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봉쇄(1)
재영은 익숙하게 우리 집 문을 먼저 열고 들어갔다. 장 봐 온 것들을 정리하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모두 재영이 했다. 재영은 본가에서 일하는 요리사가 한식이 전문이라 예전에도 틈이 날 때마다 아저씨에게 요리를 배웠다고 했다. “요리는 왜? 보통 다 해주시지 않아?”라고 물었더니, 재영은 물끄러미 나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는 이렇게 챙겨줄 사람이 생길 것 같았거든.”
재영이 그냥 던진 말에 바보처럼 입술만 뻐금거렸다. 별거 아닌 말이라고, 그냥 태생이 다정한 놈이라 남자에게도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을 때였다.
“엄마가 결혼하면 아내한테 이런 걸 해주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고 그랬어. 본인 이상형이 그런가보다, 생각하긴 하지만.”
재영은 익숙하게 우리 집에 있는 주방 기구들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었다. 못내 서운한 감정이 일었다. 아내, 결혼. 모두 생소한 것투성이지만, 재영을 보고 있자면 그럴듯하게 어울렸다. 좋은 남편이 될 것 같았다. 좋은 아빠도 되겠지.
어색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재영의 등을 쳐다보았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볼 것도 없으면서 괜히 폰 화면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캘린더의 일정도 확인하고, 아침 알람 시간도 확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영의 음식 솜씨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솜씨보다 더 좋았다. 한 그릇도 모자라 두 그릇을 비웠다. 재영은 턱을 괴고 내가 밥 먹는 걸 흐뭇하게 바라봤다.
“밥 다 먹고, 녹음한 거 같이 들을까?”
“참고로 나 하이, 이후로는 그냥 알아들은 말이 없어. 수업이 로또 수준으로 맞는 게 없어.”
“녹음은 다 한 거지?”
“응. 아, 아니.”
쉴 새 없이 옆에서 떠들어대던 바드가 떠올랐다. 이유 없이 동작이 어색해졌다. 숟가락을 내리고 테이블에 폰을 올렸다.
“응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재영이 부드럽게 물으며 빈 접시를 가져갔다.
“호정아.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아니. 진짜 ‘응’도 아니고, ‘아니’도 아니고. 애매해서 그래. 너도 들어보면 알 거야.”
“그게 뭐야.”
재영이 피식대며 웃었다. 물을 틀어 접시를 씻은 재영이 턱짓을 해 보였다. 폰에 녹음했던 걸 틀어보라는 의미였다.
“궁금해서라도 빨리 듣고 싶은데?”
쭈뼛대며 오늘 녹음한 수업 파일을 틀었다. 테이블 위에 폰 화면이 천장을 향하게 놓았다. 재영이 들을 수 있게 음량을 최대한으로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같은 건 없었다. 그나마 들린 ‘unfamiliar’라는 단어에 희망을 걸었다. 낯선 환경에 기죽지 말고 잘 적응하라는 건가, 익숙하지 않을 테지만 익숙해지려는 노력이라도 해 보라는 의미일까, 생각하며 재영을 바라보았다.
“나 방금 하나 들었다? 언패밀리어.”
“응. 기특해. 예쁘네.”
재영은 나를 보던 눈을 거두고 고개를 떨구었다. 어깨를 들썩이는 걸로 보아 바보 같은 내 모습에 웃음이 터진 것 같았다.
“야. 너 지금 나 비웃는 거지?”
“아냐.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그래. 너 중학교 때 얼굴 생각나서.”
“나 중학교 때 얼굴을 네가 어떻게 알아?”
재영이 눈썹을 달싹였다. 재영은 미소만 지은 채 냉장고 문을 열어 내가 좋아하는 탄산음료를 꺼냈다. 가까이 다가와 음료부터 내밀기에 질문도 잊고 캔을 땄다. 재영을 응시한 채로 음료를 들이켰다. 재영은 내가 아닌 테이블에 놓인 폰을 보고 있었다.
“그때, 차 안에서 보여줬었잖아. 민재 집 다녀와서.”
“아. 그러네. 잊고 있었다.”
재영은 내 머리에 손을 얹으려다 테이블에 놓인 폰을 먼저 가져갔다.
“다시 처음부터 들어도 되지? 말하느라 못 들었어.”
“응. 혹시나 과제 있다고 하면 말해줘. 다음에 챙겨가야 하는 것도. 나 다른 사람들 눈에 최대한 안 띄고 싶거든.”
“응. 그건 나도 바라는 거야.”
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녹음된 걸 앞으로 돌린 후 다시 폰을 테이블에 올렸다. 둘 다 녹음된 음성에 귀를 기울이느라 주변이 조용해졌다. 두 번을 들어도 교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교수의 말보다 앞자리의 누군가가 속삭이는 ‘우노’, ‘도스’ 같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바드의 말처럼 정말 이 과에는 영어를 못 하는 아이들이 더 많나 생각하던 찰나였다.
녹음된 파일을 듣던 재영이 내 손을 가져갔다.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무슨 글자일지 모를 글자를 쓰기 시작하는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손바닥이 간지러워 자꾸만 웃음이 샜다. 재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톱을 세워 내 손바닥을 긁었다. 손바닥에 집중했지만, 아무리 봐도 재영이 쓰는 글자가 한글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림에 가까워 보였다.
“저기. 혹시 한국인 맞죠?”
녹음된 파일에서 바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지금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뱉어진 말에 나도 모르게 괜히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녹음 파일에선 계속해 바드의 수다스러운 음성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재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재영의 눈치를 살피던 눈을 내렸다. 바드가 내 바로 옆에 앉은 덕에 녹음된 파일에서도 바드의 목소리가 교수의 목소리보다 더 컸다. 바드는 다시 들어도 정말 지독하게 수다스럽고 눈치가 없었다. “여기 한국인 별로 없다던데.” 하며 웃는 목소리가 너무 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반말 안 해? 나보다 더 어려?”
“아니.”
녹음된 내 목소리도 듣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알던 내 목소리와 녹음된 파일 속 내 목소리 간의 괴리감으로 괜히 멋쩍은 웃음이 났다. 녹음은 여기에서 중지되었다. 바드가 쉽게 말을 멈출 것 같지 않아 내가 폰으로 하던 녹음을 정지했기 때문이었다.
“…내 목소리가 좀 이상하게 들리네.”
어색함에 괜히 아무 말을 덧붙였다. 재영은 여전히 내 손목을 꽉 쥔 채로 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괜히 재영의 눈치가 보이고 몸이 움츠러졌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친해질 생각도 없다는 변명이 왜 속에서 우글우글 기어 나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친구를 상대로 이런 일에 변명과 핑계부터 떠올리는 내 모습이 녹음된 내 목소리만큼이나 생소하고 낯설었다.
“한국인이래. 여기서 한국인을 보니까 반가웠는지 말이 너무 많은 거야. 목소리도 좀 크고 어차피 녹음해도 안 들릴 것 같아서 더는 녹음 안 했어. 얘 목소리만 나올 거 같아서.”
“잠시만.”
“어?”
재영은 내 폰을 다시 가져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녹음은 다시 바드가 처음 내게 말을 걸던 순간으로 되감겼다. 바드가 내 나이를 묻는 타이밍에 재영이 정지 버튼을 누르며 날 쳐다봤다.
“교수가 과제를 내줬는데?”
“아, 그래? 언제까지래?”
괜히 머쓱해져 볼을 긁었다. 재영은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음 주 수업까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종목 하나씩 선정해서 리포트 써 오래.”라고 답했다. 애초에 교수의 말에 집중하느라 바드가 하는 말은 듣지도 않은 듯했다.
재영은 내가 마시던 캔을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재영의 목울대를 향하던 시선을 내렸다. 저 정도의 집중력은 되어야 전교 일 등도 하고 이런 대학에도 정식으로 올 수 있는 거였다. 괜한 눈치를 살폈던 것에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학교에 간 동성의 친구가 동성의 다른 친구와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둘 친구는 없을 테니…….
아니, 그래도 이 넓은 학교에서 같은 과에 한국인이 있다는 건 좀 놀라울 만한 일인 거 같긴 한데…….
다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재영을 쳐다보았다. 재영은 또다시 내 손이 노트라도 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이것저것을 쓰고 있었다. 재영을 보던 시선을 내렸다. 손톱으로 내 손바닥을 긁던 재영이 고개를 들어 볼똑하게 솟은 내 볼을 한 손으로 감쌌다. 공기가 어색해졌다. 재영의 옆으로 당겨진 폰을 끌어 주머니에 넣었다.
“발표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우물쭈물 눈을 피하며 말했다. 재영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는 발표 없다고 들었어. 지금처럼 교수가 리포트 내주는 건 내가 도와줄게. 영어로 써야 하잖아.”
“발표가 아예 없다고?”
“아마도?”
“왜? 멍청한 애들만 오는 데라서?”
이 과는 돈만 내면 온다던, 멍청한 애들만 오는 과라던 바드의 말이 떠올랐다. 괜히 창피해졌다. 내 성적과 머리 수준을 아는 재영 앞인데도 부끄럽고 창피해 얼굴이 다 화끈해졌다. 재영은 내 볼을 약하게 꼬집었다.
“누가 너한테 그런 개소리를 했지?”
재영의 입에서 나온 개소리라는 단어에 웃음이 났다. 이런 말도 쓸 줄 아는구나 싶었다. 고개를 꺾어 재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좀 전의 그 친구가 알려줬어. 애가 좀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악의는 없는 거 같았어.”
단호한 목소리처럼 재영의 표정도 묵직하게 변화가 없었다.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에 귀 뒤가 움찔하며 저렸다. 고개를 살짝 꺾었다. 손으로 귀와 목 사이를 매만졌다.
“얘 이름이 뭐래?”
재영이 잔잔하게 웃으며 물었다. 바드의 원래 이름과 한국 이름 중 무얼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내 볼에 있던 재영의 손이 멀어졌다.
“오늘 너한테 개소리한 애 이름. 뭔데?”
“아. 어…….”
녹음된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도 바드가 하는 말을 놓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 민재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다 인간이 아니라고 했었다. 한 과목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우리와 달리 수학 강의를 들으면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문학책을 읽으면서도 영어를 중얼거린다고 했었다. 민재는 마치 신화 속 인물이나 전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법 진지한 표정을 하며 그러니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랑은 어울릴 생각도 하지 말라며 덧붙이기도 했었다. 나보다 조금 더 똑똑한 자기 같은 친구들이나 나에게 어울린다고 말하던 모습이 생각나 비린 웃음이 났다.
“한국 이름이 김민재래. 루마니아 이름은 바드. 한국인인데 루마니아에서 살았대.”
어색하게 말했다. 재영도 민재의 이름에 마음이 아픈 모양이었다. 재영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오늘 정말 놀랐겠다.”
“조금?”
“그래서 그렇게 눈을 빨갛게 하고 달려온 거야?”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재영의 손을 끌어 테이블에 놓고 그 위에 내 볼을 턱과 볼을 기댔다. 재영은 나머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쪽팔리니까 너만 알고 있어. 눈물이 좀 날 것 같긴 하더라. 괜찮다가도 불쑥불쑥 그 새끼 생각나. 친구라고 할 만한 애는 민재뿐이었으니까. 놀자고 할 때 더 놀아줄걸, 피시방도 빼지 말고 따라가 줄걸. 너희 집에 가라며 쫓아내지 말고 밥도 더 주고 더 쉬게 해주고 그렇게, 그렇게 좀 더 같이 있다가 보낼걸. 그런 생각이 들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재영의 손이 내 목 뒤로 들어왔다. 목 뒤의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움직임에 눈을 감았다.
“호정아. 난 네가 말하는 그런 감정은 잘 몰라.”
감았던 눈을 떴다.
“나, 그런 친구는 없었잖아.”
고개를 돌려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재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한테 너라는 친구가 생기니까, 조금은 알 것 같아. 네가 없으면… 네가 사라져버리면 어떤 느낌일까. 아마 지금 너랑 비슷할 거 같긴 한데.”
“걱정 마. 난 네 옆에 안 사라지고 오래 살 거니까.”
재영이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약하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재영의 손이 멀어졌다. 턱과 테이블 사이에 있던 재영의 나머지 손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재영이 돌아간 후 새벽까지 혼자 잠들지 못했다. 졸리지도 않았다.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민재가 죽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내가 민재를, 하나뿐이었던 친구를 잠시나마 잊었다는 사실에 화도 났다.
결국 침대 옆에 둔 노트북을 켜고 베개에 기대앉았다. 민재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라도 해야 갑갑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것 같았다. 포털사이트 메인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며 민재 아버지 회사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다.
“하. 틈날 때마다 민재가 자랑하던 회사 이름인데. 왜 기억이 안 나냐고. 금붕어야.”
이럴 때마다 내 기억력이 나쁜 것에 화가 났다. 검색창에 점멸하듯 깜박깜박 움직이는 커서에 신경을 집중했다.
‘야. 우리 아빠 회사가 전국 물류 3등인 거 모르지? 너 나한테 잘해, 새끼야. 잘하면 내가 나중에 우리 회사 한자리 줄 수도 있잖아. 예를 들면 뭐 내 비서? 그런 거. 그러니까 빼지 말고 내 커피 취향 같은 거 미리미리 파악해두라고.’
민재가 했던 말이 잔상이 되어 머리를 스쳐 지났다. 나쁜 기억력 중에 그나마 이 정도의 기억이라도 난 게 다행이었다. 검색창에 ‘물류’라는 글자를 넣었다.
“두 글자, 두 글자 무슨 물류였는데. 씨. 한재영이었으면 바로 기억했을 텐데.”
화면을 천천히 내렸다. 검색 사이트를 쭉 내려도 어느 회사가 민재 아버지의 회사인지 불분명했다.
“물류 회사 이름은 다 비슷하네.”
화면을 끄고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재영처럼 생각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재영의 뇌를 내 뇌로 이식한다 해도, 내 세포 자체가 무식한 탓에 그 잘난 뇌도 내 세포 수준에 맞춰질 것 같았다.
“부고. 냈으려나….”
다시 노트북을 열려다 참척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던 민재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민재의 부고를 냈을 리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이 뜨겁고 귀 뒤는 전기라도 통하는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날은 여전히 따뜻한 편인데 이른 감기라도 드는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엌에 가 물이라도 한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까지 하는 중에 침대에 둔 폰이 울렸다. 재영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았더니, 재영의 숨소리만 들렸다. 미간을 좁히고 폰을 반대편 귀로 옮겼다.
“재영아?”
재영은 말을 하지 않았다. 전화만 하고 답이 없으니 무슨 일이라도 난 걸까 걱정이 될 때쯤이었다.
“잠시, 잠시만. 호정아.”
처음에는 달리는 사람의 숨소리처럼 흔들리던 숨이 이제는 그 뜀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도 여전히 평소와는 다른 격한 숨소리였다.
“야. 한재영!”
몇 번 재영의 이름을 더 불렀다. 재영은 느리게 숨을 정돈했다. 재영의 숨이 차분해진 느낌이 드는 순간, 재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호정아. 집이면 문 좀 열어줄래?”
“우리 집? 왜? 너 집 아니었어?”
복도를 빠르게 걸어 1층으로 내려갔다.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그 틈으로 재영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놀라 눈만 껌벅댔다. 재영의 손에 아직 뜨거운 김이 나는 일회용 컵이 쥐어져 있었다. 재영은 좀 전의 차분하던 목소리와 달리 여전히 달뜬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웃기 시작했다.
“뭐야, 밤에 갑자기.”
“친구 데려다주다가 갑자기 너 생각났는데, 따뜻한 거 사주고 싶어서 쥐고 달려왔지. 커피.”
