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행방
인생은 늘 재영이 계획한 대로 흘러왔다. 큰 줄기를 세세히 들여다보면 엇나가는 몇 줄기는 있기 마련이지만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호정이 제멋대로 소파를 움직인 덕분에 호정을 관찰하던 윤 비서가 앞뒤 생각 없이 집을 찾아간 것도 그런 유였다. 계획이 엇나간다고 해서 원했던 걸 얻지 못 하는 경우는 없었다.
작은 줄기는 작은 줄기일 뿐이니까. 나무의 가지 하나가 틀어진다고 해서 뿌리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강의 가지도 마찬가지다. 곡류를 만나 잠시 미적댈 수는 있으나 강은 여전히 강일 뿐 작은 강줄기 한 줄에 휘말려 격류가 되지는 못한다. 작은 줄기에 그 정도의 영향력은 없다. 큰 줄기는 언제나 자신이 그어놓은 선대로 유유히 흐를 거다. 언제나 그랬듯이.
호정은 조금 앓다가 돌아올 거다. 돌아오지 않으면 재영이 찾으면 되는 거였다.
원래라면 그랬을 거였다.
* * *
호정은 공항에 내려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바지에서 비행 모드인 폰을 꺼내 전원부터 껐다. 화장실 휴지통에 폰을 넣고 휴지를 풀어 덮었다. 세면대에 서서 얼굴을 마저 씻어냈다. 부은 얼굴이 볼썽사나웠다.
휴지로 얼굴을 닦다 자신의 목을 더듬거렸다. 목을 더듬는 손이 떨렸다. 목을 잡았던 그날, 재영은 정말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걸까. 정말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자신이 사이코패스라던 재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호정은 거울 속 자신의 눈을 응시했다.
“으욱.”
별안간 속이 뒤집혔다. 가장 가까운 변기에 얼굴을 묻고 속을 게워냈다. 노란 액이 줄줄 새어났다. 속은 여전히 따갑고 더부룩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자주 토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스무 살이 된 후로는 조금만 버거운 일에도 이렇게 구토를 해댔다. 호정은 명치를 주먹으로 꾹 눌러 다잡았다.
원래 난 어땠지. 재영을 만나기 전, 난 어떤 사람이었지. 호정은 화장실 바닥에 작게 몸을 웅크려 누웠다. 달뜬 숨이 뱉어졌다. 눈시울이 뜨겁게 부풀었다.
* * *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내 재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기내 대각선 좌석에 앉은 윤 비서는 재영의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재영은 기내 신문 하단에 실린 기사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두드렸다. 공항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남자의 기사였다. 약물 과다 복용에 의한 심정지. 재영은 그 단어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미소 지었다.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악보가 뭐더라. 바흐랬던가. 음 하나 숨길 수 없이 정확하고 명확하게 두드려야 하는 음악. 피아니스트가 한 음조차 관객을 속일 수 없는 음악. 재영은 느리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귓가에 언젠가 엄마가 쳤던 피아노 선율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한국인이라며?”
음료를 준비하는 승무원이 다른 승무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니에요. 생긴 건 동양인인데 루마니아래요. 교포라던데?”
“하필 죽어도 공항에서. 진짜 찝찝해. 비행기 타기 직전이었다더라. 기내에서 죽었다고 생각해봐. 진짜… 으으…….”
승무원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약쟁이는 원래 생명줄이 짧은 법이니 그보다 더 짧아진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재영은 바드가 호정을 가린 순간부터 바드를 죽여도 되는 정당한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호정의 꺼진 폰을 굳이 켜둔 이유도 그와 비슷했다. 바드가 호정에게 선을 넘는 이야기를 한다면 자신이 바드를 죽여도 그건 정당한 사유에 들 것이라는 게 재영의 판단이었다.
도청 이야기까지는 괜찮았다.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는 정도였다. 호정이 가장 의심하지 않는 자신을 의심하게 하려면 도청까지는 이야기해야 했을 테니까.
‘김민재’라는 이름을 쓴 게 재영 때문이라는 건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김민재는 죽은 덕분에 호정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그런 김민재의 이름을 재영이 이용했다는 걸 들은 호정의 표정까지는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증오에 찬 눈을 마주했을 때 재영은 호정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며. 그런 말이 턱 끝까지 올랐다.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호정이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은 당연히 자신의 부모가 있는 병원일 거다.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을 테니까. 게다가 타인에게 의지하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온 호정이었다. 김민재도 자신도 없어진 이제, 호정은 다시 제 부모의 품을 파고들려고 할 거다. 누구에게라도 의지하고 싶겠지. 동시에 이젠 그마저도 불가능해졌음을 깨달았을 거다. 호정을 보는 순간 그의 엄마는 재영의 안부를 먼저 물을 거니까.
원래의 호정이라면 엄마에게 징징댔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재영의 실체를 알았으니 아무리 호정이라고 해도 무턱대고 사실 전부를 말하진 못 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 그 부모를 찾는 것까진 용인할 수 있었다.
재영은 호정이 떠난 밤, 한국의 직원을 통해 호정이 한 달간 사용할 충분한 현금을 인출했다. 인출한 현금은 전부 호정의 엄마 앞으로 맡겼다. 잘 도망가려면, 악착같이 도망가려면 제일 필요한 게 돈일 터였다. 어린아이일수록 돈이 부족하면 나쁜 길로 빠지는 법이었다. 재영이 직원을 통해 내민 두둑한 가방을 보고도 호정의 엄마는 의심하지 않았다.
“곧 방학이라 두 분 한국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이건 저희 도련님이 바빠서 전달을 못 했다고 부탁하셨습니다. 당장 필요할 거라 가급적 빨리 전달하라고 하셔서… 호정 씨 오시면 이 가방 전달 부탁드립니다.”
어디 하나 나사가 풀린 듯 어색한 말에도 호정의 엄마는 방긋 웃었다. 그저 방학이라 아이가 돌아온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린 듯했다. 호정은 침대 아래 돈은 챙겨가지 않았지만 이 돈은 챙길 거다. 엄마 앞에서 수상하게 행동해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재영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호정의 무릎에 박힌 기기의 착신을 확인했다. 다행히 호정은 아직 서울이었고 기기는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호정이 다른 지역은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용기 내 도망가서도 고작 서울에만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재영은 공항에 도착해 윤 비서에게 짐을 맡겼다. 홀로 병원에 갈 생각이었다. 호정의 엄마는 병실에 들어서는 재영을 보며 눈에 띄게 기쁜 기색을 내보였다. 재영은 인사하며 병실 안을 살폈다. 다행히 자신이 보낸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호정이 이미 이곳에 들렀다 갔다는 게 명증되었으니 자신이 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말도 정해진 셈이었다.
“호정이는 이미 왔다 갔다고 들었어요.”
“응. 어제… 방학이라 왔다면서 뭐가 그렇게 바쁘다는 건지… 엄마랑 좀 있다 가라는데도 말을 안 들어.”
호정의 엄마가 웃었다. 저렇게 해준 것 없는 부모도 부모라는 이유로 호정이 찾는 존재가 된다는 게 우스웠다. 재영은 테이블 위 유리를 손톱으로 긁으며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아버님 상태는 괜찮으시죠?”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는 호정의 아빠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호정과 닮은 구석이 없었다.
“네가 신경 써줘서 괜찮아. 이이는 대체 언제 깨어나려는지…….”
호정의 엄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재영은 침대 위에 맥없이 늘어진 호정의 아빠 손을 끌어 잡았다. 마른 손이었다. 그러게 왜 술을 처먹고 운전을 하셨어요. 왜 우리 애를 힘들게 해요. 왜 호정이가 힘들 때 기댈 수도 없게 변변찮게 살아오셨어요. 재영은 돋아나는 속마음을 감추듯 호정의 아빠 손을 잡았던 제 손도 등 뒤로 감추었다.
“호정이… 제가 준 가방은 챙겨갔죠?”
“응. 꽤 무겁던데. 책이야?”
“…네. 방학이어도 과제는 많은 편이라서요. 혹시나 책은 본가에 두려나 싶어서 따로 보냈어요.”
“으응. 지금은? 너희 집에서 지내는 거니?”
재영은 고개를 들어 호정의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뭐가 더 재미있을까. 우리 집이 아니라고 하면 득달같이 전화해 혼자 있지 말라며 아이를 들들 볶아댈 여자 같았다. 아이 혼자 생각할 시간이라곤 주지도 않고 몰아세울 무식한 여자. 재영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네가 있어서 안심돼.”
“아니에요. 혼자 잘하는 아이니까.”
재영이 어머니를 향해 미소 지었다.
“집에는 자주 가세요?”
“아니. 이 사람 이러고 있으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집에는 전혀 못 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옷 갈아입으러 갈까, 말까. 참. 우리 호정이는 이번에 또 폰을 잃어버렸다면서.”
호정의 엄마가 낮게 “내가 걔 때문에 못 살아.”라고 중얼거렸다.
“폰을 또요?”
호정의 엄마는 동의를 바라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원래는 그 정도로 덤벙거리는 아이는 아닌데 최근 들어 폰을 몇 번이나 잃어버린다는 소리를 해댔다. 내가 준 폰이라 도청이라도 하나 싶어 버렸나. 생각보다 빨리 자신의 처지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래서 오늘 연락이 안 됐구나. 호정이 휴대폰, 언제 잃어버렸대요?”
“한국 오면서 잃어버렸다던데. 비행기에서 잃어버렸는지… 택시인지. 잃어버렸다고 하면서도 어찌나 천하태평이던지.”
“집에서는 그런 말을 안 해서 몰랐어요.”
호정의 엄마가 안심한 듯 미소를 보였다. 재영은 다시 병실 안을 살폈다. 호정이 여기 머무르고 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을 곳인데 호정의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나이든 사람의 살가죽 냄새와 약 냄새, 비릿한 물 냄새만 나는 이런 곳은 여러모로 호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병실을 나서려는 재영에게 호정의 엄마는 늘 그랬듯 고맙다는 말을 더했고 재영은 고개만 살포시 숙여 답했다.
한 달. 재영은 자신이 정한 기간까지만 호정을 봐줄 생각이었다. 호정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호정의 생일인 1월 10일을 넘겨서는 안 됐다. 함께 맞는 첫 생일은 의미 있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오로지 자신과 보내야 했다.
재영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윤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본가에 도착해 짐을 내리던 중이던 윤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마침 세희가 주차장 계단을 내려왔다. 윤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반대편 귀로 옮겼다. “네, 도련님.”이라는 말에 세희가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재영과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에 세희는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재영의 말에 윤 비서는 연신 “네.”라는 답만 반복했다. 호정의 위치를 꾸준히 체크할 것, 재단 사무실로 출근할 테니 방학 동안 일에 집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버지에게 계속 보고할 것 등의 간단한 지시였다. 윤 비서는 다시 자신의 주인이 돌아온 것에 안도했다. 짧게 네, 라고 답할 때마다 점점 감정이 고조되어 전화를 끊을 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재영이는요?”
주차된 차 옆으로 다가온 세희가 물었다. 윤 비서는 짐을 내리던 손을 멈추었다.
“재단 사무실에 계십니다.”
“아, 네.”
