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사이코패시(1) (2/22)

2. 사이코패시(1)

악인은 흰 눈이다. 처음에는 새하얗고 아름답지만 곧 진흙땅이 된다.

-유대인 속담-

처음 그 병원에 갔을 때 재영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재영은 아직도 이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생에 가장 지루했던 날이었으므로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이날을 떠올리면 하품과 함께 짜증이 났다.

열 살의 재영은 대기실의 검은 스툴에 앉아 발을 굴렀다. 줄곧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지겨웠다. 분주하지 않은 사람들의 느린 움직임은 따분하기까지 했다. 작은 스툴이 오른쪽으로 한 바퀴를 돌면 다시 발을 굴려 왼쪽으로 한 바퀴를 돌렸다. 벌써 몇 바퀴나 스툴을 돌렸다. 엄마의 피로 물들었던 얼굴과 옷은 이미 보모의 손을 거쳐 말끔해졌다. 그런데도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재단 소속의 대학병원에 이어 다음날은 정신병원이었다. 학교 과제가 남아 있었다. 조금 있으면 중국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도 집에 올 시간이었다. 내일은 영어, 모레는 스페인어였다. 그것뿐일까. 기초소양을 다지는 예의 시간과 다도 수업도 있었다. 수요일이니 펜싱 수업도 해야 했다. 단순히 재밌는 수업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었다. 재영에게 수업은 재미의 유무로 선택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재영은 그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계획이 타자 때문에 틀어졌다는 사실에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다.

재영은 병원 벽면의 시계를 보며 입술을 구겼다. 다친 게 자신도 아닌데 왜 이곳에 자신까지 붙들려 있어야 하는지 짜증만 났다.

의사의 지루한 이야기도 들어줬다. 한계치에 다다를 정도의 지겨움도 견뎠다. 그런데도 오늘은 으레 아빠가 주던 마땅한 포상이 없었다. 어제 자르다 만 엄마의 손이 이 지루함을 견딘 값의 포상이 된다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엄마의 잘린 손을 받는 상상을 했다. 줄곧 무표정하던 재영의 얼굴이 묘하게 일렁거렸다. 기분이 나아졌나 생각하니 명백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재영은 좀 전 의사가 던진 질문을 상기했다. “재영아. 왜 엄마 손바닥을 칼로 찔렀어?”라고 묻는 말이 의아했다.

“손바닥을 찌를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었다. 자신은 엄마의 손바닥을 찌를 생각이 없었다.

오전부터 엄마와 놀고 싶었는데 엄마가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한다며 놀아주지 않았다. 원어민 교사가 오기 전 놀아야만 하는데 엄마는 제 말을 듣지 않았다. 눈치 없이 계속 피아노 건반만 두드렸다. 얌전히 고분고분 제 말을 들어주면 좋겠는데 엄마는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피아노만 쳐 댔다.

“엄마. 언제까지 피아노 칠 거야?”

“재영아. 엄마 점심때까지는 이거 마무리해야 해. 미안, 소윤 이모랑 좀 놀고 있을래?”

재영은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미안한 짓은 애초에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재영은 엄마의 손을 다시 당겼다. 피아노를 치려던 엄마가 재영을 돌아보았다.

“언제까지 칠 거냐니까?”

세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들인 재영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엄마 두 시까지만 칠게. 응? 엄마 좀 봐줘, 재영아.”

“음…….”

재영은 다시 피아노로 향하려는 세희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늘 말고. 언제 완전히 피아노를 안 치게 되는 거냐고.”

재영의 말을 들은 세희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아주 아기일 때부터 엄마인 자신에게 붙어 지내는 아들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고 피아노만 치는 엄마가 세상 야속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런 아들이 고집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 고집마저 세희의 눈엔 그저 귀여웠다. 세희는 흐른 머리카락을 넘기고 칭얼대는 아들을 허벅지에 올려 안았다. 재영이 세희의 목 뒤로 흐른 머리카락을 꼭 쥐었다. 세희는 재영을 꼭 안았다. 아들은 열 살인데도 아직 아기 냄새가 났다.

“우리 아기. 엄마도 우리 재영이랑 계속 같이 놀고 싶지.”

“언제 안 치게 되냐니까.”

재영이 세희의 머리카락을 당겼다. 세희가 픽 웃으며 재영의 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글쎄. 아마, 엄마 이 손가락이 다 없어질 때?”

“그래?”

비로소 재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응. 그전까지는 엄마 피아노 계속 쳐야 해. 이게 엄마 일이라서.”

진작 말해주지. 재영은 미리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엄마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재영의 생각은 지겨웠던 좀 전 의사와의 상담으로 다시 돌아갔다. 재미없음을 표하듯 심드렁한 얼굴을 했는데도 의사는 눈치 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재영아. 엄마 손바닥을 칼로 왜 찔렀니? 이유가 있었어?”

의사가 부드럽게 물었다. 확인하는 말투였다. 재영이 싫어하는 말투이기도 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한번 말할 때 두 가지 이상의 질문을 하지 말라 당부해 놓은 재영이었다.

재영은 상담 때문에 늦어버린 제 수업만 생각했다. 엄마가 자신과 계속 놀 수 있게 엄마를 도우려던 것뿐인데 병원에 붙들린 탓에 수업에도 늦게 되었다. 몹시 짜증스러운 상황이었다.

재영은 멀뚱한 눈으로 “손가락을 찌르려고 했는데 빗나가서요.”라고 답했다. 사실이었다. 손바닥을 찌를 생각은 없었다. 엄마가 말해준 대로 손가락만 없어지면 될 일이었는데 처음 해 본 탓에 서툴러 실수가 났다.

“아무튼 실수였어요.”

학교 앞에 자주 출몰하는 고양이를 찌를 땐 자잘한 실수 따위 없었다. 엄마의 경우 칼을 쥐고 나타난 자신을 보며 먼저 기겁하며 도망치는 탓에 손바닥을 찌르고 만 것이었다.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면 이번엔 실수 없이 엄마의 손가락을 잘라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사가 의자를 밀며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재영은 의사의 태도를 보며 방금 자신이 한 말에서 오류가 있음을 인지했다.

“아빠는 피아노를 안 쳐요. 그래서 엄마 손만 찌른 거예요.”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그래도 의사의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이것도 정답이 아니라면 대체 네가 원하는 답은 뭔데. 재영은 입안에서 지글지글 끓는 분노를 느꼈다.

“음… 피아노를 버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엄마는 찌르면 아프잖아. 피아노를 버린다는 생각은 왜 해 보지 않았어?”

의사는 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재영은 손톱을 세워 느리게 제 볼을 긁었다.

“제 말, 이해 못 하신 거 같은데요. 엄마 손가락이 없어야 피아노를 못 친다고요.”

재영은 숨을 고르고 다시 의사를 쳐다봤다.

“엄마는 칼에 찔리면 아프잖아.”

의사는 똑똑한 사람들이 한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지. 엄마가 피아노 따위를 치느라 자신과 놀아주지 않은 이야기나 끝맺으면 좋겠는데, 자꾸 아프니 마니 헛소리를 해대는 게 수상쩍었다.

“엄마가 나랑 놀아주지 않은 건요? 씨. 지금 저 수업에 늦게 생겼다고요.”

의사가 재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의사의 책상에 놓인 하얀 종이가 어느새 복잡한 검은 선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재영과의 상담을 막 마치고 나온 의사는 다훈과 세희를 자신의 앞에 앉혔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 본분을 잊지 않고 그 직급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두 사람의 불안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고 말았다.

자리에 앉은 세희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다훈은 곧 입술을 꾹 다문 의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의사의 마른 입술이 재영의 병명을 말해야 할지, 숨겨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사이코패시… 들어보신 적 있나요?”

세희의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몰라요.”

“아니면 사이코패스라고 혹시 뉴스나…….”

“모른다고요. 아니… 아니에요. 재영이는 외동이라 완전 아기일 때부터 소유욕이 좀 있…….”

세희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잇다 고개를 숙였다. 볼을 타고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의사는 무덤덤한 얼굴로 온 훅 버튼을 눌렀다. 재영의 상담 자료와 뇌 사진을 요구하는 모습에는 마치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 같은 평온함이 있었다.

물론 자주 보는 뇌는 아니지만, 이쪽 계열의 환자를 대하며 보지 못한 뇌의 모양도 아니었다. 수치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삼 년에 한 번 교도소의 죄수들을 상담하러 가면 열에 한 명꼴로 이런 뇌 모양과 뇌파를 하고 있기도 하니까.

의사는 모니터 화면을 두 사람 쪽으로 돌렸다. 재영의 뇌파와 뇌의 MRI 사진이 모니터 화면에 양분해 떴다.

“온통 검죠. 보통은 이렇게…….”

마우스가 움직이더니 화면에 좀 전과 전혀 다른 색의 뇌파 사진이 떴다.

“보통은 뇌의 앞쪽에 이렇게 초록색과 빨간색이 가득 보입니다.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두 분도 그러실 거고.”

화면에 뜬 뇌 사진 밑에 ‘정상인의 뇌’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건 비교 대상 된 조금 전 재영의 뇌가 정상인의 뇌와는 다르다는 방증이었고 그건 곧 자신들의 아들이 정상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자가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아직은 어려서 답을 제대로 한 덕분에 사이코패스 진단 결과가 제대로 나왔지만, 음…….”

잠시 말을 줄인 의사가 잘근 입술을 물었다.

“나중에는 그 검사마저 스스로 조작할 겁니다. 조금만 지나도 이런 검사는 무용해집니다. 자제분은 지금 사이코패시를 앓고 있어요. 현재 결과로는 S등급의 사이코패스입니다.”

의사가 내민 종이에 처음 보는 등급표가 적혀 있었다. 가장 상위의 P 바로 밑에 방금 의사가 말한 S가 적혀 있었다. P 옆에 직접 살인이라는 글자가, 알파벳 S 옆에 타자로 하여금 살인 교사 및 자살 종용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하나 같이 역겹고 비통한 단어들뿐이었다.

“물론 더 정밀하게 보자면 일주일 정도는 입원해서 심층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겠죠.”

다훈이 세희의 손을 잡았다. 다훈은 세희의 봉합수술이 끝난 다음 날, 세희와 함께 재영을 데리고 이 병원에 왔다. 일부러 재단 소유의 목경대 병원을 피했다. 경기도 외곽의 정신병원을 찾은 것은 소문이 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은 재영의 병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이코패시 및 강박적 정신질환 전문가인 유 박사에게 재영을 데려온 것 또한 부부가 아들의 병에 대해 짐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희야. 우리 어렴풋이 알고 있었잖아.”

아이가 문장을 구성하기 시작한 네 살부터,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병아리의 발을 자르고 해부한 몸통을 그들에게 웃으며 보여줄 때부터. 시끄럽다는 이유로 유치원 친구의 입에 테이프를 붙여놓았다가 들켰을 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를 꼬드겨 유치원의 창고에 가두고도 하루 동안 말하지 않았을 때도.

어쩌면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선 아들의 병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가 먼저 이 폭탄에 불씨를 붙이느냐가 문제였을 뿐이었다.

“아니야. 우리 재영이는 아픈, 아픈 거야. 다훈 씨도 그랬잖아. 아픈 거라고, 이 병원에 오면 다 해결된댔잖아!”

세희의 오른손을 감싼 붕대에 검붉은 피가 번졌다.

“우리 아들이 날 많이 좋아해서 그래요. 아기 때부터 엄마를 유독 찾고. 이번에는 내가 단독회 준비로 예민해서 우리 아이한테 좀 화를. 그래. 여보. 기억났어. 내가 먼저 재영이한테 짜증냈던 거 같…….”

다훈이 고개를 숙였다. 의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머니. 재영이는 어머님을 좋아하지 않아요. 죄송하지만 저 아이의 뇌는 누구도 좋아할 수 없는 뇌입니다. 가지고 싶은 것과 버리고 싶은 것만 있죠. 원하는 건 다 가지려고 할 거예요. 나이가 들면서는 그 덫과 그물을 더 촘촘하게 만들 겁니다. 지금은 가지고 싶은 물건이겠지만, 나중엔 돈, 권력… 그리고 그 대상이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의사는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렸다.

“바라는 거, 원하는 건 모두 가지려 할 겁니다. 못 가지면 그걸 부수고 찢어서라도 가질 거예요. 만약 그 대상이 사람이나 동물이 된다면… 그걸 죽여서라도 가질 거예요. 그런 뇌입니다. 재영이 뇌는.”

“아니에요. 아니야.”

세희의 상체가 고꾸라졌다. 의자에서 떨어진 세희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런 세희의 몸을 다훈이 받쳤다. 다훈은 잇몸 가득 고이는 비린 침을 느끼며 입을 꽉 다물었다. 다시 세희를 자리에 앉혔다. 세희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제 소견으로는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대로라면 뇌가 기본적으로 컨트롤해야 하는 생리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제어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힘드시겠지만, 부모님이 먼저 아이의 병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세희는 부정했지만, 다훈은 어제 일이 있고 이 병원을 찾을 때부터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는 다 해볼 생각이었다. 약이든 주사든 상담이든 상관없었다. 아들의 뇌를 모니터 속 정상인의 뇌로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하리라 마음먹은 상태였다.

“치료라면…….”

여전히 고개를 젓는 세희의 손을 꽉 붙들었다. 세희와 다훈의 결혼은 달랐다. 있는 집 자식들이 으레 그렇게 하듯 선이나 기업 간의 만남으로 정해진 게 아니었다. 어른들도 알지 못하게 일 년을 연애했고 양가의 축복 아래 결혼했다. 재영은 축복으로 가득했던 그 결혼 후, 2년 만에 얻은 소중한 아들이었다.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상담은 사이코패스들에겐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다만, 재영이는 아직 어린 나이라서…….”

