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덫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매년 돌아오는 엄마의 생일을 까먹어 미운털이 박히기도 하고, 수업엔 교재를 준비하지 않아 혼나는 일도 부지기수다. 친구와의 약속도 자주 잊어 욕을 사서 먹고, 지난주에 있었던 사소한 일은 당연히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쉽게 사라져버린다. 성적도 당연히 밑바닥. 아니다. 그 밑바닥보다도 더 아래인 지하에 가깝다.
그런 내가 유독 한재영과 처음 제대로 마주쳤던 날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오전 내내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뚝 그친 직후, 학교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골목에서 한재영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
“어? 이호정?”
학교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의 길 중 도로와 멀어 아이들이 가지 않는 오른쪽 골목을 선택한 게 실수였다. 보충수업을 째고 내려온 탓에 최대한 사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택하려던 게 하필이면 한재영을 마주치게 한 거였다. 불린 내 이름이 어색했다. 한재영이 반가운 기색으로 웃으며 일어섰다.
“보충 안 듣고 째는 거야?”
“어어.”
어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답했다. 한재영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생각하다 보니 그와 내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날 보는 한재영의 눈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기껏 1년 같은 반이었을 뿐인 나를 골목에서 맞닥뜨린 게 그는 반가운 듯 보였다.
전교 1등에다 학생회장, 반반한 얼굴만 해도 충분히 유명할 이유가 되는데 한재영은 총리직을 보낸 외조부와 사업가이자 재단의 이사장인 아버지, 유명 피아니스트인 어머니까지 두고 있었다. 당연히 학교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유명할 수밖에 없는 놈이었다.
한재영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도 당연히 한재영을 모르진 않았다. 지루한 학교 행사나 축제 때 늘 그 선두에는 한재영이 있었고, 여자아이들이 작게 속닥이는 이야기에도 빠지지 않는 존재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한재영을 모른다고 하면 오히려 자격지심이라고 욕을 먹을 터였다. 게다가 내가 2년간 좋아한 최정화가 짝사랑하는 대상.
알게 모르게 속으로는 한재영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서 보니 한재영은 더없이 맑은 얼굴을 하고 날 보고 있었다. 모범생들이 으레 나를 볼 때 보이던 적대감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나를 보는 눈빛은 무료해 보일 정도였다.
“넌 여기서 뭐하고 있었는데?”
한재영이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어색하게 벽에 긁어 껐다. 반쯤 남아 있던 담배 끝이 치르륵 소리를 내며 사그라졌다. 벽에 검게 그을린 타르 자국이 보였다.
“너 담배도 피우냐?”
역한 담배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 물었다.
“아, 응. 가끔 펴. 공부에 집중이 안 돼서.”
한재영이 웃으며 다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멀리서 몇 번 마주칠 땐 몰랐는데 직접 말을 섞어보니 한재영은 꽤 낯을 가리는 데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듯했다.
“할 건 다 하네.”
웃음이 났다. 반듯한 얼굴을 하곤 골목길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잘난 놈이라 저 말고 다른 사람은 모두 자신의 아래로 깔보는 게 익숙할 것 같았는데, 한재영은 전혀 아니었다.
지나가려다 뒤돌았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착하고 순진한 놈이 어떤 연유로 담배에 빠졌나 걱정이 됐다. 나나 민재라면 모를까, 저런 놈들은 반듯한 길 따라 반듯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오지랖도 있었다. 한재영의 옆에 그와 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은 것도 반은 충동적이었다.
“몸에 안 좋은 건데 웬만하면 좀 끊지?”
한재영의 입에서 뻐끔하며 하얀 연기가 솟았다. 하늘로 구름처럼 올라가는 연기에 콜록대며 코를 막았다. 목이 따가웠다.
“담배 싫어해? 네 친구들도 다 피우지 않아?”
한재영이 맑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나와는 애초에 결이 다른, 친해지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생각이 확신이 됐다. 이러니 1년을 같은 반이고도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않았던 거란 생각도 들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언제나 첫눈에 알아보기 마련이다.
“우린 어차피 글러 먹은 놈들이고, 넌 크게 될 놈인데 우리랑은 다르지. 좋지도 않은 건데 웬만하면 끊어. 네 아버지는 너 담배 피우는 거 모르실 거잖아.”
개교기념일에 한두 번 봤던 한재영의 아버지가 생각나 물었다. 친하지 않아 잘못하면 비위를 상하게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질문이었는데도 한재영은 방긋 웃으며 날 쳐다봤다.
“아, 괜찮아. 나 아버지랑 맞담배도 트고 그러는데.”
해맑은 웃음이었다. 눈치 없이 착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내 쪽으로 기울어진 한재영의 어깨를 툭 밀었다.
“좋네. 엄청 쿨한 가정인가 보다. 나였음 반쯤 죽었을 거 같은데. 난 이제 간다. 마저 피워.”
반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재영이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손에 담배를 쥔 채로 다급히 내 손을 잡았다.
“저기, 호정아.”
“어?”
“아…….”
제법 가까이 다가온 한재영이 고개를 꺾어 나를 내려다봤다. 가까이에서 보니 키가 더 컸다. 어깨도 넓은 데다, 손은 그에 맞게 두툼하고 묵직했다. 손에 들린 담배에선 여전히 매캐한 연기가 올랐다. 순진무구한 얼굴과 담배가 이질적이게도 어울렸다.
“저기…….”
한재영의 눈동자가 파들파들 떨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어 삐딱하게 섰던 자세를 고쳐 바로 섰다. 한재영의 떨리는 얼굴을 빤히 보고 있자니 좀이 쑤셨다. 어색해 입안이 다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나 가야 해. 약속 있어서 보충 짼 거라.”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한재영의 손에 들린 담배 덕에 자꾸만 기침이 났다. 그제야 한재영은 놀란 듯 주섬주섬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미안. 담배 냄새 싫어하는구나.”
“이제 알았냐?”
처음 네 담배 볼 때부터 콜록댔구만, 생각하는 중에도 한재영의 눈치 없음이 웃겨 웃음이 새어났다. 말하는 데 거침이 없는 남자 놈들만 봐오다 한재영처럼 말 한마디도 수십 가지 생각을 하며 뱉는 놈을 보니 생경하고 신기했다.
“뭐, 나한테 할 이야기 있어?”
잡힌 손을 풀며 물었다. 잠시 입술을 세게 깨물고 망설이던 한재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너 바쁠 텐데 내가 시간만 잡아먹고, 미안.”
잔뜩 풀죽은 머리통에 괜히 마음이 안쓰러워졌다. 사실 약속이랄 건 없었다. 집에 가서 게임이나 할 생각이었기에 가야 한다는 것 또한 거짓말일 뿐이었다.
“할 말이 뭔데? 그냥 말해.”
“아, 아냐. 괜찮아. 다음에, 다음에 이야기할게.”
조금 삐딱한 내 말에 한재영이 우물대며 서둘러 말을 마쳤다. 한재영은 익숙한 표정과 자세로 주머니에서 향수를 꺼내 옷에 뿌렸다. 향수를 들어 보이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재영은 또 비실대며 웃더니 내 교복 셔츠에도 향수를 뿌렸다. 향수를 뿌리려고 다가온 한재영이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남자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어색하고 불편해 눈을 피했다.
“근데 나 전에도 궁금했는데. 네 건 왜 색이 달라?”
향수를 다 뿌린 한재영이 내 교복 셔츠를 잠시 만지작댔다. 한재영이 말한 건 내 교복 셔츠일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빨간 내복과 같이 세탁기에 돌린 탓에 내 교복 셔츠는 옅은 분홍빛이 돌았다. 엄마는 티도 안 나 아무도 모를 거라 했고, 실제로 그 후로 단 한 번도 내 교복 셔츠의 색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 한재영을 제외하고는.
한재영은 세상 순진한 얼굴로 내 답을 기다렸다. 구구절절 설명하기 싫어 그저 모르겠다고만 답하고 뒤돌았다. 내일 보자는 한재영의 인사에 한 손을 느리게 흔들었다.
집에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게임을 할 생각도 사그라들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울리던 휴대 전화를 뒤집었다. 보나 마나 민재, 보지 않아도 여자 문제, 봐도 답 없는 고민만 반복하는 연락일 게 뻔했다. 교복을 벗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셔츠를 빤히 응시했다. 정화도 내 셔츠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씨. 쪽팔리네.”
남자 놈들이라 눈썰미가 없었나 왜 여태 아무도 내게 교복에서 티 나게 분홍빛이 난다고 말해주지 않았나, 짜증이 났다. 발가락으로 셔츠를 들어 구석에 던졌다. 구겨진 셔츠가 죄라도 지은 놈인 양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다음 날 물든 교복 셔츠를 엄마 몰래 버렸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 셔츠를 두고 올 땐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셔츠를 버린 탓에 며칠 동안은 체육복만 입고 다녀야 했다. 조금 있으면 졸업인데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교복 셔츠는 왜 굳이 더 사려고 하느냐는 엄마의 성화에도 굴하지 않았다. 작년에 아빠 회사의 주거래처였던 곳이 부도나지 않았더라면, 그 부도어음을 아빠 회사가 쥐고 있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불필요했다. 나는 그런 집안 형편에도 삼 일간 밥도 먹지 않고 투쟁해 끝내 엄마 카드로 새 교복 셔츠를 살 정도로 철이 없었다.
한재영이 다시 내게 말을 건 건 졸업식이었다. 이따금 복도에서 마주치기도 했지만 딱히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한재영이 익숙한 얼굴에 그보다 더 익숙한 웃음을 보이면 나는 살짝 손만 흔들어주는 식이었다. 한재영을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교복 셔츠가 생각나 못내 짜증이 나기도 했다.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원래 살갑게 아는 척하던 사이도 아니었으니 더 어색할 것도 없었다.
* * *
졸업식 날, 졸업생은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는 한재영의 교내방송에 민재와 함께 강당에 도착했다. 강당에 도착하자 단상에 선 한재영이 보였다. 한재영은 마이크를 쥔 채로 중얼중얼 졸업식 연설문을 외우고 있었다. 어리숙한 얼굴로 실수라도 할까, 연설문에 코를 박은 모습이 우스웠다.
“잘나긴 잘났네.”
중얼대며 한재영을 보았다. 큰 키와 달리 유독 작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고생이라곤 겪어보지 않았을 티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맨 앞자리에 앉아 한재영을 올려보는 정화가 동시에 보였다. 정화는 한재영이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쥐고 있던 음료를 한재영에게 내밀었다. 한재영이 연설문에서 눈을 떼고 웃는 게 보였다. 정화가 내민 음료를 따 단숨에 들이켜는 별거 아닌 모습에도 여유가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학교 앞에 걸린 플래카드를 보았다. 한재영과 정화의 이름이 나란히 걸린 플래카드였다. 전교 1등과 전교 2등. 선남선녀. 학생회장과 부회장. 세상의 모든 좋은 수식어란 수식어는 죄다 그 둘 앞에 붙은 듯했다. 둘 다 걱정이랄 게 없는 인생처럼 보였다.
정화와 이야기를 마친 한재영이 슬쩍 나를 봤다. 한재영이 인사라도 하려는 듯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색하게 손을 올리려는데 민재가 먼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옆구리를 찔렀다.
“호정. 뒤에 엄마랑 아빠 오셨다.”
“어어.”
한재영을 향하던 시선을 겨우 떼 뒤로 돌았다. 강당에 도착한 엄마와 아빠가 나와 민재를 보며 눈인사를 해 보였다. 갈 수 있는 성적의 학교가 없어 대학은 진즉에 포기한 상태였다. 처음엔 조금 우울해하시던 아빠도 이제 전교 꼴등인 아들이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한 듯 보였다. 일종의 체념과 같았다.
민재와 뒤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한재영이 눈앞에서 우리를 막아섰다. 멀뚱히 선 한재영은 예의 그 미소로 웃으며 날 내려봤다.
“어?”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해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재영은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강당 앞의 단상을 가리켰다.
“저기, 나중에 내가 부르면 위에 올라와 줄 수 있어?”
“나? 왜?”
이유를 몰라 되물었다. 내 어깨에 기댔던 민재가 나와 한재영을 의아한 눈으로 번갈아 쳐다봤다. 한재영은 익숙한 미소로 나를 보며 답을 기다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재영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뭔데? 뭘 알아야 올라가지.”
“아, 별건 아닌데… 내가.”
“무슨 일인데?”
한재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성격 급한 민재가 나와 한재영 사이에 서며 물었다. 능글맞게 웃는 걸 보니 무슨 일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둘이 어떻게 친… 아, 1학년 때 둘 다 3반이었지?”
“어.”
들이민 민재의 얼굴을 밀쳤다. 민재가 낄낄대며 뒤로 물러섰다. 한재영이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민재 덕에 기가 죽은 것 같아 안쓰러웠다.
“알았어. 그냥 올라가기만 하면 되지?”
“응? 어. 고마워.”
한재영은 담배를 끄던 그 표정으로 다급하게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깨를 쓰다듬어주자 한재영이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다시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뒤로 갔다. 엄마의 손에 들린 꽃다발이 보였다.
“꽃 사지 말라니까. 돈 아깝게.”
“친구?”
엄마는 어느새 다시 단상에 오른 한재영을 가리키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연설문을 보는 한재영이 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옆에 서 있던 민재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야. 맞잖아. 너랑 한재영, 둘 다 1학년 때 3반이긴 했잖아. 그치?”
“같은 반이라고 다 친구냐?”
민재가 “아아. 맞는 말.” 하며 낄낄댔다. 내가 한재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으니, 우리 둘이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를 묻는 듯했다. 친하지도 않지만,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더 싫어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손에 있던 꽃이 민재의 손으로 옮겨갔다. 민재는 꽃다발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야. 냄새 죽인다.”
“윽, 씨.”
민재가 난데없이 꽃다발을 내 얼굴에 비볐다. 꽃냄새가 얼굴에 확 끼쳤다. 캑캑대며 뒤로 물러나자 민재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이마를 비벼댔다. 어색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던 아빠가 내 볼을 툭 건드렸다. 씩 웃어 보이자 그제야 아빠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마무리 잘해. 엄마랑 여기 뒤에 있을 테니까.”
“…어.”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도 민재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왜?”
“야. 너 나중에 저기 왜 올라가는데?”
“나도 몰라.”
단상을 쳐다봤다. 연설문을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한재영은 턱을 괸 채 앞을 보고 있었다.
“쟤 너 보고 있는 거 아님?”
딱히 시선이 나를 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 보는 건 아닌 거 같은데.”라고 말하자 민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재영은 표정이 없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한재영이 픽, 웃으며 다시 연설문에 시선을 옮겼다.
어디에선가 향수 냄새가 섞인 담배 연기가 올라오는 착각이 들었다.
“꽃 냄새 좋다.”
민재가 내 품에 꽃을 던지듯 내밀었다. 방금 맡은 게 향수가 아니라 꽃 냄새인가 싶어 꽃에 코를 대고 킁킁댔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딱히 한재영을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한재영이 너무나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불어온 담배 연기가 단번에 폐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민재야. 이상해. 나 속이 안 좋다.”
“미친 새끼. 오버하네.”
민재가 피식대며 내 볼을 잡아당겼다. 짜증스레 손을 뿌리쳤다. 재학생과 졸업생은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민재는 내 눈치를 살피며 힐긋거렸다. 한재영이 단상에 나를 부르려는 이유가 궁금해 좀이 쑤시는 듯했다. 저런 표정으로 날 보고 있으니 더 장난을 치고 싶어 일부러 더 민재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야. 민재야.”
“어. 나 진짜 들을 준비 다 됐어.”
민재가 눈을 빛내며 날 올려봤다.
“나 화장실 좀.”
“아이씨.”
민재가 내 품에 있던 꽃다발을 가져갔다. 웃으며 일어나 그대로 강당을 벗어났다. 바지 주머니에 시린 손을 넣고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졸업식이 막 시작한 덕분에 복도에는 일상의 소란스러움이 없었다.
평일 낮의 학교가 고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될, 어쩌면 다시는 밟을 일이 없을 대리석 바닥이었다. 바닥에선 겨울의 찬 기운이 올라왔다. 털로 감싼 겨울용 슬리퍼가 무색했다.
문득 뒤에서 들린 구둣발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 빈 복도를 훑었으나 나 외에 복도를 걷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구둣발 소리도 더 들리지 않았다. 적요한 복도에 선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막판까지 최정화한테는 말 한 번 못 걸고. 등신 새끼.”
중얼대며 텅 빈 화장실의 소변기에 서서 바지를 내렸다. 혼잣말한 것뿐인데도 어쩐지 속이 꽤 후련해졌다. 이래서 선조들이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 어쩌고를 해댔던 거다.
“어어?”
팬티를 반쯤 내리고 요의로 무거워진 성기를 막 쥐었을 때였다. 어깨너머로 불쑥 들어온 손이 별안간 내 어깨를 안았다. 팔로 몸을 쳐내거나 다리로 정강이를 차는 건 할 수조차 없었다. 찰나에 내 어깨를 감싼 팔이 축 늘어지며 몸을 감쌌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해 몸이 언 건 당연했다. 좀 전 아무도 없이 황량했던 복도가 떠오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누, 누구…….”
더듬대며 말을 뱉었다. 남자가 옅게 웃는 소리가 느껴졌다. 고개를 찬찬히 내려 내 어깨를 잡은 손을 내려 보았다. 나와 같은 교복 재킷이 보였다. 맥이 풀리는 기분과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김민재. 장난 그만 하…….”
당연히 민재일 거라 생각하며 팔에 바짝 들었던 힘을 풀었다. 남자는 가슴을 내 등에 밀착한 채 작게 한숨 쉬었다.
“너, 누구.”
“아, 미안해. 내가 오늘 너무 긴장을 했더니, 좀 어지러워서…….”
낯설지만 그렇다고 아예 낯선 것만은 아닌 목소리. 등을 타고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한재영이 자신의 가슴을 내 몸에 무겁게 기대었다.
“뭐야? 장난 그만해.”
어깨를 움츠려 몸을 비틀려 했다. 그러자 허리와 등으로 한재영의 몸이 붙었다.
“야야. 좀 비켜.”
한재영은 답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 한재영은 고개를 완전히 내게 기댄 채 몸의 힘을 풀고 있었다. 늘어진 팔과 젖은 속눈썹이 보였다. 학생회장이라 학교 행사 때마다 앞에 잘만 서던 놈이 왜 이렇게나 긴장을 하나 싶었다.
“야. 한재영.”
“미안. 아빠가 있으면 내가 평소보다 긴장을 많이 해. 공황장애 알아? 잠시만 좀 기대도 될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세상을 사는 게 편하고 지극히 수월할 것만 같은 놈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낯설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 까짓 게 잘난 한재영을 안쓰러워한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손을 들어 한재영의 축 처진 머리통을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위로는 해본 적이 없었다. 내게 위로를 구하는 사람도, 위로를 해줄 만큼 심지가 약한 사람도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지 지퍼를 올리지도 못하고 한재영을 달래주는 꼴이 되었다. 머리통을 어색하게 몇 번이나 쓸어주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조금 기운을 차린 듯한 한재영이 뒤에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내 바지 지퍼에 닿았다. 그리고는 매끄럽게 내 팬티를 올리고 지퍼를 올려 닫았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한재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인 탓에 거부하거나 어색하게 구는 게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어정쩡하게 팔을 올리고 있었더니 한재영이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 내가 무대공포증도 좀 있거든.”
“네가?”
간신히 몸을 돌렸다. 솜털 하나까지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숨이 느껴져 살짝 고개를 돌렸다.
“호정아.”
“어?”
한재영 쪽은 보지도 못한 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너 왜 대학 안 가?”
한재영의 시선이 내 바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몸을 비켜섰다. 한재영은 세상 무해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전교 꼴등이라도 내가 또 양심은 있거든.”
“갈 수 있게 돼도? 그래도 안 갈 거야?”
나름 진중한 얼굴에 픽 웃음이 났다. 손을 씻는 한재영의 옆에 섰다. 거울에 비친 한재영의 얼굴이 한재영과 정화의 플래카드에 적힌 미래만큼이나 맑고 선명했다. 아무리 봐도 나와는 다른 결이었다.
“어. 안 가. 못 가서 안 가.”
“나랑 갈래? 네가 원하면 같이 갈 수 있는데…….”
한재영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셨다. 한재영의 말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입을 가리고 웃는 날 보는 한재영의 얼굴은 정말 농담이 아닌 듯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됐어. 지금도 안 하던 공부를 대학 간다고 뜬금없이 하겠냐. 돈 낭비, 시간 낭비.”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한재영이 나를 따라 웃었다.
“진짠데. 나 너랑 친해지고 싶거든.”
한재영은 좀 전에 적신 손수건의 물기를 짜냈다.
“어어, 그래. 믿어줄게.”
어색하게 웃으며 한재영의 등을 밀었다. 나를 따라 웃던 한재영은 결국 내게 등이 밀려 화장실을 먼저 나가게 됐다. 복도를 걸어올 때 뒤에서 들렸던 구둣발 소리와 같은 소리가 났다.
내가 한재영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가질 수 있는 건 전부 다 가진 새끼가 도대체 나에게서 얻을 게 뭐가 있어서, 내가 친구인 게 무슨 이득이 되어서 저러나 싶었다. 잘난 놈들이 저렇게 계산 없이 착하기까지 하니 나 같은 건 더 설 자리가 없어지는 세상이었다.
다시 소변기로 다가가 마저 오줌을 눴다. 강당으로 돌아왔을 땐 민재가 초조한 얼굴로 날 찾고 있었다. “미친놈아. 벌써 시작했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있었다. 뒤에 선 부모님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딱 오늘만 더 버티면 이 지긋지긋한 학교도 마지막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
민재는 똥이라도 지르고 왔느냐며 웃었다.
“빨리 끝나면 좋겠다.”
“네가 똥 싼다고 존나 늦게 와서 금방 끝날걸?”
장난치는 민재의 어깨를 어깨로 툭 밀었다. 눈은 다시 단상을 향했다. 한재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종이를 쥔 채 연설 중인 교장을 보고 있었다. 긴장해있던 좀 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내내 익숙하게 보았던 학생회장다운 얼굴만 그곳에 있었다.
“다음은, 27대 학생회장 한재영 군의 축하 연설이 있겠습니다.”
한재영이 무심한 얼굴로 단상의 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겉보기에는 무심하기만 한 저 얼굴 뒤로 무대 공포증과 불안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여기에서 몇 명이나 될까 가늠해 보았다. 못된 마음이지만 한재영 같이 잘난 놈도 본인이 가진 걸 누리기 위해 속으론 그 나름의 노력을 한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좋은 추억만 남겨주신 은사님들과 학우분들께 감사의…….”
잔뜩 풀죽은 얼굴로 친하지도 않은 내게 위로를 구하던 놈과 당당한 얼굴로 단상에 서서 감사함을 역설하는 학생회장.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한재영의 본질에 더 가까울까 생각했다.
축하 연설과 재단 이사장, 교장의 축하문은 짧지 않았지만 쉬지 않고 장난을 걸어오는 민재 덕에 시간은 금방 흘렀다. 두세 번 박수를 치고 나니 졸업식도 거의 마지막에 다다라있었다.
“한재영 군과 함께 우리 재단의 특별 장학생으로 선정된 이호정 군.”
불린 내 이름에 먼저 반응한 건 민재였다. 민재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교장이 부드러운 눈으로 자리에 앉은 아이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를 찾는 듯했다.
“호정아?”
한재영이 방긋 웃으며 나를 불렀다. 마이크에 입술을 붙인 한재영이 내가 앉은 곳을 가리켰다. 온화한 미소가 그림처럼 얼굴에 번져 있었다. 그 뒤로 한재영과 닮은 이사장의 얼굴이 보였다. 나와 한재영을 번갈아 보는 눈빛이 달갑지 않았다. 저런 서슬 퍼런 눈으로 보니 한재영이 좀 전처럼 그렇게 겁을 먹고 사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상에 올라와 달라던 부탁이 이거였구나 싶었다. 학교에 3년간 다니며 특별 장학생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전교 꼴등만 했고, 민재와 어울리며 주기적으로 나쁜 일에 얽힌 탓에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좋은 소리라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특별 장학생?”
중얼대는 민재를 따라 나도 그 생소한 단어를 중얼댔다. 한재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나를 가리켰다.
“호정아. 이제 올라와야지?”
한재영의 말에 강당을 채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웃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한재영과 정말 친분이 있는 사이가 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한재영의 말투가 다정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꽃다발을 들고 일어섰다. 단상 바로 아래에 앉은 정화가 보였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중에 저 위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민재가 눈썹을 들썩였다. 섭섭한 눈빛에 나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몰랐다, 새끼야. 라는 말이 속에서 부글댔다. 내가 단상에 서자 한재영이 어깨를 감싸 툭 두드렸다.
“호정아. 너랑 함께 받으니까 긴장이 좀 풀린다.”
어색한 기분에 한재영을 쳐다봤다. 한재영은 내가 아닌 교장과 이사장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한재영이 마이크를 쥐고 있던 덕에 그 목소리가 강당에 울렸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귀에 한재영의 중얼거림이 들어갔다. 민재가 팔짱 낀 채 턱을 까닥였다. 언제부터 한재영과 저렇게 친했던 건지, 자신을 속여 온 것인지를 묻는 눈빛임이 틀림없었다.
나중에 다 설명할게. 이 상황이 뭔지 나도 이해하게 되면.
한재영을 쳐다보자 그가 내게 눈짓을 해 보였다. 나름 긴장한 얼굴에 어리바리한 눈빛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미리 말해주지 않아 미안하다는 것인지, 부탁한 대로 올라와 준 것에 고맙다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결국 쭈뼛대며 한재영의 옆에 섰다.
