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함정 (4/22)

3. 함정

모든 일이 빠르게 마물러졌다. 엄마는 재영을 볼 때마다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엄마의 떨리는 손과 불안한 눈, 위축된 등을 볼 때마다 한재영 앞에서 내 위치가 가진 부채감을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아빠는 수술 후 몸을 회복했다. 오한으로 몸을 떨지도 않았고 혈액이 부족해 발작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만, 아직도 의식은 깨어나지 못했다.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도리어 내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의 가슴에 붙은 심박동기와 코에 고정한 호흡기가 내 목을 조이고 양팔과 다리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묶는 듯했다.

아빠는 숨을 붙이고 있을 남은 생 동안은 아마 평생 병원에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고는 운전자였던 아빠가 음주운전 상태라 보험도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전의 음주운전 경력까지 보태진 사망사고였다. 이기적인 나는 아빠가 깨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아빠를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빌어먹을 술버릇 덕에 산송장이 되었다는 모난 말을 하며 염치가 있다면 진즉에 죽어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뜬금없이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어느 쪽이 엄마의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나 또한 아빠가 죽지 않아 다행인 건지, 더는 사고 치지 않고 평생 이 병원에 붙어 있어 다행인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으니까. 병원만 가면 속이 답답했다.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내가 불안해할 때마다, 재영은 그런 내 옆을 지켰다. 합의금을 비롯해 사건과 관련한 모든 일은 재영이 나를 대신해 해결해주었다. 치료비와 입원비는 병원이 자신의 재단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결국 불안하던 두 눈을 꾹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잘난 동창 둔 덕 좀 본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름 내 부담을 덜어주려는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재영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전부터 나와는 결이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낯선 일 앞에 바보처럼 우두커니 선 나와 달리 재영은 모든 일을 하나같이 매끄럽게 해결해주었다.

내가 스물이었으니 재영도 고작 스무 살이었다. 재영에게도 이런 일련의 일들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재영은 무던하고 덤덤한 말투로 나를 먼저 달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걱정했던 일이 이미 말끔히 해결된 뒤였다.

“호정아. 큰일 아니야. 게다가 넌 뭐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무덤덤하게 말하는 재영을 보고 있으면, 마음을 복잡하게 하던 일련의 일들이 별 게 아닌 게 되는 기분이었다. 내 불안을 잠식하게 해주는 건 안정감이었고, 스물의 나에게 모든 안정감의 근원은 재영이 되었다.

영국으로 가는 짐 정리도 무난했다. 입학 관련 서류 또한 내가 준비할 건 없었다. 모두 재영이 준비해준 덕에 내가 더 신경 쓸 일도 없었다. 외국에 가기 전 입영을 몇 년 뒤로 미루는 절차만 정리하면 되었고, 나머지 일정 또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대학교 사진을 보여주는 재영을 보면서 맞장구를 치거나 웃는 일 정도였다. 현실과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답답하던 마음이 나아졌다.

아빠의 사고 후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던 엄마가 점차 진정되어 가고, 아빠의 사고에 대한 충격도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할 때쯤 즉, 출국을 두 달 정도 앞둔 초여름이 되어서야, 못된 나는 뒤늦게 민재를 떠올렸다. 내 일만 생각하느라 민재도, 민재의 부모님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영의 방에서 늦잠을 자고 창밖을 내다보다 문득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게 실감났다. 민재와 함께 계획했던 수많은 스물의 계획에는 단연 여름에 하려던 일들이 많았었다. 영국에 가기 전에는 민재의 부모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재를 보낸 후로, 폰도 잃어버렸고 새 폰은 재영이 마련해준 탓에 번호도 이미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 핑계로 여태 연락 한 번 드리지 못했다는 게 죄스러웠다.

민재 집에 가기 위해 책상 위에 있던 지갑을 챙겼다. 방을 나서려는데 침대에 누워 책을 읽던 재영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 가게?”

“아무래도 가기 전에 민재 부모님은 뵙고 가야 할 거 같아. 폰 잃어버린 후로, 연락도 못 드렸었고.”

“아… 민재 집, 우리 집이랑 가까웠지?”

“어. 혼자 갔다 올게.”

재영은 보던 책을 덮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입가에 스민 잔잔한 미소에 나도 괜히 웃음이 났다.

“같이 가.”

“나 혼자 간다니까.”

“데려다줄게. 가까우니까.”

“왜, 나 혼자 간다니까 불안해?”

재영은 자신의 지갑을 챙기더니 그 지갑의 모서리로 내 볼을 살짝 찔렀다.

“그래, 불안하니까 나 꼭 데려가라.”

“너. 그거 분리불안인데. 너 은근 나 좋아해.”

“은근 아니고, 대놓고인데.”

재영은 내 팔꿈치를 잡아 나를 앞장서게 했다.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라, 차를 타지 않으려고 했는데 재영이 막무가내로 차에 나를 태웠다.

“차 안 타고 갈 거면, 너 데려다준다고도 안 했어.”

“이런 건 진짜 아무리 봐도 여자 꼬시는 남자 맞는데.”

“도대체 네가 생각하는 여자 꼬시는 남자들은 뭘 어떻게 하는데.”

재영은 내가 이 말을 하며 놀릴 때마다 도대체 여자를 꼬시는 남자의 모습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도 마땅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냥 재영이 하는 모든 행동이 그랬다.

“그냥, 너. 그냥 너야.”

“그럼 난 억울하지.”

옆자리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거는 재영을 쳐다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괜히 진짜 꼬심을 당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라, 얼굴이 화끈해졌다. 재영이 보지 못하게 반대편 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이럴 때마다 미래에 재영이 만나게 될 여자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재영은 어떤 여자를 보면 설레는지, 그 여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이라는 걸 하긴 하는지, 말은 어떤 식으로 붙이는지. 친구인 나에게도 이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니 더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지극정성일까.

“재영아.”

“응.”

“…아니야.”

재영은 더 묻지 않고 그저 나를 슬쩍 보기만 했다.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만히 재영의 손을 느끼다가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영은 차고에서 부드럽게 차를 빼 골목을 돌았다. 동네의 슈퍼에 들러 약소하게나마 과일바구니를 샀다. 빈손으로 가자니 아무래도 손이 밋밋해 민망했다.

과일바구니를 들고 차에 타자, 막 노래를 틀려던 재영이 내게 폰을 내밀었다. 내 취향에 맞는 노래를 틀어달라는 의미였다. 재영은 노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당연히 좋아하는 가수도, 자주 듣는 노래나 좋아하는 노래도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했을 때, 재영은 두 눈을 깜박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공부만 해서 노래도 잘 안 들었나, 생각하며 재영의 폰에 내가 듣는 플레이리스트를 똑같이 채워주었더니, 그날 이후로 재영은 내가 넣어주는 노래들만 듣고 다녔다.

차에 타면 언제나 이전에 내가 튼 노래가 그대로 재생됐다. 지금처럼 내가 새 노래로 채워주지 않으면 언제고 죽을 때까지 내가 이전에 추천한 노래만 들을 수도 있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노래 지겹지 않았어? 난 이제 안 들어.”

“그래? 그럼 리스트에서 빼줘.”

“응.”

민재의 집과 재영의 집이 가까워 다행이었다. 아마 운전하는 재영의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면, 나도 모르게 바보처럼 말을 더듬거렸을지 몰랐다.

민재의 집 앞에 섰다. 민재가 무턱대고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래도 이전에는 몇 달에 한 번꼴로는 놀러 가던 곳이었다. 민재가 죽은 후 홀로 서자니 이 집도 이 집의 앞에 선 내 모습도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현관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재영을 돌아봤다. 재영은 골목에 차를 대고 나를 보고 있었다. 같이 들어가자고 했더니, 재영은 괜히 어색할 것 같다고 답했다. 장례식장에서 민재의 아버지가 재영의 눈치를 본다던 민재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재영을 더 조를 수 없었다.

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르고 기다렸다. 곧 상주해 일하는 아주머니의 익숙한 목소리가 나왔다.

“네. 저 민재 친구 이호정이에요. 어머니 집에 계시면 뵙고 싶어서요.”

“어머. 호정 학생. 오랜만이다, 그죠? 잠시만. 문 열어줄게요.”

인터폰 너머 아주머니의 목소리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민재의 집으로 들어서며 다시 차에 앉은 재영을 돌아보았다. 재영은 내가 아닌 폰을 보고 있었다. 방금 내가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한 노래들의 제목을 천천히 훑고 있는 것 같았다. 폰의 화면을 스치는 재영의 손이 부드러웠다. 좀 전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덩달아 생각났다.

집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마당에 나온 아주머니가 나를 먼저 반겼다. 이전에는 그렇게 찾아오는 친구들이 많더니, 이제는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다며 아주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아휴. 아니야. 오늘 호정 학생이 와서 사모님이 기뻐할 거예요.”

아주머니는 내 팔을 잡고 끌었다. 엉거주춤 끌려가며 민재와 놀던 마당과 그 안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괜히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야. 이호정. 너 나 없이 어떻게 살래?’

당장이라도 민재가 슬리퍼를 끌며 달려 나올 것 같았다. 어깨를 감싸고 내 어깨에 볼을 붙인 채로 그때처럼 낄낄대며 아이 같은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러게…….”

너 없이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또 미련하게 살아진다.

하고픈 말을 꾹 삼켰다. 눈물이 나올까 입술 위를 손등으로 눌렀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멍하니 창가에 서 있던 민재 어머니는 인기척이 들리자 눈시울을 붉히며 다가왔다. 어머니는 나를 꼭 안고 다정하게 등을 쓸었다.

“민재 가고 우리 집에 온 첫 친구가 누굴까 했는데, 역시 호정이 너구나.”

“죄송해요. 폰을 잃어버렸는데 번호도 바뀌는 바람에.”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로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냐. 와준 게 더 커. 우리 민재가 저기서 오늘 얼마나 기뻐할 거야… 가기 전에도 친구 이름은 늘 호정이, 호정이… 우리 호정이가, 오늘은 이랬어, 저랬어. 그러던 애인데. 네 이름만 입에 달고 살던 녀석이었잖아.”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하던 민재가 떠오른 듯 미소 지었다.

“애가 겉보기에는 친구가 많은 것 같아도…….”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잇던 어머니가 내 손에 들린 과일바구니를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어머니는 곧 얼굴에 스며있던 미소를 천천히 거두고 눈썹을 달싹거렸다.

“호정아. 우리 집에 오면서 새삼스럽게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

“아.”

손에 들린 과일바구니를 엉거주춤 내밀었다.

“저 어머니랑 아버지 덕분에 고등학교 나왔잖아요. 어쩌다 보니 영국에 있는 대학으로 가게 됐는데… 감사 인사는 꼭 드리고 싶어서요. 아직 마음 안 좋으실 텐데…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야. 기특하고 예쁘기만 한데.”

어머니는 과일바구니를 바닥에 내리고 다시 나를 안았다.

“그렇지 않아도 민재 사진이 많이 남아서 고민 중이었어.”

민재는 평소에도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운동회나 학교 축제 때는 못 해도 백 장 이상은 찍어대던 놈이었다. 늘 신상품 중 가장 비싼 카메라를 들고 와 우쭐대던 민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 사진 실력에 이 카메라는 명백한 사치.”라고 말하면 민재는 나를 노려보며 “내 사치스러운 카메라에 담기는 네 얼굴이 소박한 거다.”라며 나를 놀렸었다.

민재 어머니는 민재의 방이 있는 2층으로 나를 안내했다. 앞서 계단을 올라가는 어머니의 등이 이전보다 더 말라보였다.

“식사는 잘하고 계시죠?”

어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눈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하나 있던 아들이 죽었는데도 밥이 들어가… 신기하지?”

“아뇨. 이전보다 살이 빠지신 거 같아서… 당연히 잘 드셔야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마다 민재의 숨이 겹겹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민재의 방은 민재가 있었을 때와 달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방에는 여전히 민재의 짐이 많이 남아 있었다. 수십 개의 카메라와 앨범이 한 벽면을 채운 것도 그대로였다.

오토바이를 좋아하던 만큼 민재는 새로운 디지털 기기나 제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 민재가 유일하게 아날로그를 지향하던 게 바로 사진 인화였다. 민재는 자신이 찍은 사진은 언제나 인화해 앨범에 꽂아 보관했다. 나와 보낸 시간이 많다 보니 당연히 민재가 찍은 사진 앨범에도 내가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민재가 호정이한테 참 많이 고마워했었어.”

“네.”

“진짜 자기 좋아해 주는 친구는 너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

“아니에요. 민재 인기 많았어요. 친구들도 다 민재 좋아했었고…….”

민재 어머니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던 앨범 몇 개를 내려 내밀었다. 눈물로 아직도 두 눈이 빨갰지만, 나름 괜찮아 보이려 노력 중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흐릿한 미소로 앨범 등을 쓰다듬었다.

“사람들이 죽은 사람 사진은 다 태우는 거라는 거야… 그래야 좋은 곳으로 간다고. 지들은 자기 새끼 죽으면 그 사진 다 태울 수 있을 거 같아? 난 절대 못 태워. 못 태우겠더라. 호정아. 이거라도 좀 봐야 살아지겠는 거야.”

“네. 이해해요, 어머니.”

“호정이 너도 몇 개 가져갈래? 네 사진이 유독 많았어.”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 말씀대로 이 사진을 가져가는 게 어머니를 좀 더 편하게 해드리는 방법인 것 같았다. 손에 들린 앨범이 꽤 무거웠다. 민재의 방 창가 앞에 놓인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책장에서 앨범 서너 개를 더 꺼내 나를 따라 소파로 왔다.

창가로 해가 스몄다.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재영의 은빛 차가 보였다. 민재의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게 지겨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늦어질 것 같다고 연락하려 폰을 꺼내는데 어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주머니에 폰을 넣었다.

“중학교 때 우리 민재가 처음 카메라를 샀잖아.”

“네. 기억나요.”

민재는 몇 날 며칠 새로 산 카메라를 들고 내 뒤통수를 찍어댔었다. 나중에는 쉴 새 없이 울리는 셔터 소리에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얼마나 좋은 카메라인지 아냐며 묻지도 않은 사양을 줄줄 읊어대던 그 날의 민재 모습이 선명했다.

“그것도 호정이 너 때문에 사야 한다고 며칠을 조르는 통에 사준 거야.”

“저요?”

어머니는 앨범 하나를 펼쳐 내게 내밀었다. 앨범 내지에는 민재와 나의 중학교 사진이 빼곡했다. 사진은 주로 운동회나 소풍처럼 특별한 날들이 많았다. 중간중간 민재가 카메라를 들고 온 날, 친구들과 반에서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민재 축구하다 다쳐서 일주일 동안 네가 데려다준 적 있잖아. 그때 네가 이런 거 다 사진으로 남겨 보관해야 증거가 된다고 했다며. 그 핑계로 어찌나 카메라를 사달라고 조르는지. 민재 아빠나 나나, 어디 민재 이길 수나 있어? 하여간 뭐 사고 싶을 때마다 어찌나 잔머리를 잘 굴리는지.”

“민재답네요.”

웃음이 났다.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민재의 사진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민재가 친구들과 축구하다 다리를 접질린 탓에 일주일이 넘게 내가 민재를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업는 건 무거워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어깨 한쪽만 내어주면 된다기에 그러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민재는 내 어깨에 자기 볼을 찰싹 붙인 채로 일주일 동안 내게 기대 등하교를 했다. 나중에 크면 자기 등골 빼먹을 기회를 주겠다던 민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곰탕이 되도록 우려먹으라던 말이 떠올라 작게 웃고 말았다.

“민재… 보고 싶어요.”

최대한 편안하게 말하려 했는데도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어깨를 떨며 한숨 쉬었다.

“…응. 일이 있어서 그 며칠, 민재 아빠가 애를 좀 혼냈었거든… 그게 마지막일 줄 누가 알았겠어. 민재 아빠는 아직도 밤만 되면 울어. 다 자기 탓 같대.”

앨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두 팔을 벌렸다. 어머니의 마른 어깨를 안아드렸다. 내가 진짜 민재는 되어드릴 수 없겠지만, 아들의 친구로서 때가 되면 인사도 드리고 찾아는 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직도 면역이 되지 않았는지 민재 생각을 오래 한 것만으로 눈물이 났다. 앨범 곳곳에 담긴 민재의 웃음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사진 몇 장 챙겨갈게요. 민재 보고 싶을 때마다 보고… 저 어머니랑 아버지 뵙고 싶을 때마다 여기 와도 될까요?”

“그래 주면 우리가 고맙지. 앨범은 몇 개 그냥 통째로 가져가. 그래도 돼.”

“네.”

어머니는 내 품에 안긴 채로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몸이 축 늘어진 것도 모자라 어깨에 닿은 어머니의 턱과 볼에도 힘이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이제 곧 영국에 가게 되면 자주 찾아뵐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꼭 민재 집에 들러 안부를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민재가 내게 해준 것들과 그 고마움은 절대 잊어선 안 될 것들이었다. 민재를 떠올리자 병원에 누운 아빠와 그 옆에서 한숨을 내쉬던 엄마가 연이어 생각났다.

품에 앨범 두 개를 안고 대문을 나왔다. 차 안에서 폰을 보고 있던 재영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활짝 웃으며 앨범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을 흔들었다. 재영은 차에 시동을 걸다가 문득 내 손에 들린 앨범에 시선을 고정했다. 차에 올라타자 차 안에서 재영 특유의 묵직한 나무 향이 났다. 향수를 더 뿌린 걸까 생각하는 사이 재영이 손을 뻗어 내 손에 들린 앨범을 가져갔다.

“사진?”

“어. 민재가 사진 찍는 걸 좋아했었는데. 어머니가 가져가도 된다고 하셔서.”

“그래? 나도 봐도 돼?”

“어. 되지.”

재영은 차를 채우던 노래를 끄고 앨범을 펼쳤다. 중학교 때의 내 얼굴과 민재의 얼굴이 첫 장에 나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왜?”

재영이 고개를 들고 물끄러미 나를 보며 물었다.

“웃기잖아. 나 중딩 때 모습.”

“난 그냥 신기한데. 진짜 너무 그대로라서.”

