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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활착하는 달(2)(5권) (14/22)

10. 활착하는 달(2)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이 이마와 코끝, 인중을 차례로 간질이며 스쳐갔다. 간지러움에 미간을 좁히며 눈을 떴을 땐, 눈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호정은 눈을 가린 그림자를 보기 위해 눈을 비볐다.

“호정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호정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지금 자신의 이마와 코끝과 인중을 간질이는 게 바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자신이 떠나고 싶었던 동시에 그 마음만큼이나 그리워했던 재영의 손길이었다.

“우리 애기. 진짜 왔구나.”

한결같았다. 목소리가 여전히 다정했고 부드러웠다. 중간 중간 스민 웃음은 다감했다. 호정은 내심 재영이 마지막에 보였던 그 무서운 눈과 손길로 자신을 대하길 바랐다. 그러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완전히 재영을 떠날 수 있게 될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눈물이 나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나 진짜 미친놈 같지…….”

호정이 중얼댔다. 재영에게서 도망쳐 결국 돌아온 게 재영의 집이었다. 심지어 그 방에서 자신도 모르게 잠까지 들었다는 게 스스로도 한심스러웠다.

“졸렸잖아. 더 자도 괜찮아.”

재영의 손이 인중을 지나 호정의 입술을 만지작댔다. 차라리 집에서처럼 모자라도 썼어야 했다. 그랬으면 이렇게 엉망으로 구겨지고 있을 얼굴을 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종아리까지 내려가 있던 이불이 다정한 손길을 따라 어깨까지 올라왔다.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목소리보다 더 다정했다.

“너희 엄마가 그랬어. 너 어릴 때부터 힘들면 오래 잤다고.”

깊게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 나오려던 눈물이 멈춰져 다행이었다. 재영의 손이 호정의 볼에서 작은 호선을 그리며 돌았다.

“왜 도망갔어?”

재영이 물었다. 호정은 두통이 오려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네가 가라고 했잖아.”

“그건 네 무릎이 멀쩡할 때 이야기지.”

다정한 목소리가 멎었다. 호정은 자신의 어깨를 덮은 이불을 끌어내렸다.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사람 무릎에 그딴 걸 박… 미친 새끼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자신을 올곧게 보고 있는 재영의 얼굴이 보였다. 굳게 닫혀있던 재영의 입술이 벌어졌다.

“잘 기다렸는지는 왜 안 물어 봐? 그게 더 중요한 거야.”

“한재영. 나 지금 너랑 말장난하는 거 아니야.”

말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었다. 호정은 수사적 질문을 던지는 재영의 방식과 수에 더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단호한 호정의 말에 재영이 미소 지었다.

“주치의가 나 같은 사이코패스랑 대화할 때는 그런 식으로 대화하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말투는 다시 살갑고 다정한 이전으로 돌아왔다.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마찬가지로 따뜻하기만 했다. 호정은 의사가 해준 재영에 관한 말을 상기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혀들었다. 미묘하게 어긋나는 재영의 눈을 쫒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막상 마주한 눈은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의사는 네가 날 죽일 거랬어. 지금 당장이든 나중에든 언젠가는 네가 나를 죽일 거라고.”

“내가?”

재영이 실소를 터뜨렸다. 재영의 눈은 호정을 벗어나 가파르게 허공을 향했다. 살짝 올라갔던 고개가 비틀렸다. 주치의를 떠올릴 때마다 재영은 사형선고를 받았던 날의 소크라테스의 심정을 이해했다.

당시 아테네에 살던 대부분의 시민이 무지했다. 그들은 하늘이 왜 하늘인지도 몰랐고, 진리나 정의에도 도통 관심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그 무식한 배심원들의 다수결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사는 것에 대한 미련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으나 다만, 자신의 죽음을 판단한 자들이 너무 무식한 자들이라는 것에 한탄했다. 그러다 곧 그는 무식한 자들이 판단한 것에 의미나 무게를 두지 않기로 했다.

아테네의 중앙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보던 소크라테스. 재영은 주치의가 자신을 볼 때마다 마치 소크라테스 옆에 나체로 선 기분을 느꼈다. 경멸감. 주치의가 자신에게 보이는 감정은 오직 그거 하나여서 더욱 명확했다.

“하, 씨발새끼…….”

호정이 어깨를 움츠렸다. 허공을 향해있던 재영의 눈은 다시 빠르게 호정의 눈을 찾아들었다.

“널 죽이고 싶긴 했지만, 지금 마음 같아선 널 죽이기 전에 그 새끼부터 죽일 거 같은데?”

입꼬리는 분명 위를 향했으나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정은 몸을 조금 더 당겨 재영의 가까이에 붙었다. 그새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단단하고 곧았던 풍채도 이전보다는 확연히 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더 세게 물리던 입술이 벌어진 건 그 위로 재영의 손가락이 닿아서였다. 재영은 깨문 호정의 입술을 살금살금 더듬었다.

“이렇게 세게 깨물면 아프잖아. 응?”

동그라미를 그리며 간질이는 손길에 아프게 깨물었던 입술을 풀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너도 내가 널 진짜 죽일 거 같아?”

재영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호정은 반대편 손에 잔뜩 힘을 줘 주먹을 쥐는 재영의 손과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는 손의 괴리감을 느꼈다. 어느 쪽이 진심일까. 가늠되지 않았다. 재영은 잠시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호정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듯 떨리는 눈동자에 호정은 오히려 안심했다.

“내가 진짜 널 죽일 거 같냐고.”

호정은 재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몰라. 답은 너한테 있잖아.”

의사가 말한 재영은 자신이 본 재영이 아니었다. 호정은 자신이 보고 느꼈던 재영만을 생각했다. 재영이 직접 자신에게 설명해줘야 했다. 그래야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사가 말하는 너는 날 죽이겠지. 그런데 내가 본 너는 날 절대 못 죽여. 그러니까 네가 답해봐. 뭐가 넌데. 어떤 게 넌데.”

결국 의사가 본 재영의 모습은 피상적일 뿐 재영 자체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기대가 의사가 말한 피해자의 어리석은 기대일 수도 있었다. 재영은 미간을 좁히고 호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호정은 왠지 재영의 눈이 이전과 달리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좀 전처럼 화를 낼 것 같았는데 재영이 입술을 적시며 입을 다물었다.

“난 네가 아니면 됐어. 의사가 아는 너는 내가 본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 대신 네가 직접 나한테 설명해. 민재, 우리 아빠, 내 무릎까지.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 윤 비서 방에서 내가 본 것들이 뭐였는지 전부 다 이야기해.”

허공에 갇힌 듯 멈춰있던 재영의 시선이 호정에게 돌아왔다. 덤덤한 얼굴. 무감각한 표정. 서늘한 눈동자. 일직선으로 굳어 조금의 미동도 없는 입꼬리와 하나의 선으로 곧게 떨어지는 턱선. 호정은 이토록 낯선 재영의 얼굴에서도 이전의 재영을 떠올리고 있었다.

재영은 다정하던 손길을 거두고 호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재영의 깊은 눈동자에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재영의 두 손이 호정의 허리를 파고들어 안았다.

“김민재가 죽은 게 그렇게 억울해? 음주운전한 너희 아빠가 다친 게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파? 무릎, 만약 다치지 않았었다면. 뭐, 기쁜 마음으로 군대라도 갔을 거야?”

재영은 호정의 어깨에 턱을 붙인 채로 말했다. 재영의 숨이 귓불을 타고 지났다.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답해줄 수도 있어.”

