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behind (2) (30/30)

5. behind (2)

“너무 맛있어요, 어머니.”

고정원의 한마디에 식탁이 들썩였다.

“어어, 그래-? 너무 다행이다. 손님 온다고 해서 고기 특별히 좋은 걸로 샀는데, 맛있다니 다행이네. 무침은, 너무 짜지 않고? 입맛에 맞아?”

“하나같이 맛있어요. 간도 딱이구요.”

조인휘는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식사 내내 대화가 한시도 끊이지 않았다. 고정원을 향한 엄마의 관심이 지대했다. 너무 속속들이 캐물으시는 것 같아 불편했는데, 정작 고정원은 그런 기색 없이 하나를 물으시면 열을 대답하는 수준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이따금씩 자신 쪽에서 식탁 밑으로 다리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만 말하라는, 혹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였으나 고정원은 능청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식사 후, 고정원은 뒷정리를 도우려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간신히 방으로 보낸 뒤 조인휘는 설거지하는 엄마의 옆으로 그릇을 날랐다.

“엄마. 설거지 내가 할게요.”

“됐어, 몇 개나 된다고.”

“그래도….”

어색하게 서 있자 옆구리가 쿡, 찔렸다.

“근데 쟤는 어쩜 애가 저렇게 귀족 같어?”

“…예?”

엄마는 고정원이 들어가 있는 방을 힐끔거리시며 말했다.

“말도 사근사근 이쁘게 해, 얼굴은 또 말할 것도 없어, 피부도 반질-반질한 게 광이 나더라 아주. 목소리도 차분하게 착, 깔린 게 듣기도 좋고. 허우대도 큼직큼직 운동선수처럼 가슴이랑 어깨가 떡 벌어져서는….”

고정원에게 푹 빠지신 듯했다. 식사할 때도 보는 자신이 민망할 정도로 눈을 떼지 못하셨다. 사람을 홀리는 외모에 행동까지 예쁘게 하니 어른들이 좋아하실 수밖에 없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너도 운동 좀 해라.”

갑자기 싸늘해진 시선이 몸을 훑었다.

“…왜, 나도 하는데 가끔.”

“너도 저렇게 근육 좀 만들어 봐. 남자가 키가 아쉬우면 몸이라도 좋아야지.”

이어지는 잔소리에 조인휘가 한숨을 내쉬었다. 생전 키 작다는 소리는 안 들었는데, 고정원과 비교하니 어느새 ‘아쉬운 키’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애인이 칭찬받으니까 기분은 좋았다.

“사위 삼고 싶어, 정말. 어떻게, 네 누나 슬쩍 소개시켜 봐. 응?”

하지만 좋은 기분도 이어지는 말에는 급격히 가라앉았다.

“…아까 얘기 들었잖아요. 쟤 만나는 사람 있다니까.”

‘네, 삼 년 넘게 만나고 있어요. 결혼할 생각이구요.’ 여자친구 유무를 묻는 엄마의 질문에 고정원이 한 대답이었다. 질문부터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옆에서 사레까지 들렸다.

“혹시라도 사람 일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

어지간히 탐나시는 모양이었다.

“근데 쟤는 무슨 친구 집 오면서 이렇게 거한 것들을 가져온다니. 여자친구네 집에 인사드리러 온 것도 아니고.”

마지막 말에 헛기침이 터졌다.

“정원이 쟤가 그 친구잖아. 너랑 자취 같이 했던 금수전가 뭔가, 맞지? 집세랑 다 부담해 줬다며 저 친구가. 네가 오히려 갚아야 하는 거 아냐? 뭘 도와줬길래 너한테 이렇게 잘해?”

“…그냥, 이것저것, 많이 도와줬어요.”

조인휘는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실제로 사귀는 사이고 인사드리러 온 게 맞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조금 씁쓸했다.

“어떻게 집안까지 부족한 게 없어. 성격 좋아, 키 커, 배우처럼 잘생겨… 쟤 여자친구는 절대 안 놓치려고 하기는 하겠다, 그지?”