재영은 내가 나온 사진마다 손가락으로 볼을 꾹꾹 눌러보았다. 어찌나 진지하게 사진을 눌러대는지 사진 속 내가 볼살을 일그러뜨릴 것만 같았다. 내가 가져온 앨범에는 민재 자신의 사진과 풍경을 찍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교 친구들과 내 사진이었다. 민재 어머니의 말씀대로 민재가 찍은 인물 사진의 대다수는 나였다. 가장 붙어 있는 시간이 길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민재 사진 찍는 거 좋아한 거 맞아?”

“응. 이런 앨범이 민재 방에 한 트럭이야.”

“음…….”

재영은 끝말을 줄이며 나를 흘깃 쳐다봤다.

“알아. 민재 사진 실력은 별로야. 그냥 찍는 거 좋아하고 새 기기 사는 걸 좋아했어서 그래. 애처럼 그런 욕심이 좀 있었어.”

민재의 그런 철없는 모습을 좋아했었다.

“그런 게 귀여웠어.”

친구지만 민재를 귀여운 동생처럼 느낀 데는 그런 민재의 해맑음 덕도 있었다. 재영은 앨범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평소처럼 쓰다듬어주거나 머리카락을 흩뜨릴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재영은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꾹 누르듯 덮고만 있었다. 이내 손이 내려가고 앨범이 다시 내 허벅지 위로 올려졌다.

“민재. 사진 찍는 게 아니라 널 찍는 걸 좋아했던 게 아닐까?”

“어?”

“네 얼굴밖에 없잖아. 거기에.”

앨범을 다시 펼쳤다. 아무 면이나 펼쳐졌는데도 소풍 때 민재와 내가 웃고 있는 사진이 나왔다. 다시 앨범을 덮고 재영을 쳐다보았다.

“내가 옆에 제일 자주 있어서 그럴걸.”

“호정아. 넌 사진 찍는 거 좋아해?”

재영은 말과 동시에 차를 움직였다. 차는 부드럽게 코너를 돌았다. 집으로 가는 길과 반대 방향이었다.

“난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기억하고 싶은 일이나 좋은 일이 생기면 가끔 먼저 찍기도 하는데, 막 나서서 찍는 편은 또 아니야.”

앨범 위에 손을 얹고 어루만졌다. 민재의 추억이 스멀스멀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민재가 내 사진으로 자신의 학창 시절을 기록했듯 내게도 학창 시절은 민재와의 기억뿐이었다. 아마,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친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차 스피커를 타고 노래가 흘러나왔다. 좀 전에 내가 채워둔 플레이리스트라 노래는 마치 내 폰으로 튼 것처럼 자연스럽게 차 안을 채웠다. 흥얼대며 노래를 부르다, 운전하는 재영을 몰래 훔쳐보았다. 재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채 한 팔을 창틀에 의지해 있었다. 검지를 입술 사이에 걸친 모습이 마치 그림 같았다.

“넌?”

“나?”

“넌 취미 같은 거 없어?”

“음…….”

재영은 머뭇거리다 미간을 살짝 좁혔다. 공부가 취미라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그런 어색한 생각을 하는 사이 재영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나는 영상 찍는 거.”

“영상? 진짜? 나 한 번도 너 카메라 들고 있는 거 못 본 거 같은데.”

“다음에 보여줄게. 나는 사진보다는 움직이는 게 좋아서.”

“신기하다.”

영상도 찍고, 그걸 편집도 할 수 있는 걸까 생각했다. 공부도 잘하고 머리도 좋으니까 아마 지금은 못 한다 해도 금세 배우고 또 금방 수준급으로 잘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새 재영의 차는 익숙한 도로를 벗어나 동네의 입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집에 가는 거 아니야?”

“아. 나온 김에 밖에서 저녁 사 먹고 갈가 해서. 아까 너 탔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까먹었었나 봐. 미안.”

“네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나 민망해.”

재영이 픽, 웃더니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손을 내려 핸들을 바로 쥐었다. 동네를 벗어났다. 이면도로가 아닌 넓은 도로로 빠져나오자 갑갑하던 마음이 풀린 것처럼 한숨이 터졌다. 재영은 한 손으로 매끄럽게 차를 몰았다.

재영의 길고 흰 손을 보며 침을 삼켰다. 담배를 완전히 끊은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민재의 장례식장에서는 이제 피우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줄였다는 의미이지 끊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 앞에선 연기를 싫어하는 나를 배려해 피우지 않았지만, 밤에 마당에 나갈 때나 이따금 재영이 혼자 있는 서재에 들어가면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재영아.”

“응?”

“나도…….”

“어.”

잠시 신호를 받고 정차한 사이, 재영이 나를 돌아보았다. 차를 채운 노랫소리가 흐릿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부터 시작해 머리에 든 모든 생각이 꼬이고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상체를 뒤로 물렀다. 재영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붉던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나도, 라고 했잖아.”

“아. 어. 나도, 맞다. 나도… 나도… 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오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재영이 손가락으로 내 볼을 툭 건드렸다. 앞을 보고 있는데도 용케 한 번에 내 볼을 찾은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나도 담배 피울까? 네가 피우는 그거.”

“어?”

재영이 표정을 굳히고 나를 돌아봤다. 운전 중이라 재영의 양 볼을 잡아 다시 앞을 향하게 했지만, 고개는 소득도 없이 금세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야. 한재영. 앞 봐. 위험해.”

“아니,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나 해서.”

잠시 목을 축였다. 목을 가다듬고 나름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나도 담배 피울까 한다고. 네가 피우는 그거랑 같은 거로.”

“담배…….”

재영은 차 중앙의 콘솔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 이미 이 몇 개가 빠진 담뱃갑이 있었다. 재영은 손을 뻗어 담뱃갑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담배를 피우는 재영의 모습이 이유 없이 남자답고 멋있어 보여서 나도 피워볼까 생각은 했지만, 오늘 당장 피울 생각은 없었다. 침만 꼴깍 삼키며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재영은 내 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멈추지 않았다. 차가 정차할 때마다 나를 돌아보며 내 얼굴을 살피다가 웃고, 다시 차를 운전해 가다가 웃길 반복했다. 아무리 봐도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재영이 준 담배를 다시 통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왜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진 건데? 연기만 맡아도 기침했었으면서.”

재영은 호텔 입구에 차를 세우고 물었다. 직원이 달려와 재영에게서 차 키를 받아 갔다. 재영을 따라 차에서 내리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네가 하는 걸 해보고 싶어서. 그냥 네가 담배 피우는 모습이 꽤 멋들어져서. 갖가지 이유가 생각났는데 막상 입으로 뱉을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너도 피우니까.”

“내가 피우는 거랑 네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진 거랑은 전혀 연관이 없어. 호정아.”

재영은 차 뒤로 걸어와 내 옆에 섰다. 곧이어 호텔 입구를 가리켰다. “예전에 한 번 와봤는데, 맛있었어.”라고 하는 말이 평소처럼 다정했다. 얘는 왜 별거 아닌 말에도 이렇게 다정함을 뚝뚝 묻혀서 나를 괴롭게 하는 걸까. 우물대는 입술을 가리고 재영의 옆에 섰다. 쭈뼛거리는 나를 재영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민재 집 다녀오니까 담배가 당겼어?”

아직도 더 놀릴 게 남았나 싶어 올려보니 재영이 내 주머니에 자신의 담뱃갑을 넣어주고 있었다.

“너 피우고 싶으면 피워. 난 담배 친구 생기는 거 언제든 환영이니까.”

“가르쳐줘.”

“하. 진심이야?”

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진심으로 담배를 배울 생각으로 말한 것인데, 재영이 어색하게 입술을 말았다. 자꾸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또 뭐로 나를 놀리려나 싶어 지레 겁을 먹고 노려보았더니, 재영이 내 양쪽 볼에 손을 얹고 꾹 눌렀다. 입술과 볼이 가운데로 밀렸다. 바보 같은 꼴이 된 것 같아 재영의 팔을 잡아 끌어내렸다. 재영은 내가 자신의 팔을 잡아 내리자 아무런 반항 없이 팔을 아래로 내렸다. 벌겋게 됐을지도 모를 볼을 쓱쓱 문질러댔다.

“호정아. 담배는 어떻게 배우게?”

“뭐, 뒷골목이라도 가서 배우는 거야?”

“그건 아니고.”

재영은 웃는 얼굴로 호텔 로비를 향해 걸어갔다. 재영의 걸음을 따라 두 걸음을 단번에 걸어 그 옆에 섰다. 재영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호텔 로비의 천장을 훑던 재영이 다시 나를 내려 보았다.

“여기 조명이 예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곳에 와 조명 같은 걸 본 적이 없던 나는 의아한 눈으로 재영의 눈이 훑은 곳을 따라 훑었다. 재영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호텔 내부를 살폈다. 로비의 천장부터 바닥의 대리석까지 살펴보던 재영은 내 어깨를 안아 손가락으로 호텔 로비 한 면을 차지한 거대한 통창을 가리켰다.

“조명 색이랑 저기 창틀을 따라 이은 조명이 같은 색이야. 전구색. 붉어서 사납게 보이기도 하는데, 느낌은 주백색보다 훨씬 따뜻하고 고급스러워. 이런 빈티지 호텔에 어울려서 쓴 것 같아. 이런 건 무난해, 원래는.”

“예쁜데…….”

중얼대며 재영을 슬쩍 올려보았다. 재영은 흥미로운 걸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걸 볼 때, 재밌고 관심 있는 일을 할 땐 이런 눈빛을 보이는구나, 생각하니 어른 같게만 느껴지던 재영이 비로소 같은 나이의 친구로 느껴졌다.

“응. 얘넨 저 전구 사이에 레드 다이아몬드를 박았거든. 당연히 진짜는 아니고 위조품이겠지만, 전구색에 붉은빛이 섞여서 나름 그 느낌은 나.”

“다이아몬드도 빨간 게 있어?”

“전 세계에 백 개도 채 안 된대. 저 붉고 작은 게 뭐라고. 한 알에 수십억씩 하니까… 색이 다르면 그만큼 비싸지는 거야.”

재영은 손가락으로 내 눈 밑을 훔쳤다. 속눈썹이라도 떨어져 있었나 생각하며 재영의 손이 스친 눈 밑을 빠르게 비볐다.

“처음 들어.”

“관심사가 다르니까. 그거 알아? 저 빛 때문에 지금 네 얼굴이 붉어.”

재영은 몰랐겠지만, 그건 빛 때문이 아니었다. 재영이 내 한쪽 어깨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품에 안긴 꼴 같아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 탓이었다.

“담배, 배우기 전에 하나 알아둘 게 있는데. 꽤 중요한 거야. 그거 듣고도 피울 거면 그땐 내가 가르쳐 줄 거고.”

“…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재가 낀 것처럼 목이 답답하고 안이 간지러웠다. 재영은 어느덧 내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내리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재영의 옆에 섰다. 금색 엘리베이터 문에 우리 둘의 모습이 비쳤다.

아빠의 합의금과 병원비에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엄마와 상의해 집을 처분했다. 새로 이사할 곳은 같은 구보암동이지만, 보암동의 외곽 쪽에 자리한 구축 아파트였다. 집은 나를 대신해 재영이 알아봐 주었다. 우리 예산에 맞는 집을 알아봐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인데 재영은 이사한 집의 주인과도 인연이 있다고 했다.

재영 덕분에 전세금도 낮출 수 있었다. 전세금을 내고 남은 돈은 재영에게 모두 주려 했다. 재영은 잠시 내가 내민 통장을 바라보다 다시 내 주머니에 넣었다.

표정이 언뜻 보기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때, 재영은 처음으로 내게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물었었다. “너, 민재가 이랬어도 끝까지 이렇게 돌려줬을 거야?” 질문은 간단했지만 내게는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 엘리베이터에 비친 재영의 얼굴이 그날과 같았다.

“저기. 한재영.”

“응?”

재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부르긴 했지만 무슨 말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왜?”

재영이 재차 물었다. 다시 온화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재영의 주머니에 좀 전 재영이 준 담배를 다시 넣었다.

“이거 배우기 전에 알아둬야 한다는 거. 그게 뭔데?”

“…….”

재영의 손이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내가 다시 돌려준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사람도,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사람도 우리 둘뿐이었다. 재영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3층 버튼을 눌렀다. 금방 답해줄 줄 알았는데, 재영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마냥 잘생긴 재벌집 범생이인 줄만 알았다. 그래서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던 재영과 만났을 땐 더욱 놀랐었다. 처음 제대로 말을 섞던 그 날처럼 한없이 다정하게 굴다가도, 어느 순간 표정을 굳히면 지금처럼 무서워 보였다. 아무런 표정 없이 있는 재영을 보면 괜히 어디 화가 났나 싶어 눈치가 보였다. 웃으면 분명 따뜻한 얼굴인데, 이따금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읽는 얼굴을 보면 내 생각과 달리 차가웠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3층에 도착했다. 내가 먼저 내렸다. 재영이 데려온 곳은 호텔 안에 있는 일식당이었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은 재영을 보더니 이름도 묻지 않고 내부의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아까 너 민재 집에 있을 때, 예약했거든.”

“아… 내가 거기 너무 오래있었지?”

밖에서 기다리던 재영에게 연락 한 통 남기지 못한 게 그제야 생각났다. 재영은 빙긋 웃더니 직원이 내민 메뉴판 두 개를 한 손에 잡아 그중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아니. 그다지 오래는 아니었어.”

재영은 직원이 내민 메뉴판을 익숙한 자세로 훑었다. 어떤 걸 먹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같은 거 먹을래?”라고 묻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재영을 보고 있으면 하나하나 전부 배울 게 많았다. 사소한 배려나 몸에 밴 매너 같은 것들은 내가 언제 흉내나 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재영은 내가 한숨을 내쉬자 살짝 표정을 굳히고 내 얼굴을 살폈다.

“일식 안 좋아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내가 가릴 처지도 아니고.”

“가릴 처지였으면 가렸을 거란 소리야?”

재영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날 보며 물었다.

“참나. 나 일식 환장한다. 됐냐?”

재영은 옅게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입까지 가리며 크게 웃어댔다. 물티슈로 손을 닦는 와중에 재영이 먼저 내 잔을 채워주었다. 재영은 내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천천히 보다가 자신 앞에 놓인 물티슈를 펼쳤다.

“담배 피우면 여자들이 싫어해.”

“꼭 알아둬야 한다는 게 그거야?”

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저 이유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을 걸 떠올리니 그 순수함에 웃음이 났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담배 피우는 여자들도 피우는 남자는 싫어한대.”

“근데 왜 피우려고?”

“말했잖아. 너도 피우니까 나도 피우고 싶다고.”

“그건 좀…….”

재영이 또다시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고 느낄 때마다 재영은 저렇게 고개를 저었다. 철없는 사촌 동생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 필수로 따라붙었다.

“그건 좀 내가 오해할 수 있는 말인데.”

“오해? 무슨 오해?”

마른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재영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룸의 문이 열리고 직원이 이동식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룸의 끝에 트롤리를 세우고 음식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는 직원 덕에 룸 안이 조용해졌다. 재영은 그 후로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재영의 집에 돌아오니 거의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배가 불러 씻기도 전에 침대에 누웠다. 재영은 언제나 차고에서 별채로 곧장 들어왔다. 집에 들어온다고 해서, 또 반대로 집에서 나간다고 해서 본관에 있는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집 같았다.

이전에 졸업식 때는 재영이 아빠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처음 말을 섞던 골목에서 재영이 자신의 아빠와 맞담배도 피운다던 말처럼 어떤 부분에선 우리 집보다 더 유한 부분이 있는 집인 듯했다.

맞담배. 그 골목을 떠올리는 순간, 다시 담배가 떠올랐다. 재영이 주머니에서 지갑과 담배를 꺼내 테이블에 올리고 있었다.

“담배 가르쳐 달라니까.”

응석 부리는 아이처럼 다가가 재영이 테이블에 올린 담배를 쥐었다. 재영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손에 들린 담배를 가져가 입에 물었다. 라이터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맑았다. 재영은 고개를 살짝 숙여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순식간에 내 얼굴을 덮었다.

“호정아. 왜 여자들이 담배 피우는 남자를 싫어하게?”

“연기 때문 아냐?”

매캐한 연기에 뒤로 살짝 물러났다. 재영의 큰 손이 내 허리를 당겨 자신의 앞과 완전히 맞붙게 했다. 나도 모르게 콜록대며 기침을 내뱉었다.

“키스할 때 담배 냄새가 나서 싫어하는 거야.”

“아. 그런 이유라면 괜찮아.”

“괜찮아? 정말?”

재영이 묘하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내 턱을 쓸었다.

“너 담배 피우는 사람이랑 키스해 본 적 없지?”

재영의 물음에 표정을 굳히고 허리를 감싼 손을 밀어냈다.

“진짜인가 보네.”

“씨. 야. 됐어. 줘.”

재영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빼 내 입에 물었다. 겉에서 볼 땐 매캐하기만 하던 연기가 막상 직접적으로 입안으로 들어오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까지 들었다. 매운 정도가 아니었다. 고춧가루를 목에 들이부은 것처럼 잔기침이 났다. 컥컥대며 기침을 해대느라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눈이 빨개지며 덩달아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재영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해볼래? 어떤 맛인가?”

재영이 한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얼굴을 당겼다. 미간을 좁힌 채로 턱을 빼내려 고개를 비틀었다.

“키스라며. 남자끼리?”

“그냥 키스잖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내 말에도 재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끼리 어떻게 그걸 해…….”

꾸역꾸역 짜내듯 말을 뱉었다. 아무리 호기심 때문이라고 한들 남자끼리 키스를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않나. 머리가 복잡해지려 할 때였다.

“호정아. 그게 뭐가 중요해. 그냥 담배 냄새가 어떤가 좀 맡는 것뿐인데.”

재영이 다시 무심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순간 담배 냄새를 맡겠다고 키스를 하는 사람이 있나 생각한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심드렁한 말투였다.

재영의 말대로 단순히 담배 냄새를 맡기 위한 키스일 뿐이라면. 별 게 아닌 게 되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똑똑한 한재영이 하는 말이라 나도 모르게 현혹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머리가 복잡해져 눈을 찌푸렸다. 턱을 움켜쥔 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잡힌 턱이 조금 아렸다. 재영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 내 입에 물린 담배를 빼내 다시 자신의 입술 사이에 꽂았다.

