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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활착하는 달(1) (13/22)

10. 활착하는 달(1)

병원 앞에 보이는 편의점에 가 물과 함께 허기를 달래줄 몇 가지를 골랐다. 습관처럼 익숙하게 커피를 골랐다가 다시 진열대에 내려놓았다. 대신 이전에 즐겨 마셨던 탄산음료를 담았다. 계산대로 향하던 호정은 노트와 볼펜이 있는 곳 앞에서 망설였다. 결국 하나씩 골라 담고 나와 모텔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한 번도 깊게 잠들지 못했었는데 이날만큼은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비닐봉지 안에 든 노트와 펜을 꺼냈다. 의사에게 물어볼 것들을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금세 잊을 것 같았다. 나중에 하지 못한 질문을 생각하며 아쉬워하지 않으려면 가기 전 질문들을 미리 정리해두어야 했다. 노트를 펴 떠오르는 질문을 빠르게 써내려갔다.

“미친놈아. 고딩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얼마나 좋아.”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가 괜히 울컥 눈물이 나려해 고개를 젖혔다.

“이씨…….”

손등으로 뜨거워진 눈덩이를 아무렇게나 비볐다. 뜨거운 열이 볼로 번졌다. 꽉 막힌 목을 풀어줄 틈도 없이 노트 위에 글자를 써내려갔다.

처음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은 나이.

사이코패스 진단을 내린 이유.

진단의 변화 과정.

재영이에게만 보이는 특징이 있었는지. 다른 점이 있는지. 있다면 이유는 무엇인지.

감정은 어느 정도까지 느낄 수 있는 것인지.

몇 가지를 추가로 써내려갔다. 감정은 어느 정도까지,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까지는 못한다 치더라도 그렇다면 기쁨과 슬픔은 어느 정도까지인지, 어느 선까지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인지 물어야 했다.

책에서는 이 또한 사이코패스마다 다르다고 했다. 감정에 관해서는 전문가의 상담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호정은 재영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다른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았다.

질문은 그날 오후와 저녁을 비롯해 늦은 새벽까지도 불현듯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잊지 않기 위해 노트에 생각난 질문들을 추가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누워있다가도 갑자기 떠오른 재영의 모습들을 썼다.

재영이가 가장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어느 정도까지 컨트롤을 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도 모두 빠짐없이 적었다. 마지막에 다 쓴 질문들을 보니, 그냥 생각나는 모든 것을 다 적은 듯했다. 노트의 네 면을 빼곡하게 채운 질문을 보고 또 보았다. 질문이 유의미한지 무의미한지는 호정이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후우…….”

기다리던 월요일이 되었을 때 호정은 병원이 문을 여는 아홉 시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그 앞에 도착했다. 병원 직원을 기다리며 노트를 몇 번 더 들춰보았다.

하늘이 유달리 맑고 아름다웠다. 속을 모르는 느긋하고 한적한 바람이 불었다. 세상은 너그러웠고 겨울의 바람은 이전과 달리 따스했다. 새 붕대를 감은 무릎도 며칠 누워 쉰 덕분인지 많이 나아졌다. 기분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많이 나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펼친 노트를 덮고 병원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벽이 등에 붙어 척추를 따라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눈을 감았다. 영락없이 재영이 떠올랐다.

재영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쩌면 자신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본래의 재영으로 돌아가 버렸을 수도 있었다. 원래의 한재영으로 돌아가 자신을 만나기 이전의 익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원래 재영의 삶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도드라지는 건 자신의 존재였으니까.

연기였든 본래였든 재영은 그 이전의 모습대로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책에서처럼 자신을 떠난 나 따위는 이미 지운 채로, 관심은 금세 시들해지고 잊은 채로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었다.

호정은 씁쓸한 기분으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맑은 하늘이 눈에 담겼다. 겨울은 언제 끝이 날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재영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호정의 앞으로 알이 큰 무테안경을 쓴 의사가 걸어왔다. 남자는 처음부터 호정을 찾은 사람처럼 당당하고 빠른 걸음으로 호정의 바로 앞에 와 섰다.

“금요일에 한재영 씨 일로 저를 찾아오신 분… 맞죠?”

“아, 네.”

직원이 주말에 호정의 이야기를 전달해준 모양이었다. 호정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유중석입니다. 한재영 씨 주치의이기도 하고요.”

막상 의사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도, 귀찮은 얼굴도, 그렇다고 딱히 호정을 반기는 얼굴도 아니었다.

호정은 마른 침을 삼키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의사는 호정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 기분이 나빠질 정도로 세세하게 호정의 머리카락부터 다리, 종아리까지 보는 눈빛이 진득했다.

“덕분에 오전 상담은 모두 취소했어요. 들어오세요.”

의사는 병원 입구에 명찰을 대고 문을 열어주었다. 내부로 들어오니 이미 출근한 직원 몇이 보였다. 호정은 재빨리 의사의 뒤에 붙었다.

“아. 그러실 것까지는 없어요. 저는 그냥 몇 가지만 물어보고 가려…….”

“아니요.”

의사가 호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그쪽한테 물어볼 게 많아요.”

“네?”

“한재영 씨 일로 오셨다면서요.”

“네.”

“그러니까 제가 더 물어볼 게 많죠.”

의사는 의미 모를 말을 하며 웃었다. 로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의사는 호정에게 고갯짓했다.

“타세요.”

“네.”

강압적이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호정은 뒷목을 괜히 멋쩍게 긁었다. 느리게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의사가 호정을 따라 탔다. 3층 버튼을 누른 뒤 의사는 다시 호정을 찬찬히 살폈다. 모자로 푹 눌러 쓴 얼굴. 군살 없이 날씬하지만 적당히 탄탄한 몸. 날렵한 턱선과 가는 어깨선. 기다란 손가락… 의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보자마자 알겠네요. 한재영 씨와 단순히 친구 사이인 건 아니죠?”

호정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친구예요. 고등학교 친구.”

“한재영 씨한테 친구라는 건 없어요.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의사의 비소에 호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의 말대로 자신이 재영의 친구이기만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호정은 점퍼 바깥으로 나온 후드를 당겨 정리했다. 눌러 썼던 모자도 벗었다.

“저쪽이에요. 들어오세요.”

의사는 긴 의자가 즐비한 복도의 끝 방을 가리켰다. 가는 길에 문이 두 개 더 보였다. 그 문 앞 모두에 의사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호정은 자신보다 앞서 걷는 의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쳐다봤다.

“내담자가 서로 마주치길 꺼리니까요. 상담실이 총 세 개예요. 시간차가 있더라도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요.”

호정의 시선을 느낀 의사가 먼저 말했다. 호정은 바쁜 걸음으로 의사를 쫓았다. 모자로 눌린 머리카락을 털었다. 의사를 따라 들어간 상담실 내부는 벽면 가득 서류더미와 종이가 가득했다. 옅은 시트러스 향이 풍겼다.

“저쪽에 보이는 칸이 전부 한재영 씨 관련 자료예요. 기분이 어때요?”

호정은 의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책장의 가장 가운데 칸. 세로로 긴 책장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자연스럽게 걸음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여긴 제 환자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내담자들의 자료만 받아놓은 방이에요. 그중에서도 한재영 씨는 아주 독특하죠. 늘 새로운 논문 주제를 던져주는 존재이니까.”

“논문…….”

호정은 책장에 꽂힌 논문집 하나를 꺼냈다.

