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로
마지막 섹스는 아예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두 번째 섹스가 끝나고 세 번과 네 번까지는 어렴풋이 기억났지만 그 후론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린 탓이었다. 새벽에 아랫배의 통증 때문에 눈을 떴다. 통 창으로 효색이 반듯한 선을 그리며 스미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빛은 그대로 우리가 누운 침대를 향했다.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던 재영이 지금 내 옆에 나체로 누워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재영의 볼을 쓰다듬었다. 하얀 얼굴에 보기 좋게 그려진 이목구비는 언제 보아도 재영 본연의 성격만큼이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아랫배의 통증도 잊은 채 재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잠결에도 재영은 내 등을 쓸고 등에 닿은 손을 떼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눈을 뜰 수 있었다. 밤새 나를 품에 안고 잠든 재영의 팔을 조심히 떼어냈다. 움직여지지 않는 아래를 보니 두 다리 모두 재영의 다리 사이에 붙들려 있었다. 불편한 자세 같은데도 재영은 그저 편안한 얼굴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재영이 깨지 않게 상체를 일으키려다 허리가 찢어지는 고통에 다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재영이 속눈썹을 떨었다. 재영은 곧 내 손목을 붙들며 눈을 떴다. 재영은 느리게 일어나 침대 옆 협탁의 문을 열었다.
눈도 채 다 뜨지 못한 채로 협탁을 연 재영이 그 안에서 작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파스를 꺼냈다. 침대로 온 재영이 내 목과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파스를 붙여주려는 모양이었다.
“아.”
“여기 아파?”
“…응.”
잠기운이 묻은 목소리와 얼굴로 내 걱정을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고개를 끄덕이자 뒤통수마저 저리고 아팠다. 재영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파스를 분리해 허리와 팔, 목 뒤, 허벅지 안 등, 내가 앓는 소리를 내는 부위마다 한 장씩 붙였다. 재영은 중간중간 작게 하품하면서도 꼼꼼히 내 몸 여기저기를 눌러 파스를 붙이는 데 집중했다.
재영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귀 뒤로 넘겨주고 말간 볼에 입술을 붙였다.
“나 욕실 좀. 씻고 싶어서.”
“우리 호정이 씻고 싶구나아.”
재영은 잠꼬대처럼 느리게 말을 뱉으며 내 볼을 잡아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재영이 입을 맞춘 볼을 슥슥 닦아내면서도 내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재영의 눈에 맞춰져 있었다.
“일어설 수 있겠어?”
재영이 물었다. 재영의 머리카락이 다시 눈썹 위로 쏟아졌다. 서울에서 재영의 집에서 지낼 때도, 재영이 우리 집에 와 잘 때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 괜히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재영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운 날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부축해주려는 것 같았다. 다친 것도 아닌데 부축까지 받아 화장실에 가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아. 혼자 갈 수 있어. 어느 문인지만 알려줘.”
자세히 본 건 아니었지만 어제 보니 재영의 집엔 이전 별채처럼 문이 많았다. 재영이 피식 웃더니 내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윽, 소리를 내며 상체를 들자마자 골이 뻐근하게 울리며 고개가 아래로 푹 떨어졌다.
“아, 진짜 조금 아픈 거야……. 심하게 아픈 건 아니고.”
허리와 척추뿐 아니라 그 아래 엉덩이와 사타구니까지 저려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웠다. 엉덩이는 불에 덴 것처럼 시트에 닿는 부위마다 시큰거렸다. 손을 뒤로 해 파스가 붙은 허리와 엉덩이를 엉성하게 가렸다. 재영은 다시 내 볼에 입을 맞추며 허리를 잡았다. 재영의 뜨거운 혀가 귓바퀴를 돌고 떨어질 때까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깨며 팔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봐. 아프면서.”
“이게 다 누구…….”
“그러게. 누가 우리 호정이를 아프게 하는 거야, 정말.”
어제 있었던 일이 점차 하나씩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섹스는 침대 위가 아니었다. 벽을 짚고 선 채 앞으로 픽픽 고꾸라진 상체가 밀려나던 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득한 정신에도 창호지 벽에 내 등이 긁힐까 그 사이에 팔을 넣고 잡아주던 재영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 갈비뼈를 움켜쥔 재영의 팔을 내려 보았다. 군데군데 긁힌 생채기들이 보였다. 재영은 내 시선을 따라 자신도 눈을 움직였다. 내 시선이 다친 자신의 팔을 향하자 서둘러 팔을 감추었다.
“다쳤네, 너도.”
“애인이 자꾸 도망을 가서.”
“내가 언제 도망을, 내가 무슨 도망을 가. 잠시 쉬려던 건데.”
긁힌 상처가 난 재영의 팔을 잡아 문지르며 구시렁거렸다. 재영이 웃으며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비벼댔다.
“너 내 애인하려나 보네.”
재영의 손이 다시 허리를 부드럽게 감아 당겼다. “읏.” 소리를 내자 재영은 손을 풀어 다시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재영은 침대 아래 떨어진 홑이불을 펼쳐 내 등을 감싸 덮었다. 무릎 뒤로 손을 뻗어 안아들려 하기에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싫어. 이건 좀.”
“왜?”
보호받는 기분이라서. 동등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됐든 어제의 재영과 내 관계를 적나라하게 인정하게 되는 것 같은 자세니까. 정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된 것처럼 느껴지니까.
무엇부터 말해야 재영이 좀 더 쉽게 이해할까, 생각하는 사이 재영은 무릎 뒤로 뻗었던 손을 빼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럼 잡는 건 해줘. 너 다치는 건 내가 안 돼.”
“…너 앞으로는 그런 거, 나 업고, 들고. 그런 거는 안 돼. 내가 된다고 할 때까지 하지 마.”
재영의 두 눈 가득 왜, 라는 글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듯했지만, 모른 척했다. 얇은 이불로 몸을 대충 가리고 재영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뒤꿈치만 살짝 바닥에 닿았을 뿐인데 종아리부터 허벅지 뒤까지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살짝 휘청했는데도 내 손을 쥔 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뭘, 또. 그렇게까지 전전긍긍해. 나 안 죽으니까 벌벌 떨지 마.”
“어제는 호정이가 잔뜩 떨지 않았어?”
“야.”
능글대며 장난치는 모습이 얄미워 흘깃 노려보았다가, 다시 살포시 발을 디뎠다. 재영은 마치 아이의 걸음마를 돕는 어른처럼 내 손을 잡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한 걸음을 더 떼어내 바닥을 디뎠다.
“아이, 기특해. 잘 걷네.”
이를 꽉 깨물었다. 재영의 팔을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은데, 뿌리치자니 당장 발목이 꺾여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짜증이 이는 중에도 재영의 손을 꽉 쥐고 당길 수밖에 없었다.
“야. 씨. 차라리 안아.”
“일부러 변덕 부리는 거야?”
친해지면서는 장난기가 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능글거리지는 않았는데. 재영은 어제 이후로 스킨십에서나 나를 대하는 행동, 말투에서 훨씬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졌다. 재영은 이불 채로 허리와 허벅지를 받쳐 나를 들어 올렸다. 작은 키도 아닌데 재영이 들자, 한 품에 들린다는 게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복도로 나오자, 어제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내가 신발을 복도 입구까지는 끌고 들어온 탓에 바닥의 곳곳에 흙이 떨어져 있었다. 바닥엔 어제 재영이 던진 지폐 몇 장도 여전히 나풀거리고 있었다. 지금 나를 안고 있는 재영의 얼굴을 흘깃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어제의 재영과는 달랐다. 어제 내가 본 재영의 얼굴은 서늘하고 어두워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이 무서워 보이기만 했는데, 오늘 다시 보니 재영은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하기만 했다.
고개를 재영의 반대편으로 돌렸다. 문은 생각보다 더 많았다. 눈에 보이는 방문만 다섯 개가 넘었다. 창호지 문으로 된 침실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색의 문으로 닫혀 있어, 그 속이 어떤지는 알기 어려웠다. 이전에 병원에서 재영이 보여주던 집 내부 사진을 대충 보았던 게 후회될 정도로 집안 곳곳에 재영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뭐든 눈에 안 보이는 게 깔끔하니까.”
재영은 옷, 서재, 취미 등 분류대로 방을 나눠 정리했다고 했다. 별채에 불이 나 정리할 거리가 많이 줄어든 편인데도 막상 이곳에 오니 또 방만큼 무언가가 채워지더라, 하며 미소 지었다.
“별채에 불난 거. 아직도 넌 좀 마음이 아프겠다, 그치?”
재영의 목을 끌어안고 물었더니, 재영은 묵묵히 웃기만 했다.
“글쎄. 그게 마음이 아픈 건가.”
“아끼는 것들 많았잖아. 넌 별채 따로 써서 본채에 네 짐이 따로 있던 것도 아니고. 전부 거기에만 있었는데.”
“거기 있던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건 챙겨 나왔어.”
재영은 복도 끝에 있는 가장 짙은 목제 문 앞에 나를 내렸다. 발을 딛고 내리려는데 재영의 손이 내 뒤꿈치를 감쌌다. 재영의 손바닥을 지그시 밟고 서자, 좀 전보다 훨씬 견디기 쉬웠다. 재영은 더 세게 밟아도 된다는 표시로 한 손으론 내 종아리를 감싸 쥐었다.
“혼자 들어갈래?”
“응.”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화장실 문은 미닫이라 왼쪽으로 살짝 밀어내야 했다. 문이 열리자 화장실과 욕실을 한 번 더 가려주는 검은색 본견이 문의 중앙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거, 그때. 별채에 있던 본견이랑 같은 거 맞지? 여긴 검은색이네.”
본견이 취향이라던 재영의 말이 떠올라 살포시 웃었다. 영국까지 와서 한옥을 짓기에 취향 한번 고집스럽다고는 생각했지만 내부까지 이렇게 꼼꼼하게 다듬었을 줄은 몰랐다. 무엇 하나에 꽂히면 집착하는 성향이 엄마에게서 왔다더니, 재영이 원래 있던 서울의 별채도 재영 엄마에 의해 그대로 다시 지어졌을까, 생각했다.
재영의 손을 딛고 화장실로 천천히 들어갔다. 벽을 짚고 서서 문을 다시 닫았다. 재영은 문 앞에 계속 있을 테니 다 씻고 나면 문을 두드리라고 했다. 욕실 안을 둘러보았다. 별채의 욕실에 있던 것보다는 작았지만, 이 집에도 역시 편백으로 만든 욕조가 있었다. 두 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는 되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천장을 보았다. 다행히 부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토하듯 내쉬고 다시 문을 잡았다. 재영이 붙여준 파스 냄새가 습기와 만나며 더 짙어졌다.
“…재영아.”
아주 작게 부른 목소리였는데도 재영은 금세 “응.” 하며 답했다. 고요한 목소리가 지금 욕실을 채운 습기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같이… 씻을래? 나 씻겨줄 수 있어?”
재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 목문이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다리 아래까지 자잘한 진동이 일었다.
“이제는 걸음마도 하기 싫은가 보네.”
문을 열고 들어온 재영이 깊숙이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재영의 손이 다시 아래의 성기를 천천히 휘감아 올렸다. 척추에 뭉근하게 뭉개지는 재영의 아래가 느껴지는데도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재영의 손이 천천히 성기를 감쌌다. 뜨거운 손과 귀로 전해지는 숨결에 어깨에도 진동이 일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왜, 왜 갑자기 같이 씻자고 하는 건데?”
재영이 웃으며 묻기에 고개를 돌려 재영의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다급하게 붙였지만, 재영이 곧 내 뒤통수를 감싸 당긴 덕에 혀가 어색하지 않게 엉킬 수 있었다. 두 눈을 감고 내 입술과 혀를 핥는 재영을 보다 살짝 밀어냈다. 재영이 느리게 눈을 떠 나를 쳐다봤다.
“네가 그랬잖아. 내가 오늘 걸으면, 할 수 있게 해준다고.”
“그래서 지금 하겠다고? 그 꼴로?”
재영의 허벅지가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조금 닿았을 뿐인데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엉덩이가 재영의 사타구니로 박혀 들었다.
“아윽.”
“고집 많은 아이는 혼을 내야 하나, 더 애정을 줘서 바르게 키워야 하나. 아빠는 고민이 많아.”
재영이 낮게 읊조리며 내 볼을 꼬집듯 잡았다. 곧 얼굴이 한 손에 잡혀 재영 앞으로 끌어졌다. 재영은 눈을 감고 내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혀끝에서 달달한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욕실의 습기가 더욱 짙어졌다.
성기를 감싼 손이 뜨거웠다. 몸을 작게 움츠리자 재영이 내 배를 당겨 편히 기댈 수 있게 등을 붙였다.
“근데, 어제 너 좀 이상했어.”
“내가?”
“어.”
고개를 끄덕이는 중에 재영의 손이 사타구니 안을 파고들었다.
“하읏.”
순식간에 깊숙하게 들어온 손에 나도 모르게 부끄러울 정도로 적나라한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재영의 손은 허벅지 안을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굳어있던 근육은 재영의 손이 닿는 곳마다 통증을 그대로 드러냈다.
“아……!”
허벅지 안은 긁힌 상처와 근육통으로 아직 손만 닿아도 따가웠다. 허벅지의 살이 재영의 손이 만지고 주무르는 모양으로 변화하는 게 싫지 않았다. 동그랗게 말렸다가 이내 통증과 함께 풀어지는 허벅지를 보던 고개를 들었다. 뿌연 습기로 가득 찬 욕실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 뒤에 선 재영을 쳐다보았다.
“진짜 이상했어. 내가 너 도대체 누구냐고 하니까, 나도 이제 모른다고, 아니다. 헷갈린다고 했었나. 아무튼 어제 순 이상한 말만 해대고. 너 안 같았어.”
“내가 그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재영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욕도 했었어.”
“그래? 너랑 하는 게 너무 좋았나 보지.”
“…미친 거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고개를 돌리려고 했더니, 허벅지를 휘감아 만지던 손이 어느새 다시 성기로 옮겨졌다. 절로 무릎 사이가 오므라들었다. 엉덩이 근육에도 잔뜩 날이 서며 뒤로 묵직한 고통이 찾아들었다.
“호정아. 원래 누구를 좋아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잖아.”
“몰라. 너 말고… 이렇게까지 누구 좋아해 본 적 없어.”
재영이 다시 웃기 시작했다. 좀 전보다 확연히 큰 떨림이 등을 통해 느껴졌다. 동시에 재영의 아래가 두꺼운 선 그대로 등에 고스란히 맞닿았다. “너 섰어?”라고 물으니 재영은 “그 말 듣고 안 서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라고 되물었다. 재영의 손이 큰 탓에 내 성기를 감싼 손에 성기가 전부 붙들린 꼴이 되었다. 약하게 표면을 주무르던 손은 느리게 올라와 허리를 붙들었다. 재영은 내 목에 입술을 깊게 묻고 물었다.
“탕까지 갈까, 거기가 더 나을 거 같은데.”
재영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고 잔잔했다. 잡다한 생각이 모조리 잊히고 오로지 재영의 손에만 의지해 탕까지 천천히 걸었다. 욕실 바닥을 적신 물을 밟을 때마다 등으로 찌르르 전기가 울렸다. 조금이라도 무릎을 절면 뒤에 선 재영이 서둘러 내 몸을 받쳤다. 재영이 이렇게 유난을 떨면 떨수록 진짜 어린아이가 되어 걸음마를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탕은 이미 뜨거운 물로 채워져 있는 듯했다. 옅게 오르는 아지랑이로 그 온도가 전해졌다. 탕의 가까이 다가서자 습기로 인해 파스가 붙은 부위마다 시린 고통이 느껴졌다. 파스가 덕지덕지 붙은 팔을 매만졌다. 시큰한 고통에 절로 눈을 찌푸렸다.
“근데 원래 남들도 이렇게 많이 해?”
질문과 동시에 서둘러 말을 붙였다.
“알아. 나, 이상한 질문 많이 하고 있다는 거 아는데. 진짜 궁금해서 그래. 남자끼리 하면 더 그런가 해서.”
탕에 먼저 들어간 재영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재영이 내민 손을 잡고 탕 안으로 발을 들이자 무표정한 얼굴로 날 보던 재영이 촉촉한 손으로 볼을 쓰다듬었다.
“넌 남들 궁금해 하지 마.”
“왜. 너 생각보다 좀 치사한 구석이 있다?”
치사하다는 말에 재영이 표정을 풀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물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온도였다. 탕의 끝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서로를 안고 물고 핥아대던 때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는 게 묘하게 더 부끄러웠다. 결국 내가 먼저 재영을 보던 시선을 내렸다. 시선은 습기가 되어 올라오는 아지랑이부터 시작해 전나무 결이 살아있는 욕실의 벽으로, 다시 그 위를 막처럼 덮은 흰 본견으로, 본견이 감싼 직사각형의 탕까지 이어졌다.
편백나무 욕조는 가운데 홈이 생각보다 더 깊었다. 가슴까지 차오른 물을 손으로 탁탁 쳐보다가 고개를 드니, 재영이 고개를 꺾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젯밤 나를 내려 보던 시리고 고요한 눈빛이 다시 보였다. 회색빛이 감돌아 그 속이나 기분, 감정조차 느낄 수 없던 흐릿한 눈빛이었다. 탕의 물을 두 손으로 받쳐 텁텁한 얼굴을 씻어냈다. 선명해진 시야로 다시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기만 한 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물 온도는 괜찮은 거 같아?”
익숙한 재영의 얼굴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응. 좋아. 적당해.”
재영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재영이 일어선 탓에 눈앞으로 밤새 날 힘겹게 하던 성기가 다시금 또렷하게 보였다. 두툼하게 큰 아래는 나처럼 반쯤 고개를 든 상태였다. 재영이 내게 다가오는 물의 울림은 크지 않았지만, 옅은 출렁임만으로도 피부가 따가웠다.
“파스, 다 떼야 할 거 같은데.”
부끄러워 우물우물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코앞에 다가온 재영의 성기를 빤히 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더 낫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재영의 아래를 아무렇지 않은 척 볼 수는 없었다. 이전에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제는 밤새 저 성기에 뒤를 내놓고 헐떡이던 내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어색함에 위가 꼬이고 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호정아.”
탕 속 재영의 발이 내 두 발 사이의 좁은 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닿아있던 두 발 사이로 들어온 재영의 발이 내 발을 양옆으로 천천히 밀어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태라 재영의 발이 움직이는 동선이 더욱 잘 보였다. 내 양발을 옆으로 진득하게 밀어낸 재영의 발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재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혀를 가만히 받아들이다 살짝 고개를 틀어 다시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왜에. 또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여?”
말끝을 늘이는 재영의 얼굴이 평소와 같았다. 또 다른 얼굴일까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다정하고 살가운 얼굴이었다. 하얗고 온기가 가득한 얼굴을 몇 번이나 더 살펴 확인한 후에야 다시 재영의 목을 당겨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서로의 타액과 호흡이 허공에서 얽히다 깊숙이 두 혀가 엉켜 들 무렵이었다.
“흣.”
재영이 탕 안에 떠오른 내 발목을 당겼다. 몸이 물에 떠오름과 동시에 재영은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내 몸을 잡아 내렸다. 순식간에 재영의 허벅지에 앉힌 자세가 되었다. 재영의 손가락이 내 허벅지를 잡아 뭉근하게 짓눌렀다.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부끄러워 다급히 재영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호정아. 물 안에서는 몸이 뜨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으응.”
재영이 내 허벅지를 매만져 줄수록 자꾸만 마음이 다급해졌다. 재영의 뒤통수를 당겨 다시 입술을 물고 핥고 싶었다. 재영이 어제처럼 내 혀를 억지로 당겨 물고 유두를 아프게 짓이기고 주춤거리는 나를 확신에 찬 동작으로 이끌어 주길 바랐다. 두 손에 힘을 주고 재영의 뒤통수를 당겼다. 재영의 고개는 속상할 정도로 조금도 당겨지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고 재영을 쳐다봤다. 맑게 웃는 눈과 하얗고 투명한 볼이 눈에 들어왔다. 재영은 젖은 손으로 내 볼을 한 손에 감싸 더듬었다.
“물에서는 못 걷는다는 의미야.”
재영의 아래가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왔다. 미지근한 물로 이완된 뒤를 지그시 누르는 감각에 입안 가득 쓰린 침이 고였다.
“나… 거, 걸을 수 있어…….”
“쓰읍. 못 한다고 했지.”
미지근한 물이 철렁거렸다. 성기의 입구가 뒤로 들어오려는 게 느껴졌다. 아득아득 이를 깨문 채로 재영을 노려보았다.
“내가, 으윽, 내가… 해… 흣. 내가…….”
어깨를 쥔 손에 잔뜩 힘이 들며 하얗게 질렸다. 입구에서 완전히 삽입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던 재영이 내 허벅지 안을 지그시 누르며 다리를 더 벌리게 했다. 발목에 힘을 줘 재영의 허리를 감쌌다. 재영의 성기가 입구의 아문 상처를 다시 벌리며 들어왔다.
“…호정아.”
재영은 성기를 다 넣지 않고 내 이름을 불렀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가까스로 눈을 떠 마주했더니 재영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곧 재영의 손이 내 볼을 톡, 건드렸다.
“안 되겠어. 너, 지금 안이 많이 부었어.”
“어제… 네가, 네가 계속… 계속 해서 그렇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씻기만 할까?”
재영이 허벅지를 부드럽게 감싸 몸을 들어 올리려 했다. 아무래도 내벽이 부은 날 위해 그만두려는 심상인 듯했다. 다급하게 재영의 손을 잡아 물 밖으로 꺼냈다. 재영이 두 눈을 깜박거리며 날 빤히 쳐다봤다.
“너, 아프…….”
“윽, 아무 말도… 하지, 마. 움직이지, 움직이지도… 마.”
물속으로 손을 넣어 입구에 멈춰선 재영의 아래를 잡았다. 재영이 미간을 아프게 좁히는 게 보였다. 재영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어젯밤 몇 번이나 섹스를 하면서도 나만 아프고, 나만 힘겹고, 나만 징징댄다는 느낌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같이 하는 거니 재영도 내가 느끼는 걸 같이 느끼게 하고 싶었다.
“내가 못 넣는 쪽이면 움직이는 거라도 내가 할 거야.”
“하.”
재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눈썹이 틀어진 것도, 미간이 좁아지고 볼이 실룩대며 감정을 토해내는 것도, 고요한 얼굴보다는 마음에 들었다. 재영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보다 엉성하게 움직이는 내 엉덩이를 잡아 멈추었다.
“안이 다 부어서, 지금 하면 너 아프다니까.”
“뭐, 어제는, 읏, 괜찮았는 줄 알아?”
가까스로 재영의 성기를 뿌리까지 박아 넣었다. 재영의 어깨를 붙들고 있는 손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어깨까지 경련이 일었다. 내 안을 뜨겁게 채우던 재영의 성기가 마침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움직이겠다고 했지만, 그건 객기어린 말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온몸이 떨리고 아려 내 힘으론 엉덩이를 들어 올릴 수조차 없었다. 재영이 내 허리와 엉덩이를 감싸 느리게 올리고 내려주고서야 점차 살이 철벅이며 맞붙는 소리가 났다.
“읏, 흐으… 응.”
“하아…….”
엉덩이와 성기가 붙고 떨어질 때마다 미지근한 물이 엉기고 풀어지며 물길을 만들었다. 재영의 등 뒤로 탕에서 넘쳐난 물이 쿨럭대며 흘렀다.
“호정아. 무리하지 마. 응?”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공부고, 그 다음으로 싫은 건 잔소리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재영의 입술 사이에 무턱대고 혀부터 밀어 넣었다. 맞물려 있던 재영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고 곧 재영의 손이 내 뒤통수를 움켜쥐듯 잡았다.
“읏.”
재영이 한숨 같은 앓는 소리를 내는 것도, 미간을 좁히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도 마침내 자신의 입안을 침범한 내 혀를 찾아 끝내 아프게 물어 당기는 것도. 모두 좋았다.
“흐응… 재영아.”
숨소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아무렇게나 뱉어냈다. 격한 엇박자의 숨소리와 호흡이 엉망으로 뱉어지는데도 재영은 눈을 감은 채 더 나를 세게 몰아붙였다.
“넌 정말 알 수가 없어.”
내 엉덩이를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선 재영이 흰 본견이 드리워진 벽에 내 등을 붙였다.
“강아지 같이 굴다가, 고양이처럼 굴기도 해. 네 마음대로야.”
말하느라 달싹이는 재영의 입술을 핥고 물기 젖은 볼을 몇 번이나 깨물어댔다. 벽에 등이 닿은 채로 아래는 더욱 격하게 박혀 들었다. 곧고 선명한 성기가 내벽의 깊은 곳까지 단번에 들이닥쳤다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재영의 어깨를 꼭 쥐고 아래에 박혀드는 속도에 맞춰 조금씩 엉덩이를 움직였다.
“흐응… 응, 응, 읏.”
벽에 완전히 나를 붙이고 내 몸에 자신을 완전히 붙인 채로 재영의 손이 액으로 젖은 내 성기를 감싸 어루만졌다.
“근데 상관없어. 내게 붙어 끙끙대는 건 어느 쪽이든 같으니까.”
재영의 혀가 귓불을 핥고 귀 안으로 깊숙이 박혔다. 아래에 쑤셔지는 성기처럼 혀는 귓바퀴를 돌다 안을 찌르며 모든 소음을 잠식했다. 오직 내 귀를 핥는 재영의 숨소리만으로 세상이 채워진 기분이었다.
“응, 응, 읏… 흐읏, 으응, 응.”
바짝 붙은 서로의 배가 밀렸다. 저리게 성기를 채운 액이 솟구치며 재영의 손을 끈적하게 적셨다. 고개가 벽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궈졌다.
거의 동시에 뜨거운 액이 뱃속에 번졌다. 재영의 성기가 내벽을 동그랗게 돌며 어루만졌다. 마침내 뒤를 채우던 성기가 빠지자마자 탕 안으로 질척한 액이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정액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재영이 내 코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맑게 웃는 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 애기, 이제 씻고 약 바르자.”