의사는 다시 모니터를 자신 쪽으로 돌렸다. 분주한 타자 소리가 진료실을 메웠다. 누군가가 치는 타자에 이토록 오래 집중한 적이 있던가 생각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다훈은 자신의 손에서 힘없이 풀어지는 세희의 손을 다잡았다. 우리 아들이니, 우리가 지켜내자고 손을 통해 마음을 전했다. 세희가 다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훈의 어깨가 곧 세희의 눈물로 젖어 들었다.

의사가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글자는 모두 재영의 입으로 들어가게 될 약물의 이름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재영의 전두엽을 움직이게 할 약들이라는 설명에 다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들의 검은 뇌 사진이 떠올랐다.

“사이코패시는 낫지 않는 병입니다. 미리 당부드리지만, 이것 또한 결코 치료제가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노력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자 검은 스툴에 앉아 발을 구르는 아들이 보였다. 세희가 다훈의 뒤로 몸을 숨기며 어깨를 떨었다. 다훈은 양팔을 벌렸다. 재영이 무덤덤한 얼굴로 다가와 다훈의 품에 안겼다. 다훈은 자신의 어깨에 꼭 맞는 어린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가, 재영아. 아빠가 우리 재영이 고쳐줄게. 반드시.”

재영이 불편한 듯 몸을 꼬았다. 지루한 기다림을 견딘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표현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다훈이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품에 안긴 재영이 “아빠. 난 안 아파. 다친 건 엄마잖아. 난 그냥 지겨웠다고. 근데 나한테 뭐 해줄 거야?”라고 묻는 말이 등 뒤, 세희의 울음소리에 묻혔다.

* * *

재영의 차트에는 전두엽을 활성화할 수 있는 모든 성분이 다 적혔다. 복잡한 영어들이 적힌 차트는 간호사에게로 옮겨졌고, 다시 접수처로 옮겨졌을 것이다. 재영은 이제부터 저 성분으로 된 약을 자신이 먹게 될 거라는 걸 눈치로 알았다.

fluoxetine, blonanserin, aripiprazole, paroxetine, vortioxetine, escitalopram, sertraline, paliperidone.

과제를 하듯 자신의 이름 아래 적힌 모든 알파벳을 외웠다. 집에 가 노트에 그 알파벳을 다시 써넣었다. 그 성분이 하는 역할, 그 성분이 담긴 약이 어떤 것인지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런 느낌을 지칭하는 말이 있었는데. 재영은 손에 쥔 볼펜을 굴렸다. 언젠가 자신의 경호원인 윤동후가 하굣길에 자신을 놓친 후 혼자 중얼대던 말이었다. ‘씨발’이었던가. 아니다. ‘좆같네’였을까.

“…….”

둘 다 아니었다. 이 배신감과 치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나 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재영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을 때, 재영은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발견했다. 3년 전 자신이 적은 성분 위에 빨간 줄을 긋는 놀이였다. 그건 자신이 먹는 약에서 그 성분의 약을 지우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일부러 아빠가 웃을 때 따라 웃었고, 엄마가 울면 따라 슬픈 척을 했다. 드라마와 영화 속 배우의 모습을 캡처해 표정을 배웠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서는 줄곧 사람들의 표정만 살폈다. 누가 웃으면 따라 웃는 체를 했다. 마치 너무 웃겨 목이 막힌다는 시늉도 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표정이 사진에서 본 웃는 얼굴과 같아졌다. 미세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반대로 아래로 내려가는 눈꼬리의 그림. 사진의 이름이 뭐더라. 희망? 기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재영은 이해되지 않는 그 표정들을 다만 성실하게 연습했을 뿐이었다. 그러면 몇 주 지나지 않아 제조되는 약에서 그 성분의 함량을 낮출 수 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이제는 성분을 빼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재영은 약을 먹지 않고 빼돌리기 시작했다. 아예 약을 그만 먹고 싶었다. 약을 먹으면 종일 무기력하고 힘이 빠졌다.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멍청이나 병신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인베가. 아빌리피. 룰란.”

재영은 손에 알약을 쥐었다. 자의로는 먹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보는 앞에선 얌전히 먹는 체할 수밖에 없었다. 약을 먹지 않은 밤엔 발작을 일으켰다. 경기를 일으키며 침대에서 떨어지고 바닥을 기었다.

“약을 임의로 중단하면 뇌가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발작을 일으켜요. 좀 더 관찰을 세밀하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약 먹는 거 절대 어기시면 안 돼요.”

의사의 말에 재영은 약을 먹는 걸 깜박 잊었다며 둘러댔다. 의사가 거짓말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들키지 않으려 한 거짓말도 아니었다. 차트에 적힐 상담 기재용을 위한 거짓말일 뿐이었다.

의사는 속지 않더라도 약의 함량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재영의 검사표 수치가 나날이 정상인에 가깝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영이 자신의 검사를 조작하고 있다는 심증은 있었지만, 어찌 됐든 검사 결과에 따라 약을 조절해야 하는 게 의무였다.

약을 먹지 않으면 발작이 인다는 건 재영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발작을 일으키는 아들이 안쓰럽기만 할 테니 답은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터였다.

자신에게 강제로 약을 먹이거나. 약을 끊게 되거나.

먹지 않고 빼돌린 약이 손에 한 움큼씩 쥐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 재영은 별채의 편백나무 욕조를 뜨거운 물로 채웠다. 그 안에 제쳤던 모든 알약을 뿌리고 몸을 담갔다. 약이 녹으며 마치 물 위로 용암이 끓는 듯한 하얀 거품이 올랐다.

재영의 예상대로 재영은 편백나무 욕조 안에서 급격한 발작을 일으켰다. 몸을 부르르 떨며 탕 안으로 침전되어가는 와중에도 재영은 물속에서 자신이 몇 분을 버틸 수 있는지 생각했다.

수영 때는 가장 오래 버틴 게 2분이었다. 발작 중엔 호흡기가 제멋대로 물을 들이켤 테니 아마도 1분도 되지 않겠지. 욕실이라면 발작을 일으키는 소리와 물소리가 밖까지 크게 울릴 테니 욕실 밖 경호원에게도 더 빨리 발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죽진 않겠다는 계산이 섰다.

“도련님!”

45초. 약이 녹은 물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경호를 맡은 윤동후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동후는 재영을 꺼내려 온몸으로 재영의 팔을 잡고 당겼다. 재영이 발작을 일으켜 몸이 뒤틀리고 팔다리가 엉망으로 떨릴 땐 절대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었다. 하지만 물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아이가 죽을까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재영은 흐릿해져 가는 시선으로 경호원 뒤에 선 다훈을 보았다. 다훈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본채에서 별관까지 달려온 것 같았다.

재영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격하게 날리던 팔다리도 점차 잠잠해졌다. 재영은 온몸을 늘어뜨린 채로 시선을 다훈에게 고정한 채 기절했다.

침대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재영은 잠잠히 누가 오기를 기다렸다. 재영은 “씨발. 여기에 카메라를 달았었네.”라며 중얼댔다. 그렇지 않고서야 별채에서 일어난 일에 다훈이 그렇게 빨리 달려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재영은 몸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눈만 굴려 방을 살폈다.

이로써 아빠와 긴밀한 협상이 필요하게 됐다는 게 몹시 귀찮았다. 몸을 돌려 누웠다. 마치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눈 아래를 양손으로 훔치는 척했다. 다행히 엄마가 자주 하는 행동이라 따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다음날, 욕실 천장에 부적 하나가 붙었다. 악귀를 쫓는 부적이라고 했다. 집에서 가장 오래 일한 소윤 이모가 와 엄마의 말을 전했다. 엄마는 재영이 곧 나을 거라 했다. 재영은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엄마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악귀.”

낮게 읊조렸다. 듣기 싫은 단어의 느낌은 아니었다. 재영은 엄마가 제멋대로 욕실에 부적을 붙이는 걸 허락하기로 했다.

* * *

협상은 딱 자신의 생각만큼 순조로웠다. 재영은 부모님 앞에 무릎 꿇었다. 발작을 일으키는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럽고 괴롭노라고 절절한 표정으로 고백했다. 세희는 재영이 감정을 느꼈다는 것에 잔뜩 상기됐다. 다훈이 무릎 꿇은 재영의 앞에 그와 똑같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것조차 거짓말일까. 의사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속지 말라며 자신을 다그칠 것이다.

“아빠… 엄마… 나 진짜 너무 괴로워요. 학교에서도 언제 발작이 날까 내내 그 생각만 해요. 공부도 제대로 못 한다고요.”

다훈은 재영의 물기 어린 눈을 응시했다. 이 눈마저 거짓일까.

“아빠…….”

재영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맥없이 뒤로 젖혔다. 자칫하면 쓰러질 듯한 움직임이었다.

“진짜예요. 저 믿어주세요.”

다훈이 침을 삼켰다. 자신의 말이 진짜라고 말하는 아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발작할 때 제 기분이 어떤지 모르시잖아요.”

재영이 다시 까무러질 듯 고개를 뒤챘다.

“사지가 비틀릴 때마다 제가 정상인이 아닌 걸 깨달아요. 약 먹는 동안의 저는 절대 정상인이 될 수 없어요.”

재영은 다훈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정상인이 아닌 아들. 자신만 용인해준다면 어쩌면 충분히 정상인으로 보이고, 살아갈 수도 있는 아들. 다훈의 눈이 흔들렸다. 재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요. 죽을래요. 차라리.”

정말 죽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떨어댔다. 다행히 눈물도 어렵지 않게 나왔다.

“어떻게 해주면 되겠니?”

고개를 숙인 채 있던 재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훈이 자신의 볼을 쓰다듬어주었으므로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재영아. 우리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니?”

“의사가 저는 제어가 필요하대요. 규율, 규범, 통제, 제한을 배워야 한대요.”

“재영아… 그래야 네가 평범하게 살 수 있…….”

“아빠.”

재영이 아빠의 어깨에 볼을 붙여 기댔다. 아주 어릴 때처럼, 아빠가 들어 안아주던 시기의 그 얼굴을 하고, 마치 정말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볼을 깊숙이 기댔다.

“저 평범한 거 말고, 조금 다른 거, 그거 할게요. 아니, 정상인 할게요. 정상인처럼… 아니. 저 정상인이 될게요.”

재영이 다훈의 어깨에 기댄 채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아빠. 저한테 통제 그따위 것들 말고, 충족을 주시면 안 될까요?”

다훈은 의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들은 그게 무엇이든 충족할 수 없다고 했다. 반드시 그 이상, 그걸 얻고 나면 또 그 이상의 이상을 원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품에 안긴 아들은 울고 있었다.

“저 전혀 티 나지 않게 행동할게요. 의사가 의심하지 않게 약도 계속 처방받을게요.”

세희가 다훈의 어깨를 흔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세희가 자신을 보며 옅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

재영은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의 모든 인간 신상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언제 자신에게 필요해질지 몰라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엔 교내 선생들의 신상까지 자연히 외우게 되었다.

생각하자면 그중 재영에게 필요한 인물은 딱히 없었다. 하나같이 적당한 인생과 적당한 인간들뿐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인물 또한 없었다. 다만, 골목에서 피투성이가 된 호정을 발견했던 그 날, 재영은 처음으로 그 적당한 사람들의 신상을 외워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속으로는 자신의 선견지명에 스스로 감탄하면서.

같은 반인 이호정의 이름을 알아둔 게 만족스러웠다. 적당한 인간들 사이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 유일하게 필요한 인물이 될 인간을 발견한 것 같았다.

암기라고 별다른 게 있는 건 아니었다. 학생의 경우 그 이름과 집안 정도만 아는 정도였다. 어려운 것 또한 없었다. 거기에 훗날 자신의 소유가 될 재단에 도움이 될 만한 인물과 해가 될 수 있는 인물들만 따로 분류해 세밀하게 한 번 더 살피는 식이었다. 호정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그날 이전까지만 해도 재영에겐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고등학교의 건물은 총 5채였다. 예체능실이 있는 건물이 5층으로 그중 가장 높았다. 나머지 4채의 건물 옥상에는 누구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지만 이 건물의 옥상만큼은 오직 재영만 출입이 가능했다. 재영이 이 고등학교에 들어오며 만든 규칙이었다. 재영은 타자가 만든 규칙 내에 드는 건 극도로 싫어했지만 저 스스로는 숱한 규칙들을 만들어냈다. 5층 옥상 또한 재영이 만든 숱한 규칙 중 하나였다.

그날도 옥상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석식이 끝나고 잠시 여유가 있었다. 재영은 여유롭게 담배를 물고 하늘과 그 아래 건물들을 눈으로 훑었다. 언젠가는 저 하늘도, 땅을 기는 개미도 전부 자기 것이 될 거였다. 눈 아래 보이는 건물은 모두 자기 것이 될 테니까. 하늘과 땅이라고 해서 다를 순 없었다.

“김민재.”

학교 건물이 아닌 맞은편의 낮은 상가 건물 옥상에 민재가 서 있었다. 재영은 민재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머리에선 이미 민재의 집안과 재력 수준 같은 상세정보가 떠올랐다. 국내 3위 물류회사인 엘든의 독자. 민재에 대한 정의는 그거 하나였다. 재영에게 민재는 그 정도였다. 민재와 반은 달랐지만, 그가 오늘 학교에 나오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학교의 점심시간이 지나면 재영이 늘 확인하는 게 아이들의 출결 여부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학교도 안 나온 놈이 학교 근처의 건물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양아치 새끼, 재영이 중얼대며 비소를 머금었다. 담배를 깊숙이 빨아 당긴 탓에 내뿜은 연기도 짙었다.

민재는 건물 난간에 몸을 축 늘인 채 비죽비죽 웃으며 쉬지 않고 줄담배를 태웠다. 피우던 담배가 다 타면 곧장 새 담배가 물리는 식이었다.

뭘 기다리는 건가.