“야… 나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냐?”
남들이 듣지 못하게 속닥이며 물었다. 앞을 보고 있던 한재영이 나를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어. 미안. 당황스럽지?”
걱정스러운 표정에 괜한 걱정으로 들끓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졌다. 뒤에 서서 놀란 눈으로 날 보는 부모님의 얼굴에 티끌 같은 용기가 났다. 학생회장에 전교 1등인 한재영이 부탁한 일이었다. 내게 이런 부탁을 해서 한재영이 얻을 이득도 딱히 없을 것 같았다. 설마 나쁜 결과야 있을까 싶어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한재영과 닮은 이목구비에 비슷한 눈빛을 한 이사장이 나와 한재영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다가왔다. 손에 들린 상패가 정말 내 것인가 의아했다.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자 없던 공포증도 생길 것 같았다.
답지 않게 어색한 표정과 몸짓으로 상패를 받아 단상에서 내려왔다. 단상에서 무슨 말을 듣고 어떻게 서 있었는지도 하나 기억나지 않았다. 민재는 일어서서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눈썹을 꿈틀대는 게 내 일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서운함인 듯했다.
“이 앙큼한 새끼 좀 보소.”
“나도 몰랐다고.”
뒷머리를 세게 긁었다. 민재가 상패를 가져가 펼쳤다.
“와씨. 한재영이랑 친했으면 나한테도 진작에 좀 소개해 주지.”
민재가 툴툴대며 상패를 덮었다. 애초에 친하지도 않고, 친해질 수도 없는 놈이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삐진 티를 내는 민재가 웃겨 어깨를 무심하게 밀쳤다. 그제야 민재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날 쳐다봤다.
“나도 한재영이랑, 어? 말도 좀 섞고 친한 척 좀 해서 이런 거 하나 받아 가면 좋잖아. 우리 엄마 상, 벌. 이 두 가지에 엄청 약한 사람이라고.”
“벌만 받던 새끼가 상은 무슨 상.”
“지는. 인맥으로 받은 주제에.”
민재가 볼을 실룩대며 웃기 시작했다. 저나 나나 고등학교 내내 전교 꼴등만 앞 다투던 놈들인데 이제 와 상이나 벌을 따지는 게 낯간지러워진 탓이었다.
“나도 몰랐다고. 나중에 단상만 올라와 달라길래 올라간 거야.”
“아무튼 상 받았으니까 저녁 쏴라.”
영문은 모르겠지만 더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듯 상패를 다시 내 품에 넘겼다. 상이 어색해 등 뒤로 숨겼다.
졸업식의 마지막은 역시나 지루하게 남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졸업식이 대체 언제쯤 끝나나 생각하며 앞을 보았다. 한재영과 정화가 꼿꼿한 자세로 앞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태생부터 다른 존재들 같았다. 이 고등학교를 벗어나면 다신 나와는 마주칠 일이 없는 인간의 전형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가계 형편도 나빠졌으니 민재를 제외한 이 고등학교 아이들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분명했다. 잘난 놈들이 천지인 잘난 고등학교에서도 한재영과 정화는 유독 더 빛이 나는 존재였다. 그래서 더 먼 존재들 같기도 했다.
졸업식은 내 하품이 잦아질 때쯤 끝이 났다. 꾸벅대던 민재는 결국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민재는 졸업식이 끝나고 의례적인 박수 소리가 강당을 울리는데도 쉽게 깨지 못했다. 어깨를 툭 밀어내자, 민재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떴다.
“존나 인정머리 없는 이호정.”
“그래. 존나 눈치 없는 김민재야.”
등 뒤에 두었던 상패와 꽃다발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에 서 계신 부모님께 가려는데 이번에도 한재영이 부리나케 달려와 내 가슴 앞에 휴대폰을 내밀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만큼이나 손은 떨리고 있었고 그 안으론 잔뜩 밴 땀이 보였다.
“호정아. 저기, 네 번호 좀.”
“아…….”
번호까지 줄 필요가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일 텐데. 게다가 한재영이 내게 보이는 선의나 호의도 조금 부담스럽고 불편해지려던 차였다. 아무 번호나 눌러주자니 마음이 쓰였고 주지 않자니 예민하게 보였다. 망설이는 틈에 불쑥 등 뒤에서 손이 들어왔다. 민재의 손이었다.
“오. 폰 번호도 모르는 사이였다고? 그런데 장학금까지 주고?”
민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이전엔 내가 폰이 없었어.”
한재영이 쑥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멋쩍은 웃음이었다. 민재가 한재영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갔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올려보니 민재는 장난기 가득한 평소의 얼굴 그대로 한재영의 휴대폰에 번호를 찍어주고 있었다.
“야. 김민재.”
“이건 내 번호인데, 다음에 호정이 만날 때 나한테 대신 전화해. 같이 보자. 셋이. 꼭 셋이 봐야 한다. 꼭.”
“미친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민재는 평소에도 워낙 독특한 놈이라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다. 다시 앞을 보았다. 한재영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민재를 보던 눈이 내게 돌아왔다.
“그래. 연락할게. 셋이 보자.”
한재영이 민재의 번호를 눌렀다. 민재의 바지에서 울리는 진동이 내게도 전해졌다. 민재는 휴대폰을 꺼내 새롭게 뜬 낯선 번호를 저장했다. 한재영이 앞으로 돌아가고 나와 민재는 부모님이 계신 강당의 뒤를 향했다.
“호정아.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저런 놈들이랑은 친하게 지내야 한다.”
“미친놈.”
“또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런 놈들이랑 친해질 땐 꼭 나랑 같이 친해져야 한다. 저런 놈들 주위엔 예쁜 애들이 많거든.”
민재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휴대폰에 뜬 한재영의 번호를 내게 내밀었다. 나에게도 번호를 알아두라는 것 같았다. 밀린 하품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부담스러운 인연은 이쯤에서 끊어야 옳았다. 맞지 않는 인연을 억지로 잇는 건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
“너나 예쁜 애들 실컷 만나보든지.”
“미친놈은 아무래도 너지. 고작 최정화에.”
“그래. 네가 너무 오래 살았다.”
“이호정이 최, 정화를!”
“…미친!”
팔을 내저으며 소리치는 민재의 입을 간신히 막았다. 민재가 숨넘어가는 웃음소리를 내며 내 손을 끌어내렸다. 민재는 내 팔을 내리고 어깨를 바짝 끌어안았다. 결국 민재에게 어깨가 붙들린 채 부모님 앞에 섰다.
“민재도 같이 밥 먹고 갈 거지?”
“네. 어머니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어깨를 비틀어 품을 벗어났다.
“잘사는 놈이 더한다고, 너 왜 맨날 얻어먹냐.”
“잘살아도 친구 부모님한테는 얻어먹는 거다. 이 정 없는 이호정 놈아.”
“말은 잘하지.”
민재는 굴하지 않고 우리 부모님 사이에 팔짱을 끼고 섰다. 성큼성큼 강당을 빠져나가는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부잣집 놈들만 다니는 학교. 민재의 아버지도 외곽에서 규모가 큰 물류업을 하는 회사의 대표라고 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한 후로 친구들과 놀며 어울리는 것도 꺼리는 내게 민재는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하게 대해주는 유일한 놈이었다.
강당을 벗어나는 세 사람에게 붙으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호정 학생? 잠시 시간 될까요?”
군청색 정장이 강당의 큰 창으로 들어온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이미 강당을 나간 민재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연락을 남기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남자는 키도 컸지만 어깨도 족히 내 두 배는 됨직 보였다. 절로 기가 죽는 외형이었다. 남자를 따라 강당 단상 뒤로 들어섰다. 한재영이 의자에 앉아 엄지손톱을 반대편 손으로 꾹 누르고 있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정아!”
나를 발견한 한재영이 벌떡 일어나 내 옆에 섰다. 뭘 또 답지 않게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나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잘 사는 집 놈들 중엔 아버지 눈치를 보고 무서워하는 인간들이 많던데 한재영도 그런 쪽인 걸까, 생각했다. 내 형편에 또다시 한재영을 안쓰러워한다는 전제가 성립할 수 있나 하는 이성적 판단은 잠시 뒤로 미루었다.
맞은편으로 정장을 입은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남자가 몸을 비키니 그 앞에 앉은 이사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 저는 왜…….”
상을 다시 돌려달라는 건가. 상패를 만지작댔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니 돌려달라고 한다면 응당 돌려주는 게 맞을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패 사진이라도 찍어둘 걸, 생각했다. 나를 빤히 보던 이사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재영이는 잠시 자리 비켜주고.”라는 말에 나도 한재영처럼 긴장하고 말았다. 뒤에서 불안한 숨소리를 내던 한재영이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붙였다.
“아버지가 왜 너를 불렀는지 모르겠어. 난 그냥 너랑 친구인데, 상 같이 받으면 한국은 안 되더라도 외국 대학은 원하면 갈 수 있고… 그래서 학교에 말했던 건데. 원래 이런 거 신경 쓰던 분…….”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으응… 미안. 미안해 호정아.”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한재영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다. 한재영이 주춤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정장을 입은 남자도 함께 나갔다.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앉아있던 이사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올려봤다. 마주한 눈을 피해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에 이사장이 먼저 내 눈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사장인 한재영의 아버지는 한재영만큼이나 풍채가 컸다. 덕분에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옆에 서면 위압감이 들 정도라 한재영의 불안해 보이던 모습이 단번에 이해될 정도였다.
“재영이랑 제 사이는 알죠?”
“네.”
이사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화를 낸 것도 아닌데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정말 재영이랑 친구가 맞나요?”
“아, 네.”
머뭇대며 답했다. 이사장이 고개를 살짝 꺾어 내 얼굴을 살폈다.
“거짓말은 아니죠?”
질문은 집요한데, 추궁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아닌데요.”
“그럼 어떻게 친구가 된 건지 물어도 될까요?”
예의를 차린 말투였지만, 명백히 아래를 향한 시선이었다. 아들인 한재영도 벗어나지 못한 위축감을 내가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거짓말이라면 꽤 능통했다. 민재와 숱하게 자율학습을 빼먹으면서도 나만 크게 혼나지 않았던 이유엔 표정 연기가 한몫했을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 어떤 영웅심리가 발동한 것인지 한재영이 그저 안쓰러워서인지 거짓말은 보다 수월하게 입 밖으로 뱉어졌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요. 재영이는 반장이라 친구들도 원래 잘 챙겼고요.”
“질문을 다시 하죠. 어떻게 친해진 건지 물어도 되겠죠?”
역시 아들의 친구라기엔 내 존재가 못 미더운 게 분명해 보였다. 친구가 아니니 걱정 마시라 하고픈 걸 한재영 얼굴을 생각하며 꾸역꾸역 참았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같았어요. 보통은 멀어질 일인데 재영이는 좀 승부욕이 없다고 해야 할지, 양보심이 많다고 해야 할지. 아무래도 착해서겠죠? 그 여자애 이야기하면서 친해졌어요. 나중에는 재영이가 잘해보라고 도와주기도 했고.”
“재영이가 승부욕이 없었다?”
고등학생 남자 두 명이 여자 이야기 빼고 뭘 더 할 게 있을까. 민재와 나만 해도 그랬다. 일주일에 서너 번도 더 울리는 민재의 전화 속 이야기도 전부 여자애들 이야기뿐이었으니까.
“네. 나름 친구라고 봐준 거 같기도 하고…….”
“그 여자애 이름이 혹시.”
“네. 뭐, 부회장… 최정화요.”
괜히 마음이 쓰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휴대폰이 몇 번 울리다 조용해졌다. 민재의 연락이었다. 잠시 나를 보던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더 의심 없이 내 말을 믿기로 한 듯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재영이한테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서, 나도 놀라서 이러는 거니까.”
“네.”
주머니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혹시 재영이 관련해서 연락할 일이 생기면 여기로. 부탁할게요.”
“…네.”
이사장이 내민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이번엔 엄마의 전화였다.
“저, 죄송한데 저희 부모님이 밖에서 기다리셔서요. 재영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익숙한 거짓말을 하며 나섰다. 이사장에게 전화할 일은 앞으로도 내게 절대 생기지 않을 일이었다. 이사장이 내 뒤통수를 빤히 보는 게 보지 않고도 느껴졌다. 강당 뒤의 대기실을 빠져나오자 한재영이 불안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손으로 ‘잠시’를 표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나 이제 나가. 어, 어. 알아. 거기로 갈게.”
한재영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착하게 날 기다렸다. 한재영과 서 있던 남자가 대기실로 다시 들어가는 걸 곁눈질했다. 한재영은 내 전화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다가왔다.
“미안해. 아버지가 친구에 예민해 하셔서.”
“다 너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지.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나 부르신 거 같던데.”
“나를?”
한재영이 눈썹을 올리며 자신의 가슴 앞을 가리켰다. 그럼 날 걱정해서 부른 거겠냐. 피식 웃으며 한재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상, 고맙다. 다음에,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보고. 아. 말하다가 내가 네가 최정화 좋아했었다고 했는데, 괜찮지?”
“아… 상관없어. 저기, 호정아.”
한재영이 또 휴대폰을 꺼내려 했다.
“미안. 밖에서 다들 나 기다려서.”
바쁜 척을 하며 한재영을 비껴 달렸다. 뒤에선 한재영이 얼빵한 표정으로 멍하니 날 쳐다봤다. 나와 맞지 않는 건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기 마련이었다. 한재영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부담스럽다 못해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존재. 나와는 절대 어우러질 수 없는 존재. 그게 한재영이었다.
강당을 벗어나니 운동장에 선 사람들 사이로 민재와 부모님이 보였다. 민재가 안쪽 볼을 혀로 훑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어디 갔다 온 건데? 너 자꾸 나한테 비밀 만들면 죽는다.”
“스물에, 그것도 무식한 네 손에는 절대 죽고 싶지 않은데.”
“그러니까 나한테 잘하라고. 나 좀 짜증나게 하지 말고.”
장난치는 민재의 팔을 끌어 엄마 옆에 섰다. 오랜만에 엄마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옆을 보니 아빠의 얼굴도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졸업이라는 게, 거짓이지만 그래도 나름 상 한 장 받았다는 게 생각보다 더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빠 품에 상장을 넘기고 엄마와 함께 앞서 걸었다. 뒤에 선 민재와 아빠가 상패 안을 열어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범벅된 문구를 읽기 시작했다. 상장에 범벅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숱한 거짓들에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 * *
졸업 후 한 달 동안은 매우 나태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물론 모든 나태한 하루는 민재와 함께였다. 대학은 미리 준비할 게 많지 않냐고 물으니 민재는 옷만 사면 된다며 따로 준비할 건 없다고 했다.
민재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를 졸라 오토바이를 샀다. 민재가 산 오토바이는 오토바이만 해도 오천만 원이 넘었다. 기타 악세사리까지 더하면 천만 원 정도가 더해진다고 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차를 사겠다는 말에 민재는 여자 친구가 생기면 그 핑계로 차도 살 거라 답했다.
“차 살 핑계는 평생 못 대겠네.”
“와. 이호정 존나 나쁜 새끼. 얼굴만 착하고 입은 악마인 새끼.”
나와 똑같이 공부도 못하고 주기적으로 안 좋은 일에도 얽혔던 민재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후원금으로 나름 수도권 내의 중위권 대학에는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가 나보고 본 적 없는 불효자래. 집 거덜 낼 새끼라고.”
민재는 낄낄댔지만, 나는 민재의 그런 말조차 못내 부러워할 만큼 철이 없었다. 우리는 종일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에겐 관심이 없었다. 휴대폰만 붙들고 있다가 때가 되면 알아서 밥을 먹는 식이었다.
“한재영한테 연락해 볼까?”
“뭐하러.”
시큰둥하게 답했더니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던 민재가 고개를 들어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너. 한재영한테 묘하게 날 세우는 거 그거 자격지심이다.”
“알아.”
“오. 안다고?”
침대로 기어 올라온 민재가 엉덩이를 밀며 옆에 누웠다. 혼자 눕기에도 벅찬 좁은 침대에 둘이 누우니 몸이 벽에 바짝 붙게 되었다. 짜증내며 몸을 돌렸다. 민재가 뒤에서 옆구리를 찔러대도 모른 척 무시했다.
“최정화한테 연락해줄까?”
“미친놈아. 됐다고 했지.”
“데이트 한 번 못해보고 포기하려고?”
전교 꼴등에 돈도 없어 대학을 안 가는 것처럼 정화를 좋아했던 마음을 접은 것도 내 주제를 아는 것의 연장선이었다. 민재는 계속해 옆구리를 찔러댔다. 무시하고 또 무시해도 민재는 나와 달리 포기를 몰랐다.
“야, 그만.”
“호정아. 한재영 영국 가는 거, 너는 알았어?”
“영국?”
“어. 국내 대학은 수준에 안 맞는다, 이거지. 그런 재벌 놈들 뻔하잖아.”
뻔하다는 말에, 그 기준에는 전혀 뻔하지 않았던 한재영의 평소 모습이 떠올랐다. 웃음이 새어났다.
피식대자 민재는 내가 화가 풀렸다고 믿었는지 냉큼 옆구리에 제 발을 올려 날 끌어안았다.
“그런 새끼들은 군대도 안 가겠지?”
“야. 군대 얘기는 금지인 거 까먹었지? 우리끼리 이러기냐.”
“아. 죄송.”
민재의 몸이 더 가깝게 붙었다. 팔꿈치로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배를 쳐냈으나, 민재는 “억” 소리를 내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한국에서 다닌 민재지만 출생만은 미국에서 했다고 했다.
배 속 아이가 남자아이인 걸 알고 출산일 한 달 전 미국으로 갔다던 민재의 가족은 민재가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민재의 아빠가 영주권이 있었던 탓에 민재의 국적문제도 수월하게 해결됐다. 우리 고등학교의 남자애들 절반 이상이 민재처럼 군대가 면제였다. 오히려 군대를 가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소수여서 민재는 종종 일부러 나를 놀리기 위해 군대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나 일하러 갈까?”
뜬금없이 툭 던진 말에 연신 내 몸을 안고 흔들던 민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민재의 몸을 벗어나 자리에 앉았다. 민재가 나를 따라 옆에 앉더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일?”
“어. 그냥 돈 벌 수 있는 거. 대학도 안 가는데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건 그런데.”
민재는 말끝을 줄이더니 풀썩 소리를 내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난 그냥 너랑 대학 같이 다니면서 놀고 싶다. 이호정 놈아.”
민재의 말이 진심인 건 알았다. 친구로서 나를 걱정하고 또 안쓰러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잘사는 동네, 이름난 좋은 중학교에서 만난 사이였으니 그 미래까지도 비슷할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당연히 민재도 그랬을 거다. 동네에서도 돈 있는 애들이 간다는 고등학교에 나란히 합격했을 때도 당연히 고등학교 3년뿐 아니라 그 후의 대학, 결혼까지 모두 비슷한 방향일 거라 생각했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로 이어지고 몇몇 아이들이 은근히 나를 피할 때도 민재만은 여전히 내 옆을 지켰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민재가 이런저런 핑계로 내주는 고등학교 학비를 받았으니 염치라는 게 없기도 없었다.
민재는 누가 나를 싫어한다더라, 누가 나를 거지라고 한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일절 전하지 않았다. 듣고 흘리는 방식으로 묵묵히 내 옆에서 이전과 같은 친구 노릇을 해냈다.
아빠 사업이 부도를 맞고 얼마 되지 않아 어울리던 무리에서도 은근히 멀어졌다. 아이들은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모임이나 여행에서 나를 제하는 방식으로 내가 알아서 떨어지길 바랐다. 그럴 때도 민재는 내 옆에 있었다. “씨발. 거기에 예쁜 여자가 한 명도 없는 거야.” 핑계는 늘 빈약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늘 고마웠었다.
“야. 집에 좀 가라. 너 며칠째 우리 집에만 있잖아.”
“아. 무슨 집주인인 줄.”
“우리 아빠가 가라고 하면 갈 거냐?”
“와. 집주인 아들 유세 쩔고.”
민재는 늘어난 내 잠옷을 입은 채로 끝끝내 침대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민재야.”
“어.”
“진짜. 농담 아니고 나 돈 벌어야 한다니까.”
“어. 그럼 같이하자.”
어느새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민재가 고개를 빼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슬쩍 나를 보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긴 민재는 몇 번 화면을 돌리다 한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시체 닦는 이런 일은 어떠냐?”
민재가 내민 화면에는 턱이 빠지게 입을 벌린 미라의 사진이 있었다. 휴대폰을 탁 밀쳐냈다.
“시체를 왜 닦는데?”
“아. 이 미친놈아. 나보다 더 무식… 아. 맞다. 이호정 이거 전교 꼴등이었지.”
민재가 눈을 흘기며 상체를 들더니 장난스럽게 내 볼을 살짝 찔렀다.
“아. 나 20년 인생에 또 전교 꼴등이랑 겸상을 다 하네.”
“미친. 시체를 왜 닦냐고. 그거 돈 많이 준대?”
민재는 마치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위를 살피며 몸을 붙였다. 가까워진 얼굴이 징그러워 몸을 움츠렸다. 민재는 내 어깨를 잡더니 귀에 대고 “돈 존나 많이 준대. 사람 죽으면 그 시체를 닦아야 한다더라. 막 몸에 있는 구멍에서 물이란 물은 다 나와서.”라는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아. 돈 아무리 많이 줘도 그건 못 하지.”
“왜? 이 새끼, 이거. 말만 그렇게 하고 돈이 엄청 간절하지는 않은 거네.”
“야. 내가 시체를 어떻게 봐. 무섭고 싫어.”
“무섭고 싫어.”
민재는 내 마지막 말을 흉내 내며 낄낄거렸다. 주먹으로 세게 배를 때리고 나서야 민재는 컥컥거리며 웃음을 멈추었다. 민재는 한참이나 나를 흘겨보다 침대에서 잠들었다.
부모님과 사이가 나쁜 편도 아닌데 민재는 줄곧 우리 집에서 놀고 잠을 잤다. 졸업식 때도 정작 자기 부모님에게는 절대 오지 말라고 하더니 우리 부모님과 밥을 먹고 집에서 잠도 자고 간 놈이었다.
잠든 민재를 두고 부엌에 가 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민재는 인생에 딱히 고민이랄 게 없는 놈이었다. 특히나 금전적인 고민이라면 그에겐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고민이라는 게 맞았다. 나 또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랬었으니까,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렇다면 민재보다도 더 돈 많은 집의 아들인 한재영은 어떨까. 대학교도 영국에 소재한 대학교, 또 그게 너무나 당연한 인생. 만나고 싶은 여자는 그게 누구든 만날 수 있고, 가지고 싶은 건 그게 뭐든 가질 수 있는 인생. 지금은 그럭저럭 조금 티가 나는 정도의 격차라지만 몇 년 후에는 하늘과 땅의 격차가 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뱉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돈 생각만 하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답답한 마음으로 물을 더 따르려는데 방에서 시작된 민재의 코 고는 소리가 거실까지 이어졌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남의 집에서 제 집보다 더 편하게 자는 놈은 저놈이 유일할 거라 생각했다.
민재는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가 오늘도 안 들어오면 죽여 버린다네.”라는 말을 할 땐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너희 아버지 인자하신 편인 거야.”
무심하지만 한껏 진심이 담긴 내 말에도 민재는 절레절레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빠도 참. 친구한테 질투를 다 한다니까.”
“질투가 아니라 이 정도면 가출이라고 생각하실걸. 미친놈아.”
민재는 여전히 풀죽은 얼굴로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갔다. 마치 막 독립하는 아들처럼 우리 엄마와 아빠를 한 번씩 안기까지 했다. 셀 수 없이 미친놈이라는 욕을 듣고 나서야 민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헬멧을 썼다.
민재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 날부터 나는 줄곧 컴퓨터 앞에 앉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공부머리도 아닌 데다 타고난 능력도 없었고 자격증이나 잘하는 것도 하나 없어서 머리를 쓰는 업종에는 이력서조차 넣을 수 없었다. 몸 쓰는 일을 찾는 게 편하다는 결론은 애초에 정해져 있던 답처럼 빠르게 내려졌다. 할 수 있는 게 정해져 있는 삶이니 할 수 있는 것 몇 가지 중 하나를 하는 게 옳았다.
민재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후 며칠이 더 지나고, 민재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동네 치킨집에서 닭을 튀기는 일의 면접을 보고 막 나오던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민재에게 전화를 할 참이었다. 휴대폰에 뜬 민재의 이름에 웃음이 났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가지고.”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낮은 목소리로 물었더니 민재는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김민…….”
-호정이니?
“아. 네. 안녕하세요.”
민재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민재의 번호가 맞았다.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민재 어머니의 숨소리만 너머로 들렸다.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도로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불안한 기분에 휴대폰을 두 손으로 쥐었다. 별거 아닌 말을 해주길 바랐다. 민재 어머니는 한참이나 격한 숨만 내뱉다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호정아. 우리 민재가 어제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아, 네. 어머니. 저 지금 갈게요. 어디 병원인가요?”
조금 다친 거라고.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던 놈이니까, 다친 김에 자기 엄마를 통해 나를 놀리려는 속셈이라고. “호정이 좀 놀리게 전화해 봐.”라는 말을 하며 이전처럼 어머니 옆에서 낄낄댔겠지. 그런 바람 같은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
-고암장례식장이야. 올 수 있니?
집엔 마땅한 정장도 하나 없었다. 당연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도 가지 않은 나에게 정장을 사줄 명분이나 이유도 없었으니까.