어색하게 손을 뻗었다. 헤실헤실 웃던 재영의 몸이 내게 기울어졌다. 무거운 재영의 몸을 받쳤다. 손에 든 커피를 쏟기라도 할까 봐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재영의 몸에서 옅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아빠는 사업이 부도를 맞은 후로 자주 술을 마셨다. 거의 매일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았다. 술을 끊는 것보다 자신이 죽는 게 더 쉽고 빠를 거라는 말을 습관처럼 해대던 아빠 덕에 나는 타인에게 풍기는 미약한 술 냄새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재영이 왜 술을 마셨느냐보다 더 궁금한 질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너 술 누구랑 마셨어? 여기 벌써 친구가 생겼어?”
본능적으로 불쑥 누구랑 마셨느냐는 질문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재영이 술을 마셨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가장 궁금한 게 누구와 마셨는지라는 게 못내 불편했다. 손에는 여전히 위태롭게 흔들리는 커피를 쥔 채로 재영의 몸을 약하게 밀어냈다.
“누구랑… 음…….”
재영이 답할까 서둘러 말을 끊었다.
“아, 됐어. 어디서 마셨는데?”
“우리 집에서. 어릴 때부터 알던 애랑 마셨어. 대학은 다르지만 둘 다 대학 첫날이라는 기념으로.”
재영이 몸을 일으켰다. 재영은 한 문장마다 숨을 내쉬며 느리게 답했다. 세 문장이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뱉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보기에 재영은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의 향은 재영의 몸에 붙은 밤 냄새와 같았다. 비린 냄새였다.
영국에 온 지 두 달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재영의 집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굳이 내부를 볼 필요는 없다고 해도, 재영도 나를 집으로는 부르지 않았기에 볼 수도 없었다. 더불어 내가 갈 일도 없었다. 내가 가기도 전에 재영이 늘 먼저 우리 집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재영은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이거 줬으니까 난 이제 갈게. 호정아. 너 내일 몇 시 수업이랬지?”
“아침 수업이긴 한데.”
“그럼 같이 가. 나 10시 반 타임에 수업 하나라 같이 가면 되겠다. 너 학교 데려다주고, 나는 학교 앞에서 공부 좀 하고 수업 들어가면 되니까.”
재영은 내 손에 쥐여 준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내 손이 재영의 손에 완전히 가려졌다.
“잘 자.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
재영의 손에 안긴 손바닥으로 커피의 뜨거운 열이 전해졌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재영은 커피를 쥔 내 손을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표정을 굳히고 있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불쑥 재영이 걱정되었다.
“자고 갈래? 집도 바로 앞인데 굳이 너희 집에 갈 필요 없잖아. 너 갈아입을 옷도 여기 있고, 내일 어차피 나 데리러 여기 올 건데 귀찮기도 할 테고. 피곤할 거 같기도 하고… 그냥 여기서 같이…….”
“호정아.”
“어?”
“길게 말하지 않아도 돼. 나 자고 갈게.”
재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멍청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보같이 눈만 깜박거렸다. 양손으로 커피를 세게 쥐었다. 손가락 끝이 빨개질 정도로 커피가 뜨거웠다. 재영은 내 손에 들린 커피를 다시 자신의 손으로 옮겼다. “손 데면 어쩌려고. 아까운 손인데.”라는 말이 평소의 재영답게 다정했다.
열려있던 문을 닫고 재영을 따라 2층 계단을 올랐다. 재영의 뒤꿈치와 종아리만 보며 걸었다. 괜히 볼을 긁었다.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앞서 걷던 재영이 걸음을 멈추고 아래에 선 나를 돌아보았다. 재영을 따라 계단을 오르던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재영은 계단의 가운데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재영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혹시나 나보다 먼저 재영의 집에 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친구를 의식하고 있는 내 꼴이 들키기라도 한 걸까 두려웠다.
“호정아. 이리 와봐.”
재영은 머그 리드를 한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나머지 손을 까닥이는 움직임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계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재영은 벽에 등을 기댔다. 자신보다 높은 곳에 선 내 움직임을 따라 재영의 눈이 움직였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재영을 쳐다봤다. 벽에 등을 붙인 재영이 커피를 계단 난간에 두고 손을 뻗었다.
허리를 감싸는 손이 차가웠다. 밤이라 바깥 공기가 서늘한 탓이었다. 재영의 손이 닿은 등으로 시린 바람이 살갗을 뚫고 들어와 작게 몸을 떨었다.
“추워?”
“조금.”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재영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호정아.”
재영이 재차 내 이름을 불렀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영이 아니라 재영을 보는 내가 위험했다. 이성 간이 아니고서야 이런 감정과 스킨십은 이상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재영이야 천성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라지만 나는 아니었다. 민재와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고 험한 말도 하던 나였다.
재영에게는, 유독 재영에게만은 그 모든 게 어려웠다.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내 모습이 자연스러운 건 아니었다.
“씻어. 따뜻한 거… 마실 거 뭐라도 내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댔다. 재영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난간에 두었던 커피를 다시 들었다. 고개를 드니 재영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재영은 내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먼저 계단을 올랐다.
“알았으니까, 떨지 마.”
“나 안 떨었는데.”
재영이 의아한 눈길로 나를 내려 보았다.
“아까 춥다고 했었잖아?”
재영이 눈을 깜박거리며 날 빤히 쳐다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다시 재영의 뒤로 슬그머니 걸음을 붙였다. “얼른 가.”라고 재촉하니 재영은 별다른 말없이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중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먼저 누웠다. 재영이 오면 잘 수 있게 옆 베개를 가지런히 펼치다가 괜히 이런 꼴도 우스워 정리하던 베개를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민재가 몇 백 번 우리 집에 올 때도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침구 정리를 지금 재영을 상대로 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오버하지 말자. 제발.”
스탠드 조명만 켠 채로 폰을 들었다. 오늘은 영어 공부도 하지 못했다. 베개에 볼을 붙이고 누웠다. 내일부터는 다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학창 시절 내내 반복했던 ‘내일부터’라는 권태로운 핑계가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침대 옆에 놓은 재영이 사 온 커피를 물끄러미 보다 다시 베개를 세워 앉았다. 침대 아래 두었던 영어책도 마지못해 펼쳤다. 재영이 사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보다는 식은 상태라 입바람을 불 필요도 없을 정도로 미지근했지만 제법 온기는 남아 있었다.
내게는 내가 온 과가 어떤 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재영의 도움으로 온 곳이니 나도 내 할 도리는 하는 게 옳았다. 나중에 재영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무사히 졸업부터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 양심은 있어야 했다.
책을 펼치자 샤워실의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재영이 움직이는 소리, 곧 문이 열리고 재영이 작게 하품하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수건을 움직여 몸을 닦는 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책을 침대 아래에 던지고 다시 베개에 볼을 대고 누웠다.
“호정아. 자?”
재영이 들어오며 내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술 냄새는 이제 더 나지 않았다. 재영 본연의 냄새에 내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재영이 스탠드 등을 끄고 내 옆에 앉았다. 침대가 울렁거렸다. 등이 꺼지자 눈앞이 금세 어두워졌다. 재영이 폰을 켰는지 잔광처럼 얕은 빛이 눈 위로 떨어졌다. 더욱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와 실은 자지 않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호정아.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재영이 중얼거렸다. 곧 눈앞을 아스라이 비추던 옅은 빛도 사라졌다. 이불이 흔들리고 내가 덮은 이불 안으로 재영이 들어왔다. 재영은 손을 뻗어 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린아이라도 쓰다듬는 것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불면증은 없지만 그런 게 있다고 해도 금방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온화한 움직임이었다.
재영의 몸이 더욱 가까워졌다. 숨을 참지 않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호흡해야 한다고 나를 다그쳤다. 서투르게 연기해서는 안 됐다. 내가 다른 남자 친구들과 재영을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었다.
“그러니까 늘 조심해. 나쁜 아저씨 따라가지 말고.”
재영은 장난치는 아이 같은 목소리로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주의하라는 거야.”
잔잔한 재영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더욱 눈을 깊게 감았다.
꿈에 재영이 나왔다. 한번 자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자는 경우가 많아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다. 재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건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를 물끄러미 보고 선 재영에게 먼저 달려든 건 나였다.
싫다는 재영의 볼을 잡아 억지로 입을 맞추고 어깨를 억지로 억눌렀다. 헉헉대는 숨을 고스란히 내뱉으며 버둥대는 재영의 볼과 목을 억지로 핥고 깨물었다.
화가 난 사람처럼, 서러운 사람처럼, 서글프고 억울한 사람처럼 악착같이 매달려 재영의 입을 비집고 혀를 들이밀었다. 꿈속에서 재영은 내 혀를 거부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싫다는 재영의 볼을 양손으로 잡아 눌렀다. 벌어진 틈 사이로 다시 무자비하게 내 혀를 쑤셔 넣었다.
“하아, 하아, 으흣.”
가까스로 벌어진 입술 사이에 도톰한 혀를 밀어 넣고 엉성하게 재영의 입술 안을 핥았다. 꿈인데도 입술이 달았다. 재영의 집에서 키스했던 그때처럼 꿈에서도 재영의 입에서는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다.
혀를 세워 재영의 목 깊숙이 혀를 박아 넣었다. 거부하던 재영이 내 뒷덜미를 움켜쥐고 내 혀를 받았다. 서로의 위치가 바뀌고 무자비하게 재영을 쑤셔대면서도 나는 재영의 모습 하나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눈을 떴다.
꿈에서도 벗어나기 싫어 재영의 목을 끌어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라도 손을 놓으면 재영이 내가 모르는 곳으로 나를 버리고 영영 가버릴 것 같았다.
재영이 내게 키스했을 때는 어땠는지. 처음은… 분명 부드러웠다. 내 입술을 감싸는 혀와 입술이 시원했다. 재영이 혀를 내밀어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땐 입술이 촉촉하게 젖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 재영의 혀는 내 치아부터, 잇몸을 훑고 입의 천장을 간지럽게 매만졌다. 아니, 천장부터 시작해 입안의 모든 곡선을 훑다가 마지막에는 혀로 내 혀를 옭아맸던가. 내 허리를 잡은 손은. 뒤통수를 감싼 손가락 다섯 개는. 모두 세세하고 촘촘하게 떠올리고 싶었다.
나를 만지던 손길.
내 목을 더듬던 손.
입안을 헤집고 엉망으로 쥐어뜯던 혀의 움직임…….
“하아, 하아.”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하아.”
이른 아침이었다. 눈앞에 고요히 잠든 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이불 안으로 빳빳하게 고개를 치켜뜬 아래가 느껴졌다.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프게 솟은 아래를 한 손으로 감쌌다.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씨… 발…….”
내가 한재영을, 재영을 상대로. 몸을 웅크렸다. 거칠어진 숨부터 정돈해야 했다. 재영에게 들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머리가 다 어질했다. 천천히 몸을 빼 침대를 빠져나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차가운 물을 틀었다. 잠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바닥에 던지듯 놓았다. 아프게 날을 세운 성기의 끝이 이미 젖어 있었다. 눅진하게 젖은 성기 끝을 쓸고, 뿌리부터 움켜쥐었다. 끈적한 사정 액이 손바닥에 거미줄처럼 형성됐다.
차가운 물이 떨어지는 샤워기 아래에서 버거운 숨을 뱉으며 얼굴을 세게 문질렀다. 남자를 상대로 자위하는, 남자를 상대로 그런 상상을 하는 남자가 있을 수 있나.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있다고 듣긴 했다. 주변에도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관심도 없던 이야기였다. 그런 건 TV 속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현실에 잘 없으니 그런 소재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는 독특하다는 이유로 소비되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
그렇다면, 나는?
자문할 것도 없었다. 여태 좋아했던 사람은 당연히 모두 여자였다. 중학교 때 했던 첫 연애도 비록 민재가 볼 때마다 싫다고 노래를 불러대는 통에 한 달을 채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 첫 연애의 상대도 당연히 여자였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희수였다. 처음에는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만났지만, 실제로 몇 번 데이트를 하고 나서는 나도 희수가 좋아졌다.
희수는 약속장소에도 나보다 항상 먼저 나와 있던 아이였다. 약속장소에 나가면 희수는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 멀뚱한 얼굴로 땅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부르면 두 볼이 발갛게 부풀 정도로 나를 좋아하는 티가 나는 아이였다.
민재가 알고 보니 희수가 자신의 친구인 진희웅을 꼬시려 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희수와의 연애는 풋풋하고 간결했다. 민재는 여우도 그런 여우가 없다며 나를 볼 때마다 희수 욕을 해댔다. 그 통에 희수와는 길게 만나지도 못했다. 내가 희수를 만나면 만날수록 서로에게 피해가 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희수를 좋아하긴 했었지만 늘 마음을 받는 쪽이었기에 헤어질 때도 그리 힘들지는 않았었다. 헤어지자는 말은 희수가 먼저 했다. “너 나 좋아했니?”라고 묻는 희수를 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민재가 해줬던 이야기를 굳이 희수에게 전하지는 않았다.
내 성적 취향, 성향도 언제나 올곧았다. 그쪽으로는 곁다리를 짚은 적도 없었고 잠시 휘청한 적도 없었다. 언제나 내 마음이 가는 쪽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여자였다. 관심이 가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설레거나 나를 긴장하게 하는 대상도 언제나 여자였다. 맹세코 남자에게 그런 쪽의 상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씨발. 이거는 말이 안 되잖아.”
좀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열이 올라 달뜬 숨을 헉헉대며 뱉던 내 모습이 역겹게 느껴졌다. 구역질이 일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이 점차 약해지더니 이내 다시 거세졌다. 고개를 완전히 젖혀 떨어지는 물을 얼굴에 정면으로 맞았다.
이런 질문을 왜 스스로에게 하며, 왜 이런 답을 하며, 왜 이런 과거까지 떠올리며 애써 나를 두둔하려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갑갑하고 무거웠다.
씻고 나와 침실로 갔더니 재영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오래 씻었나 생각하며 눈썹을 긁었다. 빈 침대를 보고 있는데 부엌이 소란했다. 재영이 벌써 아침이라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다는 걸 알자 마음에 안도감이 들었다. 비척비척 부엌을 향해 걸었다.
좀 전의 일만 떠올리면 마음이 참담했다. 재영이 알지 못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아침의 내 모습을 봤다면, 눈앞에서 자신을 상대로 아래를 세운 채 헐떡대는 남자를 봤다면. 재영은 나를 얼마나 징그럽게 생각하고 싫어하게 됐을까. 만약 내가 재영이었어도 동성의 친구가 자신을 상대로 제멋대로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심한 표정을 숨기며 재영의 앞에 섰다. 조금만 방심해도 한숨이 푹푹 내쉬어졌다. 재영은 냉장고를 뒤져 아주머니가 만들어 둔 반찬을 꺼내고 있었다.
“아침 먹고 가자. 커피는 가면서 사 가고.”
“어.”
꺼낸 반찬통을 올리고 접시를 마저 꺼내던 재영이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나를 보는 눈길에 우물쭈물 몸을 꼬며 테이블에 가 앉았다.
“호정아. 어디 아파? 표정이 안 좋은데.”
“아니. 어제부터 감기가 좀 오는 거 같아.”
“학교는 갈 수 있겠어?”
재영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결국 재영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다가온 재영이 내 이마를 짚으려 하기에 그만 나도 모르게 그 손을 거칠게 쳐내고 말았다.
“왜?”
재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내 안색을 살폈다.
“아, 미안. 열 안 나. 괜찮아.”
침 삼키는 소리가 재영에게도 들릴까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재영은 입을 다물고 깊은 숨을 내쉬다가 돌아섰다. 접시를 꺼내 반찬을 소분하던 재영이 다시 나를 불렀다.
“아픈 거면 말해. 알겠지? 약 찾아줄 테니까.”
“내가 할게.”
말이 퉁명스럽게 뱉어졌다.
“호정아.”
고개를 들었다. 재영은 손도 멈춘 채로 그저 나를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준다잖아.”
낯설면서도 단단한 목소리에 긴장하고 말았다. 경박한 내 꼴을 들키기 싫다는 핑계로 재영과 거리를 두려한 게 미안해졌다. 어리숙하고 성급한 판단으로 재영의 호의를 너무 매몰차게 거절한 거다.