세희가 어색하게 답했다. 묻고 싶은 게 더 있는 듯 보였다. 윤 비서는 내린 짐을 흘깃 바라보고 세희의 질문을 기다렸지만, 망설이던 세희는 끝내 어떤 질문도 하지 못 하고 계단을 올라 사라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로 재영은 호정을 찾지 않았다. 간간이 윤 비서가 호정의 위치를 보고했다. 호정을 관찰하는 건 오로지 윤 비서의 몫이 되었다.
대신 재영은 학업을 핑계로 미뤄두었던 재단의 일에 집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외할아버지를 자주 찾아뵙고 사업에 대한 포부를 이야기하는 시간도 잊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늘 자신감에 차 있는 손자의 모습을 좋아했다. 재영은 언제든 할아버지의 지적 허영을 채워줄 존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찌 됐든 외할아버지는 이 집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재산이 가장 많은 것 또한 그였다. 가장 쓸모 있는 존재를 꼽자면 당연히 외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를 뵙고 사무실로 직행했다. 이 집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든 재산이 자신에게 와야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그것까지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까. 못해도 10년, 어쩌면 20년이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재영은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답답했다. 이럴 때 호정이 있다면…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웃어주면 자신도 덩달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호정 씨는 오늘도 구보암동에 있습니다.”
“네.”
재영은 눈을 감았다. 윤 비서는 매일 호정의 위치와 동선을 보고했다. 며칠째 눈에 띌 만한 특이한 점은 전혀 없었다. 오늘도 역시나 도서관에 갔다. 자신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알려주었으니 그게 어떤 것인지, 자신의 뒷구멍을 내어 준 한재영이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을 거다.
한국에 온 후로 잊지 않고 꼬박꼬박 도서관에 들른다는 게 신기했다. 이렇게 집중해 자신에 대해 공부하고 배우려는 자세가 예쁘게 느껴졌다. 단지 전교 꼴등이었던 호정이 정보를 얻을 방법으로 택한 게 동네 도서관뿐이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대학 도서관이라면 논문도 볼 수 있을 텐데. 그 빌어먹을 의사 새끼가 쓴 자신에 관한 논문도 호정이라면 단번에 알아봐 줄 텐데.
“오늘은 동네 병원에도 갔었습니다.”
“병원이요?”
“…네. 아파트 맞은편의 작은 건물인데…….”
두통이 심해졌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리 잠만 잔다던 호정의 엄마 말이 떠올랐다. 재영은 한숨을 내쉬며 윤 비서가 내민 태블릿PC를 보았다. 호정의 동선은 간결했다. 구보암동에 있는 자신의 집과 동네 도서관. 그러다 며칠은 집에서 나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오늘은 도서관에 간 후 병원에 갔다.
“크게 신경 안 쓰셔도 될 듯합니다. 겨울이라 감기일 수도 있고. 건물에 여러 병원이 있는 듯한데, 내과도 있었습니다.”
“겨울이라 그런가.”
재영은 감았던 눈을 뜨고 윤 비서를 쳐다봤다.
“윤 비서님. 저 물 좀.”
“네. 도련님.”
윤 비서는 태블릿을 재영의 자리에 두고 사무실을 나갔다. 태블릿 위에 뜬 호정의 위치는 아직도 구보암동의 본가였다. 도망을 가려면 제대로 가야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으면 더 빨리 너를 데려오고 싶잖아. 재영은 태블릿 화면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 * *
호정이 집에 도착했을 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속을 게워낸 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병원에서 엄마가 준 오렌지 주스가 오늘 먹은 것의 전부였다. 재영이 엄마에게 주고 갔다는 가방으로 기어가듯 걸어가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여는 손가락이 떨려 반대편 손으로 손을 움켜쥐어야 했다. 천천히 가방 지퍼를 당겼다.
“하. 이 미친 새끼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쭈뼛대면 엄마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무턱대고 가방을 받은 게 잘못이었다. 책 몇 권으로 가린 가방 안에는 온통 빳빳한 오만 원 권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얼마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호정은 가방의 지퍼를 닫고 모자를 찾았다. 한숨이 절로 났다.
옷장을 모두 뒤져보았지만 쓸 만한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건 예전에 몇 번 썼음직한 검은 볼캡이었다. 검은 볼캡을 눌러쓰고 집 구석구석을 뒤졌다. 사각지대와 방의 구석, 침대 아래까지 살폈다. 다행히 감춰두었을 법한 카메라와 그 비슷한 기계는 보이지 않았다.
호정은 침대 끝에 지친 몸을 붙여 누웠다. 집을 모두 살펴보았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아직도 재영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자신이 하는 말을 듣고, 자신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괴로웠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호정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지독하게 이어지는 기침을 해대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씻자마자 볼캡부터 깊게 눌러썼다.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아침 일찍 서둘러 찾아간 곳은 도서관이었다. 그곳에서도 혹시나 재영이 있을까 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러 썼다.
‘뉴스에서 사이코패스. 뭐, 그런 거 들어본 적 있어? 내가 그거래.’
한국으로 들어오는 내내 머리를 채운 문장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사이코패스. 호정은 이를 꽉 깨물었다. 정말 재영이 그런 사이코패스라면 연인이 되고자 했을 때 자신에게 미리 말해줬어야 했다. 적어도, 적어도…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됐다. 자신의 모든 행동과 감정이 철저히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호정은 또 눈치 없이 뜨거워지려는 눈덩이를 손바닥으로 비볐다.
평일 아침이라 도서관에는 아이를 데려온 젊은 엄마 두어 명이 전부였다. 1층에서 음료수를 뽑아 타는 목을 달랬다. 도서관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도서검색대에서 ‘사이코패스’를 검색했다. 검색한 책 중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 모든 책을 찾아 자리로 돌아왔다. 처음 들어보는 ‘소시오패스’와 관련된 책도 보였지만 이미 사이코패스와 관련된 책만으로도 두 손이 가득 찼다. 자리로 돌아와 책을 놓았다. 가장 상단에는 사이코패스와 범죄의 연관성을 설명한 책이 놓였다. 호정은 그 책의 가장 앞면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모든 극악범죄자가 사이코패스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이코패스가 범죄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이코패스가 무언가를 절실히 얻고자 할 때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방법이 범죄인 경우가 많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일례로 소아 강간, 연쇄살인, 테러리스트 등 강력범죄자만 모아놓은 러시아의 Black marine 감옥의 경우 재소자 중 사이코패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많은 이들이 100%라고 호언장담하겠지만 결과는, 아니다. 그들 중 절반을 약간 웃도는 53%의 재소자들만이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았다. 이는 범죄의 면죄부가 사이코패스가 될 수 없듯, 사이코패스의 결과가 범죄자인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다.]
호정은 글자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런 글에 안심하는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웠다. 다음 장을 넘겼다.
[사이코패스들은 특정인 앞에서 유독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들의 과시욕은 자신의 더러운 욕망과 기질에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아닌 척 가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당신의 뒤에 서 있기도 하지만 종종 그들은 당신의 바로 앞에 나타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자신이 한 극악무도한 짓을 알아봐달라는 듯이. 그러므로 그들의 수에 당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에게 농락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그들이 하는 말을 유의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얼마나 교묘한 술수로 당신을 비웃고 있는가는 그들이 하는 말에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들은 대체 누구의 앞에서, 어떤 특성을 지닌 사람 앞에서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할까.
바로 자신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자. 그들이 감내하는 평온 수준의 감정 폭을 거부하는 자가 바로 그들의 흥미로운 타겟이 된다.]
책은 다음으로, 다음과 다음으로 이어졌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며칠이 더 지났다. 호정의 옆에 탑으로 쌓여있던 책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호정은 마지막 책의 목차 앞에 손을 얹었다.
[사이코패스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할 수 있을까?]
네 번째 목차를 차지한 소제목에 검지를 얹어 비볐다. 볼캡을 더욱 깊숙이 눌러 시야를 가렸다. 호정은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자신의 얼굴을 감추었다. 128p. 네 번째 목차가 보이는 페이지로 책을 넘기고 읽기 전 숨을 골랐다. 목이 타고 속은 울렁거렸다. 그제야 자신이 근 며칠간 물 빼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다시 펼친 책에 집중했다.
[사이코패스에게 사랑이 가능할까. 이것은 숱한 사이코패스들이 내게 묻는 말이자 그들의 가족들이 확인을 위해 수백 번 묻는 말인 동시에, 그들 스스로가 죽을 때까지 되묻고 찾고자 하는 답의 근원적 시발점이다.
사이코패스와 일반인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성향, 태어난 환경이 그들을 극악한 사이코패스로 만든다는 이론과 타고난 뇌의 형태, 전두엽의 손실이 그들을 사이코패스로 만든다는 두 가지의 이론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다만, 그들이 어떤 원인으로 사이코패스가 되었든 간에 그들에게 인간이라면 마땅히 존재해야 할 배려, 이타심, 양심이 없거나 혹은 희박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사랑은. 그들에게 사랑은 과연 가능한 감정인 것일까.
이 질문을 묻기 전,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의해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아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타인에 대한 배려? 나보다 그를 더 아끼는 마음? 무엇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내어주고 싶은 마음? 당신이 일반인이라면 응당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을 것이다. 당신이 정의한 사랑이 이것이라면 사이코패스들에게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LA에서 태어난 Karen. G는 19살에 아빠가 누구인지 모를 첫째 딸을 낳았다. 28살의 Karen은 남자친구와의 섹스를 끝내고 한 번 더 하자는 남자친구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녀는 한 번 더 섹스하기엔 지쳐있다는 이유로 고작 9살이었던 그녀의 딸을 불러 자신의 남자친구와 섹스할 것을 종용했다. 여기에서 당신은 경악했을 것이다. 그렇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사이코패스다. 그녀에게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양심과 도덕성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딸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모성애라는 감정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이제 당신은 그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판단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그들에게도 예외적인 경우는……]
“저기… 학생.”
“…네?”
호정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에 고개를 들었다. 어린 남자아이의 손을 잡은 여자가 호정의 어깨를 옅게 흔들었다.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코피… 괜찮아요? 이걸로 닦으실래요?”
“아. 어… 감, 감사합니다.”
호정은 뭉근한 액이 흐르는 코 아래를 다급히 더듬었다. 여자의 말대로 붉은 피가 손바닥에 묻었다. 호정은 놀란 얼굴로 아이 엄마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 코와 입을 막았다. 때맞춰 몇 방울 떨어지던 코피가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어린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호정을 올려보았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감싸 화장실로 달려갔다.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양손 물을 담아 턱까지 흐른 피를 훔쳤다. 이렇게 책을 읽는다고 도움이 될까. 재영이라면 이미 자신의 병명을 들은 순간부터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은 다 읽었을 사람이다. 이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읽는다 한들 재영이 생각하는 범위의 일말에도 들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호정은 다시 쿨럭대며 쏟아지는 피를 손으로 받았다.
“형아.”
다시 물을 담아 얼굴을 헹구려다 고개를 내렸다. 아이가 호정의 티셔츠 끝을 꼭 쥐고 울먹이려 했다. 엄마 손까지 놓고 호정이 걱정돼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온 모양이었다.
“놀랐지… 미안. 형 아픈 거 아니야.”
