ, 정혜궁마마께서 집으로 오셔서,”
“만날 보던 얼굴들이 까마득히 오래 못 봐 목이 빠진 애인보다 대수입니까.”
“……, ……, 애……인입니까?”
유현진이 무더워지는 낯으로 간신히 그 말을 꺼낸 순간, 갑자기 현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삽시에 냉담해진 그 주위로 온도가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유현진 씨.”
“……, 그,”
“유현진.”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 안에 경고와 압박이 들어차 있다. 이건 딱, 아주 가끔 가다 진문성이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하면 ‘문성아. 제대로 안 할래……?’ 하고 으르던 때의 음색이다.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끝이라고 고하는 것 같던.
유현진은 뚫어지게, 아주 뚫어지게 현태오를 쳐다보다가 제 손을 쥐고 있는 현태오의 손을 붙들어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 손끝에 가만히 입술을 댄다. 어린 새나 고양이 따위가 쪼듯이 몇 번이나 거듭, 서투른 사과라도 하듯이.
그러나 사실은――사과가 아니다.
입술을 댄 순간 깨달았다.
유현진은 그저 현태오가 반갑고 그리웠다. 그의 손끝마저도 그리워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문득 현태오의 숨이 멎는 듯했다.
노려보듯이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어느 순간 나직이 혀를 차는가 싶었다. ‘어디서 이런 몹쓸 걸 배워 와서…….’, 잇새로 사납게 뇌까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춥습니다. 일어나요.”
갑자기 현태오가 그 손을 뿌리치듯 떨구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낯이 딱딱해져 있었다.
……? 그냥 화난 척만 하는 줄 알았었는데, 정말로 화가 났었나? 유현진이 살짝 움츠러들며 덩달아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저만치 떨어진 본채 쪽을 흘끗 보는가 싶던 현태오는 바로 등 뒤의 별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금은 간혹 외부 손님이 머무를 때 쓰는 곳이라 한동안 비어 있었지만, 매일 청소는 하니까 깨끗합니다. 들어오십시오. 추운데 밖에 있지 말고.”
“예? ……아,”
왜 본채로 가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유현진은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동시에 가슴이 설렜다.
십 년만이다. 십 년 전에 살았던 곳으로 들어서자 낯익음과 낯섦이 공존하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거실을 중심으로 아담한 방 세 칸이 있는, 세 식구가 살기에 알맞았던 공간이다. 구조도, 가구가 놓여 있었던 배치도 그대로였다. 손님용이라는 말대로 식기나 이불 등의 자잘한 물건들도 비치되어 있어 곧바로 사람이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비록 유현진이 여기에 살았던 때와는 사소한 물건들이 달라 다소 낯설기도 했지만, 테이블, 소파, 심지어 방들 안에 있는 침대까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리운 마음이 물씬 솟아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유현진은 자신의 방이었던 곳으로 들어섰다. 집 안을 둘러보며 난방 따위를 켜는가 싶던 현태오가 따라 들어온다.
크기는 제일 작았지만 창밖으로 바로 정원이 내다보이는 방이었다.
“여기에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으면 가끔 현태오 씨가 보였습니다.”
노을 지는 창밖을 바라보던 유현진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현태오가 유현진에게로 시선을 떨군다.
“정원에서 활쏘기나 검술 연습을 하신다거나, 날씨 좋을 땐 나무 그늘에서 책을 읽는다거나……. ……저는 방에 있을 때엔 습관적으로 바깥을 내다보곤 했었어요. 오늘은 보이지 않을까, 언제쯤 올까…….”
이제야 말하는 오래전의 기억이다.
그때 유현진은 아무도 모르게 현태오의 모습을 눈길로 좇았었다.
현태오는 빤히 유현진을 내려다보았다. 겸연쩍기라도 한 듯 도로 창밖으로 시선을 준 그는 잠시 그대로 묵묵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저는 정원에 나와 있을 때에는, 이놈이 언제쯤 지나갈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요.”
유현진은 눈을 깜박였다.
그때 유현진은 현태오가 정원에 나와 있으면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뛰고 긴장해, 한층 더 무뚝뚝한 기색으로 그에게서 최대한 거리를 두고 지나갔었다. 그리고 현태오는 유현진이 지나가는지 마는지 알지도 못하는 양 냉랭한 얼굴로 본인 일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다 막상 지나가면, 저 새끼는 대관절 나한테 무슨 불만이 저렇게 많아서 저따위로 얼굴을 구기고 지나가나, 기분이 확 상했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그랬습니다.”
“누가 바로 앞에서 화를 내거나 울고불고해도 신경도 안 쓰실 줄 알았는데.”
“신경 안 썼습니다.”
“…….”
“그런데 유독…….”
현태오는 그때를 생각하듯 가느스름한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이없다는 듯 제풀에 피식 빈 숨을 내쉬고 만다. 그때부터……,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입술이 도중에 멈추었다.
유현진은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오래전 저곳에는 두 소년이 서 있었다. 마냥 서툴렀던 소년들이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차차 짙푸르러지는 하늘에는 별이 한둘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전 이곳에서 지냈던 때와 같은 정경으로.
“오늘, 퇴원하고 오후 내내 짐 정리를 했습니다.”
유현진이 조용히 말을 꺼내자 현태오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짐이요?”
“예. ……그 집에서 오래 지내게 될 것 같아서, 서재 방을 따로 두고 옷 방도 따로 두기로 했습니다. 다른 방들을 너무 비워 두는 것도 좀 그래서…….”
그 넓은 집에서 유현진이 모든 짐을 끌어안고 방 한 칸만 차지하고 있는 걸 현태오는 별반 내키지 않아 했다. ‘꼭 금방 다시 나갈 사람 같군요.’ 하고 냉담하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썩 탐탁지 않았던 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실제로 유현진은 그곳에서 얼마나 살게 될지, 현태오와 얼마나 함께 있을지 알 수 없어 그렇게 지냈었지만, 이제는 그곳을 제집인 양 여겨도 될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하면 이 남자도 기꺼운 얼굴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얘기한 유현진이었지만,
“……. 안 되는 거였습니까?”
어딘지 미묘한 표정을 떠올리는 현태오를 보고 유현진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어하는 것 같기도 한 현태오를 보며 변명처럼 덧붙였다.
“현태오 씨가 평항에 계시는 동안 저는 그곳에서 지내며 기다리면 되는 줄 알고……. 안 된다면 짐 정리는 금방 다시,”
“아니, 안 된다기보다는,”
현태오는 손을 들어 말을 도중에 가로막았다.
미간을 찌푸리고서 턱을 감싸 쥔 채 물끄러미 유현진을 뜯어보던 현태오는, 시선을 마주친 채 확인이라도 하듯이 한마디 한마디 명료하게 입을 열었다.
“사월 중순에는 평항으로 돌아가 다시 복귀할 겁니다.”
“……예.”
“그리고 향후 5년은 더 평항에 머물면서, 미사담 왕자와 정혜궁마마가 그리로 넘어와 안정적으로 공동 통치를 맡아보실 수 있도록 정리를 해 둔 뒤에야 수도로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5년…….”
기네요, 하고 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우울하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당장 현태오가 평항에서 물러날 수는 없고 한참은 더 있어야 한다는 걸 유현진도 이미 알고 있었고, 각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5년이라는 숫자를 듣자 벌써부터 마음이 흐려졌다.
“싫습니까?”
유현진의 낯빛을 살피며 현태오가 물었다. 유현진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싫다기보다는, ……, 예, 좀 싫긴 하지만……,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현태오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이걸 어떻게 할까, 고민스러운 듯 지그시 유현진을 바라보던 현태오는 짧게 혀를 차더니, 별안간 단호하게 낯빛을 바꾸었다.
“5년 동안은 평항에서 지내셔야 할 텐데, 그게 싫으냐고 여쭤본 겁니다.”
유현진은 일순 머릿속이 비었다.
어, 하고 몇 초쯤 생각이 멈춘다.
“……저요?”
“그럼 설마 함께 안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현태오가 비난의 눈길로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유현진.’ 하고 나직이 부르던 때의 딱 그 눈길이다.
유현진은 아연히 현태오를 마주 보았다.
안 갈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함께 간다는 선택지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가족도 부하도 아닌 타인이 부임지까지 함께 가는 경우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으므로.
하지만, 함께 간다면. ……그럴 수 있다면.
“정말, 그래도 됩,”
들뜨는 호흡을 억누르며 유현진이 막 물어보려던 때, 현태오가 엄격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아시겠지만, 평항에는 제양 법과 달리 적용되는 특별 조례가 있습니다. 그중 송갈과의 접경 지역이라 송갈의 문화를 일부 수용하는 조항이 있는데,”
거기까지 말한 현태오가 뚫어질 듯 유현진을 쳐다보았다.
평항 특별 조례……, 송갈 문화……, 평항에 가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건 난데없이 무슨 말이지……, 하고 멍하니 현태오를 바라보던 유현진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고, 바로 그때 현태오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함께 지내시는 김에 아예 확실하게 법적인 관계를 성립시켜 두는 것도 좋겠습니다.”
“……법,”
“저는 지금 청혼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유현진은 넋을 잃고서 현태오를 본다.
귓속을 파고든 그 말은 몹시 느린 속도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넋 나간 인형처럼 깜박, 깜박, 커다란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기만 하는 유현진을 살피던 현태오가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유현진의 뺨에 닿는 손이 조심스럽다. 그러다 깨어질까 염려스럽기라도 한 것처럼――혹은, 혹여 물러날 기미라도 보였다가는 곧바로 붙들어 세우기라도 할 것처럼.
“그날, 유현진 씨가 저를 찾아왔던 날 이후로 계속 기분이 널뛰고 있습니다.”
악문 잇새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유현진은 현태오가 눈에 보이는 것만큼 태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날의 말들을 떠올리며 구름 속을 걷는 것 같다가, 혹시 꿈을 꾸거나 환청을 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진창에 처박히는 것 같아요. 유현진 씨와 주고받은 문자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면 또 안심하는데, 그러다 보면 당장에라도 눈앞으로 끌고 오고 싶어서 돌겠거든. 전화도 못 하겠더군요, 목소리라도 들었다간 당장 뛰쳐나가서 아직 다 낫지도 않고 병원에 있는 놈을 끌고 올 것 같아서.”
“――.”
조심스럽게 뺨을 감싼 손은, 감싸자마자 단단한 힘과 열기를 품고 뺨을 문질렀다. 그대로 으스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기라도 하는 것 같다.
커다란 손에 두 뺨을 감싸인 채로 유현진은 현태오를 본다. 그는 몹시 사나운 얼굴로 낯을 구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서울 때보다 더 가슴이 요동치며 술렁이고 있었다.
“약 빤 것처럼 황홀했다가, 지옥문에 선 것처럼 불안했다가, 이 새끼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 화도 치밀었다가, 문자라도 오면 또 정신없이 그것만 들여다보다가, ……의사를 불러야 하나 싶을 지경이었어요.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것 같았거든.”
이를 갈며 앓듯이 중얼거린 현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어 유현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었다. 열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뜨겁다. 아니, 열이 있는 건 자신의 이마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수십수백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머리를 들쑤실 수 있나, 분열증이라도 생긴 건가, ……유현진 때문에.”
뺨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으르렁대는 숨결이 입술 위에 닿는다.
그러다 문득,
그 손에서 어렴풋이 힘이 빠졌다.
“믿기지가 않아요. 이 보기만 해도 아까운 게 정말로 내 거라니. 그래서 뭐든 현실감을 갖게 해 줄 게 필요합니다. 늘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는 거든, 법적 관계든, 뭐든.”
그 목소리가 그 남자답지 않게 너무도 불안하고 약하게 들려서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은 유현진은 자신도 남자의 두 뺨을 감싸 그를 가까이 당겼다.
“――.”
현태오의 메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충동 때문에 너무 세게 깨물었는지도 모른다. 희미하게 피 맛이 배어났다. 그러나 그 메마른 감촉도, 비린 맛도, 뜨거운 체온도 모든 것이 벅차게 사랑스러워, 유현진은 그 입술을 더욱더 세게 물어뜯은 뒤 그 속으로 혀를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기라도 한 듯 움찔 멈춰 버린 현태오의 혀를 세차게 빨아들이고 그마저 짓씹고 난 다음에야, 유현진은 입을 뗐다.
바로 앞에서, 반뼘만큼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현태오가 눈을 부릅뜨고 유현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현실감이 안 듭니까?”
유현진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가쁜 호흡과 함께 새어 나갔다. 그새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현진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눈을 한 번 깜빡, 했다.
“……. 더 안 드는데.”
삽시에 무표정해진 얼굴이 중얼거린다.
“……, ……사실은 저도 안 듭니다.”
유현진은 깨물리는 바람에 터져서 핏방울이 맺힌 현태오의 입술로 손을 뻗어 쓰다듬으며, 아까부터 귀가 아플 정도로 세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금세 현태오의 입술이 아물었다. 그 대신 자신의 입술에서 비린 맛이 나며 욱신거리는 통증이 옮겨 왔지만, 그조차 아픈 줄 모르겠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취한 것 같았다.
“저도 안 들어요. 계속, 계속 꿈꾸는 것 같아요.”
유현진이 가쁜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뚫어질 듯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문득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숨을 삼키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현태오가 아주 천천히, 느리게 고개를 떨구었다. 다시 입술이 닿는다. 입술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을 댄 채로, 그가 숨을 억누른 채 나직이 그르렁거린다.
“유현진 씨. 정말로 제가 좋습니까? 유현진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맞아요?”
“――현태오 씨를 좋아합니다.”
“오래전부터?”
“예.”
“제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입니까?”
유현진은 웃고 말았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보드라운 숨이 스치고 나간다.
“현태오 씨보다 훨씬 더요.”
유현진의 대답에, 잠시 침묵하던 현태오가 중얼거렸다.
“이것만큼은 틀린 대답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유현진에게 닿아 있던 입술을 좀 더 가까이 했다.
“내가 훨씬 더 욕심이 나서 죽을 것 같거든.”
그 말만큼이나 욕심이 숨 막히게 배어 나오는 목소리는, 이내 입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은 거칠 것도 억누를 것도 없이 욕심 사납게 혀와 혀가 얽혔다. 호흡이, 체온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단단한 팔이 저보다 작은 체구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결코 벗어날 도리라곤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유현진 역시 팔을 뻗어 현태오를 끌어안는다.
