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사이코패스(1) (10/22)

8. 사이코패스(1)

민재의 집에 가겠다고 과일을 사러 간 호정을 기다리며 재영은 폰을 뒤적였다. 고작 그런 집에 가는데도 호정이 뭘 사가야 하고, 민재 부모를 위해 뭘 준비해야 한다는 게 몹시 못마땅했다. 애초에 그 집에 굳이 찾아간다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했다. 폰에는 윤 비서가 보낸 보고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대학 관련 자료들과 호정이 지낼 집에 설치해야 할 CCTV가 또 말썽이라 수리에 들어갔다는 보고와 마당의 백송이 이번에도 제대로 이식되지 못하고 말라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나마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있었다.

[루마니아 출생인데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합니다. 한국어로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한 정도이고 연기도 전공했었다고 하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재영은 윤 비서의 번호를 눌렀다. “네.”라는 윤 비서의 목소리를 듣고 남자에 대해 상세히 물었다.

“그래서. 걔가 우리한테 원하는 건 뭔데요?”

윤 비서의 보고가 길어졌다. 재영은 윤 비서의 보고를 들으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 까다로운 조건도, 들어주기 힘든 것들도 아니었다.

“걔로 해주세요. 멍청하고 원하는 거 분명하고. 좋네요.”

-네. 알겠습니다.

“백송은 다시 구하시고요.”

-네.

두 번째 백송마저 뿌리를 내리기 전에 죽었다. 까다로울수록 가치는 더 올라갔다. 그러면 더 가지고 싶어지기 마련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와중에 호정이 보였다. 슈퍼에서 산 과일바구니 하나를 들고나오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있는 걸 보니, 또 김민재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죽은 새끼가 다시 죽는 방법은 없나.”

재영은 중얼대며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한 대라도 피우고 싶은데, 호정이 곧 차에 오를 테니 피울 수도 없었다. 굳은 표정으로 다가오던 호정이 자신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는 게 보였다. 저런 건 타인의 기분까지 고려하는 배려일까. 호정이 보이는 배려는 어릴 때 배운 것인지 혹은 타고난 것인지 궁금했다.

“과일이 생각보다 좋은 거 같아.”

차에 탄 호정이 중얼대며 웃었다. 과일이 예쁘다고 해주었더니 호정은 과일보다 더 예쁜 입술을 실룩거리며 살뜰하게 웃으려 노력했다.

재영은 골목을 돌 때마다 흘깃대며 호정을 관찰했다. 자신의 폰을 가져가 플레이리스트를 채우는 모습은 기특했지만 저 작은 머리통에 김민재가 끼어있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재의 집 앞에 호정을 내려주었다. 호정은 긴장되는지 입술을 힘줘 다물었다가 꾹꾹 눌렀다가 이내 아이처럼 헤실대며 입술을 벌렸다. 당장이라도 저 입술 안에 혀를 비집어 넣고 싶었다. 민재의 집 앞에서 호정을 발가벗겨 핥아먹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그건 그거대로 꽤 좋을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는 호정의 모습을 재영은 눈을 떼지 않고 보았다.

대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호정이 벨을 누르고 들어가는 걸 보며 차의 시동을 껐다. 윤 비서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재영의 시선은 집요하게 민재의 집 2층을 향해 있었다. 담보다 높게 오른 소나무들은 얼핏 봐도 관리가 잘 된 것들이었다. 탐이 날 정도였다.

저 방에 김민재가 있었고, 곧 그 방에 호정이 들어갈 것이다.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가 폈다. 때마침 윤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네. 일식당 예약은 확인됐나요?”

-네. 하루 예약이니 시간 상관없이 가셔도 됩니다.

재영은 입술을 적셨다.

“별건 아닌데. 아까 죽었다는 그 백송이요.”

-네. 도련님.

재영은 핸들을 감싸고 그 위에 볼을 붙여 기댔다. 고개가 기울자 민재의 집 2층이 더욱 잘 보이게 되었다. 2층의 넓은 창에 해가 반사됐다. 저 안에서 지금 호정은 뭘 하고 있으려나. 김민재는 저 방에서 호정이를 상대로 무슨 상상을 했을까.

-도련님.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거 그냥 버리지 말고 불태워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재영은 창을 내리고 팔을 밖으로 뻗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기분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나서야 호정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혹시나 담배 냄새가 날까 호정의 자리에까지 빠짐없이 향수를 뿌렸다. 들어갈 때와 달리 호정의 기분은 나아져 있었다. 방긋 웃는 얼굴이 평소의 웃음과 같은 형태라 안심됐다. 재영은 차에 시동을 걸려다 호정의 품에 안긴 것들에 시선을 옮겼다.

“…저건 또 뭐야.”

호정이 차에 타는 순간 제어하지 못하고 먼저 손을 뻗었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호정의 손에 들린 건 사진 앨범이었다. 사진이냐고 물으니 호정은 해맑은 얼굴로 민재가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고 했다. 재영은 속으로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티 내진 않았다.

“어머니가 가져가도 된다고 하셔서.”

“그래?”

미친 아들을 낳은 미친 여자다운 발상이었다. 죽은 새끼 앨범을 친구에게 주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재영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 차에 울리던 노래를 껐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짜증스러움으로 가득한데 노래까지 듣는 건 무리였다.

앨범을 펼치자 앳된 호정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웃는 민재의 얼굴도 있었다. 순간 옆에 있던 호정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도무지 웃긴 부분이 없는 상황에서 터진 웃음이라 재영은 그 웃음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왜?”

“웃기잖아. 나 중딩 때 모습.”