“이런 데 바르는 약도 있어?”
여전히 정박에서 조금 틀어진 숨을 내뱉으며 가까스로 물었다. 재영이 입술을 깨물며 웃더니 벽과 내 등 사이에 손을 넣어 등을 어루만졌다.
“응. 우리 집에는 다 있어.”
허세 섞인 농담에 픽 웃음이 새어났다. 재영의 어깨에 볼을 붙여 기댔다. 따뜻하게 울리는 재영의 숨소리와 심장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월요일이 되자 몸이 좀 나아졌다. 재영은 학교에 갈 수 있겠냐며 나를 걱정했다. 난 고작 섹스를 했다는 이유로 앓아눕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재영은 그럼 주말 내내 자신이 본 사람은 누구였느냐며 되물었다. 분명 누군가 고작 섹스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침대에 앓아누워 자신이 떠주는 밥을 먹고, 밥을 다 먹고 나면 허벅지에 기대 종일 잠만 잤던 것 같다고 했다. 이젠 아예 나를 놀리는 데 재미가 들린 사람 같았다.
“너 진짜 얄밉고 사람 화나게 하고 그런데, 내가 참는 거야.”
“왜? 나 좋아해서?”
“응.”
덤덤하게 답했더니 도리어 재영이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웃는 재영의 볼이 나보다 더 붉었다.
“다음에 또 내가 널 화나게 해도, 나 좋아하니까 참아줄 거야?”
“그때 봐서.”
재영은 눈을 꼭 감고 웃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려면 집부터 가야 했다. 재영이 준비할 동안 집에 가 교재와 가방을 챙기겠다고 했더니 재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실로 들어가는 재영을 보고 집을 나왔다. 아침에 보는 마당의 풍경은 저녁에 볼 때와는 달랐다. 밖에서 볼 땐 자세히 보이지 않아 몰랐는데, 정원에는 제법 오래된 듯한 백송도 한 그루 있었다.
영국까지 와 한옥을 짓고, 그 마당에 백송을 심는 재영의 취향에 잠시 감탄하다, 비로 젖은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게, 뭐야…….”
그림자가 길게 이어진 백송 아래, 검붉은 흙이 보였다. 비에 젖은 흙이 덜 말랐다고 하기엔 색이 다른 곳과 달리 탁하고 어두웠다. 자줏빛에 가까운 흙색이었다.
“호정아. 데려다줘?”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 밑동을 쳐다보는 중에 문이 열렸다. 현관으로 나온 재영이 나를 불렀다. 아직도 대문이 열리지 않으니 내 걱정이 되어 나온 것 같았다.
“아니, 아니. 씻어. 너 준비 다 되면 전화해.”
“아냐. 그냥 집에 있어. 내가 가면 되니까.”
“응.”
재영은 내 머리를 흩트리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대문을 나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재영은 이미 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속이 답답했다. 이유 모르게 찝찝한 마음을 달래며 도로를 건너 집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와 가장 먼저 한 건 토요일, 침대에 던져두었던 폰을 찾는 것이었다. 이불을 양손으로 들어 뒤척였다. 그 안에 파묻혀 있던 폰이 침대 시트 위로 툭 떨어졌다. 침대에 떨어진 폰을 쥐고 바로 주머니에 넣으려다 혹시나 싶어 화면을 켰다.
“허… 이게 다 뭐야.”
온통 바드의 연락이었다. 대충 봐도 족히 10통은 넘어보였다. 파티에서 재영이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꼴을 본 데다 아프다는 시답잖은 핑계까지 대며 서둘러 집에 왔으니 바드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입술을 적시고 부재중 목록을 채운 바드의 번호를 눌렀다. 차가운 볼을 손등으로 훑었다.
“어? 번호 바뀌었나?”
바드의 전화는 신호음도 가지 않은 채 그대로 끊겼다. 몇 번이나 더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끊기는 통화에 폰에 저장된 바드의 번호를 다시 확인할 정도였다. 점차 바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확인하면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폰을 열어 오늘 수업에 오냐는 연락을 한 번 더 보내고, 오지 않더라도 꼭 답은 해달라는 말을 더 남겼다.
“…….”
등 뒤로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와 흥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영이 노래를 흐릿하게 흥얼대며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였다. 생각보다 준비가 더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내가 아니면 노래도 듣지 않는 재영이 흥얼대는 노래라 더 귀를 기울이게 됐다. 폰을 주머니에 넣고 가방을 들었다. 재영의 노랫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호정아아.”
재영이 다감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옅은 웃음이 났다.
“응. 다 됐어.”
손에 쥔 가방을 둘러메고 침실에서 나오니 재영은 벌써 2층에 올라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영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 팔을 벌렸다. 빠르게 걸어가 품에 안겼다. 재영이 날 덜렁 들어 안았다.
“계단 내려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오버하지 말고 나 내려줘.”
재영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대며 날 안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넘어지면 나 죽어.”라고 속닥였더니 재영이 내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네가 날 더 세게 안으면 되겠네.”
“너 안 같아, 자꾸.”
어리숙하고 시무룩한 얼굴, 조금만 냉정한 말을 뱉어도 금방 입술을 샐쭉하고 고개를 푹 떨구던 우리 전교 1등, 순진한 한재영은 어디로 간 거냐고 묻고 싶었다. 재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 넓은 어깨에 턱을 기댔다가 아예 볼을 꾹 눌러 붙였다.
“재영아. 나 너 좋아하고 너랑 그것도 했으니까 나 이제 게이인 거지?”
계단을 내려가던 재영이 별안간 걸음을 멈추었다.
“왜, 어떤 놈이랑 붙어먹게?”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말도 안 되는.”
재영의 등을 퍽퍽 때리자, 재영이 푸스스 웃는 소리를 냈다.
“근데 바드가 전화를 안 받아.”
“그래?”
재영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느새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와 현관에 가까워졌다. 재영의 어깨에 붙은 볼을 비비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상하네. 나한테는 좀 전에 메시지 왔던데?”
“어? 진짜? 뭐야. 바드 나 차단했나…….”
현관 앞에서 나를 내려준 재영이 자신의 폰을 켜 내게 내밀었다. 재영의 메시지 목록 가장 위에 적힌 바드의 이름이 보였다. 시간도 불과 얼마 전이었다. 내 전화는 신호가 다 가기도 전에 끊어버리더니, 재영에겐 메시지까지 보낸 게 못내 서운했다.
“너 괜찮은 거냐고 물어봐서, 괜찮다고 했어. 오해가 좀 있었는데 덕분에 잘 풀었다고도 했고.”
파티에서 그렇게 나간 게 뒤늦게 미안해졌다. 괜히 바드에게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신발을 신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발을 대충 욱여넣으려다 재영이 운동화를 신던 모습을 떠올려 흉내 냈다. 뒤꿈치까지 깊게 천천히 밀어 넣고 재영처럼 신발 뒤축을 잡아 정리했다. 신발을 마저 신고 고개를 들어 현관 앞 거울을 쳐다보니, 그런 나를 내려 보며 미소 짓는 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다행이다. 난 바드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
“별일 없을 거야. 걱정 마.”
신발로 바닥의 카펫을 툭 밀어냈다. 재영이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애인이 되니 에스코트가 더욱 좋아졌다며 장난치자 재영은 쑥스러운 듯 입술을 꼭 깨물고 내 어깨를 당겨 안았다.
재영과 발을 맞춰 집을 나섰다. 열쇠를 가방에 넣는 중에도 재영은 내 어깨를 감싼 손을 내리지 않았다. 집 앞에 주차된 차로 걸어가던 재영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재영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재영의 차 앞에 선 남자가 재영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 재영의 집에 차를 대고 내리던 검은색 짧은 머리의 남자였다. 째진 눈에 키도 크고 풍채마저 커서 눈에 띄는 남자는 단순히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낯이 익었다.
“어, 저 사람…….”
“왜? 본 적 있어?”
고개를 끄덕이려다, 주춤대며 고개를 저었다. 2층 거실에서 네가 집에 있나 없나 훔쳐보다 보았던 사람이라고 말하려니 아무래도 창피했다. 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살피기에 “아니. 몰라. 처음 봐.”라는 거짓말까지 하고서야 재영이 웃으며 내게 남자를 가리켰다.
“재단에서 근무하시는 윤지후 비서님이셔. 엄밀히 말하자면 내 개인비서이기도 하고.”
우리를 향해 걸어온 윤 비서가 나를 슬쩍 쳐다봤다. 윤 비서의 눈을 피해 “너 개인비서도 있었어?”라고 재영에게 작게 속닥였더니 재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고개를 올려 내 앞에 큰 그림자로 선 비서를 올려보았다. 윤 비서라는 사람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보통 초면에는 웃으며 인사를 나눌 법도 한데 윤 비서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를 보고도 멀뚱한 눈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기만 했다. 재영이 그런 윤 비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비서님. 호정이에요. 반갑게 인사해야죠.”
“아, 네. 반갑습니다.”
재영이 말을 마치자 비서가 급격히 표정을 풀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미는 동작과 표정이 마치 처음 사람을 만나는 아이처럼 어색해 보였다. 오히려 어색할 만큼 과장된 몸짓에 가까웠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윤 비서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재영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미소 짓다가 주차된 차를 가리켰다.
“오늘은 윤 비서님이 대신 운전해 주실 거야.”
“아, 이제 계속 여기 같이 계시는 거야?”
“계속은 아니고, 당분간만. 할 일이 있어서 오신 거라.”
재영이 윤 비서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그제야 윤 비서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개인비서라고 하면 하는 일은 전부 재영과 관련된 일이어야 맞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재영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재영은 방긋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가시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비서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공허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내 뒤에 서 있는 어떤 존재를, 혹은 내 심연에 깔린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은… 자세히 보면, 그 어느 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흑색의 눈에 내 모습이 어른거리는 걸 홀린 듯 보고 있을 때였다.
“멍하니 무슨 생각해?”
재영이 내 볼을 쓸며 물었다. 멍하니 윤 비서의 눈을 보고 있던 시선을 재영에게로 돌렸다. 내게 보이는 재영의 맑은 웃음을 보고나서야 이유 모르게 불안하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니. 그냥.”
“너 지금 낯가리는 거지?”
“응. 조금.”
윤 비서가 먼저 차에 타고, 뒤이어 나와 재영이 뒷좌석에 올랐다. 윤 비서는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그대로 차를 몰아 학교로 향했다. 이전에도 숱하게 이 길을 다녀본 사람처럼 골목마다 핸들을 꺾는 손놀림이 익숙해 보였다. 윤 비서의 뒷모습을 보다 내 손을 잡은 재영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집에만 가둬놓고 싶은데, 학교는 보내야 하고. 이제 엄마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가네.”
흘겨보며 웃는 내 얼굴을 재영이 빤히 쳐다보았다. 진득한 눈길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달아오른 볼과 목을 문지르자 재영이 내 손을 끌어내려 자신의 손과 완전히 맞잡았다. 운전하는 윤 비서가 볼까 작게 고개를 저었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러냐는 움직임을 담았는데도 재영은 눈치 없이 내 볼을 조물조물 더듬었다. 재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야… 앞에… 계시잖아…….”
윤 비서를 슬쩍 보며 말했더니, 방금까지 나를 보며 웃고 있던 재영이 표정을 굳혔다.
“왜?”
“보면 어떡해.”
“상관없지.”
다시 내 볼을 쓰다듬으려는 재영의 손을 슬그머니 피했다. 재영은 허공에 있던 손을 들어 검지로 자신의 눈썹을 매만졌다. 묘하게 굳은 표정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무거운 공기가 돌았다.
“호정아. 왜인지 말해줄래?”
“앞에 비서님…….”
“아니.”
흐릿하게 이어지려던 내 이야기를 재영이 끊었다. 재영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으나 때마침 길게 드리워진 창밖 그림자에 재영의 얼굴이 어둡게 가려졌다. 표정이나 나를 보는 눈빛 또한 검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윤 비서가 보니까, 앞에 누가 있어서. 뭐 그런 이유 말고… 네 감정이나 상태 말이야.”
다시 내 뒤로 햇살이 비치며 재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무거운 목소리와 달리 평상시와 같은 미소 띤 얼굴이었다. 안도감에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재영의 귀를 당겼다. 내 입술 앞까지 당겨진 재영의 얼굴을 보며 비서가 들을 수 없게 속삭였다.
“부끄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런 관계가 됐다는 걸 너희 부모님도 알게 되실까 봐 겁나기도 하고. 나도 그랬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직 남자, 남자. 그런 거에 좀 어색해하기도 하잖아. 나도 잘 모르겠어. 나도… 설명하자니 좀 복잡한데 굳이, 굳이 설명하라고 하면 아무튼 이래. 게다가 저분 너희 회사. 아니, 재단 소속 비서라며. 너희 부모님한테 이를 거 같아. 잘 이르게 생겼어.”
작은 목소리로 웅얼대며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듣던 재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결국 윤 비서가 백미러를 통해 우리를 흘깃거리고 말았다.
“야. 그렇게 크게 웃으면 어떡해. 쳐다보시잖아.”
“괜찮아. 윤 비서는 우리가 왜 웃는지 절대 모를 거야. 평생.”
입술을 샐쭉거렸다. 윤 비서는 아무런 말없이 다시 앞을 보았다. 그사이 재영이 부드럽게 내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깜짝 놀라 밀쳐낼 새도 없었다. 재영은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폰을 내밀었다.
“노래 틀어줘. 네가 좋아하는 노래. 네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첫사랑은 좆같은 거라던 민재의 말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좋기만 한데. 민재가 살아있었다면 해보니 좆같은 게 아니라 좋은 거더라 하며 놀려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이 온통 기분 좋은 노래로만 가득 채워지고 그 울림으로 나를 감싼 세상마저 떨리는 게 첫사랑이라는 얄팍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이런 생각조차 괜히 부끄러워 목 뒤를 머쓱하게 긁었다.
재영이 내민 폰을 받아 이전에 채운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를 틀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시트에 놓인 내 손 위를 재영의 큰 손이 덮었다. 잠시 망설이다, 시트를 향해 있던 손을 뒤집어 재영의 손을 맞잡았다. 창가를 보고 있던 재영이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게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만 보는 내 볼이 붉게 물들었다.
재영과 헤어져 강의실로 들어섰다. 바드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도착한 몇몇 아이들 틈에 앉아 폰을 꺼냈다. 바드의 번호를 찾아 눌렀으나, 이번에도 역시나 바드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 번 더 해볼까 하다가 아침에 재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게 기억났다. 크게 다치거나 아프지 않은 거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다 자리를 창가로 옮겼다. 창가에 앉아 창을 열었다. 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들어왔다. 열이 올랐던 볼이 바람에 점차 식어갔다.
주말 동안 재영의 집에 있었던 걸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자꾸 바보처럼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두 뺨을 감쌌다. 폰이 울려 바드인가 보았더니, 재영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연락을 달라는 메시지에 하트 하나를 찍어 보냈다. 그 흔한 하트 하나를 보내놓고 책상 아래 두 발을 동동 굴렀다. 전보다 더 뜨거워진 볼을 손등으로 연신 매만졌다. 다시 뜨겁게 오른 열은 이번엔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재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폰을 꺼냈다. 폰만 보며 걷느라 앞에 누가 서 있는지,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도 보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재영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 재영은 학교 앞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메시지 내용조차 다정했다.
“귀여워. 오늘 수업도 없으면서. 나보다 얘가 날 더 좋아하는 거 아니야?”
중얼대는 틈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머릿속엔 온통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재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얼른 재영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수업에 찌든 모습이 멋있어 보이지 않을 테니 화장실에 잠시 들러 머리라도 정리하고 갈까, 하는 절반의 생각이 빠르게 교차했다.
“hey.”
로비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려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낯선 영어 억양과 톤에 슬쩍 돌아보니 나와 키가 비슷한 백인 남자가 내게 아는 척을 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서둘러 “나는 영어를 못 한다.”를 영어로 떠듬떠듬 느리게 말하며 뒷걸음질 쳤다. 말을 걸지 말라는 의미로 어색한 웃음까지 지어보였으나, 남자는 계속 해맑은 얼굴로 내게 말을 붙였다.
“씨… 나 영어 못 알아듣는데.”
쫑알대며 쳐다보았더니, 남자는 손까지 크게 움직여가며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꽤 집중해 들었으나 그중 내가 알아들은 영어단어라고는 고작해야 파티, 가이, 호스트, 코리언이 전부였다. 파티라는 단어에서 혹시 바드가 초대했던 지난 토요일 파티가 떠올랐다. 그 파티에 왔던 남자 중 하나인가 생각하며 남자를 살펴보았다.
“The party… last Saturday?”
입술을 야무지게 움직여 단어 하나하나를 힘줘 말했다. 다행히 남자는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까지 크게 끄덕여댔다. 진짜 그 파티에서 날 봤다는 건가 생각했다. 내가 다음 말을 하지 않자 남자는 후, 하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영어를 아예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에 안심한 듯 보이기도 했고 그래도 깊은 대화는 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실망한 듯 보이기도 했다.
“씨, 진짜 이제 아는 영어 끝인데. Really sorry. I don’t know… you… sorry…….”
남자는 내가 엉성하게 뱉은 엉망진창의 영어를 듣자마자 연이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조금만 느리게 말해줘도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남자는 계속해서 다급하게 말을 잇고 또 이었다. 머리까지 혼미해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두 배속으로 영어듣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재영에게 그저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교수의 말만 녹음할 게 아니라, 이 남자 이야기도 처음부터 녹음했으면 좋았을 걸, 생각했다. 재영에게 나중에 들려주면 재영이 해석해줬을 텐데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는 잠시 눈을 굴리다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물고 망설이는 듯했다. 후, 하고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내쉰 남자가 주위를 살피고 내게 폰을 내밀었다.
“Vad.”
짧은 단어였지만 의미만은 분명히 전달되었다. 그건 바드의 이름이었다.
“바드?”
내가 바드의 이름을 되묻자 남자가 반가운 기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드 친구라는 소리인가 싶어 다시 “바드?”라고 재차 물으니 남자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 바드. 두 단어만 들어도 그날 파티에서 나를 봤던 사람인 게 확실해졌다. 바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 다시금 걱정이 일었다. 동시에 설마 그 파티에서 나를 봤다고 내가 게이라고 생각해 친한 척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앞에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선약이 있다, 바쁘다, 라는 말을 빠르게 뱉고 싶은데 조악한 기본 단어들만 몇 개 떠오를 뿐이었다. 막상 문장으로 말하자니 한 문장도 뱉기 힘겨웠다.
“후우…….”
얘도 재영이 말하던 나쁜 아저씨라는 부류에 드는 인간인가 싶어 살짝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다급한 눈으로 나를 보다 복도 끝을 한 번 보고는 내게 폰을 내밀었다. 폰 번호를 달라는 것 같았지만, 굳이 번호까지 교환하기는 싫었다.
“Why……?”
답을 듣는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할 걸 알면서도 굳이 왜냐는 질문을 던지고 기다렸다. 남자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자신의 청바지 안으로 폰을 넣었다. 다시 복도 끝을 보는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는 때였다. 남자가 내 어깨를 붙들고 눈을 맞추었다. 남자의 금빛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Beware of that guy.”
눈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 몰라 어버버하는 사이 남자는 서둘러 가방을 고쳐 들고는 내게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였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떠들어대던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돌아갔다. 남자가 지칭한 대상이 누구인지 잠시 생각했다. 남자를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누구를 뜻하는지는 불분명했다. that이라고 했으니 이곳에서 누구를 본 걸까 싶어 조금 전 남자가 보고 있던 복도로 고개를 돌렸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던 재영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었다. 반가움에 두 팔을 들어 흔들었다.
“뭐야. 언제 왔어? 카페는?”
“너무 지겨워서. 너 데리러 왔지.”
재영이 고개를 까닥하며 다가왔다. “놀라게 해주려고 했더니 갑자기 뒤도는 바람에 들켰어.”라고 볼멘소리를 해대는 게 귀여웠다. 재영의 옆으로 거의 달리다시피해 붙어 섰다. 재영이 미간을 좁히며 내 무릎을 먼저 살폈다.
“달릴 때는 조심해.”
“너 내가 진짜 무슨 세 살인 줄 아냐고.”
반쯤 툴툴대며 뱉은 말에 재영이 미소 지었다. 그래도 재영은 내 무릎을 굳이 한 번 더 살펴본 후에야 걷기 시작했다. 나와 걷는 속도가 같았다.
“지겨워도 카페에서 기다리지. 괜히 여기까지는 왜 왔어.”
“더 일찍 보면 좋잖아.”
재영의 걸음과 내 걸음이 같아졌다. 오른발과 오른발, 왼발과 왼발이 같은 속도와 같은 폭으로 걸어지는 것에 이유 모를 뿌듯함이 들 정도였다. 재영의 발을 따라 걸음을 움직이다, 어제 욕실에서 내 발 사이로 들어와 공간을 만들던 재영의 발이 생각났다. 순식간에 목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목을 가다듬으며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앞을 보고 걷는 재영의 얼굴은 나와 달리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나에게는 첫 연애고, 첫 섹스지만 재영에게는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우리 연애의 부피와 재영이 느끼는 부피가 다를 수도 있다는 게 조금 씁쓸했다.
“나 너무 피곤해서 커피 마시고 싶어.”
“응. 가자. 커피 사줄게.”
일부러 재영과 속도를 달리했다. 재영과 내 발이 어긋났다. 내 걸음에 맞춰 걷던 재영이 별안간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은 나쁜 아저씨 안 따라갔어? 과자 준다고 따라오라는 아저씨도 위험해.”
“커피 사준다는 아저씨는?”
재영의 허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장난치는 걸 눈치챈 재영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음……. 아저씨 중에 제일 위험한 유형이지.”
웃음을 터뜨린 재영을 따라 나도 웃고 말았다. 재영의 뒤로 보이는 캠퍼스에 핀 붉은 꽃이 아름다웠다. 재영에게 꽃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재영은 딱히 꽃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저런 유의 붉은색은 좋아한다고 답했다.
“주목이라는 나무가 있어. 국산재라 가구로도 자주 만들어지는 나무인데, 그 나무의 씨가 붉은 열매처럼 보여. 햇살이 비치면 주홍빛이 되었다가 밤이 되어서 그늘이 지면 짙은 고동색처럼 보이기도 해서… 내가 좋아해. 볼 때마다 색이 달라 보여서. 그런 건 귀하거든. 찾기도 힘들고.”
재영은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쑥스러운 얼굴로 낯을 붉혔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웠다. 특히 재영이 해주는 이야기라면 더욱 그랬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말할 때 묘하게 틀어지는 재영의 입술과 살짝 붉어지는 얼굴, 집중해 오므라진 눈썹 사이도 좋아서 재영이 더더욱 많은 이야기를 내게 풀어주길 기대하게 했다.
“마당에 있던 나무는 그거 아니고, 백송 맞지?”
“어? 어떻게 알았어?”
재영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줄기에 흰빛이 돌아서. 예전에 비싼 나무라고 들었던 것 같아.”
재영은 눈에 띄게 즐거운 얼굴로 나를 보며 웃었다. 살짝 놀란 얼굴로 보이는 설레는 표정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알아준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정도는 나도 알았다. 재영은 신난 얼굴로 백송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송은 재영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라고 했다. 희귀수종이라 영국으로 이식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며 볼을 부풀렸다.
“집 짓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들었어. 지금 심은 것 전에 두 그루나 죽어서.”
“그렇게까지 해서 그걸 꼭 거기에 심고 싶었던 거야? 너도 진짜 별나다.”
자신의 엄마처럼 뭐 하나에 꽂히면 집착 같은 걸 한다던 재영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웃음이 났다.
“근데 왜 하필 백송이야?”
재영이라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든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재영은 나를 한번 돌아보더니 묵묵히 웃기만 했다.
“그냥. 예뻐서.”
늦게 뱉어진 재영의 답은 생각보다 심심했다. 재영이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그거, 가까이에서 보면 좀 징그럽지 않아?”
예전에 사진으로 봤던 백송이 생각났다. 가지의 피부가 얼룩덜룩하게 벗겨지고 그 자리마다 동그랗게 흰색과 갈색이 뒤섞였던 나무는 오늘 재영의 집에서 본 백송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보였다. 재영의 집 마당에 있던 백송은 줄기가 얼룩덜룩하지 않았다. 오히려 줄기 전체에 하얗게 윤이 나고 있었다.
“왜 징그… 아… 수피 벗겨지는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
재영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옅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영은 백송은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이가 들며 태가 다르다고 했다. 애정을 받고 자란 백송은 자라며 무늬가 없어지고 모두 하얗고 고른 색을 띤다고 일러주었다. 지금 이식한 백송의 전 주인도 그 백송을 십 년 넘게 애정으로 키운 것이라고 하며 재영은 보기 드물게 볼을 붉혔다. 그런 재영을 보는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마시는 중에도 재영은 테이블에 놓인 내 손가락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렸다. 손마디 하나하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동그랗게 쥐었다가 만지길 반복했다.
“손톱도 예뻐. 넌 참 색이 예뻐.”
손톱을 하나씩 만지작대며 낮게 읊조리던 재영이 불현듯 날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거기 옷으로 가려진 곳도. 색이 다 예쁘던데.”
“미친. 야!”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내뱉었다.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커피가 입이며 볼에 방울로 묻어났다. 아이처럼 커피를 흘린 게 부끄러웠다. 입가에 묻은 커피를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려하자, 재영이 내 손을 잡아내려 자신의 손등으로 내 입술과 볼을 훔쳐 주었다. 그런 재영을 보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빨대로 잔에 담긴 얼음을 세게 쿡쿡 찔러댔다. 볼이며 목에 열이 올라 후덥지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까 그 비서님은 어디 가셨어?”
어색함에 눈을 굴리다 문득 이곳까지 같이 온 비서가 떠올랐다. 학교까지 운전해줬으니 당연히 재영과 같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재영은 고개를 까닥이더니 입에서 혀를 굴렸다. 볼로 밀려난 혀가 입안에서 한 바퀴를 굴렀다.