“저와 함께 평항으로 가 주십시오.”
현태오가 입술을 맞댄 채 협박이라도 하듯 거칠게 제안했다. 유현진은 호흡이 가빠 아득해지는 머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현진에게 참을 수 없다는 듯 한 번 더 깊이 혀를 섞은 현태오가, 더욱 사납게 을렀다.
“그리고 나랑 결혼해요.”
“――.”
유현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숨이 가쁘고 머릿속이 아득해 현태오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에게 제가 먼저 입술을 겹치고 만다.
부디.
부디 그렇게 하길.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말은 겹쳐진 입안에서만 흘렀지만, 그 말은 틀림없이 현태오에게도 닿았을 터였다. 으스러지게 끌어안는 그 팔은 그대로 평생 풀리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사실 핑계이긴 하지만, 또 진심이기도 한데,’
맹수가 사냥감에 침을 바르듯 유현진의 이마며 볼, 콧잔등 따위를 마구잡이로 잘근거리던 현태오가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유현진 씨는 그 버릇을 없애야 해요. 볼 때마다 화가 나거든.’
‘……?’
한참이나 이어진 입맞춤에 호흡이 모자라 아득해진 머리로 의아하게 올려다보는 유현진의 입술을 현태오가 깨물었다.
조금 전 현태오에게서 옮겨 왔던 입술의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 맛이 아릿하게 번졌다.
‘내가 그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빌어먹을 신성가호를 미리 없애 놓지 않았던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고. 그런데 또 이렇게 습관처럼 남 대신 아프고 있으니, 더 내버려 둘 수는 없잖겠습니까.’
핑계 대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고. 난 이미 너무 오래 참았으니까.
한계에 다다른 맹수가 뇌까렸다.
유현진은 언제나 이 남자를 갖고 싶었다.
현태오가 자신을 보아 주길, 자신을 원해 주길, 자신에게 마음을 주길 원했고, 동시에 그의 육체도 원했다.
아무리 정결하게 살았다 한들 젊고 건강한 청년으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인 관계를 원치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그는―비록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였지만― 현태오와 자려고 애썼던 적도, 잘 뻔했던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불쾌감이나 거부감이 들 리는 없었지만,
“――현, 현태, ――아,”
뜯어내다시피 열어젖힌 셔츠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현태오가 쇄골을 깨문 순간 유현진은 움찔하고 말았다. 어느 결에 바지 앞섶까지 풀어 헤친 커다란 손이 어렵잖게 유현진의 바지를 끌어 내려 바닥에 떨궈 버린다.
속옷 위로 현태오의 손이 유현진의 사타구니를 그러쥐었다.
“잠, 잠깐, ――!!”
흠칫한 유현진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 위로 현태오의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유현진의 몸 위에 반쯤 몸을 겹쳐 엎드리면서, 현태오가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셔츠를 더 벌렸다. 가슴 위로 붉게 도드라져 있던 유두를 내려다본 그가 일순 목울대를 울리는가 싶더니, 그곳을 덥석 집어삼켰다.
유현진의 몸이 튀어올랐다.
굶주린 듯이 유두를 씹는 현태오의 머리를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는 사이에 속옷째로 유현진의 성기를 쥔 현태오가 느리고도 우악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한다. 유현진은 열기에 들떠 오르는 저릿저릿한 감각이 아픔인지 뭔지 구분할 수 없었다.
“현, 현태오, 씨, 저, 이상, ……잠깐만, 기다,”
유현진이 헐떡이며 속삭였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 숨 가쁜 애원을 뱉은 순간, 유현진의 말을 순순히 따라 주기라도 할 듯 현태오가 고개를 들어 유현진을 본다.
그 얼굴은 분명 유현진이 잘 알고 있는 얼굴인데도 몹시 낯설어 보였다. 현태오의 꺼풀을 뒤집어쓴 포악하고 난폭한 무엇이다.
“현태오 씨, 맞……는 거죠?”
유현진이 더듬거리며 묻자 현태오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무, 무섭, ……현태오 씨가, 아닌 것 같,”
유현진이 멈칫멈칫 하는 말에 현태오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나직이 혀를 차는가 싶더니, 거친 숨을 억지로 억누르며 고개를 떨구어 부드럽게 입 맞춘다.
“잘 봐요. 내가 누구로 보입니까.”
“……현태오 씨요.”
“맞았어요.”
입술을 댄 채로 속삭이던 현태오가 유현진의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현태오 말고는 유현진 씨한테 이래도 되는 놈은 아무도 없거든.”
그 느릿한 말 직후, 억누르던 것이 끊어지기라도 한 듯 입맞춤이 사나워졌다. 잡아먹을 것처럼 혀를 밀어 넣고 입술을 짓씹는다.
유현진의 허벅지에 닿아 있는 그의 사타구니는 언제부터인가 부풀어 있었다. 허벅지 위에 대고 문지르는 움직임이 거듭됨에 따라 그 감촉이 점점 더 단단해졌다.
“안아요.”
현태오가 유현진의 팔을 들어 올려 제 목에 두르며 속삭였다. 유현진은 반쯤 날아가 버린 의식으로 그의 말을 따라 팔 안에 들어온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만족스런 숨소리가 입술에 닿았다.
거침없이 주무르는 커다란 손안에서 유현진의 성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뭐 뿌렸습니까?”
“……? 예……?”
“뭐 뿌렸냐고요. 이상한 향수 같은 거.”
“아, 닌,”
“그런데 왜 이렇게 단 냄새가 나. 달달한 냄새가 진동을 해서,”
삼켜 버리고 싶잖아……, 현태오가 혼잣말처럼 잇새로 내뱉는다. 그 말과 동시에, 더는 견디지 못한 듯 유현진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유현진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현태오의 손이 유현진의 속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성기를 문지르던 손이 더 아래로 내려가 엉덩잇골 사이를 은근하게 누른다. 느릿한 손가락이 주름진 사이로 파고들어 유현진의 몸이 펄떡 뛰었지만 현태오의 육중한 몸이 그 위를 눌렀다.
“가만……, 괜찮아요. 괜찮아.”
거짓말쟁이가 아이를 꾀는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몇 번이고 어린 새처럼 쪼며 입 맞추는 입술마저 부드럽다. 그러나 아래를 파고드는 손가락은 결코 다정하지만은 않았다. 느리지만 망설임 없이 꿈틀거리며 몸속을 벌린다.
“아, 잠깐, ――이, 이상, 이상해요,”
유현진이 허덕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럼에도 현태오는 그 위에 엎드린 몸을 비켜 주지 않았다.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몸이, 아래가,”
유현진은 숨을 삼키며 헐떡였다.
손가락이 몸속으로 드나들며 구물거릴 때마다 간지러운 것 같은, 안타까운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솟았다. 성기를 직접 붙들어 주무르던 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다.
“하나도 안 이상합니다. 잘하고 있어요.”
현태오가 말했다.
하지만, 하고 유현진이 항의하려 했지만 그 위를 덮는 입술에 말이 막히고 말았다. 일부러 막기라도 한 것처럼 혀가 깊이 밀려든다.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났다. 몸속이 더 벌어졌다.
아까부터 허벅지 위에 닿아 있는 현태오의 성기가 흉기처럼 일어나 있었다. 그 역시 흥분할 만큼 흥분해 있었음에도, 끈기 있게 몸속을 헤집으며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는다.
유현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흠칫거렸다.
이상하다. 낯설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은, 낯선 감각을 맛보고 있는 이 공간이 낯익은 탓이다.
마치 과거 이곳에 살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이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이 머물렀던 방에서, 줄곧 그 남자의 모습을 찾으며 내다보았던 그 창문을 올려다보며, 유현진은 어느 결에 실올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 채 그 남자와 뒤엉겨 있었다.
유현진의 사타구니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성기 끝에서 맑은 액체가 방울져 떨어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피부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일렁이는 빛무리가 안개처럼 살갗 위로 스며났다. 그 빛은 유현진이 몸이 움찔거리며 튀어오를 때마다 점점 더 밝게 일렁였다.
“…―.”
유현진이 그 사실을 알아챔과 동시에 현태오도 멈칫하더니 약간 고개를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신기한 듯이 내려다보는 현태오의 시선이, 온몸이 붉게 달아올라 헐떡이고 있는 유현진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감탄과 탐욕이 함께 뒤섞인 눈길이 유현진을 낱낱이 핥는다.
“……아름답군요.”
하나람님의 가호가 깃들어 있다는 증거다.
현태오가 천천히 유현진의 목덜미에서부터 가슴, 배 위까지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 손아래에서 안개 같은 빛무리가 흔들린다.
“깨뜨리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당장 깨뜨려 버리고 싶어, 현태오가 속삭이며 고개를 떨구어 유현진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러면서 유현진의 몸속을 벌리고 있던 손가락들을 거칠게 휘젓는다.
유현진이 낮은 신음을 내지르며 움찔 몸을 움츠렸다. 유현진의 성기 끝이 좀 더 젖어 들었다. 빛무리도 파르르 떨린다.
“전에도 이걸 얼마나 부수고 싶었던지.”
현태오는 유현진의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으며 으르렁거렸다.
“이번에는 안 놔줍니다.”
단호하게 잘라 말한 그는 유현진을 부둥켜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유현진은 숨이 막힐 것 같아 크게 허덕였다.
아래를 끈질기게 드나드는 손가락이 몸을 빠듯하게 벌리고 있었다.
물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질퍽거리는 소리가 거친 숨소리와 뒤섞여 귓가에 들렸다.
계속해서 몸이 저릿저릿하게 튀어 올랐다. 손가락이 또 하나 늘어난 것 같았다. 허리가 부들거렸다.
“아, 아파, 아파요, 제발,”
유현진은 울먹이며 호소했다.
아팠다. 아니, 아프다기보다는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었지만, 생경하고 익숙지 않은 아픔으로 느껴졌다.
낯설고 무서워 다급하게 애원하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내려다보았다. 속까지 다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이 찬찬히 보다가 속삭인다.
“……아파요?”
그럴 리 없을 텐데,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투다.
현태오는 한계까지 몰렸으나 간신히 눌러 참는 것처럼, 바싹 누른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그러면 안 되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손가락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배 속의 압박감이 사라져 유현진은 안도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안개처럼 빛무리가 일렁이는 유현진의 몸을 현태오가 감탄스러운 듯 내려다보는 사이, 안개가 아주 조금씩 잠잠하게 진정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유현진이 긴장했던 몸에서 힘을 빼며 늘어진 그때, 현태오가 유현진의 두 다리를 붙들어 위로 올렸다.
“――?!”
벌어진 다리 사이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직후 무더운 숨결이 다리 깊숙이 닿는가 싶더니, 뜨겁고 축축한 것이 그 사이를 핥아 올린다.
“하지, ――!”
유현진이 기겁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현태오의 억센 손이 가슴을 눌러 가로막았다.
가라앉는가 싶던 안개가 눈 아프게 반짝이며 요동쳤다.
문득 헛웃음이 들리더니 욕망이 선명하게 묻어나는 욕설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씨발, 미치겠네……, 온몸이 다 달아…….
나직이 중얼거린 현태오가 유현진의 허벅지 안쪽을 깨물었다. 뜨끔한 아픔이 달린다. 곧이어, 아래에 얼굴을 파묻은 현태오가 깊은 속으로 혀를 들이민다.
마치 아래부터 먹어치우려는 것처럼 거침없이 우물거리는 입과, 축축하고 끈적한 소리. 그 지독하게 음란한 소리에 머릿속까지 익어 버릴 것 같다.
“제발, ……아, ……현,”
유현진은 울먹이며 숨을 헐떡였다.
온몸이 부들거렸다. 몸속까지 파고들어 낱낱이 핥고 있는 혀가 불처럼 뜨겁다.
손가락이 같이 몸속으로 들어와 드나들었다. 욕망이 뚜렷하게 서려 있는 손가락이 하나, 둘,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도 아래에 들끓는 감각 때문에 의식이 흐려졌다.
“제발, 제발요, 어떻게 좀, ――아,”
이 낯설고 거대한 자극을 어떻게 해야 할까, 허리가 요동치며 몸이 뒤틀렸지만 가슴을 억누르고 있는 큰 손이 피하려는 유현진을 가로막았다. 부들부들 떨던 유현진은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아래를 핥으면서도 집요하게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는 저――무섭게 욕망이 들끓는 얼굴.
현태오는 유현진과 시선을 마주한 채로 보란 듯이 아래를 핥으며 몇 개째인지 모를 손가락을 깊이 밀어 넣었고,
“――!”
유현진은 파정하고 말았다.
허리가 움찔거리며 튀었다. 성기에서 뿜어져 나온 일부가 현태오의 얼굴에까지 하얗게 튄다.
“죄, ……죄송,”
유현진은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현태오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듯한, 당황한 듯한 얼굴로 유현진을 본다. 유현진은 현태오의 얼굴에 묻은 희끗한 액체를 보곤 자신이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합니다. 저, 저도 이럴 줄, 모르,”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그렁거리며 더듬거리는 유현진을 현태오가 빤히 쳐다보았다. 손등으로 천천히 제 얼굴을 닦으며 구석구석 유현진을 뜯어보던 현태오가 문득 하,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새까만 눈이 무서울 정도로 욕심 사납게 반들거렸다.
“사과할 게 아니라 외려 이건 내가 고마워해야 할 거 같은데…….”
손등에 묻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핥은 현태오가 유현진의 위로 엎드렸다. 그리고 유현진의 이마에, 뺨에, 입술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겹쳐진 몸이 무거웠다. 유현진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는 성기가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앞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뒤로만 간다고……? 처음 하면서?”
현태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다 이를 갈듯 속삭인다.
“이런 몸으로 대체 어떻게 신관이 될 생각을 했습니까?”
“죄, 송.”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서 그저 당혹스럽기만 해 사과하는 유현진의 입술을 깨물며 현태오가 거칠게 내뱉었다.
“저를 좋아해서 다행인 줄 아십시오. 다른 놈 좋아했다 한들, 그놈한테는 죽어도 못 갔을 테니까.”
빌어먹을, 더는 못 참겠어, 현태오가 목구멍 속으로 중얼거리는 듯했다.
