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어디에도 없는 곳 (16/22)

외전 1. 어디에도 없는 곳

약 한 달 정도의 크리스마스 방학을 이용해 재영과 함께 부모님을 뵀다. 재영은 방학이 되면 나와 잠시라도 한국으로 들어와 함께 엄마, 아빠를 뵈었다. 혹시나 내가 외로울까 봐 고민 끝에 내린 제 나름의 배려인 셈이었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좀 전 병실에서의 재영을 떠올렸다. 아빠는 여전히 병실 침대에 누워 눈을 깜박거렸다. 재영이 그 옆에 섰다. 재영은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재영의 앞에 가지런히 모인 두 손을 본 엄마가 반가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재영이 종교가 있었어?”

재영은 입술 끝만 올려 미소 짓고는 나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영의 입가에 간신히 걸린 미소는 나를 마주한 순간 깊어졌다. 재영은 종교가 없었다. “만약 빌게 될 일이 생긴다면 그때그때 제일 잘 들어줄 놈한테 빌겠지.”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바람을 알릴 사람이 아니었다.

달리는 차의 창 너머로 잠시 바람이, 삶에서 단 한 번의 인연도 없을 것 같은 무심한 사람들이, 목마다 길게 늘어선 가로수가 찰나의 눈길도 받지 못한 채로 스쳤다.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복잡해 눈을 감았다.

재영과 나도 지금 창밖의 존재들처럼 그날 골목길에서 단 한 번 우연히 스친 존재로 남았을 수도 있었을까. 어쩌면 전혀 접점 없이 스쳤을 수도. 그저 무의미한 찰나로 서로에게 남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복잡한 생각의 끝에 두 손을 깍지 껴 기도하던 재영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호정아. 공항이야.”

감았던 눈을 느리게 움직였다. 재영의 손가락이 이마에서 시작해 머리카락 사이를 부드럽게 훑었다.

“더 잘래?”

“으응. 아니…. 다 잤어.”

재영은 내 머리카락을 나 대신 정돈해 넘겼다. 창문에 얼굴을 비췄다.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카락을 보고 아직 느릿느릿 움직이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재영이 맑은 얼굴로 나를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마실 거 사줄게. 잠 깨야지.”

“우유 마실래.”

후드를 올려 머리 위에 덮었다. 여전히 졸음이 쏟아져 수차례나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해댔다. 재영은 후드로 덮은 내 머리통을 두 손으로 잡아 자기 품에 당겼다. “오늘 신경 많이 썼어?”라고 묻는 말투가 다정했다. 아직도 재영과 아빠가 같이 있는 걸 보면 배가 된 죄책감을 느꼈다. 재영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아빠에게는 계속해 중죄를 짓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재영도 그런 내 죄책감이 무엇인지 표면적으로는 알았다. 아빠를 보고 올 때마다 내가 스트레스로 인해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재영을 따라 터미널 내부의 편의점에 들어섰다. 선잠을 자고 났더니 묵직한 우유가 당겼다. 우유 진열대 앞에 서서 한참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하… 어렵다. 어려워.”

이마를 긁적였다. 내게는 진로나 미래에 대한 결정보다 더 내리기 힘든 결정이 있다. 딸기맛 우유와 바나나맛 우유 앞에서 손가락이 좌측과 우측으로 연신 배회했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 몇 개를 집어 든 재영이 어느새 내 옆에 와 섰다.

“호정아, 그냥 초코, 딸기, 바나나 전부 다 사.”

“다 고르면 재미없지. 어때? 아무래도 바나나가 낫겠지?”

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너 고민하는 척하면서 매번 바나나 고르잖아.”

“아냐. 나 매번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고르는 거야. 그래. 오늘은 바나나가 낫겠다. 하나 남아 있으니까 왠지 더 가치 있어 보여.”

“우리 호정이 먹고 싶은 건 다 먹어야지.”

재영이 하나 남은 바나나맛 우유로 손을 뻗었다. 빨간색과 갈색 사이라 더 눈에 띄는 노란색 곽으로 재영의 손끝이 막 닿으려던 때였다.

“꺼져! 빠나나 진환이 꺼야!!!”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달려와 재영의 팔을 밀쳤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밀쳐진 손을 내려다본 재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입술이 꽉 조여드는 걸 보니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야. 내놔. 그거 내가 먼저…….”

재영이 아이를 붙잡아 돌렸다. 바나나우유가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품에 안은 아이가 세차게 도리질하며 재영의 손을 뿌리쳤다.

“싫어!! 싫어!!! 꺼져!”

“야. 너 말이 왜 짧아?”

재영이 표정을 굳혔다. 재영은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도망치려는 아이 팔을 양손으로 붙든 재영이 두리번대며 아이 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네 부모 어딨어. 바나나 이리 내. 넌 딸기 처먹어도 되잖아.”

“한재영.”

재영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이 팔을 붙들고 있던 재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손끝이 파들파들 떨리는 걸 보다 진열대에서 딸기 우유 두 개를 꺼내 재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스물두 살 한재영 씨. 애랑 그만 싸우고 이제 일어나시죠.”

재영이 딸기 우유를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로 달려가는 아이의 뒤 꼭지를 노려보는 눈에 불이 이글거렸다.

“부모가 저렇게 애를 좆같이 키우니까…….”

재영은 욕을 뱉고 잠시 내 눈치를 보다 큼, 하고 목을 긁었다.

“오냐오냐 키우니까 애들이 예의가 없잖아.”

“눈. 예쁘게 떠야지.”

불이 이글대던 재영의 눈초리가 아래로 힘없이 휘어졌다.

“괜찮아. 나 오늘은 딸기 먹을래.”

재영이 고개를 다시 계산대 쪽으로 돌렸다. 아이는 제 키만 한 계산대에 냉큼 돈을 내밀고는 빠르게 편의점을 벗어났다. 편의점 앞에 서서 통화 중인 제 아빠의 품으로 미끄러지듯 안긴 아이가 재영을 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저 개새… 호정아. 여기서 기다려 줄래? 나 쟤 아빠랑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애는 저렇게 키우면 안 되잖아.”

“아니. 돼. 저렇게 키우는 건 돼. 이렇게 다 큰 애가 저만한 애랑 싸우는 게 안 돼.”

딸기우유 곽이 희미하게 으그러졌다. 재영이 손등으로 자기 눈썹 위를 쓱 문질렀다.

“너 왜 쟤 편드는데?”

재영이 진중한 얼굴로 나와 편의점 입구를 번갈아 보았다. 아이를 향해 적의 어린 눈빛을 보내던 재영이 화를 억누르듯 잇새로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애는 적당히 훈육하면서 되는 거, 안 되는 거 구분해서 키워야지. 가지고 싶다는 거 다 가지게 하고, 사고 싶다는 거 다 사주고, 잘하는 거 하나 없는 새끼한테 다 잘한다, 네 말이 다 맞는다… 그렇게 키우면 저런 개새끼보다 못한 애가 된다니까.”

재영의 손에 들린 딸기우유를 뺏었다.

“안 먹을래. 입맛 떨어졌어.”

씩씩대며 눈썹을 일그러뜨리던 재영이 기운 빠진 입술을 달싹거렸다.

“화났어?”

재영은 편의점 안을 둘러보았다. 뭘 사줘야 내 입맛이 돌아 오려나 고민 중인 듯 보였다. 두리번거리던 재영이 내 손가락을 펼쳐 우유를 다시 가져갔다.

“호정아. 우리 A 터미널 갈까? 거기 있는 편의점에서 내가 바나나, 딸기, 초코 다 사줄게.”

방금 전에 사고 싶다는 거 다 사주면 안 된다 하지 않았던가. 이중적인 재영의 태도에 결국 맥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진지한 얼굴로 품 가득 과자와 우유를 담은 재영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재영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아빠. 전 예의 있게 크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오늘은 제발 그냥 딸기만 사 주세요.”

재영이 내 눈을 마주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재영의 귓바퀴가 아주 옅게 붉어졌다.

“갈까?”

재영의 팔을 잡아끌며 물었다. 입구를 보니 좀 전의 아이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계산을 마친 재영은 우유에 빨대부터 꽂아 내 입에 물렸다. 내가 우유를 마시기 시작하고서야 재영은 봉투에 과자를 담기 시작했다.

“나 개강하고 다음 주에 바로 테스트래.”

우유를 마시며 투정을 부렸다. 재영은 봉투를 쥐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여전히 귓바퀴와 귓불이 붉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과가 너랑 안 맞으면 다른 거 배워도 돼. 뭐든 다 되니까 하고 싶은 거 생기면 언제든 말해줘. 너 하고 싶다는 건 다 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아이를 보며 올바른 훈육에 열을 올리던 재영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빨대를 촘촘하게 깨물었다.

“네. 아빠.”

“치….”

목까지 붉어진 재영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내 볼에 자기 볼을 부딪쳐 비볐다. 살짝 닿았다 멀어진 재영의 볼이 뜨거웠다.

재영은 2학년이 되면서 과를 옮겼다. 약학과만으로는 재단과 할아버지 기업 승계를 받기 까다로울 거라는 게 이유였다. 약학과는 이사진에 자신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이미지 정도는 줄 수 있겠지만, 승계에선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거였다.

직속 승계라는 명분이 있다 해도 요즘은 전문 경영 자격이 없으면 이사진의 반발이 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연히 내가 가져야 할 것에 별것도 아닌 게 거절 의사를 표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싫어.” 재영은 그 말을 하며 표정을 찌푸렸었다.

뒷말이 나올 일은 애초에 제거하는 게 재영의 방식이었다. 며칠 고민하던 재영은 결국 약학대에서 경영대학으로 과를 옮겼고 덕분에 나와 졸업 연도가 같아졌다.

재영처럼 내 삶에도 달라진 것은 많았다. 내가 보는 세상이 그랬고, 나를 둘러싼 삶이 그랬다. 그런데도 절대 변하지 않는 몇 가지가 있었다. 대학에서 듣는 강의가 그중 하나였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도 강의는 여전히 지루했다. 예전보다 영어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히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교수의 눈을 피해 노트를 펼쳤다. 강의내용을 받아 적는 척하며 의미 없는 선을 좌측에서 우측으로 긋고 중간 중간 더 의미 없는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드문드문 고개를 들고 호응하듯 끄덕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나처럼 수업에 흥미가 없어 보였다. 몇몇은 이미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잡담을 이어가고 있었다.

잡다한 선으로 더러워진 종이를 넘겨 다음 장을 펼쳤다. 무엇을 그릴까 하다가 초등학생 때 그렸을 법한 나무를 그리고 뭉게구름처럼 그려진 잎 사이에 사과를 그려 넣었다.

“…….”

얼추 사과나무가… 아니, 사과가 달린 나무 같은 게 완성됐다. 비록 좀 썩은 듯 보이기는 하지만.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팔을 뻗어 거리를 두고 노트에 그린 그림을 보았다. 거리를 두고 보니 가까이서 볼 때보다 그 허접함이 더 티가 났다. 아무리 내가 그렸다고는 해도 어이없는 실력에 웃음이 났다. 내 그림 수준은 초등학교 즈음에서 멈춘 게 확실했다.

“좀 단순한가.”

나무니까 나이테와 옹이라도 더하면 나아지려나. 그래야 더 그럴듯해 보일 테니까. 그린 나무를 잘라 나이테를 보여줄 순 없으니 대신 몸통의 가운데에 옹이를 그려 넣기로 했다.

“오… 진짜 구린데.”

다 그리고 보니 초등학생이 그릴 법한 그림도 못 되었다.

“음…….”

다음 장을 펼쳤다. 잠시 고민하다 작은 달걀 모양의 타원을 먼저 하나 그렸다. 재영이라도 그려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휴대폰을 꺼내 앨범 속 재영과 함께 찍은 사진을 열었다. 이렇게 잘생긴 놈은 어떻게 그려도 실제보다 나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실제 재영을 담을 수 있는 그림은 그릴 수 없을 거다. 이미 그린 타원형 안에 옆으로 긴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흣.”

피식 웃음이 났다. 엉망으로 그려진 동그라미 세 개는 아무리 봐도 재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휴대폰 속 재영의 얼굴을 보았다. 오뚝하게 높은 코. 굴곡 없이 솟은 코는 내 손에서 엉성한 세모가 되어 그려졌다. 그 밑에 나름 예쁘게 그려보려고 한 입술은 영락없이 찌그러진 구름으로 나타났다.

마침내 책상에 이마를 박고 웃음을 쏟아냈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사진 속 재영과 조금도 닮지 않은 기하학적인 선들을 보다 다시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니 벌써 주변이 소란해져 있었다. 어느새 강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교수도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다급히 가방을 챙겨 어깨에 걸었다. 재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노트를 손에 쥐고 강의실을 빠져나오자, 역시나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재영이 보였다. 강의를 마친 아이들 수십 명이 한 번에 빠져나가는 난장 속에서도 오직 재영만 다른 존재처럼 빛이 났다. 잠시나마 저런 사람을 고작 동그라미와 세모로 그리려 했던 내 어리석음을 반성했다.

“재영아.”

“응.”

내 부름에 재영이 미소 띤 얼굴로 다가왔다. 재영은 익숙한 자세로 내 어깨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가방을 가져갔다. 가방을 손에 쥔 재영이 내 손에 들린 노트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거, 가방에 넣어줄까?”

“아니. 내가 들고 갈게. 여기 안에 나중에 너한테 보여줄 게 있거든.”

“지금 보면 안 되는 거야?”

강의실에서처럼 웃음을 참으려 눈을 감았다. 재영은 영문도 모른 채로 그저 나를 따라 웃었다.

“나중에. 차에 타서 보여줄게. 놀라지나 마.”

“그런 말 할 땐 꼭 놀라게 되던데.”

재영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다 손을 뻗어 나를 감쌌다. 덕분에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 재영이라는 명확한 경계선이 생겼다.

“뭘 또 이렇게까지 경계해.”

“보호지. 세상에 미친놈들이 많잖아.”