부모님 옷장을 뒤져 유행 지난 검은 정장을 꺼내 입었다. 아빠의 정장은 내게 품도 길이도 맞지 않았다. 엉성한 정장 차림으로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동안 눈은 깜빡이는지 숨은 쉬는지 걸음은 제대로 걷고 있는지 모든 게 아득하기만 했다.
숨은 막히고 목구멍엔 자꾸만 뜨거운 숨이 차올랐다. 숨을 쉴 때마다 울컥울컥 모래알이 목에 차는 기분이었다.
장례식장에 어떻게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경황없는 와중에 1층의 모니터 속에 적힌 303호 숫자 옆 김민재의 이름을 보았다. 멍청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는데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김민재.”
고개를 푹 숙이고 3층의 빈소를 향했다. 일부러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혼자 있을 자신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속 거울로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는 중에 가쁜 숨을 헐떡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장례식장 안엔 조문객이 별로 없었다. 입구에서 보였던 드나드는 사람들은 민재 아버지 거래처나 지인, 사업적으로 교류하는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식의 장례에는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던 예전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마음이 애달파 자식의 친구나 가까운 지인만 부른다던 그 말을 떠올리자 목에서 까끌거리던 모래알이 눈 뒤편으로 굴러온 것 같았다.
“후우…….”
세차게 눈을 비볐다. 때마침 친척으로 보이는 조문객을 배웅하러 나온 민재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민재 어머니의 눈이 빨갛게 익었다. 빨간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호정아. 호정아. 아이고. 호… 정아.”
발에 반쯤 걸린 슬리퍼를 너덜거리며 민재의 어머니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우는 어머니를 안고 거친 숨을 들이켰다. 계속 목을 답답하게 하던 울분이 터지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딸꾹질 소리를 내며 울음을 간신히 틀어막고 민재의 영정사진 앞에 섰다.
새벽에 문을 여는 소리가 나 거실에 나왔더니 그곳에 민재가 서 있었다고 했다.
“어두운 데 서서 뭘 하냐고 물었더니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그게 마지막일 줄은. 호정아. 우리 민재 어떡하니.”
나 말고도 워낙 친구가 많은 놈이었다. 오토바이를 함께 타는 모임의 친구들도 여럿이었다. 울음을 꾹꾹 누른 채로 “네네.” 바보 같은 답만 했다.
“새벽에 트레일러 기사들이 많이 졸잖아. 속도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민재 어머니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주먹을 세게 쥐고 부들거렸다. 온몸이 떨릴 정도라 다가가 주먹을 감쌌다. 작게 “어머니.”라고 부르자 그제야 민재 어머니가 빨간 눈을 풀며 상이 차려진 테이블로 안내했다.
“너한테 전화하고 민재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친구들한텐 다 문자 돌렸어. 저기 먼저 온 친구, 호정이도 알지? 재영이.”
민재 어머니가 가리킨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있는 한재영이 보였다.
“아, 네. 친구예요.”
“잘 됐다. 호정이가 재영이 좀 챙겨줄래? 문자 보내고 민재한테 가장 먼저 달려온 친구인데, 민재 아빠는 자꾸 저 친구 눈치만 보고 있고. 보다시피 난 조문객들 때문에.”
“네.”
쭈뼛대며 구두를 벗었다. 한재영은 내가 들어서자 테이블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날 쳐다봤다. 눈인사만 대충 하고 한재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이렇게 볼 줄은 몰랐네.”
다음에 볼 땐 꼭 셋이서 봐야 한다던 민재의 말이 떠올라 속이 쓰렸다. 엉성하게 벌어진 재킷을 다듬었다. 한재영이 표정을 굳히더니, 대뜸 손을 뻗어 내 눈 밑을 훔쳤다.
“뭐…….”
뭐하는 짓이냐고 물으려는데 한재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묵묵히 나무젓가락을 뜯어 내게 내밀었다.
“울었네?”
“아. 어.”
한재영의 손이 스쳐 갔던 눈 밑을 쓱쓱 문질렀다. 품이 엉성한 재킷이 쪽팔렸다. 내가 한재영을 불편해하고 피하는 게 자격지심이라던 민재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속도 좋지 않아 다시 젓가락을 내리려는데 한재영이 내 손을 잡고 고기 쪽으로 움직였다.
“좀 먹어. 조문객이 와서 맛있게 먹어줘야 더 좋은 곳으로 간대.”
손을 비틀어 잡힌 손을 빼냈다. 한재영은 무뚝뚝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억지로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한재영의 머리통만 보고 있었다.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해서 무슨 이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입만 우물댈 뿐 입 밖으로 뱉어지는 말이 없었다.
“졸업하고 거의 한 달 만이지?”
한재영이 물었다. “어.”라고 답하려다 문득 민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영국에 간다고 들었는데.”
“아… 민재한테 들었어?”
한재영이 고개를 들어 살짝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회사끼리 알다 보니까.”
괜히 머쓱한지 목 옆을 옅게 긁더니 날 보며 다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직접 민재한테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리려는 몸짓이 어쩐지 귀여워 웃음이 날 뻔했다.
“지난주에 인터뷰는 하고 왔어. 7월부터 학사라 아직은 시간도 좀 있고. 남은 일도 세 가지 있었고.”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기에 나도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남은 일을 정확한 개수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낯설면서도 어떻게 보면 그런 모습조차 참 나와 다른, 그런 표현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묵히 웃던 한재영이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세 가지 정도. 이 말이 덜 어색하지?”
“뭐?”
한재영이 어벙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순간 여기가 민재의 장례식장이라는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입을 가리고 웃으니 한재영이 나를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너 생각보다 좀 웃긴다?”
“내가?”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자신을 가리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 처음 들어.”
한재영이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며 내 앞으로 음식을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다.
“괜찮아. 입맛도 없고.”
“이거라도 먹어.”
한재영이 내민 탄산음료가 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등학교 땐 늘 입에 달고 살던 음료였다. 될 놈들은 타인에게 선의를 베풀 때조차 아무거나 내밀어도 그 사람이 제일 선호하는 걸 주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덕분에 민재 마지막이라도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
한재영이 캔을 따 내게 내밀었다. 마지못해 캔을 받고 한 모금 마셨다. 갈증으로 거칠던 목에 탄산이 알알이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게. 미친놈. 그렇게 셋이 보자고 우겨대더니. 결국 이렇게 셋이 보게 되네.”
향냄새가 테이블 앞까지 밀려왔다. 다시 고개를 돌려 민재가 있는 빈소를 응시했다. 향 연기가 민재의 영정사진 앞을 안개처럼 스쳤다. 이제 막 민재의 영정사진에 인사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조문을 마친 후 어머니를 안고 코를 훌쩍였다. 여섯의 아이들은 함께 맞춘 것으로 보이는 같은 브랜드의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자기 옷이니 모두 태가 좋았다. 내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재킷 단추를 풀었다. 속이 답답하고 쓰렸다.
막 조문을 마친 민재의 친구들은 한때는 나와도 친했던 놈들이었다. 빈소에서 우후죽순으로 나온 아이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내가 앉은 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들어오던 아이들 중 몇이 먼저 나를 발견했다. 반가운 척을 하며 몇 놈이 손을 흔들었다. 눈인사를 하며 대충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 맞지?”
한재영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한재영은 젓가락으로 땅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느리고 여유로운 동작에 하마터면 해야 할 답도 잊을 뻔했다.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술을 황급히 닫았다. 한재영이 막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재영은 다정한 눈길로 나를 보더니 이내 눈을 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친구들한테 가도 돼.”
친구들. 소란스러운 테이블 쪽으로 더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졸업하기 전에도 민재가 아니면 연결고리랄 게 없는 이들이었다. 아닌 척은 했지만, 아버지 사업이 망한 후로 묘하게 나를 겉돌게 만든 놈들이기도 했다. 돈이 서열이 되는 학교였으니 민재가 아니었다면 대놓고 나를 괴롭히거나 무리에서 따돌렸을 게 뻔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졸업 후론 한 번도 개인적인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필요한 존재. 저들과 나는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오. 한재영. 반갑다. 여기서 다 보네. 너 민재랑 친했었던가?”
무리 중 가장 오지랖이 넓었던 유상현이 내 옆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물었다. 한재영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유상현의 속이 빤했다. 너무 투명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유상현이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쌌다. 만지작대는 감촉이 싫어 뒷덜미를 타고 미세한 소름이 돋아났다. 땅콩을 뒤적이던 한재영의 젓가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를 향해있던 한재영의 시선은 내 어깨를 감싼 유상현의 손을 따라 곧 그의 얼굴까지 이어졌다.
“친한 건 아니었어. 내가 친해지고 싶어 했지.”
한재영이 피식하고 옅은 웃음을 흘렸다. 골목에서부터 졸업식까지 봤던 한재영의 웃음과는 결이 달랐다. 오히려 말을 트기 전 내가 한재영을 떠올렸을 때의 잔상과 비슷해 보였다.
“네가? 김민재랑?”
한재영은 묘하게 웃기만 할 뿐 더 답하지 않았다. 때맞춰 상조 도우미가 상을 더 추가할 거냐고 물어왔다. 괜찮다고 답할 새도 없이 유상현이 소주 두 병을 추가했다. 한재영이 있는 한 이 테이블을 먼저 떠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의외네. 둘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 3반?”
“어.”
유상현은 내 어깨를 잡은 채로 다시 한재영을 보며 물었다. 답은 내가 했다. 한재영이 반찬 속을 느리게 뒤적대던 젓가락을 놓았다. 의자에 몸을 기댄 한재영은 나와 유상현을 번갈아 보았다.
“민재가 호정이랑 친해서. 그래서 친해지고 싶었어.”
유상현이 길게 찢어진 눈을 더 가늘게 뜨며 날 쳐다봤다. 뜨악한 표정이 무척이나 노골적이었다.
“호정이 좋잖아. 멋있고.”
한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몸을 앞으로 당겼다. 한재영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다행히 유상현이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 내렸다.
“이… 호정이?”
그리고는 비웃듯 웃으며 내 어깨를 제 어깨로 툭 밀었다. 마치 한재영에게 받는 칭찬이 대통령의 칭찬쯤이나 되는 듯 유난스러운 반응이었다. “한재영한테 칭찬도 다 받고, 출세했네.”라는, 하지도 않은 말이 환청으로 들릴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상현에게 맞은 적이 있었다. 이제 막 각각의 중학교에서 올라온 다른 무리가 민재를 필두로 한데 섞이던 중이었다. 서열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재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날, 유상현과 그 무리가 나를 골목길로 불러냈다. 한재영과 처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던 그 골목이었다.
뭘 하자는 건지 눈에 보였지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전 여자 친구와 뭐가 있었느니 꼬셨느니 하는 이야기는 핑계일 뿐이었다. 유상현의 전 여자 친구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중 내 말을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일부러 심하게 반항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막 위태로워지기 시작한 시기라 부모님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닥에 볼이 붙어 있었고 눈 아래가 찢어져 피가 나고 있었다. 몸은 다음날 보라색과 초록색으로 온통 물들었다.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재영이 너 담배 피워? 나갈래?”
유상현이 물었다. 어떻게든 나를 빼고 한재영과만 대화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탄산음료의 캔을 만지작댔다. 골목길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한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배 안 피워. 누가 싫어한다고 해서.”
“어? 누가? 여친? 와. 너 여자 친구 있구나.”
유상현의 눈이 반짝였다. 턱을 괴고 앉은 유상현의 옆얼굴에 속이 비틀렸다. 한재영이 만나는 여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일까 궁금해 하는 유상현의 눈이 뱀처럼 번뜩였다.
한재영은 대답 없이 흐리게 웃기만 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보면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도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었다. 또렷한 눈매를 마주 보고 있자니 부담스러웠다. 문득 담배를 떠올리자 그렇지 않아도 뒤틀리던 위가 더욱 빠르게 꼬였다. 입안 가득 쓴 위액이 고였다.
“아. 미안. 나 잠시만.”
화장실에 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상현이 눈을 반짝거렸다.
“어어. 갔다 와.”
드디어 나를 제외하고 한재영과 둘만 앉게 됐다고 생각한 유상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제 인생에 도움 될 인간들과만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속물적으로 느껴지다가도 어쩌면 그런 인간들이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철이 든다는 건 저런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기준이라면 민재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철없는 삶을 산 게 분명했다. 자신의 인생에 하등 도움 되지 못할 나라는 존재를 끝까지 친구로 두고 갔으니까. 휘청하며 억지로 구두에 발을 밀어 넣었다. 뒤축이 구겨졌다. 토할 듯한 기분으로 나오려는데 옆으로 유상현의 친구이자 한때는 나와도 같은 무리에 섞여 있었던 이서정이 붙었다.
“호정. 오랜만이지? 저기.”
“미안. 나 잠시 화장실 좀.”
위액이 침처럼 입안 가득 고였다. 간신히 위액을 삼키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이서정이 나를 따라 나오려는 듯 구두를 신기 시작했다. 토하는 꼴까지는 보이기 싫었지만 화장실에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는 건 오버스러웠다. 언젠가 민재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호정 너는 세상 사람들이 다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아는데, 그거 아니다? 네 생각보다 너 지켜보는 사람 많아.” 낄낄대던 민재의 얼굴을 떠올리자 영정사진 속 어색한 민재의 웃음과 대비되며 금방이라도 구토가 일 듯했다.
이서정은 언제부터 이런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유상현의 옆에 배알도 없이 앉아있던 데다, 한재영의 앞에서 한없이 주눅 든 채로, 맞지 않는 볼품없는 정장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추고 거기에 하나뿐인 친구마저 잃은 초라한 내 모습을. 도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뒷머리를 당기며 붙었다.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서정이 나를 따라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정아.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이서정의 목소리가 컸다. 민재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일로 주목받고 싶진 않았다. 비틀대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미 손가락 사이로 노란색 위액이 줄줄 새어났다. 변기에 얼굴을 박고 속을 게웠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들어온 이서정이 내 등을 두드렸다.
“괜… 윽… 괜찮아.”
먹은 것도 변변치 않은데 구토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체한 거야? 신경성이야?”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이서정이 내 걱정이라니, 같잖고 우스웠다. 유상현이 나를 골목으로 불러냈을 때 그 옆엔 이서정도 있었다. 같은 무리로 고등학교 내내 함께 어울려 다니긴 했지만 이서정과는 따로 연락한 적도 없는 사이였다. 3년 동안 둘이서만 본 적도, 따로 논 적도 없었다.
등을 들썩였다. 온몸에 경련이 오는 낯선 느낌에 손을 내려 보았다. 어색하게 덜덜 떨리는 손을 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의 일은 다 잊고 나름 친구로, 하나의 무리로 3년간 잘 어울리며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이면 민재의 장례식장에서 그 일이 짙게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저기. 호정아. 이 타이밍에 이런 얘기 좀 그렇긴 한데. 사고 나던 날 말이야, 그날 민재한테 전화가 왔…….”
“호정아!”
오른손으로 변기를 짚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이서정의 뒤에 한재영이 서 있었다. 한재영은 이서정을 거칠게 밀치고 반쯤 열려있던 문을 마저 열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토했어?”
“…어. 별일 아니야.”
한재영의 손을 못 본 척하고 자리에서 혼자 일어났다. 이서정은 나와 한재영을 한 번씩 쳐다보다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색한 눈빛이었다. 민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세면대를 꽉 쥐었다. 눈앞이 흐렸다.
“민재, 왜? 무슨 일인데?”
거울에 비친 이서정을 향해 물었다. 이서정이 다가오려는데 그 앞으로 한재영의 모습이 겹쳐졌다. 한재영의 팔이 내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왔다. 날 부축하려는 듯했다. 기운이 빠진 상태라 나도 더 자존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 한재영에게 기댄 채로 다시 이서정을 쳐다봤다. 이서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지 기억나? 민재… 2학년 때.”
이서정이 머뭇대며 말을 이었다. 한재영이 이 이야기를 듣는 게 껄끄러운 듯 보였다. 당연했다. 이서정의 입에서 나온 예지라는 이름에 나도 움찔하며 한재영의 눈치를 살폈으니까. 한재영에게 기댔던 몸을 일으켜야 했다. 세면대로 뻗으려는 내 손을 한재영이 저지했다. 자신에게 더 기대있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 일이면 민재 장례 끝나면 얘기하자. 전화할게.”
“어. 근데 너 진짜 속 괜찮아? 체한 거 아니야?”
이서정이 물었다. 입을 씻는 중에도 한재영은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물로 아무리 입을 씻어도 혀가 쓰렸다.
화장실에 둘을 두고 먼저 빈소로 돌아왔다. 민재의 웃는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민재의 아버지가 내 어깨를 다독여주셨다. 민재가 보고 싶었다. 민재가, 너무나 간절히 보고 싶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겨우겨우 벽을 짚었다. 복도 끝에 선 한재영이 보였다. 유상현과 함께 자판기 앞에 서 있던 한재영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느리게 테이블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머리를 꽉 잡아 눌렀다. 눈알이 뜨겁게 타는 기분이었다. 속도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저녁이 되고 한재영은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내일 다시 올게.” 한재영이 말했고 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들과 어색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소식을 들은 부모님이 밤늦게 빈소를 찾아왔다. 엄마는 울면서 와서인지 벌써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고 아빠도 경황이 없어 보였다. 내가 입은 자신의 정장을 보던 아빠가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역하고 짙은 술 냄새가 났다.
민재의 어머니는 우리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민재의 아버지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아빠의 표정이 어두웠다.
“넌 내일 민재 발인하는 거 보고 올 거지?”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이미 먹었다는 의미로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빠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엄마와 함께 장례식장을 떠났다. 부모님이 가고 나니 더욱 기운이 빠졌다.
처음엔 헛헛하기만 했던 게 중간엔 공상처럼 허황된 감정으로 빠지다가, 출상이 다가올수록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화장 시간에 맞춰 내일 아침 아홉 시에 출상이 이뤄질 거라 했다. 민재의 관을 들 사람으로 나와 유상현을 포함한 아이들 몇이 정해졌다.
민재의 관. 민재의… 관. 어색한 표현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아무리 곱씹어도 소화되지 못할 단어였다.
밤을 거의 꼬박 새우다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쪽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에서 어제 마셨던 탄산음료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 인기 있는 음료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동이 난 듯했다. 마침 아침에 정산을 위해 나온 상조 도우미에게 음료를 물었다.
“그건 없는데…….”
“아, 어제 먹어서 혹시나 해서요.”
“어제요? 글쎄. 가끔 재고에 따라서 종류가 조금씩 바뀌기도 하긴 하는데. 아무튼 지금은 그 음료 없어요. 어제도 없었을 텐데.”
“아. 네. 죄송합니다.”
냉장고에서 음료 대신 생수를 꺼내 목을 채웠다. 갑갑한 속이 씻기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하고, 아이들과 지하로 내려갔다. 민재가 누운 관이 보였다. 운구를 도울 친구 몇과 함께 가족 분들의 뒤에 섰다. 장례지도사가 마지막으로 고인에게 인사하라고 말하며 관을 열었다. 단정히 누운 민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굴의 반이 뜯긴 채로 민재는 말이 없었다. 감은 눈 위가 검었다.
‘사람 죽으면 그 시체를 닦아야 한다더라. 막 몸에 있는 구멍에서 물이란 물은 다 나와서.’
철없이 웃던 모습이 떠오르고, 이제야 이 모든 게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민재가 죽었다.
형편이 달라지면서 삶의 결은 달라졌지만 평생 옆에서 낄낄대며 웃어 줄 거라 생각했던 놈이었다. 헛소리를 헛소리인 줄도 모르게 하고, 실없는 농담들로 밤을 지새워도 평생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던 유일한 친구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둘이 있을 땐 여전히 철없는 소리를 할 거라 생각했던, 그런 친구가 죽었다.
이제는 때마다 귀찮게 전화를 걸어올 놈도, 여자 이야기를 지겨운 줄도 모르고 지겹게 할 놈도, 심심하면 집에 찾아와 밥을 같이 먹을 놈도 없다는 현실이 실감 났다. 터진 울음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갈라진 울음이 터졌다.
“김, 민재… 민재야… 으윽… 흐…….”
유상현과 아이들 몇도 울음을 터뜨렸다. 울컥 솟는 눈물을 재차 닦아냈다. 비틀대는 민재 어머니를 품에 안아 다독였다. 원래도 마른 편이었던 민재 어머니는 그새 더 왜소해지셨다.
민재의 관을 짐칸에 실은 후 버스에 올랐다. 운구는 간단하게 민재의 본가만 들르기로 했다. 그 후엔 곧장 화장터로 간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울컥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시린 눈을 비볐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뒤쪽에 앉은 아이들을 피해 가운데 좌석에 앉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는데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손을 내려 얼굴을 확인했다. 한재영이 깊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왔어?”
“응. 아침은 좀 먹었어?”
아침에 오겠다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게 놀라웠다.
“진짜 왔네. 장지까지 같이 가게?”
“어. 와야지.”
당연한 일이라는 말투여서 나도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거. 좋아하지?”
한재영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덥석 품에 안긴 봉투의 입구가 벌어지며 안에 든 김밥과 탄산음료가 드러났다. 아침에 마시고 싶었던 그 탄산음료였다.
“아침에 이거 찾았는데, 없더라.”
“그래? 사 오길 잘했네.”
한재영이 바람 빠진 미소를 짓더니 봉투 안에서 음료를 꺼냈다. 한재영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재영은 이번에도 캔을 따서 내게 내밀었다. 대접받는 기분에 괜히 기분이 불편해졌다. 미묘한 기분으로 한재영이 내민 캔을 받았다.
“김밥은 나중에. 차 안이고 속도 안 좋아서.”
“알았어. 이거라도 먼저 마셔. 차 출발하기 전에.”
“어. 고맙다.”
다정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숱한 남자 놈들과 지내왔는데도 불구하고 한재영은 처음 보는, 생경한 느낌을 주는 남자이다. 살아온 삶과 환경이 다르면 남자라도 이런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단숨에 캔의 반을 비웠다. 목을 긁는 탄산의 감촉이 좋았다. 개운한 느낌이 들면서 내내 몽롱하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음료가 반 남은 캔을 마저 비워냈다. 혀를 입안에 굴리던 한재영이 날 쳐다봤다.
“이런 질문 좀 이상할 거 같은데.”
“어.”
앞좌석에 달린 고리에 막 빈 캔을 넣던 참이었다. 돌아보지 않고 답했더니 한재영이 뜸을 들였다. 때맞춰 버스에 시동이 걸렸다.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귀를 울렸다.
“지금 네 기분. 슬픈, 그런 기분인 거지?”
“뭐?”
질문의 의도를 몰라 되물었다. 내 기분이 궁금하다는 건지, 나름 슬픈 감정을 느끼는 나를 위로하고 싶다는 것인지 헷갈렸다.
“슬퍼 보여?”
한재영이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재영의 눈을 빤히 보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표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어떤 표현도 지금 이 감정에 덧대기에 적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먹먹했다.
“슬픈 정도가 아니라, 따라 죽고 싶을 정도야.”
한재영이 나를 보던 눈길을 거두었다. 내 손 위로 한재영이 자신의 손을 올렸다.
어색해 잡힌 손을 빼냈다. 한재영은 허공에 붕 뜬 자신의 손을 바지에 비비며 어색해했다. 낯선 공기가 머리 위를 짓누르며 내려왔다. 민재의 본가에 들르고 화장터로 가는 동안 한재영은 내게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화장터에서 밥을 먹자는 친구들의 말에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이런저런 핑계도 대지 않았다. 친구들은 더 묻지 않았다. 한재영도 나를 따라 점심을 먹지 않았다. 기사도 내린 버스 안에 둘만 남은 상황이 불편했다. 한재영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민재의 장례가 모두 끝나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야기나 좀 더 나누자는 친구들의 말을 거부하고 돌아섰다. 한재영이 나를 따라왔다. 손에는 내게 주려고 사 왔던 김밥이 든 봉투가 들려 있었다.
“왜?”
왜 따라오느냐고 물으니 한재영이 나를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데려다줄게. 그건 하게 해줘. 친군데.”
친구. 한재영과 나누기엔 낯선 단어이면서도 싫진 않았다. 집도 같은 동네라 그리 멀지 않으니 부담스러울 것도 없었다. 역시 잘난 놈들이라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다들 차를 사는구나 싶었다. 어쩌면 고등학교 때도 차 한 대 정도는 두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운이 없었던 탓에 데려다준다는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멍하니 한재영을 바라보다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영이 먼저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중에 아침에 지하에서 보았던 민재의 마지막 얼굴이 생각났다. 헛구역질이 났다.
한재영은 뒤돌아 나를 보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다. 졸업식에서부터 좀 전까지 몇 번이나 내게 거절당한 손이었다. 한재영은 그런 것에 연연하거나 자존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닌 듯 보였다. 나를 잠식한 자격지심이나 못난 자존심이 한재영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런 인생을 사는 놈들에겐 오히려 내가 시시때때로 느끼는 이런 날것의 감정들이 더 낯선 것일지도 몰랐다. 보폭을 좁혔다. 한재영의 손이 아닌 팔을 감싸듯 쥐었다.
“미안. 좀만 기대서 가자.”
“응.”
한재영은 걸음조차 부드러웠다. 잔잔하고 고요해 걷는 중에도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차에 올라 뻑뻑한 눈을 비볐다. 한재영은 옆 좌석에 나를 앉혔다. 멍하니 앞만 보는 사이, 한재영이 내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어어. 미안. 깜빡했다.”