“…알았어. 고마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재영의 손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재영의 손은 기다랗고 하얗지만 동시에 두툼하고 단단해 남성적인 선이 강했다. 그 손을 따른 팔은 재영의 굵은 선이 더욱 선명해지는 지점이었다. 팔을 따라 이어지는 근육이 내 시선을 따라 더욱 도드라졌다.
핏줄은 푸른색과 보라색에 가까웠다. 선명하게 솟구친 핏줄은 팔뚝을 따라 어깨까지 이어져 있을지도 몰랐다. 괜히 내 팔을 문질렀다. 재영과 비교하자면, 내 팔은 그저 밋밋했다. 남성적인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괜스레 기분이 가라앉았다.
재영은 나를 학교 앞에 내려주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같이 올라가겠다는 걸 거절했다. 재영은 두 번 묻지 않았다. 내가 거절하자,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알겠다고 답하며 미소 지었다.
학교에 오며 재영이 사준 커피를 손에 쥐고 코를 훌쩍였다. 진짜 감기가 오려는 것 같았다. 오는 내내 내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하던 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영을 떠올리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앞으로 적어도 4년은 이곳에서 재영에게 의지해 있어야 했다. 언제 불쑥 본능에 이끌려 재영에게 실수하게 될지 몰랐다. 한국이었다면 재영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적당히 거리를 둘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는 영국이었다. 내가 의지할 사람도, 말을 할 사람도,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도 재영뿐이었다. 내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재영이 눈치채기 전에 내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와. 호정!”
“아씨. 깜짝이야…….”
등을 때리는 손길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보라색의 곱슬머리가 바람에 좌우로 흔들렸다. 역시나 바드였다. 바드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린 커피를 가져가 한 입 마셨다.
“아뜨.”
“조심해. 그거 아직 뜨거운데.”
바드는 내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한 채 이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라는 엉뚱한 말만 해댔다.
“사실은 그랜마가 좋아하는 노래야. 역시 난 거짓말은 못 해.”
“어. 그래.”
바드의 손에서 다시 커피를 가져왔다. 바드는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보다가, 내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근데 사실, 그랜마가 좋아해서 내가 좋아하게 된 노래니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여기에서는 피노키오인데, 한국에서는 그 아저씨… 그랜파… 뭐지?”
“그게 뭔데?”
“오, 호정. 무식…….”
이를 꽉 깨물었다. 짜증이 난 내 얼굴에도 바드는 어제처럼 여전히 눈치 없이 자신의 이야기만 이어갔다.
“여기, 여기가 덜렁거려. 불알처럼.”
“뭐?”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드는 자신의 턱을 탁탁치며 미간을 좁혔다. 얼굴이 화끈해졌다. 눈을 굴리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혹부리 영감 이야기하는 거야?”
“맞아. 혹부랄 영감.”
“혹부리야.”
바드는 어깨까지 떨어가며 웃기 시작했다. 강의실로 같이 들어가기 싫어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는데도 내가 늦어지면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렸다. 제발 따로 들어가자는 의미를 담아 어색하게 웃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아예 걸음을 멈추자 바드는 강의실 입구에 멀뚱히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강의실로 들어가려는 학생들이 입구에 우두커니 선 바드의 몸을 피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흘깃대며 바드를 노려보는 눈빛이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결국 손을 뻗어 바드의 몸을 당겼다.
“좀 비켜.”
바드는 놀란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뒤를 빠르게 지나 강의실로 들어가는 학생들의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예의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이럴 수가.”
진지하게 충격을 받은 듯한 바드의 얼굴을 무시했다. 바드가 굳이 보태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머리가 복잡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바드를 스쳐 지났다. 그런데도 바드는 계속 “그랜마한테 혼날 짓을, 그랜마가 나는 예의가 바른 아이로 클 거라고 했는데.” 하며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바드를 피해 일부러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바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눈을 돌려 강의실 안을 살폈다. 강의실을 한번 둘러본 바드가 상체를 숙여 내 귀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붙였다.
“호정… 교수가 질문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난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제발 네 걱정이나 해.”
“야박. 호정 매우 야박.”
“하씨…….”
바드는 속삭임을 멈추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다시 강의실 안을 살피던 바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 앉았다.
“한국인 정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내가 옆에 앉아줄게.”
“괜찮으니까 너 앉고 싶은 데로 가.”
바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자리에 걸었다. 뒤돌아 강의실 안을 살폈다. 이미 뒷자리부터 가운데자리까지 낯선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드가 앉을 자리는 없어 보였다. 바드에게도 딱히 선택권은 없던 셈이었다. 바드는 중얼대며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호정. 펜 있어? 보라색 펜이면 좋겠어.”
“없어.”
“그럼 민트는?”
“없다고.”
가방에 잡히는 펜 중 아무거나 잡아 바드에게 내밀었다. 바드는 눈에 띄게 밝아진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해댔다. 강의실은 금세 소란해졌다. 소란의 절반은 바드의 몫이었지만, 나머지 절반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 강의 때 얼굴을 텄던 아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어색한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따로 시간표를 정하지 않아도 고등학교 때처럼 시간과 반이 정해져 있다는 게 편하면서도, 이번 학기 동안은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과 싫어도 계속 볼 수밖에 없다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옆에 앉아 구시렁구시렁 말을 해대는 바드를 쳐다보았다. 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끄러움과 불편함을 적어도 이번 학기 동안은 견뎌야 했다.
“왜 호정은 보라색 펜이 없을까.”
바드는 내가 준 펜의 뒤를 눌러 노트에 선을 긋다가 나를 흘깃 노려보고, 다시 노트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왜 긋는지 모를 의미 없는 선이 노트에 그어졌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겨 나왔다. 바드가 말을 걸며 쫓아오기라도 할까 봐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학교 앞에서 시간을 보내다 재영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함께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폰을 꺼내 재영에게 수업이 끝났다는 연락을 보내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로비를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히는 타이밍에 그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순간 어젯밤 우리 집에 들어와 커피를 내밀던 재영의 모습이 겹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바드가 몸을 들이밀었다. 바드는 엘리베이터 문에 끼었던 손을 탈탈 털며 앓는 소리를 냈다.
“미친. 너 안 다쳤어? 아프지?”
바드의 손을 보며 물었다. 엘리베이터에 탄 바드가 “아파, 아파. 아프다고. 아프프. 매우 아픈 상태.”라고 말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바드가 방방 뛰어대는 탓에 엘리베이터가 흔들렸다. 말이 많은 애는 아프다는 말도 세 번 이상은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드는 주먹 쥔 손을 내게 내밀었다. 손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내일이 되면 멍이 들거나 부어오를 것 같았다.
“호정은 얼굴만 꽃이고 속은 맛없는 무야. 야박이. 너 일부러 나 피해서 도망간 거지?”
“아니야. 나 일이 있어서 그런 건데.”
“거짓말. 이 과에 다니는 사람 중에 일 있는 사람은 없댔어. 우리 그랜마가 그랬다고.”
침을 꼴깍 삼켰다. 눈치가 없는 편인 줄 알았는데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빨랐다.
“도망간 건 맞는데, 네가 엘리베이터에 손을 밀어 넣을 줄은 몰랐지.”
“한국인 친구, 좋은데. 너는 왜 나 싫어해?”
어깨에 멘 가방을 등 뒤로 돌렸다.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아니라는 의미를 담아 바드 앞에 흔들었다. 바드가 싫은 건 아니었다. 물론 귀찮고, 귀찮은 데다 또 귀찮긴 했지만, 아무리 이기적인 나라고 해도 내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닌 바드를 무턱대고 싫어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다.
바드는 민재와 닮은 듯 달랐다. 더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같아 보이지만, 달랐다. 바드는 아직도 얼얼한 제 손을 연신 내 눈앞에 흔들어댔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로비에 도착해 바드의 손을 다시 살폈다.
“약 사서 발라. 꼭.”
“약?”
바드는 약이라는 글자에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봤다.
“연고 같은… 안 아프게 바르는 거.”
“아. 응.”
바드의 표정이 풀어졌다. 바드는 얼얼한 손을 몇 번 더 흔들다가 내 옆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딱히 가려는 곳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가려는 곳을 무턱대고 따라가려는 걸까 걱정되어 쳐다보았더니 바드는 복도 끝을 보고 있었다.
“오. 저기 한국인 하나 더 있다.”
로비에 도착해 걷는 중에 바드가 복도 끝을 가리켰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고개를 드니 재영이 종이백을 손에 쥔 채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나 한국인 잘 찾거든.”
“어. 좋겠네.”
떨떠름하게 답했다. 멀리 보이는 재영은 평소와 달리 안경을 끼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재영이 가슴 옆에 손을 올려 인사하듯 까닥거렸다. 재영의 잔잔한 미소를 보게 되니 아침의 민망했던 일도 잊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재영을 따라 비실대며 웃고 말았다.
“뭐야. 호정 나 빼고 한국인 친구 또 만든 거였어?”
“너 빼고가 아니라, 쟤가 먼저야.”
“애니웨이.”
바드는 나보다 더 먼저 재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드는 해맑은 얼굴로 재영의 앞에 섰다.
“…….”
재영은 자신과 나 사이를 가로막듯 선 바드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바드를 피해 꺾은 고개를 따라 나도 재영을 보기 위해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한국인?”
“나 한국인 같아?”
바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재영의 얼굴에 실소가 담겼다.
“어. 누가 봐도. 반말할 거지? 나도 스물이니까 너한테 반말할게.”
재영이 바드의 어깨를 끌어 옆으로 밀쳐냈다. 바드가 옆으로 밀려나며 나를 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재영이 바드를 밀친 것보다 어제 들은 녹음 내용을 아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더 놀랐다.
재영을 향하던 시선을 바드에게 돌렸다. 바드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좀 전보다 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부탁인데, 내 앞에서 호정이 가리지 마. 다시는.”
재영은 바드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내가 알던 재영의 모습과는 야트막한 거리감이 있었다. 재영과 바드를 번갈아 보는 사이 재영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영의 표정이 급격하게 풀어졌다.
“아침에 보니까 아무래도 너 감기 맞는 거 같아서. 감기는 초기에 잡는 게 좋아.”
“너 수업은? 안 갔어?”
“지금 가려고.”
내 머리를 쓰다듬은 재영이 바드를 한 번 쳐다보았다. “갈게.”라는 재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드가 다급히 그 팔을 붙들었다. 바드의 보라색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재영의 팔을 잡은 바드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바드의 손에 재영이 준 종이백을 보던 눈을 올려 바드를 보았다.
“나, 한국인 친구 가지고 싶었는데. 너도 스물이니까 그럼 우리 친구 하자. 호정, 너, 나.”
“그래, 친구. 좋네.”
재영이 픽 웃더니 바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드는 재영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좀 전의 자신으로 돌아와 웃기 시작했다. 눈치 없고 수다스러운 본인의 성격에 맞게 바드는 재영의 뒤를 쫓으며 쉴 새 없이 말을 붙였다. 재영의 건물로 가는 길은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재영의 옆에 서서 걷던 바드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재영이 데려다주고 너랑 커피 마실까, 하는데. 호정이 네 생각은?”
“재영이를 네가 왜?”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바드가 나보다 더 재영과 친한 사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한테 하는 것으로 보아 막연히 친화력이 좋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바드는 내 생각 이상의 친화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재영을 상대로도 이렇게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재영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재영이 왕따 시키지 말자. 우리가 데려다주면 좋잖아. 호정, 야박하잖아, 그건 너무. 아까도 야박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몹시, 매우, 너무나 야박해. 호정. 그러지 마.”
재영과 바드가 친한 사이고 그 사이에 내가 낀 기분이 들 정도로 바드는 쉬지 않고 재영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와 달리 재영은 바드가 하는 말마다 귀찮은 내색 없이 답해주었다.
살짝살짝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재영은 미소 지은 얼굴로 바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나처럼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이거나 귀찮은 내색을 비추지도 않았다.
“그래서, 약리학… 그거 다니면 뭐가 좋은데? 아니다. 좋은 점만 있을 테니 그중에서 가장 좋은 점. 베스트를 말해줘.”
재영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깊게 생각할 때 보이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입술을 가로로 꾹 다문 채로 눈을 느리게 깜박이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웃었다. 재영은 안경을 한번 들썩여 다시 쓰더니 질문을 던진 바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년에는 해부학도 한대.”
“해부? 해… 부?”
바드가 미간을 좁히며 재영이 아닌 나를 돌아보았다. 두 눈 가득 ‘한국어 천재인 네가 얼른 나에게 설명해 봐.’라는 무언의 말이 담겨 있었다. 목을 가다듬었다. 배 앞을 긋는 시늉을 하며 “여기 갈라서 안을 보는 거.”라고 했더니 그제야 바드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vivisectie……. (해부학…….)”
바드는 루마니아어인 듯한 말을 중얼대며 재영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올려 안았다.
“멋있다. 역시 우리 친구 맞는 거지?”
재영이 바드를 보던 눈을 접어 웃기 시작했다. 재영이 저렇게 크게 웃는 모습은 나도 오랜만에 보았다. 재영은 숨을 참지 못하고 웃다가 눈물까지 났는지 눈 아래를 꾹꾹 눌러 닦았다.
“Da. (그래.)”
재영이 말하자, 바드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 똑똑이를 왜 어제 소개해주지 않았냐고 타박하는 것 같았다. 바드는 고개를 홱 돌려 재영을 이리저리 살폈다. 입만큼이나 고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 너 루마니아어도 해?”
바드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재영은 바드의 벌어진 입을 보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니. 어릴 때 이탈리아어를 좀 배웠어.”
“아.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방금 그건 완전한 루마니아어야. 낫 이태리.”
바드는 호들갑을 떨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호정아. 재영이 진짜 똑똑하다.”라는 소리가 너무 컸다. 운동장을 지나는 모든 학생이 한 번씩 돌아볼 정도였다.
“너 이제 손 안 아픈가 보네?”
“그럴 리가. 봐. 여전히 이렇게 아픈데.”
바드는 흔들던 손을 물끄러미 내리고 내게 발갛게 부은 손을 내밀어 보였다. 루마니아어와 이탈리아어가 비슷하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바드는 두 언어의 어휘가 반 이상 같다고 했다. 그건 바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하는 말의 절반은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였고 동시에 둘이서 루마니아어든 이탈리아어든 둘 중 하나로 떠들기 시작하면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난 똑똑한 애들 보면 좋아. 내가 멍청… 아니야. 멍청한 건 취소야. 이런 말은 나빠. 어제 그랜마한테 너 만난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도 했는데 그랜마한테 완전 혼났어. 한국에서는 그게 욕이라며.”
바드는 웃던 입꼬리를 어색하게 내리더니 이내 다시 웃기 시작했다.
“맞아. 호정. 그건 루마니아에서도 욕이었어.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구나.”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애니웨이.”
바드는 다시 고개를 재영에게로 돌렸다. 재영이 바드의 뒤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쿡 찔렀다. 깜짝 놀라 재영을 쳐다보았지만 재영은 여전히 바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잘못 찌른 건가 생각하며 뒤를 보았다. 재영이 손을 뻗고 있었다.
어쩌라는 건지 몰라 잠시 재영을 보았지만 재영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재영과 나 사이에 선 바드가 자꾸만 재영을 가렸다. 좀 전 재영이 했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 또한 바드가 재영을 좀 그만 가리길 바라고 있었다.
“…어…….”
재영이 바드의 등 뒤로 내 팔꿈치를 끌어 잡았다. 바드는 여전히 우리 둘의 사이에서 떠들고 있었다. 재영에게 별다른 저항 없이 팔을 내어주었다. 내가 재영의 손을 쳐내면 중간에 있는 바드가 그 움직임을 눈치챌 것 같았다.
