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이코패스(2)
루마니아 출생 한국인 남자의 신상에 대해 좀 더 알아둘 것을 부탁했다. 약점이야 이미 그가 부탁한 것으로도 충분했지만, 꽤 중요한 역할을 맡긴 만큼 약점은 많을수록 좋았다. 무엇이든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백화점에 들러 호정에게 필요한 노트북과 패드를 사고, 그 안에 있는 서점에서 책도 몇 권 샀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호정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책에 쓰다 보니 차는 어느새 호정의 병원과 가까워져 있었다. 재영은 책을 덮고 자신의 폰을 호정의 폰과 연결했다. 일하느라 듣지 못했던 호정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자고 있다면 숨소리를 듣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 아니에요. 너무, 너무 미안해서… 내가. 다 내 탓, 내 탓인데. 우리 집에서. 그런…….
-…세희 씨.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였다. 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부모님이 호정을 찾아갈 거라는 건 진즉에 예상했지만 이렇게 당일에 바로 올 줄은 몰랐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창 너머 병원 입구가 보였다.
“차 세워요.”
“네. 알겠습니다.”
재영은 입구에서 내려 다급히 로비로 뛰어들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빼려다 귀에 들리는 호정의 목소리에 걸음을 늦추었다.
-…네. 저는 원래 안 좋은 일이 많은 편이라. 그러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불난 게 두 분 때문도 아니고. 이것도 금방 나을 거래요. 재영이 만나고는 오히려 저한테는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어요. 안 좋은 일도… 금방 해결되고.
“하, 이호정….”
재영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부모님과 호정과 나누는 대화의 아귀가 들어맞는다는 게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터지는 웃음을 도무지 참기 힘들었다. 결국 사람들을 피해 비상구로 들어왔다. 위로 두세 계단을 동시에 밟고 올라가기 시작하면서도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네. 지금은 괜찮으니까. 재영이가 괜찮지 않다고 해도 제가 괜찮습니다.
호정이 나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재영은 격해진 숨을 고스란히 내뱉으며 고개를 젖혔다.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 바닥에 집어 던지고 나머지 계단을 빠르게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호정을 더욱 빨리 보고 싶었다. 처음엔 병실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 새도 없었다.
“저한테 말하고 오시지.”
재영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호정의 엄마가 한 말을 떠올렸다. 호정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잔다고 했다. 두통도 동반된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재영은 호정에게 다가가 이마부터 짚었다.
“머리 아프지 않아?”
“괜찮아.”
세희가 다훈의 팔을 끌었다. 주치의가 했던 말을 떠올린 탓이었다. 재영이가 정말 저 남자아이를, 하는 의구심에 찬 눈빛을 다훈도 모르지 않았다. 다훈은 차라리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재영이 누구를 친구로 두고 좋아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 자신들이 염원하던 일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대상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이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저 아들이 평범한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그 전제가 더 필요했다.
“저녁 밖에서 같이 먹을까요? 엄마, 아빠 두 분 다요.”
재영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세희는 종일 자신을 불안하게 하던 불안감이 아들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모조리 사라지는 걸 느꼈다. 게다가 주치의의 말은 틀렸다. 재영은 호정에게 자신의 병을 숨기지 않았다. 세희는 그 생각만으로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우리는 좋은데. 다훈 씨. 그렇죠?”
“응.”
재영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 참는 방법을 다시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연습했었다. 지독히도 하기 싫은 일들뿐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우위의 존재로 살아남으려면 좋아하는 척하며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기댈 수 있는 게 필요했다.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무언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부모라는 것들의 목을 분질러버리고 싶은 자신의 살욕을 잊게 할 무언가.
재영은 뒤로 손을 뻗어 호정의 허벅지를 찾아 주무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가 살며시 내렸다. 손에 들어오는 말캉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잊지 않기 위해 손바닥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살뜰히 주물렀다. 호정이 아픔에 잠시 신음을 내는 게 들렸다. 재영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귀를 메울 정도로 시끄럽게 짖는 자아의 목소리를 잠식시켰다. 마음이 평소처럼 다시 차분해졌다.
“아, 호정이랑 런던에서 지낼 집. 이제 다 지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재영은 침대 끝에 걸쳤던 몸을 일으켜 자신의 부모가 앉은 소파로 다가갔다. 재영이 다가오자 세희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이게, 제가 지낼 집이고. 이 집이 호정이가 지낼 곳인데…….”
“어? 우리 따로 지내?”
세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재영이가 두 채를 구하긴 했는데, 가까워서…….”
엄마의 눈에도 호정이 귀여운 모양이었다. 재영은 웃는 자신의 엄마를 따라 바들대며 입꼬리를 올렸다. 엄마는 자주 울었고 또 그만큼 자주 웃었다. 아주 짜증스러운 존재임이 분명했다. 이런 여자를 어떻게 데리고 사는 거지, 생각하며 아빠를 보니 아빠도 엄마처럼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재영은 입꼬리를 내리고 호정을 쳐다보았다.
재영은 호정에게 다가가 사진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재영이 지낼 한옥과 벽돌로 지어진 호정이 지낼 집 사진을 보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런 표정이 무슨 의미라더라. 재영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걱정? 불안? 재영은 혹시나 싶어 호정을 안심시키려 말을 덧붙였다.
“바로 앞집이야. 가까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도 호정이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냥 너랑 같이 지내면 안 돼?”
걱정이 아니구나. 재영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지금 호정이 보이는 표정에 든 감정은 서운함이라는 거다.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가장 강력한 호감 표현 중 하나이자 친밀한 관계에서만 느끼는 감정. 관계의 선에서 안쪽에 자리한 사람에게만 느낀다는 감정. 재영은 호정의 표정을 잊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말하는 것도 잊은 채 호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호정은 서운함을 느낄 때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잊지 않아야 했다. 속으로 방금 전 호정의 표정을 되감고 또 되감아 각인하듯 머리에 새겼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재영은 안간힘을 써 웃으려 애썼다. 엄마가 하는 말, 아빠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다. 감정은 엉망으로 들끓다가 아무런 잔재도 남기지 않고 소각되고 다시 미세한 재로 뭉쳐 머리를 채웠다.
왜 자꾸 멍청하게 나를 믿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과 왜 아직도 나를 의심하느냐는 양가 질문이 공존했다. 다훈과 세희의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혼란스러우니 질문을 던지는 자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영은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다시 호정에게 가보겠다고 했다. 세희가 눈을 깜박거리며 다훈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집에서 다친 거라 마음이 많이 쓰여서요.”
재영이 웃으며 말했다. 잔잔하게 걸친 미소에는 걱정과 안쓰러움까지 담았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연기였다. 어렵지 않은 연기였다. 차에 타기 전 다훈은 더듬더듬 손을 올려 재영의 어깨를 다독였다.
“재영아. 아빠랑 엄마는 네 편이야. 알지?”
“네. 알죠.”
재영은 멀어지는 다훈의 차를 보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런데 왜 의사를 찾아갔어요.”
비스듬한 사선으로 꺾인 도로와 그 위를 위태롭게 굴러가는 차. 그 안에 앉은 두 사람. 재영은 다시 고개를 세웠다. 세상이 제대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하늘과 땅 그 사이의 모든 것이 위태로웠다. 재영은 열 살 때, 자신의 삶이 사선이 되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언제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자신이 보는 게 정방향이라 믿었는데 열 살 이후로 자신의 것만 틀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찬찬히 안을 살펴보면 실상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틀릴 리 없었다.
윤 비서가 다가와 재영의 옆에 섰다. 윤 비서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도 재영은 한참을 더 그 위태로움 속에 자신을 방치했을 것이다.
“다시 호정이한테 갈게요.”
“네. 차 준비하겠습니다.”
“호정이는 지금 뭐 해요?”
재영은 자신이 감시하지 못할 때는 도청을 윤 비서에게 일임했다. 윤 비서는 심드렁한 얼굴로 “잠만 자던데요.”라고 말했다. 호정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차에 오르던 윤 비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공부도 좀 하려고 한 거 같긴 한데, 아까부터는 그냥 잠만 자는 것 같습니다.”
“네.”
고민이 많을 때, 스트레스를 받을 때 잠을 많이 잔다는 호정의 엄마 말은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의사에게 이제부턴 무통주사 대신 수면제만 넣으라고 했으니 더욱 잠이 쏟아졌을 거다.
“많이 자야 잘 크죠.”
윤 비서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룸미러에 비친 주인의 얼굴이 좀 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뿐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윤 비서를 보내고 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불 꺼진 병실에 들어가기 전 의사에게 다시 수면제를 부탁했다.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나가려던 의사가 머뭇대며 다시 들어왔다.
“수술 집도한 의사가 처음 보는 외래 의사라서. 수술 경과는 저희가 따로…….”
“됐습니다. 괜찮아요.”
의사는 재영의 눈치를 살피며 차트를 펼쳤다. 병원이 소속된 재단 아들의 친구가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집도의가 외래 의사라고 했다. 면목이 서질 않는 눈치였다. 의사는 나가지 않고 서서 끙끙대며 목을 가다듬었다. 꽤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 몸짓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의사는 제가 따로 부른 사람이었으니까.”
“따로 부르신 이유가… 저희 병원 의료진 수준은 어느 곳과 비교해도. 아. 죄송합니다. 저보다 더 잘 아실 텐데.”
의사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재단 소속 의사들의 수준이 의심스러운 건가 하는 염려가 깃든 말투였다. 재영은 고개를 숙이고 침대에 누운 호정의 얼굴을 살폈다.
“수면제는 얼마 동안 효과 있을까요?”
“아마 내일 아침까지는… 아.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몸에 해로운 건 아니…….”
“아니요.”
황급히 답하는 의사의 말을 재영이 끊었다. 재영은 미동조차 없이 잠든 호정의 얼굴을 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럼 좀 나가주실래요? 진짜 시끄러워서요.”
“네?”
의사가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 중인 듯 보였다.
“우리 애 깨울 심산이세요?”
의사는 멋쩍은 얼굴로 목을 몇 번이나 더 긁으며 물러났다. 허겁지겁 차트를 추슬러 나가는 폼이 다급했다. 재영은 의사가 나가고 나서야 호정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까 왔을 때부터 계속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엄마와 아빠가 예고 없이 온 탓에 호정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우리 부모가 둘 다 눈치가 좀 없어. 불편했지, 도란도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재영은 물기 젖은 호정의 뺨과 이마를 어루만졌다.
호정의 몸을 살짝 옆으로 옮기고 그 옆에 누웠다. 호정은 자세히 볼수록 타고난 것들이 많았다. 그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는 의미이자 대체될 존재를 찾기 힘든 희소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재영은 종일 힘들었던 자신을 호정이 다독여주길 바랐다. 링거 꽂힌 호정의 팔에 볼을 붙이고 그 품에 안겼다. 눈을 감았다. 호정의 숨소리가 더욱 잘 들리기 시작했다. 호정이 틀어주는 노래들보다 호정의 숨소리가 더 듣기 좋았다.
“…호정아.”
나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죽이고 싶어. 나는 그래. 타고나기를 그렇대. 그냥 눈앞에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다 죽이고 싶어져. 어릴 때는 죽였고, 커서는 죽일 수가 없어서, 이 병원 영안실을 자주 찾았어.
재영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창으로 비친 달빛. 색색대는 고른 숨소리. 하얀 달빛에 비친 그보다 더 하얀 호정의 얼굴. 사선으로 기울어 그 무엇도 세울 수 없던 자신의 삶이 다시 원래의 각도로 틀어짐을 느꼈다. 똑바로 펼쳐진 세상을 재영은 의문에 가득 찬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평평한 세상에 발을 디디고 서도 이제는 기울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재영은 호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을 내려 볼도, 목도 그 아래 허리를 살짝 안아도 보았다. 호정은 아무런 반항 없이 곧이곧대로 몸을 맡겼다.
흐트러진 호정의 베개를 바로 했다. 그 아래 있던 다훈의 명함이 흘러내렸다.
“…….”
재영은 명함을 쥐었다. ‘한다훈’이라고 적힌 이름이 낯설어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호정의 베개 아래 집어넣었다. 재영은 호정의 목 뒤로 팔을 넣어 안았다. 호정의 몸이 흔들리며 매달린 링거 줄이 흔들렸다. 호정이 아빠에게 전화하는 순간, 자신은 아빠를 더 간절히 죽이고 싶어질 거다. 그때는 바람이 아니라 행동이 될 수도 있었다. 재영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아빠를 죽이는 건 문제 될 게 없었다. 엄마도 며칠은 징징거리겠지만 어찌 됐든 다시 살아갈 테고. 자신은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후우…….”
단 하나 거슬리는 게 있다면 아직 자신의 아빠가 재영에겐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회사 지분은 절반은커녕 10%도 물려받지 못했다. 재단은 더했다. 재단의 상속 절차는 더욱 까다로울 거다. 아빠가 급작스럽게 죽으면 그다음 후계자로 재영을 지지해줄 이사진의 수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경력도 부족했다. 아직 스무 살인 자신을 믿어줄 사람은 없다는 걸 재영은 너무나 잘 알았다. 고로 아직은 아빠를 죽일 수 없었다.
또 명함을 버리는 건 무리였다. 베개 아래 놓아둔 명함이 사라지면 아무리 호정이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은 재미도 없었다. 흥미롭지 않았다. 재영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호정의 목을 감싼 손을 움직여 말랑거리는 호정의 속살을 조물조물 만졌다.
호정이 스스로 판단해서 자신의 아빠에게 전화를 하지 않게 된다면 좋을 텐데.
“호정아. 우리 아빠랑 엄마는 내 편이래.”
재영은 호정의 목을 손톱을 세워 긁었다. 여린 살결 위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그러니까 걔들한테 전화하지 마. 걔는 너 못 도와줄 거야. 응?”
재영은 다시 몸을 눕혔다. 호정의 옆에 누워 눈을 감고 호정을 상상했다.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는 호정의 모습을 볼 때마다 처음 골목에서 마주친 그 모습이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옷을 벗겨 가장 눈에 띄는 부위마다 기다랗고 흉흉한 상처를 내고 싶었다.
“이 세상에 널 돕는 건 나뿐이야. 나만 네 편이거든.”
재영은 손바닥으로 호정의 가슴 위로 덮어 지그시 다독였다. 아기를 재우듯 고요하고 차분한 움직임이었다. 손가락 끝에 들었던 힘이 다 풀릴 때까지 다독이는데도 지겹지 않았다.
얽혀있던 일을 하나씩 해결하고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재영은 오랫동안 참고 있던 긴장을 풀었다. 그제야 모든 피곤이 쏟아지며 자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내내 자신을 붙들고 있던 불편함과 불안함마저 사라졌을 땐 비행 내내 잠만 자고 일어난 상태였다. “많이 피곤했어?” 묻는 호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줄곧 피곤했었어. 줄곧 불편했고, 내내 불안했었어. 마음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튀어 올랐다. 호정이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영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삼켰다.
이제 드디어 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마음은 평온함과 동시에 다음 준비로 바쁘고 복잡했다. 학기 전까지 두 달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호정이 자신처럼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여전히 미지수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주면 조금이라도 따라오려나,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신이 들었다.
자신처럼 생각하는 이호정.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된 게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같은 이호정. 그것도 그것대로 마음에 들었다. 보통은 이런 문장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던가. 재영은 자꾸만 웃음이 났다.
“아름다운 표현이야.”
“진짜?”
호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좀 전 호정이 무슨 말을 했던가. 중요한 말은 아니었을 거다. 재영은 캐리어를 한 손으로 옮겼다. 빈 나머지 손으로 호정의 볼을 톡 건드렸다. 호정이 의아한 눈길로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호정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저 머리통에 든 생각이 무엇인지, 다음 행동이 어떤 것인지 예상 가능할 것이다.
호정은 금세 의아함을 잊고 재영의 집과 자신이 살게 될 집을 번갈아 보기 바빴다. 자신의 것이었던 별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지은 별채엔 방의 개수도 이전과 동일하게 맞추었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했던 지하실을 마당의 크기만큼 넓게 뚫어두었다.
“근데 진짜 따로 안 지내도 되는데.”
호정이 중얼거렸다. 재영은 입을 꾹 다물고 잔잔히 웃었다. 따로 지내야 네가 나를 찾아오게 되잖아. 그게 더 재미있고. 너는 그런 꼴이 더 예쁜 아이잖아.
호정은 영문도 모른 채 재영을 따라 미소 지었다. 호정이 자신을 따라 웃는 건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았다.
우선 호정의 집부터 가기로 했다. CCTV의 위치와 화면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윤 비서가 수차례 확인했고 자신도 몇 번의 수정 끝에 위치와 각도를 승인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호정이 움직이는 건 달랐다. 호정의 움직임에 가장 맞는 위치와 빛, 조명까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2층에 올라 캐리어의 짐을 푸는 사이, 윤 비서의 전화가 울렸다. 윤 비서는 지금 최정화와 함께 있는 상태였다. 한국에는 참 귀찮은 것들이 많았다. 똑똑하면 귀찮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화 역시 그리 똑똑하지는 않았다. 이미 수차례 경고해줬음에도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고 지속적으로 재영에게 전화를 걸어댔다. 경고를 줬음에도 어기는 건 죄였다. 죄에는 그에 걸맞은 벌이 따라야 했다.
재영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쳐 거실을 어둡게 했다. 어두운 상태에서도 영상이 잘 보일까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잠깐 폰을 열어 확인하니 어둠 속에서도 호정의 움직임과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소파의 등받이에 자리한 카메라가 호정의 반반한 뒤통수를 담아냈다. 재영은 픽 웃으며 커튼 앞을 가리고 섰다.
윤 비서는 시킨 대로 적절한 시간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뒤에서 숨을 헐떡이는 건 최정화일까, 생각했다. 그것조차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네. 아니에요. 확인 안 한 제 탓이죠.”
호정이 고개를 움직여 자신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입 모양을 보고 있자니 또 슬며시 웃음이 났다. 다가온 호정의 앞머리를 흩뜨렸다. 눈썹 위를 덮으며 내려온 머리카락에 호정의 눈동자가 반쯤 가려졌다. 재영은 전화를 끊고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해두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나 진짜 이런 실수 안 하는데… 미안. 개강이 7월이 아니라, 9월이래. 방학 시작 달이랑 개강 날짜를 헷갈렸나 봐.”
조금 불안해 보이는 게 나을 거다. 게다가 호정은 재영이 부모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싶으면 자신의 처지도 잊고 어쭙잖게 재영을 동정했다. 아마 유일하게 재영을 안쓰럽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일 것이었다.
“하… 아빠랑 엄마가 나한테 또 얼마나 실망하실지.”
재영은 부모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다시 호정의 눈치를 살폈다. 호정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라도 챈 건가 싶었는데 이내 눈동자에 물이 차오른 것처럼 촉촉해졌다.
“야. 헷갈릴 수도 있지. 나도 잘못 볼 때 많은데. 한번 잘못 보면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쭉 그렇게 보일 때 많잖아. 나는 너처럼 하고 싶어도 못 해. 멍청해서.”
재영은 호정의 멍청하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커튼을 더욱 당겨 빛을 완전히 차단했다. 어둠 속에서도 호정의 표정은 적나라하게 다 드러난다. 밝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겠지. 누구의 눈에도 저 속이 빤히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건 싫었다.
“그럼, 호정아. 우리 두 달 동안 재밌는 놀이 할까? 여기서?”
두 달의 시간 동안 해야 하는 걸 설명하면 호정이 이해할까 의문이었다. 네가 나처럼 생각하고 내가 되는 거. 그래서 내 속이 네가 보는 것과 달리 검다는 걸, 칠흑같이 어둡다는 걸, 너와 뼛속부터 다르다는 걸 깨달으면 어떨까. 이야기를 들은 호정이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다 이내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재영아. 네가 내 머리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래. 그냥 네가 엉성하게 상상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야. 나는 진짜 엄청 무식하다고.”
호정은 전혀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해맑게 웃어댔다. 재영은 호정을 보며 따라 웃는 게 덜 어색할지 이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게 덜 어색할지 잠시 고민했다. 못한다며 물러서는 호정을 놓아주기 싫었다. 호정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호정이 가지지 못했던 걸 건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윤 비서의 전화는 좀 전 전화에서 10분 뒤에 다시 울리게 되어 있었다. 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소파로 가 호정의 나머지 짐을 정리했다. 옷이 작다고 했더니 호정이 자신은 평균보다 크다고 했다. 늘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호정은 진지해졌다.
마침 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재영은 입술을 적시고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받았다.