“아… 시차 때문에 피곤해하는 거 같아서.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고 했어. 아무래도 온 지 하루밖에 안 됐으니까. 일이야 내일부터 해도 되는 거고.”
“어제 오셨다는 거야?”
재영이 커피를 마시며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괜찮아 보이시던데.”
“아냐. 너 내려주고 나서 계속 졸려했어. 아마 지금 집에서 자고 있을 걸?”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커피를 마시는 재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분명 며칠 전 재영의 집으로 들어가던 윤 비서를 보았다. 내 창을 보며 진득하게 담배를 물던 짧은 검은 머리와 서늘한 눈빛을 한 남자는 오전에 봤던 윤 비서가 분명했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거지, 생각하며 재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행히 재영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얼음이 반쯤 녹은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쭉 마셨다. 다시 고개를 들어 재영을 보았다. 재영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재영의 눈이 아침에 내 손을 잡고 인사하던 윤 비서의 공허하고 탁한 눈과 닮아 보였다.
“재영아……?”
“응.”
하늘에서 눈을 뗀 재영이 나를 보며 웃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재영의 손을 끌어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 위에 볼을 붙이고 느리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재영은 나머지 손으로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볼을 쓰다듬던 손은 천천히 목으로 내려와 간지럽히듯 목을 긁어대다가, 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뒤통수를 감쌌다.
“하늘이 맑아.”
“응. 비 그친 후로 더 그런 거 같아.”
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보았다. 맑게 갠 하늘에 뜬 구름조차 수가 많지 않았다. 해는 자신의 온화한 기운을 고스란히 내뿜고 있었고, 바람은 그에 맞춰 느린 박자로 우리를 지났다.
“날이 좋으니까, 기분이 좋다. 그치?”
재영의 물음에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 재영의 손바닥에 더욱 깊숙이 볼을 기댄 채로 하늘을 향한 재영의 얼굴을 관찰했다. 눈동자의 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속눈썹, 하늘을 보다 작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의 공간까지. 맑은 하늘 아래 반짝이는 재영의 얼굴은 여태까지 내가 봐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얼굴은 여전히 곧은 선으로 빛났지만 묘한 이질감이 들기도 했다.
“…있잖아. 재영아.”
더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어 눈을 감았다. 아마 재영이라면 이런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생각으로 시간을 죽이지는 않을 거다. 질끈 눈을 감았다. 내 뒤통수를 감쌌던 손이 더디게 움직이더니 이내 내 볼 위로 올라왔다. 쿡쿡, 손가락으로 볼을 찔러대는 동작에 나도 모르게 흐릿한 웃음을 흘렸다.
“혹시… 너 민재 아버지 회사, 들었어?”
“어? 아…….”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재영이 고요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볼을 약하게 누르던 손이 멀어졌다.
“부도난 거?”
“응. 왜 그렇게 된 거야? 너희 회사랑도 좀 알지 않아?”
장례식장에서 재영의 눈치를 살피던 민재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들의 친구라고는 해도 아무래도 사업적으로 연관이 있는 관계니, 그때도 눈치를 봤던 거라 생각했다. 재영이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물류 창고 확장 때문이라고 들었어. 투자하기로 한 곳들이 하나둘 회수하면서 이자도 못 갚았다고 들었고.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알아봐 줄까?”
재영의 손바닥에 기댔던 볼을 들었다. 괜히 기운이 빠졌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졌다. 재영은 그런 나를 보다 느리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할아버지한테 물어볼게. 내 친구라고 하면 모른 척하시지는 않을 거야. 많이 걱정했어?”
“아. 그냥 좀 놀랐어. 나는 그렇게 큰 회사는 안 망하는 줄 알았거든.”
“큰 회사들도 그런 경우 많아.”
잘은 모르지만 재영이 하는 말이 맞을 터였다. 시무룩해진 내 얼굴을 보던 재영이 주위를 살피다 내 볼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도와주실 수 있으면 도와주라고 할게. 할아버지면 도울 방법이 있을 거야. 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면 다행이긴 한데. 난 사실 사업이나… 뭐, 그런 건 아는 게 없어서.”
“보통 다 그렇지. 나도 그래.”
속삭이듯 “아니. 넌 안 그래. 넌 똑똑해.”라고 덧붙였다. 재영은 눈을 꼭 감고 웃다가 다시 내 입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가볍게 붙었던 입술은 이내 아랫입술을 핥고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농익은 움직임에 허리로 찌릿한 전기가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 볼을 잡은 재영의 손목을 꼭 쥐었다. 타액으로 진득하게 젖은 입술이 멀어졌다.
“호정아. 근데 이상하지 않아?”
“뭐가?”
시린 바람이 불며 눈이 따가웠다. 재영의 손목을 쥐었던 손을 떼 두 눈을 비볐다. 재영의 두 손이 내 볼에서 떨어져 눈을 비비는 내 손을 잡았다. 속눈썹이라도 떨어졌는지 아프게 떨리는 눈을 다시 더듬으려는데 내 손을 붙든 재영의 힘이 생각보다 셌다.
“네가 신경 쓰는 모든 일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게. 신기하잖아.”
“응?”
아픈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흐릿한 시선 사이로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재영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안 신기해. 그냥 고맙지.”
“그래?”
손을 올려 눈을 마저 비볐다. 흐릿하던 시야가 맑아졌다. 재영이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재영을 따라 빙긋 웃자, 재영이 고개를 꺾었다. 진득하게 나를 보던 재영이 느린 동작으로 컵을 들어 안에 담긴 얼음을 입에 물었다. 재영의 입에서 얼음이 으드득, 소리를 내며 으깨졌다.
집에 돌아오자 재영의 집 앞에 윤 비서가 서 있었다. 골목 끝으로 들어오는 차를 발견한 윤 비서가 손에 쥐고 있던 연초를 바닥에 비벼 껐다. 윤 비서의 머리 위로 담배 연기가 그득했다. 이글대며 오른 연기가 불어온 바람에 날려 곧 사라졌다. 바닥 아래로 떨어진 담배 개수도 이미 열 개비는 넘어 보였다. 주차공간에 차를 대고 함께 다가섰다. 윤 비서는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반쯤 숙여 인사했다.
“인사 편하게 하셔도… 되는데요.”
얼떨결에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고 말했더니 윤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웃으려고 노력은 하는 것 같았으나,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무척 어색한 웃음이 걸쳐졌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웃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집에서 쉬고 있으라니까 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재영이 윤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담배 피우다 보니까 몇 시간이 그냥 지나서요.”
“그래도 들어가서 편하게 쉬어요. 피곤할 텐데. 난 호정이 집에 있다 갈 거니까.”
“네. 감사합니다.”
윤 비서는 재영이 내민 차키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윤 비서를 빤히 보고 있었다. 재영보다 조금 더 큰 키. 탁한 회색빛이 고스란히 보이는 검고 짧은 머리. 가로로 길고 매서운 눈. 먹물처럼 짙고 어두운 눈동자. 능숙하게 담배를 피우고 당연하다는 듯 바닥에 버리는 자세. 다시 봐도 분명 그날 재영의 집으로 들어가던 사람이 맞았다.
재영이 얼굴 앞에 손을 흔들었다. 나도 인지하지 못한 채 윤 비서를 너무 집중해 보고 있던 탓이었다. “뭐해?”라고 물으며 웃는 재영을 향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샤워를 마친 듯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오던 그 날 재영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지금 눈앞에서 흔들리는 손 위로 그날 윤 비서에게 들어오라 말하던 재영의 손이 겹쳐졌다. 눈앞에서 흔들리던 재영의 손은 곧 내 등 뒤로 옮겨졌다. 등에 멘 내 가방을 끌어 자신의 손에 쥐는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고마워.”
재영은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평소처럼 미소 지었다. 재영을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마음 한구석에서 막힌 질문을 풀어내고 싶다가도, 뱉어내는 것보다는 묵묵히 삼키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보통의 연인들은, 그러니까 보통 연애를 하면 다들 이런 의심이나 질투를 어떻게 넘기는 거지, 생각했다. 이런 것 하나하나 당장 털어내 그 자리에서 푸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눈앞의 상대방이 하는 말을 믿는 게 먼저인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계단을 오르던 재영이 문득 나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호정아.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
“응. 좋지.”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 손을 내밀기에 그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2층 거실에 오르자 재영은 커튼을 쳐 해를 가렸다. 아직 낮인데도 커튼 하나에 집은 금세 어두워졌다. 창가에 서서 커튼을 친 재영이 나를 돌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깊은 적막이 흘렀다.
재영은 잠시 눈을 굴리다 무언가가 생각난 듯 피식 웃으며 나를 응시했다. 카페에서 하늘을 보며 기분이 좋다던 재영의 얼굴이 스쳤다. 지금 나를 보며 웃는 재영의 얼굴 위로 그 모습이 겹치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리 와.”
나를 보던 재영이 두 팔을 벌렸다. 재영의 팔 사이로 내가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입술을 말아 느리게 재영을 향해 걸어갔다. 재영은 고개를 살짝 꺾은 채로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점차 걸음을 옮기며 다가서자 그제야 빙긋이 미소 지었다.
“윤 비서 지금 진짜 피곤할 거야. 목요일에 잠깐 여기 왔다가 일 때문에 한국 돌아갔었는데. 어제 급하게 다시 온 거거든. 일정이 완전 미쳤지? 아마 우리 아빠보다 더 바쁘실걸?”
“어? 어… 일정이 그렇게도 가능해?”
“그러니까. 일이 너무 많은 분이야.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재영이 한숨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내내 불안하던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그날 잠시 봤던 윤 비서의 모습과 재영의 말이 이해됐다. 괜한 오해로 혼자 속을 끓인 게 부끄러워졌다. 걸음을 서둘렀다. 재영의 품에 안기자마자 두 손이 내 등을 부드럽게 쓰는 게 느껴졌다.
“나 사실, 목요일에 비서 분 봤었거든…….”
“진짜? 어디서?”
재영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여전히 손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여기. 창에 서서 너희 집… 훔쳐 보… 아니, 그냥 보다가. 혹시 나 좀 스토커 같아 보여? 이상해 보이지?”
“뭐?”
“너희 집 보고 있었어. 너 집에 있나, 없나 계속 보다가… 그날 집으로 들어가시는 거 봤어.”
재영이 몸을 들썩대기 시작했다. 웃음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분명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영은 오히려 기쁜 듯 보였다. 몸까지 달싹이며 웃던 재영이 별안간 사이를 벌려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마치 내가 기특한 일을 해낸 듯한 착각이 일 만큼 재영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자신의 집을 보고 있었다는 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닌 듯했다. 다행이었다.
“진짜 스토커는 너처럼 이렇게 귀엽지 않아.”
재영은 내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지자 그 틈으로 재영의 차가운 혀가 들어왔다. 볼을 붙든 손이 단단했다. 단호하게 내 얼굴을 잡아 비스듬하게 돌린 재영은 이내 내 혀를 감싸 당겼다. 창가에 기대앉은 채로 다리 사이에 내 몸을 넣어 완전히 결박했다. 재영의 몸은 언제나처럼 단단했다. 두 다리가 붙들린 상태로 재영의 허리 옆을 꼭 쥐었다.
“그리고 걔들은 너처럼 이렇게…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지도 않아.”
“…전혀 위로 안 돼.”
“그래?”
재영이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내 볼을 감싸고 있던 손이 차츰 내 목을 감싸며 올라왔다. 창가에 기대있던 재영이 몸을 일으켰다. 커튼으로 이미 어두워진 거실에 재영의 그림자가 더해지며 몸 위로 더욱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재영은 고개를 숙여 내 목을 깨물었다.
“으응, 아, 아파.”
재영의 손이 더 굳세게 내 목 뒤를 감쌌다.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붙들린 상태가 되어서도 벗어나고자 아픈 목을 비틀었다. 재영은 다시 이를 세워 내 목을 깨물었다.
“그런데 그런 애들도… 결국에 자기가 누군지 알려주려고 한대.”
“왜?”
재영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 난 모르지.”
“그럼 나 그날 진짜 스토커처럼 군 게 맞는 거야? 지금 너한테 말해줬으니까…….”
우물대며 물었다. 목을 깨무는 재영의 이가 부드러워지고 그 위를 덮는 입술은 따뜻하고 촉촉해졌다.
“아니. 넌 그냥 단순해. 그때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나도 단순히… 지금 너를 좋아하는 거고.”
내 목을 완전히 덮어 핥고 있는 재영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재영의 볼을 잡아들자, 촉촉하게 젖은 재영의 눈이 보였다. 그 눈 위에 입술을 살짝 붙였다 떼어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에서 오직 재영의 눈동자만이 선명한 빛으로 이글대고 있었다. 지금 이 어둠이 나로 느껴졌다. 재영이 없었다면 지금쯤 내 인생은 이 어둠과 같았을 거다. 이미 이전부터 나에게 내린 빛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까… 내가 목요일에 비서 분 봤었다고 했잖아. 그래서 아까 네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물을까 말까 계속 생각했는데… 못 물었어. 진짜 네가 거짓말하는 걸까 봐. 혼자 의심해서……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말을 다 안 해서 그런 건데.”
두 손으로 내 골반을 당긴 재영이 한 손을 내려 내 청바지 앞 후크를 열었다. 곧이어 그 아래의 지퍼를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느리게 지퍼를 내리는 손길이 앞과 스치듯 닿았다. 놀라 어깨를 살짝 움츠리자 재영은 지퍼를 내리던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내려 보며 미소 지었다.
“아침에 바른 약, 괜찮았어? 불편하지는 않았고?”
“아… 응. 며칠 지나면 완전히 낫지 않을까?”
지퍼를 마저 내린 재영이 내 청바지를 살짝 아래로 당겼다. 어둡다고는 해도 팬티가 반쯤 드러난 상황이 부끄러웠다. 어색함에 몸을 비틀자 재영이 다시 단호하게 내 허리를 잡아 세웠다. 속옷 안으로 재영의 손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들어왔다.
“야…….”
몸을 아무리 비틀어도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재영의 손이 엉덩이 사이로 들어와 뒤를 채운 촘촘한 근육 사이를 더듬었다.
“그러네. 며칠 지나면 다 나을 거 같아. 이미 많이 아물었어.”
“응. 걸을 때 아프거나 그러진 않았어.”
재영은 낮게 다행이라고 속삭이며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이제 점점 적응해가나 보다.”
“응. 그런가 봐.”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칭찬을 받은 것처럼 쑥스럽기도 해서 웃음이 났다. 재영의 어깨를 잡았다. 엉덩이를 쓰다듬던 재영의 손이 올라와 내 손을 감싸 내렸다. 재영의 손이 내 등 뒤로 들어왔다.
“이거 벗어볼래?”
“어?”
머뭇대며 티의 끝을 꼭 쥐었다. 지금은 아프지 않지만, 막상 하면 다시 아파질 게 분명했다. 아물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고 찢어지던 그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도 몸은 성실하게 그날의 감각과 등줄기를 꿰뚫던 쾌감을 상기하고 있었다. 재영은 티의 끝을 꼭 쥐고 있던 내 손을 감싸 천천히 들었다. 자연스럽게 티가 반쯤 말려 올라갔다.
“넣지는 않을 거야. 완전히 아물 때까지는.”
“…그럼 옷은 왜 벗으라고 한 거야?”
진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물었을 뿐인데, 재영이 다시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웃기 시작했다. “너 나 비웃지 마.”라고 투정부리듯 짜증을 냈다. 그런데도 재영은 쉽게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 볼을 살짝 꼬집은 재영이 내 몸을 들어 자신의 품에 나를 완전히 밀착해 안았다.
“소파가 낫겠어, 침대가 낫겠어?”
“진짜 안 할 거야?”
두 다리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엉덩이 사이로 벌써 발기한 재영의 아래가 느껴졌다. 입술을 세게 꾹 다물었다. 재영은 나를 들어 올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재영이 팔의 힘을 조금만 풀어도 몸이 내려가며 재영의 성기에 그대로 뒤가 뚫릴 것만 같았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목을 넘어가는 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잠시 망설이다 재영의 어깨에 볼을 붙였다.
“왜? 지금 나랑 하고 싶어?”
“…응.”
낮게 속삭였다. 거짓은 아니었다. 재영의 웃음소리가 어깨를 타고 전해졌다.
“아직 아물지 않아서 아플 거야. 상처는 더 벌어질 거고, 그러면 아무는 데 이전보다 더 오래 걸릴 거…….”
재영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지지부진한 말이 너무 길었다.
“…할 거면 더 가까운 곳.”
덧붙여 “안 할 거면 너희 집 가.”라고 말하자, 이번에도 재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파가 더 낫다는 거네.”
재영의 손이 엉덩이를 부드럽게 안아들었다.
“이전보다 더 아플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괜찮다는 거지?”
“너 자꾸 묻지 마. 내가 매달려서 하는 꼴이잖아.”
재영은 고개를 숙여 작게 내 귀를 깨물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재영의 숨소리가 귓바퀴를 돌았다. 당연히 소파에 나를 먼저 내려줄 거라 생각했다. 재영은 허벅지 위에 나를 앉히고 자신이 소파에 기대앉았다. 푹신한 소파가 재영의 몸을 따라 파였다.
“근데 호정아.”
재영이 입맛을 다시며 소파에 더욱 깊숙이 몸을 기댔다.
“방금 네가 매달려서 하는 꼴이라는 말이…….”
재영의 허벅지 위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출렁이는 소파에 앉은 재영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서. 꼭 봐야겠는데.”
재영이 소파 헤드에 팔을 올렸다. 출렁이던 소파의 움직임이 잔잔해질수록 나를 보는 재영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네가 움직여 볼래?”
물론 지난 욕실에서도 내가 리드하고 싶어 객기 어린 말을 뱉은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막상 이렇게 재영이 느슨하게 힘을 푼 채 나를 보고만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난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할게. 나 그거 잘하잖아.”
재영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부끄럽던 상황이 재영의 말 때문에 고개를 들 수도 없을 정도로 어색하고 낯설어졌다. 엉덩이 아래로 내려가 걸쳐져있는 바지를 벗었다. 티를 마저 벗고 재영을 빤히 쳐다보다, 재영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재영은 느긋한 얼굴로 내 움직임을 관망했다. 빨갛게 열이 오른 손가락은 내가 보기에도 불안해 보였다. 초조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주먹을 꼭 쥐었다 펴 재영의 티 아래로 쭈뼛대는 손을 넣었다.
“…이거. 이거 벗어줘.”
재영은 고개를 까닥 움직여 답하고는 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올렸다. 머리 위로 벗은 티가 재영의 한 손에 쥐어졌다. 재영은 벗은 자신의 티를 바닥에 던지듯 놓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은. 이다음은 또, 뭐 해줄까?”
재영이 내 귓바퀴를 매만지며 물었다.
“여기…….”
재영의 손을 끌었다. 이전에 할 때 내 가슴을 주무르고 짓누르던 재영의 손가락과 입술, 진득하게 유두를 적시던 혀가 떠오른 탓이었다. 동시에 아래가 고개를 들며 발기하려 했다. 손으로 속옷 앞섬을 가리며 재영을 보았다. 나에게 끌려온 재영의 손이 내 가슴 아래 흉곽을 움켜쥐었다.
“아니… 거기 말고… 그…….”
“배꼽?”
재영이 웃으며 손을 내려 내 배꼽을 꾹 누르더니 이내 허리를 감쌌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원하는 게 어디인지 알면서 일부러 그곳을 피해 더 나를 약 올리려는 것 같았다. 놀리려는 심보가 보여 괘씸하기까지 했다. 재영이 손가락을 들어 꼭 깨물고 있던 내 아랫입술을 두드렸다. 이에 들었던 힘을 풀고 재영을 마주보다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나 이상하지? 여태 이런 것도 못 해보고. 잘하지도 못하고.”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속으로 놀리고 싶어 하잖아.”
나름 눈을 매섭게 뜨고 노려봤다. 재영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떨어댔다. 무릎으로 소파를 눌러 재영의 허벅지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엉덩이와 맞붙은 재영의 앞이 벌써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재영은 내 손을 자신의 바지 앞, 발기한 성기로 끌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섰잖아.”
어색한 손의 감촉에 다리를 움츠렸다. 엉덩이 사이로 올라온 재영의 아래가 느껴졌다. 엉덩이를 조금 더 세워 성기와 닿지 않는 곳에 놓아야 할지, 이대로 성기와 완전히 밀착해도 될지 망설였다.
“아까 말하려던 곳, 여기 맞지?”
재영의 손이 흉곽을 꽉 감싸고 이내 유두를 어루만졌다. 봉긋하게 오른 유두가 흔들리며 미세한 아픔이 전해졌다. 미간을 살짝 좁혔다. 재영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유륜을 따라 움직였다.
“여기, 어떻게 해줄까?”
재영은 내 허리를 당겨 자신의 아래와 내 엉덩이를 완전히 밀착시켰다. 재영이 몸을 움직이자 소파가 작은 반동을 만들었다. 덕분에 꼿꼿하게 선 재영의 성기가 속옷 위를 찌르며 맞닿았다. “읏.” 소리를 내며 허리를 떨어대면서도 내 가슴을 지분대는 재영의 손에 온 신경이 쏠렸다.
재영의 혀가 유두를 음미하듯 핥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그려지는 혀의 움직임이 노골적이었다. 주말 내내 서로를 핥고 속을 탐하고 서로를 구걸하듯 온몸을 애무했다. 그런데도 갈증은 더욱 박차를 가해 목을 마르게 했다. 재영과 몸을 섞으면 섞을수록 내 안에 이상할 만큼 큰 욕구가 생기는 듯했다. 몸집을 키운 욕구는 재영과 이렇게 둘이서만 있고 싶게 했다. 서로만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서로의 몸만 탐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잠시만, 으, 응.”
두 손으로 재영의 뒤통수를 감쌌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혀를 굴리던 재영이 고개를 들었다.
“나랑 있을 때 너한테 잠시라는 건 없어.”
재영이 속옷 안으로 빠르게 손을 뻗어 넣었다. 브리프 안에서 고개를 들고 있던 성기는 재영의 손이 닿자 솟구치며 밖으로 튕겨 나왔다. 부끄러움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재영은 내 얼굴을 잡아 붉게 발기한 내 성기를 똑바로 보게 했다.
“잘 봐둬야지.”
재영은 내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여전히 한 손은 내 유두를 짓이겨 누르고 있었다. 입이 벌어질 때마다 내가 듣기에도 낯 뜨거운 신음소리가 새어났다. 입을 틀어막고 싶어질 때마다 재영의 혀가 입술을 핥으며 그 사이를 벌렸다.
“으흥…….”
혀에 달큼한 향이 뱄다. 얼른 재영의 혀가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도망치는 혀를 찾아 애무하고 볼을 어루만져주길 기다렸지만 재영은 간간이 입술만 핥을 뿐 키스를 해주지는 않았다. 조바심이 나 절로 허리가 들썩거려졌다. 가슴을 지분덕대는 손의 움직임은 확연히 거칠어졌는데도 여전히 재영은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흐씨…….”
결국 내가 먼저 재영의 얼굴을 잡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고른 치열을 따라 혀를 움직였다. 내 혀를 찾으려는 재영의 혀를 피해 볼 안쪽으로 내 혀를 붙였다. 자잘한 안쪽 근육이 도드라지며 혀끝으로 그 감각이 전해졌다. 츱츱대는 물기 젖은 소리가 거실을 메웠다.
재영의 바지 버클을 급하게 풀고 두 손으로 브리프와 함께 솟은 성기를 감싸 쥐었다. 재영이 했듯 그 끝을 둥글게 어루만졌다. 엉성해 보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호정아…….”
재영이 내 뒤통수를 거칠게 잡아 입술을 빈틈없이 물었다. 내 움직임을 보며 나른해 보였던 재영의 눈이 선명해졌다. 재영은 한 팔로 완전히 나를 감싸 안았다.
“넌… 진짜 사람을 너무 감질나게 해.”
재영의 손이 내 성기를 잡아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뿌리부터 간지럽히듯 긁으며 올라온 손은 엄지로 귀두를 꾹 눌러 액이 새어나게 했다. 마치 내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하응, 응, 읏.”
밀착된 입술 사이로 열뜬 호흡을 연신 내뱉었다. 방금 재영이 알려준 대로 손을 어색하게 움직였다. 재영의 성기를 잡고 있던 손을 떼 손가락을 세웠다. 성기의 뿌리부터 긁으며 올라와 끝을 지그시 눌렀다. 동시에 재영이 손을 뒤로 뻗었다. 내 뒤의 근육을 짓누르는 손에 어깨를 떨었다.
이질적인 감각이 성기를 타고 전기가 되어 척추를 올랐다. 세우고 있던 무릎의 힘이 빠지려 하면 허벅지에 잔뜩 힘을 줘 몸을 세웠다.
“입으로… 해줄까?”
재영이 눈썹을 까닥였다. 입술에 고인 침을 닦고 재영의 허벅지에 앉았던 몸을 내려 소파 아래로 내려왔다. 카펫 위에 몸을 세우고 완전히 발기해 번들대는 재영의 성기를 잡아 입안에 머금었다.
“하아.”
재영이 탄식을 흘리며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거대한 성기가 입안 점막을 들쑤시며 들이닥쳤다. 볼은 홀쭉하게 파이고 부풀기를 반복했다. 익숙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볼 안을 찌르는 성기와 내 머리를 잡은 재영의 손, 그 어느 것도 적응될만한 건 없었다.
성기를 물고 있는 쪽은 나인데도 재영의 성기가 입에 들어올 때마다 전신에 귀가 아플 정도의 전기가 올랐다. 날 세운 혀로 성기의 아래를 천천히 핥아댔다. 미끄덩한 혀에 힘을 줘 성기의 뿌리를 조이듯 타고 올랐다.
침으로 축축해진 재영의 성기가 눈앞에서 번들거렸다. 보라색의 핏줄이 울긋불긋 도드라졌다. 울퉁불퉁한 혈관을 따라 빛이 굴곡지게 반사됐다. 침이 잔뜩 묻은 입술로 다시 재영의 귀두를 핥을 때였다.