괜히 뜨거워지는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재영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여전히 조금도 다물어지지 않는 바드의 입을 향해 있었다. 재영도 나만큼이나 이런 바드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왜 굳이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내 팔을 끄는 걸까.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바드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영이라면, 한재영이라면.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 걸까.
“사실 거짓말했어. 너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 내가 이 건물 구경 오고 싶었거든.”
바드는 또다시 유난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웃는 것 하나조차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약… 약리학. 좋아. 똑똑이들이 가는 곳이잖아. 그렇지?”
바드가 본인답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물고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바드의 등 뒤에서 내 팔을 잡고 있던 재영의 손이 멀어졌다. 고개를 돌려 바드의 뒤를 살폈다. 빈 팔을 끌어다 팔짱 꼈다. 내 팔을 감싸던 온기가 금세 바람에 흩어졌다.
“나 배고픈데. 재영. 몇 시에 마쳐?”
바드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구김살 없이 맑은 얼굴이었다. 바드는 타인이 자신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봐도 이 보라색 유전자 안에 한국인의 유전자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 시쯤? 눈치 보고 더 빨리 나올 수 있으면 나올게.”
재영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과일 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알록달록한 색이 재영과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졌다.
“호정아. 넌 괜찮아? 이거라도 먹을래?”
내 앞에 먼저 내민 사탕을 고개만 저어 거절했다. 사탕은 딱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바드는 재영이 내민 사탕을 냉큼 가져가 자신의 입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을 닫을 때만큼이나 다급한 움직임이었다.
“데려다준 거 고마워. 너무 배고프면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뭐라도 먹어. 난 괜찮으니까.”
“카페에서 기다릴게. 같이 먹자.”
“진짜 괜찮으니까. 알겠지?”
마지못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 웃으며 내 어깨에 걸린 가방을 끌어 바드의 품에 안겼다.
“호정이가 아프니까 가방은 네가 들어줄 수 있지? 호정이 지루하지 않게 해줘. 너무 많이 말하지는 말고.”
“난 수다스럽지 않은 편인데?”
바드가 뻔뻔한 얼굴로 어깻짓을 해 보였다. 진중한 얼굴이었다. 정말 저 자신은 자신이 그렇다고 믿고 살아온 듯했다. 바드는 떨떠름한 얼굴로 내 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수업 잘 듣고 와. 똑똑이. 야박이는 내가 지킬게.”
“야박이?”
재영이 픽 웃었다. 눈썹을 올리며 나를 한 번 바라보기에, 나도 어깨를 들썩거렸다.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재영은 용케 내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갈게.”
재영이 뒤돌아 건물로 들어가고 나와 바드는 한동안 재영이 들어간 건물의 외관을 멍하니 보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건물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이전에 재영이 보여줬던 사진 속 아름다운 캠퍼스는 바로 이곳이었다.
캠퍼스의 뒤로 보이는 도서관이 마치 박물관처럼 웅장했다. 학생들의 옷차림도 달랐다. 보라색 머리를 한 바드처럼 요란하기만 하던 우리 건물의 학생들과 달리 이곳의 아이들은 재영처럼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다.
학교는 자신들의 상징과 자랑이 되어줄 아이들이 다니는 곳과 우리처럼 돈만 되어줄 뿐 학교 이미지에는 도움 되지 않는 아이들을 나름의 기준으로 철저히 구분하고 있는 셈이었다.
“호정. 그런데 진짜 아파? 언제부터 아팠어? 나 손 아플 때부터?”
바드는 다시 자신의 부은 손을 내밀었다. 이골이 난 표정으로 바드의 손을 잡아 살폈다. 이걸로 몇 주는 더 우려먹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드의 손을 자세히 살폈다. 가까이에서 보니 부은 게 좀 전보다 심했다. 붉은 기는 벌써 푸른색으로 변해 멍이 되려 하고 있었다.
“너 아무래도 아까 많이 다친 거 같은데. 병원…….”
“호정도 계절이 바뀔 때 아파?”
바드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내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아… 그건 아닌데, 원래 자주 이래.”
“자주 그러면 더 안 좋은 거잖아. 우리 그랜마도 자주 아프시거든.”
처음에는 그냥 상황이 어색해 뱉은 말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감기가 올 거 같았다. 미열이 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바드는 제 할 말만 하고는 교정 가운데에 섰다. 곧 파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더니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호정.”
답하지 않고 그 옆에 섰다. 지나는 사람들 몇몇이 바드를 쳐다보기도 했지만, 바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나를 불렀다.
“여기 공기가 좋다. 호정이 맡는 공기 냄새는 어때?”
“비려.”
“비려?”
바드가 눈을 떠 날 쳐다봤다. 비리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물고기 냄새 같은 거.”
“물고기. 바다. 비리다.”
바드가 중얼거렸다. 바드의 어깨에 걸린 가방을 끌어 다시 내가 멨다. 바드가 “어어?” 소리를 내며 나를 쫓아왔다. “재영이 부탁한 건데.”라며 졸졸 따라오는 모습이 웃겨 웃음이 났다. 다급하게 손을 휘젓던 바드는 곧 내 가방을 돌려받는 것을 체념하더니 옆에 붙어 좀 전에 새로 배운 단어를 쫑알거렸다. 바드는 영국에 있는 대학교에 와 한국어나 배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비려. 비리. 비리다.”
“바드. 조용히 좀 하고 걸으면 안 될까?”
“비려. 비리. 비리다.”
바드는 목소리를 낮추는 동시에 자신의 어깨까지 잔뜩 움츠렸다. 속삭이듯 말했지만 어깨를 움츠리고 어정쩡한 자세로 말하는 통에 더 눈에 띄었다. 길을 지나는 학생들의 눈이 우리에게 꽂혔다. 사람들 눈에 최대한 띄지 않고 졸업하는 게 목표였는데 바드가 옆에 있는 한 그 목표는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카페에 도착해 2층 테라스에 앉았다. 바드의 말처럼 오늘은 공기가 맑고 좋았다. 영국에 온 지난 몇 달 동안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 적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유독 시원하고 맑은 공기만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바드는 계속 킁킁대며 바람과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바드가 느리게 눈을 떴다. 흐릿하던 눈이 맑고 깨끗한 본연의 눈으로 돌아왔다.
“커피 좋아해?”
“처음에는 재영이 따라서 마시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좋아해.”
“왜?”
잠시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는 재영을 따라 마시기 시작한 게 벌써 반년이 넘었다. 이전부터 좋아했던 탄산음료나 단 음료도 여전히 좋아하고 자주 마시지만,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첫 번째 메뉴가 커피일 때도 많았다.
“재영을 왜 따라 하는 거야?”
바드는 심드렁한 얼굴로 묻다가 이내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긴. 멋있어. 따라 하고 싶을 거 같기는 해.”
역시나 한재영은 누가 봐도 멋있긴 하구나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대학생이 되니 더 어른 티가 나고 성숙해지긴 했다. 골목길에 서서 멀뚱한 눈으로 느리게 말을 잇던 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간질거렸다.
“재영과는 언제부터 친구야?”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어.”
“으흠. 친한 사이네. 한국에서 대학까지 같은 곳에 올 정도로.”
마침 1층의 벨이 울렸다. 커피가 다 되었으니 내려와 가져가라는 의미였다. 바드는 “호정은 아프니 내가 갈게.”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바드를 보며 다시 고등학교 때를 떠올렸다. 적확하게는 고등학교 때 내가 봤던 재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에 띄는 놈이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나와는 삶과 결이 너무 다른 탓에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같은 반일 때는 오히려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말다운 말을 섞은 것도 3학년 때의 골목에서가 처음이었으니 친구라는 말은 스무 살이 된 올해부터가 오히려 맞았다. 바드에게는 고등학교 때부터라고 했지만, 막상 생각해 보니 우리가 친구가 된 지 그리 오래된 건 아니었다.
바드가 손에 트레이가 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조금이라도 들어주려 일어나 다가섰더니 트레이에는 우리가 주문한 커피 외에도 초코케이크가 한 조각 있었다.
“네가 시킨 거야?”
“응. 스위트한 게 먹고 싶어서.”
아이 같은 얼굴을 한 바드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른 케이크를 먹고 싶은 눈치였다. 바드가 배고프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배가 많이 고픈 거냐고 물으니 그래도 재영이 사탕을 줘서 괜찮다고 했다.
“우리끼리 먼저 먹어도 되는데. 그럴래? 재영이는 괜찮다고 할 거야.”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바드는 눈을 찌푸리며 테이블에 트레이를 올렸다. 배를 문지르는 걸 보니 여전히 배가 고픈 거 같긴 했다. 재영은 우리가 먼저 점심을 먹는다고 해서 서운해 하거나 삐질 사람은 아니었다. 바드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나중에는 나 빼고 점심 먹으러 갈 거지?”
“어?”
“나중에도 나 기다려줘. 재영이 기다려준 것처럼.”
“아휴.”
눈을 흘기며 커피를 가져갔다. 바드는 쀼루퉁한 얼굴로 빨대를 쪽 빨았다. 그러다 아이스커피가 몸에 들어가자 기분이 좋은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웃기 시작했다.
“호정이는 정말 생각을 못 숨기는구나? 볼에 다 드러나.”
바드가 웃으며 내 볼을 쿡 찔렀다. 소름이 돋아 뒤로 물러났더니 그 모습에도 바드는 깔깔대며 웃었다. 바드가 건드린 볼을 손등으로 세게 문질렀다. 어느 부분에서 저토록 신이 났는지 좀체 이해되지 않았다. 바드는 깔깔대며 웃다가 케이크의 반을 잘라 내게 나눠주었다.
“볼 만지는 거 싫어하는구나! 나 이렇게 섬세해!”
“남자가 남자 볼 만지는데 좋아할 놈이 어디 있어.”
조금 퉁명스럽게 답했더니 바드는 놀란 눈을 하고 커피를 내려놓았다.
“방금 그건 매우 차별적인 말이야. 호정.”
“차별? 이게 왜?”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썹을 달싹거렸다. 바드는 의자를 바짝 당기더니 손을 까닥거렸다. 2층 카페에 앉은 건 우리뿐인데도 바드는 단호한 얼굴로 다시 내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와 들으라는 의미 같았다.
“왜?”
“네가 방금 한 발언을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겁나서 그래. 내가 지금 널 보호해주는 거야.”
“아. 그럴 필요는 없…….”
“나는 게이야, 호정.”
바드가 두 눈을 깜박깜박 움직였다. 내 눈을 빤히 보는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거짓말 같지도 않았지만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바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구겨 물었다. 쉴 틈 없이 떠들어대던 평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태어나 게이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매체를 통한 게 아니라 실제 눈앞의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건. 동성을 좋아한다는 건 내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었다.
“게… 게이?”
“또 표정을 못 숨기네.”
바드는 큰 소리를 내며 다시 웃기 시작했다. 바드가 앉은 의자가 휘청거릴 정도의 큰 움직임이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 오. 호정 설마.”
“뭐가?”
내 얼굴에 아침에 재영을 보며 발기한 게 티라도 나는 건가 싶어 고개를 숙이며 되물었다. 바드는 웃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보았다. 얼른 무슨 말이라도 이어주길 바라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바드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호정. 그럼 재영도 몰라?”
“재영이? 한재영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그래? 으흠.”
바드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팔짱까지 끼고 의자에 기대 나를 보던 바드는 내가 케이크를 한 입 먹자, 미간을 좁혔다.
“호정. 도둑질에 능숙하구나!”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까 나 먹으라고 나눠준 거 아니었어?”
“아니야. 나중에 먹으려고 덜어놓았던 건데. 호정은 욕심이 많네.”
“야박은 내가 아니라 너네, 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민망함에 괜히 컵의 빨대만 이리저리 세차게 휘저었다. 얼음이 달달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바드의 뒤로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보라색의 머리. 그 독특한 색이 여름 나무를 덮은 잎들처럼 결마다 나부꼈다.
“농담이야. 진짜. 먹어, 먹어.”
바드는 깔깔대며 웃다가 테이블에 볼을 붙이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웃긴가, 생각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웃긴 상황은 아니었다. 바드의 발갛게 부은 손이 테이블을 쿵쿵 두드렸다. 컵 안의 커피가 몇 방울 튕겨 나올 정도였다.
“들어봐.”
바드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아무 말을 보태지 않자 바드는 자신 또한 입을 다물고 나를 보기만 했다.
“들으라더니 왜 말을 안 해?”
“아. 내가 그랬지. 잠시만. 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빨대를 당겨 커피를 마셨다. 씁쓸한 맛이 입술 사이에서 단맛으로 목을 넘어갈 땐 다시 처음의 쓴맛으로 넘어가는 게 신기했다. 이 맛을 알려준 것도 재영이라서,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실 때는 재영의 생각이 났다.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호정.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해줄까?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 표정에 드러내지 않을 자신도 있고?”
“재미없을 거 같아. 안 들을래.”
“재영 이야기인데도?”
바드는 이채가 감도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게 사뭇 진지해진 얼굴에 결국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재영에 대해 바드가 할 말이 있다고 한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대단한 일은 아닐 게 분명했다. 바드가 또 내게 장난을 치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나를 맥 빠지게 할지도. 바드는 또 괜히 주변을 살피며 내게 손짓했다. 어쩔 수 없이 상체를 숙여 귀를 가까이했다.
“재영, 게이야.”
멍하니 눈만 끔벅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방금 내가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도 헷갈렸다. 잠시 멍하던 눈을 바로 뜨고 커피 잔에 든 빨대를 뽑아 그대로 몇 모금 마셨다. 속이 탔다. 너무 놀란 탓인지 머리도 아파지기 시작했다.
“와우… 진짜 몰랐나 보네.”
“아니야. 재영이도… 나도 여자 좋아하고. 게다가 재영이는 인기도 많고.”
“난 바로 알겠던데.”
바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조금 집어 올렸다. 머리 위에 안테나처럼 삐죽 솟은 머리카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바드는 레이더마냥 올라온 머리카락을 비비 꼬아 머리 위에 고정했다.
“꾸루꾸루끼리는 알아본다잖아.”
“끼리끼리 말하는 거야?”
“으흠. 역시. 한국어 천재.”
바드의 머리에 안테나처럼 솟아있는 머리카락이 푹 기운 없이 떨어졌다. 괜히 바드의 눈치를 보며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조금 전에 급하게 들이킨 탓인지 이미 커피는 바닥에 가까워 있었다. 남은 커피를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바드는 자신의 잔에 남아 있던 커피로 내 잔을 다시 채워 주었다. 망설이다 바드가 나눠준 커피로 목을 축였다. 자꾸만 목이 비쩍비쩍 마르는 게 느껴졌다.
재영이 게이라면, 재영이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정말 나를 좋아해서? 뻐근한 목 뒤를 주물렀다. 목 뒤쪽도 열이 올라 뜨거웠다. 숨마다 뜨거운 공기가 붙었다. 어색하게 웃다가 그보다 더 어색하게 표정을 굳혔다. 생각해 보니 재영은 처음에도 나와 친해지고 싶다고 했었다. 정말 재영이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던 거지, 생각하는 사이 얼굴까지도 뜨거운 열이 차올랐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해준 일은 모두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과분한 베풂이었다. 보통의 친구 사이에서 이 정도는…….
“민재.”
아니다. 민재도 나와 친구라는 이유로 잘해줬었으니까. 물론 다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민재도 내게 도움을 준 게 많았다. 바드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나, 왜?”
“아. 아니. 너 부른 거 아니야.”
바드는 금방 수긍해 머리를 끄덕였다.
“애니웨이. 재영이 게이인 걸 몰랐다고? 그럼 아까는 왜 그랬어?”
바드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제 손을 깍지 껴 보였다.
“내 뒤에서 이렇게 손잡고, 팔 만지작. 꼼지작. 꼬물락. 했잖아. 설마 야박이 너 지금 부끄러워서 그래? 나한테는 연애 숨기지 않아도 돼.”