“어. 정화야.”
재영은 졸업식 날 정화를 보던 호정의 눈동자와 어색하게 배배 꼬던 손가락 끝과 어정쩡하던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약점. 네가 가지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했던 거. 그걸 나는 너무 쉽게 가지고 있어. 호정아. 네가 내가 되면 이런 건 쉬울 거잖아.
재영은 작은 미끼를 던지고 물고기가 물길 기다렸다. 창가에 섰다. 역시나 호정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 게 보였다.
-미친 새끼야. 너는 미쳤어. 너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이호정한테 다 말할 거야. 개새끼. 네가 얼마나 변태 사이코인지 내가 세상에 다 말……!
윤 비서의 뒤로 정화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재영은 피식대며 새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호정 무리 자체가 싫다고 하지 않았었나. 이제 와 자꾸 호정의 이름을 올리며 내 심기를 건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재영은 그 이유가 정화가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날 좋아하니까 내가 흥미 있어 하는 호정에게 내 실체를 알리고 싶은 거다. 착하고 만만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았다. 그래서 영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화는 영특하지도 못했다.
-너 벌써 영국이야? 이호정은! 이호정은 어디에 있는데. 같이 있지? 미친 새끼.
“아. 어. 호정이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친구. 응. 그 친구랑 같이.”
재영은 정의로운 역할에 심취한 정화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한창 이런 거 좋아할 나이지. 정화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고 윤 비서의 기침 소리가 잔잔해졌다.
재영은 호정에게 손짓했다. 호정은 재영의 손을 보더니 이내 창가로 걸어왔다. 우리 호정이도 가지고 싶은 게 있었구나. 이런 계집애를 왜 좋아했을까. 얘는 이렇게 못되고 무식해. 멍청한 건 네가 아니라 이런 애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야. 재영은 제법 단단하게 선이 오른 호정을 훑었다. 주먹을 꼭 쥐었다 펴는 호정의 모습을 보다 눈을 들었을 땐 호정의 눈동자가 올곧게도 자신을 향해 있었다.
-도련님. 죽이는 건 안 된다고… 씨… 안 된다고 그러셨죠? 진짜 안 되나요?
재영은 대꾸 없이 전화를 끊었다. 사사로운 질문에까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을 부르는 호정을 마주 보았다.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고작 최정화의 이름에 자신 앞까지 걸어온 호정에게 못내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왜 하필 그런 여자야? 걔는 한 번도 나를 이긴 적이 없는데.
재영은 호정의 볼을 감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호정의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절반의 나쁜 말이 뱉어지는 게 다 이 위보다 조금 더 도톰한 아랫입술 때문인 것 같았다. 책에선 아이를 훈육할 때 그 자리에서 바로 해야 한다고 했다. 잘못을 한 그 시점이 지나 뒤늦게 하는 훈육은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재영은 그 논리에 완전히 동의했다.
“두 달 동안 너도 그렇게 생각해봐. 생각나는 그대로. 한재영이라면 지금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호정이 자신을 보며 웃었다. 재영은 좀 전 기침으로 발개지던 호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잔잔한 붉음이 좋았다. 운다면 모를까 기침으로 인해 빨개진 얼굴은 자신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재영은 호정의 은은한 얼굴을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그걸 보려면 담배는 언제든 끊을 수 있는 부수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 * *
루마니아에서 올 남자의 이름은 ‘조시프 바드 초안’이라 했다. 올해 22살. 마약은 16살 때부터 시작해 18살에 처음 적발되어 한 차례 복역을 마친 상태였다.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는 고령으로 인한 치매를 앓는 중이었고 현재는 국립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했다. 나라에서 보조금이 나오고 있었으나 할머니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할 바드가 마약사범이 된 탓에 그 보조금마저 곧바로 병원비로 납입되는 형태라고 했다.
바드가 재영에게 원하는 건 간단했다. 돈과 마약. 둘만 준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게 바드의 제안이었다. 재영에겐 손해랄 게 전혀 없는 거래였다.
“수임은 일이 완료된 후 줘도 되는데, 약은 그전에도 지속적으로 주길 원합니다.”
“그 새끼한테 할머니가 소중한 건 맞아요? 너무 사치스러운 감정인데.”
윤 비서는 피식 웃더니 다음 자료를 넘겼다. 루마니아에서 영국으로 건너오기 위해 한 차례의 전신 탈색을 마쳤고 탈색 후로는 입국을 위해 약을 완전히 끊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꽂을 수 있는 약을 원한다고 했다.
“그쪽에서 명확하게 이야기한 건 Acid입니다.”
“구해줘요. 와서 바로 처먹게.”
재영은 책상에 앉아 바드의 사진을 보았다. 노란 머리의 남자는 한쪽 눈을 찌푸린 채 밝게 웃고 있었다.
재영은 서재의 방문을 이룬 창호를 바라보았다. 매우 다양한 전통 창호의 살 모양 중 아자살을 택했다. 가장 복잡한 문양으로 짜인 창호는 시작점도 마침점도 알 수 없는 살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 조명과 밖의 빛이 어긋나며 서까래의 그림자가 창호에 비치면 그 복잡함은 배가 되었다. 창호의 문양처럼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좋은 것도 있었다. 그럴수록 그걸 풀어낼 때 더욱 흥미로울 테니까.
재영은 앞으로 일어날 복잡한 일들을 고대했다. 동시에 호정이 자신이 그어준 선 위를 꿋꿋하게 디뎌 엇나가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길 기대했다.
개강 전까지 자신이 나서 바드를 볼 필요는 없었다. 윤 비서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개강하면 보게 될 인물이었다. 그런 인간을 미리 보는 건 불필요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윤 비서는 때에 맞춰 바드가 세운 계획을 알려주었다. 재영이 원하는 게 분명하듯 바드가 원하는 것 또한 명확했으므로 나서서 조율할 것들도 딱히 없었다.
남자인 호정에게 남자도 남자를 좋아할 수 있고 그게 전혀 아무렇지 않음을 알려줄 것. 남자와 몸까지 섞을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해줄 것. 호정이 재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명백히 이성적인 호감이라는 걸 알려줄 것. 마지막으로 호정으로 하여금 재영을 의심하게 만들 것. 그래서 호정이 스스로 판단해 도망가게 하는 것까지.
바드는 윤 비서에게 그런 건 전혀 어려운 게 아니라고 했다. 일단 호정이 재영에게 호감이 있는 상태라면 그런 걸 깨닫게 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식이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이성애자가 어디 있겠어요.”라며 바드는 눈을 휘게 접으며 웃어댔다.
“자신만만해 보였습니다.”
“다행이네요.”
“도련님.”
“네.”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 비서가 소파에 앉았다. 윤 비서는 이틀 뒤면 다시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아직도 한국에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재영은 그게 못내 불편했다. 윤 비서마저 없었다면 그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을 터였다.
“최정화 씨는 이제 진정되긴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최정화 씨 고등학교 성적이 재단과 집안의 협력 관계에 의해 조작됐다는 걸 알려준 후로는 잠잠합니다.”
“참 안됐죠. 조작 안 해도 걔는 전교 2등이었는데.”
재영이 웃었다.
“생각보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잘못 보는 부모들이 많다는 게 재밌어요.”
“네.”
재영은 윤 비서를 빤히 쳐다보았다. 멀뚱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윤 비서를 보다가 재영은 다시 바드의 사진을 들었다. 바드의 사진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튕겼다. 나풀대던 사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쪽 눈을 접고 웃고 있는 바드의 얼굴이 바닥에 엎어졌다.
“이 사진을 찍을 때도 얘는 마약을 하고 있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이름은 김민재로 하라고도 전했죠?”
“네. 전달했습니다.”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손톱의 박자는 여전히 균일했다. 윤 비서는 피곤해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려 애썼다. “자도 돼요.”라는 재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 비서는 소파에 등을 붙여 기댔다. 재영은 윤 비서를 보며 아빠에게 가끔 고마움을 느꼈다. 저렇게 충직한 부하를 준 것 하나만큼은 멍청한 아빠를 칭찬해줄 만한 일이었다.
개강일이 되었을 때, 재영은 기대감에 들떴다. 이 기분과 가장 흡사한 날을 꼽자면 역시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 가장 비슷했다. 자신이 그린 새로운 계획이 막 시작하려는 생동감이 좋았다.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학교로 가는 내내 호정은 긴장한 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차에 타면 으레 틀어주던 노래도 처음에는 틀어주려 하지 않았다. 호정이 틀어주는 노래가 좋고 싫음은 없었다. 다만, 재영은 호정이 노래를 틀어주는 그 행위 자체를 좋아했다. 자신의 휴대폰을 쥐고 이리저리 화면을 돌리는 호정의 진중한 표정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첫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호정은 자신을 떠나는 순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재영은 그 후의 대책으로 한국대 편입을 준비 중이었다. 막상 호정이 도망가게 되면, 그런 호정을 찾는 건 쉬울 거다. 그러나 호정이 눈치를 채기까지의 시간이 관건이었다. 그 기간을 알 수 없어 편입까지도 확정을 내릴 수 없었다. 다행히 한국대에선 긍정적인 답이 있었다. 다음 학기부터 입학이 가능하다며, 언제든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회신을 받게 된 것이다.
호정이 수업에 들어간 후 재영은 카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업이 마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 지금쯤 그 약쟁이가 호정에게 말은 걸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재영은 일부러 오늘 호정의 폰을 도청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일인 만큼 호정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었다.
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호정의 수업이 끝나갈 시간이 다 되었다. 반 이상 남은 커피를 두고 카페를 나섰다. 아침에 본 뉴스에서 오후부터 옅은 비가 날릴 거라 했었다. 손에 우산을 들고 호정을 맞이하러 가는 길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건물 입구에 섰을 때 예상한 것보다 이른 시간에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는 호정이 보였다. 붉게 충혈된 눈과 뛰어온 것인지 달뜬 숨을 쉬고 있는 호정이 자신을 발견하고는 눈을 떨었다.
“비가 와서, 데리러 왔어. 수업 가려다가 아무래도 첫 수업이라 쓸데없는 소리만 할 거 같아서 안 갔거든.”
호정에게 천천히 다가가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살폈다. 턱을 잡아 오른쪽, 왼쪽 모두 살폈다. 분명 기분이 좋았었는데 막상 호정의 얼굴을 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김민재의 이름이 아직도 이 정도의 파급력이 있어야 하나.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건네려다 뒤로 감추었다. 재영은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호정의 머리 위로 기울였다. 고작 죽은 친구의 이름일 뿐이다. 그게 너 같은 인간들에게는 몇 달이 지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울컥할 정도로 슬픈 일인 걸까. 죽은 친구의 이름을 들은 것뿐인데 그 친구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놀라운 일인 걸까. 재영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우산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생각보다 더 놀랐나 보네.”
재영의 말에 호정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배려. 호정은 또 재영의 기분을 살피며 그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재영은 호정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출할 줄 안다면 더 좋을 텐데. 재영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빗소리는 굵어지고 흐려지길 반복했다. 들쭉날쭉한 자신의 기분과도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재영은 호정이 바드의 이야기를 해줄 때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표정에서 티가 날까 속으로 어떤 표정이 더 적합한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금 놀란 표정이 나을까. 호정이 자신의 폰을 테이블에 올리고 재영을 불렀다. 재영은 호정이 내민 폰을 보며 미소 지었다. 호정의 긴장한 표정을 보는 건 그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표정을 보는데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재영은 호정의 앞에 앉아 녹음된 파일을 틀었다. 호정의 팔을 끌어 어릴 때 별채에서 혼자 심심해 배워두었던 상형 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호정의 몸 구석구석에 이런 글자를 그려 넣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생각했다. 이왕이면 한재영이라는 이름이 더 좋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녹음 파일의 내용은 대충 흘려듣고 있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오직 바드가 호정에게 말을 붙이는 시점만 기다렸다.
“저기, 혹시 한국인 맞죠?”
바드의 첫 마디를 듣고 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 있다더니 첫 대화부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호정은 말랑하게 생긴 외관과 달리 친해지기 전까지의 선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호정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김민재라는 이름부터 대라고 일러주었는데도 바드는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녹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녹음이 중단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인이래. 여기서 한국인을 보니까 반가웠는지 말이 너무 많은 거야. 목소리도 좀 크고 어차피 녹음해도 안 들릴 것 같아서 더는 녹음 안 했어. 얘 목소리만 나올 거 같아서.”
“잠시만.”
“어?”
재영은 폰을 가져가 녹음 파일을 앞으로 돌려 다시 틀었다. 바드가 처음 말을 거는 순간으로 파일이 돌아갔다. 바드의 목소리와 교수가 하는 말을 동시에 듣기 시작했다.
교수가 과제를 내줬다는 말에 호정이 입술을 볼똑하게 내밀었다. 재영은 호정이 마시던 음료를 가져가 마셨다. 남이 입 댄 것에 단 한 번도 구미가 당긴 적이 없었는데 호정의 것은 달랐다.
“발표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호정이 폰을 가져가 넣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재영은 호정의 표정을 더욱 깊게 인식하려 노력했다.
“그 과는 발표 없다고 들었어. 지금처럼 교수가 리포트 내주는 건 내가 도와줄게. 영어로 써야 하잖아.”
“발표가 아예 없다고?”
“아마도?”
“왜? 멍청한 애들만 오는 데라서?”
재영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호정이 혼자 저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재영은 바드가 자신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한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누가 너한테 그런 개소리를 했지?”
재영은 턱을 괴고 한 손으로 호정의 뺨을 어루만졌다. 호정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동시에 곤혹스러웠다. 호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키지 않은 말을 하는 패기를 넘어가자니 과연 시킨 일은 제대로 했을지 궁금해졌다. 제정신도 아닌 채로 살아가는 약쟁이 새끼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얘 이름이 뭐래? 오늘 너한테 개소리한 애 이름. 뭔데?”
“한국 이름이 김민재래. 루마니아 이름은 바드. 한국인인데 루마니아에서 살았대.”
호정은 바드라는 이름보다 김민재라는 이름을 먼저 말하며 웃었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아니었다. 좀 전 수업을 마치고 내려올 때 호정의 표정을 보고 바드가 민재라는 이름을 말했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혹시나 말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였다.
호정은 민재라는 이름을 신경 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연차적으로 발생할 때마다 재영은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속을 채우는 생각들은 현실에서는 모두 불가능한 것들뿐이었다. 세상에는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이지만 실상 내면에 침잠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정작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해도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호정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까지 그런 약쟁이를 불러서 볼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생각보다 건방진 그 약쟁이 새끼를 하루 먼저 만나고 싶어졌다. 현관을 지나며 그에게 어떤 방식이 맞을지 잠시 고민했다. 경고와 회유. 어느 쪽이 더 잘 들어맞을까. 재영은 마당에 선 백송을 쳐다보며 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백송의 가지가 균형 맞게 좌우로 기울어져 있었다. 백송 앞에 섰다. 경고와 회유. 재영은 백송의 오른쪽 가지를 잡아 단번에 부러뜨리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백송을 바라보는 사이 윤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네. 도련님. 거실에 있었습니다.
“그 약쟁이 불러요. 오늘 약 준다고… 지하실에 둔 거는 거실로 옮기고.”
-네. 알겠습니다.
윤 비서는 재영과의 전화를 끊고 휘파람을 불었다. 바드에게 집 주소와 함께 한 시간 내로 오면 약을 주겠다는 연락을 하고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실을 가린 흑색의 긴 차양을 치웠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좀 일이 시작되려나. 여태는 너무 지겨웠다. 도련님이 하는 일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게 자신의 원칙이었다. 여태 도련님이 하는 일은 언제나 납득 가능했기에 굳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이전과 달리 좀체 일이 진행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윤 비서는 최근 들어 종종 따분함을 느꼈다.
긴 호흡의 휘파람을 불며 지하실에 내려와 불을 켰다. 죽어가는 짐승의 헐떡이는 소리와 진득한 검붉은 피가 바닥을 절반 이상 메우고 있었다. 꾸덕한 검은 핏물이 지하실 중앙의 하수구를 통해 흘렀다. 검은 본견 속에 감긴 존재가 밝아진 불빛에 몸을 부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윤 비서는 지하실 끝에 걸린 본견의 색 중 하얀색을 골랐다. 새하얀 본견으로 검은 본견이 꽁꽁 감싼 존재의 몸을 더욱 꼼꼼하게 덮었다. 노끈으로 위와 아래도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묶었다. 무게가 100kg이 넘는다고는 들었지만 다 죽어가며 몸을 늘어뜨린 덕분에 무게는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윤 비서는 노끈의 한쪽을 두 손으로 세게 붙들었다.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이 들어오는 소리였다. 윤 비서는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지하실의 계단을 올랐다. 계단의 층계마다 짐승의 몸이 쿵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윤 비서의 걸음과 같은 박자로 울리는 소리에 입구에 선 재영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 * *
바드는 우버에 올라 기사에게 윤 비서가 보낸 주소를 보여주었다. 이성애자인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는 많았다. 오히려 아닌 경우가 더 희박했다. 종종 이성애자를 좋아하게 돼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이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특이했다. 이성애자인 사람을 게이로 자각하게 해달라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그 후에 의뢰자를 의심하게 만들어달라는 건 여러모로 수상쩍은 제안이었다.
“하긴. 약만 준다면 뭐.”
오늘 처음 본 호정이었지만 ‘김민재’라는 이름에 인상을 구기던 얼굴에 마음이 쓰였다. 왜 굳이 이 이름을 써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검은 정장을 입은 비서는 그 이름이 호정의 죽은 친구 이름이라고 했다. 바드는 혀를 날름 내밀며 고개를 내저었다.
“좀 변태 같은 새끼인가.”
바드는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꺾어 몸을 풀었다. 하필이면 죽은 친구의 이름이라니. 아무래도 찝찝했다. 복잡한 머리를 흔들며 우버의 창문을 열었다. 구태여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해달라는 것만 해주고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 루마니아로 돌아가면 끝이었다. 할머니의 요양비와 당장 먹을 약만 얻을 수 있다면 그뿐이었다.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바드는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격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오른손을 꽉 잡아 눌렀다. 허벅지에 손바닥을 펼쳐 붙이고 떨지 않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더 약을 얻을 곳도, 얻을 수 있는 돈도 없었다.
“안지혜.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연기 어렵지 않아. 딱 이번 한탕만 해 먹고 그랜마한테 가는 거야.”
약에 찌들기 전만 해도 바드는 연기를 전공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연기 공부를 시작했지만, 약에 빠진 뒤로는 무대에 설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바드는 이게 신이 주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약속대로 약을 준다고… 약을 준다면… 약만 준다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버에서 내려 윤 비서가 보낸 주소의 집 앞에 섰다. 집은 생각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고향. 내 피의 첫 줄기가 시작된 곳에 있다는 한옥이 런던에 있었다. 늘 할머니가 보여주던 사진으로, 또는 인터넷에서 검색해서만 보았던 한국의 한옥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바드는 목을 가다듬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현관의 벨을 누르려는데 달칵, 하고 문이 먼저 열렸다. 놀란 바드가 손가락을 세운 채로 머뭇대는 사이 인터폰으로 들어오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비서의 목소리였다.
밖에서 볼 때만 해도 높은 외관의 벽으로 인해 마당이 세세하게 잘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마당 안으로 들어오니 나무부터 흙과 바닥을 이룬 돌까지 신경을 많이 쓴 집이라는 게 느껴졌다.
“와우…….”
바드는 마당을 걸어 들어가며 곳곳을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오후에 내린 비로 젖은 바닥과 한옥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이런 건 찍어야지.”
사진이라도 찍어 할머니에게 보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바드가 막 폰을 꺼냈을 때였다.
“폰 주시죠.”
“네?”
윤 비서가 열린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윤 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말이지 생각하는 사이 윤 비서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에 들린 폰을 뺏어갔다.
“나중에 나가실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들어오시죠.”
“음… 네.”
바드는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으며 윤 비서의 뒤를 따랐다.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간 덕분에 현관문의 모양이나 한옥 안의 벽과 방은 주의 깊게 보지도 못했다. 거실의 넓은 소파 끝에 엉거주춤 앉았다. 집 안 가득 짙고 역한 피비린내가 났다. 바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안지혜 씨. 맞으시죠? 사진으로 봤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재영이 다가오며 미소 지었다.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소파에 올린 재영이 손에 끼고 있던 라텍스 장갑을 벗고 바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드는 생각보다 더 잘생긴 재영의 얼굴을 보며 침을 삼켰다. 목이 시큰하게 아렸다. 큰 키에 남자답게 선이 분명한 얼굴, 드러난 굴곡만 봐도 훌륭한 몸매를 가진 남자였다.