“으응… 아푸지 마.”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려다 물과 피가 묻은 손을 다시 흐르는 물에 담갔다.
“영진아! 엄마 밖에 있어!”
밖에서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이름이 영진이구나. 엄마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가 냉큼 고개를 돌려 화장실 입구를 보았다.
“응. 내가 형아 데리구 가께!”
호정은 연거푸 손에 물을 담아 얼굴을 닦았다. 피가 멎을 때쯤 손수건을 물에 적셨다. 얼굴을 다 닦고 나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호정의 티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 손을 호정을 향해 뻗었다.
“안아달라고?”
“아니. 영진이 애기 아니야. 손만 잡아 주… 주세요!”
호정은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의 손이 따뜻했다. 화장실 밖에서 영진을 기다리던 영진의 엄마가 웃으며 살짝 아이를 노려보았다. “엄마 놀랐잖아.”라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호정에게는 애기가 아니라 안기지 않겠다더니 영진은 엄마를 보자마자 손을 뻗어 품에 안겼다.
“미안해요. 예쁘고 잘생긴 형아들 보면 그렇게 따라다녀.”
“혹시 다음에 여기 또 언제 오세요?”
호정은 손에 쥔 손수건을 보이며 물었다.
“이거 세탁해서 드리고 싶어서요.”
“매일 와요. 영진이가 유치원을 못 가서요.”
아이 엄마가 미소 짓더니 호정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 애기가 좀 아파요. 그래서 키 큰 형들 보면 좋아하고.”
호정은 놀란 눈으로 아이 엄마의 품에 안긴 영진의 뒤통수를 보았다. 꾸무럭대던 작은 머리통이 안정감 있게 엄마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엄마가 ‘애기’라는 말을 써서 아이도 그 단어를 썼던 거라 생각하니 귀엽게 느껴졌다.
‘우리 애기, 우리 호정이. 아까, 놀랐지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어…….’
‘우리 애기, 왜에… 뭐에 심통이 나서 아빠를 다 꼬집어.’
‘우리 애기.’
‘애기야. 호정아…….’
“애기…….”
호정의 중얼거림에 아이 엄마가 눈을 끔벅거렸다. 호정은 별일 아니란 듯 고개를 저었다. 불현듯 재영이 떠올라 젖은 손수건을 세게 쥐었다. 눈은 뜨거워지고 목은 막힌 것처럼 시큰댔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덮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졸린 것보다 책을 읽는 게 우선이었다. 마지막에 보던 책의 뒷내용을 마저 읽어야 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그들에게도 예외적인 경우는 반드시 존재한다. 예외가 없는 사람, 예외가 없는 논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이 절대적 논리만이 예외 없는 진실이다.
사이코패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있다. 미국 전역을 공포로 밀어 넣었던 희대의 살인마, Gary. 무려 147명을 강간,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이자 형 확정 후 역사상 가장 빠른 시일 내 사형 집행이 이뤄진 살인자. 드러난 피해자가 147명일 뿐 실은 그 이상의 범죄를 저질렀을 거라 예상되는 사람. 그중 124명의 신체를 참혹한 잔인성으로 조각낸,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물. 인간이라는 표현조차 아까워 일부 논문과 저서에서는 ‘Gary’를 말할 때 인간,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기도 할 정도의 사이코패스.
Gary가 저지른 범죄와 집행, 사형 과정까지는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 같다. 그가 저지른 범죄의 잔혹성과 처참함에 대해서도 수많은 정보가 산재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 희대의 살인자에게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Gary에게는 지적장애 2급을 앓는 아들, Matheo가 있었다. 다행히도(다행이라는 말이 적합한가에 대한 숱한 고민이 있었으나, 저자가 삭제하지 않길 원했다.) Gary가 강간을 해서 얻은 아들은 아니었다. Gary의 아내에게서 나온 이 아들은 Gary가 레바논에 파병 가 있던 시기에 출생됐다. Gary는 자신의 아들이 네 살이 되고서야 파병에서 돌아와 자신의 아들을 처음 보았다.
Gary는 자신의 아들이 앓는 지적장애에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내가 아들의 병이 일반인과 달라 그를 평생 괴롭게 할 거라고 했고 많은 돈이 들 거라 했으며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병이라고 말한 정도. 그 정도의 정보만이 Gary가 자신 아들에 대해 얻은 정보의 전부였다.
이때부터 Gary는 많은 사이코패스 학자들이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학자들이 연구해 온 사이코패스들과 전혀 다른 행동 양상을 보인 것이다.
Gary는 강간 중에도 아들의 전화가 오면, 강간 행위를 멈추었다. Gary를 벗어난 3명의 생존자 모두 현장에서 Gary가 아들의 전화를 받았음을 진술했다. “아들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매우 상냥한 목소리를 냈어요.”라는 진술에서 우리는 기묘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체포될 수 있었던 마지막 범죄에서 강가에 아무런 훼손 없이 시체를 버린 것도 이례적이었다. 평소 시체 훼손에 거침이 없던 그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체포되는 결정적 증거의 반추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결정적인 피해를 입힌 실수였다. 이 실수의 순간에도 그의 통화목록엔 3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모두 Matheo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미 알고 있듯, 그는 사이코패스 검사에서 현존하는 분류 중 가장 높은 최상위 등급을 받았다. 147명을 살해하고 3명의 생존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려 23년간 잡히지 않은 데에는 그의 이러한 고도의 사이코패스적인 완벽주의가 기저 해 있었다.
처음 체포되었을 당시만 해도 그는 마지막 범죄 건에 대해서만 그 죄를 인정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인 사건이었지만 피해자는 한 명이었고, 그에게는 충분한 보석금이 있었다. 최종 10년 내외의 형이 내려질 거라는 판단을 Gary가 못했을 리 없었다. 경찰의 집요한 수사에도 그는 함구했다. 당연했다.
그런 Gary의 입을 연 건 지독한 수사도, 철저한 증거도, 생존자의 증언도 아니었다. 입을 닫은 지 3일이 지났을 때 경찰은 Gary에게 가족과 면담할 것을 권했다. 아내가 찾아왔을 때 단 한 번의 면담도 허락하지 않던 그였지만 아내가 아들 Matheo와 동행하자 순순히 면담에 응했다.
아내는 그에게 이제 아들을 버릴 것이라고 했다. 147명을 죽인 사이코패스의 아들이자 지적장애를 가진 성인 아들을 경제적 능력 없는 본인이 혼자 키울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동안에도 Gary의 눈은 아들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아무도 Gary의 마지막 유언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더 죽일 수 있었지. 더 죽였을 수도 있고.”라는 희대의 쓰레기 같은 망언만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Gary는 분명한 유언을 남겼다.
“모든 살인, 제가 죽인 모든 피해자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Matheo를 국가가 보호하는 기관에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Matheo는 연어, 땅콩에 알레르기가 있고, 그가 말하는 숫자 6은 실은 7을 뜻하는 것입니다. Matheo가 숫자를 틀리게 말한다고 해서 혼내지 말아 주십시오. 며칠을 슬퍼할 겁니다.”
그 후, 그는 사이코패스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부탁드립니다. Matheo를 살려주세요.”
많은 학자들이 이 말 자체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는 건 당연하다. 나 역시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사이코패스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실은 내면에 사랑이 있는 진실한 정상인이었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에 한해 이런 말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고 연기할 수 있으며 흉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Gary가 한 말은 실상 그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 발언이 아니었다. 형기만 채우면 그는 다시 세상으로 나올 테고, 잠시 사람들의 경멸과 관심을 받겠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사이코패스이기에 그런 멸시에 굴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Gary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왜 자신이 손해인 거래를 했던 것일까. 왜 자신이 아니라 타자인 Matheo를 위한 선택을 했던 것일까.
드물지만 이처럼 사이코패스가 자식을 위해 자신에게 이득 되지 않는 선택을 한 사례는 몇 가지 더 있다. 확률을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이 몇 가지의 사례에서 눈에 띄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이 비슷한 모든 사례 속 사이코패스가 남성이었던 점. 그들의 어떤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심적 동요를 이끈 존재들이 모두 아들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왜일까.
앞서 말한 Karen. G처럼 사이코패스들에게는 모성애, 부성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아이일 뿐, 말 그대로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적은 이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박한 감정을 티냈던 모든 사례의 주인공이 남성 사이코패스라는 점과 그 대상이 그들의 아들이라는 점에 집중했다.
아래부터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며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거나 허락을 받은 건 더더욱 아닌.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만 30년간 연구하고 관찰하고 면담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일 뿐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생식적 구조를 그 근거로 보았다. 자신의 배에서 9달 아이를 키워낸 여성 사이코패스(물론 이들 중 다수가 아이의 사산을 두려워하지 않아 담배, 술, 마약을 지속적으로 했다.)는 자신의 생식기를 통해 아이를 세상에 출산했다.
자신의 생식기에서 나온 자신의 아이임에도 여성 사이코패스들은 놀랍도록 아이와 자신을 빠르게 분리할 줄 알았다. 그들이 아이와 자신을 분리하고 아이를 타자 화하는 데는 출산일인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학자의 관점에서 이는 ‘배출’ 행위를 직접적으로 겪은 여성이 오히려 아이가 자신과 다른 완벽한 타인이라는 걸, 자신이 아니라는 걸 매우 빠르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남성의 경우 아이를 얻는 과정이 여성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남성은 여성과 달리 9달 만에 자신의 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느닷없이 나타난 입장이다. 이 중 희박한 확률의 몇 사이코패스들(앞에 나온 Gary처럼)은 눈앞에 갑자기 자신의 피를 받은 완벽한 또 하나의 자신이 세상이 내놓아졌다고 인식한 것이 아니었을까. 희박하지만, 실제로 부성애와 같은 감정으로 아들을 대한 사이코패스들은 Gary 외에도 더 있었다. 이들 모두 자신의 아이를 처음 본 순간이 아들이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나서였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해버리긴 힘들다.
그들에게 아들은 완벽한 자기 자신도 그렇다고 완벽한 타인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은 규범화할 수 없는 존재. 규범화할 수 없기에 통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Gary가 살해한 147명 중 자신의 감정을 분노로 동요하게 하거나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대상이 아닌데도 살해당한 16명의 피해자가 섞여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한 번이라도 Matheo를 무시하거나 그에게 욕설을 뱉었던 인물이었다.
타자 그 누구에게도(심지어 그들의 부모에게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그들이 단 하나의 존재에게만 이토록 집착을 보인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 챕터의 핵심 내용이다. 정상인인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분산하는 감정을 그들은 한 존재에게만 몰입해 투자했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이코패스 사례에서 이들은 타자 누구에게 이렇게 비상식적인 집착을 밀어 넣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Gary가 자신의 아들에게 그러했듯 말이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산할 줄 모르는 존재들인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의 투자가 사랑이 아니라고 장언할 수 있는가. 나는 앞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당신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이 아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타인에 대한 배려? 나보다 그를 더 아끼는 마음? 무엇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내어주고 싶은 마음?>
위의 사례를 읽은 당신에게 다시 묻고 싶다. 그들의 이 특성이 사랑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장담할 수 있다면 그들이 왜 이런 특성을 보인 것인지 내게 설명해주기를 바란다. 이미 몇의 학자들은 내게 그런 특성을 보인 인물들이 실제로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소명했다. 검사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의문을 제시한 그 학자들 역시 속으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특성을 보였던 이들도 모두, 완벽한 사이코패스였다는 것을.]