《사이코패스의 대타자 활용을 통한 살인 충동 억제 연구》

“살인…….”

“이미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재영 씨는 직접적 살인 충동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등급이에요. 그 행위를 저지를 때 자신이 잃게 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계산도 매우 빠른 사이코패스입니다.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선택만 하기 때문에 살인 충동을 대신 해결해줄 대타자가 반드시 필요하죠.”

“그래서 그 일을 대신할 사람을 찾… 사람이 있다는 거네요?”

호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재영의 개인비서였던 윤 비서가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 아주 악한 부류죠.”

호정은 논문을 쥐고 책장의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이 칸 전체를 채운 논문집에 재영의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한 층당 못해도 스무 편이 넘는 논문집이 빼곡히 찬 책장은 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재영이 상담 내용으로 논문 쓴 거, 재영이도 아나요?”

“심지어 외우기까지 했죠.”

의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컴퓨터를 켰다.

“내 이론에 오류가 있나 걱정했는데 당신이 찾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 이론에는 오류가 없었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까요.”

“제가 왜 그 증명이 돼요? 오류는 뭐였는데요?”

호정은 논문과 노트를 쥐고 의사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빠르게 움직인 탓에 욱신대는 무릎을 매만졌다.

“한재영 씨가 자신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누군가에게 고백했다면 그 대상은 반드시 자신의 성적인 대상이어야 하죠. 속박하고 억압해야 하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손쉽게 겁줄 수 있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고…….”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호정을 응시했다.

“사이코패스의 가장 큰 말썽인 성욕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호정은 대답 없이 논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재영이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제가 아는 재영이와 선생님이 아는 재영이가 많이 다른 거 같아서요.”

“이해하고 싶어서 오신 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건 없습니다. 사이코패스들은 이해를 구하는 사람들도 아니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니까요.”

호정은 입술을 말았다. 노트를 펼쳤을 땐 느닷없이 머리가 어지러워 암전된 두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몇 살 때… 처음 이곳에 왔었나요?”

“열 살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나이죠.”

의사가 미소 지었다. 그는 호정의 당황한 표정에서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세 살에서 다섯 살만 되어도 사이코패스의 기질적 특성이 드러납니다. 보통의 아이들과는 명확히 다른 잔인성을 보이는데 그래도 고등학생 정도는 되어야 그 기질이 문제로 드러나죠. 그래서 보통은 그 이후의 나이에 PCL-R 진단을 받으러 오는 거고. 그렇다고 해도 부모가 직접 열 살 아이를 사이코패스 센터에 데려오기는 쉽지 않죠.”

“재영이는 무슨 일로 왔었어요?”

호정은 의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의사는 어깨를 들썩이더니 호정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모자를 벗으니 얼굴이 더욱 도드라져 드러났다. 아침의 햇살이 그대로 호정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엄마 손바닥을 찔렀습니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요.”

“네?”

“나중에는 당신도 찌를 겁니다. 자신을 두고 이렇게 저를 보러 왔으니까.”

“그런… 아니에요.”

의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왕 도망친 거라면 절대 돌아가지 마세요. 한재영 씨는 당신을 반드시 죽일 겁니다. 지겨워져서 죽이든, 배신해서 죽이든, 자신을 의심해서 죽이든. 뭐 이유야 그 사이코패스가 만들어내기 나름이니까요.”

“아니에요. 재영이는…….”

호정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정말 그날, 재영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걸까. 자신의 목을 감싸던 재영의 기다란 손가락을 떠올렸다.

“아니에요. 정말… 재영이는 절대 저를.”

자신이 보았던 재영의 얼굴, 자신이 느꼈던 재영의 손가락과 무게, 악력… 모든 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떠올랐다. 그날, 자신의 목을 감싸던 재영의 손아귀엔 전혀 힘이 들어있지 않았었다. 만약 재영의 손에서 조금이라도 억센 힘이 느껴졌다면 그날 그런 식으로 웃어넘기지는 못했을 거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피해자가 그쪽처럼…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옆에 있다가 사이코패스 손에 죽었죠.”

호정은 자신이 들고 온 노트를 노려보았다. 재영에 대한 숱한 질문들이 적혀 있었다. 호정은 잠시 숨을 고르고 노트를 덮어 바닥 아래로 내렸다. 이런 질문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질문으로는 절대 재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재영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사이코패스도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나요?”

“하아.”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코패스 부모들이 꼭 하는 질문을 하는군요. 제 대답도 이미 아실 텐데요.”

“사랑을 못 하나요?”

“네. 아주 조금도요.”

의사가 확신에 찬 눈으로 호정의 눈을 끈질기게 쫓았다. 떨리는 눈과 불규칙한 손가락의 움직임. 동공은 좌에서 우로, 다시 우측에서 위와 아래로 질서 없이 움직이고 흔들렸다. 의사의 눈에 호정은 지금 명백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불안 증세를 보이시네요.”

“제가요?”

“네. 특별한 일도 아니죠.”

의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주변인을 병들게 한다. 정작 자신은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 주변인의 피를 말리고 숨통을 조이는 게 사이코패스들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보통은 자신이 아닌 타인이 걱정되어서 잘해주고 챙겨주고 보듬어주고 시간을 내어주는… 그런 모든 게 다 사랑이잖아요. 굳이 거창하게 목숨을 걸고, 희생하고, 마음을 다 내어주고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요. 제 생각은… 사랑이 꼭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닌데. 기준을 낮추면 재영이도 충분히 제 나름의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사랑의 범주를 좀…….”

“…그렇게 믿고 싶으시겠죠.”

호정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아요. 네…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진짜 그렇게 믿어져서요. 걔가 저한테 했던 행동 중에 무의식에서 보이는 행동들이 있었어요. 그런 건 학습이나 연기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일반인인 당신의 기준에서는 그렇겠죠. 하지만 한재영 씨 같은 그런 사이코패스들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호정은 의사의 눈을 더욱 깊게 응시했다. 의사 역시 호정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호정의 눈은 이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짙고 불안정해보이던 심리 상태가 아닌 듯했다. 가능한가. 불안 증세는 불규칙적으로 드러나지만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숨길 순 없다.

의사는 고개를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결코 실수하지 않지만, 어쩌면 창으로 들어오는 해가 너무 짙어서 이번만큼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게 연기라면… 그 연기는 어떻게 해야 멈춰지나요?”

커튼을 치던 의사가 손을 멈췄다. 돌아서니 여전히 호정의 눈동자는 곧고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보는 눈빛이 단호했다. 마치 자신에게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그런 진단을 받은 환자의 보호자들의 첫 반응은 대개 이런 식이니까. 부정하고 분노하는 것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아직은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가장 극한의 상황에 몰아붙여지면요. 그러면 결국 본성을 드러내죠.”

호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재영이와 저는 단순히 친구로 정의되는 관계는 아니었으니까요.”

비릿한 웃음에 의사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호정은 벗었던 모자를 들어 병원에 올 때처럼 머리에 덮었다. 꾹 눌러 쓴 모자에 두 눈이 가려졌다.

“저는 재영이를 좋아했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재영이의 그 모습들이 연기든 흉내든, 재영이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었어요.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린 것도… 네. 맞아요.”

의사는 피식 웃었다. 당연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사이코패스 분야에 관해서 자신이 틀릴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가 재영이에게 부탁한 게 있어요. 돌아올 테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저를 기다려달라고요. 정말 만약에… 재영이가 그런 저를 기다린다면요?”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이호정이요.”