호정은 재영의 팔을 세게 잡아 밀쳐냈다. 재영의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해도 도저히 그 안에 든 감정이 무엇인지 읽을 수 없었다. 재영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꺾었다. 잔잔하게 머무른 미소에 호정의 표정이 굳어졌다.

“민재가 새벽에 잠시 보자고 했어. 졸업식 이후로 몇 번이나 연락 왔었어. 친해지고 싶다고. 그날도 당연히 같이 놀자는 건 줄 알았고. 거절할까 했는데 몇 번이나 그러는 것도 미안해서 윤 비서를 대신 보냈어. 윤 비서는 민재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고만 했는데 트레일러가 민재 오토바이를 박은 건 다음 날 나도 민재 엄마 문자 받고 안 거야.”

재영이 멀뚱한 얼굴로 다시 호정의 팔을 끌어당겼다.

“호정아. 나 안아줘.”

호정의 몸이 맥없이 끌려왔다. 재영은 그런 호정의 몸을 깊게 안았다.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호정에게서 다른 향이 난다는 게 못내 서운했다.

“너희 아버지 일은 나도 잘 몰라. 고속도로에서 윤 비서가 몰던 차가 고장이 났는데… 1차선이라 위험할 것 같아서 비켜 있다가 사고를 목격했대. 너희 아버지가 윤 비서님 차를 피하려다 사고가 났다는 것만 추후에 들었어. 그때 태블릿PC로 사고자 정보를 보고서야 사고 트럭이 너희 아버지인 걸 알았고… 그래서 도왔던 거야. 너한테는 굳이 전달할 일이 아니라 못했던 것뿐이고. 네 무릎은…….”

재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느린 숨소리가 방을 채웠다.

“무릎은, 알잖아. 그날 노숙자가 내 별채에 불냈던 거. 화재현장에서 난 네 옆에 있지도 않았고. 그건 정말 사고… 사고인데… 하아…….”

말을 잇던 재영이 못내 불편한 기색으로 자신의 이마를 비볐다.

“호정아.”

재영은 자신의 품에 안긴 호정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너도 알잖아. 씨발…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재영이 중얼댔다. 호정은 버둥거리지 않았다. 품을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재영이 다음 말을 잇길 기다렸다. 곧 재영이 몸을 떼 호정과 눈을 맞추었다.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호정은 약하게 느껴지는 악력에도 재영을 벗어나지 않았다. 더욱 곧은 시선으로 재영을 쳐다봤다.

“씨발. 김민재 같은 쓰레기가 죽은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그 새끼가 죽은 게 언제인데 아직도 김민재 타령이야. 고작 네 친구라서? 네 친구면 그런 쓰레기가 사람들이랑 같은 숨을 마시고 뱉고 그렇게, 아닌 척 살아도 된다는 거야? 그래? 네 친구인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죽으면 안 되는데. 죽어야 될 새끼라서 죽은 건데 뭐 나한테 지금 그 새끼를 살려라도 달라는 거야? 관이라도 꺼내올까? 그래야 그 새끼 이야기 그만둘 거야?”

엉망으로 구겨진 재영의 얼굴이 도드라졌다. 호정은 그런 재영의 표정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거칠어진 재영의 숨이 호정에게까지 전해졌다.

“너. 김민재, 그 개새끼가 몇 명 인생을 조졌는지는 알아? 진짜 김예지, 그 한 명만 당했을 거 같아?”

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묵묵한 얼굴로 재영의 팔을 잡아 밀어냈다. 재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호정의 어깨를 더욱 센 힘으로 붙들었다.

“너나 모르는 척 그만해. 그 새끼 죽고 너도 얘기 들었잖아. 어떤 새끼였는지.”

“그래서. 네 논리면 민재는 그런 새끼니까 죽여도 된다는 거야? 네가 뭔데.”

재영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게 먼저일지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뱉는 게 우선일지 고민했다. 다시 고개를 들어 호정을 바라보았다. 호정은 재영의 눈을 마주하고도 피하지 않았다.

“…하, 씨… 너.”

재영은 호정의 얼굴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자고 있는 걸 볼 때도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보니 더 명확해졌다. 자신이 보지 못한 새에 호정의 얼굴이 더 예뻐졌다. 살이 빠진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눈 밑을 살뜰히 채운 색도, 옅은 주홍빛의 입술도 선명했다. 재영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왜 더 예뻐지고 생기 있어진 거지? 내가 없는 사이에, 왜? 내가 없는데, 어째서.

“…내가 김민재를 왜 죽여… 호정아. 나 아니라니까?”

호정의 눈을 바라보던 재영이 일순간 눈을 휘게 접어 웃기 시작했다. 조금 쑥스러운 듯도 보이는 웃음이었다. 목소리 역시 순식간에 익숙한 어조로 돌아왔다. 한없이 다정하고 고요한 목소리에 호정은 척추부터 뒤통수까지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재영은 다시 이전에 호정이 알던 재영처럼 다감한 손길로 등을 안아 쓰다듬었다. 호정의 어깨에 기댄 볼이 축 늘어져 붙었다. 호정은 이를 세게 깨물었다.

“장난이야. 응? 내가 말했잖아. 김민재가 새벽에 보자고 했다니까. 걔는 오토바이 탈 때 헬멧을 잘 안 썼나봐. 습관인지 버릇인지… 귀찮고 새벽이라서 나 대신 윤 비서가 대신 나갔어, 진짜. 트레일러 기사가 조는 바람에 김민재를 박은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다음 날 연락 보고 알았다니까. 그 노트에 기일이 쓰여 있던 건 만나기로 한 날이라 적어둔 거야. 나도 마음 아파.”

재영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금세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여전히 호정의 허리를 붙든 손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호정은 재영의 품을 살짝 비켜났다. 표정을 놓쳐선 안 됐다. 조금의 흔들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영은 잠시 눈을 피했다가 다시 호정을 지그시 응시했다.

“너희 아버지 매일 일 마칠 때마다 그 시간에 술 마시고 운전했대. 4차선 도로에서도 화물차로 늘 1차선을 달렸고. 그러다 사고가 난 게 뭐 대단히 이상하고 괴이한 일은 아니잖아?”

호정의 볼이 일그러졌다. 재영은 차가운 얼굴로 호정을 빳빳하게 응시했다. 호정의 빨개진 눈이 시야에 들었다. 재영은 손을 뻗어 열이 오른 호정의 볼과 눈 아래를 문질렀다. 호정은 입술을 다문 채로 그런 재영의 손을 아프게 쳐냈다.

“그래. 다 거짓말인 거… 이제 알겠어.”

밀쳐진 재영의 손이 허공에 떴다.

“그때 말했던 그게 이 모든 네 행동의 이유야? 그냥 나를 가지고 싶어서? 내가 너만 보게 하려고?”

재영이 입술을 적시며 호정의 얼굴을 살폈다.

“그럼 그거 말고 네가 듣고 싶은 말은 대체 뭔데. 원하는 대로 다 말해줄 테니까, 네가 말해봐.”

호정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더는 똑바로 재영을 볼 자신이 없었다. 도망가 있던 내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하는데도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어깨는 밉게 부들댔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은 더더욱 아니었다. 몇 번이나 속으로 되감고 연습했던 게 쓸모없어지게 되어버렸다.

“충분히 좀 전처럼 그렇게 거짓말해줄 수도 있어. 네가 원하는 말만 해줄 수도 있다고. 그런데, 너한테는… 너한테만큼은 싫어. 호정아.”

재영의 깊고 고요한 한숨소리에 호정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마저 들었다.

“평생 이 짓은 못 해. 이제는 못 하겠어.”