호정은 고개를 꺾고 한숨 쉬었다. 뜨거운 숨이 공중으로 번졌다.
[Gary 역시 뇌파 검사를 받았다. Gary는 다른 이야기에는 뇌파 반응이 일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들 이야기에는 공포 영역이 활성화되며 뇌의 시냅스 연결이 무기력에 빠지는 기현상을 보였다. 자신의 감정을 동요하게 하는 유일한 존재에게 그가 느낀 감정은 공포였을까.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결코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범죄까지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무감정이라는 틀로만 그들을 봐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뇌파로만 사이코패스를 분류하는 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호정은 다시 책의 앞장을 펼쳤다.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존재.”
호정은 앞에 보았던 책을 잡아 방금 전까지 보던 책 위에 올렸다.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에 기시감이 든 탓이었다.
“통제… 통제…….”
이 책이 아니었나. 다시 몇 장을 더 넘겼다. 빠르게 넘어가는 책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손으로 이마를 받쳤다. 마침내 찾던 페이지가 나타났다. 이마를 받쳤던 손을 내려 책 위에 올렸다.
[그들은 당신의 바로 앞에 나타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자신이 한 극악무도한 짓을 알아봐달라는 듯이. 그러므로 그들의 수에 당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에게 농락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그들이 하는 말을 유의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얼마나 교묘한 술수로 당신을 비웃고 있는가는 그들이 하는 말에 숨겨져 있을 테니까.]
책에 올린 손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그어졌다. 호정은 눈을 찌푸렸다. 재영은 분명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 그렇다면 분명 자신 앞에서 몇 번이나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신의 모습을 보이려 했을 것이다. 자신을 티내려 했을 거다. 그 술수들… 민재든 아빠 일이든 호정에게 저지른 모든 일을 어쩌면 꾸준히 티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호정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재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려 애썼다. 나쁜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재영이 자신에게 했던 말만큼은 곧잘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가장 본능적인 순간, 재영이 가장 자신의 실체를 잘 보일 수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자신이 보던 재영과 묘하게 달랐던 날. 여태 알던 재영과 묘하게 달라 두렵기까지 했던 그 날.
“…파티.”
파티에 갔던 밤이자 처음 재영과 잤던 그 날 밤. 호정은 그날 보았던 재영의 낯설었던 모습을 꼼꼼하게 떠올리려 노력했다. 그날 본 재영은 자신을 제어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줄곧 차분했지만 표정은 지어낸 듯 서늘했었다. 낯선 남자를 내쫓을 땐 폭력적이고 무자비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게 본래 재영이 지닌 모습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쭈뼛대고 생글대던 웃음과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던 잔잔한 웃음은 모두 지어낸… 지어낸 거짓이었던 걸까.
‘너의 여기가 나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들어.’
책에서 보았던 그 단락이 아니었다면 호정은 지금까지도 다시 제 무릎 안을 들여다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재영의 집에서 무릎을 다쳤고 그 후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전신마취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군대 면제…….
“너무…….”
이제와 생각하니 모든 상황이 마치 짜인 판처럼 너무나 절묘했다. 재영을 만난 후로는 모든 일이 그런 식이었다.
“하씨.”
걸음을 멈추고 외투를 더욱 바짝 조였다. 숨마다 흐릿한 김이 새어났다. 집에 도착해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등을 기대앉았다. 바닥은 보일러를 켜지 않아 여전히 차가웠다. 모자에 시야가 가려져 다행이었다. 호정은 주먹 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뜨끈한 눈물이 손에 묻어났다.
‘너의 여기가 나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들어.’
자신의 무릎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하는 말에 숨겨져 있을 테니까.]
책의 구절이 다시금 떠올랐다. 무릎에 고정해 있던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호정은 감은 눈 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다음날, 호정은 도서관에 들러 영진과 그 엄마를 기다렸다. 세탁한 손수건을 내밀며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영진은 금세 부끄럼을 타며 엄마 품에 안겨 호정을 보기만 했다.
덕분에 엄마 생각이 났다. 도서관 앞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땐 아이처럼 모든 걸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재영이 거의 매일 아빠를 찾아와 살핀다고 했다. 호정은 추임새 같은 “응.”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도서관에서 나와 곧장 아파트의 맞은편 건물에 있는 병원에 들렀다. 아파트 앞에 있는 5층 건물의 한 층은 전부 다양한 병원들로 이뤄져 있었다. 호정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깊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감보다는 두려움이 몸을 감쌌다. 지금 자신이 하는 생각이 그저 지독한 망상이길 바라며 복도 끝에 자리한 정형외과에 들어섰다.
“네.”
간호사는 병원 입구에 들어오는 호정을 보지도 않고 간단히 답했다. 오전 10시가 막 지나려는 참이었다. 호정이 오늘 병원을 방문한 첫 환자였다. 서류 몇 장을 정리해 뒤편 사물함에 넣던 간호사가 답 없는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들어오세요?”
간호사는 입구에 요지부동으로 선 호정을 힐긋 보았다. 아침부터 이상한 손님이 들면 종일 이상한 손님만 드는 법이었다. 지어낸 친절한 표정으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요청했다. 간호사와 눈을 마주하고도 호정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간호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담도 등록은 하셔야 해요. 성함이랑 주민등록번호 먼저 여기 접수증에 적으세요.”
간호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호정은 쭈뼛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간호사가 앉은 접수처로 다가가 접수증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수술할 건데. 제 정보가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아서요.]
간호사가 눈을 치켜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엇 때문에 왔는지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십자인대죠? 우리 그런 거 안 해요.”
어떻게 십자인대인 걸 알았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호정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다시 접수증 종이를 뒤집어 황망히 글자를 써넣었다.
[죄송합니다. 여기에 써서 말해주시면 안 될까요?]
마침 물을 마시러 나온 의사가 호정을 위아래로 훑었다.
“안 들리시는 분인가?”
간호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의사는 느리게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 동시에 코의 중부에 간신히 걸린 안경을 올렸다. 좁혀진 미간에 졸음과 짜증이 가득해 보였다. 저 나이 때 십자인대 수술로 정형외과를 찾는 남자들이 꽤 됐다. 군대는 가기 싫은데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는 수술을 원하는 거다. 의사는 호정이 선 접수처까지 다가와 호정이 쓴 종이를 가져갔다.
[우린 십자인대 수술 안 해요. 앞으로도 할 생각 없고. 걸리면 바로 면허 정지인데 작은 병원이라 타격이 크거든. 작은 병원이라 만만하게 보고 찾아온 모양인데. 작아서 원래 수술도 안 하는 곳이고, 아무튼 안 하고, 안 됩니다.]
호정 앞에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 쓴 글씨를 읽던 호정이 입을 뻥긋거렸다.
‘그건 이미 수술했어요.’
호정의 말에 의사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럼 철심 제거?]
이제야 진즉에 말하지, 하는 표정이 되었다. 호정이 접수증 한 장을 더 가져가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아니요. 아직 수술한 지 1년도 안 지나서……]
의사가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마신 의사가 호정에게 손짓해 보였다. 호정의 표정이 평범한 남자애들과 달리 간절해 보였다. 보통 이런 수술을 하러 오는 날티 나는 남자애들의 외형과도 많이 달랐다. 모자로 푹 눌러쓴 얼굴이었지만 퀭하게 마른 상태라는 게 티 날 정도였다.
이미 수술도 했다면서 철심 제거도 아닌데 왜 정보도 주지 않고 무턱대고 수술부터 이야기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의사는 상담실 문을 열며 호정을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들어와요.”
의사는 종이컵에 물을 더 따르고 상담실로 들어가 앉았다. 호정이 앉을 수 있게 맞은편 의자도 밀어주었다. 호정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오른쪽 무릎을 걷어 보였다. 의사는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동작을 해 보이는 호정에게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아무거나 꺼내 내밀었다.
[수술은 했는데 이 안에 혹시 철심 말고 다른 장치가 있나 해서요.]
“다른 장치?”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였다. 호정이 다급하게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의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호정이 쓴 글자를 보았다.
[현금으로 전부 결제할 테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한 번만 여기 살펴봐주실 수 있나요?]
의사는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다 종이를 끌어갔다.
[의심 가는 거라도 있어요? 학생. 위험한 일 해요?]
의사는 모자로 가린 호정의 얼굴을 살피며 자신이 쓴 종이를 호정 쪽으로 내밀었다. 마른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나쁜 일을 하게 생긴 얼굴은 아닌데 쫓기는 사람처럼 경황이 없어 보였다.
“밥은 먹고 다녀요?”
의사는 일부러 시선을 비스듬하게 했다. 호정이 자신의 눈을 피하기 쉽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아… 금식해야 하죠?”
“말할 줄 아네요?”
“아…….”
호정이 표정을 굳혔다. 멍청한 건 이래서 싫다. 정말 결정적일 때 실수하는 건 죄다 이 전교 꼴등만 한 멍청한 머리 탓이었다. 호정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볼을 긁적댔다.
“아니. 그런 의도가 아니고… 너무 기운이 없는 거 같아서. 혼자 살아요?”
호정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호정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 나이에 무슨 기구한 일을 겪어서 수술한 무릎까지 열어달라는 걸까.
[먹은 건 없어요. 오늘 바로 확인해주실 수 있나요?]
호정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의사는 호정을 빤히 바라보다 종이 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넣었다.
그는 호정을 두고 상담실을 나가 간호사에게 아침 수술로 오전 진료는 닫아달라고 말한 뒤 다시 상담실로 돌아왔다. 동네의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면서부터 수술은 웬만하면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다시 돌아오니 호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오른쪽 무릎을 더듬고 있었다.
척추 아래 하체만 부분마취 해 수술을 진행했다. 혹시나 싶어 호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종이에 써서 보여 달라고 했더니 호정은 수술 내내 [안에 진짜 뭐가 있나요?]라는 질문만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의사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큰 병원에 가면 비수술 요법으로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작은 병원에 온 건 왜일까, 궁금했다.
역시나 개인정보를 주고 싶지 않아서일까 생각하니 납득이 갔다. 위험한 일에는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데 안 된다고 하고 돌려보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다행히 십자인대를 연결한 철심 외에 무릎 안쪽에 특별히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의사는 고개를 들어 호정을 바라봤다. 호정이 눈을 깜박였다. 고개를 좌우로 저어주자 호정이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말해도 되나 봐요?”
“…네.”
호정이 살포시 웃으며 쥐고 있던 종이를 자신의 뒤통수로 옮겨 누웠다.
“도청장치 같은… 그런 게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의사는 다시 호정의 무릎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심을 박은 무릎에 다른 흠은 없었다. 누가 했는지 참 깔끔한 수술 솜씨였다. 철심을 수술용 망치로 가볍게 두드렸다. 벌건 피로 꿈틀대는 근육을 살피던 의사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호정의 무릎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여 무릎 안을 보던 의사는 곧 귀를 그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왜… 왜요? 뭐가 있어요?”