모자로 가린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게 보였다. 의사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호정의 작은 머리통과 바닥에 놓인 노트를 바라보았다.

“호정 씨. 그 사이코패스는 절대 호정 씨를 기다리지 않아요. 정말 그 사이코패스가 아직 당신을 필요로 한다면… 당신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나 상황을 조작해낼 겁니다. 여태 많이 겪어보시지 않았나요? 특히 한재영 씨는 그런 덫을 놓는 것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죠.”

호정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한테 물어보실 게 많다고 하셨잖아요. 물어보셔도 돼요.”

“아. 이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의사는 문 앞에 선 호정을 지그시 응시했다. 호정은 쭈뼛대던 손을 마주 잡았다.

“저한테 질문하셨더라도… 제 어떤 답도 믿지 않으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네?”

“재영이는 저를 기다릴 거예요.”

의사는 잠시 멈칫하다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호정 씨. 제가 말씀 드…….”

“저를 기다려줄 거예요. 제가 돌아간다고 했으니까요.”

호정이 모자를 다시 벗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반듯한 눈이 마주쳤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게 믿으신다면야, 뭐.”

의사는 어깨를 달싹거리며 미소 지어 보였다. 자신이 틀릴 일도 없겠지만, 사이코패스가 그렇게 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호정은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병원과 집 사이에서 고민하다 먼저 집에 가 옷부터 갈아입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의사의 앞에서는 재영을 믿는다고 했다. 괜찮은 척 어쭙잖게 건방을 떨었지만 속은 병원에 올 때와 같았다.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으로 일렁였다. 택시에 타 마른 얼굴을 연신 쓸어댔다. 피곤함에 금방이라도 졸음이 쏟아지려는 눈을 손바닥으로 으깨듯 눌렀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오다가 보니, 택시는 금세 아파트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입구에 주차된 차를 눈으로 훑었다. 재영의 차는 없었다. 점퍼를 당겨 추운 바람을 막았다.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던 호정이 손을 멈추었다. 낯선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하고 남은 비밀번호를 마저 눌렀다. 집 안은 자신이 떠날 때와 같았다. 호정은 자신의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불과 며칠 만일 뿐이니, 다른 게 더 이상하다는 자각이 뒤따른 탓이었다. 점퍼를 벗어 식탁 의자에 걸고 화장실로 가 손을 씻고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살피던 호정이 눈을 깜박였다. 세면대 거울에 흐리게 찬 습기가 보였다.

* * *

번잡한 목경대 병원 앞으로 재영의 차가 매끄럽게 들어와 섰다. 재영은 다친 손이 눈에 띄지 않게 재차 점검했다. 윤 비서가 챙겨 나온 종이백 안을 살폈다. 그냥 보기엔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춘 듯은 보였으나, 실제 호정의 엄마가 즐겨 입는 옷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영은 핏줄이 터져 붉어진 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호정이 떠난 뒤로 줄곧 자신을 쫓던 피곤함이 이제는 지겨웠다. 이런 고통을 당장이라도 끝내고 싶은 마음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호정의 아빠가 있는 병실로 가기 전 화장실에 먼저 들렀다. 재영은 거울 앞에 서서 굳은 자신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제는 익숙하다고 생각해온 표정을 다시 지어내 연습했다. 약간의 걱정이 묻은 웃음이어야 했다. 다급해 보인다면 더 나을 것 같았다. 어떤 표정이었지. 보통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짓지. 어떤 감정을 느끼지.

재영은 종이백을 세면대 위에 올리고 물을 틀었다. 양손 가득 물을 담아 얼굴을 적셨다.

호정의 아빠는 호정에게 도움이 된 적이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오히려 지금은 굳이 표현하자면 짐에 불과했다. 죽는다고 해도 호정에게 손해는 아니었다. 보통은 가족이 죽으면 슬퍼한다고 했으니 호정도 잠시는 슬퍼하겠지만, 슬픔은 금세 잊힐 거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편안해질 수도 있었다. 언제 숨이 멎을까 전전긍긍하며 아빠의 안부를 묻는 것보다 이미 죽은 자의 기일을 챙기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종이백에 있는 옷 중 그나마 가장 깨끗해 보이는 티셔츠를 꺼내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고등학교 때 맡았던 호정의 향이 옅게 맡아졌다. 물기를 닦은 티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종이백을 쥐었다.

호정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게 만들 테니까. 종이백 끝이 구겨졌다. 재영은 표정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병실 앞에 서서 뻐근한 목을 풀었다. 병실 안에서 호정의 엄마가 틀어놓은 듯한 TV 소리가 새어나왔다. 재영은 병실 문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호정의 엄마가 눈에 띄게 밝은 웃음을 지었다.

“재영이니? 오늘 바빠서 못 온다더니.”

“아. 시간이 좀 나서요. 부탁받은 것도 있고.”

“부탁?”

재영은 멋쩍은 듯 웃으며 들고 온 종이백을 건넸다. 창을 교체하고 집을 정리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호정의 엄마가 가끔 집에 돌아가는 이유가 옷 때문이라는 걸 알아 다행이었다.

“호정이가 어머니한테 이것 좀 전해달라고 해서요. 어머니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애가?”

호정의 엄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종이백을 들었다. 안을 살펴보는 호정의 엄마를 보던 재영의 눈은 곧장 침대에 누운 호정의 아빠를 향했다. 꽤 오랜 시간 저곳에 누워 있었다.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갔다. 오늘 갑자기 죽는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빠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호정은 죄책감을 먼저 느낄까. 나를 의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먼저일까. 이것마저 내가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더욱 나를 벗어나려고 할까. 결과야 어찌 됐든 호정이 돌아온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특하긴 한데 여기 한번 와서 얼굴 보여주는 게 더 기특한 건데. 진짜 아들이라는 놈이 어떻게 친구인 재영이만도 못해.”

“그럴 리가요.”

죽이는 방법 중 어느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까. 재영은 목경대 병원의 지리와 내부 상황을 잘 알았다. 아빠가 어릴 때부터 재영의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 종종 지하의 영안실에 데려온 것도 이유가 되었지만, 각 층의 호실과 수술실의 위치까지 파악한 건 재영의 의지였다. 언젠가는 이 병원도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또 병원만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장소는 드물기 때문에 재영에게는 병원 내부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현재 층에 있는 CCTV는 총 11대였다. 물론 병실 내부와 화장실, 수술실은 제외였다. CCTV는 복도와 병실 앞, 간호사들이 있는 곳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병실에 CCTV가 없다는 건 오히려 재영에게 불리했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될 수 있었다. 병실에 들어가는 모습이 이미 찍혔을 테니 문제가 생긴다면 용의자 명단에 자신도 속하게 될 거다.

“뭐라도 먹을래? 밥은 먹었니?”

호정의 엄마가 손을 잡아끌었다. 재영은 호정의 엄마 손에 끌려 침대 앞쪽의 가죽 소파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네. 어머니는 드셨어요?”

“먹었지. 그럼 마실 음료수라도 줄까?”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 내미는 호의는 거절하지 않았다. 재영은 주스를 내민 손을 따라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호정의 엄마는 종알종알 말이 많은 편이었다. 문득 재영은 그녀가 실제로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말없이 누운 남편과 병실에 둘만 있다 보면 누구나 말이 많아지는 게 아닐까 생각하니 문득 저 남자를 지키는 게 호정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영은 순간 이제 일어날 일의 용의자로 병상을 지키던 아내가, 범행동기로는 병간호에 지쳐 우발적 범행이라는 타이틀이 적격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났다.