재영은 민재의 시선을 따라갔다. 민재가 응시하고 있는 곳은 학교 앞 두 갈래의 골목 중 인적이 드문 오른쪽 길이었다. 그 골목에 민재와 어울리던 놈들이 여섯이나 들어가고 있었다. 학교 내에서도 재영의 신경을 거스르던 집단이었다. 그저 범죄 없이 잘 졸업해 자신의 재단에 누가 되지 않기만 바라는 한심한 집단이기도 했다.

여섯…….

둘과 넷…….

셋과 셋.

“아니.”

재영이 담배를 끄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에 다섯.”

재영은 자신과 같은 반인 호정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시 시선을 민재에게로 돌렸다. 민재의 시선 또한 호정의 뒤통수. 동그랗고 작은 그 뒤통수에 박혀있었다.

“이호정.”

재영은 이호정에 대한 머릿속 자료를 되뇌었다.

이호정. 재영 집안의 재단 두 개 중 하나의 직속 부설 중학교 출신. 교내 폭행 사건이나 불미스러운 일에 얽힌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지만, 중학교 때 김민재와 함께 다른 동네 질 나쁜 아이들과의 다툼이 있었다. 버스에서 시작된 싸움은 큰 폭행 사건은 아니었다. 둘에겐 더더욱 큰일이 아니었을 거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자식들뿐이었던 상대방 측만 징계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로, 재영에게 이호정과 김민재는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재단에 누가 될 수도 있는 인간들의 카테고리에 들었다. 가까이 둘 필요는 없지만 지속적인 관찰 정도는 필요한. 딱 그 정도의 인간들.

“둘이 죽고 못 사는 개새끼들 아니었나…….”

재영은 민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낑낑대며 서로를 물고 빠는 강아지 두 마리를 떠올렸다. 둘과 매우 닮아 보였다. 재영은 입에 고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민재가 있는 곳에선 자신이 보일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담배를 비벼 껐다. 주머니에 넣어둔 안경을 꺼내 썼다. 시력이 안 좋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흥미로운 순간에는 안경을 써야 기분이 났다.

민재의 담뱃불이 사그라들었다. 다시 새 담배가 물렸다. 재영은 담배를 무는 민재의 입가에 고이는 웃음을 보았다. 저건 기쁠 때, 기분이 좋을 때, 흥미로울 때, 즐거울 때 띠는 미소라고 배웠다.

친구가 자신이 학교에 나오지 않은 날, 어울리긴 하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은 다섯에게 끌려가는 중이었다. 재영이 배운 대로라면 민재에게선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없어야 했다. 재영은 배운 대로의 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 제 식대로의 해석을 붙였다. 그게 더 이해가 빨랐다.

“…지 거라는 건가?”

재영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재영은 턱을 괴고 다시 골목을 쳐다보았다. 목이 잡힌 채 끌려가던 호정이 손을 뿌리치며 대들기 시작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성질이 좀 있는 편인가 싶었다.

중학교 때 있었다던 싸움도 이호정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반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 친구인 민재와 반이 달라서인지 자신의 반에서는 늘 조용하게만 있던 호정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창밖만 보던 호정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재영은 고개를 꺾으며 턱을 쓸었다.

“왜? 왜일까.”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간의 싸움은 흔하지 않았다. 다 적당히 좋은 집안에서 자란 탓에 미래에 누가 될 행동은 서로에게 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옆 동네의 가난한 애들을 팬다면 모를까, 서로에겐 겨누어봤자 하등 도움 될 일 없는 총구였다.

재영은 이 무식한 다툼의 원인을 민재로 보았다. 다음 담배의 불을 붙이는 민재의 얼굴에서 꽤 흥미로운 일을 찾았을 때 보이는 웃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재밌네.”

일방적인 구타였다. 다툼은 더더욱 아니었고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구석으로 몰린 호정에게 둘씩 붙어 때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어느 부위를 맞느냐에 따라 단숨에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죽을까. 쟤들이 정말 이호정을 죽일 수 있을까. 재영의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재영은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막 2분이 지났다. 다시 민재 쪽을 쳐다봤다. 담배를 마저 피운 민재가 자신처럼 시간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재영은 민재의 마음에 자신과 같은 것이 있음을 직감했다. 저 양아치도 엄마의 부적이 필요한 놈이었다. 그래도 같은 재단의 학우인데 엄마한테 말해 부적 하나를 받아줘야 할까. 피식 웃음이 났다. 생각보다 효과가 있는지 탕에 들어가 천장의 부적을 보고 있노라면 좆같던 기분이 조금은 잠잠해지던데. 재영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호정이 죽지 않았다.

3분. 4분. 5분.

“우리 반 호정이 잘 버티네. 자그마한 게.”

재영은 드러나 있던 시계를 소매 안으로 넣었다. 민재가 옥상을 천천히 내려가는 게 보였다. 재영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필터에 불을 붙여 깊게 숨을 마셨다. 5분이 지나서야 끝끝내 버텨내던 호정의 상체가 앞으로 수그러들었다. 무릎이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캑캑대며 뱉는 침마다 빨간 피가 고였다.

“진짜 아니라고. 나 아니라니까.”

호정이 외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이렇게 먼 곳에서도 그 아우성이 선명히 들렸다. 누가 들으면 어쩌지, 나만 보고 싶은데. 재영은 건물 아래 운동장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죽을까. 저것들이 이호정을 죽일 수 있을까.

재영은 옥상을 내려간 민재도 잊고 강한 흥미로움을 느꼈다.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골목을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바닥에 쓰러진 호정을 향해 유상현이 무슨 이야기를 중얼댔다. 호정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진짜 죽었을까. 진짜 저 양아치들이 이호정을 죽였을까? 재영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죽었을 수도.’로 내려졌다. 재영은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중학교 때 아빠와 있었던 협상 후로 단 한 번도 이처럼 즉흥적인 결정을 내린 적은 없었다. 이따금 불시에 몸을 휘감는 충동을 느끼면 그에 따른 충족이 이어졌다.

필요하면 사람을 불렀다. 경호원은 그들에게 별채에 들어온 하루 동안은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약을 먹였다. 약의 설명을 듣고도, 사람들은 별거 아니라는 미소를 걸치고 재영을 위해 별채에 들었다.

분노가 치밀면 격투기 선수 두 명을 불러 경기를 관람했다. 재영만 관람하는 것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모든 경호원을 불러 단체로 경기를 보는 식이었다. 별채에 별도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두 성인 남자가 코뼈가 부러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치솟던 분노를 잠시 소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그 충동을 완전히 억제해주는 건 아니었다.

“씨발…….”

재영은 실로 오랜만에 제어되지 않는 끌림과 분노를 느끼며 달렸다. 죽었으면, 이호정이 죽었으면. 바닥에 붙은 볼이 차갑고 검은자가 뒤집힌 채로 죽어 있었으면. 심장도 고요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아니지.”

재영은 생각을 고쳤다. 자신이 갈 때까지 호정은 죽어선 안 됐다. 죽기 직전, 생명의 불씨가 아스라할 때의 인간을 보고 싶었다. 이따금 시체가 보고 싶어 밤에 잠도 이룰 수 없을 땐, 아빠가 재영을 데리고 재단 병원의 영안실로 데려가 주었듯이. 그곳에서 죽어 온몸이 검게 변한 사체들을 한 시간만 보고 있어도 삶의 활력이 났다.

하지만 지금 호정의 모습은 그것들과는 달랐다. 이미 죽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진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죽었다 하더라도 얼마 되지 않은 상태. 재영은 이를 꽉 다물고 뛰어 골목에 들어섰다. 호정을 구타하던 다섯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흐, 후우… 으윽…….”

죽지 않았다. 재영은 호정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호정이 죽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반대로 미세하게 일렁이는 안도감에 잠시 입술을 비틀었다. 호정은 이미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 같았다. 눈도 감은 채로 겨우겨우 입술을 떨었다.

“호정아. 도와줄까?”

재영은 설렘이 가득한 손을 호정에게 뻗었다.

“아.”

호정이 다 까진 손으로 재영의 손을 쳐냈다. 눈이 찢어지고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한 상태였다.

“씨발. 병 주고… 하으… 약 주냐. 유상현 이 씨발 새끼야… 네 도움 좆도 필요 없으니까 꺼져.”

유상현? 재영은 골목의 끝을 한 번 쳐다보았다. 다시 시선을 호정에게 돌렸다. 걘 갔어, 라고 말하면 어떤 감정을 느끼려나. 너 같은 정상인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양심 없는… 흐으… 새끼.”

“양심?”

재영은 의사가 자신에게 가장 결핍된 것이라던 그것을 호정이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했다. 어차피 오락가락하는 중이니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도 기억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들었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양심이 없어 보이니? 티 나? 묻는 걸 상상만 했을 뿐인데 웃음이 났다.

“좋냐… 유상현 미친 새끼야. 아니다. 너 이서정인가… 누군데, 너.”

입술을 비틀었다. 제정신도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을 앞에 두고 아직도 유상현 같은 것이나 이서정 따위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했다. 재영은 미소 짓던 입술을 굳혔다.

아무래도 그건 위험했다. 마음에선 지금 널 보고 있는 난 한재영이고 네가 속한 반의 반장이자, 네가 다니는 학교 이사장의 아들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열 살 때 병원에 갔는데 그곳에서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엄마 손가락을 자르려다 손바닥을 찔러서 악귀 취급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전부, 전부 다 해주고 싶었다. 죽어가는 아이에게 이 정도의 스스럼없는 대화는 괜찮은 게 아닐까 하는 합리화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유상현이든 이서정이든. 아무튼, 민재한테는 오늘 일 말하지… 마. 어? 후우… 나 쪽팔려. 그리고 진짜 상현… 네가 유상현이든 뭐든. 네 여친은… 나는 몰라, 씨발아.”

재영은 민재가 서 있던 건물의 옥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말한 걔는 저기서 네가 맞고 있는 걸 보고 있던데. 입이 근질거렸다. 아파서 찌푸리는 게 아니라, 실망감에, 절망에, 배신감과 분노에 눈을 찌푸리고 부들대는 호정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호정아. 내가 그런 유의 인간을 좀 아는데 걔는 너한테 자기만 친구이길 바라는 놈이던데. 이것도 걔가 꾸민 짓일지도 몰라.

재영은 속에서 구렁이처럼 꼬이는 말을 삼키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계산이 빠르게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오래 이 얼굴을 보고 싶단 생각만 가득했다. 어쩌면 그 빌어먹을 의사 새끼의 말이 전부 맞을지도 몰랐다. 사이코패스인 한재영은 자신을 절대 통제할 수 없고, 영원히 이렇게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몸을 맡긴 채로 살다 죽을지도.

자신이라는 존재가 들킬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이 피투성이의 동갑 놈을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정상인처럼 신고하는 척이라도, 선생을 부르는 척이라도, 놀란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재영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흥분감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온몸을 이룬 혈관이 펄떡이고, 몸에선 점차 느껴본 적 없던 생생한 생기가 돌았다. 굴복하기 싫었다. 의사는 안 된다고 했지만, 자신은 완벽하게 정상인처럼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어쭙잖은 그들 사이에서 다름을 티 내지 않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신이 없었다. 의사 말대로 그건 완전한 불가능일 수도. 순간 재영의 머릿속에 불가능하면 어때서, 라는 생각이 스쳤다.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땐 되지 않던 계산도 이미 평소처럼 되기 시작했다.

여러 생채기가 생긴 호정의 하얀 볼로 손을 겸자처럼 뻗었다. 붉게 그어진 상처들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난 네 여친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무튼 그 여자애한테 좆도 관심 없다고.”

호정이 말했다. 말할 때마다 몸을 들썩거렸다. 가까스로 말을 이어가던 호정이 별안간 깊은 숨을 내뱉더니 하늘을 향해 돌아누웠다. 이제는 아예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재영은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 호정의 눈 밑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부드러웠다. 어릴 때 피아노를 치던 엄마의 손가락을 만졌을 때나, 엄마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잡아당기던 그것보다 더. 재영은 재빨리 호정의 눈 밑에서 손을 뗐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색이… 다르네.”

진한 분홍빛. 가까이서 보면 더 선명한 선홍빛. 다홍. 주홍색. 귤색? 아니다. 전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진한 색. 이를테면 붉고 빨간색. 이글이글 불타는 불의 중심지와도 같은 색.

“씨발…….”

아니다. 이것도 아니었다. 재영은 주먹을 펴고 다시 호정의 눈 밑으로 손을 뻗었다. 제어할 수 없었다. 의사의 말이 옳았다.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은 반드시 생길 것이고 한재영은 절대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을 거라던 좆같던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씨발. 무슨 색이냐고.”

어떤 색으로 명명해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재영은 호정의 볼을 양옆에서 잡아 가까이서 살폈다.

좀 더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조금만 더, 완전한 틈도 없게.

“우욱, 윽…….”

호정이 몸을 떨었다. 재영은 호정의 볼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손에 호정의 생채기에서 난 피가 묻고 교복 셔츠가 더러워졌다. 그런데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재영은 호정의 피가 묻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닦았다. 혀를 움직여 입술을 핥았다. 호정의 피는 차갑고 썼다.

“하아…….”

이호정이 자신의 품에 안겨 부들부들 온몸을 떠는 건 어떨까. 재영은 호정의 배 아래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자신의 성기가 박힌다면 아마 이 정도. 아니. 재영은 배꼽보다 더 높은 곳을 엄지로 눌렀다. 그보다 더 깊을 수도. 배꼽 위까지 한 번에 진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는 여자와 다르니 성기를 받을 때도 단번에 받을 수 없으려나. 재영은 손가락을 배꼽에서 오른쪽으로 긁어 옮겼다. 그렇다면 이쯤.

“흐음…….”

지금보다 더 밭은 숨을 내뱉을 때 이호정의 표정은 어떨까. 재영의 성기가 움직이는 대로 허리 짓을 해대며 더 안으로, 지금 자신의 손가락이 닿은 곳보다 더 깊숙한 곳으로 재영을 빨아 당길까.