역시 편하게 살고 싶어 눈치가 없는 척을 하며 살 뿐, 알고 보면 눈치가 매우 빠른 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드를 보던 눈을 내렸다. 한 번 본 재영도 꿰뚫어 보듯 속까지 살펴보는 놈이라는 걸 알고 나니 나도 괜히 그 눈을 보기 싫어졌다. 지금도 나를 보며 어떤 속마음을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슨 연애야. 나도 걔도 여자 좋아한다니까.”
“으흠.”
바드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웃었다. 다시 자리에 앉은 바드는 나머지 커피마저 내 잔에 부어주었다.
“그래? 그럼 아직은 친구?”
“헛소리 좀 하지 마.”
케이크를 잘라 다시 입에 넣었다. 할 수 있다면 입안 가득 케이크를 밀어 넣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바드는 몸을 휘청거리며 웃어댔다. 대체 무엇에 저렇게까지나 신이 난 건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색하게 케이크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 도중에 바드는 아예 상체를 접어 웃기 시작했다. 끅끅대며 숨을 헐떡이던 바드가 상체를 숙인 채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호정. 농담이야. 농담.”
바드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시 몸을 굽혀 웃었다. 농담이라면 바드의 한 말의 어디에서부터 농담이라는 건지 궁금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어디서부터 농담이라는 건데? 무슨 말부터?”
“음… 케이크 다 내 거라고 했을 때부터?”
그렇다면 재영이 게이라는 건 농담이란 소리였다. 그럼 바드 본인이 게이라던 말은 진짜인 걸까. 바드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미리 답했다.
“난 게이 맞아. 이상해?”
“…아니.”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같이 놀아줄 거지? 셋이. 너, 나, 재영.”
이제야 바드의 속내가 이해됐다. 앞으로는 바드를 피할 수도 없게 됐다는 걸 직감했다. 내가 그를 피하면 나는 성소수자를 피하는 천하의 나쁜 놈이 되어버릴 거다. 내가 또 바드에게 휘말린 것임을 깨달으며 한숨을 후 내뱉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도 재영이 마치는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었다.
재영이 게이라는 바드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안심해야 옳았다. 재영이 내게 잘해줬던 모든 일이 그저 민재가 내게 했던 것과 같은 친구에게 보이는 호의라는 의미일 뿐이니까. 친구에 대한 애정과 순수한 우정의 마음으로 내게 베풀어준 것뿐이라는 의미이니까.
“하아.”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바드가 사는 동네는 우리가 사는 동네와 가까웠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재영이 먼저 바드의 집을 물었다. “네가 아까 나 데려다줬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데려다줄게.”라는 말은 역시나 재영다웠고, 역시나 다정했다. 재영은 나에게만 다정한 게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자세히 보면 사람을 대할 땐 늘 저렇게 다정하고 다감한 태도가 기본으로 장착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하지 않던 나를 대할 때도, 지금 처음 본 바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재영에게 전혀 특별할 게 없었다. 내심 재영이 나를 특별하게 대한다고 생각하기라도 했었는지 재영이 바드에게 다정한 말을 보탤 때마다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재영과 나는 아니더라도 바드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바드는 카페에서 한 말이 농담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재영의 저런 다정한 태도 때문에 조금 전에도 바드가 재영을 오해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드. 볼 수 있으면 다음에 또 보자.”
재영은 바드를 그의 집 앞에 내려주며 미소 지었다. 차에서 내린 바드가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있는데, 재영이 내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창을 향해있던 시선을 돌리자 자신의 폰을 내게 내밀고 있는 재영이 보였다.
“노래 들으면서 갈까?”
재영이 내민 폰을 받아 만지작댔다. 차가 출발하고도 쉽게 노래를 틀지 못했다. 듣고 싶은 노래도, 생각나는 노래도 없었다. 그저 재영에게 묻고 싶은 것만 산더미처럼 쌓여 가슴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재영의 폰을 콘솔박스에 다시 돌려놓았다. 운전하느라 앞만 보고 있던 재영이 그런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호정아. 무슨 일 있었어?”라는 말이 참 쓸데없이도 다정하게 들렸다. 괜한 짜증이 났다. 다정한 사람에게 왜 짜증이 나는 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할 만한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 감기 기운이 나면서 몸이 약해지니 이런저런 짜증도 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재영은 내게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줄곧 이유 없이 내 눈치만 살피는 꼴이었다. 착한 게 죄. 착한 사람은 못된 사람을 만나면 그 앞에서 죄인이 된다더니. 그 말은 재영을 위한 말 같았다. 못된 나 때문에 늘 재영만 이런 식의 피해를 보았다.
염치도 없고 양심도 없는 내가, 베풀기만 하는 재영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 꼴사나운 형태였다. 주제가 넘어도 한참 넘는 짓이었다. 내 눈치만 보며 집에 온 재영은 집 앞에 나를 내려준 후 다시 차를 몰아 동네를 빠져 나갔다.
“약속이 있어서. 미안해. 아까 준 감기약은 꼭 챙겨 먹어.”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니까 나한테 사과하지 않아도 돼.”
네가 사과할수록 자꾸 내가 주제를 넘고 더한 걸 바라게 돼. 비열하게 솟구치는 역한 속마음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입을 꾹 다물고 집에 들어왔다. 집에 도착하자 열이 더욱 짙게 올랐다. 재영이 준 종이백과 가방을 바닥에 내리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겨우겨우 계단을 올랐다. 바드가 했던 말이 구불구불한 곡선이 되어 몸을 기어 왔다. 발가락부터 시작해 무릎까지 오른 말은 이제 내 목을 감싸 긁었다. 목 안이 따갑고 어깨는 한없이 무거웠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침대에 그대로 몸을 묻었다.
눈을 세게 감았다. 눈과 목을 비롯한 전신이 뜨거웠다.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곳에 재영이 나와 내 옷을 벗겼다. 순식간에 나체로 뒤엉켜 서로의 살갗을 물고 빨아 올렸다. 입술이 빨린 곳마다 하얀 살결이 빨갛게 익어 부풀었다.
“하아, 하으 하아.”
아래가 뻐근해져 견디기 힘들었다. 다리를 꼬아 몸을 웅크리고 양손으로 성기를 움켜쥐었다. 척추가 휠 정도로 부푼 건 음낭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느껴보는 격렬한 성욕이었다. 자위를 할 때도 이런 식의 주체하지 못할 동요를 느낀 적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성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었다. 행위가 끝나고 손이 축축하게 젖은 후에도 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몸을 감쌌다. 정신이 아득했다. 눈꺼풀이 무게를 더했다. 지쳐 잠들기 전까지도 나는 끈질기게 재영을 상상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폰을 찾으려 침대 위를 더듬거렸다. 침대 안도 내 열기로 뜨거웠다. 목이 아파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물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일어나 다시 침대를 살폈지만, 침대 아래도 테이블 위에도 여전히 폰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집에 들어오며 1층에 가방과 모든 짐을 두고 올라온 게 기억났다. 부엌과 계단 사이에서 어디를 먼저 갈까 고민하다 1층에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힘없는 걸음으로 겨우겨우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 앞의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가방과 종이백을 들었다. 가방 안에서 폰을 꺼내고 재영이 준 종이백 안을 살폈다. 세심하게 분류된 약을 보는데도 한숨이 나왔다.
“약, 먹어야겠다.”
갈라진 목을 정돈하고 계단을 오르며 폰을 켰다. 동시에 폰의 진동이 울리며 재영의 번호가 떴다. 흠칫 놀라 폰의 화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혹시나 갈라진 목소리가 들키기라도 할까 봐 목을 재차 가다듬고 통화를 눌렀다.
“어. 재영아.”
-호정아.
기운 없는 재영의 목소리에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었다. 우뚝 멈춰 서서 가만히 폰 너머 들리는 재영의 잔잔한 숨소리에 집중했다.
-전화 왜 이렇게 안 받았어? 걱정했어.
“아…….”
폰을 내리고 통화목록을 열었다. 현재의 통화 아래로 받지 않은 부재중 전화의 목록 전부가 재영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식 같은 숨을 뱉었다. 다시 폰을 귀에 붙였다.
“자느라 못 받았어.”
-아직도 아픈 거지? 많이 아픈 거야?
재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다급한 목소리 역시 나를 혼란스럽고 오해하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재영아. 나 좀 쉬고 싶은데.”
-미안해. 아침부터 아픈 거 같아서… 나는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되니까… 하. 아니야. 호정아. 일단 쉬고 내일,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혹시 내가 계속 전화해서 깬 거면…….
“너 때문에 깬 건 아니야.”
꾸역꾸역 솟는 나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마음에는 못나고 못된 마음만 가득했다. 아까는 무슨 약속이 있어 갔다가 이제야 이렇게 연락을 해대는 것이냐는 질문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비참하고 날이 선 말이었다. 푸석한 내 얼굴처럼 혀에선 자꾸 못생긴 말이 휘감아졌다.
“좀 피곤해서, 재영아. 나 내일 수업 없으니까 우리 집 안 와도 돼. 너도 쉬고. 내 걱정은 하지 마.”
재영은 답하지 않았다. 숨소리를 듣고 있다가 전화를 껐다. 가방을 다시 멨다. 종이백과 폰을 쥐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부엌으로 가 물과 함께 약을 먹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밤 아홉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여섯 시간 넘게 낮잠을 잤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 아무리 아파도 사람이 이렇게 오래 자는 게 말이 되나, 생각하는 사이 현관의 벨이 울렸다.
영국에서 우리 집을 찾아올 사람은 재영뿐이었다. 이 시간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벨을 울리게 할 사람도 역시나 재영뿐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만약 내 마음에 짜증이 났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웠을 거다. 이 늦은 밤에 말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는 불쾌감이 차라리 먼저 들었다면 나는 그나마 내 감정을 야트막하게나마 이해했을 거다. 그러나 아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은 설렘에 가까웠고, 비참하게도 안도감에 더욱더 가까웠다.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 문이 열렸다. 계단을 오르던 재영과 계단의 중간에서 마주쳤다. 눈을 마주한 채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우리 집의 열쇠를 재영이 하나 더 들고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동시에 재영의 얇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실내용 슬리퍼만 신은 발에도 당연히 시선이 갔다. 침을 삼키는 목이 따가웠다. 마음은 괜히 눈물이 날 것처럼 서러워졌다. 네가 자꾸 이런 모습을 보이니까 멍청한 내가 허튼소리에도 기대를 하고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라며 재영을 몰아붙이고 싶었다. 모든 억울함의 근원을 내가 아닌 재영에게 돌리고 싶었다.
“너 이거 먹어야 해서.”
“뭔데?”
“먹어, 일단. 설명하기는 힘드니까.”
재영이 내민 손을 보았다. 재영의 손에 하얀 봉투에 든 알약이 보였다. 표정을 보니 화가 난 듯 보였다. “약은 아까 줬잖아. 좀 전에도 먹었어.”라고 덤덤하게 말했는데도 재영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먹어. 다른 거니까.”
재영은 내 손을 끌어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이제는 재영이 이렇게 내 손을 끌고 올라가는 것조차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게 바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탓이었다. 재영이 내게 해줬던 모든 것들과 나를 대하던 모든 방식들, 이 모든 게 갑자기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내가 재영을 어색하게 느끼기 시작해서, 라는 게 가장 적절한 이유였다. 재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없었다. 늘 모든 사람을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했을 뿐이었다. 내게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특별한 게 아니었다.
팔을 비틀어 재영의 손에 잡혀있던 팔을 빼냈다. 계단을 오르던 재영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잡혔던 팔을 문질렀다.
“미안. 아팠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약 먹었다고 했잖아.”
“호정아.”
재영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어두운 복도였다. 창으로 들어온 야트막한 빛에도 재영의 얼굴은 빛이 났다. 집에 들어오는 모든 빛이 재영의 얼굴에만 쏟아지는 듯했다. 재영의 가슴 앞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가 나였다. 나는 모든 빛의 반대 방향과 같았다. 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등에 쏟아지는 얕은 빛조차 짙은 어둠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오늘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뭐 때문에 네가 갑자기 이렇게 나를 불편해하는지 모르겠는…….”
“너는 왜 이러는 건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데. 친구라서? 내가 네 친구니까?”
“뭐?”
“단순히 내가 네 친구라서 잘해주는 거냐고.”
재영의 어이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른 이유가 더 있어야 해? 너는 그래?”
뻣뻣하게 굳은 말투. 답답하고 화가 난 듯한 말투. 정당한 화마저 내지 않기 위해 억눌러 뱉어내는 느린 숨소리. 명백히 평소의 재영과는 달랐다. 다른 이유는 없는 게 마땅했다. 친구라서 잘해주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는 게 맞는 거였다.
“후우.”
그런데 나는 자꾸 마치 재영에게 다른 이유가 있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기다려.”
재영은 나를 두고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올라간 재영이 무엇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려고도 해봤지만 여전히 생각은 나의 내면으로만 파고들 뿐, 현재의 재영에게로 뻗어지지 못했다. 나는 이런 순간에도 한없이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었다. 지독하게도 내 감정과 나의 설움이 먼저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면 그건 재영일 것이다. 이 간단한 진리를 나름 부정하고 싶었다. 이렇게 더디게 깨달은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마른 얼굴을 비볐다. 그 사이 재영은 다시 계단을 내려와 내 앞에 섰다. 손에 물을 든 채로 나를 물끄러미 내려 보는 눈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화는 많이 진정된 듯 보였다. 물을 가져오며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는데도 재영은 그 원인에 자신을 넣고 나를 이해하려 노력했을 거다. 재영이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곧은 직선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이호정이 내게 화가 났다.’라는 복잡한 문장을 ‘내가 이호정에게 잘못을 했다.’라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테니까.
“약, 먹어. 너 먹는 거 보고 갈 테니까.”
“좀 전에 먹었다니까.”
재영은 별다른 말없이 다시 내게 물과 약을 내밀었다. 입술을 깨물고 재영을 노려보았다.
“안 먹는……!”
“난 피해도 되는데, 이건 먹어.”
부드러운 말투인데도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강압적인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재영은 내 볼을 잡아 벌렸다. 재영의 기다란 손가락과 함께 알약이 혀에 닿았다. 입속에 들어온 알약을 뱉어낼 틈도 없이 재영이 내게 물을 내밀었다.
“너한테 강제로 먹이기 싫어.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먹어.”
약은 입에서 빠르게 녹았다. 금세 약의 쓴맛이 고였다. 재영이 준 물을 입에 넣고 삼켜냈는데도 여전히 혀에는 약의 쓴맛과 신맛이 고스란히 남았다. 재영은 내가 약을 먹자 다시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내일은 오지 말라고 했지?”
“응. 수업 없어.”
어느새 현관 앞에 다다른 재영이 나를 올려 보며 물었다. 입안 가득 진득한 침이 고였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알약의 쓴맛은 자꾸만 입속을 마르게 했다.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마른 입술도 적셨다.
“하나만 물을게. 나 왜 너한테 불편한 존재가 된 거야?”
재영의 목소리에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재영이 세세하게 달라진 내 반응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기보다는 내 이런 마음이 들킬까 더욱 겁이 났다.
“…그냥.”
“말하기 싫은 거야, 말할 게 없는 거야?”
재영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계단을 내려가 당장이라도 재영을 붙들고 싶은 마음과 이곳에 꼿꼿하게 서서 재영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갈림길에서 길을 잃었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닌 것 같았다.
“네가 나를 대하는, 나에게 해주는 이 모든 게. 이 집, 대학교, 우리 아빠. 모든 게 평범한 친구 사이에도 가능한 거야?”
더듬대며 물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재영의 눈을 똑바로 보기 힘들었다.
“네 말은 지금 내가 너를 평범한 친구 사이로 대하고 있지 않다는 거네?”
“…….”
“느닷없이, 갑자기, 너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고?”
고개를 힘겹게 숙였다. 재영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과 볼 수 없는 마음이 공존했다. 이번에도 나는 어느 쪽이 더 정답에 가까운지 알지 못할 거다.