“흐윽… 응, 읏.”
“후우…….”
뒤를 어루만지던 재영의 손가락이 불시에 안을 찌르며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만 들어왔을 뿐인데 카펫에 닿았던 무릎에 힘이 풀리고 입에 물고 있던 성기가 튕겨 나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가까스로 힘을 줘 재영의 허벅지를 쥐고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재영의 성기가 내 볼을 툭 밀치며 더 세차게 솟았다.
“으으… 응.”
경련이라도 온 듯 떨리는 손으로 재영의 성기를 다시 찾아 물었다. 찢어진 내벽에 약을 발라줄 때처럼 재영의 손은 부드럽게 내벽을 이룬 근육을 어루만지듯 더듬었다. 상처로 일그러진 몇 군데는 지나치지 않고 꾸욱 눌러대기도 했다. 재영의 성기가 자꾸만 컥컥대며 입에서 튕겨 나갔다.
“힘, 풀어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재영의 성기를 찾아 물었다. 시큼한 액이 입안에 비릿하게 번지며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뻐끔대는 아래에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근육통이 일었다. 근육통은 금세 종아리까지 전이됐다.
“넣, 그만 넣어줘… 응? 흐응. 넣어줘, 재영아. 여기, 여기. 움직여줘.”
“느리게? 아니면, 빠르게?”
재영이 내 골반을 세게 움켜쥐며 물었다. 반쯤 웃음기가 묻은 재영의 목소리에도 자존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느리게, 빠르게. 그 어느 쪽도 상관없었다.
“뒤돌아볼래?”
재영이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세우고 누웠다. 팔을 굽혀 허리를 낮게 했다.
“하윽.”
엉덩이가 치켜세워진 자세가 민망할 틈도 없었다. 재영의 액과 타액으로 흥건히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려는데, 순식간에 카펫에 볼이 붙어 밀리고 몸이 완전히 앞으로 쏠렸다.
“으읏. 하으.”
재영은 위로 솟구친 성기를 잠시의 틈도 없이 몰아붙여 넣었다. 미약하게 남은 자존심을 세우려 무릎을 다시 세웠다. 헐떡이는 숨이 허공에서 연기처럼 고였다.
“하윽, 잠시. 잠시만… 잠시…….”
팔꿈치를 세우려 할 때마다 몸이 바닥으로 밀쳐지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재영이 아래를 거칠게 부딪치며 삽입했기 때문이었다. 아픔에 절로 악 소리가 났다. 팔을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창피하게도 아픔에 눈물이 터졌다. 카펫을 적신 물이 타액인지, 내 성기에서 쏟아진 정액인지, 눈물인지조차 헷갈렸다.
“잠시는 없댔지.”
입구에서 반을 들어오다 멈춘 재영의 아래가 보였다.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사나워진 말투였는데도 막상 고개를 젖혀서 본 재영의 얼굴은 잔잔했다. 나를 배려해 제 성기를 온전히 다 넣지도 않은 상태였다. 재영이 나를 의식한 듯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재영의 손이 카펫에 닿은 내 무릎을 감쌌다. 눈물로 젖은 뺨을 닦으며 재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 너, 흐응, 너 보고 할래.”
재영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곧 내 몸을 돌려 안은 재영이 부드럽게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동시에 척추가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엉덩이의 골을 타고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다 들어온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두려움에 팔꿈치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으읏. 흣.”
“후.”
여태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이런 곳도 아플 수 있구나, 느끼는 순간 곧바로 이런 곳에도 경련이 오고, 이런 부위도 떨릴 수 있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재영은 여전히 내 뒷구멍에 자신의 성기를 반쯤 박은 채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잠시는 없다며 큰소리를 쳐대더니 누구보다도 나를 기다려주고 있는 셈이었다. 재영의 가슴에 손을 뻗어 재영이 내게 해준 것처럼 유두를 살짝 비틀어 당겼다. 재영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우리 애기, 왜에… 뭐에 심통이 나서 아빠를 다 꼬집어.”
재영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구멍이 살짝 느슨해지는 틈을 타 내벽의 굴곡들이 재영의 성기를 빨아들였다. 스펀지에 물이 스미는 느낌이 들었다. 내 내벽이 물기로 가득하다는 걸 나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허벅지 사이로 진득한 액이 차올랐다. 차진 내벽의 근육은 촘촘하게 움직이며 반쯤 들어온 재영의 성기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반을 밀어 넣은 건 재영의 의지였을지 몰라도 뿌리까지 박혀 들 땐 재영의 움직임보다 내가 재영을 끌어당기는 힘이 더 셌다.
“으으, 흐응.”
재영이 엉덩이에 힘을 줘 단번에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살짝 힘을 빼 성기가 빠져나갈 땐 본능적으로 몸을 바들대며 재영의 움직임을 독촉했다.
“아파?”
엉덩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크기로 벌어졌다. 재영이 금방이라도 움직임을 멈출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
“응, 읏, 흐응.”
다행히 재영은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내 손을 따라 허리를 움직였다. 얼굴을 어루만지는 재영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재영의 손이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이 간절하게 잡아 입술을 붙이고 혀로 핥아댔다. 재영의 손가락 사이로 내 호흡과 신음이 진득하게 고였다.
스스로 엉덩이를 움직였다. 뒤꿈치에 힘을 줘 몸을 살짝 뒤로 빼자 재영이 다급하게 몸을 붙였다. 덩달아 조금 빠졌던 성기가 다시 뿌리 근처까지 박혀 들었다. 이를 세워 재영의 검지를 깨물었다.
“흐읏.”
재영은 거의 끝까지 빼낸 성기를 느리게 밀며 들어왔다.
“으, 으읏, 응, 흐.”
한 번의 추삽질이 시작되자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이전에도 그랬듯 박아대는 박자는 내가 따라갈 수 없이 빠르고 거칠었다. 내벽을 타고 구멍으로 진득한 피가 재차 흘러나왔다. 내 안을 채운 크기가 여전히 튼실하고 뜨거웠다. 허리까지 성기가 빠듯하게 채워진 느낌이 이제는 싫지 않았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응, 흐응, 아읏.”
재영이 엉덩이에 바짝 힘을 줘 나를 밀어붙였다. 밀고 들어가는 순간에 맞춰 내 허리를 잡아 아래로 당겼다.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되면 찰박한 물기 젖은 소리와 살성이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거실을 채웠다. 거실은 금세 서로의 달뜬 숨소리와 젖은 아래가 척척 맞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우둘투둘한 재영의 성기의 굴곡이 내벽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프진, 않아?”
재영이 느리게 성기를 빼며 물었다. 입술을 손등으로 막았다.
“괜찮아… 좋… 아.”
내벽을 긁던 아래가 더 바짝 끝을 올리며 사나워지는 게 느껴졌다. 덩달아 내 안쪽 길이 빠르게 수축하며 좁아졌다.
“읏…, 으응, 아흥.”
재영이 내 턱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입술 사이로 물컹한 혀가 미끄러지며 들어왔다.
“흐으……, 으으, 응, 아읏.”
재영은 일정한 박자대로 내 몸에 성기를 박아댔다. 거칠게 쑤셔 넣고 조금 느리게 빼 잠시 틈을 주고 뿌리까지 박아대는 속도에 맞춰 엉덩이를 들었다. 엉덩이가 들리고 내려가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박는 속도가 더 거칠고 빨라진다는 건 끝이 가까워졌다는 걸 의미했다. 재영의 성기를 더 가까이 받아들이고 싶었다. 카펫을 짚고 있던 한 손을 들어 엉덩이 한쪽을 당겨 벌렸다.
“흐읏, 으.”
“하아, 으흥, 읏, 아읏.”
뒤를 박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가 더 끈적하게 내벽과 맞닿았다.
“으읏…….”
질끈 눈을 감았다. 엉덩이 안을 채우며 뜨거운 열기가 돋았다. 동시에 골을 타고 질척한 정액이 잔뜩 묻어났다.
“호정아… 너 무릎… 미안. 아팠지…….”
사정하자마자 재영은 내 무릎을 감싸 입을 맞추었다. 안 아프다고 몇 번이나 더 웃으며 말했는데도 재영은 안절부절못한 눈으로 연신 내 무릎과 허벅지에 입을 맞추고 혀로 핥아댔다. 호호, 바람까지 불어주려 하기에 간지럽다며 어깨를 발로 밀어냈다. 재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내 입술을 머금었다.
재영은 내 과제를 모두 도와주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 힘겹게 눈을 깜박거리는 걸 보다 나도 그 옆에 누웠다. 지쳐 보이는 얼굴에 걱정되어 빤히 쳐다보았더니 재영은 곧 아이처럼 웃으며 내 품에 안겨들었다. 부지런하고 착한데 똑똑하기까지 한 한재영이 영국까지 유학 와 한다는 게 고작 내 과제를 돕는 거라는 게 내심 우습고 고마웠다.
“씻지 말고 그냥 자. 나 때문에 피곤하지? 전교 1등만 하던 애가 내 거까지 해주려니까.”
나름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재영은 그런 나를 보며 더 세게 나를 품에 안았다.
“이러려고, 너랑 이거 하려고 공부했나 보지.”
“나 이제 진짜 영어 공부 열심히 할게.”
“기특해라.”
재영의 웃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약학과는 우리 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테스트와 과제가 많다고 들었다. 정규 수업시간도 우리와는 달랐다.
“네 과제가 더 많지 않아?”
재영의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나른한 재영의 호흡이 볼을 타고 전해졌다. 재영은 내 물음에 자기 건 내일부터 하면 된다며 오히려 나를 달랬다. 고요히 숨을 내쉬는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어디에서 봐도 잘생긴 얼굴에 괜히 내가 뿌듯해졌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물었다.
재영은 지난 주말 내내 나와 붙어 있었다. 게다가 먹는 거며 입는 것, 씻는 것까지 나를 대신해 챙겼다. 집에 오자마자 거실에서 또 한바탕 소란을 피워대고 과제까지 도맡아 했으니 피곤하기도 했을 거다. 재영의 볼이 금세 잠잠해졌다. 고요하고 안락한 바람이 입술 사이로 나왔다. 세상 어느 곳의 바람과도 비교되지 않을 따뜻함이 느껴졌다. 재영의 가슴에 볼을 바짝 붙인 채로 한동안 눈을 깜박거리다, 재영이 깨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책상 앞으로 가 재영이 해준 과제를 들춰보았다. 마치 자로 그은 것처럼 반듯한 글씨 위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병원에서 내게 선물했던 영어책에 쓰인 포스트잇 속 재영의 글자가 떠올라 미소가 번졌다. 뒤돌아 잠든 재영을 보았다. 움직임 없이 잠든 재영의 얼굴 위로 창가로 든 빛이 스몄다. 빛이 들어오지 않게 커튼을 마저 치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부엌으로 가 물 한 잔을 먼저 마셨다. 마른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에 공부로 혼미했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남은 물을 들고 소파에 가 누웠다. 복도에서 바드 이야기를 꺼낸 남자의 얼굴과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다급하던 남자의 얼굴은 점차 선명해지기만 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바드의 이름에 마음이 불안했다.
“비웨… 웨어? 비… 뭐라고 했는데.”
중얼대며 폰에 최대한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써넣었다. 문장 끝에 나온 ‘댓 가이’라는 말은 알았지만 그 앞의 말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바드가, 그 남자가 다쳤다? 그렇다면 ‘헐트’가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멍청한 생각만 이어질 때였다. 어둡던 거실의 조명이 켜지며 그 뒤로 재영이 나타났다.
“재영아. 왜 안 자고. 잠든 줄 알았어.”
재영은 조명을 켜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며 오라는 시늉을 했더니 재영이 흐릿하게 반쯤 뜬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소파로 다가온 재영은 내 몸을 돌려 뒤에서 허리를 당겨 안았다. 재영의 다리 사이에 온전히 몸을 기댄 채로 폰 화면에 써넣었던 단어를 지웠다.
“안 자고 뭐 했어?”
재영이 내 어깨를 약하게 깨물었다. 다시 검색창에 ‘be’까지 써넣었을 때였다. 재영이 흠, 하며 낮게 숨을 내뱉었다. 목에 불어온 바람이 낯설어 어깨를 움츠렸다.
“아… 오늘 어떤 남자가 복도에서 바드 이야기를 했는데.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서. 왠지 중요한 이야기 같은데… 그 발음이… 비… 아니다, 웨? 붸? 끝에는 댓 가이라고 그랬어.”
“누가 말을 걸었어?”
“응.”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에 자신의 턱을 올렸다. 허리를 안고 있던 재영의 손이 올라와 폰을 쥔 내 손을 감쌌다.
“바드 말고 또 다른 말… 한 건 없어?”
재영은 내 폰을 대신 쥐고 검색창을 눌렀다.
“음… 파티… 토요일 파티 이야기도 했는데. 그래서 바드한테 그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더 걱정돼. 바드 아침에 그 연락 말고 너한테 또 연락 온 건 없었지?”
“응. 없었어.”
재영의 턱이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걔는 별일 없을 거야.”
고개를 살짝 돌려 재영의 볼에 내 볼을 붙였다. 재영이 느리게 미소 짓는 게 느껴졌다.
“그 남자, 너한테 남자 조심하라고 말한 거 아니야?”
“남자를 내가 왜 조심… 아, 나 이제 남자 좋아하는 거 티 나는 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더니 재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네가 남자를 왜 좋아해. 나를 좋아하는 거지.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재영이 미소를 거두며 어깨에 기대있던 얼굴을 들었다. 고개를 젖혀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웃지 않는 얼굴 덕에 재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beware of that guy. 그런 거 아니야?”
“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 한 영어와 남자가 했던 말이 한 문장으로 겹쳐지며 같은 문장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맞는 거 같아. 그게 남자 조심하라는 거야? 걔 뭐야. 나한테 왜 그딴 말을 해? 미친놈이네.”
몸을 완전히 돌려 재영의 양쪽 볼에 손을 얹었다. 재영의 얼굴을 양옆에서 꾹 누르자 재영의 입술이 톡 튀어나왔다. 재영이 다시 눈을 감고 웃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머쓱해진 볼을 긁었다.
“너 걱정해서 한 말이겠지. 깊게 생각하지 마.”
재영이 내 뒤통수를 끌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외국 애들 중에도 오지랖 떠는 애들이 있네.”
“그러게. 기분 나쁘다. 왜 나보고 남자를 조심하래. 나도 남잔데. 근데 댓 가이면, 한 명 말하는…….”
“그러니까. 우리 호정이가 얼마나 남자인데. 그치?”
재영의 손가락이 내 잠옷 바지 앞을 부드럽게 쓸었다. 몸을 움츠리며 재영의 손을 밀어냈다.
“기분 나쁘게 한 애는 신경 쓰지 마. 내가 혼내줄게.”
피식 웃음이 났다. 고개를 끄덕이며 재영의 품에 온전히 몸을 기대 안겼다. 재영이 부드럽게 내 등을 쓰다듬었다.
다음날도 바드는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 바드가 했던 말이 맞았던 것인지 교수는 이 과에서 수업을 듣는 인원이나 학생들의 출결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이 과에 다니는 학생들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이 강의실에는 수업에 바드가 오지 않는다는 걸 인지한 사람도, 그런 바드를 걱정하는 사람도 오로지 나뿐인 셈이었다.
별안간 이전에 나에게 와 바드 이야기를 하며 혼내던 교수가 떠올랐다. 그때 교수가 했던 말은 워낙 길어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이제는 흐릿하기만 할 뿐 세부적인 건 떠오르지 않았다. 재영이 줬던 책으로 공부만 좀 더 성실히 했어도,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틀이 더 지났다. 바드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틀이나 더 지나자 도저히 걱정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바드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전화는 역시나 연결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바드가 의도적으로 내 연락을 피하고 있는 게 맞는 듯했다. 그렇다고 멍하니 없는 연락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화가 난 거라고 해도, 걱정되니 답은 해달라는 내용을 바드에게 남겼다. 마음이 무거웠다. 괜찮다는 연락만 해줘도 마음이 나을 텐데 바드는 그런 답조차 없었다. 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멀리서 나를 보며 오던 재영이 먼저 나를 불렀다.
“뭐하고 있었어?”
내가 좋아하는 탄산음료를 들고 온 재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주머니에 넣으려던 폰을 가리키며 어깨를 들썩였다.
“아. 그냥. 바드… 오늘도 학교에 안 왔거든.”
“그래? 무슨 바쁜 일이라도 생겼나 보지. 원래 걔 공부에 별로 관심 없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재영이 내민 캔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목이 칼칼했다.
“전에 바드 집. 어디인지 기억해? 바드 집에 한번 가볼까 해서. 학교도 안 나오고 연락도 안 되고… 걱정돼.”
“아, 그래도 되지. 근데 나 오늘은 수업이 좀 늦게 마칠 거 같은데. 어떡하지…….”
재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재영이 미안할 일이 아니었다. 풀죽은 재영의 어깨를 작게 다독였다. 얼마나 늦는 거냐고 물었더니 재영은 저녁쯤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학사과정에 중간고사는 없지만 벌써 10월이 되어 과제는 많았다.
우리 과는 과제 개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무엇보다 자잘한 테스트가 없었다. 게다가 교수가 시험이나 학점구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 그럭저럭 눈치껏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재영이 다니는 과는 달랐다. 재영은 멍한 내 눈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쥐고 있던 캔을 들어, 내 볼에 붙였다. 볼이 차가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으로 비켰더니 재영이 집요하게 따라와 볼에 캔을 붙였다.
“집에 먼저 가 있어.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마치고 먹을 거 좀 사서 갈게.”
“응. 내가 도울 건 없… 아무래도, 없겠지?”
장난치듯 웃으며 물었더니 재영이 내 손에 나머지 한 캔을 더 쥐여 주었다.
“넌 내 옆에 있는 거, 그 자체가 돕는 거야.”
“그래. 나 요즘 큰일 하고 있는 거네.”
재영은 입술을 다문 채로 미소 지었다. 재영의 수업이 있는 건물 앞까지 재영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기억하기로 바드가 사는 동네는 우리가 지내는 동네와 가까웠다. 다리를 건너 길목이 나뉘는 곳에서 반대편으로 조금만 가면 바드의 동네였던 기억이 났다. 버스에선 정류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한 상태로 창밖만 보았다. 마침내 길이 갈래로 나뉜 곳에 도착했다. 잊지 않고 제때에 맞춰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바드에게 연락했다. 여전히 내 전화는 받지 않았지만, 이전에 보낸 연락은 읽은 상태였다. “지금 너희 동네니까 별일 아니면 좀 나와 봐. 아니면 답이라도 해줘.”라는 내용을 보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전에 재영의 차를 타고 온 탓에 모든 집이 비슷비슷해 보이기만 했다. 길을 모르니 당연히 바닥을 스치는 발걸음도 느려졌다. 폰을 보니 바드는 역시나 답이 없었다. 노란 지붕 집이 익숙했다. 바드의 집이 이 근처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은 들지 않았다. 집에 갈 땐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하며 골목을 막 돌아갈 때였다.
“…바드.”
“어?”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인 바드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로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서자 바드는 곧장 뒤를 살피더니 머리를 세게 벅벅 긁어댔다.
“머리 뭐야. 염색했어?”
“아… 응. 퍼플, 지겨워져서…….”
바드가 말꼬리를 늘리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걱정되던 마음이 그래도 바드의 얼굴을 보니 사그라졌다. 볼을 부풀리며 다시 바드의 앞에 다가섰다. 바드는 입술을 살짝 벌리고 날 보다가 이내 고개를 홱 돌렸다.
“연락은 왜 안… 바드. 너, 얼굴이 왜 그래?”
걸음을 재촉했다. 빠르게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바드가 두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리기에 그 팔을 끌어내려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눈 옆은 흐릿하게 찢어진 채 멍이 들어 있었고, 입술도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이전에 바드의 머리 위를 물들였던 보라색이 이제는 바드의 얼굴 곳곳에 멍으로 나타나 있었다. 얼굴을 살피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누구랑 싸웠어? 얼굴은 왜 이렇고, 연락은 또 왜 안 됐…….”
“아. 그냥 좀 창피해서.”
바드가 눈을 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파티 끝나고 집 가다가 시비… 시비가 붙었는데. 내가 생각보다 싸움에는 재능이 없고, 또 걔네들은 무리로 있었고. 근데 내가 술에 취해서 먼저… 아무튼 복잡해. 호정, 네가 보면 분명 걱정할 거 같아서 이거 다 나으면 학교에 가려고 했지. 연락하면 설명할 것도 너무 많고.”
바드의 손을 내려 보았다. 손에 먹다 만 아이스크림을 쥔 채로 바드가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불안한 사람 같아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진짜야? 재영이한테는 연락했다며.”
“어. 호정. 나 거짓말… 나, 거짓말 못… 안 하잖아. 재영이 내 일을 도와줘서 고마워서 연락한 거야.”
올라간 바드의 입꼬리가 그의 손처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것 봐. 나 다친 거 보면 너 이렇게 호동갑 떨 게 뻔해서 연락 안 했다니까.”
“호들갑, 말하는 거야?”
“어어. 애니웨이.”
바드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들다가 주변을 살피더니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학교는 언제 올 거야? 수업도 많이 빠졌어.”
“괜찮아.”
피식대며 웃던 바드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바드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벙긋거렸다.
“응?”
바드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 같았다. 또 무슨 장난기가 돋아서 그러나 싶어 나도 살포시 미소 지으며 바드의 눈을 응시했다. 바드는 자신의 손을 펼쳐 내게 보이더니 곧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보였다. 내 손도 그렇게 보여 달라는 의미 같았다. 바드처럼 손바닥을 위로 해 내밀었다. 바드가 내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폰 번호. 바꾸지 마. 꼭 연락할게.’
손바닥을 빤히 보다 고개를 들었다.
“어?”
“쉿.”
바드가 다시 입술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입을 꾹 다물고 내 손바닥과 바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를 보는 바드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받침 몇 개는 틀렸지만 그렇다고 문장 전체를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바드는 자신의 얼굴 옆에 손을 연신 접었다 폈다하며 입을 뻥긋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리자 바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번에는 아예 아이스크림을 쥔 손까지 입술 옆에 들어 접었다 폈다. 다급하게 오므렸다가 펼치는 바드의 양손을 보다 바드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말하라는, 그냥 아무 말이나 하라는 건가 싶어 잠시 머리를 굴리다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 너 아이스크림 먹고 있었네?”
내가 말을 하자 바드는 그제야 안도한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코를 찡긋거리며 맑게 웃던 바드는 찢어진 입술 옆이 아픈지 상처를 문지르며 인상을 구겼다.
“응. 이거 진짜 맛있어. 호정도 먹을래? 먹던 건 좀 그렇고. 내가 사 줄게!”
“아냐. 너 얼굴 봤으니까 이제 됐어. 야.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면 수업은 나와. 알았지?”
“…응.”
바드가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바드는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쭝얼쭝얼 “호정, 완전 야박한 그랜마… 꼬장꼬장…….”이라고 말하며 나를 흘깃거렸다. 내가 진짜 네 그랜마였다면 지금 등짝 한 대 정도는 때려주었을 거라고 말하려다 모든 말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상처로 가득한 바드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가방에 재영이 준 약이 있었다. 찢어진 흉터나 긁힌 곳에 바르는 약이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내가 바른 곳은 다른 곳이었지만, 어찌 됐든 재영이 찢어진 상처에 바르는 약이라고 했으니 바드의 얼굴 흉에도 분명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바드는 내가 뭘 할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먹던 아이스크림도 먹지 않고 멍하니 기다리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가방을 뒤적여 연고를 꺼냈다. 연고는 내가 넣을 때 제대로 닫아두지 않았는지 가방 안에 온통 끈적끈적하게 흘러나와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연고를 꺼내려다 반 이상 샌 연고에 문득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바드가 왜 웃느냐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날 쳐다봤다. 뚜껑이 반쯤 열린 연고를 들어서 보여주었다. 그제야 바드도 나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너 약은 발랐어?”
바드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거 찢어지거나 그런 데 바르는 약이래. 재영이가 준 건데, 일단은 너 써. 난 집에 상비약… 집에 두는 약상자에 그런 거 좀 더 있을 거야. 없으면 재영이가 줄 거니까 이건 너 써도 돼.”
“…응.”
바드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거렸다. 티셔츠를 끌어 뚜껑과 밖에 묻은 연고를 닦아 바드에게 내밀었다. 바드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 다시 내 손을 끌었다. 무언가를 쓰려던 바드가 다시 자신의 입술 옆에서 손을 접었다 폈다. 다시 아무 말이나 하라는 의미 같았다.
“날… 오늘 날씨 좋다. 그래서 너 학교는 언제 올 건데. 아직 답 안 했잖아.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바드가 시키는 대로 중얼대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눈은 바드가 글씨를 쓰고 있는 손바닥에 고정됐다.
‘너, 폰. 도첨.’
도첨? 잠시 눈을 굴리다 내 손바닥 위에 ‘도청’이라는 글씨를 다시 쓰고 검지로 귀를 톡톡 건드려 보였다. 바드는 나와 내가 두드리는 귀를 번갈아 보더니 맞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을 좁히고 이번엔 검지로 나를 가리켜 보였다. 내 폰을 도청한다고? 아니면, 내 폰이 너를 도청한다고? 눈빛으로 물었더니 바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 다음 주에는 꼭 갈게. 나 친구들한테 잘생겨 보이고 싶은데. 지금은 흉터, 너무 많아. 못났어.”
말하면서도 바드의 시선은 오로지 내 손바닥이었다. 바드가 다시 내 손바닥 위에 문장을 이어나가려는 듯 손을 끌었다. 바드의 손을 뿌리치고 양손으로 엑스 자를 그렸다. 아무래도 바드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전 수업시간에 내가 폰으로 녹음을 하고 있었던 건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재영에게 그 내용을 들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줘야 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바드에게 긴 이야기를 설명하려니 마음만 다급해졌다. 장난을 치는 걸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막상 바드의 얼굴을 보니 한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어느 쪽이 맞는지 헷갈릴 때였다. 바드가 다시 내 손을 끌어갔다.