재영의 눈동자에 얼떨떨한 표정을 한 내가 박혔다. 그중 네가 제일 미친놈이잖아. 속에서 꿈틀대는 말을 삼켰다.

“엘리베이터 타지 말자. 저것들이 너한테 더 붙을 거 같아.”

어깨를 감싸고 있는 재영의 손을 천천히 끌어내렸다. 풀로 붙인 것처럼 단단하게 붙어있던 손이 겨우겨우 내려졌다.

“과보호하지 마. 난 금방 버릇없어지는 타입이야.”

“알지. 아직도 잘 때 한 번 이상은 등 돌리잖아.”

재영이 내가 끌어내린 손을 들어 머리칼을 어질렀다.

“넌 더 버릇없어져도 돼.”

버릇이 더 없어져도 된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나중에 한껏 예의가 없는, 버릇이라고는 아주 눈을 뜨고 찾아볼 수도 없는 그림을 보여줘도 그 마음가짐이 유지되어야 할 텐데. 눈치 보듯 재영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자꾸 웃음이 나 큰일이었다. 그림을 보여주기도 전에 이 엉성함 탓에 먼저 들킬 것 같았다.

차에 오르자마자 재영이 내 가슴 앞에 손을 내밀었다. 오는 동안 줄곧 이 노트에 적힌 게 무엇일지만 고민했을 게 뻔한 모습이었다. 자칫 방심해 웃음이 날 뻔했다.

“대단한 건 아닌데… 나 그림 그렸거든. 볼래?”

분명 재영도 그림을 보자마자 나처럼 웃음을 터뜨릴 거라 생각했다. 웃는 모습을 예상하며 노트를 건넸다. 재영은 노트를 열려다가 잠시 숨을 골랐다. 노트 표지에 손바닥을 올리고 경건한 자세로 눈을 감으려는 재영의 팔을 꼬집듯 잡았다.

“성전 아니니까 그냥 열어. 오버하지 말고.”

“아냐. 이미 기운이 신성해.”

“장난 그만 치고.”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자 재영이 핸들을 쥐고 웃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노트를 여는 재영의 손을 끌어 나무를 그린 장으로 옮겼다. 어릴 때 한 번씩은 그려봤음 직한 나무 그림에도 재영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좀 전까지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싸늘히 사라지기까지 했다.

“음…….”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릴 줄 알았는데 그림을 보는 재영의 눈이 진지해졌다. 재영은 미동 없는 얼굴로 가만히 제 턱을 쓸었다. 눈꺼풀이 느리게 감겼다가 떠지는 걸 보니 생각보다 더 진중하게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진지한 얼굴로 나를 놀리려는 건가 싶었는데 얼굴을 살피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야…. 재영아. 안 웃겨?”

“또 그린 거, 다른 그림 있어?”

재영은 내 답을 듣기도 전에 먼저 다음 장을 펼쳤다. 사람의 얼굴 같기는 하나 도무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 게 드러났다. 차라리 앞장을 보게 할 걸. 이 얼굴 같지도 않은 걸 보여주느니 차라리 앞장에 그린 기하학적 선을 보여주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웃기지? 이거 너…….”

“하. 호정아.”

재영이 눈을 깜박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왜?”

자기를 그린 걸 눈치챘나.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설마 화라도 난 건가 싶어 살금살금 눈치를 살폈다.

재영은 다시 앞장의 사과나무로 장을 넘겼다. 침을 꼴깍 삼키고 재영을 보니, 재영이 검지로 사과나무를 그린 선을 따라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프란츠 마르크 알아?”

알 리가 없지. 애초에 재영이 “알아?”라고 하는 질문 중 내가 아는 것은 잘 없었다. 이번도 마찬가지라 고개를 저었더니 재영이 감격한 얼굴로 내 뺨과 목을 어루만졌다.

“그 작가 초기작품 같아.”

“그럴 리가. 내가 아무리 마르…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해도… 아니, 그 사람이 뭘 그렸다고 해도 이거랑 닮았을 리가 없을 텐데.”

“비슷해. 작품에 담긴 감성이.”

재영은 또 진지한 얼굴로 그림을 응시했다. 나무라고 표하기엔 심히 짓눌린 것을 저렇게까지 감격스러운 얼굴로 볼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냥 이 허접한 그림을 보며 같이 좀 웃으려던 것뿐이었는데 상황이 오묘해졌다.

재영은 그 앞에 그린 선들까지 보고 다시 뒷장을 펼쳤다. 자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그림을 보던 재영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몇 번 큼큼, 목을 가다듬었는데도 재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그린 그림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틀을 깬다, 깨야 한다, 그렇게 말하기는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틀이 가장 중요하거든. 기본적인 틀이 없으면 그림은 무용하니까.”

진짜 아니니까 그만해……. 괜히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난 틀을 깼다고 표현하는 작가들도 실상은 자신만의 틀을 구축한 거지, 완전히 틀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아니다. 자세히 보니까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과도 흡사해. 선의 움직임이.”

닥쳐. 재영아. 이건 틀이고 뭐고 없어. 재영의 팔을 끌어당겼다. 지금이라도 이 그림의 실체를 말해주고 저 부끄러운 소리를 그만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팔을 끌어당기는데도 재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집요하게 노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진짜야.”

빈말로 날 놀리려는 게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재영은 진심으로 내 그림에 감탄하고 있었다.

“프란츠 마르크 작품 중에 <집과 개 그리고 소가 있는 풍경>이라는 그림이 있어. 나한테 좋은 그림이라는 건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는 세상을 똑같이 구현해내는 게 아니라, 그 세계의 이면을 볼 수 있는 시각을 더해주는 거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해준 그림이야. 지금 네 그림을 보는데 딱 그 생각이 다시 나. 신기해.”

재영이 미소를 띠며 나를 보았다. 어정쩡한 얼굴로 재영을 마주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절대 이 그림의 주인이 너라는 이야기는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건 뭘 의도하고 그린 거야?”

“어… 이거…….”

차라리 자화상이라고 하는 게 나으려나. 얼추 보면 사람 얼굴을 그리려고 한 것 같아 보이기는 하니까. 적절한 답을 구하려고 잠시 망설이는 사이 재영이 노트를 덮었다.

“네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줄 미리 알았다면 미술 쪽으로 보내는 건데. 내가 눈치가 없었다.”

“아니. 재영아. 나 미술에 재능 없어. 하나도. 조금도. 일말도. 눈곱만큼도 없어.”

“겸손은.”

겸손이 아니라 염치. 재영의 말을 고쳐주려다 노트부터 뺏었다. 가방에 노트를 넣고 입술을 말았다. 앞으로 재영에게 이런 장난은 절대 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가방 지퍼를 잠글 때였다.

“나 그려줘서 고마워. 마지막 장, 그거 나 맞지?”

“…….”

“딱 봐도 나였어.”

재영이 커다란 손을 들어 내 뺨을 조물조물 문질렀다. 볼을 어루만지던 손이 목덜미를 감싸 자신 쪽으로 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가자 재영이 내 아랫입술을 물어 핥았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짓만 해? 나 보고 싶었어? 왜 나 그렸어?”

“그림 잊어줘.”

재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그림이 현대적이니까 액자는 깔끔한 아크릴이 낫겠지?”

재영이 사뭇 진지하게 물으며 차를 출발했다.

“더 깔끔하게 그냥 버릴 순 없을까?”

“왜 선물을 줬다가 뺏어?”

재영이 서운한 얼굴로 차를 세웠다. 덕분에 차는 주차장 입구에 우두커니 서게 되었다.

“선물 아니야.”

재영이 손을 뻗어 내 안전벨트를 걸어주었다. 어이없는 말을 듣느라 벨트를 하는 것도 까먹었었다. 재영을 쳐다보았다.

“받은 내가 기쁘니까 선물 맞아. 집 가면 나 줘. 내 거니까.”

재영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다시 차를 출발했다.

재영이 말한 대로 며칠이 지나자 집으로 액자를 만드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빈말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속이 꽉 찬 진심일 줄은 몰랐다.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내 그림들은 확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로 확대되어 벽에 걸렸다. 재영의 집에 대형 아크릴 액자로 확대되어 걸린 그림은 볼 때마다 나를 창피하고 부끄럽게 했다. 재영이 부탁해 그 아래 엉성하게 쓴 사인 덕에 더 그랬다. 별다른 꾸밈없이 단순하게 이호정이라고 적은 사인은 내 부끄러움을 배가 되게 했다.

내가 그린 그림 같지도 않은 그림은 그날부터 쭉 재영의 메신저 프로필이 되었다. 심지어 그 후로 재영은 밖에서 드로잉노트나 예쁜 펜을 발견하면 잊지 않고 사와 내 가방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가방에서 새 노트와 펜이 나올 때마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웃음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짜… 이거 뭔데.”

또 가방 안에 든 새 노트를 발견했다. 노트를 테이블에 던지며 물었더니 재영이 눈을 동그랗게 떠 날 쳐다봤다.

“심심하거나 시간 날 때 그림 그리라고 사 왔지. 예뻐서.”

“싫다고.”

“알았어. 강요 안 할게. 그냥 네 재능이 아까워서 그래.”

아까울 거 하나 없는 재능이라고 몇 번을 설명해도 매번 허사였다. 재영은 테이블에 던져진 노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괜히 미안해져 노트를 다시 내 가방에 넣었다.

“그림은 안 그릴 거지만, 수업 노트로 쓸게.”

재영이 금세 입꼬리를 올렸다.

“사춘기 호정. 화풀이 다 했으면 와서 나 안아줘.”

눈썹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재영이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노트 던져서 나 상처받았어. 그러니까 안아줘.”

“핑계는.”

다가가자 재영이 먼저 내 팔을 당겨 제 품에 안았다. 너무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재영의 심장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진짜 그림에 재능 있어.”

“…닥쳐.”

그 후로도 재영은 틈만 나면 그림 앞에 서서 이 말을 중얼댔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눈치라 못 들은 척해도 소용없었다. 그림을 세 장만 그려 다행이었다. 몇 장 더 그렸다면 재영은 아마 내 전시회라도 열어주려 했을 것이다.

* * *

웬일로 아침에 밥이 아닌 빵 냄새가 났다. 샤워 후 로션도 바르지 않고 곧장 부엌으로 가니 재영이 내게 손을 뻗었다. 자신과 가까운 곳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재영이 토스트를 굽고 있는 부엌의 하부장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곧 막 구운 토스트 한 조각이 내 입에 물렸다.

“아, 뜨…….”

“뜨거워? 이리 와봐.”

재영이 얼굴을 가까이해 다가왔다. 재영은 내 입술 사이에 물린 뜨거운 토스트에 입김을 불었다. 토스트의 뜨거운 열감에 입술이 달싹거렸다. 재영이 고개를 기울여 내 눈치를 살폈다.

“많이 뜨거워?”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휘파람이 나올 것처럼 입술을 가운데로 모아 바람을 불어주었다. 토스트를 식혀주던 재영이 눈동자를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뜨거운지 묻는 눈빛이었다.

“아직 뜨거워.”

토스트를 문 채로 오물오물 가까스로 답했다. 그제야 재영이 웃으며 내 입에 물린 토스트를 손으로 빼갔다.

“잘라줄게.”

토스트가 도마 위에 놓였다. 도마 위에 놓인 토스트에서 하얀 김이 올랐다. 부엌의 하부장 위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폴싹 아래로 내려왔더니 재영이 냉큼 내 허리를 감아 자신의 옆으로 끌었다.

“어디 가려고?”

“그냥 내려오기만 했어.”

“여기 있어. 금방 식혀 줄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영의 등에 몸을 붙여 안았다. 재영을 안으면 큰 몸이 두 팔 가득 담길 듯 담기지 않았다. 버겁게 안는 느낌이 좋았다. 팔을 펼쳤다. 재영의 두 팔 전부를 안고 있던 손을 팔과 허리 사이에 밀어 넣어 끌어안았다. 재영이 내 손을 당겨 더욱 자신을 바짝 안게 했다.

“오늘 수업 3시랬지?”

“응. 느긋하게 나가도 될 것 같아. 넌?”

“나도 오늘은 조직론 하나라서. 마치고 같이 오자.”

마치고 같이 오자는 재영의 말에 팀 프로젝트 때문에 팀원들과 미팅 약속을 잡았던 게 생각났다.

“오늘은 너 먼저 와야 될 거 같아. 팀 프로젝트가 있어서. 다섯 시에 다 같이 미팅하기로 했거든.”

“그래? 몇 명인데?”

“나 포함해서 여섯 명.”

향수에 적당히 섞인 토스트의 기름 냄새를 맡으며 재영의 등에 볼을 비볐다. 젖은 머리가 불규칙하게 흐트러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치 몸에 재영의 향을 묻히려는 강아지처럼 좀 더 볼을 비비고 나서야 등에서 떨어졌다.

“더 해도 되는데.”

“뭘?”

일부러 모른 척 물었더니 재영이 토스트를 자르던 동작을 멈추고 턱으로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더 해주면 안 돼?”

“싫어.”

재영은 내 웃음을 따라 웃었다. 다시 다가가 재영의 등에 내 몸을 찰싹 붙였다. 매미처럼 붙어 왼쪽 볼을 비비다가 다시 오른쪽 볼을 비볐다.

“자.”

재영이 뒤돌았다. 이번에는 재영이 자신의 품에 나를 가둔 꼴이 되었다. 재영은 품에 나를 안고 한입 크기로 자른 토스트를 내밀었다. 입을 살짝 벌리자 그 안으로 뜨겁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식은 토스트 조각이 들어왔다.

“맛은 괜찮아?”

“응. 맛있어.”

재영이 손가락으로 내 볼을 톡 건드렸다. 재영은 가끔 볼이 옴폭 파일 정도로 볼을 꾹 누르기도 했고, 양손으로 꽉 잡아 두 뺨 모두를 눌러보기도 했다. 지금도 가볍게 볼을 툭 건드리던 손가락 끝으로 점차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양쪽 볼에 옴폭 작은 홈이 파였다.