짙고 뽀얀 연기가 재영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와 내 얼굴 위로 끼쳤다. 기침을 하는 것도 괜히 창피하고 불편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기침을 참았다.

“어떤 맛이 나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중에 너랑 키스하게 될 여자도 맡을 맛인데. 나는 그냥 네가 그걸 알고도 피울 건지 궁금해서 그래. 그게 괜찮다면 당장 피워도 문제 될 건 없지.”

“넌… 넌 어땠는데? 담배 피우는 여자랑 키스해 본 적 있어?”

“글쎄. 기억 안 나는데?”

턱이 잡힌 채로 재영의 얼굴과 더욱 가까워졌다. 코앞에서 보는 재영의 얼굴은 거리를 두고 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조금 더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내가 알던 재영의 얼굴과 다르게 느껴졌다. 오한이 드는 것처럼 공기가 차가웠다. 재영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재영 역시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재영의 입에 물린 담배에선 연신 하얀 연기가 솟아났다. 재영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피식 웃은 재영이 내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야! 방에……!”

방바닥에 담배를 던졌다는 것에 놀라 잠시 입술을 벌린 틈이었다. 턱을 잡은 재영의 손이 나를 당겼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물컹한 살덩이가 들어오는 것 같더니 이내 입술 위로 물기가 가득한 재영의 입술이 덮어졌다.

상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키스보다 더한 것을 상상해본 적도 수없이 많았다. 대상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고등학교에 와 정화를 본 후로는 상상 속 대상은 거의 정화였다.

눈만 끔벅끔벅 느리게 움직였다. 재영의 기다란 속눈썹이 보였다. 눈을 감은 재영의 눈이 너무 가까웠다. 저 속눈썹 끝이 내 눈꺼풀을 찌르고 눈을 멀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입술 사이에서 망설이던 재영의 혀가 이내 내 혀 밑을 찌르듯 눌러왔다. “읏.” 소리가 나왔다. 동시에 입이 더 벌어졌다. 재영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잡아당겨 몸을 밀착시켰다. 배에 닿은 재영의 아래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몸은 이미 뻣뻣하게 굳고 머리의 회로도 멈춘 듯했다. 호흡의 박자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재영의 입술이 벌어지는 틈마다 때를 노려 헐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 한재…….”

숨이 버거웠다. 팔꿈치를 세워 재영의 가슴팍을 밀어냈으나, 재영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나를 세게 당겼다. 허리를 움켜쥔 손이 뜨거웠다. 입안을 헤젓는 날렵한 혀는 이와 반대로 차가웠다. 등을 감싼 손과 입안을 들쑤시는 혀의 온도가 달라 어느 곳에 내 온도를 맞춰야 할지도 헷갈렸다.

재영의 혀는 능숙하게 능선을 그리며 내 안을 휘저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재영의 팔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가까스로 팔을 붙든 채로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길 기도했다. 고개가 뒤로 조금씩 꺾어질 때마다 재영은 나머지 손으로 내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덕분에 조금도 물러설 곳이 없었다.

“흐으.”

반항하려면 할 수도 있었다. 발로 걷어차거나, 팔로 세게 밀쳐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정도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단호하게 싫다는 말로도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아… 흐…….”

나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담배를 이유로 키스하는 재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재영은 남자인 나와 키스하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생각하는 사이 입술이 더욱 벌어졌다.

재영의 고개가 우측으로 꺾어졌다. 재영은 내 뒤통수를 붙든 손으로 내 고개를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재영의 입술과 내 입술 사이는 그 어떤 공기도 들어설 수 없게 완전히 밀착되었다. 살결이 쓸리는 소리와 물기가 늘어지며 척척대는 낯뜨거운 소리가 방을 채웠다.

남자와의 키스로도 발기가 된다는 걸, 발기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등을 감싼 재영의 손이 티 안으로 들어오길 순간 바랐다. 말도 안 되게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나와 달리 재영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내 입안을 헤집고 다니는데도 얼굴과 감은 눈이 고요하게만 보였다. 이런 일에 익숙한 걸까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어색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어리숙함까지 고스란히 들키고 있는 기분이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쓸리고 부풀어 아팠다. 재영의 혀가 윗니의 뒤로 들어와 천장을 긁었다. 얼어붙은 몸이 풀리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재영의 팔을 안간힘을 써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팔을 뻗어 재영의 목 뒤를 감쌌다. 껴안다시피 재영의 목을 당겼는데도, 재영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를 달래는 어른처럼 부드럽게 뒤통수에서 손을 내려 내 목 뒤를 문질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아니, 그보다 더.

마음에서 드는 알 수 없는 본능에 이끌려 반쯤 정신을 놓았을 때였다. 내 목을 문지르던 재영의 손이 멀어지고 내 허리를 감싼 재영의 손도 떨어졌다. 밤새 내 입안을 들쑤셔주길, 사납게 나를 몰아세워 주길 바랐던 재영의 혀가 이내 내 윗입술을 살짝 핥고는 떨어졌다.

“봐. 담배 냄새 심하지?”

“어?”

담배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키스하는 동안 담배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따위 걸 신경 쓸 여유도, 여력도 없었다. 젖은 입술을 손으로 가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재영은 나를 스쳐 지나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을 들었다. 좀 전 방에 던진 담배꽁초를 치우려는 것 같았다.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재영이 다가와 내 볼을 검지로 살짝 눌렀다.

“먼저 씻을래?”

“어… 어어…….”

이 키스가 재영에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그저 담배 냄새가 나는 키스가 이렇다는 걸 단순히 알게 해주려는 그 나름의 배려일 뿐이라는 것, 내가 담배를 피울까 하는 염려에서 온 행동일 뿐이라는 것.

그 정도라는 것에 왜 기분이 상하고 우울해진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단순히 첫 키스여서, 처음 해 본 것이라 내가 과한 의미를 부여 중인 걸 수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모든 처음은 의미가 큰 법이니까. 후들대던 다리를 겨우 견고하게 붙들었다. 침대 위에 직원이 개어놓은 새 잠옷을 들고 욕실을 향했다.

“재영아.”

“…응.”

테이블 옆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재영이 내 부름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잠옷을 쥔 채로 그 앞에 다가갔다. 재영은 자세를 고쳐 앉더니 내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여태 재영의 배려와 매너를 잘만 받아먹다가 왜 이번만큼은 재영의 이러한 배려에 속이 뒤틀리고 체한 것처럼 숨이 막히는지.

재영은 여전히 눈에 물음표를 단 채로 날 보고 있었다.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재영은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듯 옅게 웃었다.

“담배. 피울 거야, 나도.”

“그래. 담배 친구는 언제든 환영이니까.”

담배 친구. 친구. 담배. 담배를 나눠 피울 수 있는 친구. 고작 두 단어에 수만 가지 생각이 범벅되었다. 재영은 내민 내 손 위에 담배가 아닌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나보다 큰 손이라 재영이 손을 올리자 그 아래 내 손이 전부 가려졌다.

“근데 오늘은 안 돼. 너 얼굴 빨개, 지금.”

재영의 손 아래 있던 손을 빼 볼을 쓸었다. 담배 연기에 연신 기침을 해댄 덕에 재영의 말대로 볼이 뜨거웠다. 속도 메스꺼웠다.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잡아 돌렸다. 몸이 다시 욕실을 향하게 되었다. 재영은 내 어깨를 아프지 않게 꽉 잡아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재영의 걸음에 맞춰 나도 쭈뼛대며 걷기 시작했다.

“담배는 몸에 안 좋아. 웬만하면 피우지 마. 난 사실 너랑은 담배… 그, 친구 하기 싫거든?”

“왜?”

“그냥.”

재영의 얼굴이 욕실 문의 통유리에 비쳤다. 분명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다분하고 웃음기 또한 잔뜩 묻은 목소리인데 정작 창에 비친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없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려 재영의 얼굴을 찾았다. 창에 비친 얼굴과 달리 정작 진짜 재영은 살포시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자, 우리 호정이 얼른 씻자. 오늘 피곤했잖아.”

재영은 내 어깨를 다잡았다. 욕실로 걸음을 옮기며 재영의 표정을 살폈지만,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씻고 나와 보송한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 재영은 내가 나오자 습기로 훈기가 도는 욕실에 옷을 벗고 들어갔다. 침대 옆 탁상에 놓아두었던 앨범을 펼쳤다. 민재가 찍은 사진을 보니 재영의 말과 민재 어머니의 말이 교차하다 일순간 합쳐졌다.

“미친놈… 너나 나나 친구는 서로뿐이었나 보네.”

민재 장례식장에서 봤던 유상현이 떠오르고 내게 전화해 듣기 싫은 민재의 이야기를 하던 이서정도 떠올랐다. 목젖이 다 보이게 해맑게 웃고 있는 중학생 민재의 얼굴 위를 손으로 덮었다.

“민재야. 도대체 뭐가 맞는 걸까.”

내가 본 너와 타인들이 말하는 너의 모습 중. 내가 믿어야 하는 건 어느 쪽인 걸까.

죽은 민재는 답을 할 수가 없다. 괜히 울컥해 앨범을 덮어 침대 아래에 넣었다. 엄마에게 내일은 병원에 가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재영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너무 잠이 쏟아져 어쩔 수 없었다. 스르륵 감긴 눈을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쓸수록 피곤은 더욱 박차를 가해 나를 덮쳐왔다. 재영이 욕실 문을 열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 모습과 천천히 테이블에 가 담배를 무는 모습까지, 마치 꿈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재영아… 나 먼저 잘게…….”

“푹 자, 호정아.”

재영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문득 줄곧 내 앞에선 담배를 피우지 않더니 오늘은 종일 내 앞에서만 피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잠이 깼다. 코가 막히고 목이 따가웠다. 재영이 설마 방에서 또 담배를 피우는 걸까 생각하며 따가운 목을 더듬을 때였다. 별안간 누군가 내 허리 밑에 손을 넣어 나를 안아 들었다. 침대에 있던 몸이 들어 올려지며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누… 누구…….”

“호정아. 지금 당장 나가야 해.”

재영이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단호했다.

“지금 별채에 불이 났어.”

“…뭐?”

재영의 품에서 내려와 발을 디디고 섰다. 재영은 내 손을 잡아 지하 차고로 연결된 계단으로 나를 먼저 보내려 했다.

“같이… 같이 가.”

“엄마, 아빠한테도 알리고 직원들도 봐야 해. 여긴 방이 많아서 직원 중에 아직 방에서 자는 사람도 있을 거야. 소방관보다 내가 찾는 게 더 빨라.”

침실 뒤로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말을 할수록 목이 따갑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발화점이 도대체 어디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부옇게 연기로 가득 찬 욕실과 침실 뒤로 차오르는 연기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영은 내 어깨를 붙들고 낮게 한숨 쉬었다.

“호정아. 먼저 내려가. 나 진짜 금방 갈게. 다치지 말고. 응?”

“너… 그래도 너랑 같이…….”

“난 괜찮아.”

재영은 물에 적신 수건을 내게 내밀었다. 입과 코를 가리라는 시늉을 하는 재영을 엉거주춤 흉내 냈다. 재영에게 등이 떠밀려 문 앞에 섰다. 차고지로 내려가는 계단은 길었다. 처음 왔을 땐 이것만 올라와도 운동이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을 만큼 여전히 가파른 계단이었다. 이 계단만 올라도 운동이 되겠다던 내 말에 살포시 웃던 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계단의 입구에 서서 하얀 연기로 찬 재영의 방을 쳐다보았다. 재영은 서재 뒤로 연결된 문을 통해 마당에 나간 것 같았다. 별채에 내는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과 경호원들, 상주 도우미들이 지내는 건물이 그 뒤에 있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을 가린 수건을 꼭 쥐고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파른 계단은 아직 연기가 차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옅은 연기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재영이 직원들을 깨워 집 밖으로 내보내고 있는 듯했다.

“미쳤어! 누가 감히 이 집에…….”

“새벽에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내 뒤로 사람 몇이 더 붙는 느낌이 들었다. 떠밀리듯 계단에 발을 디뎠다. 밀집된 사람들의 소리에서도 여전히 재영의 목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한재영…….”

나도 모르게 재영을 찾았다. 목제 지붕이 타며 별채 전체가 이글거렸다. 계단을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영을 두고 나 혼자 이곳을 나갈 순 없었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이 대여섯은 되었다. 그 틈을 비집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뽀얀 연기를 막기 위해 입을 가렸던 수건은 이제 빳빳하게 굳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콜록대며 기침이 났다. 눈도 따가웠다. 얼른 재영이 나타나 내 손을 끌어주길 바랐다.

“한재영!”

나름 크게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연기로 목이 막혀 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갈라지고 뭉개진 목소리로 계단 벽을 짚었을 때였다.

“어… 어어…….”

누군가 내 어깨를 밀치며 거칠게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순간 몸이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아득한 계단 아래로 몸이 떨어졌다. 등과 허리가 엉망으로 계단의 굴곡마다 부딪혔다. 팔을 들어 가까운 벽을 짚으려고 해봤지만,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내가 잡을 곳은 하나도 없었다. 몸은 그대로 차고지 바닥에 떨어졌다. 쿵 소리는 불길이 이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금세 묻혔다.

“으읏… 흐으…….”

벽과 계단에 엉망으로 부딪힌 무릎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다리를 끌어안으려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계단을 통해 내려온 연기가 뿌옇게 눈 앞을 가렸다. 재영이 손에 쥐여주었던 수건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계단에서 구를 때 놓친 듯했다. 목이 아플 정도로 기침을 해댔는데도 기침은 조금도 멎지 않았다. 벅찬 숨만 헐떡이며 바닥을 기었다. 열린 차고지 문 사이로 직원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나가는 뒷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하아.”

누군가의 하품 소리가 들렸다. 불 냄새와 잿가루가 뒤섞인 곳에서 옅고 쌉싸름한 박하 냄새가 났다. 정신이 이미 아득해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누군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더니 젖은 수건을 얼굴 위에 올렸다. 시야가 암흑으로 바뀌고 눈이 감겼다.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삑삑, 하는 일관된 기계 소리만 들렸다. 힘겹게 눈을 뜨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신을 차리자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재영이었다. 그 불길에서 살아 나왔는지 걱정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호정아.”

“엄마…….”

안도의 숨과 함께 엄마를 당겨 안았다.

“엄마!”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 모든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빌어먹을 스물의 악재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불운이 여전히 내 발목을 끌어당기고 있었던 거라는 생각에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내 유일한 친구였던 민재도, 아빠도, 이제는 나를 도와주던 재영의 집마저도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모든 게 내 탓 같아 눈물이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엄마는 천천히 내 등을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등을 달싹거리며 울었더니 명치가 저리고 아팠다. 목에선 자꾸만 신물이 올라와 울 때마다 비릿한 피 맛이 전해졌다.

“재영이는? 재영이 집에 불이 나서.”

일어나려고 몸을 달싹이는데 엄마가 내 품을 벗어나 어깨를 잡았다. 오른쪽 다리가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발바닥부터 허벅지의 중앙까지 연결된 깁스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계단에서 굴렀을 때 무릎이 저렸던 게 기억났다. 생각보다 크게 다친 듯했다.

“재영이는 괜찮아. 자지도 않고 네 옆 지키다가 좀 전에 물 좀 마시겠다고 겨우 일어나 나갔어.”

“하…….”

재영이 괜찮다는 말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내 다리야 얼마가 다치건 상관없었다. 재영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게 내겐 가장 중요했다. 엄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내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수술이 얼마 전에 끝나 아직 물은 안 된다며 안쓰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수술?”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계단에서 구르며 오른쪽 다리의 전방 십자인대가 파열됐다고 했다. 전방 인대가 끊어진 상태로 계단에서 굴렀고 바닥에 몸이 그대로 떨어진 탓에 후방 인대의 모양까지 비틀렸다고 했다. 의식을 차린 후 수술하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하는 게 낫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그날 바로 수술이 됐다고 했다. 온통 낯선 단어들뿐이었지만,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수술이 잘 되었다는 의미 같았다.

“호정아!”

내 이름이 불린 입구로 눈을 돌렸다. 재영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안았다. 아직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상체를 다 일으켜 앉은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구토할 듯 속도 뒤틀렸다. 재영은 나를 안았다가 살짝 떼어내 얼굴을 살폈다.

“나 때문이야. 괜찮아?”

“뭐가 너 때문이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재영은 내 상체를 다시 뒤로 눕혔다. 완전히 누운 자세는 아니었다. 마취를 한 상태에서 완전히 누우면 두통이 지속된다고 했다. 재영은 젖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를 보더니, 엄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수술도 잘 됐고, 금방 회복할 거래요.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이제 점점 나아지고 계시니까.”

내가 입은 환자복과 시트에 적힌 병원 이름을 확인했다. 그제야 내가 누운 이 병원이 아빠가 있는 목경대 병원이라는 걸 눈치챘다. 내일 병원에 가겠다고 엄마에게 남겼던 문자가 생각나 어이없음에 웃음이 났다. 내가 환자로 병원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호정이는 재영이가 잠시 봐줄 수 있어? 아무래도 애 아빠한테 다시 가 봐야겠어. 어제… 좀 안 좋았잖아.”

“…네.”

“아빠 어제 안 좋으셨어?”

엄마는 고개를 젓는 듯하다가 이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열이 들끓는 순간이 있었다. 어제가 그랬던 모양이었다.

엄마가 병실을 나가고 재영은 내 옆에 앉아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내 무릎을 보던 재영이 손을 올려 깁스한 다리에 손을 얹었다. 크고 단단한 손이 깁스 위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종아리까지 내려가던 손을 멈추고 재영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괜히 우리 집에서 지내는 바람에 너까지… 하아…….”

“야. 무슨 소리야, 진짜. 야. 재영아…….”

재영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내 눈을 피했다.

“너, 설마 지금 울어?”

시선을 피해 고개 숙인 재영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애썼다. 재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을 깊게 내쉬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재영의 안색을 살피는데 괜히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 손을 들어 재영의 손목을 당겼다.

“집은 어떻게 됐어?”

“다행히 별채만 탔어.”

재영은 그게 다행이라고 했지만 그건 내게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별채는 재영의 옷들과 책, 재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러면 거기 있던 네 물건들 전부 다 타버린 거야?”