재영도 호정처럼 딱히 이쪽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따지자면 그가 어느 쪽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속을 보기 힘들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저런 외모면 호정을 꼬드기기 위해 이런 노력까지는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이 재영이 다시 손에 검은색 라텍스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바드는 그가 오늘 자신을 부른 이유, 이곳까지 오라고 한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유 모를 강압감과 무게감 있는 눈빛에 지레 겁을 먹은 탓도 있었다. 바드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고 흑색의 마룻바닥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 나뭇결의 끝에 검붉은 색의 천으로 둘러싸인 형체를 목도했다.
“Oh my…….”
바드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영이 차분하게 소파에 앉아 그런 바드를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Oh my… oh… God… Ce naiba… e asta? (이게… 뭐죠?)”
윤 비서는 벽에 기대두었던 쇠파이프를 들었다. 쇠파이프의 중앙부터 끝까지 떨어지는 붉은 액체는 분명 피였다. 하얀색이었을 천의 끝까지 붉은 피가 뭉근하게 스미고 있었다. 꿈틀대는 천 속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다. 바드가 다시 격렬하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라질 때마다 나타나는 중독 증상이었다. 처음에는 몇 시간 단위로 손과 발, 눈 아래에 경련이 왔는데 이제는 그 단위가 줄어 약을 먹지 않으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손발이 떨리고 눈앞이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바드는 흐릿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싶었으나, 손은 자꾸만 제멋대로 궤도를 벗어나 옆으로 떨어지기만 할 따름이었다.
“멧돼지예요. 크죠?”
“그게 왜 여기 있… 왜 죽… 왜…….”
바드는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보고 싶지 않은데도 시선은 자꾸만 검붉은 천에 감겨 있는 형체를 향했다. 꿈틀대는 멧돼지의 몸을 보고 있자니 헐떡이는 숨소리와 격한 신음이 더욱 잘 들리는 듯했다. ‘꾸에엑’ 하는 멧돼지의 포효에 파이프를 든 윤 비서가 멧돼지의 몸을 뒤챘다. 뒤집히려던 멧돼지의 몸은 다시 마룻바닥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놀란 바드가 어깨를 움츠리며 재영을 쳐다보았다.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보도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곱 살 아이를 그대로 들이박았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얘는 도로를 달려나가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았대요. 근데도 아직 살아 있어요. 대단하죠? 사람을… 그것도 어린아이를 죽였으니까 다들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여기로 데려왔죠.”
좀 전 바닥에 떨어지는 멧돼지의 몸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퍽퍽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고 윤 비서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형상이 옆 눈으로 느껴졌다. 그런데도 바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차마 바로 볼 수 없었다.
바드는 그저 얼른 약속한 약을 받고 싶었다. 오늘 자신을 이곳에 부른 이유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졌다. 다시 퍽퍽, 묵직한 살덩이를 쳐대는 마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드는 사납게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왜… 왜 이러시는 건지. 오늘 호정 씨 만나서 잘 이야기했고. 친구가 되기로 했…….”
“왜 우리 애한테 멍청하다고 했어요?”
“네?”
바드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바드는 그제야 호정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건 단순히 농담이었다. 솔직히는 농담이자 진심이기도 했다. 자신 같은 약쟁이도 재영이 돈만 내면 한 학기 정도 다니는 건 일도 아닌 쓰레기 같은 과라고 생각하긴 했으니까. 바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애한테 멍청하다는 소리는, 좆같으니까 하지 마세요.”
재영은 바드의 눈을 꼿꼿하게 바라보며 멧돼지를 가리켰다. 축 늘어진 짐승의 사체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바닥의 틈을 타고 바드의 발밑까지 흘러들었다. 바드는 역한 피 냄새에 구역질을 느끼며 발을 오므렸다.
“저 멧돼지 말이에요. 어린아이를 죽였으니까 죽는 게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쟤도 제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인간들이 산에 뿌린 제초제 덕에 바이러스에 걸렸대요. 지 머리에 고인 피가 점점 굳어가니까 누구라도 들이박고 싶었겠지. 생각해봐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걸 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 뇌가 그런 걸 어쩌겠어요.”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 비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윤 비서는 피가 뚝뚝 흐르는 파이프를 건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죽어 뭉근한 피를 쏟아내는 사체 위를 파이프로 뒤채보던 재영이 사체의 가운데에 파이프의 끝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우욱… 읏…….”
바드는 그대로 마룻바닥에 속을 게워냈다. 손가락 사이로 토사물이 넘쳐흘렀다.
“지혜 씨. 본견 알아요? 나는 본견이 참 좋아요. 한복으로 만들어 놓으면 몇 시간을 봐도 질리지가 않아. 예쁘고 부드럽고 비싼 데다 아름답잖아. 얘는 자기 가치를 자기가 제일 잘 알거든요. 근데, 나는 그런 허접한 이유 때문에 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바드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속에선 또 한 번의 구토가 일 것처럼 구역질이 오르고 목은 따가웠다. 재영은 멧돼지를 감싸고 있던 본견을 손으로 벗겨내기 시작했다. 가운데 꽂힌 파이프를 중심으로 본견이 양옆으로 찢어졌다. 본견이 벗겨지자 그 안에 있던 멧돼지의 검은 피부와 털이 보이기 시작했다. 눅진하게 눌어붙은 검은색의 빳빳한 털들은 피로 얽히고 뭉쳐 있었다. 흰색으로 돌아간 멧돼지의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재영은 손을 뻗어 멧돼지의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를 가렸다. 검고 긴 속눈썹으로 된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감겨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은 바드가 계속해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물이 잘 들어서. 한번 물들면 그 색을 못 빼니까. 본견에 든 색 중에 가장 안 빠지는 게 핏물이에요. 피는 본견에 스미면 지워지지 않고 더 진해져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재영은 장갑을 벗어 윤 비서의 품에 던졌다. 자신의 재킷에 튄 핏물을 보던 재영이 재킷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재킷 위에 피가 튄 구두를 비벼 닦은 재영이 다시 바드가 앉은 소파로 돌아왔다. 바드는 두 차례의 구역질 끝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토사물이 엉겨 붙은 볼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로 바드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 보는 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Vad. Nu vrei să-ți salvezi bunica? Nu vrei Lucy? (할머니 살리고 싶잖아. 약도 필요할 거고.)”
바드의 손이 불규칙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손보다 더 격하게 부들부들 떨리는 눈을 감았다. 재영은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냈다. 바드의 턱을 잡아 내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약을 밀어 넣자 바드가 허겁지겁 약을 삼켰다. 약을 삼킨 바드는 온몸을 비틀며 소파에 몸을 비벼댔다. 바드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흐릿하던 시선이 선명해져 있었다.
“Acid, Lucy, Cid, Tabs, Doses, Dots, Blue heaven, Cubes…….”
바드는 재영이 하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쟁이 새끼들은 지들이 하는 게 대단한 거라도 되는 줄 알아. 그깟 약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렇게 은어까지 만들고 말이야. 덕분에 여러모로 귀찮죠.”
바드는 재영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올곧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목을 타고 넘어간 약이 뇌로 번지며 눈앞에 번뜩이는 빛을 만들고 있음을 느꼈을 뿐이었다. 곧 손과 발을 괴롭게 하던 경련도 멈출 것이다. 멍청하던 머리도 선명하고 분명한 기억들로 가득 찰 것이고, 불안하고 무섭던 감정에도 기쁨과 환희만 차게 될 거란 기대감이 일었다.
“네 할머니와 약.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면 넌 뭘 택할까.”
재영은 주머니에서 알약 하나를 더 꺼내 바드의 앞에 떨어뜨렸다. 눈을 굴리던 바드가 다급히 손을 더듬어 마룻바닥 틈에 낀 알약을 주워 삼켰다. 떨어진 알약에 묻은 검은 핏물은 이미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바드. 누구에게나 인생은 다 좆같은 거예요. 그런데 다들 맨정신으로 악착같이 살아요. 어떻게든 버티면서 산다고. 근데 네들은 대체 뭔데 흐릿한 정신으로 대충 살려는 거야.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면서 살지도 못 하면서 왜 대접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 동등하게 받으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 나는 너 같은 약쟁이들이 존나 싫어요. 나태하고 무례해.”
바드는 정신이 선명해지고 온몸을 울리던 경련 역시 점차 잦아들고 있음을 느꼈다. 헐떡이던 격한 숨이 다시 본래의 차분하던 박자로 돌아왔다. 약을 먹은 후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휴지기였다. 그제야 눈앞에 자신을 경멸하듯 보고 있는 재영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재영은 시선을 바드에게 고정한 채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붉은 적포도주였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검붉은 사체의 피와 와인의 붉은색이 교차했다. 다시 구역질이 일었다. 바드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걔 여기 들어오게 하면 되잖아요. 하… 별로 어려운 거 아니라니까요. 멍청하다고 한 건… 실수였어요. 오케이. 나 다신 실수 안 할게요. 진짜 믿어 봐요.”
재영이 미소 지었다. 재영이 손을 내밀자 윤 비서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바드의 폰을 가져와 재영에게 내밀었다. 재영은 바드에게 폰을 건네며 표정을 살폈다.
“약은 적어도 3일에 0.5 이상은 받고 싶어요. 내가 들키면 그쪽도 별로잖아요.”
바드는 재영이 건넨 폰을 가져가며 말했다. 재영은 다시 와인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좀 전에 바드가 먹은 알약도 보통 사람이라면 기절하고도 남을 정도의 양이었다. 3일에 0.5g이나 처먹는 이 약쟁이가 저 멧돼지의 자리에 있는 게 여러모로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무래도 재미는 좀 없겠죠. 하는 거 봐서요. 사람이라는 게 계약에 유동성이 있어야 말을 잘 듣더라고요.”
재영은 짧은 시간 바드의 피부색을 관찰했다. 저런 피부에는 어떤 본견이 가장 어울릴까. 바드를 본견으로 꽁꽁 감싸는 상상 끝에 재영은 눈앞의 이 약쟁이에겐 그마저의 본견도 아깝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본견으로 감쌀 필요도 없는 헐값의 몸인 건 분명하지만, 쇠파이프마다 저 오염된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것 또한 역하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재영은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생각했다. 본견으로 감싼 후 죽이는 것과 그대로 죽이는 쪽. 최악과 차악을 고르는 건 언제나 고된 일이었다.
“연기는 걱정하지 마요. 티 안 나게 잘할 테니까.”
바드는 조금 전 재영이 말한 “뭐라도 해서.”라는 문장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확신이자 동시에 불안한 자신을 다독이려는 방어적인 동작이었다.
재영은 남은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충분히 이해한 것 같으니 이제 가도 돼요.” 재영의 말에 바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비틀대며 바닥에 쓰러졌다. 약을 삼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팔이며 다리며 완전히 제어되는 부분이 없었다. 게다가 짧은 시간 재영이 준 약을 두 알이나 먹었다. 바드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다 손바닥에 진득하게 엉기는 핏덩이에 소리를 질러댔다.
바드의 소란스러움에 재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윤 비서가 다가와 바드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그거 치운 후에 이건…….”
재영은 본견으로 둘러싼 사체를 가리켰다.
“이건 그냥 백송 밑에 묻어주세요. 걔가 피를 좋아하잖아요.”
“네. 도련님.”
윤 비서의 팔에 몸이 끌려 나가면서도 바드는 저항하지 않았다. 끌리는 두 다리는 맥없이 거실 바닥을 긁으며 지났다. 흘깃 올려다본 윤 비서의 얼굴에 가느다란 조명이 스몄다.
“…후…….”
약은 이래서 위험했다. 본능, 본성, 육욕을 일깨웠다. 곁에 있는 아무나, 눈에 보이는 사람이 누구든 당장 발가벗고 섹스하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는 하이 상태가 앞으로 삼십여 분은 더 지속 될 터였다. 바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la naiba……. (씨발…….)”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대듯 욕을 뱉었다. 약에 취해 하는 말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곤 일말도 들지 않은 것들이었다. 보통은 뇌를 거치지 않고 곧장 입에서 배설되듯 쏟아지는 무의미한 문장들이었다. 바드는 까맣게 풀린 동공으로 거실에 선 재영을 다시 한 번 더 쳐다보기 위해 애썼다. 재영은 사체에 꽂힌 쇠파이프를 돌려 빼내고 있었다. 사체 앞에 선 재영의 모습이 어스름한 그림자로 느껴졌다.
“윤 비서님. 올 때, 커피… 사 오세요. 우리, 호정이, 보러 가게.”
재영이 숨을 내쉴 때마다 손에 쥔 쇠파이프가 허공에서 아래의 바닥으로 세차게 내려졌다. 둔탁한 마찰음에 바드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쩐지 금액이 컸다. 일에 비해 보수가 너무 클 때 조금이라도 의심했어야 했다.
“네. 도련님.”
자신의 팔을 잡아끌던 윤 비서가 내쉰 숨이 등줄기를 타고 전해졌다. 바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당까지 끌려 나왔을 땐 이미 바지와 가랑이 사이가 오줌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씨발. 더럽게.”
윤 비서는 한 팔로 바드의 몸을 잡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등 뒤로 매캐한 연기가 올랐다. 바드는 고개를 젖혀 한 팔로 자신을 안은 윤 비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윤 비서의 치아 사이에 위태롭게 매달린 담배를 뺏어 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윤 비서는 담배를 이에 문 채로 다시 바드의 몸을 끌어 현관 앞에 던지듯 놓았다.
“후우…….”
한숨을 내쉰 윤 비서는 곧장 재킷을 벗어 바드의 하체를 감싸고 재킷의 팔을 끌어 단단하게 동여맸다. 도련님이 사준 재킷을 이런 버러지를 위해 써야 하나 생각하는 사이 바드가 축 늘어져 있던 팔을 들었다. 바드는 팔꿈치로 윤 비서의 옆구리를 찔렀다. 윤 비서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바드를 곧게 응시했다.
“전 사람도 죽입니다.”
진지한 윤 비서의 말에 바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뭐 그쪽이 살인자라도 된다는 거예요?”
“네.”
“진짜요?”
아무런 동요 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 윤 비서가 바드의 손에 지폐를 쥐여 주었다. 바드의 놀란 얼굴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당분간 쓸 돈입니다. 택시 타고 가세요. 더럽습니다.”
바드는 약 기운을 떨치기 위해 눈을 게슴츠레 떴다가 다시 감았다. 진짜 자신이 살인자라는 건지, 단순히 농담인 건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옆구리는 찌르지 말걸, 하는 생각 정도만 들었다. 윤 비서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두로 짓눌렀다.
죽은 건 흥미가 덜했다. 언제나 죽기 직전의 마지막 헐떡임, 가까스로 숨이 이어지는 그 맥박이 더 흥미로웠다. 도련님도 마찬가지일 거다. 윤 비서는 검은 눈에서 점차 회색으로 마지막엔 흰색으로 저물어가던 멧돼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윤 비서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있는 호정의 집 창문을 응시했다. 도련님의 눈에는 저 집에 있는 호정이라는 존재가 그런 멧돼지 같은 것일까, 죽기 직전의 헐떡임을 지닌 흥미로운 존재처럼 보여서 이토록 잘해주는 건가. 골치 아픈 일을 이렇게 많이 해야 할 정도의… 정말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인물인 걸까.
윤 비서는 다시 담배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느리게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쓰읍 하고 연기를 길게 들이켰다. 바닥에 널브러진 바드의 다리 위로 담뱃재가 날려 떨어졌다.
윤 비서가 집에 도착했을 때 재영은 얼굴과 몸에 온통 피를 묻힌 채 벽에 기대있었다. 너덜너덜하게 갈라진 멧돼지의 사체와 재영을 번갈아 보던 윤 비서가 천천히 걸어가 재영의 앞 테이블에 사 온 커피를 올렸다.
“갈아입을 옷 가져오겠습니다.”
“…….”
힘없이 풀린 재영의 동공이 바닥에서 윤 비서의 눈까지 올라왔다. 윤 비서는 그런 재영의 눈을 응시했다. 잠시 재영을 쳐다보던 윤 비서가 자신이 입고 있는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당겨 쥐고, 재영의 이마와 볼에 튀어 오른 핏방울을 닦으며 물었다.
“도련님. 내일도 준비해드릴까요?”
“…….”
“준비하겠습니다.”
윤 비서는 눅눅하게 들러붙은 마룻바닥의 피를 뭉개듯 짓밟았다. 재영의 드레스룸에서 새 옷을 꺼내 왔을 때 재영은 와인 한 잔을 더 따라 마시며 거칠어졌던 숨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에 적신 수건과 옷을 건넸다. 재영은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손에 튄 피를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흐리던 동공이 본래의 재영이 가진 색으로 돌아왔고 얼굴에도 본래의 빛이 돌기 시작했다.
옷을 다 갈아입은 재영이 신발을 새것으로 갈아 신으며 호정의 번호를 찾아 눌렀을 때, 윤 비서는 멧돼지의 옆에 몸을 숙여 앉고 있었다. 너덜너덜하게 갈라진 살점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던 윤 비서가 입맛을 다셨다. 한 번에 파묻는 것보다는 잘라서 나눠 묻는 게 더 나으려나, 머리를 굴리는 틈에 재영이 커피를 쥐고 나가는 게 보였다.
재영은 손에 커피 몇 방울이 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안했다. 자신이 본성을 온전히 제어할 수 있고 제어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좀 전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온전히 혼자만 남은 공간에서 죽은 멧돼지의 목을 파이프로 내려치는 순간, 재영은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자극에 휩싸였다. 멧돼지의 몸을 내려치는 파이프를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손은 멈추지 않고 사체를 두들기고 찢어댔다.
그 빌어먹을 의사 새끼가 처방하던 약이 정말 효과가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여태 이런 살욕을 견디게 해준 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고작 그 몇 알의 약 때문이었을까. 순간 파이프를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여태 자신을 억제한 게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그 몇 알의 약 때문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파이프를 바닥에 던지고 뒤로 물러섰을 땐 얼마의 시간이 지난 것인지도 분간되지 않았다.
온몸의 세포를 깨우고 흥분하게 하던 살욕은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을 어지르는 흥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는 불안함이 여전히 심장을 거칠게 뛰게 했다.
재영은 거친 숨을 정돈하며 호정을 찾아갔다. 호정이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불쑥 손부터 밀어 넣었다. 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표정에 든 감정까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친구 데려다주다가 갑자기 너 생각났는데, 따뜻한 거 사주고 싶어서 쥐고 달려왔지. 커피.”
좀 전의 흥분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아직도 숨이 평소보다는 빨랐다. 호정의 눈에 자신이 어색해 보일까. 호정의 눈에도 자신이 사이코패스로 보일까. 방금 피가 흐르는 생명을 죽이고 온 사람 같아 보일까. 정상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걸까. 재영은 복잡한 머리를 털어냈다.
“뛰어왔어? 너한테서 바람 냄새나. 밤에 부는 바람 냄새 알아? 그 냄새. 난 그 냄새 좋아해.”
호정이 웃었다.
“바람 냄새?”
“응. 조금 비릿한… 알지?”
호정의 말에 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 냄새가 덜 닦였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게 되었다.
“이거 줬으니까 난 이제 갈게. 호정아. 너 내일 몇 시 수업이랬지?”
“아, 아침 수업이야.”
재영은 뜨거운 커피를 쥔 호정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커피를 건넨 자신의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자고 갈래?”
호정이 고개를 꺾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재영은 발갛게 익은 호정의 손과 그보다 붉은 호정의 눈 밑을 번갈아 보았다. 중얼중얼, 재영이 이곳에서 자고 가길 바라는 몸짓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어눌한 목소리와 문장에 담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재영은 그런 표정에 대해선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보는 호정의 시선이 호감에서 그보다 더 깊은 감정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확신이 들었다. 재영은 호정의 손에 들린 커피를 다시 가져갔다.
“손 데면 어쩌려고. 아까운 손인데.”
“내 손은 전혀 안 아까운 손인데. 안 아껴도 돼.”
호정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매만졌다. 저게 무슨 말인지는 알고 저러는 걸까. 재영은 피식 웃으며 호정의 손을 끌었다. 호정의 손가락을 조금 더 만져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저 손가락이 달린 팔과 그 팔이 달린 몸통과 그 몸통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까지. 모조리 뜯어내 빈틈없이 만져보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이 존재가, 왜 이호정이라는 이 존재만 다른지 그 이유를 알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쩌면…….