동시에, 유현진의 아래로 엄청난 기세로 치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유현진은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 별이 튀는 것 같다. 일순 시야가 새까매지며 숨이 막혔다.
아래에, 어마어마한 것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벌겋게 달군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망치질하듯 퍽, 퍽, 배 속을 두들기며 파고든다. 이미 벌어질 만큼 벌어진 줄 알았는데 턱도 없었다. 몸이 갈라지고 있는 것 같다.
안개가 미친 듯이 반짝이며 넘실거렸다. 빛무리가 살갗 위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거듭하며 조금씩 그 범위를 넓힌다.
단단히 부둥켜안은 현태오를 마주 안은 채, 유현진은 그의 몸 아래에 깔려 정신없이 뒤흔들렸다.
“아……, 아……, 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배 속 아주 깊이, 명치까지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아래를 꽉꽉 메우며 밀려드는 부피감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몇 차례의 추삽질로 단숨에 성기를 끝까지 채워 넣은 현태오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유현진은 작살에 꿴 물고기처럼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현태오의 벌겋게 달아오른 눈길이 잠시 그들의 몸이 맞물려 있는 곳을 살피는 듯했다.
“좋아요. 잘 삼켰네. 다치지도 않고. ……아주 잘했어요.”
거대한 성기를 삼키고 빠듯하게 부풀어 오른 입구 위를 현태오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덧그렸다. 그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오므라드는 감각에, 현태오가 낮은 호흡을 삼켰다.
점점 더 욕망이 맺혀 번들거리는 눈으로 유현진을 뚫어질 듯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허릿짓을 하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밀어올리던 움직임이 점차 거칠게 속도를 높였다.
“…―! ――!!”
유현진이 울며 몸을 퍼득였다. 그 몸을 단단히 붙든 채 현태오가 때려 박듯이 몸을 부딪친다. 더 이상은 여유라곤 없는 몸짓에 질퍽거리며 물이 튀었다.
금세 유현진의 허리 아래가 흥건하게 젖어들었다.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저릿거렸다.
한 덩이가 되어 얽혀 버린 몸들 위로, 일렁이는 빛무리가 현태오의 몸까지 집어삼켰다. 아득해지는 시야가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격렬하게 일렁이던 그 빛무리가 몸속에서 반짝거리며 터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
현태오가 거친 탄성을 뱉었다.
모든 것이 멈추는 듯 움직임이 멎었고, 그 직후, 유현진의 몸속에서 뜨거운 감각이 흘러넘쳤다. 왈칵, 몸속에 쏟아지는 무더운 사정을 느낌과 동시에 유현진 역시 길게 토정하고 말았다.
부둥켜안은 몸이 욕망으로 경련한다.
그리고, 빛이 터졌다.
화악――눈부시게 반짝인 빛무리는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흩어졌다.
유현진은 자신에게 깃들었던 신성한 가호가 떠나가는 것을 느꼈다.
줄곧 그를 지켜 주었던 무형의 은사는 아주 부드럽고 상냥하게, 이제는 없어져도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듯이 유현진을 쓰다듬어 주고는 사라져 갔다.
그 아쉬움과, 그리움과, 감사함과, 막막함.
그 모든 감정들이 맞물려 눈가에 고였다.
현태오가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입술로 유현진의 눈가를 쓸었다. 넘쳐 나는 눈물을 모두 핥아 삼키며 진득하게 입을 맞춘다.
“앞으로는 제가 계속 유현진 씨와 함께 있을 겁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선언 같기도 한 낮은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빛무리가 흐릿하게 사라져 버리자 더운 체온이 선명해졌다. 맞닿은 살갗의 감각도.
유현진은 그렁거리는 눈으로 현태오를 보았다.
자신에게 남은 남자다. 선물을 남겨 놓은 것처럼, 유현진에게는 현태오가 있었다.
유현진은 현태오를 끌어안았다. 상냥한 입맞춤이 언제까지고 이어진다.
거칠던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여전히 포개져 있는 몸의 체온도 조금씩 식어 가며 느른한 편안함이 찾아들었다.
유현진은 현태오의 몸 아래서 늘어졌다. 이제, 아직껏 배 속을 빠듯하게 벌리고 들어와 있는 압박감만 사라지고 나면 노곤하게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아쉽습니까?”
현태오가 나직이 물었다.
이제 신성한 가호는 사라졌다. 유현진은 더 이상 은사도, 이능도 쓸 수 없었고 신관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전혀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
유현진은 제 위에 엎드린 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현태오 씨가 다쳐도 도와드릴 수 없는 건 아쉽습니다.”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린 현태오가 코웃음 쳤다.
“전 바로 그 부분이 잘됐다고 생각하는 중인데요.”
유현진은 제 뺨에 입을 맞추는 현태오의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거뭇거뭇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미 저녁도 물러가고 밤이 찾아들기 시작한 하늘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신관으로 평온하게 지내더라도, 그 가운데 외로울 때도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마음 다치는 일들도 많았고요. 그럴 때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하나람님께 기도를 드리며 늘 저와 함께 계신 그분을 붙들고 위로받는 것뿐이었어요.”
그분이 분명히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자신을 지켜 주신다는 증거를 몸에 품고서, 오로지 그것만 위안 삼아 위로받은 날들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했던 은사가 이제는 영원히 떠나가 버렸다.
“물론 지금도 그분께서는 신성가호만 거두어 가셨을 뿐 언제나 저와, 그 누구와도 함께하시지만……, 그래도 좀 허전하긴 하네요.”
조용히 말한 유현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그런데,” 하고 현태오를 보았다.
“이제 현태오 씨가 계속 같이 있을 거잖습니까.”
현태오가 눈썹을 치켜올리는가 싶었다.
곧 눈매를 구부리며 웃음 지은 그는 유현진을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유현진은 품 안에 가득 찬 남자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제 몸 위에 얹히는 무게감이 무거웠다. 그것이 왠지 안락하고 마음 편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선명한 무게 때문일까, 더운 체온 때문일까, 이 남자와 함께 있다는 게 명확한 실감으로 다가온다.
내 것이다. 이 순간 그는 분명히 자신의 것이었다.
유현진은 문득 가슴이 벅차올라 현태오를 끌어안았다. 거의 동시에 현태오 역시 유현진을 끌어안는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게 또다시 사랑스러워져 유현진은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어제보다 더, 아까보다 더, 1분, 1초 전보다 더.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던 어느 때, 불현듯 현태오가 나직이 뇌까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릴걸.”
“……?”
뭔가 중얼거린 현태오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유현진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 유현진은 뜨끔하게 아파서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든 현태오가 어딘지 씁쓸한 얼굴로 유현진을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유현진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러운데, 시선이 어둡다.
“……? 왜요.”
“아니……, 좀 후회가 들어서요.”
현태오의 무뚝뚝한 대답에 유현진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후회, 라면…….”
의아하게 중얼거리던 유현진은 움찔하고 멈추었다.
아직껏 배 속에 들어 있던 것이 꿈틀, 움직인 것 같았다. 잠잠하던 것이 어렴풋이 부풀어오르는 듯도 했다.
“처음 봤던 그날, 그냥 그때 바로 덮쳤어야 했는데.”
혀를 차며 나직이 내뱉은 현태오가 고개를 떨구어 입을 맞추었다. 유현진은 커다랗게 뜬 눈을 깜박일 뿐이다.
“그러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계속 애지중지하면서, 유현진 씨는 힘든 일 따위 구경도 못 하고 지내게 했을 테고 저도 일찍부터 행복해졌을 텐데, 아깝게, 16년이나 손해 봤습니다.”
처음 본 날 바로 가졌어야 했어, 현태오가 잇새로 중얼거린다. 유현진은 눈만 깜박이다 어물거렸다.
“……아니……, 그때 현태오 씨 나이가……, 내 나이가 몇이었는데 그런, 턱도 없는 소리를…….”
“그러게 누가 그 어릴 때부터 그렇게 예쁘랬습니까.”
현태오가 유현진의 턱을 깨물었다.
“그때는 이 별채가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유현진의 턱에 입술을 댄 채 그가 중얼거린다.
“늘 삭막한 얼굴로 나를 지나쳐선 여기로 들어와 숨어 버렸잖습니까. 제 몸 숨길 둥지로 파고드는 것처럼. ……기어이 이곳에서 나한테 붙들릴 줄 모르고.”
현태오가 흘끗 시선을 들어 유현진을 보았다. 가느스름한 눈매가 기분 좋아 보인다.
“이제는 더 도망칠 데도 없는데 어쩌실 겁니까.”
“――, 도망 안 칩니다. 친 적도 없고요.”
유현진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피식 웃는 기척이 돌아왔다.
현태오가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제야 나가려다 보다.
몸속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던 성기가 바깥으로 주륵 끌려 나간다. 빡빡하게 맞물려 있다가 틈이 생긴 사이로 흘러나온 것들이 허리 아래로 줄줄 흘러 흥건하게 고였다.
유현진은 그 낯선 느낌에 소름이 끼쳐 어깨를 움츠린다. 살덩이가 주룩주룩 끌려 나가 압박감이 줄어들자 배 속이 편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도중에 움직임이 멈추었다.
거의 다 빠져나간 현태오가 끄트머리만 남겨 둔 상태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숙여 유현진에게 입 맞추었고, 성기도 도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
아물어 들던 몸속을 다시 벌리며 밀고 들어오는 압박감에 유현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
입술을 핥으며 혀를 빨아들이던 현태오는 유현진이 다급히 그의 팔을 움켜쥐자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선명한 욕구가 서려 있었다.
“……끝, ……끝난 거, 아니었,”
유현진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현태오는 불시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춘 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눈도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유현진을 보던 현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그럼,”
“전희는 끝났습니다.”
“――, 무슨, 전,”
눈을 크게 뜨며 항의하려던 유현진의 입을 제 입으로 덮어 버리며 현태오가 끌어안았다. 등 아래로 팔을 둘러 단단히 끌어안은 그가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그럼 설마 그걸로 끝날 줄 알았습니까? 내가 얼마나 오래――얼마나 힘들게 참아 왔는데.”
술이라도 마시고 시작할 걸 그랬나, 하고 현태오가 중얼거렸다. 잊고 있던 죄책감에 유현진이 움찔하며 슬쩍 쳐다보자 심술궂게 눈이 가늘어져 있다. 심보가 고약하다.
“정말로, 힘듭니다.”
유현진이 호소하듯 애원했지만 현태오는 들어주지 않았다.
“오늘만, ……앞으로 한동안만 봐줘요.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으니까.”
그런 뒤 힘껏 허리를 들이밀었다. 유현진은 숨을 삼키며 그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삽시에 공기가 무더워졌다. 거침없는 허릿짓이 계속되며 느리게, 빠르게, 현태오의 성기가 유현진의 몸속을 헤집었다. 조금 전보다는 한결 미끄럽게 들어왔지만 여전히 몸속을 무섭도록 빠듯하게 벌려 든다. 질퍽하고 끈적한 소리가 이어졌다.
유현진은 현태오에게 매달렸다. 저릿저릿하게 넘실거리는 안타까운 감각이 파도처럼 점점 거세게 밀려들었다. 몸이 움찔거리며 성난 침입을 옥죄었다.
“――몸이 진짜, 뭐 이렇게 생겨 먹어서,”
현태오가 기가 막히다는 듯 이를 갈며 유현진의 목을 물어뜯었다. 빠듯하게 부풀어 오른 욕망이 몸속을 사납게 헤집으며 들쑤셨다.
“이렇게 찰지게 쥐어짜면서 나더러 참으라고 하면, 어쩌란 겁니까.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아! ――!!”
질책하듯 말한 현태오는 유현진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벌리며 제 허리를 단숨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몸이 마찰한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을 퍼득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유현진을 보고 현태오가 웃는 듯했다. 그 웃는 기척은 이내 거친 숨결로 바뀐다.
별안간 현태오가 유현진을 안아 올렸고,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유현진은 움찔하며 매달렸다. 현태오는 괜찮다는 듯 등을 다독이며 유현진을 끌어안은 채로 일어나 앉았다.
벽에 기대어 앉은 현태오의 위에 올라앉은 채 마주 보게 된 유현진이 당혹스레 눈을 깜박였다. 그런 유현진의 쇄골에 입을 맞추며 현태오가 허리를 추어올린 순간,
“――!”
스스로의 몸무게로 가라앉는 유현진의 몸에 현태오의 성기가 더욱 깊이 박혔다. 배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에 유현진은 황급히 현태오를 끌어안았다.
“현, 현, ……이거, 빼 주,”
“쉿. 가만.”
울음 섞인 목소리로 허덕이는 유현진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현태오가 부드럽게 속삭인다. 그러나 그 안심시켜 주는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느릿하게 추어올리기 시작한 몸짓은 조금씩 빨라졌다.
“아, 아프, 그만,”
울먹이며 어깨를 움켜쥐고 일어나려는 유현진의 허리를 붙들어 세운 현태오가 다른 손으로 유현진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커다란 손안에서 희롱 당하는 성기가 움찔거리며 힘을 받는다. 유현진은 몸을 뒤틀었지만 그때마다 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몸도 아래로 떨어졌다. 아래를 벌리며 파고드는 깊이가 더더욱 깊어진다.
몸이 한계까지 벌어져 둘로 갈라질 것 같다는 공포에 유현진은 힘껏 현태오에게 매달린다. 나직하고 거친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아파, 힘들어요,”
“하지만 섰잖습니까, 유현진 씨도.”
현태오의 손안에서 유현진의 성기가 뻣뻣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현진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믿기지 않는 듯 내려다본다.
힘을 받고 일어나 있는 자신의 성기와, 그 아래로 흉흉하게 일어나 몸속을 비집고 든 굵은 성기가 대비되었다.
별안간 낯이 달아올랐다. 촉각으로 느끼는 것과 별개로, 시각으로 확연하게 느껴지는 깨달음.
지금 그들은 실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날것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
몸이 움츠러들었다. 저절로 조여드는 배 속에서 뜨거운 살덩이가 맥박 친다. 그때, 커다란 손이 허리를 단단히 움켜쥐고 확 끌어내렸다.
푸욱, 아래에서 꽂히는 성기에 몸이 통째로 꿰인 유현진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현태오가 아래에서 몸을 추어올리기 시작했다.