호정은 다시 키득대며 웃다가 민재의 얼굴 위로 손을 뻗으려 했다. 재영은 그 손보다 빠르게 손을 뻗어 어린 호정의 볼을 꾹꾹 눌러보았다. 호정을 따라 웃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다음 장, 그다음 장, 마지막 장까지 넘겨도 앨범의 주인은 민재가 아니라 호정이 분명했다. 거의 모든 장에 호정의 사진이 있었다. 재영은 이를 세워 안쪽 볼을 세게 깨물었다.

“민재 사진 찍는 거 좋아한 거 맞아?”

“응. 이런 앨범이 민재 방에 한 트럭이야.”

“그래?”

재영은 앨범을 보던 고개를 돌려 시선을 민재의 집 2층 창으로 옮겼다. 다시 민재의 집 현관과, 높은 소나무 그보다 높은 담벼락까지 훑었다. 시선은 다시 민재의 방이 있는 2층으로 빠르게 옮겨졌다.

“이런 앨범이 한 트럭…….”

재영은 낮게 읊조리며 시선을 내렸다. 이런 앨범이 많다는 건 어릴 때 호정의 사진도 저 안에 많다는 의미였다.

“음…….”

가지고 싶어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가져와 자신이 모르던 때의 호정의 얼굴을 구경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말랑할 것 같은 하얀 볼을 한 모든 사진을 만져보고 싶어졌다.

재영은 다시 민재의 집 현관을 쳐다보았다. 집이 너무 컸다. 김민재는 외동이다. 아들도 없는 부부가 살기엔 집이 과분하게 넓었다. 집이 크니 쓸데없이 죽은 아들의 앨범이나 붙들고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집이 좁아지면. 저 집이 아니면 앨범을 둘 곳도 없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다 내 건데.

재영은 턱을 쓸었다. 민재는 몹시 짜증스러운 존재였지만 여러모로 쓸모는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죽어서도 또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꼴이었다.

오늘 밤은 재영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다. 헛된 기대로 자신을 옭매려는 엄마의 좆같던 부적도, 기둥을 연결한 창방마다 달렸던 CCTV가 붙었던 흔적도 동시에 없앨 수 있는 날이었다. 게다가 호정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재영은 곧 자신이 불타게 될지도 모른 채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웃는 민재의 사진을 흘깃 쳐다보았다. 나머지 네 사진들도 곧 같이 보내줄게, 민재야. 제법 다정하게 속삭였다. 민재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참 좋겠는데. 빙긋 웃는 사이 호정이 자신을 따라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재영아.”

동네를 빠져나와 예약한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이었다. 호정이 문득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재영은 호정이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듣기 좋았다. 되물으면 되묻는 대로 왜냐고 묻지 않고 다시 “재영아.”라고 부르는 것도 듣기 좋은 건 마찬가지였다.

호정은 생각보다 거리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자리한 사람과 외곽에 자리한 사람의 경계가 분명했다. 외곽에 서 있을 땐 ‘한재영’이던 자신이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재영’이 된 것 또한 좋았다.

“나도 담배 피울까? 네가 피우는 그거.”

“어?”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운전 중인 것도 잊고 호정을 돌아보자 호정이 입을 벌리고 웃더니 자신의 얼굴을 잡아 앞을 보게 만들었다. 혹시나 김민재의 집에 들어갔을 때 피운 담배 냄새가 차에서 난 걸까도 생각했다. 향수를 뿌린다고 뿌렸는데도 호정이 눈치챈 거라면. 그렇다면 차라리 향수를 뿌리지 말았어야 했다. 어쭙잖게 속이려 했다는 느낌을 주긴 싫었다.

“나도 담배 피울까 한다고. 네가 피우는 그거랑 같은 거로.”

호정은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부끄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니 담배 냄새를 맡아서 담배를 떠올린 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왜 느닷없이 담배가 떠올랐을까. 그것도 하필 죽은 김민재의 집을 다녀온 직후에.

재영은 짜증으로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평온하게 유지했다. 죽은 김민재의 집을 다녀오고 나니까, 죽은 김민재의 사진을 보고 나니까. 그러니까 김민재 생각에 담배라도 피우고 싶어진 건가.

“담배…….”

자꾸만 웃음이 났다. 어떻게 그렇게나 건방진 생각을 하고, 그 건방진 생각을 가감 없이 자신의 앞에 드러낼 수 있는지 그 순수함에 기가 찰 정도였다. 호텔에 도착해서야 왜 피우고 싶냐는 질문이 뱉어졌다. 호정은 어려운 질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냥. 너도 피우니까.”

핑계인지 진심인지 알고 싶었다. 재영은 호정의 옆에 서서 천천히 표정을 살폈다.

“왜. 민재 집 다녀오니까 담배가 당겼어?”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호정의 주머니에 옮겨주고 다시 표정을 천천히 살폈다. 당황한 얼굴을 보니 진짜 담배를 피우고 싶은 건 아닌 듯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거라면, 그 의도대로 맞춰주고 싶었다. 담배를 배우고 싶다는 거. 자신이 하는 걸 호정이 배우고 싶다는 건 재영에겐 언제나 환영이었다. 배우는 방식은 자신이 정하는 걸 테니까. 그게 무엇이든 손해랄 건 없었다.

“가르쳐줘.”

호정은 기특하게도 자신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말할 줄도 알았다. 붉게 오물거리는 입술과 그 안쪽 살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샅샅이 훑어 빠짐없이 핥고 싶어질 정도였다.

“호정아. 담배는 어떻게 배우게?”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에도 호정은 눈치 없이 미간을 좁혔다. “뒷골목이라도 가서 배우는 거야?”라고 묻는 표정이 생각보다 더 앙증맞아 웃음이 났다.

“담배는…….”

재영은 새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잘하면 생각보다 더 빨리 저 건방진 소리만 해대는 입술을 맛볼 기회가 올 것 같았다. 기분이 나아졌다.