재영은 차분해진 눈으로 호정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떠 있던 손이 자신의 허벅지로 내려갔다가 시트로, 그러다 곧 호정의 허벅지와 허리를 파고들었다.

“넌 그냥 비겁한 거야.”

원망스러운 눈이 재영을 향했다.

“사이코패스고 뭐고… 씨… 하나도 모르겠어. 책도 보고 의사도 만나봤는데, 아직도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호정의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재영은 호정의 허리를 파고들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내가 아는 건… 그냥 넌 비겁하고 나쁜 새끼라는 거야. 네가 뺏길 것들이 두려워서 너를 드러내지도 못했으면서… 나한테는 이제 그 척조차 못하겠다는 거잖아. 안 한다는 거잖아. 나보고만 다 이해하라는 거잖아, 지금.”

호정을 보던 재영의 눈빛이 좀 전과 달라졌다. 흑색으로 흔들림 없던 눈에 차츰 옅은 빛이 감돌았다.

“왜 나한테만 다 받아들이라는 건데. 왜 나한테는 그 척조차 못하겠다는 건데!”

호정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호정의 젖은 볼과 이마를 향하던 재영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재영은 고개를 잠시 숙였다. 머리에서 무분별하게 솟구치는 단어들과 문장들로 속이 메스꺼울 정도였다. 재영은 자신의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

“왜, 나한테… 나한테만……!”

“…내가 널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면 믿어는 주고?”

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의사의 말과 자신이 알았던 재영과 좀 전의 재영이 혼재했다. 재영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호정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잔잔한 눈동자에 빛이 스몄다. 호정은 팔을 뒤로해 몸을 뺐다.

“거봐. 아니잖아.”

재영이 흐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

호정은 무릎을 세워 침대 위를 디뎠다. 참아지지 않은 눈물이 쏟아졌지만, 그 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호정은 두 손으로 재영의 멱살을 움켜잡아 그대로 시트에 밀쳤다. 재영의 몸이 시트 위로 쓰러지며 침대 전체가 울렁거렸다.

“너는… 네가 한다는 사랑은 그런 식이야?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이 미친 새끼야! 그게 왜 사랑이냐고!”

이를 세게 깨문 채로 부들대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막상 뻔뻔한 얼굴로 그 말을 하는 재영을 보니 화가 났다. 좀 전의 숱한 거짓말들처럼 이 또한 모든 게 재영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

시트 위에 힘없이 늘어진 재영의 손이 호정의 손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호정은 흐릿한 시야로도 끝까지 재영의 손을 응시했다.

“하아…….”

재영이 짙은 한숨을 뱉었다. 자꾸만 빠르게 차오는 눈물 덕에 재영의 얼굴이 흐릿했다. 재영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봐야만 했다. 호정은 재영의 멱살을 움켜쥔 손을 잠시 풀었다. 호정이 눈물을 훔칠 틈도 없이 재영이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재영은 자신의 허벅지에 놓인 호정의 몸을 제 몸 쪽으로 당겼다. 차분한 손길로 아래를 향한 호정의 턱을 움켜쥐었다. 호정은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두 눈엔 눈물이 가득했다.

“우리 엄마도 그날 이후로 너처럼 이렇게 매일 울었어. 이게 그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거야? 내가 고작 정상인이 아니라는 게?”

똑바로 마주한 재영의 눈에서 호정은 묘한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꼈다. 달랐다. 자신이 알던 재영도, 자신이 모르던 진짜 재영의 모습도 아니었다.

“왜 내가 한 건 사랑이 아닌데? 너 같은 사람들. 살면서 사랑이라는 거 수도 없이 정의하면서 살아오는 거 알아. 태어나면서는 당연하게 엄마, 아빠. 학교에 갈 때부터는 선생님, 친구들… 머리 좀 크면 남자친구, 여자 친구. 인간을 만날 때마다 그 관계가 무엇이든 사랑은 이런 거다, 정의하기 바쁘지. 좋아하는 연예인, 존경하는 사람, 위인, 선배, 소설가… 끝도 없이 정의하고 지우고 번복하는 것도 알아. 살면서 몇 백 번도 더 그 대단하다는 사랑. 정의하면서 살아왔다는 것도. 씨발. 나도 다 안다고.”

호정은 자신의 턱을 움켜쥔 재영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단단하게 붙든 듯 보이지만 센 힘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나는 네들 같은 정상인이 아니라서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좆같은 걸 정의해본 거야. 네들이 수도 없이 해왔다는 걸 난 지금 처음 한다고. 너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정의한 이걸, 사랑이 아니라고 네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냐고! 너 같은 정상인들이 정의한 것만 진실이야? 그것만 사랑이야? 내가 정의한 건 왜 사랑이 아닌데. 왜 틀렸는데?”

재영은 호정의 떨리는 입술을 어루만졌다. 당장이라도 안아 입을 맞추고 싶었다. 떨리는 입술 안을 헤집어 이 작은 머리통에 온통 자신의 생각만 가득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영의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의사도 자신의 부모도, 이제는 호정조차 자신의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고만 한다.

재영은 호정의 입술을 다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너 다른 누구한테도 절대 못 보내. 처음부터 내가 주웠고, 내 거라고 해서 데려온 거야. 도와달라고 했던 것도 너였고, 내 집으로 들어온 것도 너였어. 가지고 싶어서 가지면 그게 사랑이 아니야? 그거 꼭 그렇게 고귀하고 고결해야만 하는 거야? 더럽고 구질구질하고 구차하고 집착하고 매달리고, 독점하려는 건 사랑이 아니야? 내가 생각하고 느낀 거는 안중에도 없이, 네 기준에서는 그게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거냐고.”

재영은 숨을 고르듯 느리고 차분하게 숨을 뱉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호흡은 가빠지기만 했다.

“씨발… 그러니까 좀 떠나지 마.”

호정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 자신의 손과 겹쳤다.

“나, 너 기다렸어. 기다리면 온다고 네가 먼저 그랬으니까 약속 지켜.”

호정은 재영의 손을 쳐내며 물었다.

“왜 나를 기다렸는데. 나도, 아빠도, 우리 엄마도 그냥 다 죽여 버리지.”

재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손을 뻗어 호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품에 안긴 호정의 몸에 자신의 향을 묻히는 것만으로 안심이 됐다.

“기다리면 오겠다는 네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온다는 말 같아서.”

이건 거짓이 아니었다. 호정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재영은 아이처럼 호정의 어깨에 볼을 기댔다. 호정이 낮게 한숨 쉬는 소리에 재영은 안도했다. 죽이지 않아서, 호정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왜 내 거짓말을 듣고 싶었는지 알아.”

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자꾸만 자신의 품을 파고들려는 재영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넣어 쓰다듬었다. 재영은 끝도 없이 볼을 비비며 호정을 더욱 안으려 애를 썼다.

“너 나 사랑하잖아. 내가 하는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었던 거잖아.”

호정은 한참이나 재영이 숨을 고르고 차분해지길 기다렸다. 머리카락을 감싸는 손길이 점차 더 느려졌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재영의 숨이 온전히 돌아왔다. 빠르게 떨리던 심장도 본래의 속도로 돌아왔다. 그제야 호정은 천천히 손을 떼 재영과 자신의 몸 사이에 일정한 간극을 만들었다. 재영은 떨어지기 싫은 듯 입술을 일그러뜨리다 겨우 품에서 떨어졌다.

“맞아. 나 너 사랑했어. 사랑하지 않는 놈한테 그렇게… 그렇게는 할 수 없어.”

호정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너는 아니야.”