“맛있어서 행복하지?”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우물대며 토스트를 씹던 동작을 멈추었다.

“응. 행복한 맛이야.”

재영은 자주 행복을 물었다. 내 답이 행복하다는 하나의 답으로 결론지어질 게 뻔한데도 재영은 행복을 묻고 행복하다 답하는 나를 만족스럽게 보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재영은 내 답에 만족한 얼굴을 지었다. 내가 입에 든 토스트를 다 먹어가자 재영은 곧장 토스트 한 조각을 더 들고 기다렸다. 재영은 내가 다 먹고 나서야 자신의 식사를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내가 먹는 걸 지켜본 후에야 자기 식사를 시작하는 식이었다. 내가 빠르게 몇 입을 더 먹어야 재영이 먹기 시작할 거란 걸 알기에, 재영이 주는 걸 거절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볼이 미어지게 몇 입을 더 먹고 나자, 그제야 재영은 남은 토스트를 제 입에 물었다.

“맛있다.”

“또 해줄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멀뚱히 서서 눈만 쳐다봤다. 재영은 토스트 한 조각을 베어 물고는 다시 자기 가슴 앞을 가리켰다.

“아까 등에 해준 거, 앞에도 해줘.”

“참나.”

“차별하는 건 안 되지.”

말 같지도 않은 이유가 귀여워 웃음이 새어났다. 재영의 가슴에 볼을 붙이고 느리게 볼을 비볐다. 재영이 토스트를 오물대며 씹는 박자에 맞춰 가슴이 들썩거렸다.

이른 오후인데도 학교로 가는 길의 하늘이 어두웠다. 다가올 저녁에 비가 올 것 같았다. 오늘 저녁에 비가 오는지 묻자 재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를 따라 차창 밖 하늘을 짧게 올려다본 재영이 다시 내게 시선을 옮겼다.

“예보에서는 늦은 밤에나 올 거라고 했으니까. 아마 저녁까지는 아닐 거야.”

“다행이다. 집에 올 땐 비 안 내려야 하는데.”

“미리 우산 하나 사 갈까?”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혹시 안 오면 들고 다니기 귀찮기만 하고.”

“우리 애기는 참 귀찮은 것도 많지.”

재영이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회갈색 빛이 감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사나운 바람이 창을 스치며 지나갔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재영과 짧게 인사했다. 먼저 가라는 말을 당부하듯 던지자 재영은 물끄러미 웃기만 했다. 수업시간을 확인하며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학업에 열을 올리는 과는 아니라서 팀 프로젝트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비록 명분뿐인 프로젝트지만 그래도 학년이 오르니 벌써 두 과목에서 팀 프로젝트로 과제를 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국적이 달라 언어도 제각각인 아이들은 성적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지난주 수업이 끝나고 짧게 가졌던 미팅에서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서로서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를 원했다. 잘할 필요도 없으니 교수에게 퇴짜 맞지 않을 정도의 과제만 적당히 내자는 게 다수의 의견이었다. 내 생각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실수라면 그 ‘적당히’라는 것의 개념을 정하지 않고 무턱대고 오케이를 외친 점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한 명도 안 오냐고.”

수업을 마치고 모이기로 한 C-4 강의실 앞이었다. 수업에 팀원 중 아무도 오지 않아 걱정하긴 했지만, 설마하며 넘긴 게 화근이었다. 메신저 화면은 계속 붉은 점만 깜박이며 모두의 부재를 알렸다. 벌써 약속 시간에서 삼십 분이 지났다. 휴대폰의 배터리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 가방 앞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차가운 복도 벽에 등을 붙여 기댔다.

“그냥 재영이랑 갈 걸 그랬네.”

팀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Peer assessment’라는 조원 평가를 거치게 된다. 교수가 과제를 평가할 때, 프로젝트 작업에서 기여도가 낮거나 불성실한 멤버를 참고해 점수를 매길 수 있게 해주는 평가 자료였다. 과제가 끝나면 모든 학생들은 이 조원 평가서를 제출하게 된다. 그래서 성적에는 연연하지 않아도 기본은 지킬 줄 알았는데 첫 미팅부터 전원 펑크였다. 나만 어리석게 그 제도를 신뢰한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모든 팀원의 태도를 불성실이라고 쓴다 한들 나머지가 그렇게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거였다.

“하, 씨. 그냥 집 갈…….”

“Hey.”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서 그냥 집에 가버릴까 고민하는데 강의실 앞으로 같은 팀원인 카를로스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멕시코에서 온 카를로스는 얼굴선이 굵고 눈이 깊었다. 그는 190에 가까운 큰 키와 덩치를 가진 팀원이었는데, 그런 카를로스가 달려오자 복도바닥이 다 울리는 듯했다. 내 앞까지 다가온 카를로스는 상체를 숙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Hi.”

숨을 몰아쉬고 건네는 인사에 안 오는 줄 알았다고 했더니 카를로스는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액정이 완전히 깨진 휴대폰이 카를로스의 얼굴 옆에서 흔들리는 걸 보다 웃고 말았다. 어찌 됐든 한 명이라도 와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팀원 중 둘은 나왔으니 미팅의 명분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명분 있는 미팅에 참여한 서로의 증인도 된 셈이었다. 평가표를 낼 때도 유리할 것이다.

카를로스는 손바닥을 펼치더니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내밀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메신저 아이디를 적어달라고 했다. 자기가 휴대폰을 화장실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액정만 깨진 게 아니라 완전 먹통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치고 오려다가 늦은 거니까 넌 봐줄게.”

중얼대며 카를로스의 두툼하고 커다란 손바닥을 잡아끌었다. 카를로스는 낯선 한국말이 궁금한지 고개를 기울여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팀 프로젝트를 위해 만든 메신저 아이디를 손바닥에 썼다. 아이디를 다 쓰고 펜과 함께 손을 돌려주었다.

“HOJ… J…….”

카를로스는 내가 쓴 아이디를 하나씩 읽었다. 내 이름으로 만든 아이디라 카를로스의 눈에는 낯선 알파벳 조합으로만 보이는 듯했다.

“호정.”

가슴 앞을 가리켰다. 카를로스는 그제야 내 이름과 아이디의 알파벳을 조합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 적힌 알파벳을 보던 카를로스가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ha. Cutie name.”

호정이라는 이름에 귀엽다를 떠올리는 한국인은 없을 테지만, 카를로스는 멕시코 사람이니까. 굳이 답하지 않았다. 머리에는 얼른 팀 프로젝트 관련 이야기를 마치고 비가 오기 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카를로스에게 강의실 입구를 가리키며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비록 여섯이나 되는 멤버 중 모인 건 단 둘뿐이지만 둘이서라도 뭐든 해야 했다. 카를로스는 나를 따라 강의실로 들어가려다 복도 끝을 가리켰다. 카를로스가 가리킨 곳을 보니, 재영이 양손 가득 커피 캐리어를 들고 복도 끝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재영아.”

재영을 부르며 카를로스를 뒤돌아보았다. 카를로스는 “Korean.”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단순히 한국인이라는 걸 알아서 재영이 내 친구라는 걸 알았을까. 생각해 보니 이 수업이 끝날 때 재영이 강의실 앞에서 나를 기다린 적이 많았다. 나와 재영이 친구라는 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들 아직도 다 안 온 거야?”

“아직도가 아니라 아예 안 올 거 같아.”

“그래? 괜히 많이 샀네.”

재영은 픽 웃으며 캐리어에 담긴 커피 하나를 꺼내 카를로스에게 내밀었다. 카를로스는 고맙다고 말하며 커피를 받았다.

“폰 꺼져 있던데.”

“아. 배터리가 다 되어가긴 했는데.”

가방 앞에 꽂았던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재영의 말대로 휴대폰은 이미 방전되어 꺼진 상태였다.

“그새 꺼졌나 보다.”

“휴대폰은 꼭 켜 놔. 걱정돼.”

“응.”

재영이 잔잔하게 웃으며 내 눈높이에 자신의 눈을 맞추었다.

“둘뿐이면 오늘은 굳이 미팅 안 해도 되지 않아?”

“아… 그래도 시간 내서 온 애도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가기는 좀 그래서.”

“음.”

재영은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켜 내 뒤에 선 카를로스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재영은 상냥한 얼굴로 카를로스에게 강의실에 같이 들어가도 되겠느냐 물었다. 같이 사는 친구라 집에 같이 가는 게 편하다는 말을 덧붙이자, 잠시 망설이던 카를로스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흘깃거렸다.

“봐. 얘도 별로 안 하고 싶은 눈치잖아?”

“그렇긴 하겠지.”

가방을 앞으로 돌려 미리 준비해두었던 자료를 내밀었다. 비록 인터넷에서 급하게 찾은 자료일 뿐이지만 둘이서 기본이라도 해보자는 의미였다. 내가 내민 파일을 차르륵 빠르게 넘기며 훑은 카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nough.”

카를로스는 자료를 빠르게 보더니, 조사해 온 마케팅 사례 중 제출할 만한 자료는 자신이 추리겠다고 했다.

“호정아. 가면 안 돼? 네 팀원도 벌써 가고 싶어 하잖아.”

“알겠어. 잠시만.”

고개를 끄덕인 뒤 카를로스를 보기 위해 뒤돌았다. 카를로스에게 한 번 더 진짜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원한다면 짧게나마 자료를 추리는 것까진 오늘 같이 하고 갈 수 있다고 했다. 카를로스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내가 준 파일 속 자료를 다시 훑기 시작했다.

“This one.”

자료를 보던 카를로스가 검지로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카를로스는 따로 추릴 필요 없이 이 사례 하나만 파고들어 발표하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지금 동의한다면 집에서는 해당 자료만 조사해오겠다는 뜻이었다. 카를로스는 해당 자료가 멕시코의 축구팀 마케팅 사례이기 때문에 자국어로 검색하면 자료가 더 많을 거라고 했다.

“오, 좋을 것 같…….”

“…호정아.”

등 뒤에 선 재영이 내 허리와 팔 사이로 자신의 팔을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밀착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재영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그저 평온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답을 채근하듯 묘하게 비틀어진 눈썹이 눈에 띄었다.

“응? 가자.”

재영이 볼을 살짝 부풀렸다. 재영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있는 순간을 마뜩찮아 했다. 지금 같은 상황도 예외일 수 없었다. 팀 프로젝트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없는 곳에 나 혼자 있을 뻔한 상황을 극도로 불쾌해하는 중이었다. 재영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아래로 수그러든 고개가 내 어깨에 안착했다. 어깨에 턱을 붙인 채로 재영이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었다.

“응? 호정아… 호정아.”

“잠시만.”

“가자. 집으로. 응?”

재영이 어린아이처럼 떼쓰듯 되물었다. 다시 앞을 올려다보니 나와 재영을 의아한 눈으로 보던 카를로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카를로스는 보고 있던 파일을 덮어 자신의 팔에 끼웠다.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이미 엉성해진 시선은 나와 재영 사이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럼 미팅은 여기서 끝내고 다음 수업 때 보자고 말하자 카를로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이 카를로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Lovely meeting you. (만나서 반가웠어.)”

재영이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카를로스는 어깨를 들썩이며 재영의 손을 잡았다. 가방을 챙긴 카를로스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인사를 끝으로 카를로스가 나를 스쳐 가고 나자 재영이 내 어깨에 밀착해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가는 거지?”

재영은 피곤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복도를 돌아 나가는 카를로스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래. 가자, 가.”

“응. 우리 집에 가자.”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재영의 손에 들린 남은 커피 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러려고 왔지?”

“뭐가?”

재영이 입꼬리를 당겨 웃다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니야. 커피 주려고 온 거야. 맛, 괜찮지? 저기 17번가 앞에 새로 생긴 카페인데 같은 과 애가 추천해서. 다음에 같이 가자.”

재영은 나를 품에 안은 채로 뺨을 쓰다듬었다. 거짓말인 건 알았다. 분명 나 혼자 두기 싫은 불안함에 나를 데리러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팀원들이야 있겠지만 나를 일찍 빼가려고 집에 먼저 가지 않고 온 것도 티가 났다. 고로 지금 마시는 이 커피도 핑계일 뿐이었다.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재영을 아는 내 눈에는 그 면면이 티 날 수밖에 없었다.

“…쟤 죽이고 싶다는 생각 안 했어. 진짜.”

재영이 속삭였다.

“죽여?”

카를로스를 죽이는 상상까지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잠시 얼빠진 얼굴로 재영을 살짝 밀어냈다. 재영이 미간을 좁히며 다급히 다시 나를 품에 안았다.

“아니. 친구끼리 어깨 두드리고 눈 굴려서 쳐다볼 수 있는 거니까. 나 이해해. 네 어깨 두드린다고 손톱까지 빼고 그러지는 않아. 나 진짜 별생각 없었어. 멕시코 쪽 애들이 학기 이수 율이 가장 낮으니까 당장 멕시코로 돌아가서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어. 아직도 나 의심해?”

재영은 시무룩한 얼굴로 이마를 내 어깨에 비볐다.

“손톱은 왜 빼는데.”

“아까 쟤가 어깨 두드릴 때 손톱이 네 어깨뼈, 여기를 찔렀잖아.”

재영이 손으로 내 어깨 끝을 살포시 눌렀다.

“물론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아니고.”

“그런 생각하지 마. 진짜.”

“…이제 안 할게.”

재영이 아이처럼 웃으며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집에 갈까?”라는 말을 하면서도 재영은 내 안색을 살피듯 올려보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진한 얼굴이었다. 재영은 내가 웃는 걸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재영이 내쉰 숨이 목덜미를 따뜻하게 훑으며 지났다.

늦은 시간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그날 새벽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잠결에 재영을 찾기 위해 침대 옆을 더듬거렸다. 웬일인지 당연히 옆에 있어야 할 재영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아침이면 내 옆에 누워 나를 안고 있는 재영이었기에 눈을 비비며 시트 위를 더듬었다. 그 어디에도 재영이 만져지지 않았다.