어색하게 벨트를 쥐었다. 말로 해줬어도 충분했을 텐데 한재영은 내 쪽의 벨트까지 손수 매주었다. 몸에 밴 매너인 것 같았다. 이런 건 배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재영의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도 배울 게 많았다. 보고 있으면 한재영 특유의 나른함이 있었는데, 그게 소위 말하는 우아함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사업이 망한 후로 부모님은 주말 없이 일했다. 게다가 오늘은 평일 저녁이었다. 당연히 집은 비어 있을 터였다. 한재영은 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올랐고 긴 복도까지 따라왔다. 손에 쥔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리며 소리를 냈다.
“설마 집 앞까지 데려다주려고?”
픽, 웃으며 물었더니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아직 네 번호도 모른다?”
“아. 그러네.”
생각해 보니 한재영의 번호를 몰랐다. 한재영도 내 번호를 모르고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민재라는 연결고리가 사라진 지금, 어색하게 한재영이 내민 폰을 받았을 때였다.
“좀 배고프네.”
한재영이 읊조렸다. 낮은 목소리가 평온하게 복도를 울렸다. 한재영의 폰에 번호를 입력하던 손을 멈췄다. 민재의 장례를 끝까지 함께 해준 고마운 놈인데, 배가 고프다는 말이 신경 쓰이는 건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버스 안에서 나와 함께 점심을 굶은 한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만 신경 쓰느라 한재영을 챙기지 못했다. 유상현을 비롯한 친구들은 한재영에겐 분명 어색한 놈들이었을 거다.
친하지도 않은 민재의 마지막 자리를 지켜준 고마운 놈이었다. 망설이다 번호 찍힌 폰을 내밀었다. 뒤돌아 현관문을 잡고 잠시 고민했다.
“밥 먹고 갈래? 참고로 맛있는 건 없어.”
한재영을 보며 물었더니 잠시 멍하니 날 쳐다보던 한재영이 눈을 접어 미소 지었다.
“난 좋지.”
어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민재를 제외하고 이 집에 친구가 온 건 처음이었다. 이전에 살던 집과 비교도 되지 않게 초라한 집이었지만 그 이전 집이라고 해도 한재영이 사는 곳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게 뻔했다. 내가 부자든 거지든 한재영의 앞에선 모두 거기서 거기일 뿐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한재영은 나를 따라 들어오며 정장 재킷 단추를 풀었다. 목에 깔끔하게 감겨있던 넥타이도 느슨하게 풀었다. 한재영을 따라 나도 넥타이를 풀었다.
“배 많이 고파?”
“아니. 씻고 줘도 돼.”
생각보다 눈치가 빨랐다.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운 탓에 샤워도 하지 못했다. 얼굴도 까칠했다. 어색한 정장도 벗어버리고 싶었다. 한재영이 내 눈치를 살피며 식탁 의자를 매만졌다. 어디에 앉아서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내 방에서 기다려도 돼. 여기서 TV 봐도 되고…….”
“방에서 기다릴게.”
한재영이 내 말을 끊고 답했다. 방은 청소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같은 남자끼리니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방에 들어서자 한재영이 쭈뼛대며 나를 따라 들어왔다. 벗어둔 옷이 겹겹이 쌓인 의자를 당겨 앉으려 하기에 침대에 앉아도 된다고 했다.
셔츠를 벗고 옷장에서 속옷과 편한 옷을 꺼냈다. 문득 돌아보니 한재영이 침대에 앉아 내 등을 빤히 보고 있었다. 등 뒤로 반쯤 뻗어 기댄 매끈한 팔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뭘 그렇게 보고 있냐? 너도 옷 줄까?”
농담이었다. 진짜 내 옷을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한재영도 웃으며 아니라고 답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를 빤히 보던 한재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 정장은 자주 안 입어서 불편하네. 아무 옷이나 괜찮아.”
생각보다 뻔뻔한 놈이라 생각했다. 이왕 집에 들어와 밥까지 먹고 가라고 했으니 옷이라고 못 줄 것도 없었다. 싸구려 옷 중 그나마 깔끔한 트레이닝복을 꺼내 내밀었다. 몇 번 입지 않은 옷이었다. 민재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탐내며 잠옷으로 빌려 입던 옷이기도 했다.
한재영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 한재영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저런 재벌 놈들은 정장을 일상복보다 더 자주 입는 게 아니었나 생각했다. 생각보다 내가 편협한 생각에 갇힌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욕실로 와 뻑뻑한 머리를 물에 적셨다.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피부가 벌겋게 익기 시작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덮고 부엌을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안에 든 반찬을 뒤적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에게 대접할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방에 돌아왔다. 목을 타고 식은 물이 방울로 떨어졌다. 어깨가 물방울에 젖었다.
“한재영. 밥…….”
차라리 시켜 먹는 게 나을 거 같아 물어보려 했다. 방에 오니 한재영이 내 트레이닝복을 입고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순간 민재가 살아 돌아온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민재와 잠든 자세가 같았다. 한숨이 터졌다. 다가가 깨우려다 침대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많이 피곤했는지 한재영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어 있었다. 잔잔한 숨소리가 고요하게 방을 채웠다. 드르렁대며 코를 골던 민재와는 달랐다. 민재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미친놈. 평생 같이 놀자더니. 20대가 되면 미팅도 같이 하자더니. 모두 부질없는 약속만 채우고 저 혼자 떠난 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또다시 눈물이 나려 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김민재가 이런 내 꼴을 보면 얼마나 놀려댈까 생각했다. 신파 찍냐며 볼을 잡아 늘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철없이 해맑던 놈. 앞으로의 삶에 얼마나 많은 순간에서 나는 그 철없는 놈을 그리워하게 될까.
한재영이 몸을 뒤척였다. 벽을 보고 누운 한재영을 보다 이불을 끌어 덮어주려는데 한재영이 거센 힘으로 내 손을 끌어안았다.
“읏. 야!”
휘청하며 몸이 쏠렸다. 얼결에 한재영의 몸 옆에 어색하게 눕게 됐다. 갑작스러움에 놀란 것도 잠시였다. 이게 잠버릇이든 뭐든 한재영에게 화가 났다. 무릎도 욱신거렸다. 편하게 자게 해주려던 마음을 바꿔 깨우려는데 한재영이 중얼대며 내 품을 파고들어 왔다.
“엄마…….”
주먹 쥐었던 손을 풀었다. 한재영은 아이처럼 내 품에 볼을 붙였다.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라니. 짜증과 한심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손의 힘을 풀었다. 멍하니 한재영을 쳐다보았다. 깊게 잠든 얼굴이 보였다. 결국 벗어나길 포기했다. 잠든 놈을 상대로 화를 내서 뭘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재영의 등에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된 피로가 한 번에 밀려왔다. 고요한 한재영의 숨소리도 한몫했다. 젖은 머리카락 덕에 베개가 물로 젖었다. 한재영에게선 좋은 냄새가 났다. 어떤 향수를 쓰는 걸까 생각했다. 하등 쓸모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채웠다.
잠에서 깬 건 타의에 의해서였다. 북적대는 소리에 느리게 눈을 떴다. 집에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였다. 현관에서 내 신발을 발견한 엄마가 방문을 열어 날 확인했다. 피곤이 덜 풀린 상태라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표정을 구긴 채로 열린 방문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었… 친구?”
엄마가 내 옆에 누운 한재영을 흘깃 보며 물었다.
“어. 같이 왔어.”
“그래? 밥은?”
“아직.”
“친구 깨워서 같이 먹어.”
엄마가 문을 닫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푸석하게 마른 얼굴을 비볐다. 한재영은 여전히 고른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처음 온 남의 집에서 이렇게 깊게 자는 게 가능한 놈이라는 게 낯설면서도 우스웠다. 한재영과 나 사이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높은 벽 하나가 부서진 느낌이 들었다.
왜일까. 문득 한재영이 같은 일을 겪은 동지처럼 느껴졌다. 한재영을 바라보는 데서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감정이 몰아치는 것에 몸을 떨었다. 한재영이 우리 집에 와 제법 친한 친구처럼 누워 있다는 것에 우쭐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게도 나 또한 유상현처럼 속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었다.
등 뒤로 손을 뻗어 한재영의 어깨를 약하게 흔들었다. 한재영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 반쯤 눈을 떴다. 흐릿하게 날 보던 눈이 또렷해지더니 이내 한재영이 놀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 나 여기서 잤어?”
“어.”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다. 폰을 찾으려 벗어둔 정장 재킷을 더듬을 때였다.
“거의 열두 시네.”
뒤를 도니 한재영이 자신의 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았다. 폰을 찾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재영이 눈을 비비며 무거운 몸을 마저 일으켰다.
“밥 먹고 가.”
“미안. 깜박 잠들어서…….”
한재영의 고개가 맥없이 숙어졌다. 한심하다는 듯 제 얼굴을 비벼대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피곤했으니까.”
영국에 있는 대학에 갈 준비에 이것저것 해야 할 일도 많았을 텐데 의도치 않게 민재 일까지 겹쳤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당연히 나보다 피곤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재영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 그림자가 내 몸을 뒤덮었다. 그새 그가 나보다 얼마나 큰지 잊고 있었다. 한재영은 나를 의식하지 않은 표정으로 크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딱히 피곤할 것도 없어. 이젠 시간도 많아.”
한재영이 웃었다. 큰 웃음은 아니었지만, 피곤함은 가신 듯 보였다.
“한재영.”
“어.”
바보같이 머뭇거리고 말았다. 온종일 하고팠던 말이었는데 막상 말로 뱉으려니 간지러웠다. 입술을 반쯤 깨물었다 뗐다.
“고맙다. 민재 마지막, 챙겨준 것도 그렇고. 졸업…….”
졸업식 날 챙겨준 상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민재의 장례를 함께 해준 게 고맙다는 말보다 내게 상을 준 사실을 곱씹는 게 더 낯간지러웠다. 졸업식에선 가볍게 뱉어지던 말이 쑥스러워졌다. 한재영과 있으면 속물적인 내 모습을 한없이 마주하게 된다. 나 자신의 비겁한 면을 직면하는 게 탐탁지 않았다. 더불어 그 직면이 잦아진다는 게 속을 더 괴롭게 했다.
한재영에게 빚을 지는 기분이 늘었다. 한재영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말이 없어 결국 내가 먼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보게 됐다. 한재영은 내가 눈을 맞추자 그제야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밥 먹고 자고 가도 돼?”
“어?”
“나. 고맙다면서.”
눈썹을 비틀며 올려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방이지만 민재도 늘 자고 가던 방이니 둘이 자는 것에 불편함은 없었다. 오히려 불편한 건 한재영일 거다.
이렇게 좁은 방에서 지내본 적도 없을 텐데. 조금 전처럼 잠깐 자는 거라면 몰라도 아예 잠을 자고 간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정말 자고 간다는 건지 고맙다는 말이 간지러워 장난을 치려는 것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자고 갈게. 너 걱정 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한재영이 답했다. 말을 마친 한재영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색해 손을 뻗어 저지하려는데 손은 벌써 멀어지고 없었다. 한재영이 먼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가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한재영을 불렀다.
“그때. 졸업식에서, 학생회장이었던 친구 맞지?”
엄마의 기억력에 내가 더 놀랐다. 딱히 인사를 나눈 것도 아니었기에 한재영을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네. 안녕하세요. 한재영이라고 합니다.”
한재영을 다시 쳐다봤다. 어색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내가 봐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가 분명했다. 엄마는 칙칙한 표정으로 볼을 긁는 나를 보며 국과 밥을 내었다. “아빠는?” 하고 물으니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못할 거라 했다. 일이 바쁜 모양이었다.
엄마가 의도적으로 민재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머리를 말리지도 못하고 자서 옆머리가 뻗쳤다. 엄마는 밥 먹는 내 옆에 앉아 뒤집어진 까치머리를 연신 매만졌다. 내가 안쓰러운지 엄마는 오래 내 얼굴을 보다가 뻗친 머리를 매만져주길 반복했다.
“엄마. 밥 먹는데 자꾸.”
귀찮은 티를 내며 말했더니 엄마가 서운한 얼굴로 식탁에서 일어섰다.
“재영이 오늘 자고 갈 거지? 시간이 많이 늦었어.”
엄마가 한재영을 보며 물었다. 한재영은 입안 가득 물고 있던 밥을 단번에 삼킨 후 “네.”라고 답했다. 얹히기라도 할까 걱정되는 마음에 물 잔을 내밀었다. 한재영은 내가 내민 물 잔을 들어 담긴 물을 삼켰다.
“그래. 편하게 있다가 가. 재영이도 우리 호정이도 오늘 많이 피곤했을 텐데.”
엄마의 손이 다시 부드럽게 내 볼을 감쌌다. 간지러운 볼을 긁었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한재영이 다시 숟가락 가득 밥을 올렸다. 이런 음식이 입에 맞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해졌다. 한재영은 제법 맛있게 엄마의 반찬을 먹었다. 뭐라도 시켜줄까 물을 새도 없었다. 그는 이미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운 뒤였다.
다음날 눈을 떴더니 방에는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혼자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눈이 시렸다. 목은 아플 정도로 건조했다. 한재영은 대체 언제 집에 간 걸까 생각했다. 역시 이 좁은 침대에서 길게 자는 건 불편했을 거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나름 잠귀가 밝다고 생각했는데, 한재영이 나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재킷을 뒤적였다. 폰부터 찾아야 했다.
“하.”
이렇게 오래 폰을 보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폰을 꺼냈다. 숱한 부재중 전화엔 낯선 번호가 많이 섞여 있었다. 면접을 봤던 치킨집의 전화가 다섯 통도 넘었다. 다시 회신할 용기조차 없었다. 이제는 일도 하기 싫어졌다. 당분간은 돈을 벌 욕심도 들지 않았다. 민재가 떠나니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는 한재영의 번호였다. 낯선 번호를 엄지로 눌러 ‘한재영’이라는 이름을 입력해 넣었다. 한재영의 이름은 몇 번을 보아도 한없이 낯설었다. 만약 이 폰에 최정화의 번호를 저장하게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한재영의 번호 아래 이서정의 번호도 있었다.
민재와 관련해 할 이야기가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시간을 확인했다. 늦은 아침이었다. 대학 입학을 앞둔 나태한 시기라고 해도 충분히 일어나 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전화를 받은 이서정이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어. 호정아.
“어. 좀 쉬었어?”
막힌 목을 긁으며 물었다. 이서정의 낮은 숨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넌? 좀 쉬었어? 속 안 좋아 보이더니.
생각보단 잠도 잘 잤고 밥도 먹었다. 민재가 죽어도 나는 이전처럼 살 수 있다는 게 괴이하게 느껴졌다. 결국 산 사람만 살아가는 게 세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괴리감에 머리가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불편한 전화의 목적을 또렷하게 해야 했다. 덜 풀려 찝찝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민재가 없으니 더더욱 만날 일이 없는 인연들이었다. 불편하고 번거로운 만남도 더는 이어갈 필요가 없을 터였다.
“민재. 무슨 이야기야?”
화장실에서 이서정이 하려던 이야기를 물었다. 예지라면 나도 아는 인물이었다. 예지는 우리 고등학교에서 꽤 먼 곳의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애였다. 민재는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했지만, 민재와 종종 만나 밤을 보낸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스치며 얼굴을 한 번 본 적도 있었지만 명확하게 기억나는 얼굴은 아니었다.
-민재 얼마 전에 예지한테 신고…….
이서정이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였다.
-하, 그걸로 신고 당했다는데. 너도 알고 있었어? 사고 나던 날. 그거 이제 해결될 거 같다고 나갔다고 하던데.
“…민재가 강제로 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한숨을 내뱉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머리를 긁었다.
-사실 우리 친구긴 하지만. 민재, 좀 그랬잖아.
이서정은 이미 내 뜻을 아는 것처럼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말했다. 민재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모두 내린 듯했다.
민재가 그런 쪽에서 제어하지 못하고 늘 문제를 터뜨린다는 건 나도 알았다. 늘 통화를 할 때마다 너 그러다 벌 받는다, 말하면 민재는 변명하지 않고 낄낄대기만 했다.
그래도 그런 일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전에도 민재는 정말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내게 언급도 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과 내 형편이 틀어진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민재는 나에게만큼은 그런 나쁜 면면을 전부 다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도 저 나름의 이미지 관리라는 걸 내게 해왔던 셈이었다. 나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내게는 꽤 좋은 친구로 남고 싶은 그 마음이 밉지 않았으므로 일정 부분에선 나도 모르면 모르는 대로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갔던 일이 많았다.
“확실히 맞는 거야?”
-예지, 민재보다 나랑 더 먼저 친구였어. 그런 거로 거짓말할 애는 아니야.
“하. 김민재.”
-문제는.
이서정이 잠시 말의 박자를 늦추었다. 다음 말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였다.
-문제는, 왜 그걸 갑자기 1년이나 지난 지금 터뜨리려고 했냐는 건데. 예지, 민재랑 보지 않게 된 후로 학교 그만뒀었거든. 내 생각엔 자기는 그 후로 인생이 그렇게 됐는데, 김민재는 아빠 빽으로 대학도 간다고 하고, 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잘 지내니까 배알이 꼴렸던 걸 수도 있고. 일부러 그 새끼 대학 갈 때 터뜨리려고 했던 걸 수도 있고. 몇 번 얽힌 사이라고 김민재가 좀 안일했지.
이서정은 잠시 길게 이어가던 이야기를 끊었다. 물을 마시는지 잠시의 적막이 들렸다.
-신고까지는 나도 몰랐어. 아무튼 사고 나기 며칠 전에 터졌다나 봐. 민재 아버지가 민재 불러다 팰 정도면 말 다 했지.
민재는 사고가 많은 친구였다. 주기적으로 나쁜 일과 안 좋은 일에 이름을 올렸다. 학교에 흉흉하게 겉도는 소문의 선두에는 민재의 이름이 없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쁜 일에 민재가 얽히지 않는 걸 보는 게 더 어려웠다.
그래도 민재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민재를 때린 적이 없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을 위해 군 면제권까지 얻어줬던 사람이니 민재의 문제는 그에겐 그저 사사로운 골칫거리들일 뿐이었다. 민재가 일으키는 사건들조차 그게 민재를 혼낼 일은 아니라는 게 민재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이 어떻게 됐다는 건지 서둘러 말해주길 바랐다. 제법 길게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붉은 인주 자국처럼 이마에 동그라미가 새겨졌다.
-그날, 새벽에 민재랑 통화했었어. 해결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하더라. 기분도 좀 좋아 보였고.
해결. 도대체 어떤 식으로 그 큰일을 해결한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대답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속이 갑갑했다.
“그래서 해결…….”
-아무래도 김민재, 자살인 거 같아. 어쨌거나 민재 죽으면서 그 일이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 건 사실이니까.
“민재는 트레일러가…….”
-그러게. 김민재,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뭐?”
되물었으나 이서정은 답이 없었다. 스스로도 좀 전의 말이 실수인 건 아는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되묻는다고 해도 ‘운이 좋다.’는 말은 결코 반복하지 않을 기세였다. 이서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사실이 궁금해졌다.
“너 이런 말, 나한테 왜 해주는 건데.”
그제야 이서정은 느리게 입술을 뗐다.
-그냥. 김민재 죽은 거 나도 마음 안 좋아. 죽은 애로 이런 말 하는 것도 뒤숭숭하고. 근데 그냥 민재 일, 너는 알아도 되지 않나 싶어서. …민재 말인데.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너한테는 끝까지 좋은 친구였냐? …아니다. 됐다. 더 말해도, 뭐. 다 지난 일이기도 하고.
말을 마친 이서정이 전화를 끊으며 잘 지내라는 말을 했다. 애초에 내 답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지랖. 그건 쓸모없는 배려였다. 민재가 누구 한 명에게라도 좋게 기억되는 게 싫어서 한 참견일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픈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민재를 떠올릴 때마다 욱신거리던 마음에 이제는 다른 의미까지 더해져 괴로웠다. 침대를 주먹으로 두어 번 내려쳤다. 침대 매트가 울렁거렸다. 덩달아 속도 불편해졌다. 당장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미친 새끼. 좀 제대로. 제대로 좀 살다 가지.”
남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준 자의 마지막은 이런 식이라고 배웠다. 내가 늘 민재에게 걱정을 담아했던 말도 그런 의미였다. 실룩대며 웃던 민재의 얼굴이, 내게 붙어 “호정아, 우리 좀 재밌게 같이 놀면서 살자.” 하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머리를 거칠게 비볐다. 복잡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민재의 모습으로 민재를 남겨두어야 할지, 타인이 말해주는 모습을 진짜 민재로 받아들일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제 민재가 세상에 없으니 평생 그 결정을 보류한 채 살펴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죽은 민재의 삶은 비틀린 궤적만 엉성하게 그린 채였다. 민재의 생은 끝났으므로, 더 변명할 수도 항변할 수도 없고, 억울하다거나 미안해하거나 죄를 뉘우친다거나 하는 인간의 그 어떤 행태도 표할 수 없었다.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재가 되어 버렸다.
끝까지 자기 편한 대로만 하는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하기엔 민재가 내게 보여준 친구로서의 모습만 숱하게 생각났다. 잠시 지쳐있는 사이 폰이 울렸다. 밝은 화면으로 유상현의 문자가 떴다.
[다음에 한재영이랑 볼 때 나도 좀 불러줘.]
내용은 간략했지만 속은 터무니없이 검고 추했다.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민재의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내게 먼저 연락한 걸까 생각하니 우습기까지 했다.
“미친 새끼들.”
낮게 욕을 내뱉었다.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현관의 벨이 울렸다. 부모님이라면 당연히 벨을 누르지 않을 터였다. 받을 택배나 올 사람도 없었다. 민재가 아닌 이상 평일 오전에 우리 집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현관 앞에 섰다. “누구세요.” 하고 물으니 밖에선 답이 없었다. 복잡하던 심경에 짜증이 묻은 말투로 다시 한 번 누구냐고 되물었다. 잠시 고요하던 밖에서 그보다 더 고요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정아. 나.”
마른 침을 삼키며 현관에 한 발자국 다가섰다.
“나 재영인데, 두고 간 게 있어서.”
문을 열자 한재영이 반쯤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한재영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그 틈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문이 열리자 한재영은 머리를 빗던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발견하자 멍하니 있던 한재영의 얼굴이 금세 미소로 차올랐다. 밖에 비가 오는 건가 복도 위를 살폈다.
열린 문 사이로 한재영이 발을 들였다. 나를 따라 들어오며 내 안색을 살피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한재영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우쭐해졌다. 좀 전 유상현이 보낸 문자 덕이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방으로 걸어갔다. 속으론 수건이라도 꺼내줘야 할까 생각했지만, 금세 갈 텐데 굳이 일을 더 보태고 싶지 않았다.
“뭐 두고 갔는데?”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게 물었다. 한재영은 내 심중을 눈치채지 못한 듯 평소처럼 웃었다. 어떤 땐 눈치가 빠른 듯하다가도 이럴 때 보면 영 눈치가 없는 것 같다. 한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나를 따라 방에 들어왔다.
“미안. 새벽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도 못 하고 갔어.”
“어. 뭐…….”
한재영은 미안할 것도 아닌 일에 미안함을 표했다. 으레 우리 나이의 남자들이 그렇듯 미안하다는 말이 실패나 패배를 의미한다고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 자체가 승리자이니 그렇겠지. 평생 질 일이 없는 인생이니 미안하다는 말에도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무거운 이마를 꾹 눌렀다. 한재영에 관해 이런 식의 내 잣대를 들이밀 때마다 낄낄대며 웃던 민재의 말이 머리를 짓눌렀다. “너 그거 자격지심이다.” 당장이라도 민재가 내 볼을 잡고 그렇게 외칠 것만 같았다.
“요즘 정신이 좀 없어서.”
한재영은 내 책상 위에 두었던 자신의 지갑을 챙겼다. 나 또한 정신이 없었다. 한재영의 지갑이 그곳에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깨자마자 이서정이며 유상현이며 귀찮은 일 일색이라, 책상 위를 살피지 못한 이유가 컸다. 그런 연락이 없었다고 해도 아침부터 책상을 살펴보진 않았을 테지만.
한재영은 청바지에 자신의 지갑을 챙겨 넣으며 자기 볼을 살짝 긁었다. 하얀 볼이 분홍빛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금세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지갑?”
괜히 어색해 물었더니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지갑을 남의 집에 두고 가는 인간이 다 있나, 생각하며 멍하니 발을 까닥거렸다. 한재영은 방 가운데 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빈틈이 많은 놈인 건 아닐까, 생각하니 그건 또 그거대로 흥미롭게 느껴졌다.
“전화하지.”
“아, 통화 중이던데.”
좀 전까지 이서정과 통화 중이었던 걸 잊고 있었다. 지갑만 찾고 다시 나가길 바랐지만 내 바람과 달리 한재영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오래 이곳에 있을 기세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혼자만 있고 싶었다. 평소여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더욱 유별나게 홀로 있고 싶었다. 한재영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말없이 있던 한재영이 내가 앉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저기. 호정아.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고 싶거든.”
“괜찮은데.”
죽고 싶을 정도라던 내 말이 마음에 남은 건가 생각했다. 잘난 놈이 잘난 대로 이기적이고 못되게나 살지, 이렇게 속도 착하고 여리면 어떡하나 싶었다. 좀 전 이서정과의 통화가 생각났다. 그 뒤로 욕심이 득실득실해 보이던 유상현의 문자도 떠올랐다. 너처럼 착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살기엔 그걸 욕심내는 나쁜 사람들이 참 많다는 말을 하면, 그것 또한 오지랖이 될까. 이것 또한 자격지심인 걸까. 잘난 놈에게 느끼는 열등감인 걸까. 나보다 잘난 남자에게 살면서 한 번쯤 해 보이고 싶은 그런 억지스러운 잘난 척인 걸까. 그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 한재영이 다시 내 눈치를 살폈다. 큰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작게 만든 모습에 웃음이 날 뻔했다.