호정은 재영의 두 볼을 잡았다. 꼿꼿하게 자신을 보는 시선에 눈을 맞추었다.

“내 옆에 있고 싶으면 내가 사랑했던 그 한재영의 모습으로 살아. 그러면 사랑해줄게.”

호정은 재영의 볼을 잡았던 손을 내려 재영의 턱 끝을 살짝 잡아 아래로 내렸다. 고개를 꺾어 벌어진 재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덧대었다. 허리를 감싼 재영의 손가락에 차츰 따뜻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느리고 더디게 재영의 입술 안을 훑었다. 차갑던 입술이 점차 따뜻하게 젖어 들었다. 호정은 맞붙어있던 입술을 떼 재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네가 정의했다는 그 사랑, 믿어줄게.”

호정의 눈빛이 재영을 응시했다. 호기로운 척 말은 뱉었지만 속에선 두려움이 높은 파도가 되어 일렁였다.

재영은 그 눈을 그대로 마주한 채 잠시 말을 멈췄다. 생각이 멈춘 듯했다.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호정의 의도와 생각, 감정을 읽고 싶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읽히던 사람의 마음이 이제는 눈을 마주하고도 무엇 하나 확신이 드는 게 없었다. 재영은 갑갑한 마음으로 목을 죄고 있던 타이를 풀어 바닥에 내렸다. 짜증으로 범벅된 숨을 내쉬었다.

씨발… 그 좆같은 연기를 해야만 날 믿어준다고? 속에선 수없이 단조로운 욕이 반복됐다. 재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맞물린 치아가 아렸다.

“불가능해.”

바닥에 놓인 넥타이를 구둣발로 짓이겼다. 재영은 호정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침대에 눕혔다. 머리에선 왜 호정이 더 예뻐졌을까 하는 생각만 지독스레 되풀이됐다.

“호정아. 나는…….”

재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차분해졌던 숨이 다시 급박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호정은 그런 재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목을 잡아당겨 안으니 재영이 힘없이 끌려와 안겼다. 재영의 몸이 자신의 몸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나로, 한재영으로 네 옆에 있고 싶어. 그거 그렇게 큰 욕심인 거야? 네가 이렇게 질질대며 서럽게 울어댈 만큼?”

재영은 한쪽 볼과 귀를 호정의 가슴에 붙였다. 호정의 심장박동이 듣기 좋았다. 이대로 깊은 잠에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런 한재영을 사랑할 자신이 없어.”

재영아. 넌 지금 어떤 생각을 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호정은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질문을 삼키며 재영의 셔츠를 꼭 쥐었다. 재영을 믿고 싶었다. 호정의 가슴에 볼을 붙이고 있던 재영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본 호정의 얼굴이 단호했다. 진심 같았다.

“왜, 진짜 한재영은 못 사랑하겠어?”

재영은 표정을 굳히고 호정의 얼굴 옆에 팔을 세웠다. 덕분에 밀착되어 있던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간극이 만들어졌다.

“네가 사랑했던 난, 내가 아니라서?”

호정의 얼굴을 자신의 팔 사이에 가두었다. 이렇게 밑에 두면 내 그림자 하나에도 온전히 다 가려지는 주제에. 재영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꺾었다. 그림자가 빗나간 곳에서 호정의 얼굴은 그대로 천장의 미등 빛을 받았다. 재영은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자신의 그림자에 호정을 가두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왜 자꾸 자신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거지? 빛에 익은 살은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왜 저 좆같은 하늘에 얼굴을 들이미는 걸까. 이 그늘에 편하게 누워 온전히 자신만 보고 있으면 편할 텐데.

“넌 진짜 나한테 바라는 게 많다.”

재영이 쓰린 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랬다. 온통 바라는 것투성이인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게 맞는지 재영은 혼란스러웠다. 달래서 웃게 해줘야 할지, 혼내서 버릇을 고쳐야 할지도 늘 헷갈렸다. 속눈썹을 따라 드리워진 그림자가 호정의 눈 밑을 가렸다. 재영은 손을 뻗어 호정의 앞머리를 넘기고 눈 밑을 가린 속눈썹을 간질였다.

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을 피하는 눈길에 재영은 다급히 손을 내려 호정의 손을 잡았다. 호정의 주먹 쥔 손이 자신의 손에 담겼다. 재영은 서운한 얼굴로 호정의 손을 하나하나 펼쳤다.

“너라도 나를 좀……!”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나를 나로 봐주면 안 돼? 틀렸는지 잘못됐는지 그런 판단은 하지 말고. 그냥 나라는 존재 그 자체를.

재영은 뒤에 이어지려던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격앙된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감정은 더 요동쳤다.

“씨발, 진짜… 너는 나를 좀 받아줄 수 있잖아.”

호정은 자신의 손을 펼쳐 잡으려던 재영의 손을 쳐냈다. 재영은 허공에 뜬 자신의 손과 호정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호정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재영은 호정의 표정에 스민 감정을 비로소 읽게 되었다.

혐오. 아니, 실망일까. 어쩌면 자신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듣게 된 순간부터 호정의 감정은 줄곧 이 상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영은 울컥 치미는 화를 느끼며 호정을 응시했다.

“너 아직 모르나 본데, 널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

“비켜.”

호정이 표정을 찌푸리며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재영은 호정의 두 손을 한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두 팔이 잡힌 채 올려졌다. 호정이 몸을 버둥거리며 재영을 노려보았다.

“한재영!”

방법이야 만들면 만들수록 많아지는 법이다. 지금처럼 손을 쳐낸다면 두 번 다시는 내 손을 쳐내지 않게 묶으면 된다. 몇 번의 실패는 더욱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을 제시해준다. 호정이 자신을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방법은 더욱 간결해질 테고 호정이 거부하면 할수록 방법은 더 위태로운 가지를 치고 사방으로 늘어갈 것이다.

애초에 호정을 가질 방법이야 많았다. 흠집 없이 데려오기 위해 공을 들였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자신답지 않았다. 재영은 이러한 자신답지 않은 짓이 이 계획을 실패로 이끌었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널 상처 안 내고 가지겠다고 하는데, 좀 순순히 따라주면 안 돼? 너는 뭐가 그렇게 다 어려운데?”

재영은 한 손으로 호정의 손을 강하게 결박해 잡았다. 호정은 처음으로 자신과 재영이 지닌 힘의 차이를 명확히 느꼈다. 언제나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였다. 손길은 말투보다도 더 살갑고 다정했다. 가끔 고압적인 순간은 있었지만, 그래도 본질은 녹녹하고 보드라웠다. 여태 재영에게 무르고 매끄러운 손길만을 받아왔던 호정에게 이토록 거친 재영의 손길은 낯설었다.

“으으…….”

호정이 몸을 떨었다. 순간 공포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눈은 짙게 물들어 마주한 눈동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호정은 무릎을 세워 재영의 가슴을 밀쳐냈다. 재영이 호정의 발목을 잡아 내렸다.

“왜? 가짜 한재영은 사랑한다면서 진짜 한재영은 씨발… 보는 것도 좆같아? 이렇게 밀쳐낼 정도야?”

“으윽, 읏.”

재영은 호정의 무릎을 비틀어 옆으로 눌렀다. 재영의 무릎이 호정의 허벅지를 거칠게 짓눌렀다. 호정의 입에서 악 소리가 터졌다. 허벅지의 근육이 으깨지는 기분이었다. 재영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혀 잠시 숨을 골랐다. 왜 이렇게 제멋대로 큰 거지, 생각할 새도 없이 호정의 청바지 버클로 손이 갔다.