“호정아. 넌 네 생각만 하면 돼. 민재 앨범… 찾으려고 했는데 못 찾았어.”

재영이 표정을 굳혔다. 잠시였지만 또다시 무서운 얼굴이 스쳤다.

“하, 지금 그게 왜 중요해. 그걸 왜 찾고 있었어.”

자기 집이 다 타버린 와중에 내 앨범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에 잠시 화가 났다. 밤에 앨범을 본 후 침대 아래 놓아둔 게 기억났다. 그 혼란에 그걸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네 옷, 책… 설마 네가 영상 찍어둔 거 있다는 것들도 전부 다 없어진 거야?”

재영은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내 볼을 쓰다듬었다. 자칫하면 재영의 손바닥에 볼을 깊숙이 기댈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재영의 손에서 볼을 떼어냈다.

“누가 그런 거래?”

“곧 뉴스에도 나오겠지만… 노숙자래. 우리 집이 한옥이라 동네에서 가장 눈에 띄었대. 직원들은 다 무사해. 네가 다쳐서 문제지만.”

재영은 다시 내 종아리에 얹은 손을 움직였다. 재영은 이제 내 발등에 손을 올리고 잠시 나를 쳐다봤다. 불탄 자신의 집보다 다친 내 다리가 더 안쓰러운 것 같았다. 재영은 잠시 자신의 눈 아래를 훔쳤다. 내 발등을 쓰다듬던 재영의 손이 종아리로 천천히 올라왔다. 깁스를 했는데도 볼록하게 솟아있는 무릎을 지나 다시 허벅지로 오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나저나, 호정아.”

“응.”

재영은 잠시 입술을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수초가 수분으로, 몇 시간처럼 공허하게 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내 앞으로 숙여 가까이했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괜히 키스했던 어제가 생각났다. 덕분에 밋밋하던 볼도 다시 뜨거워졌다.

“이번 주 목요일이 입영 연기 신청 날이라고 했었지?”

“아. 맞다.”

다친 다리를 쳐다봤다. 이 꼴로는 신체검사도 제대로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출국 전에는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미루다 보니 결국 이런 사달이 났다.

“검사 날을 미룰 수도 있나? 하, 어떡하지. 영국 가기 전에는 마무리해야 하는 건데.”

“미루는 게 아니라…….”

재영은 한 손으로 침대를 짚은 채 나머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슬쩍 재영을 올려보았다. 좀 전에 정말 나 때문에 울기라도 했던 건지 재영의 눈도 내 얼굴만큼이나 발갛게 색이 들어있었다.

“너 이거 십자인대 파열이라 아예 면제될 거 같은데.”

이마에 있던 손을 무릎에 얹은 재영이 속삭였다. 십자인대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다친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뻣뻣한 깁스로 감긴 다리는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거 다치면 면제야?”

“글쎄. 나도 잘은 모르는데… 언뜻 들었던 것 같아서.”

절로 다친 다리에 시선이 고정됐다.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야, 우리 호정이는 곧 군대 가야 하네. 난 안 가는데.” 하며 낄낄대던 민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깁스로 꽁꽁 붙들린 다리가 아직 어색했다.

“내가 한번 알아볼게.”

재영은 내 눈을 따라 다시 내 다리를 응시했다. 입술을 깨무는 재영의 모습에 나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손을 뻗어 재영의 팔을 툭 건드렸다. 멍하니 내 다리를 보던 재영이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너 때문 아니야. 재영아. 어? 너 그런 표정 지으면 내가 더 미안해져. 너희 집에 얹혀서 편하게 지내던 건 나였잖아.”

재영은 애써 미소 지으며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았지만, 시선만은 여전히 내 다리에 박혀있었다.

“내일 오전에는 밥 먹는 거 가능할 거야. 괜찮아? 기운 없지?”

“야. 당연히 괜찮지. 아직 입맛도 별로 없어서.”

“그래도 목마를 텐데.”

재영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왔다. 음료수에 달려있던 작은 빨대를 떼어내 물병에 꽂고 내 입에 맞춰주었다. “조금은 괜찮을 거야.”라는 말에 우물쭈물 망설이던 입술을 벌려 물을 마셨다. 재영은 물병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목 뒤를 감쌌다. 덕분에 물을 마시는 게 좀 더 편해졌다. 말라서 뻑뻑했던 입안에 물기가 돌았다. 몽롱하던 정신이 차려졌다.

“너 집에 안 가 봐도 돼? 불나서 해결할 일 많지 않아?”

“알아서 하실 거야. 보험도 다 되어있는 집이고. 우리 집 걱정은 그만 하라니까, 호정아.”

재영이 피식 웃으며 내 볼을 건드렸다. “넌 네 생각만 해.”라는 말에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재영은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놈인지 모를 거다. 아빠가 병원에 의식 없이 누워있고, 더 나빠질 것 없어 보이던 집안이 이전보다 더 나빠졌는데도 이기적인 나는 나만 생각해 재영을 따라 영국에 가려고 한다. 재영과 마주해 있던 눈을 슬그머니 내렸다. 이런 내 모습이 창피했다. 내 목을 만지던 재영의 손이 멀어졌다.

“아. 호정아. 너 혹시 나올 때 폰은 챙겼어? 병원 와서는 못 본 거 같아서.”

“폰? 아… 아 맞네. 하씨…….”

이번 것마저 잃어버리면 올해만 벌써 잃어버린 폰이 두 개였다. 게다가 이번 폰은 재영이 사준 것이었다. 불이 나 정신없던 상황에 당연히 폰을 챙기지 못했다. 이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복을 뒤적거렸다. 옆 테이블도 쳐다봤지만 역시나 폰은 보이지 않았다. 재영이 고개를 꺾어 나를 보고 있었다.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재영이 검지로 내 볼을 쿡 눌렀다.

“왜? 없어?”

“…어. 네가 사준 거였는데.”

“그래서 내가 찾아왔지.”

재영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내밀었다. 이전과 같은 디자인의 것이라, 순간 진짜 잃어버린 이전 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기종만 같은 새 폰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재영을 쳐다보자, 재영이 내 손을 가져가 폰을 쥐여주었다.

“야. 뭐야. 새 거잖아.”

“기능 헷갈릴까 봐 이전 거랑 같은 걸로 샀어.”

재영이 준 폰을 손에 쥐고 입안 가득하던 바람을 불어냈다. 한숨처럼 뱉어진 숨이 내 마음처럼 무거웠다.

“야. 나 너한테 진 빚들, 다 언제 갚으라고 이러냐.”

“평생 갚으면 얼추 다 되지 않을까?”

재영이 장난치듯 웃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다. 덩달아 걱정만 가득하던 내 마음에도 얕게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재영은 꽤 긴 시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두어 번 하품 중에 폰을 확인한 재영이 비서의 연락이라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 말과 함께 병실을 나설 때가 내게 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문 입구의 불투명 창으로 검은 정장을 입은 비서의 얼굴이 살짝 스쳤다. 재영은 병실을 나서며 아직은 움직이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괜찮다는 말로 재영을 안심시켜 보냈지만, 재영은 그 후로도 시간마다 내게 연락을 보내왔다. 자신 때문에 불이 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집에서 다친 내게 쓸데없이 미안한 감정이 드는 모양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별거 아닌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던 착한 놈이었는데 혹시나 지금도 혼자 속앓이를 하는 거면 어쩌나 괜히 걱정되었다.

무료하게 병실에 있다 보니 점차 아빠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라도 하려다 손을 멈추었다. 아빠에 대한 걱정이 깊어지면 그와 비례해 아빠의 존재가 마치 짐처럼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도 깊어졌다. 상이한 두 감정이 언제나 공존했다.

재영과 있을 땐 잠시나마 불편하고 갑갑한 현실을 잊고 마치 재영처럼 편안하게 보내다가도 이렇게 혼자 있으면 영락없이 보잘것없는 이호정의 현재로 돌아가지는 게 신기했다. 지독하고 갑갑한 현실이 다시 머릿속을 채웠다. 병원비, 집, 빚, 돈. 구질구질한 단어들이 마치 누군가 갈고리로 끄는 것처럼 연달아 줄을 이어 떠올랐다.

재영과 같은 집에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나는 뼛속까지 재영과 같을 수 없음을, 오히려 매일매일 더욱 절실하게 깨닫는 기분이었다.

“하…….”

탄식과 같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재영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음식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배도 고파졌다. 노래라도 틀면 나아지려나 싶어 폰을 뒤적거릴 때였다.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리기에 고개를 들어 문을 쳐다봤다. 재영이나 엄마라면 노크를 할 리가 없었다. 내가 깬 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으니 수술 후로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났을 터였다. 누군가 내 병실 문을 두드린다면, 그건 당연히 간호사나 의사일 거라 생각하며 답했다.

“네. 들어오셔도 돼요.”

미닫이문이 느리게 열렸다. 그 사이로 생각하지도 못한 재영의 아빠 모습이 보였다. 표정을 굳히고 선 재영의 아빠는 병실 입구에서 나를 보더니,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잠시 한숨 쉬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라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뒤늦게 주춤거리며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들, 들어오세요.”

나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다 욱신거리는 다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을 깨무는 나를 보더니 재영의 아빠가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재영의 엄마가 마치 그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 들어왔다.

“어어. 아니에요.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그대로 있어요.”

재영의 엄마는 구두를 신었는데도 불구하고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온화한 동작은 들뜨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았다. 피아노를 치던 영상 속 모습처럼 그저 고고하기만 했다.

두 분은 천천히 내 침대로 걸어왔다. 걸어오는 내내 내 안색을 살피듯 느리게 눈을 움직였다. 내가 다친 건 단순히 사고일 뿐, 자신들의 탓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미안해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두 분을 보니, 괜히 내가 더 민망하고 미안해졌다. 오히려 눈치를 봐야 하는 쪽은 이렇게 좋은 1인실에 누운 나와 그 아래 또 다른 1인실을 공짜로 취득한 아빠 쪽이었다.

“미… 미안해요.”

재영의 엄마가 더듬대며 말했다. 내 침대 옆에 서서 잠시 입술을 깨물던 재영의 엄마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감싸는 동작에 놀라 눈만 끔벅거렸다. 설마 우시는 건가 싶어 재영의 아빠 쪽을 보니, 재영의 아빠도 안절부절 못 해하는 게 보였다.

“어머니. 전에 저한테 말씀 편하게 하시기로…….”

받은 게 많아 오히려 미안해해야 하는 쪽은 나인데, 재영도 그렇고 재영의 부모님도 그렇고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고도 미안해하나 싶을 정도였다.

“아. 아니에요. 너무, 너무 미안해서… 내가. 다 내 탓, 내 탓인데. 우리 집에서. 그런…….”

“…세희 씨.”

재영의 아빠가 엄마의 어깨를 감쌌다. 재영 엄마의 여린 몸은 재영 아빠의 손에 이끌려 침대와 떨어진 곳에 자리한 소파로 옮겨졌다. 소파에 재영의 엄마를 앉힌 재영의 아빠가 다시 침대로 걸어왔다.

“전에 나한테, 우리 재영이랑 1학년 때부터 친구라고 했었죠?”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의 아빠는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떨릴 정도의 깊은 숨이었다.

“그때도, 이런… 그러니까, 좋지 않은 일들이. 조금이라도 있었어요? 없었죠?”

“…어…….”

눈을 내리깔고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재영과 비교하자면 내게 안 좋은 일이란 마치 일과처럼 흔한 일이었다. 중학교 때도 버스에서 의도치 않게 작은 싸움에 휘말린 적이 있었고, 고등학교에 와서도 한 번, 정신을 잃을 정도로 얻어맞은 적이 있었으니까.

“이전에도 그런 일이 좀 많은 편이긴 했는데요.”

“네?”

재영의 아빠가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재영의 아빠는 예상하지 못한 답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붙은 거머리가 얼마나 멍청하고 못난 놈인지 이제야 알게 되신 걸까,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눈을 끔벅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친구들이랑 싸운 적도 좀 있고, 안 좋은 일에 얽힐 때도 많고.”

소파에 앉아있던 재영의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게 흐리게 느껴졌다. 어쩌면 두 분은 내가 재영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그렇게 못난 친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을 거다. 이전에 집에서 마주쳤을 때 나를 반겨주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마취약이 덜 빠진 상태라 많이 움직이면 머리가 아플 거라던 재영의 말이 맞았다. 마취약 때문인지 창피해진 상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파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그랬다고요?”

“…네. 저는 원래 안 좋은 일이 많은 편이라. 그러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불난 게 재영이 어머니 아버지 때문도 아니고. 이것도 금방 나을 거래요. 재영이 만나고는 오히려 저한테는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어요. 안 좋은 일도… 금방 해결되고.”

비록 내 스물이 밑도 끝도 없는 우울한 날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건 재영과는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나를 구렁텅이에서 빼주고 도와준 건 재영이었다. 입술을 세게 다물었다. 재영의 엄마는 이제 재영의 아빠보다 나와 더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두 분의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우리, 재영이… 어릴 때, 아프… 아니, 아팠… 아니야, 아니. 많이 안 좋아서…….”

처음 재영의 집에 갔을 때, 어릴 때 종종 발작을 일으켰다고 말하던 재영의 쓸쓸한 얼굴이 떠올랐다. 열 살짜리 아이를 그까짓 발작이 뭐라고 그 큰 독채에 혼자 살게 한 두 분이 이해되지 않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랬다. 마치 그게 재영의 큰 단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두 분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아, 들었어요.”

“누구한테요? 우리 재영이한테요?”

“…네.”

입안에 든 뜨거운 공기를 훅, 하고 내뱉었다. 두 분 다 나만 보고 있는 통에 표정 하나까지 전부 신경 쓰이고 눈치 보였다.

“그래서 별채에 따로 머무르게 됐다고 들었어요.”

재영의 아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학교 행사 때 보았던 근엄하고 무서운 이사장으로 그를 볼 때와 지금, 둘은 비슷한 얼굴빛을 띠고 있었다. 몰랐다고 해야 했나, 생각하는 사이 재영의 아빠가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작게 “네.”라고 답했다. 재영의 아빠는 내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런데도 친구가 되었… 될 수, 하아.”

재영의 아빠가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비볐다.

“네. 지금은 괜찮으니까. 재영이가 괜찮지 않다고 해도 제가 괜찮습니다.”

“지금은 괜찮대요? 호정이가 볼 때, 정말 우리 재영이가 괜찮아 보여요?”

다시 진지해진 어머니의 얼굴에 멍하니 그 얼굴을 응시했다. 재영의 엄마는 입술 사이에 엄지손톱을 깨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작이 좀 심했었나, 혹시 TV에서 보던 간질 같은 그런 유의 병이었을까. 잠시 숨을 다듬고 어지러운 머리를 뒤로 받쳤다.

“그때, 명함 준 거 아직 가지고 있죠?”

“네. 집에 있을… 아, 죄송해요. 이사를 하는 바람에.”

졸업식 날 받았던 명함을 어디에 뒀었는지 생각했으나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서랍 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책상 위에 던져놓았던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후에 이사하며 쓰레기에 휩쓸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재영의 아빠는 주머니에서 명함집을 꺼내 그중 한 장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잃어버리지 말아요. 필요할 땐 꼭 연락하고.”

“…네.”

머뭇대며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재영의 아빠는 테이블에 놓인 명함을 다시 들어, 내 베개 아래로 넣었다. 의아해 눈만 깜박이는 사이 두 분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빠. 여기서 뭐 하세요? 엄마까지 데리고.”

미닫이문 뒤로 재영이 고개를 까닥이며 서 있었다.

재영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린 듯 보였다. 낯선 재영의 얼굴을 살피고 싶었지만, 내 앞으로 재영의 아빠가 등을 보이고 선 탓에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영의 손에 들린 종이백이 많았다. 재영은 좀 전까지 자신의 엄마가 앉아있던 소파 앞에 종이백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선 구두가 나를 향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내 쪽을 보고 있는 듯했다.

“저한테 말하고 오시지.”

“아… 네 친구가 우리 집에서 다쳤는데, 우리도 병문안은 와야겠다 싶어서.”

재영의 아빠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 날 내려 보는 눈길에 베개를 고쳐 명함을 감추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 위로 재영을 속이는 기분이 섞여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저랑 같이 오셨어야죠. 호정이 너 놀란 거 아니야?”

재영의 아빠가 살짝 비켜섰다. 재영의 아빠는 팔을 뻗어 자신의 뒤로 재영의 엄마를 감추듯 숨겼다.

“아니. 전에 뵌 적도 있고. 전혀 상관없지.”

괜히 어색한 기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말을 곰곰이 듣고 있던 재영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재영은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와 내 이마를 짚었다. 작게 “머리 아프지 않아?”라고 묻는 얼굴에 재영의 부모님과 있을 때의 긴장감이 녹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부모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색하게 재영의 손을 밀어내고 이마의 온도를 체크했다. 열이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재영의 말처럼 마취약이 덜 빠져나간 탓에 두통만 미세하게 온 듯했다.

“자리에 앉으셔도 되는데…….”

재영의 뒤에 서 계신 두 분을 보고 말했다. 재영이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재영은 자신의 부모님이 계신 방향을 향해 섰다. 뒤에서 보니 다급하게 왔는지 재영의 숨이 차분하지 못했다. 재영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침대 끝에 기대섰다.

“저녁 밖에서 같이 먹을까요? 엄마, 아빠 두 분 다요.”

팔을 침대에 붙이고 기댄 탓에 흰 티 위로 드러난 재영의 팔 근육이 도드라졌다. 재영은 나보다 몸이 좋았다. 이전에 같이 샤워할 때 보았던 재영의 몸이 생각났다. 재영의 팔을 보던 시선을 슬그머니 내렸다. 고개를 침대에 붙이고 뻑뻑해진 눈을 깜박거렸다. 눈 안이 까끌까끌하고 따가웠다. 피곤한 탓이 컸다. 재영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얼른 눈부터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재영은 침대에 반쯤 기대앉은 채로 한 손을 뒤로 뻗었다.