“…그럴 리가.”
재영의 말에 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영은 말을 멈추고 미소 지었다. 호정보다 먼저 2층을 향했다. 복잡하던 머리가 호정을 보면서 정리되었다는 것에 기분이 나아졌다. 다행이었다. 재영은 문득 계단의 가운데 서서 뒤에 선 호정을 찾았다.
“호정아. 이리 와봐.”
호정이 쭈뼛대며 자신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호정은 때에 따라 고분고분할 줄 알았다. 벽에 등을 기댔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어색하게 움직이는 모습과 무슨 말을 할까 머뭇대며 눈을 굴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살아오며 본 타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호정은 자신보다 위의 계단에 서 있었다. 멀뚱한 눈을 굴리며 재영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재영은 터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호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중학생 때도 이런 얼굴을 했을까. 초등학생 때는. 그보다 더 어릴 때는, 더 많은 눈치를 보며 눈을 굴렸겠지. 그중 자신이 실제로 본 모습이 없다는 게 못내 짜증스러웠다.
“…호정아.”
재영은 인생에 형편없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인간관계의 수평이었다. 세상에 수평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곧고 반듯한 직선. 오직 수직의 세상에서만 재영은 편안함을 느꼈다. 고로 누구도 자신의 위에 있을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이 정한 가장 엄격한 규율이었다. 보통의 인간들이 정했다는 구질구질한 법규, 제약과는 차원이 다른 논리적인 법칙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위에 설 수 없고 그 누구도 자신을 내려다볼 수 없어야 옳았다.
재영은 자신의 위에 올라 순진한 눈망울을 굴리던 호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품 안에 들어 있는 호정의 살결 내음을 들이켰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보다 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세상의 선과 동일한 선에 누구 한 명을 놓아야 한다면 그건 호정이었다.
재영은 로비에 서서 호정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호정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딱히 자신의 신경을 거스르는 정도는 아니었다. 호정이 자신에 대한 마음을 곡진히 바라보게 된 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런 짜증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사춘기라도 겪나보다,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남자인 자신과 하는 키스에 거부감이 없을 때부터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기대는 했었다. 다행히 호정은 느리지만 부지런하게 자신의 박자에 다가서고 있었다. 전교 꼴등다웠다. 그건 꼼수를 부리는 법이 없는 성실함이었다. 재영은 약아빠진 인간들보다야 호정의 어리숙함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로비의 복도와 조명은 아름답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허접한 조명을 달고 등록금을 받을 생각을 했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자신의 과가 있는 연구동과 비교하자면 그 차이는 더 컸다. 재영은 싸구려 조명을 향해 있던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호정의 대화에 집중했다. 엘리베이터에 손이 끼여 징징대는 바드의 소리가 호정의 목소리보다 더 컸다. 재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뺐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복도의 끝으로 바드와 함께 걸어오는 호정이 보였다. 자신이 붙여놓은 놈이지만 호정과 너무 거리가 가까웠다. 재영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바닥의 타일과 그 사이의 틈 수를 세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바드가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제보다 좀 더 편해진 얼굴이었다. 약을 먹고 뇌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어야 멀쩡해지는 얼굴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라 역으로 불쾌했다. 게다가 그런 불쾌한 면상이 호정의 얼굴을 가린다는 것도 정도를 지나치게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부탁인데, 내 앞에서 호정이 가리지 마. 다시는.”
미소를 걸친 채로 말했다. 약쟁이 주제에 어제의 학습효과는 있었는지 바드는 얼른 몸을 비켰다. 어색하지 않은 척을 하고는 있었지만 어젯밤 기억이 남아 있는 것 같아 흡족했다. 머리가 나빠 어제의 일도 잊고 건방을 떨어대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던 차였다. 바드는 두 손을 미세하게 떨어댔다. 단순히 어제의 기억이 남은 수준이 아니라 매우 선명하게 각인되었다는 것에 안심하며 재영은 바드의 눈을 다시 응시했다.
“…….”
티 나지 않게 잘하겠다며. 재영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었다. 다행히 바드는 재영의 눈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다. 바드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영의 팔을 잡았다.
“나, 한국인 친구 가지고 싶었는데. 너도 스물이면 우리 친구 하자. 호정, 너, 나.”
“그래, 친구… 좋네.”
재영은 바드의 말에 미소 지었다. 이런 야트막하고 허접한 술수에도 호정의 얼굴이 보기 좋게 시무룩해졌다. 호정이 생각보다 질투가 많은 편이라는 건 매우 긍정적인 신호였다. 기분이 좋아졌으므로 바드의 얕고 영리하지 못한 행동도 이번엔 넘어가 주기로 했다.
바드를 사이에 끼우고 약과대학으로 걸어가는 중에 재영은 지루함을 느꼈다. 바드를 피해 호정을 쳐다보았다. 바람이 호정의 머릿결 하나하나를 흩트리며 지나고 있었다. 재영은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바드의 등 뒤로 손을 뻗어 호정의 팔을 당겼다. 못 이긴 척 팔을 주고도 바드의 눈치를 보는 호정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호정은 어색하게 몸을 굳힌 채로 괜스레 자신의 볼을 손등으로 훑었다. 호정의 관심이 자신의 팔을 쓰다듬는 재영의 손에만 쏠린 사이, 재영은 바드의 주머니에 가루약을 넣어 주었다. 개가 공을 물어왔을 땐 보상을 해주는 법이라고 배웠다.
“사탕 먹을래?”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호정에게 먼저 내밀었다. 호정은 사탕을 좋아하지 않았다. 바드에게 어떤 식으로 약을 제공할지 고민했을 때 첫 번째로 고려한 게 호정이었다. 호정이 절대 손대지 않을 만한 것이어야 했다. 역시나 호정은 사탕을 잠시 흘겨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탕이 무엇인지 눈치챈 바드가 떨리는 손을 재영에게 내밀었다. 재영은 선심 쓰듯 바드의 손에 사탕을 올렸다. 바드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다급하게 사탕을 입에 집어넣는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그저 약쟁이의 모습일 따름이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바드의 저 공허한 눈동자와 탁한 얼굴빛을 의심했겠지만 호정은 아니었다. 재영과 눈이 마주친 바드가 슬쩍 발을 뒤로했다. 그제야 호정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재영은 바드에 반쯤 가려있던 호정의 얼굴을 살폈다.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운동화로 바닥을 긁는 호정의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기분이 좋아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더 바드가 호정의 얼굴을 가리게 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재영은 겨우 데려온 백송에게 이런 약쟁이의 피를 주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 * *
바드는 오랜만에 기분을 좋게 하는 바람을 느꼈다. 재영이 준 사탕에는 딱 기분이 좋아질 정도의 양만 들어 있었다. 교정의 가운데 서서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약을 하면 공기의 맛도 제각각으로 느껴졌다. 보통 무색, 무향, 무맛인 공기도 약을 하고 나면 공중의 흐릿한 바람결 모양이 보이기도 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달고 쓴맛이 코와 입을 메우기도 했다.
“여기 공기가 좋다. 호정이 맡는 공기 냄새는 어때?”
바드는 호정에게 눈을 두지 않고 물었다. 약을 하기 전에 맡았던 바람의 냄새가 어떠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비리다는 호정의 말에 슬며시 웃음이 났다. 바드는 그제야 그 이전에 자신이 맡았던 바람의 냄새도 그러했음을 깨달았다. 가끔은 약을 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진심이 불쑥 솟구쳤다. 바드는 무분별하게 솟구치려는 말을 한숨으로 겨우 숨겼다. 호정을 보며 웃으니 호정이 피식 웃으며 눈썹을 들썩거렸다.
학교 앞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기분이 더 나아져 있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고 자꾸 실없는 농담을 중얼대고 있었다. 2층 테라스에 앉자, 교정에서 불어오던 바람보다 더 짙고 선명한 바람이 불었다.
“호정은 아프니 내가 갈게.”
호정을 2층에 두고 1층으로 내려가면서 바드는 좀 전 재영이 준 주머니 속 약을 꺼냈다. 폰을 꺼내니 앞으로 모든 약은 사탕으로만 제공될 거란 재영의 연락이 와 있었다.
“Nu contează. (상관없지.)”
바드는 흥얼대며 카운터에 섰다. 주문한 커피를 받은 뒤 주변을 살폈다. 점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바드는 평온한 얼굴로 케이크를 주문했다.
“May I have some ‘Triple C velvet’ cake? (덱스트로메토르판 주세요.)”
어제는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아침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이 바지에 꽂혀 있었다. 약은 약대로 받으면 되었다. 돈도 약으로 바꿀 수 있었다.
바드는 웃음을 참으며 점원을 쳐다보았다. 지폐 몇 장을 꺼내 내밀자 점원은 멀뚱하던 눈을 내리깔았다. 곧 바드가 내민 돈을 받은 점원은 그 돈을 앞주머니에 넣고 주변을 살폈다. 1층에는 점원과 바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점원은 냉장고로 가 초코케이크 한 조각을 꺼내 왔다. 바드는 쏟아지는 기침을 손등으로 가렸다. 점원이 내민 케이크와 커피를 들고 떨리는 눈꺼풀 위를 지그시 눌렀다.
“하아.”
기침이 겨우 진정되었다. 바드는 재영이 좀 전에 준 가루약을 자신의 컵에 털어 넣고 계단을 올랐다.
“네가 시킨 거야?”
“응. 스위트한 게 먹고 싶어서.”
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를 먹는 바드를 보던 호정은 몇 차례나 혹시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답해주어도 시무룩한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약을 시작한 후로 배가 고프다는 느낌조차 들어본 적이 잘 없었다. 바드는 약을 탄 커피 안을 빨대로 휘저었다.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어제보단 확실히 약한 약이지만 그래도 몸을 얼게 하던 긴장이 풀리는 느낌 정도는 들었다. 기분이 좋아지며 저도 모르게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났다.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케이크를 잘라 호정에게 내밀었다.
“…그랜마 보고 싶어.”
바드는 중얼대며 커피를 다시 홀짝였다. “뭐라도 해서.”라는 재영의 말대로 뭐라도 하면 될 터였다. 얼른 이 일을 끝내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재영이 한 말이니 괜찮을 거다. 뭐라도 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서 눈앞의 이 남자애가 제 발로 재영의 집에 들어가 섹스만 하면 끝날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약이라면 본능을 깨울 테니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처음이면 면역력도 없을 거다. 더 효과가 클지도 몰랐다.
바드는 호정이 케이크를 한 입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색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호정이 마침내 바드가 잘라놓은 케이크를 한 입 덜어 먹었다.
“호정. 도둑질에 능숙하구나!”
웃으며 던진 말에 호정이 화들짝 포크를 내려놓았다. 바드는 낄낄대며 호정의 모습을 관찰했다.
“농담이야. 먹어, 먹어.”
많이 먹어서 네 본능대로 얼른 그 망할 변태 새끼에게 간다면 좋을 텐데. 바드는 재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커피를 마셨다. 덜 녹은 가루가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아작아작 소리를 내며 씹혔다. 바드는 떨리는 다리를 한 손으로 잡고 바람을 느꼈다. 슬쩍 쳐다보니 시무룩한 얼굴로 얼음만 남은 빈 커피잔을 뒤척이는 호정이 보였다. 바드는 자신의 커피를 호정의 잔에 부어주었다.
뭐라도 하라고 한 건 그쪽이다. 그래서 뭐라도 하는 거다. 바드는 속으로 되뇌며 호정의 안색을 살폈다. 호정이 빨대로 커피를 저어 한 모금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자신이 평소에 먹는 약과 다른 약이었다. 바드는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처음이니 아직은 아니고 저녁쯤이면 약 기운이 돌 거다. 처음 하는 거라면 열도 날 거고 머리도 아프겠지. 그때 한재영이 찾아간다면 생각보다 쉽게 얘를 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나도 계획보다 빨리 루마니아로 돌아갈 수 있을 테고. 바드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바드. 오늘 날이 좋아.”
“어? 어…….”
“할머니한테 사진 보내드려. 여기 예쁘다고. 하늘이랑 저기 도로에 핀 꽃 같은 거. 할머니들은 그런 거 좋아하시잖아.”
바드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만 그랜마 보고 싶은 거 아닐 거야. 할머니도 너 엄청 보고 싶으실 거야.”
“…….”
“사진 보내드리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우리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까 폰에 온통 내 사진뿐이더라고. 엄마한테는 낯간지러운데 할머니한테 사진 자주 보내드렸거든. 우리 할머니, 손자 중에 유일하게 공부 못하는 게 나라고 매번 나 혼내시기만 했는데. 속으로는 나를 제일 예뻐하셨나…….”
느리게 눈을 돌려 호정을 응시했다. 무덤덤하게 말을 뱉고는 자신이 준 커피를 다시 마시려는 호정이 보였다.
“커피 다시 돌려줘.”
“왜?”
“…그냥.”
바드는 호정의 앞에 놓인 잔을 뺏어 단숨에 들이켰다. 호정이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도둑질에 능숙한 건 너네. 줬다가 뺏고.” 호정은 테이블에 볼을 붙이고 웃어댔다. 동그란 눈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유려하게 휘었다. 눈도, 눈을 감싼 속눈썹도 부드러울 거다. 바드는 입술을 적시고 고개를 돌렸다.
* * *
재영은 교수의 수업에 집중했다. 돈을 낸 값어치가 있는 수업이었다. 지불한 것과 받는 것의 가치가 같다고 느껴질 때, 재영은 만족했다. 다만, 가장 배우고 싶었던 약의 효용에 대해선 아직 겉핥기로만 배워야 한다는 게 아쉬웠다. 교수는 다음 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심화 된 내용을 배울 거라고 했다. 제대로 된 내용은 다음 학기가 되어서나 배울 수 있다는 소리였다.
재영은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한 바퀴 돌렸다. 호정이 모든 걸 알고도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곳에서 다음 수업도 들을 수 있을 거다. 재영은 노트 가득 메모한 수업 내용을 눈으로 한 번 더 훑어 살폈다.
이호정은 자신을 떠날까, 떠나지 않을까. 고작 두 가지의 경우의 수뿐인데도 어느 한 쪽에 더 큰 무게를 두기 싫었다. 어느 쪽이 되어도 재미있겠지. 다만 호정이 떠나게 된다면 다음 학기 수업을 듣게 되지 못할 거다. 그게 아쉬움의 전부였다. 한국의 교수 수준이 이 정도가 될 수 있으려나.
재영은 책상 위로 폰을 꺼냈다. 한국으로 돌아간 윤 비서에게 한국대 약학대학의 교수 명단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들의 약력과 함께 여태 쓴 논문도 모두 첨부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혹시나 이호정 때문에 이곳보다 수준 떨어지는 교육을 받게 될까 불안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지.”
재영은 다시 윤 비서에게 한국대를 포함해 전국의 모든 약학 대학 교수들의 명단을 요청했다. 그중 국제학술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자, 학위는 미국이나 영국인 자, 약학에서도 약품화학, 생화학, 독성학을 두 개 이상 연구 중인 자들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수준이 안 되면 수준에 맞는 교수들을 선택해 불러다 배우면 될 일이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수업이 끝날 때보다 시작할 때를 더 좋아하는 재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수업이 끝나는 시간만 기다렸다. 호정과 바드가 있는 카페로 가며 좀 전 배운 수업 내용을 되감았다. 암기해야 하는 내용들은 한 번씩 더 곱씹어보았다. 조금이라도 헷갈리는 부분이 없게 해야 했다. 뭐든지 완벽한 게 좋았다. 조금이라도 부족한 건 싫었다. 그건 아예 시작하지 않은 것과 같았다.
머리가 정리되고 나자 걸음이 빨라졌다. 카페의 맞은편 횡단보도에 섰다. 2층 테라스를 올려다보니 눈을 감고 웃고 있는 호정의 얼굴이 보였다. 호정의 고개가 여린 박자로 까닥까닥 흔들렸다. 바람이 저렇게 부나 보다. 호정에게는 바람이 저렇게, 저 방향으로, 저 속도로.
재영은 픽 웃으며 그 옆에 호정을 보고 있는 바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감은 호정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바드가 재영을 발견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곧 바드가 호정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호정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맞은편 횡단보도에 선 재영을 발견한 호정이 어색하게 표정을 굳혔다.
“…….”
재영에 대한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복잡한 심경을 보이는 건방짐은 견딜 수 있었다. 그건 오히려 기분이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예의가 없었다. 처음부터 호정은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건방지다고는 생각했었다. 속을 내어주다가도 아닌 척 발을 빼는 요사스러움이 있었다. 조금은 무례하고 되바라진 행동은 늘 적당히 귀여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재영은 표정을 고치고 고개를 들었다. 한 손을 들어 좌우로, 평소처럼 흔들었다.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정이 어색하게 웃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 묘하게 시무룩하게 기가 죽은 볼. 평소보다 느린 속도의 인사. 재영은 틀어지는 기분을 빠르게 잊기 위해 인사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잔잔한 바람이 볼을 긁으며 지났다.
“…이 좆같은 바람 좀 안 불게 할 수 없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부는 바람은 호정에게서 바드에게로 흐르고 있었다. 호정의 향이 바드에게도 맡아지려나. 재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바드와 호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호정을 집 앞에 내려주고 동네를 빠져나왔다. 약속이 있어 미안하다는 말에 호정은 의젓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재영은 호정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노력했다. 운전하느라 표정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호정이 제법 진지하게 자신에 대해 고민 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여태 해준 일들이 보통의 친구 사이에서는 오버스러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 생각보다 길지 않은 시간이 걸린 건 좋았다. 하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바드의 말에 이렇게나 흔들린다는 건 역시나 기분을 틀어지게 했다. 김민재라는 이름 때문인가. 그 이름이 뭔데. 재영은 동네 초입에 차를 대고 핸들을 세게 쥐었다.
“한번 안기 힘드네.”
차라리 돈으로 되는 관계라면 쉬웠을 텐데. 돈만 주면 뒤를 벌려대는 그런 놈이라면 지금쯤 신경도 쓰지 않을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을 텐데. 재영은 핸들을 안고 그 위에 상체를 기댔다. 좀 전까지 호정이 앉아있던 옆자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나 맛있으려고 이렇게 내 기분을 망쳐. 응?”
차를 돌려 윤 비서가 이전에 봐두었던 집으로 향했다. 새로운 집이 필요했다. 호정이 돌아오면 같이 살게 될 새로운 공간. 재영은 인간은 믿지 못해도 새로운 공간이 주는 힘은 믿었다. 도망갔다 잡혀 온 호정이 영국에 살기를 원할 수도 있었다. 자신에겐 여러모로 더 좋은 일이었지만 호정이라면 저 한옥과 벽돌집에는 들어가기 싫어할 수도 있을 거다. 같이 살 새로운 집을 미리 얻어두는 게 나았다.
새로 구하려는 집은 지금의 동네와는 거리가 좀 있었다. 다시 돌아온 호정에게 새로운 기분을 내게 해주기에 적합했다. 호정과 함께 집을 고르고 가구도 함께 고른다면 좋을 텐데. 만약 호정이 “난 이게 더 좋은데.”라고 건방을 떨어대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윤 비서가 봐둔 집을 한번 훑어보았다. 손 댈 곳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기간을 길게 생각한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바드의 계획대로 해주려면 파티를 열 수 있는 장소도 추가로 필요했다. 한 달 정도 렌탈이 가능한 집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건 전적으로 윤 비서에게 일임할 생각이었다. 귀찮은 일에 속하는 건 윤 비서에게 맡기는 게 편했다. 재영은 폰을 꺼냈다. 정해둔 시간에 호정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걱정하고 있다는 뉘앙스는 풍길 필요가 있었다.
“…….”
연결되지 않는 전화에 표정을 찌푸렸다. 건방짐이 더 심해졌다. 남자랑 잔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호정에게는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복잡할수록 재미는 있겠지만 호정이 자신에게 선을 그으려 할수록 빈정이 상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여태 단 한 명의 인간도 자신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군 적이 없었는데. 무례하게 구는 인간을 살려둔 적도 없었는데. 재영은 다시 호정의 번호를 누르고 핸들을 빠르게 돌렸다.
“왜 이렇게 버릇없이 키운 거지.”
재영은 호정의 엄마와 병실에 누운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받지 않는 호정의 번호를 누르려다 그 아래 호정의 엄마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어머니. 아버지는 괜찮으시죠? 네… 걱정돼서요. 네, 호정이는 잘 지내요.”