“칩도 빼놓고 사람 골탕 먹인 거로는 모자란 거지? 나를 아주 반병신으로 만들어야 속이 후련하다는 거지, 지금?”

풀린 동공 그 어디에도 호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자신이 바라던 재영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았던 재영은 더더욱 아니었다. 믿고 싶지 않았던 책 속의 사이코패스와 의사가 말하던 재영의 모습이 떠올라 불시에 지금의 재영과 겹쳐졌다. 호정은 고개를 돌렸다. 고여 있던 눈물이 단번에 코와 턱을 타고 흘렀다.

“흐으……. 으… 씨… 개새끼, 씨… 너, 흐윽…….”

호정의 울음에 허벅지를 억누르던 재영의 무릎이 옆으로 비켜났다. 날 선 뼈가 사라지고 짓누르던 아픔이 사라졌는데도 호정은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널… 안 놓으려고… 으윽… 흐, 이러는 거잖아! 미친… 이 흐… 개새끼야…….”

호정이 고개를 돌려 시트에 볼을 붙였다. 호정의 손을 결박하고 있던 재영의 아귀힘이 스르륵 풀렸다. 재영은 손을 내려 손바닥을 문질렀다. 땀에 젖지 않은 손으로 호정의 젖은 볼을 어루만지려다 손을 거두었다. 호정은 자신의 두 팔로 눈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으… 씨… 못 놓아서, 못 놓겠어서… 내가… 너를… 으흑…….”

아이처럼 엉엉대며 우는 호정을 보며, 재영은 모든 회로가 정지하는 걸 느꼈다. 좀 전에도, 그 이전에도 호정이 우는 건 보았지만 지금과는 달랐다. 이전의 그것과는 명백히 다른 결의 울음이었다.

재영은 호정의 울음에서 자신을 보았다. 정확히는 처음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던 날의 자신을 보았다. 기억은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 같지 않은 존재로 부모님이 재영을 인지했던 그 순간으로 재영을 내던졌다. 되레 처음엔 괜찮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재영은 지금의 호정처럼 울고 싶었다. 속에서 울리는 진실한 말을 뱉으면 엄마는 경악했고 아빠는 입을 다물었다. 억울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생각과 말이 그릇된 것이라는 걸, 정상인들과는 철저히 다른 범주의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재영은 소리 내 화내고 울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없는데 어떡하라는 거냐며 자기 부모를 붙잡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재영은 호정이 자신처럼 생각하고, 자신처럼 행동하길 바랐었다. 그때 자신이 했던 말처럼, 지금 눈앞의 호정에게서 정말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나.

우는 호정이 자신 같아서, 몸을 움츠리고 우는 게 호정이 아니라 자신 같아서, 재영은 물끄러미 호정을 보고 또 보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재영의 자아는 나뉘지 않았고 언제나 하나의 존재로 견고했다. 프로이트와 주치의를 무시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자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태 한 번도 분화되지 않고 단단했던 자아였다. 그런 자아가 분화가 아니라 아예 타자로 완전히 변질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은 메스꺼웠다.

“호정아.”

호정의 눈물은 포기일까. 자신에게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 걸 깨달았을 때의 상심인 걸까.

사이코패스 판정을 받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학교 체험용으로 잡은 달팽이의 배를 죄다 갈라놓은 적이 있었다. 햇살 아래 찢긴 배를 하늘을 향한 채 죽은 달팽이를 관찰하던 자신을 발견한 엄마가 마당에 주저앉아 흐느끼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호정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답답하고 갑갑한 것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더 컸다. 재영은 허겁지겁 셔츠에 손을 닦았다. 말끔해진 두 손으로 호정의 팔을 끌었다.

“싫, 흐으… 싫어. 비켜…….”

눈을 보고 싶었다. 재영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어떻게든 호정을 어르고 달래 울지 않는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호정아.”

정말 호정이 자신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호정이 자신이 모르는 곳으로 영영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상상. 호정은 이제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놓아 포기해버릴 거란 확신. 이번에도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허무함.

“후…….”

재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눈을 가린 채 끅끅대며 우는 호정의 팔꿈치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감쌌다.

“호정아… 내가, 내가 잘못했어…….”

무섭고 두려웠다. 재영은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거두지 못한 채 호정의 팔꿈치를 지분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 때문에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호정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처럼 큰소리를 내며 우는 호정을 보던 재영이 호정의 위에 있던 몸을 일으켰다.

“호정아……. 나 이제 아무것도 안 할게. 응?”

재영은 침대 아래로 내려가 호정의 팔을 옅게 흔들었다. 진짜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재영의 눈에 다정함이 담겼다. 이전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 호정의 팔을 어루만졌다.

재영은 고개를 살포시 꺾어 호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애썼다. 팔로 가린 탓에 호정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호정은 타인이 아니었다. 호정이 정말 자신의 아이 같았다. 자신과 똑같은, 자신과 연결된 존재 같아서 재영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입술이 반쯤 멍하게 벌어졌다.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호정아… 내가 다 잘못했어. 네가 싫다는 건 안 해. 다 해줄게. 울지 마. 응? 울지만 마.”

재영은 침대 끝에 턱을 기대고 호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팔로 가린 눈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재영의 속이 울렁거렸다. 입안엔 텁텁한 위액이 차올랐다.

“진짜야……. 응? 나 버리지만 마… 다 해줄게…….”

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꺽꺽대는 숨넘어가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 재영은 여전히 호정의 팔꿈치를 지분거리다 시선을 내렸다. 호정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호정은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것 중 가지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인 존재였다. 또한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해 얻은 것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연결고리가 끊어진 건 여전히 아쉬웠다. 무릎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호정이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흐으…….”

호정이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재영은 좀 더 다급해진 마음으로 호정의 팔꿈치를 감싸 아프지 않게 꾹꾹 눌렀다.

“네가 원하는 한재영 해줄게……. 나 할 수 있어, 평생 해줄게. 호정아… 내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우는 거야? 그래?”

재영은 뜨거워진 자신의 볼을 시트에 붙여 눌렀다. 왜 이렇게 몸 전체가 뜨거워지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호정의 팔꿈치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 호정의 볼을 문지른 후 자신의 볼도 문질렀다. 호정의 볼보다 자신의 볼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자신의 볼을 쓰다듬던 재영의 손이 떠나자 호정이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다. 붉게 긁힌 눈이 재영을 향했다. 이내 두 눈이 또렷하게 커졌다.

“재영아.”

“응.”

재영은 미소 띤 얼굴로 아이처럼 팔을 뻗었다. 안아달라는 뜻 같았다. 호정은 자신의 볼을 닦은 손으로 재영의 볼을 훔쳤다. 호정의 차가운 손이 볼에 닿았다. 정말 내 볼이 더 뜨거웠나, 재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너 왜…….”

호정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호정의 볼을 타고 다시 눈물 몇 방울이 흘렀다. 자신의 볼을 아무렇게나 문지르려는 호정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재영은 천천히 얼굴을 당겨 호정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붙여 비볐다. “호정아, 호정아.” 방 안에 쉴 새 없이 호정의 이름이 불렸다. 호정은 까딱까딱 넘어가던 숨을 골랐다.

이름을 불러대는 재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호정은 아이처럼 엉겨 붙는 재영의 등을 한 손으로 쓸었다.

“재영아. 왜 울어…….”

호정의 볼에 연신 제 볼을 비벼대던 재영이 볼을 떼 호정을 바라보았다. 코끝이 스칠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다. 호정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담겼다. 재영은 촉촉이 젖은 자신의 볼을 손등으로 닦았다.