피할 곳도, 밀려날 곳도 없이 제 무게를 싣고 아래로 떨어지는 몸속을 흉포한 성기가 짓이긴다. 주무르며 흔들어 대는 손길도 거칠고 사나웠다.
그 폭력적일 정도로 거침없는 행위 속에서, 유현진은 그저 현태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요동쳤다. 뻣뻣이 솟은 성기 끝이 푹 젖어 현태오의 손을 적시고 있는 것도 몰랐다.
아랫도리가 녹아 버린 것 같았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거친 숨소리와 섞였다.
눈물에 일그러져 보이는 현태오의 얼굴이 다른 사람 같다. 격렬하고 황홀하게 사랑에 빠져 있는――짐승의 얼굴이다.
어쩌면 자신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유현진은 문득 머릿속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자신도 지금 저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을까. 저렇게, 어쩔 줄 모를 욕망에 절어 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상대를 애타게 원하는 얼굴로.
움찔, 몸속이 움츠러들었다. 현태오가 낮은 신음을 흘린다. 이 이상 더 커질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피감이 울컥 늘어났다.
유현진은 울며 헐떡였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몸속이 멋대로 그의 성기를 빨아먹으며 경련하고 있었다.
“제발, 현,”
유현진이 애원하며 그를 부둥켜안던 때, 유현진을 낱낱이 쳐다보던 현태오가 불쑥 속삭였다.
“형.”
그렇게 속삭인 그는, 의아하게 쳐다보는 유현진에게 입 맞추며 말했다.
“형, 하고 불러 봐요.”
“――.”
유현진은 커다란 눈으로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그런 유현진의 뺨을 핥으며 재촉한다.
“어서. 현진아.”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나 주지 않으리라는 듯.
유현진의 낯이 붉어졌다. 더 더워질 수 없으리라 여겼던 몸이 더욱 더워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인 유현진이 현태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태,”
더워진 뺨에 재촉하듯 입맞춤이 닿는다.
“태, ……오, 형.”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유현진이 속삭인 순간, 현태오가 숨 막히게 부둥켜안았다.
그에게 떠밀려 쓰러진 유현진의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실리며, 아래를 두들기는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유현진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몸속을 사정없이 파헤치며 드나드는 질량감이 꼭 배 속에 주먹질을 하는 것 같다. 그때마다 고통 대신 눈앞에 별이 튀는 듯한 어찔한 감각이 덮쳐 왔다.
“현진아, ……유현진……!”
현태오가 악문 잇새로 끊임없이 이름을 부른다. 제 것임을 확인하듯이, 혹은 제 것이라고 귓속에 새겨 넣듯이.
유현진도 그를 부르려 했지만, 흐느끼는 울음밖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유현진의 성기는 띄엄띄엄 정액을 흘려 내고 있었다. 우악스런 성기에 푹푹 쑤셔 박힐 때마다 배 위에 하얀 액체가 뿌려졌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무서울 정도로 강렬하고 낯선 감각이 몸과 더불어 정신까지 휩쓸어 간다.
그 격렬한 감각에 한계까지 몰려 머릿속까지 아득해진 순간,
“――!”
일순 배 속을 벌리며 부풀어 오른 성기가 퍽, 하고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뜨겁고 세찬 사정이 꽉 들어찬 배 속을 비집어 열며 욕망을 퍼붓는다.
몸속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뜨거운 물기가 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동안에도, 유현진은 몸을 덜덜 떨며 울었다. 그 떨리는 몸을 현태오가 으스러뜨릴 듯 끌어안았다. 제 모든 것을 유현진 속에 흘려 내려는 양, 사정이 끝난 뒤에도 두 번, 세 번 더 허리를 추어올린 다음에야 움직임을 늦춘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임이 멈추었다.
정적 속에서 무더운 열기만 피어올랐다. 거친 호흡이 혀와 함께 뒤섞이며, 느리고 다정하게,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지분거린다.
“이대로 하나로 섞여 버리면 좋을 텐데.”
현태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아쉬운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바람이 담겨 있었다.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유현진은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녹초가 된 몸은 너덜너덜하게 지쳐 금세라도 의식이 떨어져 버릴 것 같았지만, 힘이 다 빠져 버린 팔을 간신히 들어 현태오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에게 가만히 입을 맞춘다.
“……좋아합니다.”
울음에 잠긴 목에서 겨우 새어 나온, 바람처럼 희미한 목소리였다.
현태오의 몸이 어렴풋이 굳었다.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춰 있는가 싶던 그는 별안간 유현진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훨씬,”
현태오의 말은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목소리가 떨린 탓이다.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오른 것처럼, 현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유현진은 그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전하고 싶은 감정도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자리에서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아, 지금 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하나씩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걸릴 테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자신의 위에 엎드려 있는 현태오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는 게 살갗 너머로 전해져 왔다.
어쩌면 이 남자도 할 말들이 아주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역시 서두를 필요는 없다. 시간은 둘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유현진은 노곤해져 몸을 늘어뜨렸다. 머릿속까지 노곤하게 흐려졌다. 지친 몸에서 차츰 힘이 빠져나가며 졸음이 밀려왔다.
“유현진 씨. 잡니까?”
부드럽게 뺨을 지분거리던 입술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기분 좋은 자장가 같다. 유현진은 나른한 숨을 내쉬며 의식을 천천히 풀어놓았다.
“아직 자면 안 되는데.”
곤란한 듯이 중얼거리는 상냥한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아랫도리를 은근하게 밀어 올리는, 아직 몸속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는, 두툼한 압박감.
갑자기 찬물을 얻어맞은 듯했다.
흠칫 눈을 뜬 유현진이 설마, 하고 믿기지 않는 시선으로 현태오를 본다.
“정 졸리면 자도 돼요.”
현태오는 유현진을 다독이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래를 슬근슬근 드나들며 부풀어 오르는 부피감은 명확하게 제 주장을 하고 있었다.
“저, 저는, 이제 너무 힘들, 그만하고 싶,”
다급하게 더듬거리는 유현진의 말을 현태오의 입술이 삼켜 버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오래 걸렸잖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힘들면 현진 씨는 쉬어요.”
자신도 본의가 아니라는 듯 혀를 차며 말한 현태오는, 마치 대단히 넓은 아량으로 봐준다는 투로 말하곤 물기가 그렁거리기 시작한 유현진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미안한 듯이 아주 부드럽게――그러나 단호하게 유현진을 끌어당기며 입술을 겹쳤다.
*
유현진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낯선 천장이 있었다.
천장의 저편 아래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커튼이 쳐져 있었음에도 그 너머에서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창문도, 커튼도, 이 밝은 시각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모두 낯설어, 유현진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미처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문득 관자놀이 옆에서 희미한 바람결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서 현태오가 잠들어 있었다.
“…….”
왜 이 남자가 여기서 자고 있지. 여긴 어딜까.
유현진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현태오를 여전히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머리가 무겁게 가라앉아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도 유현진은 바로 코앞에 있는 현태오에게 넋 놓고 시선을 빼앗겼다.
곤히 잠들어 있는 얼굴이 조각처럼 잘생겼다. 심장이 흥성거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살짝 몸을 옆으로 튼 유현진은, 바로 그 순간 움찔하고 굳어 버렸다.
낯선 고통이 허리 아래에서 밀물처럼 몰려왔다.
배 속이 욱신거린다. 강제로 벌어졌던 몸속이 미처 다물리지 않은 듯한, 몸속에 동굴이 뚫린 듯한 느낌이었다.
아랫도리가 화끈화끈하고 욱신거리며, 저 깊은 안쪽에 아직 남아 있는 뭔가가 주르륵 흐르는 것 같았다.
“――.”
그제야 머리가 깨어나며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히 새벽까지는 별채에 있었는데.
적어도,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또다시 시달리다 잠들 때까지는 별채에 있었다.
‘그렇게 피곤해요? ……도무지 안 되겠어요? ……그래요,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고, 좀 쉬고 내일 다시 하지요.’
때려죽여도 깨어나지 못할 만큼 지쳐서 새벽에 아예 의식을 놓아 버린 유현진의 귀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말이었다.
“…….”
유현진은 차차 창백해지는 낯으로 현태오를 쳐다보았다.
그 ‘내일’이라는 게 아마도 오늘일 것 같은데.
속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며 괴롭히는 인간일 줄은 몰랐다.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유현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생겨 보이는 그 얼굴을 원망스럽고 두려운 심정으로 노려보다가, 어쨌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상체를 반쯤 일으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허리 아래가 빠질 듯이 저리고 아파 식은땀이 흘렀다.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아 일어난들 도저히 두 다리로 버티고 설 자신이 없었다.
도로 풀썩 누워 버린 유현진은 드러난 제 몸의 울긋불긋한 꼴을 보곤 경악해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올려 코끝까지 덮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곳이 본채에 있는 현태오의 침실이란 걸 깨달았다.
제대로 들어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오래전 복도를 지나가다가 열린 문 틈새로 보았던 그 구조 그대로다. 침대 말고는 거의 가구가 없는 널찍한 방에, 현태오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이곳에 눕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문득 이불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현태오의 냄새다.
가만히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그 냄새를 맡으며, 귓가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는 사이에 유현진은 차차 마음이 느슨해졌다.
유현진은 몸을 기울여 굼실굼실 현태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좋았다. 이 남자의 모든 것이.
시선을 들자 바로 눈앞에서 현태오는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 남자가 곤히 잠들어 있다는 게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겹쳐진 커튼 틈새로 한 줄기 비쳐 든 햇빛이 현태오의 머리 위로 드리워 있었다. 반짝반짝, 먼지 같은 것이 그의 머리카락 위로 나풀거렸다. 머리카락까지 반짝거린다.
불현듯 간밤에 보았던 빛무리가 떠올랐다. 안개처럼 유현진의 피부 위에 서려 있다가 흩어지고 만 특별한 가호의 상징이, 문득 그 햇빛과 겹쳐져 보였다.
떠난 것 같아도 늘 그곳에 함께 있노라 말하는 것처럼.
유현진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제 손 위에 햇빛이 고인다.
“……하나람님, 오늘 하루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입술에서 저절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늘 거듭해 왔던 습관대로 기도의 말들이 새어 나온다.
이제는 신성가호도 없고 신관으로 돌아갈 수도 없이 그저 일반인일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유현진은 그분의 가호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만을 위한 가호는 거두어 가셨지만 모든 이에게 평등한 자애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먼 길을 돌아왔다.
이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와 결국은 이곳에 다다랐다. 이 남자의 품 안에. 또한 이 남자 역시 자신의 품 안에 들어왔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이미 자신의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자신이 그의 것이었듯이― 이렇게 길게 돌아오는 시간이 분명히 그들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유현진은 눈앞에 보이는 현태오의 미끈한 목덜미에 살며시 입 맞추었다. 그리고 그 위에 가만히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어떻게 이런 귀한 것이 내 것일까.
아직도 꿈만 같다. 그러나 꿈이 아니라고, 이 순간은 명확히 자신의 것이라고 여실히 전해 주는 이 체온, 냄새, 기분 좋은 숨소리.
문득 가슴이 더워졌다.
내 것이다.
처음으로 가진, 유일하게 원했던, 내 것.
여태 자신의 몫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루어진 것도 없었다. 오로지 하나의 소원만을 간절히 기원하며 빌었지만, 그조차 자신을 위한 기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무엇보다도 원했던 것이 자신의 품 안에 있었다.
“부디 제게, 또한 그에게 당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축복 아래 제 기원이 이루어져, 그가 어디에서든 다치지 않도록, 어떠한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도록,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유현진은 입술만 달싹여 기도를 읊조렸다.
매일 새벽마다 늘 거듭하던 기도는 이제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해 주세요.
유현진은 나직한 기도를 맺은 뒤에야 시선을 들었다. 잠들어 있는 현태오의 모습을 좀 더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졸음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선명한 눈매가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불시에 눈이 마주쳐 유현진이 움찔하자 다정한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아침마다 기도합니까?”
목소리에는 아직껏 졸음이 남아 잠겨 있었다. 가만히 유현진의 등을 다독이는 팔 안에서 유현진은 “예.”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럴 이유는 없는데 왠지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그게 아침마다 하는 기도예요?”
유현진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현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현태오가 다시 묻는다.
“왜 유현진 씨가 바라는 걸 기도하지 않고요.”
“……. 이게 제가 바라는 겁니다.”
점점 더 계면쩍어져 얼굴까지 붉어진 유현진은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런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던 현태오가 혀를 찼다.
“이분이 술버릇만 안 좋은 게 아니었네……. 이렇게 숨 쉬듯이 사람을 홀리면 어쩝니까.”
나무라듯이 중얼거린 현태오가 유현진을 품에 바싹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는 단단한 팔 안에서 유현진은 일순 미동도 못 하고 얼어 버렸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들어 현태오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래도 괜찮을 것이다. 내 것이니까.
조심스러워하는 유현진의 손길이 닿자 머리 위에서 현태오가 낮게 웃는 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꼭 끌어안았던 팔이 느슨해지며, 잘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유현진의 어깨를 두드린다.
밝은 그늘을 만들며 비치는 햇빛 한 줄기와 잘 어울리는 안락하고 기분 좋은 포옹이었다.
느리고 안온하게 공기가 흐른다.
그 속에서 문득 현태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여태 부족한 것도, 모자란 것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
이미 알고 있다.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인지 유현진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일을 하면서도, 평탄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불안이나 위기감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때그때 최선의 해법은 늘 보였고, 계획한 대로 실행이 되었거든요.”
“……예.”
“게다가 난 뭐든 잘했습니다. 처음 하는 일이라도 금방 요령이 보였고, 쉽게 해낼 수 있었어요. 늘 그랬지요.”
유현진도 알고 있다. 현태오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을 사실이다.
그는 무엇이든 잘 해냈다. 때로는 유현진조차 시샘이 날 정도로 모든 것에 능했다.
그런데, 그런 현태오는 거기서 말을 멈추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유현진을 보았다. 마치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라도 앞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런데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뭔가를 못할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잘 모를 수도 있고. 잘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예.”
“그러니까, 기다려 줘요.”
