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Autumn (17/22)

외전 2. Autumn

1955년 미러미시 강에서 부화한 새끼 연어의 수는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치어는 두 번 오지 않을 강의 최적 환경에서 자랐고, 이는 1959년 역대 가장 많은 연어가 산란을 위해 미러미시 강의 하천으로 회귀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면 1955년, 캐나다에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많은 연어를 생존하게 하고 회귀하게 할 수 있었던 걸까. 그해는 단순히 변덕스러운 신의 은총과 느닷없는 하늘의 너그러움과 난데없는 행운이 들어찬 한해였던 걸까.

1954년, 캐나다의 뉴브런즈윅 북동부 지역의 미러미시 강 지류에 대규모의 화학물질이 살포되었다. 화학물질이 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허리케인 에드나가 캐나다 해안에 맹렬한 폭우를 쏟아냈다. 강풍은 캐나다 대서양 농작물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을 뿐 아니라, 미국 및 캐나다 해안에 막강한 피해를 입혔다. 대규모로 살포된 화학물질이 연어의 먹이 경쟁자를 모두 죽인 상태에서 허리케인까지 몰아치며 치어의 주 먹이인 유충이 지류에 활발히 생성되었다.

1955년부터 시작된 캐나다 연어의 최대 풍어기는 그 직전 해에 있었던 대규모의 화학물질 살포와 29명의 사망자를 낸 허리케인이라는 비극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삶은 매우 잔인하다. 누군가의 해피 엔드는 누군가의 비극에서 말미암는다.

* * *

[속보] 배우 손신아, 강남 자택서 사망……. 동료 배우 은하윤이 발견

[속보] 경찰 "배우 손신아 사망 신고 접수“

[속보] 배우 손신아 사망 신고 접수 중으로 확인

[속보] 경찰 배우 손신아 사망 신고 관련, 아직 확인 중

[속보] 경찰 “배우 손신아 사망 맞다. 새벽 2시 42분 신고 돼.”

[1보] 배우 손신아 사망, 경찰 “사망 경위 파악 중”

[1보] 배우 손신아 사망 원인 조사 착수

[속보] UIO 측 “배우 손신아 빈소 및 발인 장례 절차 전면 비공개 결정, 유가족의 뜻.”

“강남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12년 차 유명 배우 손신아. 사망 원인은?”

“한국 톱배우 손신아, 극단적 선택 추정. 그 이유는?”

“손신아 사망은 우울증 영향, 현대인의 감기, 우울증 심층 분석”

출근 때부터 업무가 정신없이 몰아쳤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마무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후우…….”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고 주변을 살폈다. 식사를 마친 직원 몇이 사무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뻐근한 목을 돌리며 멍한 눈으로 사무실 창가를 바라보았다. 가을 청공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며칠째 같은 하늘이었다.

“손신아가 자살이라니…….”

“그러니까요. 진짜 우리나라에서 제일 완벽한 여자였는데. 여태 기부한 금액이 드러난 것만 100억이 넘는다면서요.”

“난 아직도 안 믿긴다니까요. 심지어 다음 작품 찍던 중이었다던데?”

사무실로 들어오던 직원들이 손에 커피를 쥔 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종일 손신아 관련 속보가 쏟아지던 날에서 이틀이 더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뉴스는 배우 손신아의 자살로 들끓었다.

“난 은하윤도 불쌍해. 제일 친한 친구였다는데, 그런 친구 죽은 걸 발견했다고 생각해 봐요.”

“으으.”

단발머리의 직원이 옅게 팔을 문질렀다. 늘어지게 하품하고 고픈 배를 문질렀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가벼운 식사 정도는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요기라도 하고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손신아 관련 영상 또 떴어요.”

“뭐가 더 남았대?”

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직원 중 하나가 휴대폰을 켜더니 음량을 높였다.