손등에 묻은 물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들어 다시 호정을 바라보았다. 의도하지 않고 울었던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자신은 눈물을 의도했던가. 울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나. 혼란한 생각이 뒤범벅됐다.

“재영아.”

재영은 멍하던 정신을 차려 다시 호정을 보았다. 호정의 눈이 녹녹하게 녹아들었다. 재영은 호정의 입꼬리를 따라 입을 붙였다. 젖은 볼과 젖은 손등과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 위에도 빠짐없이 입을 맞추었다.

호정은 자신의 얼굴과 목에 입을 맞추는 재영을 거부하지 않았다. 멍하니 그저 재영이 자신의 볼과 눈과 이마에 입술을 붙이면 붙이는 대로 놔두었다. 마음이 심란했다. 재영은 사이코패스가 분명했다. 재영이 직접 자신에게 말했고 의사가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그런 재영이 어떻게 울 수 있는 걸까. 왜 우는 걸까.

“재영아.”

호정은 답을 찾듯 재영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이 타당하다고 강변하던 재영은 이제 더 보이지 않았다. 호정은 눈물이라는 단어 앞에 붙였던 사이코패스라는 전제를 잠시 지우기로 했다. 눈앞의 상황을 보다 간결하게 정리했다. 재영이 울고 있었다.

“왜 우냐니까.”

재차 물어도 재영은 답이 없었다. 제 자신도 답을 몰라 답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재영은 내상을 입은 동물처럼 호정의 드러난 살갗마다 입을 맞추고 살을 붙였다. 날뛰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제 나름의 노력이자 방법인 것 같았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호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재영의 이마와 볼을 쓰다듬었다.

재영은 지겹지도 않은지 호정의 뺨이며 코며 눈에 보이는 모든 부위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호정은 그런 재영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재영이 저지른 일에 대한 분노와 화가 완전히 증발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재영의 눈물을 보는 순간 안쓰러움이 그 모든 걸 잠식하며 몰밀어왔다. 재영이 저지른 숱하게 나쁜 일들이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재영이 우는 모습을 더 원하지 않았다. 이런 것도 연기일까. 연기일 수 없었다. 호정은 그렇게 믿으며 재영의 여린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울지 마. 안 떠날게.”

“…응.”

재영은 마침내 원하던 약속을 받아낸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호정의 생각은 도서관에서 보았던 책으로, 재영을 참고한 논문으로, 다시 좀 전에 보았던 재영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중 사이코패스의 눈물에 대한 건 보지 못했다. 그럼 정말 좀 전에 보인 재영의 눈물은 무슨 의미일까. 억울함? 회피? 불안함? 무서움?

“호정아. 무슨 생각해?”

호정의 목에 입술을 묻고 있던 재영이 미동 없는 호정의 반응에 고개를 들었다. 호정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재영을 내려다보았다. 재영이 그런 호정을 보며 픽 웃더니 꽉 닫힌 입술에 엄지를 올렸다. 엄지로 입술을 꾹 누르니, 세게 맞물려 있던 호정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렇게 자주 물더라. 이러면 아픈데.”

그러니까 자꾸 완충재가 필요해지잖아. 재영은 호정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며 몸을 붙였다. 몇 번 더 혀가 얽혔다. 뜨거운 습기가 둘의 입술 사이로 머금어졌다.

재영은 호정이 그리웠었다. 호정은 저를 향해 대뜸 모난 말을 쏘아대기도 하고, 자주 의아한 말을 내뱉기도 했고, 우쭐한 얼굴로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줄곧 그리웠었다. 떠나면 더 쉽게 잡을 줄 알았다. 떠난 아이가 돌아오면 더 온전한 자신의 것이 될 줄 알았다. 재영은 그렇게 믿었다.

이렇게 그리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재미없는 놀이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재영은 지난날 자신의 오만함을 떠올렸다. 그러다 곧, 어찌 됐든 호정이 돌아왔고 지금 자신의 품에 있음을 상기했다. 중요한 건 그거 하나였다.

“재영아. 너는 지금 무슨 생각해?”

잠시 입술이 벌어진 틈에 호정이 물었다. 뺨은 옅게 달뜬 숨을 내쉬느라 발갛게 부풀었다. 재영은 숨을 고르며 입술을 적셨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모든 생각이 비워진 그 자리에 호정의 뚜렷한 얼굴이 대신 들었다. 재영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눈앞의 호정을 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 내가 어떤 생각을 했지. 막상 떠올리니, 그리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기다리면 진짜 오는구나, 그 생각.”

“또?”

손을 뻗어 호정의 뺨을 어루만졌다. 호정은 두 손으로 재영의 손목을 쥐고 자신의 볼을 재영의 손에 더욱 바짝 붙였다. 아직 눈물자국이 축축하게 남은 볼이 재영의 손바닥에 눅진하게 밀착됐다. 쌔근쌔근 가쁜 숨을 쉬는 얼굴이 코가 시큰할 정도로 적나라했다. 재영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네 생일 전에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 네 생일날 우리 할 게 많거든.”

호정은 볼을 부풀렸다가 모아둔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호정은 이제야 비로소 재영의 모든 생각에 다가가고 싶어졌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재영을 완전히 알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재영의 심상을 떠올릴 때마다 들었던 막연히 두렵고 무서웠던 감정에는 이제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그 탓일 수도 있었다. 재영의 두툼하고 큰 손이 시큰한 호정의 눈을 느리게 어루만졌다. 호정은 여전히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재영의 눈을 보고 또 보았다.

“또?”

“음…….”

재영이 느리게 눈을 굴렸다. 입매는 꾹 다물린 채 옆으로 길게 일자를 그렸다. 호정은 답을 채근하듯 재영의 팔을 끌었다. 재영은 자신의 팔을 끄는 호정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붙여 핥았다.

“네가 넣겠다고 했을 때, 넣게 해줬으면 안 떠났을까. 그런 생각도 하긴 했지.”

재영이 호정의 버클 풀린 바지 앞을 슬며시 어루만지며 미소 지었다.

“하, 진짜.”

호정이 재영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이가 없어 터진 웃음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웃네. 재영은 웃는 호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웃는 호정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호정은 예전부터 어떻게 있어도 예쁘긴 했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처음 교실에서 보았을 때부터. 재영의 관심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던 시점에서 보았을 때도. 창을 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까딱이며 뜻 모를 음악을 중얼댈 때도. 그때에도 분명 참 예쁘긴 했었다.

당시의 재영에겐 도움 되지 않을 인물, 필요치 않은 인물이었기에 딱히 자주 보지 않았음에도 이따금 복도에서 친구들 무리에 끼여 웃는 호정을 보면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참 예쁘네, 하고. 입맛을 다신 적도 있었나, 떠올리니 그건 분명하지 않았다.

“됐어. 이제 네 거기에 박을 생각도 없어.”

호정의 말에 재영이 진지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왜? 박히는 게 더 좋아졌어? 아.”

재영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재영은 호정의 볼을 검지로 꾹 눌렀다. 사진에선 꿈쩍도 하지 않던 볼이 이제는 물컹한 감촉을 따라 옴폭 파였다. 재영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휘어진 재영의 눈에 장난기가 다분했다.

“우리 애기는 박은 적이 없댔지.”

“이씨…….”

호정이 표정을 찌푸리며 재영의 손과 뺨을 동시에 밀어냈다. 재영은 볼이 밀린 채로 푸스스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 결국 호정도 재영을 따라 웃고 말았다.

“호정아.”

“어? 어… 왜?”