‘도청. 재영.’
“재영……!”
내 입에서 재영의 이름이 나오자, 바드가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싶어 눈만 끔벅거렸다. 바드는 주변을 살피다가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던진 바드가 빠르게 내 손바닥 위에 손을 움직였다.
‘진짜. 진짜.’
바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빤히 보았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내 손을 한 번 더 당기기에 맥없이 몸이 끌려갔다.
“호정. 나 다음 주에는 꼭 수업 갈게. 애니웨이. 나 걱정해줘서 고마워.”
바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해맑게 말을 이었다.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드가 손가락으로 그어 만든 ‘폰, 도청.’이라는 촉감이 여운이 되어 선명히 그려졌다.
“어… 나 이제 갈… 게. 살아있는 거 봤으니까, 됐어.”
“그랜마가 나는 오래 산댔어.”
바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 같은 애들이 더 오래 살더라.”
나도 웃으며 말했더니, 바드가 입술을 꾹 닫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미묘한 웃음이라 나도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 바드의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서려다, 괜히 걱정돼 다시 뒤돌았다.
“바드, 우리 집 가서 같이 밥 먹을래?”
“아…….”
바드가 눈을 굴렸다. 바닥과 허공, 하늘을 맴돌던 바드의 눈이 내게 떨어졌다.
“아냐. 난 괜찮아.”
맥없는 웃음을 짓고 다시 골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적어도 정류장이 있던 도로까지는 나가야 우버라도 있을 것 같았다.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어깨 아래로 떨어지려는 가방을 다시 고쳐 들었다. 느닷없이 뒤에서 내가 선 쪽을 향해 달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길을 비켜주려 살짝 옆으로 몸을 비켰을 때였다. 내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드였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바드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미안. 호정. 미안해.’
“응?”
바드는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고 숨을 헐떡였다. 왜 미안하다는 건지 몰라 눈만 굴렸다. 바드가 자신의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폰 번호 바꾸지 마.’
바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바드가 손을 들어 흔들었다. 좌우로 옅게 흔들리는 손을 보며 나도 따라 손을 흔들어줬다. 학교에 안 와서 수업을 못 들은 건 자신인데 왜 나한테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친구가 없으니까 자기가 안 와서 혼자 수업을 듣게 된 게 미안하다는 건가 싶었다. 바드는 다시 자신이 뛰어온 길을 향해 뛰어갔다. 고개를 돌렸지만, 벌써 골목 끝을 돌아 들어간 듯 바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이 있던 도로까지 걸어오자 대기 중인 우버가 즐비해 있었다. 가장 가까운 곳의 우버에 올라 물끄러미 빈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너. 폰. 도청. 재영. 진짜. 미안.
매끄럽게 이어지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다시 천천히 곱씹어봤지만 바드가 쓴 단어들은 역시나 한 문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은 모두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었다. 역시나 바드가 장난을 친 거라는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웃음을 거두고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미안.’이라는 글자를 쓴 후 어색하게 내 눈을 피하던 바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 말을 못 하게 하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이 들게 하는 행동들이었다.
내 폰을 재영이가 도청……?
더 큰 웃음이 터졌다. 택시 기사가 흘깃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고개를 돌려 터지는 웃음을 참았다. 제일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종일 좋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얄팍한 비를 날리기 시작했다. 무게가 가벼운 비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창문을 긁고 빠르게 사라졌다. 하늘은 맑았지만 하늘에 고인 구름은 잿빛으로 어두웠다.
집이 가까워지자 빗방울도 점차 굵어졌다. 팁을 포함한 요금을 내고 우버에서 내리는데 내 앞으로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윤 비서가 내 머리 위에 검은 우산을 드밀고 있었다. 처음엔 파라솔처럼 큰 우산에 놀랐다가 나를 보는 윤 비서의 서늘한 눈에 더 놀랐다. 놀란 눈을 거두고 윤 비서에게 인사부터 했다.
“감사합니다.”
“늦으셨네요.”
“늦은…….”
내가 늦은 건가. 애초에 내가 언제 집에 올 줄 알고. 멍하니 눈을 끔벅거리는 사이 윤 비서가 우리 집을 향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이 아까 호정 씨 출발할 때 연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늦었다고 했구나. 입술을 꾹 다물고 물기 젖은 바닥을 응시했다. 둘이 있으니 역시나 어색했다.
“아… 네. 일이 좀 있어서.”
“네.”
윤 비서는 전혀 흥미 없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심드렁하게 답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짧은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현관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땐 무릎이 다 시큰거릴 정도였다.
“우산이 엄청 커요. 파라솔 같…….”
“아니요. 우산입니다.”
“…아, 네.”
뻘쭘해진 볼을 긁적거렸다. 윤 비서는 내게 손을 펼쳐보였다. 손은 군데군데 흉터가 많았다. 비서라더니 경호원까지 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난히 큰 덩치며 매서운 눈빛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뭘 달라는 건가 생각하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더니, 윤 비서는 대뜸 내 손에서 열쇠를 빼앗다시피 가져가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열쇠를 가져가는 바람에 몸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만 편하게 쉬십시오.”
“…네.”
윤 비서가 흐릿한 눈으로 접은 우산을 내게 내밀었다. 난 집에 이미 도착해서 괜찮으니 재영의 집까지 쓰고 가라며 다시 돌려주었다. 윤 비서는 나를 빤히 보다가 다시 내 집 안에 우산을 거의 던지듯 밀어 넣었다. 덕분에 바지며 티로 우산에 묻어있던 물방울이 튀었다. 고개를 돌린 윤 비서의 얼굴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칙칙한 얼굴빛이었다.
“좀 이따 재영이 오면 같이 저녁 드실래요?”
“아니요.”
“아… 그럼 같이 여기서 재영이 기다려도…….”
“아니요.”
“아… 네.”
윤 비서는 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집 앞에 서 있을 기세로 나를 빤히 쳐다만 보았다. 뭘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답을 찾고 있지 못한 것 같기도 했고 애초에 별다른 목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윤 비서의 멍한 눈을 응시했다. 눈 아래가 탁했다. 재영의 말대로 일이 많은 분이라 피곤한 듯 보였다.
“피곤하시죠? 일이 워낙 많다고 들었어요.”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거, 우산 가져가시는 게…….”
“아니요.”
괜히 눈치가 보였다. 맥없이 끊기는 대화에 잠시였지만 속에서 울컥 짜증이 일기도 했다. 민망함에 간지럽지도 않은 눈 옆을 긁으며 다시 윤 비서의 눈을 쳐다봤다.
“저번 주에만 여기랑 한국을 두 번이나 왔다…….”
“잠시만요.”
윤 비서는 내 말을 끊더니 주머니에서 자신의 폰을 꺼냈다.
“도련님 전화가 와서요. 도련님 전화 먼저 받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재영의 전화를 받은 윤 비서는 줄곧 “네.”만 반복했다. 나에게는 내내 “아니요.”만 반복하던 남자가 재영에겐 모든 대답이 “네.”라는 게 그저 신기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윤 비서는 나를 집 안에 거의 밀어 넣다시피 밀치고는 거칠게 문을 당겨 닫았다. 닫힌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생각했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멍했다. 내 의지로 집에 들어온 게 아니라 마치 윤 비서에 떠밀려 들어온 기분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폰이 몸을 떨었다. 재영의 전화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폰 너머 재영의 숨소리가 약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곧 재영이 밝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놀란 마음에 흐릿하던 정신이 재영의 목소리에 돌아왔다.
“어. 재영아.”
-호정아. 비가 오네. 너 갈 때는 괜찮았어? 우산은? 비 맞은 건 아니지?
“윤 비서님이 앞에 기다리고 계셔서 비는 안 맞았어.”
-어. 다행히 시간이 된다고 하셔서.
재영이 부스스한 목소리로 답했다. 윤 비서가 우산을 집으로 들이밀 때 티에 튄 물방울이 보였다. 손으로 젖은 티를 만지작거렸다. 비는 좀 전보다 묵직해졌지만 그래도 재영은 비를 맞지 않을 것이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댔을 테니 주차장에서 곧장 운전해 와 차고에 차를 대면 나으려나, 생각했다. 결국 생각은 재영이 오는 시간에 맞춰서 우산을 들고 기다려야겠다는 것으로 귀결됐다. 우리 집으로 올 테니 비를 아예 맞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빗소리와 함께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 바드한테 갔다 왔거든. 방금 도착했어.”
재영은 잠시 걸음을 멈춘 듯 답이 없다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듯했다. 폰 너머 들리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들리는 빗소리와 바람 소리가 폰 너머 재영으로부터 넘어온 소리인지, 내가 선 현관 밖의 소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잘했네… 난 수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응. 장 봐서 올 거지?”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말해봐. 다 해줄게.
작게 음… 소리를 내며 천천히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귀에 바짝 붙이고 있던 폰을 살짝 내렸다. 재영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짐과 동시에 천천히 문고리를 비틀어 문을 열었다.
“…읏!”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현관문 바로 앞에 여전히 윤 비서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여전히 탁하고 퀭한 눈. 날 바라보는 무감각한 얼굴의 윤 비서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갑자기 문을 열었는데도 그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어 보였다.
“어… 가… 가신 줄 알았어요.”
-누구야?
재영이 물었다. 그사이 윤 비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게 인사하고는 재빨리 재영의 집을 향해 뛰어갔다. 재영의 집까지 뛰는 윤 비서의 머리 위로 비가 무겁게 떨어졌다. 할 일도 많다는 사람이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재영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윤 비서를 보는 사이 재영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호정아?
“아. 윤 비서님. 혹시나 해서 문 열었는데 아직 집 앞에 계셔서. 좀 놀랐어.”
재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 집에 들여보내라고만 말해서 그래.
“응?”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되묻자, 재영의 웃음소리가 더욱 짙어졌다.
-다음 말을 안 하면 가끔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몰라. 그래서 거기서 기다렸던 거야.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융통성이 좀 없으셔. 사람이 일을 너무 많이 하면 과부하에 걸린다잖아.
“과부하. 융통성…….”
재영의 말을 따라 하다가, 우산이 커서 파라솔 같다는 말에 그래도 우산이라고 정정하던 윤 비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융통성이 조금이 아니라 아예 없는 거 같던데. 웃으며 다시 현관을 닫고 윤 비서가 던지고 간 우산을 정리해 세웠다. 볼과 어깨 사이에 폰을 끼웠다. 계단을 오르며 재영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좀 전까지 학교에서 같이 있다가 온 건데도 이렇게 금방 재영이 보고 싶어진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재영아. 보고 싶어.”
-응. 나도.
웃던 재영의 목소리가 금세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빨리 갈게. 씻고 있어.
“응.”
괜히 달아오른 볼을 문질렀다. 윤 비서가 우산을 밀칠 때 날린 빗방울이 얼굴에도 튀었던 모양인지 볼에도 비 몇 방울이 묻어 있었다.
-윤 비서, 파라솔 우산. 그거 잘 챙겨놔. 그 사람 그것만 쓰거든.
“어. 그 우산 진짜 크더… 라.”
다시 1층 현관 앞을 살폈다. 윤 비서가 두고 간 파라솔 우산은 크기가 워낙 커서 우산꽂이에 꽂힌 상태에서도 눈에 띄었다.
“재영아. 비 오니까 조심히 운전해서 와.”
전화를 끊고 계단의 중간에 섰다. 주머니에 넣으려던 폰을 꺼냈다. 손에서 한 바퀴를 돌렸다. 뒷면, 앞면을 한 번씩 살피고 꺼진 화면 위를 손톱으로 두들겼다. 톡, 톡. 까맣게 꺼진 화면을 지그시 쳐다보다 다시 현관에 꽂힌 우산을 응시했다.
내가 윤 비서가 우산을 두고 갔다는 걸… 재영에게 말했던가.
폰을 꼭 쥐었다. 현관을 향했던 시선을 위로 돌렸다. 계단을 마저 올라 거실 창가에 섰다. 재영의 집에 조명이 켜져 있었다. 가방을 소파에 두고 부엌으로 가 차가운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셔댔다. 쉬지 않고 물을 마시느라 눈과 코가 따가웠다. 바드에게 연락하려다 왠지 모를 찝찝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에 폰을 두고 거리를 두고 섰다.
욕실로 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그 아래 한참을 서 있었다. 머리는 분명 복잡한데 도대체 왜 복잡한지, 어디에서부터 복잡해진 것인지는 감이 서질 않았다. 생각이 깊어져서 샤워를 하는 시간도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는 중에 복도에 발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다 말리지도 못한 채로 복도로 나왔다. 볼이며 어깨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막 계단을 올라온 재영이 방긋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재영아. 나 씻고 우산 들고 나가려고 했는데. 비는 그쳤어?”
“어. 안 맞았어. 너 나 많이 보고 싶었나 보다.”
다가가 볼을 재영의 가슴에 비볐다. 물기 하나 없이 보송하던 재영의 티가 내 물로 젖었다. 재영은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빗질하듯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었다.
다음 주부터 학교에 오겠다던 바드는 그다음 주가 되어서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역시나 이전처럼 연락도 전혀 닿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날 바드가 했던 행동들이 점차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바드가 했던 행동과 말에 대한 의구심이 들면서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폰을 쳐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왜 하필 도청이라는 이야기를 꺼냈을까. 왜 굳이 누가 내 폰을 도청한다는 듯이 손을 끌어 글자를 써야 했을까. 왜 미안하다고 했을까. 왜. 왜 하필, 재영이라는 이름을 그 문장 가운데에 썼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윤 비서가 던지고 간 우산이 떠올랐다.
* * *
방학이 가까워졌다. 3주의 짧은 시간인데 첫 주는 심지어 시험을 치는 기간이라 실질적인 방학은 2주밖에 되지 않았다. 재영의 집에서 재영이 오길 기다리며 이제 곧 다가올 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온통 영어로 뒤섞인 책을 펼쳤다 닫았다 마지못해 다시 열었다. 내 맞은편에 앉은 윤 비서를 흘깃 쳐다봤다. 윤 비서는 내가 책을 펼쳤다가 닫듯이, 자신의 라이터를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기를 반복했다. 나처럼 무료한 듯 보였다.
재영은 테스트와 과제가 많아지면서 학교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내 집에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재영의 집에 있을 땐 윤 비서와 둘이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일 안 하세요?”라고 물으니 윤 비서는 피식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내가 멀뚱히 쳐다보자 낮게 하품하던 윤 비서가 내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비서님. 저 배가 고픈데요.”
“네.”
사람이 배가 고프다는데 네, 라니.
“같이 뭐 드실래요?”
“아니요.”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네.”
윤 비서는 입고 있던 검은 재킷을 소파 아래에 아무렇게나 놓았다. 흰 셔츠의 첫 단추를 푼 윤 비서는 제 손등으로 코와 볼을 마구 비벼댔다. 쏟아지는 졸음을 깨우려는 것 같았다.
윤 비서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의 집은 우리 집보다 먹을 게 언제나 더 많았다. 물론 재영이 오기 전에 무언가를 배부르게 먹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잠도 깰 겸 커피와 함께 과일이라도 윤 비서랑 나눠 먹고 싶었다.
윤 비서를 두고 부엌을 향해 혼자 걸어가다 문득 어둡게 차양이 내려진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차양은 검은색이 한 겹, 그 뒤로 어두운 잿빛이 한 겹 더 덧대어져 있었다. 아무리 집중해도 그 뒤의 어둠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재영의 집에 있는 모든 방의 문은 미닫이 형태라 굳이 문을 잠그지 않았다. 드레스룸이나 신발만 있는 방, 서재는 필요에 의해 재영을 따라 구경한 적이 있었지만 그 외의 방은 한 번도 들어가거나 구경한 적이 없었다. 굳이 구경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는 게 더 적합했다. 내가 들어가지 않았던 방의 개수를 세보았다.
복도 끝에 차양이 드리워진 곳 하나. 그 옆에 항상 불이 켜진 방이 또 하나였다. 그것 외에 눈에 보이는 다른 특별한 방은 없었다. 불이 켜진 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낮인데도 여전히 저 방만큼은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윤 비서가 있는 거실 쪽을 슬쩍 쳐다보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쁜 일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발소리를 줄여 복도 끝의 차양 앞까지 걸어갔다. 주홍빛이 감도는 전구색을 쓴 침실이나 다른 방과 달리 미닫이문 뒤로는 주백색의 밝은 빛이 어른거렸다. 영국에 오기 전 함께 갔던 호텔에서 재영이 빛에 대해 설명해 주었던 게 생각났다. 전구색이 훨씬 따뜻하고 고급스럽다던 재영의 말이 떠오르자 굳이 다른 색을 쓴 이 방 안이 더욱 궁금해졌다.
“뭐하십니까?”
“아. 네.”
미닫이문을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윤 비서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 들 정도로 더딘 움직임이었다.
“아, 방이 궁금해서.”
“왜요?”
“네?”
윤 비서가 숨을 훅, 내쉬었다. 윤 비서는 바닥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셔츠 단추를 다시 여민 윤 비서가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재영과 내가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주인도 없는 집을 함부로 구경한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윤 비서를 향해 걸어갔다. 윤 비서가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도련님이 호정 씨 먼저 식사하게 도우라고 하시네요.”
부엌으로 걸어가는 윤 비서의 뒤를 따랐다. 윤 비서의 손에 들린 폰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꺼지지 않은 화면에는 ‘도련님’이라는 이름이 번쩍이고 있었다. 별다른 미동 없이 부엌으로 걸어가는 윤 비서를 보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차양이 드리워진 곳에서 미세한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앞서 걷는 윤 비서의 등을 다시 쳐다보았다.
재영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버티고 있었지만 여전히 머리는 멍청하게 재영의 생각만 하고 있던 참이었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냉큼 책을 덮고 일어나니 나보다 먼저 일어난 윤 비서가 내게 먼저 나가도 된다는 듯 손을 펼쳐 보였다. 윤 비서를 지나쳐 현관으로 달려갔다. 재영이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내 볼을 꼬집어 당겼다.
“우리 강아지. 왜 안 자고 있었어?”
“같이 밥 먹으려고.”
재영이 내 뒤에 선 윤 비서에게 눈을 맞추었다.
“호정이 밥 먼저 먹이라고 했는데.”
“내가 안 먹겠다고 했어. 너 오면 같이 먹으려고.”
“그랬어?”
재영이 내 볼을 쓰다듬으며 눈을 맞추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마음이 쓰였다.
“내가 일단 너랑 먹으려고 요리라는 걸 하긴 했거든?”
“네가?”
“아. 윤 비서님이랑 같이.”
재영이 실소를 터뜨리며 내 뒤에 선 윤 비서를 쳐다봤다. 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재영이 다시 웃으며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야. 뭘 만들긴 했어.”라고 덧붙였다. 재영은 자신의 가방을 윤 비서에게 내밀면서도 눈은 계속 나를 향했다.
“근데 진짜 뭘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어. 윤 비서님이 김치를 넣어야 맛있다고, 자꾸.”
“뭘 만들었는데?”
잠시 눈을 굴렸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윤 비서에게 이건 만둣국이라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막상 다 만들고 나니 개밥이 되었다. 요리가 끝났을 땐 윤 비서는 나를, 나는 윤 비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호정 씨가 자꾸 국자를 움직여서 만두가 다 터졌습니다.”
“윤 비서님이 김치를 포기 째로 넣었으니까 제가 계속 저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국을 저은 건 호정 씨입니다.”
“와. 진짜.”
재영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나를 품에 안고 부엌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일단 만두를 넣은 국인데 김치가 들어갔다는 건 알겠어.”
“너 진짜 요점정리 잘한다.”
우리 똑똑이, 하며 재영의 어깨에 볼을 비벼댔다. 부엌으로 가는 길에 복도 끝, 차양이 드리워진 곳을 한 번 더 보았다. 재영에게 그 방에 대해 물으면 재영은 숨기지 않고 말해줄 것이다. 재영이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은 자정을 넘어 있었다. 저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재영과 탕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 과랑 너희 과는 달라서 나보다는 네가 더 피곤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재영이 말간 볼을 올리며 미소 지었다.
“없을 거 아는데, 혹시나 내가 도울 거 있으면 말해줘.”
“그거 해줄래?”
재영이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키스만 해도 되는 거면 해주고.”
내 말에 재영은 살포시 눈동자를 올리다가 내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키스만 하고 그칠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웃으며 재영의 입술에 입술을 붙이려는데 재영이 고개를 살짝 꺾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썹을 위로 들었다. 내 눈에 담긴 물음표를 읽었는지 재영이 내 볼에 젖은 손을 올렸다. 탕에 담겨 있던 뜨거운 물이 볼을 적시고 이내 목을 타고 흘렀다.
“호정아. 전에 너한테 말 걸었던 그 외국인 말이야.”
“응? 응…….”
완전히 잊고 있던 사람이었다. 재미없는 이야기에 볼을 부풀리자 재영이 내 볼을 한 손으로 잡아 볼에 든 바람을 뺐다. 입술이 볼똑하게 튀어나왔다. 재영은 그런 내 입술을 살짝 핥았다. 키스는 하기도 전인데 벌써 몸이 찌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벗고 있는 상태라 몸의 변화가 더 적나라하게 보일 것 같아 부끄러웠다. 괜히 몸을 달싹이며 피했다. 재영이 내 어깨를 붙들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 후로 마주친 적 있어?”
“…….”
마주친 적이 있던가. 남자는 눈에 띄는 얼굴이 아니었다. 마주쳤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을 명확하게 기억하는 게 아니니 남자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집중해 볼 일도 없었다. 학교에선 수업만 듣고 집에 오기 때문에 복도에서도 누구를 자세히 보며 걷진 않았다. 그때처럼 누군가 먼저 말을 건다면 모를까,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고개를 저었더니, 재영이 표정을 굳히고 내 엉덩이를 당겨 몸을 좁혔다.
“갑자기 그 남자는 왜?”
“그냥.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한데. 잘 살겠지.”
단호하게 말했더니 재영이 또 아이처럼 해맑게 웃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떨어대며 웃던 재영이 나를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턱을 붙인 재영이 작게 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재영은 자신이 깨문 곳을 혀로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한번 궁금해 해봐.”
“음…….”
어깨에 닿는 재영의 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눈이 파란색이었다. 머리는 조금 밝은 노란색. 눈에 띌 정도의 외모도 아니었다. 내게는 그저 평범한 외국인이어서 다시 마주친다고 한들 내가 알아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재영 덕분에 그 외국인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남자를 조심해. 남자를, 조심. 남자를…….
“근데 그때 그 남자. 나한테 that guy라고 했는데.”
“응.”
“그건 한 명 말하는 거 아니야?”
내 어깨를 핥던 재영이 고개를 들어 내 입술을 물었다. 다음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내 혀를 옭아매는 재영의 혀에 반쯤 정신이 풀리고 말았다. 첨벙대는 물소리에 맞춰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에 힘을 주기 시작할 때였다. 욕실 밖으로 그림자가 졌다. 윤 비서가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재영이 내 턱을 잡아 다시 입을 맞추려 하기에 고개를 비켰다.
“왜?”
“밖에 윤 비서님 서 계신 거 같은데.”
“어.”
재영은 다시 내 턱을 돌려 혀를 밀어 넣으려 했다. 다시 고개를 비키며 재영의 손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재영이 미간을 좁혔다.
“신경 쓰여서 그래?”
“들릴 거 같은데.”
“하아.”
재영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내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읏, 소리를 내며 입술을 벌리자 그 안으로 혀가 거칠게 들어왔다. 목을 찌르듯 들어온 혀를 피하지도 못한 채 입속에서 두 혀가 엉켰다. 휘어지는 허리를 재영의 손이 단단히 붙들었다.
“들을까 신경 쓰이는 거면… 내가 윤 비서 귀 멀게 해줄까?”
“무슨 소…….”
“그거 바라는 거 아니면 됐어.”
재영이 내 뒤통수를 당겼다. 두 입술이 완전히 맞물렸다. 욕실은 금세 거칠어진 숨소리로 채워졌다. 올라가려는 허리를 재영이 한 팔로 감싸 내렸다.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나를 응시하고 있는 재영의 눈이 보였다. 재영의 어깨를 힘줘 잡았다. 재영은 더욱 짙게 나를 응시하며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줬다.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욕실이라 소리가 더 크게 울릴 것이다.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문밖에 선 윤 비서의 그림자를 향했다. 재영이 눈썹을 구기며 내 뒤통수에 있던 손을 내렸다. 뒤통수에서 내려온 재영의 손은 이제 내 눈 앞을 가렸다. 덕분에 속눈썹이 물로 흠뻑 젖어 들었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왜 너만 달라?”
재영의 목소리에 촉촉한 습기가 담겨 있었다.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물에 젖어 무거운 속눈썹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몰라. 날 보는 네가 다른가 보지.”
장난을 섞어 말했지만 괜히 부끄러워 웃고 말았다. 내 허리를 잡은 재영의 팔을 타고 근육이 각기 다른 결로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씻고 나왔을 때는 욕실 앞에 서 있던 윤 비서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재영이 타월로 몸을 닦아주는 중에도 시선은 복도 끝을 향했다. 다리를 닦고 상체로 올라와 팔과 허리의 물기를 닦아주던 재영이 내 시선을 따라 복도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너 저기 방들은 아직 구경 못 했었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재영이 먼저 했다. 고개를 끄덕이려다 이전에 재영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신경 쓰는 일이 무엇이든 그게 재영이 해결해줄 수 있는 범위의 일이라던 말을 떠올리며 내 몸을 닦아주는 재영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정말 이상한 일인가. 재영의 팔을 주물러대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저긴 뭐하는 곳이야? 조명이 다르던데.”
“궁금했구나. 근데 이제 저기 못 들어가는데.”
“왜?”
재영이 난감한 표정으로 제 볼을 긁었다. 날이 선 손톱이 재영의 볼을 스치며 붉은 선 몇 줄이 그어졌다.
“윤 비서 오면서 저 방은 윤 비서가 쓰기로 했거든.”
“아…….”