「지난 19일 새벽, 유명 배우 손신아 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 이미 많은 분이 알고 계실 텐데요. 배우 손신아 씨를 발견한 동료 배우 은하윤 씨가 오늘 오후 2시, 손신아 씨 사망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손신아 씨의 발인이 끝나자마자 기자회견을 여는 그 취지와 의도가 무엇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추후 기자회견 현장, 생방송으로 송출해드리겠습니다. 저희 ‘열린 밤’은 항상 가장 빠른 연예가 소식으로 여러분들을 만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감은 속눈썹 위로 창으로 스민 해가 적나라하게 쏟아졌다. 모든 매체의 눈이 죽은 손신아를 향해 있었다. 덕분에 다음 달에 새로 영입하기로 한 선수의 홍보 자료는 오늘도 포털 사이트 메인에 뜨지 못했다. 직원이 휴대폰 화면을 넘기는 듯 잠시 소란하던 음성이 약해지더니 곧이어 음량이 다시 좀 전처럼 높아졌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 차트에서 10년 연속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던 배우이자, 지난해 <여름밤으로의 항해>로 프랑스 칸의 선택을 받았던 배우죠. 배우 손신아 씨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아직 많은 분이 그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계실 겁니다. 오늘 오후 2시에 있을 배우 손신아 씨 사망 관련 동료 배우 은하윤 씨의 긴급 기자회견 현장을 저희 TBS가 생방송으로 중계해드리겠습니다. 저희 TBS는 고 손신아 씨의 유가족과 팬들에게 조금의 누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 어떤 편집도 없이 기자회견 전 현장을 그대로 방송하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 지체할 순 없었다. 오후에 남은 업무까지도 시간이 빠듯했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니, 직원 몇이 황급히 휴대폰 음량을 낮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정 씨. 아직 식사 안 하셨네요?”

“네. 이제 먹으려고요.”

“오늘도 바쁘셨죠?”

재무팀 직원이 우는 시늉을 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피식 웃자, 직원도 나를 따라 빙긋이 미소 지었다. 소리는 껐지만 여전히 휴대폰 화면에는 속보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속한 마케팅팀은 업무 강도도 높고, 언론보도의 시간이 자유로운 탓에 거의 24시간 대기조로 근무를 하는 형태였다. 덕분에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퇴사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선임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사한 지 겨우 2년이 되었을 때부터 팀이 맡은 언론보도 중 몇 개는 내가 총괄하게 되었다.

구내식당에 와 샌드위치와 우유를 고르고 멍한 눈을 비볐다. 내일 연차를 사용할 예정이기에 오늘은 더욱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시간을 확인할 겸 휴대폰을 열었더니 재영의 연락이 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종일 한 통도 연락하지 못했다는 게 생각났다.

“…….”

재영에게 전화하며 고개를 젖혔다. 무지근한 눈을 감았다. 재영은 아마 저녁을 먹자고 할 거다. 내일은 네 번째로 맞이하는 아빠의 기일이니까.

* * *

재영은 볼썽사납게 시끄러운 TV를 끄고 사무실 끝에 선 윤 비서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재영의 무심한 손짓에 윤 비서가 상체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재영은 휴대폰을 꺼내 자신의 번호보다 더 익숙한 호정의 번호를 눌렀다. 최근에 호정은 자신만큼이나 바빠졌다. 자신이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근무시간 동안 전화 한 통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호정아…. 전화 받아야지.”

재영의 손가락이 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위아래로 낮게 움직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에 결국 재영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책상 위에 놓았다.

“푼돈 번다고 힘든가 보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에 우두커니 섰다. 애초에 호정이 일을 하지 않길 바랐지만, 호정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재영은 호정과 오래 함께하며 호정의 의견에 반기를 들지 않는 쪽이 더 편하다는 걸 습득했다.

‘돈 벌어서 너한테 빌린 돈도 갚고, 민재 부모님한테 빚진 것도 갚아야 한다’는 호정의 지론은 너무나 따분한 명분이었지만, 재영은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호정이 하고픈 대로 하게 해줌으로써 호정이 기뻐하는 얼굴을 보는 것도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재영은 책상에 둔 휴대폰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호정은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를 걸어올 거다. 바빠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되물을 테고,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한다는 말에는 기쁜 기색으로 알겠다고 할 거다. 재영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때맞춰 책상 위에서 몸을 떠는 휴대폰을 들었다.