타인이 자신의 기분에 관여할 수 있다는 것에 재영은 꽤 깊은 흥미를 느꼈다. 초밥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대는 호정의 모습을 턱을 괴고 빤히 보았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술 하나, 귀 두 개. 아무리 봐도 형태 면에서는 다른 인간들과 다를 거 없는 존재인데 키우면 키울수록 기특한 맛이 있겠다 싶었다.

“안 먹어?”

호정이 물으며 눈을 깜박거렸다. 붉은 눈 밑에 주홍색 조명이 반사됐다.

“먹을게. 이제 입맛이 좀 도네.”

호정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까닥거리며 다시 입에 초밥을 물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호정은 잊지 않고 담배 이야기를 꺼냈다.

“담배 가르쳐 달라니까.”

가까이 다가와 테이블에 올려둔 담배를 쥐는 폼이 생각보다 더 저돌적이고 당돌했다. 이렇게나 사정하며 가르쳐 달라고 하니 도무지 가르쳐주지 않을 수 없었다. 재영은 자신이 이렇게 부탁에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던가 생각했다.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느리게 기어 방을 채웠다. 호정의 얼굴이 가까웠다. 선명한 얼굴에 흐린 연기를 끼쳐도 얼굴은 다시 선명한 선으로 연기 사이를 뚫고 나왔다. 재영은 그 선명한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졌다. 손을 뻗어 허리를 당겼다. 아래가 맞닿자 견디기 힘들 정도의 충동이 일었다. 재영은 고개를 젖혀 잠시 머리를 느리게 한 바퀴 돌렸다.

“너 담배 피우는 사람이랑 키스해 본 적 없지?”

치아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물려있던 담배가 호정의 손에 의해 빼졌다. 재영은 그런 호정의 행동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행동으로 자신을 놀라게 하려나 생각하는 사이, 호정은 빼낸 담배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딱히 말릴 마음도 없었지만 막을 새도 없었다. 호정은 숨을 들이마심과 동시에 잔기침을 해대며 고개를 숙였다. 호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눈가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재영이 가장 좋아하는 호정의 모습이었다.

“해볼래? 어떤 맛인가?”

재영은 호정의 눈을 빤히 응시한 채로 다시 담배를 가져가 입술 사이에 넣었다. 그 어느 때보다 깊은 한 모금을 마셨다. 옅은 연기로 가려진 호정의 얼굴이 여전히 붉었다. 재영은 바닥에 담배를 던지고 마치 자신을 기다리는 듯 벌어져 있는 호정의 입술을 물었다. 턱을 한 손으로 잡아 아플 정도로 누르자 호정의 입술 사이가 더욱 벌어졌다.

어떤 맛일까 늘 궁금했었다. 골목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피투성이의 몰골을 봤을 때부터 이호정의 맛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작약나무, 군자란, 단풍, 능소화, 아카시아, 유홍초, 흰말채의 가지. 가시나무.

붉은 것들을 죄다 끌어와 상상해 보았지만 상상도 현실만큼이나 명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늘 상상할수록 골치가 아프고 짜증만 났다.

재영은 더 깊게 혀를 틀어박고 호정이 내뿜는 호흡을 들이켰다. 엉성하게 빗나가는 호정의 날씬한 혀는 붉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으로 생겨 먹은 것과 닮아 있었다.

붉은 열매를 단 주목(朱木)이 그나마 호정의 호흡이 내는 맛과 흡사했다. 옅고 쓰지만 결국엔 달다. 묘한 맛이 나서 계속 먹게 되지만 그 끝은 역시나 갈증이고 갈망이고 타는 목마름일 뿐인 주목.

“…….”

더. 이호정은 가지면 가질수록, 희구하던 걸 얻고 나면 더 얻고 싶어지게 되는 다음 것을 내놓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핥고 그 안의 내벽을 이룬 근육까지 훑고 나니, 더욱 그다음이 궁금해졌다.

허리를 세게 움켜잡아 당겼다. 호정의 혀가 어색하게 어긋나며 뒤로 물러섰다. 재영은 그조차 견딜 수 없었다. 허리를 더 당겨 완전히 밀착시켰다. 어디도 벗어날 수 없어. 어디도 못 가. 호정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팔을 움켜쥐었다. 놓아주길 바라는 몸짓인데도 뭉근하게 고이는 타액은 더욱 재영을 바라고 있는 듯했다.

재영은 호정의 볼과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매만졌다. 이 볼도, 이 머리카락도. 자신이 모를 때와 모르던 모습이 존재했다는 게 싫었다. 물린 혀를 더욱 세게 빨아 당겼다. 호정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무너지려는 다리를 가까스로 붙들어 버텼다. 호정의 아래가 닿아있어 발기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호정은 들키기 싫은 몸짓으로 어색하게 몸을 꼬았다.

“흐응.”

재영의 목을 감싼 호정의 손이 느껴졌다. 열 살 이후로 엄마조차 재영의 목을 감싸 안은 적이 없었다. 재영은 점점 머릿속에 차오르는 검은 빛을 느꼈다. 더는 위험했다. 지금에서 더 나아가는 건 재영이 참을 수 있는 범위를 유월하는 짓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 호정에게서 얻어야 할 것이 더 많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재영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호정의 윗입술을 핥고 입술을 떼어냈다. 달뜬 호흡으로 젖은 호정의 눈과 붉어진 눈 밑을 마주 보기 어려웠다.

리모컨 버튼을 눌러 바닥을 닦을 아주머니를 부르고 잠시 들떴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신이 이상했다. 멍하니 서서 땅바닥만 응시하는 호정의 모습이 위태로웠다. 재영은 호정의 등을 보며 그걸 어루만지는 상상을 했다. 척추뼈 하나. 골반까지 이어지는 모든 뼛조각들이 손가락 마디를 채우며 안기는 상상.