귀를 기울여야 할 정도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삑, 삑 동일한 박자의 소리였다. 흐릿하지만 무릎 뒤에서 그 소리가 들린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마치 기계가 움직일 때 나는 작동 음 같았다. 의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좀 전 호정이 그랬듯 검지를 입술 위에 올렸다.
* * *
재영은 차가운 물을 반쯤 마시다 책상에 놓았다. 호정의 일과는 며칠이 더 지나도 처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도서관에 가는 횟수보다 병원에 가는 횟수가 늘어났다는 것 정도였다.
윤 비서는 오후 업무를 마치고 태블릿PC 화면 속 붉은 점으로 멈춘 호정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따분해 견디기 힘들었다. 동일한 위치에서 깜박이는 빨간 점만 보일 따름이었다. 태블릿PC를 뒤집었다. 지루하던 빨간 점이 보이지 않게 되자 좀 살 것 같았다. 늘어지게 하품하다 재영의 사무실을 살폈다. 한국에 온 후 재영은 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재단 사무실로 출근했고 직원들에겐 싹싹한 얼굴로 안면을 익히려 노력했다. 윤 비서는 그런 재영의 야망 있는 모습을 좋아했다. 도련님의 성공이 마치 자신의 성공처럼 느껴지는 탓이었다.
“커피.”
윤 비서는 마른 입술을 뻐금거렸다. 덮었던 태블릿PC를 다시 확인하려다 관두었다. 커피가 더 고팠다. 지루함에 졸리는 눈을 뜨기 위해선 호정의 위치 따위보다 커피가 절실했다. 윤 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영이 있는 사무실을 한 번 더 살피고 긴 사무실 복도를 빠져나왔다.
재영은 지금보다 더 빠르게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5년도, 10년도 아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단 한 달 만이라도 지나있기를 바랐다. 이상하게 호정을 보지 못할수록 그 모습이 더욱 선연해졌다. 이따금 눈을 감으면 눈앞에 호정이 있는 것 같았다. 가끔은 가늘게 눈을 떠 확인해보기도 할 정도였다.
“하아…….”
재영은 아버지가 이미 결재했던 작년의 서류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아빠가 하는 일을 잘 따라 해야 이 모든 게 손쉽게 제 손에 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는 사업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근간의 사업을 따지자면 당연히 재단이었다. 재단을 물려받는 사람이 상속에서도 우선순위가 되는 건 집안사람 모두가 암암리에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재영에게 재단은 더더욱 소중한 것이자 절대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조금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재영은 보고 있던 결재 서류 더미를 옆으로 밀어냈다. 재단 소속의 고등학교 방과 후 액티비티 활동을 추가하자는 아버지의 제안은 그들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가장 얼마 되지 않은 재영에게 업무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재영은 재단 업무 중 하나가 온전히 자신에게 오게 된 것에 기뻐했다. 방학이 짧아 가능하겠냐고 묻는 아빠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할 때만 해도 설렘에 가득 찬 상태였던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즐거운 일이 더 이상 즐겁지도 흥미롭지도 않았다. 언제나 즐거웠던 일이 지겨워진 까닭을 곱씹자니 이유는 역시나 하나였다. 볼펜의 뚜껑을 닫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구르던 펜이 바닥으로 볼품없게 떨어졌다. 재영은 폰을 꺼내 호정의 엄마 번호를 찾아 눌렀다.
“네. 어머니. 마음은 매일 찾아뵙고 싶은데 오늘 일이 좀 있어서요. 죄송해요. 네. 아버지는… 괜찮으시죠?”
호정의 엄마 목소리를 들으며 호정을 떠올렸다. 얼굴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어투나 몇몇 단어의 높낮이에서 호정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다행이었다.
-참참. 재영아. 호정이 며칠째 전화도 안 하고, 찾아오지도 않는데. 혹시 지금 옆에 있으면 바꿔줄 수 있니?
“제가 지금 집이 아니라서. 호정이 평소에는 도서관 앞 전화 부스에서 통화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안 하나요?”
-며칠째 연락이 안 와서. 나중에 집에 가면 호정이한테 연락 좀 달라고 전해줘. 부탁해, 재영아.
재영은 가벼운 목소리로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으로 그런 걱정 할 시간에 집에 가서 애가 있나 없나 확인이나 해보라는 말이 입술 앞까지 밀려왔다. 재영은 입술을 살짝 물었다.
책상 뒤로 하늘을 비추는 창가에 섰다. 창에 쏟아지는 햇살을 등진 채로 좀 전 바닥에 떨어졌던 볼펜을 구두로 짓눌렀다. 바닥과 재영의 구두 사이에서 버티던 펜이 콰직 소리를 내며 으깨졌다. 덩달아 재영의 표정도 서늘하게 굳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호정이한테 오늘… 말해둘게요.”
재영은 뒤돌아 창가를 마주 보았다. 창 너머 잔잔히 흐르는 강을 보며 전화를 끊었다. 해를 반사하는 물길에 집중했다. 불편하던 마음이 강의 흐름을 따르자 다시금 잔잔해졌다.
재영은 잔잔해진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나는 왜 굳이 한 달을 기다리려고 했던 거지. 그런 질문을 던지고 나니 속이 더욱 갑갑해졌다. 나 같이 좆같은 놈이라도 그리워하게 되려면 그 정도는 지나야 해서? 재영은 자신을 떠나며 보이던 호정의 표정을 상기했다.
“…한 달.”
한 달로 가능할까. 문득 몇 년이 지나도 호정이 자신을 그리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자신이 한 상상 중 가장 기분을 망치는 상상임이 자명했다. 호정이 한국에 온 지 얼마가 지났는지 생각하니 벌써 2주나 지난 참이었다. 한 달과 2주에 그리 큰 차이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다가 문득 깨 바라보면 호정은 늘 자신을 등지고 자고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원래부터 태생이 버르장머리가 없는 아이라고는 생각했었다. 역시나 호정은 한국에 와서도 입국 첫날을 제외하곤 자신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들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재영이 더 자주 그의 부모를 찾는 꼴이었다.
단순히 재영 재단의 병원이라 혹시나 재영의 눈에 띌까 봐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호정은 그저 어리고 버릇이 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올바른 길로 인도할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이 좀 더 빨리 호정을 찾아가는 게 이치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정아. 이호정아… 뭐해, 지금.”
재영은 고여 있는 듯하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뒤척이는 강물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했다.
“아빠는 우리 애기 보고 싶은데. 호정이는 아빠 전혀 안 보고 싶나 보네.”
이것저것 다른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호정을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이었다. 호정에게도 자신을 올바른 길로 안내할 보호자가 필요할 거다. 호정을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니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서랍에 넣어두었던 담배를 꺼내려다 한숨과 함께 서랍 문을 닫았다.
옷걸이에 걸려있던 재킷을 빼 의자에 걸었다. 사무실 벽면에 걸린 거울을 보고 이미 반듯한 타이를 굳이 고쳐 맸다. 셔츠의 단추 하나도 틀어지지 않게 다잡았다.
호정이 떠날 때 보인 태도는 생각할수록 무례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예의 있게 호정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집에 찾아가면 조금 놀라려나. 놀란 얼굴로 자신을 맞이할 호정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덕분에 재킷을 한 손에 쥐고 사무실에서 나올 땐 익숙한 미소까지 지을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나오는 재영을 본 윤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막 사 온 커피를 마시려던 윤 비서의 고개가 비스듬하게 꺾였다.
“어디 가십니까?”
자신에게 기쁜 일이니, 무료한 얼굴로 있는 윤 비서에게도 응당 기쁜 일이 될 것 같았다. 재영은 혼자 가려던 생각을 고쳐 윤 비서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윤 비서와 함께 가야 호정을 데려오기 수월할 거라는 생각이 든 탓도 있었다.
“운전 좀 부탁할게요.”
“네. 도련님.”
윤 비서는 단숨에 차가운 커피를 들이켰다. 플라스틱 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은 윤 비서가 미소 지었다. 어디에 가려는 것인지 감을 잡은 표정이었다. 윤 비서는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던 태블릿PC를 챙겼다. 재영보다 먼저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태블릿을 재영에게 내밀었다. 평온해 보이는 재영의 얼굴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윤 비서는 한시라도 빨리 호정을 잡아 오고 싶었다. 그래야 재영의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지금은 집에 있습니다. 가시면 바로 잡아 올 수 있습니다.”
재영은 화면 속 붉은 점으로 깜박이는 호정을 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건 당장 자신을 찾아내 데려가 달라는 신호였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정의 위치는 명확하고 분명했다. 2주나 찾아가지 않아 오히려 풀이 죽어 있을지도 몰랐다. 방에 누워 재영이 언제 자신을 찾을까 전전긍긍할 모습까지 떠올리니 진즉에 가서 데려올 걸 하는 측은지심까지 들었다.
“계획보다 더 빨리 가시네요.”
“그러게요.”
재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새 살이 조금 빠졌다. 요즘 들어 무언가를 맛있게 먹은 기억이 없음을 깨달았다. 점심으로 무얼 먹었지 떠올리니 역시나 점심에도 사무실에서 서류만 들여다보았을 뿐 무언가를 먹은 기억은 없었다.
문득 영국에서 호정이 해주었던 만둣국이 생각났다. 처음 해본 게 분명했을 음식 솜씨였다. 속이 다 터져 고기며 채소가 둥둥 떠다니던 국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윤 비서. 만둣국 기억나죠?”
“네.”
윤 비서가 티 나게 인상을 구겼다. 개밥 같던 만둣국이 생각난 탓이었다.
“우리 호정이가 처음 만들어준 건데 생각보다 맛있었어요. 그죠?”
“맛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호정 씨가 한 건 별로 없었습니다.”
재영은 윤 비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거울 속 자신을 다듬었다. 윤 비서는 차가 주차된 지하층을 누르며 재영을 돌아보았다. 근래 본 재영의 얼굴 중 가장 생기 있는 얼굴이었다. 윤 비서가 재영을 보며 물었다.
“계획 틀어지는 거 원래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그랬죠.”
재영은 심드렁하게 답하고 다시 얼굴을 다듬었다.
“근데 한두 개 틀어지는 것 정도는 괜찮더라고요.”
머리는 더 다듬을 게 없는데도 굳이 몇 번 더 손으로 쓸어 넘기기까지 했다. 차에 올라 피곤으로 시린 눈덩이를 세게 감았다가 떴다. 불분명하던 시야가 맑아졌다. 어제도 밤을 새웠던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밤을 새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호정이 있는 구보암동과 사무실은 꽤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호정의 집으로 가는 길이 예전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멍하니 창가만 보는데도 시간은 지지부진하게 지났다. 누군가 뒤에서 차의 뒤 범퍼를 잡아당기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퇴근 시간인가. 왜 이렇게 막히지.”
재영은 중얼대며 폰을 열었다. 습관적으로 호정의 번호를 누르려다 옆에 던지듯 놓았다. 이번 폰에는 도청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었는데. 안심하고 그냥 가져갔어도 됐을 텐데. 뒤늦게야 호정에게 미리 말해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다 아무리 속이 상해도 자신이 준 걸 버렸다고 생각하니 또 괘씸해졌다.