“호정아. 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민재와 나처럼, 유상현과 이서정처럼 그렇게 적당히 나쁘게, 적당히 이기적으로, 적당히 모질게 살아가면 편할 텐데. 한재영은 왜 이렇게 의심 없이 착하기만 할까. 왜 아무것도 아닌 나를 돕겠다는 걸까. 아무 상관없는 존재인 내 슬픔을 왜 한재영은 제 슬픔이라도 되는 양 돕겠다고 나서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을 것 같았다. 잘난 한재영의 머릿속을 나 까짓 게 알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착한 인간들의 심성이야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상체를 숙여 머리를 양손으로 짚었다. 느껴본 적 없던 편두통이 다 올 정도였다. 한재영처럼 살기엔 이미 늦은 인생이었다. 민재 이야기를 들은 후로 이제 민재의 죄책감은 내 몫이 되었다. 친구로서 내 죄가 아무것도 없다고 발뺌할 수도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내 삶을 전부 버리고 아예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을 정도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고 싶었다. 한재영이 내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이마를 짚던 손을 떼고 한재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든 버거운 일이 생기면, 연락해. 뭐든 도울게.”
“야. 재영아.”
“어?”
한재영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한재영을 볼 때마다 속에선 검은 물음표가 애벌레처럼 기어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속에서 징그럽게 뒹굴대는 물음표의 애벌레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너 날 왜 이렇게 자꾸 도와주려고 그러냐. 우리 고등학교 때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말 나눈 적도 사실 별로 없…….”
“친구잖아.”
장난이라도 치자는 건가 생각했다. 딱히 친구가 아니라고 표현을 고치는 게 더 억지스러웠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한재영은 이번에도 무심히 친구라는 단어로 자신과 내 사이를 표했다.
“우리 아빠한테 네가 내 친구라고 해줬었잖아. 그때 사실 좀 난감했는데 네 덕분에 잘 넘어갔어.”
“아, 뭐. 친구는… 맞으니까.”
명확하게 이해된 건 아니었지만 애초에 이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한재영은 양손을 깍지 끼고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좁은 방 안에 같은 성별인 남자와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몸이 뒤틀리고 불편한지 알 수 없었다.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불편함일까 생각했다.
민재와 있었을 때의 편안함을 상기했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었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역시나 민재와 한재영은 선명하게 다른 존재라는 게 실감 났다. 굳이 분류하자면, 내 본성은 민재와 같은 유에 속할 것이다. 이제는 그조차 수치스러웠다. 한재영의 앞에 도드라진 하얀 선 안에 들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검은 선의 동그라미를 벗어나고 싶었다.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말이야. 전혀 낯선 곳에 가면 좀 낫던데.”
한재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화난 사람을 다독이는 듯한 말투였다.
“여행 갈 기분은 아니야.”
기분보다는 역시나 돈 생각이 먼저였다. 평생 돈 걱정이라곤 해 본 적 없을 한재영이 이런 내 속을 알 리 없었다. 설명해봤자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
옅게 웃은 한재영이 주머니에서 자신의 폰을 꺼냈다. 뭘 하려나 싶어 문득 돌아보니 한재영이 화면에 내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그새 내 번호도 외운 듯했다. 머리 좋은 놈들은 이런 사소한 데서도 티가 났다. 친구 번호는 고사하고 가족들 번호도 외우기 힘든 게 요즘이었다. 할머니 번호를 물으면 단번에 떠올리지 못할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에, 한재영이 내 번호를 하나하나 누르고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한재영의 손끝에서 꾹꾹 눌러지는 11개의 숫자와 그 순서, 조합까지 모두 새롭게 느껴졌다.
어제 받은 번호를 바로 외운 게 신기한 것도 잠시였다. 책상 위에 올려둔 내 폰이 몸을 떨었다. 시끄러운 진동소리에 한재영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너 뭐하냐?”
피식 웃으며 책상에 둔 폰을 들었다.
“받아봐. 좋은 소식일 수도 있잖아.”
“하. 너도 참 제정신인 놈은 아니네.”
화면에 뜬 한재영의 이름에 다시 한 번 눈앞의 한재영을 쳐다보다 폰을 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저장했네.”
한재영은 화면에 뜬 자신의 이름이 만족스러운 듯 잔잔하게 웃었다. 받아줄까, 말까. 장난치듯 폰을 까닥거렸다. 한재영이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재영은 내 폰 위로 손을 뻗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한재영이 하는 모든 행동은 가끔 낯설면서도 독특해서 웃겼다. 내가 자신의 전화를 받자 한재영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내 침대에 앉는 모습이 꽤나 자연스러웠다.
“…….”
답 없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웃음이 어색해졌다. 한재영은 폰을 들고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집 갈래? 아무도 없거든, 오늘.”
“너희 집?”
폰은 손에 쥐기만 한 채 한재영을 향해 물었다. 한재영이 자신의 귀에 닿아있는 폰을 톡톡 건드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어정쩡하게 볼에 닿아있던 폰을 귀에 붙였다.
“왜?”
“가서 좀 쉬면 좋잖아. 집도 민재도, 잠시 다 잊을 수 있으니까.”
한재영의 말에 틀린 건 없었지만, 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언제 한재영에게 집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던가 생각했다. 집에 있는 게 불편하다거나 집이 망한 후로 이 집 자체가 나를 갑갑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민재에게조차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한재영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전화를 끊었다. 볼에 닿아있던 폰을 내렸다. 전화는 끊겼지만 화면엔 여전히 한재영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별다른 의미는 아니야. 그냥 민재 여기서 자주 있었을 테니까. 여기 있으면 네 마음이 계속 안 좋을 거 같아서.”
“아… 어.”
중점을 빗나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 어긋남이 실은 내 내면에서 바라오던 회피와 맞아떨어졌다. 피하고 싶었다. 이 집도, 가난을 잔뜩 묻힌 채 피곤해하는 부모님의 얼굴도, 내가 믿었던 민재의 모습과 괴리되는 민재의 이야기들도. 떨쳐버릴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었다.
내 표정을 살피던 한재영이 후드티의 모자를 올려 젖어있는 머리에 덮었다.
“아. 밖에 비 오더라.”
한재영이 낮은 미소를 걸친 채 말했다. 화제를 돌려주는 건 배려가 맞았다. 이서정이 내게 한 전화와는 다른 차원의 배려였다. 이서정이 내게 한 게 나를 억누르고 겁주려는 비겁함의 배려라면, 한재영은 내가 편하길 바라는 온전한 배려에 가까웠다.
문득 한재영이 궁금해졌다. 한재영의 삶이 궁금해졌다. 한재영의 머릿속. 생활환경. 가정. 그가 배운 모든 것들.
고등학교 내내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한재영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화산재처럼 목구멍을 뜨겁게 채웠다.
“수건 줄까?”
“아니. 괜찮아. 좀 덮고 있으면 마르겠지.”
한재영의 말을 무시하고 욕실에 가 수건을 가져왔다. 들고 온 수건을 한재영의 허벅지에 살짝 던지듯 놓았다.
“나 닦으라고?”
“어.”
한재영은 잔잔하게 웃더니 자신의 허벅지에 놓인 수건을 물끄러미 보았다. 곧 한재영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수건을 네모로 반듯하게 접어 얼굴과 머리에 남은 물기를 꾹꾹 눌러 닦아내는 모습에 덩달아 내 기분도 나아졌다. 네모로 반듯하게 접힌 수건은 곧 침대가 아닌 한재영의 허벅지로 다시 안착했다.
“너희 집 이 동네 맞지?”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아.”
“너는 인식 못 할 거 같긴 한데 가끔 너 말하는 게 여자 꼬시는 남자처럼 보이고 그러거든? 참고로 아주 음흉해 보여서 내 마음에는 쏙 들어.”
장난치듯 뱉은 말에 한재영이 대답 없이 웃었다. 씻지 않고 가도 되냐고 물으니 한재영은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달싹여 보였다. “따뜻한 물 채워 놓으라고 할게.”라는 말에서 왠지 모를 당당함과 평온함이 느껴졌다. 집이 망하기 전에도 우리 집에 상주해 일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두 번 온 적은 있었지만, 엄마가 전업주부였던 탓에 그마저도 몇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한재영은 자신의 일을 돕는 사람들의 역할에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게 거만해 보인다거나 오만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땅히 받을 일을 받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느껴졌다.
“너 옷 사이즈가 뭐지? 2?”
한재영은 허벅지에 놓았던 수건을 침대에 올리고 내 옆에 섰다.
“2? 그게 뭔데.”
외국 사이즈를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걸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보통 95 입어. 왜?”
한재영에게 답하는 중에 잠옷으로 입을 추리닝과 속옷, 옷도 한 벌 챙겼다. 너무 많이 챙기면 한재영의 집에서 오래 지낼 것처럼 보일 것 같아 한 벌씩만 챙겨 가방에 넣었다.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한재영이 상체를 숙이고 내가 챙기는 옷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집요하게 보나 했더니 아무래도 내가 챙기는 속옷과 여벌 옷의 사이즈를 눈에 담는 것 같았다. 내 번호를 외운 것처럼, 이 조잡한 숫자들을 외우는 것 또한 쉬울까, 생각하니 괜히 민망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중학생 때 입던 게 다 그 사이즈인데. 너 입어도 될 거 같아.”
“야. 키 큰 거 자랑하냐?”
“너도 크잖아. 177.”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재영은 상체를 숙인 채로 나를 올려보더니, 이내 다시 내가 챙기던 짐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하게 키를 맞춘 것도 짜증 났지만, 무엇보다 중학생 한재영의 사이즈가 지금의 내 사이즈라는 것도 묘하게 억울하게 느껴졌다.
“너는 얼만데. 너 크지?”
“나는 185.6.”
한재영이 무덤덤한 얼굴로 가장 이상적인 숫자를 읊조렸다. 휴대폰 뒷자리에나 어울릴 법한 숫자가 뱉어지는 것에 부러움과 동시에 얄밉다는 생각마저 일었다. 한재영의 얼굴은 무덤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잔잔하고 고요한 얼굴에 심사가 뒤틀리려다가도 이내 풀어졌다.
“거의 186이네.”
“아냐. 0.4 모자라.”
“으. 이과.”
“이과?”
내 속뜻을 모르는 한재영이 어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많이 넣지도 않았는데 가방은 불룩하게 배를 내밀었다. 폰을 들고 친구 집에서 며칠 있다 오겠다는 문자를 엄마에게 남겼다. 성인이 아닐 때도 민재 집에서 몇 번 자고 온 적이 있었기에 허락을 구할 필요도 딱히 없었다. 폰을 주머니에 넣고 옆에 선 한재영을 보았다. 어느새 숙였던 상체를 든 한재영이 눈을 끔벅이며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가자.”
내 말에 한재영이 손을 내밀었다. “가방 들어줄까?”라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미쳤어? 그런 거 나한테는 하지 마.”
“왜?”
“싫어. 징그럽고.”
“그래?”
한재영은 내 말을 암기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올렸다. 동그랗고 새카만 눈동자가 한 바퀴를 부드럽게 돌았다. “알았어.”라고 답하는 모습이 마치 우직한 충견 같아 퍽 마음에 들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렀다.
한재영이 먼저 집을 나섰다. 한재영은 운동화 끝까지 발을 밀어 넣었다. 운동화조차 앞코를 바닥에 찧는다거나 뒤를 접어 신는다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신발에 맞춘 것처럼 두 발이 매끄럽게 운동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느릿하게 한재영을 따라 걸었다. 복도에 담배 몇 개비가 버려져 있었다. 이 층에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있던가 생각했다. 아직 불씨가 남은 담배를 보며 한재영의 뒤에 섰다.
한재영은 이 좁은 복도의 주인처럼 걸음마다 거침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사소한 동작에서도 태가 났다. 어제 한 번 왔던 게 전부인 이곳에서조차 한재영은 명백한 주인처럼 보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문득 고등학교 때도 한재영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한재영이 멍하니 고등학교의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때. 문득 그 옆을 스치다 한재영을 보고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은 적이 있었다. 마치 제 것을 바라보는 느낌. 학교 안을 구성한 모든 것들, 심지어 그 학교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학생들을 보는 눈빛에서도. 그래서 복도나 운동장을 걷는 한재영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나는 한재영의 정원에 잠시 숨어든 불청객처럼 불편함을 느꼈다.
“미친.”
피식하고 바람 빠진 웃음이 났다. 이건 명백한 과대망상이었다. 내가 언제 한재영을 그렇게 주의 깊게 봤었다고. 한재영이 언제 그런 눈빛으로 학교며 그 학교의 아이들을 바라봤었다고. 머리가 아프더니 정신까지 퓨즈가 나간 것만 같았다.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흐릿한 정신이 어서 온전해지길 바랐다.
내가 낮게 내뱉은 말에 한재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다행히 뭐라고 했느냐고 묻진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했다. 평소에도 잘나진 않았지만 뒤로 비치는 한재영 덕에 내 얼굴을 이룬 굴곡이 볼품없게 느껴졌다. 반듯하고 유려한 선들로 이뤄진 한재영의 얼굴과 내 얼굴이 비교됐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1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옅은 빗소리가 들렸다.
“아, 우산.”
비가 온다는 말을 한재영에게 듣고도 바보같이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았다. 멍한 얼굴로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나 우산 가져올게.”
“차, 저기 바로 앞인데.”
“그래도.”
“난 이미 한 번 맞아서 괜찮은데, 너 불편하면 다녀와도 돼.”
젖은 채로 비싼 차에 타도 되는 건가 생각했다. 한재영의 괜찮다는 말이 말뿐인 것 같지는 않았다. 한재영의 차가 정문 가까이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살피다 결국 우산 없이 뛰는 쪽을 택했다. 어깨에 멘 가방을 품에 안았다.
“그래. 그냥 가자. 죽는 것도 아닌데.”
“응.”
한재영은 후드의 모자를 끌어 쓰고는 내 팔을 당겨 뛰기 시작했다. 몸이 휘청할 만큼 엉성하게 팔이 붙들린 채로 차까지 뛰었다. 차 앞에 도착한 한재영이 내 쪽 문을 먼저 열어주었다. 차에 올라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곧 한재영이 운전석으로 들어오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와. 이거 운동 되네.”
한재영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한재영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 옷에 묻은 비를 털어주었다. 가까이 다가와 물티슈를 꺼낼 땐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한재영은 비를 맞아도 좋은 냄새가 났다. 그러다 향수도 쓰지 않는 내 꼴이 생각나 어깨를 움츠렸다. 비를 맞은 데다 아침에 씻지도 않았다. 역한 살 냄새라도 날까 작게 움츠렸지만, 한재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티슈를 내밀었다. 내 머리를 탁탁 털어주는 동작은 무척이나 간결하고 깔끔해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출발할게.”
“…어.”
혹시나 이번에도 한재영이 먼저 벨트를 매줄까 봐 황급히 벨트를 찾아 맸다. 한재영은 그런 나를 찬찬히 보다 미소 지었다. 차는 말끔한 도로를 달렸다. 익숙한 도로와 익숙한 거리를 지났다. 학교 자체가 한재영 집안의 재단이라 그 근처에 집이 있다고 들었다. 소문은 윗동네의 3층짜리 저택이라더라, 부터 시작해 알고 보면 진짜 집은 다른 동네고 이 동네에 있는 건 별장이라더라, 하는 것까지 이어졌다.
“근데 오늘 왜 집에 아무도 없어?”
“글쎄.”
“글쎄?”
보통은 이유가 있지 않나. 한재영의 집을 떠올리니 자연히 유명 피아니스트라는 한재영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언젠가 인터넷에 뜬 영상으로 한 번 봤던 인물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한재영은 이사장인 아버지보단 어머니 쪽을 많이 닮은 듯 보였다. 유하고 고운 선의 중간중간 선명하고 또렷한 직선. 도드라지게 흰 얼굴. 고고함과 우아함이 있는 동작들은 딱딱하고 무서운 눈을 가진 이사장보다는 부드럽고 상냥해 보이던 어머니 쪽과 가까워 보였다.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건반을 누르던 한재영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인터넷 영상의 화질이 좋진 않았지만, 그 고귀한 느낌만은 선명하게 전해졌었다.
한재영의 차가 부드럽게 비탈길을 올랐다. 비탈길이라고는 해도 경사가 심하진 않았다. 완만한 비탈길을 오르며 창밖을 응시했다. 민재의 집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민재 집이랑 가깝네, 그 생각했지?”
“와. 어. 방금 소름 돋았어.”
한재영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코너를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데 한재영이 먼저 민재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여기 위쪽 사는 애들 좀 있으니까. 민재 집도 이 동네라는 걸 알았던 건 아닌데, 운구 때 여기로 오길래 알았어.”
“아. 그러네. 같이 있었지.”
화장터로 가는 길에 운구차가 민재의 본가에 들렀던 기억이 났다. 소위 부자 동네라 일컫는 보암동에서도 이 위쪽은 동네 이름 앞에 ‘신’자가 붙었다. ‘신보암동’과 ‘구보암동’.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동네조차 둘로 나눠 서로의 다름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행정상 정해진 명칭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으로 자리 잡은 데는 신보암동 사람들의 입김이 셌다.
한재영의 집은 동네의 가장 위쪽에 자리한 한옥이었다. 울타리가 높은데도 기와가 더 높게 드리워져서 외관에서도 한옥이 그림자로 티 날 정도였다. 한재영과 한옥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조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넓은 한옥의 기품이 한재영과 결을 같이 했다.
“생각은 했지만, 너희 집 예쁘다.”
“엄마 취향.”
한재영은 왼손을 핸들에서 떼어냈다.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에 옅은 빛이 감돌았다. 차고에 차를 주차한 한재영이 곧 차의 시동을 끄며 답했다.
“엄마가 한옥을 좋아해.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준대. 악귀도 쫓고.”
“아. 나 예전에 너희 엄마 인터넷에서 본 적 있어. 공연 영상.”
“피아노 좋아해?”
“아니. 그럴 리가.”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졌다. 나는 피아노, 클래식, 교양 같은 것들에 무디고 무지하다. 아는 게 없으니 아는 척도 할 수 없는 게 지금의 내 수준이었다. 멋쩍게 웃으니 한재영이 나를 따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랑 어울리지도 않는데.”
“그럼 왜 봤어?”
“우리 학교 관련된 거 몇 개만 봐도, 너희 엄마 영상 나와. 알고리즘의 무서움. 알지?”
“맞아. 그렇겠네.”
벨트를 풀었다. 뒷자리에 두었던 가방을 들려는데 한재영이 먼저 내 가방을 집어 내밀었다.
“문 열어줄게.”
말과 동시에 내 쪽 문이 열렸다. 가방을 품에 안은 채로 차에서 내렸다. 곧 차에서 내린 한재영이 차고에 자리한 세 개의 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차고지에서 집으로 가는 문도 세 개나 된다는 게 신기했다. 한재영이 먼저 그 문 앞에 섰다. 그 뒤로 엉성하게 서서 가방을 다시 멨다. 문을 열려고 손을 뻗던 한재영이 문득 뒤돌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호정아. 우리 엄마, 어때 보였어?”
“아름다우시지, 뭐. 하얗고 예쁘시고. 너 계속 보니까 아무래도 엄마 쪽 닮은 거 같아.”
“진짜?”
한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입가를 가린 손등이 지하의 차고에서도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아름답고 예쁜 엄마를 닮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걸까 생각했다. 생긴 것과 달리 한재영은 아이처럼 해맑은 구석이 있었다. 한재영이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계단은 마당과 이어지지 않고 곧장 집안으로 이어진 듯 보였다. 한옥에 어울리지 않는 높은 대리석 계단이 문에서부터 위를 향해 이어졌다. 하마터면 촌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을 뻔했다.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던 한재영이 나를 돌아봤다. 얼굴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내가 엄마를 닮았는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나를 계속 봤다는 그 말, 그건 좋은데.”
왜 포인트가 거기인 거지. 멀뚱히 한재영을 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한재영이 웃음을 거두고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대리석의 계단에 먼저 오른 탓에 그렇지 않아도 큰 한재영의 그림자가 더욱더 짙게 내 몸을 덮었다.
“네가 방금 한 그런 말들이 좀… 그러니까. 그런 말이 여자 꼬시는 남자 같이 느껴진다는 거야. 넌 모르겠지만.”
“그래? 난 내가 그런 줄 몰랐는데.”
“낯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그래.”
“자제해야겠다.”
한재영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로로 넓은 등판에 빛이 가려질 정도였다.
“아냐. 다정한 거지. 보통 나 같은 애들은 너처럼 다정하거나 섬세하지 못하니까.”
“그럼 칭찬이었던 거네?”
“어?”
칭찬이었나. 그렇지는 않았는데. 아니라고 하면 삐질까 싶어 대충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재영이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그 큰 덩치에도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대리석의 반짝거림에서 발화된 빛이 한재영의 발끝으로 전해졌다. 멍하니 그 뒤꿈치만 보며 걸었다. 계단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 끝에 다다라 또 다른 목재 문에 섰을 땐 숨이 조금 가빠져 있었다.
“하아.”
“이것도 운동되지?”
“그러게. 네가 몸이 좋은 이유가 이거였네.”
한재영이 또 웃기 시작했다. 웃음이 헤픈 쪽인가 생각하면 고등학교 때의 낯선 모습만 떠올랐다. 물론 말을 나눈 후로는 한재영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더 많았지만, 그 외엔 무심하게 적적한 얼굴을 한 한재영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것 또한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추억한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겠다. 대리석을 보며 소강 되던 한옥의 감동이 오동나무 색이 선명한 목재 문 앞에 서자 상기되었다. 나무의 결이 분명하고 선이 굵었다. 아주 오래된 촘촘하고 여문 목재를 사용한 듯했다.
이 또한 한재영 엄마의 취향인 걸까. 한재영 엄마가 한옥을 지으며 쫓겠다는 악귀가 나인 건 아닐까 생각했다. 고귀하게 키운 아들 옆에 붙은 진드기 하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한 마리. 만약 눈앞에 거울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내 꼴을 직면하게 됐을지도 몰랐다. 한재영의 등 가까이에 붙었다.
한재영이 목재 문을 한 손으로 밀어 열었다. 문은 목재 특유의 뻑뻑한 소음도 없었다. 그저 부드럽게 대리석 바닥을 밀며 열렸다. 한옥답지 않게 층고가 높았다. 외관의 높은 벽에도 불구하고 차고로 들어서며 용마루를 볼 수 있었던 건 한옥의 층고가 높기 때문이었다. 한옥은 특성상 층고를 이렇게 높게 짓기 어렵다고 들었다. 심지어 한재영의 집은 내부를 이룬 단단한 목조가 우람한 소나무처럼 넓은 홀의 중심부를 꿰뚫고 있었다. 가로로 두툼한 대들보 대여섯 개가 넘게 천장을 받친 형태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더 웅장한 내부에 절로 숨을 참았다. 내 숨이 이 집을 더럽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존재가 이 성대한 곳에 묻어도 되나 걱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한옥 복도의 끝으로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다섯 명의 남자가 보였다. 남자들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한 줄로 서 있었다. 한재영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건지 내가 고개를 내밀었을 땐 다섯의 남자 모두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도착하셨습니까.”
“오늘 여기 최소 인원으로 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네. 그래서 다섯 명으로…….”
한재영이 “하, 씨…….”라고 하는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렸다. 설마 싶어 한재영의 얼굴을 확인하려는데 한재영이 앞에 선 덕에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재영이 아니라 저 중 누군가가 내뱉은 소리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제가 말한 최소 인원은 없어도 된다는 의미였는데요.”
한재영은 흘깃 나를 돌아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묘하게 날이 선 말투라 나도 몸을 움츠렸다. 분위기가 왜 이런가 생각해 보니 그 원인이 나인 것 같았다. 슬쩍 한재영의 후드티 끝을 당겼다. 다시 앞을 보려던 한재영이 제 후드티의 끝을 쥔 나를 바라보았다. 곧 내가 아는 한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올려본 한재영의 얼굴은 한숨을 내뱉거나 날 선 표정을 한 모습이 아니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들은 게 명백한 환청이었음을 미약하게나마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어. 왜?”
“네 방, 어딘데.”
한재영은 나를 제 뒤로 감추듯 앞을 가렸다. 큰 덩치에 앞에 선 남자들의 얼굴과 몸도 가려졌다. 한재영이 나가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남자들은 서둘러 홀을 벗어나 사라졌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건지 물으려는데 한재영이 뒤돌아 반대편의 문을 가리켰다.
“여기는 다 쓰면 돼. 나 혼자 쓰는 공간이라서.”
“여기를 다?”
“응. 여기 별채는 나 혼자 쓰고, 본채는 부모님이 쓰셔. 초등학교 때부터.”
별채가 이 정도면 본채는 어떠려나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날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한재영의 차를 타고 이곳에 오며 내심 그의 부모님을 뵙게 되는 상상을 하긴 했었다. 졸업식 날 봤던 한재영 아버지의 모습과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본 한재영 어머니를 떠올린 순간 간담이 서늘해졌다. 결코 이 꼴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재영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한재영은 반듯하고 하얀 창호지가 발린 세살문을 한 손으로 밀었다. 문이 옆으로 밀리며 그 안을 드러냈다. 거실 크기만 한 침실이 먼저 보였다. 방은 내벽부터 침대 프레임, 창문틀까지도 모두 색을 맞춘 듯 짙은 고동색의 목재로 이뤄져 있었다. 통일감이 지나쳐 오히려 마음이 갑갑할 정도였다. 넓은 방엔 그 방의 삼 분의 일을 차지할 정도로 큰 원목 프레임의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보였다. 침대는 높은 원목 위에 그보다 더 높고 두툼한 매트리스를 깐 형태였다. 그 외 사사로운 잡기는 보이지 않았다. 창호지 사이로 옅은 빛이 스몄다. 낮인데도 침실은 옅은 빛만 감돌 뿐 어두웠다.