그 상상의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호정은 어느 순간 사라질 것처럼 생긴 사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으로 보였다. 빤히 보고 있자니 이호정은 정말 그런 인간이었다. 재영은 떠오른 문장을 고쳤다.

그러니까 그건…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 꼭 필요한 인간이란 의미였다.

호정의 군대 문제는 생각처럼 어렵지 않았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나 떠올리면 언제나 없다, 라는 간결한 답만 맺어지는 게 한국이니까. 호정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면제를 받을 수 있게 서류를 정리하는 데는 한 달 가까운 시간이 들었지만 큰돈이 들지는 않았다. 호정이 남자 새끼들만 득실대는 군대에서 흙바닥을 구르고 땀에 젖어 성급하게 옷을 벗고 그들 사이에 누워 잘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았다.

그날 밤 재영은 잠든 호정의 옆에 앉아 책을 읽는 척했다. 등본 속 호정의 이름 위로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을 볼펜으로 그었다.

“쯧, 무능한 것들.”

무능력한 호정의 부모는 여태 아들 군대 문제도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뭘 했나, 한심할 지경이었다. 호정의 부모가 못 해준 일을 자신이 처리해준 것이니 호정이 고마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낮에 본 호정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잠든 호정의 볼도 실룩대며 웃음기를 머금었다.

“우리 애기. 무슨 꿈꾸는 중이야? 응?”

재영은 책 안에 등본 종이를 구겨 넣고 호정의 옆에 누웠다.

“나를 알고 나면 네가 어디로 갈지 알아.”

재영은 호정의 붉은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없는 곳. 그게 어디든 내가 없는 곳으로 갈 거잖아. 손길을 느낀 호정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산이든 바다든… 땅 밑이든. 그게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괜찮아. 난 어떻게든 찾을 거니까.”

재영이 미소 지었다. 시간이 가까워졌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는 사이 방 입구로 윤 비서가 들어왔다. 발소리도 없이 들어온 윤 비서는 고개를 반쯤 숙여 인사하고는 자신과 호정을 번갈아 바라봤다.

“20분이면 됩니다.”

윤 비서는 장갑을 끼고 입에 사탕을 물었다. 짙은 박하 향이 났다. 언젠가 사탕을 왜 먹느냐고 물으니 윤 비서는 멀뚱한 눈으로 “맛있습니다.”라고 했다. 그게 전부라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계단 앞에서 기다리세요. 깨워서 내보낼 테니까.”

“네.”

윤 비서는 재영이 정리해둔 호정의 폰과 교복 셔츠, 사진 등을 챙겨둔 박스를 들고 방을 나가려다 잠시 뒤돌았다. 재영이 고개를 들어 눈으로 의중을 물었다.

“최정화 씨가 또 연락해왔습니다.”

“걔는 지치지를 않네.”

그런 빌어먹을 끈기로 나를 3년이나 좋아할 수 있었던 건가. 재영은 잠든 호정의 볼을 쓸었다. 호정의 얼굴 위에 하필이면 그날 봤던 정화의 얼굴이 겹쳤다.

그날 정화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호정의 교복 셔츠를 집어 던지며 이게 뭐냐고 바득바득 울어댔다. 재영은 호정의 셔츠를 주워 탈탈 털었다. 옷에 바닥의 먼지가 묻은 탓에 짜증이 났었다. 빨면 호정의 냄새가 사라질 텐데.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무심한 얼굴로 “이호정 셔츠.”라고 말하는 순간 정화가 베개를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었다. 또 뭐라고 했었는데. 재영은 잠든 호정의 얼굴을 살피며 정화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너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그리고 그다음. “이호정한테도 다 말할 거야. 너 미친 새끼라고.” 그리고 그다음….

그래. 그다음은 없었다. 그대로 달려가 베개로 정화의 얼굴을 내리누르고 버둥대는 팔을 두 다리로 잡아 눌렀으니까. 경호원 두 명이 달려와 말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여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차라리 그때 정화를 죽이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괜찮아요. 호정이 폰도 내일 바꿀 거니까.”

재영은 잠든 호정을 보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윤 비서가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그게 뭐 큰일이라고. 그렇지, 호정아? 너한테는 고등학교 내내 눈길도 안 주던 년이, 이제는 너를 찾고 있대. 혹시 기뻐?”

호정의 숨소리를 가까이에서 듣고 싶었다. 재영은 호정의 입술 가까이에 귀를 가져갔다. 웃음이 났다. 호정은 이런 순간에도 깨질 않았다. 게다가 늘 신기할 정도로 깊게 잠을 잤다. 어쩜 이렇게 자주, 이렇게나 깊게 잠을 잘 수 있나 신기했다. 재영은 이번 기회에 의사에게 호정의 몸에 안 좋은 곳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살피라고 할 생각이었다.

불이 났다며 다급하게 호정을 깨웠다. 호정을 먼저 내보내고 호정이 볼 수 없는 뒤뜰에 앉았다. 윤 비서가 준비해준 방화모와 장갑이 있었지만 굳이 쓰진 않았다. 시야를 가리는 게 싫었다. 두려움에 떠는 호정의 얼굴을, 불안함이 뒤엉킨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뒤뜰에 앉아 도망치는 호정을 바라보았다.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갈 것 같았던 호정이 계단의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재영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또 뭘까.

“한… 한재영.”

자신을 부르는 입 모양이 선명했다. 재영은 그런 호정을 보며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앞에 화산처럼 이글대며 불타는 별채에도 호정은 덜덜 떠는 눈으로 자신을 찾고 있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를 꺼내 입에 넣었다. 별채가 으스러지는 거센소리에 담뱃불 소리가 묻혔다.

“왜 안 가고 나를 찾는 거지?”