아쉬워 죽겠다는 말투셨다. ‘저런 사위 보면 열 아들이 안 부럽지. 어느 집 사위 될지 벌써부터 배 아프네, 그냥.’ 시샘 어린 투정까지 하셨다. 그 정도로 좋으신가. 물끄러미 엄마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조인휘는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나랑 결혼하게 되면 우리 집 사위 되는 거 맞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혼자서 얼굴을 붉혔다.

“간만에 냉장고가 꽉 차네.”

설거지를 끝내고 냉장고와 냉동고를 차례로 열어본 엄마가 뿌듯하게 말씀하셨다. 온통 고정원이 사 온 것들이었다. 꽃바구니, 각종 과일세트 외에도 고기를 비롯해 백화점에서 산 갖가지 선물들로 집 안이 혼잡해질 정도였다. 조인휘는 이런 그림은 예상도 못 한 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과일을 사 오겠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가 트렁크에서부터 끝도 없이 나오는 선물의 행렬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아들 덕에 엄마가 호강하네?”

“무슨….”

쑥스러운 기분이 느껴져 고개를 숙였다. 능력 없는 아들 대신 고정원이 효도를 해준 것 같아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갈 때 반찬 많이 싸줄 테니까 가져가. 앞으로는 더 자주 해줘야겠다, 정원이랑 같이 먹으려면.”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저희 자주 사 먹으니까 안 그러셔도 돼요. 대답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갔다.

“…고맙습니다.”

엄마가 챙겨준 반찬을 고정원이랑 같이 먹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얼른 가봐. 정원이 심심하겠다.”

엄마가 자신보다도 고정원을 신경 써주고 있었다. 조인휘는 눈썹 끝을 늘어뜨리며 비시시 웃음을 흘렸다.

“네.”

손에는 후식으로 챙겨주신 과일 쟁반이 있었다. 똑, 대충 한 번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막연히 앉아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고정원은 방 한구석, 벽에 붙어 있는 책장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너 뭐…, 그거 내려놔!”

고정원에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제 졸업앨범이었다. 조인휘는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초등학교 때 안경 썼어?”

조인휘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앨범을 든 고정원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얄밉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그거 친구 거… 아니, 그냥 내놓으라고 빨리.”

하필 초등학교 졸업앨범이었다. 차라리 고등학교 앨범을 보지. 초, 중 앨범은 객관적으로 최악이었다. 특히 초등학교 졸업앨범의 야외 컷은 친구 안경을 빌려 쓴 탓에 더욱 웃겼다. 안경을 쓰는 게 한참 유행했고, 자신은 시력이 좋았기 때문에 늘 안경을 그림의 떡처럼 보던 시절이었다. 친구가 벗고 찍는다기에 허락을 받고 빌려 쓰고 찍었다. 안경은 테두리에 빨간색이 들어가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당당한 표정과 포즈까지 더해져서 더욱 웃길 뿐이었다.

“아, 진짜! 왜 맘대로 보는데!”

보여지는 게 진심으로 너무너무 싫었기 때문에 정색을 하고 화냈다.

“귀엽기만 한데 왜.”

고정원은 볼우물이 깊게 팰 정도로 웃음 짓고 있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짜증이 났다.

“하….”

머리를 헝클어뜨린 조인휘가 떨어져 나갔다. 빼앗기를 포기하고 반대편 구석에 놓인 조그만 탁자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휴대폰을 꺼내고 무작정 게임을 했다. 모든 게 짜증스러워서 우다다다 죽이는 게임을 하고 있자 어느새 고정원이 다가왔다. 뒤로 겹쳐 앉으며 은근슬쩍 끌어안았다.

“삐졌어?”

“더워. 저리 가.”

미취학아동 시절의 사진이야 기분 좋게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졸업앨범은 한창 사춘기를 관통하는 학창시절, 우스꽝스러운 특정 순간이 박제된 것이나 다름없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여주기 싫은 상대를 고르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고정원이었다.

“초등학교 때랑 중학교 때 사진이 특히 귀엽던데. 심장 아팠어.”

“…시끄러워.”

말이 곱게 안 나갔다. 중등, 고등 앨범들까지 이미 찾아본 모양인데, 귀엽다느니 심장 아팠다느니, 그런 소리는 당사자인 자신에게는 빈정거리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지금이랑 똑같더라.”