호정의 엄마는 남편의 얼굴을 젖은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요란한 벨 소리를 내며 울리는 휴대폰은 호정의 엄마 것이었다.

“어. 아들.”

아들이라는 말에 재영은 음료를 마시며 티 나지 않게 눈을 돌렸다. 화사하게 웃는 호정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엄마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도 호정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여태 세상 모든 일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불합리함이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혼자 가면 위험한데, 재영이랑 같이 가지 않고… 응… 너희 아빠야 뭐 매일 똑같지. 자식 사랑은 결국 짝사랑이라더니, 한국 와서는 첫날 한 번 왔던 게 다지. 이호정…….”

호정의 엄마가 서운한 기색을 하며 재영을 흘깃 바라보았다. 재영은 호정의 엄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살포시 미소 지었다.

“재영이 지금 여기 와 있는데. 바꿔줄까?”

재영은 호정의 엄마가 내민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전화는 재영의 손으로 넘어오기 전에 이미 끊긴 상태였다. 깜박거리는 화면 위로 호정이 전화를 건 곳의 번호가 보였다.

“031…….”

자신의 부모를 찾아갔다가 간 곳이 이번에는 경기도였다. 경기도와 자신의 부모. 재영은 이제야 호정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적셨다. 가까스로 익숙한 웃음을 지으며 호정의 엄마에게 폰을 돌려주었다.

“전화가 끊긴 것 같아요.”

“아유, 얘도 참. 성격 급한 애도 아니면서.”

호정의 엄마가 호정에 대해 아는 척을 할 때마다 재영은 속이 뒤틀렸다.

아마 호정은 자신의 주치의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자신을 버린 것이라면 주치의를 굳이 찾아갈 이유는 없었다. 주치의는 사이코패스에 관해 설명해줄 수는 있겠지만 재영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재영이 자신에게 한 일을 파헤치려면 재영의 부모 다음에는 윤 비서 순이어야 맞았다.

재영은 음료를 마시는 척하며 병실의 천장을 살폈다. TV 소리가 낮아졌다. 호정의 엄마가 재영과 본격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음량을 낮춘 탓이었다. CCTV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천장을 살피고 음료를 테이블에 놓았다.

뇌사판정을 받고 쓰러진 지 몇 개월이 지난 환자가 갑자기 진행할 수 있는 수술 따위는 없었다. 아무런 증상도 없이 편안하게 누워있던 사람이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킨다 해서 어떤 수술을 곧장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기다려. 너랑 있으면 아무 생각도 못 하겠으니까.’

느닷없이 재영의 머릿속에서 호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재영은 고개를 옅게 저었다.

“…….”

그렇다면 수술보다는 역시나 병실 안이 안전했다. 느닷없는 발작, 그것까지는 괜찮을 듯했다. 발작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일어났던 일이기에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거냐는 것과 그 발작이 어떻게 사망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할지 하는 두 가지였다.

‘너 버리는 거 아니야. 나 혼자 생각 좀 하고 돌아올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사망까지도 어렵지 않다. 뇌사 상태의 환자가 지금 당장 발작을 일으켜 죽는 건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 중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재영은 이제 그 발작을 어떻게 일으키지, 하는 고민으로 생각을 옮겼다.

‘재영아.’

모든 독은 증거를 남긴다.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독은 신체 어디에든 남아 증거가 되는 것뿐이었다. 재영의 생각은 이제 사후에도 몸에 남지 않는 약인 C-2를 구해오는 쪽과 병원과 협의해 사망원인을 빠르게 진단내리는 쪽 중 어느 쪽이 더 안전한지로 옮겨졌다. C-2는 구하는 것부터 손에 넣는 것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약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실수로 걸리게 되면 일은 더욱 복잡해질 게 분명했다.

‘재영아. 넌 똑똑하니까 내가 영국에서 마지막에 한 말. 기억하지?’

“하… 씨…….”

재영은 낮게 욕을 읊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귀를 울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재영아.’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가 아프고 복잡했다.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왜 자신의 계획 중간마다 호정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태 자신의 계획에 타인은 결코 끼어들 수 없었다. 당연히 이 모든 상황이 몹시 짜증스러웠다.

재영은 다시 호정이 있는 곳의 번호를 떠올렸다. 호정이 쫓는 게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자신의 병이라면. ‘대체 왜.’라는 질문이 필수적으로 따랐다. 호정은 정말 다시 돌아올 생각인 걸까.

주치의는 자신에게 결코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마지막 상담 후로는 이제 자신을 더욱 혐오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재영은 열이 들끓는 이마를 다시 양손으로 받쳤다.

‘그 말, 꼭 들어줘.’

눈을 감았다. 가슴부터 목덜미, 이마와 볼까지 뜨거운 열이 끼쳤다. 입술 안도 마찬가지였다. 끓는 열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하아…….”

인간에겐 약점이 있다. 약점이 있는 인간은 약해지기 마련이다. 재영은 호정이 자신의 약점이 되었다는 걸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재영은 뜨거운 열이 전이된 손을 쥐었다.

“…어머니. 저…….”

호정의 엄마가 재영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호정의 엄마는 이마를 덮은 재영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뜨거운 열이 전해졌다.

“너 지금 열나는데 감기 들린 거 아니니? 요즘 통 못 쉬었다더니… 기다려. 아줌마가…….”

약을 사 오려 자리를 뜨려는 손을 끌어 잡았다. 재영은 아이처럼 호정의 엄마 어깨에 볼을 붙여 기댔다. 자신을 만나기 전 호정에게서 나던 옅은 향이 호정의 엄마에게서도 났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차분해졌다.

“호정이 어릴 때 이야기해주세요. 갓난아기 때도 괜찮고, 그냥 전부 다요.”

“호정이야 뭐, 어릴 때부터 참 꾸준히 말썽 많이 일으켰지.”

재영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약속은 잘 지켰어요?”

“약속? 다음 시험은 잘 칠게요, 하는 약속은 한 번도 못 지켰는데. 그것 빼고는 다 잘 지켰지.”

재영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호정의 엄마는 깔깔대며 웃다가도 중간 중간 재영의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했다.

“그래. 어떤 이야기 해줄까?”

“전부 다요. 그냥 호정이 이야기가… 너무 듣고 싶어요.”

재영이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었다.

“어머니는 아세요? 호정이 여행이 언제 끝나는지.”

“글쎄… 아닌 척은 해도, 애가 외동이어서 그런지 독립적이지는 못해. 금방 오지 않을까?”

호정의 엄마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왜, 매일 붙어있었으면서 그새 또 보고 싶니?”

호정의 엄마는 다 큰 남자애들이 참 유별나기도 하다며 웃었다. 재영은 호정의 엄마를 따라 웃었다. 당신이 유별난 아들을 낳아서 그런 거라고, 당신의 아들이 너무나 유별난 아이라서 그렇다고, 재영은 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호정이한테 연락 오면요. 제가 기다리고 있다고… 꼭 전해주세요.”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심지어 다음 계획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릴 힘조차 없었다. 약점이 약점이 아니게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재영은 내면에 차오르는 생소한 감정을 알아차렸다. 그건 재영이 처음으로 느끼는 상실감이었다. 인생에서 잃은 것도, 누구를 잃은 적도 없었던 재영이 느끼기엔 너무나 처참하고 위협적인 경험이었다. 재영은 뜨거워진 눈을 감고 호정의 엄마 품에서 잠이 들었다.