결국 몽롱하게 떴던 눈을 바로 떴다. 재영은 창가로 스민 새벽의 어스름을 마주한 채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밤에 내린 비 덕에 어스름이 어두웠다. 흑색이 침투한 창 앞에 재영만 덩그러니 놓인 듯 느껴졌다. 재영은 왼쪽 손톱을 물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나머지 다리로는 바닥을 짚은 재영의 눈 위로 새벽의 아득한 어스름이 쏟아졌다.

재영은 물고 있던 자신의 손톱을 깨물었다. 까득, 까득. 손톱이 깨물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재영은 시트를 지그시 누른 반대편 손에 힘을 줬다. 뼈마디가 달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재영은 눈을 감고 다시 손톱을 깨물었다. 입술 사이에 물려있던 엄지손톱이 까득 소리가 날 때마다 튕겨 나왔다. 눈을 감았다. 마치 봐선 안 될 걸 본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밝아서 그래?”

재영은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손을 내리고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다행히 내가 잠에서 깬 걸 눈치챈 건 아니었다. 재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들춰진 커튼을 가리고 내 옆에 누웠다. 잠든 내 몸을 살포시 당겨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복도에서 나를 안았을 때와 같은 낮은 숨이 귓불을 스치며 지났다. 깊게 잠든 척 고른 숨을 내뱉었다. 재영의 손이 내 등을 부드럽게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우리 애기는 행복해야 해. 내가 바라는 건 그거야.”

그 후로도 재영은 꽤 오랜 시간 내 등을 쓸고 땀에 젖은 이마를 대신 닦아주었다. 새벽 내내 재영의 손길을 받으며 한 가지 생각을 했다. 내게 지금 행복을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는 답보다는 ‘그렇다’는 답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지금 재영은 행복한 걸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시 이전처럼 자신을 가린 현실이. 고작 내가 함께 있다는 이유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생각에 갇혀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재영은 내가 몸을 떨자 고개를 기울여 얼굴을 살폈다. 곧 좀 전보다 더 부드러운 손길이 내 등을 쓸며 내려갔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아침이 되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재영의 가슴에 볼을 붙였다.

“깼어?”

“으응.”

비몽사몽으로 답했더니 재영이 가슴을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화 왔었어. 이번 부활절 방학 때는 너랑 여행 가고 싶으시대.”

“여행?”

재영이 더욱 힘을 들여 나를 안았다.

“응. 아까 전화로 그러시던데.”

“넌?”

“난 여기. 여기서 너 기다리면 돼.”

재영은 뒤늦게 뭔가를 떠올린 듯 내 턱과 볼을 만지작대던 손을 멈추었다.

“아버지는 걱정 마. 간병인 두 명 정도야 내일이라도 구할 수 있으니까.”

재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 볼에 입을 맞췄다. 늘어지게 붙었다가 떨어지던 입술이 다시 볼에 안착해 붙었다.

과제와 시험으로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일주일 정도의 짧은 방학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방학이었는데 막상 방학이 다가오니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지난 학기에 아쉬움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챙기고 있자니 또 하나의 학기가 끝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재영은 오늘 있을 마지막 시험 후 동기들과 간단한 파티가 내정되어 있다고 했다. 재영처럼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사람들은 기업의 오너이거나 오너의 자제인 경우가 많았다. 그 자체로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이자 인맥이 될 수 있기에 재영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임이나 파티는 거절하지 않고 참석했다.

비가 쏟아지는 창가에 서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켰다. 비가 오니 조심해서 오라는 연락을 남기고 사납게 비를 내리는 하늘을 응시했다. 그 후로도 종종 새벽에 눈을 뜬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재영은 홀로 깨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재영은 뭐가 불안한 걸까. 무엇이 재영을 초조하게 하는 걸까. 무슨 생각에 빠져 있기에 깊게 잠들지 못하는 걸까. 질문이 중첩되며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애기야. 아빠, 곧 도착.]

때맞춰 도착한 재영의 답에 웃음이 났다.

“미친놈.”

재영은 아직도 종종 자신을 스스로 아빠라고 지칭했다. 애칭인가 싶어 내가 먼저 아빠라고 부르면 재영은 묘하게 답을 회피하며 눈을 굴렸다. 그 모습이 재밌어 일부러 재영을 아빠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신이 먼저 아빠라 지칭했을 때 내가 답을 피하면 안 됐다. 그러면 재영은 집요해졌다. 어떻게든 나를 닦달해 아빠라는 답을 얻어냈다.

[네. 파파.]

장난을 섞은 짧은 답을 보내고 창문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취한 건가.”

하늘에선 연신 사나운 비가 쏟아졌다. 구멍이라도 난 듯 물을 흩뿌려대는 하늘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외투를 챙겼다. 집 앞에서 재영을 기다리려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재영의 차가 들어올 도로의 입구를 향해 걸으며 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 거의 다 왔어.

“나 지금 골목 입구인데, 이미 지난 건 아니지?”

-입구?

재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구로 들어오는 재영의 차가 보였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재영이 창문을 내려 우산을 쓰고 있는 나를 확인했다.

“잠시만.”

“응.”

재영은 창문을 올리고 기사에게 돈을 내밀었다. 차에서 내린 재영의 옆에 서둘러 붙었다. 그새 재영의 머리와 몸이 비에 젖었다. 우산을 씌워주려 하자 재영이 우산을 가져가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다.

“집 앞에 대라고 했으니까 알아서 댈 거야. 우린 걸어서 가자.”

재영의 따뜻한 손이 젖은 어깨를 감쌌다. 짙게 풍기는 술 냄새에 흘깃 올려다보니 재영의 뺨이 하얗게 상기되어 있었다.

“비 맞게 왜 나왔어.”

“걱정돼서.”

“내가?”

재영이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이 젖은 내 볼을 조물조물 만졌다.

“넌 내 걱정 안……!”

끼이익-

우리보다 앞서가던 재영의 차가 빗길에 멈춰 섰다. 보닛과 무언가가 부딪힌 듯 둔탁한 마찰음이 도로를 울렸다. 웃으며 말을 잇던 재영이 급하게 말을 멈추고 내게 우산을 넘겼다. 재영은 빗길을 달려가 멈춘 차 앞에 섰다. 우두커니 서서 차 앞을 확인한 재영이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명백한 저지의 표현이었다. 그건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차에서 내린 기사가 재영의 앞에 섰다. 기사는 안절부절못하며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손과 어깨가 눈으로 보기에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재영은 운전석으로 다가가 헤드라이트를 하향으로 바꿨다. 도로 바닥을 비춘 조명으로 차 앞에 쓰러진 물체를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재영은 차의 시동을 껐다.

“뭔데.”

재영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길고양이인 거 같아.”

재영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바닥에서 튄 빗물이 옷을 적셨다. 재영은 트렁크에서 기사가 타고 돌아갈 자전거를 꺼내주고 팁을 더 건넸다. 놀랐을 텐데 조심히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기사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다가 차는 자신이 마저 주차하고 떠나겠다고 했다.

“흠.”

입술을 말고 잠시 고민하던 재영이 다시 차 앞으로 걸어갔다. 재영을 따라갔다. 빗방울이 무겁게 떨어지는 재영의 머리 위에 우산을 덮자, 재영이 우산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뒤에 서 있어. 보면 놀랄 거야.”

“괜찮아.”

괜찮다는 말에도 재영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 결국 차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재영이 자기 코트를 벗어 손에 쥐었다. 다가가 손을 내밀자 망설이던 재영이 벗은 코트를 내게 건넸다. 바닥에 앉은 재영의 몸 너머로 검붉은 형체가 얼핏 보였다. 놀란 마음에 고개를 확 젖혀 피했다. 재영은 두 손으로 물체를 들어 도로 밖으로 비켜섰다. 입을 가리고 재영의 뒤를 따랐다. 기사가 다시 운전석에 올라 차를 집 앞까지 몰고 가는 걸 보다 길옆에 고양이를 내린 재영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재영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바닥에 내린 고양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고양이… 설마 죽은 거야?”

재영은 피가 묻은 손으로 제 눈썹 뼈를 지그시 눌렀다. 내가 다가서는 데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시선이 꼿꼿했다. 재영의 옆에 그와 같은 자세로 앉았다. 재영은 여전히 올곧은 눈으로 늘어진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빗물에 시야가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재영의 눈동자가 혼탁했다.

“재영아.”

재영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사체처럼 꼼짝하지 않고 늘어진 고양이의 배 위에 천천히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직 뜨거워.”

우산을 바닥에 내리고 일어섰다. 재영의 등 뒤로 가 재영의 몸을 끌어안았다.

“한재영.”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재영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고양이의 배 위에 올려진 재영의 손이 달싹거렸다.

“호정아. 얘 아직 살아있어.”

“진짜야? 살아있어? 하…….”

재영의 손이 아니라 고양이가 옅은 숨을 내쉰 거였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마음이 급해졌다. 끌어안은 손을 풀고 재영의 옆에 섰다. 어둠 속에서도 비 아래 늘어진 고양이의 모습이 처참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여기 배가 뜨겁고 내쉬는 숨이 축축해. 딱 죽기 직전처럼.”

“비켜.”

재영이 멍한 눈을 내 쪽으로 돌렸다. 시선은 분명 나를 향했지만 나를 보는 눈은 아니었다. 흐릿하고 혼탁한 눈은 세찬 빗물에도 본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빗물이 고스란히 재영의 얼굴을 적셨다.

“한재영. 난 얘 살릴 거야. 그러니까 넌 비켜.”

재영이 빗물에 젖은 눈을 비볐다.

“당장 일어나.”

“호정아.”

재영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알던 애야? 왜 살리려는 건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알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금 더 있으면 죽…….”

“얘 죽으면 나 너 안 봐. 그러니까 비켜.”

재영이 느리게 눈을 떴다.

“나는… 호정아. 나는 못 변해.”

재영이 짜증스러운 움직임으로 제 눈썹 뼈를 긁었다. 뒤이어 낮게 읊조린 욕설이 빗소리에 묻혔다.

“누가 변하래? 일어나라고. 당장.”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입술을 짓이겼다. 단호하게 말하고 재영을 밀쳤다. 재영 역시 나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거친 빗물이 재영의 뒤통수를 때리며 떨어졌다.

“안아주면 일어날래?”

재영이 휘청대며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이 녹녹하게 담겨 혼탁했던 눈빛이 본래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히 정신이 든 것 같았다. 재영은 아이처럼 두 팔을 벌리며 나를 찾았다.

“그래. 이리 와. 나 있잖아.”

“응.”

재영은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간절하게 내 등을 꼭 쥐었다. 외투가 구겨질 정도의 센 힘이었다. 굵은 비는 여전히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치 나와 재영을 책망하듯 쏟아졌다. 재영의 숨은 점차 거칠어지다가 이내 차분해졌다. 재영의 손에 우산을 쥐여 주고 점퍼를 벗었다. 점퍼를 펼쳐 힘없이 늘어진 고양이를 감싸 안았다. 품에 고양이를 안자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재영의 말대로 고양이는 축축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숨이 붙은 상태였다.

재영이 젖은 머리를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이 보지 못하게 고양이를 두 손으로 조심히 안아 품에 바짝 당겼다.

“병원 가자. 살릴 수 있어.”

재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눈동자를 살짝 내리고 망설이던 재영이 마침내 휴대폰을 꺼냈다. 재영은 택시를 부르고 주변에 응급으로 수술이 가능한 동물병원을 찾았다. 고양이를 품에 온전히 안고 오른손을 들어 재영의 피 묻은 눈썹을 문질러주었다. 재영은 입꼬리를 올려 억지로 미소 지었다.

병원에 도착해 시린 눈을 비볐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자 머리카락에 붙어있던 빗물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며 떨어졌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영이 티슈를 뽑아 와 내 이마와 뺨을 닦았다.

“우리 호정이. 감기 걸리면 어떡하지?”

재영의 두 손을 끌어 앞에 모으게 했다. “기도해.”라는 내 말에 재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기도?”

“저 아이 살려달라고 기도해. 아무한테라도 좋으니까 제일 잘 들어줄 분한테 해.”

“하…….”

재영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뻐근한 목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묵묵히 재영의 손을 끌어 가운데에 모았다.

“기도해.”

재영의 살인 욕이나 폭력성은 평생 재영을 따라다닐 것이다. 내가 옆에 있으니 억지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 그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삐딱한 시선으로 날 쳐다보던 재영이 마침내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천천히 눈을 감은 재영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너무 늦은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수술을 마친 의사의 내일이면 깰 거라는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고양이는 수액을 맞은 채로 수술실에서 나왔다. 마취가 덜 깨 혀를 빼꼼 내밀고 늘어져 있었다. 그런 고양이를 보는 재영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치료 다 하면 집에서 기를 거야. 이름은 뭐가 좋아?”

재영이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름 뭐가 좋아?”

재영이 내렸던 시선을 올렸다. 나를 보는 눈에 담긴 감정이 다른 것도 아닌 서운함이라는 것에 실소가 터졌다. 망설이는 듯 보이던 재영이 입을 열었다.

“그냥. 고양이?”

“고양이 이름을 고양이로 해?”

“그럼 성 떼고 양이.”

재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티슈를 마저 뽑았다. 내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는 손이 부드러웠다.

그날 새벽도 재영은 자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다. 까드득, 까드득, 손톱이 깨물리는 소리가 길어졌다. 여태 외면했던 재영의 불안을 그날은 외면할 수 없었다. 이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은 꽤 자주. 오늘처럼 재영의 본모습이 다시 나타나는 순간이 올까 두려워했었다.

내면의 나는 나약하다. 나는 여전히 재영이 두렵고 무섭다. 그런데도 생각의 끝은 항상 하나였다. 생각의 마지막엔 재영을 떠나게 될 내가, 그러고도 평생 한재영만 떠올릴 내가 더 무서웠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재영에게 다가갔다.