“어쩌라고.”

“왜 그렇게 화를 내. 인휘도 내 앨범 봤었잖아. 기억 안 나?”

고정원네 본가에 갔을 때 고정원의 초, 중, 고 졸업앨범을 본 적 있었다. 물론 거기에서 ‘놀림거리’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 졸업앨범 사진이라는 게 굴욕적인 부분이 한 부분이라도 있기 마련인데 고정원은 예외였다. 혼자 반사판을 대고 조명을 받은 것처럼 완벽했다. 그것도 초, 중, 고 앨범 전부.

전부터 느꼈지만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고 균형이 완벽해서 사진이 잘 받았다. 고정원을 보면 ‘실물은 좋은데 사진발이 안 받는다’는 말은 핑계처럼 느껴졌다. 사실 자신이 늘 그런 타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조인휘로서는 얄미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잘 나왔는데 난 아니니까 그러지.”

그런 앨범이라면 자기도 자랑 겸하여 누구든 보여줄 수 있었다.

“…아닌데. 내 눈에는 귀엽고 예쁘고 잘생기기만 하던데. 왜 그러지.”

빈말인 것을 알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상한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민망해서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인휘야. 나 좀 봐봐.”

“싫어, 하지 마.”

뺨을 만지는 손길을 턱짓으로 강하게 떨쳤다. 좀 너무했나. 생각이 드는데 고개가 강제로 돌아가며 입술로 뜨거운 것이 덮였다.

키스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하지만 깊었다. 뺨 한쪽을 받치고 있는 고정원의 손이 뒷목으로 미끄러졌다. 춥, 쪽, 촉….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소리가 크게 났다. 예민한 입 안이 비벼지는 것도 그렇고 자세도 다소 힘겨워 ‘음….’ 신음이 새었다. 고정원은 흥분했는지 입을 맞추며 니트 안으로 손을 넣고 있었다. 문도 잠가두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서 번개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린 조인휘가 팍, 밀어 냈다.

“하….”

역시나 고정원은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눈꺼풀이 반쯤 내려간 눈은 아무런 빛도 흡수하지 못해 음침했다.

“오버야…. 이런 건 집에 가서 해.”

말해 놓고 휴대폰 화면에 집중했다. 고정원은 뒤통수에 뜨거운 입술을 몇 번 찍더니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라서 올려다보자 목덜미를 잡아당겨 니트를 벗고 있었다.

“나 갈아입을 옷 좀 줄래?”

“어? 옷은 왜. 우리 이제 곧 금방 갈 건데.”

“무슨 소리야. 어머님이 자고 가라고 하셨잖아.”

“…….”

아까 식사 때 나온 말이었다. ‘먹고 그냥 가게? 왜, 오늘은 놀다가 하루 자고 가지.’ 하시는 엄마의 말에 고정원이 반색하며 ‘그래도 돼요?’ 대답한 것으로 사실상 일박 확정이었다.

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 조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제발 오늘은 참아줬으면 싶었다. 아니, 자신이야말로 어떤 교묘한 유혹이든 시작도 하지 못하게 무시해야 했다. 고정원네 본가에 있을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여기는 층마다 분리된 공간도 아니고, 좁은 만큼 옆방으로 소음도 쉽게 전달되었다.

“자고 갈 거면 뽀뽀 같은 것도 절대 안 돼. 여기 소리 진짜 잘 샌단 말이야. 옆이 바로 부모님 주무시는 안방이고. 진짜, 진심이야. 알았지?”

“안 해. 약속할게.”

확답을 받아낸 뒤에는 고정원에게 줄 만한 옷을 찾았다. 아무 생각 없이 옷장을 열자 회색 트레이닝 세트가 반듯이 개켜져 있었다. 그걸 본 조인휘는 그제야 이 옷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짜. 니 거.”

옷을 받아 든 고정원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기억이 나는지 희미한 웃음이 서렸다.

“겨우 주인 찾았네.”

“…그러게.”

자리에서 갈아입은 고정원이 걸치고 있던 집업의 지퍼를 올리며 물었다.