호정은 멍하던 정신을 바로 했다. 흐리던 눈을 깜박여 재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주한 재영의 눈과 얼굴은 자신이 익히 알던 익숙한 재영의 그것이었다. 너그럽고 온화한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재영은 다시 입술을 축이고 호정의 볼을 두 손으로 이리저리 문질렀다. 저지하듯 재영의 손목을 움켜쥐었으나 허사였다. 재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 호정의 볼을 잡아 연하게 문질렀다. “야… 왜 이러는데.” 호정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좋아서. 너무너무 좋아서.”

재영은 두 눈까지 접어가며 웃어댔다. 진심일까 물으려다 붉게 물든 재영의 눈을 마주한 순간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이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호정아. 우리 방학 다 끝나가.”

“응.”

대학교와 방학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호정은 방학이 며칠 남았나를 생각했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어느새 방학은 두 손의 손가락 개수보다도 적게 남아있었다. 재영은 호정을 안아 귀를 핥았다. 촉촉하게 젖어 날을 세운 혀가 호정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호정이 목과 볼을 움츠렸다. 재영은 집요하게 호정을 쫓아 귓불을 입에 물었다. 오물거리며 핥으면 호정은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목을 움츠렸다. 재영은 호정의 이런 반응이 좋았다.

“우리 다시 영국 가자…….”

재영은 일부러 끝을 늘이며 말했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았다.

“둘만 있고 싶어.”

“…그래. 알았어.”

호정은 무의식적으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안아달라는 듯 몸을 붙이는 재영을 버겁게 안아 다독였다. 영국. 호정은 속으로 그 단어를 곱씹었다. 재영과 함께, 그렇게 다시 영국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과 가장 최악의 기억이 뒤섞인 곳. 호정은 영국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어깨를 떨었다. 재영은 호정을 달래듯 후드 안으로 손을 넣어 얇은 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호정아.”

재영이 호정을 불렀다. 호정은 재영의 깊은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재영의 심해 역시 저 눈처럼 깊고 어두울 거다. 그곳은 호정의 생각보다도 더 어둡고 짙고 외로울 것이다. 자신은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들이, 떠올려 본 적도 없는 일들이 재영의 심해에선 쉴 새 없는 너울로 일렁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호정은 그곳을 향해 내려가기로 했다. 자신의 몸이 침잠될지도 모를 그곳에, 천천히 두 발을 디디기로 했다. 두 발을 감쌀 먹색의 심해를 떠올렸다. 심해의 너울은 언젠가 호정이 모르는 새 발목까지, 그리고 머지않아 종아리와 허리로, 종내 머리끝까지 차오를 것이다.

그래도 괜찮을까. 숨이 막혀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발아래 질척이는 짙은 먹색의 물이 언제쯤 자신을 모두 잠식하게 될까. 모두 잠식당한 채로도 나는 나일 수 있을까.

“호정아.”

생각이 깊어지려는 틈에 재영이 다시 호정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자고 있는 호정을 깨우듯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호정은 옅게 고개를 저으며 재영을 안았다.

“재영아.”

“응.”

“이제 나쁜 짓은 하지 마. 알겠지?”

“…응.”

호정은 재영의 어깨에 턱을 붙이고 볼까지 바짝 붙여 기댔다. 재영이 웃으며 나온 바람이 귀를 지나 목을 간지럽혔다.

“나쁜 짓은 안 돼. 진짜.”

사이코패스는 누구보다도 나쁜 것과 착한 것.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잘 구분한다고 했다. 다만, 그것이 그들에게 의미가 없을 뿐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해서는 안 될 행동과 상충할 때 그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을 택한다고도 했다. 호정은 에둘러 표현한 ‘나쁜 짓’에 대한 의미를 재영이 더욱 잘 알 거라 확신했다. 잠시 망설이던 재영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재영은 고개를 까닥까닥 박자에 맞춰 움직였다.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호정은 순진한 얼굴로 볼을 부풀리는 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맑은 얼굴 뒤에,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일말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감정이 있었던 적이 한 번은 있었을까. 호정은 호흡을 고르게 가다듬었다.

“재영아. 미안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있어?”

질문을 던지는 말투가 평소와 달리 담담했다. 작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호정은 그저 고요한 얼굴로 재영의 답을 기다렸다. 기분 좋은 듯 웃던 재영이 표정을 굳혔다. 망설이듯 입술을 혀로 핥은 재영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까 너한테 미안하다고 한 거, 내 감정과 그렇게 완전히 다르지는 않았어.”

그건 호정을 만나기 이전, 좀 전 미안하단 말을 하기 전까지는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다는 말과 같았다. 호정은 재영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재영이 다급히 호정의 품을 파고들었다.

“너 말고 내가 미안해야 할 사람은 없… 그래. 아버지 일은 내가 미안해. 다 나으실 때까지 내가…….”

재영이 한숨 쉬었다. 우물쭈물 이어지던 말이 끊겼다.

“민재는?”

재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재영은 손에 힘을 풀어 자신의 품에 든 호정을 놓았다.

“엘든은 부도나기 이전 수준까지는 아니겠지만, 나아질 거고. 민재 아빠도 우리랑 합병되는 걸 원했다고 하니까. 그쪽으로 해결할게.”

재영은 마치 준비한 대사를 읊는 배우처럼 망설임 없이 말을 끝마쳤다. 재영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내 답을 들은 너의 답은 이제 무엇인데. 그렇게 묻는 듯했다.

“너한테는 백 번이고 사과할 수 있어. 그 외는 못 해.”

호정은 고개를 티 나지 않게 들어 재영의 볼에 자신의 볼을 붙였다.

“네가 못 할 줄 알았어.”

“호정아. 너한테 평생 속죄하며 살게. 그러니까 넌 앞으로 어디도 가지 마.”

호정은 답하지 않았다. 심해는 생각보다 따스하고 안락하고 순종적이며 평온할 수도. 막연했던 자신의 생각과는 또 한없이 다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만 내려앉은 탓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두 팔 안에, 자신의 품 안에 재영이 있었다. 그것만이 오직 호정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비로소 발을 디딘 먹색의 바닥이 느껴졌다. 그곳은 누구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재영의 심연이었다.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오직 호정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영역이었다.

호정은 재영이 저지른 모든 일의 근원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에 자신이 일말의 원인이 아니라고는 차마 말할 순 없었다. 알아내기 힘들었던 민재 어머니의 연락처는 우습게도 재영에게서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재영은 민재 어머니를 뵈러 간다는 호정을 탐탁지 않게 여기긴 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고 뵙겠다는 호정의 말에도 재영은 별다른 저지 없이 주소를 알려주었다.

호정은 민재 부모님이 현재 지내신다는 아파트 앞에 서서 긴 호흡을 내쉬었다. 민재 부모님이 계시는 곳은 원래 살던 집보다는 아니지만, 다행히 깔끔한 아파트였다.

“같이 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재영이 먼저 호정의 손을 이끌었다. 주차장과 연결된 로비의 인터폰으로 간략하게 인사를 드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호정은 재영에게 정말 같이 올라갈 거냐고 확인하듯 물었다. 재영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민재 어머니가 현관문을 연 채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민재 어머니는 호정의 뒤를 따라 내리는 재영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고개를 기울였다.

“재영… 재영이 맞지?”

“네. 오랜만이네요. 어머니.”

재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호정과 재영을 번갈아 보던 민재 어머니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둘은 어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에서부터 이어진 긴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착했다.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꽤 넓은 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서 들어와. 집이 좀 좁아지긴 했는데.”

“어머니. 이거… 별 건 아닌데, 그래도 새해라서요.”