“너 진짜 여기서 잠만 자?”
“응. 왜?”
“나 침실에 침대 하나만 있는 사람 살면서 처음 봐.”
“그래? 신기하네.”
서로를 신기해하는 꼴이 우스웠다. 넓은 한재영의 침대에 기대앉으려다 좀 전 비를 맞았던 게 생각나 엉거주춤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재영은 괜찮다는 듯 눈을 깜박였지만, 괜히 눈치 보일 짓은 안 하는 게 맞았다.
“욕조에 따뜻한 물 있을 거야. 저기 보이는 문, 옆으로 밀고 들어가면 욕실이거든. 안에 웬만한 건 다 있어.”
한재영이 가리킨 방향에만 문이 두 개였다. 방의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큰 사이즈 침대를 필두로 사방으로 보이는 분합문만 해도 여러 개였다. 이 방을 중심으로 욕실, 서재 같은 한재영의 개인 공간이 뻗어지게 구성한 것 같았다. 차고에서 올라올 때 보이던 세 개의 문을 떠올렸다.
“너희 집에는 문이 엄청 많다.”
“아… 본채는 이 정도는 아닌데, 별채 구조가 좀 특이해.”
“그래? 나 씻고 구경해도 돼?”
“당연히 되지.”
한재영이 제 머리에 묻은 물을 탈탈 털며 말했다. 목재 바닥으로 물 몇 방울이 날리듯 떨어졌다. 한재영의 집이니 그가 먼저 씻는 게 나을 듯했다. 침대 앞에 서서 나를 멀뚱히 바라보던 한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할 말이 더 있느냐를 묻는 표정 같았다.
“나는 나중에 씻어도 되니까 너 먼저 씻어.”
한재영이 느리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너 먼저 씻어도 괜찮은데.”
“그래도 양심이 있지. 집주인 먼저 씻어.”
“양심이라는 말 좋아하나 봐?”
“나?”
가방을 들던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언제 또 양심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던가 곱씹으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전교 1등과 전교 꼴등의 격차 큰 두 머리가 싸우는 꼴이니 승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진배없었다. 이미 진 싸움이라 나도 더 부정하지 않았다. 멍하니 입만 꾸물대는 나를 보던 한재영이 느리게 내 앞으로 걸어왔다.
“욕조가 편백나무라 금방 피로 풀릴 거야.”
“아, 응.”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뱉은 한재영이 곧 후드에 넣어둔 자신의 폰을 꺼냈다. 느리고 분명한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모습에 문득 잊고 있던 내 폰이 생각났다. 집에서 엄마에게 친구 집에 간다는 문자를 보낸 후로 한 번도 폰을 보지 않았다는 자각이 뒤따랐다. 가방에 넣었던가 싶어 무릎을 접어 앉았다. 바닥에 둔 가방을 뒤졌다.
“폰 찾아?”
“어. 여기 넣어둔 것 같긴 한데… 잠시만.”
“응.”
한재영은 내 앞에 나와 같은 자세로 앉았다. 까닥까닥하며 한재영의 상체가 위태롭게 앞과 뒤로 움직였다. 가방을 뒤적이다 다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바지는 여전히 빈 채였다. 흐린 기억에도 바지는 확실히 아니었다. 바지도 가방도 아니라면 역시 집에 두고 온 걸까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폰은 당연히 들고나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의 집에 지갑을 두고 간다며 아침부터 한재영을 비웃었더니 그보다 더한 꼴이 된 셈이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다 내 앞에 앉은 한재영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재영이 픽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왜? 폰이 안 보여?”
“어. 집에 두고 온 건 아닐 텐데.”
“차에 찾아볼까?”
“됐어. 괜히 너 귀찮게.”
잠시 고민하다 머리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엄마에겐 이미 친구 집에 온다는 연락을 해둔 상태였고, 딱히 내게 연락을 해 올 사람도 없었다. 민재가 죽은 후로 내게 온 연락은 모두 반가운 연락들이 아니었다. 이서정과 유상현의 연락만 해도 그랬다. 오히려 하루 정도는 폰이 없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머리 아프게 하던 일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테니까.
“딱히 연락 올 사람도 없고. 아. 나중에 네 폰으로 엄마한테 전화 한 통만 해도 되지? 걱정하실 수도 있거든.”
“응. 당연히 되지.”
한재영이 내게 제 폰을 내밀었다. 가슴 앞까지 내밀어진 폰을 보다 다시 한재영의 품으로 폰을 돌려줬다.
“씻고 나서 나중에. 지금은 괜찮아.”
좀 전 한재영이 말한 편백나무 욕조를 떠올렸다. 그 안에서 몸을 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문득 내가 탕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면 한재영은 새 물을 받아 씻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더 지체될 게 뻔했다. 역시나 이건 양심의 문제였다. 바닥에 앉은 한재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먼저 씻어. 어? 내가 진짜 양심이 있어서 그래.”
“음…….”
한재영은 입을 쭉 늘이다가 다물었다. 또렷한 시선이 내게 닿았다.
“욕실 넓은데. 같이 씻을래?”
“같이? 그건 좀.”
“왜?”
왜? 왜지? 잠시 표정을 굳히고 한재영을 보았다. 후드티를 입어도 듬직한 어깨선이며 고고한 몸의 선이 도드라졌다. 딱히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닌 내 몸이 생각났다. 한재영이 그런 내 몸을 보고 나를 비웃거나 놀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구태여 비교 대상에 나서서 들고 싶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재영이 날 보기 위해 상체를 조금 숙였다. 한재영은 마치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큰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눈앞에 머리카락이 차양처럼 찰랑찰랑 남은 빗물을 흩뿌리며 흔들렸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호정아. 괜찮으니까 먼저 씻어.”
한재영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시큰할 정도로 마른 침이 목을 긁으며 넘어갔다. 한재영에게 마치 속이 들킨 것 같아 더 자존심이 상했다. 괜히 입술을 깨물고 가방에서 속옷을 꺼내 일어섰다.
“됐어. 같이 씻어. 욕실도 넓다며.”
웃던 한재영이 잔잔한 웃음을 거두었다. 내 손에 들린 속옷과 나를 번갈아 보던 한재영이 곧 욕실을 향해 먼저 걸었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부드러운 걸음을 따라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와… 이 냄새, 뭐더라. 좀 익숙한 냄새인데.”
진득하게 몸을 감싸는 향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냄새야.”
미약한 불 냄새와 재 냄새. 금방이라도 검은 재가 날린 것 같은 회갈색의 향. 절에서 나던 냄새가 이와 같았던가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어릴 때 한두 번 불국사 정도만 가본 게 다였기에 명확하진 않았다. 내가 냄새에 집중한 사이, 한재영은 벌써 제 후드티를 벗어 세면대 위에 놓았다. 혼자 지내는 별채라더니 씻을 수 있는 세면대만 해도 두 개였다. 그 사이의 간격도 꽤 멀었다.
“친구가 올 거라고 했더니, 엄마가 별채에 왔었나 봐. 미안. 향냄새 좀 역하지?”
“아니, 아니. 맡아본 냄새라서 어디서 맡았었는지 생각하고 있었어. 나쁘지 않아.”
정말 싫지 않아 한 말이었는데 한재영은 내가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없이 미소 지었다. 세면대 뒤로 피어나던 연기로 한재영이 손을 뻗었다. 초록색의 기다란 대가 보였다. 연기의 시작점이자 향의 냄새가 시발된 곳이기도 했다. 한재영은 향을 세면대에 버리고 물을 틀었다.
하부장에서 향수를 꺼내 여기저기에 뿌리는 한재영의 모습이 의아할 정도로 진지했다. 세면대의 뒤로 한재영이 말한 편백나무 욕조가 한복에나 쓰일 법한 실크 차양으로 가려져 있었다. 광택이 도는 소재는 베이지 톤이라 투명하진 않았지만, 그 뒤의 실루엣이 드러날 정도는 되었다.
“저기 실크, 예쁘다.”
“본견이야.”
“그것도 엄마 취향?”
한재영이 픽 웃으며 뿌리던 향수를 세면대 옆에 놓았다. 다가온 한재영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뻗어 넣었다. 반쯤 마른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흩날렸다. 얼굴을 간지럽게 만드는 머리카락에 웬일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살짝 고개를 들어 한재영을 쳐다봤다.
“이건 내 취향.”
본견은 예전에 부모님 맞춤 한복에 쓰인 소재라 나도 이름만 얼핏 들어본 적 있었다.
“부드러워서 기분 좋거든.”
한재영의 손이 여전히 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실크와 같은 거라 물에 젖으면 안 되는 소재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한복을 입은 엄마가 물에 소매라도 젖을까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퍽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저거 물에 젖으면 안 되는 거 아냐?”
“똑똑하네.”
한재영이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다. 실크가 물에 젖으면 안 된다는 걸 안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칭찬받아도 되나, 내가 더 얼떨떨해졌다. 한재영은 뒤이어 “매일 교체해서 괜찮아.”라고 읊조렸다. 물기 먹은 목소리에도 좀 전 똑똑하다는 말과 놀란 표정만 떠올랐다.
“와씨. 너 방금 나 놀린 거지?”
한재영이 얼굴을 풀며 웃기 시작했다. 놀린 게 확실하단 증거였다. 한재영을 흘겨보다 그를 따라 맨투맨을 벗었다. 검은 바탕에 브랜드 로고 하나만 박힌 평범한 맨투맨을 벗고 막 바지에 손을 가져갈 때였다. 먼저 옷을 다 벗은 한재영이 세면대 옆 샤워가운과 흰옷을 가리켰다.
“어? 왜?”
“너 입어도 되는 것들이야.”
“옷 가져와서 괜찮은데. 잠옷도…….”
말을 하며 얼굴을 본다는 게 한재영의 몸에 시선이 먼저 갔다.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 더 넓게 벌어진 어깨에 시선이 붙들린 탓이었다. 부푼 듯 두툼한 흉곽을 보자 자연스레 내 몸과 비교되었다. 그 아래. 그 아래로 그림자가 질 정도로 묵직한 한재영의 성기가 도드라졌다.
“하.”
육성으로 터진 감탄사에 나도 놀랐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한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한재영은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건 집에 갈 때 입으면 되지. 여기선 편하게 있어.”
잠옷도 있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정한 표정과 부드러운 말투. 그것과는 너무 상반되게 크고 두꺼운 성기가 눈 바로 앞에 핏줄을 세우고 있었다. 발기한 상태도 아닌데 저 정도면 발기하면 어떠려나, 부러운 마음으로 흘깃 눈을 돌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아래를 오래 보는 건 실례였다. 한재영이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움츠린다고 가려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손으로 배와 가슴을 엉성하게 가렸다. 성기에 박혀있던 시선을 억지로 떼 한재영이 가리킨 옷으로 옮겼다. 내 머리가 이렇게나 무거웠나 생각이 들 정도로 고개를 돌리는 일이 버거웠다.
“어. 고마, 워.”
대충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옷이었다. 바지를 벗으며 무심히 살펴보아도 세면대 옆에 놓인 옷은 명백히 한재영의 사이즈가 아니었다. 내 몸에나 맞을,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였다. 이게 한재영이 말한 중학생 때 옷일까 생각하니 옅게 웃음이 났다. 흰 티를 입고 지금보다 작았을 중학생 한재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좀체 상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탕은 너만 써. 난 그냥 저기서 샤워만 할 거야.”
한재영이 가리킨 곳에 샤워부스가 따로 있었다. 투명한 샤워부스로 걸어가는 한재영을 불렀다.
“한재영.”
“어.”
멀뚱멀뚱한 눈이 나를 향했다. 과하게 순진하고 맑은 눈이었다. 너무 다급하게 부른 게 괜히 어색해졌다. 속옷마저 벗어버린 탓에 한재영이 뒤돌았을 땐 나체의 상태였다. 가리는 게 더 어색할 것 같아 짐짓 아닌 척을 하며 수건 하나를 손에 쥐었다.
“나만? 너는 왜 탕 안 들어오려고?”
“난 아침에 써서 샤워만 해도 돼.”
“아…….”
“나랑 같이 씻고 싶어?”
한재영이 처음 보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 수건을 쥔 손에 힘이 들었다. 이유를 왜 물어봤는지 나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한재영의 말처럼 그와 같이 탕에서 씻고 싶어서? 집주인 대신 탕에 혼자 들어가는 게 양심에 찔리고 눈치가 보여서?
“…아니. 그건 아니지.”
“물 식어. 호정아. 얼른 들어가.”
“…어.”
욕실 바닥은 욕실인데도 불구하고 물기가 없었다. 나와 한재영의 머리에서 미세하게 날린 빗물 몇 방울이 전부였다. 당연히 한재영이 샤워부스로 걸어갈 때조차 찰박이는 물소리나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한재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걸어야 저렇게 부드럽고 고고하게 걸을 수 있나 뒤꿈치에 들었던 힘을 풀었다.
베이지 톤의 본견으로 둘러싸인 탕 앞에 섰다. 실크의 감촉이 손을 스쳐 손등과 팔까지 전해졌다. 기분 좋은 감촉에 낮게 몸을 떨었다. 탕 옆에 수건을 걸고 한 발씩 천천히 몸을 담갔다.
“흣.”
발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된 따뜻함에 어깨 위로 소름이 돋았다. 탕은 생각보다 더 깊고 넓었다. 둘이 들어왔다고 해도 멀찍이 앉아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본견 뒤로 샤워부스의 물이 한재영의 몸 위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실루엣만 보이는데도 좀 전에 봤던 듬직하고 단단했던 근육들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듯했다. 내가 봐도 이 정도인데 여자들은 더… 최정화도, 최정화의 눈에도 그랬을까. 한재영을 볼 때마다 완벽한 남자라고, 참 멋있는 남자라는 그런 생각을 했을까.
최정화가 나를 공들여 본 적도 없을 테지만, 봤다면 나에 대한 감상은 어땠을까. 교내의 유일하게 집이 망한 애. 덜떨어진 전교 꼴등. 내 앞에 붙은 수식어와 한재영이라는 인간 자체의 수식어의 격차가 가늠되지 않았다.
“재영아.”
한재영은 답이 없었다.
“한재영아.”
한재영의 몸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세질수록 아마도 내가 하는 말은 더욱더 소음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편백나무 욕조에 살짝 볼을 기댔다. 물의 온도가 적당했다. 차라리 조금 식었다면 더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손등이 점차 빨갛게 익어갔다. 정적인 탕 안의 소음과 달리 샤워부스 안의 물소리는 쉬지 않고 바닥을 때렸다.
“…좋다.”
나도 좀 형편이 좋았다면, 머리가 좀 좋았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가 되면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망상에 더 가까울 듯했다.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나머지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불쑥 마음에 솟구쳤다. 잘난 인간이 되고 싶었다. 저 차양 밖으로 보이는 실루엣의 한재영처럼. 행동 하나하나 고귀함이 보이는 저 인간처럼. 몸에 밴 다정함과 섬세함을 가진 저 남자처럼.
발가락을 움직였다. 물은 잔잔한 파도를 만들었다. 가슴께까지 차오르던 물이 그 아래로, 다시 목 부근으로 오르는 느낌이 좋았다. 일어난 지 오래된 것도 아닌데 벌써 눈이 시리고 잠이 쏟아졌다. 민재가 떠나고 오히려 그 전보다 더 깊게 오랜 시간을 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때때로 졸리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민재의 죽음은 너무 큰 몫이었다.
그 언젠가 본 영상에서 우울과 잠은 결을 같이 한다고 들었다. 너무 많은 잠을 자는 것과 불면에 시달리는 극단의 두 증상 모두 우울증을 나타내는 증상이라 말하던 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울. 항상 밝던 민재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이제는 내 마음의 우울함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 자체로 머리에 열이 올랐다. 이제 민재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자고 하면서 그 틀에 갇혀 또다시 민재를 떠올리는 꼴이었다. 죽으면서 친구 없는 나에게 너 대신 한재영을 주고 간 거냐고 묻고 싶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댔던 볼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목을 살짝 뒤로 젖히자 목을 받칠 수 있게 구성된 편백의 결이 부드럽게 목을 받쳤다. 천장을 올려보는 자세로 팔을 기댔다. 몸을 감싼 물결이 부드럽고 잔잔했다. 적당한 온도. 나가기 싫을 정도의 평온함. 간간이 들려오는 한재영의 샤워 소리가 좀 전 밖에서 들은 빗소리와 같았다. 천장을 향한 채로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떴다.
“으앗. 씨.”
순간 너무 놀라 그대로 탕을 박차고 일어났다. “호정아.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한재영이 내 쪽으로 걸어오며 물었다. 놀라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높은 양상을 노란색의 커다란 부적이 대들보의 끝에서 끝까지 길게 가리고 있었다. 빈틈조차 없었다.
피처럼 붉은 그림이 그 가운데 그려져 있고, 다시 그 위에 진한 주홍빛의 부적이 수백 개가 넘게 붙어 있었다. 부적마다 선명하게 그려진 붉은 색의 글자들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기 달랐다. 그림인지 한자인지조차 구분하기 힘들었다. 마치 붉은 뱀 수천 마리가 공중에서 똬리에 틀고 나를 보고 있는 듯 보였다.
“하아, 하아.”
탕의 열기가 습기로 맺혀 마치 부적의 붉은 선들이 핏물처럼 습기로 물들어 있었다. 내 얼굴에 붉은 물이 떨어지진 않았을까 젖은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꼿꼿한 자세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부적으로 빼곡하게 찬 천장은 아무리 봐도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 이렇게까지, 일반 집에 이렇게까지 부적을 다는 경우가 있던가.
이 집에 오며 한재영이 한 말을 떠올렸다. 한옥이 악귀를 쫓는다던 한재영의 엄마와 내가 영상에서 본 한재영의 엄마. 둘 사이엔 괴리감이 있었다. 게다가 이 별채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재영이 혼자 지낸다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 저 정도의 부적이라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한재영이 다가와 드리워져 있던 실크를 한쪽으로 밀쳤다. 내가 소리를 질러댄 탓에 한재영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한재영은 멍하니 서서 천장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한재영의 시선은 내가 보고 있는 천장에서 다시 놀란 나로 연차적으로 이어졌다.
“미안. 놀랐지?”
한재영이 미간을 좁힌 채 길게 늘어진 본견을 주먹으로 꽉 쥐었다. 차양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아… 어. 이게 뭐야, 다.”
“이것도 엄마. 무슨 악귀를 쫓는 거라는데, 예술을 하시는 분이라 그런가… 이런 거에 좀 징크스? 그런 게 있는 거 같아.”
한재영은 곧 “정말 쓸모없는 짓이지.”라는 말을 하며 다가왔다. 벽에 걸어둔 마른 수건을 빼 내게 내미는 손길이 마치 구세주의 손길이라도 되는 양 느껴졌다. 아직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재영이 내민 수건을 잡았다.
수건을 머리에 덮었다. 한재영이 내게 손을 뻗으려다 거두는 게 보였다. 머리에 덮인 수건 사이로 파르르 떨리는 눈을 떴다. 한재영의 우람한 성기와 단단한 허벅지가 시야에 들었다. 얼굴을 닦는 척하며 수건으로 두 눈을 가렸다.
“샤워부스 쓸래? 난 이제 다 씻었어.”
“어. 고마워.”
“부적은… 신경 쓰지 마. 엄마가 저거라도 해놓아야 마음이 놓인다고 하셔서.”
이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고 물으려는데 그럴 틈도 없이 한재영이 먼저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어릴 때 가위에 좀 자주 눌려서. 발작도 좀 있었고.”
“발작?”
머리를 덮은 수건을 내렸다. 한재영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병원에 가도 원인을 모르니까. 엄마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다 나았는데도 뭐 거의 집착 수준으로 저러셔. 아무래도 외동이다 보니 좀 걱정이 많으신 거 같아.”
가위에 눌린다거나 발작을 일으킨 게 죄도 아닌데, 아들이 사는 공간에 부적을 저렇게나 붙여 놓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나도 외동이긴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이 정도로 나에게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었다. 형편이 안 좋아진 후로는 사는 게 바빠 더욱 내게만 관심을 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피아노를 치던 한재영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 뒤엔 아들의 흠은 하나도 보고 싶지 않은, 외면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는 걸까. 예술인들은 어딘가 뇌의 한 부분이 일반인들과는 다른 데다 유독 예민하다던데 한재영의 어머니 또한 그런 부류인 듯했다. 졸업식 때처럼 또다시 주제도 모르고 한재영을 안쓰럽게 보는 나를 발견했다. 머리를 덮고 있던 수건을 어깨에 두르고 탕을 빠져나왔다.
“윽.”
너무 놀란 탓인지 탕을 나오려다 잠시 휘청했다. 결국 한재영이 내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잡았다.
“아, 미안.”
“아냐. 내가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매일 보다 보니 난 좀 무뎌져서 생각도 못 했어.”
한재영이 나를 잡지 않은 나머지 손을 세게 주먹 쥐는 게 보였다. 가위에 눌렸던 거나 발작을 했다는 게 제 나름은 감추고 싶었을 이야기였을 텐데, 이렇게 내게 보인 게 창피한 듯 보였다. 나 또한 한재영에게 감추고 싶은 이야기나 보이고 싶지 않은 쪽팔리는 면면이 많기 때문에 그런 속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재의 이야기만 해도 그랬다. 장례식장 화장실에서 이서정이 민재의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고 말을 멈춘 건 내 옆의 한재영 때문이었다. 민재의 개인적인 이야기라 하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그런 일로 죽은 친구와 우리. 그 모든 관계에 대한 창피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재의 일로 한재영이 그와 어울렸던 무리 자체를 그렇게 볼까 나름의 두려움이 있었던 거다. 이서정의 그런 계산적인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한재영이 먼저 욕실을 나가고 한재영이 있던 샤워부스 안에 들어섰다. 조금 전까지 한재영이 씻었던 곳이기에 안에는 진득하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습기를 훅 들이켰다. 머리엔 여전히 좀 전에 본 부적의 어지러운 형상이 뒤엉켰다. 한재영이 먼저 욕실을 나간다고 할 땐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고 무서워서 그러니 다 씻을 때까지만 여기에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할 뻔했다.
내가 만약 그랬다면, 한재영은 온화한 얼굴로 여기 서서 내가 다 씻을 때까지 나를 기다려줬을 거다. 보통의 친구들과는 다른 놈이니까. 남을 상처 내는 말을 하고 욕을 해대는 게 더욱 우정에 가깝다고 여기는 그저 그런 놈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
수건을 걸이에 걸고 물을 틀었다. 탕의 물만큼이나 뜨거운 물이 머리를 적시고 어깨를 감싸며 떨어졌다. 시원한 소리였지만, 어쩐지 등이 서늘해질 만큼 무서워졌다. 여전히 저 천장을 덮고 있는 부적들의 눈이 모두 나를 향한 기분이었다. 이글대던 붉은 곡선과 직선이 모두 검붉은 가시가 되어 나를 향해 달려올 것만 같았다. 한재영이 가위에 눌려서 저 부적들을 단 게 아니라, 저 부적이 한재영이 가위에 눌리는 원인인 것 같았다.
“어린 애를 혼자 이 큰 집에 두니까 그렇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비록 한재영은 별채에 혼자 지낸 게 초등학교 때부터라고 덤덤하게 말했지만, 생각해 보면 고작 초등학생일 뿐이었을 나이였다. 열 살 즈음의 어린아이를 이 큰 별채에 따로 두었던 한재영의 부모가 이해되지 않았다.
졸업식 때 유독 이사장 앞에 겁먹은 얼굴로 있던 한재영이 떠올랐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한재영이 나간 욕실 문을 응시했다.
잘나게만 보이는 한재영의 속도 속이 아닐 거 같았다. 드라마나 영화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재벌 집의 자식들은 으레 다 이런 일을 겪으며 사는 걸까 생각했다. 저 부적만 봐도 제정신으로 사는 게 더 힘들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냈다. 한재영이 놓고 간 옷을 입으려는데 그 위에 놓인 새 속옷이 보였다.
“속옷은 언제…….”
언제 사둔 거지, 생각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아니더라도 다른 친구들이 간혹 놀러 오기라도 하나 싶어 치수를 살폈다. 다행히 내 사이즈와 맞는 속옷이었다. 내가 가지고 온 속옷을 그대로 두고 한재영이 준비한 속옷을 입었다. 그 옆으로 바디크림과 향수가 보였다. 허공에 향수를 한 번 뿌려 맡았다. 늘 한재영에게서 나던 향과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 목과 손목에 향수를 뿌려 비볐다. 쓰라고 둔 것일 테니 써도 괜찮겠지 싶었다. 내 몸에서 한재영의 냄새가 난다는 게 그리 싫지 않았다. 바디크림을 듬뿍 짜 발랐다. 이전에는 진득하고 끈적한 느낌이 싫어 바르지 않았는데, 한재영이 바르는 걸 보니 나도 바르고 싶어졌다. 바디크림 역시 향이 좋았다. 문득 크림의 뒷면을 살폈다. 향수와 브랜드가 같았다. 그러고 보니 향도 같았다.
“한 가지 향만 쓰나 보네.”