“응. 호정아.”

-미안. 나 오늘 좀 바빠서 전화도 못 받았어. 무슨 일 있어?

호정의 잔잔한 목소리와 호정의 주변에 그에게 친하게 말을 붙이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재영은 안도했다.

“그냥 오늘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어머니 뵈러 같이 집에도 갈 겸.”

-저녁? 좋지. 오늘 일찍 마칠 수 있을 거 같아.

“호정아. 내일… 나 시간 되니까 같이 가.”

-…응.

티슈를 뽑아 이마의 땀을 닦는 움직임까지 고스란히 보이고 느껴졌다. 예상했던 그대로라 더 마음이 놓였다.

“호정아. 밥은 먹었고?”

-나 이제 먹으려고. 오늘 오전에 일이 많아서 좀 늦었어.

조금 머쓱해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났다. 재영은 강가에 비치는 햇살을 보았다. 강 표면의 빛은 여러 갈래로 산란해 눈을 밝혔다. 늘 짜증스럽게만 보이던 것도 호정과 오래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그럭저럭 봐줄 만해졌다.

“마칠 때쯤 데리러 갈게.”

호정이 낮게 알겠다는 답을 해왔다. 호정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아무도 과제를 내지 않는 과에서 혼자 미루지 않고 과제를 제출하고 시험까지 빠지지 않고 친 덕분이었다. 그 정도만 했을 뿐이었는데, 졸업 때 보니 나름 과 내에선 우수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졸업 후엔 전공을 살려 국내 프로 야구팀인 ‘SE’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에이전트에 입사했다. 마케팅 부서에 들어가고 2년이 지나선 팀 내 보도용 자료 대부분을 호정이 담당하게 되었다.

사실 재영은 집에 있는 호정을 가장 예뻐했다. 집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호정은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호정이 맡은 일을 잘해 칭찬을 듣고 오는 날이면 키우는 재미가 있는 동시에 보람도 들게 하는 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마다 재영은 자신의 안목을 스스로 칭찬하며 자족감을 채웠다.

심지어 최근엔 신생 프로팀의 직속 마케팅팀에서 호정에게 컨택이 왔다고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호정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호정은 재영에게 그쪽에서 제시한 연봉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재영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연봉이 얼만데?” 하고 물었다. 그쪽에 호정이 혹할만한 금액을 제시하라고는 했지만, 질문하면서도 재영은 호정이 받을 금액에 대해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호정이 손가락 다섯 개를 들었다.

“오천! 성과급은 별도래. 대박이지?”

재영은 호정의 얼굴을 살뜰히 살폈다. 호정이 말한 액수가 정말 한 달이 아니라, 연에 받는 금액의 총액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오천이라고 말하는 호정의 감정이 기쁜 것인지, 짜증스러운 것인지도 구분해야 했다.

“진짜… 대박이야. 오천. 와, 재영아. 나 금방 부자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 근데 너 열심히 잘했으니까. 그 정도는 받을만하지.”

호정이 보인 표정과 문장에서 호정이 기뻐하고 있다는 걸 유추했다. 호정이 느끼기에 연봉 오천은 무척이나 큰 금액인 듯해서 재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재영은 휴대폰을 기다란 데스크의 중앙에 올렸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겼다. 호정과의 저녁 약속까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회사 앞으로 데리러 가는 시간까지 계산해도 여유가 있었다. 이미 아이스하키 팀을 운영 중인 재단 고등학교에 야구팀을 신설하는 제안서를 챙겨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시계를 확인했다. 은하윤의 기자회견까지 두 시간 남짓이 남았다. 지겨웠다.

“하아…….”

입속에서 혀를 굴렸다. 재영은 지난 8년간 호정과 연애하며 나름의 만족감을 얻었다. 하지만 완전한 충족까지는 아니었다. 자신이 계획한 완벽한 충족까지는 아직 2년이 남았다. 재영은 소파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낮게 한숨 쉬었다.