적색 신호를 바라보며 재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적응도 해야 해서. 아마 지금 정신없어서 연락 자주 못 드리는 걸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혹시 오늘 전화해보셨어요? 오늘도 안 받던가요?”
재영은 폰을 반대편 귀로 옮겼다. 자신이 한번 전화해보겠다는 호정의 엄마 말에 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능하지만 눈치는 있어 다행이었다. 재영은 전화를 끊고 가장 가까운 곳에 보이는 서점 앞에 차를 댔다.
서점에 들어가니 다행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점원은 슬쩍 재영을 쳐다보더니 귀찮은 표정으로 정리 중이던 책에 다시 몰두했다. 인사는 없었다. 철학 카테고리 아래에 꽂힌 책 전부를 구매했다. 점원은 그제야 재영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차의 뒷좌석으로 책을 옮기던 직원이 또다시 재영의 얼굴을 살폈다. 어려 보이는데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궁금한 모양이었다. 재영은 그런 직원의 겉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폈다.
재영은 숨을 참았다가 깊게 들이마셨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는 남자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재영은 방금 남자가 차에 실은 책 중 하나를 꺼내 펼쳤다. 펼친 책의 단면을 찢었다.
“미안. 내가 오늘 기분이 너무 좆같아서 그래.”
남자의 턱을 잡고 입을 벌려 찢은 종이 한 장을 구겨 넣었다. 남자는 재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기 위해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물러났다. 돈이 부족한가. 책 파는 애가 생각보다 욕심이 많네.
재영은 돈을 더 꺼내 남자의 품에 던지고 책을 한 장 더 찢어 구겼다. 동그란 구 형태로 구겨진 종이를 남자의 입에 쑤셔 넣었다. 버둥대던 남자의 몸이 잠잠해졌다. 겁에 질린 남자의 눈이 점점 벌겋게 물들어갔다. 재영은 다시 숨을 깊게 내쉬었다. 다시 폰을 꺼내 호정의 번호를 눌렀다. 역시나 이번에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재영은 자신의 지갑을 아예 남자의 손에 쥐여 주고 이번엔 책을 뭉텅이로 찢었다. 벌어진 남자의 입에 찢은 종이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고 나서야 재영은 지갑의 모든 현금을 꺼내 남자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남자는 입에 물고 있던 종이를 토하듯 뱉어냈다.
아직도 바닥에 앉아 벌벌 떠는 남자를 두고 차에 올랐다. 지하실에 윤 비서가 준비해두고 간 노루가 있었다. 그런데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다시 폰을 꺼내 호정의 번호를 누르려는데 바드의 전화가 먼저 울렸다. 재영은 바드의 이름을 보는 순간 2층 테라스에 앉아있던 호정과 그런 호정을 보던 바드의 상기된 얼굴을 떠올렸다. 전화를 받자 바드가 호들갑을 떨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라도 하라고 해서요. 오늘 걔한테 가면 좀 일이 빨리 해결될 거 같은데요. 잘하면 그 파티, 안 해도 될걸요?
재영은 당장이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재영이 답이 없자 바드가 다급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오늘 준 약, 그거 이호정한테 좀 먹였는데. 괜찮죠? 아마 지금 열도 나고 옆에 있는 사람 누구라도 붙잡고 섹스하고 싶어졌을 건데.
중간중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라도? 재영은 자신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오늘 준 것만 먹였나요?”
-아. DXM도 먹였는데. 감기라면서요? 감기면 약 먹어야 하잖아요. 그거랑 거의 같으니까.
“하.”
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죽여도 되는 이유를 스스로 차곡차곡 쌓아주는 멍청함이라니. 재영은 신경질적으로 폰을 집어 던졌다. 맞은편 창문을 맞고 튕겨 나온 폰이 시트 아래로 떨어졌다.
재영은 빠르게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할 수 있다면 거리의 모든 차를 들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정에게 마약이라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외투를 바닥에 던졌다.
“상종 못 할 개새끼한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재영은 중얼대며 신경질적으로 서랍을 뒤졌다. 서랍의 모서리에 몇 번이나 손이 긁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약을 찾아 부엌으로 향했다. 두 종류가 섞였다. 게다가 처음 약을 먹었을 테니 어떤 반응이 나타나고 있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에 자신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약 때문이라는 새로운 이유가 비집고 들어찬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영은 약 두 개를 섞기 시작했다. 꾸덕꾸덕하게 녹아 늘어지는 약을 굳히는 중에 다시 호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왜 이렇게 안 받았어? 걱정했어.”
최대한 침착한 척했지만 시선은 아직도 굳지 않은 약과 기운 없이 늘어진 호정의 목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직도 아픈 거지? 많이 아픈 거야?”
잠시 망설이는 호정의 목소리에 짜증이 일었다. 재영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서점의 직원이라도, 바드라도. 둘 중 아무나라도 죽여야 했다. 누구 하나는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하필 윤 비서도 없었다.
-좀 피곤해서, 재영아. 나 내일 수업 없으니까 우리 집 안 와도 돼. 너도 쉬고. 내 걱정은 하지 마.
재영은 눈썹을 검지로 쓸었다. 구겨진 표정을 펴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너희 집에 가고 안 가고는 내가 결정해. 네 걱정을 하고 말고도 내가 결정하는 거야.
재영은 아직 덜 마른 약을 봉투에 넣고 빠르게 집을 나섰다. 신발을 갈아 신을 새도 없었다. 호정의 집 벨을 눌렀으나 답이 없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다 내려오던 호정과 마주쳤다. 발갛게 열이 오른 볼을 타고 귓불까지 빨간 열이 올랐다. 늘 하얗고 선명한 색을 지녔던 눈의 흰자도 탁해져 있었다.
재영은 걸음을 옆으로 살짝 비틀었다. 빛이 내려오는 쪽에 서서 호정의 얼굴을 더 세심하게 관찰했다. 재영은 호정이 오직 자신에게만 뒤를 내어주는 참한 아이로 크길 바랐다. 누구든 상관없이 자고 싶어 하는 되바라진 아이는 원하지 않았다.
다시 호정의 눈을 응시했다. 다른 부위에 발갛게 열이 오르며 눈 밑 색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재영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너 이거 먹어야 해서.”
“뭔데?”
“먹어, 일단. 설명하기는 힘드니까.”
“약은 아까 줬잖아. 좀 전에도 먹었어.”
“먹어. 다른 거니까.”
재영은 호정의 손을 거칠게 끌어 계단을 올랐다. 당장이라도 손이든 발이든 비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왕이면 목을 비트는 게 가장 간결할 거다. 무엇 하나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호정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목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호정이 재영의 손을 뿌리쳤다.
“…호정아.”
재영은 자신의 손을 빠져나간 호정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발갛게 익은 손목을 쥐고 입술을 깨문 호정의 모습이 보였다.
“미안. 아팠지? 마음이 너무 급해서.”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호정의 눈빛에 재영은 재빨리 자신이 한 행동을 되감았다. 표정에서 티가 나지는 않았을까. 자신의 본래 표정과 눈빛이 들킨 건 아닐까. 어색하게 허공에 뜬 손을 내렸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데. 친구라서? 내가 네 친구니까?”
재영은 그제야 호정이 자신의 손을 뿌리친 이유를 깨달았다.
거칠게 잡아서, 무턱대고 팔을 끌고 가려고 해서, 잡힌 팔이 아파서. 호정은 그런 허접한 이유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자신의 혼란스러움에 화가 난 상태였다. 약을 하면 솔직해진다고 했던가. 재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약을 하니 이렇게 솔직하게 물을 줄도 아는구나.
“다른 이유가 더 있어야 해? 너는 그래?”
재영은 표정을 굳히고 몸을 바로 세웠다. 해독하기 전 좀 더 그 진심을 듣고 싶어졌다. 흥미로운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리숙한 얼굴을 하고 되바라진 눈빛을 한 존재는 여전히 꼿꼿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던지고 있었다. 올려다보는 눈길이 제법 당당하고 또렷했다. 감히 자신을 다그쳐 원하는 답을 얻어내려는 시건방진 태도.
“기다려.”
재영은 뒤돌아 계단을 올랐다. 물을 따를 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어디서 저런 존재가 굴러왔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옅게나마 김민재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그 골목에 호정이라는 존재를 피투성이로 버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자신이 옭아맬 일도 없었을 텐데. 멍청한 인간들이란 항상 욕심을 부려 가진 것마저 잃기 일쑤였다.
물을 내밀어도 호정은 이를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화라도 난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에 재영은 당장이라도 팔을 끌어다 계단에 얼굴을 박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목을 잡고 도망치려는 호정을 결박해 바지부터 내려 뒤를 쑤셔버리고 싶었다. 건방진 입술에선 침을 흘려대고 주제넘은 태도로 일관하던 뒷구멍에는 자신을 박은 채로. 그런 꼴을 하고도 호정은 저런 표정을 지어댈 수 있을까.
“난 피해도 되는데, 이건 먹어.”
재영은 호정의 볼을 잡아 눌렀다. 서점 직원의 턱을 잡아 늘이던 동작과 결은 같았으나 힘의 크기는 명백히 달랐다. 손가락에 알약을 끼워 입안 깊숙이 넣고 물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들어갔다 나온 입술은 여전히 벌어져 있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짜증과 억울함으로 호정의 두 눈이 촉촉했다.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데서 오는 짜증. 똑똑한 재영조차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데서 오는 억울함. 이 모든 게 자신만의 착각일까 하는 분노. 재영의 손에 볼이 눌린 채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약을 먹게 된 수치심. 재영은 눈앞에 보이는 호정의 태도와 눈빛에서 감정을 찾아냈다. 하나하나 호정이 보이는 감정을 정리하니 자신이 할 일이 더욱 명확해졌다.
“네가 나를 대하는, 나에게 해주는 이 모든 게. 이 집, 대학교, 우리 아빠. 모든 게 평범한 친구 사이에도 가능한 거야?”
재영은 문고리를 쥐고 웃음을 흘렸다. 좀 더 거리를 두면 알아서 올 아이구나. 호정은 김민재에게 돈이든 감정이든 받아만 온 시간이 꽤 길었다. 아닌 척하지만 그만큼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보통은 의아하고 의심을 할 만한 일에도 친구니까 해줄 수 있다, 라는 막을 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런 호정이 자신과 자신이 받아온 것에 의문을 품은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래서 아이는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건데. 재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호정의 안색을 살폈다. 호정은 먹은 약이 쓴지 얼굴을 찌푸렸다. 쓰린 혀를 이 사이에 끼우고 자신을 올려보는 모습에 자칫하면 웃음이 날 뻔했다.
저렇게 자신을 먹어달라고 애를 쓰는데도 당장은 박아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재영은 느리게 계단을 내려갔다. 할 말이 있는 아이는 재촉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줘야 했다. 그게 올바른 양육자의 태도였다.
“네가 다시 괜찮아질 때까지 오지 않을게. 학교까지는 힘들면 기사 불러줄게. 이것도 부담스럽다면 네 인생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 거야. 내 행동이 너에게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
재영은 문을 열고 나가며 걸음을 멈추었다. 얼른 자신을 불러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젖혔을 때 뒤로 호정이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그 대단하다는 평범한 친구 관계로만 나를 본 게 확실해?”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건 어떨까. 재영은 이 어려운 문제를 호정 혼자 풀 수 있을까 자문하며 호정을 바라보았다. 호정이 눈을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답을 구해올 때까지는 기다려주기로 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하루. 이틀? 저 영악하지 못한 아이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정답을 쥐고 나타날 수 있을까. 혼자서 답을 찾으려면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잡아먹을까.
재영은 집으로 돌아와 상단에 있는 바드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바드가 전화를 받았다. 약에 취해 단어 하나조차 분명한 발음으로 뱉어내는 게 없었다.
-헤이… 하… 성공했죠? 잤죠?
낄낄대며 웃는 바드의 목소리에 재영은 눈을 굴리며 소파에 앉았다. 조명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 바닥에서 시작해 차양으로 가려진 지하실 입구까지 시선을 옮겼다.
“호정이 나올 때까지 네 약은 없어.”
-나와? 어디에서 나온다는 건데요?
바드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재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지하실의 입구까지 느리게 걸어갔다. 죽어가는 노루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눈을 감고 깊고 긴 호흡을 내뱉었다.
“지혜 씨. 그날 본 멧돼지 기억하죠?”
-…네? 아… 멍청하다는 말, 그날 이후로 한 적 없어요. 진짠데… 진짜예요. 진짜.
재영은 차양을 세게 쥐고 옆으로 밀었다.
“약은 너 같은 것들이나 먹는 거지. 내 애가 먹는 게 아니야.”
지하실로 내려가며 전화를 끊었다. 바드가 무어라 더 말을 이으려 했지만 듣기 싫었다. 계단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숨소리는 더욱 크고 거칠어졌다. 짙은 피 냄새. 재영은 벽에 걸려있는 장갑을 끼고 검은 본견으로 감싸진 두툼한 형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목을 가다듬고 더욱 깊게 향을 음미했다. 고개를 들고 천천히 지하실을 바라보았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으로만 가득 차 있는 공간을 다시 눅눅하고 비린 공기가 채운 이곳. 정말 이런 곳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곳일까.
아름다운 차양으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악취가 나는 곳. 빛이 들지 않아 소음이 없고 고요하기만 한 곳. 바닥에 질척이는 찐득한 핏물.
생각보다 일이 지리하고 지루해졌다. 흥미가 떨어졌을 때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건 재영의 방식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걸 추가하는 것. 그게 재영의 방식이었다.
재영은 본견으로 감싼 형체에 손을 얹고 숨을 가다듬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떨림. 거친 숨소리와 살고자 하는 버둥거림. 아직은 뜨거운 몸. 훅훅 내뱉는 숨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안면. 본견을 벗어나고자 하는 들썩임. 재영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꼈다.
“어떻게 죽이지.”
* * *
며칠이 더 지났을 때, 약학대학의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바드와 마주쳤다. 불안정하게 떨리던 손을 뒤로 감춘 바드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 재영은 바드의 몸을 보며 지하실에서 죽어가던 노루를 떠올렸다. 얼추 크기가 비슷했다.
“약… 약 먹인 건… 죄송… 죄송해요. 그러니까… 약속한 대로 약 좀… 주, 하아… 하나만… 하나라도.”
재영은 혹시나 바드가 자신의 팔이라도 잡을까 팔짱 낀 손을 풀지 않았다.
“호정이 아직 학교 안 나와서 안 되겠는데요?”
“그럼 폰 번호라도 알려줘요. 연락… 연락해볼게요.”
재영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호정은 이런 약쟁이와 다를 바 없는 초라한 삶을 살았을 거다. 재영은 눈앞에 선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동공이 풀린 채로 하루하루 약이나 구걸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라니.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여태 번호도 못 받고 뭐 했어요. 애한테 약 처먹일 생각할 시간에 열심히 노력했어야지. 지혜 씨는 왜 그렇게 뭐든 쉽게 받으려고 해요.”
재영은 진심으로 바드를 걱정하며 되물었다. 정말 왜 이렇게 쉽게, 대충 살아가는 건지 궁금했다. 전교 꼴등이었던 호정이도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렇게 학교도 나오지 않고 혼자 끙끙대며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말하면 그쪽도… 손해잖아요.”
바드는 입술을 떨며 재영을 노려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바닥에 고꾸라질 것처럼 휘청대는 몸짓에 재영은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호정이랑 진짜 친해지지는 마.”
“…네?”
바드가 게슴츠레한 눈을 떠 재영을 올려보았다. 위태롭던 몸이 바닥으로 푹 쓰러졌다. 재영은 주변을 살피며 그 앞에 앉아 바드의 안색을 살피는 체했다.
“호정이랑 진짜 친해질 생각은 하지 말라고.”
바드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말일까, 생각할 틈도 없이 재영의 소매를 당겨 잡았다. 재영이 짜증스레 손을 뿌리쳤지만 다시 버둥대며 손을 뻗어 재영의 소매를 끌었다.
“파티 준비도 해야 하니까 조금이라도 미리 주면… 미리 좀 줘요.”
“약쟁이들은 진짜 뻔뻔하구나.”
양심이라는 건 이런 것들에게나 없는 건데. 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방을 열어 사탕 하나를 꺼냈다. 사탕을 감싼 비닐을 벗기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드가 다급히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쥐었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고 재빠르게 사탕을 문 바드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흐려졌던 눈을 몇 번 깜박였다. 탁하던 눈동자가 검고 선명한 빛으로 차기 시작했다.
며칠이 더 지났다. 호정이 학교에 나온 건 그날 이후 일주일이나 지나서였다. 바드의 머릿속엔 온통 약 생각뿐이었다.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하자 이제는 그 주기가 예전처럼 다시 짧아졌다. 며칠 전 재영이 준 사탕 하나로는 여전히 부족했다. 입맛도 없었다. 재영의 말이 맞았다. 호정의 번호를 왜 여태 받지 않았지, 하는 자책만 늘어갔다.
건널목에 선 호정을 다시 보았을 땐 호정의 머리통이 알약으로 보일 정도로 환희에 찼다. 바드는 침을 꼴깍 삼키고 호정의 옆에 붙었다. 왜 일주일이나 수업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궁금했다. 호정은 웃기만 할 뿐 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할머니 사진에 관심을 보였고 다쳤던 손이 괜찮은지 되물었다.
“야박아. 너 다정한 편이지?”
“나? 아니.”
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정한 건 재영이. 네가 봐도 그렇지 않아?”
호정이 볼을 긁으며 물었다. 바드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강의실에 들어와서도 마음 한편이 찝찝하고 불쾌했다. 커피를 사러 나간다는 호정을 보내고 자리에 앉아 책상에 고개를 박았다. 쿵쿵 소리를 내며 이마를 찧어댔다.
돈 때문에 괜히 어려운 일에 끼어들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두통은 더 극심해졌다. 바드는 당장 눈에 보이는 아무것이라도 입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에 넣어 씹을 수만 있다면 길바닥을 기는 쥐든 바퀴벌레든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바드는 가방에서 진통제를 꺼내 손바닥 위에 전부 털어냈다. 다섯 알이 넘는 약을 입안에 한 번에 쏟아 부었다. 진통제가 효과가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독증세가 심해질 때는 미량의 파라세타몰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열로 들끓는 몸이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바드는 화면에 뜬 재영의 번호를 보고 목을 가다듬었다. 알약 몇 알이 목에 걸리더니 이내 목구멍을 아프게 긁으며 내려갔다.
“이호정… 학교 왔어요. 저랑 좀 전에 봤……!”
-알아. 내려와요.
바드는 다급하게 건물을 뛰어 내려갔다. 할 수 있다면 창문을 통해 1층까지 단번에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신호등 앞에 서서 재영을 기다렸다. 재영의 차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섰을 땐, 자신을 덮은 피부의 모든 세포가 찢어지고 갈라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바드는 재영이 내민 사탕을 허겁지겁 받았다. 재영은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바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바드는 재영의 차가 출발한지도 모를 정도로 멍하니 숨만 쉬어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후…….”
길을 건너온 호정이 자신의 옆에 섰다. 바드는 일부러 호정 쪽을 보지 않았다. 호정을 연민할 필요는 없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호정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더 급했다. 바드는 속으로 자신이나 걱정하자고 다짐했다. 할머니와 자신의 걱정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속 편하게 호정이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도 되뇌었다. 호정을 향한 걱정이 모두 배부른 소리라고 정의하자 이유 없이 불안하던 마음도 조금 진정되었다.
재영이 준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나니 온몸을 돌던 긴장감이 풀렸다. 검은 점이 번쩍거리고 형형색색의 불빛이 반짝이던 눈앞도 본래의 형태와 빛으로 분명해졌다. 머리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약을 오래 하니 약을 하기 전과 후가 뒤바뀐 기분이었다.
옆에 선 호정이 자신의 팔을 끌어 손을 보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손을 내려놓았다.
“왜?”
“아까도 너 손 떠는 거 같던데. 마치고 같이 병원 갈래? 근육 쪽은 겉으로 티 나지 않더라도 심각한 경우도 있대.”
호정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자신의 손목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는 호정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바드는 자신의 손을 빼내 어색하게 맞잡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웃어 보이자 호정이 자신을 따라 웃었다. 호정은 몇 번이나 더 바드의 손을 의식했다. 어째서인지 손을 떠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 싫었다. 바드는 맞잡은 손에 잔뜩 힘을 줘 경련이 멈추길 바랐다.