“안 잤어?”

황급히 손을 내린 재영이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아까 그 일 때문에 못 자는 거지? 놀라게 해서 미안해.”

걱정 기 가득한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 없었다.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재영이 내 볼에 입술을 붙여 살짝 깨물었다.

“재영아. 여행, 같이 갈래?”

“여행을?”

재영은 여전히 내 뺨에 입술을 붙인 채로 물었다. 뺨에 붙은 입술이 달싹거리며 간지러움을 일으켰다.

“응. 너랑 떨어져 있는 거 나도 싫어.”

어리광을 피우며 재영에게 안겼다. 재영은 내 등을 안아 조심히 침대에 눕혔다.

“어머니는 너랑 둘이서만 가고 싶으실 거 같은데.”

“내가 너 혼자 두고 가기 싫어서 그래.”

“그건 나도 그래.”

재영은 만족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답하고 내 턱을 당겨 세웠다. 고개가 반쯤 들리고 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재영의 촉촉한 입술이 입술 위를 잠식하듯 덮었다. 재영의 입술 덕에 입술 위가 물기로 젖어 들어갔다.

“내 애기. 도대체 누가 이렇게 예쁘게 키웠을까?”

혼자 두고 가기 싫다는 내 말이 재영의 마음에 쏙 든 것도 모자라 기특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길옆에 앉은 재영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내 입술을 핥아 깨물던 재영이 키스를 멈추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품에 들어온 재영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재영아. 우리 약속 다시 할까?”

“…나 잘 지키고 있잖아.”

불안해졌는지 재영이 내 등 뒤를 감싼 손에 바짝 힘을 들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순간을 줄게.”

품에 안겨 있던 재영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표정을 굳힌 채로 빤히 내 눈을 응시하던 재영이 고개를 저었다.

“또 도망가려고 그래?”

재영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재영아. 난 적어도 너랑 있는 지금이 행복해.”

“나도 마찬가지야.”

내 등을 감싼 재영의 손을 끌어당겼다. 재영의 깔끔하고 정갈한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불균일하게 뜯어진 엄지손톱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 내가 안전하고, 네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재영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 비틀리며 어긋났던 시야가 다시 맞춰졌을 땐 재영의 눈은 이미 고요하게 가라앉은 채였다. 내 의도가 무엇인지 찾는 눈빛이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속눈썹 위에 입술을 붙였다.

“너 두고 절대 어디도 가지 않아.”

“그걸 어떻게 믿어?”

재영이 표정을 굳혔다.

“네가 저지른 짓들이 있기 때문에… 나, 너한테 항상 행복해야 한다고는 말 못 해. 그런데 적어도 있잖아. 재영아. 아무도 없이 우리 둘만 있을 때, 그럴 땐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재영에게 돌아올 땐 한 가지만 생각했었다. 양심 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내가 바란 행복이 나의 행복이었을까. 맹세하건대 그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그런 식의 국지적인 바람은 아니었다.

내가 바란 건 재영과의 행복이었다. 재영과 함께하고 싶었다. 세상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게 오직 우리 둘뿐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만의 세상에선 행복해지고 싶었다. 재영과 함께하기로 결심했을 때 내가 바란 건 우리의 행복이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었다.

“네가 말한 그런 순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해도 떠나지 않겠다는 거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말까지는 아니야. 범위 내에서.”

일그러지던 표정이 다시 차분한 본래의 재영으로 돌아왔다.

“널 안을 때, 누군가 널 볼 때, 네가 다른 사람이랑 말하고 웃을 때도. 속에서는 더러운 생각이 솟구쳐. 이 중에 너와 단둘만 있는 순간은 내가 널 안을 때뿐이야.”

“그럼 그럴 때 해. 매번은 안 되겠지만.”

“역시 어렵네.”

재영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차갑게 식은 재영의 볼을 만지작댔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끝에서 튕겼다.

“쉬운 거 싫어하잖아.”

“그건 그렇지.”

재영이 흡족하게 웃으며 내게 몸을 붙였다.

“어려워서 더 좋아.”

새벽마다 재영이 그랬듯 이번엔 내가 재영의 등을 다독였다. 불규칙하게 울리던 재영의 심박이 점차 차분해졌다.

“안아줄까?”

재영이 고개를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품에 재영을 꼭 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게 완전히 밀착해 안았다. 아기새처럼 떼를 쓰고 품을 벗어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재영이 보일 때마다 나는 또 안쓰러움을 느끼고 만다.

재영의 손을 맞잡아 으그러진 엄지손톱에 입술을 붙였다. 혼자 고민하고 아파하지 말라는 진심이 전달되길 바랐다. 품에 안겨 있던 재영이 고개를 내밀어 내 입술을 물었다.

“키스도 해줘.”

“이미 하고 있으면서.”

재영이 두 눈을 감고 웃더니 다시 내 입술 위에 입술을 붙였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 덕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림도 또 그려줘.”

“그건 안 돼.”

“…응.”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떼려는 재영의 턱을 잡아 더 진득하게 입술을 붙였다. 차가운 입술 사이로 혀를 넣어 더딘 움직임으로 재영의 혀를 옭았다. 재영이 내 어깨를 잡아 잠시 틈을 벌렸다.

“아. 그거구나? 이제 내 몸에다 그리려고.”

혀를 쯧 차며 손바닥으로 재영의 양쪽 볼을 눌렀다. 볼똑하게 튀어나온 입술에 촉,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재영을 아래에 두고 허리 옆에 종아리를 붙여 앉자 아래가 미묘하게 어긋나며 부딪혔다.

“이제 두 번은 안 그린다니까.”

“왜에. 여기 그려줘.”

재영이 자신의 쇄골 아래를 가리키며 웃었다. 재영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웃는 재영을 보는 내 눈이 뜨거워졌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 남자를, 한재영을 아마 평생 오롯이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거다. 재영 또한 평생 자신이 사랑하는 나에게서 온전한 이해를 바랄 수는 없을 거다.

그런데도 나는 재영을, 내가 평생을 바쳐도 온전히는 이해하지 못할 이 남자를, 적어도 온 마음으로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을까. 재영 또한 이해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를 사랑할 테니까.

재영이 맹목적으로 나를 사랑하듯이 나 또한 속절없이 재영을 사랑한다. 이를테면 밥을 먹다가 문득 맞은편에 앉은 재영이 나를 부를 때, 어스름이 스미는 새벽녘 떠는 나의 등을 꼭 안아 쓰다듬는 재영의 손길에서, 나를 보는 눈빛에서 사랑을 깨닫는다.

그런데도 가끔은, 아주 긴 시간의 틈에 한 번 정도는 골목길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던 재영의 얼굴을 떠올린다. 말갛던 그 얼굴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기도 한다.

황새풀 군락이 저물면 그 위로 겨울 서리가 내린다. 서리는 자비 없이 날려 군락을 하얗게 잠식한다. 서리가 잠식한 그 틈에도 피는 꽃이 있다 했다. 이따금 바스러진 군락을 덮은 서릿발보다 그 안에 핀 꽃 한 송이에 더 시선을 뺏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황새풀 군락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서릿발 내린 군락을 안아주고 볼을 비벼 줄 것이다. 황새풀이 가장 황새풀다울 수 있는 가을이 올 때까지. 마른 황새풀 군락이 내 숨에 우리만의 가을이 왔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때까지, 나는 재영을 안아줄 것이다.

* * *

엄마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여행에 재영도 함께 가도 되느냐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호쾌하게 긍정을 표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재영이가 같이 가면 더 좋지, 라는 목소리가 커서 옆에서 전화를 엿듣던 재영이 나보다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재영이 엄마가 엄마 질투할 것 같은데.

엄마가 웃으며 말을 붙였다. 재영의 부모님이 알면 서운해 하려나, 생각하며 옆에 앉은 재영을 돌아보았다. 재영은 잔잔한 미소를 걸친 채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여행 어디로 갈지, 생각해둔 곳은 있어?”

엄마와 여행을 간다고만 정해두었지 딱히 구체적인 일정을 정한 건 아니었다. 계획적이지 못한 탓에 단순히 한국에 가서 엄마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을 가야지, 정도만 생각해 두었었다. 재영이 같이 간다고 생각하니 하다못해 여행 장소와 일정이라도 미리 정해야 할 것 같았다.

-엄마는 그냥 바다 보러 가고 싶었는데, 재영이도 같이 간다니까 너희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게 더 좋지.

재영이 자신의 휴대폰을 내 앞에 들어 보였다. 재영이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마치 엄마의 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입을 뻐금대며 ‘어디?’라고 묻자 재영이 그 아래 뜬 글자를 가리켰다.

양양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웃는 재영의 얼굴을 재차 확인했다. 재영은 확신에 찬 얼굴로 다음 사진으로 화면을 넘겼다. 소금같이 하얀 모래사장과 그 아래 흐르듯 고인 하늘색의 바다가 마치 그림 같이 어우러진 곳이었다.

“엄마. 양양 어때? 강원도 바다도 좋을 거 같은데. 그렇게 멀지도 않고.”

-두 아들이랑 가는 건데 어디든 안 좋을까.

“그럼 재영이랑 내가 좀 더 알아볼게.”

-그래. 아들들, 조심히 와.

엄마의 해맑은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재영이 다가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엄마가 바다 보고 싶어 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전에 통화 때 몇 번 얘기 하셨어. 재영이는 바다 좋아하니? 이렇게. 보통은 그거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이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난 엄마가 바다 좋아하는지도 몰랐어.”

재영이 눈동자를 굴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든 재영이 내 볼을 잡아 양옆에서 꾹 눌렀다.

“왜?”

“응?”

느닷없는 재영의 왜, 라는 질문에 고개를 기울여 되물었다.

“너 왜 기분이 안 좋을까 해서.”

내가 기분이 안 좋았나. 굳이 이유를 찾자면 엄마의 사소한 말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미안함과 재영의 부모님을 미처 생각하고 챙기지 못했던 마음 때문일 거다. 입술을 오물거리다 마주한 재영의 눈을 슬쩍 피했다.

“너희 부모님도 너랑 여행 가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

“뭐? 호정아.”

재영은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이마를 살짝 덮으며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때도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내가 두 분한테 여행 가자고 하면 기겁하실걸?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로 지내는 게 내 쪽에선 효도야.”

재영은 때때로 지금처럼 살벌한 이야기를 웃으며 했다. 여행을 가자는 자신의 말에 부모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새 상상이라도 해본 건지 재영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여기 흔들다리도 있고. 어머니 조개구이나 회는 다 잘 드시지? 저번에 초밥은 잘 드셨던 것 같은데.”

“응.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으실걸.”

재영의 휴대폰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관광지를 중심으로 누군가가 추천했을 법한 맛집 목록이 그 아래 보였다. 느리게 화면을 내리는 재영의 손을 잡아 멈추었다. 재영이 무심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다행이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리려던 재영이 느리게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난 너희 엄마한테 잘 보여야 하는 처지라서 어머니 말씀하시는 거 잘 기억하는 거야. 넌 엄마한테 잘 보일 필요가 없잖아. 아들이니까.”

이번에도 재영은 내 감정을 나보다 더 먼저 알아챘다.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얼굴에서 나도 모르게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재영의 손이 내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엄마한테 죄책감 느끼지 마. 나도 우리 엄마가 하는 말은 죄다 흘려들어. 근데 너희 엄마 말은 네 엄마니까 잘 기억하는 거야.”

불효를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재영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단호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났다.

“너희 부모님도 뵙고 오자.”

재영은 오른손으로 내 뺨을 만지작댔다.

“고양이 퇴원 전에는 와야 하니까. 오기 전날 우리 집에 하루 들렀다 오면 될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바빠서 집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다. 갔다는 생색은 내면서 둘은 안 봐도 되고.”

중얼대던 재영이 슬쩍 내 눈치를 살피더니 뺨에 닿았던 손에 힘을 주었다. 재영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느새 내 허리를 감싸 안은 재영이 자신 쪽으로 허리를 당겨 안았다. 흣, 앓는 소리를 내며 안기자 재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너랑 바다 보는 거 처음이다.”

재영의 입술이 내 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게.”

입술이 닿았던 뺨을 괜히 문지르며 답했다.

“앞으로도 우리 둘이서 처음으로 하게 될 것들이 더 많겠지?”

재영은 내 손을 끌어 자신의 어깨를 잡게 했다. 재영의 얼굴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입술 사이로 차갑고 단단한 혀가 여린 살을 밀며 들어왔다. 입술 사이를 빠르게 뚫고 들어온 혀는 막상 점막을 훑을 땐 부드럽고 온화하게 움직였다. 잠시 벌어진 틈으로 뜨거운 숨이 차올랐다.

“어머니랑 같이 있으면 당분간 이거 못 하잖아.”

재영의 손이 티 안으로 들어와 늑골을 단단히 감쌌다. 재영의 손아귀에 바짝 들어찬 늑골이 긴장감으로 얼얼해졌다.

“흔들다리, 기대돼. 예전에 한 번 갔었는데 꽤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재밌었어?”

“응. 어릴 때 딱 한 번 갔었는데. 아빠랑 엄마가 두 번은 안 데려가더라. 둘 다 진짜 유별나지.”

이유를 되묻기 전에 다시 재영의 혀가 입술을 잠식해 덮었다. 망설임이라곤 하나 없이 혀를 감싸는 움직임에 절로 허리를 움칠거렸다. 귓바퀴를 타고 소름이 돋으며 전신에 간지러움이 일었다. 손으로 귀를 덮어 만지작대자 재영은 놓치지 않고 내 손을 감싸 끌어내렸다. 곧 내 손보다 조금 더 뜨거운 재영의 손가락이 내 귓바퀴를 감싸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 * *

한국에 도착해 아빠가 계신 병원부터 향했다. 병실에선 아침 일찍 도착한 듯 보이는 간병인 두 분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며 낯선 간병인들과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엄마는 딱히 미리 일러둘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아빠 옆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발끝이 자꾸만 아빠 침대 옆을 맴돌았다. 설명에 긴 시간을 할애하고서도 몇 번이나 돌아서서 잊어버릴 뻔했다며 이것저것 다른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먼저 “엄마, 여기서 시간 다 보내겠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제야 엄마는 소파에 둔 가방을 챙겨 병실 앞에 섰다.