그래서 아까 윤 비서님이 싫어했구나. 방이 궁금하다는 말에 대뜸 왜냐고 묻던 윤 비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 방을 윤 비서가 쓴다는 걸 알게 되니 어색하던 모든 순간들이 이해됐다. 다급히 다가와 내가 방 앞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관찰하던 윤 비서의 얼굴을 떠올리자 허탈함에 웃음이 났다. 재영은 내가 웃자 나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왜 웃는 거야?”
“아… 아까 저기 앞에 서 있으니까 윤 비서님이 뭐하냐고 묻던 게 생각나서. 그 사람 놀란 표정도 그런 거라는 게 좀 웃겨. 표정이 전혀 없어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던데.”
“그래?”
재영은 내 머리 위에 수건을 올렸다. 시야가 가려졌다. 머리에 올려진 수건을 쥐고 물기를 털어내는 사이 재영이 내 팔을 하나씩 순서대로 끌어 잠옷을 입혀주었다. 별채가 불타고도 재영은 이전과 같은 흰색 잠옷을 똑같이 주문했다. 세상에 없는 옷. 오직 재영만 살 수 있는 옷. 두 사이즈로만 제작되어 나오는 이 옷 중 작은 사이즈는 모두 내 것이 되었다. 10벌이 넘는 잠옷을 반은 우리 집에, 반은 재영의 집에 나눠 두었다. 이제 나도 이 잠옷을 입는 게 마음이 편했다. 이런 것에 이상하리만치 강박증이 있는 재영을 떠올리며 머리의 물기를 마저 닦았다.
“이 집 열쇠 줄게. 나 이제 자주 늦으니까 여기에서 쉬어. 집 와서 너 안고 자고 싶어. 윤 비서 방에만 안 들어가면 돼.”
“으응.”
눈을 감고 떨어지는 물을 느끼는 사이 재영이 내 발목을 들었다. 곧 잠옷 바지도 마저 입혀졌다.
“나도 그래?”
“응? 넌 우리 집 열쇠 이미 가지고 있잖아.”
머리에 씌어있던 수건이 재영의 손으로 옮겨졌다. 느리게 눈을 떴더니 재영이 미소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거 말고.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어?”
“왜? 무슨 생각 중인데?”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앞에 선 재영의 얼굴이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시선에 몇 개로 나뉘고 겹쳐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재영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든 시야에도 재영을 찾고 싶어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머리를 말려주던 재영의 손이 천천히 사그라지더니 곧 멈췄다. 젖은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눌러 시야를 분명하게 했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재영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요즘 들어 자꾸 마음에 이유 없는 파동이 번졌었다. 시작이 어디인지 떠올리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내려졌다. 시발점은 바드가 내 손바닥에 그어놓은 글자들이었다. 재영이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천천히 내렸다.
“얼른 침대로 가서 지금 내가 입힌 걸 다시 내가 벗기고 싶다는 생각.”
“미쳤어?”
“가자. 윤 비서 자고 있을 거야.”
재영이 가리킨 복도 끝을 다시 보았다. 윤 비서의 방이라는 곳에선 여전히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복도의 끝, 차양으로 가려진 곳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으로 내려오고도 끌릴 만큼 길게 내려진 검은 차양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이유 모를 섬뜩한 느낌에 재영에게 손을 뻗어 안겼다. 재영은 마치 아이를 다독이듯 내 등을 쓰다듬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마저 말려주었다.
재영의 베개에 볼을 바짝 붙여 누웠다. 침대 옆에 큰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본 재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택배는 나에게만 아니라 재영에게도 기쁜 거라고 생각하니 재영이 나와 제법 비슷한 인간 같이 느껴졌다.
상자 앞에 앉은 재영의 옆에 몸을 작게 해 쭈그려 앉았다. 재영은 택배 상자를 뜯어 그 안에 들어 있는 병풍을 꺼냈다. 접혀있던 병풍이 재영의 손을 따라 벽에 길게 펼쳐졌다. 은은하게 벽을 타고 새어 나오던 빛이 펼친 병풍에 반 이상 가려졌다. 병풍 뒤로 조명이 노을처럼 번졌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멍하니 걸음을 옮겨 그림 앞에 섰다.
짙은 녹음이 드리워진 다섯 개의 봉우리와 그 앞을 양옆에서 호위하듯 곧게 선 소나무. 물결은 산에 부는 바람의 흐름 같다가도 자세히 보면 바다를 가르는 파도 같기도 했다. 일렬로 선 다섯 봉우리 위에 흰색 동그라미와 붉은 동그라미가 떠 있었다. 두 구는 선명한 색으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일월오봉도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고.”
재영이 내 어깨에 볼을 붙이며 속삭였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조차 산수화라는 게 참 재영다웠다.
“나 이거 사극에서 봤던 것 같긴 한데.”
일월오봉도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 혹시나 비싼 그림이면 어쩌나 싶어 다급히 손끝을 오므렸다. 재영은 그런 내 손을 잡아 하얀 동그라미 위에 올렸다. 꾸덕하게 발렸을 마른 물감의 굴곡이 촉감으로 전해졌다.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만져도 되는 거야?”
“응. 이게 너니까.”
“이게 뭔데?”
“달.”
재영이 창밖에 떠오른 실제 달을 향해 턱짓했다. 통창으로 스미는 달빛과 눈앞에 그려진 하얀 동그라미가 같은 존재라는 게 신기했다. 그 옆에 달과 같은 위치에 그려진 붉은 동그라미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붉은 건 해야?”
“응.”
“그럼 저건 너 해.”
재영이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네가 허락해주는 거야?”
“응.”
어깨에 닿아있던 재영의 볼이 멀어졌다. 등 뒤에 병풍을 두고 뒤돌았다. 재영은 나를 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나와 병풍을 동시에 찬찬히 살피던 재영이 마침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도 재영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호정아. 원래 이 그림에는 저 해랑 달이 없었대.”
“그럼 누가 그렸는데?”
“‘오봉도’에 해와 달의 의미가 필요했던 사람이.”
또 어려운 이야기였다. 반쯤 시무룩해진 얼굴로 재영의 품에 안기자 재영이 침대로 나를 품고 가 눕혔다. 재영은 내 이마에서부터 코를 타고 내려와 모든 살마다 입을 맞추었다. 오므려지는 무릎 사이를 재영의 허벅지가 지그시 누르며 파고들었다.
“해와 달은 동시에 뜰 수가 없는데, 저 그림에는 같이 떠 있잖아. 왜 그 사람한테는 저 두 개가 같이 떠 있어야 했을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사극에서 왕 뒤에 꼭 저 그림이 있던데.”
간지러움에 푸스스 웃으며 간신히 말했더니 재영이 내 목에 닿아있던 입술을 떼고 느리게 내 볼을 쓰다듬었다.
“조선을 건국할 때, 왕이 직접 지시해 오봉도에 해와 달을 그렸대. 천하를 아우르는 존재가 대계 아래 있고, 그게 자신임을 알려야 했으니까. 직관적인 해와 달은 아닌 거야.”
볼을 완전히 감싸고 주무르던 손이 곧 목과 뒷덜미로 옮겨졌다.
“진짜 의미는 그렇게 다들 감추니까. 그러니까 이게 왜 이렇지? 이상하다, 싶은 것들에는 꼭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거야.”
“어려워.”
재영이 키득대며 내 볼에 코를 비볐다. “우리 호정이. 아직도 어렵구나.”라는 말소리에 묻은 숨이 볼을 간지럽혔다.
“나도 너처럼 똑똑하고 싶어.”
칭얼대듯 말하고 재영에게서 몸을 뗐다. 재영과 나 사이에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재영의 눈을 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걱정과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곧 해결될 거라는 희망으로 변할 수 있었다.
“넌 나처럼 생각하지 않잖아. 좀 더 똑똑하고 현명하게 생각할 거잖아.”
“무슨 걱정이라도 생겼어?”
재영의 손이 내 볼을 더듬었다. 큰 손에 볼을 기대고 눈을 깜박거렸다.
“내 생각은 직선이라고 했었잖아. 난 필요하면 가져. 필요가 없으면 버리는 거고. 내가 너보다 더 단순하게 생각하고 살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나보다 더 복잡하고 똑똑하게 살아가는 걸 수도 있지.”
“그럼 난 네가 가지고 싶으니까, 네가 필요한 거네.”
장난치듯 웃으며 한 말에 재영이 내내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볼에 닿아있던 손이 멀어지고 다시 재영의 입술이 맞물렸다. “나도 아직은 그래.”라고 말하는 재영의 목소리가 입속에서 진동으로 번져 전해졌다.
* * *
3주의 짧은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바드는 학교로 돌아왔다. 다행히 얼굴에 났던 상처와 멍은 많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다쳤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오히려 이전보다 기운이 더 좋아진 느낌도 들었다. 나를 보는 바드의 눈에 총기가 돌았다. 학교로 돌아온 바드는 이전처럼 내 옆에 앉아 졸지 않았다. 교수가 하는 말을 띄엄띄엄 쓰기도 했고, 자신이 오지 않은 동안 과제가 있었는지 묻기도 했다.
“너 좀 변한 거 같아.”
“내가?”
바드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보다가 다시 아이처럼 까르륵 소리까지 내 웃어댔다.
“방학 때 그랜마 보러 갈 거거든. 그래서 기분 좋아.”
바드의 웃음소리가 워낙 컸다. 그렇지 않아도 소리가 울리는 복도에서 바드의 웃음은 유독 높은 소리를 내며 복도를 울렸다. 우리 옆을 지나는 몇몇 아이들이 흘깃대며 보는데도 바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들이 상처 난 얼굴을 못생겼다고 할까 봐 학교도 오지 않을 정도로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는 사람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오히려 타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첫날부터 내게 과할 정도로 친밀하게 말을 걸던 바드가 떠올랐다. 내가 불편한 기색을 보여도 물러서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걸던 모습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불과 몇 달 전인데 까마득한 옛날이라도 된 것 같았다.
“루마니아 갔다 오게?”
“응. 그랜마 보고 기운 내야지. 이제 이 학기도 끝났고.”
바드는 마치 근육 자랑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머리 옆에 팔을 올리고 흔들어댔다.
“여름에 가지. 그때 방학이 제일 길잖아.”
“아냐. 얼른 돌아가고 싶어.”
그날 바드의 동네에서 바드가 했던 말에 대해서는 더 묻지 못했다. 괜히 도청이라는 말을 들은 후로는 나도 말을 할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분명 평소에도 장난기 많았던 바드가 나를 놀리려고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계속 그 단어가 머리를 맴돌았다. 그날 이후로 혼자 있을 때도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바드와 있으니 더욱 말을 조심하게 됐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니 바드가 내 한쪽 어깨를 꽉 잡았다.
“응?”
고개를 들었다. 바드가 빙긋이 미소 짓더니 내 나머지 어깨도 지그시 움켜쥐었다. 바드의 얼굴을 하나하나 나눠 보았다. 화려한 머리 색만큼이나 얼굴도 화려한 편에 속했다. 속쌍꺼풀이 있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바드가 입을 뻐금거렸다. 눈을 찌푸리며 입술에 집중했다.
‘폰.’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할게.’
바드의 눈을 올려다보고 다시 입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바드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 나도 입을 다물었다.
‘…….’
“응?”
고개를 살짝 저었다. 문장이 길어서 제대로 입 모양을 읽지 못했다. 내 어깨를 쥔 바드의 손에 좀 전보다 더 힘이 들었다.
“호정아. 우리 커피 마실까?”
“…어.”
“내가 살게. 마지막이니까.”
“마지막?”
내 어깨를 쥐고 있던 바드가 손을 내렸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바드는 “아, 방학 전 마지막.”이라며 말을 붙였지만 아무리 봐도 표정부터 어색하지 않은 구석이 하나 없었다. 카페에 가면서도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바드가 사 온 커피를 마시며 바드의 눈치를 살폈다. 뜨거운 커피에선 연신 흰 연기가 올랐다.
바드는 다시 도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궁금해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가방을 뒤적여 노트와 볼펜을 꺼내 바드 앞에 내밀었다.
“공부하려고?”
“아니. 오목 알아? 한국 사람은 심심할 때 다 이거 해.”
“알지. 그거 루마니아도 하는데?”
바드는 내가 준 볼펜을 쥐고 방긋 웃었다. 담배 한 개비만 피워도 되겠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드가 담배에 불을 지피는 사이, 노트에 그날 바드가 적은 단어들을 띄엄띄엄 써넣었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고 웃으며 노트를 보던 바드가 표정을 굳히고 나와 노트를 번갈아 보았다.
‘내 폰. 도청. 재영. 다 무슨 말이야? 그냥 장난쳤던 거야?’
바드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뺐다. 커피 위로 올라오던 연기보다 조금 더 뽀얀 연기가 바드의 입에서 구름처럼 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바드는 마른 입술을 적시고 주변을 살폈다. 볼펜을 손에서 굴린 바드가 내 노트를 가져가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전처럼 받침과 글자 몇 개는 틀렸지만 문장으로 보면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네 폰, 재영이 도청하고 있어. 몰랐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드가 노트에 적은 글자를 보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뭘 봤어?’
다급히 노트에 글자를 쓰고 바드에게 내밀었다. 바드는 입술 끝에 담배를 문 채로 노트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다급히 쓴 탓에 날리는 글씨였다. 바드가 쓴 단어들, 문장을 몇 번이나 보고 또 보았다.
‘파티에서 재영이 통화하는 걸 들었어. 거기에 한국말 아는 건 나뿐이니까.’
아무리 봐도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었다. 왜, 라는 질문이 오르다가도 이게 진짜일까, 하는 의구심이. 그러다가 다시 왜,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바드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테라스 바닥에 비벼 껐다. 파티라는 말에 얼마 전 재영이 물었던 외국인 남자가 떠올랐다. 바드라면 인맥이 넓으니 그 남자에 대해서도 알 것 같았다. 노트에 파란색 눈을 한, 노란 머리의 외국인을 적었다. 적으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생기지 않은 외국인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이 외국인이 나한테 파티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남자를 조심하라고 했어.’
바드가 미간을 좁히더니 내가 내민 노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드는 나를 잠시 올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저으며 노트를 돌려주려던 바드가 다시 노트를 가져갔다.
‘그런 애들은 신경 쓰지 마. 그 파티에 제정신인 애들 거의 없어.’
노트에 적힌 문장을 읽는 사이, 바드가 다시 내 노트를 가져갔다.
‘너희 집은 살펴봤어?’
바드가 추가한 글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입 모양으로 ‘집?’하고 되물었더니, 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글자를 쓰는 손이 좀 전보다 확연히 빨라졌다.
‘집도 살펴봐. 재영이 너무 믿지 말고.’
바드가 쓴 글씨들을 오래 쳐다봤다. 바드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바드 역시 글씨를 보는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린 바드가 다시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냈다. 입에 새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는 모습을 쳐다보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졌다.
“호정아.”
“아. 어.”
어색하게 노트를 덮고 바드를 응시했다. 바드의 입에 물린 담배와 그 위로 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바드는 중요한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잠시 망설이다 내가 덮은 노트를 가져갔다. 다시 볼펜을 쥐고 글자를 쓰려던 바드는 한동안 망설이다 펜을 내렸다.
영문을 몰라 바드의 얼굴만 보고 있자니 곧 바드가 미소 띤 얼굴로 내 품에 볼펜과 노트를 돌려주었다.
“호정아.”
“어. 왜?”
진지한 바드의 얼굴이 어색해 옅은 웃음이 났다. 바드는 웃는 나를 보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미안해. 이건 그냥 말로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진짜, 진짜로 미안해.”
평소와 달리 너무나 또렷하고 분명해진 한국어 발음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드가 낮게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짙게 빨아들였다. 하늘로 오르는 담배 연기가 더 깊고 진해졌다.
재영이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은 있었다. 다만, 내게 말하는 바드의 표정 또한 본 적 없이 진중해 단순히 장난으로만 치부하긴 어려웠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을 구성하고 있는 가구부터 가전, 옷 하나까지도 재영의 손이 닿지 않은 건 없었다. 생각해보면 재영은 모두 나를 위해서, 다리를 다쳤던 나를 대신해 자신이 직접 시간 내 준비해준 것인데. 바드의 말 하나에 재영의 호의를 의심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죄책감이 들었다.
“하아… 미치겠네.”
벌써 시간은 저녁에 가까워 있었다. 재영은 오늘도 시험 준비로 늦을 거라 했다. 창가로 가 재영의 집을 확인했다. 불 꺼진 집이 보였다. 집엔 윤 비서도 없는 듯 보였다. 가방에서 재영이 준 열쇠를 꺼내 쥐었다. 재영의 집이라면 뭔가 알만한 게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보았다. 폰을 소파 사이에 끼웠다. 재영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죄책감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부엌으로 가 물을 마셨지만 그래도 여전히 목은 따갑고 입술을 마르게 하는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바드의 말이 다 사실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런데도 만약 폰도, 이 집도, 재영이 정말 나를 도청하고 있는 거라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궁금했다. 복잡한 머리를 세게 비볐다가 주먹을 쥐고 때려보기도 했다. 이렇게 멍청하니 내가 아는 선에선 그 어느 것도 답이 아닌 게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재영이 정말 나를 도청하고 있는 거라면. 그나마 내가 생각한 가장 합리적인 이유는 ‘범죄가 많은 도시니까, 나를 걱정해서.’가 전부였다.
‘집도 살펴봐. 재영이 너무 믿지 말고.’
바드가 쓴 말을 곱씹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창가를 향해 있던 소파를 끌어 창을 등지게 옮겼다. TV 아래, 선반 곳곳을 훑어보기도 했다. 특별한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재영이 준 것들, 모두 재영이 사고 재영이 놓아둔 것들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특이한 점도 없었다.
맥이 풀리는 기분으로 소파 사이에 넣어두었던 폰을 꺼내려 할 때쯤이었다. 아래층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소파에 폰을 두고 아래로 내려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세졌다. 우리 집에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막상 현관문을 여니 그 앞에 윤 비서가 멀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윤 비서님. 왜……?”
“네?”
찾아온 건 자신이면서 윤 비서는 도리어 나를 의아한 눈길로 내려 보았다.
“왜 찾아오셨나 해서.”
윤 비서는 그제야 낮게 “아…….” 소리를 내며 무턱대고 현관 사이로 발을 들이밀며 들어왔다.
“우산을 아직도 안 주셨던데.”
“네?”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요.”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우산꽂이에 꽂힌 윤 비서의 큰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윤 비서가 던지고 간 우산을 돌려줘야지 생각만 하고 여태 돌려주지 못했다. 우산꽂이로 가 우산을 꺼내주려는데 윤 비서가 그 틈에 우리 집 안으로 불쑥 몸을 들였다.
“밥 주실 수 있죠?”
“네?”
내가 되묻자 윤 비서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밀치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꽂이에서 꺼낸 우산을 다시 카펫 위에 두고 계단을 오르는 윤 비서를 벙찐 얼굴로 쳐다봤다.
“배고파서요.”
“뭐… 갑자기요?”
윤 비서는 성큼성큼 한 번에 두 계단씩을 밟으며 올라갔다. 윤 비서가 언제 우리 집에 와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윤 비서는 2층으로 올라가는 데 거침이 없었다. 소파에 자신의 서류 가방을 던지듯 놓더니 나보다 먼저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뒤적였다.
“아주머니가 해주신 반찬이 좀 있긴 한데.”
윤 비서의 뒤에 서서 나도 냉장고 안을 기웃거렸다. 내 말에 윤 비서는 냉장고를 뒤지던 손을 멈추었다.
“저기서 앉아 기다리세요. 드릴 테니까.”
“네. 호정 씨가 만든 게 아니라니 다 괜찮습니다.”
“무슨. 그럼 저한테 와서 밥은 왜 달라고 하시는데요.”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윤 비서는 테이블에 손을 올려 턱을 괴었다. 집을 살펴보는 모습에 다른 곳도 원한다면 구경해도 된다고 했더니 윤 비서는 그제야 피식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를 보던 눈은 곧 다시 거실로, 내 뒤의 부엌으로 옮겨졌다.
“구경시켜드려요?”
“아니요. 소파가 원래 저 위치였나요?”
소파는 내가 대충 끌어놓은 탓에 창 앞에 엉성히 기울어져 놓인 채였다. 볼을 긁으며 반찬을 꺼내 접시에 담았다. 밥 한 공기를 덜어 테이블에 올려놓는 중에도 윤 비서는 전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눈은 여전히 느긋하게 거실과 부엌, 복도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없으신가 봐요?”
윤 비서의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윤 비서는 내가 내민 반찬을 한 번 훑어보고는 한숨과 함께 젓가락을 들었다. 대답을 할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실망할 것도 없었다. 윤 비서는 표정만큼이나 밥조차 밋밋하고 맛없게 먹는 재주가 있었다. 덩치는 재영보다도 큰 사람이 젓가락으로 새 모이만큼 덜어 깨작거리는 걸 보다 부엌으로 가 물을 따라왔다.
“일하는 중입니다.”
밥알을 하나하나 젓가락으로 나누던 윤 비서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윤 비서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래 응시하는 건 처음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공허하고 탁한 눈에 잠시 빛이 일렁이다가 곧바로 소강했다. 윤 비서의 눈에 들어있는 내 모습이 생소할 정도로 윤 비서의 눈은 힘이 없었다. 탁한 눈 밑도 마찬가지였다. 물잔을 윤 비서 앞에 내밀었다.
“물 좀 드세요.”
“네.”
윤 비서는 내가 내민 물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잔을 내게 내밀었다. 더 마시겠냐고 물으니 윤 비서는 마치 자신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처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 차가운 물이 쏟아지자 잔의 외벽으로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물을 마저 따르고 다시 테이블에 가 앉았다. 윤 비서와 대화하면 어느 것도 핀트가 맞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없는 표정도 문제지만 말투도 딱딱하기만 해서 벽에 대고 혼자 구시렁구시렁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대화다울 것 같았다.
“밥 먹고 바로 가실 거죠? 저 이제 쉴 건데.”
“네.”
윤 비서는 내가 내민 물을 또 비우더니 여전히 밥알 위를 젓가락으로 툭툭 밀어내기만 했다. 밥알 하나하나를 골라내는 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윤 비서는 밥이 아닌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심심하세요? 다 드시고 TV라도 보실래요?”
“네.”
“진심이세요?”
“네.”
오늘은 “네.”만 하는 날인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에 가 TV를 켜고 내가 엉망으로 옮겨놓은 소파와 카펫을 둘러보았다.
“TV 방향이 소파와 반대네요.”
좀 전 소파 위치를 묻던 게 생각나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좀 심심해서 옮겨봤는데… 시간 되시면 나중에 이거 같이 정리해주실 수 있어요?”
“네.”
나를 보지도 않고 답하는 윤 비서를 보다 소파에 몸을 기대 누웠다. “밥 다 드시면 말하세요.”라고 말하자 윤 비서는 또다시 “네.”라는 기계적인 답만 했다. 몸 어딘가에 녹음된 문구만 버튼에 따라 뱉어내는 사람인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소파 등을 보고 누워 눈을 감았다. 바드가 했던 말, 바드가 노트에 쓴 글만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지겨운 편두통이 다시 나를 찾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려다 재영이 챙겨둔 상비약 중 하나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모든 것, 가구, 옷, 향수. 심지어 내가 아플 때 먹는 약까지.
‘의심해줘. 네 주변 모두를.’
처음 재영과 몸을 섞던 그 날, 아득한 정신에 잊혔던 재영의 말이 왜 지금에서야 새삼스레 선명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심… 왜 내가 주변인을 의심해야만 하지. 왜 재영은 그 순간 내게 믿음이 아닌 의심을 바랐을까. 보통 그런 순간에는 더 깊은 믿음을 주길, 신뢰가 쌓이길 바라는 게 더 옳지 않나.
재영이라면, 나보다 똑똑한 재영이라면. 지금 내가 재영이라면 어떻게 이 의심을 지우려고 할까.
소파에 두었던 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소파 아래로 윤 비서의 가방을 내리는 척하며 그 안에 내 폰을 넣었다.
“윤 비서님. 폰 가져오셨어요?”
“네.”
“어디 있어요?”
윤 비서가 테이블 위에 자신의 폰을 올렸다. 윤 비서 쪽을 보지 않은 채로 상비약이 든 통을 뒤져 두통에 먹을 수 있는 약을 꺼냈다. 윤 비서의 앞으로 가 물을 약과 함께 들이켰다. 밥알을 젓가락으로 들추던 윤 비서가 내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바드가 말한 도청 장치는 내 폰이 아니라 저 윤 비서인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윤 비서는 집요한 시선으로 내 움직임을 따랐다.
“윤 비서님은 재영이 개인비서 맞죠?”
“네.”
“그럼 재영이가 시키는 일만 하는 건가요?”
잠시 말을 멈춘 윤 비서가 테이블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탁, 떨어지는 쇳소리가 컸다. 윤 비서는 몸을 의자 뒤로 기대고 고개를 들었다. 대각선으로 꺾어진 고개와 눈빛에는 짜증이 그득해 보였다.
“네.”
“그럼 여기 온 것도 재영이가 시킨 거겠네요.”
“그게 왜 궁금하시죠?”
윤 비서 앞에 놓인 밥그릇을 눈으로 가리켰다. 윤 비서는 내 시선을 따라 밥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처음으로 윤 비서의 눈에 검고 선명한 빚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게 느껴졌다.
“배고파서 오신 거 아닌 거 같아서요.”
“배. 고팠습니다. 분명히.”
윤 비서가 자신의 목을 한 바퀴 느리게 돌렸다.
“지금 하나도 안 드셨잖아요.”
“분명 배고팠다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실룩거리던 윤 비서의 볼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짜증 난 표정이 적나라했다. 감정을 가릴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윤 비서는 볼을 일그러뜨려 달싹거렸다. 어린아이처럼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윤 비서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제가… 하아. 씨…….”
윤 비서가 턱을 비틀며 인상을 구겼다.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윤 비서의 폰을 응시했다. 윤 비서의 가방에 넣은 내 폰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윤 비서의 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윤 비서의 손에 균열이 일었다. 상처로 가득한 손이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걸까. 배가 안 고픈데 왜 왔냐고 묻는 것에 왜 저렇게까지. 질문은 이어졌지만 답은 없었다. 답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괜히 머리만 더 지끈거렸다.