이번 사탕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약이 함유되어 있었다. 입이 찢어져라 쏟아지던 하품과 눈앞에 날파리처럼 떠돌던 잔상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강의 시간 내내 졸려 잠만 잤다. 혼잡한 분위기에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수업을 마친 교수가 자신과 호정의 사이를 막고 서 있었다. 흐릿한 눈을 떠 올려보았다. 당연히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교수는 자신이 아닌 호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Your friend who sleeping in class all the time, he might be changing his friends a lot, sometimes very energetic, talk fast, interrupting someone in a rude way, or say things that don’t make sense. hmm. ok, sure. At least now you know, this is warning, if he ever offers you drugs, just report it. you hear me? (수업시간 내내 자는 네 옆에 얘, 혹시 친구들도 너무 자주 바뀌고 가끔 정신이 나가 있고 말도 빠르고… 무례하게 말을 자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하고 그러지 않니? 너도 이제 알겠지만 이건 경고야. 만약에 얘가 너한테 약을 권하면 바로 신고해. 알겠니?)”
교수는 조금의 틈도 없이 빠르게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교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는 호정이 보였다. 바드는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알아들었으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 들어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제발. 호정이 교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만을 바랐다. 아직 들켜선 안 됐다. 이제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교수가 화를 내는 대상이 바드라는 건 호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바드는 두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차라리 호정이 자신을 버려두고 강의실을 나가길 기다렸다.
“바드. 바드! 야. 다음 강의 가야지.”
바드는 느리게 눈을 떠 호정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수업이 벌써 끝난 거냐고 물으니 호정은 고개만 끄덕였다. 교수가 혼냈다는 이야기는 전하지 않기로 저 혼자 결정한 듯 보였다.
네가 자서 내가 혼났잖아. 보통은 다들 이렇게 화를 냈었다. 열여섯이던 10학년 때 처음 약에 손을 댔다.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던 남자애가 권한 것이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바드는 너무 외로웠었다. 동성애자라는 성향 때문인지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누구 하나 옆에서 자신을 걱정해주거나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던 남자애가 속한 무리에 섞여 처음 필터에 끼운 약을 흡입했다. 아이들은 그런 바드를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그들이 바드에게 보여준 첫 웃음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바드는 약이 아니라 아이들의 웃음에 중독되었다.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손을 뻗어 호정의 손을 잡았다.
“너 그렇게 다정하지 마. 나 좋은 사람 아니야.”
호정은 실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바드는 호정이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약을 하기 전에도, 약을 한 후에도 자신의 손을 뿌리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잡는 순간 내쳐지는 게 일상이라 오히려 순순히 손을 내어준 호정의 손가락과 팔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때 나랑 닮았다던, 그 친구가 혹시 재영이야?”
“…한재영? 아니. 그럴 리가. 다른 친구 있… 어… 있었어.”
호정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asta e ușurare. (다행이다.)”
바드는 눈을 감고 윤 비서가 말했던 ‘김민재’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 이름 덕에 호정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 친구는 나와 어디가 닮았을까. 자신이 그 친구와 닮았다면, 그렇다면 만약 자신이 한국에 있었다면 그 친구처럼 호정의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럼 자신도 약 같은 거에는 손대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평범한 22살의 바드였을까. 바드는 눈을 감고 잡고 있던 호정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그날 밤, 윤 비서가 한국에서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토요일에 있을 파티 전에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다훈과 세희는 영국에서 돌아온 윤 비서를 붙들고 영국에 있는 재영의 하루하루를 보고하라고 했다. 윤 비서는 재영이 미리 알려주었던 문장을 하나씩 떠올렸다.
도련님은 런던에서 매우 잘 지내고 있다, 공부는 언제나 그랬듯이 열심히 하고 있으며 호정과 거의 매일 같이 저녁을 먹는다, 별다른 일은 없다, 재영이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재영이 시킨 말들을 늘어놓는 중에 윤 비서는 영국에 있는 재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볼 때 영국에 온 후로 재영이 즐거워 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아… 씨발……. 재미없어.”
윤 비서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고개를 들어 맞은편 호정의 집 창문을 응시했다. 도련님이 즐거워야 자신도 즐거웠다. 그가 행복하고 기뻐야 자신도 기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더욱 신나는 일들만 시켰으면, 더욱 재밌는 일만 시켜줬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하나씩 돋아났다.
윤 비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얀 담배 연기가 눈썹 위로 올라갔다. 저 창문 뒤에 도련님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있었다. 왜 겨우 저런 것 하나 잡는데 이렇게 조심스러워야 하는 거지? 멧돼지나 노루를 잡을 때와 뭐가 그렇게 달라서. 그냥 목에 밧줄을 둘러 질질 끌고 와 지하실에 가두면 그만이었다.
윤 비서는 무심결에 떠오른 재영을 향한 질문을 서둘러 삼켰다. 명백히 건방진 행동이었다. 도련님이 하는 일에 감히 질문이라니. 분에 넘치는 행위였다.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를 깊게 빨았다.
“당연히 이유가 있으시겠지.”
윤 비서는 바닥에 담배를 던지고 호정의 창가에 박혀있던 시선을 내렸다.
* * *
토요일은 준비한 일들을 체크하는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재영은 오랜만에 날 선 얼굴로 윤 비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건 윤 비서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재영의 모습이었다. 무감각하고 무신경한 재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진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드는 오전부터 재영의 집에 있었다. 재영은 더듬대며 말하는 바드의 계획을 무표정하게 듣고 있었다. 윤 비서는 그런 재영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도련님이 누군가를 싫어하고 증오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재영은 가끔 자신의 부모를 보며 그런 표정을 짓기도 해서 윤 비서는 재영이 다훈과 세희와 함께 있을 때 일부러 뒤에 서서 재영의 얼굴을 보곤 했었다. 윤 비서는 재영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바드를 흘깃 보고 짜증으로 일그러진 재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단 파티만 오면 분위기 때문에라도… 아니, 다른 사람들은 어색할 테니까 아무래도 그쪽한테 붙을 테고… 무슨 말인지 아시죠?”
바드가 중얼중얼 힘겹게 말을 이었다. 재영은 바드를 보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파티만 열어주면 알아서 한다더니 생각해온 게 고작 이런 거라니. 이호정이 어색한 상황에서 내 옆에 붙을 거라고? 아니. 이호정은 그 파티 장을 벗어나는 방식을 택할 거다. 재영은 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요. 좋네요.”
재영은 상황이 바드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바드는 자신이 시킨 일 중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은 한 셈이었다. 재영은 약쟁이가 이 정도의 역할을 해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윤 비서. 지혜 씨 데려다줘요. 호정이보다 먼저 가 있어야 하니까.”
“네. 도련님.”
바드가 다가왔다. 윤 비서는 재영이 미리 준비해주었던 사탕을 바드에게 내밀었다. 바드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따라 나왔다. 차에 오르자마자 바드는 신난 얼굴로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쪽은 이런 거 해본 적 없죠?”
바드가 혀를 내밀었다. 빨간 혀 위에 올려져 있는 사탕이 보였다.
“네.”
“하지 마세요. 한번 하면 못 벗어나니까.”
“안 합니다.”
바드가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골목을 나서려는데 막 집에서 나와 길을 걸어가는 호정이 보였다. 바드의 시선이 호정을 따라 뒤로 옮겨졌다. 사탕은 바드의 오른쪽 볼에서 왼쪽 볼로 굴려졌다.
“호정이… 파티 가는 중이네. 기운 없어 보인다. 기분도 안 좋은 거 같고… 그죠?”
그제야 윤 비서는 백미러로 호정의 모습을 확인했다. 우산을 들고 걷는 호정이 보였다.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게 무슨 말인지. 기분이 안 좋은 건 또 무슨 말인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는 바드를 슬쩍 쳐다보았다. 바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여전히 호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 비서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골목을 돌아 나갔다.
집에 홀로 남은 재영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 밤 호정은 제 발로 재영의 집에 들어와야 했다. 지루한 계획의 겨우 절반까지만 왔는데도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호정에게 너무 긴 시간을 주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아이는 제 나름의 답을 가져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와 그 답을 제시해야 했다. 제시한 답이 맞고 틀리고는 재영이 선택할 일이었다.
재영은 횡단보도에서 자신의 차와 그 앞에 선 바드를 보며 흔들리던 호정의 눈빛을 상기했다. 꽤 볼만한 얼굴이었는데. 더 보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어 돌아서야 했던 게 아직도 아쉬웠다.
머뭇대며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얼굴. 얄쌍한 자존심을 부리는 못된 얼굴. 재영이 손을 내밀면 언제든 잡을 테지만 자신이 먼저 내밀지는 않을 거라는 얄팍한 오기로 잠식된 그 얼굴을 오늘 더 볼 수 있을까 기대했다.
호정이 파티에 오는 건 확실해졌다. 바드는 호정이 재영의 옆에 붙을 거라고 했지만, 재영의 생각은 달랐다. 호정은 절대 바드의 계획대로 행동하지 않을 거다.
재영은 바드를 처음 자신에게 소개해주며 머뭇대던 호정을 떠올렸다. 아닌 척하면서도 앙큼하게 질투가 있는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당한 훈육 법으로 예의를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망설이고 머뭇대면 잃게 되는 게 있다는 것. 그걸 알려준다면 호정은 얼마나 불안해할까. 당장 달려와 자신의 품에 안기려 하지 않을까. 키우는 건 자신 하나만이어야 한다고 울며불며 매달릴 수도 있지 않을까. 날을 세우고 자신의 옆에 붙은 사람을 할퀴어대는 당돌함마저 있다면. 그것도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재영은 입맛을 다시며 옅게 휘파람을 불었다. 호정이 틀어주었던 노래였던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노래가 입술 사이 바람이 되어 흘러나왔다. 서재로 가 서랍에 넣어두었던 사탕을 한 움큼 쥐었다.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사탕이 바닥에 몇 개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재영은 제 눈엔 한없이 초라하기만 한 주택가 앞에서 호정을 기다렸다. 게으르고 무책임한 인생을 살아가는 약쟁이들에겐 적합한 장소였지만 본인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호정이 아니었다면 이런 거리에 서 있을 필요도 애초에 없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내심 괘씸한 마음마저 들었다.
호정이 콜록대며 기침을 하는 소리와 와인점에 들어서서 어색하고 미흡한 영어로 말하는 소리, 어쭙잖게 더듬으면서도 끝내 원하는 와인을 사는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다 컸네.”
재영은 호정의 어색한 영어 실력에 기특함을 느꼈다. 시계를 보니 자신보다 십여 분 더 늦게 이곳에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가 아닌 버스를 타고 온 탓에 자신보다 늦은 시간에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계획대로 움직여줘야 하는데 혹시나 그사이 길이라도 잃을까 신경은 온통 귀에 꽂힌 호정의 소리와 움직임에 집중됐다. 다행히 호정은 길도 잃지 않았고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생각에 와인도 준비할 줄 알았다. 물론 호정이 산 게 무엇이든 약쟁이들에게는 과분한 것이었다.
재영은 귀에 꽃은 이어폰을 뺐다. 호정이 곧 이곳에 올 거라는 생각이 들자 짙은 흥분감이 몸을 감쌌다. 바드가 불렀다는 친구들은 하나 같이 제대로 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한자리에 모으기도 힘들 텐데, 재영은 혀를 차며 쓰레기 너머 또 다른 쓰레기들을 관찰했다. 바드를 불러 그들 중 누구라도 자신에게 먼저 손대지 말 것을 명령했다. 바드의 옆에 있던 남자가 재영을 흘깃 쳐다보며 바드에게 몸을 붙였다.
왜 호스트 기분이 나빠 보이냐는 물음이었다. 파티에서는 호스트보다 더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는 게 보통이었다. 바드는 제 나름 꽤 열심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절반 이상은 방금 지어낸 거짓말들이었다. 호스트의 기분이 나쁜 게 아니다, 지금 쟤가 어색해서 그렇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충분히 즐거워할 테니 일단은 즐겁게 놀아라, 라는 간단한 몇 마디 문장을 말하고 노래를 크게 틀어놓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집 안은 재영이 제공한 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풍선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그 안에서 하얀 가루가 쏟아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풀린 동공으로 약을 집어 먹다가 낄낄대며 바닥을 구르기 일쑤였다. 구석에 모여 서로의 몸에 주사를 꽂는 무리도 있었다. 바드는 그 틈에 끼여 사탕 하나를 벗겨 입에 넣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호정이 올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마른 침을 삼켰다.
오늘만 잘 넘기면 절반은 성공이었다. 일단 호정이 재영과 이 파티를 계기로 이어지고 나면 의심하게 하는 거야 지금보다야 훨씬 수월할 것이다. 바드는 사탕을 입에서 굴리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곧 루마니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일었다. 시킨 일이 모두 제대로 완료되면 약속한 돈도 모두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갈 수 있을 거…….
“oh… my…….”
바드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손이 떨리고 눈 뒤는 뒤통수까지 뜨거워졌다. 할머니에게 연락한 지 거의 일주일이나 되었다는 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나마 조용한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폰을 꺼내 다급히 할머니의 번호를 누를 땐 몇 번이나 손이 미끄러져 바지에 손을 닦아내야 했다.
“…nana.”
맞은편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드는 자신의 손자가 영국의 대학교에 합격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울컥하고 말았다.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할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손바닥에 흥건히 고인 땀을 바지춤에 다시 닦았다. 곧 돌아갈 거라는 말에 할머니가 웃었다. ‘공부 다 하고 와야지, 아가야.’ 바드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에 코를 훌쩍이며 화장실 바닥에서 일어났다. 코끝이 찡해 몇 번이나 코를 비비고 찡그렸다. 화장실 옆 칸에서 살이 부딪히는 적나라한 소리와 신음이 들렸다. 바드는 옆 칸 벽을 주먹으로 쾅 쳐냈다.
비척대며 일어나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한없이 어색했다. 바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약은 더욱 간절해졌고 시선은 불분명해졌다. 바드는 얼굴을 손으로 세차게 비볐다. 가까스로 세면대를 짚고 물을 틀었다. 손 가득 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얼굴에서 목으로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한참 바라보다 울리는 폰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재영은 파티가 진행 중인 집의 맞은편에 서서 호정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거리감을 주면 더욱 다가올 아이라는 걸 알았으므로 먼저 다가가진 않을 계획이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다면 호정 역시 자신을 멀리서 지켜만 볼 것이다. 애가 타는 쪽도, 불안하고 불편하고 조급해지는 쪽도 당연히 호정이 될 거다. 재영은 팔짱을 낀 채로 골목을 돌아 들어오는 호정을 보았다.
잔뜩 기죽은 얼굴로 골목을 두리번거리는 호정이 품에 들고 있던 와인을 고쳐 들었다. 와인이 많이 무거운 걸까. 다시 생각해도 저딴 약쟁이에게 주기엔 너무 과분했다. 호정은 자신이 받은 주소와 집을 확인하더니 폰을 꺼냈다.
어깨에 기우뚱하게 걸린 우산에 웃음이 났다. 영국에 올 때 자신이 사준 우산이었다. 웃으며 호정을 보던 재영이 표정을 굳혔다. 호정의 뒤로 파란 눈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밤갈색 머리를 한 외국 남자가 붙었다.
“저 새끼들은 왜 이렇게 똥오줌을 못 가리지.”
재영은 팔을 풀었다.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거리던 호정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재영은 좌우도 살피지 않고 도로를 건너 남자의 뒤에 섰다. 호정을 가린 남자의 어깨를 꽉 잡아 옆으로 밀쳐냈다.
“비켜.”
빗물로 미끄러워진 바닥을 잘못 디뎌 주춤거리던 남자는 곧 재영의 얼굴을 확인하고 옆으로 비켜났다. 재영과 호정을 번갈아보던 남자가 재영을 향해 웃음을 보였다. 파트너가 있으면 손대지 않겠다는 듯 남자는 손을 살짝 올리며 물러섰다.
“들어가자. 너도, 여기 놀러 온 거잖아.”
시작도 하기 전에 계획이 틀어졌다. 타인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 재영은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밤갈색의 머리. 재영은 파티 장 안으로 들어서며 밤갈색 머리부터 찾았다. 계단의 끝에 다다라서도 좀 전 밤갈색 머리만 찾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찾아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을 끌어다 죄다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hey…….”
재영은 자신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밤갈색의 머리. 머리 색과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이질적인 파란 눈. 호정의 뒤에 붙이려던 개좆같은 성기를 단 남자가 자신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재영은 미세하게 웃으며 남자의 턱을 잡아 좌우로 돌리며 얼굴을 살폈다. 그리 역겨운 얼굴은 아니었다. 두 번 다시 호정에게 그 더러운 좆은 박을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무릎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줄 정도. 딱 그 정도로 뒤를 박아줘야 저 약물로 썩은 좆을 세울 생각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테니까.
2층에 서 있던 바드는 호정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던 바드와 계단의 끝에 선 재영의 눈이 마주쳤다. 바드는 재영의 옆에 선 남자와 재영을 번갈아 보았다. 어떤 상황인 건지 가늠되진 않았지만 이런 순간에 앞뒤 상황이나 잴 여유는 없었다. 바드는 심호흡 같은 긴 호흡을 뱉고 호정의 앞에 섰다.
“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 진짜 미안한데, 먼저 가도 되지?”
“하지만 호정은 방금 왔는데.”
몸이 좋지 않다는 호정의 말에 바드는 뒤에 선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재영이 저 남자와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호정의 오해를 풀어줄 수 있었다. 바드는 평소와 달리 생기 없어진 호정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늘 반짝거리던 눈이 이렇게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마저 빛을 잃은 게 속상했다.
“저기, 재영 말인데.”
바드는 호정에게 재영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면 호정의 눈이 금세 평소처럼 돌아올 것만 같았다. 언제든 네가 부르기만 하면 재영이 네 옆에 올 거야. 그 정도로 너한테 미친놈이야.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바드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호정의 눈이 더욱 탁해진 상태였다. 멍하니 풀린 눈을 깜박이던 호정이 바드를 지나쳐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호정!”
바드는 호정이 나간 문을 따라 나가려다 재영 쪽을 쳐다보았다. 한 손에 밤갈색 머리통을 움켜쥔 재영이 보였다.
“어디 가게?”
재영의 입 모양이 선명했다. 바드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재영은 자신의 입술을 핥는 남자의 뒤통수를 더욱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떨릴 정도의 거센 움직임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웃는 재영의 얼굴에 바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잡고 있던 문고리를 힘없이 놓았다.
재영의 손에서 남자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남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재영을 불렀다. 재영의 팔을 긁는 손에 힘이 들어있지 않았다. 재영은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남자의 입에 쑤시듯 밀어 넣고 잡은 머리카락을 더욱 바짝 쥐었다. 재영이 바드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가까이 오라는 것인지, 물러서라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바드는 재영의 손에 붙들린 남자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몸을 떨었다. 동시에 바드의 몸을 지탱하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드는 쓰러지듯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 지금부터 한 마디도 하지 마.”
호정이 나가며 열린 문으로 윤 비서가 들어왔다. 윤 비서는 느린 하품과 함께 주머니에서 꺼낸 박하사탕을 입에 넣었다. 팔을 들어 기지개까지 켜는 동작이 여유로웠다. 윤 비서는 사탕 비닐을 바닥에 던졌다. 주변을 살피며 누군가를 찾던 윤 비서의 눈에 뒷걸음질 치는 바드가 들어왔다. 윤 비서는 눈썹을 까닥 올렸다. 왜 저러고 있지, 그런 생각을 하는 눈빛이었다. 다행히 윤 비서가 찾는 건 바드가 아니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을 쥐고 질질 끌며 오는 재영을 보자 윤 비서가 걸음을 재촉해 그 옆에 섰다.
“도련님. 이호정 씨가 나가기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재영은 어느새 바드의 앞까지 다가왔다. 덩달아 입에 거품을 문 남자도 바닥에 무릎을 긁으며 재영의 손에 의해 바드의 앞까지 끌려왔다. 저 정도면 치사량에 가까운 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드의 호흡이 가팔라졌다. 약에 취해 바닥을 기는 사람들의 몸을 재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밟았다. 시끄럽게 귀를 울리던 노래도 이제 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누군가가 음악을 꺼버린 탓이었다. 파티 장은 단번에 적요해졌다.
앓는 소리를 내다가 바닥에 쓰러져 낄낄대며 웃는 사람들과 재영의 눈치를 보며 조용해진 사람들의 모습 따위는 바드에게 보이지도 않았다. 꼿꼿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재영의 눈에서 이전에 느꼈던 공포감을 느꼈다. 바드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등 뒤로 뻗어 바닥을 짚었다. 그날 밤 보았던 핏물에 덮인 멧돼지가 자신으로 치환된 기분이었다.