평생 옆에 두고 보기엔 가끔 이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되바라진 버릇들이 몇 있었다. 이번에 데려오면 호정에게 기초적인 예의범절부터 다시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루한 시간을 견뎌 호정의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재영은 호정의 집이 있는 5층을 보기 위해 1층부터 천천히 각층을 훑어 살폈다. 느린 시선이 마침내 5층에 다다랐다. 불 꺼진 호정의 집이 보였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기 때문에 이미 환하게 거실 조명을 켠 집이 많았다. 재영은 주차를 마친 윤 비서를 불러 태블릿 화면을 켰다.
“호정이, 집에 있다고… 했죠?”
“네. 지금도 집에 있습니다.”
재영의 시선을 따라 불 꺼진 5층 창을 보던 윤 비서가 의아한 눈으로 재영을 돌아보았다.
“그래요?”
재영은 태블릿을 한 손에 쥐었다. 여전히 화면 속 호정은 붉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호정이라면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충분히 잠들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이해되지 않는 껄끄러운 감정이 자리했다. 재영은 밝은 집들 사이 이질적으로 어둡게 불이 꺼진 5층 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 집에 있는 거 확실해요?”
“네. 오는 동안 위치가 변경된 기록은 없습니다.”
재영이 인상을 구겼다.
“원래 집에 있을 때… 위치 변경이 어느 정도의 폭으로 되나요? 방과 방 사이. 화장실과 거실. 이런 거요.”
윤 비서는 잠시 입술을 벌리고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랬던가. 위치 확인만 되면 그 후로는 건물에서 나오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만 보고했었다. 집에서 호정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는 관심이 없었다. 집에 들어갈 때만 체크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나올 때만 살폈기에 재영의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다.
“그 정도의 거리는 미세한 진동으로 움직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치까지 잡히는지는 잘…….”
“…모른다는 거네요.”
재영은 추위도 잊고 재킷을 벗어 손에 쥐었다. 다시 완전히 암전된 호정의 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가죠.”라는 재영의 말에 윤 비서가 먼저 아파트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재영은 윤 비서를 따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가 8층에서 꾸물대며 내려오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미간을 좁혔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윤 비서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부르는데도 무시했다. 정갈하게 정리했던 넥타이를 풀어 복도 바닥으로 던졌다. 뒤따라오던 윤 비서가 재영이 던진 넥타이를 주워 그를 따랐다.
“도련님!”
11개의 계단을 지나 보이는 코너를 돌면, 다시 11개의 계단이 있다. 몇 번 그 코너를 돌고 나니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뒤꿈치는 앞의 걸음을 쫓느라 가빴다. 재영은 막무가내로 뱉어지는 거친 숨을 고르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짙은 짜증과 불안함이 몸을 감쌌다. 매우 불편한 감정이었다.
마침내 굳게 닫힌 호정의 집 문 앞에 섰다. 재영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숨을 골랐다. 아이가 놀라지 않으려면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호정을 불러야 했다. 재영은 문손잡이를 잡으려다 허공에서 주먹을 쥐고 손을 내렸다.
“호정아.”
숨겨지지 않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호정을 불렀다. 역시나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안쪽 볼을 씹으며 호흡을 삼켰다.
“호정아. 나야… 재영이. 내가 미안해. 응? 문 열어봐.”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들어 문을 느리게 두드렸다.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여린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복도 끝으로 윤 비서가 넥타이를 쥐고 올라오고 있었다. 윤 비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호정아. 문 열어. 응? 나 사과하러 온 거야. 우리 오해가 좀 있었잖아.”
찾아온다 해도 문 열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재영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잠시 뒤로 물러섰다. 아무 대답 없이 뻗대고 있는 현관을 당장이라도 불 질러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재영은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구겨진 표정을 풀었다.
“호정아. 내가 너한테 사과하러 왔다는데… 왜… 문을 안 열어.”
재영이 표정을 굳히고 이를 세게 물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맞물리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재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고작 다섯 개의 비밀번호를 아주 천천히 하나씩 곱씹으며 차근히 눌렀다. 뒤따라온 윤 비서가 재영의 손에 쥐어진 재킷을 가져갔다.
“…도련님.”
윤 비서는 재영의 재킷을 털어 넥타이와 함께 오른손에 들었다. 비밀번호는 다행히 이사 때 재영이 설정해준 번호 그대로였다. 재영은 현관 손잡이를 잡은 채로 윤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윤 비서님.”
“네.”
“보통은 이렇게 부르면 답을 하잖아요.”
“네.”
윤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무런 말없이 선 재영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무덤덤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재영의 눈과 마주쳤다. 윤 비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재영이 무슨 지시라도 내려주길 바랐지만, 재영은 그 후로도 말이 없었다. 한참 윤 비서를 바라보던 재영이 마침내 문을 마저 열고 안으로 발을 옮겼다.
집 안으로 들어서던 재영이 줄곧 차분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재영은 차가운 얼굴로 텅 빈 현관을 오래 바라보았다. 윤 비서는 그 뒤에 서서 재영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불 꺼진 거실은 이미 밖에서 보았던 것이니 괜찮았다. 재영은 신발장을 열어 그 안을 살폈다. 다시 현관 바로 아래를 응시했다. 난잡한 파란색 타일로 엮인 현관 바닥이 깨끗했다.
“신발이… 없네요?”
“네?”
“호정이 신발이 하나도 없다고.”
윤 비서는 그제야 한 번도 보지 않았던 현관 아래를 살폈다. 호정의 엄마가 몇 번 신었을까 싶은 슬리퍼 하나가 현관의 타일 바닥을 차지한 신발의 전부였다. 재영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PC의 화면을 켰다. 여전히 자신이 있는 곳 바로 위에서 깜박이는 빨간 점이 보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호정이 자신의 무릎에 칩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 칩을 제거까지 했을 리가. 그럴 수는 없었다. 재영은 잠시 얼빠진 얼굴로 집 안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하.”
무덤덤하던 재영의 얼굴에 착잡한 웃음이 번졌다. 윤 비서가 말릴 틈도 없이 재영이 손에 쥐고 있던 태블릿을 거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개… 이… 씨발……!”
쾅 소리와 함께 이내 집 전체를 깊은 정적이 감쌌다. 윤 비서는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던져질 때 식탁의 끝과 부딪힌 태블릿이 여전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에서 바닥으로 튕겼다. 으스러진 유리 조각은 자잘한 파편으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재영은 구두를 신은 채로 성큼성큼 걸어가 호정의 방문을 열었다. 방문이 맥없이 뒤로 밀렸다. 윤 비서가 재빨리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흔적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 보였다. 책상과 서랍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호정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 줄만한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도 마찬가지였다. 각을 잡아 정리된 이불을 보던 재영이 뒤돌았다.
방을 나서려던 재영이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방문 옆에 붙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정중앙을 네모난 위치추적 칩이 관통하고 있었다. 거울의 가운데에 테이프로 붙인 칩이 있었다. 재영은 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호정아…….”
칩은 눈치 없이 여전히 삑삑대는 흐릿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재영은 거울에 붙은 위치추적기를 떼어냈다. 손톱의 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칩은 호정과 자신을 이어주던 것이었다. 재영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건 호정이 어디에 있어도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연결고리이자 안전장치였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호정이 스스로 먼저 끊어버린 것이었다.
재영은 손가락으로 칩을 쥐고 짓이겼다. 파직, 소리와 함께 칩이 비틀리고 삑삑대던 흐릿한 소음도 사라졌다. 다시 짙은 정적이 두 사람을 감쌌다. 윤 비서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으로 입안 가득 매캐한 침이 고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재영이 시린 눈으로 윤 비서의 턱을 잡아 올렸다.
“지금 죄송하다고 그런 거죠?”
“죄송합니다. 도련님.”
윤 비서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재영의 두꺼운 손이 그대로 윤 비서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있던 바스러진 칩이 윤 비서의 뺨을 찢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 비서님.”
재영은 찢어진 윤 비서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어루만졌다. 붉은 피가 재영의 손바닥과 엉켰다. 윤 비서의 뺨을 타고 맺힌 피가 목선을 타고 흘렀다.
“윤 비서님 탓이 아닌 건 알겠는데, 애 잃어버린 사람 눈에 지금 뭐가 보이겠어요.”
“…네. 죄송합니다.”
“내 부모랑 최정화 부모만 자기 자식을 모르는 게 아니었네.”
윤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피가 더 빠르게 차올라 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하얀 셔츠와 재킷을 적신 피의 검붉은 색이 적나라했다. 그런데도 윤 비서의 시선은 오직 재영의 눈을 향했다. 무슨 의미인지 묻는 눈빛이었다. 재영은 윤 비서의 손에 쥐어져 있던 자신의 넥타이를 가져가 윤 비서의 뺨에 묻은 피를 대신 닦아주었다.
“나도 내 부모나 그년 부모만큼 내 아이에 대해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재영이 고개를 느리게 숙였다. 고요하고 깊은 숨이 뱉어졌다.
“호정이요. 중학교 때 버스에서 옆 동네 애들이랑 싸운 적이 있어요. 그때 누가 제일 먼저 사람을 때렸는지 아세요?”
윤 비서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재영이 피 묻은 넥타이를 바짝 움켜쥐었다. 넥타이를 적셨던 피가 방울져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우리 호정이요. 생기부에 호정이가 제일 먼저 그 애들을 때렸다고 되어 있더라고요. 내가 그걸 잊고 있었어요.”
호정이 버텨준 건 성정이 그러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에게 버텨주는 쪽을 택한다는 건, 얼마의 침범까지 버틸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이 호정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재영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도련님.”
재영이 고개를 들자 윤 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사장님 전화입니다.”
하필 이럴 때 아빠의 전화였다. 재영은 눈을 세게 감고 목을 돌려 긴장을 풀었다. 윤 비서의 손에서 폰을 가져가 귀에 붙였다. 주체할 수 없는 짜증이 나 견디기 힘들었다.
“네. 지금 바쁜…….”
재영은 자신의 뒷덜미를 손으로 꽉 쥐었다.
-재영아. 나.
목을 매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호정의 목소리였다. 재영은 귀에 붙은 폰을 내려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 뜬 번호는 분명 아빠의 것이었다. 재영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잠시 머뭇거렸다.
-방학인데 너희 부모님 뵙고 인사는 드려야 할 거 같아서. 유학도 그렇고 나 도움 많이 받았잖아.
평소와 다름없이 잔잔한 목소리였다. 재영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늘 호정의 생각이 고스란히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호정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뒤에서 웃는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정이 웃으며 “재영이 바꿔 드릴까요?”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호정아.”
그들이 너에게 도움을 준 건 하나도 없어. 다 내가 너를 도운 거야. 머릿속에선 여전히 그런 말만 떠올랐다. 휴대폰을 바짝 움켜쥐었을 때였다. 호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영의 이름을 불렀다.
-재영아. 넌 똑똑하니까 내가 영국에서 마지막에 한 말. 기억하지?
재영은 자신을 떠나던 호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선명하고 분명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모습이었다. 매일 밤 곱씹던 호정의 모습이었으니 당연했다. 재영은 그제야 어제도 호정의 그 모습을 생각하느라 잠들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너 버리는 거 아니야. 나 혼자 생각 좀 하고 돌아올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재영은 휴대폰이 바스러질 듯 세게 움켜쥐었다.