“2년.”

여태 호정과 함께한 8년이 금세 지났듯 지금의 2년도 그러할까 기대했다. 2년. 숫자로 보면 지겹기 그지없는 숫자인데, 앞선 8년이 그렇게나 빠르게 지났다는 걸 상기하면 그리 지겨운 시간도 아닐 것 같았다. 2년 후면 드디어 서른이었다.

8년이 지나고도 호정은 여전히 특별했다. 다른 존재들처럼 질리지도 않았고 지겨워지지도 않았다. 처음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하니 그건 전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호정은 보면 볼수록 특별하고 소중해서 재영은 손에 호정의 오른손을 꼭 쥐고도 쥐지 못한 왼손을 안타까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호정이 특별하다는 걸 깨달을수록 그에게도 자신이 유일해야 한다는 욕망이 들어찼다.

스물하나에 호정이 자신을 완전히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재영은 아직도 뒷골을 짜릿하게 하는 그날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기억했다. 짜릿한 통증은 처음 느껴본 탓에 분명 신선한 감각이긴 했으나 결코 두 번 겪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아직도 호정은 자신이 며칠 안지 않으면 금세 뒤를 조붓하게 좁혔다. 처음처럼 비좁아진 속은 앙큼하게도 재영을 밀어내며 익숙지 않은 티를 냈다. 호정은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건 재영뿐 아니라 타자들도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었다.

“2년 남았어. 호정아.”

재영은 미소 띤 얼굴로 결재 파일을 열었다.

* * *

아빠가 죽은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재영과 늦은 저녁을 함께하고 엄마가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와 한 침대에 누웠다. 내일 추모원에 갈 생각을 하며 잠들어서인지 아빠의 부고를 듣던 4년 전 꿈을 꿨다.

대학교 졸업을 고작 이틀 앞두고 아빠의 부고를 들었다. 욕실에선 재영이 씻고 있었고 넓은 거실엔 나 혼자뿐이었다. 정신이 멍했다. 소파에 앉아 재영이 씻는 소리를 들으며 방금 받은 전화의 내용을 되감았다. 창가에 앉아있던 양이가 내려와 내 볼을 핥았다.

나를 낳아준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는 건 죄악에 가까웠지만, 사고 후로 단 한 번도 그런 상상을 해보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그런데도 막상 아빠의 부고를 들으니 뇌가 기능을 멈춘 듯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리에서 울리는 진동에 귀가 먹먹했다.

스무 살 이후 대학 졸업까지, 4년간 병원에 누워만 있었던 아빠의 부고였다. 내리 4년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고 자부했는데도 전화를 받는 내내 눈이 뜨겁고 아렸다. 마음은 더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침내’라는 부사를 아빠의 죽음 앞에 놓으려다 죄책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병실에 누운 채로 아빠는 지난 4년간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과거를 회상하고, 어떤 모습의 자신을 떠올리고 있었던 걸까.

씻고 나온 재영이 내 옆에 앉았다. 촉촉하게 젖은 손이 내 머리카락을 넘기고 볼을 감쌌다.

“재영아. 우리 아빠 돌아가셨대.”

재영은 볼을 감싼 손을 다시 내 머리로 옮겨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재영의 고요한 두 눈이 나를 향했다.

“지금 표 알아보면 아마 바로 갈 수 있을 거야.”

“내 것만. 나만 갈게. 졸업식하고 와.”

장례는 엄마와 나로도 충분했다. 재영은 대표 연사로 선정되어 졸업식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힘없는 팔로 소파를 딛고 비척대며 일어서려는데 재영이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같이 가. 나 지금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재영은 묵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 팔 안에 온전히 몸을 기댔다. 힘없이 축 늘어진 전신이 재영의 품에 들었다.

“재영아. 우리 아빠가 죽었대.”

“…응. 들었어.”

방심하는 사이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재영은 아무런 말없이 티슈를 건네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공항에서 바로 목경대학병원의 장례식장을 향했다. 눈물로 두 눈이 퉁퉁 부은 엄마가 건넨 상주 복을 입고 나오니 비로소 아빠의 부재가 실감 났다.