“그럼 네가 느닷없이 정의했다는 그 평범한 친구 사이에는 친구를 도대체 어떻게 대하지?”
재영의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들렸다.
“친구다운 친구는 네가 처음이었고 내가 먼저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도 네가 처음이었어. 그래서 나는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그 결과로 너에게 이런 오해를 사는 거라면, 그래. 이것마저도 다 내 잘못이겠지.”
고개를 들었다. 현관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재영을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재영을 붙들고 사과해야 했다. 내가 괜히 헛소리를 해서 우리 관계를 망치려 했으니 사과도 내 몫이어야 했다. 발이 무거웠다. 좀체 움직이지 않는 게 내 발인지 내 마음인지 알기 어려웠다. 재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눈 위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이 나를 두고 나간다는 게 처음으로 두려운 순간이었다.
“한……!”
언제나 나가면 다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지금은 아니었다. 재영이 저 현관을 열고 나가는 순간, 나와의 인연은 끝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네가 다시 괜찮아질 때까지 오지 않을게. 학교까지는 힘들면 기사 불러줄게. 이것도 부담스럽다면 네 인생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거야. 내 행동이 너에게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
“재영아.”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갔지만 이미 문은 닫힌 뒤였다. 닫힌 문을 열었다. 마당을 나가던 재영이 뒤돌아 나를 보았다. 시린 눈빛이었다. 본 적 없이 서글픈 재영의 눈빛은 내 걸음을 앞이 아닌 뒤로 밀리게 했다. 다가가기 힘들었다.
“너는. 호정아, 너는 나를 여태 네가 정의한 그 평범한 친구로만 대했다고 자신할 수 있어? 네가 정의한 그 대단하다는 평범한 친구 관계로만 나를 본 게 확실해?”
말을 마친 재영이 뒤돌았다. 맞은편에 자리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재영을 그저 보기만 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야 했다. 재영을 붙들고 오해였다고 말해야 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재영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다시 나를 안아줄 테고. 그런 후에는 나를 이해해줄 거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씨…….”
나는 더한 걸 자꾸 바라게 될 거다. 재영이 내게 준 호의보다 더한 것들을 내어달라고 조르게 될 거다. 지금처럼.
며칠이 더 지났다. 재영은 그날 했던 말대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연락을 해오지도 않았고 내 감기에 대해 더 걱정하지도 않았다. 때때로 아침에 찾아와서 해주던 식사나 커피도 더는 챙기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아주머니가 해놓고 간 반찬을 깨작이며 먹다 그마저도 다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도무지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날 재영이 돌아가고 밤에는 또 기운이 빠진 채로 잠만 잤다.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어 일어났을 땐 온 침대가 땀으로 젖어 있을 정도였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소파에 누워 또 한없이 늘어지는 잠을 잤다. 머리는 몽롱했고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나 몇 번이나 속을 게워내야 했다. 이틀이 지나 학교에 가야 하는 날이 되었을 때도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몸도 좋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이 컸다. 창가에 서서 재영의 차가 골목을 돌아나가는 걸 보면서 입술을 깨문 적도 있었다. 내가 학교에 가지 않고 있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재영일 터였다. 그런데도 재영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모든 관계를 내 허튼 기대와 망상으로 망쳐버렸음을 절감했다.
일주일이나 더 지나고서야 집을 나올 수 있었다. 날은 그새 좀 더 쌀쌀해져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버스를 어떻게 타는지, 어디에서 타서 어떻게 내리는지 헤매느라 늦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도착하니 수업시간까지는 여유가 좀 있었다.
시간 틈이 생기니 자연스레 커피가 생각났다. 마침 이전에 바드와 갔던 카페가 가까웠다. 그곳에 들러 커피를 주문했다. 이전에 바드가 주문한 케이크가 생각나 두리번거렸지만 초코케이크는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영어로 물으니 점원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케이크 종류는 매일 바뀐다고 했다.
결국, 케이크는 사지 못했다. 커피만 들고 카페 앞 건널목의 신호를 기다렸다. 매캐한 매연들로 시야가 흐릿했다. 갈색과 회색의 연기가 내가 들고 있는 커피 위를 고스란히 덮는 기분이었다. 일회용 컵 위를 한 손으로 막 덮으려는데 누군가 내 옆에 붙었다. 고개를 돌리니 바드였다.
“호정.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바드가 기운 없는 얼굴로 내 어깨를 툭 밀었다. 바드는 며칠 자지 못한 사람처럼 퀭한 눈으로 나를 흘겼다.
“너 일부러 과제 안 내려고 안 왔던 거지?”
“아. 맞다. 과제.”
그제야 교수가 첫날에 내줬던 과제가 생각났다. 재영이 도와주기로 했던 과제는 물론 나 혼자 해내기에 버거운 일인 건 맞았지만, 아예 나는 과제 자체를 잊고 있던 상태였다. 바드는 내 손에 들린 커피를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저번 주부터 과제 하느라 못 잤더니… 죽겠어.”
바드는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올렸다. 무겁다며 팔을 밀쳐냈지만 바드의 팔은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다시 내 어깨로 올라왔다.
“내가 머리는 좀 나빠도 예전부터 선생님 말씀은 잘 들었거든. 교수님이 내준 과제니까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
“그래. 고생했겠다.”
바드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폰을 꺼내 내밀었다. 검은색의 폰 액정에 빛이 반사되어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네 번호도 모르더라고.”
“아. 그랬나?”
“감기라고 한 이후로 학교에 안 오니까 걱정했어.”
워낙 처음부터 친밀감 있게 붙은 덕에 당연히 폰 번호는 서로 교환했다고 생각했었다. 바드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아예 자신의 폰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얼떨결에 폰을 받아들었다.
“호정, 네 번호 저장해줘. 재영이 번호는 얼마 전에 받았어.”
바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해댔다. 바드가 내민 폰을 받았다. 폰의 화면은 노란색 머리를 한 바드가 자신의 할머니를 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바드의 폰 화면을 보다 문득 오늘은 내가 먼저 엄마에게 전화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시차와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엄마의 전화를 받아도 귀찮은 티를 내고 대충 받던 내가 한심해졌다. 옆에 선 바드는 이제 아예 내 커피를 자신의 커피처럼 마시기 시작했다.
“내 그랜마, 예쁘지?”
“응.”
“건강하실 때 모습이야.”
바드의 폰에 내 번호를 저장해 돌려주었다. 바드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이내 내가 저장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내 폰을 보여주고 나서야 바드는 활짝 웃으며 다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는 야박해서 진짜 번호를 안 줄 수도 있을 거 같았거든.”
“별걸 다.”
교정으로 들어가자 학생들이 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각기 다른 가방을 메고 다른 신발을 신은 학생들처럼 사람은 모두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거다. 내 옆의 바드처럼, 남자인데도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 거…….
“그랜마 사진 더 보여줄까?”
바드의 눈 아래가 어두웠다. 며칠 잠을 못 잤다더니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바드가 반쯤 남은 커피를 돌려주려 하기에 다 마셔도 된다며 커피를 다시 돌려주었다. 바드는 또다시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몸을 기댔다. 무겁게 기댄 바드를 질질 끌다시피 해 강의실로 데려갔다. 바드는 내게 거의 몸을 맡긴 채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너, 손은?”
다쳤던 손이 생각나 물었더니 바드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바드의 팔을 잡아 손을 살폈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나아 보였다. 병원은 갔었느냐고 물으니 바드는 고개를 저으며 재영이 준 약을 발랐다고 했다.
“재영이가?”
“응. 정말 스위트 가이야. 잘생겼는데 똑똑하고 스위트해. 역시 재영은 게이여야만 해. 보통은 그런…….”
“바드, 너.”
바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바드의 말을 듣고 잔뜩 날 선 채로 재영을 몰아붙였다. 며칠이 지나 조금 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으로 게이에 대해 검색해보는 거였다. 나는 그쪽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호불호나 편견이 없을 수 있었던 건 정말 아예 그쪽으로는 무지했기에 가능한 거였다. 정말 내가 한재영을 이성적인… 아니, 성적인 의미로 좋아하는 거라면 그에 따른 문제와 답은 달라질 것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얻은 지식이라고 해봤자 별다른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그들은 그저 평범한 연인들처럼 연애도 하고 섹스도 한다고 했다. 여자와 어떻게 하는지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당연히 남자와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전혀 감이 서질 않았다. 단순하게 적힌 ‘섹스 전에 준비할 것들이 많다.’라는 말에는 함의가 많은 듯 보였다. 더 자세히 보려고 하니 성인인증을 하라는 문구가 떴다. 이걸 찾아보고 있는 내 꼴이 민망해 자세한 내용은 보지 못 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내가 검색해보니까 네가 전에 나한테 한 그런 농담이 더 못된 거던데?”
“내가 뭐라고 했었지?”
바드는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봤다. 동그랗게 커진 눈을 보다 멋쩍어진 눈을 피했다.
“네가 재영이 게이라고 한 거.”
“으흠.”
“나보고 차별적인 말이니 뭐니 하더니, 네가 더 나빠.”
“으흠.”
바드는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검색해볼 정도로 신경 쓰였단 말이지?”라고 묻는 말에 눈을 흘겼다. 눈치가 빠른 인간과의 대화는 힘들었다. 내 속을 그대로 보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호정, 난 진짜 농담이었잖아. 물론 재영처럼 잘난 인간들은 그러니까, 내 안테나가 말이야. 아니. 아무튼 그렇게 똑똑한데 잘생긴 애들은 보통 그러니까. 내가 그러기를 바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애니웨이. 중요한 건 네가 신경 쓰지 않으면 충분히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던 거 아니야?”
횡설수설했지만 끝에는 맞는 말이긴 했다. 신경 쓰지 않고 농담은 농담으로 넘기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 말에 잔뜩 긴장한 채로 재영을 몰아붙이고 바짝 오른 날로 재영을 상처 주고 쫓아낸 건 나였다. 바드는 웃으며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네가 재영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아니야.”
물론 고등학교 때도 최정화를 좋아할 만큼 주제넘은 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재영을. 내가 감히 한재영을 좋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건 주제를 넘다 못해 이탈하는 수준이었다.
“그럼 됐지, 더 신경 쓸 게 뭐 있어.”
바드는 낄낄대며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켰다. 목울대를 넘어가는 커피를 보다 보니 나도 다시 목이 말랐다.
“너 한 잔 더 마실래? 내 거 사러 갈 건데 너 마실 거면 같이 사 오려고.”
“괜찮아. 커피 마신다고 풀릴 피로도 아니고.”
강의실에 자리를 맡아두고 다시 건물을 빠져나왔다. 바드에게 자리를 좀 봐달라고 했더니 바드는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 좀 전에 건넜던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 카페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후…….”
재영은, 한재영은 오늘 몇 시에 수업이 있을까. 재영도 나처럼 아직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일까. 그렇다면 나처럼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으로 학교에 왔을까. 아니면 오늘은 수업이 없어 혼자 집에 있으려나. 이곳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누구일까. 왜 아직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재영의 집에 다른 친구들은 갈 수 있는 걸까. 그날 만나고 왔던 친구는 누구…….
“이호정. 미쳤냐, 진짜.”
재영의 생각이 실타래처럼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점원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몇 시간이고 재영만 생각할 뻔했다. 뜨거운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왔다. 맞은편에 선 바드가 보였다. 바드는 내게 반가운 손짓을 해댔다. 강의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더니 기어코 이곳까지 따라 나와 나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바드는 여전히 피곤한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고개를 젖혀 코와 볼을 주무르며 잠을 깨우던 바드의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다가왔다. 재영의 차였다.
뜨거운 커피를 들고 재영의 차를 응시했다. 신호가 바뀌고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는데도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바드는 해맑은 얼굴로 차 안의 누군가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곧 바드가 손가락으로 맞은편에 선 나를 가리켰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재영이 내게 아는 척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재영의 차는 도로를 벗어난 뒤였다. 빨간색이 된 신호등을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바드는 횡단보도의 맞은편에 서서 날 보고 있었다. 우물쭈물 망설이는 표정을 보니 재영과 내 사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다음 신호 때 길을 건너 바드의 옆에 섰다. “강의실에 있지, 왜.”라고 묻자 바드는 입을 꾹 다물더니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위로 같기도 했고 위안 같기도 했다. 바드가 정말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지금 내 마음도 그가 대신 눈치채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으흠.”
바드는 나를 슬쩍 내려 보며 입을 다셨다. 바드는 별다른 말없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넣었다. 달콤한 포도 향이 났다. 바드는 내게 재영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네가 반대편에 있으니 보고 가라고 말했는데도 재영이가 그냥 떠나더라.’ 혹시나 바드가 그런 이야기를 쏟아낼까 애써 더 묵묵한 표정을 지으며 걸었다.
수업은 지겨웠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없으니 당연했다. 이전처럼 수업시간에도 말을 걸며 시끄럽게 할 줄 알았던 바드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철이 들었나 돌아보니 책상에 볼을 붙이고 자는 바드가 보였다. 바드는 중얼중얼 잠꼬대까지 해가며 졸았다. 바드의 고개가 책상 위에서 좌우로 힘없이 흔들거렸다.
수업이 끝나자 단상에 서 있던 교수가 큰 보폭으로 내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내게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교수의 구두가 나와 바드 사이에 서고 나서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교수는 자는 바드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완벽하게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긴 문장 속 “your friend.”, “interrupt.”, “warning.”이라는 단어에서 어렴풋하게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네 친구 잠꼬대가 수업을 방해하니 주의를 주길 바란다는 것과 이건 명백한 경고라는 것.
보나 마나 이런 내용일 게 뻔했다. 와중에도 아직 자는 바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냥 바드를 깨워서 혼내면 될 걸 왜 굳이 나한테 저렇게 화를 내나 싶었다.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바드는 여전히 숨소리를 색색대며 깊게 자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교수가 강의실을 나가고 나서도 강의실 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차분했다. 강의실 전체가 가라앉은 듯 느껴졌다.
빈 일회용 컵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전이라면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시끄럽게 강의실을 빠져나갈 아이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하게 강의실을 나갔다. 흘깃대며 바드를 보고 또 나를 보는 눈길에 혹시 교수가 말한 경고의 대상이 나였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잠든 바드의 몸을 흔들었다. 얄밉긴 해도 어찌 됐든 자는 사람을 두고 나 혼자 갈 수는 없었다. 내가 몸을 흔들자 바드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아무리 봐도 오늘은 바드에게 너무 힘겨운 날인 것 같았다.
“하암. 수업 벌써 끝난 거야?”
바드는 눈을 반도 뜨지 못 하고 물었다.
“응. 이제 다음 수업 가야지. 3층이래.”
“호정. 난 오늘은 도저히 수업 더 못 듣겠거든? 혼자 갈 수 있지? 혼자 가도 안 외롭지? 나 보고 싶어지려나? 하지만 어차피 이 과에 수업 제대로 들을 사람 없는 거 교수도 알 거야.”
그렇다고 하기엔 방금 너한테 ‘경고’까지 하고 갔는데.
괜히 말했다가 상처만 받겠지 싶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바드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다시 자신의 볼을 책상에 붙였다.
“진짜 안 갈 거야?”
“응. 혼자 가. 난 여기서 더 자고 바로 집으로 갈게.”
“집에 가서 자지. 점심은?”
바드가 감았던 눈을 느리게 떴다. 눈동자만 굴려 나를 올려보는 눈에 나도 그 눈을 마주했다. 바드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뒤로 감추려다 성소수자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 그대로 두었더니 바드가 내 손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너 그렇게 다정하지 마. 나 좋은 사람 아니야.”
“내가 언제 다정했다고.”
“내 밥 챙기고 그러는 거. 그거 우리 그랜마만 하는 거야.”
제 말만 하고 바드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호정.”
바드가 눈을 감은 채 나를 불렀다.
“예전에 나와 닮은 친구가 있댔잖아.”
“어.”