뒤로 뻗은 손이 내 허벅지를 느리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깁스가 되지 않은 허벅지를 주무르는 동작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내 허벅지를 한 손에 감싸 잡았다가 부드럽게 풀리길 반복했다. 엄지와 검지로 눌린 허벅지가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저릿한 감각은 이내 허벅지를 타고 아랫배로 전해졌다.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편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 호정이랑 런던에서 지낼 집. 이제 다 지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네. 보실래요? 예뻐요.”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내 허벅지를 잡고 있던 손도 멀어졌다. 빈 허벅지 위를 손으로 쓱 문지르고, 부모님을 향해 걸어가는 재영의 등을 쳐다봤다. 재영은 침대 끝에 걸쳐져 있던 몸을 일으켜 부모님이 앉은 소파로 가고 있었다. 아빠 옆에 앉은 재영이 손에 들린 폰으로 사진 몇 장을 보여주는 듯했다. 재영의 얼굴에 내가 아는 익숙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이게, 제가 지낼 집이고. 이 집이 호정이가 지낼 곳인데…….”

“어? 우리 따로 지내?”

급작스러운 내 물음에 셋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했다.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예상외로 재영의 엄마였다. 온화한 미소에 괜히 큰 소리를 낸 게 부끄러워졌다. 처음 이 병실에 들어올 땐 많이 긴장하고 놀라 보였던 재영의 엄마는 이제 많이 진정된 듯 보였다. 촉촉하던 눈가도 평소와 같아졌다. 다행이었다.

“재영이가 호정이가 불편할 거라고… 다른 집을 구해야 한다고 그랬대. 다훈 씨, 맞지?”

“어. 재영이가 결벽증도 좀 있어서.”

재영의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재영의 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기, 세면대, 침대… 뭐 하나도 남과는 같이 못 쓰는 아이라.”

재영은 자신의 아빠에게 폰을 내민 채로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매일 나와 별채에서 같은 침대를 썼기에 그런 결벽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집에 갔을 때 침실이 이곳 말고도 더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는 왜’라는 같잖은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호정아, 왜?”

“…아니. 그냥 굳이 따로 살 필요가 있나 해서. 방만 다르면 되지 않을까?”

돈도 그렇고, 물가도 그렇고. 얹혀서 가는 주제에 집까지 다르게 지낸다면 부담이 더욱더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재영의 부모님은 그런 면으로는 전혀 아끼는 게 없는 분들처럼 보였다. 새로 얻었다는 집 사진을 보는 얼굴이 평온하기만 해서 오히려 덤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병실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저 가족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 오직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요. 이거 호정이한테도 보여주고요.”

“어. 그래. 호정이도 봐야지.”

“호정이가 좋아하면 좋겠는데.”

재영의 웃음에 두 분의 얼굴이 급격히 풀어지는 게 보였다. 재영은 폰에 화면을 띄운 채로 내게 다가왔다. 첫 번째로 보이는 한옥 형태의 집 모양에 눈을 끔벅였다.

“런던에 이런 한옥을 지었다고?”

“응.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아니, 잠시만.”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하구나, 생각하며 사진을 확대했다. 보는 눈이 없는 나에게 한옥이야 당연히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겠지만, 뭔가 묘했다. 사진 속 런던에 새로 지었다는 한옥이 불탄 별채와 꽤 흡사해 보였다.

“근데 왜 우리 따로 지내는 거야? 거기는 여기보다 집값 더 비싸지 않아?”

소파에 앉은 두 분이 들을 수 없게 재영의 귀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여태 같은 침대도 썼었잖아, 라는 말은 왠지 간지러워 뱉지 못했다. 재영은 대답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재영이 화면을 훑자 다음 화면이 드러났다. 재영의 집처럼 한옥은 아니었지만, 붉은 벽돌벽으로 지어진 주택이었다. 차라리 작은 원룸이라면 마음이 나을 것 같았다. 따로 지내며 생활비를 이중으로 지출하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데, 이렇게 큰 주택에 혼자 따로 지낼 자신이 없었다. 재영보다는 그의 부모님 눈치가 더 보인 탓도 있었다.

“저기, 재영아.”

“바로 앞집이야. 가까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너랑 같이 지내면 안 돼?”

내 말에 재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웃기 시작했다. 재영이 제법 크게 웃음을 터뜨린 탓에 소파에 앉아있던 두 분의 시선도 우리를 향했다. 어정쩡하게 손을 뻗어 재영의 등을 두드렸다.

“왜? 나랑 떨어져 있는 거, 불안해?”

민재의 집에 갈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한 것 같았다.

“아니, 굳이 바로 앞인데 따로 사는 건 또 뭐야.”

중얼댔더니 재영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물러섰다.

“오늘은 혼자 자. 난 부모님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아.”

재영이 웃으며 말했다. 어찌 보면 부모님과 함께 돌아가는 게 당연한 일인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답을 피하는 걸 보니 재영은 영국에선 나와 다른 집에서 지내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게다가 내일 오전부터는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당연히 재영과 함께 먹게 될 줄 알았다. 혼자 기대하던 내 모습이 민망했다.

“집 사진은 더 보내줄게. 보고 더 추가할 거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연락하고. 알겠지?”

“…응.”

주제넘게 그런 걸 말할 수 있을 리가. 재영은 다시 내 어깨를 다독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목 뒤를 매만져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재영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튕겼다.

“왜?”

“삐진 사람 같이 굴어서.”

“내가? 전혀 아닐 텐데. 그럴 리가.”

고개까지 저으며 부정했다.

“삐진 거 맞는 거 같은데. 난 사람 표정을 잘 보거든.”

재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부모님이 먼저 병실을 나가고 재영은 소파에 두었던 종이백을 가져와 내 옆에 놓았다. 재영은 “심심하면 안 되잖아.”라고 말하며 사 온 걸 하나씩 꺼내 보였다. 소설책과 영어책은 그러려니 넘겼다. 다음 종이백에서 나온 노트북과 패드에 기겁하고 말았다.

“야…….”

“알겠어, 알겠어. 그거 이 빚 내 옆에서 평생 갚겠다는 의미잖아.”

재영은 또 장난기 다분한 얼굴로 웃으며 종이백을 정리했다. 평생 갚는다고 해서 갚아질 빚이 아니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재영은 진동이 울린 폰을 한 번 보더니 나와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아빠. 밑에서 기다리고 있대. 갈게. 오늘은 혼자 있을 수 있지?”

“어…….”

“아마 조금 있으면 어머니도 올라오실 거야. 아버지 괜찮아지셨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고마워.”

재영은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허공에서 주먹을 꽉 쥐고 내렸다.

“갈게. 쉬어.”

“응.”

재영이 병실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그 뒤를 빤히 바라보았다. 재영은 뒤돌아보지 않고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마음이 복잡하고 뒤숭숭했다. 다시 재영이 돌아와 내 이름을 불러주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불나던 어젯밤처럼…….

“미친. 이호정. 미친 새끼야.”

재영도 자신도 둘 다 남자인데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좀 전 재영이 손을 댈 때만 해도 괜찮던 볼과 이마가 뜨거워졌다. 뜨거운 볼을 손등으로 비비고 재영이 가져온 책을 꺼냈다. 나는 영어에는 아예 까막눈이나 진배없었다.

영국에 가면 재영 없이는 봉사에 귀머거리가 될 거다. 나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내가 그런 상태면 재영이 불편할 것 같았다. 착한 놈이라 마음 편히 나를 두고 혼자 다니지도 못하려나 생각하니 태어나 처음으로 공부에 의지가 생겼다.

재영이 사 온 영어책은 다행히 내 수준에 맞는 기초 문법과 어휘 책이었다. 스물에 그 좋은 고등학교를 나오고도 고작 레벨 원의 문법책을 본다는 게 창피하긴 했다. 책 사이에 끼워진 볼펜을 꺼내려 책을 펼쳤다.

“와… 미친… 나보다 더 미친놈…….”

페이지마다 재영이 직접 붙인 포스트잇이 가득이었다. 포스트잇에는 책에 나오지 않은 부가설명이 적혀 있고 몇몇에는 재영이 손수 그린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동물 이름이 적힌 곳마다 그 동물을 그려놓은 것에 입술을 깨물고 웃었다. 좀 전까지 들던 이유 없이 섭섭하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진짜 얘 나 꼬시는 거 아니야?”

재영이 매만졌던 허벅지 위에 책을 올리고 등을 기대 누웠다. 볼펜 꼭지를 눌렀다. 재영이 쓴 포스트잇 아래 한재영이라는 이름을 써넣었다. 지금 당장 생각난 것, 당장에 머리에 떠오르는 게 그것뿐이었다.

집에 있을 땐 한없이 여유로워 보이는 재영이지만 비서라는 사람의 연락을 받을 때나 학교 관련 일을 할 때면 영락없이 뉴스나 드라마에서 보이던 바쁜 재벌 2세, 3세들의 모습과 같았다. 그 말은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 재영은 늘 바쁜 상태라는 의미였다. 그런 재영이 자신의 눈에는 어이없는 수준인 이런 책을 샀다. 게다가 나를 위해 정성스러운 메모까지 해두었다. 바쁘고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갰으려나. 괜히 웃음이 났다.

혼자 있는데도 누가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멋쩍은 볼과 귀를 긁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다던데, 한재영이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거면.

“하아…….”

얼굴 위에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천장을 향해 고개를 뒤로 꺾었다.

“말이 되는… 한재영이 왜 너를… 남자를 왜 좋아하겠냐.”

책이 뜨거워졌다. 재영이 붙인 포스트잇이 뜨거워진 내 얼굴을 덮었다. 책을 쥐고 있던 손을 뗐다. 다행히 책은 위태롭게 흔들리기만 할 뿐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을 덮었던 책을 손으로 끌어 내리고 재영의 글씨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아래 방금 내가 쓴 재영의 이름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커튼 사이로 스민 햇살이 눈을 부시게 했다. 더디게 눈을 떴다. 역시 일찍 자려면 나 같은 놈들은 공부를 해야 하는 거구나, 깨달았다. 이전에 한 번 재영의 집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어 새벽에 일어난 적이 있었다.

켜져 있는 미등에 옆을 보니 재영이 그 새벽에 책을 읽고 있었다. 밤에 책을 읽는 건 빨리 잠들기 위해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한재영은 읽다 보니 재미있어 도무지 잘 수가 없더라며 미소 지었다. 내가 한재영이 될 수 없는 데는 머리 즉, 뇌라는 지적 영역과 체력이라는 신체의 영역이 극명하게 달라서일 수도 있었다.

새벽에 엄마라도 왔다 갔는지 침대 옆에 미지근한 물이 놓여있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머리맡에 손을 뻗었다. 베개 옆에 있는 폰을 들어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꽤 오래 지났는데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렸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눈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다시 엄마 번호를 누르고 볼에 폰을 붙였다.

-누구…….

“엄마, 나.”

-너 또 왜 번호가 달라?

“아… 다쳤을 때 또 잃어버려서… 엄마 밤에 여기 왔었어?”

-어. 너 너무 깊게 자서 안 깨우고 왔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정신은 몽롱하다가 금세 산만해졌다. 아무 생각이 없다가 이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이 동시에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베개에 비볐다.

-재영이는 아직도 거기 있어?

“아니. 어제 재영이 부모님 오셔서 같이 갔어.”

눈을 부시게 하던 빛이 차츰 사그라졌다. 해가 이동한 듯했다. 목이 말랐다. 통화가 끝나면 엄마가 남긴 물부터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눈이 뻑뻑했다. 눈 위를 비볐다.

-무슨 소리야. 어제 재영이 밤새 거기 있었는데.

“뭐?”

-엄마 새벽에 갔을 때도, 소파에서 자고 있었어.

느리게 눈을 떴다. 창문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해가 자리를 이동한 게 아니었다. 기다랗고 큰 재영의 그림자가 나와 창문 사이를 가려주고 있었다. 엄마와 통화 중인 것도 잊은 채 앞에 서 있는 재영을 불렀다.

“한재영?”

“어. 깼어?”

재영은 커튼을 쳐 빛을 마저 가려주었다.

-여보세요? 호정아?

휴대폰 너머 엄마의 채근을 듣고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엄마.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

-거봐. 재영이 있지?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응.”

통화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확인하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 부셔서 깬 건 아니지?”라는 재영의 말이 너무 다정했다.

재영은 옆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내게 내밀었다. 재영이 내민 잔을 받아 나도 목을 축였다. 재영은 창문을 향한 채로 다시 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베개 옆에 두었던 영어책을 슬그머니 뒤로 가렸다. 한 장도 보지 못한 걸 알면 재영이 실망할 것 같았다.

“언제 왔어?”

“밤에. 호정아. 네 말이 맞더라. 분리 불안은 내 쪽이던데?”

재영이 피식 웃는 것 같았다. 눈을 부시게 하던 빛이 가려지자 눈도 편안해졌다. 재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는 그런 말은 여자를 꼬실 때나 쓴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마치 내가 꼬임을 당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는 말로 들릴까 봐 겁이 났다. 창가를 보던 재영이 별안간 뒤돌아 나를 내려 보았다.

“다리 아프지 않아?”

“아, 괜찮아.”

“어제 너 잘 때 의사 선생님이 오셨었거든.”

“뭐래?”

재영은 내 눈을 맞추고 잠시 나를 빤히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대.”

“갑자기 왜 웃어?”

세수도 하지 못한 꼴이 웃겼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환자복 소매를 당겨 반대편 볼을 닦았다. 생각해 보니 세수에 이도 닦지 못했다. 추해도 너무 추한 꼴이었다. 재영을 흘깃 쳐다보았다.

재영 아빠의 말로는 재영이 결벽증이 있다고 했다. 타인과는 세면대도 변기도 같이 쓰기 어려울 정도라는데 내 흉한 꼴에 입맛이라도 떨어졌으면 어쩌나 염려됐다. 다시 소매를 당겨 눈 위를 꾹꾹 눌렀다.

“의사 선생님이 네 다리도 들어보고 만져보고 눌러보는데도 네가 깨지도 않고 자던 게… 그게 자꾸 생각나서.”

재영은 내 손을 당겨 내렸다. 눈 위를 누르던 손이 내려졌다. 재영은 물끄러미 내 눈을 살폈다.

“야. 피곤해서 그렇지.”

“맞아. 우리 호정이 어제 많이 피곤했지이.”

재영은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와 동갑이면서 묘하게 나를 어린아이로 대하는 어투였다. 웃으며 냉장고로 걸어가던 재영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커튼이 흔들리며 다시 그 틈을 비집고 햇살이 스몄다. 눈을 찌푸릴 새도 없이 재영의 몸과 얼굴 위로 밝은 햇살에 쏟아졌다. 몸의 곡선과 다부진 선이 도드라졌다.

“뭐 먹을래? 호정아.”

“나, 먼저 씻고… 먹고 싶은데.”

“아. 그러네. 찝찝했겠다.”

재영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허리 뒤로 손을 뻗으려는 재영의 손을 다급히 밀어냈다. 재영이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데도 꿋꿋하게 혼자 바닥을 디디고 섰다. 재영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팔 잡고 가. 넘어지면 어떡해.”

“어. 고마워.”

손가락으로 재영의 팔을 살짝 잡았다. 재영은 고개를 비틀어 나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나를 빤히 보던 재영은 곧 내 손을 끌어 손바닥을 펴게 해 자기 팔을 온전히 잡게 했다. 재영의 팔을 잡은 채로 다리를 끌었다.

화장실로 가는 동안 재영은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곳이나 차라리 앞을 봐주면 좋겠는데 씻지도 않은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못내 어색했다. 일부러 시선을 회피했다.

“호정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어제 우리 아빠가 한 말 때문이면, 신경 안 써도 돼.”

“응?”

“나 결벽증이라는 거.”

재영의 웃음이 밝지 않았다. 묘하게 씁쓸한 미소라 괜히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거 때문에 너 지금 나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야?”

“아, 아니야…….”

“너랑 친해지고 싶었고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싶었어. 깨끗한 걸 좋아하긴 하는데, 결벽증은 아니야. 친구랑 같은 침대 쓸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거 나한테 큰 의미는 아니야. 너도 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야…….”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또 별것도 아닌 내가 재영을 눈치 보게 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 독단적으로 내린 결론으로 누군가를 고민하게 했다는 사실에 나에 대한 혐오감까지 들 정도였다. 재영은 자신의 팔을 잡은 내 손을 감쌌다.

“너 지금 나 불편해하고 있잖아.”

재영의 아랫입술이 부풀었다. 시무룩한 얼굴을 살피다가 나도 모르게 그 얼굴로 손을 뻗었다. 재영은 아이처럼 내가 내민 손길을 고스란히 받은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듯 보였다. 재영은 자신의 볼을 내 손바닥에 붙인 채로 눈을 끔벅거렸다. 느리게 감기고 떠지는 눈동자가 고고하고 깊었다.

“진짜네.”

“뭐가?”

재영이 떨구고 있던 시선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너희 엄마를 더 많이 닮았어.”

“그래?”

“응.”

너희 엄마처럼 속없이 순진하고 착하고 고고해 보인다고 말해주면 이번에는 재영이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재영은 그의 엄마처럼 내게는 여전히 다가가기 힘든 존재였다. 나와 다른 세상에서 줄곧 살아온 게 이런 순간에도 뼈저리게 티가 나는 존재였다.

재영의 말이 맞았다. 어제는 줄곧 멍청한 생각만 했다. 결벽증인 애가 나와 같이 자는 게 큰 의미이면 어떡하지, 에서 시작된 망상은 재영이 나를 좋아하는 거면 어떡하나, 로 이어졌다.

마지막에는 반대로 내가 재영에게 그런 마음이 드는 거라면 어쩌나 하는 구질구질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질 정도였다. 내 이런 망상과 걱정이 재영을 눈치 보게 할 줄은 몰랐다.

피아노를 두드리듯 재영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재영이 푸스스 바보처럼 웃으며 내 어깨에 이마를 붙여 기댔다.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혹시나 내가 넘어지지 않게 배려하는 모습에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호흡이 빨라졌다.

“걱정했어. 네가 괜한 오해라도 할까 봐.”

“오해는 무슨. 너나 나나 남자끼린데. 네가 잘해주면 내 입장에서는 그냥 고마운 거지. 오해 안 해.”

재영은 대답 없이 내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다친 다리가 휘청하며 몸이 중심을 잃고 재영의 품에 끌려갔다. 팔을 세게 움켜쥐었는데도 재영은 아파하지 않았다.