공포에 어깨를 들썩이다가 두려움에 제어되지 않는 두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마지막엔 희열로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좀 더 넣어달라고 떼를 쓰는 건 아닐까. 흰자가 눈의 반을 채우고 어깨부터 척추까지 미세한 소름을 돋운 채로. 입에선 아이처럼 연신 침을 흘려대고 밑은 난잡하게 너덜대며 찢어진 채로. 그렇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건. 한 번만 도와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자신을 도울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재영 너뿐이라며, 애걸복걸하며 울어대는 모습은 또 어떨까.

“아니…. 씨발. 이게 아니지.”

어쩌면 반대다. 도망가는 이호정의 멱살을 잡아 바닥에 얼굴을 거칠게 처박는 쪽, 버둥대는 몸을 내리누르고 결박해 헉헉대는 예쁜 얼굴을 짓누르는 쪽, 이호정의 발목을 한 손으로 낚아채 거칠게 잡아당기는. 새된 소리로 재영의 이름을 부르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몰아붙이는.

바로 그 쪽이다.

재영은 순간 격렬하게 치솟는 욕망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갈구였다.

재영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느리게 돌렸다. 의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처럼 무미건조하던 얼굴. 눈썹도 눈도 입술도 평행이던 얼굴. 재영은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

지금처럼 특정 대상에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이는 상황에 대해서도 숱하게 연습해오지 않았던가. 재영은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자신의 창창한 인생에 흠이 될 일에 대해선 철저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도 통제해야만 했다. 다만, 호정의 눈 밑이, 저 알 수 없는 색에 드는 강한 끌림까지 통제하긴 어려웠다.

호정은 이제야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 보였다. 몸이 축 늘어졌다. 재영은 이를 꽉 문 채로 폰을 꺼내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호정의 눈 아래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빠. 네. 저요. 저 오늘 말인데요.”

재영은 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호정의 볼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손은 그의 목덜미를 훑고 내려가 이내 피 묻은 교복의 가슴팍에 닿았다.

“오늘은 여자 말고. 남자면, 좋겠어요. 늦지 않게요. 아빠, 잠시만요.”

재영은 꿈틀대는 호정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호정의 하얀 신발도 교복처럼 피로 더러워져 있었다.

“키가 175인 남자여야 해요.”

* * *

준비는 철저해야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엇나가지 않도록.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결과를 다 염두에 둬야 했다. 동시에 어설프거나 의심 가는 면도 당연히 없어야 했다.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도 필수였다. 하나의 실수도 없어야만, 그래야만 호정이 애걸복걸 매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테니까. 호정에게 이 세상에 자신만 남게. 저 두 팔이 매달릴 수 있는 상대가 오직 자신만이 될 수 있게.

재영은 그날 이후 몇의 남자를 더 집으로 들였다. 그런데도 밤의 끝은 허무했고, 흥미롭지 않았다. 자신의 아래에 누운 남자의 목을 비틀고 뺨을 때려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그날의 호정과 닮지 않았다. 특히 남자들의 눈 아래 색은 호정의 것과는 명백히 달랐다. 검거나 희거나 누렇거나 탁한 회색이거나. 호정이 가진 색과 비슷한 색조차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혀끝이 썼다. 재영은 그중 누구라도 호정과 같길 바랐다. 비슷하기라도 해준다면 고마울 것 같았다. 귀와 눈이 먼 남자들의 눈동자 밑에서 호정과 같은 색을 찾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렇다면 일이 한결 쉬워질 테니까. 내내 갑갑하게 목을 죄는 낯선 불편함을 지울 수 있을 테니까.

학교에서 호정을 보고 지독한 끌림을 느끼는 날이면 재영은 다시 그 오른쪽 골목을 찾았다. 골목에서 피를 두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 날의 호정을 떠올렸다. 그러면 혀 아래로 달큼한 침이 고였다. 그 고인 침을 삼키면 들끓던 충동이 어느 정도 참아졌다. 호정의 피 맛이 그리웠다. 그럴수록 더더욱 울며 매달리는 호정의 모습을 보고 싶단 욕망은 부피를 키워갔다.

시작은 호정의 집부터였다. 호정이 가진 것 중 가장 잃게 하기 쉬운 게 돈이었으니까. 또한 돈이 그 시작이어야 뭐든 쉽게 풀릴 테니까. 자신의 집에 비할 건 당연히 아니었고, 호정의 집은 민재와 비교해도 현저히 떨어졌다. 중소기업 수준의 작은 회사인 데다 주식회사도 아니었다. 주거래처의 부도에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호정의 집 수준으로 애초에 자신의 재단인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온 것도 놀라운 정도였다.

“또 김민재.”

재영은 호정이 이 학교에 오는 걸 가능하게 해준 조력자를 떠올렸다. 그건 단연 민재였다. 약을 지우던 놀이 이후 흥미롭던 놀이가 없었는데 다행이었다. 재영은 새 노트를 꺼내 첫 장에 민재의 이름을 썼다. 이름조차 무의미했다. 무미건조한 이름.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김민재가 있으니 그중 하나가 사라진다 해서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다.

부도어음을 전부 떠안은 호정의 집이 망했을 때, 가장 먼저 호정을 찾은 것 또한 민재였다. 호정이 멀리 이사 가는 건 재영에게도 낭패였다. 가까이에서 살펴야 하는데 만약 전학이라도 가겠다 설치면 화가 날 것 같았다.

재영은 김민재를 믿었다. 김민재라면 호정을 절대 자신과 다른 동네로는 보내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학교도, 이호정이 다른 곳에 갈 수 없게 미리 손을 써두겠지, 확신했다. 그 정도의 미친놈이길 바랐다. 너도 나만큼이나 이호정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뺏어올 때 더욱 재미있을 테니까.

민재가 자신의 생각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일을 마무리해 주었을 때 재영은 나름 민재가 기특하게 느껴졌다.

“불쌍한 새끼.”

재영은 중얼대며 민재의 이름 옆에 선 하나를 그었다. 흠이 많은 인간에게 흠이 좀 더 나서 터진다 해도 문제일 게 있을까. 이미 깨진 호박의 나머지를 으깨주는 건 오히려 칭찬받아야 하는 일 아닐까. 재영은 민재의 이름 옆에 민재와 잔 여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약점이라는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약점이 약점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순간은 잘 나갈 때가 아니니까. 비참하고 나약할 때 가장 밝게 빛나는 게 약점의 속성이니까. 재영은 어느새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민재의 이름으로부터 뻗어 나간 잔가지들을 그리고 있었다. 진갈색으로 시작한 가지의 끝은 빨간색이었다.

언젠가는 이 썩은 나무에 애벌레로 가득 찬 열매가 열리고 썩은 뿌리에선 역한 냄새가 올라올 거라 상상하면서. 마침내 민재의 이름을 단 이 나무가 쓰러지고 그 아래 피떡이 된 호정이 드러나는 순간을 고대하면서. 죽어가는 호정이 자신에게 도와달라며 매달리길 기대하면서. 재영은 자신의 품으로 엉금엉금 기어 올 호정을 기다리면서 나뭇가지의 끝을 다듬었다.

골목에서 다시 호정을 마주치게 된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골목에 앉아 그날 피웠던 담배와 같은 담배를 물고 피투성이였던 호정을 떠올리고 있던 차였다. 재영을 발견한 호정은 다른 것보다 먼저 재영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놀란 듯 보였다. 호정이 생각지도 못한 표정을 지어댔지만 싫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래 대화를 나눌 생각으로 호정에게 말을 건 건 아니었다. 하필 마주친 곳이 이 골목이라 놓아주기 싫어졌을 뿐이었다.

“나 가야 해. 약속 있어서 보충 짼 거라.”

김민재. 보나 마나 그 썩어빠진 김민재와 또 같이 있겠지,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호정은 곧잘 답하면서도 계속 골목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사람은 불편한 상황에서 저렇게 눈을 굴린다던데. 그렇다면 호정은 이 상황이 불편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불편한 것일까 생각했다. 재영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다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호정을 보았다. 목이며 얼굴 가까이 다가가 이호정에게선 어떤 냄새가 나는지 맡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이 쓸모없는 인간처럼 보이는 이호정이 왜 자꾸 자신의 고요함을 깨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잔잔한 곳에 왜 자꾸 발을 넣고 흔들어 노도를 만들어내느냐고도. 자신만의 이유를 덧붙여 이해해보려 했다. 하지만 어려웠다. 재영은 어쩔 수 없이 호정의 무례를 넘어가 주기로 했다.

호정이 눈을 찌푸렸다. 콜록대며 기침을 할 때마다 눈 밑 붉은색에 균열이 일었다. 예쁜 색에 금이 가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았다.

“미안. 담배 냄새 싫어하는구나.”

재영은 호정의 기침을 멈추게 할 생각으로 담배를 끄며 말했다. 호정 주변의 쓰레기들이 다 피우는 것이라 자각하지 못했다. 호정이 자신과 같은 담배를 피우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같은 냄새가 날 텐데. 재영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담배를 벽에 마저 지졌다. 타르가 꺼져가는 소리를 뚫고 호정이 쭈뼛쭈뼛 말을 걸어왔다.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냐고 묻는 호정의 모습에 재영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착해 보이게. 자신이 아는 사람 중 착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사람, 처음 본 사람도 오래 지켜본 사람도 하나같이 착하다며 입을 모으는 사람. 바로 그의 엄마를 흉내 내면서.

“너 바쁠 텐데 내가 시간만 잡아먹고, 미안.”

재영은 말을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여도 키가 큰 덕분에 호정의 얼굴은 볼 수 있었다. 호정아, 착하지. 우리 착한 호정이. 재영은 속에서 분수처럼 치솟는 호정의 이름을 곱씹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주게 그 턱이라도 주무르며 어르고 달래주고 싶었다. 잠시 미간을 좁히던 호정이 할 말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할 말은 없었다. 하고 싶은 건 있었지만.

재영은 주머니에서 향수를 꺼내 자신의 옷에 뿌리고 호정의 옷 위에도 뿌렸다. 제법 거리가 가까워졌다. “담배 냄새날까 봐.” 우물우물 말을 뱉으니 호정이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기껏 가까워졌더니 발을 뺀다. 재영의 눈에 호정은 버르장머리가 없는 편에 속했다. 재영은 전혀 착하지 않은 호정의 목을 당장이라도 비틀고 싶었다. 얼굴이 빨갛게 물들고 가느다란 목이 졸린 채로 다리는 허공에서 달싹이는 호정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시선은 또다시 호정의 눈 밑을 향하게 되었다.

“근데 나 전에도 궁금했는데, 네 건 왜 색이 달라?”

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호정의 교복 셔츠를 잡았다. 마음 같아선 있는 힘껏 잡아당겨 호정의 목덜미를 세게 움켜쥐고 싶었다. 생각은 순식간에 담배 연기가 싫다는 호정의 입안을 담배 연기로 가득 채우는 것까지 진행됐다. 강제로 연기를 마시게 하는 상상까지 해대다 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잡았던 호정의 셔츠에서 느리게 손을 뗐다. 위험했다.

왜 다른지, 어떻게 하면 그런 빛을 낼 수 있는지 알려주면 편하고 좋으련만. 호정은 모른다는 시큰둥한 답을 하더니 재빠르게 골목을 벗어났다. 내일 보자는 재영의 말은 진심이었다. 내일도 호정을 보고 싶었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네 그 좆같이 다른 눈 색을 계속 마주 하고 싶어, 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었다. 호정은 멍청하니까 어쩌면 그 좆같은 눈 색이라는 말에 진짜 좆을 보여줄지도. 재영은 픽 웃으며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가 타며 주홍빛 빛을 내다 사그라졌다. 담배를 불태우고 검은 연기를 내뿜게 하는 이 불길조차 자세히 보면 호정의 것과 달랐다. 이 세상에 같거나 비슷한 것이 없다는 건 저 존재가, 이호정이 유일하다는 말과 같았다. 재영은 고개를 젖혀 하늘을 한 번 올려보았다. 손에 꽂힌 담배에선 여전히 연한 회색 연기가 올랐다.

“유일한 건 내가 가져야지.”

재영은 호정이 떠난 골목 끝을 빤히 쳐다보다 깊게 연기를 들이켰다. 불쌍한 호정이. 비슷한 것이라도 알려주면 지금이라도 내가 너를 놓아줄 수 있을 텐데. 가련한 마음으로 골목을 보다 벽에 기대 남은 담배를 마저 피웠다. 담배가 맛이 없었다. 시원하지도, 갑갑하던 마음을 풀어주지도 못했다.

“씨발.”

재영은 담뱃갑을 바닥에 내던졌다. 금색 담뱃갑이 쨍 소리를 내며 바닥과 부딪혀 튕겨 올랐다.

다음날, 예체능 건물의 옥상에 서 있던 재영은 골목을 걷는 익숙한 인영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안경도 꺼내 썼다. 호정이 교복 셔츠를 손에 쥔 채 골목을 걷고 있었다. 생활복인 흰 티만 입은 채로 골목을 걷던 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앙큼한 고양이 꼴을 하고 나쁜 짓을 하려는 듯 몸을 웅크린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재영은 입맛을 다셨다. 종일 식욕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골목길을 병든 병아리처럼 골골대며 걸어가는 호정을 보니 식욕이 돋았다.

“뭐야, 또.”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호정이 골목 벽에 자신의 교복 셔츠를 내던지고 달아났다. 재영은 호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배운 대로 정상인의 범주 선에서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제 식의 해석을 붙이려고 해도 좀체 떠오르는 게 없었다. 왜 교복을 버리지, 왜 자기 교복 셔츠를 저 골목에 버리지. 재단의 교복을 조심히 여기지는 못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에 화가 나야 마땅했지만, 이번엔 화도 나지 않았다. 재영은 단순히 궁금했다. 옥상을 내려와 골목을 향했다. 호정이 버린 교복을 쥐고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아직도 어제 자신이 뿌려준 향수 냄새가 났다. 재영은 호정의 교복을 구겨 한 손에 쥐었다. 동그랗게 구겨진 교복이 바람에 비틀댔다.