아득아득 이를 문 윤 비서가 다시 고개를 돌리는 걸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테이블로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윤 비서는 정장 바지의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먹으려다 주먹으로 사탕을 꼭 쥐었다. 주먹 쥔 손이 다시 테이블을 박자에 맞춰 치기 시작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윤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폰을 쥐었다.
[도련님]
윤 비서의 폰에 뜬 재영의 번호가 보였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여차하면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문 탓에 볼이며 얼굴이 제멋대로 구겨졌다. 윤 비서를 쳐다보았다. 윤 비서는 손을 뻗어 자신의 폰을 쥐었다. 그저 전화를 받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한 듯 보였다.
“네. 도련님. 네. 지금 호정 씨 집입니다. 네. 한국대는 내일… 그쪽에서 연락해주기로 했습니다.”
윤 비서는 재차 나를 살피며 폰을 반대편으로 옮겼다. 언제나 이런 타이밍, 이런 적절한 순간에 재영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폰뿐만 아니라 이 집 어딘가에도 나를 도청하는 장치가 정말 있는 걸까.
나를 비켜 거실로 간 윤 비서가 창틀에 기대 전화를 받았다. 흘끔대며 나를 몇 번 보던 윤 비서는 언제나 그랬듯 재영에게 “네.”만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윤 비서가 나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던 볼도, 묘하게 틀어졌던 고개도 원래대로 반듯하게 돌아왔다. 평소의 무감정한 얼굴로 돌아온 윤 비서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호정 씨 덕분에 식사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파는 지금 원위치로 돌려놓겠습니다.”
“…네.”
윤 비서가 소파 아래 놓인 자신의 가방을 들어 거실 끝으로 가방을 옮겼다. 윤 비서는 양손으로 소파의 가운데를 잡아끌었다. 미처 함께 잡을 새도 없이 소파는 금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윤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가 창가를 보게 놓았다. 무릎을 살짝 굽혀 비뚤어진 곳이 있나 살피기까지 하더니 마음에 든 듯 이내 소파 헤드를 툭툭 다듬었다.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들어 남은 물을 마저 삼켰다. 누군가를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이 버티기 힘들었다. 내가 의심하는 모든 게 그저 허무맹랑한 망상이길 바라며 윤 비서를 다시 불렀다. 막 가방을 들고 거실을 나가려던 윤 비서가 뒤돌아 날 쳐다봤다.
“잠시 폰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 휴대폰이 안 보여요. 버스에서 잃어버린 거 같은데… 재영이한테 연락해주려고요.”
윤 비서의 눈썹이 비틀리긴 했지만 그는 곧 체념한 듯 날 쳐다봤다. 윤 비서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폰을 꺼내 재영에게 전화를 걸어 내밀었다. 가슴팍 바로 앞까지 내밀어진 폰을 옮겨 받아 귀에 붙였다.
-또 뭔데요.
“재영아.”
재영의 목소리가 굳었다. 윤 비서를 대하는 재영의 목소리가 한없이 어색했다. 재영에게서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였다. 의아한 마음으로 재영의 이름을 불렀다.
-아, 호정이네.
재영이 어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폰을 잃어버린 거 같은데, 너 걱정할까 봐, 윤 비서님 폰 빌렸어.”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머뭇대며 고개를 들었다. 윤 비서는 팔짱 낀 채 벽에 기대있었다. 시선만은 올곧게 나를 향해 있었다.
“버스 같긴 한데… 잘은 모르겠어.”
-그래. 내일 같이 사러 가자.
“…응.”
전화를 끊고 윤 비서에게 폰을 내밀었다. 낚아채듯 폰을 가져간 윤 비서는 다시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윤 비서를 따라 인사하고 고개를 들었다. 윤 비서는 내 인사는 받지도 않고 이미 계단을 반 이상 내려가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우산을 챙기는 소리, 구두로 카펫을 짓이기는 소리, 다급하게 현관문을 여는 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귀에선 여전히 다정하기만 한 재영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는 듯했다. 꼭 전화하겠다던 바드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속을 들쑤셨다. 둘 중 어느 쪽. 더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쪽이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누군가 내 눈앞에 대놓고 정답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가로 가 맞은편 재영의 집 앞에 선 윤 비서를 바라봤다. 주머니에 넣어둔 재영의 집 열쇠를 꺼내 창틀에 놓았다. 집 앞에 선 윤 비서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그날처럼 창가에 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피하지 않았다. 윤 비서 역시 창문 뒤의 내가 보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올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재영은 늦은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깜박 잠이 든 사이였다. 침대에 어지럽게 둔 노트와 전공 서적, 볼펜을 하나하나 정돈하는 소리에 눈을 뜨니 재영이 책상 위로 내 물건들을 옮기는 중이었다.
“왔어?”
“우리 호정이. 기특하네. 공부하다 잔 거야?”
“미안. 너 기다리는 동안만 하려고 했는데, 잠들었나 봐.”
재영은 책상 위에 내 물건들을 정리해 내려놓고 침대로 다가왔다. 베개와 내 볼 사이로 재영의 차가운 손이 들어왔다. 재영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재영의 손바닥에 볼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언제나 그랬듯 재영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재영의 손과 향을 따라 편안함이 전해졌다. 재영은 내 볼을 감싸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이마를 짚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눈을 덮었다. 눈을 덮은 재영의 손을 끌어당겨 팔로 안듯이 잡았다. 재영이 미소 짓는 게 느껴졌다.
“재영아…….”
“응.”
“오늘. 오늘 말이야. 네가 너무… 네가 너무 보고 싶은 거 있지…….”
“우리 애기, 왜 오늘따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을까?”
웃음이 났다. 그러게. 그렇게 같이 있었는데 왜 자꾸 네 생각만 났을까.
“그러니… 까.”
재영의 손이 잠옷 안으로 들어와 가슴 아래를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에 흠칫 놀라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재영은 이미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입술을 물려 하고 있었다.
“학교에 너 없으니까 입맛이 없더라.”
“아무것도 안 먹고 왔어?”
재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재영의 볼을 감싸 어루만졌다.
“뭐라도 먹을래? 밥도 좀 있을 텐데.”
재영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풀리는 단추를 보는 내 눈을 가린 재영의 손이 차츰 아래로 내려왔다. 이불 속으로 들어온 손을 따라 차가운 공기도 따라 들어왔다. 온몸을 타고 소름이 연하게 돋았다. “추워.”라고 하는 내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재영은 잠옷 바지 뒤로 손을 넣어 무방비하게 있던 둔부를 세게 움켜쥐었다.
“하루 종일 먹고 싶던 건 너 하나였는데?”
“아, 제발 좀.”
기겁을 하며 발로 재영의 허벅지를 툭 밀어냈다. 웃음이 났다. 밀리긴커녕 오히려 나처럼 웃음만 흘린 재영이 더 세게 엉덩이를 잡아 둔부 아래 바지가 걸쳐지게 내렸다.
“진짠데. 너 보니까 입맛이 돌아.”
웃으며 재영의 팔을 당겼다. 침대 위로 올라온 재영이 나머지 셔츠의 단추도 푸는 걸 지켜보았다. 내내 불안하던 마음이 재영을 보는 순간 별일 아닌 것처럼 풀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불안했다. 불안하게 떨리는 내 눈을 보면서도 재영은 그저 미소 짓기만 했다. 느리게 입술을 물던 재영이 내 몸을 돌렸다. 자연스레 침대 시트에 볼이 붙였다.
“예쁜 얼굴 다칠라.”
재영이 베개를 끌어와 내 얼굴 아래 놓았다. 재영은 상체를 숙여 내 턱을 잡아 돌렸다. 입술이 완전히 밀착해 붙었다. 불편한 자세로 서로 다른 살성의 혀가 얽히는 느낌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점액질의 끈적지근함과 미처 삼켜지지 못하고 입술 새로 흘러넘친 진득한 타액. 그 타액이 볼을 적시고 뚝뚝 흘러 베개를 적시는 느낌까지. 모두 종일 초조하던 나를 어르고 달래는 것들이었다.
벗겨진 곳이라곤 오직 뒤쪽뿐인 상황에서 앞으로 상체가 쏠리며 배의 윗부분까지 밀려온 티. 그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의 감촉까지도. 이어질 상황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짝 얼어붙은 쇄골이 주는 얼얼한 통증에서도 이유 모를 편안함이 들었다.
익숙한 쾌감이 찾아올 걸 아는 듯이 몸이 먼저 느리게 힘을 풀기 시작했다. 치열을 지나 동그란 선으로 만들어진 아치의 입천장을 훑는 재영의 혀를 더 강하게 빨아 당겼다. 불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재영에 대한 갈망이 더 진해졌다. 이 행위가 오늘 하루 나를 괴롭히던 두통과 혼란을 잠재워 주길 기대했다.
“전에 준 거 어디 뒀어?”
재영이 내 볼을 검지로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베개에 볼을 바짝 붙인 채로 침대 옆 탁상을 가리켰다. 재영이 상체를 좀 더 깊게 숙여 탁상 서랍을 열었다. 재영이 줬던 젤과 콘돔이 그 안에 있었다.
재영은 한 손에 젤을 잔뜩 짜 손을 쥐었다 폈다. 손에서 넘친 젤이 엉덩이와 척추로 투둑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차… 차가워.”
“우리 호정이. 감기 걸리면 안 되지.”
재영은 떨어진 젤을 팔로 닦아 자신의 손에 묻혔다. 차가운 젤이 발린 재영의 손이 그대로 뒤를 파고들었다.
“흐응.”
아프지는 않았다. 찐득한 손가락이 내벽을 찌르는 데도 아픔보다는 찌릿하게 울리는 간지러움에 먼저 눈을 감고 거칠어지는 숨을 다듬었다. 시트를 딛고 있던 무릎이 무너질 듯 후들거렸다. 버티는 힘이 약해지며 허벅지의 근육이 풀어질 때쯤이었다. 재영이 내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저릿한 아픔에 고개를 돌려 재영을 쳐다봤다. 허벅지로 젤이 뭉근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 높게 들어. 다 흘리잖아. 응?”
“그, 그냥 넣으… 그냥 넣으면 안 돼?”
재영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내 턱을 잡아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우리 애기… 편식하면 안 되지요.”
“흐응, 으읏……. 응.”
무릎을 끌어 다시 허벅지에 힘을 줬다. 가까스로 엉덩이에 힘을 줘 세웠다. 재영은 젤을 들어 내 엉덩이골을 따라 젤을 흘리기 시작했다. 재영의 손이 내 뒷구멍의 촘촘한 근육을 풀어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타원을 그리는 손가락에도 차가운 촉감에 근육이 더 풀리지 않았다.
“호정아. 여기 움직여봐.”
“어, 어떻게?”
황급히 오므라지는 뒷구멍을 보던 재영이 뿌듯한 얼굴로 내 볼을 잡아 촉촉,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지금처럼.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나도 흘리지 말고 먹자.”
“몰라……. 느낌 이상해.”
“많이 먹어야지. 그래야 안 아프고 잘 크지. 맞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재영이 말해준 대로 뒤의 힘을 풀었다가 주길 반복했다. 뻐금대는 뒷구멍을 따라 끈적한 젤은 내벽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재영은 다시 제 손이 넘치게 젤을 짜 발랐다. 뒤로 들어오는 손가락이 좀 전보다 느슨하고 차분해졌다.
“자꾸 아빠 것만 달라고 하면 어떡해. 골고루 먹어야지.”
“아빠는 무… 흐응, 무슨.”
느슨하게 안을 누르던 손가락이 빠짐과 동시에 재영의 아래가 들이닥쳤다. 턱이 빠질 듯 억, 소리를 내며 베개에 그대로 볼이 쓸리고 밀렸다. 까끌까끌하게 돋아난 음모와 성기의 뿌리가 엉덩이 사이로 그대로 박혀 들며 비벼졌다. 살과 성기가 교차할 때마다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다듬어지지 않은 교성이 터졌다. 얼굴이 그대로 베개에 박혔다.
“소리, 내야지.”
재영이 베개 사이로 손을 넣어 내 얼굴을 베개의 바깥으로 돌렸다.
“흐읏, 으, 읏! 흐으응… 으읏, 응.”
“호정아…….”
뻐끔대는 아래가 질기게 재영의 성기를 붙드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릎과 허벅지 뒤로 근육이 날을 세워 일어났다. 엉덩이 근육이 돋으며 재영의 성기를 빨아당기는 꼴이었다. 허리를 움직이는 것도, 더 깊게 박아달라는 듯 높게 발기한 재영의 성기에 엉덩이를 붙여대는 것도 내 쪽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허리를 재영이 느슨하게 잡아 움켜쥐었다.
“우리 애기,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해졌지?”
재영의 손이 내 엉덩이 위를 아프게 두드렸다. 주사를 놓기 전 간호사가 만져주듯 착, 착 소리가 나게 엉덩이를 때린 재영 덕에 촘촘하게 조이던 뒤의 근육이 풀어졌다 급하게 좁혀들었다. 재영은 뿌리까지 성기를 박아넣고 상체를 숙였다. 등으로 재영의 상체가 맞붙으며 입안 가득 달짝지근한 침이 고였다.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은 재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내 엉덩이를 잡아 주물렀다. 주무르는 손길에 뒤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순간마다 재영의 성기는 구멍을 찢을 듯 거칠게 박혀 들었다. 성기가 내벽을 쳐댈 때마다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아, 아흐, 아파.”
티 안으로 들어온 손이 유두를 잡아 비틀었다. 고개를 저어댔다. 재영의 손이 집요하게 유두를 짓눌렀다. 역으로 아래의 근육은 느슨하게 풀어졌다. 성기 끝이 축축하게 젖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요의를 느꼈다. 다급한 마음으로 스스로 발기한 성기를 움켜쥐었다. 당장 사정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재영의 성기가 박힌 뒤도 잊은 채 성기를 잡아 흔들었다. 재영이 그런 내 손등을 아프게 때렸다.
“흐읏.”
“그러니까 왜 버릇없이 혼자 가려고 해.”
재영은 아주 깊은 곳에 성기를 박고 베개에 묻힌 내 얼굴을 돌려세웠다. 팔을 세워 시트를 밀어냈다. 상체를 조금 일으키는 것만으로 척추를 짓누르던 고통이 잦아들었다. 재영은 내 손을 잡아 다시 내 손이 성기를 쥘 수 있게 해주었다.
“호정아.”
“으, 으응.”
천천히 뿌리에서부터 시작해 귀두까지 움직이는 건 내 손이었지만, 내 손을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재영의 손이었다.
“요즘 난 마음이 이상하다?”
“왜… 으응… 왜?”
더듬더듬 가까스로 말을 뱉었다. 무릎의 힘이 풀리며 까딱하면 상체가 쓰러질 것 같았다. 내 몸이 앞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재영은 내 골반을 잡아 자신의 아래와 틈 없이 밀착시켰다.
“내 계획대로 진행되면 분명 기뻐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아.”
“고, 공부… 힘들… 흐응, 힘들어?”
팔을 접어 눈을 꾹 눌러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재영이 손을 뻗어 내가 방금 스치고 간 눈 아래를 매만졌다.
“예쁘네.”
동시에 내 안을 채운 재영의 성기가 더욱 크게 부푸는 게 느껴졌다. 깊게 들어온 성기를 저지하려 뒤로 손을 뻗었다.
“잠시, 잠시…….”
재영은 뒤로 뻗은 내 손을 잡아 깍지 꼈다. 시트에 깍지 낀 손이 놓였다. 잡히지도 않는 시트를 움켜쥐려 손톱을 세웠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시트를 허둥대며 잡는 사이 재영은 내 손을 세게 잡아 시트 위로 지그시 눌렀다.
“널 잠시라도, 못 본다는 게.”
재영이 작게 속삭이며 내 허벅지 사이를 다리로 밀어 넓게 벌렸다.
“응, 으응, 으흑… 흐응… 응, 읏.”
추삽질이 빨라지며 이불과 시트 위로 내 정액이 먼저 쏟아졌다. 끈적하게 허벅지와 배를 타고 흐르는 정액에도 재영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방해하는 건 다 죽여 버리고 싶어질 거 같아.”
헉헉대며 거친 호흡을 뱉어댔다. 흐릿한 눈으로 겨우겨우 고개를 돌려 재영을 보았다. 시트는 흩뿌려진 정액과 허벅지를 흐르고 떨어진 젤로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릎에 걸쳐진 잠옷 바지도 혼잡하게 뿜어진 액들로 더럽혀진 지 오래였다.
“가더라도 금방 돌아와. 알았지?”
재영이 내 티를 밀어 올려 척추 선을 따라 입을 맞추었다. 몸이 앞으로 쏠려가는 와중에도 척추에 닿는 입술의 촉감에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널 두고 가지 않아, 내가 어디를 가겠어.
속에서 차오르는 말이 뱉어지려 할 때마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덕분에 입에선 신음만 흘러나왔다.
“하으, 윽… 읏. 흐응…….”
뱃속에 뜨거운 열기가 끼쳤다. 성기가 빠져나가는 곳으로 시린 바람이 불었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찔끔찔끔 새어나던 액은 재영의 성기가 빠지자 진득한 정액과 섞여 물처럼 줄줄 흘러나기 시작했다.
“흘리지 말라니까.”
“씨…….”
재영은 정액이 새는 내 뒤를 손으로 막고, 목이며 귀에 연신 입을 맞춰댔다.
“씻… 씻고 싶어.”
“알았어. 이거 먼저 닦고 씻겨줄게.”
재영은 침대에 벗어둔 자신의 셔츠를 들었다. 셔츠를 한 손에 구겨 쥐더니 그걸로 정액과 젤로 질척이는 내 허벅지와 뒤를 천천히 닦아주었다.
“네 셔츠 더러워지잖아.”
“버리면 돼.”
“아까운데.”
재영이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필요 없어졌어. 버려도 돼.”
“…그래도 아까워.”
푸스스 바람이 날리는 웃음에 마음이 노곤해졌다. 나른한 미소로 재영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재영은 다시 내 목을 잡고 안았다.
“그래.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지.”
재영의 눈이 평소와 달리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 보였다. 눈을 깜박이고 시선을 선명하게 해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재영이 내 눈을 가리고 다시 입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그 눈만 밤새도록 보았을 것이다. 그래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재영의 허리 뒤로 손을 뻗어 안았다. 팔 가득 안긴 재영의 몸에 코를 박고 익숙한 향을 맡았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걱정과 근심과 오해와 의심이… 모두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누가 너에게 그런 장난을 쳤냐고 재영이 말하며 웃어준다면. 그래 준다면 난 속절없이 재영의 말을 믿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품에 안긴 채로 그렇게 모른 척 지나고 싶어지겠지.
널 믿고 싶어서. 그래서 더 네가 아니라는 증거가 내게 필요하다고 하면 재영은 믿어줄까.
다음 날 바로 새 폰을 샀다. 이전과 같은 기종을 사겠다고 하자 재영은 별다른 질문 없이 이전과 같은 폰을 사 주었다. 분실신고는 따로 하지 않았다. 처음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영도 결국엔 내 뜻을 따랐다. 분실신고를 하지 않아서 부득이하게 번호도 새 번호를 받아야 했다.
“엄마한테 새 폰 샀다고 꼭 말씀드려. 걱정하실 거야.”
“아. 응. 근데 폰 또 샀다고 하면 혼내는 게 먼저일 거 같은데.”
“혼나더라도.”
“…응.”
학교에 가는 중에도 재영은 분실신고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재영이 집요하게 그 이유를 물었다면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재영이 말한 대로 엄마에게 전화부터 하려다 시차를 생각했다. 메시지로 전화를 대신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이 번호로 연락을 하게 됐다는 간단한 메시지만 보내고 앞을 보았다.
벌써 학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학교에 가면 바드에게 새 번호를 알려줘야 했다. 내게 꼭 전화하겠다던 바드의 말이 왠지 모르게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찌르는 기분이었다.
강의실에 도착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드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보였다. 윤 비서의 가방에 폰을 넣은 것도, 새로운 폰을 산 것도 모두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바드의 번호라도 따로 적어뒀다면 먼저 연락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나쁘면 늘 결과가 이랬다. 바드가 나를 빨리 찾을 수 있게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도 바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주에 방학이 시작하면 방학 첫 주에는 시험을 쳐야 하는데도 바드는 결국 오지 않았다. 시험에 관한 이야기라도 전해주려면 바드의 번호가 필요했다. 벌써 루마니아로 간 건가 생각하며 괜히 새 폰만 만지작댔다.
수업 두 강을 듣고 나왔을 땐 밖은 이미 저녁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사이 재영의 연락과 엄마의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도 과제와 테스트로 밤늦게나 새벽이 되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재영의 연락과 달리 엄마의 연락은 산뜻할 정도로 간단했다.
[아들. 제발 덤벙거리지 말고. 폰 관리.]
혼낼 줄 알았다. 엄마에게 간단하게 알겠다는 답을 했다. 재영의 메시지를 다시 열어 마치고 우리 집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복도를 걸었다. 평소에는 주변을 보지 않던 내가 재영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 곁을 지나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날 내게 말을 걸었던 외국인은 그 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 넓은 대학에서 한 번 보았을 뿐인 남자를 다시 마주치는 게 더 신기한 일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재영의 집을 살폈다. 재영의 집은 거실부터 모든 벽면으로 보이는 불이 전부 꺼진 상태였다. 마른 입술을 적시고 폰으로 이전 폰 번호를 눌렀다. 폰이 꺼져 있다는 안내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윤 비서가 내 폰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휴대폰의 전원부터 켜보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확인만 하고 나오자.”
일단은 재영의 집에 가보는 게 우선이었다. 정말 바드의 말이 맞는다면, 재영의 집에 나를 도청한 흔적이나 증거가 있을 터였다. 들킬까 겁도 났지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재영이나 윤 비서에게 들키면 폰 핑계를 대기로 마음먹었다. 잃어버린 폰을 여기서 찾았다고 하면 어색한 상황이지만 그럭저럭 넘어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창틀에 두었던 재영의 집 열쇠를 쥐고 커튼을 쳤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보았다.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가 선택하고 내렸던 이전의 모든 오답들처럼 이번에도 오답이길 간절히 바랐다. 손에 쥔 열쇠를 세게 움켜쥐었다.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재영은 늦는다고 했으니 괜찮을 듯했지만, 윤 비서님이 변수였다. 그가 언제 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티 나지 않게 집을 뒤져보아야 했다.
걸음을 재촉해 재영의 집 앞에 섰다. 긴장감에 손을 쥐었다가 펴고, 숨도 훅훅 소리를 내며 내뱉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거실에 드리워진 백송을 흘깃 쳐다보았다. 여전히 나무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오히려 그림자의 범위가 이전보다 넓어진 듯 보였다.
거실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거실 벽면을 훑어 불을 켰다. 깔끔하게 정돈된 거실이었다. 이전과 변함이 없었다. 어디부터 갈까 생각하다 재영의 침실로 먼저 발을 들였다. 침대 옆 탁상부터 시작해 그 옆의 서랍까지 모두 뒤적였다. 다행히도 의심이 갈 만 한 건 없었다.
보통 도청을 하면 어떤 기기로 그 도청한 걸 듣지 생각했다. 폰과 컴퓨터가 동시에 떠올랐다. 폰은 재영이 들고 있을 테니 확인할 수 없고 남은 건 노트북뿐이었다. 서재로 걸음을 옮기는 중에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병풍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으로 반짝이는 병풍이 여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림 속 해와 달을 올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달을 보며 웃던 재영의 얼굴을 상기했다. 말간 얼굴과 분홍빛 뺨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야.”
병풍에 뺏겼던 시선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침실의 불을 끄고 서재로 빠르게 걸어갔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닫이문이 소리라도 낼까 약하게 밀어 문을 열었다.
책상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을 누르고 노트북이 켜지는 동안 서재 벽면을 채운 책을 눈으로 훑었다. 다양한 책들은 영어로 적힌 게 전부라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잘 없었다. 노트북은 금세 켜졌지만 비밀번호가 걸려있었다.
“미치겠네.”
재영의 생일… 아니다. 재영이라면 생일 같은 거로 노트북 비밀번호를 지정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단순할 리 없었다.
탁상에 놓인 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거다. 단순한 진리를 절실히 깨달으며 이를 깨물었다.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밀번호 하나에 시간을 더 허비할 순 없었다. 책이 꽂힌 서재를 한번 훑어보고 그 아래 서랍장도 열어보았지만 역시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이전에 구경했을 때와 그저 똑같을 따름이었다. 괜히 바드의 말만 듣고 재영을 의심했던 게 아닐까, 후회가 들었다.
나오기 전 아쉬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흘깃 쳐다보고 서재에서 나왔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욕실과 부엌이 있는 복도를 보다,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게 들어가 보지 않은 방. 윤 비서님이 쓴다던 방이 떠올랐다.
차양이 드리워져 그 뒤가 가려진 공간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윤 비서가 외출하며 가방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내 폰도 윤 비서의 방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씨… 그 사람은 좀 무서운데.”
목덜미를 긁었다. 윤 비서의 무표정을 떠올리니 괜히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윤 비서를 뽑을 거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이미 한 차례 이전 폰에 전화를 해보았고 그 폰이 꺼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뻘쭘한 마음에 폰을 꺼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꺼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이전 폰 번호를 누르는 손의 움직임도 더디었다.
“…….”
고개를 돌렸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벨 소리가 들렸다. 검은색 나뭇결로 이뤄진 거실 바닥을 디디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폰이라는 확신이 들도록 전화를 끄고 폰을 귀에서 뗐다. 비록 미약하지만 분명히 들리던 벨 소리가 내가 전화를 끊자 더 들리지 않았다. 두통이 오려는 이마를 꾹 누르고 다시 이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벨 소리는 확실히 윤 비서의 방에서 나고 있었다. 여전히 밝은 불이 켜진 방은 밖에서 보기에 적요하기만 했다. 윤 비서의 가방에 폰을 넣을 때 혹시나 싶어 폰을 꺼두었었다. 게다가 내 폰은 언제나 진동상태였다. 이곳에 오기 전 전화를 걸었을 때도 분명 꺼져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잠깐 사이 누군가 내 폰을 켰고, 마치 들으라는 듯 진동마저 풀어놓았다면.