아빠의 장례는 울음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엄마는 조문객이 빈 시간이면 으레 멍하니 허공을 보며 입을 뻐끔대긴 했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기색이 더 짙었다.

드문드문 들어오는 조문객은 아빠의 옛 직장동료이거나 오랜 친구들뿐이었다. 내 친구도 재영뿐이라 장례는 우리가 원하던 대로 소란하지 않게 진행되었다. 마지막 운구 길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자지러지는 울음을 내지도 않았고 숙덕대며 아빠 이야기를 종알대지도 않았다.

“호정아.”

땅으로 맥없이 떨어진 손을 재영이 조물거렸다. 손톱이 있는 손가락 끝부터 손가락이 나뉘고 시작되는 고리까지 이어지던 지지부진한 움직임은 내가 그를 올려다보고서야 멈춰졌다.

나는 재영이 지금의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 아빠의 죽음을 대할 때 자식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재영은 전혀 몰랐을 거다. 궁금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거다.

“이제 내가 네 보호자야. 그러니까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마.”

일시에 얼음물을 함씬 맞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재영은 내가 보인 표정을 그대로 따라 했다. 뻣뻣하게 일자를 그린 입매와 조금 피곤하게 감기는 눈꺼풀, 금방이라도 아래로 고꾸라질 듯한 눈초리가 지금 재영이 지은 표정이자 내가 재영을 보는 표정이었다.

어둠이 짙은 새벽, 불안한 눈으로 창을 보던 재영을 목도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재영에게 사람의 표정을 흉내 내기 귀찮다면 그때마다 내가 짓는 표정을 따라 하라고 했다. 재영이 상황과 맞지 않는 이질적인 표정을 짓거나 아무런 동요 없이 날 선 얼굴로 서 있는 걸 내가 더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재영은 명석한 두뇌로 곧잘 이런 상황에서 내 표정을 놀랍도록 똑같이 모방해 나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지금. 너 슬픈 거 맞지?”

재영이 물었다. 정상인이라면 아버지의 장례를 겪는 아들에게 감히 상상으로도 할 수 없는 질문이겠지만, 재영에겐 아니었다. 어쩌면 잔인할 정도로 순수한 질문이어서 나 또한 버석한 얼굴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래는 안 돼.”

“너라면 어떨 거 같아? 아빠… 말이야.”

재영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늘어지는 하품을 숨겼다. “지겨워?” 하고 물으니 재영은 정말 아니라는 표정을 하며 날 내려다보았다. 진심과는 다르겠지만 겉보기엔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습기가 어려 있던 동공이 금세 말끔하게 말라 있었다.

“우리 아빠는 아직 죽으면 안 돼. 승계 절차가 복잡해져. 호흡기를 달아서라도 적어도 1~2년은 더 버텨야지. 날 위해서.”

잠시였지만 재영의 두 눈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반짝거리다 소강되었다.

“그냥 앞으로는 그런 건 상상도 하기 싫다고 답해. 그게 더 자연스러워.”

“알았어. 우리 호정이 지금 정말 기분 안 좋구나?”

재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내 주변을 살피던 재영이 내 손을 놓고 엄마의 옆에 섰다. 장지에 도착해 하관이 이뤄진 후로 엄마는 줄곧 멍한 상태였다.

“어머니. 기운 내셔야죠. 이러다 어머니 쓰러지시면 호정이 힘들어해요.”

엄마가 억지로 미소 지었다. 대학 자체를 못 갈 줄 알았던 못난 아들이 영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이토록 좋은 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남편이 야속하고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몇 년을 누워있던 사람이 고작 그거 며칠 못 기다리고 가…….”

엄마가 젖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울컥 치솟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

엄마의 팔을 끌어 편히 기댈 수 있게 했다. 엄마가 힘을 풀고 내게 몸을 기댔다. 어깨가 옅게 흔들렸다.