“아빠 혼자 며칠을 두려니 마음이 불편하네.”

엄마가 중얼대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틈에 재영이 먼저 엄마의 옆에 붙어 섰다.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엄마의 손을 꽉 끌어 쥔 재영이 휴대폰에 저장해둔 바다 사진을 열어 보였다.

“여기 바다 바로 앞에 조개구이 맛집이 있대요. 호텔도 바다랑 가까운 곳으로 잡았고. 그러니까, 오늘 밤에는 저희랑 술 한잔해주실 거죠?”

살가운 재영의 말에 엄마의 불안하던 마음도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오랜만에 아들들이랑 술, 좋지.”

엄마가 웃으며 나머지 손을 내게 내밀었다. 다가가 엄마가 내민 손을 꽉 잡았다.

평일 오후, 게다가 겨울 바다인데도 제법 사람이 있었다. 드문드문 선 사람들 사이 커다란 담요를 모래사장에 깔고 앉았다. 바다는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 위해 온다던 엄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담요 위에 앉아 바다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과 연인의 손을 잡고 해안가를 거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린 바람이 뺨과 이마를 스쳤다. 겉에 두른 외투를 바짝 조이자 재영이 자신의 점퍼를 벗어 내 어깨를 덮었다.

“어머니, 저 잠시 차에 좀.”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영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차된 차로 가는 재영을 보다 시선을 엄마에게로 돌렸다. 재영이 덮어준 외투를 벗어 엄마의 어깨로 넘겨주었다. 엄마가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엄마 괜찮은데.”

“춥잖아.”

“다 컸네.”

엄마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귀를 채웠다. 파도 소리를 이토록 절절하고 크게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영상에서 보던 소리와 실제 해변에 앉아 듣는 소리에 이토록 큰 차이가 있구나 깨달을 때였다. 내 어깨 위로 좀 전보다 더 두툼하고 따뜻한 외투의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재영이 웃으며 내 볼을 가볍게 쓸었다. 외투 하나를 더 가져오려고 차에 갔던 거였구나, 깨달았다. 재영이 덮어준 외투를 끌어 입었다. 재영은 엄마의 옆자리에 앉아 바다를 보는 엄마를 쳐다보았다.

“다음에 또 바다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말도 참 예쁘게 하지.”

“진짜예요. 멀리 있어서 호정이랑 저, 늘 마음이 불편하거든요. 한국에 있을 때만이라도 어머니 하고 싶으신 거 다 들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호정이가 어머니 걱정 많이 하니까.”

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재영이 한 말의 진위를 묻는 눈빛에 한숨과 함께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엄마의 미소가 웃음으로 번지는 걸 보며 엄마의 등 뒤로 재영이 손을 뻗었다. 외투를 고쳐 입는 척하며 재영의 손을 맞잡았다. 시린 바람이 잠시 잊힐 정도로 따스한 손이었다.

조개구이와 함께 반주라고 하기엔 꽤 많은 술병을 비웠다. 대부분이 엄마 혼자 비워낸 것들이었다. 호텔로 돌아갈 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엄마를 재영이 업어야 했다.

해변의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해안가를 걸으며 재영의 뺨과 이마를 어루만졌다.

“힘들지?”

“안 힘들어. 넌 안 추워?”

“나 생각보다 추위 안 타나 봐.”

뻔뻔하게 뱉은 말에 재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련할까.”

운동화가 모래알 섞인 아스팔트 바닥을 거칠게 긁어댔다. 재영의 등에서 잠든 엄마의 숨소리가 커졌다. 재영아, 부르고 싶은 걸 참고 다시 재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호텔로 걷는 걸음마다 나를 살피던 재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너 그렇게 자꾸 나 보는 거. 무슨 의미야?”

재영이 오른손이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다가 멀어졌다.

“미쳤지? 엄마 들어.”

등에 업힌 엄마를 살피고 다시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은 금세 아이처럼 눈을 휘어지게 접어 웃기 시작했다. 해맑은 웃음이었다. 술기운이 들었을 때 잠시나마 풀어지는 재영의 얼굴이 좋았다. 재영의 본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이따금 이런 식으로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을 짓는 재영을 보면 나 또한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이었다.

터덜터덜 발을 끌며 걸었다. 이전에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재영과 나의 발이 같은 속도로 맞춰지는 게 좋았다.

“웃긴 말인 거 아는데, 나 이렇게 너랑 발걸음 맞추는 거 좋아해.”

“알아. 너 걸을 때 몇 번이나 우리 발 확인하잖아.”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앞에 선 재영이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재영의 등에 업힌 엄마의 평온한 표정이 보였다.

“난 다 알아. 너한테 관심 많아서.”

재영이 눈썹을 까닥이며 말했다.

“이래서 전교 1등이랑 겸상 안 하는 건데. 전교 꼴등 속 다 보이는 거라서.”

중간 중간 웃어가며 던진 말에 재영이 흐릿하게 웃으며 엄마를 고쳐 업었다. 재영의 옆으로 다가가 엄마의 등에 손을 얹고 다시 발을 맞췄다. 재영의 말처럼 다시 보니 재영과 나의 발은 우연히 맞춰진 게 아니었다. 내 오른발이 한 걸음을 내디디면 그 뒤로 재영의 왼발이 속도를 늦춰 내 걸음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재영아.”

“응.”

재영이 무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호텔이 가까워져 있었다. 호텔 창에서 쏟아진 빛은 아스팔트로 가려진 검은 도로와 흰 모래사장을 지나 그 아래 끝도 없이 이어진 검은 바다를 온전히 비추고 있었다.

실타래처럼 얽힌 채 늘어진 빛을 따라 재영의 그림자가 나를 덮으며 쏟아졌다. 불현듯 떠올랐던 말이 끈적한 엿가락처럼 늘어져 입에 고였다. 무심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피던 재영이 이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의아한 눈빛을 담아 물었더니 재영이 무심한 표정을 굳히며 내 오른뺨을 감쌌다.

“네가 어떻게 걸어도 난 다 맞춰. 그러니까 넌 걱정 안 해도 돼.”

“진짜 전교 꼴등 머릿속은 일등한테 다 보이나 보다.”

내 머리 위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재영이 머리를 두드리는 내 손을 끌어내렸다.

“진짜 다 보이면 더 좋긴 하겠네.”

재영의 미소가 밤바다의 파도 소리에 묻혔다.

다음날은 두 섬을 잇는 흔들다리에 들렀다. 어릴 때 한 번 가본 게 전부지만 그래도 꽤 좋은 기억이 있다던 재영의 말처럼 재영은 입구에서부터 기분이 들떠 보였다. 다행히 흔들다리는 미풍에는 거의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인 구조였다. 발판도 넓은 편에 속해 양측에서 통행이 모두 가능했다. 고소공포증이 없는 엄마가 먼저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걸으려다 문득 뒤돌아 재영을 찾았다.

“재영아.”

“아… 갈까?”

멀찍이 흔들다리에 선 사람들을 관찰하던 재영이 뒤늦게 내게 시선을 던졌다. 그제야 왜 재영의 부모님이 재영을 이곳에 다시 데려오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찰나의 망설임과 적막 사이, 재영은 흔들다리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울먹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던 중이었다.

사지를 온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사람들의 표정과 적당히 고인 눈물을 보는 재영의 눈에 차츰 흥미로움이 들어찼다. 저렇게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람들만 보고 있으니 부모님도 두 번은 데려오지 못했을 거다.

“재영아.”

재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말을 듣고 있었다는 나름의 표현이었다.

“너 무서우면 내 뒤에 바짝 붙어서 가.”

재영은 잠시 내 표정을 살피다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재영의 앞에 서서 팔을 끌어당겼다. 재영의 이마가 내 정수리에 붙는가 싶더니 이내 재영의 턱이 머리통 위를 지그시 눌렀다.

“응. 나 무서웠어.”

“바짝 붙어. 떨어지면 안 돼. 사람들 보지 말고 나만 보고 걸어.”

“응.”

재영이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내 정수리에 닿은 턱을 움직였다. 턱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끼며 재영의 팔을 더욱 단단히 붙들어 걸었다.

“사람들 안 보고 있지?”

“응. 우리 애기 머리통만 보고 가고 있어.”

“잘하네.”

재영이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의도는 진즉에 눈치챘을 거다. 그런데도 재영은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내 의도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다리의 중간 중간마다 내 겨드랑이 아래를 간지럽히는 장난을 곁들이긴 했지만, 재영은 순순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재영은 아마 처음으로 무서움에 떠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머리통을 보았을 거고, 눈물을 훌쩍이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눈 대신 자신의 팔을 당겨 안은 내 손만 보며 걸었을 거다.

“아직도 무서워?”

여전히 흔들다리의 건너편을 향해 걸으며 물었다. 재영이 등 뒤에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쌌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까 생각하다 다시 앞으로 한 걸음을 디뎠다.

“응. 나 무서워.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잠시 쉬면 안 돼? 봐. 어머니도 다시 여기로 오고 계시잖아.”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 이미 도착했던 엄마가 방긋 웃으며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 안 봤어. 너 제외하곤 어머니랑… 여기, 바다.”

몸을 돌려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 떠 있던 재영의 두 눈이 내 시선에 안착했다. 재영이 턱짓으로 가리킨 발아래 일렁이는 바다를 보자 가슴이 탁 트이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때맞춰 미풍만 일던 바다 위로 거센 바람을 묻힌 파도가 일었다.

“어어.”

“으윽. 뭐야!”

미처 줄을 잡지 못한 사람 몇이 휘청거렸다. 소란한 소리에도 재영은 꼿꼿한 시선으로 고요히 바다의 표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그렇게 묻고 싶었다. 이전에도 그랬다. 재영의 본성을 알고 나서도 궁금한 게 많았다. 삼켜지지 않는 질문을 뱉으면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답이 돌아왔다. 아마 지금도 재영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생각의 굴레를 걷고 있을 것 같았다.

바다를 보던 재영이 내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품에 안긴 채로 재영이 보는 시야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나 여기 무서워한다며. 그러니까 네가 안아줘.”

재영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응.”

파란 물결 위에 하얀색 실타래로 밀려오는 거품이 보였다. 뭉실한 감촉이 눈으로도 전해질 정도였다.

“나 계속 안아줘.”

자신의 입술을 쓸며 중얼대는 재영을 향해 웃어주었다. 재영이 나를 따라 눈을 접었다. 재영의 품에서 빠져나와 내가 더 크게 팔을 펼쳐 재영을 안았다. 엄마가 다가와 왜 둘이 이러고 섰느냐고 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냥 좋아서, 그냥 재영이가 안쓰러워서.” 그런 시답잖은 답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 *

모든 여행이 그렇듯, 짧았던 엄마와의 여행도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끝났다. 다가올 여름에 같이 가게 될 줄 알았던 여행은 결국 졸업 때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 때문이 아니었다. 아빠만 병원에 두고 가는 것을 엄마가 더는 내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의 시간은 대학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가파른 속도로 흘렀다. 졸업식 전날 들었던 아빠의 부고를 시작으로 취직부터 지금까지 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그렇게 지난 하루가 금세 한 달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게 신기해 달력을 보면 멍해지는 때가 많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손바닥보다 조금 컸던 양이는 이제 제법 무게가 나가는 크기로 자랐다. 양이는 내가 재영의 집에 들어설 때마다 현관까지 달려 나왔다. 창가에 있다가 달려오는 재빠른 발톱 소리는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게 했다. 오늘도 역시나 입구까지 나온 양이가 익숙한 얼굴로 재영을 지나쳐 내 종아리에 몸을 비볐다.

“형이 나 없어도 우리 양이랑 잘 놀아주지?”

양이의 머리통을 간지럽히며 일부러 재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재영은 그것까지 해줘야 하냐는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양이가 내 볼을 핥으며 답하듯 울어댔다.

“양이 크면서 발바닥 끝의 털색이 좀 달라지는 거 같지?”

“아. 저번 주에 의사도 그러던데. 아픈 건 아니래.”

말하는 걸 보니 의사가 말하기 전까진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소파에 서류 가방을 내린 재영이 두 팔을 뻗었다. 여전히 종아리에 몸을 비비는 양이를 품에 안았다. 재영은 나와 양이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내 품에 든 양이를 꺼내 캣타워의 중간층에 올렸다.

“너 여기서 강 보는 거 좋아하지?”

양이가 옅은 울음소리를 내더니 바닥으로 풀썩 내려왔다. 꼬리를 세우고 천천히 내게 다가온 양이가 다시 내 팔과 겨드랑이 사이에 끼어들어 안겼다. 캣타워 앞에 선 재영이 표정을 굳히고 양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양이랑 싸워서 하, 뭘 얻으시죠?”

양이의 머리통을 긁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말 중간에 하품이 섞였다.

“평소에는 여기에 두면 강만 보더라고.”

재영이 양이를 흘깃 쳐다보더니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양이의 반대편에 앉은 재영이 내 팔을 끌어 조물조물 만지기 시작했다.

“손톱 잘랐네?”

손가락을 하나씩 들어서 살피던 재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월요일에 신입사원 워크숍 가니까 깔끔하게 가려고.”

“음….”

“너희 회사에 신입사원 수 많지도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이가 눈을 감고 가르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기 퇴사율이 높으니까 이번에 신입들 단합력 좀 키워보자, 뭐 그런 취지래. 가면 초반에 초청 강사 강의 듣고 계속 쉰다니까 크게 신경 쓸 건 없어.”

“상사랑 하루 붙어있으면 퇴사 안 하려던 신입도 퇴사하려고 들걸?”