별채에서 나던 향이 재영의 몸에서 났다. 몸이 가까우니 재영에게도 내 냄새가 그대로 전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하루 동안 씻지도 못했고 밤새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땀 냄새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잡고 있던 재영의 팔을 밀었다.

“들쳐 업기 전에 가만히 있어.”

재영이 웃으며 말했다.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 나도 재영을 따라 웃고 말았다.

“근데 나한테 냄새나지 않아?”

괜히 코를 킁킁대며 물었더니, 재영이 내 어깨에 붙였던 이마를 떼어냈다. 재영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번에는 이마가 아닌 자신의 볼을 내 어깨에 붙였다.

덕분에 고개가 틀어지며 재영의 입술이 내 목을 향하게 됐다. 재영이 들이쉬고 내뱉는 숨결이 그대로 목으로 끼쳐왔다.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여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이럴 때면 짙은 한기를 느꼈다. 재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 목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내 냄새가 나. 너한테서.”

“아, 다치기 전에 네 거 뿌려서 그런가. 그 향수 향 엄청 오래 간다.”

“그러게.”

재영은 몸을 일으켜 다시 내 옆에 서서 팔을 내밀었다. 재영의 팔을 쥔 채로 화장실로 더딘 걸음을 내디뎠다. 깁스를 했는데도 발끝과 발꿈치가 잠시라도 바닥을 스치면 여전히 골반까지 저린 고통이 전해졌다.

재영은 세면대를 짚고 서서 변기 앞에 선 나를 쳐다보았다. “야. 나 좀 민망한데.”라고 했더니 “너 또 나 신경 쓰는 거야?”라며 울상을 짓기에 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남자끼리 이런 일에 더 말을 붙이는 것도 우스웠다.

고등학교 때도 쉬는 시간이라 사람이 붐빌 때면, 바로 옆 소변기에 붙어 오줌을 누던 일도 남자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었다. 결국 주섬주섬 치마처럼 두른 하의를 올렸다. 수술 후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 겉옷을 들자 그대로 아래가 드러났다.

“호정아. 넘어지겠다. 잠시만.”

뒤로 다가온 재영이 무던한 얼굴로 내 등에 자신의 몸을 붙였다.

“편하게 기대.”

아래를 드러낸 채로 재영과 몸이 붙었다. 생소한 감각에 등을 타고 미세한 소름이 돋아났다. 귀 뒤로 끼치는 숨이 뜨거웠다. 괜히 머리를 긁으며 오줌 줄기가 빨리 끊어지기를 바랐다. 재영은 아무런 말없이 내 몸을 받쳤다. 또다시 몸이 어색해졌다.

뒤로 한 손을 뻗어 치마 끝을 당겼다. 드러난 엉덩이를 가리고 싶었다. 거울에 비친 재영의 얼굴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남자가 엉덩이까지 드러내고 자신의 하체에 그걸 붙이고 있으면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재영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전혀 티 내지 않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대며 아래를 닦고 재빨리 치마부터 끌어 내렸다.

“호정아.”

“어… 어?”

“어제 집 사진 더 보냈는데, 봤어?”

재영은 내 허리를 약하게 당겨 세면대로 이끌었다. 재영의 품에 완전히 안긴 꼴이 되어 대충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영어책의 첫 장만 봤는데도 잠이 쏟아져서 폰은 보지도 못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재영은 생각보다 집이 예쁘게 잘 지어졌다며 내 손을 당겨 비누칠을 대신 해주었다. 다친 건 다리니 손까지 씻겨줄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괜히 어색해하는 내 꼴이 더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말을 꺼내 보지도 못했다.

“왜 안 봤어?”

“…아, 나중에 집중해서 보려고.”

재영은 나를 빤히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내 손을 마저 씻겨주었다. 세차게 떨어지는 세면대의 물과 내 손을 붙들고 요리조리 씻어주는 재영의 뒤통수를 번갈아 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왜 굳이 따로 지내는 거야? 멀지도 않고 바로 앞집인데.”

“네가 불편하잖아.”

“네가 불편한 건 아니고?”

나도 모르게 날이 선 말을 뱉었다. 손을 씻겨주던 재영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숙여 그 눈을 피했다.

“아니. 너 거기서 여자 친구 생길 수도 있는 거고… 그러면 내가 같이 지내는 게 불편해지니까. 그래서 그런 건가 싶어서.”

“여자 친구?”

재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뒤에서 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재영이 내민 수건을 받았다. 재영은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보더니, 내가 손을 다 닦자 다시 내 손에서 수건을 가져갔다. 수건을 만지작대던 재영이 피식 웃으며 다시 팔을 내밀었다. 재영이 내민 팔을 잡았다.

“내가 집을 나눈 이유에 적어도 ‘나’는 없었어. 여자 친구,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네 생각만 했어. 네가 편한 방향으로 정한 거야. 언제든 너 방해받지 않고 지낼 수 있게.”

재영은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준 수건을 쥐고 눈을 감으라는 듯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얼결에 눈을 감았더니 재영이 한 손으로 내 목 뒤를 잡아 살며시 당겼다.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자니 또다시 키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장 달려나가 아무나와 키스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누구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처음인 데다 유일한 키스라는 게 내게 쓸데없이 큰 의미가 된 것 같았다. 재영과 얼굴이 가까워질 때마다 키스가 떠올라 몸이 어색하게 비틀렸다. 얼굴로 열기가 솟아 눈덩이까지 뜨거웠다.

“호정아.”

“응.”

“너 민재 어머니 번호 외워?”

“아… 맞네. 나 폰. 하씨.”

재영은 미지근한 물을 틀어 수건을 적셨다. 세면대를 때리는 물소리가 화장실을 채웠다. 또 폰을 잃어버렸으니 민재 어머니 번호를 받으려면 다시 민재의 집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욱신대는 다리 위에 손을 얹었다. 피 통을 연결한 호스가 출렁일 때마다 지탱하는 다리의 힘이 풀어졌다.

“영국 가기 전에는 시간이 안 될 거 같고, 갔다 와서 들르면 될 거야. 이사는 절대 안 가실 분들이야.”

“그래?”

적신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던 재영이 눈 아래에서 잠시 손을 멈추었다. 재영은 눈을 감고 얼굴을 맡긴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고분고분한 게 너무 예쁜데?”

“참나.”

웃음이 났다. 눈을 감은 채로 재영의 가슴 언저리를 밀쳐냈다. 재영은 앓는 소리를 냈지만 뒤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 내 다리를 두고 내가 넘어지지 않게 단단히 내 몸을 받쳤다.

젖은 수건이 얼굴을 지날 때마다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억세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재영은 내 손을 당겨 자신의 어깨를 잡게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방문한 의사가 다리에 연결된 피 통을 뽑았다. 아픔에 나도 모르게 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지탱할 곳 없던 손이 향한 건 역시나 재영의 팔이었다.

입원해 있던 한 달 동안 아빠를 보러 가는 게 아닌 이상은 병실에만 있었다. 재영이 사 준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도 듣고 책으로 영어도 공부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재영이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한 달이 되었을 땐 병실에서 재영을 기다리는 게 주요일과가 되어있었다.

퇴원 후 한 달은 재활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인대가 손상되어 다리 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사의 말 때문이었다. 입원과 재활 훈련으로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유학에 관련된 모든 준비는 재영이 도맡아 해주었다. 그쪽으로는 도통 아는 게 없으니 다치지 않았더라도 딱히 내가 도움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재영의 말대로 군대는 면제가 되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헷갈리는 와중에 재영은 자신도 군대는 가지 않는다며 나를 위로했다.

“너는 어디에서 태어났는데?”

“응? 나 한국.”

“근데 왜 면제야?”

여태 내가 아는 군 면제 이유는 민재처럼 미국에서 태어나 국적이 다른 경우밖에 없었다. 당연히 재영도 그런 쪽일 거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아…….”

재영은 잠시 망설이다 내 눈을 피했다.

“어릴 때 발작이 좀 있었다고 했잖아. 그거 때문에.”

말실수한 것이 미안해 잠시 멍하니 있었더니, 재영이 내 머리를 꾹 누르며 웃었다.

* * *

7월 학사 일정에 맞춰 6월 중순,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재영은 나보다 한 칸 앞에 앉았다. 이따금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내 안색을 살피기도 했지만, 그때를 제외하곤 가는 내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린 채 잠만 잤다. 재영은 기내식도 먹지 않았다. 마치 밀린 잠을 자는 사람처럼 보여서 나도 재영을 깨우지 못했다.

재영이 런던에 지었다는 한옥은 실제로 보니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 별채와 닮아 보였다. “불탔던 별채가 여기로 옮겨진 것 같아.”라고 했더니 재영은 내가 한 말이 듣기에 아름답다며 나를 칭찬했다.

내 말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문학 성적이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재영이니 재영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한옥 앞에 있는 붉은 벽돌집으로 재영과 함께 들어왔다. 런던에 오기 전, 재영은 자신의 짐은 이미 정리해두었다고 했다. 덕분에 캐리어 세 개에 담긴 짐이 전부 내 옷과 책뿐이었다. 내가 지낼 집에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재영이 열쇠를 내게 내밀었다. 재영이 내민 열쇠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걱정과 달리 집 안은 이미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게 준비된 상태였다. 가재도구는 물론이고 냉장고 안에도 먹을 게 가득했다. 집을 둘러보았다. 재영은 집 안을 살피는 나를 고개까지 꺾어 응시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일 도와주는 사람이 올 거야.”

“…응.”

“한국인으로 부르는 게 낫겠지?”

“아, 상관없어.”

“잠시만.”

캐리어의 지퍼를 열던 재영이 주머니에서 울리는 자신의 폰을 꺼냈다. 참고 있던 숨을 풀었다. 집에 들어오고 나니 내가 정말 영국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뻗친 머리를 가리기 위해 썼던 모자를 벗어 소파에 놓았다.

재영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쳤다. 거실로 가득 드리워지던 해가 가려졌다. 창마다 달린 커튼을 치자 대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워졌다.

전화를 받던 재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지한 얼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시선을 고정했다. 재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어둠에 표정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네. 아니에요. 확인 안 한 제 탓이죠.”

재영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표정을 더 굳혔다. 입 모양으로 ‘무슨 일인데?’ 물으며 다가갔다. 커튼 앞에 서 있던 재영이 손을 까닥였다. 다가가 앞에 서니 재영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어 천천히 머리카락을 넘겼다. 귀 뒤로 넘겼던 머리가 풀어지며 눈썹 위를 덮었다.

“아니에요. 네. 알아서 할게요. 네.”

재영은 불안한 내 얼굴을 보더니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했다. 길지 않은 통화가 끝나자 재영이 먼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영은 여전히 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재영의 폰 화면이 어두웠다.

“나 진짜 이런 실수 안 하는데… 미안. 개강이 7월이 아니라, 9월이래. 방학 시작 달이랑 개강 날짜를 헷갈렸나 봐.”

“어?”

“하… 아빠랑 엄마가 나한테 또 얼마나 실망하실지.”

재영은 폰 화면 위에 손가락을 얹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일정이 틀어져 불안해진 거다.

“야. 재영아.”

재영은 폰을 창틀에 놓고 손을 들어 자신의 눈 위를 비볐다.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재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와중에도 부모님의 인정을 바라는 재영의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재영아. 어? 나 좀 봐.”

구경도 다니면서 이곳 지리를 익히다 보면 두 달이라는 시간은 금세 지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재영은 마치 자신을 책망이라도 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 재영의 양쪽 볼에 손을 올려 꾹 눌렀다. 재영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야. 헷갈릴 수도 있지. 나도 잘못 볼 때 많은데. 한번 잘못 보면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쭉 그렇게 보일 때 많잖아. 나는 너처럼 하고 싶어도 못 해. 멍청해서.”

“내가 일정만 제대로 봤어도 너 부모님이랑도 더 있을 수 있었는데.”

“별걸 다… 야. 재영아. 같이 놀면 되잖아. 두 달 동안.”

재영은 잠시 입술을 말았다.

“같이 놀아?”

입안에서 혀를 굴리던 재영이 뒤돌아 커튼을 당겨 더욱 굳건하게 빛을 차단했다. 재영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당겼다.

“진짜? 두 달 동안?”

“어. 두 달 생각보다 금방 가.”

재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재영은 한껏 풀 죽어 있던 표정을 풀고 나를 마주 보았다. 불안하던 눈빛이 평소의 재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차분해진 얼굴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럼, 호정아. 우리 진짜 재밌는 놀이 할까? 여기서?”

짙은 어둠 덕에 재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재밌는 놀이?”

“응.”

재영이 검지로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재밌는 거, 뭐?”

“두 달 동안 네가 내가 되는 거야. 완전 나처럼. 어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내가 한재영처럼? 어이없음에 웃음이 나 고개를 돌렸다. 그게 가능할 리 만무했다. 나를 어떻게 꾸며내도 내 근간에 깔린 허접함과 무식함은 이호정일 뿐, 절대 눈앞의 재영은 될 수 없었다. 그걸 절실하게 잘 아는 것도 당연히 나였다. 나는 나를 잘 알았다.

나는 무식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가난해진 집과 부모님을 속으로는 탓하고 원망하며, 일부러 철없는 소리를 해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는 게 나라는 인간의 본성이었다.

“…….”

재영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부스럭대는 작은 소리에 신경이 집중됐다. 곧 무거운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보이더니, 재영과 나 사이로 담배 연기가 올랐다. 어둠 덕분에 재영의 얼굴과 나 사이에 아지랑이로 오르는 담배 연기의 형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담배도 가르쳐줄까? 예전에 피우고 싶어 했잖아.”

답하지 않고 재영의 눈동자를 찾으려 애썼다. 어둠이 짙어지자 담배 불빛에 비친 재영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진지한 얼굴이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재영이 하는 말의 의미를 찾지 못해 헷갈렸을 뿐이었다.

“내가 네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인데?”

“내가 볼 때, 너는 충분히 나처럼 할 수 있거든.”

재영이 픽 웃더니 이 사이에 담배를 물고 양손으로 내 골반을 잡아당겼다. 휘청대며 발을 뗐다.

“내가? 나 고등학교 때 전교 꼴등이었는데.”

“하.”

재영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얼굴로 끼치는 담배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이제는 담배 연기가 난다고 해서 기침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게 되지는 않았다. 나름 이것도 적응이라면 적응인 셈이었다.

“재영아. 네가 모르나 본데, 나는 무슨 수를 써도 너처럼은 될 수가 없어.”

재영은 여전히 담배를 문 채로 창틀에 기대앉았다. 재영이 창틀에 기대앉자 커튼이 미세하게 열렸다. 그 틈으로 스민 햇살에 눈이 부셨다. 미간을 좁히며 재영의 얼굴을 찾는 사이, 재영의 무덤덤하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너, 나 골목에서 봤을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내가 뭐랬는데?”

그날 우리가 분명 긴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다.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재영이 내게는 몹시 어색하고 불편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과 같은 사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 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내게도 선명할 만큼 그날 재영의 모습과 내 감정만은 아직도 고스란히 떠오를 정도였다.

길지 않았던 대화 중 지금 재영이 말하고자 하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했다. 내 골반을 잡은 재영의 손이 부드럽게 올라와 이내 허리를 잡았다. 허리를 감싼 재영의 손도 잊고 나는 그날, 그 골목의 재영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이거. 몸에 안 좋은 거니까 웬만하면 끊으라고. 네가 그랬잖아.”

재영이 입술에 물었던 담배를 빼내 보였다. 눈앞으로 붉은빛이 스쳐 갔다. 코와 볼에 가깝게 붙었다 멀어지는 빛에 순간 놀라 몸을 휘청였다. 재영의 두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담배를 물고 있는 낯선 재영의 모습에 괜히 모난 말이라도 뱉고 싶었던 어쭙잖음과 자존심이라고 할 수도 없는 창피한 자격지심이 떠올라 민망해졌다. 손가락으로 목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때는 그랬었지.”

“그랬는데 몇 달 전엔 이거 배우려고 했잖아. 사람은 변할 수 있는 거야.”

확신에 가득 찬 얼굴이라 뭐라고 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재영의 눈만 응시했다. 재영은 혀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내 입안을 파고 들어와 윗니와 어금니까지 더듬던 그 혀라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재영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물론, 죽어도 못 변하는 인간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너처럼 되려면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이 더 걸릴지도 몰라. 너 나 영어 하는 거 봤잖아. 나는 그냥 그 정도야. 기본적인 예절이나, 말하는 것도 서툴고. 공부도 못했고….”

“호정아. 왜 너를 낮춰?”

재영은 내 허리를 쥐고 있던 손 중 하나를 떼 커튼을 마저 열었다. 여전히 한 손은 내 허리를 잡아 세우고 있었다. 재영이 창문을 열자 순식간에 바깥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줄곧 알 수 없을 만큼 답답하던 마음이 풀어졌다.

재영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창문 밖으로 던졌다. 담배는 힘없이 정원 바닥으로 고꾸라지듯 떨어졌다.

“낮출 필요 없어. 내가 너보다 높지 않으니까.”

“근데 내가 왜 너처럼 돼야 해? 그게 무슨 놀이야.”

“재밌잖아. 재미있을 거 같은데, 난.”

재영은 한 손으로 단단히 내 허리를 감싸 당겼다. 여전히 재영과 몸이 가까워지는 건 어색했다. 재영의 두 다리 사이에 완전히 몸이 잡힌 꼴이 되었다. 민망해 눈을 둘 곳이 없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빛이 들어오자 재영의 얼굴과 몸이 더욱 적나라하게 눈에 박혔다. 재영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시선을 내렸다. 재영의 눈은 여전히 올곧게도 나를 향해 있었다. 결국 또 내가 먼저 눈을 피하고 말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재영은 보면 볼수록 나와는 너무나 다른 존재, 그 자체였다.

“두 달은 부족해.”

“충분해.”

“재영아. 네가 내 머리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래. 그냥 네가 엉성하게 상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야. 나는 진짜 엄청 무식하다고.”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재영을 무섭게 쳐다봤다. 재영이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누르고 있던 내 손가락을 끌어내렸다.