-그 말, 꼭 들어줘.
어깨에서 돋아난 핏줄이 손목까지 불뚝 솟았다.
“…언제까지?”
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재영이 좀 있으면 집에 온대요.”라고 재영의 부모에게 답지 않은 거짓말을 하는 호정의 목소리만 들렸다. 재영은 이미 끊긴 전화에도 귀에 붙은 폰을 선뜻 내리지 못했다.
“윤 비서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죠?”
재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윤 비서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재영의 귓가에 있는 휴대폰을 가져갔다. 여태 자신이 본 도련님의 표정 중 가장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호정은 재영과의 통화를 마친 후 곧장 휴대폰을 다훈에게 돌려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재영과 통화하기 전 다훈에게서 받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호정은 미소 띤 얼굴로 쪽지를 손에 쥐었다. 어색한 미소였지만 다훈과 세희가 눈치를 챌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이 호정을 향해 있었다. 재영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재영이 곧 올 거예요. 재영이 보고 가면 좋은데… 저는 저녁에 병원 예약이 되어 있어서요.”
호정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붕대로 감싼 호정의 무릎을 본 세희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호정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무릎은 그때 화재 때 다친 거 때문이지? 아직 아픈 거예요?”
“아니에요. 한국 들어왔을 때 검진 받은 김에 철심까지 제거하느라. 아프지는 않아요.”
호정은 어색한 거짓말을 하며 눈을 피했다.
“다훈 씨. 그때 호정이 무릎 수술, 어떤 선생님이 하셨었지?”
다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호정은 소파 헤드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재영이 오기 전 이 집과 동네를 벗어나야 했다. 힘없이 일어난 호정을 보던 세희가 호정을 따라 일어섰다.
“우리 차타고 가면 안 될까? 마음이 불편해서…….”
세희가 호정의 손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의 울퉁불퉁한 흉터가 호정의 손등을 스쳤다.
“괜찮아요. 올 때 택시를 이미 불러놔서. 저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땐 저 꼭 태워주세요.”
“그래, 그래. 자주 와요. 재영이랑 영국에서 있던 이야기도 해주고 전처럼 편하게 잠도 자고 가고. 자주 와줘.”
“…네.”
호정 스스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세희에게 호정은 중요한 존재였다. 주치의의 말과 달리 재영이 호정에게만은 자신이 사이코패스임을 알렸고 자신의 병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에 세희는 모든 실낱같은 기대를 호정에게 건 상태였다.
아들이 영국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호정을 봤던 병원에서 호정이 자신의 아들이 지닌 병에 대해 보여준 무덤덤함에 세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고마움을 느꼈다.
호정은 그 당시 재영의 부모와 자신이 했던 대화가 근본부터 아주 완벽히 틀어져 있었음을 이제는 깨달았다. 그렇다고 굳이 그 대화를 고칠 생각은 없었다. 오늘 재영의 집에 온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이 분 만나려면 예약해야 하나요?”
호정은 다훈에게서 받은 쪽지를 들고 물었다. 갈색 종이가 호정의 손에서 흔들렸다. 다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약해도 만나려면 좀 걸릴 거예요.”
“네.”
다훈은 호정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아들에게 처음 친구가 생겼다는 걸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의심을 완전히 거둔 적은 없었다. 다훈은 여전히 호정을 볼 때 조심스러웠다. 재영이 성적인 대상으로 호정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의사 말대로 그래서 다 말한 것이라면.
“후우…….”
재영은 언제든 돌변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아이였다. 세희의 손바닥을 찌르고 무료한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던 열 살의 아들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주치의를 왜 만나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다훈은 고개를 숙인 것도 모자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물었다.
“다훈 씨…….”
세희는 다훈의 이런 확인이 불편했다. 호정이 말한 대로, 재영이 말한 대로만 믿고 싶은 게 세희의 마음이었다. 호정은 다훈이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대답을 기다리던 다훈이 고개를 들어 호정의 눈을 마주 보고 나서야 호정은 가까스로 미소 지었다.
“재영이 마음은 모르지만, 제가 재영이를 좋아하게 됐거든요.”
다훈이 눈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호정이 한 답은 자신이 던진 질문의 의도와도 맞지 않았다. 호정은 마치 넘어지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소파의 가죽을 세게 움켰다.
“재영이를 사이코패스라고 진단한 의사를 만나고 싶어요. 저는…….”
세희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일까 두려웠다. 아들에게 품었던 기대가 이번에도 역시나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세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 돌렸다. 굳이 질문을 던져 이런 확인을 받는 다훈까지 미워지려던 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호정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저는 아직 재영이를 놓고 싶지가 않아서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재영의 말대로 온전한 재영이 되어 그 생각을 읽고 이해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다. 재영을 용서하고 싶었다. 호정은 한숨을 숨기며 낮게 인사했다. 돌아서 나가는 걸음은 절뚝거렸지만 단호하고 분명했다. 넓은 거실을 딛는 발걸음이 정상적인 누구보다도 곧았다. 세희는 잠시 벙찐 채로 두 눈을 끔벅거렸다.
“재영이가 병만 고백한 게 아니라… 그런 모습도 이미 보인… 보인 거 같… 죠? 친구가 생겼다고 해서 그게 아직 완전히 나은 게. 아닌 거… 그런 거…….”
다훈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세희를 올려다보았다. 안쓰러웠다. 세희의 눈은 여전히 호정이 빠져나간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호정은 재영의 집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올랐다. 세희와 다훈이 적어준 병원의 주소를 기사에게 말해주고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영이 사이코패스라면 첫 진단을 내린 의사와 병원이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재영의 집을 찾아왔다. 미성년자일 때 진단을 받았을 테니 병원부터 의사까지 부모가 알고 있는 건 당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재영에게 처음 사이코패스 진단을 내리고 그를 치료하고자 했던 주치의를 만나고 싶어진 건 모든 책을 다 읽고 난 후였다. 그가 알고 있는 재영의 모습이자 자신은 알지 못했던 재영의 모습을 듣고 싶었다.
책은 책일 뿐이었다. 그건 재영이 아니었다. 책은 결코 재영의 전체를 대변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던 시절의 모습과 재영이 했던 행동, 재영에게 내려진 처방을 보면 책만으로는 내려지지 않는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영에 대해 더 알아야 했다. 의사를 만난 후엔 재영이었다. 마지막엔 결국 재영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창밖 전경에 시선을 돌려도 머리는 여전히 재영의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모든 게 거짓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부질없는 바람인지도 몰랐다.
택시가 골목을 돌아 동네를 빠져나왔다. 이제는 재영의 집이 더 보이지 않았다. 호정의 상체가 아래로 기울어졌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택시 바닥으로 쉴 새 없이 떨어졌다.
‘UWB칩… 나도 이거 뉴스에서만 본 건데. 도청은 아니고 위치추적 그런 거라고 본 것 같은데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어쩌다가 이런 걸 무릎에.’
의사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호정에게 칩을 내밀었다. 칩에 묻은 피를 티셔츠에 닦고 손에 쥐었을 때 호정은 이미 울고 있었다. 수술 베드에 누워 마취가 풀리길 기다릴 때까지도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한재영… 이 개새끼야…….”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자신은 결국 재영을 좋아하게 됐을 거다. 그게 재영이 만들어낸 허상의 모습이라 해도 자신은 결국 재영을 사랑하게 되었을 거다. 도망가는 게 두려웠다면 도망가지 않게 해야 했다. 자신을 더 악착같이 감춰줬어야 했다.
“나쁜 새끼… 미친 새끼.”
호정은 손등으로 눈물이 묻은 볼과 눈을 닦아냈다. 달뜬 숨을 참기 위해 두 눈을 몇 번이나 세게 감았다가 떴다.
자신은 마지막 윤 비서의 방에서 보았던 스크린과 USB들과 민재의 집에서 가져왔을 사진보다, 재영과 처음 잤던 그 날 밤, 기절해 잠들었던 그 새벽을 더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잠든 자신의 볼과 어깨에 끊임없이 입 맞추던 재영을 떠올렸고, 몸을 돌려 이불을 당기면 “버릇없어.”라고 말하면서도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주던 상냥함을 기억했다. 등 돌린 자신의 허리를 당겨 안으면서도 혹시나 호정이 깰까 조심조심 등을 다독이던 다정함을 더욱 짙게 기억했다.
“재영아…….”
함께 잘 때면 재영은 자신과 달리 밤새 깊게 잠들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자면서도 자신을 살핀다는 것을 알았다. 재영은 자신이 조그만 몸을 뒤척여도 금세 깨어나 어깨와 등을 어루만졌다. “왜 자꾸 몸을 돌리는 거야. 너는 대체 이런 버릇들을 어디서 배운 거야.” 심통 난 목소리로 툴툴대다가도 끝끝내 자신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깨물고 목 뒤부터 척추가 끝나는 지점까지 편히 잠들 수 있게 쓰다듬어주었던 걸 떠올렸다.
자신에게 재영은 그런 모습이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재영은 그랬다. 재영의 본 모습이 어떤 것이든 막상 미친 새끼라고 욕하며 떠올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이런 다감했던 모습들만 떠올랐다.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오래 걷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저리고 아팠다. 조금만 걸어도 오금이 저리고 발바닥과 종아리에는 쥐가 났다. 호정은 전기가 오는 듯 저린 허벅지를 주물렀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아직 재영을 놓을 수 없다는 게 스스로도 한심했다.
“나는 원래… 한심하고 무식하고 멍청해.”
다짐하듯 중얼댔다. 이런 꼴을 하고도, 네가 한 짓들을 어렴풋이 알게 된 지금도 나는 너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한심하고 무식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똑똑한 너라면 나를 버렸겠지만, 나는 너처럼 똑똑하지 못하니까. 너를 흉내 낼 수 없고 여전히 네가 될 수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너처럼 생각할 수도 없다. 넌 내가 이기는 게임이라고 했지만 그때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나 역시 네가 될 자신은 없다.
“제발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기다려줘. 내가 너한테 돌아갈 수 있게.”
창밖으로 망망대해 같은 하늘이 밀려들었다. 노을은 해를 찢고 나온 해의 부산물이다. 붉은 노을이 스민 하늘은 당장이라도 머리 위로 쏟아질 듯 거칠었다. 호정은 밀려드는 하늘을 피하지 않고 보았다.
* * *
윤 비서는 재영의 손에서 흔들리는 피 묻은 넥타이를 보았다. 시선을 들었으나 여전히 재영의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지금 내 주인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흥미로운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윤 비서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재영의 손가락을 하나씩 천천히 떼어내 넥타이를 가져갔다.
“도련님.”
그나마 깨끗한 쪽으로 재영의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도 윤 비서의 시선은 낯선 재영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재영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떠한지 알지 못했다. 지금부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잊은 채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왜 계획이 틀어졌지. 내 계획의 어디에서 실수가 있었던 거지. 계획의 오점, 오류는 대체 무엇이었지.
호정에 관한 건 처음부터 이런 식이었다. 자기가 그어준 선을 미묘하게 벗어나던 행위는 결국 마지막에 와서는 아예 방향마저 틀어버렸다. 가는 방향이 같다면 미세한 어긋남은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에 확신이 사라졌다.