현태오가 한숨처럼 말하며 유현진을 끌어안았다. 유현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박일 따름이었다. 씁쓸한 숨결이 머리 위에 닿았다.
“나는 사람한테 이렇게 넋이 나가는 건 처음입니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는데도 여태 몰랐을 만큼, 나한테는 낯선 일이에요. 이렇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뭐가 뭔지도 모르겠어서 속수무책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뭘 어떻게 해야 계속 곁에 묶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초조한 기분이 듭니다.”
조용조용하게 흘러나오는 말들 속에서 유현진은 그의 등에 얹고 있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감미로운 한탄이라니.
“일단 요령만 알고 나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은 있습니다. 유현진 씨에게도 지금보다 훨씬 잘해 줄 테고, 나만큼 잘해 줄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그러니까――기다려 줘요. 혹시라도 실망하지 말고. 싫어하지도 말고.”
현태오답지 않은 불안스러움이 내비치는 마지막 말에, 유현진은 어깨를 움츠렸다. 고개를 들자 까맣고 다정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어떻게 하면 실망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싫어하게 될지, 알려나 주시든가요.”
처음 봤던 이후로 그걸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지금 이렇게 됐는데요, 유현진이 조그맣게 투덜거리며 현태오를 끌어안았다. 잠시 머리 위에서 꽂히던 시선이 별안간 앓는 듯한 한숨으로 바뀌는가 싶었다.
“진짜 숨 쉬듯이 사람을 홀리네…….”
혀를 차며 중얼거린 직후, 현태오가 유현진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더니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우나 탐욕스런 입맞춤이 그들을 잠식한다.
그것이 언제일지, 어떻게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실망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아무도 자신만큼 상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도 상대만큼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이 더운 호흡과 함께 섞여 드는 체온 속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내가 가장 이끌릴 사람은 당신일 것이다. 당신이 그렇듯.
문득 유현진은 움찔했다.
한층 깊이 입을 맞추며 유현진을 품에 바싹 끌어안는 현태오의 아래에서 뭉툭하게 힘을 받고 일어선 것이 유현진의 아랫배를 지그시 누른 탓이다.
“……. …….”
아침이라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일어선 것도 이해할 만하지만, 간밤에 하도 시달리고 난 뒤이다 보니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유현진이었다.
슬그머니 엉덩이를 뒤로 빼자 현태오가 왜 그러냐는 듯 내려다본다.
“이것……, 힘 좀 빼 주시겠습니까? 닿아서 불편한데요.”
“아아. 그럼 좀 빼 볼까요?”
유현진이 무뚝뚝하게 요구하자 현태오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양 제 아래로 흘끗 시선을 떨구고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유현진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기자 모른 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욕망이 더 바싹 닿았다. 아무래도 ‘빼다’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유현진은 엉거주춤 허리를 뒤로 물리며 불안스레 현태오를 노려보았다.
“안, 안 할 겁니다. 어제 그만큼 했는데…….”
방어적인 태세로 말하는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16년이나 기다렸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과장하지 마세요. 16년을 계속 좋아한 건 저고, 현태오 씨는 길어 봤자 겨우 몇 달 전부터이지 않습니까.”
“아닌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유현진이 눈을 치뜨며 엄하게 말했지만 현태오는 피식 웃기만 했다.
“차차 알게 될 겁니다.”
현태오는 그렇게 속삭이며 입을 맞추었다. 농밀하게 얽혀 드는 혀에 유현진은 반사적으로 숨이 달아올랐다. 간밤에 학습이라도 된 것처럼 살갗에 열이 오른다. 그러나 동시에 떠오른 것은, 얼얼하고 욱신거리는 아래의 통증이다. 허리 아래를 은근하게 쓰다듬기 시작하는 현태오의 손길은 명백히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이러다 다시 은근슬쩍 넘어갈 것 같았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바로 했다간 죽어 버리고 말 거다.
“저 어제 오후부터 굶었습니다.”
잠시 입이 떨어진 사이에 다급히 속삭이자 현태오가 멈칫했다.
이거구나. 이건 통하려나 보다.
유현진은 구명줄을 잡은 기분으로 최대한 서글프고 비참하게 말했다.
“상아랑, 정혜궁마마랑 오후에 쿠키 한 조각 먹고는 그 뒤로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어제저녁도, 이러느라 못 먹었고…….”
“…….”
“배가 고파요…….”
굶주림에 시달리는 불쌍하고 가엾은 어린애처럼 유현진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현태오는 배고파하는 유현진을 침중한 낯으로 바라보다가 억누른 한숨을 내쉬었다. 굶길 수야 없지, 하고 혀를 찬다.
“알겠습니다. 하더라도 일단 배불리 먹이고 해야지, 나 혼자만 배불리 먹는 건 불공평하지요.”
나도 딱히 배부를 만큼 먹은 건 아니지만, 하고 중얼거리며 현태오가 몸을 일으켰다. 그 말에 이유 모르게 유현진의 등골이 서늘해지는 가운데, 현태오가 느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게다가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고 덧붙인다.
“그……, 밥 먹고 산책이라도 나갈까요.”
왠지 모르게 그 ‘얼마든지 있는 시간’에 불안감이 든 유현진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현재 현태오가 연금 상태라는 걸 떠올리곤 “아, 맞다, 안 되지, 참.”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현태오는 침대 옆 의자에 걸쳐 두었던 옷가지를 주워 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책 좋네요. 날씨도 좋은데, 잠깐 나갔다 오죠.”
“연금은 어쩌고요…….”
“뭐, 그래 봐야 연금 기간이 더 늘어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어차피 더한 벌이 내릴 리는 없다고 이 배짱 좋은 남자는 뻔뻔하게 말했다.
그야 분명히, 지금도 바깥에서는 중요한 일손이 부재중이라며 아우성인 마당에 현태오에게 더한 벌이 내려질 리는 없었다. 그러니 배짱을 부릴 만도 하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래도 되나……, 유현진이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그런 유현진을 보고 현태오가 픽 웃더니 손을 뻗어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이 뒷산의 산책로는 우리 집 사유지라 괜찮습니다. 오늘은 거기까지만 갔다 오고, 연금 풀리고 나면 더 멀리까지 나가 봐요. 별도 보러 가고, 눈도 보러 가고……, 갈 곳이 많습니다.”
유현진을 보는 현태오의 눈매가 기분 좋게 휘어 있었다. 그 흔흔한 눈매를 보는 사이에 유현진도 저절로 표정이 누그러지고 만다. 빤히 쳐다보던 현태오가 갑자기 이불째 더럭 끌어안았다.
“봐도 봐도 안 질리네……, 아침까지 계속 보다 잤는데…….”
이불 너머로 혼잣말이 들려온다. 유현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현태오는, 그러나 곧 이불 뭉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리고 미련을 떨쳐 내듯 일어나 옷가지를 꿰입었다.
“뭘 드시고 싶습니까?”
“……. 전에 끓여 주셨던 지리탕이 맛있었습니다. 아, 얼갈이배추무침도요.”
이불에서 고개를 내밀며 대꾸한 유현진은 고개를 끄덕이곤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라며 일어나는 현태오를 보았다. 아까부터 줄곧 기분 좋은 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는 남자를.
틀림없이 지금 자신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왠지 쑥스러워져서 도로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리는 유현진이었다.
선선하게 걸음을 옮기던 현태오는 막 문고리를 잡다가 생각난 듯 돌아보았다.
“연금이 풀리면 제일 먼저 신전에 들러 볼까 합니다.”
“……? 아주 신실하고 바람직한 생각입니다만, 웬일로…….”
한 달에 한 번 형식적으로만 예배에 참석하던(그나마 종종 빼먹었던) 남자의 갑작스런 말을 듣고 미심스럽게 묻는 유현진에게, 현태오가 담담히 대답했다.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감사…….”
유현진은 여전히 의아해하면서도 납득했다.
오랫동안 그다지 신앙이 깊지 않았던 이 남자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게 뜻밖이었지만, 감사라면 아무리 많이 드려도 모자라다. 삶의 모든 것이 감사한 일이었으므로.
전직 신관으로서 길 잃은 양을 되찾은 기분이 들어 기뻐진 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유현진을 차근차근 살피듯 바라보던 현태오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하나람님께서 유현진 씨를 참 많이 사랑하시나 봅니다.”
현태오는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는 유현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유현진 씨의 기도를 틀림없이 들어주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현태오는 유현진이 처음 보는 얼굴로, 몹시 기쁘게 웃었다.
Epilogue.
연초부터 떠들썩한 소식들이 잇따라 들려오는 이상한 해였다.
정재계 인사의 비리와, 오래도록 적대시해 왔던 송갈과의 국혼과, 그 과정에서 터진 사고 등으로 각종 매체들의 훤소는 잠잠해질 날이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겨울이 물러가고 온갖 사건들도 그럭저럭 수습되어 가는 양상으로 접어들어 소란이 차차 잦아들던 때.
봄이 완연히 찾아와 꽃망울에 살이 오르고 뜰마다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니던 어느 날, 또 하나의 소식이 평온해져 가던 수면에 돌을 던졌다.
부상 치료 때문에 임시로 수도에 돌아와 있던 평항 총독 현태오가 내달 다시 평항으로 복귀하는 대로 결혼을 하리라는 소식이었다.
그 상대는 이미 작년 늦가을 왕실과 파혼하면서 온 세상에 알려진 바 있는 전직 신관 청년이었는데, 평항은 특별 조례로 동성혼이 가능한 곳이었으나 이만한 지위에 있는 인물들이 공개적으로 혼인을 했던 전례는 없어 세상은 또 한 번 떠들썩해졌다.
*
작년 가을 아들의 파혼 소식에 이어 올봄 아들의 결혼 소식까지 대중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제양의 총리 현상원은 어이가 없다는 기색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평소 온후하지만 수틀리면 화분도 집어 던지는 아버지의 성정을 알고 있는 아들들이―정확히는 현태양이―미리 재떨이며 꽃병 따위를 치워 놓고 바늘방석에 앉은 양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막내아들은 태연했다.
“너 이게 뭐냐.”
현상원이 툭, 하고 아들의 눈앞에 신문을 내려놓았다. 차를 마시던 현태오는 제 결혼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는 황색 신문을 보고는(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일개 고위 관리의 사생활은 정론지에까지는 실리지 않았다) “아.” 하고 몰랐다는 듯, 그러나 별로 놀랍지는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엊저녁에 평항의 법리국장과 잠깐 통화했던 것뿐인데, 그새 이야기가 나갔나 보네요.”
“너 지금 여기 실린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거냐?”
“정확히 뭐라고 실렸는지 모르겠지만, 헤드라인만 보면 맞습니다.”
평항 총독 현태오 전격 결혼! 상대는 소문의 그 남성! ――이라고 굵은 글자로 적혀 있는 문구를 여상하게 내려다보며 현태오가 말하자 현상원은 한층 더 어이가 없어져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놈이…….”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아들을 노려보던 현상원이 식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 막돼먹은 놈이, 대관절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길래 아비가 네 결혼 소식을 딴 데서 들어야겠냐?!”
“그러잖아도 주말에 집으로 오시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주중에는 총리 관저에 머물고 주말에만 본가로 돌아오곤 하는 현상원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낯짝인 아들을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다가 갑자기 힘이 빠진 듯 허, 하고 어이없이 의자에 푹 기대어 앉고 말았다.
“너 정말로 진심이냐? 남자랑 결혼을 하겠다고?”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사람 책임지겠다고 왕실과 파혼까지 한 마당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화친을 앞두고 있으니 평항 총독이 송갈 문화를 이해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면모를 보여 주는 것도 좋다고 하신 게 아버지 아니셨습니까?”
언젠가 임금과 더불어 부친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현태오를 기가 막히다는 듯이 쳐다보던 현상원이 손을 내젓곤 “그래,” 하고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럼, 그 결혼 생활을 언제까지 계속하려고?”
늘 그랬듯 이 막내아들에게는 뭔가 나름의 생각과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현상원이었다. 필요에 의해서 한동안 결혼 생활을 하겠다는 모양인가 보다.
그러나,
“결혼에 언제까지가 어딨습니까. 죽어서도 같이 묻혀야 할 마당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는 그 언짢은 목소리는 농담을 하는 기색이 아니었고, 아들이 차라리 입을 다물지언정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는 현상원은 아연해졌다.
“아니 너……, 상황 좀 가라앉으면 어디 지방 신전으로 보내겠다더니?!”
“그러려고 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바뀌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그러면 그렇지, 싶은 기색과 혹여 조심해야 할 사안이 또 생겼나, 싶은 기색이 뒤섞인 신중한 자세로 현상원이 묻자 현태오는 눈 하나 까딱 않고 아버지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놈 없으면 제가 돌아 버릴 것 같아서요.”
농담인가 진담인가, 현상원은 이번에야말로 말을 잃고는 한동안 멀거니 아들을 쳐다보다가 버럭 외치고 말았다.
“아니 이놈아, 앞날은 알 수 없는 법인데 뭘 굳이 결혼까지 하겠다고 그래?!”
“앞날을 알 수 없으니까 하는 겁니다.”
“뭐?”
“상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제도적인 장치 하나쯤은 있어야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보는 현상원 옆에서, 복잡스런 낯으로 물끄러미 아들을 보고 있던 주선미 여사가 끼어들어 물었다.
“너, 현진이는 동의한 거니?”
이번엔 현태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모친을 쳐다보았다.
“그럼 설마 본인한테 청혼도 안 한 상태에서 기사부터 났겠습니까?”
“기사 난 건 괜찮대?”
현태오가 멈칫했다. 잠시 미묘한 사이를 둔 뒤 무뚝뚝하게 말한다.
“안 괜찮을 이유는 뭡니까.”
이번에는 현태오의 미간에 진 주름을 유심히 보던 현태주가 물었다.
“혹시 현진이가, 결혼은 천천히 시간 두고 생각해 보자고 하던?”
현태오가 다시 멈칫했다. 묵묵히 제 형을 노려보는 현태오를 보며 현태양이 제 형에게 귓속말을―그래 봤자 다 들렸지만―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현진이는 신중한 애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기사가 먼저 터져 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에고……, 빼도 박도 못하게 발목 잡혔네.”
혀를 끌끌 차며 대화를 나누는 제 형들을 바라보며 현태오의 미간에는 주름이 더 늘어났다.