피식 웃음이 났다. 이 향에 꽂힌 건가, 생각하니 그 나름대로 귀엽게 느껴졌다. 하나에 꽂히면 하나만 하는 애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공한다더니 딱 한재영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흰 티를 입었다. 그 아래 흰 바지도 있었다. 면으로 된 바지는 품도 넓고 허리도 고무줄로 되어 있어 편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흰 티에 흰 바지라니. 보통 집에서 흰옷은 안 입지 않던가 생각했다. 내가 흰 티에 무얼 묻히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혼내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애들에게는 흰옷은 금기라던 엄마의 농담도 떠올랐다. 우리 엄마의 모든 금기를 깨고도 이렇게나 잘 지내는 남자가 있다는 생각에 조금 웃음이 났다.
옷을 다 입고 나오자 침대에 누운 한재영이 보였다. 팔로 눈을 가린 모습에 잠든 걸까 싶어 걸음 소리를 낮추었다.
“나왔어?”
“어. 자는 거 아니었어?”
“아니. 뭐 좀 생각하느라.”
한재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내가 뿌린 향수 냄새가 한재영에게 날 거라 생각하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냥 둔 걸 내 멋대로 바른 게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재영은 묵묵히 내게 다가와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냄새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괜히 긴장해있던 몸을 풀고 한재영이 내민 폰을 받았다.
“엄마한테 전화해드려. 걱정하시겠다.”
“아, 맞다.”
씻은 후에 폰을 빌려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폰을 받아 엄마의 번호를 누르다 문득 내 앞에 선 한재영을 다시 올려보았다. 내가 입은 흰 티, 흰 바지와 같은 옷을 입은 한재영이 보였다. 크기만 다를 뿐 티와 바지는 같은 브랜드의 같은 디자인의 제품이었다.
“옷이 똑같네.”
“응. 난 집에서 이 옷만 입어.”
“언제부터?”
웃으며 물었더니 한재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음. 10살부터?”라고 답했다. 거의 10년을 집에서는 한 디자인의 옷만 입는다는 게 웃기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사이즈만 다른 같은 옷이 이 집 어딘가에 첩첩으로 쌓여있을 걸 생각했다.
“외조부가 여기 창업주셔. 단종된 디자인이라 지금은 내 것만 만들고. 다른 건 불편해서.”
“와… 진짜 상상 이상이네.”
“응? 뭐가?”
네 집안과 그 재력. 속에서 굼뜬 말을 숨기며 다시 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재영은 고개를 갸웃대며 내 답을 기다렸지만, 딱히 더 답할 것도 없었다. 한재영의 시선을 못 본 체하며, 엄마의 번호를 마저 눌렀다. 몇 번의 수화음 끝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엄마.”
-호정이니?
엄마가 잠시 숨을 고르는 게 느껴졌다. 이게 누구 번호인지 확인하는 듯했다.
“나 친구 집에서 며칠 놀다 갈 거야. 폰을 잃어버려서.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해.”
-어제 왔던 그 친구야?
엄마가 물었다.
“어. 재영이. 한재영.”
-응. 알았어. 너무 오래 신세 지지 말고 금방 와.
답하는 사이 눈은 자연스레 앞에 선 한재영을 향했다. 매끈한 몸을 감싼 흰옷에 젖은 머리카락에선 아직도 굵직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다시 침대로 가 앉은 한재영이 손가락으로 침대를 두드렸다. 일정한 박자로 두드려지는 검지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샤워를 막 마친 참이라 정신이 몽롱해졌다.
-호정아. 이호정! 엄마 말 안 들려?
“어어. 왜?”
잠시 어지럽던 머리를 매만졌다. 지끈대는 이마를 짚고 시선을 돌렸다. 한재영이 내 쪽을 보고 있단 걸 인식하니 괜히 몸이 불편해진 것도 있었다.
-폰 얼른 찾아보라고. 잃어버렸다며. 새로 사는 것도 일이잖아.
“응. 그렇지. 아마 집이나 친구 차에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알았어. 올 때는 꼭 연락해. 그 전에 폰 찾아도 연락하고. 알겠지?
“알겠어.”
엄마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까맣던 화면이 다시 밝아지고 한재영 폰의 배경화면이 떴다. 한재영 폰의 배경화면은 이 옷처럼 하얗기만 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유럽풍의 건물 사진이었다. 한재영이 진학 예정인 학교의 사진인 듯 보였다.
“이거, 네가 간다는 그 영국 대학교 사진이야?”
“본관 전경이래.”
한재영에게 폰을 돌려주며 그 옆에 앉았다. 한재영이 폰을 쥐고 다시 화면에 뜬 대학교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좋아?”
“응. 1학년 때부터 여기 엄청 가고 싶었거든.”
“왜?”
졸업식 때 보았던 플래카드를 떠올렸다. 최정화와 함께 국내 대학의 합격을 축하하는 내용의 플래카드였다. 한재영은 다시 점멸된 폰의 화면을 응시하다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국내는 가기 싫었어. 좀 멀리 가야 더 좋지 않을까 싶었지.”
“음…….”
집을 벗어나고 싶은 걸까. 너도 나처럼?
물론 수준이나 상황은 여러모로 차이가 크지만, 어찌 보면 같은 결은 가진 고민일 수도 있었다. 내가 우리 집의 낯선 가난이 고되고 지겹듯이. 한재영도 자신을 향한 기대나 관심이 지겨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한계가 있는 얄팍한 이해력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내 생각이 맞는다면 또다시 한재영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재영이 풀썩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자기 옆을 팡팡 두드리기에 돌아보니 눈을 감고 침대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자신 옆에 누우라는 듯 느껴졌다. 한재영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향을 두른 채 그 옆에 어색하게 누웠다. 본 적 없이 크고 넓은 침대라 나중에는 넓은 간격을 두고 누워도 될 듯했다.
“침실은 여기 하나야?”
한재영이 느리게 눈을 떴다.
“하나 더 있어. 어떻게 알았어?”
“아,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보통 별채는 손님이나 자식들 용도라 혹시나 해서 물었는데 진짜였나 보다. 한재영이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기다란 눈이 동그랗게 떠진 채 날 향했다. 순식간에 몸이 가까워졌다. 움찔대며 몸을 비틀었다. 옆으로 조금 비켜났지만, 생각보다 간격은 멀지 않았다. 한재영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천장을 향해 누웠다.
“하나 더 있긴 한데 거긴 좀 좁고 불편할 거야. 왜, 나랑 자는 거 불편할 거 같아?”
“아니. 내 방에서도 같이 잤었는데, 뭐.”
그 좁은 침대에서 잔 적도 있는데 이렇게 넓은 침대에서 못 잘 이유가 없었다. 졸린 건 아니었지만, 나도 한재영을 따라 천장을 보고 눈을 감았다. 그 많은 부적을 왜 가위에 눌리던 침실 천장이 아니라 욕탕 위에 붙인 것인지 궁금했다. 이유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나 내 머리로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점심 먹자. 어떤 거 좋아해?”
“난 아무거나 다 좋아해서. 넌 보통 뭐 먹는데?”
“음…….”
침대가 울렁였다. 한재영이 자세를 바꾼 듯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면 한재영은 나를 보고 있을까 생각했다. 한재영도 나도 남자인데 마치 이성에게 관심받고 싶어 하는 애가 된 기분이었다. 한재영의 옆에 있을수록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고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느껴질 정도이니 옆에서 보는 한재영의 눈엔 이런 내 모습이 더 고스란히 보일 거다.
눈을 뜨지 말자. 절대 눈을 뜨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재영이 다시 말을 이을 때까지 눈 뜨지 말고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부러 얼굴의 근육을 부드럽게 풀었다. 어깨와 몸에 들었던 긴장감도 풀었다. 한재영을 의식하고 있지 않음을 온몸으로 표하고 싶었다.
다시 침대가 울렁이더니 한재영이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난 호정이 네가 먹고 싶은 거로 대접하고 싶은데. 우리 집에서 먹는 첫 끼니까.”
마지못해 눈을 뜨고 눈앞에 선 한재영을 쳐다봤다. 한재영은 옆이 아닌 내 무릎이 닿은 곳 바로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그림자가 내 전신을 덮은 참이었다. 팔을 구부려 상체를 받쳤다. 반쯤 몸을 일으키고 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척했다. 발가락과 다리가 움직이며 한재영의 종아리에 닿았지만, 한재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 그냥 밥 먹으면 될 거 같은데.”
“한정식? 여기 아저씨가 그거 전문인데. 다행이다.”
우리 집에서 정말 반찬에 밥만으로 잘 먹던 애가 눈앞의 얘가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해사하게 밝아진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났다. 폰을 쥐고 점심 연락을 보내는지 한재영의 손가락이 분주했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만 폰을 두드리던 한재영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폰 자판을 바쁘게 두드렸다.
“음료도 준비하랬어. 너 좋아하는 거.”
“아… 나 그거 내 주변에서 좋아하는 사람 나 빼고는 한 명도 못 봤는데, 너도 좋아해?”
“난 음료수 잘 안 마셔.”
“그래? 콜라도?”
“응.”
왜냐고 물으려는데 한재영의 폰이 울렸다. 폰에 뜬 화면을 확인한 한재영이 “잠시만.”이라고 말하며 침실을 나갔다. 점심이 다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테니 씻기 전에 말한 집구경을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부모님은 오늘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차피 이곳 별채에만 지내는 놈이니 본채까지 구경시켜 달라고 할 순 없을 터였다. 먼저 이 침실에서 가지처럼 뻗은 방들부터 구경하고 싶었다.
“머리…….”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마저 털었다. 샤워실 안의 드라이기를 사용하려고 다시 욕실 문으로 손을 뻗었다. 한재영이 나간 침실문을 다시 보았다. 욕실 안의 방대한 부적들을 떠올리자 도무지 혼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적어도 한재영이 이 침실까진 들어와야 안심하고 욕실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통화는 오래되지 않아 끝났는지 한재영이 금세 통화를 마치고 들어왔다. 욕실 앞에 멀뚱히 선 나를 발견한 한재영이 눈을 깜박거리며 다가왔다. 무서워서 그런다고 말하자니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호정아, 왜?”
한재영이 다가와 물었다. 욕실 문을 향해 뻗으려던 손을 바지 주머니에 감추었다.
“화장실은 어디야?”
“아. 저기. 화장실 갔다 오면 나머지 방도 구경시켜 줄게. 밥은 15분이면 다 될 거 같아.”
“금방 되네.”
답하며 한재영이 가리킨 문을 보았다. 화장실의 문은 다른 문과 달리 오동나무로 지어진 문이 아니었다. 좀 더 밝은 목제문의 색이었지만 어떤 인공적인 색도 가미하지 않은 본연의 색이라 그 자체로 시선이 가는 문이었다.
“화장실만 색 다른 거, 귀엽네.”
“그래?”
한재영이 웃었다.
“하나쯤은 색이 다른 걸 좋아하거든.”
평소에 보이던 웃음보다 더 깊은 웃음이어서 순간 한재영의 볼 가운데로 옴폭한 보조개가 드러났다. 보조개도 있었구나. 진짜 하나하나 가지지 못한 거라곤 없는 인생을 살고 있구나 싶었다.
“그 옆으로 드레스룸, 서재, 작업실…….”
문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하던 한재영이 끝을 줄이더니 작업실이라던 네 번째 문을 다시 가리켰다.
“공부하는 곳, 그 옆은 잡다한 거 넣은 방이라 보여주긴 좀 그래.”
“팬트리, 아니다. 창고 같은 거?”
“어. 딱 그거야. 창고.”
“보통 그런 데 재밌는 게 많던데. 졸업앨범이나 사진첩 그런 것들.”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뒤에 서서 문을 가리키며 설명하던 한재영이 다시 서재를 가리켰다.
“그런 건 서재에 있어. 보여줄까?”
“다음에. 내가 네 졸업앨범 봐서 뭐해.”
괜히 여자 친구 집에 놀러 온 기분이 나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재영은 다시 폰을 쥐고 침대에 가볍게 누웠다.
화장실 역시 변기가 두 개였다. 그 앞으로 기다랗게 한 벽면을 모두 채운 세면대 장이 보였다. 씻을 수 있는 세면대는 두 곳이었지만 하부장은 벽의 끝에서 끝까지 틈 없이 이어져 있었다.
“인테리어 한번 사납게도 하셨네.”
장 안에는 보나 마나 수건이나 휴지가 가득할 거라 생각했다. 오줌을 누며 느슨하게 잡은 성기를 바라봤다. 내 성기가 결코 작다고 생각하고 살지 않았다. 언젠가 민재와 같이 씻을 때 민재가 놀린 적도 있을 만큼 덩치에 비해 제법 묵직한 사이즈라고 생각하고 살았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좀 전에 본 한재영의 성기와 비교하니 터무니없었다.
“쟤는 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크고, 다 잘났을까.”
이 정도면 신의 실수가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유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불공평한 세상을 떠올리면 이젠 한재영이 가장 먼저 생각날 거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다시 침대에 누운 한재영이 보였다. 인기척에 일어난 한재영이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서재부터 볼래?”
“근데 보통은 서재가 공부방 아니야?”
“그런가?”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표정에 내가 알던 게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보통… 보통은 그렇구나.”
“아냐. 집마다 다른 거지.”
괜히 또 시무룩해질까 싶어 서둘러 말을 고쳤다. 한재영은 나를 앞서가 서재 문을 열어주었다. 내부는 돔처럼 둥글었다. 서재는 거실처럼 층고가 높았다.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책에 나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리며 다가섰다. 책은 분야에 따라 분류된 게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출판사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책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나와는 상반됐다. 이 많은 책을 다 읽긴 읽은 걸까 하는 생각과 전교 1등에 학생회장까지 한 한재영도 책을 읽을 시간이 있는데 난 뭐였나 하는 자괴감 섞인 생각이 범벅되었다. 손가락 끝으로 책을 훑었다.
“책 별로 안 좋아하면 여기 컴퓨터 있거든. 심심할 때 쓰면 돼.”
“아… 아냐. 나도 이제 책 좀 읽을까? 너 보니까 책 좀 읽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진심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한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나 싶어 봤더니 한재영은 묵묵히 컴퓨터 앞에 가 모니터를 켰다. 켜진 화면을 보았다. 민재와 함께 피시방에 갈 때마다 했던 게임들이 모니터에 보였다.
“오. 너 게임도 해? 너 진짜 하루를 48시간으로 쓰는 거 아냐? 마법사처럼?”
뿌듯한 표정을 보인 한재영이 울리는 폰을 받았다. 점심 준비가 다 되었다는 연락 같았다. “네, 네.”를 몇 번 반복한 한재영이 전화를 끊었다. 점심 준비가 끝났다고 말하며 한재영이 다시 서재 문을 향하기에 나도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점심을 먹은 후, 서재에서 가장 얇아 보이는 책 한 권을 챙겨 나와 침대에 누웠다. 한재영은 누운 내 옆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정리할 게 좀 있다는 말을 하며 한재영은 또 “미안.”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일부터 나 오후에는 일이 좀 있거든. 혼자 있을 수 있어? 혹시나 필요한 거 있으면 일하는 분들한테 말하면 돼. 저기 리모컨에 버튼 누르면 본채에서 바로 올 거야. 우리 부모님은 이틀 뒤에 오시니까 그때 인사시켜줄게.”
“게임 좀 하다 보면 금방일 거 같긴 한데.”
“늦진 않아. 나도 금방 올 거니까.”
내일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한재영의 부드러운 손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앞머리를 넘기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받았다. 처음엔 낯설었던 동작도 몇 번 되니 익숙해졌다. 오히려 좀 더 오래 만져주길 바라는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다음날 눈을 뜨니 한재영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오후부터 나간다더니 벌써 나간 건가 생각하며 폰을 찾았다.
“아. 잃어버렸지.”
벅벅 머리를 긁으며 바닥에 발을 붙였다. 아무리 살펴도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침실에 시계를 두지 않는 집이야 흔했다. 샤워라도 할까, 침대에서 일어나려는데 베개 옆에 놓인 작은 상자와 쪽지가 보였다. 쪽지를 떼어냈다. 마치 컴퓨터로 쓴 것처럼 반듯한 한재영의 글씨가 보였다.
[아침에 차 안을 다 봤는데 폰이 없어서. 아무래도 불편할 테니 당분간은 이거 써. 내 번호, 외우진 못 했을 거 같아서.]
메모 아래 한재영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상자를 들었다. 한재영이 두고 간 건 검은 스마트폰이었다. 누가 봐도 새것이었다. 상자를 열고 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두 시… 미쳤어.”
새 폰에 뜬 시간에 마른 얼굴을 비볐다. 남의 집에서 깨지도 않고 이렇게 오래 자는 놈은 나뿐일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를 두고 나갔다가 다시 새 폰을 사와 두고 가면서 한재영은 내가 얼마나 한심했을까. 한재영 눈에 비쳤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창피하기까지 했다. 욕실로 향하려다 화장실로 걸음을 바꾸었다.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고 머리까지 감았다. 가방에서 세면도구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준비된 새 칫솔로 이를 닦았다. 세면대 옆에 꽂힌 한재영의 칫솔 옆에 가만히 새 칫솔을 붙였다.
“이것도 한 제품만 쓰네.”
씻은 후 머리 위에 수건을 덮다가 문득 민재 장례 이후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피어싱이 떠올랐다. 피어싱 자국으로 가득한 귓불과 귓바퀴를 만지작댔다. 한재영의 말끔하고 깨끗한 얼굴과 귀가 생각났다. 늘 예쁘다고 생각했던 피어싱과 헤어스타일도 이제는 조잡하게 느껴졌다.
침실로 와 리모컨을 들었다. 리모컨의 버튼은 한재영에게 맞게 맞춤한 것이었다. 버튼마다 식사, 빨래, 청소, 호출 등 부름의 목적이 쓰여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식사 버튼을 눌렀다. 리모컨 상단의 전구가 잠시 반짝였다.
“편하긴 하네.”
중얼대며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사람 없이 텅 빈 거실이었지만 온기가 가득했다. 마당이 보고 싶었다. 집이 이 정도니 한옥의 마당은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할지 궁금해졌다. 보이는 문 중 인터폰이 달린 옆문이 마당과 이어진 현관 같았다.
“마당, 봐도 되려나.”
현관문은 다른 문에 비해 더욱 무겁고 두꺼웠다. 두 손으로 힘줘 밀어야 겨우 밀릴 정도였다. 심호흡을 하고 밀치자 한옥의 중정이 드러났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별채를 포함한 한옥 세 채가 둘러싼 형태였다. 앞에 보이는 두 한옥과 별채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우람하게 아래로 처져 늘어진 소나무들이 마당의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앞으로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붉고 흰 꽃의 대비가 아름다웠다. 눈에 보이는 슬리퍼를 신었다. 한재영의 것인지 뒤로 한 마디가 남아 덜렁거렸다. 마당 안으로 느리게 발을 디뎠다. 보송보송한 느낌의 잔디 결이 느껴졌다. 가만히 바닥에 깔린 잔디를 내려다보며 슬리퍼를 앞뒤로 움직였다.
“누구, 누구시죠? 거기 누구세요.”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영상 속 보석이 촘촘히 박힌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한재영의 엄마가 마당의 끝에 서 있었다. 이틀은 더 지나야 부모님이 오신다더니 아니었다. 어제 본 것과 같이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재영 엄마 앞을 막고 섰다.
“아, 아직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내일 들어오시는 줄 알고… 저… 동백이 예뻐서 잠깐 나와 본다는 게.”
민망하고 뻘쭘했다. 한재영 옷을 입고 선 것도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슬쩍 고개를 들었더니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놀랄 일인가 새삼스러웠다. 곧 남자의 등 뒤에서 길고 하얀 손이 뻗어 나왔다. 한재영의 엄마가 남자의 등을 두드렸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비켜섰다. 다시 한재영 엄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보, 보여요?”
“네?”
“지금 내가, 우리가 보여요?”
보이냐는 게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했다. 돌려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지금 내 눈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묻는 건가 생각하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
자신들이 사는 집이니 왜 낯선 사람이 있는 거냐고 물어야 하는 건 저쪽이었다. 오히려 나에게 자신들이 보이느냐고 묻는 게 어색했다. 한재영의 엄마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오며 순간 욕실 천장을 빼곡히 채운 부적들이 떠올랐다.
“그… 설마 귀신… 귀신이세요?”
입술까지 파르르 떠는 한재영의 엄마와 멍하니 입만 벌린 채로 나를 쳐다보는 경호원을 보며 물었다. 한재영이 한옥이며 부적이 엄마의 취향이라고는 했지만, 그 엄마가 살아있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이전에 우리 집에서 잘 때, 잠결에 엄마를 찾던 한재영이 떠올랐다. 한재영의 엄마가 죽은 거라면 저 경호원 역시 귀신인 건가 생각했다.
“아. 아니… 아니지. 그럴 리가.”
복잡한 머리를 좌우로 옅게 흔들었다. 생각은 다시 어제 욕실에서 나던 향냄새로 이어졌다. 엄마가 향을 피웠다고 했으니 한재영의 엄마도 저 경호원도 귀신은 아니란 소리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떨리는 입을 막았다.
“아니. 씨. 설마 이거 내가 죽은 건가.”
저들이 아니라 내가 이미 죽은 걸까. 볼을 매만졌다. 손을 뒤로 감추고 등을 세게 꼬집었다.
“낮인데. 어떻게 여기…….”
경호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을 하는 중에도 한재영의 엄마를 자신의 뒤로 감추는 걸 잊지 않았다. 저 말은 정말 내가 지금 여기에서 보여선 안 되는 존재라는 말과 같았다. 꼬집은 등이 아팠다. 이건 꿈도 아니고 나도 귀신도 아니… 어야 했다.
“설마. 진짠가. 나 진짜 죽었나.”
경호원과 한재영 엄마는 여전히 날 귀신 보듯 보고 있었다. 좀 전보다 더 세게 등을 꼬집었다. 여전히 아팠다. 두 사람의 뒤로 갖가지 음식이 실린 트롤리 카트를 밀고 오는 직원이 보였다. 카트를 밀고 오던 직원은 정원에 멀뚱히 선 나와 건너편에 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카트를 멈추었다. 덕분에 돌바닥을 세게 두드리던 바퀴 소리도 멎었다. 직원은 곧 한재영 엄마 쪽을 향해 고개 숙였다.
“사모님. 저분, 도련님 학교 친구분이시래요.”
“재영이 학교… 친구요?”
경호원이 옆으로 비켜섰다. 한재영 엄마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빤히 보는 눈에 경계심이 남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이 아들의 친구랍시고 정원에 멀뚱히 들어왔으니 충분히 놀랄 만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직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 입술을 잘근 물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호정입니다. 미리 인사 못 드려서 죄송…….”
한재영 엄마가 회색 원피스를 팔랑대며 내게 다가왔다. 경호원이 바짝 그 뒤를 쫓아왔다. 하얀 손가락이 내 눈앞에서 흔들렸다. 손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피아니스트의 손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손바닥엔 옴폭하게 패인 깊은 흉이 있었다. 적당한 굴곡의 선과 도드라진 뼈에 집중한 사이 눈앞의 손이 사라졌다.
“어머. 보여. 보이나 봐요.”
한재영 엄마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더니 이내 크고 맑은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어머. 어떡해. 우리 재영이 친구… 학교 친구래요.”
“네.”
경호원이 나를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엉거주춤 경호원을 향해 인사하려는데 두 손이 한재영의 엄마에게 붙들렸다. 한재영의 엄마는 트롤리에 담긴 음식을 보더니 내게 아직 밥을 안 먹었느냐며 걱정이 잔뜩 담긴 눈으로 물었다.
“여태 밥도 안 먹고. 재영이는 어디 갔어요?”
“네. 일이 있다고… 죄송해요. 재영이가 배고프면 밥 먹어도 된다고 해서… 저기, 저한테 말씀 편하게 하세요.”
우물쭈물 말했다. 한재영의 엄마가 또다시 손을 떨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은 피아노를 치기엔 너무 마르고 힘이 없는 느낌이었다. 평생 피아니스트의 손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어 그 생김새가 어떤지는 알지도 못 하지만, 이 손과 몸으로 그 큰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고 한 시간을 빼곡하게 앉아 피아노를 친다는 게 신기했다. 한재영의 엄마는 내가 본 화면에서보다 더 왜소했다. 키는 160 초반 혹은 중반. 최정화의 키와 비슷한 듯 보였다.
“재영이래요. 우리 재영이보고 재영이랬어. 들었죠?”
“네. 사모님. 들었습니다.”
한재영을 재영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 멀뚱멀뚱 눈을 움직였다. 한재영의 엄마는 연신 “일찍 돌아오길 잘했다.”며 잡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다훈 씨가 재영이 손님 오는 날이래서 며칠은 가지 말라더니… 이번에 백련 장군님 부적은 들을 거랬는데, 그렇게 아니라더니. 봐. 우리 재영이 친구가 다 집에 오고. 이런 친구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호정. 호정이.”
한재영의 엄마는 내 이름을 암기하듯 되뇌었다. 한재영 엄마의 입을 통해 뱉어지는 내 이름이 평소와 달리 세련된 새 이름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내면에 부자에 대한 사대주의라도 있었나 부끄러워졌다.
한재영의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본채로 이끌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혼자 먹으면 쓸쓸하다며 나를 이끄는 동작에 한재영의 큰 슬리퍼를 질질 끌며 따라가고 말았다.