걱정? 불안? 인간들은 아주 평범한 시간에도 불안을 가정해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을 안고 산다고 하니까. 호정도 걱정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설마 나를? 재영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왜?”

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거지. 불씨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다시 이 불길로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쭈뼛거리는 호정의 모습에 짜증이 일었다. 지금쯤 계단의 중간에는 서 있어야 했다. 윤 비서와 부딪혀 계단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체됐다. 윤 비서가 짙은 연기 사이에서 손을 뻗어 사람들을 황급히 계단으로 밀어붙이는 게 보였다. 그 틈에 밀려 호정도 계단 아래로 밀려났다.

재영은 호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앨범에 있던 사진을 반으로 찢어 민재의 얼굴만 남은 사진을 불길이 이글대는 별채 쪽으로 던졌다. 어색하게 웃는 중학생 호정의 얼굴을 마주 보니 웃음이 났다.

“귀엽네.”

사진을 바지에 넣었다. 사이렌 소리가 집 주변을 감쌌다. 귀가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마치 구원의 울림과도 같았다. 재영은 안도감으로 짙은 숨을 내쉬었다. 매캐한 연기가 폐로 스몄다. 자신의 담배 냄새를 맡는 호정이 왜 그토록 기침을 해댔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재영은 마당을 내려오기 전 방화모와 장갑을 별채에 던지고 사람들 뒤에 붙어 집을 빠져나왔다. 소방차 사이 구급차가 두 대 끼여 있었다. 그중에 호정이 탄 게 있을 거다. 윤 비서라면 실수하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이 시킨 일이라면 죽더라도 해낼 사람이니 이번에도 호정을 계단에서 넘어지게 했겠지. 그렇다면 됐다. 재영은 땀에 젖은 이마를 털어냈다. 기분이 좋았다.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났다.

“재… 재영아.”

불타는 별채를 보며 웃던 재영이 고개를 돌렸다. 본채에서 카디건만 걸친 채 나온 엄마가 자신을 보며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가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어릴 때도 엄마가 저 얼굴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때, 어땠지? 어떤 결과가 나왔었지? 엄마가 분명 좆같은 선택을 했던 것 같은데.

재영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너무 놀라서… 엄마… 저 너무 허탈해서 웃은 거예요. 제가 별채 엄청 아낀 거 아시죠?”

엄마는 대답하지 않고 옆에 선 다훈의 팔을 세게 붙들었다. 그제야 화염에 휩싸인 별채만 보고 있던 다훈이 고개를 돌려 재영과 세희를 바라보았다.

“왜? 세희야. 괜찮아. 불, 금방 끌 거야.”

다훈은 세희의 어깨를 안으며 다독였다. 곧 다훈은 불안한 눈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아들을 안심시키려 억지로 입술을 끌어올렸다.

“재영이 네 친구, 계단 내려오며 다리가 좀 다친 모양이라 병원에 갔어. 안 보여서 걱정했니?”

“네.”

이제야 기억났다. 엄마가 했던 좆같은 선택. 재영은 두려움에 떠는 세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는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이다. 평생 수발드는 사람들과 살아온 사람이었다. 자기 뜻대로 뭐 하나 선택하는 게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빠에게 그 선택권을 넘길 것이다. 재영은 열 살 때를 떠올렸다. 병원에 가는 길 내내 말없이 창밖만 보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빠의 선택이 더 좆같았던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호정을… 찾아가겠네.”

재영은 고개를 숙였다. 마른 입술을 적시고 다시 고개를 들어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세희를 똑바로 응시했다.

“씨발.”

윤 비서에게 맡긴 일이니 일 처리를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계단에서 떨어진 호정이 다른 부위도 아닌 무릎을 다치게 된 건 운이 좋았다. 재영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당연히 믿는 종교도 없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신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똑똑한 자신의 편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신이나 선인이 좋아했던 건 영리한 사람이지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멍청한 것들은 그들이 하는 말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타자들에게 순리를 옮겨주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들이었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수술은 새벽이 다 넘어갈 정도로 오래 걸렸다. 무릎의 인대와 인대 사이에 불가피하게 금속 지지대를 박았다. 비행기 탑승이나 다른 상황에서 위치추적용 칩을 들키지 않으려면 금속 삽입 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과 칩 설치 시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의사를 데려와 수술까지 마치고 나니 꽤 긴 시간이 흘러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불을 내기에도, 수술을 하기에도, 호정을 혼자만 보기에도 매우 만족스러운 시간 정도였다.

지지부진한 수술이 끝나고 외부 의사가 병원을 떠난 후, 재영은 호정이 누운 병실 소파에 앉아 잠든 호정을 쳐다보았다. 의사에게는 수술 후 무통주사와 함께 수면제를 놓아달라고 했다. 호정의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나자 아침이 다 되어 있었다. 재영은 피곤한 눈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깁스를 한 호정의 두 다리가 마음에 들었다. 저 상태가 아니었다면 호정이 다시 민재의 집에 찾아갈지도 몰랐다. 해맑은 얼굴로 어머니가 주신 민재 사진을 잃어버렸어요, 폰을 잃어버려서 어머니 폰 번호도 잃어버렸어요. 이따위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올지도 몰랐다.

호정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자신이 아니니까. 재영은 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재영아?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넌 괜찮니?”

병실 문이 열리고 호정의 엄마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왔다. 소란에도 호정은 다행히 깨지 않았다. 재영은 호정의 엄마에게서 전혀 궁금하지 않은 호정의 아빠 안부를 들었다. 재영 덕에 호정의 아빠가 많이 나아지고 있다는 이야기, 그 사람이 예전에는 그래도 번듯한 사업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호정의 엄마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보였다. 호정과 그리 닮아 보이지 않았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었다. 잠든 호정만 보고 싶을 뿐, 그의 엄마가 늘어놓는 이야기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시끄러운 경적으로 가득한 고속도로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게 훨씬 홀가분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귀찮은 티를 낼 수도 없었다.