* * *

졸업식이 다가왔다. 재영은 오직 이날만 기다렸다. 새벽부터 편백나무 욕조에 물을 채우고 들어갔다. 어릴 때 동요조차 듣지 않았던 재영이 처음으로 욕실이 가득 울리게 노래를 틀었다. 고개를 젖혔다. 보개천장을 가린 부적을 보며 재영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적을 향해 후후 바람을 불어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부적을 보며 재영은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샤워를 마친 후, 오늘을 위해 사둔 회색 코트를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한참 자신을 보았다. 오늘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는 경호원의 말에 미소 짓기도 했다. 아침을 준비하는 소윤 이모의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빌 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아침 등굣길엔 차에서 콧노래까지 불러댔다. 옆자리에 앉은 다훈이 흘깃대며 재영을 훔쳐보다 눈이 마주치자 미소 지었다.

“아빠.”

“응.”

재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다훈을 보았다. 다훈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자기 아들과 눈을 마주했다. 키도 덩치도 성인과 다르지 않지만, 여전히 다훈에겐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였다. 다훈은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재영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졸업이라는 게 자기 아들에게도 기쁜 일이었음을 깨닫자 다훈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엄마는, 음… 알지? 엄마가 몸이 좀 약하잖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괜찮아.”

다훈은 재영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의사는 다훈과 세희가 그의 거짓말을 절대 눈치채지 못할 거라 했었다. 하지만 다훈은 이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재영은 제 말대로 약을 끊은 후로 놀랍도록 애쓰며 정상인으로 살아왔다. 의사보단 아들을 믿는 편이 나았다. 다훈은 자신의 아들에게는 절제보단 충족이 옳았던 거라며 자신을 다독였다.

“아빠. 저 오늘 기분 좋아요.”

“그래?”

다훈은 재영의 손을 꽉 잡았다. 어쩌면 아들은 성인이 되는 순간 갑자기 진짜 정상인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10여 년간 자신과 세희를 괴롭혔던 모든 일이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재영이 그 어린 날의 얼굴을 하고 다훈의 품에 안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세희의 말처럼 재영의 마음에 들었다는 그 악귀는 재영이 성인이 되면 자멸해 저 하늘로 날아가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정말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네. 엄청 갖고 싶던 게 있었는데, 그걸 오늘 가질 거거든요.”

“아빠한테 말하지 않았던 것 중에 가지고 싶던 게 있었어?”

“아, 네.”

재영이 해맑게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영은 조금 전 잠시 일그러지던 다훈의 얼굴을 상기했다. 방금 자신이 한 말 중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기란 어려웠다. 재영은 미간까지 좁혀가며 오류를 찾고자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을 보던 재영이 다훈을 마주 보며 웃었다. 잠시 벙찐 얼굴을 하고 있던 다훈이 눈썹을 달싹였다.

“특별 장학생이요. 그거 받고 싶었거든요.”

“…어.”

다훈이 어색하게 답했다. 재영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훈을 바라보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재영이 말을 이었다.

“그 상, 좋은 거잖아요. 맞죠?”

“그 상이 그렇게 받고 싶었어?”

“네. 좋잖아요. 이름도 예쁘고.”

다훈은 그제야 풀어진 표정으로 재영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재영의 성적이면 가고 싶은 대학은 충분히 갈 수 있을 터였다. 당연히 특별장학생과 그 상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특별 장학생을 먼저 말한 건 재영이었다. 저녁을 먹다 마치 방금 생각난 듯 재단과 연계된 영국 대학을 화제로 꺼냈다.

“그거 있으면 다른 성적 안 보고 바로 가는 거 맞죠?”라고 묻는 얼굴이 생생하게 반짝였다. 다훈은 네 성적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재영을 다독였다. 아무리 성적이 뛰어난 재영이어도 3학년이 되며 내심 입시에 스트레스를 받았었나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다훈은 옆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재영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다시 재영의 머리로 손을 뻗으려는데, 창밖을 보는 재영의 표정이 창에 비쳤다. 재영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입으로는 노래를 흥얼대는데 표정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재영이 뒤돌아 다훈을 보았다. 다훈은 흠칫 놀라 뒤로 고개를 뺐다.

“아빠.”

“응?”

“특별 장학생, 그거 제 거… 맞는 거죠?”

다훈은 거두었던 손을 다시 뻗어 재영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 전부, 전부 네 거야. 재영아.”

재영이 다시 활짝 웃으며 다훈을 바라보았다.

졸업식 전까지만 해도 그 기분은 잘 유지되고 있었다. 이제 곧 졸업식이 시작되면 호정에게 네가 나와 함께 특별 장학생이 되었다고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반은 당황해하고 또 반은 어색해하며 단상에 오를 호정의 모습을 상상했다. 민재가 보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쭈뼛대며 자신의 옆에 서 있게 될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웃음을 견디기 힘들어 재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졸업식의 순서는 단순했다. 단순하고 익숙한 순서였다. 매년 바뀌지 않는 인사말마다 빨간 줄을 긋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입안에서 적당하게 굴려지는 말은 모난 곳이 없었다. 무난하고 적당히 둥글둥글한 멘트들을 곱씹어보다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민재와 호정이 들어오고 있었다. 재영은 좀 전까지 보고 있던 연설문의 글자들을 입속에서 다시 굴려보았다. 적당하고 알맞게 입에 달라붙는 글자들 속, 재영은 까끌까끌한 탓에 입안에서 굴려지지 않는 이름에 인상을 구겼다.

“김민재.”

여전히 심기를 건드리는 얼굴과 이름이었다. 호정의 어깨에 두른 손은 어깨에서 팔로, 다시 어깨로 올라갔다. 재영의 눈에 그건 끈질기고 더러운 움직임이었다. 재영은 혀를 꼬며 연설문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중얼대며 연설문을 외우는 척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앞에 앉은 최정화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빙긋 웃은 재영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재영아! 잠시.”

부회장인 정화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불렀다. 재영은 천천히 미소 지으며 그 앞에 섰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정화가 웃으며 음료수를 내밀었다. 그리 좋아하는 음료수는 아니었지만, 자습실에서 함께 공부할 때마다 정화가 사 먹던 것이었다.

재영은 호정을 제외하곤 무식한 인간들 모두를 혐오했다. 인구는 불필요하게 많았고, 그 불필요한 인구 중 대부분은 불행하게도 쓸모없고 무식했다. 재영은 그들을 향한 혐오의 크기만큼 자신처럼 똑똑하고 유능한 인간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정화는 재영이 본 재단에 도움이 되는 인물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눈치도 빠르고, 대처도 빠르고, 머리도 좋았다.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인간이었다.

“목마르지 않아?”

“마침 딱 그렇긴 했는데. 고마워, 매번.”

부드럽게 말하며 웃었더니 정화가 볼을 붉혔다. 정화는 재영의 취향은 딱히 아니었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매력이 없었다. 재영이 말을 걸면 어정쩡하게 웃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예쁘지 않았다. 재영은 정화가 내민 음료를 단번에 마시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호정이 서 있었다. 예상과 달리 호정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영은 내심 좋아진 기분으로 손을 들었다.

“호…….”

민재가 호정의 옆구리를 찌르며 호정의 몸을 돌렸다. 민재는 여느 때처럼 낄낄대며 웃어댔다. 뒤를 가리키는 손을 당장 잘라다 아득아득 씹어 먹고 싶을 정도였다. 옆에 선 정화가 눈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다 마신 건 나 줘. 내가 버려줄게.”

“아, 괜찮아. 정화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응.”

재영은 캔을 쥐고 걸음을 옮겼다. 호정의 놀란 표정을 좀 더 극적으로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다가가 호정의 앞에 섰다. 호정이 생각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보았다. 멍청한 인간들 중 유일하게 용서되는 존재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자신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졌다. 재영은 자신이 계산 없이 호정의 앞에 달려왔음을 깨달았다. 단상을 가리켰다. 나중에 올라올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호정은 뭐냐며 표정을 굳혔다. 다 알려주긴 싫었다. 아침부터 줄곧 그 놀란 얼굴만 상상하며 왔다. 그 얼굴을 못 보게 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사이, 민재가 웃으며 둘의 사이로 들어왔다. 재영은 낮게 “씨발.”을 내뱉었다.

“둘이 어떻게 친… 아. 1학년 때 둘 다 3반이었지?”

명백하게 불편함이 담긴 얼굴을 하고도 민재는 낄낄대며 웃었다. 민재는 이런 일에 익숙해 보였다. 재영을 보는 눈에도 서슬 퍼런 경계를 자연스럽게 감추고 안일함과 자신만만함을 덧대고 있었다. 재영은 혹시라도 자신이 인상을 찌푸리고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될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나중에 보자는 말을 하고 다시 단상으로 걸어오자, 정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민재와 호정을 바라보았다. 뒤돌아본 호정의 눈이 자신이 아닌 정화를 향해있었다. 곧이어 호정의 몸은 다시 민재에 끌려 뒤를 향했다.

“재영아. 왜? 캔 버리러 가려던 거 아니었어?”

정화가 맑게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빈 캔을 자신에게 달라는 표현이었다.

“거봐. 바쁘면서. 넌 저거 연습해. 내가 버리고 올게.”

“어. 고마워. 부탁해. 정화야.”

재영은 조금 전 자신을 보고 있던 호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호정의 눈이 자신이 아니라 정화를 향해있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재영은 캔을 버리러 나가는 정화를 한 번 쳐다보고, 부모님 앞에 선 호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설문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두어 번 두드렸다. 탁탁 종이를 치는 소리가 옅게 들리고, 재영은 그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렸다. 재영은 켜진 마이크를 가렸다.

“좆도 안 어울리네.”

전교 2등을 좋아하는 전교 꼴등. 꼴 같지도 않았다. 높은 곳을 보려면 더 높은 곳을 봐야지 겨우 전교 2등 최정화한테나 발정해대는 이호정이 불시에 미워지고 싫어졌다.

재영은 민재와 같이 꽃다발을 들고 오며 웃는 호정을 노려보았다. 야망이 없으니 저렇게 꼴등이나 도맡아 하다 고등학교 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거다. 호정은 걸어오며 중간중간 재영을 흘깃댔다. 재영은 빈정 상한 얼굴을 연설문이 있는 단상대로 다시 돌렸다.

“잘 안 외워져?”

정화가 돌아와 물었다. 단상 아래 서서 자그마한 얼굴을 높인 채로 묻고 있었다. 이호정이 너를 좆을 쑤셔대고 싶은 표정으로 보고 있던데, 너도 알았어? 재영은 처음으로 정화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정화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만 있는 재영을 보며 방긋 웃었다.

“뭐야. 한재영. 왜 이렇게 얼이 나갔어.”

“아. 오늘 너 뭔가 다른 거 같아서. 뭐 했어?”

“응?”

정화가 제 볼을 손등으로 닦았다.

“나 다른 거 없는데.”

“그래? 더 예뻐 보이는데?”

“진짜?”

정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꼴사납게 웃어대는 통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재영은 괜히 주변을 살피며 정화를 가까이 불렀다. 정화가 어색하게 웃음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왔다. 작은 입이 벌어지며 “왜?”라는, 그보다 더 작은 물음표가 떨어졌다.

“정화야. 오늘, 마치고 시간 돼? 우리 집 갈래?”

“너희 집?”

밝게 웃던 정화가 표정을 굳혔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재영의 눈이 휘어졌다. 재영은 정화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정화야. 우리 이제 성인이잖아. 그치?”

“…응? 그건 그렇지.”

정화가 두 손을 뒤로 감추었다. 재영은 정화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는 것조차 그만두기로 했다. 얘 따위가 하는 생각이나 의중 따위를 파악하는 것도 지겨웠지만, 무엇보다 정화는 속이 다 보여 굳이 머리를 쓸 필요도 없었다.

“몇 시에?”

“밤이면 좋겠어. 네가 자고 갈 수 있게.”

“어? 자고?”

정화가 잠시 낯을 바꾸며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자신을 따라갈 거면서 안 그런 척 얌전을 떠는 모습마저 귀찮았다. 호정이 다시 눈을 굴려 재영을 보고 있는 정화를 찾고 있었다. 재영은 정화의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훑었다. 이호정이 좋아하는 얼굴. 정화의 이마에 글자라도 박아주고 싶었다. 그러면 이 얼굴에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쁘면 뭐, 됐어. 다음에도 시간 있을 테니까.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아, 아니야. 갈게.”

재영이 피식 웃으며 정화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기다란 손이 정화의 어깨를 한 번 감싸고 손가락 끝은 어깨 끝에서 다독이듯 떨렸다.

“그럼 내가 밤에 데리러 갈게.”

“응.”

정화가 볼을 붉히며 재영을 올려보았다. 눈이 반짝거렸다. 동시에 붉어진 볼이 보였다. 재영은 고개를 조금 더 내려 정화의 눈 아래를 확인했다.

곧 졸업식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재영은 이미 외운 연설문을 보는 척하다 고개를 들었다. 호정이 인상을 구기고 강당을 벗어나고 있었다. 민재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꽃다발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던 민재는 별안간 활짝 웃으며 뒤에 선 호정의 부모님께 손을 흔들었다.

재영은 민재의 눈을 피해 재빠르게 강당을 빠져나갔다. 호정을 잡아야 했다. 겨우 최정화 따위를 보면서 발기라도 하는 건지, 최정화처럼 매력 없는 여자를 보면서 설레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뒤따르는 걸음이 빨라졌다. 정돈되지 못한 구두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침에 신경 써 입은 회색 코트를 벗었는데도 등줄기를 타고 미세한 땀이 흘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인 게.”