호정과 자신을 잇던 연결고리가 끊어졌고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호정의 손에서 이뤄졌다. 처음으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은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당혹감에 목 뒤로 후끈한 열이 끼쳤다.
“거실이랑 방, 치워주세요. 호정이 엄마가 눈치채지 못 하게.”
“네. 알겠습니다.”
윤 비서가 거실로 나가고 재영은 현관을 열고 나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당연히 주머니 어디에도 담배는 없었다. 호정 때문에 끊었다는 걸 또 잊었다. 멍하니 복도에 섰다. 입이 썼다. 하늘을 적시며 다가오는 핏빛 노을을 노려보았다.
“…기다려, 라니.”
재영은 호정이 아닌 좆같던 의사의 얼굴을 곱씹으며 마른 얼굴을 쓸었다. 그 씨발새끼가 내가 제일 하지 못한다는 게 그런 기다림 아니었던가. 주치의는 절제나 통제. 자기조절. 자기제어. 정도. 억제 같은 인간의 지적 능력 중 상위 개념의 영역을 자신 같은 사이코패스는 해낼 수 없다고 했었다.
그럼 내가 담배를 끊은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이건 제어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려나. 그 새끼는 이것 역시 사이코패스의 이기적인 연기라고 말할까. 재영은 텁텁한 혀를 굴려 입안을 적셨다. 비릿한 맛이 났다.
“형은 누구예요?”
“…….”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갓 초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남자아이가 재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가 큰 재영을 보기 위해 고개를 거의 구십 도로 꺾은 아이의 표정이 의기양양했다. 재영은 심드렁한 얼굴로 아이를 지나치려 했다.
“누구세요. 여기 호정이 형 집인데.”
“호정이?”
재영은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빠의 사고가 있고 이곳으로 이사 온 후, 호정은 거의 매일 재영의 집에서만 지냈었다. 그 후로는 영국에 가 있었기에 이 집에 그나마 오래 있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터였다.
큰 눈을 깜박거리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호정이랑 언제 봤어? 친했니?”
“네. 형이 저번 주에 여기 앞에서 떡볶이도 사줬었어요.”
“그래? 왜?”
왜 너한테는 그런 친절을 베풀었지? 내가 준 휴대폰은 버리고 내가 박아둔 칩도 버렸으면서, 게다가 이제는 날 버리고 도망까지 간 주제에. 왜 이따위 초등학생한테는 그런 과도한 친절을 베푼 거지. 속과 달리 재영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아이가 쭈뼛거리며 눈가를 긁었다.
“음…….”
아이가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렸다. 눈앞에 있는 형의 얼굴은 말을 할 때도, 걸을 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마주할 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덤덤하고 시린 얼굴은 석고상처럼 그 안이 굳은 사람 같았다. 미동 없는 얼굴이 무섭게 느껴졌다. 뒤로 물러나려는 아이의 팔을 재영이 붙들었다.
“씨발……. 너 대답 좀 제때 할래?”
재영이 말을 빠르게 고쳐 물었다. 아이는 팔을 비틀어 빼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침에 여기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저 학교 가는 길이랑 호정이 형 가는 길이 같아서… 형이 그냥 떡볶이 사준 건데…….”
재영은 고개를 더 숙여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호정이 좋아하는 얼굴인가. 자신과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닮지 않았고 친구였던 김민재와도 닮지 않은 외모였다. 재영은 호정의 주변인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호정의 엄마, 아빠… 당연히 그쪽도 아니었다.
“너 이름이 뭐지?”
“저요?”
“두 번 묻게 하지 말고.”
“형 좀 이상해요. 표정이 엄청 무서워요.”
재영이 고개를 비틀었다. 조금만 손을 뻗어도 아이의 팔을 붙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아이는 작다. 작으니까… 한 손에 움켜쥘 정도로 팔이든 다리든 모든 게 작으니까, 어떻게 찢어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지도. 재영은 감았던 눈을 뜨고 아이를 응시했다. 아이가 몸을 배배 꼬며 재영을 힐끗거렸다.
“개미 밟아본 적 있지?”
아이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영은 아이의 팔을 세게 끌어당겼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이의 눈이 짙고 어두웠다. 이 눈으로 호정이가 내게서 도망가 있던 동안, 자신이 보지 못한 호정의 모습을 보았을 거라 생각하니 심기가 뒤틀렸다. 웃고 있었을까.
“밟을 때 아무 생각도 없었지?”
느적느적 위아래로 움직이는 고갯짓을 따라 아이가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재영은 커다란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카락 위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당장이라도 이 머리채를 잡아끌고 간다면 좋을 텐데. 재영은 고개를 들어 복도 끝에 있는 CCTV를 올려보았다. 빨간 불이 규칙적으로 깜박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아이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었는데도 아이는 겁먹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런 면에선 어른보다 더 눈치가 빨랐다.
“형한테는 네가 그래.”
재영은 한숨과 함께 다시 아이를 쓰다듬었다.
“고작 그 정도로 누구와 친하다고 말하면 안 돼. 형 같은 사람이 들으면 오해해. 알겠니?”
볼을 가볍게 툭 쳐주자 아이가 눈을 질끈 감고 재영의 팔을 뿌리쳤다. 어릴수록 이런 말이 결코 우스갯소리로 하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 다행이었다.
때마침 호정의 집 현관문이 열리고 윤 비서가 나왔다. 아이는 재영이 일어서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달아났다. 호정의 옆집인 자신의 집으로 황급히 몸을 숨기느라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철문이 부딪히며 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닫힌 옆집 문을 보는 재영의 옆으로 윤 비서가 붙었다.
“아무래도 창은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깨진 부분이 티가 많이 납니다.”
“새 건 더 티가 날 것 같은데…….”
재영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바로 가십니까?”
윤 비서가 눈썹을 긁으며 물었다. 입술과 볼이 여전히 시큰거렸다. 재영은 아이가 들어간 현관을 빤히 보았다. 호정의 주변 인물 누구와도 닮지 않은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호정의 주변인이라고는 이제 자신과 호정의 부모뿐이었다. 재영은 도무지 잡히지 않던 다음 계획이 점차 또렷해짐을 느꼈다.
“호정이 엄마 옷 좀 챙겨 나와 주세요. 집보다는 목경대 병원을 가는 게 낫겠어요.”
“네? 이호정 씨…….”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재영의 눈빛에 윤 비서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이번에도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통해 1층까지 내려갔다.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의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입구에 도착할 때쯤엔 호정의 엄마 옷이 담긴 종이백을 쥔 윤 비서가 자신보다 앞서 있을 정도였다.
재영은 입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재영이 고개를 들자 반쯤 열려 있던 호정의 옆집 창이 급박히 닫혔다. 재영은 호정의 집과 그 옆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 비서님. 집 나간 애가 돌아오려면…….”
윤 비서의 이마와 눈썹이 일그러졌다. 재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윤 비서를 지그시 응시했다.
“누구 한 명이 죽으면. 되지 않을까요?”
윤 비서는 재영의 익숙한 눈빛에 그제야 안도했다. 긴장해있던 몸이 풀리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고 미소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마른 미소가 걸린 입가를 따라 여전히 마르지 않은 볼의 피가 흘러내렸다.
* * *
재영의 아버지가 적어준 병원은 서울과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둑한 밤이 되어 있었다. 출발할 때부터 어차피 오늘은 시간이 늦어 만날 수 없을 거라 예상했었다. 호정은 병원 근처의 모텔 방을 잡아 몸을 씻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무릎의 붕대도 새것으로 갈았다. 몇 번 해보았다고 붕대를 감는 게 벌써 손에 익었다. 낯설고 어려운 일에도 결국 적응하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낡은 모텔의 침대에선 퀴퀴한 묵은 냄새가 났다. 천장의 얼룩은 세월의 수로 자리했고 바닥의 장판은 군데군데 담배로 지진 자국이 보기 싫게 남아 있었다. 호정은 생각을 멈추기 위해 일부러 더 모텔 방 안을 꼼꼼하게 살폈다. 의사를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게 답이 될 수 없었다. 불필요한 생각을 덧대고 싶지 않았다.
“…아, 아빠…….”
아빠와 엄마 생각이 나는 게 당연했다. 며칠 연락도 못해 걱정하고 계실 게 뻔했다. 호정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혼자 여행 왔다는 거짓말을 주절댔다. 아픈 아빠를 병원에 둔 자식이 하기엔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말이었는데도 엄마는 딱히 호정을 혼내지 않았다.
-혼자 가면 위험한데, 재영이랑 같이 가지 않고.
“…어, 응. 아빠는? 괜찮지?”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희 아빠야 뭐 매일 똑같지. 자식 사랑은 결국 짝사랑이라더니, 한국 와서는 첫날 한 번 왔던 게 다지. 이호정…….
“미안, 엄마. 나 금방 갈게.”
-재영이 지금 여기 와 있는데. 바꿔줄까?
엄마가 요란하게 폰을 움직였다. 호정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테이블 뒤의 전화선을 뽑았다. 뛰지도 않았는데 심장박동이 빨라져 덩달아 숨도 가빠졌다.
병원은 CCTV도, 보는 사람도 많은 곳이다. 재영이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그렇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나쁜 마음을 먹을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호정은 재영을 믿고 싶었다. 자신이 그를 이해하려는 이 시간이 헛되이 되지 않게,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게 재영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바랐다.
호정은 새벽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두 번째는 목이 말라서, 세 번째는 옆방의 TV소리가 사나워서. 갖가지 이유를 댔는데도 결국 가장 그럴싸한 답은 재영이 생각나서였다. 그게 진실이었다. 방보다 밝은 빛이 창을 타고 침대 위를 덮었다. 눈을 깜박였다.
아침도 먹지 않고 서둘러 준비해 병원에 왔다. 병원의 접수처에 재영의 아버지가 적어준 종이를 보였다. 접수처의 직원은 호정이 내민 종이를 보며 친절한 웃음을 지었다.
“아, 어떡하죠. 저희 교수님 이번 주까지는 일이 있어서 못 나오시는데.”
호정은 접수처 직원의 뒷면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보았다. 오늘이 목요일이었다. 이번 주가 안 된다면, 3일이나 더 이곳에서 의사를 기다려야 했다.
“그럼 월요일에는 예약이 가능할까요? 제일 빠른 시간에 뵙고 싶은데요.”
“…워낙 예약이 많으신 분이라. 학술 세미나 시기에는 특히 더 예약이 어렵고요.”
직원은 안절부절못해하며 호정의 눈치를 살폈다.
“환자분, 상담만 하시려는 거죠?”
“아… 한재영이라고. 유중석 교수님 환자라고 듣고 왔는데, 그 친구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요.”
직원의 입술 사이가 살짝 벌어졌다.
“환자 성함이나 정보에 대해서 저희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어요.”
떨떠름한 얼굴로 답하는 직원을 보던 호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선생님 연락되면 여기로 전화…….”
말을 잇던 호정이 순간 아차 하는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휴대폰이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영락없이 월요일에 다시 와 무턱대고 의사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호정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인사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겨울인데도 등에선 땀이 났다. 이마도 마찬가지였다. 호정은 손등으로 이마를 닦고 아픈 무릎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