“호정이는 참 잘 자네요. 언제나.”

어색하지 않으려 던진 실없는 이야기에 호정의 엄마가 호정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며 미소 지었다.

“그러니?”

“네.”

호정의 엄마는 기쁜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음소리를 냈다. 땀에 젖은 호정의 볼을 매만지는 손길을 빤히 보았다.

“아직 애 같아서 그래. 아기 때부터 우리 호정이는 스트레스 받거나 견디기 힘들면 엄청 오래 깨지 않고 자. 그래서 두통도 잦고. 우리 애가 사고도 좀 치고 공부도 못했는데… 그래도 성정이 못된 애는 아니라서. 오히려 여려.”

“…네.”

“아빠 사업 안 되고 그 집으로 이사했을 땐 학교도 안 가고 이틀을 잠만 자기도 했으니까.”

재영은 호정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는 호정의 엄마를 관찰했다. 책에서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감정 중 가장 고도로 발달 된 감정이 내리사랑 즉,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이라고 했었다. 타인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 될 수 없고, 타인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될 수 없는 여타 다른 사랑에 비해 내리사랑은 자식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 되고 자식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이 된다고 했었다.

재영은 턱을 쓸며 호정의 엄마를 빤히 보다, 다시 잠든 호정을 보았다. 그 대단하다는 내리사랑이라고 명하기엔 저 여자는 호정에게 준 게 너무 없었다. 재영은 입술을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저 잠시만, 물 좀 마시고 올게요.”

“응. 아유. 피곤하겠다. 그래, 어서 다녀와. 잠은 좀 잤어?”

“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호정의 엄마가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재영은 복도로 나와 비상구를 찾았다. 비상구 벽에 등을 기대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은 연기를 빨아 마시자 어젯밤이 떠올랐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간절한 눈빛은 호정과 매우 잘 어울렸다. 자신의 팔을 붙들고 도와달라고 매달릴 때보다 어제의 눈빛이 더 간절했다.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보니 입술을 핥아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영은 입술에 물린 담배를 빼고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담배를 배운 후로 이보다 더 중독성 있고 맛있는 건 찾기 힘들 거라 확신했던 적도 있었다. 호정의 혀와 진득하게 늘어지던 타액을 되감았다. 어느새 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하고 어깨의 근육을 따라 손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호정은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말에도 군대가 면제된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기뻐한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말을 들은 호정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지근했다. 속살거리는 목소리로 십자인대를 중얼대던 호정이 고개를 들어 재영을 빤히 쳐다봤다.

“이거 다치면 면제야?”

호정은 자신의 다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군대 면제를 생각도 해보지 않고 살아온 사람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저 앙큼하게 나풀대는 속눈썹과 어울리는 여전히 붉은 눈 밑을 한 이호정은, 다친 자신의 다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재영은 호정의 눈을 따라 호정의 깁스한 다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너 때문 아니야. 재영아. 어?”

호정이 가까스로 웃는 게 보였다. 재영은 생각지도 못한 호정의 말에 그의 무릎을 다시 지그시 쳐다보았다. 호정이 자신의 팔을 건드리며 부르지 않았더라면 침대에 앉은 호정의 존재조차 잊었을지 몰랐다. 벌써 귀에 삑삑대며 호정의 위치를 알려줄 것만 같은 기특한 존재가 이 안에 있었다.

“아니. 네 다리가 다친 건 정말로 나 때문이야, 호정아.”라고 당장이라도 진실을 쏟아내고 싶었다. 일그러지는 호정의 얼굴을 찬찬히 음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새 폰을 주었을 때도, 호정은 전혀 의심이라는 게 없었다. 좀 더 영특하고 똑똑하게 “왜 자꾸 내가 폰을 잃어버리지.” 같은 질문을 하거나 “이전 폰이랑 같은 번호로 바꿔야겠어.”, “십자인대를 다친 건데 왜 깁스를 하는 거야.”와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을 텐데. 호정은 재영이 하는 일이라면 의심 없이 호의를 받았다. 아마 김민재의 호의도 그런 식으로 받았을 거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여태 그 성범죄자 새끼의 호의나 받아먹는 인생이었겠지.

그래서 더 마음을 굳혔다. 이호정은 똑똑해져야 했다. 자신을 상대로 좀 더 긴 이야기를 풀어가려면, 지금보다 더. 자신, 한재영에 가까워져야만 한다.

“진짜 너 때문 아닌데…….”

호정이 고개를 숙인 채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재영은 당장이라도 저 작은 얼굴을 잡아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걸 참으며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호정이 자신을 따라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시간이 더 지났다. 재영은 윤 비서의 연락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차고 넘치는데, 부모라는 것들이 도움이 되긴커녕 이런 순간에 일거리만 더 던져주는 것 같았다. 둘 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단 비서분이 연락이 와서. 미안해. 금방 올게.”

“미안은. 얼른 가. 나 혼자 잘 있어.”

혼자 잘 있는 건 안 되지. 재영은 얄미운 호정의 볼을 쓰다듬었다. 호정은 마음에 쏙 드는 예쁜 말을 하다가도 지금처럼 문득문득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병실에서 나오자 그 앞에 서 있던 윤 비서가 재영의 옆에 바짝 붙었다.

“호정이 엄마가 볼 수도 있으니 한 걸음 뒤요.”

“네. 도련님. 죄송합니다.”

윤 비서는 걸음을 뒤로 물렀다. 재영의 뒤에 서서 재영의 걸음 속도에 자신의 발을 맞추었다. 재영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윤 비서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힘을 확인하고서야 비상구 계단을 통해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두 분은 아직 유중석 박사와 이야기 중입니다.”