“어려운 건 아니야. 내 취향이 어떤지,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상황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보고 따라 하면 돼. 넌 잘할 거야.”

정말 민재의 말대로 나는 재영에게 끝도 없는 자격지심과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지금의 재영처럼 타고난 우아함으로 사람을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기심은 내면의 깊은 뿌리에서 기생한 벌레가 되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런 이기심만 봐도 그랬다. 나를 대할 때도 배려뿐인 재영이 되려면 내 근원에 깊게 자리한 욕심부터 뿌리 뽑아야 할 터였다.

“못 해.”

“그래? 그럼 우리 뭐할까? 두 달이나 시간이 비는데.”

재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창틀에 걸터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도 두 달이라는 텀이 생길 줄은 몰랐기에 딱히 정해둔 건 없었다. 그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두 달은 이곳에 적응하는 시간으로 보내면 될 것 같았다.

재영은 내 캐리어로 다가가 짐을 풀었다. 소파에 앉은 재영에게 다가갔다. 캐리어에 든 내 옷을 하나하나 들어서 정리하던 재영이 자신의 무릎 위에 방금 꺼낸 옷을 올렸다.

“작네.”

“평균 이상일걸?”

“그래? 우리 호정이 평균보다 큰 거구나.”

재영의 무릎에 놓인 티를 들어 능글대는 얼굴을 가렸다.

“너 진짜 은근 사람 잘 놀린다?”

“넌 놀리고 싶은 사람은 아닌데.”

재영은 내 손목을 잡아 자신의 앞을 가린 옷을 끌어 내렸다. 재영과 눈을 마주한 채로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예전에 아빠와 싸운 엄마가 남자는 직접적으로 말해야 할 때 간접적으로 말해 사람을 화나게 하고, 간접적으로 돌려 말해야 할 때 직구를 던져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한다고 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남자에게 놀리고 싶은 대상은 반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되는 셈이었다. 재영도 그런 걸까. 눈을 깜박거렸다. 만약 그게 맞는다면 재영이 놀리고 싶은 대상에서 내가 제외되는 건 당연했다.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재영이 고개를 꺾어 내 얼굴을 살폈다.

“호정아. 왜 기분이 안 좋아졌어?”

“내가?”

“응.”

재영은 내가 쥐고 있던 옷을 당겨 가져갔다. 생각보다 세게 쥐고 있었는지 티셔츠가 티 날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재영은 손으로 옷을 탈탈 털어내 다시 자신의 무릎에 올렸다. 다시 재영의 주머니에 있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영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주머니 속 폰을 꺼냈다. 내게 양해를 구하는 표정을 보이기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 정화야.”

자신의 무릎에 쌓여있던 내 옷을 소파 옆으로 밀어낸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화의 이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로 민재의 입이 아니면 듣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정화와 재영이 친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그걸 확인받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성인이 되고도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게 생소하고 껄끄러웠다.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에 섰다. 때문에 통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재영은 문득문득 웃다가 커튼을 쥔 채로 뒤돌아 나를 응시했다.

졸업 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덕분에 정화를 떠올릴 틈도 없었다. 한때 좋아했지만 잊고 있던 존재가 불시에 재영의 입에서 불린 것에 대한 멋쩍음인지, 나를 보면서도 수화기 너머 정화의 목소리에 미소 짓는 재영에 대한 언짢음 때문인지 불분명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만은 분명했다.

“아. 어. 호정이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친구. 응. 그 친구랑 같이.”

재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가 나를 기억할지도 미지수였다. 재영의 미간이 조금씩 좁혀지는 게 보였다.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다리부터 시작된 이기심의 벌레가 다시 허벅지를 타고 배까지 기어올랐다. 온몸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재영아.”

재영을 불렀다. 폰을 들고 있던 재영이 눈썹을 들었다.

“한재영.”

다시 단호하게 이름을 불렀더니, 재영은 그제야 폰을 내렸다. 재영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재영의 등으로 쏟아지던 빛이 바닥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마치 웅덩이처럼 고인 그림자를 디디고 섰다. 재영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재영은 내게 묻지 않았다. 흔한 왜냐는 물음도 던지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림자가 만든 웅덩이의 가운데에 섰다. 웅덩이의 얄팍한 물이 점점 진득하게 차올라 내 배와 가슴을 막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재영의 앞에 발가벗겨진 사람처럼 민망하고 난처한 기분이 되었다.

“네가 말한 놀이, 그거 하자. 네 취향이 뭔지. 한재영, 너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상황에 따라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보고 따라 하면 되는 거잖아. 그거 나도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거잖아.”

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재영이 왼손으로 천천히 자신의 턱을 쓸었다.

“그럼 이 놀이는 누가 이기는 거야?”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럼에도 재영은 답하지 않고 한참이나 나를 빤히 응시했다. 재영이 전화를 끊고 내게 다가왔다. 발아래에 고인 웅덩이가 흔들렸다. 재영은 내 앞으로 다가와 상체를 숙였다. 똑바로 마주한 눈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귀 뒤로 넘어갔다. 재영의 부드러운 손이 볼을 스치고 멀어졌다.

“네가 무조건 이기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사이 내 손에 담배가 쥐어졌다. 재영은 담배를 쥔 내 손을 당겨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마셨다. 고개 숙인 재영의 턱선에 시선이 꽂혔다. 그만 보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시선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재영의 턱선에 고정됐다.

“연기에 먼저 적응해 볼래?”

“어떻게?”

재영은 입안 공기를 고개 돌려 뱉었다. 내 손목을 잡은 재영이 뒤로 걸어왔다. 얼떨결에 재영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재영은 내 손목을 잡아 손에 들린 담배를 입에 맞춰주었다.

“시늉만 해봐.”

시늉해 보라는 말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뻣뻣하게 서 있었다. 재영의 숨이 너무 가까웠다. 재영은 내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붙였다. 볼과 볼이 붙었다.

내 손목을 당긴 재영이 담배를 한 모금 다시 빨아 숨을 뱉었다. 귀 옆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 냄새가 역했다. 더 가까워진 거리에서 연기를 맡으니 처음 맡을 때처럼 목이 매캐하고 간지러웠다. 기침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 이를 꽉 깨물었다.

“이리 와.”

재영은 내 반대편 볼을 잡아 더욱 얼굴을 밀착하게 했다. 입에 담배가 불편하게 물렸다. 앞니로 엉성하게 담배를 짓이겼다. 방심한 사이 들이마시는 숨에 연기가 목 안까지 깊숙이 들어찼다.

“읏… 흐…….”

컥컥대며 목을 감쌌다. 몸이 앞으로 숙어지려 했지만 재영이 내 볼을 감싸고 있는 덕에 상체가 수그러지지는 않았다. 재영의 손에 볼을 기댄 채로 숨을 헐떡였다. 목이 따가웠다. 연기에는 이제 좀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연기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호정아.”

“후우…….”

목을 가다듬고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은 내 손에 들려 있던 담배를 가져가 깊게 빨아 마셨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접시에 담배를 비벼 끄는 재영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갈린 검은 재를 보자, 속이 뒤틀렸다. 멀미라도 할 것처럼 울렁대는 명치를 꾹 눌렀다. 기침을 억지로 참느라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보기 흉한 모습일 게 뻔했지만, 얼굴을 피할 수도 없었다.

재영의 손목을 잡아 내 볼을 감싼 손을 내리려 애썼다. 재영의 손이 묵직했다. 굳건하게 볼을 감싼 손이 쉽게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전에 나랑 키스할 때 너 나한테 담배 냄새가 안 났다고 했던가?”

“어. 안 났어.”

“기침이 계속 나?”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담배는 나와 맞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내 얼굴을 잡아 돌린 재영이 이를 세워 내 아랫입술을 물었다. 재영의 입술 사이에 물려있던 아랫입술이 튕겨졌다.

“야!”

재영의 가슴을 퍽 소리가 나게 세게 밀었다. 재영은 꿈쩍하지도 않고 그저 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맞춰보라는 거야?”

이게 재영이 말한 놀이인 것 같았다. 퀴즈와 시험에는 오답이 나의 주특기였다. 고개를 느리게 좌우로 저었다. 재영이 무슨 생각 중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잠시 나를 보던 재영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랑 키스하면 담배 냄새가 안 날 수가 없는 거구나, 생각했어.”

“…너는 고작 그거 확인하겠다고, 지금.”

“나는 그래. 의외로 생각이 직선이야. 네가 그때 나한테 거짓말이라도 한 걸까 생각 중이야.”

“웃기려고 이러는 거지?”

재영의 가슴을 한 번 더 세게 밀었다. 재영의 입술이 닿았던 아랫입술을 손등으로 비벼 닦아냈다. 재영이 아이처럼 해사한 웃음을 터뜨렸다.

“두 달 동안 너도 그렇게 생각해봐. 생각나는 그대로. 한재영이라면 지금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순진한 얼굴로 웃는 재영 덕에 나도 웃고 말았다. 안도감에 맥빠진 웃음이 나온 것도 있었다.

“내가 방금 내린 결론은 네가 이거를 피우는 게 아니라 내가 끊는 쪽이라는 거야.”

“담배, 끊으려고?”

“왜, 싫어?”

재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다시 소파로 가 내 옷을 정리하는 모습에 또 나만 어색해졌다. 재영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재영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섬세함도 보통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몸에 밴 배려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이 원하지 않는 건 내가 궁금하더라도 묻지 않는 것과 같은, 기본적이지만 지키기 힘든 일들에 재영은 생색 없이 그 묵직함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재영아.”

“응.”

재영이 옷을 개던 손을 멈추고 날 지그시 바라봤다.

“담배 진짜 끊을 거야?”

“내가 피우는 건 좋고 싫고가 없는데. 네가 피우는 건 이제 싫어서. 아니. 네가 피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재영의 말을 낮게 따라 했다. 네가 피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네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네가 하지 않는 게 좋으니까. 나로선 주체를 타인에게 두는 화법이 어색했지만, 그게 재영의 방식이라면 방식이었다.

“지금은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재영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새 캐리어에 챙겨온 짐이 모두 정리됐다. 재영은 정리한 내 옷을 들고 익숙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의 중간에 선 재영이 나를 불렀다. “호정아, 따라 와. 집 구경해야지.”라는 말에 멍하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1층에는 응접실과 방 하나가 전부였다. 침실과 옷방으로 쓸 방 하나를 포함해 주방은 모두 2층에 있었다. 2층 침실의 맞은편 방이 옷방이라고 했다. 옷이 그렇게 많은 사람은 아니어서 굳이 내게 옷방이 필요할까, 물었더니 재영은 대답 대신 옷방 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옷방에 걸린 옷은 내 취향이라기보다는 재영의 취향에 가까웠다. 재영의 것과 치수만 다를 뿐 티셔츠, 셔츠 하나까지 전부 재영의 것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방에선 기분을 편안하게 하는 아로마 향이 났다. 다가가 옷 냄새를 맡았다. 방을 채운 아로마 향과 달리 옷에선 재영이 쓰는 향수와 같은 향이 났다.

“너, 진짜 나를 네 미니미로 키우기로 한 거야? 아니지?”

“그럴 리가. 무섭게.”

재영은 자신의 팔을 슥슥 문지르며 나를 쳐다봤다. 선반 위에 가져온 옷을 올리고 옷걸이마다 가지런하게 옷을 거는 재영을 흉내 냈다. 두 달간 재영이 사는 삶의 방식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 내가 그럴듯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기대감이 들었다.

같잖은 이유를 핑계로 나를 무시하던 고등학교의 친구 놈들과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도 해 보지 않고 살아갈 최정화, 앞으로 내가 접하고 만나게 될 모든 사람에게 이제는 쉬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영처럼, 조금 어렵고 불편한 존재가 되고 싶기도 했다.

어색하게 재영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사이, 재영이 한 손으로 내 볼을 꼬집었다.

“왜.”

볼이 잡힌 채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재영은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한국에선 집에 늘 도와주는 사람들이 상주해 있던 재영이었다. 그런데도 이럴 때 보면 집안일도 굳이 할 필요가 없어 하지 않았을 뿐, 막상 하면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해 있던 내 옆에서 나를 챙겨줄 때도 재영은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 타인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는 타고난 것인지, 노력으로 얻은 것인지 궁금했다. 후자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쭙잖은 흉내라도 낼 수 있을 테니까.

옷걸이에 옷을 거는 재영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엉성하게나마 손을 움직였다. 똑같이는 하지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나마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정말 두 달이면, 재영이 말한 것처럼 나는 재영이 될 수 있을까, 비슷하게라도 될 수 있는 걸까, 상상했다. 사람들의 눈에 가볍지 않고 어려운 사람으로 보인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보는 눈앞의 한재영처럼.

재영의 한옥 내부도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재영이 거의 매일 내가 사는 집을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학교 가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알지?”라는 재영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심통 난 내 표정을 보며 재영은 즐거워했다. 어떤 때 보면 재영은 내 친구가 아니라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똑같은 문제를 연속으로 틀리면 “우리 호정이 매라도 맞아야 하나.” 중얼대기도 했다. 늘 끝엔 “때리기는 또 너무 아깝고.”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밤에 누워 자기 전에도 그날 한 공부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때리기는 또 너무 아깝고.”

문득, 그날 재영이 한 말을 떠올렸다. 재영의 목소리와 말투를 따라 했다. 이 놀이가 재미있을 거라던 재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점차 재영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재영은 말을 할 때 숨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들뜬 목소리도 없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했다. 문장도 간결했다. 강조하고 싶은 건 문장의 가장 뒤에 두어 말을 다 듣고 나면 그가 한 말의 가장 마지막 문장만 기억나게 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때리기는 또, 너무… 아깝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보고 있던 영어책을 베개 옆으로 밀어냈다.

“…아깝고.”

눈을 깜박였다. 침대 위의 조명이 눈에 받쳤다. 눈을 감자 방금 전까지 눈을 부시게 하던 조명의 빛이 파편이 되어 점으로 번졌다. 촘촘하게 떨어지던 파편은 이내 하나의 커다란 검은 핵이 되어 눈앞에 이글거렸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곧 머리를 어지럽게 헤젓던 빛이 소멸했다. 완벽한 암흑이었다.

두 달은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았다. 공부하다가도 때마다 재영과 동네 주변을 둘러보고 함께 쇼핑하고 놀다 보면 하루는 금세 일주일로, 일주일은 또 금세 한 달이 되어 흘렀다.

학교에 가기 전날도 재영은 아침부터 나를 찾아왔다. 재영이 전화도 하지 않고 온 탓에 씻지도 않은 채로 문을 열었더니, 날이 참 좋더라는 엉뚱한 말을 했다.

“운동했어?”

“응. 여기 앞에 좀 달리고 왔어.”

운동복 차림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재영은 운동을 나간 김에 장을 봐왔다고 했다. 재영의 손에 있는 비닐백을 가져가려 하자, 재영은 괜찮다며 내 손을 저지했다. 2층의 부엌에 올라 비닐에 든 음식을 정리하는 재영의 모습을 식탁에 앉아 바라봤다.

저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여자를 만날까.

한재영은 어떤 여자를 좋아할까.

어떤 여자가 저런 남자를 만나게 되는 걸까.

“후우…….”

얼굴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 들었던 생각이 또다시 떠오른 것이 불편했다. 재영과 나 사이의 이질감을 느낄 때마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곱씹지 않기로 했다.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재영아. 나 씻고 올게.”

“응.”

재영은 짐을 정리하다 말고 잠시 손등으로 목을 닦았다. 여름의 끝이었다. 아침이라 좀 나은 편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해는 뜨겁고 따가웠다. 땀에 젖은 재영의 얼굴과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재영이 사 온 건 대부분이 식자재였다. 딱히 내가 요리를 잘하는 편도 아니고, 요리에 흥미가 있는 편도 아닌데, 재영은 며칠에 한 번꼴로 장을 봐 와 내 냉장고를 채웠다. 나는 게으른 편이라 일해주는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와 해주는 반찬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운동 후에 마트에 들러 먹을 것까지 사서 친구 집 냉장고를 채울 수 있는 사람과는 달랐다.

만약 지금 내가 재영이고, 운동 후 친구 집에 와 장 봐온 물건을 정리하는 게 내 쪽이었다면. 그렇다면 집의 주인인 재영은 내게 무슨 말을 먼저 했을까. 재영이라면, 만약 내가 한재영이라면. 욕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냉장고 앞에 선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재영아. 먼저 씻을래?”

“나?”

“응. 난 세수만 하면 되거든.”

“난 좋지. 나 입을 옷, 너희 집에 있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에 찾아오는 덕에 옷방의 한 부분이 아예 재영의 옷으로 채워진 지 오래였다. 재영은 내가 지내는 집에 자신의 옷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늘 확인하듯 되물었다. 무슨 일이든 어디 하나 당연하게 받는 태도가 없었다. 늘 상대에게 먼저 묻는 게 습관처럼 붙어 있었다. 엉망인 얼굴을 비비려다, 재영은 이런 식으로 얼굴을 비비지 않는다는 걸 상기하고 손등으로만 눈 부위를 세게 꾹꾹 눌렀다.

“땀 때문에 좀 그렇긴 했어. 고마워.”

재영이 나를 스쳐 지났다. 땀 냄새라고 할 것도 없었다. 좋은 냄새. 그저 좋은 냄새만 났다. 이전에는 미약하게나마 풍기던 담배 냄새도 이제는 전혀 나지 않았다. 재영은 그날 이후로 정말 담배를 끊은 모양이었다. 분명하진 않았지만, 다시 예전처럼 내 앞에서는 피우지 않게 되었다.

스물이 되면 괜히 새 출발도 해 보고 그러고 싶은 거라는 재영의 말이 설득적이라 나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재영은 처음부터 내게 직선의 생각을 주로 한다고 일러주었다. 자신의 기준에 옳은 거면 옳은 거고, 틀린 거라면 명확히 틀린 것이라고 했다. 본인이 생각할 때 맞다고 생각하면 의문을 가지지 않는 방식이 재영이 말한 직선의 방식이었다. 어쩌면 그건 내게 가장 필요했던 생각의 흐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는 점차 내 생각의 흐름을 재영의 방식으로 맞추려 노력했다.

나를 스쳐 욕실로 들어가는 재영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재영이 욕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나서야 숨을 뱉었다. 그제야 내가 재영을 보며 숨을 참고 있었음을 자각했다.