원래는 졸업 후 재영과 함께 1, 2년은 더 영국에서 머물 계획이었다. 재영은 전과하며 아쉽게 마무리 짓지 못했던 약학 수업을 추가해 더 들을 생각이었고, 난 말은 통하지만 그래도 미흡한 영어를 좀 더 다듬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아빠가 세상을 떠나며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혼자 있게 될 엄마를 두고 도저히 나 혼자 다시 영국으로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대학 졸업까지 끝낸 상태에서 고작 영어를 이유로 엄마를 혼자 두고 떠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추모원에 아빠를 묻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재영은 창밖만 보는 내 손을 끌어 잡았다. 내 손이 재영의 손바닥 안에 동그랗게 감겨 안겼다. 잡힌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재영이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난 여기서도 하려면 할 게 많아.”

“…나 여기 남을 거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

설핏 웃으며 물었더니 재영이 내 볼을 툭, 건드렸다.

“그냥. 보통은 엄마 혼자 두고 못 갈 테니까.”

재영은 제법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때문에 네가 하려는 걸 포기하지는 마, 라고 작게 말했지만, 재영은 듣지 않았다. 재영은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와 함께 한국에 남았다.

엄마와 같이 지내야 해서 영국에서처럼 같이는 못 살 거라는 말에도 괜찮다고 했고, 일을 해야 해서 이전처럼 매일은 보지 못할 거라는 말에도 괜찮다고 했다.

“정말 괜찮아?”

입술을 잘근 깨물고 겨우 던진 말에, 재영이 피식 미소 지었다.

“괜찮아. 음… 한 5년만 견디면 되는 거잖아. 서른 즈음엔 나랑 같이 살 거잖아. 그렇지?”

꿈에서 깨어 4년 전 그 말을 하며 웃던 재영의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옆에 누운 재영의 고른 숨에 마음이 놓였다. 재영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겨주었다. 재영은 잠결에도 내 허리를 감싼 손을 풀지 않았다. 8년이 되었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가끔 재영의 집에서 자고 일어나는 아침마다 여전히 내 옆을 떠나지 않고 얼굴을 살피는 재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벽 어스름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재영의 얼굴을 천천히 밝히는 빛에 작은 숨을 내쉬었다.

“우리 애기 왜 안 자고 나만 봐.”

재영이 눈을 감은 채로 속삭였다.

“자는 거 아니었어?”

재영이 느리게 내 품을 파고들었다. 가만히 재영의 등을 안았다.

“재영아. 너 나랑 만나면서 언제가 가장 좋았어?”

효색 짙은 새벽이라 술 없이도 취기가 올랐다. 재영은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다 내 등을 꽉 잡아당겼다.

“영국에서 같은 집에 살 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내 옆에 네가 있었으니까. 네가 아무 곳도 가지 않고 내 집에만 있는 건 어떨까, 그 생각만으로 새벽이 다 갈 정도였어.”

“아침에 눈 같이 뜨는 게, 제일 좋았던 순간이야?”

생각보다 소박한 이야기에 미소가 지어졌다. 순간 내 등을 감싼 재영의 팔과 손가락에 거센 힘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추골을 타고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넌 아직 몰라.”

다음날 이른 시간에 눈을 떴다. 추모원에 가는 동안 재영은 내 옆을 지켰다. 본인이 운전해야 편하다고는 했지만, 아직은 아빠를 보러 가는 마음이 불안정한 나와 엄마를 대신해 운전을 도맡는다는 걸 알았다. 재영은 드문드문 엄마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걸었다. 절반은 의미 없는 우스갯소리였고, 절반은 내 회사 성과에 대한 과도한 칭찬이었지만, 둘 다 엄마가 좋아하는 유의 이야기여서 재영의 말은 어느 쪽이든 엄마를 기쁘게 했다.

스무 살 때부터 나보다 더 엄마를 자주 찾은 재영 덕에 엄마는 이제 아들인 나보다 재영이 더 편하다고 했다. 이따금 야근으로 늦을 때도 재영은 내가 없는 집에 가 엄마와 저녁을 먹고 무료해하는 엄마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우리 집에서 재영을 발견할 때의 행복이 좋아서 종종 야근 후에 집에 재영이 없으면 재영의 바쁜 일정을 알면서도 내심 서운해 하기도 했다.