재영은 복도를 돌아가는 호정을 발견하고 다시 발소리를 낮추었다. 얌전하지 못한 고양이. 제멋대로라 늘 예상을 벗어나는 버르장머리 없는 병아리. 언제 목이 뒤틀리고 다리가 잘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놈인데, 또 죽이자니 아까웠다.

재영은 호정을 따라 코너를 돌았다. 호정은 기지개를 켜며 화장실로 발을 들이고 있었다. 하품과 함께 “지겹다.”라고 종알대는 모습을 보며 재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다듬었다. 다급하게 온 걸 티 내면 안 될 테니까.

재영은 호정처럼 깨끗한 머리를 지닌 아이들의 경계심을 어떻게 풀어야 조금 더 자연스러울지 고민했다.

“까짓거. 약점, 만들어서라도 하나 주면 되잖아.”

부모님의 엄청난 기대감에 숨통이 막히는 것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공부에만 열을 올리다 지친 것처럼, 늘 눈치 보며 사느라 바들바들 위태롭고 떨리는 삶을 사는 것처럼. 그런 약점이야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막 오줌을 누고 있는 호정의 뒤에 섰다. 세모로 날을 세운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자 호정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긴장감이 가득한 목소리와 굳은 어깨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아직 발기하지 않은 아래가 흡족했다.

최정화 따위나 보며 발기해 있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던 재영이었다. 그랬다면 지금 잡은 곳이 어깨가 아니라 목덜미가 되었을 테니까.

호정은 뒤에서 자신을 안은 존재가 재영이라는 것에 안심한 듯 숨을 내뱉었다. 재영은 중얼중얼 말을 하면서도 오직 호정의 아래만 보았다. 정화에 발기하지 않은 아래에 마음이 놓이다가도, 오래 보고 있자니 괴로웠다. 재영은 미간에 힘을 주고 손을 뻗었다. 호정의 바지 지퍼를 대신 올려주며 눈을 돌렸다. 호정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날 재영은 밤새 정화를 안았다. 서재와 작업실 앞은 정화가 볼 수 없게 ‘일월오봉도’의 병풍으로 가렸다. 정화는 생각보다 더 숫기가 없었다. 부끄러운 몸짓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영은 정화를 놓아주지 않았다. 버티지 못한 정화가 다리를 끌며 몸을 비켜나도 다시 발목을 당겨 안고 또 안았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목이 탔다. 집으로 부른 남자들을 숱하게 안으며 느낀 갈증과는 또 다른 목마름이었다.

재영은 자신의 방에 달빛 한 점도 비치지 않길 바랐다. 지금 자신의 아래 놓인 전라의 인간이 호정이 아닌 다른 존재라는 걸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골목에서 자신을 보았을 때와 아빠와 이야기를 마친 후 자신을 볼 때 얼른 벗어나고 싶어 몸을 꼬던 호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당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긴장감과 경계심이 가득했던 이호정이 고작 이 여자를 안고 싶어 안달 나 한다는 사실이 짜증을 유발했다.

세상에는 이해하기 싫은 일만 있을 뿐, 이해할 수 없는 건 잘 없다 믿었었다. 그런 재영에게 이해되지 않는 색을 가진 존재가 불시에 코앞에 떨어졌다. 재영은 자신의 손끝에 빨갛게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순간이 오면 그는 자연스레 자신의 주치의를 떠올렸다. 동시에 욕조를 채웠던 약물의 하얀 거품을 떠올렸다. 그러면 진행하던 모든 행위를 일시에 멈출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젖혀 숨을 골랐다.

절제. 통제. 조절. 제어. 정도. 억제. 또 뭐라더라. 씨발. 그 새끼가 뭐라고 했었지. 내가 뭘 못한다더라.

“씹…….”

재영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도망치는 정화의 발목을 다시 당겼다.

“너 이호정 알아?”

재영은 정화가 호정을 잘 알길 바랐다. 이왕이면 호감 쪽으로. 호정이 지금 원하는 건 너니까. 이호정이 너한테 박아댈 때 내가 이호정에게 박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인 건 아닐까, 정화에게 부드럽게 권유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정화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투자 대비 이득을 따져 자신의 청을 들어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호정?”

“어. 1학년 때 3반, 2학년 때 5반, 3학년 땐 2반이었던.”

정화가 눈을 깜박이는 것 같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미세한 빛을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질문을 던진 재영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 눈을 찾는 것 같기도 했다. 재영은 두 손을 뻗어 정화의 얼굴 옆에 놓았다. 정화의 눈이 자신의 바로 아래에 맞춰졌다. 정화는 잠시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걔는 갑자기 왜?”

말을 줄인 정화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재영의 팔을 붙들었다.

“아. 걔 오늘 특별 장학생, 그것도 받았잖아, 근데 둘이 원래 친한 사이였어? 오늘 친해 보여서 신기했어.”

“넌?”

“나?”

정화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표정을 굳혔다. 호정의 이야기를 하며 웃는 타인을 보면 그게 누구든 죽이고 싶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의 입을 찢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다시 정화의 찢어버리고 싶은 입술에 입을 맞대었다. 잠시 훑던 입술이 멀어지고, 정화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걔랑 너무 어울리지는 마.”

재영은 흐린 미소를 보였다. 한 번 몸을 섞은 일로 감히 자신에게 명령해대는 꼴에 짜증이 일었다. 명백히 주제넘은 일이었다. 이호정이라면, 이호정이라면 어떤 답을 했을까. ‘친해.’ 또는 ‘친하지 않아.’ 자신의 마음에 쏙 들게 명료한 두 가지 답 중 하나를 내놓았을 거 같았다.

“난 걔네 무리 다 싫어하거든.”

정화의 웃음이 재영의 눈에는 조금도 예뻐 보이지 않았다. 눈을 지금 위치에서 위로, 아니 어쩌면 그보다 아래. 입도 옆으로 조금 더 길게. 입술 산은 선명하고 붉게. 그리고 눈 밑은 그 색으로, 이호정이 가진 그 색으로 바른다면 조금이나마 예뻐 보일지도. 아주 조금이나마 흥미가 생길지도. 재영은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으로 정화의 턱을 움켜쥐었다.

“정화야. 걔들 무리 말고 이호정 말이야.”

“이호정? 근데 걔는 좀 예뻐서 인기 있을걸?”

재영은 질문의 핵심을 비껴가는 정화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비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손에 들었던 힘을 가까스로 풀었다. 욕조의 하얀 거품이 목구멍에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 넌 걔 어땠는데?”

“말했잖아. 난 그 무리 자체를 싫어한다고. 특히 김민재. 재수 없어. 변태 같고.”

재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귀여운 정화의 코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잠시만.”

마음에 드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한 화답이었다. 재영은 전라로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껐다. 그렇지 않아도 어둡던 방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아무리 눈을 깜박여도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병풍 뒤에 가려졌던 드레스룸으로 들어왔다. 재영은 그 방 벽에 걸어두었던 호정의 교복 셔츠를 가져왔다. 호정이 버린 교복 셔츠는 그의 눈 밑 색만큼이나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물이 든 옷이었다. 그날 골목에서 주워와 보관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호정의 물건 중 하나가 쓸모 있게 쓰이는 순간이었다.

재영은 드레스룸에서 돌아오며 옅게 비추던 미등조차 모두 꺼버렸다. 방의 모든 창을 암막 커튼을 쳐 가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이불을 어깨에 두르고 앉은 정화의 매끈한 등이 보였다.

“정화야. 춥지 않아?”

“응? 조금? 근데 한옥은 원래 좀 그렇잖아.”

“이거라도 입을래?”

재영은 무릎을 세워 침대에 앉았다. 정화가 두르고 있던 이불을 내리고 몸에 호정의 셔츠를 덮었다. 가능하다면 셔츠로 정화의 얼굴을 덮고 싶었다. 정화는 어둠 속에서 셔츠를 만지작댔다.

“잠옷이야? 좀 빳빳한데.”

“응.”

재영은 정화의 손을 잡아 셔츠에 맞춰 넣었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갔다. 분홍빛이 감도는 셔츠 위로 정화의 가슴이 솟아났다. 재영은 손을 뻗어 호정의 이름이 자수로 박힌 셔츠 주머니를 움켜잡았다. 자수가 구겨졌다. 동시에 정화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 * *

며칠 지나지 않아 재영은 민재의 전화를 받았다. 재단 사무실에서 대학교 진학 자료를 정리하던 차이자, 민재를 처리하기 위한 일과 호정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로 바쁘던 와중이었다. 재영은 자신의 시간을 더 이상 김민재 따위에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여보세요.”

-어. 재영! 나 민재, 김민재!

“응.”

민재는 재영에게 드는 경계심을 감추려고 오버해 웃고 있었다. 재영은 민재의 검은 속이 보이는 것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얼른 처리하고 더는 이따위 잡생각은 그만두고픈 마음이었다. 재영은 이마를 매만지며 작게 한숨 쉬었다.

-어. 다른 건 아니고, 예쁜 애들 많은데. 나올 생각 있나 해서.

재영은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폰 너머 그대로 웃음이 새어 나갈 뻔했다. 호정에게 보이는 관심이 성적인 관심도 동반된 것인지 떠보려는 수작이 너무 선명했다. 재영은 폰을 잠시 떼어내고 참아지지 않는 웃음을 겨우겨우 감추었다. 멍청한 아이들은 도움 될 건 없지만 가끔 이런 식의 재미는 주었다.

“미안. 난 여자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서.”

-야. 그거 좀 오해 소지 있는 말인 거 알지? 여자한테 지금 관심이 없다는 건지, 아예 여자가 아니라 다른 쪽이라는 건지.

결국 민재 쪽에서 먼저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재영은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인데, 비밀 하나 알려주는 것쯤 어렵지 않았다. 민재의 억지스러운 웃음이 귀를 채웠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겠다. 나 영국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해서 지금은 준비할 게 좀 많아. 정신도 없고. 아, 혹시 옆에 호정이 있어?”

재영은 민재를 더 놀리고 싶어졌다. 살짝만 건드려도 바들대는 모습은 어떤 때 보면 멍청하지만, 충성심만 높은 충견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재영에게 그런 개는 필요가 없었다. 충성심이 높으려면 멍청하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 쓸모가 있었다. 호정 또한 그렇겠지, 생각했다.

-호정이는 왜?

“있으면 바꿔줄래?”

민재가 여자들과 어울릴 때 호정을 데려가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아는 정보였다. 게다가 호정과 있을 때 자신에게 연락했을 리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재영은 일부러 호정을 찾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일정한 박자로 탁탁 손톱이 부딪히는 속도가 났다. 정확히 다섯 번, 초로 따지자면 5초가 지난 후에야 민재는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내가, 재영아. 내가, 네가 호정이를 왜 찾느냐고, 방금. 씨발, 먼저 물었잖아.

재영은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을 내렸다. 자꾸 웃음이 나서 견디기 힘들었다. 멍청한 사람과 이렇게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나한테 해. 내가 전해줄게.

민재는 목을 가다듬고 예의 웃음기 다분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나는 여자한테는 관심 없다니까. 난 호정이한테 관심 있거든. 그러니까 번호 줘.”

-뭐?

“이호정 번호 달라고.”

재영은 사무실 입구의 구석에 서 있던 자신의 비서를 손으로 불렀다.

윤 비서는 재영이 아버지와 협의를 마친 그날 이후, 다훈이 재영을 위해 직접 고용한 사람이었다. 범죄형 사이코패스 중 충성심이 높은 인물을 고르고 골랐다. 그도 재영처럼 어린 나이에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가난했던 그의 부모는 임상실험이라는 명목에 기대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을 병원에 버렸다고 했다. 버려진 윤 비서의 머리에 일 년 내내 강력한 전기가 흘렀고, 실험은 당연히 실패했다. 다훈은 병원에 멍하니 앉은 윤 비서를 불렀다. 장기간의 실험으로 정신을 놓고 있던 윤 비서에게는 자신의 충성을 바칠 새로운 주인이 필요했다. 그 주인으로 재영이 딱이었다.

윤 비서가 다가와 고개를 반쯤 숙였다. 무슨 일이든 시켜달라는 충직함이 몸에 밴 동작이었다.

-너 설마 게이냐?

민재의 웃음이 폰을 타고 전해졌다. 앞에 선 윤 비서는 재영이 딱히 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다음 스케줄을 인지한 듯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윤 비서를 보며 재영은 책상 옆에 놓인 화분의 난을 매만졌다. 난은 기화라 이미 혼자 봄을 맞아 꽃을 틔우고 있었다. 마치 찢어진 입처럼 붉게 위아래 벌어진 꽃대를 잡았다.

-어? 한재영? 너 게이냐고.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재영은 잡은 꽃의 목을 꺾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대롱대던 꽃이 곧 화분 위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재영은 답하지 않았다. 이런 대화는 성격 급한 쪽이 지게 돼 있었다. 재영은 민재가 다시 말을 잇길 바라며 떨어진 꽃을 매만졌다. 봄도 오기 전에 먼저 꽃을 피운 건방짐에 대한 벌. 재영은 엄지로 꽃을 바닥에 비볐다. 꽃잎이 으깨지며 옅은 꽃물이 묻어났다.

-근데 어쩌냐. 이호정은 그쪽 아닌데.

“알아.”

재영은 난의 나머지 목을 모두 한 손에 낚아챘다. 뿌리가 들리며 바닥으로 모래가 떨어지고 꽃이 달린 난이 손에 들렸다. 화분이 비틀대며 옆으로 쓰러졌다. 꽃을 피우는 데 3년이 걸렸다. 귀한 꽃이니까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다. 내 사무실에서 나갈 땐 차라리 죽은 모습이어야 했다. 재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 손에 들린 난의 목을 꺾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난의 뿌리가 마치 사람의 머리카락처럼 아래로 늘어졌다.

“너도 알아서 그러고 있는 거잖아. 씨발아.”