“하아… 진짜. 이게 뭔데.”

소파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재영이 들어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물 아래 땀에 젖은 재영이 나체로 서 있을 모습을 상상했다. 재영의 집에서 지낼 때 욕실에서 봤던 재영의 몸이 자연히 떠올랐다. 남자면서 똑같이 남자인 재영의 몸을 기억하는 것도 우스웠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 된 기분이었다. 처음 겪는 혼란이었다.

* * *

일정대로 9월이 되어 본 학기에 들었다. 재영과 나는 과가 달랐다. 재영은 정규적인 시험을 거쳐 합격한 정식 학생인 반면, 나는 재단이 준 장학생이라는 명분으로 특별히 추가로 입학하게 된 케이스였다. 재영은 약리학과로, 나는 스포츠 마케팅으로 과도 나뉘었다. 과가 다른 것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다만, 재영 없이 낯선 곳에 혼자 있다는 것만은 분명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대학교의 첫 강의에서 내가 알아들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재영과 내가 나온 고등학교도 전국의 상위권 아이들이 꽤 많은 학교였지만 막상 이곳에 오니 이곳 사람들은 그곳의 아이들과도 비교되지 않아 보였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어색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두 달의 놀이가 무색할 만큼 나는 재영처럼 덤덤하게 앉아있지 못했다. 불안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거라 생각했다. 얼른 재영이 나타나 날 끌고 집으로 돌아가 주길 바라는 미숙한 마음도 들었다.

재영은 내게 당분간은 수업 내용을 모두 녹음하는 게 좋을 거라 했다.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집에 와서 다시 천천히 들어보면 알 수도 있다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거기에 더해 만약 그래도 모르겠다면 자신이 듣고 해석해주겠다는 말로 나를 달랬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잘해줄까, 라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재영은 “내가 여기까지 오자고 한 거잖아. 나도 책임감 같은 걸 느끼나 보지.”라며 웃었다. 재영을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책임감이라는 단어에서 평소와 달리 비장한 표정을 짓던 재영이 떠올라 웃음이 난 덕분이었다.

“저기. 혹시 한국인… 맞죠?”

“네? 네.”

책상을 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순간 재영에게 배운 덤덤한 표정을 짓는 법과 말하는 법도 잊은 채 본래의 나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보이고 말았다.

태어나 보라색으로 염색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보라색의 반곱슬머리가 남자의 속눈썹 위에서 흔들렸다. 남자는 웃음이 나오려는 듯 입술을 비틀며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얄쌍하게 마른 턱과 대조되는 넓은 어깨가 이목을 끌었다.

“와. 신기해. 여기 한국인 별로 없다던데.”

“아, 네.”

“수업, 재미없죠?”

남자는 친한 척을 하며 자신의 책상을 당겼다. 몸이 가까워진 게 불편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덮어 문질렀다. 이곳에서 누구와 친해질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 누구와도 친해질 마음이 없었다.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남자는 주절주절 몸을 낮춰 자신의 이야기를 이었다.

“이 과에 온 거 보니까, 그쪽도 집만 잘 살고 머리는 좀 나쁜 쪽?”

눈을 찌푸렸더니, 남자는 눈까지 꼭 감고 웃기 시작했다.

“원래 정식 학과는 스포츠 경영이고, 이 과는 추가로 돈 내고 오는 애들만 뽑는 과거든요. 그쪽만 알고 있어요. 제가 민족주의가 있어서, 한국인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라고 혼자 정했거든요. 민족주의. 어제 외운 단어인데, 아주 마음에 들… 근데, 이십 맞죠?”

“이십이요?”

“아, 스… 스물?”

눈을 끔벅였다. 귀찮고 짜증이 나 당장이라도 무시하고 싶었다. 재영에게 배운 예절과 매너가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로비로 나가버렸을 것이다. 남자의 보랏빛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남자는 한국어로 말했지만, 말투는 묘하게 외국 억양이 섞여 있었다. 자신 딴에는 목소리를 낮춘 것 같았으나 워낙 조용한 강의실이라 그마저도 눈치가 보였다. 하필 남자의 머리 색도 보라색이었다. 게다가 이 강의실에 동양인은 우리 둘뿐이었다. 교수의 눈에 띄는 건 시간문제였다. 단상에 선 교수의 눈치를 보고 다시 고개를 책상으로 돌렸다.

“그럼, 말 놓을까? 나도 같은 나이. 나는 진짜 엄청 멍청해서, 여기 돈 내고 왔거든. 너도야? 너도 멍청해? 아. 나는 루마니아에서 왔어. 부쿠레슈티 알아? 거기는 겨울에 비가 잘 안 오거든? 근데 여기 겨울은 비가 온대. 겨울에 비 오는 거 좋아해?”

“아뇨.”

“왜 반말 안 해? 나보다 더 어려?”

“…아니.”

흘깃 노려보고 다시 책상을 쳐다봤다. 녹음하기 위해 책상에 올려두었던 폰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상한 놈을 만나 오늘 강의는 더더욱 알아들을 수 없게 됐다. 한숨을 내쉬고 폰의 녹음을 중지했다. 폰을 주머니에 넣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미안한데 넌 영어 잘 알아듣는지 몰라도, 난 못 알아들어. 그래서 녹음해야 하거든?”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너도 여기 돈 내고 온 거네.”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눈을 꼭 감고 웃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입을 다물지 않는 한 교수에게 들키고 말 거다. 첫날부터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았다. 이를 꽉 깨물었다. 한재영이었어도 이 순간에는 화를 내고도 남을 것 같은데. 웃음으로 들썩거리는 저 볼을 딱 한 대만 세게 때리고 싶었다. 웃던 남자가 다시 몸을 웅크리고 내게 붙었다. 몸을 뒤로 물렀다.

“걱정하지 마. 여기 있는 애들, 거의 다 영어 못할걸? 다 브라질, 독일, 쟤는 인도. 쟤는 스페인 아니면 멕시코, 아까 우노, 도스, 트레스. 이러는 거 내가 들었…….”

“원래 말이 많아?”

“오. 너 그 동양… 한국 엑소시스트. 무당. 그런 거야?”

“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이마를 짚고 폰을 꺼냈다. 재영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재영도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니 당연했다. 재영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겠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웬 미친놈이 지독하게 말을 건다는 험담을 문자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진짜? 너, 무당?”

“아니. 무당 아니고, 부자도 아니야. 넌 어떤지 모르겠는데, 난 돈 없어. 그리고 지금 조용히 있고 싶어. 나 수업 듣고 싶거든?”

“거짓말. 그럼 너 공부 잘해?”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대열이 틀어질 정도로 책상만 더 가까워졌다.

“아니.”

“거봐. 못 하잖아.”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남자에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눈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싫은 티를 내고 있는데도 남자는 히죽대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도 공부 못하지만, 집에 돈이 있어서 그걸로 온 걸 거야. 눈치 보지 마.”

“알겠으니까… 말 좀 그만, 제발 그만 걸어줄래?”

“왜? 바빠? 나중에 말할까?”

지금도 싫었지만, 나중은 더 싫었다.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면 당장 재영이 있는 건물로 달려나갈 생각만 했다. 학교 앞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기로 한 것만 생각하며 차오르는 화를 삭이려 애쓸 때였다.

남자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났어도 교수와 눈이 마주칠 뻔했다. 고개를 홱 돌려 짜증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날 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난 바드. 브이, 에이, 디. 풀 네임은 ‘조시프 바드 초안’인데, 그냥 바드라고 부르면 돼. 브이, 에이… 디.”

다음 수업 땐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제일 앞에 앉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이 눈앞의 미저리이자 머저리이기까지 한 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영이라면 그래도 상대가 민망하지 않게 답은 해줬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며 억지로 바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바드. 이제 그만 말하면 안…….”

“넌?”

바드가 내 팔꿈치를 꼬집으며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영어 이름은 없어.”

“아니. 한국 이름. 나, 너의 한국 이름이 알고 싶어.”

“이호정. 됐지? 진짜 말 좀 그만 걸어줄래?”

“나도 한국 이름 있어.”

바드가 해맑게 웃었다. 이번에도 내 팔꿈치를 잡을까 봐 팔을 허리에 붙여 숨겼다.

“나는 김민재입니다. 아니다, 민재예요. 김민재야. 뭐가 가장 자연스러워?”

“뭐?”

표정을 굳히고 바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드는 보라색 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며 아이처럼 웃었다.

“김민재. 한국인이 듣기에는 어떤 느낌의 이름이야? 우리 그랜마가 지어준 건데, 늘 궁금했거든. 좋은 느낌이야? 좀 섹시한 느낌이면 좋겠는데.”

바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민재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외모였다. 옅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바드의 눈 중간쯤까지 내려왔다. 바드를 향해있던 시선을 느리게 옮겼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한국에서 이거 섹시 네임, 맞아? 한국인의 감각으로 솔직하게 말해줘. 난 상처받지 않아. 절대. 네버.”

“좋은 이름이야. 섹시는… 어, 그쪽은 아닌데. 한국에서는 무난하고 평범한 이름이야. 그쪽이 전혀 평범하지 않아서 어울려.”

“무난? 무는 알아. 먹는 거. 맛없어. 우리 그랜마가 좋아해.”

바드는 무난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꺾었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눈길에 결국 “그냥 평범이랑 같은 의미인 단어야.”라고 덧붙였더니 오버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한국어 천재.”

“하아.”

“호정도 고추 잘 먹어?”

“어어.”

귀찮았다. 대충 답만 해줬는데도 바드는 호들갑을 떨며 “매운 고추 맛있지?” 같은 소리를 해댔다. 그 뒤로 몇 분간은 더 고추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귀에 고춧가루라도 뿌린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귀가 따갑고 얼얼할 정도였다.

다행히 예상보다 빨리 수업이 끝났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보니 첫 강의라 간략하게 수업의 개요와 학과 소개만 한 듯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난 것에 만족했다. 폰을 꺼내 재영에게 먼저 연락을 보냈다. 수업이 생각보다 더 일찍 끝나 네가 있는 건물로 갈 수 있겠다는 연락이었다. 바드는 내가 재영에게 연락하는 동안에도 강의실을 나가지 않고 내 옆에 있었다. 벌써 모든 아이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강의실에 남은 건 나와 바드뿐이었다. 가방을 쥐고 바드를 쳐다봤다. 바드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내 옆에 붙었다.

“안 가?”

“나는 한국인 친구. 가지고 싶었는데.”

“너 원래 성격이 이래?”

“오. 내 성격이 어떤데? 굿이지? 나 친구도 많아. 근데 한국인 친구만 없어. 왜일까?”

한국인이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귀찮고 불편하고 사람 난감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성격. 나대고 말 많고 타인의 상황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그런 성격.

“나 갑자기 생각났는데, 전에 우리 그랜마가 굿이 한국에서는 너 같은 무당들이 하는 그런 운동? 댄스랑 비슷하다고 했었거든? 그런데, 나는.”

“너.”

한마디로 정말 민재, 내 유일한 친구였던 민재의 성격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재는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무턱대고 말을 잘 걸었다. 마트에서 나올 때마다 아주머니들에게 “이 마트는 중학생을 아르바이트생으로 써도 되나?” 같은 너스레를 떨어 기어코 아주머니들의 웃음을 얻어내던 게 민재였다.

내가 처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자기 할 말만 해대는 것도. 철없어 보이는 말을 밉지 않게 해대는 것도. 이 보라색 머리를 한 바드가, 내가 아는 민재와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민재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 내 친구랑 닮았어.”

바드는 방금 내가 한 말이 칭찬이 맞느냐고 되물었다. 답하지 않고 바닥에 두었던 가방을 손에 쥐었다.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중에 폰이 울리는 것도 알지 못했다. 무턱대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밖에서는 최대한 민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민재 생각만 하면 아직도 복잡한 감정이 들었는데, 거의 전부 민재를 향한 죄책감과 미안함이었다. 복도의 바람이 코와 입으로 무차별적으로 들이닥쳤다. 계단을 오르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1층까지 쉬지 않고 단번에 내려갔다. 재영이 있는 건물은 우리 건물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그곳까지 뛰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호정아.”

헉헉대는 숨을 정돈하지도 못했다. 건물 입구에 재영이 서 있었다. 재영은 손에 우산을 쥔 채 울먹이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폰을 귀에 대고 있는 걸로 보아 지금 내 주머니에서 울리는 전화의 주인 역시 재영인 것 같았다. 한쪽으로 고개를 꺾은 재영이 눈을 찌푸렸다. 나를 자세히 보기 위해 그런 듯했다.

“비가 와서, 데리러 왔어. 수업 가려다가 아무래도 첫 수업이라 쓸데없는 소리만 할 거 같아서 안 갔거든.”

재영이 천천히 내게 걸어왔다. 재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고 나를 응시했다. 내 꼴 어딘가가 못마땅하기라도 한 건가 생각했지만, 재영이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너 지금 이호정인데.”

“어?”

“내가 아니라, 이호정이야. 이건.”

재영이 내 턱을 부드럽게 쓸었다. 턱을 잡은 손을 잡아 내렸다. 재영의 손이 스르륵 아래로 떨궈졌다. 재영은 여전히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이 평소와 달리 어두웠다.

“난 원래 이호정이야.”

“그건 그렇네.”

재영이 평소처럼 살포시 미소 지었다.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내밀기에 멍하니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호흡은 엇박자로 뱉어졌다. 들숨이 필요한 순간에 뜨거운 숨이 입을 타고 뱉어졌다. 바드를 보다가 민재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날 뻔했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에게도 이런 추한 꼴을 보이기 싫어 무턱대고 달린다는 게 엉뚱하게 숨만 격하게 만든 셈이었다. 얼굴도 뜨거웠다. 재영의 우산을 받기 위해 내민 손이 아닌 나머지 손으로 땀이 흐른 목을 닦았다.

“계단을 좀 뛰어 내려왔더니.”

“그래?”

재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재영이 내민 우산을 쥐려는데 재영이 자신의 뒤로 우산을 숨겼다. 허공에서 손이 엉성하게 멈춰졌다. 멍하니 재영을 올려보았다. 재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가기로 했던 집이 문을 닫아서, 집 가서 먹으면 어떨까 싶은데.”

“난 상관없어.”

재영은 자신의 우산을 내게 내어주었다.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펼치려 하기에 다급히 손을 뻗어 재영의 손을 저지했다.

“주차장까지 금방이니까…….”

“…응.”

“우리 이거 하나만 쓰고 가자.”

재영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들고 있던 우산의 몸통 가운데를 쥐었다. 우산살과 겉의 비닐이 살짝 구겨졌다. 재영은 뛰지도 그렇다고 걷지도 않았다. 다행히 비도 약하게 날리는 정도라 발을 젖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영의 발만 보고 걸었다.

오늘 학교에서 민재와 이름이 같은 친구를 만났다고 말할까 망설였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괜히 하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여자 친구 앞에서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것처럼 입술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결국 입안에 구르는 말을 뱉지 못하고 재영의 발만 따라가다 오도카니 멈추었다. 재영이 걸음을 멈춘 탓이었다. 재영이 내 어깨를 안았다. “무슨 생각해?”라고 묻는 재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수업 이후 줄곧 멍하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무, 아무 생각도 안 해. 그냥 좀, 첫날이니까.”

“긴장했구나.”

“응.”

재영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트에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재영은 익숙하게 자신의 폰을 내게 내밀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도 된다는 의미였다. 재영은 여전히 내가 틀어주는 노래만 들었다. 며칠이 지나 폰을 보아도 이전에 나와 같이 듣던 곡이 마지막 곡으로 늘 정지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 노래, 좋더라.”

“응. 틀어줘.”

차를 출발하는 재영을 보다가 재빨리 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국에 온 후로 줄곧 이상한 감정이 요동쳤다. 재영을 볼 때마다 드는 감정이 무엇의 발화점인지 알 수 없었다. 감정에도 가연성이라는 게 있는지 요즘은 틈만 나면 제멋대로 감정에 불이 붙어 이글거렸다. 마음이 모난 사람처럼 일순간 재영이 미워지다가 싫어지다가 급격히 좋아지기도 했다. 말없이 연락이 안 되면 종일 짜증이 났다. 거의 매일 내 집에 찾아와 냉장고를 채우고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놓다가도 재영은 하루 동안 말없이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이런 감정의 들썩임은 오직 내 탓이었다. 남자인 내가 같은 남자 친구에게 이런 걸로 서운함을 느껴선 안 됐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내 마음이 많이 각박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재영의 탓이 아니었다. 노래를 찾아 재생을 누르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 하고 숨을 내뱉고 나니 다행히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다.

재영이라면, 한재영이라면 고작 친구라는 이유로 이런 감정을 느끼지는 않을 거다. 친구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게 재영의 삶일 테니까. 친구가 연락하지 않는 거로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굳이 재영까지 갈 것도 없었다. 나 또한 민재가 살아있을 때, 민재가 연락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진 않았으니까. 며칠 동안 연락이 없어도 그러려니 했다. 문득 죽기 전에 며칠이나 민재와 연락하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늘 민재가 먼저 연락을 해왔기에 내가 먼저 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느라 바빴다는 건 역시나 핑계에 불과했다.

“하아.”

분명 괜찮다가도 민재는 파도처럼 세차게 내 죄책감을 몰아붙였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노도가 몰려드는 날이었다. 성난 파도가 내 몸을 휘청대게 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려는데 내 손보다 재영의 손이 먼저 내 이마를 짚었다.

“생각보다 더 놀랐나 보네.”

“응.”

“교수님 말하는 건 어땠어? 이해했어?”

내 이마를 덮은 재영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재영의 손이 따뜻했다.

“전혀. 하나도. 나중에 녹음한 거 들려줄게. 해석해줄 수 있어?”

“당연하지.”

재영의 다정함이 자꾸 좋아져서 큰일이었다. 귀찮은 바드 때문에, 수업의 지루함 때문에, 낯선 사람들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나는 강의실에서 재영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의존은 결코 옳은 게 아니었다. 나중에는 재영이 없으면 흔한 결정조차 내리지 못할 비루한 인간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친구를 존경하는 것과 그에게 한없이 의지하고 위탁하는 건 전혀 다른 결이었다. 재영의 손을 끌어 핸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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