재영은 아침이 되어서야 느리게 눈을 떴다. 호정이 떠나고 한 번도 이렇게 깊게 잠이 든 적이 없었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간이침대에 누워 잠든 호정의 엄마는 아마도 자신을 배려해 그곳에서 잠든 듯 보였다.

재영은 침대에 누운 호정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길게 이어진 링거의 호스와 투명한 수액을 잇던 시선은 눈을 감은 호정의 아버지의 얼굴로 다시 떨어졌다. 재영은 시선을 호정의 아버지에게 고정한 채 낮게 읊조렸다.

“진짜 이렇게 악착같이 안 죽는 사람이, 있긴 있네.”

득실을 따졌을 때 호정의 아버지를 죽이는 건 명백한 손해였다. 아직 호정이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호정의 아버지가 잘못되면 호정은 자신을 더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게 뻔했다. 그런 여지는 주고 싶지 않았다. 호정이 자신을 마음 편히 떠날 수는 없어야 옳았다.

재영은 의식 없는 호정의 아버지 눈앞에서 손을 양옆으로 흔들었다. 이렇게 손을 저어서 그림자를 만들어내도 그는 모를 것이다. 뇌가 죽어버렸으니까. 이 사람이 숨을 쉬는 건 신체에 남은 기관들일 뿐이었다. 사람이 사람다운 구실을 하려면 뇌가 움직여야 했다. 사람은 사고함으로써 사는 것이지 숨만 쉰다고 사는 건 아니었다. 그러므로 눈앞의 이 남자는 이미 죽은 이나 다름없었다.

“왜 이렇게 오래 버티세요. 쓸데없이.”

모든 게 호정의 아빠 때문이었다. 재영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이름만 아빠인데도 호정은 정말 이 사람이 필요한 걸까. 단순히 생물학적 아빠라는 이유로 나보다 더 낫다는 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머리에선 그가 호정의 인생에 오점이자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었다. 아직 호정에게는 이 사람이 자신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생각했지만 재영은 이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 그냥 죽는 게 나았을까.”

애초에 이 계획이 실패한 건 그 시점부터였던 것 같았다. 고속도로 사고 후 호정이 모든 걸 포기하든 말든 이 남자를 죽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위치추적 칩까지 쓸모없어진 지금에 다다라서야 재영은 이전의 자신의 계획들을 차례로 되감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오류처럼 느껴졌다.

오류는 연쇄적으로 머리를 채우다 결국 그날의 골목까지 이어졌다. 핏물에 잠식되어 쓰러진 호정의 얼굴은 아직도 생동감 있는 기억으로 떠올랐다. 팔과 다리에 드러난 생채기마다 흙과 먼지가 피에 들러붙어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던 그 날의 호정을 무시하고 지나쳤어야 했을까.

“…….”

지나쳤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재영은 늘 그래왔듯 탄탄대로의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부모 앞에서 자신을 숨긴 채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모두 얻었을 테고 가지지 못한 것도, 뺏긴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 행복했을까. 지금 자신을 구질구질하게 옭아매는 이 좆같은 상실감 따위는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호정이가 돌아올 때까지는 죽지 마세요.”

다시 고요하게 눈을 감은 호정의 아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재영은 호정의 아빠를 보며, 그날, 골목길에 피투성이로 쓰러져있던 호정을 떠올렸다. 곧이어 마치 정해진 듯 졸업식 날 자신을 보며 어색하게 웃던 호정이 떠올랐고, 죽은 민재의 관을 보며 울던 호정의 얼굴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처음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며 놀라던 호정의 눈동자와 아빠의 사고 후 도와 달라 매달리던 두 팔, 파티가 있던 날 재영을 뺏길까 두려운 눈으로 재영의 집을 찾아온 그 날의 떨리던 얼굴들이 무차별적으로 재영의 뇌리를 스쳤다. 재영은 그중에서도 자신의 두 팔 사이에 완전히 갇힌 채 해맑게 웃던 나체의 호정을 가장 오랜 시간 떠올렸다.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서 아빠 소리는 계속 들을 거잖아요.”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어제를 기점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볼썽사납게 마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죽이고 싶은 갈망이 솟구쳤다. 욕구는 거칠게 들끓다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재영은 호정의 아버지 눈앞을 배회하던 손을 내려 주머니에 넣었다. 더는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다.

병실 앞에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듯 보이는 윤 비서가 있었다. 윤 비서는 불편해 보이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맞은편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재영이 병실에서 나오자 윤 비서의 흐릿하던 초점이 비로소 맞춰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 비서가 재영의 뒤에 섰다.

“도련님.”

“집으로 먼저 갈게요.”

“이호정 씨 부모는 어떻게 진행할까요?”

재영은 윤 비서를 흘깃 쳐다보았다. 윤 비서는 병실 창을 통해 호정의 아빠를 훔쳐보고 있었다. 무심한 얼굴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잖아요.”

재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윤 비서의 평평한 볼과 이마가 순식간에 구겨졌다.

“누가요?”

병실 창에 붙어있던 윤 비서의 눈이 재영에게로 돌아왔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시겠다고요?”

재영은 어깨를 들썩거렸다. 답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자신은 호정이 부탁한 대로 해줬다. 이제는 호정의 차례였다. 호정은 약속을 지켜줘야 했다. 반드시 돌아와 이 지루한 기다림보다 더 큰 대가를 재영에게 돌려줘야 했다. 그 대가는 반드시 재영의 생각만큼 정당한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한국대 편입 준비 서둘러주세요. 서류 늦지 않게. 교수진은 전에 말한 대로 준비하시면 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윤 비서가 마지못해 답했다. 윤 비서는 재킷의 단추를 잠그며 재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재영은 자신을 따라오려는 윤 비서의 어깨를 저지하듯 가볍게 두드렸다. 윤 비서가 의아한 눈으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호정이 집부터 해결해주세요. 본가는 저 혼자 갈 테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재영은 본가에 갔다가 다시 호정의 집으로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도 윤 비서는 찝찝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서서 재영을 보기만 했다.

재영은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했다. 어제 느낀 생소한 감정이 정말 자신의 것이 맞는지 분별하기 시작하면 마음은 번잡해지고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생각 자체를 멈추는 게 차라리 더 이로웠다. 복도를 돌자 자판기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재영은 휴대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를 냈다.

“엄마. 나 집에 가려는데, 먹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엄마가 직접 해줬던 건데… 그거 이름이 뭐더라.”

호정이 자신의 부모 앞에서 티 내지 않았으니, 자신도 기꺼이 그 같잖은 연기에 동참해줄 생각이었다. 재영은 굳은 표정으로 들뜬 목소리를 냈다. 억지로 지은 미소에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재영은 눈앞에 보이는 벽을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거… 이전에 호정이가 집에 왔을 때… 소윤 이모가 엄마가 해줬다고 했던 건데. 양파 얇게… 네, 응. 그거 맞는 거 같은데. 아, 엄마가 해줬던 게 아닌가. 누가 해준 거였죠?”

재영은 떠오르는 아무 단어나 무작위로 뱉어냈다. 벽을 짚은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하얗게 저려올 때쯤 누군가 벽을 짚은 재영의 손을 끌어내려 감쌌다. 차갑게 식었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타인의 손에 의해 다시금 뜨거워지고 있었다. 재영은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지하로 내려간 줄 알았던 윤 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재영의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세요?”