“누가 더 잘 어울려?”

“응?”

“그때보다 더 잘 어울려?”

뭘 묻고 있는지 파악이 되자 당혹감부터 들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생각하며 조인휘는 눈동자를 방바닥 아무 데나 떨궜다.

“머리 짧은 게 더 좋았어?”

“…아니.”

지금이 좋아. 하고 작게 덧붙였다. 한 달이 지난 것만으로 고정원의 머리는 굉장히 많이 길어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지금이 좋았다. 짧았을 때는 훨씬 거친 느낌에 야성적인 분위기가 강해져 다른 사람 같았다. 머리 모양이 얼마나 영향이 큰지 새삼 깨달을 정도였다. 물론 잘 어울렸지만 낯선 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이 좋아?”

물으며 고정원이 은근하게 몸을 기울였다.

“응.”

대답하며 슬쩍 피했다. 그리고 다가가서 방문부터 잠갔다. 다가온 고정원에게 밀려 뒷걸음질 치자 장롱 옆으로 비어 있는 벽에 끼었다. 고정원이 바짝 다가오면서 눈앞이 그늘이 졌다.

“…….”

조인휘는 역광으로 그늘진 고정원을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렸다. 이제 보니, 회색은 좀 부담스러운 색인 것 같았다. 일부러 큰 사이즈를 샀는데도 하의로 윤곽이 잡혀서 보기에 쓸데없이 야릇한 감이 있었다. 저 상태에서 거실에 나갔다가 부모님과 맞닥뜨리면 민망할 것 같은데. 고민하고 있는데 코에 쪽, 입술이 닿았다.

“아, 이런 거 안 된다니까.”

인상을 쓰고 따지자 고정원이 웃으며 물러났다.

“실수했어. 미안.”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조인휘가 다가갔다. 그리고 거친 몸짓으로 고정원에게 뛰어올랐다.

“실수한 벌이야.”

등에 매달려 목을 조르는 장난을 치자 고정원이 반격했다. 옷이 반쯤 벗겨질 정도로 우악스럽게 놀다가 지쳐서 떨어졌다.

둘 다 계속 웃었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날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뒤늦게 깎아주신 과일을 나누어 먹으며 달라붙은 자세로 노닥거렸다.

“그때 부모님 댁에서 한 녹음은 이 방에서 한 거지?”

‘녹음’이라는 말이 나오자 바로 음성 편지 얘기인 것을 알았다.

“…응.”

이제 와 말이지만 녹음해 둔 것들은 숨기려 했다. 고정원의 기억이 돌아오고 나니 왠지 부끄럽기도 했고, 들으면 괜히 속상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였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고정원이 기록을 찾아냈다. 그리고 자기 휴대폰으로 옮겨서 매일 들었다. 음악을 듣고 있나 싶어서 보면 그 편지였다. 민망하기는 했지만 좋아해 주니까 다행이었다.

그리고 고정원은 이후로 본인도 음성 편지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맨날 붙어 있는데 왜 하냐고 묻자 ‘그냥, 나도 기록하고 싶어졌다’는 대답이었다. 성실하게 하루도 안 빼놓고 녹음하고 있었다. 녹음 뒤에는 공유하는 계정에 날마다 업데이트했다.

내용은 자신이 했던 것처럼 단순했다. 지금 뭘 하고 있고, 지난 시간에는 뭘 했으며 남은 시간에 뭘 할 건지. 마지막에는 꼭 사랑한다는 고백이 형식처럼 따라붙었다. 그 정도로 반복되면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사랑해, 인휘야.’ 하는 목소리에는 매번 가슴이 시큰하게 뜨거워졌다. 요즘 새벽에 자다 깰 때면 고정원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녹음을 연달아 들었다. 그러면 금방 다시 잠이 왔다.

“안녕. 인휘야.”

뜬금없는 소리에 돌아보았다가 고정원이 휴대폰으로 녹음을 시작했음을 알았다.

“…….”