아빠의 기일이었던 하루만 연차를 사용했을 뿐인데 다녀오니 업무가 잔뜩 밀려 있었다. 팀장님은 내가 연차를 사용한 그 하루 새 신입 한 명이 일을 관두었다고 했다. 나도 조만간 일을 관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랐지만 겨우 참아냈다.

“호정 씨가 좀 더 해줘. 우리 박흥석이랑 조여울 데려온 거 좀 홍보자료 빵빵하게 부풀리고. 주가 좀 올려보자고. 알겠지?”

“…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이틀이 지나 주말이 되었을 땐 눈꺼풀 끝마다 추가 달린 듯 졸음이 쏟아졌다. 며칠 동안 하루에 몇 시간도 자지 못했다. 그동안 재영과 양이를 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간 팀에선 지역 내 가장 눈에 띄는 신예 중 다섯의 유망주를 2군으로 모두 포섭했고, 포털 스포츠 메인 기사에 세 건이나 내가 보낸 보도용 자료가 걸렸다. 일은 흡족했다. 다만, 재영이 너무나 보고 싶어 견디기 힘들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더 그랬다. 재영을 보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일하며 중간 중간 재영과 연락은 했지만 추모원에 다녀온 후론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재영은 재영대로 바빴고 나도 나대로 밤 9시 전에 퇴근한 날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9시가 가까워진 시간에 겨우 회사 컴퓨터를 끄고 휴대폰을 꺼냈다. 회사 앞에 나오니 길엔 오가는 사람이 없어 비교적 한산했다. 세차게 지나는 버스와 점멸하는 가지각색의 빛이 유달리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택시를 타려다 재영의 번호를 먼저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재영이 전화를 받더니 대뜸 웃기 시작했다.

“왜?”

영문도 모른 채로 덩달아 따라 웃으며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재영이 내 이름을 불렀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호정아. 우리 호정이. 얼른 뒤돌아봐.”

“응?”

택시로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돌았더니, 재영이 한 손에 커피 캐리어를 들고 한 손에 휴대폰을 쥔 채 날 보며 웃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웃음이 터졌다. 앞뒤 재지 않고 달려가 재영의 품에 안겨들었다.

“많이 바빴지? 며칠 동안이나 SE팀 기사만 쏟아지던데?”

“어. 엄청. 나 눈 좀 봐.”

흐리멍덩한 눈을 끔벅대며 물었더니 재영이 눈꺼풀 위에 입술을 살포시 얹었다가 뗐다. 입술이 닿았던 속눈썹이 떨리며 눈을 간질였다.

“조여울 알아? 야구 좀 관심 있는 사람은 알 만한 신예인데 스카우트 팀에서 자기가 조여울 영입한 걸 대대적으로 알려야 한다잖아. 헤드라인 조금씩만 바꿔서 스포츠 국에 하루에 열 통씩 보도자료 넣었어.”

“그랬어, 우리 애기.”

스물여덟이 되었는데도 재영은 여전히 둘만 있으면 나를 애기라고 불렀다. 그런 애칭을 부를 때 재영이 짓는 표정이 좋았다. 정말 행복을 느끼는 사람처럼, 온화한 사람처럼 보이는 표정이 좋아서 나도 재영이 나를 애기라고 부르는 걸 구태여 고치려 들지 않았다.

재영의 차에 올랐다. 차의 시동이 켜지며 좀 전까지 재영이 듣고 있던 듯한 라디오가 켜졌다.

-…아무래도 사회적 파장이 무척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22일 기자회견 거의 직전이었죠. 해당 기자회견을 불과 5분여 남기고 잠적했던 은하윤 씨가 별안간 자신의 SNS에 비극을 암시하는 글을 남겨…….

“라디오 꺼줄게.”

재영이 라디오를 끄고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가면서 노래 들을까?”