재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재영이 민재에게 원하는 건 하나였다. 호정의 번호도 아니었다. 그건 민재를 처리한 후에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재영은 그저 멍청한 민재가 호정에게 자신이 영국의 대학교에 진학한다는 것만 흘려주길 바랐다. 언제든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고 익숙하지만 달갑진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을 수 있는 곳을 호정이 한 번이라도 상상해보길 바랐다. 어쩌면 호정은 재영의 모습이 되어 전혀 다른 자신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거다.

윤 비서의 보고는 간단했다. 민재에게 얽힌 여자는 많았지만 대부분 합의 하에 이뤄진 관계들이었고,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 이미 민재 쪽에서 돈을 써 처리해두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재영은 민재를 믿었다. 그토록 멍청한 아이가 틈 하나 남기지 않고 일을 마무리했을 리는 없다는 믿음. 잠시 망설이던 윤 비서가 재영의 눈치를 보며 다음 장을 펼쳤다.

“김예지라고, 김민재가 이 친구랑은 최근에도 연락했었습니다. 이 여자만 처리가 안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재영은 예지의 사진 옆에 민재의 사진을 붙였다. 잘 어울리는 꼴이었다. 적당한 양아치와 적당한 양아치. 예지는 재영이 그린 민재의 나무에서 뻗은 가지 중 하나였다. 재영은 흥미 잃은 표정으로 둘의 사진을 보다 다시 윤 비서를 올려보았다. 가지 중 가장 필요 없어 보이던 예지라는 잔가지가 나무의 뿌리를 찌르려 하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왜요?”

“김민재를 신고하려는 모양입니다.”

재영을 보는 윤 비서의 눈에 잠시 비릿한 웃음이 물들었다. 재영은 왜 이 잔가지만 처리가 안 된 것인지 굳이 윤 비서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김민재는 다른 여자애들이면 몰라도 이 여자애한테는 돈을 주기 싫어하는 입장입니다. 오히려 김민재 쪽에서 몇 번 연락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돈도 많은 새끼가 별걸 다 아끼네.”

재영은 말을 하다 다시 윤 비서를 응시했다. 이면에 담긴 이야기가 있다면 더 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김민재를 상대로 협박했더라고요. 겁이 없는 여자 같기도 하고, 잃을 게 없어서 막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협박. 재밌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재영은 이제야 점차 구미가 도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몸을 조금 당겨 앉았다. 윤 비서가 내민 건 둘의 대화가 녹음된 파일이었다. 녹음본을 듣기 위해 재영은 이어폰을 꽂고 손으로 턱을 받쳤다. 소리는 조용했다. 카페도 아니었다. 가끔 울리는 소음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올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아마도 차 안,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차 안에서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듯했다. 혹은 관람 열차라도 탔으려나.

재영은 살포시 웃은 후 다시 녹음파일에 집중했다. 민재와 예지의 대화는 녹음이 시작되고 한참 후에야 진행됐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성폭행했다고?

-했잖아. 그때, 나 분명히 싫다고 했었어. 기억하지?

예지의 말에 민재가 소리 없이 웃는 게 느껴졌다. 재영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네가 싫다는 것과 내가 너를 안고 싶다는 것의 상관관계를 민재나 자신 같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 그건 타인의 의사는 어떻든 궁금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민재는 담배를 꺼내 물었을 거다. 이 건방진 여자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생각 중이려나. 재영은 조금의 흥미를 느끼며 소리에 집중했다.

-당연히 기억하지. 매번 연락할 때마다 잘 벌려주던 년이 갑자기 싫다는데 기억 못 할 리가. 근데 예지야. 네가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니까 나도 물어보는 건데, 너 그때 왜 싫다고 했었어? 그때 기분 진짜 좆같더라.

민재의 목소리가 급격히 차분해졌다. 말을 마친 민재가 “너도 피울래?” 하며 담배를 권했다. 라이터의 경첩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예지의 입에도 같은 담배가 물린 것 같았다.

-너 같은 새끼들이 잘 살아가는 거 싫어. 그리고, 너 기억 안 나? 그 전에 나랑 잘 때.

-씨발. 요즘에 왜 이렇게 내가 묻는 말에 답 안 하고 헛소리하는 년들이 많지? 묻는 말에나 답해.

재영은 음성 파일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마침내 이어폰을 빼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윤 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물이 든 컵을 내밀었다. 재영은 쉽게 멈춰지지 않는 웃음을 물과 함께 삼켰다. 민재가 말하는 헛소리를 해대는 인물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재영은 다시 이어폰을 꽂고 재생을 눌렀다.

-개새끼야. 너 말 그렇게 하지 마. 내가 왜 너한테 년, 소리를 들어야 해. 미친 씨…….

-부탁하는 거면 들어주겠지만, 명령이라면 넌 내 손에 죽어.

-죽여 봐.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예지의 목소리가 더 크고 선명하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녹음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예지인 것 같았다. 재영은 다시 물 한 모금을 삼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의 천장은 부적이 없어 좋았다. 자신을 감시하는 CCTV도 없었다. 여러모로 집보다 안락한 곳이었다.

-너 그때 이호정 이름 불렀어. 미친놈처럼 이호정, 이호정, 이호…….

-미친. 너 이제 환청까지 들리냐?

민재가 당황한 티를 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영은 민재의 반응을 기대했다. 민재가 인정할지, 변명할지 자신도 궁금해졌다.

-난 게이 아니야. 알겠지만 난 여자 존나 좋아하고, 호정이는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너 같은…….

다시 라이터 소리가 들렸다. 민재의 다음 담배가 물리는 소리였다.

-너 같은 것들이랑은 다르지. 누구한테도 못 주지. 그게 나라고 해도.

-미친 더러운 새끼.

-그러니까… 이 미친년이 지금 호정이 이름으로 날 협박하겠다는 거네?

재영은 녹음본을 끄고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책상에 이어폰을 놓고 손을 까닥였다. 사무실의 끝으로 돌아가 있던 윤 비서가 재영의 옆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비서를 올려보는 재영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김민재가 왜 이 여자한테 돈을 안 주는지 알겠는데요.”

“네?”

“이 여자 하나쯤은.”

죽여도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거예요. 재영은 피식대며 윤 비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에서 뒤로 아주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왁스를 발라 고정한 딱딱한 머리카락이었지만 재영은 그 위를 쓰다듬고 윤 비서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첫 번째가 좋겠어요. 오토바이 사고.”

재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호정을 다시 만나기에 제일 자연스럽네요. 꼭 셋이 보자는 김민재 유언도 들어줄 수 있고.”

윤 비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윤 비서는 역시 도련님은 배려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빠르게 책상 위에 놓여있던 민재 관련 서류들과 USB를 빼 손에 쥐었다.

“도련님 생각이 제 생각과 같아서 기쁩니다. 이번 달 안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대학교 준비랑 이호정 애비 일도 제가 말한 대로요. 순서대로 진행되는 게 보기에 예쁘잖아요.”

“네. 이전에 말씀하신 대로 준비 중입니다. 김예지는 지금부터 우리가 본인을 돕는 거라고 생각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재영은 다시 윤 비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 비서는 손에 쥐고 있던 USB를 입안에 넣었다. 재영은 좀 전 윤 비서가 자신에게 주었던 컵을 내밀었다. 윤 비서는 입속 USB를 물과 함께 삼켰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간결한 동작이었다. 호정이 윤 비서처럼 이렇게 차분하고 말을 잘 들으면 참 좋을 텐데 생각했다. 하라는 대로, 하자는 대로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인다면 좀 더 예쁠 텐데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니지.”

재영이 천천히 웃었다. 역시 다시 곱씹자니 그게 아니었다. 지금의 호정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좋았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붉은 눈 밑은 매력적이지 못할 것 같았다.

민재 일은 자신이 해결해줄 수 있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민재의 생각은 예지를 죽이는 것이겠지만, 재영의 생각은 달랐다. 죄지은 쪽이 죽는 게 더 형평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자기만 죽으면 다 끝날 일인데, 끝까지 멍청하게.”

재영은 웃으며 이전에 그렸던 민재의 나무에 몸통을 통과하는 빨간 선을 그었다.

며칠이 지난 새벽, 윤 비서는 민재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재영의 부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호정과 관련해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핑계를 댔다. 지금은 바빠 나갈 수 없다는 민재의 말에 윤 비서는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통화가 지루해 자칫하면 하품을 할 뻔했다.

“김예지 씨 관련 일이면 저희가 대신 처리해드릴 수 있는데요. 어떡하시겠습니까? 지금 시간 되시면…….”

윤 비서는 폰을 귀에서 떼고 목을 가다듬었다. 도련님은 이런 순간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게 좋다고 했다. 뜸을 들이며 상대방의 숨소리에 집중하라고도 가르쳤었다. 윤 비서는 착실하게 자신의 도련님이 시킨 대로 뜸을 들였다.

-시간 되면, 뭐요? 나보고 어떡하라고. 씨발. 개나 소나 다 명령질이야.

“나오실 수 있습니까? 꽤 간단하게 해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윤 비서는 라이터의 경첩을 올렸다 내리길 반복했다. 탁, 탁, 울리는 소리에 맞춰 발을 까닥거렸다. 손목에 둘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 시. 아직 시간은 많았다. 언젠가 새벽에 죽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던데, 그렇게 따지면 도련님의 배려로 새벽에 죽게 된 민재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도련님이 그의 유언도 들어줄 테니까. 여러모로 민재는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운을 거머쥔 것이었다.

민재의 장례식장은 꽤 멀었다. 오랜만에 자신이 아닌 윤 비서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재영은 뒷좌석에서 담배를 물고 정리된 대학 서류를 보고 있었다. 입학 원서 기간에 맞춰 이미 호정의 정보를 넣어두었다. 재단의 특별 장학 증서 덕에 추가 입학생이 되었으니 호정은 응당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감동 받아야 할 것이다.

재영은 그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의 이호정은 절대 그러지 않겠지만.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민재의 엄마가 먼저 재영을 반겼다. 그 뒤로 민재 아빠가 아는 체를 해왔다. 재영이 누구인지 알아본 듯했다. 재영은 민재의 영정사진 앞에서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냈다. 어차피 죽을 거 이호정이나 한번 안아보고 죽지, 그러지도 못한 너무 꼴사나운 죽음이었다.

그러게 왜 까불어대. 민재야. 이왕이면 오래 살지. 재영은 향에 불을 붙이고 잠시 콜록거렸다. 엄마가 자신의 방과 화장실에 피우는 향냄새와 같은 냄새를 맡자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기분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재영은 향로에 향을 꽂았다. 가볍게 묵례만 하고 나왔다. 민재의 아빠가 재영에게 더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무시했다.

얼른 이호정이 와야 했다. 이호정은 이곳에서 밤을 새울 것이다. 쓰레기인 그 무리들과 호정이 만나야 했다. 한국이, 한국에 있는 모든 주변 인물들에 환멸을 느끼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야 했다. 재영은 느긋하게 앉아 직원이 내어주는 음식을 쳐다봤다.

지루하고 무료했다. 초침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느껴질 정도였다. 기다렸던 호정은 평소보다 눈 밑을 더 붉힌 채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재영은 턱을 괴고 호정의 뒷모습을 관찰하다 목을 가볍게 돌렸다. 다시 호정에게 보일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말투를 어떻게 했었더라. 이것보다 더 부드러웠고 톤은 한 톤 정도 높았다. 민재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호정이 재영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스스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울었는지 더 붉어진 눈 밑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재영은 호정의 부은 눈 밑을 가볍게 쓸었다. 호정이 놀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재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젓가락을 뜯으며 물었다.

“울었네?”

재영은 테이블 아래 손을 까닥거리며 물었다. 저까짓 쓰레기 하나 소각된 일에 울다니. 재영의 눈에 호정의 모습은 주치의가 말하던 정상인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인간처럼 보였다. 별일 아닌 일에 양심을 따지고 슬픈 일에는 곧잘 눈물을 흘리며 기쁘고 웃긴 일에는 연신 웃기도 하는 그런 모습의 정상인. 다만, 그 모든 모습이 재영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유일한 정상인.

죽은 건 민재인데 호정이 왜 우는 걸까 생각했다. 죽은 건 민재니 민재가 관 속에서 억울해 운다면 모를까, 호정이 왜 우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겠다. 재영은 다만 호정이 울었다는 걸 알고 난 자신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따름이었다. 고작 김민재 따위에 눈물을 흘린 것도 모자라, 보란 듯이 눈 밑을 붉혀대는 것에 짜증이 났다. 어쩌면 본인 마음속 짜증의 근원은 자신 앞에서 감정이 넘쳐나는 정상인인 걸 티 내려는 호정의 오만함 때문인지도 몰랐다. 둘 중 어느 것 때문에 발생한 짜증인지 알기 어려웠다. 다만, 호정의 눈물을 멈출 방법은 떠올랐다. 재영은 약통에서 꺼낸 알약을 손으로 비볐다. 손에 가루가 묻어났다.

“넌 뭐 좀 먹었어?”

“응. 아까 와서.”

재영은 호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그 가루를 나무젓가락 끝에 묻혔다. 젓가락을 내밀자, 호정이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호정은 고맙게도 고기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정신과 약은 육류와 섞이면 효과가 더 빨랐다. 뇌의 욕구 부분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육류가 필수였다. 성욕을 일으키기도 하고 동시에 억제하기도 하는 담당 부위는 육류가 입에 들어야만 작동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약은 호정의 속에서 재빠르게 몸을 부풀리고 혈관 곳곳을 지나 뇌로 스밀 것이다. 재영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호정의 반응을 관찰했다.

“영국에 간다고 들었는데.”

“아… 민재한테 들었구나?”

재영은 민재가 죽기 전까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갔음에 안도했다. 역시 통화했던 후로 호정을 만나 무심한 척 자신의 이야기를 흘렸을 거란 예상이 들어맞았다. 재영은 잔잔한 미소를 걸친 채로 호정의 흐릿한 눈동자를 응시했다. 호정은 이 자리를 어색해하고 있었다. 아마 다음 이야기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 중인 것 같았다.