“어차피 하게 될 일인데 미뤄서 뭐 합니까. 우선은 법적으로 관계 정리만 해 둘 겁니다. 식은 평항에서 임기 마치고 수도로 돌아온 뒤에 올릴 테니 그때까지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현태오는 선고를 내리듯 단호하게 선언한 뒤 가족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그리고 예전부터 자꾸 억측들을 하시는데, 유현진 씨가 저 좋답니다.”
“뭐?”
“유현진 씨가 예전부터 계속 저를 좋아해 왔답니다. 그러니까 자꾸 제가 유현진 씨한테 뭘 억지로 강요하는 사람인 양 말씀하지 마십시오.”
현태오가 못 박아 말하자 실내에는 잠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 그럼 설마하니 오래전부터 좋아했다는 상대가 저놈이었단 말인가, 멀쩡해 보이더니 취향이 진짜 특이했구나, 형제들이 눈짓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도 그나마 어머니만이 모정이 있는지, “현진이가 어릴 때부터 속 깊고 정 많은 아이였어. 참 마음 넓고 자애로운 성품이지 뭐니.”라고 대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현진을 칭찬하는 건지 아들을 까는 건지 경계가 미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직껏 홀로 낯을 찌푸리고 있던 현상원이 다시금 무어라 한 소리 할 듯 현태오를 보며 입을 열었지만, 주선미 여사가 가만히 남편의 손을 붙들어 말렸다. 눈을 홉뜨며 쳐다보는 남편에게 살래살래 고개를 젓자, 부인에게만은 약한 현상원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허허, 하고 헛웃음을 뱉더니 어깨를 늘어뜨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모르는 이는 없었다.
현태오가 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위인도 아니었고, 저 하고 싶은 짓은 무슨 수를 써서든 해내고야 말 인물이었다. 지금도 보아하니 본인이 일을 성사시키려고 수를 쓴 눈치인데, 누가 말린다고 들을 리도 없다.
또한 한편으로는 딱히 말릴 이유도 없었다. 왕실과 파혼을 했을 때부터 이미 세간에는 유현진이 그의 파트너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평판 걱정을 할 일도 없었고, 또 설령 누가 험한 말을 한들 현태오가 그 소리에 신경이나 쓸 성질머리도 아니었다.
결국 현상원도 그 이상은 뭐라 하지 않고 혀를 끌끌 차며 입 다물고 말았고, 주선미도 마찬가지, ‘너 현진이 괴롭히면 안 된다.’라고 따끔한 말만 덧붙였을 뿐이다. 물론 다른 두 형제도 가타부타 말없이 현태오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존중 안 하려야 안 할 방도도 없었다.
*
이사 떡 돌리러 왔다며 팥시루떡 한 상자를 끌어안고 현가 대문을 두들긴 유세진은, 원수를 씹는 듯한 기세로 제가 들고 온 팥시루떡을 우걱우걱 씹어 먹고 있었다.
현가의 안뜰에는 이미 봄 냄새가 물씬 풍겨 곳곳에 꽃이 피고 새가 우짖고 있었는데, 안뜰 테이블에 앉은 유세진의 주위에만 어둑한 칼바람이 부는 듯했다. 그 칼바람이 이는 곳에 더불어 앉은 현가의 두 형제―현태양과 현태주―는 아까부터 진문성을 삭막하게 노려보는 유세진을 살피며 공연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현진이를 위해 한마디쯤은 반대를 해 볼까 했거든……. 그런데 현진이가 좋다 그랬다니, 그럼 어쩔 도리가 있나. 본인의 의견을 존중해 줘야지.”
현태주가 헛기침을 하더니 점잖게 말했다.
“존중이고 뭐고, 우리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놈도 아니잖아요. 현진이가 하지 말자 그래도 강행할 것 같은 판국에.”
실제로 현진이가 미루려는 낌새니까 그냥 터뜨려 버린 것 같은데? 하고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툴툴거리는 현태양이었으나, 그 순간 유세진의 이마에 핏대가 서자 얼른 “어어어어……, 아냐, 그냥 우리끼리 농담하는 거야, 농담.” 하고 손을 내저었다. 사납게 도끼눈을 뜨고 험상궂은 낯을 한 채 떡을 먹어 치우는 유세진이 손에 들고 있는 포크가 유난히 위험스러워 보였다.
얼마 있지 않아 유현진은 현태오와 더불어 평항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유현진이 떠난 뒤에 비게 될 집에 유세진이 들어오게 되었다.
당연히 임시로 빌린 집인 줄 알았던 그 집은 알고 보니 유현진의 명의로 된 유현진 소유였고, 팔든 말든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현태오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던 유현진에게 제상아가 그 집을 유세진에게 빌려주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어차피 유현진이 현태오에게 도로 그 집을 떠넘기려 한들 현태오 성격에 돌려받을 리도 없었고(실제로 그렇게 말했더니 현태오는 무관심하게 쳐다보면서 ‘그럼 팔아서 유현진 씨 쓰고 싶은 데 쓰십시오.’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유세진은 얼마 전 멋대로 제집을 내놓는 바람에 거주지가 붕 뜬 상태였다. 그러니 그들이 평항에 가서 머무를 몇 년만 유세진이 그곳에 머물면 되지 않겠냐는 제상아의 말은 제법 그럴싸하게 들렸다.
현태오는 어차피 유현진 씨 집이니 마음대로 하라는 반응이었고, 유세진은 떨떠름한 반응이었으나 결국은 동의했다.
그렇게, 짐을 싸서 유현진네 집으로 이사 들어온 유세진이었으나.
현재 그 집에 정작 유현진은 없었다.
유현진은 바로 이곳, 현가의 별채에 들어와 있었다.
신문에 그들의 혼인 소식이 실린 직후, 당연한 일이지만, 유현진의 집 앞은 기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문 앞에서 북새통을 이루며 난리 법석을 떠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유현진까지 반강제 연금 상태가 되었는데, 그 상황을 본 현태오가 ‘그 집은 보안이 충분하게 완비되어 있지는 않으니 평항으로 가기 전까지는 현가에 들어와서 지내도록 하라’고 종용했다.
그래서 며칠 고민하던 유현진은 야삼경 남 다 잘 때―기자들이 그나마 좀 적을 때― 후다닥 필요한 짐만 싸서 탈출해 현가로 들어갔고, 결국 그 집에는 유세진만 남겨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세진은, 유현진이 현가에 들어가 지내려 한다는 말에 좀 꺼림칙해하긴 했지만 그 집 안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형이 안쓰럽기도 했고, 또 자신이 출퇴근할 때마다 자신을 자욱하게 둘러싸는 기자들이 지긋지긋하기도 해 그 제안에 동의했다.
그래서 유현진은 현가 별채에서, 유세진은 유현진이 살던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유세진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유현진이 제 짐을 옮겨간 뒤 유세진도 제 짐을 정리하는데, 그 정리를 유현진이 도와주었다.
찬장 어디에 뭐가 있는지, 수납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가전기기는 어떻게 조작하는지―이 집에는 현태오가 채워 넣은 신기한 최신식 기기들이 수두룩했다― 등등을 알려 주면서 유세진의 짐 정리를 돕는데, 이날도 제상아가 잠깐 시간이 났다며 찾아와 거실에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제상아에게 차를 끓여다 갖다주던 유세진이 발밑을 지나가던 나비를 미처 보지 못하고 걸려서 휘청했는데, 그 바람에 손등에 뜨거운 차를 조금 쏟고 말았다.
‘앗 뜨거!’
유세진은 반사적으로 외치곤 후다닥 제상아 앞에 차 쟁반을 내려놓은 뒤 주방으로 가 찬물에 손을 담갔는데, 그런 동생을 보고 놀라서 얼른 옆으로 달려가 상처를 살핀 유현진은 방에서 구급상자를 꺼내어 왔다.
‘많이 데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이 정도면 약만 발라도 되겠어.’
유현진이 혀를 차며 연고를 유세진의 손등에 손수 발라 주었다. 얌전히 손등을 맡기고 있던 유세진은 순간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뭐지, 뭔가 미묘한 위화감이 드는데……, 하고 생각하며 홀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 유심히 그들을 보고 있던 제상아가 불쑥 물었다.
‘현진이 너, 신력은?’
아, 맞다!
유세진은 그제야 머릿속에서 맴돌던 위화감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고는 개운해졌다.
평소 유현진은 근처의 누군가가 다치면 습관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 상처를 본인에게로 옮겨 가곤 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신력을 쓸 때는 신전의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가까운 사람이 가볍게 다치면 거의 늘 자신이 그 상처를 받아 갔다.
그래서 이렇게 가끔 유세진이 본인의 눈앞에서 다치기라도 하면 으레 손을 내미는 유현진이었으나―그리고 그럴 때마다 유세진은 눈을 부라리며 형의 손을 뿌리쳤으나―, 지금 유현진은 손 대신 약을 내밀고 있었다.
‘맞다, 맞아. 그래,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
가물가물 맴돌던 의아함의 정체를 깨달은 유세진은 손뼉을 치며 개운하게 외치다가, 도중에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 유현진이 신력을 안 쓸 리 없는데.
신력을 안 쓴다.
그 말인즉슨.
‘…….’
제상아는 반듯하게 앉은 채 지그시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현진은 연고를 바르던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어붙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고서 눈만 깜박이는 유현진의 얼굴이 천천히, 천천히 붉어졌다.
‘형……님……?’
유세진이 간신히 입을 뗐을 때, 유현진은 이미 사과 빛깔이 되어 있었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로 시선을 피하며 연고를 도로 약통에 넣는다.
‘형님, 신력은요……? 왜 저 안 고쳐 주세요……?’
‘……. 내가 신력으로 고치면 너 싫어하잖아.’
‘아뇨? 안 싫어할 건데요? 얼른 고쳐 주세요!’
유세진은 더럭 눈을 부릅뜨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유현진은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고 있다가, ‘형님?!’ 하고 유세진이 한 번 더 다그친 다음에야 겨우 실토했다.
‘이제 못 써……. 신성가호 깨져서…….’
시선을 발아래로 떨군 채 들릴락 말락 중얼거리는 그 말에, 유세진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상아는 ‘아, 그래. 결국은 했구나.’ 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일도 아니라는 양 차를 마셨지만, 유세진은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유현진을 한참이나 망연히 쳐다보았다.
‘어…… 언제…….’
‘병원에서 퇴원하고서 저녁에 잠깐 현가에 들렀다가…….’
어물어물 실토하는 유현진의 말을 듣고서 유세진은 더더욱 넋이 나갔다.
그렇다면 바로 며칠 전 아닌가.
그날의 일이 유세진의 기억 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날 저녁, 유현진의 짐 정리를 돕고 돌아갔던 유세진은 저녁 느지막이 유현진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런데 아직 잘 시각은 아닌데 도통 연락을 받지 않아, 퇴원한 당일이다 보니 혹시나 갑자기 몸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지기라도 했나 염려가 되어서 집으로 찾아갔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어서 의아해하다가 혹시나 하고 진문성에게 전화를 했더랬다.
「문성 형, 우리 형님 혹시 거기 있어요? 오늘 막 퇴원한 사람이 집에 없길래 혹시나 해서요.」
어디 길에서 쓰러져 있는 건 아니겠지, 라고 걱정하는 유세진에게 선선한 대답이 돌아왔었다.
「아, 그래, 세진아. 유현진 씨 여기 와 있어.」
「그랬구나. 다행이다. 아니 그 양반은 퇴원했으면 집에서 얌전히 쉬지 거기는 굳이 왜 가선……. 왜 또 전화는 안 받는대요? 우리 형님 좀 바꿔 주실 수 있어요?」
유세진이 토달토달거리며 말하자 진문성이 멈칫하는 듯했다. 고작해야 1, 2초 남짓이었지만 미묘하게 사이가 떴다.
「유현진 씨는 지금 별채에 있어서 여기에 없는데.」
그러나 유세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진문성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고, 유세진은 형님이 갑자기 옛집에서 추억이라도 곱씹고 있나 생각했다.
「급한 볼일이 있으면 전해 줄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무슨 일은 없고……, 별일 없으면 됐어요. 늘 집에 있는 사람이 전화도 안 받으니까, 혹시 어디서 쓰러져 있지나 않나 해서요. 우리 형님 괜찮은 거 맞죠?」
「그럼, 괜찮지.」
「그럼 됐어요.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문성 형님도 편히 쉬세요!」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오래 붙들고 있어서야 안 되지, 하고 착하게 마음 쓴 유세진은 발랄하게 인사하면서 전화를 끊었었다. 그런 뒤 마음 편하게 소파에 엎드려 드라마 채널이나 돌렸었는데, 이제 보니 바로 그때……!
유세진은 그 자리에서 털썩 고꾸라지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러냐고, 괜찮냐고 묻는 형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쟤도 저 브라더 콤플렉스는 좀 어떻게 해야 해.’라고 혀를 차곤 돌아가 버리는 제상아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세진은 끝내 형을 지켜 내지 못했다는 절망감과 함께, 뼈저린 배신감을 느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우리 형 좀 구해 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유세진은 기억과 함께 새삼스럽게 치밀어오른 배신감에 치를 떨며 진문성을 노려보았다. 팥시루떡이 꿰인 포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평소와 비슷한 얼굴에 아주 약간 난감한 웃음을 띤 채 유세진의 화살 같은 눈길을 견디고 있던 진문성이 조금 더 난감한 빛을 띠며 웃었다.
“미안하게 됐어, 세진아. 하지만 나는 상관을 거스를 수 없는 입장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는 걸 이해해 주면 좋겠다.”
“한마디만……! 한마디만 해 줬더라면 좋았잖아요! 저녁부터 둘이 별채에 틀어박히더니 나올 생각을 안 한다고! 그럼 내가 당장 달려와서 우리 형을 그 마수에서 구해 냈을 텐데!”
그렇게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사실 유세진 역시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귀띔을 듣고 달려왔던들 깽판을 칠 수 있었을 리 없다. 현태오가 한창 거사를 치르는 중에 남의 방해를 받을 인물이 아니었다. 어디 멀찍한 나무 기둥에 묶여서 밤새 꽥꽥 소리나 지르다 나가떨어졌겠지. 그러니 진문성이 유세진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은 것은 실상 유세진을 위한 일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애통함과 분통함으로 팔시루떡만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유세진에게 보리차를 건네주며 현가 형제들이 달래듯이 말했다.