“저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쪽이 이 남자랑 있어서 호정이가 간 건데… 내가 잘못한 게 아니…….”
재영이 픽 웃더니 손에 쥐고 있던 남자의 머리를 바닥에 짓이겼다. 밤갈색의 머리가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남자는 입 가득 거품을 물며 온몸을 들썩거렸다. 재영이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윤 비서가 다가와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세웠다. 바드는 윤 비서부터 그 품에 안긴 남자, 재영까지 바쁘게 훑었다.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감이 서질 않았다. 재영은 눈을 꾹 감고 이마를 지그시 누르더니 이내 바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 개새끼야. 내 앞에서 호정이 가리지 말랬지.”
바드의 멱살을 끌어다 자신의 얼굴 가까이 당겼다. 바드는 떨리는 눈을 바닥으로 옮기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재영을 말려줄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전부 괜한 일에 연루되어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은 자들뿐이었다. 아웃팅 위험이 있는 건 물론이고 마약까지 곁들인 파티였다. 재영은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을 신고하지 못하리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바드도 마찬가지였다. 바드는 카펫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응? 왜… 왜 말을 이렇게…….”
재영은 몹시 짜증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훑었다.
“좆같이 못 알아들어? 어?”
말을 듣지 않는 개새끼에게 훈육까지 필요할까. 훈육은 키울 가치가 있는 존재들에게나 하는 것이다. 재영이 한 손을 올려 윤 비서에게 내밀었다. 윤 비서는 잡은 남자를 한쪽 팔로 옮기고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어 투명한 비닐을 꺼냈다. 두툼한 봉투 안에는 각양각색의 알약과 사탕이 뒤섞여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양이 상당했다.
“차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윤 비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걔, 집에 데려갈 거예요.”
“네. 도련님.”
윤 비서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 숙였다. 바드는 파란 눈의 남자를 끌고 나가는 윤 비서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니었다. 이 중 자신을 도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입 벌려.”
“…네?”
재영의 손이 바드의 뺨으로 내리꽂혔다. 퍽 소리와 함께 눈치를 보던 남자들 몇이 조용히 현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드는 눈앞에 번뜩이는 빛에 고개를 좌우로 옅게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되묻기도 전에 재영은 바드의 볼을 잡아 입을 벌렸다.
“으윽…. 뭐… 뭐예… 으웃!”
재영은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대는 바드의 머리를 바닥에 거칠게 박았다. 윤 비서가 준 비닐을 털어 바닥에 뿌리고 손 가득 한 움큼을 쥐었다. 손에 다 담기지 못한 알약과 사탕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올 정도였다.
“약을 계속 처먹어야 한 번 말해도 안 잊을 거 아니야.”
“윽! 싫… 죄송… 해요! 다음에는… 윽, 으읏!”
재영은 고개를 살짝 꺾어 바드의 얼굴을 관찰했다. 벌어진 입 가득 사탕과 알약을 밀어 넣는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재영은 바드의 입에 넘칠 정도의 약과 사탕을 넣고 손바닥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입안에서 거품이 되어 부푸는 알약과 사탕에 바드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바닥에 등과 뒤통수가 붙었다. 자신의 몸을 발로 디디고 선 재영을 뿌리칠 힘조차 없었다. 재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드의 입을 틀어막고 뺨을 내리쳤다.
“삼켜.”
입안에 들어찬 사탕과 알약이 잇몸과 치아 사이를 긁으며 숱한 상처를 만들어냈다. 재영의 손바닥은 다시 묵직한 힘으로 바드의 뺨을 빠르게 내리쳤다.
“다시.”
입안 가득 시큼한 피가 고였다. 재영의 손바닥이 다시 바드의 뺨으로 박혔다. 웅성임도 없었다. 남은 사람들은 입술을 적시며 둘을 바라보기만 했다. 바드의 뺨에 실처럼 기다랗고 가는 상처들이 촘촘하게 생겨났다. 상처의 틈마다 붉은 피가 빠르게 차올랐다.
“다시 물어.”
재영의 손이 바드의 뺨으로 재차 내리꽂혔다. 고개가 맥없이 돌아갈 때마다 목구멍엔 삼켜지지 못한 알약과 사탕이 걸렸다. 재영이 입을 틀어막은 탓에 가벼운 기침조차 힘겨웠다. 알약과 사탕이 엉키고 섞이며 잇몸과 점막이 망신창이로 찢겼다.
“우욱… 윽……!”
바드는 두 손을 들어 재영의 손목을 쥐었다. 살려만 달라는 의미였다. 사람도 죽인다던 윤 비서의 농담이 어쩌면 농담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드는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재영의 손목을 힘겹게 움켜쥐었다.
“마지막 일은 잘하자.”
바드가 멍하니 재영을 바라보았다. 재영이 다시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바드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렁그렁 매달렸던 눈물이 볼을 적시며 뚝뚝 쏟아졌다.
차에 탄 윤 비서는 콘솔박스부터 열었다. 안에 있는 해독약을 꺼내며 차 안을 둘러보았다. 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이 남긴 커피가 보였다. 그거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 비서는 남은 커피를 남자의 입에 대충 부어 넣었다. 해독약은 몇 알을 먹여야 하지, 생각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쥐어 입에 넣었다. 쑤셔 넣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거친 동작이었다. 남자가 약을 삼킬 때까지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쿨럭쿨럭 기침을 쏟아내던 남자의 호흡이 잔잔해질 때까지도 재영이 나오지 않았다.
가져야 할 것, 지켜야 할 것, 숨겨야 할 것이 명확했던 도련님이 긴 시간을 약쟁이 하나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었다. 옆에 누운 남자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윤 비서는 남자의 가슴 앞을 툭툭 두드렸다. 아직 죽은 것도 아니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남자는 빨개진 눈을 깜박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정신을 차리자 윤 비서는 차에서 내렸다. 준비해둔 손수건을 빗물에 적시고 재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야 재영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핏물로 젖은 오른손에 윤 비서의 시선이 꽂혔다.
“도련님.”
저런 더러운 것한테 도련님이 직접 손을 대다니. 윤 비서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이런 일은 저한테 시켜도 되는 건데.”
“됐어.”
윤 비서는 젖은 손수건으로 재영의 손을 잡아 닦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질척이며 눌어붙은 살점과 피를 닦았다. 재영은 윤 비서의 손을 뿌리치고 차키를 건네받았다. 윤 비서는 파티가 있던 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절해 쓰러진 바드와 나머지 사람들을 정리해야 했다.
재영은 차에 오르자마자 벌벌 떠는 남자의 목 뒤를 잡아 눈을 응시했다. 풀린 동공과 흐릿한 시야에 박힌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네 역할이 중요해. 알겠니?”
남자는 알아듣지 못할 한국어에도 마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시선에는 무덤덤한 재영의 표정만이 담겼다. 재영은 남자의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오래 응시했다. 자신이 익히 아는 본래의 모습이었다. 낯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입었던 옷을 전부 벗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현관을 들어설 때부터 엉겨 붙으며 입술을 붙이려는 남자의 얼굴을 밀어냈다. 샤워부터 하라는 재영의 말에 남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욕실을 찾는 남자에게 재영은 샤워실을 가리켰다. 같이 씻을 생각은 없었다. 더러운 것들과 같은 공간에서 씻는 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하룻밤을 위해 별채로 불렀던 사람들과도 일절 같은 세면대나 샤워부스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몸을 담가야 하는 욕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피와 빗물로 더러워진 옷을 버렸는데도 성에 차지 않았다.
씻고 나온 남자가 재영을 불렀다. 씻은 덕분인지 남자의 파란색 눈이 더욱 도드라졌다. 해독이 효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제법 제정신으로 돌아와 있었다.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들어가며 남자의 앞에 지폐로 가득 찬 검은 가방을 던져주었다. 자신이 씻고 나올 때까지 그 안에 들어있는 돈을 세면 전부 주겠다는 말에 남자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안간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아직도 재영에게 잡혔던 두피가 따가운 것 같았다. 남자는 연신 뒤통수를 긁어대면서 가방 안으로 빠르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물줄기 아래 서서 파티 장에서의 자신을 곱씹었다. 제어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인데도 제어하지 못한 건 이번만큼은 자신을 통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정을 가리고 있는 바드를 보는 순간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을 분출해야만 했다. 그 분출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눈동자를 떨며 파티 장을 빠져나가던 호정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 씨발…….”
진짜 호정이 여기에 올까. 제 스스로 자신을 안아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영은 난생처음 자신의 계획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자꾸만 호정이 튀어나와 자신을 책망하듯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이 바라던 호정의 모습인데도 불편했다. 생각해 보니 호정은 늘 자신을 불편하게 했다.
샤워가운을 두르고 나와 젖은 머리를 털어냈다. 휴대폰을 들었다. 아직 호정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부디 이 기대감이 실망으로 변화하지 않기를 바랐다.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맛있게 먹을 정도도 아닌 밤갈색 머리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소파에 앉아 돈을 세던 남자가 흠칫 놀라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어색하게 감추는 손으로 시선이 갔다. 남자는 벗어두었던 자신의 겉옷으로 가방 속 돈을 옮기던 중이었다.
“세면 그냥 주겠다는데도, 너 같은 것들은 늘 훔칠 생각만 해.”
때맞춰 호정이 벨을 눌렀다. 재영은 그제야 심연에서 들끓던 분노가 차분해짐을 느꼈다. 파티 장에서부터 시작되어 좀체 진정되지 않던 소용돌이가 소강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이 밤갈색의 남자에게 생명의 은인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마땅히 호정이어야 했다.
계획은 계획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고, 기대는 실망이 되지 않고 그대로의 기대감으로 발현되었다. 재영은 이 모든 게 매우 흡족했다. 제 발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눈앞의 남자를 내보낼까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호정의 꼴은 비참하고 아련하게 느껴져서 몇 번이나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남자의 목을 잡아 현관까지 끌고 나갔다. 재영은 문득 호정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처음이던가 생각했다. 호정이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나서야 재영은 호정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걸 깨달았다. 호정의 앞에서 잠시만 이렇게 본성을 꺼내도 속이 후련할 정도로 상쾌했다. 그러니 자꾸만 앞으로도 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살고 싶다는 열망이 거세지는 것이었다.
남자를 보내고 호정의 손목부터 꼼꼼하게 핥기 시작했다. 호정의 손목에서 자신의 향이 났다. 호정의 몸과 붙으면서 호정만의 향이 된 냄새이지만, 깊게 음미하면 그 안에는 명백한 재영의 향이 있었다. 이 향을 맡으면 호정이 정말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영은 혀로 손목을 핥고 호정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들어 입을 맞췄다.
“우리 애기, 우리 호정이. 아까, 놀랐지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어…….”
재영은 호정의 목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얼마나 놀랐을까. 내가 자신을 떠날까 봐. 저런 허접한 쓰레기와 몸이라도 섞을까 놀라서 달려온 호정의 꼴에 재영은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의 계획이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안도감. 자신의 예상이 틀릴 리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안정감. 재영은 참고 있던 숨을 터뜨리듯 깊게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결에 놀란 호정이 자신의 목을 손으로 감싸며 벽에 등을 붙였다.
“물러나지 마.”
“…응.”
호정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그런 호정의 볼에 입술을 붙이고 이마부터 턱 끝까지 빈틈없이 입을 맞췄다. 전부 내 거니까,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노력해서 얻은 내 것이니까. 응당 내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게 맞는 거다.
재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정을 들어 안았다. 호정에게는 이 모든 게 첫 경험이었다. 아이의 첫 경험을 이런 마룻바닥에서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국에 호정을 데려오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침실은 애초에 호정과의 섹스만 생각하며 만든 곳이기도 했다.
사방을 감싼 창호 뒤의 빛은 너의 눈 아래와 가장 흡사한 색을 골랐어. 그렇게 말하면 호정이 얼마나 자신을 징그럽게 볼까. 생각만으로 웃음이 났다.
첫 섹스라고 해도 큰 배려는 필요 없을 거다. 사실 배려라는 건 어디까지나 호의일 뿐 의무적일 이유는 없었다. 호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재영은 호정을 번잡했던 하루를 견딘 자신에게 주어진 상이라고 생각했다. 상이니 마땅히 기쁜 마음으로 받으면 그만이었다. 배려는 불필요했다.
몸을 섞는 내내 호정은 엉덩이를 붙이고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자신의 팔을 붙드는 호정을 내려 보았다. 재영은 고개를 숙여 호정의 아랫입술과 그 위의 입술을 빨아올렸다. 눅진하게 엉기는 두 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다 넣지도 않았는데 안이 너무 좁아 음경이 부풀수록 성기의 몸통도 뻐근해졌다.
“흐응, 응, 으읏… 응. 윽.”
눈을 감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목과 팔을 붙드는 호정의 모습을 재영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정의 얼굴 옆에 팔을 세우고, 온전히 자신만이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에 갇힌 호정의 모습을. 골목길에서 우연히 주웠을 때부터 얼마나 이 모습을 간절히 보고 싶었던가를 곱씹었다.
꺼지라고 욕하던 그 날의 피투성이 호정과 자신의 아래에서 엉덩이를 드러내놓고 울먹이는 호정의 격차가 생각보다 더 컸다. 두 모습이 어지럽게 갈마들어 눈앞이 혼미했다. 재영의 그림자가 호정의 몸을 어둡게 덮었다. 눈 아래의 색도 자신의 그림자에 잠식되었다.
첫 섹스가 끝났을 때 재영은 고개를 반쯤 숙이고 미소 지었다. 절반의 허탈함과 절반의 개운함이 몸을 감쌌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역시나 이럴 줄 알았다. 지금처럼 이렇게 온전히 자신의 품에 들어오게 되면 질리게 될 줄 알았다. 가지게 되기까지 다른 것들보다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뿐, 이호정이라고 해서 별다를 건 없는 게 맞는 거였다. 애초에 자신에게 다른 사람이라는 건, 특별한 사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카테고리일 뿐 그 안에서 세세하게 다름을 나타내며 구별될 리 없었다. 그럴 순 없는 거였다. 섹스를 하고 나면 금세 시들 감정이리라 상상했던 대로 호정도 별것 아니었다.
재영은 차분해진 마음으로 슬며시 피어나는 웃음을 거두었다. 멍하니 자신의 아래에 누운 호정을 바라보았다. 호정이 젖은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이호정도 별 볼 일 없는 다른 인간과 같…….
“재영아.”
호정이 손을 뻗어 재영의 볼을 어루만졌다. 아주 고요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재영은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어 아래에 누운 호정을 다시 빤히 쳐다보았다.
“재영아……. 이거 별거 아니다. 그치? 나 생각보다 잘 견뎠지?”
호정은 여전히 재영의 볼을 감싸며 웃어댔다. 말은 호기롭게 하지만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스스로는 잘 견뎠다고 생각한 것인지 칭찬을 바라는 당돌한 눈빛까지 곁들어져 있었다. 그에 대조되는 서툰 움직임을 느꼈다. 볼을 감싸고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이 온화하고 따스했다. 재영은 자신의 볼을 감싼 호정의 손 위에 제 손을 감싸듯 얹었다. 호정이 손을 내릴까 겁이 났다.
“재영아. 왜?”
불안한 눈동자. 반쯤 벌어진 입술. 갸우뚱하게 기울어진 고개. 발개진 볼.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눈 밑과 충혈 된 채 젖은 눈동자. 재영은 자신의 볼을 감싼 호정의 손을 힘줘 꽉 잡았다.
“…한재영?”
내면에 존재하는 세 가지의 자아 중 자신에게 있는 건 단 하나의 자아였다. 분열되지 않고 하나로 한 가지의 목소리를 내던 자아가 쪼개지고 갈라져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재영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호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의아하게 자신을 보는 호정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네가 부른 한재영은 누구일까. 누구길래 이렇게 속이 시끄러워지는 걸까. 재영은 호정의 눈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다르다는 직감이 들었다. 같은 카테고리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인간의 카테고리에 호정을 넣을 수 없었다. 호정과 비슷한 카테고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재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 내가, 씨발…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억센 힘으로 호정의 무릎을 벌렸다. 잠시 떨어졌던 호정의 손을 끌어다 다시 자신의 볼에 붙였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떨어지는 호정을 용납할 수 없었다.
기회를 줄 때 금방 지겨워져서 버려졌다면 좋았을 텐데. 호정은 이전처럼 또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게 다 호정의 탓이었다. 첫 섹스가 끝난 좀 전도, 자신을 두고 간 파티에서도, 제발 주워가달라며 골골대던 그 골목길에서도 자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건 언제나 호정이었다. 충분히 감추고 숨길 수 있는 본성을 자꾸만 깨우치게 하는 게 호정이니 모두 호정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었다.
“읏… 아파.”
호정이 아양을 떨며 무릎을 오므리려고 했다. 재영은 무릎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고 오므라들려는 호정의 허벅지를 억눌렀다. 버둥대는 호정의 다리를 아프게 누르자 호정이 표정을 찡그렸다.
“야. 나 아프다니까.”
호정이 볼을 실룩거렸다. 재영의 눈엔 오직 빨갛게 익은 호정의 볼만 들어왔다. 다리로 호정의 무릎 사이를 벌리고 손을 뻗었다. 이성적인 판단의 고리가 느슨해짐을 느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재영은 손가락을 펼쳐 호정의 목을 감쌌다. 그날 그 골목에서 피투성이로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존재였는데. 호정은 자신의 목을 잡은 재영의 손에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깜박거렸다.
“이거 뭔데?”
호정이 자신의 목을 감싸 쥔 재영의 손을 가리켰다. 재영은 차분한 눈길로 호정을 응시했다. 목을 졸라 죽인다면 영원히 내 비밀은 지켜질 수도… 앞으로는 평생 누군가에게 본성과 본능을 전부 보이고 싶단 욕망도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질 거다. 이전의 차분하고 고요했던 내 삶으로 돌아가게 될 수 있단 생각이 스쳤다.
덤덤한 눈길과 달리 재영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할 때였다.
“아, 나 이거 알아.”
별안간 호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으로 달싹거리는 볼에 재영은 호정의 목을 억누르던 손을 떼어냈다. 손가락 사이에 들었던 힘이 풀렸다.
“그래. 네가 너무 완벽해서 늘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거든?”
“무슨.”
“이거 그거잖아.”
호정은 멀어지는 재영의 손을 끌어 다시 자신의 목을 감싸게 했다. 호정의 입가에 스민 웃음이 의아했다. 이유 없이 제 목을 조르려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호정은 여전히 해맑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거짓으로 지어낸 표정 같지는 않았다.
“재영이 너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맞지?”
재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한 번 표정을 살폈으나 지어낸 표정은 아니었다. 일부러 덤덤해하거나 기뻐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호정은 진심으로 이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도 알아. 이런 거 본 적 있어. 겉으로 완벽한 사람일수록 이런 성… 성벽? 그런 게 있댔어.”
제법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재영에게 “내 목 졸라 봐도 돼.”라고 속닥였다.
“그러다 내가 널 죽이면?”
재영이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 진지한 물음이었다. 난 널 진짜 죽일 수도 있는 놈인데. 재영은 찬찬히 호정의 웃는 얼굴을 살폈다. 난 널 죽여도 며칠 아쉬워하고 끝일 사람이다. 꽤 오랜 시간 흥미를 끌어준 네가 죽는다면 분명 잠시 아쉬워는 하겠지만, 그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돌아올 테고 내 원래의 삶을 잔잔히 살아갈 거다.
“너 나 못 죽이잖아.”
호정이 웃었다. 확신에 찬 웃음이었다. 내가 너를 못 죽인다는 것에 대한 확신. 재영은 이 어린아이가 어디에서부터 그런 확신이 들었을까 생각했다. 누구에게 이렇게 앙큼하고 못된 웃음을 배운 거지.
“내가 너를 못 죽여?”
“어. 넌 나 못 죽여.”
호정은 우스운 농담이라도 한 사람처럼 재영의 목을 끌어다 입을 맞추며 웃었다. 웃음 덕에 입술이 벌어졌다. 재영은 그 틈으로 뜨거운 혀를 밀어 넣으며 몸을 붙였다. 호정의 발목을 잡아 아래로 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해야 했다. 이 짓이 질릴 때까지. 이호정이 지루해지고 무료해질 때까지. 내가 너를 죽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네가 깨달을 때까지. 네가 나를 두려워하게 될 때까지.
“너 표정이 무서워.”