빠르게 말을 잇는 어머니 앞에 호정은 오는 길에 산 와인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거절하지 않고 와인을 받았다. 입가에 잔잔히 스민 미소에 호정도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민재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와인인데. 신기해. 우리 민재가 예전에 말해준 적 있니?”

“네. 예전에 한 번… 사실, 민재가 몰래 가져와서 같이 나눠 먹은 적이 있어요.”

“그래? 정말 우리 민재답다.”

민재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호정의 볼을 어루만졌다. 호정에게서 잠시나마 자기 아들을 느끼는 듯했다.

“소파에 앉아있을래? 마실 거 줄게.”

“아니요. 어머니. 뭐 안 마셔도 돼요. 재영이 넌?”

호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재영은 호정을 잠시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재영은 아무런 말없이 민재 어머니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호정 역시 재영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시선은 자연히 소파 맞은편을 향했다. 여전히 집안 곳곳에는 민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호정도 알지 못하는 유치원 때의 민재 사진도 있었다. 호정은 자신도 모르게 민재 사진에 시선을 두었다.

“호정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린 옆을 쳐다 보니 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호정을 보고 있었다. 왜 불렀는지 물으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어머니가 먼저 말을 붙였다.

“과일이라도 먹을래? 주스보다는 커피가 나으려나? 이제 커피를 더 좋아하는 나이지?”

민재 어머니는 미리 준비해둔 듯 보이는 과일과 주스를 내어왔다.

“괜찮아요. 아직은 주스가 더 좋아요.”

호정의 말에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재영이 고개를 돌렸다.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래. 대학은 잘 다니고 있고?”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에 호정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두 분 덕분에요.”

“우리가 뭘.”

“고등학교 때 저 도와주셨잖아요. 제가 그 은혜도 다 못 갚… 아직 다 못 갚아서…….”

호정은 자신의 엄지손톱 위를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었기에 울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자꾸만 눈치 없이 눈가가 뜨거워진 탓이었다.

“전부, 제 탓이에요.”

“…호정아.”

“전부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다. 옆에 앉은 재영이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게 느껴지는데도 호정은 재영을 바라볼 여력이 없었다.

“두 분이 주신 건 아무리 갚아도 다 못 갚을 빚인데… 민재, 민재요. 어머니. 민재는.”

순간 울컥 쏟아지려는 눈물에 호정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목울대가 시큰거려 도무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두 눈도 호정을 따라 젖어 들었다.

“하나뿐인 민재 친구인데, 그 정도 해준 게 뭐 큰일이라고.”

다정한 목소리에 울먹임이 묻었다. 호정은 민재가 떠난 원인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괴로웠다. 호정이 소파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께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다. 사라지지 않을 죄라고 해도 사죄는 해야 했다. 호정이 막 무릎을 굽혀 바닥에 앉으려 할 때였다.

“하. 이호정.”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호정의 무릎과 바닥 사이로 재영의 손바닥이 먼저 끼어들었다.

“알겠어.”

무슨 뜻인지 되묻는 호정의 눈빛과 영문을 모르는 민재 어머니의 눈빛 사이에서도 재영의 눈은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네가 하려는 게 뭔지 알겠으니까 일어나.”

올곧게 호정을 보던 재영이 미간이 좁히며 손바닥으로 호정의 무릎을 감쌌다.

“사과는 내가 할 테니까 넌 좀 일어나라고.”

무릎을 감싼 손이 빨갛게 변해갔다. 호정은 바닥에 닿으려던 무릎을 떼 천천히 일어났다. 그제야 재영이 천천히 호정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재영은 민재 어머니를 올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허벅지에 놓인 재영의 주먹 쥔 두 손이 눈에 띄게 부들거렸다. 제 나름 안간힘을 다해 이 상황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재영이는 또 왜. 너희 오늘 왜 이래. 아줌마 무섭게.”

어색하게 웃던 민재 어머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니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설명을 구하듯 호정을 올려다보았다. 호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호정에게 떠오르는 말은 그저 죄송하다는 것뿐이었다. 무엇을 가하고 또 무엇을 감할 수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사실 전부를 다 말한다면 그건 어머니가 견딜 수 없는 무게였다. 어느 쪽이 맞는지도 감이 서질 않았다.

“작년 물류 창고 투자 건 때, 저도 반대했었어요. 죄송해요. 민재 생각하면 제가 돕는 게 맞았는데.”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민재 어머니가 되물었다. 재영의 떨리는 두 손과 어깨가 호정의 시야에 들었다. 거짓이라 해도 재영에겐 처음 겪는 모멸감과 불편이었다. 입을 꾹 다문 호정이 재영의 옆에 같이 앉으려 하자, 재영이 무서운 얼굴로 호정을 올려보았다.

“넌 서 있어. 내 잘못이니까.”

호정이 눈을 깜박였다. 참고 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재영을 향해 있던 시선을 어머니께 돌리는 틈에도 눈물이 후드득 바닥으로 쏟아졌다.

“죄송해요. 어머니. 저는… 제가…….”

다급히 일어난 어머니가 호정의 어깨를 안았다.

“정말 왜 이래, 둘 다. 됐어. 호정이도 그만 울고, 재영이도 일어나. 응?”

호정의 어깨를 감싼 채로 재영의 팔을 끌어 일으켜 세운 어머니가 재영과 호정의 안색을 살폈다.

“우리 민재 생각나서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이제는 다 부질없게 느껴져. 뭘 해도 민재가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사업도 돈도. 전부 다.”

죄책감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호정의 볼을 타고 다시금 쏟아졌다. 호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댔다.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 없는 자신의 비겁함이 부끄러웠다.

“어머니. 죄송해요. 전부… 다 제 탓이에요.”

“아까부터 우리 호정이가 자꾸 왜 이럴까. 뭐가 그렇게 미안해.”

어머니는 호정의 울음을 멈추게 하기 위해 일부러 더 웃으며 말을 붙였다. 호정이 느끼기에 그건 자신의 비겁함을 더욱 초라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속절없는 다정함이었다.

“죄송해요. 정말.”

호정이 가까스로 다시 말을 뱉었다. 몸을 덜덜 떠는 호정을 가만히 응시하던 재영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끌어 잡았다. 호정의 손가락과 그 사이사이를 꾹꾹 마사지하듯 누르던 재영이 손바닥으로 젖은 호정의 볼을 훔쳤다.

괜찮다며 자리에 앉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소파에 앉고 나서도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재영은 불편함과 따분함에, 호정은 죄책감에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민재의 집을 나설 때도 호정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민재에 대한 죄책감이 좀 전의 그 짧은 사과로 사라질 리 만무하다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평생 사죄하며 살아도 지워지지 않을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호정이 다시 뜨거워지는 눈을 닦으려 손을 들었다. 재영이 먼저 손등으로 호정의 눈 아래를 닦았다.

“또 사과하러 갈 곳 있음 말해.”

대답 없이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호정의 눈길에 재영이 젖은 채로 부은 호정의 눈 아래에 입술을 살포시 맞추었다.

“내가 다 할 테니까. 나한테 말해.”

“재영아.”

“울지 마. 다신 그 누구한테도 무릎도 꿇지 말고.”

재영은 정말 속상한 일이라도 겪은 사람처럼 자신의 눈썹을 매만지며 표정을 구겼다.

“나랑 한 약속 기억하지?”

호정의 말에 재영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나쁜 짓 안 해. 앞으로 너 울게 하는 일 없어.”

재영은 호정의 볼과 눈 아래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의 비수가 자신이 아닌 호정에게 돌아온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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