재영은 고개를 들어 윤 비서를 올려보았다. 윤 비서는 벽을 짚느라 하얗게 질려있던 재영의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감싸 주물렀다. 재영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윤 비서에게 내밀었다. 윤 비서는 휴대폰을 멀뚱히 보기만 할 뿐, 다시 재영의 손을 주무르는 데만 집중했다. 재영이 피식 웃고 나서야 윤 비서가 멍하던 정신을 차리고 재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도련님이 무슨 선택을 하시든 따릅니다.”

재영의 손을 주무르던 윤 비서의 손이 차츰 느려졌다.

“알아요.”

“도련님이 누굴 죽여 달라고 하시면 반드시 죽일 겁니다. 반대로 살려달라고 하면 제 목숨과 바꿔서라도 살릴 겁니다.”

재영은 고개를 꺾어 윤 비서를 빤히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당연히 알았다. 다만 재영은 윤 비서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보고 싶었다. 윤 비서가 오롯이 자신의 생각을 뱉고 진심을 말하는 순간이 언제 또 있던가 생각하니 이 모습이 더욱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저보고 죽으라고 하신다면, 저는 당연히 죽을 겁니다.”

“그럴 리가요. 농담하세요?”

재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윤 비서와 눈을 맞추었다.

“윤 비서님은 아빠가 그 좆같은 병원에서 주워서 저한테 직접 주신 거예요. 아빠가 준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기도 하고, 저한테 제일 필요한 거기도 하고요.”

재영의 손을 바쁘게 주무르던 윤 비서의 손이 더욱 느려지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윤 비서는 깊게 숨을 내쉬고 재영의 볼에 자신의 왼손을 얹었다. 재영은 멀뚱한 눈으로 그런 윤 비서를 보았다. 윤 비서의 커다란 손에 얼굴의 반이 담겼다.

“…뭐든 다 대신해드릴 테니까, 지금처럼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그건 제가 대신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 지금 하나도 안 슬퍼요.”

재영은 고개까지 숙이며 웃다가 다시 윤 비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우린 안 슬프잖아요.”

재영은 장난치듯 윤 비서의 이마 앞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비서님도 나도. 둘 다 여기가 고장 났잖아요.”

“안 웃깁니다.”

윤 비서가 재영의 눈을 피하며 답했다.

“도련님은 고장 난 게 아닙니다. 고장 난 건 접니다. 전기를 하도 맞아서.”

윤 비서는 실없는 농담이라도 한 사람처럼 입을 실룩이다가 다시 굳은 얼굴로 재영과 눈을 맞추었다.

“본가까지 도련님 모셔다드린 후에 이호정 씨 집에 가겠습니다.”라는 말은 부탁과 같았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재영은 결국 윤 비서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에 앉았다.

본가에 가는 건 무언가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부모에게 딱히 더 물을 건 없었다. 다만,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 싫었고 소모적인 해명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 호정이 했던 대로 정상인의 삶을 사는 척 연기는 해야 했다. 호정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호정과 했던 통화에서 자신의 부모와 호정이 보인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더 캐묻는 게 오히려 의심을 사는 꼴이었다.

“넌 왜 쉬운 게 하나도 없어?”

재영은 휴대폰을 열어 호정과 찍었던 사진을 차례로 넘겨보았다. 호정은 웃고 있었다. 다음 장도, 그다음 장에도 여전히 호정은 웃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 선 호정은 늘 웃고 있었다. 재영은 눈치 없이 웃고만 있는 호정의 볼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아무리 눌러도 전혀 옴폭해지지 않는 하얀 볼이 야속했다.

“애기야…….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재영은 만져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호정의 눈 밑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보고 싶었다. 세상에 보고 싶은데 당장 볼 수 없고, 자신의 것인데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있다는 걸 재영은 처음 알았다. 재영은 호정의 눈 아래를 더듬던 손을 내리고 휴대폰을 껐다.

나는 생각보다 인내심이 길지 않아. 며칠이 지나면 나는 다시 네 아빠가 누운 병실을 찾아가게 될지도 몰라. 그때는 더 견고하고 틈 없는 계획을 세우게 될 거야. 그러니까 반드시 그 전에 돌아와.

재영은 청자가 없는 말을 속으로 뱉었다. 호정이 돌아오지 않는 한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호정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병을 고백하고 받아주길 기대한 사람도 호정이 유일했다.

“이호정.”

지금 당장은 유일해 보이는 호정이지만, 그런 호정의 대체재도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호정을 대신할 존재는 반드시 생길 테고, 재영은 충분히 그 대체재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호정이 죽은 것도,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유일한 그 존재가 호정뿐이었다. 그 유일한 건 반드시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재영은 사무실의 일이 끝나면 본가가 아닌 호정의 집을 찾았다.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직원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쉴 새 없이 일만 했다. 호정의 집수리를 맡긴 인부에게 보다 높은 금액을 쳐주는 대신 빠르게 새시를 갈아달라고 했다. 덕분에 그 주 주말이 지나기 전 티 나지 않게 집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일만 했지만, 재단의 일이 마치 아무런 소득 없는 일처럼 귀찮게 느껴졌다. 단조로운 일상을 혐오했던 재영은 이제 아침에 눈을 떠서도 호정의 방 천장을 오랫동안 멍하니 응시하곤 했다. 일이 귀찮게 느껴지는 것도, 호정의 방에서 잠들어 늦잠을 잔 것도 모두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호정은 욕실 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안을 살폈다. 집에서 묘하게 이질감이 들었다. 주말에 엄마가 집에 왔다 간 걸까 생각했다. 자세히 보면 이전과 변함이 없는데 느낌은 웬일인지 처음 들어온 곳처럼 생경했다. 문득 호정이 불안해 보인다던 의사의 말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진짜 내가 먼저 미친 거 아니야.”

정상인도 재영의 옆에 있으면 미쳐버린다는 의사의 말이 진짜라면. 호정은 세면대 앞 거울을 보았다. 변함없는 자신의 얼굴과 표정이 거울에 비쳤다. 거울에 묻은 습기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너무 예민해지지 말자. 호정은 다짐하듯 그 말을 되뇌었다.

나머지 옷을 벗어 바구니에 던졌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었다. 물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한숨이 뱉어지는 텀이 더 짧은 느낌이었다. 텁텁한 입을 헹구고 젖은 머리 위를 수건으로 덮었다.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빳빳하게 마른 새 수건으로 아래를 가렸다. 화장실에서 나와 시원한 물로 메스꺼운 속을 달랬다. 주치의를 만난 게 실수였나 생각하는 사이 잔에 남은 물이 모두 사라졌다.

씻고 나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금세 피곤해졌다. 불시에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호정은 기지개를 켜고 뻑뻑한 눈을 비볐다.

꽉 닫힌 자신의 방문을 보았다. 혹시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호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래를 가린 수건을 바짝 조이고 방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에 귀를 붙이고 숨을 죽였다. 안은 그저 적막할 뿐 별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을 때 호정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하.”

정말 의사의 말대로 자신이 이미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사람 같았다. 당연히 방 안은 이전과 다름없이 비어 있었다. 이 집에 재영이 있을 리 없었다. 괜한 긴장감에 떨리던 심장을 아플 정도로 세게 누르고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건 망상이었다. 안도감에 터진 한숨인지 실망감에 터진 한숨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호정은 옷장에서 가장 편해 보이는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문득 발로 딛고 있는 바닥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그새 엄마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방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보일러를 켜두었는지 바닥에는 미지근한 미열이 남아 있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 몸을 눕혔다. 침대에 눕자 그렇지 않아도 쏟아지던 졸음이 밀물처럼 삽시간에 밀려들었다.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졸린 눈을 끔벅거릴 때였다.