“자, 자, 세진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해 보자. 어차피 둘이 서로 마음은 통했고, 마음 통한 성인들끼리 나쁜 짓 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현진이는 이제 신관도 아니고, 또 둘이 결혼할 사이이기도 하고.”
“아직은 안 했잖아요, 결혼?! 아직 결혼도 안 한 미혼 남남이 무슨 짓이에요?! 풍기 문란하게!”
유세진은 테이블을 두들기며 눈을 부라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유세진은 유현진이 현가 별채에 머무르는 걸 기를 쓰고 반대했지만, 이미 짐은 옮긴 뒤였고 또 유세진이 출근한 사이 현태오가 찾아와 유현진을 홀랑 데려가 버린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씨근거리며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던 유세진은, 그러나 차가운 보리차를 삼키곤 마음을 진정시켰다. 원래는 마음을 다잡았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다시 애통해져 흥분하고 말았다.
“됐어요. 전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어요. 어찌 되었든 제가 바라는 건 우리 형의 행복이니까 지금 당장 행복하다면 놔둬야죠.”
제법 어른스럽게 말한 유세진은 시루떡을 우물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제가 할 수 있는 한의 노력을 해야겠어요. 저는 일단 출세할 거예요! 무럭무럭 출세하고야 말아서, 나중에 형이 헤어지고 돌아오면 남부럽잖게 떵떵거리며 보란 듯이 잘살게 해 줘야지! 원래 누구나 암흑의 시기를 거쳐 빛의 날들을 맞이하는 법, 그때부터가 형의 참된 행복은 시작되는 거예요.”
“어……, 태오랑 현진이가 헤어진다는 미래는 기정사실인 거야?”
“그럼 설마하니 저 현태오 총독님이 뭐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오래오래 행복하게 우리 형이랑만 살겠어요?”
무슨 탈이 생겨서 우리 형이랑 헤어지더라도 형에게 해코지하거나 마수를 뻗칠 수 없도록 내가 저 높은 자리까지 출세해야지, 하고 다짐하는 유세진이었다.
그런 유세진을 바라보며 현가의 두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문성도 마찬가지였다.
어딘지 모르게 곤란하다는 얼굴로 유세진을 보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현태주였다.
“세진아. 태오는…… 기본적으로 변덕이 없는 녀석이야. 뭘 특별히 맘에 들어 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그 대신 일단 한번 마음에 들면 내려놓는 법이 없거든.”
성의껏 조언해 주는 현태주의 옆에서는 현태양이 ‘현진이는 글렀어. 끝난 거야.’ 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유세진이 눈을 부릅뜨며 포크를 움켜쥐자, “아냐, 그래, 앞일은 또 모르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출세하는 건 좋은 일이지.” 하고 한발 물러서는 현태주였다.
유세진은 시무룩한 얼굴로 묵묵히 떡만 우물거렸다. 그 옆에서 선량한 형제들이 보리차를 따라 주거나 입가의 떡고물을 털어 주던 때, 본인 몫의 선량함까지 형제들한테 몰아 준 게 아닐까 유세진이 속으로 의심하고 있던 바로 그 남자가 본채 문을 열고 나왔다.
형제들이 같이 떡 먹자고 제안했으나―늘 거절당하면서도 늘 제안하는, 참으로 우애 깊은 형제들이었다― 2층 서재에서 책이나 읽겠다며 거절했던 현태오가 느른하게 걸어 나오더니 정원에 앉아 있던 무리 쪽으로 다가왔다.
“책 읽겠다며?”
현태양의 물음에 현태오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빈 의자에 앉았다.
“유현진 씨가 곧 올 거라고 해서요.”
평항으로 떠나기 전, 유현진을 좋게 보았던 대신관이 축복의 기도를 해 주겠다며 유현진을 따로 불렀다. 마지막 인사와 같은 의미라 두말없이 신전으로 향했던 유현진이 이제 돌아오겠노라며 현태오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중이라도 나왔다는 거냐? 네가……? 몹시 미심쩍은 눈초리로 현태양이 쳐다보건 말건, 현태오는 휴대 전화의 문자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내려놓았다. 그러다 포크를 움켜쥔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유세진을 흘끗 쳐다보았다.
“유세진 사무관님 아니십니까. 짐 정리는 다 마치셨습니까?”
“……눼.”
입에 떡을 가득 물고서 웅얼거리는 유세진이었다. 언제 들어도 사무적이고 냉랭한 목소리다.
“제 서재에서는 정원에서 나는 소리가 생각보다 잘 들립니다.”
무심히 툭 던지듯 말하는 현태오를, 유세진은 의아한 눈초리로 흘끔 쳐다보았다. 그런 유세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현태오는 저만치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며 말했다.
“제가 요즘 유현진 씨와 더불어 다소 풍기 문란하게 지내다 보니 유 사무관님이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쿨럭, 떡이 목에 걸려 마른기침을 하는 유세진에게 그제야 현태오가 서늘한 눈매를 돌렸다.
“제가 여태 한 번도 문란하게 살았던 적이 없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이렇게 누군가와 문란할 마음이 든 게 처음이다 보니 자제를 못 하고 있긴 한데, 평생 책임질 각오로 유현진 씨에게만 문란한 것이니 모쪼록 유 사무관님께서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옆에서 현태양이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유세진에게 보리차를 건네주었다. 유세진이 쿨룩거리며 보리차를 삼키는 동안에도 현태오의 느릿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유 사무관님께서 장차 크게 출세하실 거라고 하니 이제 한 가족이 될 저로서는 진심으로 응원해 드리겠는데, 출세한 뒤의 바람은 들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유현진 씨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오래오래 잘살 예정이라……. 유 사무관님께서 아쉬우시겠지만 이 또한 모쪼록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지요.”
보리차 한 컵을 다 비운 다음에야 유세진의 기침이 겨우 잦아들었고, 현태오는 잠시 유세진을 내려다보다가 한결 은근한―왠지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음색으로 덧붙였다.
“저도 유 사무관님께 아주 너그럽게 대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중입니다. 서로 너그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도 어쨌든 계속 봐야 할 사이인데.”
협박이다. 경고로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남자들이 눈짓을 교환하며 말 없는 말을 나누었다. 그러나 몸소 나서서 유세진을 비호해 줄 만큼 용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억울하고 분해진 유세진은 무서운 와중에도 눈에 대뜸 쌍심지를 켜――려고 했으나, 현태오의 그 무표정한 눈길과 마주치자마자 눈에서 힘이 풀리고 말았다.
무섭다. 역시 무섭다.
제 형제한테도 인정머리 없는 인간인데, 제 처남한테라고 후하게 대해 줄 리 없지……, 여차하면 한천 형무소에 빈자리 찾아 보내고도 남을걸……, 하고 생각하다가 ‘처남은 무슨 처남!!!’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쥐어뜯는 유세진이었다.
그러든 말든 제 할 말을 다 마친 현태오는 그걸로 유세진에게 관심을 뚝 끊어 버리곤 눈을 감았다. 아까부터 나른해 보인다 싶더니 잠깐 눈이라도 붙이려는 모양이었다.
졸지에 협박과 겁박과 구박을 들어 버린 심정으로 유세진이 울멍울멍하자 뒤늦게 현태양이 혀를 차며 “너는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잘 있는 애를 괴롭히고 그래?” 하고 편을 들어 주었으나, 현태오는 들리지도 않는 듯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유세진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와중에도 야무지게 떡을 씹으며 현태오를 곁눈질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랬다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게끔 구석구석 뜯어본다. 그러다 문득 어라, 하고 고개를 기웃했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가, 왠지 유세진이 기억하던 것보다 현태오가 덜 날카로워 보였다. 여전히 무섭고 겁나는 남자이긴 한데, 이렇게 차근차근 살펴보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시퍼렇게 날이 선 인상보다는 좀 누그러져 보인다.
“……?”
그런데 그게 유세진만의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서 현태오를 쳐다보던 현태양이 고개를 기우뚱하더니 “이놈이 살이 좀 쪘나……? 어째 좀 느슨해 보이네.” 하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유세진이 기억하는 한 현태오는 늘 쇠와 피로 이루어진 것처럼 무서운 사람이었다. 오래전 이 저택에서 함께 살았었던 시절부터 그랬다. 특히나 유현진을 볼 때면 꼭 금세라도 잡아먹어 버릴 것처럼 유난히 눈초리가 무서워져, 유세진은 이 남자가 더 껄끄럽고 두려웠다.
그랬던 남자가 지금은 마치 발톱을 가지런히 깎은 호랑이처럼, 어딘지 모르게 아주 약간 누긋한 느낌이 들었다. 날카롭던 모서리를 살짝 덮어 놓은 것 같다.
“……, ……?”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욱 빼서 현태오를 뜯어보던 유세진은, 현태오가 약간 몸을 뒤척이기 무섭게 움찔하며 목을 움츠렸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역시, 그래도 무섭다.
유세진은 유현진이 오래전부터 현태오를 좋아해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현진이 현태오와 마음을 나누고 구치소에서 돌아온 날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그리고 최근의 나날들을 얼마나 기분 좋게 보내고 있는지도 잘 알았다.
유세진에게 있어 유현진은 형이자 아버지이자 어머니였고, 그가 누구보다도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것이 현재 유세진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이 참 다행스럽고 잘됐다는 생각이 마음속 한구석에서 은근히 들고 있긴 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유세진의 낯이 울적하게 흐려지던 그때, 현태오가 눈을 떴다.
앗, 호랑이가 눈을 떴다――라고 생각하던 때,
잠시 동안 저편 하늘을 쳐다보는가 싶던 현태오의 시선이 아주 약간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무심결에 그 시선 끝을 쫓아가 보려 했던 유세진은, 그러나, 일순 현태오에게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늘 삭막하고 얼음 같던 현태오의 눈매가 별안간 휘었다. 눈부신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가느스름해진 눈매에 얼핏 웃음 같은 것이 어렸다. 삽시에 얼음이 녹고 거기엔 훈훈한 온기만 남았다.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유세진이 알고 있는 평항 총독 현태오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현태오라는 남자였다.
한순간 넋을 놓고 현태오를 보던 유세진은 얼결에 고개를 돌렸다. 현태오가 보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가자, 정원 저편에서 한 사람이 돌계단을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유현진이 두 손에 종이 가방 같은 걸 들고서 걸어오고 있었다. 신전에 인사를 갔다가 선물이라도 받았나 보다.
이쪽을 향해―별채 쪽을 향해― 걸어오던 유현진은 이곳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는 멈칫하는 듯했다. 왜 다들 저기에 나와서 몰려 앉아 있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면면을 의아하게 둘러보던 유현진이 현가 형제와 진문성, 유세진에 이어 현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때 유현진이 웃었다.
아마도 무심결이었을 것이다. 현태오를 본 순간 얼굴 전체에 서그러운 웃음이 맺히는 유현진을, 유세진은 멀거니 바라보았다.
저건 형이 정말로 편안하고 기분 좋을 때의 얼굴이다.
아주 가끔씩이나 볼 수 있는――자신조차 흔히 볼 수 없는 얼굴이, 저토록 자연스럽게 배어나고 있었다.
유세진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툭 내려앉고 말았다. 서운함, 혹은 안도감, 어느 쪽이 더 맞는지 모르겠다.
흘끔 옆을 돌아보자 현태오도 유현진을 보고 있었다. 별달리 환히 웃거나 하지는 않는데도, 느슨하게 굽어진 눈매로 유현진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왠지 몹시 설레고 흔흔해 보였다. 꼭 발톱을 깎은, 아니 발톱도 이빨도 싹 감춰 버린 유순한 새끼 호랑이처럼.
갑자기 새끼 호랑이의 선선하던 낯이 멈칫 굳었다.
돌아보니 이리로 걸어오던 유현진이 제 구두끈을 밟고는 잔디밭에 넘어져 있었다.
현태오는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고작해야 폭신한 잔디밭에 무릎 좀 부딪혔을 뿐인데도 낯을 찌푸리며 다가간 현태오가 혀를 찼다.
“괜찮습니까?”
짐을 빼앗아 들고서 유현진을 일으켜 세운 현태오는 그의 무릎과 손바닥에 묻은 흙을 손수 털어 준다. 그리고 유현진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맡긴 채 그가 다 털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그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이미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일이라는 듯이― 서 있던 유현진은 뒤늦게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눈길들을 느끼고는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현태오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그 손을 꼭 붙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
“…….”
포크를 주먹에 움켜쥐고 시루떡을 씹던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제 형을 쳐다보는 유세진도, 이미 몇 차례 본 적 있긴 하지만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흰 눈을 뜨고 있는 현가 형제들도, 유일하게 홀로 웃는 듯 마는 듯 평정을 유지하는 진문성도,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주 형님, 태양 형님, 어쩐 일로……, 세진이 넌 웬일이야.”
유현진이 겸연쩍은 빛을 감추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이사 떡 돌리러.”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 온 김에 들렀지. 현진이 너도 잘 지내고 있지?”
도끼눈을 한 유세진이 불퉁하게 대꾸하는 통에 분위기가 한층 더 썰렁해질 뻔했지만, 다행히 현태주가 차분하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넨 덕에 그 기묘하게 긴장되어 있던 공기가 좀 흩어졌다. 와……, 진짜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하고 현태양이 고개를 내저었지만 다들 못 들은 척했다.
진문성이 어느새 눈치 빠르게 본채로 연락했는지 곧 사용인이 새로 끓인 따끈한 차를 갖고 나왔고, 유현진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으나 현태주의 권유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앉았다.
불온한 평화로움이 감도는 오후의 티타임이다.
불만 가득한 기색으로 떡을 씹던 유세진은 문득 희한하다는 눈길로 자리를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이 면면들이 한자리에 앉아 차를 마실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런데 이 상상도 못 한 자리는 뜻밖에도 (유세진의 부루퉁함을 제외한다면) 그리 어색하거나 불편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현태오와 유현진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별 대화도 없이 그저 그렇게 앉아 있을 뿐인데도 그게 몹시 편안해 보이는 게 이상하다. 둘 다 유세진이 모르는 다른 사람 같은데, 한편으로는 둘 다 저것이야말로 그들 본연의 모습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물끄러미 그들을 노려보던 유세진은 왠지 모르게 맥이 풀렸다.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놓이는 것 같기도 한 그 기분이 다시금 마음을 덮는다.