재영은 편의점에서 산 탄산음료를 내밀었다. 고등학교 때 호정을 볼 때마다 자주 이 음료를 입에 물고 있던 걸 떠올렸다. 건네받은 탄산음료를 마신 호정이 억지로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약을 먹은 지 몇 분이나 지났지, 생각했다. 고작해야 1분 혹은 2분. 재영은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다시 호정을 바라보았다. 호정의 표정을 천천히 관찰했다. 인간이 지닌 일반적인 감정 중, 친구가 죽었을 때 느낄 보편적인 감정이란 무엇일까. 공부하고 배운 대로. 재영은 사전을 통해 배운 단어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슬픔. 공허함. 탄식. 고통. 애석. 설움. 비통. 비련. 애통. 참담. 통탄. 허전함. 허망함.

호정은 지금 이런 감정들을 느끼고 있을까.

“…….”

재영은 고개를 좌우로 느리게 저었다. 알아봤자 쓸 데도 없는 것들이었다.

때맞춰 적요하던 장례식장이 소란해졌다. 호정에게 고정돼 있던 시선을 드니 그곳에 민재가 속했었던 무리가 차례로 들어오고 있었다. 김민재가 죽고 지금 저 허접한 무리를 이끄는 건 유상현이 되었다. 유상현 또한 나름대로 규모가 큰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서울의 한 대학교에 진학 예정이었다. 재영은 호정이 지금이라도 나를 때렸던 저 유상현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기꺼이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친구들 맞지? 친구들한테 가도 돼.”

재영은 말을 하며 무리를 이끌고 들어오는 유상현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눈치 빠른 유상현이 재영을 발견하고 걷는 방향을 바꾸었다. 재영은 자신 쪽을 향해 걸어오는 유상현을 보고 다시 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호정이 입술을 비틀고 눈에 띄게 불편한 감정을 티 내고 있었다. 보기에 꽤 귀여운 모습이었다. 재영은 자칫 호정을 향해 뻗을 뻔한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이어진 유상현과의 대화는 지루하고 도움 될 만한 게 없었다. 재영은 다만 유상현의 옆에서 점점 불편해지는 호정의 표정을 보는 것에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호정이 자신에게 느끼는 불편함과 유상현에게 느끼는 불편함의 결이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혐오가 동반된 불편함과 동경과 호감이 동반된 불편함은 명백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이었다. 재영의 기분이 점차 나아졌다.

“재영이 너 담배 피우지? 나갈래?”

유상현이 턱을 까닥이며 물었다. 재영은 더욱 흥미로워지던 호정의 표정이 다시 굳은 것에 실망했다.

“담배 안 피워. 누가 싫어한다고 해서.”

재영은 호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호정은 자신의 옆에 앉은 유상현을 노려보다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재영이 내민 음료를 마저 들이켰다. 재영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약을 먹은 지 이제 14분이 막 지났다. 정상적인 뇌를 가진 사람이 이 약을 먹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는 재영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였다. 약을 먹었더니 자신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며 주치의 앞에서 호들갑을 떨어댈 수도 있을 테니까. 마치 정말 정상인이 된 것처럼 굴어 주치의의 얼굴에 비칠 당혹감과 의아함을 구경할 수도 있게 될 테니까.

“미안. 나 잠시만.”

호정이 자리에서 비틀대며 일어났다.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재영은 호정의 다리가 잠시 후들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뇌를 움직이는 약이 가장 먼저 제어하는 건 근육 쪽. 특히 장기를 움직이는 근육. 명치를 꾹 누르며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 구역질이 나 자리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재영은 물끄러미 호정을 바라보았다.

“호정아.”

재영은 화장실을 향하는 호정을 따라가는 시선 하나를 더 느꼈다. 이서정. 이서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정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 오늘 귀찮은 애들이 생각보다 더 많네.”

재영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렇지? 나중에 우리 애들 몇 더 올 텐데. 지겨우면 나랑 나갈래? 너희 외할아버지 회사랑 우리 엄마 회사랑 합병할 수도 있다던데.”

“아, 그래?”

“아무튼 네가 민재랑 연락하는지는 몰랐어. 신기하다, 야.”

말귀도 하나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알아먹은 체하며 말을 거는 상현에게 재영은 참기 힘든 짜증을 느꼈다. 겨우 먹인 약을 호정이 다 토해내는 것에도 이미 충분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재영은 물을 입안에 천천히 머금었다. 말을 뱉으면 욕밖에 나올 게 없었다. 이럴 땐 차라리 자신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쪽이 나았다. 입 가득 물을 머금고 잠시 숨을 골랐다. 유상현이 앞에서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민재의 발인까지 마치고 호정의 집에서 하루 자고 난 밤. 재영은 새벽에 호정의 집에서 나왔다. 옆에 호정을 두고 자자니 위험했다. 재영은 오랜만에 제어하기 힘든 마음의 요동을 느꼈다. 잠든 호정이 숨을 고를 때마다 그 공기가 그대로 자신의 폐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폐가 갑갑하고 입은 시렸다.

호정이 잠결에 몸을 돌리고 등을 보이면, 다시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렸다. 잘 때조차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재영은 호정의 버르장머리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쳐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재영은 새벽에 호정의 집을 나서며, 칩 모양의 녹음기를 지갑에 넣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양심에 예민한 아이니, 발견한다고 해도 그 안은 들여다보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들여다본다 한들 이게 녹음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재영은 한껏 멍청한 얼굴로 잠든 호정의 볼을 쓰다듬었다.

재영은 약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구토와 쏟아지는 잠. 눈에 보이는 외적인 반응은 지금까지 두 가지였다. 정상적인 사람이 정신과 약을 먹으면 이렇게 되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비참해졌다. 정상인은 받아들이지도 못해 뱉어내고 게워내야 하는 약을 자신의 몸은 흥분상태로 먹게 된다는 게 우스웠다.

아파트 아래 주차해두었던 차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고 기기를 차와 연결했다. 블루투스를 통해 호정의 색색대는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재영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핸들을 꺾었다.

재단의 사무실에 도착하기 전, 재영은 윤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다 멈추었다. 전화를 하는 동안은 호정의 숨소리를 들을 수 없을 거다. 그러긴 싫었다. 재영은 재단의 건물이 있는 곳을 지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주차장의 입구에 윤 비서가 이미 나와 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호정 씨 아버님이 재작년에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휴.”

재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윤 비서가 내민 태블릿PC를 받았다. 화면에는 호정의 아버지 신상명세과 범죄경력이 적혀 있었다.

“윤 비서님. 사람들이 참 인생 대충 살죠?”

“네. 맞습니다.”

“다 같이 열심히 살아주면 좋겠는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허점이 많을까요? 정말 안타까워요.”

재영은 혀를 차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무표정한 얼굴로 작게 목을 돌렸다. 깊게 자지 못한 탓에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다. 모레 주치의를 만나는 스케줄이 잡혔다. 여전히 귀에선 호정의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재영은 피식 웃으며 태블릿 화면 속 호정의 아버지 모습을 응시했다.

“저한테 잡힐 약점이 없게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재영이 중얼대며 손가락으로 호정의 아버지 얼굴 위를 톡톡 두드렸다.

“절대 죽이지는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죽으면 이호정이 다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네.”

사무실로 들어와 담배부터 물었다. 호정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재영은 살면서 이렇게 오래 자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제는 호정이 약 때문에 오래 자는 건지, 원래 깊게 오래 자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어느 쪽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재영은 자꾸만 피식대며 웃음을 흘렸다. 입에선 연신 짙은 연기가 뱉어졌다.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사무실을 채웠다. 연기 속에 호정의 색이 비치는 것 같았다. 재영은 손을 뻗어 잡히지 않는 연기를 더듬었다. 잡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비록 지금은 잡히지 않지만, 곧 제 손에 쥐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갑을 핑계로 한 번 더 얼굴을 보려 했다. 재영은 호정의 집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호정과 이서정의 통화에 집중했다. 생각은 했지만, 서정은 보기보다 더 입이 쌌다. 장례를 마치자마자 냉큼 전화해 저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절댈 만큼 철없는 놈이 세상에 또 있다니. 재영은 느리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다듬었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도 털어냈다. 와중에도 통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재영은 어쩔 수 없이 호정의 집 앞에 서서 담배에 불을 지피고 호정의 번호를 눌렀다. 당연히 통화 중이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재영은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글대는 빛을 따라 담배 연기가 먼저 솟았다. 담배는 입에 물지 않았다. 그저 옅게 날리는 비바람을 타고 재가 날릴 수 있게 했다. 통화가 길어질수록 호정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재영은 뒤돌아 창문 너머 있을 호정의 모습을 상상했다. 바닥에는 입에 대지도 않고 자멸한 담배꽁초가 벌써 몇 개째 떨어져 있었다.

“우리 호정이 쉬게 해주려면 폰을 없애야겠네.”

그날 밤, 재영은 밤새 자신의 옆에 누운 호정을 지켜보았다. 호정의 반듯하고 동그란 이마에서 콧대를 지나 동그랗고 분명한 선을 가진 입술을 쳐다볼 땐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나중엔 본인이 눈을 깜박이긴 했었나 궁금해질 정도였다. 하나하나 모두 만져보고 싶었다. 주물대고 아프게 찔러 보고 싶기도 했다.

재영은 잠든 호정을 보다가 잠시 자신의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별채에 있던 CCTV 중 침실에 있는 CCTV를 제거했다. 거추장스러운 설치물을 없애게 해준 데는 호정의 도움이 컸다. 다훈은 재영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처음엔 의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졸업식 날 호정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후로는 단단하던 경계가 급격히 풀어진 듯했다. 재영은 아빠가 그런 식의 망상을 자주 하는 데다, 불필요한 기대 역시 그만큼이나 자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자신에게 그만 속아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빠와 엄마는 안타깝게도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악귀를 낳은 부모의 죄란 무지와 회피가 아닐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비록 침실뿐이었지만 별채에서 가장 싫었던 CCTV를 없애게 해준 호정이 더욱 마음에 든 건 당연했다. 전교 꼴등만 도맡아 했는데도 보면 볼수록 기특한 구석이 있었다. 멍청함도 짜증 나지 않았다. 폰을 잃어버려도 의심 한 번 없이 시무룩한 얼굴로 넘기는 그만의 담대함조차 신기하기만 할 뿐 밉지 않았다.

재영에게 호정은 신기한 존재였다. 제 뜻대로 그대로 따라오는 것 같다가도 돌아보면 제멋대로 그어진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따금 자신의 처지도 모른 채 꼴 같지도 않은 동정의 눈길로 재영을 바라보기도 했다. 호정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재영은 마음속 깊이 솟구치는 성욕을 느꼈다. 더욱 가련하고 불우한 자신의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고 싶었다. 호정이 자신을 더욱 안쓰럽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는 눈길로 동정하길 바라기도 했다.

잠든 호정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달빛의 그림자가 졌다. 달은 아주 촘촘하게 속눈썹 사이를 메우고 그 아래 검은 그림자를 펼쳤다. 붉고 오묘한 빛을 내던 호정의 눈 밑이 가려졌다. 재영은 그 색이 가려진 것에 안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강제로 호정을 안았을 테고, 공들인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을 테니까.

재영은 손을 뻗어 호정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겼다. 자신과 같은 향을 두르고 같은 옷을 입고 누운 호정의 모습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할 수 있다면 호정의 살갗마다 잇자국을 내 하나하나 뜯어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재영은 어쩌면 평범한 인간들이 느낀다던 행복이 이런 것과 흡사한 게 아닐까 상상했다.

“지금 네가 누운 그 자리에 정화가 있었다? 호정아.”

좋다고 여기 올 때는 언제고 나중에는 울며불며 집에 돌려보내 달라고 하더라.

“너는 건방지게 그러지 않을 거지?”

호정의 머리카락이 다시 앞으로 흘러내렸다. 재영은 피식 웃으며 다시 호정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었다. 음식에 곁들인 음료수에 약을 넣었더니 호정은 다시 죽은 사람처럼 깊게 잠들어 깨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에는 토하지 않았으니 나름의 발전은 있은 셈이었다. 재영은 호정의 볼을 쓰다듬고 매끈한 볼을 지나 마르고 하얀 목을 더듬었다. 손을 길게 늘이면 한 손에 이 목을 다 담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치의와의 면담이 아침에 급하게 변경되었다. 오후 약속을 오전으로 변경해도 되겠냐는 연락에 재영은 미칠 듯한 짜증을 느꼈다. 총기가 허락된 나라였다면 당장 주치의의 얼굴에 수십 발의 총알을 쏘아댔을 것이다. 자신이 진짜 그렇게 했다 해도 그건 마땅히 정당방위여야 했다. 자신과 한 약속을 변경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네. 어쩔 수 없죠. 선생님, 괜찮습니다.”

재영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주치의가 시간을 이야기하는 음성도 듣기 싫어 윤 비서의 귀에 폰을 넘기고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까닥까닥 의자가 반동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윤 비서는 주치의가 하는 말을 모두 기억해 그대로 옮겼다. 동시에 어제 미리 준비해둔 호정의 새 폰을 내밀었다. 재영은 건네받은 폰을 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니 여전히 깊게 잠든 호정이 보였다. 호정의 옆에 새 폰을 놓아두고 잠든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게 언제든 집에 돌아왔을 때 호정이 이 자세로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다면 꽤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차분하고 단정한 자세로. 자신과 같은 향을 두르고, 같은 옷을 입은 채로. 그렇게 누가 봐도 자신의 소유인 채로.

재영은 차 키를 챙겨 윤 비서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운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분으로 운전하면 누구의 차든 뒤에서 박아버릴 게 분명했다. 인간이야 널리고 널린 것이니 죽어도 상관없지만, 사고로 일정이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상담을 끝내고 최대한 빨리 이 집에 돌아오고 싶었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비정상인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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