굳이 여기서, 굳이 자신을 앞에 두고 녹음할 건 뭔지. 민망한 기분을 참지 못하겠어서 품에서 벗어났다. 좁은 공간이지만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음악을 틀었다. 웹툰을 보며 딴짓을 했다. 그래도 한 공간인 만큼 다 들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인휘네 부모님 댁이고… 오늘 여기서 너랑 같이 자고 갈 거야. 어머님이 먼저 자고 가라고 해주셔서 너무 기분 좋았고, 밥도 너무 맛있었어.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하고 행복하네.”

“…….”

영상 편지를 녹음해서 좋은 점이 분명히 있기는 했다. 매일같이 붙어 있어도 잘 표현하지 않는 부분이나 솔직한 속마음 같은 것들이 편지라는 형태를 통해 전달된다는 점이었다. 대놓고 하기에는 낯부끄러운 말들도 음성 편지로는 훨씬 수월하기 마련이었다. 자신도 해봐서 알고 있었다.

고정원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녹음을 이어갔다.

“오늘 어머님이랑 대화하는 거 너무 즐거웠어. 여러모로 나에 대해 궁금해 해주셔서 기뻤고, 나도 여러 가지로 나에 대해 알려드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고. 옛날에 우리 생각도 났어. 우리 서로 알아가기 시작할 때 인휘 너한테 나에 대해 알려주는 게 정말… 너무 좋았거든.”

그 말을 들으니 추억에 잠겼다. 돌이켜 보니 고정원은 정말로 초반에 말이 많았다. 사소한 것 하나를 물으면 본인의 신상부터 가치관까지 줄줄이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음… 오늘 식사하면서, 어서 내가 인휘네 가족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강하게 들었던 것 같아. 또, 어머님이 기꺼이 수용해 주실 것 같다는 믿음도 생겼고…, 막연히 꿈꿔 왔던 것들이 하나둘씩 구체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너무 좋네.”

그런 식으로 생각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찡했다. 조인휘는 시큰시큰한 코끝을 괴롭히듯 뭉갰다. ‘가족 일원’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특히 ‘수용’이라는 표현에서 생각이 깊어졌다. 얼마나 진지한 마음인지가 느껴졌고 그래서 고마웠다. 실은 결혼은 자신과 고정원 둘만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족에게 알리고, 수용을 거치는, 좀 더 열려 있는 앞날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지금부터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만으로 훨씬 희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지금 한 방에 있는데, 인휘 너는 나한테 떨어져 앉아서 핸드폰만 보고 있어. 이리로 와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은데…,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네. 물어보면 안 되겠지?”

“…….”

오라는 소리를 참 교묘하게도 돌려서 하고 있었다. 조인휘는 그대로 일어나서 아까처럼 고정원의 다리 사이로 앉았다. 고정원의 가슴팍에 등 기대어 몸을 늘어뜨렸다.

“지금 이런 시간이 제일 행복한 것 같아.”

고정원이 들어 올린 조인휘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전에도 그랬지만, 사고 이후에는 이런 일상적인 순간들이 더 많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이렇게 너 안고 있을 때, 이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행복하다고 느껴 나는.”

“…….”

“나한테 가장 중요한 시간은 너랑 보내는 시간이라는 게 정말로 잘 느껴져.”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을 깜빡였다.

“인휘야.”

대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들려?”

어이없는 느낌으로 흐, 웃는 자신을 따라 고정원이 웃었다. 맞닿은 가슴팍에 엷게 진동하는 느낌이 포근했다.

“하고 싶은 게 생겨서… 오늘 편지는 여기서 끝내야겠다.”

고정원의 큰 손이 제 손을 뒤덮었다. 강인하게 붙들었다.

“오늘도 많이 사랑해.”

뜨겁게 느껴지는 음성을 끝으로 녹음 시간을 알리는 숫자가 꺼졌다. 기다릴 새도 없이 입술과 입술이 겹쳐졌다. 조인휘는 체온 높은 목덜미에 손바닥을 두르고 끌어당겼다.

많이 사랑해.

입술이 맞물린 채로 말하자 웅웅 울리며 발음이 엉망이었다. 고정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따라 웃으며 부드럽게 고개를 틀었다. 전에 없는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내일은 더 행복하리라는 믿음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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