별채보다 더 화려할 줄 알았던 본채는 오히려 적적한 편에 속했다. 정말 이곳에 두 분이 지내시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물건도 별다를 게 없었다. 그저 벽면을 채운 수묵화와 그 아래 백자 분마다 가득 들어찬 난이 한옥 특유의 고풍스러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한재영 엄마는 기다란 식탁으로 나를 이끌었다. 식탁은 우리 집의 끝에서 끝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한 크기였다. 트롤리에 음식을 담고 가던 직원이 다시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다가 고개를 들 때마다 한재영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상기된 얼굴을 마주하는 게 고역이었다. 어색함과 불편함에 목을 넘어가는 음식이 아렸다.
“재영이랑은 어떻게 친구가 됐어… 요?”
“아…….”
역시나 묻고 싶은 게 많아 나를 본채까지 들인 것 같았다. 내 형편이나 수준을 알면 당장 자신의 아들에게 나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진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입안에 든 음식을 재빨리 삼키고 답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잘 통해서 친해졌고.”
“그렇구나. 난 우리 다훈 씨가 말하지 않으면 하나도 몰라서.”
한다훈. 우리 학교의 졸업생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사장의 이름이 한재영 엄마의 입을 통해 들으니 꽤나 다정하게 들렸다. 화장기가 별로 없는데도 얼굴에는 기품이 있었다. 투명하고 반듯한 피부에는 인생의 고됨이나 걱정도 없을 것만 같았다. 밤늦게까지 일하다 들어오던 엄마의 얼굴과 앞에 있는 한재영 엄마의 얼굴이 겹쳐지며 속이 부대꼈다.
“그만 먹게? 더 먹지. 많이 먹어요. 이거 맛있는 건데. 우리 재영이도 곧잘 먹는다고 들었고.”
“아, 그게. 제가 원래 첫 끼를 많이 먹지는 않아서요.”
“우리 재영이랑 비슷하네.”
연신 반짝이는 눈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는 건가 잠시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건 예의가 아닌 듯했다. 게다가 한재영 엄마의 눈은 아직도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식탁에 놓인 숟가락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마침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새 폰이라 진동 설정도 하지 않아 벨 소리는 기본 벨 소리로 설정돼 있었다. 벨이 시끄럽게 홀을 채웠다.
“죄송합니다. 진동으로 한다는 게…….”
“괜찮아, 괜찮아요. 어서 전화 받아요.”
말은 죄송하다고 했지만 벨 소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준 게 고마웠다. 폰을 꺼냈다. 메모에 쓰인 한재영의 번호와 같은 번호가 떠 있었다.
“재영인데요.”
폰 화면을 슬쩍 보여주었다. 한재영의 번호를 본 그의 엄마가 안도감 섞인 숨을 내뱉었다. 얼굴에 담긴 미소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받…….”
폰의 통화 버튼을 당겼다. 막 받으려는 참에 전화가 끊겼다. 하얗게 뜬 배경화면에 웃음이 났다.
“얘가 성격이 급하네요.”
웃으며 뱉은 말에 한재영의 엄마가 미소를 거두고 눈을 끔벅거렸다. 비록 농담이더라도 엄마 앞에서 자식의 욕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뒤늦은 자각이 따랐다. 분위기를 풀 만한 이야기가 뭐 더 없을까, 생각하려는데 한재영의 엄마가 내 폰을 손으로 가리켰다.
“재영이한테 다시 전화 안 해도 되겠어요? 아니, 되겠어?”
아들의 친구인데도 말을 낮추는 게 어색한 것 같았다.
“네? 아, 괜찮아요. 급한 거면 다시 하겠죠.”
물끄러미 폰을 보다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남은 밥이라도 마저 더 먹어야 할까, 생각했다. 숟가락을 들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다시 폰이 울렸다. 이번에도 한재영의 번호였다. 눈짓으로 한재영의 엄마에게 받겠다 말하고 폰을 들었다. 아까보다 빨리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붙이자 한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아. 본채에 왔어. 어머니가 일찍 돌아 오셨나 봐. 너 몰랐어?
한재영 엄마가 내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한재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다정하고 살가웠다.
-응. 몰랐어. 나도 금방 가.
“어. 밥은?”
-안 먹었어. 넌?
“아, 여기서 먹긴 했어.”
한재영이 미소 짓는 게 느껴졌다. “잘했네.”라고 하는 말에 괜히 칭찬을 받은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한재영의 엄마가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한재영과의 통화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웃음이 났다. 한재영도 밖에서는 다정하고 섬세해도 역시나 집에서는 그저 애교 없는 아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엄마에게는 적당히 살갑지도 다정하지도 못한 그런 평범한 아들이라는 생각에 동질감이 들었다.
한재영이 돌아오기도 전에 한재영의 엄마는 본가의 방으로 들어갔다. 곧 재영이가 돌아온다고 말했지만, 한재영의 엄마는 피곤하다는 말로 자리를 피했다. 그래도 보통은 아들 얼굴을 보고 들어가지 않나. 그 또한 집마다 다를 테니 입을 떼기 어려웠다. 한재영은 본채로 들어와 넓은 자리 중에서도 하필이면 내 바로 옆에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우리 엄마, 뵀어?”
“응.”
“실제로 봐도 나를 닮았어?”
물 한 잔을 삼킨 한재영이 미소 지은 채 물었다. 실제로 봤을 때도 한재영을 닮았던가, 생각하니 답이 명확하지 않았다. 특유의 기품이나 다정함은 닮았지만 막상 얼굴 자체의 선은 비슷해 보이지 않았다. 사실 눈치를 보느라 한재영 엄마의 얼굴을 뚫어지게 볼 시간도 없긴 했었다. 한재영의 손이 부드럽게 내 턱을 감쌌다.
“어?”
턱이 잡힌 채 한재영을 향해 고개 돌렸다. 한재영의 손이 내 턱을 잡아 자신을 향하게 했다.
“더 봐. 더 보면 닮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
여전히 다정하게 웃는 한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야. 씨, 됐어. 대충 봐도 닮았어.”
내 턱을 잡은 한재영의 손을 쳐냈다. 의자에 등을 기댄 한재영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얼굴과 목이 뜨거워졌다.
“난 내가 엄마 닮았는지 잘 모르겠던데.”
“그래도 엄만데 어딘가는 닮았겠지.”
“그런가.”
한재영이 테이블에 팔을 올려 그 위에 턱을 괴었다. 한재영은 잠시 눈을 돌려 그의 엄마가 들어간 침실을 응시했다.
“뭐 하나에 꽂혀서 집착하는 거. 그런 건 닮았을 수도.”
열 살 때부터 바뀌지 않고 입는다던 흰옷과 겹겹이 쌓인 같은 향의 향수, 바디크림이 떠올랐다. 뒤이어 욕실에 잔뜩 붙어 있던 부적까지 떠올리자 한재영의 말이 조금 이해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별채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많은 상황들이 단시간에 벌어진 것에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았다. 한재영은 넋이 나간 내 얼굴을 보더니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
“아… 두 시.”
“얼마 안 됐네?”
한재영의 손가락 끝이 두피를 꾹 눌렀다. 마사지라도 받는 것처럼 몸이 느슨하게 풀렸다.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빠져나갈 땐, 아쉬운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씻으러 들어간 한재영을 기다리며 주머니 속 폰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폰도 줬는데 고맙다는 말도 아직 못 했다. 씻고 나오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지 생각했다. 이미 충분히 염치가 없는 상태였다. 염치가 없다 못해 마이너스인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다.
폰에 평소 사용하던 어플을 설치하고 설정들도 내게 맞게 정리했다. 이전에 쓰던 폰의 익숙함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나름 새로운 번호로 내가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과만 연락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다만, 외우지 못해 다시는 연락하지 못 하게 된 민재 어머니의 번호와 민재와 함께한 사진들을 잃어버린 것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태어나 한 번도 잃어버린 적 없던 폰을 하필 민재 일이 있고 잃어버렸다는 게 신경 쓰였다. 때맞춰 샤워 소리가 잦아들었다. 폰에 엄마 번호를 누르고 문자를 막 보내려던 참이었다.
“흠…….”
반쯤 써 내려가던 문자를 지우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가 어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어색한 목소리에 물기가 있었다.
“엄마. 나.”
-호정이? 이 번호는 뭐야?
“아, 내 새 번호.”
-새로 샀니?
엄마는 “폰, 못 찾았어?” 물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놀란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순간 내 돈으로 샀다는 말이 엄마를 더 화나게 할지, 친구가 이걸 사줬다는 말이 엄마를 더 화나게 할지 고민했다. 둘 다 엄마를 화나게 할 거란 확신이 들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한재영이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라이기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호정아. 집에 언제 올 생각이야?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엄마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드라이기 소리를 뚫고 귀로 들어왔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뒷머리를 긁으며 다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다음 말이 빨리 이어지길 바랐다. 엄마는 그래도 답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무슨 일 있냐니까.” 한 번 더 힘줘 묻고 나서야 엄마가 더디게 입술을 열었다.
-호정아. 엄마 네가 폰 잃어버린 거 잊고 오늘 계속 네 이전 번호로 전화했었어.
“엄마. 집에 무슨 일 있어?”
말을 돌리는 것에 짜증이 나 물었더니, 엄마가 다시 낮게 한숨을 쉬었다. 마침 머리를 다 말린 한재영이 아래에만 샤워 타월을 두른 채 나왔다. 정돈되지 못한 머리를 한 손으로 뒤로 넘긴 한재영이 통화 중인 나를 빤히 쳐다보며 섰다.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오는 한재영의 허벅지와 드러난 상체의 근육으로 시선이 갔다. 고개를 다급히 숙였다. 폰을 바짝 쥐었다.
-너희 아빠, 하, 사고를 좀 냈어. 지금 수습 중이긴 한데… 호정아, 엄마 너무 힘들어. 엄마도 이제 너무 지치고… 다 놓고 싶어. 호정아.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거친 호흡이 폰을 타고 전해졌다.
“엄마… 어디야. 어딘데.”
울먹이던 엄마의 숨소리가 곧 끅끅대는 헐떡임으로 변했다. 한재영에게도 이 울음소리가 들릴까. 폰을 바로 쥐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한재영이 폰을 쥔 내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 손과 폰이 한재영의 손에 모두 잡혔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와중에도 사고를 냈다는 아빠와 우는 엄마의 걱정이 아니라 한재영의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인 게 창피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엄마는 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내 질문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가만히 폰을 내렸다. 한재영의 손은 여전히 폰을 쥔 내 손을 덮고 있었다. 한재영이 얼굴 옆으로 흐른 머리를 뒤로 넘기고 내 무릎을 양손으로 잡았다. 양쪽 무릎이 각각의 손에 담겼다.
“호정아. 데려다줄까?”
무릎을 떠난 한재영의 손이 내 눈 밑을 옅게 쓸었다. 울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빠가 냈다는 사고가 뭘까, 생각했다. 보증이라도 잘못 선 걸까? 회사 부도 이후 그 모든 빚을 아빠가 떠안은 상태라 신용이 좋지 않았다.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일을 하는 중에 어떤 사고를 내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런 것이라면 나았다. 엄마는 아빠의 사업이 망했을 때도 지금처럼 흐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빠가 사업 실패로 풀 죽을까 늘 눈치를 살피던 쪽이었다.
무덤덤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한재영의 집과 우리 집이 멀지 않다는 게 이럴 땐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파트의 입구에서 슬쩍 위를 올려보았다. 집의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한재영이 나를 저지했다. 한재영은 자신의 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네. 어머니. 저 호정이 친구, 네. 맞아요.”
그의 엄마를 닮은 기다란 손가락이 핸들을 감쌌다. 생각보다 한재영과 엄마의 통화가 길어졌다. 아들 친구에게 무슨 할 이야기가 저렇게 있는 걸까. 울컥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엄마는 어떨지 몰라도 나에게는 한재영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면이 있었다. 구질구질하고 가난한 내 모습과 질척이는 가난의 따분함 같은 것들. 다시 한재영을 쳐다봤다.
한재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작게 한숨 쉬더니 나를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적요한 차 안인데도 통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멈춰있던 핸들이 우측으로 꺾이며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는 아파트를 선회해 다시 입구를 향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가면 삼십 분 정도 걸릴 거예요.”
마침내 통화를 마친 한재영이 폰을 자신과 나 사이에 있는 홀더에 넣었다.
“엄마. 뭐래? 어디래?”
“목경대 병원. 멀지 않아.”
병원이라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불길한 기분은 들었지만, 상황을 모르니 무턱대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잠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는데 한재영이 내 이름을 불렀다.
“호정아.”
한재영이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게 보였다.
“아냐. 가서 네가 직접 듣는 게 나을 거 같아.”
한재영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한재영은 사이드미러에도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앞만 보고 핸들을 돌렸다. 한재영을 보던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엄마는 한재영에게 무슨 이야기를, 대체 어디까지 한 걸까. 따가운 눈을 질끈 감았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비는 추적추적 느리게 떨어졌지만, 무게가 있어 바닥을 때릴 땐 둔탁한 소리를 냈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늦지 않은 시간인데도 날이 어둑해졌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병원의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한재영은 망설이지 않고 2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도 한재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병원의 엘리베이터답지 않게 2층으로 가는 동안 엘리베이터에 더 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길어졌다.
“…중환자실에 아버지 계실 거야. 나중에 연락해. 난 잠시 밖에 있을게.”
“…응.”
2층에 내려 잠시 망설였다. 우측의 복도만 지나면 중환자실이었다.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빠가 사고를 냈다는 게 아니라 사고가 났다는 거였나, 통화 속 엄마의 말이 헷갈렸다.
중환자실 입구에서 아빠 이름을 대자 이미 함께 있는 보호자가 있으니 보호자에게 연락부터 하라는 답을 받았다. 결국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통화 중이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짜증스럽게 폰을 내리는데 복도에서 폰을 쥐고 통화 중이던 엄마가 보였다. 한숨을 내쉬며 엄마를 불렀다. 복도에 울리는 내 목소리에 엄마가 쥐고 있던 폰을 내렸다.
“엄마. 전화 좀 받아.”
한껏 짜증스러운 말투로 엄마를 쏘았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넘겼다. 긴장했던 탓에 이마 옆으로 땀이 흘러 있었다.
“아빠. 사고야? 많이 다쳤어? 들어가 볼 수 있지?”
“말도 하고 괜찮더니. 갑자기 조금 전부터… 숨도 잘 못 쉬고 이상해. 아빠, 수술… 수술해야 한대.”
“해야 하는 거면 당연히 해야지. 그게 왜.”
한재영의 것인 흰 바지와 흰옷. 한재영과 같은 향을 두르고도 나는 한재영 같을 수 없었다. 타고난 형편과 집, 부모, 하다못해 내 성격과 성품도 한재영과는 완벽하게 달랐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고 엄마는 눈에 핏줄이 터진 채 우는데도 이 모든 상황에 짜증부터 나는 게 내 인품의 한계였다. 내 눈으로 직접 아빠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호정아… 흐윽, 호정아…….”
엄마가 흐느끼며 내 가슴을 끌어안았다. 엄마 인생의 마지막 동아줄이 내가 된 것 같았다. 아빠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엄마의 눈물을 보니 나도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엄마는 가까스로 나를 붙들어 안더니 숨이 넘어갈 듯 울기 시작했다.
“엄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아빠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직감이 확신이 되면서 점차 눈이 뜨거워졌다. 한참 소리 내 울던 엄마가 내 볼을 양쪽에서 잡아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아래로 늘어진 엄마의 눈꼬리와 거친 피부에서 삶의 고단함이 보였다.
“너희 아빠, 술 마시고 운전했대. 미친… 미쳤어. 완전 미친 사람이야.”
“뭐?”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 주위를 살폈다. 화가 치밀었다. 음주운전이라는 말에 머리끝까지 화마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마치 고자질이라도 하는 아이처럼 내 볼을 잡고 매달렸다. 엄마가 아무리 매달려도 난 나올 게 없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음주운전. 아빠가 운전한 차는 공사업체가 임대한 1톤 소형 화물차였다. 화물차임에도 불구하고 4차선 도로에서 1차선 추월차선을 달렸다고 했다. 게다가 속도위반. 차는 비상등을 켜고 잠시 바퀴를 점검하던 앞차를 박고 그대로 4차선 도로까지 굴렀다.
다행히 정차되어 있던 차의 차주는 차량 고장 신고를 위해 갓길에 빠져 있어 다치지 않았지만, 아빠의 옆자리에 같이 탔던 만취 상태의 동료가 앞 유리를 뚫고 도로로 튕겨 나갔다. 벨트 미착용으로 인한 사망이었고, 그 원인에 혈중알코올농도 0.12의 운전자, 아빠가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빠의 과실이 아닌 부분이 없었다. 한숨과 동시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고개는 반쯤 천장을 향했다. 품에 엄마를 안고 가슴을 달싹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나 따위가 해결할 수나 있는 것인지 막막했다.
스물. 나는 고작 스물이었다. 이제 갓 스물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감당하기도 버거운 일이었다. 목울대로 진득하고 뜨거운 침이 고였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아 지옥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픈 눈 위를 손등으로 세게 비볐다. 불에 긁힌 것처럼 눈덩이가 따가웠다. 이미 눈물로 젖어있던 부위는 마찰과 함께 붉은색을 냈다. 출입명부 가장 하단에 이름을 써넣었다. 하얀 종이를 가른 칸에 내 이름이 반듯하게 들어갔다. 종이에 쓰인 이호정이라는 이름이 다시 평소와 같아졌다. 이제 더는 한재영의 집에서처럼 세련되게 들린다거나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내 모습처럼 보잘것없는 초라한 이름일 뿐이었다.
“호정아. 너무 놀라지 마. 알았지?”
답하지 않았다. 엄마가 어떻게 말하든 아빠를 보면 그 모습에 놀랄 게 뻔했다. 아빠가 있는 곳이 중환자실이니까.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의 모습 중 보고 놀라지 않을 모습이란 건 없었다. 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엄마와 함께 중환자실에 들어섰다. 혼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아빠를 찾는 건 쉬웠다. 마침 아빠의 옆에서 기계의 수치를 작성하던 의사가 우리를 발견하고 옆으로 비켜주었다. 저 화면에 뜬 숫자로 아빠의 생명이 측정된다는 게, 저 숫자가 아빠의 남은 목숨값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작은 한숨에도 엄마는 내 등에 얼굴을 붙이고 흐느꼈다. 내가 한재영의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편하게 있던 동안 엄마는 계속 이렇게 병원에서 울고 있었을 것이다.
“수술, 언제 가능할까요?”
내 물음에 복잡한 숫자를 패드에 기재 중이던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딱 맞게 쓴 안경엔 땀으로 습기가 맺혀 있었다.
“어… 저희는 선납 후 수술 예약을 진행해서요. 선납하시면 당장 오늘도 가능할 겁니다. 외래 중인 분도 계시니까.”
의사는 제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서른이 갓 됐음 직해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그 또한 이 상황을 민망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일정하지 못한 호흡을 하던 아빠가 순간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상체는 다 벗은 채로 가슴 위로 심폐보조장치의 전선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호흡기의 숫자가 뒤틀렸다. 화면의 숫자가 빠르게 움직이며 아빠의 발작도 격해졌다.
숫자가 요동치자 의료진 몇이 뛰어왔다. 엄마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한 의사가 침대에서 튕겨 오르는 아빠의 가슴을 눌러 압박했다.
솔직히 말해 음주운전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마음에선 아빠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아빠가 생의 마지막 끈을 붙들고 있는 이 순간이 그래서 더 괴로웠다. 병원 복도에서 엄마가 울먹이며 말한 “차라리 죽었… 죽어야 해.”라는 말은 아마 엄마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지금의 아빠를 보는 게 괴로웠다.
양가감정이 교차했다. 그래도 나의 아빠니 이 떨림을 이겨내고 살아냈으면 하는 바람과 음주운전의 뒷감당을 아빠 선에서 끝내고픈 이기심의 감정이었다.
“돈만 내면, 흐윽, 지금 수술, 윽, 가능한 거죠.”
엄마는 아빠의 발등을 붙잡고 있는 막내 간호사의 팔을 끌며 물었다. 옆의 의사와 간호사 눈치를 살피던 막내 간호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형편이야 내가 더 잘 알았다. 아무리 간절한 마음으로 애쓴다 해도, 돈이 나올 구멍은 이제 더 없었다.
달마다 돌아오는 이자에 치여 일 년에 한두 번은 삼촌들에게 생활비를 구해야 하는 게 지금의 형편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아빠와 그 위에 올라탄 의료진 앞을 엄마의 얼굴이 가로막았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엄마는 다시 한 번 썩은 동아줄인 내 팔을 붙들었다. 짧은 손톱이 아프게 살갗을 찔렀다.
“호정아. 같이 온 네 친구. 그 친구… 도움 좀 받으면…….”
“엄마! 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엄마가 붙들려는 동아줄은 내가 아니었다. 나와 함께 온 한재영이었다. 짙은 수치심에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엄마가 다시 내게 다가서는 게 보였다. 엄마에게 잡히고 싶지 않았다. 아빠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소리와 분주한 의료진이 내뱉는 어려운 용어들로 범벅된 외침 속에서도 내게 다가오려는 엄마의 발소리만 귀를 울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힘겨웠다.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아빠의 얼굴에 붙은 호흡기가 아빠의 경련을 따라 들썩거렸다. 호흡기에 찬 습기가 생명의 불씨인지 이미 꺼진 생명의 연기인지 헷갈렸다. 양팔을 감싸 비볐다. 한기가 들었다. 내게 다가오는 엄마도 달갑지 않았다.
“엄마… 진짜 다 그만두고 싶은 건 나야.”
경련으로 떠는 아빠와 오열하는 엄마를 두고 뒷걸음질 쳐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엄마의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나와 엄마를 훔쳐보던 시선을 재빨리 아빠 쪽으로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마른 입술을 찢어지도록 세게 물었다. 다행히 엄마는 나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병원 복도에 나와 주머니를 뒤적였다. 폰을 찾아야 했다. 한재영에게 전화부터 해야 했다. 이 순간에 나를 도와줄 사람이라고 떠오르는 게 한재영밖에 없었다. 좀 전 샤워 중인 한재영을 기다리며 염치라는 걸 상기했던 내 꼴이 우스웠다.
“…염치는… 씨발… 내 주제에 무슨…….”
울컥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닦았다. 손이 떨려 주머니에 들어있는 폰이 잘 잡히지 않았다. 땀에 젖은 손을 티에 닦아냈다. 다시 주머니 속 폰을 꺼내려 손을 넣으려다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 선 한재영이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분주하던 손을 멈추고 한재영을 빤히 보았다. 손등으로 눈을 비벼 눌렀다. 울어선 안 됐다. 이왕 부탁이란 걸 할 거라면 덤덤한 척이라도 하며 부탁하고 싶었다.
한재영의 손에 들린 담뱃갑이 보였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려던 걸까. 아니면 이미 한 대를 피우고 또 한 대를 더 피우려던 걸까. 민재의 장례식장에선 분명 끊었다고 하지 않았었나. 누구 때문, 아니, 누가 담배 연기를 싫어한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생각들만 연쇄적으로 머리를 채웠다.
“한…….”
부를 필요도 없었다. 나를 발견한 한재영이 손에 들린 담뱃갑을 바닥에 던지고 나를 향해 뛰어왔다.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진 구겨진 담뱃갑을 보며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코앞에 다가온 한재영의 팔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절대 울지 말자고 다짐했던 게 무참히 무너졌다. 한재영이 내게 다가오자마자 나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이 순간, 민재라도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보다 쉬웠을 거다. 고등학교 학비도 지원해줬던 민재였다. 내 형편을 속속들이 아는 민재가 지금 여기 있었다면 이런 부탁도 훨씬 수월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아빠의 수술비 이야기도 어쩌면. 가벼운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었을지 몰랐다.
“한재…….”
한재영이 자신의 팔을 붙든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우리 아빠 좀 살려줘… 나… 나 좀 도와줘.”
주먹 쥔 채 바들바들 떨리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한재영의 큰 손에 잡혔다. 한재영이 내 안색을 살피려는 듯 상체를 숙였다.
“호정아. 아버지 수술비 결제했어. 걱정 마. 바로 수술 가능하대. 응? 이제 울지 마. 괜찮아.”
가까스로 고개를 올렸다. 울음을 참으려는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재영은 잡은 내 손을 당겨 끌었다. 한 걸음도 가지 않아 한재영의 품에 얼굴을 박고 안긴 꼴이 되었다.
“호정아. 나는 네가 왜 우는지 몰라.”
한재영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앞에선 뭐든 괜찮아.”
내 뒤통수를 한재영의 넓은 손이 감쌌다. 동시에 허리 뒤로도 한재영의 손이 들어왔다. 완전히 안긴 꼴이 되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욱 꼴사납게 울어댈 것 같았다.
“호정아. 졸업식 날 네가 받은 특별 장학생 상. 기억나?”
한재영이 물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듣는 순간 복잡하고 어지럽던 마음이 단번에 평온해지는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가까스로 참고 있던 숨이 터지며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한재영의 등으로 손을 올려 뺨을 훔쳤다. 겨우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뒤통수를 잡은 한재영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힘이 들어간 동작인데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호정아.”
한재영이 부르는 내 이름을 듣고 있었다.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온다 싶더니 이내 몸이 한재영의 품에 완전히 밀착하듯 안기게 되었다. 한재영은 내 허리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손이 내 티를 구기며 세게 허리를 움켜쥐었다. 한재영의 숨소리가 귀를 채웠다.
“그거 있으면 내가 가는 대학에 너도 갈 수 있는데.”
중환자실 앞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어떡할래?”
누군가 나를 지옥 불로 끌어당기는 느낌. 맥없이 두 다리가 끌려가는 중에 내게 나타난 구세주이자 동아줄이, 바로 나를 안고 있는 한재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랑 같이 갈래?”
한재영이 나를 세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된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