첫날에 했던 말을 기억하는 거 같았다. 바드의 ‘김민재’라는 한국 이름과 밑도 끝도 없는 친화력에 민재 생각이 났던 건 사실이었다. 바드의 보라색 머리가 그의 얼굴에 몇 가닥 붙었다.
“그때 나랑 닮았다던, 그 친구가 혹시 재영이야?”
“…한재영? 아니. 그럴 리가. 다른 친구 있어, 있었어.”
바드가 피식 웃었다.
“…asta e ușurare.”
“뭐?”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드는 다시 색색이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게 잠들었다. 바드의 숨소리가 강의실을 채웠다. 이렇게 혼자 두고 가도 되나 걱정이 되었지만 나도 다음 수업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바드의 노트에 혹시 다음 수업이 끝나기 전에 깨어나면 연락하라는 메모를 남기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바드는 그다음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빵까지 사 바드가 자던 이전 강의실에도 가보았지만, 강의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나도 슬슬 배가 고팠다. 집에 가서 얼떨결에 산 빵이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후에 늦었지만 제출하지 못한 과제도 할 생각이었다. 비록 제출 일에는 늦었지만, 아예 내지 않는 것과 조금이나마 성의를 보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좀 전 교수가 말한 경고라는 게 실은 바드를 향한 게 아니라 과제를 하지 않은 나를 향했던 건 아닐까도 생각했다.
“후우. 역시 공부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걸 물으면 답하기 어렵지만, 싫은 걸 묻는다면 그건 당연히 공부였다. 대학은 애초에 아빠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오지도 않았을 곳이었고, 재영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올 수도 없었던 곳이었다.
재영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 재영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마지막으로 면접을 봤던 치킨 집에서 치킨을 튀기고 기름 냄새가 나는 몸으로 지쳐 잠드는 게 지금의 평범한 일상이었을 거다.
창밖의 런던은 조용하고 적적했다. 길에 난만히 핀 꽃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지금은 평일의 낮이라 더욱 조용한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번 주말에는 집에만 있지 말고 이런 곳에 더 나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에 오지 않는 주말에도 번화가나 유명한 곳을 다녀보는 게 좋을 듯했다.
그나마 번화가인 학교 앞을 지나 버스는 빠르게 대교에 올랐다. 강의 물결마다 숨과 같은 하얀 거품이 일렁였다. 강은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바람이 잔잔하니 파문조차 부드럽고 잔잔하게 일었다. 내 삶을 이루는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나를 때리던 바람의 속도와 지금 이곳에서 내게 불어오는 바람의 속도가 달랐다. 당연히 시간의 흐름도 달랐다. 내 등을 미는 풍속도 달랐다.
지금 한국에 있었다면 내 시간은 여름 바다의 폭풍 같았을 것이다. 노도는 높낮이도 흐름도 제멋대로 흘렀을 테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디로 흘러가고 또 어디로 밀려나며 간신히 숨만 헐떡인 채 살아갔을 것이다.
그에 반해 지금의 시간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파도가 일렁이지 않는 삶에서 방향을 정하는 건 오직 노를 쥔 나 자신이니까. 이곳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겐 삶도 시간도 내 것이 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이건, 내 몫이… 아니지.”
강을 향해 있던 시선을 버스의 바닥으로 내렸다. 이건 내 몫이, 내가 온당하게 얻어낸 게 아니었다. 내게 뗏목을 만들어주고 빈손에 노를 쥐여 주고 잔잔한 강에 올려준 것까지, 모두 재영이 해준 일이었다. 나는 그저 재영에게만 의지해 이 잔잔한 강물 위에 올려졌을 뿐 내 힘으로 얻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재영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억울하고 답답해할까.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른 나를 미워하고 있을까.
나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직선. 곧은 직선. 아무리 재영처럼 그 직선의 생각을 이어보려 해도 답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집이 있는 골목에서 잠시 망설였다. 재영의 한옥은 외관으로 윤곽은 알 수 있지만 그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별채와 닮은 외관의 모습만 보일 따름이었다. 내부를 보려면 발을 들거나 가까이 다가가 돌로 쌓은 담장 안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너무 구차했다. 혹시나 외출했던 재영이 들어오며 그런 내 꼴을 보면 구질구질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질려도 완전히 질려버릴 모습이었다.
결국 현관에 들어와 숨을 훅 내뱉었다. 계단을 오르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잠시 응시했다.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다. 일주일이 넘게 울리지 않고 조용한 폰이 어색했다. 보통은 재영의 연락이 왔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거만하게 굴었지만, 우리의 사이가 멀어지면 손해를 보는 건 나였다. 나뿐이었다. 재영은 나와의 관계에서 손해랄 게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맥 중 하나가 나였다. 자기비하가 아니었다. 명백한 현실이었다.
바드에게 주려고 샀던 빵으로 배만 채우고 소파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어 과제를 검색했다. 바드에게 과제로 어떤 스포츠를 선정해서 했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 폰 번호 받았지.”
부엌 테이블에 놓았던 폰을 가져왔다. 부재중 전화 중 낮에 왔던 저장하지 않은 번호를 찾았다. 그 아래 숱하게 늘어진 재영의 번호에 한숨을 내쉬었다. 재영의 부재중전화를 보자 다시 그날 밤이 떠올랐다. 모두 그날 하루에 온 연락들이었다. 내 잘못들만 줄줄이 머리를 채웠다.
인정해야 했다.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게 맞는 거였다. 재영의 번호 위에 손가락을 올리려다 다시 손을 내렸다. 무턱대고 화낸 주제에 전화 한 통으로 사과한다고 한들 그게 쉽게 풀어질 리 없었다. 재영도 분명 상처받았을 것이다. 호의를 제멋대로 오해해 상처를 주던 내 모습에 이미 질려버렸을지도 몰랐다. 창가로 가 맞은편 재영의 집을 내려 보았다. 아직 거실과 마당의 조명이 켜지지 않았다. 집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재영이 돌아오면 직접 얼굴을 보고 사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폰을 꼭 쥐고 바드의 번호를 저장한 후 그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은 갔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못했다. 다시 통화를 누르려다 관두었다. 하루 종일 피곤해하더니 집에 가 곧장 쓰러진 것 같아서였다. 폰을 내리고 어두운 재영의 집을 보았다. 다시 소파로 돌아왔을 땐 웬일인지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민재와는 이렇게 크게 싸운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몰아붙인 적이 없었다.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벌써 뒤가 뜨거워진 노트북을 허벅지와 배 사이에 올렸다.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므로 지금은 과제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남들이 하지 않을 스포츠를 선택해야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을 스포츠라면 무엇이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농구, 골프, 축구, 하키, 배구. 머리에 떠오른 거라곤 모두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뿐이었다.
“우리나라 스포츠로 할까…….”
적어도 한국 전통 스포츠라면 나밖에 하지 않을 테니 잘했는지 못했는지 비교 대상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틀린 내용이 있는지도 잘 모를 테니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검색창에 커서를 두었다. ‘한국 전통 운동’을 검색하려는데, 이전에 검색했던 ‘물류’가 아래에 떴다.
“아, 민재… 어머니.”
커서를 내려 다시 물류 글자를 클릭했다. 엄마, 아빠, 민재마저 잊은 채 오로지 내 생각만 한 날이 스쳤다. 노트북에 시선을 집중해 내렸다. 회사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화면을 위로 올리다 문득 지난 8월 말에 우후죽순 쏟아진 기사에 커서를 멈추었다.
[국내 업계 3위 엘든 물류, 역대 최대 부도.]
[연 매출 약 4,200억의 엘든, 최종 부도]
[2조 원 매머드급 물류 창고 건설 중 악재 겹쳐, 결국 부도로 이어진 엘든의 무절제 확장.]
“엘든…….”
입에 붙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민재가 자랑하던 회사의 이름인 것만은 분명했다. 부도라는 글자가 이토록 생소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아빠의 회사가 부도어음으로 문을 닫았을 때도 이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초췌하던 민재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지 가늠되지 않았다.
검색창에 가 엘든이라는 회사 이름을 다시 검색했다. 고객센터와 본사 전화번호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막상 전화를 거니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이었다. 내가 조금만 덜 멍청했더라도 어머니께 그전에 연락 한 통은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도로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주택만 있는 곳이라 이 동네에서 여태까지는 클랙슨 소리를 들을 일이 잘 없었다. 집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에 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창가로 가서 상황을 봐야 할지, 민재 집의 번호를 찾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할지 고민했다. 머리는 둘 사이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민재 어머니와 내 일, 재영의 생각, 밖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 클랙슨이 한 번 더 크게 집과 집 사이, 동네의 도로를 메웠다. 소리가 가까웠다.
우리 집이나 재영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창가로 다가가려는데 조용하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폰에 뜬 번호는 바드의 것이었다. 허벅지에 둔 노트북을 내리고 전화를 받았다. 바드는 코를 훌쩍이다 내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목을 가다듬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호정? 전화 먼저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나 번호 받은 보람이 있구나!
목을 가다듬은 바드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반가운 티를 냈다. 혹시나 나 때문에 감기라도 옮은 게 아닌지 걱정돼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자신은 슈퍼맨이라 절대 걸리지 않는 것 중 하나가 감기라고 덧붙였다.
-또 걸리지 않는 게 있는데 속도위반, 신호위반. 절대 안 걸려. 신기할 정도로 안 걸린다니까.
“왜?”
바드는 내 답이 흡족한지 느닷없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바드는 대뜸 한국말의 ‘걸리다’가 얼마나 재미있는 단어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구절절 늘어지는 말을 듣다 다시 이유를 물었다. 그제야 바드는 본래의 문맥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나 드라이빙 라이센스가 없거든.
어이없음에 흐린 웃음과 함께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밖을 시끄럽게 하던 클랙슨 소리가 사라졌는데도 바드 때문에 여전히 머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했다. 바드는 전화만 하는데도 시끄러웠다. 기운 없는 목소리를 하고도 계속 종알대며 말을 이었다. 민재 집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바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전부 들을 자신은 없었다. 서둘러 본래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으려면 바드의 말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바드, 미안. 나 과제하다가 뭐 좀 너한테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였는데. 지금 시간 괜찮아?”
-시간이 괜찮냐는 건 무슨 의미야? 시간도 아픈 거야?
폰을 쥐고 있는 바드의 모습이 상상됐다. 아마도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통화가 가능하냐고, 통화할 시간이 되는 거냐는 의미였다고 설명하고 나서야 바드는 당연히 괜찮다며 웃었다. “나는 시간 많이 가지고 있어.”라며 웃었지만 평소처럼 호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으흠. 근데 호정. 이미 과제 시간 지났잖아?
바드가 물었다.
“한국인은 원래 과제의 노예야. 안 하면 마음이 무거워.”
내 말에 바드가 웃기 시작했다. “마음이 무거워.” 바드는 내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평소와 다른 차분한 웃음이었다. 웃던 바드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물으려던 건 뭔데?
“넌 스포츠 뭐 정해서 했어?”
-난 풋볼.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하기도 했었고. 그나마 제일 잘 알아서.
“한국에만 있는, 그런 거 해도 괜찮으려나? 넌 친구들 좀 있잖아. 다른 애들 과제한 거 봤어?”
-보진 않았지만, 괜찮을 거 같은데? 한국에만 있다니 너무 신비롭다. 대충해, 호정. 어차피 교수는 우리 과제 안 볼걸?
바드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가 다시 깔깔대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정말 안 아픈 게 확실하냐고 되물어도 바드는 자신은 절대 아프지 않다고 단언했다. 바드의 뒤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바드도 나처럼 소파나 침대에 편하게 누운 것 같았다.
-이번 토요일에 파티 있는데. 호정, 같이 갈래?
“나 시끄러운 곳 별로 안 좋아해.”
-재밌을 텐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바드 같은 타입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나는 여러 사람들과 다 같이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민재가 피시방에 가는 날에도 눈치껏 빠져 집에 오기 일쑤였다. 피시방도 그러한데 파티라니. 듣기만 해도 귀가 먹먹했다. 왠지 그런 곳에 가면 바드 같이 말 많은 아이들만 수십 명이 있을 것 같았다. 한 시간만 있어도 달팽이관이 뜨끈하게 녹을지도 몰랐다.
-남자들만 올 거야. 다 나 같은 애들이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무슨 말인데.”
-재밌을 거란 이야기야. 너도 재밌을 거야. 나 믿어. 나 믿지? 나 거짓말 안 하잖아. 호정.
바드는 또 웃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운은 없었지만 기분은 좀 나아진 듯 보였다.
“너 파티 가도 되는 상태인 건 맞는 거야?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
바드는 걱정하지 말라며, 운전면허를 따도 속도위반보다 감기에 더 걸리지 않을 거라는 재미없는 말을 해댔다. 바드가 몰아붙인 덕에 결국 파티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닫았던 노트북을 열었다. 민재의 아빠 회사와 관련된 뉴스를 클릭했다. 기사의 내용은 헤드라인과 크게 다르지도 추가적인 내용이 더 있지도 않았다. 회사는 이미 자금난을 겪고 있었고 와중에 무리하게 물류 창고를 추가로 건설하다 부도를 맞았다는 기사였다. 지난달부터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는 기사의 문구에 시선이 고정됐다.
민재라도 있었다면 지금 부모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았으려나 싶었다. 아니, 민재가 이런 걸 보지 않고 그저 풍족하게만 지내다가 가서, 나와 같은 비참함을 겪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인 걸까. 이런 일을 과연 다행이라고 할 수나 있는 걸까, 자문했다. 노트북을 소파에 놓고 부엌으로 가 물 한 통을 그대로 비웠다. 시원한 물이 쉴 새 없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도 갈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창가로 가 멍하니 재영의 집을 응시했다. 불 꺼진 재영의 집은 낮에 본 강의 물결만큼이나 잔잔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삶에 나라는 물결은 애초에 일지도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적요한 재영의 집 앞으로 낯선 차가 들었다.
“…….”
차에서 내린 남자는 한국인처럼 보였다. 멀리에서 봐도 재영보다 키가 컸다. 남자의 머리는 검은색이었으나 너무 짧은 탓에 탁한 회색빛이 같이 돌았다. 남자는 차에 기대 고개를 반쯤 숙이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가 하늘을 향해 올랐다. 동시에 남자가 연기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시선은 곧 내가 선 창을 향했다. 마치 창 뒤에 선 내가 보이는 것처럼 빤히 응시하는 눈에 나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재영은 외국은 범죄가 잦다는 이유로 이 집의 창을 밖에서 볼 수 없게 새로 지었다고 했었다. 총알도 못 뚫는 곳에 나를 두었다며 뿌듯한 표정을 짓던 재영의 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담배를 태우면서도 남자는 내가 선 곳만 보고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목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남자의 눈은 가로로 길고 매서웠다. 눈에 비해 작은 눈동자는 먹물이 담긴 것처럼 깊고 어두웠다.
무릎이 시렸다. 수술 후부터 주기적인 통증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렇게 오래 서 있다가 방심하고 한쪽으로 무게를 두는 순간 무릎이 아팠다. 무릎을 손으로 감싸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폰을 들어 무언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곧이어 재영의 집 문이 열렸다.
“재영…….”
재영이 집 안에 있었다. 재영은 젖은 머리로 문을 열고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인사는 아니었다. 들어오라는 손짓이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더 있어 보이는 데도 남자는 재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재영이 활짝 웃는 게 보였다.
그때 말했던 친구가 저 사람일까, 생각했다. 다부진 얼굴과 굵은 선, 큰 키의 남자를 생각했다. 그에 반해 소파 위에 그림자로 일렁이는 내 모습은 볼품이 없었다. 소파로 가 켜둔 노트북을 덮고 다시 그 위에 누웠다. TV도 보고 싶지 않았고 노래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파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눈을 떠 처음 한 일은 창가로 가 다시 재영의 집을 살피는 거였다. 내가 생각해도 구질구질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재영의 집은 어두웠다. 안의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어두운 곳에서 그 사람이랑 무얼 하는 건지, 왜 그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곳에 나는 여태 단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던 건지 마음이 복잡하게 뒤틀렸다. 남자는 이미 재영의 집을 떠났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재영은?