그건 분명 윤 비서일 것이다. 또한 내가 집에서 전화를 걸고 이곳까지 오는 사이에 그 일이 진행되어야 했다. 귀에 붙은 폰을 뗐다. 전화를 끄고 잠시 숨을 골랐다. 복도 끝, 윤 비서의 방 앞까지 와서도 쉽게 그 안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옆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차양이 보였다. 맞은편 창이 열려 있었다. 서늘한 저녁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윤 비서의 방문으로 손을 뻗었다.
“저기… 윤 비서님. 안에 계세요?”
방문의 홈에 손가락을 끼우고 잠시 기다렸다. 불 켜진 방에선 인기척이라곤 들리지 않았다. 내 움직임을 따라 흑색의 차양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차양을 흘깃 보고 다시 윤 비서님 방의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 비서님이라면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니까, 분명 무턱대고 문을 열었다간 화를 낼 것 같았다. 짜증 난 볼을 실룩댈 걸 생각하니 그리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말라 따끔거리는 목을 가다듬었다.
“저, 여기서 제 벨 소리가 들려서요. 문 좀 열게요. 죄송합니다.”
일부러 크게 말하고 미닫이문의 손잡이를 잡아 옆으로 밀었다. 방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넓었다. 재영의 침실과도 맞먹을 정도로 큰 방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방문의 바로 맞은편, 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흰색 스크린이었다. 마치 창을 가리는 블라인드처럼 천장에서 시작해 바닥에 닿을 듯 길게 내려온 스크린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라니… 까…….”
침대도 없이 소파만 있는 이런 방에서 어떻게 지낸다는 걸까. 스크린을 올려다보다 옆을 보았다. 소파를 두고 반대편 벽 한 면이 전부 책장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의 책등이 익숙했다. 게다가 책의 크기가 일률적이었다. 모두 어디에선가 보았던 것들처럼 눈에 익었다. 눈을 감았다 떠서 다시 보아도 분명 이전에 보았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민재… 민재 집.”
빠른 걸음으로 소파를 지나쳐 벽면을 메운 책장 앞에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책이 아니었다. 앨범이었다. 민재의 집에서 보았던 앨범과 하나같이 같은 디자인의 것들이었다. 민재의 집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 개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책장을 채운 사진첩에 손을 뻗으려다 이마 옆으로 흐르는 땀을 먼저 닦았다. 턱 아래도 손등으로 훑어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책장에 꽂힌 사진첩 하나를 빼냈다. 손으로 사진첩을 여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자꾸만 떨려 미끄러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사진첩을 단단히 잡아 펼쳤다.
“미… 미쳤… 이게 왜 여기… 왜…….”
민재가 찍어준 나의 사진으로만 점철된 앨범은 역시나 민재의 집에 있던 사진첩이 맞았다. 자신보다 내 사진이 더 많았던 앨범은 이제는 민재의 사진 하나 없이 온통 내 사진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중간중간 비어있는 곳은 민재나 다른 친구의 사진이 있었던 곳 같았다. 꺼낸 사진첩의 옆 사진첩을 꺼내 열었다.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들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책장을 채운 앨범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이 어지러웠다.
“이게… 다… 이게 다 뭐야.”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모두 민재의 집에 있던 민재의 사진첩이 맞았다. 이게 왜 여기에, 이곳까지 와 이 집 벽의 한 면을 채우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더없이 어지러웠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진첩을 책장 아래 놓고 뒤돌아섰다.
다시 폰을 꺼냈다. 분명 벨 소리가 들렸으니 이 방에 내 폰이 있다는 건 확실한 셈이었다. 폰부터 찾아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폰을 쥔 손에도 땀이 찼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폰을 바로 쥐었다.
책상 위, 어질러진 USB들이 보였다. 빨간색과 검은색의 작은 USB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수십 개는 넘어 보였다. 폰을 바지에 넣었다. 책상 앞에 다가가 그중 하나를 들었다. USB 겉면에는 검은 펜으로 네 자리의 숫자가 쓰여 있었다. 1008, 1008, 1008, 1008, 1008, 1008, 1009, 1009, 1010, 1012, 1013, 1015. 겉보기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네 자리의 숫자들을 손으로 만지작댔다. USB의 겉면마다 하나도 빠짐없이 쓰인 숫자는 아무리 봐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글자를 물끄러미 보다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이거.”
윤 비서의 글씨체가 재영의 것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재영이 쓰는 숫자의 모양과 같은 모양, 동그라미를 그릴 때 반은 왼쪽에서, 반은 오른쪽에서 그려 가운데 지점이 묘하게 비틀린 것까지도 같았다. 이전에 사 주었던 영어책 속 포스트잇마다 쓰여 있던 재영의 글자들. 그 숫자의 형태가 불현듯 떠올랐다. 책상에 어질러져 있는 USB 몇 개를 더 들어 손에 쥐었다. 까드득, 소리를 내며 손에서 비틀리는 USB 중 하나를 들고 스크린과 연결된 빔프로젝터 앞에 다가갔다.
빔의 전원이 켜질 동안 폰을 꺼내 이전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빔프로젝터가 켜지며 만든 소음 틈으로 흐릿한 벨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울리는 벨 소리가 이전보다 커졌다.
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내 폰이 놓인 곳 옆으로 두 개의 폰이 더 있었다.
“전부… 내 건데.”
재영의 집으로 처음 가던 날 잃어버렸던 것과 같은 기종의 폰 하나와 별채에 불이 나던 날 잃어버렸던 또 하나의 폰이 벨이 울리는 폰 옆에 있었다. 손이 떨려 머리를 좌우로 거칠게 저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전화를 끊고 벨 소리가 끊긴 폰을 책상 위로 올렸다. 두 번째 서랍을 열어보려는데 첫 번째 서랍에 있는 휴대폰 아래 놓인 사진 한 장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뒤집혀 있는 사진을 꺼내 돌렸다. 중학교 때 민재가 찍어준 내 사진이었다. 그건 영국으로 오기 전 민재의 집에서 받아왔던 앨범 속에 있던 사진이기도 했다.
‘민재 앨범… 찾으려고 했는데 못 찾았어.’
병원에서 재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찾지 못했다고… 찾으려고 했으나 불길 때문에 더 찾지 못했다고 그랬었다. 떨리는 오른손을 반대편 손으로 움켜쥐었다. 마음만큼이나 다음 서랍을 여는 손이 다급해졌다.
반쯤 열린 두 번째 서랍을 가까스로 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상체가 자꾸 앞으로 기울어졌다. 거칠어지는 숨을 다듬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두 번째 서랍 안에는 민재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있었다. 김민재라는 글자 옆으로 진갈색으로 그어진 여러 개의 선과 그 끝의 붉은색에 적힌 이름과 시간. 그리고 날짜까지.
“민재 사고 날짜.”
민재의 기일과 같은 숫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종이 끝을 구겼다. 김예지라는 이름 역시 낯이 익었다. 스치듯 본 게 전부라 얼굴이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이름만은 민재가 죽은 후 이서정이 말해준 덕에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쓰인 김예지라는 이름과 사고가 났던 날. 그리고 굵은 붉은색 선이 뚫고 지나간 민재의 이름.
“…씨… 하씨…….”
뒷머리를 세게 긁었다. 피가 맺힐 정도로 세차게 긁어댔는데도 머리는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아픈 머리를 만지며 종이를 다시 서랍 안에 쑤셔 넣었다. 세 번째 서랍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로딩 중이던 빔이 켜지며 일순간 환한 불빛이 방을 가득 채웠다. 로딩이 끝난 화면은 눈이 부실 정도의 흰색 배경으로 번쩍거렸다.
눈을 찌푸리며 USB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프로젝터의 뒤에 꽂았다. 기기가 파일을 읽기 시작하며 화면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세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든 태블릿PC를 꺼냈다. 태블릿PC는 다행히 켜져 있었고 비밀번호 또한 걸려있지 않았다. 바탕화면에 있는 파일 이름에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낯익은 이름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이정운… 아빠.”
무슨 내용일지 모를 파일의 명이었지만, 나의 아빠 이름인 이정운과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클릭하려는데 벽면을 채운 스크린의 화면이 먼저 켜졌다.
「너, 너 누구야. 어떤, 흐응, 어떤 모습이… 진짜, 읏, 너야… 한재영…….」
「왜? 내가 달라 보여?」
고개를 돌렸다. 타액과 눈물로 젖은 내 얼굴과 나체로 재영에게 뒤를 내보이고 있는 내 모습이 마냥 흰색이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 미친… 미친 새끼…….”
스크린을 채운 내 모습을 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하응, 응, 읏, 으응, 하읏.」
화면 가득 연신 신음을 터뜨리고 있는 내 모습에 귀를 찢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빔프로젝터의 전원을 그대로 꺼버렸다. 귀를 도려내고 싶었다.
“하…. 하아… 미… 완전 미쳤어.”
호흡이 가빠졌다. 서랍을 세차게 닫고 힘없이 떨궈지는 상체를 가까스로 일으켰다. 빔이 꺼지며 다시 초라한 흰색으로 돌아온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알이 시큰거리고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를 것투성이인 이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는 완전한 암전 상태가 되어 삑삑 정지음 같은 소리만 울려댔다.
백색의 스크린을 멍하니 보다 책장을 가득 메운 앨범들로, 시선은 다시 책상에 쌓여있는 USB들로 옮겨졌다. USB를 손이 찢어질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를 깨물었다. 볼썽사나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1008.
그건 내가 재영과 처음 마음을 확인하고 몸을 섞은 날이었다. 책상 위 숱하게 쏟아진 USB 가득 내 더러운 모습이 찍혀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픈 눈을 질끈 감고 책상에 가득 쌓인 USB를 팔로 거칠게 밀쳐냈다.
감은 눈으로 손을 뻗어 애타게 재영의 목을 끌어당기던 나체의 내 모습이 생각나 헛구역질이 났다. 입을 틀어막았다. 무릎이 바닥으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볼에 잔뜩 묻은 눈물을 닦아냈다. 손에는 여전히 USB가 쥐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민재가 찍어줬던 내 사진이 다른 USB와 함께 떨어졌다.
“와… 이게 뭐야. 윤 비서한테 이상한 취미가 있었네.”
고개를 들었다. 재영이 열린 미닫이문의 틀에 어깨를 기대 나를 보고 있었다. 재영의 손에 들려있던 와인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포도주는 피처럼 검붉은 색으로 나무 바닥을 적셨다.
“너.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었지.”
재영은 손에 와인병을 쥐고 바닥에 쓰러진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손을 뻗어 프로젝터의 전원 버튼을 다시 누르는 폼이 익숙했다. 꺼졌던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방은 다시 적나라한 신음과 살성이 부딪히는 낯뜨거운 소리로 가득 찼다.
“놀랐지… 내가 윤 비서 혼내줄까?”
“재영아. 윤 비서님 말인데.”
재영의 눈을 올려보았다.
“미안. 나도 윤 비서가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
어금니에 힘을 줘 깨물었다. 턱과 볼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귀밑이 아리고 저릴 정도로 이를 깨물었다. 내 볼을 감싼 재영의 손을 쳐냈다. 재영이 미간을 좁히며 내게 밀쳐진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윤 비서는… 윤 비서님은. 네가 시킨 일만 한다고 그랬잖아.”
잠시 벙찐 얼굴로 날 보던 재영의 두 눈이 이내 곱게 휘어졌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웃음을 따라 재영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늘 내게 보이던 다정하고 따뜻한 웃음과 달랐다. 손과 등줄기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서늘한 웃음이었다. 매만지던 손으로 다시 내 볼을 감싼 재영이 조물조물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 너 여기 못 들어온다고 그랬잖아. 이 방, 윤 비서가 쓴다고. 그러게 왜 꾸역꾸역 여기를 들어와. 호정아.”
“네가… 어떻게. 대체 왜.”
띄엄띄엄 뱉어진 말에도 재영은 생글대며 웃기만 했다. 웃던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은 책상 위에 와인병을 두고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호정아. 여기 네 거 하나 더 있는데. 이것도 봐야지.”
소파 뒤에 있는 하얀색 옷장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재영이 돌아왔을 때 재영의 손에는 우리 고등학교의 교복 셔츠가 들려있었다. 옅은 분홍색 물이 든 셔츠의 가슴에 자수로 박힌 내 이름을 보며 떨리는 눈을 재영에게로 옮겼다. 재영은 옷걸이에 걸린 셔츠를 빼 내 어깨를 감싸 덮었다. 재영의 손이 눈물로 젖은 내 눈 밑을 매만졌다.
“이 모습. 내가 얼마나 다시 보고 싶었는지 알아? 그러니까 좀 더 일찍 눈치챘었어야지.”
재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 와인 몇 모금을 들이켰다. 목울대를 넘어가지 못하고 입가에서 샌 와인 몇 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 미쳤어.”
“알아. 의사도 내가 그렇다더라.”
재영이 덮어준 셔츠 끝이 구겨지도록 세게 움켜쥐고 끌어 내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셔츠를 응시했다. 재영이 셔츠의 색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한 후로 자존심이 상해 골목에 버렸던 내 셔츠가 분명 맞았다. 어디서 찾은 건지, 도대체 언제부터 재영이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생각할수록 모든 기억의 실타래는 풀리지 않고 도리어 꼬이기만 했다.
“맨정신에는 못 보낼 거 같아서, 와인 좀 마셨어.”
재영은 다시 무릎을 굽히고 내 앞에 앉았다. 젖은 볼을 감싸고 눈과 볼에 묻은 눈물 자국을 검지로 닦아주는 손길은 여전히 다정해 나를 더욱 서럽게 만들었다.
“너도 날 버릴 거잖아?”
정신이 멍했다. 고개를 들고 재영을 쳐다보았다. 재영의 손에서 와인병이 동그란 원을 그리며 흔들렸다. 귀를 울리는 신음이 머리까지 헤집는 기분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빔프로젝터의 전원을 껐다. 스크린을 밝히던 빛이 일순간 꺼지며 방이 어두워졌다.
“우리 부모가 날 별채에 버렸듯이 너도 날 여기 버릴 테니까.”
“헛소리하지 마.”
재영의 손을 쳐내고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의 손에서 와인을 뺏어 벌컥벌컥 쉬지 않고 와인을 삼켰다. 달고 쓴 맛이 동시에 전해지며 두통이 더 극심해졌다. 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민재. 우리 아빠. 다 뭐야? 너랑 관련 있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과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게 틀렸길 바라는 마음.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가도 하나하나 찬찬히 내게 저지른 일을 빠짐없이 듣고 싶은 마음이 엇갈리며 머리를 더 복잡하게 했다.
재영이 내 뒤로 다가왔다. 등 뒤에서 뻗어진 손이 내 볼을 쓰다듬었다. 어루만지는 손을 쳐낼 힘도 없었다.
“이유가 뭔데?”
“이유?”
재영이 흠, 하고 입술을 말았다. 뒤돌아 책상에 기대섰다. 날 빤히 내려다보던 재영이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내 볼을 감싸던 손이 천천히 멀어졌다. 볼은 순식간에 온도를 내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게. 의사도 그렇고 아빠, 엄마도 항상 그런 걸 묻더라. 내 이유는 항상 하나뿐이었는데.”
내 손에 쥐어져 있던 와인병을 가져간 재영이 한 모금을 들이키고 다시 내 손에 병을 쥐여 주었다. 끈적한 손가락이 마디마디 와인병을 감쌌다.
“가지고 싶어서.”
재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바닥의 USB를 구두로 끌어 한군데로 모았다. 와인병을 쥔 내 손을 재영의 손이 잡아당겼다. 한군데 모인 USB 위로 붉은 와인이 천천히 쏟아졌다.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와인의 물소리와 구두로 짓이겨지는 USB들이 내는 마찰음이 귀를 때렸다.
“뉴스에서 사이코패스. 뭐, 그런 거 들어본 적 있어?”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내가 그거래.”
“네가, 왜.”
미간을 좁혔다. 재영은 어깨를 달싹 들었다 내렸다.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의미 같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했다. 민재와 아빠. 재영이 정말 그 모든 일을 내게 틈 하나 없이 처리해놓은 거라면. 이렇게 허술하게. 굳이 내가 볼 수도 있는 자신의 집 안에 이런 방을 두진 않았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철두철미하기만 했던 놈이 이렇게나 허접한 나에게 들켰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 협박하려고 저거 찍은 거야?”
눈을 세게 감았다. 하얀 화면을 채운 나체의 내 모습이 떠올라 다시 구역질이 났다.
“무슨 협박?”
재영이 구둣발로 바닥의 USB를 다시 짓이겼다. 수십 개의 USB가 뜨드득, 소리를 내며 바닥에 비벼졌다.
“나는 너를 누구한테도 보여줄 생각이 없어. 저건 나만 보는 거야.”
앞에 선 재영의 가슴을 세게 밀어냈다. 분이 풀리지 않았다. 바닥에 쏟아진 와인이 내 교복 셔츠까지 흘렀다.
“비켜.”
나를 뭉근하게 바라보는 재영의 눈을 도저히 더 보기 힘들었다.
“김민재가 네 사진을 저렇게 몰래 찍어댔을 때는 화내지 않았잖아. 좋다고 했었어. 너.”
재영이 뒤의 책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뻔뻔한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무덤덤한 얼굴로 나를 보는 재영의 얼굴이 한없이 낯설었다.
“저거랑 이게… 같아? 진짜 같다고 생각해?”
“글쎄. 난 정말 다른 점을 못 찾겠어서. 네가 설명을 해줘 봐. 뭐가 그렇게 다른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지체하는 순간, 또 재영의 거짓에 놀아날 게 뻔했다. 내가 아는 똑똑한 한재영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일단은 재영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혼자 생각해야 모든 일의 실마리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재영의 옆에서는 아니었다. 여기선 어떤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때맞춰 이전 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바드의 이름을 보고 재영을 보았다. 재영은 책상 위에서 울리는 내 폰을 보더니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받아도 돼.”
재영은 폰을 가져가 통화버튼을 그었다. 곧 재영의 손이 통화 연결된 폰을 내 귀에 가져다 댔다. 호흡을 정돈할 새도 없었다. 바드가 먼저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호정! 왜 전화… 하씨… 왜 전화 안 받았었어! 나 진짜… 지금 비행기 딱 타기 직전… 아니다. 아니야. 아니. 이런 건 다 됐고. 지금 너무 급하니까 일단. 호정아. 일단은, 묻지 말고 내 이야기 들어.
재영이 턱을 까닥거렸다. 걱정 말고 답하라는 의미 같아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날 보는 재영의 눈이 서늘해 오래 마주보기 힘들었다. 분명 미소 띤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인 재영의 눈빛에 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응.”
바드는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다듬기 바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전부… 전부 진짜야. 호정. 미안해, 진짜. 여태 나 너한테 거짓말만 했어. 근데 그거 다 한재영이 시킨 거야. 그날 널 그 파티에 데려오고, 네가 이쪽으로… 씨… 아무튼 네가 한재영… 그 새끼 의심하게 하는 것까지. 전부 다. 전부 한재영이 시킨 거야.
“무슨… 소리야…….”
멍하니 입을 달싹거렸다. 내가 말을 뱉고도 모든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정말 내가 말을 한 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재영은 폰을 바로 쥐고 더 내 귀에 바짝 붙였다. 재영의 나머지 손이 내 반대편 볼을 밀어 폰과 귀가 닿은 공간을 밀착시켰다. 재영의 손목을 쥐고 폰을 끌어내리려고 했으나 재영의 손은 단호했고 눈빛은 좀 전보다 사나웠다.
“읏.”
재영에게 잡힌 볼이 아팠다. 볼을 실룩거렸다.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내가 바드를 찾아가 도청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재영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이렇게 혼자 윤 비서의 방에 오게 되기까지. 그러니까 지금 바드가 하는 말은 이 모든 일련의 단계에 내 뜻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다는 말과 같았다.
-진짜야. 지금 당장은 믿기 어려운 거 알아. 진짜 안 믿을 거 아는데… 네가… 그러니까 여기에서 네가 보기에 제일 이상했던 거. 씨. 그거…….
“바드. 하나씩 말…….”
-안지혜.
“뭐?”
바드가 깊게 심호흡했다. 이를 세게 물자 내 볼을 감싼 재영의 손힘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게 느껴졌다.
-내 한국 이름, 김민재 아니라고. 내 한국 이름. 안지혜야. 한재영이 그 이름을 써야 네가 날 쉽게 믿을 거랬어. 그래서 김민재라고 한 거야.
“바드.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하.”
-씨… 한재영이 알려준 게 아니면… 내가 죽었다는 하나뿐인 네 친구 이름을 어떻게 알았겠냐고!
재영이 눈동자를 굴렸다. 하늘로 올라갔던 눈동자가 다시 내려와 나를 향했을 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시린 눈빛이 되어 있었다.
“이 개새끼는 결국 선을 넘네.”
재영이 중얼댔다.
-호… 호정아! 방금… 혹시 한재영이야? 한재영 네 옆에 있어?
바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바드의 격앙된 긴장감이 휴대폰 너머로 전해질 정도였다. 재영은 내 볼에 붙어 있던 폰을 가져가 자신의 귀에 댔다.
“지혜 씨. 너 아직 비행기 안 탔구나?”
-한재영…….
재영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든 입술이 가까이서 보였다. 여전히 재영의 구두 아래엔 USB와 와인으로 붉게 젖은 내 교복이 있었다.
“그때 봤던 내 비서가 곧 거기 도착할 거야. 그 사람, 기억 못 하지는 않을 거잖아?”
바드가 소리치는 소리가 폰 너머로 들려왔다.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폰을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재영은 버둥대는 내 손을 빤히 보다가 그대로 내 뒤의 벽에 폰을 집어 던졌다.
“흣.”
찢어지는 소리와 파열음에 귀를 막고 숨을 헐떡거렸다. 놀란 건 잠시였다.
“하, 씨발…….”
재영은 자신의 혀로 볼을 훑었다. 한쪽으로 꺾인 고개에서 불편함과 짜증스러운 감정이 묻어났다. 재영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네가 날 사랑… 적어도 좋아는 하는 줄 알았는데. 다 사실이라면 한재영. 넌 나를 사랑한 것도, 좋아한 것도 아니야.”
재영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늘 다정하기만 했던 재영의 익숙한 얼굴이 스치듯 지났다. 다시 책상을 짚고 손바닥 가득 힘을 줘 몸을 지탱했다. 이제 재영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구겨져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만큼이나 복잡한 마음이 드는 것 같긴 했다.
“왜, 내가 사이코패스라니까 도망가고 싶어?”
“조용히 해.”
“그때처럼 버텨주면 되잖아. 왜 나를 버리겠다는 건데?”
“조용… 제발 조용히… 해, 제발.”
아랫입술을 세게 물고 재영의 몸을 밀쳐냈다. 내가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재영의 몸이 이번에는 꽤 쉽게 뒤로 밀려났다. 뱉는 숨마다 떨림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물이 나려는 눈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기다려. 너랑 있으면 아무 생각도 못 하겠으니까.”
눈을 질끈 감고 책상에 기대있던 몸을 일으켰다.
“너 버리는 거 아니야. 나 혼자 생각 좀 하고 돌아올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폰을 바지에 넣고 비틀대며 문 앞에 섰다. 급하게 마신 와인이 뒤틀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문틀을 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호정.”
문틀을 쥔 손이 하얗게 변했다. 거센 힘에 팔까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확실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뒤에서 들리는 재영의 목소리가 귀에서 번지듯 울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귀를 틀어막고 심정이었다. 젖은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더는, 이 이상은 더 속아선 안 됐다.
“네 침대 밑에 현금 뒀어. 가져가.”
재영의 말을 무시하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집으로 와 대충 필요한 것들만 싸 가방에 쑤셔 담았다. 서랍을 뒤져 여권을 꺼내려다 그 밑에 이전에 재영의 아버지가 준 명함을 발견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정말 재영이랑 친구가 맞나요?’
‘혹시 재영이 관련해서 연락할 일이 생기면 여기로. 부탁할게요.’
‘그때, 명함 준 거 아직 가지고 있죠? 잃어버리지 말아요. 필요할 땐 꼭 연락하고.’
명함을 손에 쥐었다. 하얀색 명함이 손에서 구겨졌다.
“씨발… 전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재영의 아버지도, 그 어머니도. 애초에 아들이 사이코패스인데 그걸 모른다는 게 더 말이 안 됐다.
‘네가 무조건 이기는 거야.’
‘나는 그래. 의외로 생각이 직선이야.’
‘내 생각은 직선이라고 했었잖아. 난 필요하면 가져. 필요가 없으면 버리는 거고.’
‘방해하는 건 다 죽여 버리고 싶어질 거 같아.’
엇나간 규격으로 하나도 맞춰지지 않던 재영의 말들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두 달 동안 자신이 되어 보라던 말도 안 되는 놀이와 자신의 생각은 직선으로만 그어져 있다던 말까지.
“내가 전화하면…….”
명함을 세게 구겨 바닥에 던졌다. 이런 건 소용없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친 명함을 보는 두 눈이 따가웠다. 시큰대는 눈을 손으로 가리고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전부 알고 있어.”
재영은 처음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내게 명함을 줬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나에게 이런 상황이 오게 된 게 처음부터 끝까지 재영의 계획이 맞는다면, 가진 것 없는 내가 연락할 수 있는 곳이 자신의 아버지뿐이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을 거다. 만약 내가… 내가 이 명함 속 번호로 전화하는 순간, 한재영은 누구에게 더 화가 날까.
재영이라면, 내가 한재영이라면.
재영의 분노는 전화를 한 내가 아니라 명함을 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할 거다. 그래서 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조차 할 수 없게… 만든 거다.
“하아…….”
가방을 손에 꼭 쥐었다. 팔이 저리고 아파 두 눈을 감은 채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