“…어…? 하…….”

호정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다가갔다. 테이프 자국이 연하게 남은 거울의 가운데를 문질렀다. 붙여두었던 칩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으로 떨어졌을까 둘러보았지만 바닥 그 어디에도 칩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엄마와 재영. 둘 중 하나가 거울에 붙은 칩을 떼어냈을 것이다. 아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었다. 분명 재영일 게 뻔했다.

“네가 집까지 들어왔다는 걸 이렇게 알리면… 나 이제 여기도 못 있잖아.”

호정은 중얼대며 방 안을 살폈다. 벗어두었던 모자를 쓰고 침대로 가 누웠다. 이제는 정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을 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을 땐, 아마도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을 잤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들었다. 결코 꿈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재영이 보이는 듯했다. 자신이 바라던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꿈속의 재영은 호정의 볼을 아주 천천히 어루만졌다.

네가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의 너는 나를 사랑했었느냐고.

지금의 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고.

호정은 그렇게 묻고픈 걸 간신히 삼켜냈다. 따뜻한 바닥의 열기가 침대까지 끼치는 듯했다. 호정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깊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점심때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새벽에 추워 발 아래까지 내렸던 이불을 무의식에 끌어당긴 모양인지 이불이 어깨선까지 덮여 있었다. 호정은 느리게 이불을 끌어 내렸다. 뒤척이며 잤는지 모자도 벗겨진 채였다. 냉장고를 채운 물을 꺼내 마른 목을 축였다.

가벼운 샤워 후 가방의 돈을 전부 챙겨 집을 나왔다. 수술을 했던 정형외과에 들러 수술 경과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별다른 부작용이나 잘못된 점은 없다고 했다. 호정은 멀뚱히 눈만 깜박거렸다. 의사는 호정의 눈치를 살피다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더했다. 표정과 말투가 덤덤해 다행이었다. 호정은 새 붕대를 감은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이제야 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제는 별로 안 아파요.”

“여전히 아프지. 학생이 아픔에 무뎌진 거고.”

의사는 큰 뿔테안경을 올려 쓰고 호정을 보다 웃었다. 의사는 아이를 어르듯 호정의 볼을 톡 건드렸다. 예고 없이 찾아든 손길에 호정이 뒤로 물러섰다. 의사는 그런 호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조심해요. 세상에 나쁜 사람 많은 거 알죠?”

“…네.”

“의심하면서 살면 피곤한데, 결과적으로는 편해.”

호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잔잔히 미소를 지어보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건물을 나오자 빠른 템포의 음악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호정은 길거리를 채울 정도로 크게 음악을 틀어놓은 가게를 올려다보았다.

휴대폰 판매점의 직원이 호정과 눈이 마주치자 빙긋 미소 지었다. 호정은 후드를 바짝 당기고 휴대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의심하면서 살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호정은 아무런 의심 없이 직원이 추천하는 기종의 휴대폰을 구매했다.

“감사합니다.”

여태 쓰던 배열의 번호와 완전히 다른,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새 번호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바로 사용하시면 돼요.”

“네.”

가게를 나오며 가장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병원으로 갈 거라는 말에 엄마는 조금 안심한 듯 보였다. 여행 간다더니 고작 주말만 지내고 돌아왔냐는 말에도 호정은 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나름은 꽤 긴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다.

“엄마. 혼자 있어?”

호정은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엄마는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아빠랑 같이 있지.”라는 뻔한 답을 해왔다.

호정은 병실에 들어서서 아빠의 얼굴부터 살폈다. 아빠는 여전히 멀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는 주기적으로 손수건을 꺼내 아빠의 입꼬리에 고인 하얀 침을 닦아냈다. 호정은 간이의자에 앉아 막막한 심정으로 자신의 부모를 번갈아 보았다.

“너보다 재영이가 더 자주 오는 거 알지?”

“알아. 몇 번이나 말했잖아.”

“알기는… 알면 좀 자주 와. 아빠도 너 보고 싶을 거야.”

엄마는 괜히 아빠 핑계를 대며 호정을 붙들었다. 아빠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보다 재영의 이름이 더 깊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호정은 멀뚱히 앉아 창밖을 보았다. 무릎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절뚝이는 게 티 날까 엄마 앞에선 일부러 더 신경을 써 걸었다.

“참. 재영이 귀여운 거 말해줄까?”

귤껍질을 까던 엄마가 문득 재영이 생각난 듯 웃으며 호정을 바라보았다. 호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연락 오면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그러는 거야. 무슨 몇 년 못 본 사이처럼. 오히려 내가 저보다 너를 더 못 봤는데.”

엄마는 유난스럽게 웃어댔지만, 호정은 어색한 웃음마저 더 지을 수 없었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뻑뻑한 눈을 비비는 것조차 버거웠다.

“어머. 오늘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정은 엄마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응시했다. 느닷없이 쏟아진 빗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호정은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눈꺼풀을 비볐다.

“엄마. 나 요즘 왜 이렇게 자주 졸리지?”

“여행 가서는? 여행 가서도 잠만 잤어?”

호정이 미소 지었다. 모텔에서 꽤 깊게 잠들었던 자신이 떠오른 탓이었다.

“유난은. 요즘에 뭐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도 있었어? 너 스트레스 받으면 내리 잠만 자잖아. 아기처럼.”

“내가 스트레스는 무슨.”

호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여전히 무거운 눈을 비볐다.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넘기는 엄마의 얼굴이 흐려지다가 금세 선명하게 돌아왔다.

“혼자 여행간 것도 그렇고, 걱정돼서.”

웅웅대며 귀를 울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호정은 고개를 느리게 흔들었다.

병원을 나온 호정은 어디로 가야할까 고민했다. 어디도 답이 아닌 것 같았다.

‘사이코패스는 절대 기다리지 못할 겁니다. 천만 분의 일로 기다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시간은 정상적인 우리의 시간과는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하루가 그들에게는 일 년, 혹은 십 년처럼 더디게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고작 하루 기다린 걸로 왜 이러나 싶겠지만 그들은 정상인의 십 년을 기다린 거와 같다고 느끼니까요. 가끔 사이코패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다그칠 때가 있죠. 우리 기준에선 그게 5분이지만 그들에겐 그게 5시간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한… 재영.”

호정은 재영의 이름을 읊조렸다. 재영을 보지 않은 지 얼마가 지났는지 계산했다. 재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도 생각해보았다.

엄마의 입에서 재영의 이름이 나왔을 땐 비참하게도 안도하고 말았다. 재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들뜬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호정은 새 휴대폰을 만지작대다 병원 앞에 길게 줄을 잇고 선 택시에 올랐다.

“신보암동 교차로에서 위쪽 골목으로 가주세요.”

“네.”

기사에게 주소를 말한 뒤 휴대폰을 켰다. 아직도 선명한 11자리의 번호를 누르고 깊게 숨을 뱉었다. 심호흡이 무색하게도 전화는 긴 수신음에도 불구하고 연결되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호정은 지금 너희 집으로 가고 있다는 연락을 재영에게 남기고 휴대폰을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택시에 타기 전 맞았던 빗물이 콧등을 타고 흘렀다.