어이는 없지만 맞는 말이기도 해서 웃음이 났다. 재영은 웃는 나를 보며 따라 웃다가 다시 내 손톱 위를 자신의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기 옆에 왜 다쳤어?”

재영이 묻는 곳을 살폈다. 빠르게 서류를 검토하느라 검지 끝이 종이에 벤 상처였다. 하루 만에 금세 아물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제 종이에 긁혔는데, 티 나?”

“당연히 티 나지.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재영이 표정을 굳히고 자리에 바로 앉았다. 내 손가락을 하나씩 뜯어보는 건 이제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이런 식의 소란스러움과 호들갑에는 그나마 적응이 된 상태였다. 재영 덕에 양이의 머리를 긁어주던 두 손이 재영에게 붙들렸다. 덜 긁힌 머리가 아쉬운지 양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내 배와 가슴에 자신의 머리통을 비비기 시작했다.

“하. 심각한데.”

재영은 한껏 진지한 얼굴이 되어 내 손가락을 살피다 손가락으로는 모자랐는지 이제는 소매까지 걷어 팔 안쪽을 살폈다. 눈빛은 제법 진지하지만 이 모든 게 워크숍을 못 가게 하려는 수작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좀. 오버 좀.”

팔을 비틀어 빼내려 하자 재영이 좀 전보다 센 힘으로 팔을 끌어당겼다.

“워크숍 못 갈 거 같은데.”

그럴 줄 알았다. 재영의 손에 붙들린 팔을 빼내 양이를 품에 안았다. 재영에게서 멀어지자 양이가 가르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워크숍 갈 거고. 너는 여기서 양이랑 놀다가 아침에 출근할 거야. 그게 우리의 다음 월, 화 일정이야.”

재영이 눈을 흘기며 소파에 등을 기대 누웠다. 양이를 바닥에 내려주고 재영에게 다가갔다. 나를 본체만체하는 재영의 어깨를 틈 없이 밀착해 끌어안았다. 짙은 숲, 고요하고 적적한 나무의 향이 맡아졌다. 재영의 체취를 맡는 척하며 두 뺨에 한 번씩 입을 맞추었다. 촉, 하고 붙었던 입술이 반대편에서 다시 촉,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졌다.

“너 못 일어나게 해서 못 가게 하는 방법도 떠올랐는데.”

재영의 손이 등줄기를 타고 떨어졌다. 재영의 허벅지에 앉아있던 터라 반쯤 올라간 바지 사이로 재영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들어왔다.

“이제 내가 고작 그걸로 막 못 일어나고 그러지는 않지.”

재영은 허벅지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고개가 살짝 꺾어질 정도의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네에. 잘 알죠.”

재영이 장난치듯 평소보다 크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입가엔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촉촉하게 젖은 검은 두 동공에 내 모습이 가득 찼다. 허벅지의 가장 여린 살을 살짝 꼬집듯 어루만지는 손길에 허리의 힘이 풀어졌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재영의 손이 여린 살을 짓이기며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재영은 반대편 손을 내 입술 위에 얹었다. 작은 호선을 그리며 입술을 누르는 손길에 전신을 타고 간지러운 통증이 일었다.

“네.”

반쯤 장난으로 웃어 답하자 입술을 누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프다는 표시로 미간을 좁혔다. 벗어나려 몸을 비틀자 재영이 웃으며 나를 더 결박해 안았다. 좁힌 미간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처음처럼 부드러웠다.

“나쁜 아저씨 따라가지 않는 건, 이전에 배워서 알지요?”

“…네.”

“길도 조심하고 차도 조심해야 하지만, 거기서 일하는 새끼들 제일 조심하세요.”

볼을 부풀리며 답을 미뤘다. 재영이 엄지를 입술 안으로 넣어 볼의 안쪽 살을 어루만졌다. 재영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입술 안을 헤집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는데도 아직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저기. 혹시나 해서 묻는데 내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아시죠?”

눈을 흘기며 되물었더니 재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바지 앞섶이 맞붙고 가슴과 배를 잇는 곳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두 몸이 밀착해 붙었다.

“알아. 우리 애기 올해 여섯 살이잖아.”

셔츠 단추를 푸는 재영의 손을 잡아 깍지 꼈다. 재영이 눈초리를 아래로 떨구며 웃었다.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눈치챈 것이었다.

“여섯 살은 이런 거 못 하니까. 스물여…….”

“아니요. 저 여섯 살 맞는데요.”

얌전히 창밖을 보던 양이가 훌쩍 뛰어내려 소파 끝에 몸을 붙여 누웠다. 양이는 앞발 사이에 얼굴을 끼우고 고개를 비틀어 우리 둘을 빤히 바라보았다. 양이를 보다 웃음을 터뜨리자 재영이 내 웃음을 따라 미소 짓는 게 느껴졌다.

“형이라곤 고작 둘인데 그 둘이 미쳤나 싶은 거지.”

양이가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재영이 내 볼을 꼬집어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저거 그만 보고 나 좀 봐. 입사하곤 주말에야 우리 집에 오면서.”

턱을 붙든 아귀힘이 생각보다 세서 되레 웃음이 났다.

“나 지금 기분 안 좋아. 그 좆같은 워크숍 때문에. 응? 알잖아, 호정아.”

“아는데 가긴 가야 해. 그 좆같은 워크숍.”

내 말을 들은 재영이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방금 자신이 들은 지읒 달린 글자가 정말 그 지읒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 내 입술을 물끄러미 보기까지 했다.

“좆은 아무래도 좀 그랬지?”

욕을 안 하고 살아온 것도 아닌데 이럴 때면 괜히 눈치가 보였다. 먼저 욕한 사람보다 욕을 따라한 내가 더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되었다.

내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재영이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등을 구부렸다. 순진무구한 데다 티끌 없이 맑기만 한 웃음이 밀착된 어깨로 전해졌다. 재영은 내 가슴에 뺨을 붙인 채로 숨을 흩뜨리며 웃었다. 재영이 너무 크게 웃는 탓에 괜히 욕을 따라 한 게 부끄러워지려던 찰나였다.

“욕하는 입술도 좋은데? 너 처음에도 욕 잘했었잖아.”

“처음에? 내가?”

골목에서 처음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내가 욕을 섞어 이야기했던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를 틈타 다시 재영의 혀가 진득하게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생각을 멈추고 지금 내 앞의 재영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뜨거워진 뺨을 재영이 한 손으로 받쳤다. 허리를 당기는 힘에 몸을 더 밀착해 앉았다. 이제는 서로의 박자와 움직임이 제법 익숙해졌다. 늘어지는 타액과 맞붙은 입술 덕에 적나라한 살성이 거실을 채웠다.

소파 끝에 앉아있던 양이가 천천히 다가와 재영의 허리를 긁었다. 재영이 내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양이를 살짝 밀어냈다. 붙은 입술을 떼고 혀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양이 맛있는 거 줄까?”

재영에게 붙었던 몸을 떼려 엉덩이를 들었다. 재영이 내 골반을 잡아 다시 내렸다.

“쟤 먹을 만큼 먹어. 괜히 저러는 거야. 전에도 그랬던 거 기억 안 나?”

“그랬나?”

“네가 길에서 가져다 놨을 때부터 그랬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럼 더 기특한 거잖아. 네가 나 잡아먹는 줄 알고 걱정해서 그러는 거니까. 얼마나 똑똑해.”

재영을 놀릴 생각으로 일부러 더 요란을 떨며 재영의 품을 벗어났다. 내 골반을 쥐고 있던 재영의 손이 느리게 소파 위로 떨어졌다.

“지들끼리도 핥아대는데 내가 너 핥는다고 그런 오해를 할까.”

재영이 내 쪽으로 손을 늘어뜨렸다. 안아달라는 의미임을 모르지 않지만 양이가 우선이었다. 모른 척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선반을 열었다. 츄르로 가득한 선반을 보니 웃음이 새어났다.

“맛은 또 왜 이렇게 다양해.”

“의사가 추천하는 건 그냥 다 산 거야. 질문 많은 인간이라 귀찮아서.”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로 다가왔다. 양이가 바닥에 작은 엉덩이를 꼭 붙여 앉았다. 곧 자신에게 츄르를 줄 거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양이처럼 부엌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양이가 다가와 내 무릎에 앞발을 살포시 올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나와 양이를 내려다보는 재영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봐. 똑똑하지? 이거 주는 거 딱 알고 와서 애교부리는 거잖아.”

재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낸 재영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츄르를 먹기 시작하는 양이를 살짝 흘겨본 재영이 아이스크림을 뜯어 내 입술에 묻혔다.

“우리 애기도 비슷한 거 먹어야지.”

“난 괜찮아.”

고개를 피하며 말했더니 재영이 다시 내 턱을 잡아 제 쪽으로 돌렸다.

“양이 그만 챙기고, 나. 나 먼저.”

“어. 항상 너 먼저인데, 지금은 양이. 기다려.”

양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재영은 내 턱을 감싼 손을 끝끝내 놓지 않고 얌전히 나를 기다렸다. 츄르를 다 먹은 양이가 내 무릎을 지그시 누르던 앞발을 떼 멀어졌다. 양이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재영이 말한 대로 캣타워의 중간 자리였다. 양이가 자주 앉는 자리인 건 당연히 알았다. 카펫이 살짝 눌린 자국이 햇살에 도드라지기 때문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시선을 재영에게로 돌렸다.

“녹았어.”

재영이 무덤덤한 얼굴로 겉이 녹은 아이스크림을 얼굴 앞에 들어 보였다. 재영의 손에 쥐어진 아이스크림이 고요한 재영의 얼굴과 너무나 이질적으로 엇나갔다.

“너 먹지.”

“기다리라며.”

재영이 뻔뻔한 얼굴로 내 턱을 감싼 손을 조였다. 반쯤 녹아 물컹해진 아이스크림 겉면이 입술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재영이 심통을 부리듯 입술 위에 아이스크림을 댄 탓이었다.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으려는데 재영이 고개를 저었다. 가슴까지 들었던 손을 멈추었다.

“왜?”

재영은 대답 대신 내 입술 위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마치 쟤 다음에는 나라고 했잖아, 라는 말이 들릴 것만 같은 당당한 움직임이었다.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이 다 없어지고 나서도 재영은 끈질기게 내 입술을 쫓아 음미했다.

“으응.”

두 팔을 재영의 어깨에 걸치고 목 뒤를 감싸 안았다. 재영이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며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내렸다. 아이스크림은 바닥에 뒤집힌 채로 볼품없이 꽂혔다. 진득하게 녹은 아이스크림으로 시선이 가려고 하자 재영이 한 손으로 내 눈 위를 덮어 가렸다.

“가끔 네가 앞을 못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 그런 생각 그만하고 싶어.”

저만 보라는 소리를 이렇게 무섭게 하는 사람이라니.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눈을 감고 재영의 목을 당겼다. 재영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촘촘히 메웠다. 재영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처럼, 대학생 때 함께 갔던 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그 비슷한 소리가 귀를 울리는 듯했다.

* * *

워크숍이라는 건 언제나 겉으로는 그럴싸한 법이었다. 저번 주 상목 선배의 말로는 신입사원의 애사심을 높이고 팀원 간 어색함을 없애 업무능률을 높이는 것이라던가. 온갖 있어 보이는 말을 덧붙이면 그게 워크숍의 목적이 되는 것 같았다.

“스피치라니. 없던 애사심을 더욱 박차를 가해 소멸시켜 주네요.”

옆자리에 앉은 동기가 하품을 하며 말을 붙였다. 초빙된 외부 강사의 ‘조직 이해’라는 짧은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각 팀의 신입사원들마다 자신을 어필하는 스피치 시간도 주어질 예정이었다.

“네. 그러게요.”

옅게 웃으며 답했더니, 동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기력한 두 팔을 하늘로 뻗어 기지개를 켜기 바빠 보였다.

“그냥 본래 취지대로 술이나 진탕 마시면 좋겠는데. 참. 술은 잘 드세요?”

“아, 좋아하지는 않아요. 잘 마시는 것도 아니고.”

동기가 눈썹을 추켰다. 내 말이 진실인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그럼 힘들 텐데. 남자라 흑기사도 없을 거고.”

“눈치껏 반은 버리고 반은 마셔야죠.”

“으흠.”

동기가 눈을 반짝이며 남은 하품을 쏟아냈다. 보는 나도 하품이 따라 날 정도였다.

“전 술 좋아하니까 버릴 거면 저한테 버리세요.”

“네. 전 좋죠.”

동기는 다시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책상에 머리를 떨구었다.

생색뿐인 스피치가 끝나고 숙소인 펜션으로 돌아오니 마당 입구부터 초록색 술병이 가득했다. 뒤늦게 도착한 선배들이 차에서 내린 술로 펜션 입구가 비좁을 정도였다. 아직 식자재와 술 박스가 남은 흰 차의 트렁크 앞에 섰다.

“호정 씨. 저기 있는 거 반은 제 겁니다.”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았다. 좀 전의 그 동기가 헤실대며 차 안의 술병을 가리켰다.

“네. 잔뜩 버려드릴게요.”

“넵. 고맙습니다.”

정중히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트렁크에 든 박스를 내려 펜션 안의 부엌으로 옮겼다. 술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넣던 재무팀의 이은희 대리가 내가 들고 온 박스를 보며 혀를 찼다.

“신입 몇 명이나 된다고. 저 사람들 참 인생에 미련 없어요. 다 같이 마시고 죽으려고 온 거 같아. 근데 신입들은 인생에 아직 미련 많을 테니까, 적당히 마셔요. 눈치껏 몰래몰래 버리기도 하고. 알죠?”

대리님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각 팀의 팀장님을 포함한 과장님 몇이 넓은 거실 중앙에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포커를 치고 있었다.

“…네. 요령껏 잘 버려보겠습니다.”

“술 자기한테 버리라고 하는 놈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놈들이 제일 먼저 취하니까 너무 믿지 말고요.”