윤 비서는 차에 오르자마자 보고를 마쳤다. 보고가 끝난 후엔 언제나 그렇듯 룸미러로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생각과 달리 재영의 상태가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윤 비서는 눈썹을 매만졌다. 주인의 기분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니 섣부르게 다른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재영은 뒷좌석에 앉아 호정이 있는 병실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호정은 중얼중얼 아프다고 말하기도 했고, 배가 고프다며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호정이 말을 할 때마다 자꾸만 사진 속 중학생 모습을 한 호정이 떠드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왜 웃으십니까?”

운전하던 윤 비서가 물었다. 재영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호정을 보기 이전에도 세상에 귀여운 것들은 많았다. 하굣길에 보던 길고양이가 그랬고, 다 죽어가던 작은 병아리가 그랬고, 골목마다 오줌을 싸던 동네 강아지들이 그랬다. 팔을 뻗고 웃기만 해도 알아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던 강아지와 같았다. 그렇게 귀여운 것들도 목을 비틀고 나면 전혀 귀엽지 않던데… 호정은 어떨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뒷덜미가 저릿하게 아파져 왔다.

지하를 빠져나온 차는 붐비는 도로의 가운데에 안착했다. 일단은 사무실로 가야 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영국으로 가야 하는 시간과 준비해야 할 것들의 간극이 넉넉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급하게 주치의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 생각해낸 해결 방안이 또 고작 그따위 멍청한 짓이라는 것에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재영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차의 갈색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시트와 시트 사이에 꽂힌 노란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윤 비서. 이 차에 엄마가 탔었어요?”

“저에게 알린 적은 없었습니다.”

재영은 손가락으로 시트 사이에 꽂힌 노란 종이를 꺼냈다. 역시나 부적이었다. “하.”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 씨발년은 어디서 자꾸 이런 걸 사 오는 거야.”

재영은 부적을 구겨 창밖으로 던졌다. 욕실에 붙이는 걸 허락해줬더니 엄마라는 게 끝도 없이 기어올랐다. 이래서 처음부터 봐주면 안 되는 거였다. 욕실의 천장에 부적 한 장이 붙었을 때 목을 잡고 끌고 와 탕에 머리를 처박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입원은 했을지언정 적어도 지금의 무례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재영은 창문을 좀 더 내렸다. 인간들은 봐주면 끝도 없었다. 발목까지 기어오르는 건 귀엽지만, 한번 봐주면 어깨까지, 눈앞까지 기어오르는 게 인간이라는 종자의 특성이었다.

그러니까 또. 또였다. 졸업식에서 호정에게 명함을 준 것도 봐주었다. 호정의 방에서 짐 정리를 하다 아빠의 명함을 보았을 때 들었던 배신감을 티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었다. 그랬더니 이젠 화재를 빌미로 또 자신을 떠보려 하고 있었다. 주치의를 만났으니 지난번 주치의와의 면담 이야기를 들을 테고, 언제든 아들의 인생에 낀 가장 이질적인 존재, 이호정을 찾아 확인하려 들 게 뻔했다.

“날 진짜 사랑하면, 씨발… 날 좀 가만히 두라고.”

재영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받쳤다. 내리사랑은 존나 대단한 거라며. 그런데 왜 저것들은 나에게 이따위 짓만 하는 거지, 생각하자 분노로 속도 메스꺼워졌다. 그냥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죽여 버릴까. 가지고 싶은 거든 가져야 할 것이든, 지금이라면 다 필요 없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 포기하고 둘을 죽이는 것으로 대체가 될 수도 있…….

-재영이 있을 때는 괜찮더니. 가니까 배고파…….

마침 호정의 중얼대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재영은 입술을 말고 고개를 들었다. 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며 열린 창으로 묵직한 바람이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흩뜨리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복잡하던 머리가 가뿐해지고 들끓던 마음도 차분해졌다. 시트에 몸을 기댔다.

“…….”

대체 될 수 없다. 이번에 가지고 싶은 것은,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은 이전 것들과는 달랐다. 재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늘을 가린 몇 조각의 구름을 관망했다. 창으로 스미는 바람을 피하지 않고 맞았다.

* * *

예약이 있어 면담이 어렵다는 주치의의 말에도 다훈과 세희는 무작정 병원을 찾았다. 아들의 상태에 대해 확신 있는 말을 해주는 건 주치의뿐이었다. 세희에게서 “별채 불탈 때. 재영이 웃고 있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다훈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아들이 나아지고 있다는 건 자신들의 희망이었지, 의학적으로 증명된 건 아니었으니까.

병원에 도착해 시간은 언제든 상관없다고, 그게 언제가 되든 무조건 기다리겠다고 했다. 무턱대고 상담실이 있는 복도 대기석에 앉아 주치의를 기다렸다. 십여 분이 흐르고 나서야 상담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환자는 없었다. 주치의는 상담실 문을 열고 다훈과 세희에게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들어오세요.”

세희가 먼저 상담실로 들어갔다. 다훈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세희는 병원으로 오는 길 내내 속으로 곱씹고 다듬은 말을 쏟아냈다.

“우리 재영이, 약 계속 먹고 있는 거죠? 마지막 처방은… 아니, 지금 몇 가지 약을 먹고 있는 거죠?”

주치의는 모니터 화면의 전원을 껐다. 어두워진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자신은 사이코패스만 수백 명을 상대한 의사다. 자신이 상담한 사이코패스 사례집으로 탑을 쌓으면 이 병원을 채우고도 넘칠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가 묻는다면 그건 자신의 판단과 결정뿐이라는 의미였다. 주치의는 마지막으로 본 재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명백한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죄송하지만, 저한테 처방받은 지 몇 달은 되었습니다.”