재영의 집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재영의 엄마는 직원 대신 직접 우산을 들고 나와 호정을 맞이했다. “별채에서 재영이랑 만나기로 해서요.” 호정은 우물우물 거짓말을 하며 재영 엄마의 눈을 피했다. 다행히 재영의 엄마는 호정의 거짓말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이 왔느냐는 걱정이 잠시 스쳤고 곧이어 요즘 재영이 통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는 말만 반복했다.

“잘은 모르지만, 어제도 우리 경호원이 재영이 별채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너무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호정이가 와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재영의 엄마는 여전히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썼다. 말을 높이는 것도 낮추는 것도 어려운 듯 보였다.

새로 지은 별채의 내부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별채 안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재영의 엄마는 별채의 입구까지 따라오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결국 별채 안으로 들어온 건 호정 혼자였다. 재영의 엄마는 우산을 꼭 쥔 채 어색하게 웃으며 뒤돌았다. 호정은 처음 이 집에 왔던 날, 마당에서 보았던 그녀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엄마 손바닥을 찔렀습니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요.’

“그게 진짜 사실이면. 아들이라도 무서울 만하지.”

피아니스트인 엄마의 다른 곳도 아닌 손을 찌르는 아들이라니. 호정은 중얼대며 가장 먼저 침실과 붙은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안은 확실히 이전보다는 덜 화려했다. 편백으로 지은 큰 탕은 여전했지만 그 위로 바람에 나부끼며 엉겨 붙은 부적은 이제 더 보이지 않았다.

침실을 빙 두르고 있던 방문의 개수도 눈에 띌 정도로 줄었다. 두 개의 방문이 보였다. 호정은 방문을 열어보려다 손을 거두었다. 두 눈으로 확인하는 건 여전히 두려웠다.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겁이 나는 게 가장 큰 이유였고, 영국에서 바닥에 흩뿌려지던 USB와 붉은 와인의 잔재가 아직 머리에 남은 게 두 번째 이유였다.

“…후.”

재영의 방에선 여전히 재영의 향이 났다.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 * *

재영은 진행되는 회의도 잊은 채 휴대폰에 뜬 낯선 번호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처음 보는 번호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휴대폰 화면에 올린 손가락을 쉽게 뗄 수 없었다. 회의를 총괄하는 자신의 아빠가 그런 재영을 흘깃 쳐다보고서야 재영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회의에 집중하는 체했다.

“…내년에는 입학 심사 기준을 올리려고 합니다. 보다 특별한 자녀들이 입학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게…….”

재영은 교장의 말을 흘리며 볼펜을 들었다. 심이 나오지 않은 뒷부분으로 회의지 위에 호정의 이름을 써넣었다. 이호정, 이라는 세 글자가 회의지 위에 투명하게 쓰였다. 재영은 볼펜으로 종이 위를 툭툭 두드렸다. 다시 휴대폰이 미세하게 떨렸다. 재영은 아빠의 눈을 피해 휴대폰을 켰다.

[나 너희 집으로 가고 있어. 집에 있어?]

“…하아.”

웃음이 나왔다. 끝까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었다. 재영은 계획을 세우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을 세웠다면 호정의 이번 행동으로 또 계획은 틀어졌을 것이다.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뒷자리에 걸어둔 재킷을 들었다. 이사들이 멀뚱한 얼굴로 재영의 행동을 쫓았다. 재영의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재영아. 왜 그러니?”

“죄송해요.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재영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회의실 입구에 서 있던 윤 비서가 다급히 다가와 재영을 부축했다. 재영의 아빠는 윤 비서를 보며 눈빛으로 답을 종용했다. 이사들이 만족할만한, 이해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차례였다. 윤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늘어진 재영의 어깨를 붙들었다.

“며칠 전부터 몸이 계속 안 좋으셨는데. 이번 제안서 준비로 며칠이나 아예 못 주무셨… 워낙 신경을 많이 쓰셔서요.”

윤 비서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말끝을 줄였다. 재영의 아빠가 고개를 끄덕인 덕분이었다. 다행히 재영을 보는 이사들의 시선이 측은한 눈빛으로 변했다.

“좀 전의 추가 액티비티 제안서가 완벽하긴 했죠.”

이사 중 한 명이 재영을 다독이듯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회의 내용은 반드시 다시 검토하고 확인하겠습니다.”

재영은 회의실을 벗어나는 마지막까지 이사진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인사했다.

재영은 차에 오르자마자 휴대폰 속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새로운 번호였다. 굳이 새로 받은 번호를 자신에게 알려줬다는 건 정말 다시 돌아온다는 걸까, 기대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집이라면… 엄마가 있을 본관보다는 별채가 나았다. 재영은 호정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길 바랐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서 호정을 보고 싶었다.

“아침에 물은 마셨을 테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졸음이 쏟아질 텐데도 나한테 왔다는 건, 분명 좋은 의미겠죠?”

재영의 물음에 윤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의미보다는 그러길 바란다는 의미가 강했다. 재영은 호정의 냉장고에 든 물마다 수면제를 타두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덕분에 어젯밤 호정을 보러갔을 때도 호정은 자신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자고 있었다.

꾸물대던 손이 자신의 검지를 끌어 꼭 쥐었을 때, 재영은 참지 못하고 호정의 볼과 목에 입을 맞추었다. 호정에게서는 이제 더는 자신의 향이 나지 않았다. 재영은 맡아지지 않는 향을 찾기 위해 더욱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난 너를 도운 거야. 네가 더 깊게 잘 수 있게.” 재영은 그렇게 읊조리며 호정의 모자를 벗기고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호정의 엄마는 호정이 힘들 때마다 깊게 잠을 잔다고 했었다. 그 여자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불필요한 것들 투성이었지만, “자고 나면 그래도 좀 나아져.”라는 마지막 말은 꽤 마음에 들었다.

재영은 호정의 마른 입술 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차갑게 식은 혀를 옭아매자, 호정은 무의식 속에서도 입술을 더욱 벌려주었다. 그런데도 호정의 혀는 묘하게 자신을 밀어냈다.

두 혀가 엉켜들고 츱츱 얽히는 물소리가 방을 메웠다. 더운지 이불을 밀어내는 호정의 손을 잡아 모든 틈을 채우듯 깍지를 끼웠다. 지그시 시트를 밀며 눌러진 제 손등에 호정이 눈을 찌푸렸다.

“…호정아.”

재영은 입술을 떼고 호정의 젖은 입술을 자신의 손으로 아프지 않게 닦았다. 잠든 호정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재영은 그 방을 나설 때까지도 잠든 호정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호정의 집 앞까지 나왔을 땐 발걸음을 떼기 더욱 힘들었다. 그새 조금 낯설어진 호정의 얼굴에 서운한 기분마저 들었다.

재영은 어제의 그 서운했던 느낌을 상기했다. 오늘은 호정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고 싶지 않았다.

재영의 차가 들어서자 별채의 차고지 문이 열렸다. 재영은 차에서 내려 길게 이어진 계단을 올려보았다. 이 계단 끝에 호정이 있었다. 이곳에서 어제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별채는 부모가 자신을 외면하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하고 싶은 모든 걸 해도 된다는 건 방관인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걸 해도 되는 그 별채에 호정이 있었다. 재영의 옆으로 윤 비서가 붙었다.

“혼자 갈게요.”

윤 비서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5권에서 계속됩니다.>

비정상인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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