손에서도 힘이 빠지고 배도 불러 포크를 내려놓았을 때, 현태주가 유현진에게 말을 건넸다.
“소식 들었는데, 평항으로 가서 혼인 신고 할 거라며. 축하한다.”
축하할 일은 맞지? 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기 무섭게 유현진의 낯이 뻣뻣해졌다. 이미 오늘 신전에 나갔다가 수백 번쯤은 그 말을 들었을 텐데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지 낯이 금세 울긋불긋하게 달아올랐다.
“아, 예……. ……지금처럼 여러모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그런다는 게 현태오 씨 입장에서는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얘기하던 중인데……, 그게 어떻게 말이 흘러 나갔나 봐요. 갑자기 기사가 나서 저도 놀랐는데, 어떻게든 미뤄 볼 수 있으면 미뤄 보려고…….”
“그 얘긴 끝나지 않았습니까. 이미 소식이 다 퍼진 마당에, 미루면 공연히 구설만 더 많아질 겁니다. 그냥 평항에 가자마자 처리해 버리는 게 나아요.”
난감하다는 투로 이야기하던 유현진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현태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곤란한 눈치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납득한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진을 보며, 눈치가 좀 빠른 남자들―아마도 이 자리에서는 유현진을 제외한 모두―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현태오 저놈이 일부러 말을 흘린 게 틀림없어 뵌다고.
“으음, 어차피 할 거면 얼른 하는 것도 괜찮지……. 그래, 평항 갈 준비는 잘하고 있어? 다음 주말에 가는 거지? 얼마 안 남았네.”
“별로 준비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이미 있을 것 다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감도는 미심스러운 공기를 씻어 내려는 듯 현태주가 슬쩍 화제를 돌리자 현태오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유현진은 제 짐을 바지런히 싸 갈 테지만, 애초에 그는 짐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태오야 그렇다 쳐도, 현진이는 평항에 가면 한동안 힘들겠네. 그 지역도 낯설고, 아는 사람도 없잖아.”
“아닙니다. 전에 갔을 때 보니 좋은 곳 같았어요. 그리고 현태오 씨도 계시고, 진문성 씨도 계시고…….”
“태오가 있으니까 더 힘들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냐?”
사뭇 진지하게 묻던 현태양은 현태오가 칼날 같은 시선을 던지자 모른 척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유현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현태오 씨가 정말로 잘해 주시는걸요.”
“괜찮아. 현진아. 우리끼리 있는데 뭘, 그렇게 억지로 두둔할 필요 없어. 애 빈말하느라 표정까지 굳은 것 봐라.”
현태양이 안쓰러운 듯 혀를 차자 유현진은 당혹스러워했지만, 현태양의 말마따나 표정이 희박하고 서늘해서 딱딱해 보이는 그 얼굴엔 당황한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저 무표정한 얼굴 아래 멋쩍음과 당혹감이 덮여 있다는 건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유세진 정도나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또,
피식, 하고 옆에서 웃는 남자 하나와.
“그런데 현진이, 여전히 태오한테는 경칭 쓰냐?”
어떻게 이놈들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을까, 여전히 미심쩍고 신기하다는 눈치로 바라보던 현태양이 불쑥 물었다.
하긴 웬만큼 가까워져도 태오 같은 녀석한테는 호칭이 편해지긴 힘들지, 하고 덧붙이며 차를 마시는 현태양에게 그나마 더 사려 깊고 차분한 현태주가 “부르는 거야 아무려면 어때. 사이만 좋으면 됐지.” 하고 유현진을 두둔해 줬지만, 현태양은 손가락을 저었다.
“그래도, 혼인까지 할 거라는데 외려 우리를 부르는 게 더 살가우면 좀 그렇잖아요. 태오한테도 좀 편하게 부를 만한데.”
그리고 어쩌면 태오가 괜히 기강 잡으려고 함부로 못 부르게 하는 걸 수도 있고, 하고 현태주에게 조그맣게 귓속말을 한―그래 봤자 다 들렸지만― 현태양은, 혹시라도 유현진이 기죽거나 억눌려 지낼까 봐 못내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그냥 태오 형――하고 편하게 불러봐, 태오 형――하고.”
“예? 아니요, 괜찮,”
“아니야. 호칭이 의외로 중요하다니까. 호칭이 딱딱하면 상하관계로 지내 버리기도 쉽다고.”
“아니, 하지만 현태오 씨도 저를 유현진 씨라고 부르,”
“자, 태오 형――해 봐, 현진아. 응?”
하나에 꽂히면 일시적으로 막무가내가 되는 경향이 있는 현태양이 재차 권했다. 나름대로 유현진을 거들어 주려는 의도인 듯한 그를 당혹스럽게 쳐다보던 유현진이 흘끔 현태오의 눈치를 보았지만, 현태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눈을 깜박이며 뚫어져라 현태양을 쳐다보던 유현진이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차차 굳었다.
“어……, 아니, 그냥 한 말인데, ……화났어?”
불퉁하게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는 유현진을 보고 현태양이 당황한 듯이 말했지만, 저건 화난 게 아니라 몹시 겸연쩍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다. 유세진이 콧잔등에 주름을 짓는 옆에서 현태오는 느른하게 눈매를 휘며 보고만 있었다.
“현진아, 난 너 곤란하게 만들려던 게 아니라 그냥,”
“……, ……태…….”
현태양이 진땀을 흘리며 막 변명하려던 때, 삭막한 눈길로 앞만 보고 있던 유현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태…… 오…… ㅎ……ㅕ…… .”
하기 싫으면 그냥 적당히 눙치고 넘어가면 될 텐데 그런 요령이라곤 도통 없다. 울긋불긋해진 얼굴로 연신 눈을 깜박이는 유현진을 보다 못해 유세진이 말리려고 막 입을 열었을 때,
“됐습니다.”
줄곧 유현진을 지켜보고 있던 현태오가 말했다.
“부를 때 되면 부르니까 굳이 여기서 억지로 부를 필요 없습니다.”
함부로 부르면 내가 좀 곤란해지기도 하고, 라고 중얼거리는 현태오를 유현진이 흘끗 쳐다보았다. 왜 이제야 말리냐는 듯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곤혹스러운 얼굴도, 물기가 어른거리는 눈가도 붉다.
문득 현태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느스름한 눈매로 물끄러미 유현진을 쳐다보던 현태오가 혀를 찼다.
“이것 보라니까……, 그새 곤란해질 것 같아졌잖아…….”
느릿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위험스러운 빛을 띠었다. 어떻게 할까, 뭔가를 고민하는 듯 제 턱을 쓰다듬는 현태오의 기색이 어렴풋이 날을 세운다. 숨기고 있던 발톱이 저도 모르게 슬며시 드러나는 것처럼.
불안스럽게 현태오를 보던 유현진이 더럭 낯을 굳혔다.
“안 곤란해지시면 좋겠는데요.”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됩니까.”
매우 단호하게 말하며 살짝 몸을 뒤로 물리는 유현진을 빤히 쳐다보면서 현태오가 대꾸했다.
어……, 왠지 모르겠는데 뭔가 신변의 위협이 좀 느껴지……, 하고 유세진이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유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잠깐 들어가서 짐 좀 내려놓고, 정리 좀 하고 오겠습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딱딱하게 인사한 유현진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돌아서 별채로 향했다. 몇 걸음 걷다가 도중에 돌아와서 종이 가방들을 끌어안고 도로 가 버리는 게, 어지간히 당황하기라도 했나 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하니 가 버리는 걸음걸이가 꼭 달아나는 듯했다.
현태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느리게 턱을 문지르는 손이, 그가 뭔가를 고민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어느새 새끼 호랑이 같던 기척은 흉흉하고 욕심 사나운 맹호처럼 바뀌어 있었다.
유현진이 금세 자취를 감추고 별채로 사라져 가는 동안 그 자리에는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 난데없는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듯 말 듯 한 현가 형제들과, 왠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파악하기 싫은 유세진과, 그저 담담히 침묵을 지키는 진문성, 그리고 그들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별채 쪽만 응시하는 현태오만 그곳에 남았다.
“……, 현진이가……, 어지간히 널 형이라고 부르기 싫은가 보다.”
현태양이 슬그머니 입을 열자 묵묵히 별채를 보던 현태오가 흘끗 눈동자만 돌려 현태양을 보았다.
“종종 그렇게 부릅니다.”
“뭐?”
“형님들한테 형이라고 부른 것보다 저한테 그렇게 부른 횟수가 훨씬 많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유치한 말투였다. 은근히 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 단어들이 도무지 저 현태오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께름하게 그를 곁눈질하는 유세진이었다.
“누구에게든 형이라고 부른 횟수를 다 합해도, 저를 더 많이 그렇게 불렀을걸요.”
현태오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하자 현태양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저렇게 부르기 거북해하는데?” 하고 의심스러워했지만, 이번에도 점잖고 평화를 사랑하는 현태주가 “태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현진이랑 태오가 보기보다는 훨씬 가까울 테니까.” 하고 얼른 분위기를 수습했다.
별채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현태오는 어느 순간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 좀 도와주고 오겠습니다.”
“어? 현진이? 짐 별로 안 많아 보이던데 굳이?”
“할 얘기도 좀 있어서요. 길어질 테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자리에서 물러나던 현태오는 잠깐 무심한 눈길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슬슬 날 저무는데 들어들 가십시오. 유세진 사무관님도 조심해서 돌아가시고요.”
도와주고 오겠다는 말과 달리 아예 작별 인사를 박아 버린 현태오는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서슴없이 걸어가는 그의 뒤로 남겨진 사람들은 이번에도 한동안 괴괴한 침묵 속에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저놈들 뭐냐……?”
현태양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으며 중얼거렸다. 씹을 게 필요한지 떡을 입에 욱여넣고 질겅거리는 그의 옆에서,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던 진문성이 빙그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권했다.
“각하 말씀대로 슬슬 바람이 쌀쌀해지는데 그만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저녁 드실 시간도 가까워졌고요.”
해는 서산 위에 떠 있었다. 날이 저물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테지만 4월 초의 날씨는 늦은 오후에는 아직 쌀쌀하다. 오후 나절에 나왔던 그들은 얇은 차림새였고, 이제 슬슬 들어갈 만도 했다.
그래, 그럼 이만 들어가자, 하고 현태주와 현태양이 일어나 본채로 걸어가는 가운데, 유세진은 그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별채를 보며 머뭇거렸다. 함께 가자는 듯 쳐다보는 진문성을 보곤 턱짓으로 별채를 가리켰다.
“우리 형도 그렇고 총독 각하도 저녁 드셔야죠? 그럼 좀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요.”
“언제까지 말씀 나누다 오실지 모르는데 굳이 여기서 기다릴 필요는 없지. 바람이 찬데 들어가자.”
“어, 하지만…….”
어째 뭔가 꺼림칙하단 말야, 뭔가 걸리는데……, 하고 불안스레 별채를 흘끔거리는 유세진을 바라보던 진문성이 차분히 물었다.
“급한 볼일이라도 있어? 그러면 말씀드려 보고.”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어물어물 대답하던 그때, 느닷없이 유세진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기시감이 있었다.
가만있자, 내가 최근에 이 비슷한 기분으로, 이 비슷한 대화를 어디서 나눴던 것 같은데.
껌벅껌벅 눈을 깜박이며 빤히 진문성을 쳐다보는 유세진의 앞에서, 진문성이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세진은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고 눈을 부릅떴다.
“――!”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저 사람 좋은 얼굴에 또 속을 뻔했다.
유세진은 별채를 향해 다급하게 돌아섰다. 약간 난감해하면서도 굳이 말리지는 않는 진문성을 뒤로하고 막 달려 나서려던 유세진은, 그러나, 한발 막 내딛다가 멈춰서고 말았다.
비어 있는 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둥글게 놓여 있는 의자들 가운데 딱 두 개가 유난히 가까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현태오와 유현진이 앉아 있던 자리다.
당연하다는 듯 바로 옆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고 특별한 것도 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
딱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가끔 곁눈으로 옆 사람을 흘끔 쳐다보고 피식 웃던 얼굴, 옆 사람의 목소리나 기척 따위를 듣기만 하면서도 선선히 즐거워하던 표정, 그 안정되고도 자연스럽던 태도.
그런 것들이 꼭 닮아 있었다.
둘 중 누가 그렇게 웃었는지, 누가 편안한 숨을 내쉬었는지, 누가 기분 좋게 의자에 기대어 앉았는지 금방 분간해서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닮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아니 대충 생각해 봐도― 닮은 데라곤 하나도 없는 두 사람인데, 생김새고 분위기고 목소리고 무엇 하나 비슷한 것이라곤 없는데 나란히 앉았던 그 모습이 몹시 닮아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려 피를 나눈 가족보다도 더.
왜 그럴까.
“…….”
우두커니 별채를 보고 있던 유세진은 천천히 어깨를 늘어뜨렸다. 금세라도 달려 나서려던 발걸음에서도 힘이 빠진다.
그들이 닮은 이유는 다름 아니다. 서로를 보는 시선도, 서로에게 건네는 말투도, 누가 더하고 덜할 것 없이 꼭 빼닮은 감정에서 비롯된 탓이다.
그것은 그들 서로 외에는 아무도 주고받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형이 누구보다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유세진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별안간 맥이 빠져 버린 유세진은 느릿느릿 돌아섰다. 그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진문성이 그 서글프고 시무룩한 얼굴을 보곤 “괜찮아?” 하고 물었다.
유세진은 불퉁하게 입을 내밀곤 고개를 젓다가, 잠시 뒤 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아요. 아마.”
“얼굴은 안 괜찮은데.”
진문성이 웃으며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말하자 유세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다 잘됐구나 싶어서요.”
서운함과 안도감, 가슴속에 묵직하게 번지는 게 그 둘 중 어느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쌉싸름한 한숨을 내쉰 유세진은 본채를 향해 타달타달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모두가 다 원하던 걸 이루었구나 싶어서……, 참 잘됐어요.”
<블레스 유 블레스 미(Bless you, Bless me)>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