“이제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

세희의 얼굴에 금세 기대가 찼다. 화재가 있던 날, 재영은 정말 놀라고 허탈해서 웃은 것인데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주치의는 입술을 꾹 닫았다.

“아뇨. 다만 이제 성인이라 부모님께 연락드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세희가 고개를 돌려 다훈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되묻는 동작에 다훈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화되었군요. 얼마나 나빠진 겁니까?”

“아니요. 아버님.”

주치의는 검은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피해 세희와 다훈을 차례로 훑었다. 재영의 마지막 모습이야 지금도 눈앞에 선연했다. 자신이 봤던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가장 영악하고 계산적인 존재. 언제든, 누구든, 마주치는 모든 상황과 대상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넣는 대범함까지 가진 존재. 그게 재영의 본모습이었다. 주치의는 여전히 자신의 학설에 확신이 있었다.

“사이코패스는 나아지지도, 괜찮아지지도, 악화되지도 않아요. 그냥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아니… 하지만!”

다훈이 세희의 팔을 끌어 손을 맞잡았다. 다급하게 말하려던 세희가 입을 다물고 격해진 숨을 참으려 애썼다.

“갑자기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주치의가 말했다. 다훈은 세희의 손을 꽉 붙들었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뿐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인 재영은 자신들에게 기쁨이자 아픔이었다. 그 기쁨과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은 세상에 서로뿐이라는 걸 다훈과 세희는 잘 알았다. 세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다훈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세희에게 내밀고 다시 주치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재영이가 사는 별채에 불이 났습니다. 지나가던 노숙자가 불을 질렀다는데. 사실 저희 동네는… 그런 노숙자가 잘 없는 곳이기도 하고. 별채만 불탄 것도…….”

다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좀 의심스러워서요.”

“별채에 재영 씨 말고 또 누가 있었나요?”

주치의의 말에 다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재영이 고등학교 친구가 몇 달 전부터 같이 지내고 있었어요.”

“한 명이죠?”

“…네.”

“그렇겠죠.”

주치의는 책상 위 볼펜을 들었다. 널브러져 있던 종이를 끌어와 끝을 다듬었다. 하나로 뭉친 종이 위에 펜을 들어 세웠다. 사이코패스는 다수와의 만남을 선호하지 않는다.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을 절대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넣지 않았다. 오로지 그 존재를 혼자 독점하는 성향이 짙었다.

“화재 피해자는 여자겠네요. 이제 필요 없어진 거고.”

“아, 아니요.”

“네?”

종이 위에 글자를 빠르게 써 내려가던 주치의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인가요?”

“…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주치의는 작게 “흠.” 하고 숨을 쉬었다.

“재영이 성향이… 여자 쪽이 맞습니까?”

피식 웃는 주치의의 말에 세희가 눈을 바들바들 떨었다. 다훈은 재영이 고등학교 때도 집에 남자를 들였다는 사실을 주치의에게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손 안에 잡힌 세희의 손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네. 맞습니다.”

“방화로 그 친구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나요?”

“아니. 아니에요. 그 친구는 무사해요.”

“…그럴 리가요. 재영이가 친구를… 절대 불가능합니다.”

주치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볼펜마저 종이 위에 던지듯 놓은 주치의는 미간을 바짝 좁히고 인상을 찌푸렸다.

“성적으로 끌리는 대상이 아니고서야 절대 옆에 둘 리가 없습니다. 재영… 한재영 씨가 굳이 위험하게 불까지 냈다면, 쓸모없는 대상을 살려둘 이유도 없죠.”

다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졸업식 날 보았던 호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리 자신이 그쪽으로는 무지하다고 해도 호정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여태 재영이 들였던 남자와 여자의 숫자만 해도 그랬다. 재영은 단 한 번도 같은 인물을 두 번 이상 요청하는 적이 없었다. 호정이라는 친구는 벌써 몇 년이나 재영과 친구라고 했다. 당당히 재영과 친구라고 하던 호정의 얼굴, 다훈이 지금 믿고 싶은 건 그거 하나였다. 볼펜이 책상 위를 굴러 그 끝에 간신히 걸렸다. 주치의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도 재영이가 사이코패스라는 걸 아나요?”

“…….”

다훈이 세희를 쳐다보았다. 세희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직도 이따금 낯선 모습을 보이는 아들이었지만 정말 가끔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들처럼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숨기려면 숨길 수 있는 걸 굳이 타인에게 알릴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겠죠. 아마 철저하게 속였을 겁니다. 저나 부모님들한테 그러듯이 억제하고 참으면서요.”

주치의는 다시 마지막 날 본 재영의 모습을 상기했다. 자신의 뒤에 서서 빠르게 병명을 타이핑하던 재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날의 재영만 떠올리면 등으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 소름이 돋았다.

“확인해볼게요. 벌써 몇 년이나 친구니까… 말했을 수도 있……!”

“확인하셔도 마찬가지예요. 재영에게 인간이란 지금 필요한 인간과 버리거나 버릴 인간 두 가지뿐입니다. 친구라는 건 곧 버릴 존재인데 재영이가 자신의 병을 말할 리 없죠. 장담합니다. 절대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세희가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듣기 힘들었다. 언제와도 여기는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재영의 병이 아직 심각할지 모른다는 절반의 두려움과 어쩌면 정말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기를, 이제는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절반의 기대로 찾아온 게 죄라면 죄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다훈이 세희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세희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다훈의 품에 안겼다. 걷기 힘들 정도로 다리에 힘이 들지 않았다. 비틀대는 세희를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다훈은 세희를 안아 상담실 문을 향해 걸었다.

“재영이에게 계속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으세요. 두 분 다요.”

등 뒤 의사의 말에 다훈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걱정이라면, 감사합니다.”

세희를 안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호정이 있는 병원에 가야 했다. 확인해야 할 것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4권에서 계속됩니다.>

비정상인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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