“설마, 같이……?”
커튼을 열어 창가에 더 가까이 섰다. 아무리 봐도 안은 어두웠다. 마당의 조명도 켜진 게 하나 없었다. 지끈대며 열이 오른 눈덩이 위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눈앞에 검은 파도가 일렁거렸다.
다음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금요일이라 들어야 할 수업은 하나였다. 얼른 듣고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편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는데 뜻하지 않게 평소보다 더 기운이 좋은 바드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내일, 내일이라니까. 호정.”
“싫다고. 나 진짜 그쪽 아니라니까.”
“으흠. 알겠고, 그냥 친구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설마 내가 게이라서 싫다는 거야? 그런 거야?”
바드가 끈질기게 내 팔을 끌었다.
“네가 게이인 거랑 상관없이 내가 게이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를 못 간다는 거…….”
“게이들이 오지만 게이만 오는 것도 아니고, 게이가 아니라고 해서 못 가는 곳도 아니야. 어제 분명, 생각해 본다고 했었잖아.”
바드가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불뚝하게 내밀었다. 하, 하고 한숨을 내쉬며 바드의 팔을 풀었다.
“어제 재영이 온다고 해서, 처음엔 너도 오는 줄 알았잖아.”
“재영이 거기에 간대?”
“응. 파트너 데려가도 되냐길래 처음에는 당연히 재영의 파트너가 너인 줄 알았는데. 재영…….”
“언제?”
바드의 말이 마무리되기도 전이었다. 다급히 그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바드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싱긋 웃으며 내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봐. 질투하는 거잖아. 너, 재영 좋아해.”
“재영이가 거기에 간다고 한 게 언제인데?”
“너랑 통화하고 나서? 밤?”
그렇다면 그 낯선 남자가 재영의 집에 들어가고 난 이후의 시간이다. 입술을 깨물었다. 바드는 느린 눈으로 나를 훑다가 약하게 내 어깨를 슬쩍 밀쳤다. 정신을 아무리 차리려고 해봐도 생각은 끝도 없이 어제의 그 남자에게 멈춰 움직이질 않았다. 머리의 모든 생각이 정체된 기분이었다.
“아무튼 재영도 오잖아. 같이 가자.”
“됐어.”
더 가기 싫어졌다. 바드의 팔은 진드기처럼 끌어 내리고 또 떼어내도 다시 착착 올라와 내 몸에 붙었다. 결국 다시 팔을 잡아 내리려는데 바드의 팔이 눈에 띄게 부들대며 떨리고 있었다.
“바드… 어디 아파?”
“호정아.”
“어, 어.”
팔이 흔들릴 정도로 떠는 바드의 모습이 낯설었다. 시선을 올리니 눈빛도 팔 못지않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드는 숨을 훅훅 내뿜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와주면 안 될까?”
“뭘 또 그렇게까지… 나 영어도 못 해서 불편해서 그래.”
바드는 울상이 되어 날 쳐다보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바드. 응? 미안해. 나 너 무시하거나, 그런 쪽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냥 내가 그런 분위기를 어려워해.”
“…응. …어쩔 수 없지.”
파들파들 떨리던 바드의 팔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몇 걸음 걷다 뒤돌았다. 바드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운동화로 바닥을 탁탁, 걷어차는 모습을 보다 여전히 불안하게 떨리는 손으로 시선이 갔다.
“하… 미치겠네. 야! 바드!”
바드가 고개를 들었다. 멍한 눈빛에는 여전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나를 보는 바드의 눈이 시무룩하고 멍했다. 바드가 안쓰러운 절반의 마음과 재영이 그곳에 간다는 것에 마음이 동한 나머지 절반의 마음으로, 파티에 잠깐 들르는 것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옷은 아무거나 입고 가도 되지?”
“응?”
“격식 있는 그런 건 아닌 거지?”
바드의 눈에 금세 총기가 돌았다. 바드는 쪼르르 달려와 내 어깨를 감쌌다. “호정, 잘 생각했어. 재밌을 거라니까?”라는 말이 통통 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바드는 어깨를 떨어가며 웃다가 자판기 앞에 멈춰 섰다.
“호정. 나 커피, 커피 마시고 싶어.”
“카페 갈까?”
“응. 내가 살게, 호정.”
바드는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폰을 켰다 껐다. 화면에 뜬 바드와 바드 할머니의 사진은 여전히 눈이 갈 정도로 예쁜 모습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기운 넘치는 바드였지만, 사진 속 바드는 좀 더 어리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할머니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붙이고 이를 다 드러내고 웃는 바드를 따라 나도 살포시 웃었다.
집에 돌아온 오후부터 토요일이 된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하고 아픈 데다 속도 좋지 않아 아무것도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세안을 하면서 홀쭉하게 마른 볼을 매만졌다. 아무리 봐도 볼품없어진 얼굴이었다. 재영에게 사과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대충대충 느리게 샤워하고 이미 깔끔해 청소할 것도 없는 집을 굳이 또 청소했다. 오늘 입을 옷을 제외하고 전부 꺼내 세탁기를 돌렸다. 아주머니가 이미 세탁해 개어 놓은 빨래도 다시 새로 돌렸다. 마른 옷에 재영이 준 향수를 뿌려 걸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킁킁대며 입은 옷의 냄새를 맡았다. 역시나 재영의 냄새가 났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었다. 언젠가 이 향수는 본인이 직접 업체에 주문해서 쓰는 향수라던 재영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 자신만 쓰던 향을 이제는 나와 나눠 쓸 수 있게 되어 좋다며 웃던 재영의 얼굴까지 떠올렸을 때는 이미 눈시울에 뜨끈한 열이 오른 후였다.
“하아, 씨. 구질구질해.”
진짜 첫사랑이라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첫사랑. 첫 연애가 아닌 누군가를 좋아해서 괴로운 그런 마음. 마음에 애벌레 수백 마리가 득실대는 기분. 복잡하고 더러운 기분 끝에 간지러운데도 팔이며 다리를 어쩔 수가 없는 무기력함이 나를 감쌌다. 내가 감당하기엔 여전히 불편한 감정이었다. 재영을 향해 내가 느끼는 소소한 마음의 발화점이 동경과 자격지심이 아니라 어쩌면 그 모든 감정의 시작에 호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뒤따랐다.
“내가, 한재영을?”
도대체 언제부터. 목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가슴도 답답하고 눈에선 자꾸 이유 없이 눈물이 나려 했다. 하나같이 구리고 지저분한 생각들이었다. 바드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바드도 그렇다고 했다. 전혀 이상할 건 없다고 했고, 나도 그것엔 동의했다. 세상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까. 여태는 아니었지만, 내가 바뀌었을 수도 있는 거다. 아니면 애초에 나는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다.
재영을 보기 전까진 남자를 보면서 한 번도 그런 식의 상상을 하거나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도 없었다. 고등학교 땐 내내 최정화만 좋아해서 민재로부터 호구라는 욕을 듣기도 할 정도로 나는 그런 쪽으로는 곧았다. 남자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정말 남자인 재영을 좋아하게 된 거라면, 그 이유를…….
“이유야 많지.”
이유야 많았다. 재영이 보여준 배려, 매너, 몸에 밴 기품 있는 행동, 나를 보는 다감한 눈빛. 재영이 내게 베풀어준 모든 것들. 따뜻한 말, 나를 보며 웃던 얼굴. 돌아보니 하나같이 모두 그럴싸한 이유가 되었다. 오히려 이유가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것들뿐이었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내가 정말 재영을 좋아하는 거라면, 그래서 내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 그날 그렇게 재영을 몰아붙인 거라면.
그런데 재영이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거라면.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양심이 허락하는 내에서 한국으로 돌아가 재영이 선의로 베푼 것들을 돌려줘야 했다. 아버지의 병원비부터 지금의 대학교까지 해결해야 할 게 많았지만, 재영을 향한 내 마음이 친구로서가 아니기에 그 옆에 서서 뻔뻔하게 아닌 척, 여전한 친구인 척 그 모든 걸 받을 순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빌어먹을. 죽을 때까지 사랑 같은 건 하지 말라던 민재의 말이 떠올랐다. “그거 진짜 좆같은 거야. 그니까 최정화도 적당히, 좋아해야 한다. 아가야.”라며 곰살맞게 붙던 민재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마른 볼을 감싸고 바닥에 누웠다.
“웬일로 민재 말이 맞네. 이거 진짜 좆같은 거네.”
약속 시간까지 얼마가 남았는지 생각하고, 아직 여유가 있다는 판단에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 빈속이 쓰렸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챙겨 먹을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픈 가슴을 문질렀다. 답답함의 원인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내 속을 뒤트는 재영 때문이었다.
빗소리에 눈을 떴다. 따가운 눈을 겨우겨우 떠 창가로 갔더니 이미 바닥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법 세찬 비였다. 재영의 집은 여전히 어두웠다. 안이 보이지 않으니 어둠 속에 어제처럼 재영이 있는 것인지, 아예 집을 비운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준비해둔 흰색 티에 짙은 남색 카디건을 걸쳤다. 색이 어두운 청바지를 입고 흰 운동화까지 갖춰 신고 현관 앞 거울 앞에 섰다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재영의 향수를 뿌렸다. 이전에 재영이 사 주었던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현관에 서서 문을 닫는 틈에 검은 세단이 빠른 속도로 뒤를 지났다. 혹시나 재영의 차인가 싶어 돌아보았지만, 재영의 차는 아니었다. 골목을 돌아나가는 차의 뒤 범퍼를 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짝사랑까지는 괜찮지만, 상사병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너무 창피했다. 집에서 나오자 때맞춰 바드가 전화를 해왔다. 우산을 한쪽 어깨에 올리고 울리는 폰을 받았다.
“응. 나 방금 나오긴 했어.”
비 때문에 벌써 어둑해진 하늘을 한번 올려보았다.
-비가 와서 걱정했어. 너 안 올까 봐.
“가고 있어. 30분 정도면 도착해.”
-응. 오늘 재밌게 놀자, 호정!
바드가 잔뜩 신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귀에 붙었던 폰을 살짝 내리고 다시 폰을 귀에 붙였다. 바드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 어제 학교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운이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오늘은 놀 생각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빗물이 청바지의 밑단과 운동화로 튀었다. 검은 흙물이 옷과 신발을 더럽혔지만 상관없었다.
미리 검색해둔 버스에 올랐다. 바드가 보낸 주소는 학교가 있는 곳의 번화가와는 다른 반대편의 번화가였다. 나와 재영이 사는 동네에서 가려면 버스로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재영이 그곳에 오면, 사과는 할 수 있을까.
재영은 내 사과를 받아줄까.
그곳에 데려온다는 파트너는 누구일까. 남자라면, 재영도 남자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런데도 내가 아니라면.
또 분별없는 기대와 실망이 동시에 교차해 일었다. 세차게 창을 긁으며 내리는 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노래를 듣는 것보다 고요한 빗소리에 집중하는 게 더 좋은 날이었다. 늘 노래 선곡을 부탁하던 재영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첫사랑은 진짜 좆같은 거구나, 기분 좋지 않은 웃음이 났다.
바드가 말한 곳은 번화가의 안쪽 골목에 자리한 일반 주택이었다. 낯선 동네였지만 내 눈엔 아직도 외국은 외국이기만 할 뿐, 재영과 내가 사는 집이 있는 곳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좀 더 도로가 어둡고 바닥은 쓰레기로 뒤덮여 더러웠다. 빗물까지 섞여 큼큼한 냄새가 도로에 진동했다.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해댔다.
파티라기에 번화가 앞의 상점에 들러 와인도 한 병 샀다. 재영이 있다면 구색에 맞춰 더 좋은 걸 살 수 있었을 텐데 안목이 없으니 어느 게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대충 좋아 보이는 걸 들고 바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드가 말한 주택의 입구에 선 서너 명의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빈속을 파고들었다. 전화를 받은 바드의 목소리 뒤로 시끄러운 음악이 먼저 들렸다.
-호정!
“나, 여기 네가 말한 곳 앞인데. 들어가도…….”
누군가 내 뒤에 바짝 몸을 붙였다. 엉덩이 사이에 불뚝하게 잡히는 낯선 남자의 성기에 깜짝 놀라 몸을 돌리고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파란 눈을 깜박거리며 날 향해 미소 지었다. 여기에 온 게 맞느냐고 영어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대답하긴 여전히 어려웠다. 입만 벙긋대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남자가 피우던 담배를 끄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 싫은데.”
싫었다. 이런 에스코트는 고맙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바드가 한 말이 떠오른 것도 있었다. 저 외국인도 게이일 수 있었다. 덥석 손을 잡아 괜한 오해를 사긴 싫었다. 손을 빤히 보고만 있자 남자는 머쓱해진 손을 내렸다. 다행히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남자가 현관을 가리키기에 바드와의 통화도 잊고 고개를 숙이고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비켜.”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재영이었다. 재영은 눈앞에 선 남자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 시야에 있던 남자가 사라지고 그 앞으로 재영이 나타났다. 보고 싶었다. 막상 얼굴을 보고 나니 불분명하던 감정이 명확해지고 어렴풋하던 감정도 선명해졌다.
“재영아.”
재영은 나를 빤히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들어가자. 너도, 여기 놀러 온 거잖아.”
“…응.”
재영이 뻗은 손을 잡으려는데 눈앞에 있던 손이 빠르게 멀어졌다. 재영은 내가 그 손을 잡기도 전에 자신의 손을 내렸다. 나를 보는 얼굴에는 익숙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지만 편안한 느낌은 아니었다.
“아, 넌 이런 것도 부담스럽지?”
“재영아… 그때는, 내가……!”
“알았어. 놀다 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재영은 나보다 먼저 걸음을 옮겨 문으로 들어갔다. 문이 살짝 열리며 그 사이로 시끄러운 음악이 새어 나왔다. 멍하니 서 있다 재영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좀 전에 재영에게 밀렸던 남자가 몇 번이나 더 나와 재영을 흘깃거렸다. 얼른 바드에게 와인만 주고 다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도무지 속이 쓰리고 마음도 불편해 더 있기 힘들었다. 하나둘씩 짝을 지어 모인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재영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바드는 2층에 서 있었다. 날 발견한 바드가 양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바드는 2층에서 달려 내려와 내가 산 와인을 받았다. “호스트한테 전해줄게. 아니다. 호스트한테 같이 갈래?”라고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 진짜 미안한데, 먼저 가도 되지?”
“하지만 호정은 방금 왔는데.”
바드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귀를 바짝 붙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아 거의 안긴 상태로 다시 바드에게 재차 가야겠다는 말을 할 때였다. 멀리 좀 전에 내게 손을 내밀었던 남자가 재영에게 붙어 귓속말을 하는 게 보였다.
이렇게 다들 가까이 붙으라는 의도로 노래를 크게 트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보면 외국에선 꼭 이렇게 노래를 틀던데, 다 그런 음흉한 의도가 숨겨진 것 같았다. 바드는 품에 와인을 꼭 쥔 채로 시무룩해졌다.
“호정, 나랑 놀다 가지… 재밌을 텐데. 내가 친구들도 소개해줄게.”
“충분히 재밌었어. 덕분에, 덕분에 이런 데도 와보고. 너무 고마워. 바드.”
바드의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두드렸다. 바드는 장난치듯 아픈 척을 하다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기, 재영 말인데.”
“응. 들어오면서 만났어.”
애써 웃으며 답했더니 바드도 나를 따라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바드가 비켜섰다. 그 뒤로 재영의 어깨를 붙들고 재영의 입술을 핥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재영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세워 날 보고 있었다. 파란 눈의 남자는 이제 완전히 눈을 감고 더욱 안간힘을 써 재영의 입술을 벌리려 하고 있었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비정상인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