좀 전 동기와 나눈 대화라도 들으셨던 건가 싶어 눈을 끔벅거렸다. 내 표정을 보던 대리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사람 이미 있었나 봐요? 보니까 매년 그런 사람 한 명씩은 있더라고요.”

대리님이 검지를 세워 흔들었다.

“술 좋아합니다. 제가 제일 먼저 취했네요. 퇴사도 제가 제일 먼저 합니다. 이게, 술 자기한테 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확률 백 퍼센트 루틴이죠. 호정 씨도 혹시나 술 자기한테 버리라고 한 사람은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네.”

입술을 말아 감추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나를 빤히 보던 대리님이 다시 냉장고에 술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작년에 입사한 이상목 씨, 내가 본 사람 중에는 그 사람만 그 말 지키더라고요.”

“아, 상목 선배가 그렇게 술을 잘 드시나요?”

뭐라도 도우려 박스에 남은 술을 주섬주섬 꺼냈다. 대리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을 흔들었다.

“거의 본인이 이슬 그 자체인 사람이에요. 호정 씨는 우선 옷 갈아입고 좀 쉬세요. 이 초록이들 나중에 지겹게 볼 애들이잖아요.”

“네. 감사합니다.”

깊게 숙였던 고개를 들자 대리님이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호정 씨한테 술 많이 주려고 하겠네. 딱 보니까.”

“네?”

“아냐. 올라가 봐요.”

우물쭈물 “네.”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장 바지가 불편해 무릎 뒤를 만지작거렸다. 좀 전에 술은 자신에게 버려 달라 호기롭게 말하던 동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뻐근한 어깨를 풀며 2층 계단을 올랐다. 어색한 동기들 사이, 가장 마지막에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창밖으로 벌써 어둑한 그림자가 졌다.

회색의 벙벙한 후드티와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자 한결 몸이 편안해진 듯했다. 이미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소란한 마당을 흘끔 내려다보고 머리를 말렸다.

저녁 시간을 막 넘었을 뿐인데 취한 사람이 어림잡아 대여섯은 되어 보였다. 의자가 아닌 마당에 널브러진 사람이 벌써 둘이었다.

“후우…. 술 싫은데.”

물기가 남은 머리를 마저 털어내고 후드티 앞을 두 손으로 털어냈다. 1층으로 내려가기 전 후우, 하고 몸 안에 든 숨을 다 뱉어낼 듯 쏟아냈다.

현관부터 벌써 사람들의 말소리로 요란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 중인 팀으로 먼저 다가가 혹시 도울 게 있는지 물었다.

“호정 씨는 저 아저씨들 술 취하게 해서 자게 하는 거, 그게 오늘의 메인 업무예요.”

“막중하네요.”

대리님이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힘내요. 저 사람들, 회사에서 오래 버틸 것 같은 사람한텐 술 더 많이 주거든.”

“네. 힘내겠습니다.”

후드티의 끈을 당겨 조였다. 후, 하고 한 번 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고 마당에 발을 디뎠다. 재영의 연락을 확인하려는데 마당에 있던 이신운 선배가 다급히 내 이름을 불렀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선배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신운 선배는 우리 팀의 선배기는 하지만 나의 직속은 아니었다. 사무실에선 바로 앞자리인데도 이렇게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배님. 늦었습니다.”

“응. 괜찮아요. 늦은 만큼 남들보다 더 빠르게 마시면 되니까요.”

선배가 내민 잔을 받고 빠르게 술을 넘겼다. 술잔을 비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버릴 술은 자신에게 버려달라던 동기가 마당에도 보이지 않았다.

“채선윤 씨는 어디 갔나요?”

“채선윤? 그게 누구죠?”

“저기 기획팀 신입이라고…….”

말끝을 얼버무렸다. 신운 선배는 기획팀이라는 말에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혼자서 퍼마시고 자는 사람 말하는 건가? 한 명 저기 있긴 해요.”

선배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배의 손가락을 따라가니 마당 끝에 놓인 평상과 그 위에 쓰러져 누운 사람이 보였다. 사각으로 넓은 평상 하나를 혼자서 다 차지하고 누운 사람은 멀리서 봐도 좀 전에 봤던 동기, 채선윤 씨가 분명했다. 이은희 대리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다시 빠르게 채워지는 잔을 비웠다.

“윽.”

역하게 올라오는 술 냄새에 손등으로 입술을 비볐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아빠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술 자체의 쓰고 비린 냄새 때문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는데도 내 주위로 선배들이 하나씩 모여들어 내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 주위로 다가온 선배들이 한 마디씩 할 때마다 금세 잔이 채워졌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쓰고 역한 향에 큼큼, 목을 긁어댔다. 사람이 많다 보니 한마디씩만 해도 열 마디가 넘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빨갛게 익은 목을 긁으며 채워진 술잔을 다시 들었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에 몸을 떨다 마당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폰이 떨어져서.”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떠드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잔디 위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는데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화면에 뜬 건 재영의 번호였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마당의 테이블 자리를 빠져나왔다.

펜션 안으로 들어가려다 현관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좀 더 시원한 공기를 맡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혹시나 누구라도 나를 찾을까 입구에 서서 마당에 있는 사람들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다행히 지금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통화를 누르고 나지막이 재영을 불렀다.

“재영아.”

-아직 술 마셔?

“어. 심지어 이제 시작이래.”

재영의 웃음이 귀를 채웠다. 술기운이 오른 상태에서 듣는 재영의 웃음소리가 좋아 휴대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한 번 더 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고 펜션을 아예 빠져나왔다. 골목에 서서 펜션 돌담에 등을 기대앉았다. 상체를 동그랗게 말아 앉으니 마당의 사람들이 내는 소음이 차단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미친 새끼들을 어떡하면 좋지.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났다. 재영이 무심하게 뱉은 무서운 말조차 그저 귀엽게 느껴졌다.

“누구 하나 기절하기 전까지는 안 멈출 기세야.”

-그래?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이지 않더라도 재영은 내가 방금 고개를 끄덕였다는 걸 알아줄 것 같았다.

-우리 애기. 난 지금 당장 너 보고 싶은데 어떡할까?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반대편 귀로 옮겼다.

“내일 너희 집에 들렀다가 갈게.”

-그건 당연한 거고, 호정아.

저녁의 어둠이 내려앉은 아스팔트 바닥을 보며 휴대폰 너머 재영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검은 아스팔트 사이에 낀 모래가 더 짙은 흑색으로 느껴지려 할 때였다.

-파티도 아닌데 왜 그렇게 술을 먹이는 거야.

“그러게. 근데, 알지? 한국은 어디든 술 마시는 곳이 바로 파티 장인 거.”

-하, 나름 파티인 거네.

재영이 미소 짓는 소리가 들렸다.

“어. 엇비슷해.”

귀를 채우는 웃음소리가 좀 더 깊어졌다. 덩달아 내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내가 진짜 파티처럼 만들어줄게.

뜻 모를 재영의 말에도 술기운 때문인지 자꾸만 웃음이 났다.

-펜션 들어가기 직전 골목, 거기 앞까지 지금 나올 수 있겠어?

“너 설마 여기 온 거야?”

돌담에 기댔던 등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둥지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당연히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것만으로 벽 너머 사람들의 소리가 다시 소란하게 울렸다.

-너 워크숍 혼자 보내놓고 안 오면 나 미친놈이게.

굳이 따지자면 오는 게 더 미친 쪽인 거 같은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당의 사람들 중 혹시나 나를 찾는 사람이 있을까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휴대폰을 꽉 쥐고 골목 아래를 향해 뛰었다. 뒤축이 구겨진 운동화가 바닥에 질질 끌리며 딸려왔다. 골목의 입구에 도착해서 아직 끊기지 않은 휴대폰을 다시 귀에 붙였다.

“봐. 하루만 안 봐도 또 운동화 구겨 신지.”

생생하게 들리는 재영의 목소리에 귀에 붙인 휴대폰을 내렸다. 나처럼 연회색 후드티를 입은 재영이 차의 헤드라이트를 등진 채 나를 향해 다가왔다. 재영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구겨진 내 신발 뒤축을 폈다. 뒤꿈치를 아프지 않게 감싸 운동화 안으로 넣어주고서야 재영은 고개를 들었다.

“나 진짜 술 취했나. 우리 재영이 예뻐 보이네.”

“하, 애한테 술을 얼마나 처먹인 거야.”

재영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틀렸다. 늘어지게 웃는 웃음을 지었는데도 재영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영이 골목의 위에 자리한 펜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재영의 후드티 끈을 당겨 나를 보게 했다.

“키스해줄까?”

우물쭈물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제야 재영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묻지 말고 해.”

이번엔 재영이 내 후드 끈을 당겼다. 술을 마신 탓인지 입 안이 달았다. 동시에 입술과 내벽의 점막에는 열기가 올랐다. 재영의 차가운 입술이 틈 없이 곧장 맞붙었다. 생경할 정도로 차가운 느낌에 어깨를 떨었다.

재영은 떠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어루만졌다. 커다란 손이 어깨 끝을 따라 온화한 호선을 그렸다. 어깨를 어루만지던 손이 허리와 등을 바싹 잡아끌었다. 운동화를 끌며 재영의 품으로 당겨졌다.

“하아, 하.”

진득한 숨이 입술 사이로 터졌다. 재영의 어깨에 팔을 기대고 온전히 상체를 붙였다. 내 등을 쓸던 재영의 손이 내 얼굴 가까이로 올라왔다. 뺨을 어루만져줄 줄 알았던 손은 내 얼굴이 아니라 귓바퀴를 간질이다 이내 두 귀를 양 옆에서 감싸 덮었다.

“재…….”

순간이었다. 감은 눈 위로 섬광처럼 거대하게 밝은 빛이 스쳤다. 아찔할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이라 놀라 눈을 떴다.

“하.”

눈을 뜸과 동시에 머리 위로 굉음이 터졌다. 내 귀를 덮은 재영의 손에 힘이 들었다. 재영의 눈에 예쁜 곡선이 그려졌다.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던 재영이 입술로 내 양쪽 눈덩이에 입술을 맞붙였다.

굉음과 함께 펜션 바로 위에서 폭죽이 터져 올랐다. 무지개색으로 형형색색 요란하게 터지는 폭죽에 정신이 아득했다. 폭죽이 터지는 광경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파편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얼굴에 떨어질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불꽃으로 얼룩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재영이 그런 내 얼굴을 돌려 다시 입을 맞추었다.

“지금은 다 기절했겠다. 그치?”

재영이 아이처럼 웃으며 물었다. 얼굴을 뜨겁게 하던 술기운이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재영의 등 뒤로 터지는 폭죽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보기에는 저렇게 가까워 보여도 꽤 멀리서 터진 거야. 진짜 기절할 정도로 큰 소리도 아니고.”

귀를 덮고 있던 재영의 손이 내려갔다. 아직도 하늘에서 빛을 내며 터지는 폭죽을 올려다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 재영의 시선도 하늘로 옮겨졌다.

“놀라서 술 그만 처먹을 정도로만 한 거야.”

재영이 내 손을 당겨 자신의 볼에 붙였다. 차가운 볼의 감촉이 전해졌다. 손바닥으로 재영의 볼을 감쌌다.

“너 때문에 무서워서 워크숍 두 번은 못 오겠다.”

중얼중얼 낮게 읊조리자 내 말을 들은 재영이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내년에 또 이 미친 곳에 오려고 그랬어?”

“말 돌리지 말고.”

재영의 볼을 꼬집듯 꽉 잡았다. 재영은 눈을 찌푸리며 아픈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엔 웃음이 담겨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 보이는 미소였다.

폭죽에 맞춰 후드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영에게 잡힌 손을 빼 휴대폰을 꺼냈다. 신운 선배의 전화였다.

“네. 선배님.”

-미쳤다. 호정 씨. 어디예요? 지금 불꽃 터지는 거 봤어요? 완전 난리야. 대학 축제 급이에요. 방이면 얼른 내려와서 구경해요. 창문 열어서 보든지.

호들갑을 떨며 웃는 선배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도 쩌렁쩌렁 울렸다.

“목소리도 좆같네.”

재영의 욕 섞인 중얼거림에 인상을 구기며 눈을 흘겼다. 재영이 방긋 웃으며 내 좁혀진 미간을 검지로 쭉 당겨 옆으로 밀었다.

“제가 많이 취해서. 네. 네. 저는 그럼 방에서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는 하늘에서 연거푸 터지는 폭죽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술보다는 머리 위에서 터지는 불꽃을 감상하는 데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을 것 같았다.

“안 들어가도 된다는 거지?”

재영이 내 휴대폰을 가져가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가자. 오는 길에 호텔 봐뒀어.”

재영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후드티의 모자를 올려 내 머리를 덮은 재영이 가려진 내 얼굴을 살폈다.

“술 많이 마시니까 확실히 더 붉네. 조심해야겠다.”

시야 바로 아래로 뻗어진 재영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재영이 내 손을 꽉 잡아 깍지를 맞추었다. 여전히 머리 위에선 폭죽이 터지고 폭죽 소리가 들릴 때마다 밝은 빛이 쏟아졌다. 눈을 비볐다.

“갈까? 우리만 있을 수 있는 데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되었다. 내 걸음은 이미 재영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머리 위의 불빛을 따라 재영의 얼굴에도 음영이 졌다. 빛은 우리가 가려는 곳에 이미 도달해 있는 듯했다. 보폭을 맞춰 재영의 옆에 섰다. 깍지 낀 재영의 손에 더욱 굳건한 힘이 들었다.

“금방 도착할 거야.”

재영이 웃으며 속삭였다. 얼굴선을 따라 도드라진 음영이 다시금 시야를 채웠다.

재영의 심해는 지금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음영과 같았다. 확연히 보이는 듯하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한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평생 그 전체를 다 볼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곳이었다. 나를 보며 웃는 재영의 얼굴에서 음영의 이면에 자리한 심해가 보이는 듯했다.

내 손을 잡은 재영의 손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그건 나를 향한 확신이자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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