호정이 웃음을 거두고 물었다. 무섭다는 말에 재영의 어깨에 바짝 날이 섰다. 재영은 호정이 자신이 이름을 부르던 방금 전을 떠올렸다. 내면에서 깨어난 존재를 상기했다.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가 단번에 의심스러워졌다. 여태 본인을 잠식하고 있던 자아가 진짜 자신인지 호정이 보는 자신이 진짜인지, 의사가 말한 자신의 뇌가 본래의 자신인지 헷갈렸다. 살면서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이었다. 재영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급하게 호정의 안에 성기를 깊숙이 욱여넣었다.
“윽, 으응.”
가뜩이나 비좁은 내벽과 음부의 피부가 쓸리며 입구가 다시금 찢어졌다. 재영은 자신의 성기를 뜨겁고 축축하게 적시는 피를 느꼈다. 두 번째 섹스가 되어서야 호정의 내벽 굴곡과 향과 감촉, 호흡, 신음이 어떠한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재영아. 아파… 원래 아픈 거지… 응? 이거… 흐응… 원래…….”
“쉬이…….”
아프다는 말과 달리 호정의 내벽에 촘촘하게 차오른 습기는 안간힘을 써 재영의 음경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스펀지에 굵직한 물이 스미듯, 호정의 안은 재영을 모조리 흡수하려는 듯 성기를 물었다. 물기로 가득한 쫄깃한 내벽이 치받을 때마다 척척대는 진득한 물소리를 냈다.
차진 내벽의 근육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재영은 자신의 성기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 호정을 바라보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호정의 모든 부위마다 무턱대고 입을 맞추었다.
“봐. 네가 날 자꾸 놓아주지 않잖아.”
성기를 빠듯하게 조이는 호정의 엉덩이를 달랬다. 힘을 푼다고 풀어도 재영의 음경을 모두 넣기엔 안이 너무 좁았다. 재영은 성마르게 음경을 쑤셔 넣고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끝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호정이 조급하게 엉덩이를 조이기 시작했다.
“쓰읍. 힘 풀어야지.”
“나… 풀었는데…….”
호정이 두 눈을 비비며 대꾸했다. 반까지 밀어 넣을 때만 해도 분명 재영의 의지였다. 그러나 막상 음경의 거의 끝 부분까지 밀어 넣고 나니 호정이 자신의 성기를 빨아 당기는 꼴이었다. 촉촉한 내벽의 끈적지근함이 재영의 음경에 질척대며 붙었다. 움직임을 위해 성기를 잠시 빼낼 때조차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으으, 흐응.”
미끈미끈한 입구까지 단번에 들이박으면 호정은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삼켰다. 오히려 빼낼 때 안도하듯 숨을 내뱉는 식이었다. 재영은 호정이 깨문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벌렸다. 그제야 호정의 숨이 들이박는 박자에 맞춰 뱉어졌다.
둔부에 힘을 주고 밀어 넣었다. 힘을 빼고 나가면 호정의 내벽은 언제 벌어졌냐는 듯 금세 좁아졌다. 다시 넣을 땐 처음처럼 좁아진 내벽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읏으… 흐으…….”
출렁대던 호정의 성기가 바짝 얼더니 이내 정액을 뿜으며 수그러졌다. 호정은 사정 후에 더욱 눈 밑 색을 밝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재영은 호정의 눈 아래를 검지로 비볐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색이었다. 이러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어이없는 존재를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봐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사정한 것도 모자라 호정의 내부 근육은 경련하듯 떨며 재영의 성기를 조였다. 재영은 이조차 매우 생경한 감촉이라고 느꼈다.
“아직이야.”
“그냥 하면 안 돼?”
호정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때에 맞춰 아양을 부릴 줄도 알았다. 자신이 사정했으니 너도 사정하라는 건방진 말을 뱉고도 호정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왜 넌 아직도 사정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듯 눈빛은 건방을 떨어댔다.
“애기야. 그런 말을 할 때는 공손하게 부탁해야지.”
호정의 엉덩이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크기로 벌어졌다. 재영은 한 손으로 엉덩이를 벌리고 그 틈으로 다시 성기를 끝까지 들쑤셨다. 귀두부터 음경의 끝까지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호정이 놀라며 몸을 떨어댄 탓이었다. 다시 찐득한 체액과 핏물이 음경에 묻어났다.
손가락으로 어깨를 붙들고 두 다리가 벌어진 채 헐떡이는 호정을 내려 보았다. 무릎이 탁, 탁 소리를 내며 침대로 떨어질 때마다 호정의 고개도 뒤로 까무룩 넘어갔다. 재영은 호정의 무릎을 잡았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정의 무릎을 혀로 핥고 음경을 귀두까지 빼냈다.
“흐으… 아파, 아프… 아프다고. 미친…….”
재영은 호정의 머리 위를 막아 밀리지 않게 했다. 호정은 여전히 버릇이 없었다. 끝까지 공손해질 마음은 없는 듯했다. 재영은 호정의 뒤 살이 눌릴 정도로 깊숙이 성기를 짓눌러 넣었다. 느리게 들어가는 성기에 호정의 내벽의 굴곡과 모양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재영은 멈추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호정이 조금도 밀리지 않게 한 손으로는 골반을, 나머지 손으로는 머리 위를 막았다. 위로도 아래로도 움직일 수 없이 결박된 호정이 고개를 저으며 재영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삽입의 순간마다 호정의 음낭과 성기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젖은 살 소리가 적나라했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아프다가 아니라 좋다고 해야 끝이 나. 원래.”
호정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손을 뻗었다.
“이런 것까지 아빠가 하나하나 다 가르쳐줘야 해?”
벌어진 입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알량한 자존심에 고개는 아니라고 저어대면서도 아랫구멍과 윗구멍은 연신 재영이 박아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재영은 호정의 목을 잡아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호정의 혀와 자신의 혀가 얽혔다. 부드러운 감촉에 눈이 감겼다.
혀가 얽히는 속도보다 빠르게 아래도 박혀 들었다. 호정이 허리를 비틀면 안이 더욱 좁혀졌다. 곧 눅진한 정액이 호정의 안에 잔뜩 쏟아졌다. 호정이 배를 꾹 누르고 표정을 찌푸렸다. 아프다는 뜻 같았다. 근육이 날을 세우던 호정의 허벅지가 푹 시트 위로 쓰러졌다.
“미안…….”
재영은 손을 뻗어 호정의 배를 어루만졌다. 살살 호선을 그리며 돌려주었는데도 호정이 표정을 풀지 않았다.
“…호정아.”
상기된 양 뺨이 재영의 손에 엉겼다. 재영은 안도하며 호정의 뺨을 엄지로 더듬었다. 촉촉한 볼이 느껴졌다. 문득 죽은 호정을 상상하는 것보다 죽지 않은 호정을 만지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 졸랐어도 됐는데… 그 정도는 나도 맞춰줄 수 있어.”
호정이 굳은 표정을 풀더니 이내 눈을 꼭 감고 웃기 시작했다. 마음이 놓였다. 깔끔한 웃음 사이사이 아픔으로 구겨지는 눈썹과 떨리는 속눈썹이 도드라졌다. 재영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걸까. 호정은 잠이 쏟아지는지 몽롱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았다. 좀 전에 흘리듯 마신 와인 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정말 다 맞춰주려고?”
호정이 푸스스 무너지는 웃음을 지었다. 비딱하게 올라간 턱과 살짝 벌어진 입술이 이미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임을 보여주었다.
재영은 호정의 다리 사이로 진득하게 흐르는 정액과 핏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부어오른 살점으로 자신도 모르게 손이 향했다. 오돌토돌하게 찢어진 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오늘은 더 안 되겠는데.”
난감한 얼굴로 찢어진 주름을 어르는 재영의 손을 호정이 잡아 눌렀다.
“해도 돼.”
재영은 입안에서 혀를 굴려 안쪽 볼을 쓸었다. 불컥거리며 솟은 볼을 따라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 데서도 어쭙잖게 남자인 티를 냈다. 이미 밑은 너덜댈 정도로 뚫린 뒤인 데도 더 할 수 있다고 보채는 멍청함이 있었다.
“다르게 하자, 그럼. 너 안 아프게. 응?”
재영은 호정의 두 발목을 한 손에 휘감아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잡힌 발목 덕에 호정의 두 다리가 바짝 붙으며 허벅지 사이가 틈 없이 밀착되었다. 호정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푸스스 풀어지는 웃음을 지었다.
“졸려…….”
“이러고 있는데 졸려?”
“응. 졸리는데…….”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호정의 눈이 끔벅끔벅 느리게 움직였다. 재영은 호정이 잠들지 않게 호정의 둔부를 한손에 움켜쥐었다. 한손 가득 꽉 잡힌 둔부가 탄실하게 차올랐다. 땀과 물기로 젖은 덕에 손으로 움켜쥐기만 했는데도 이미 심지 굳게 서 있던 중심부가 바짝 열을 내 솟았다.
호정은 자신의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재영은 그 손을 끌어내려 자신의 손에 맞추었다. 호정의 반쯤 풀린 눈에 의아한 기색이 띠었다.
“또 해?”
“해도 된다며.”
멀뚱한 얼굴로 답한 재영이 자세를 잡기 위해 몸을 곧추 세웠다.
“나 여기 아파…….”
호정은 재영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 더듬대며 자신의 둔부 사이를 가렸다. 오목하게 파인 굴곡을 따라 이어지는 손을 보던 재영이 손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젤을 부었다. 몇 번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니 손 사이로 찐득한 액이 거미줄처럼 늘어났다.
재영은 직선으로 솟은 자신의 성기를 들어 손에 엉킨 젤을 치덕하게 발랐다. 미끄덩하게 발린 살덩이를 그대로 호정의 허벅지 사이로 밀었다.
“하윽, 읏…….”
여전히 한 손은 호정의 두 발목을 세게 움켜쥔 채였다. 사정 후 기운 없이 늘어져있던 호정의 성기와 뜨겁게 열이 오른 재영의 성기가 뿌리부터 그 굴곡을 따라 맞닿았다. 생경한 감각에 호정이 무릎을 비비며 허벅지를 벌리려 했다.
“아프, 여기도 아픈데… 아파.”
“쓰읍. 호정아. 다리.”
호정의 허리가 뒤틀리며 척추의 홈이 침대 시트와 벌어졌다. 틈이라기엔 넓은 공간이 생겼다. 재영은 호정의 두 다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올리고 그 허리를 받쳐 위에서 몸을 덧대듯 붙였다. 호정이 보채기 시작했다. 이미 세 차례의 사정이 끝난 후였다. 술기운도 도는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뜨거운 재영의 성기가 제 성기와 음낭에 비벼지며 다시 귀두의 갈라진 틈으로 쿠퍼 액이 미지근하게 찼다. 기진맥진해 더 이상의 사정은 무리였다. 호정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재영의 팔과 손목 어깨를 두서없이 움켜쥐었다 풀었다.
“아파… 응? 아파, 재영아. 나.”
재영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호정을 보았다. 곧 재영의 입매가 한쪽으로 비틀리며 웃음이 고였다.
“그래, 아빠 여기 있잖아.”
재영은 호정의 허벅지를 잡아 다시 틈 없이 붙였다. 밀착된 허벅지 사이에 끼운 성기를 반쯤 빼내 다시 몰아붙이자 호정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좌우로 뒤챘다.
“아니, 아프, 아파…….”
“응. 알았어. 그래도 우리 애기, 잘 참네.”
재영은 다독이듯 호정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렸다. 혀처럼 말캉한 엉덩이가 손에서 미끄러질 듯 탄실하게 들어찼다. 바짝 힘을 줘 제 성기를 문 허벅지 사이로 열감으로 단단해진 성기를 다시 힘껏 밀어 넣었다.
허벅지 사이로 미끈한 젤을 훑으며 성기가 빨려 들어갈 때마다 재영의 성기가 아래에 붙은 호정의 성기를 훌쳤다. 파도에 휩쓸리듯 바짝 선 성기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누구와 섹스를 할 때도 이처럼 얕은 배려를 보인 적이 없는 재영이었다. 상대의 것이 찢어지든 벌어져 아물지 않든 배가 아파 바닥을 기어대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상대방이 죽는다 하더라도 재영은 신경 쓰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흐응, 응, 읏, 으응… 으읏. 아쁘, 아파.”
뭉개진 채 뱉어진 아프다는 말은 다시 들어도 아빠를 찾는 것처럼 들렸다. 무두질 같은 긴 추삽질이 이어졌다. 호정의 허벅지 내벽을 따라 기다란 생채기가 죽죽 그어졌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던 곳에 처음으로 새겨진 상처였다. 차갑게 엉기던 젤이 눅눅하게 뜨거운 점액질로 변하며 진입하는 재영의 성기와 밀려나는 호정의 성기를 더욱 엉겨 붙게 만들었다.
“호정아. 아빠 보고 싶어?”
지금 호정에게 진심을 표하고 있는 건 병실에 누운 호정의 아빠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호정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도 자신뿐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아빠라는 존재가 더 필요할 이유가 있을까. 재영은 자신의 아래에 놓인 호정을 빤히 쳐다보다 눈을 깜박였다.
“…흐응, 우리… 아빠?”
“응. 병원에 누운 네 아빠.”
호정이 다 풀어진 눈동자로 재영을 보다 이내 눈동자를 떨구었다. 허벅지에 팽팽하게 들었던 긴장감이 풀려남에 재영의 심기도 비틀렸다. 호정은 생각하는 듯 고개를 떨궜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재영은 입술을 모아 바람을 세게 밀어냈다. 거센 바람이 입술사이로 불어나가며 연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아빠, 우리 아빠… 흐응, 으… 보고 싶지.”
호정의 몸이 시트 위로 축 늘어졌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아빠를 떠올리니 감정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재영은 주먹 쥔 오른손을 호정의 머리 옆에 놓았다. 왼손으로 호정의 허벅지를 밀착해 잡아 제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시트가 밀려날 정도로 거칠게 아래로 당겨온 호정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그래, 우리 호정이, 아빠 보고 싶지?”
“으응…….”
호정이 자꾸만 아래로 감겨드는 눈을 비비며 답했다.
“사고치고 우리 호정이 힘들게 하는데도 아빠니까 보고 싶어, 그렇지이?”
재영의 성기가 다시 끝까지 밀고 들어가 아래에 놓인 호정의 성기를 꾹, 으깨듯 눌렀다. 하등 도움 되지 못하는 존재인데도 아빠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호정의 애정을 받는다는 사실이 여전히 꼴사나웠다. 재영은 자격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자신 쪽이 더 호정의 부모 요건에 적합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주먹 쥐고 있던 손을 펼쳐 시트를 잡았다. 호정은 의식 없는 눈을 굴려 재영을 보다가 이내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재영은 호정과 자신의 성기를 한 손에 잡았다.
“아파?”
열감에 녹은 젤은 이제 물처럼 늘어져 호정의 허벅지와 배꼽, 명치 위로 빗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호정이 아무렇게나 고개를 흔들었다. 재영의 물음에 대한 답인 듯했다. 재영은 호정의 볼을 움켜쥐고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동공이 다 풀린 채 맥없이 늘어진 눈이었다. 내일이면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눈이었다.
그런 호정을 보는 재영의 눈에 생동감이 들었다. 재영은 상기된 얼굴로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고 호정의 성기와 자신의 성기를 잡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아흐, 아파… 아프… 이제 더는, 못, 아파…….”
재영이 상체를 완전히 숙여 뻐끔대는 호정의 입술을 자신의 젖은 입술로 삼키듯 물었다. 척척 늘어지는 물소리가 아래의 마찰음보다 더 크게 귀를 울렸다.
“어디가 그렇게 아파?”
“아래… 아파.”
재영이 픽 웃으며 다시 호정의 입술을 물고 그 안으로 혀를 쑤셔 넣었다. 미끄럽게 들어가던 혀는 호정의 진득한 입술 내벽을 강하게 훑다 호정의 혀가 붙어오려 하면 틈을 벌이며 멀어졌다. 호정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벌렸다. 오므려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아프다는 말만 연신 쏟아지고 머리는 암전이 되어 그저 어두웠다.
호정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다급히 손을 뻗어 재영의 목을 감싸 입술을 붙였다. 재영은 균열이 난 호정의 귀두 끝을 엄지로 지그시 눌러 막았다. 아래의 맞닿은 성기를 비비는 손길이 더욱 속도를 올려 눈에 띄게 빨라져 가는데도 재영은 쉽게 입술을 벌리지 않았다.
“재, 재영아, 으응.”
재영은 호정의 볼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손은 위로 올라가 호정의 목과 유두 근처에서 호선을 그렸고 다시 옅은 붉은 색을 내는 무릎으로 이어졌다.
“키스하고 싶어?”
호정은 재영의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손을 뻗어 재영의 목 뒤를 감으려 했다. 재영은 호정의 건방진 손길을 순순히 따랐다. 다시 입술이 붙었지만, 이번에는 입술을 벌려주지 않았다. 호정이 미간에 삐죽한 선을 그리며 재영의 어깨를 손톱을 세워 쥐었다.
“호정이 이러니까 아빠도 아프네. 아빠 어깨 봐.”
재영의 풀죽은 목소리에 호정이 눈을 감고 웃었다. 맥이 빠진 웃음이었다. 풀려있던 눈을 뜬 호정이 재영의 입술을 살포시 깨물어 틈을 벌렸다.
“아빠, 아빠……. 으응. 응.”
재영은 그제야 액이 고인 호정의 귀두 끝을 놓아주었다. 동시에 호정의 어깨가 푸르르 떨리더니 재영의 손과 자신의 배 위로 사정 액이 잔뜩 쏟아졌다. 재영은 호정의 성기를 놓고 자신의 성기를 허벅지 사이에서 빼내 다시 강하게 내처 들어갔다.
“하응, 응. 아파, 으응.”
“아파야, 아빠야. 똑바로 말해줘. 호정아. 아래도 다 흘려놓고 발음도 흘리면 나 마음 상해.”
재영은 짙은 사정감을 참으려 이를 꽉 깨문 채로 말했다. 호정은 아파서 눈을 벌겋게 부풀렸다가도 별안간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젖히며 미소 지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모습이었다. 재영은 시트에 젖은 손을 닦았다. 호정의 볼을 톡톡 건드리자 호정이 젖을 찾는 아기처럼 고개를 젖히고 입을 빠끔거렸다.
“진짜 애기네.”
허벅지 사이로 단단하게 선 성기가 다시 깊숙이 밀려들었다.
“애기들한테 체벌은 나쁜 건데.”
호정이 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젖히자 허벅지 사이도 좀 전보다 세게 밀착됐다. 완전히 맞붙은 사이로 재영의 성기가 몇 번 더 드나들었다. 재영은 앓는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반쯤 젖혔다.
재영은 사정 직전 호정의 다리를 잡아 다시 자신의 왼쪽 어깨에 올렸다. 팔로 다리를 고정하고 허벅지의 근육에 박힌 성기를 끝까지 빼내고 강하게 처넣었다. 체벌은 불필요하지만, 이렇게 아이가 사정하며 매질을 원하니 박아줄 때도 있어야 하는 거다.
“흣…….”
마침내 굵게 뿜어져 나온 진득한 정액이 호정의 목젖과 하얗게 질린 안면까지 튀어났다. 가슴과 배, 얼굴까지 튄 정액에 호정이 눈을 찌푸렸다. 재영은 호정의 다리를 침대로 스르륵 풀어 내려놓았다.
“호정아…….”
재영이 눈을 감고 목을 돌리며 이름을 불렀다. 전신을 감싸던 긴장감이 풀리며 어깨의 통증이 줄었다. 호정은 정신을 놓고 아무런 답이 없었다. 재영은 고개를 들어 호정의 눈을 맞추었다.
“아까 많이 아팠어?”
“으응? 응… 아프긴… 했지.”
호정이 머쓱하게 웃으며 재영의 볼을 어루만졌다. 손끝이 차가웠다. 내일이면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재영은 어린아이처럼 호정의 손에 볼을 붙였다가 손끝을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더 쓰다듬어줘. 더 어루만져줘. 그런 어리광이 들었다.
호정이 완전히 정신을 놓고 까무룩 쓰러진 뒤에도 재영은 연신 호정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고 따뜻하게 적신 수건으로 호정의 몸을 닦았다. 젖은 수건이 지나는 곳마다 맑은 살이 발갛게 익어들었다. 재영은 그 위에 츱,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아프지 않게 입술의 여린 부분을 이용해 붉어진 호정의 살갗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