재영이 내민 폰을 받고 미소 지었다. 재영의 폰을 그대로 내 가방에 넣자, 재영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냥 이야기하면서 집 가고 싶어서.”

“오늘은 우리 집 가야 해.”

핸들을 감싸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내 허벅지를 묵직하게 감싸 잡았다.

“응. 맛있는 거 해줘. 오늘 바빠서 기운 없어.”

조금 칭얼거리자 재영이 옅은 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허벅지에서 손을 떼 내 볼을 감싸 어루만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로 주말은 재영의 집에 들러 지냈다. 그건 취업 전에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의 부고로 급하게 영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재영은 그 후 본가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사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에 살고 싶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내실은 원할 때마다 나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양이는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엄마 때문에 재영이 맡아 키우기로 했다. 서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건 양이와 재영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똑똑한 둘답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한 듯 서로를 잠시 쳐다보는 것으로 동거라는 암묵적인 합의를 했다.

재영이 독립하며 얻은 단독빌라는 겉보기엔 층수가 4층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은 빌라이지만, 내부는 단일 층으로 이뤄진 형태였다. 차고지도 개별로 둘 수 있어 동네의 오가는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적었다. 재영은 그 사실에 가장 만족해했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재영이 내 허리를 감싸 급하게 입술을 붙였다.

“씻지도 않았어.”

재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술을 붙였다. 입술 겉면을 핥으며 진득한 살덩이를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온 양이가 우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양이야.” 하고 부르니 양이가 내 종아리에 볼을 한 번 비비고는 다시 제 방으로 몸을 숨겼다. 재영의 가슴 앞을 두 손으로 막아 살짝 밀자, 재영이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허리를 감싼 손의 힘을 풀었다.

“먼저 씻고.”

“…그럼 횟수는 내가 정하게 해줘.”

“그것도 안 돼. 오늘 피곤해.”

재영이 입술을 말았다. 짜증이 역력했다. 일그러진 재영의 볼에 내 볼을 붙여 기댔다.

“지금 못 씻으면 오늘은 아예 안 할 거야. 어떡할래?”

재영에게 다시 돌아오며 스스로 규칙을 정했다. 재영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충족과 절제를 적절히 배치해 제공해야만 했는데, 문제는 그 수치와 양을 정하는 거였다.

하나의 충족에 걸맞은 하나의 절제는 재영에겐 분명 맞지 않았다. 하나의 충족에는 열 개, 스무 개가 넘는 절제가 따라야 재영의 삶은 정상인과 비슷한 수평이 될 수 있었다. 재영은 지금처럼 하나의 절제를 겪어야 할 때마다 못내 짜증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 몇 가지를 참았을 때 내가 내어줄 충족을 때마다 계산했다. 다행히 여태 재영의 계산에서 내가 내어줄 충족의 가치는 자신이 참아낸 절제의 수보다 만족스러운 듯했다. 재영의 눈썹이 틀어졌다.

“우리 며칠이나 못 봤는지 알아?”

재영과 내가 느끼는 시간의 무게는 다르다. 우리가 보지 못한 며칠은 나에게는 그대로 며칠일 뿐이지만, 재영에겐 몇 주 혹은 몇 달의 무게였다. 재영은 제 나름 기나긴 시간을 절제하며 기다렸다고 생각했을 테고 당연히 오늘은 마땅한 충족을 받을 거라 예상했을 거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 재영이 아랫입술을 물고 나를 들어 안았다.

“대신 같이.”

“이런 거 보면 일을 따로 하는 게 신기할 정도야.”

“왜?”

재영이 내 손을 끌어다 자신의 어깨와 목을 완전히 끌어안게 만들었다. 거실부터 욕실까지 몸을 온전히 다 재영에게 떠맡겼다. 재영은 욕조 가장자리에 나를 앉히고 먼저 손을 씻었다.

“옷은 내가 벗겨줄게. 너 피곤하다고 했으니까.”

내가 한 말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억해 되받아치거나 이용하는 재영의 버릇은 지금처럼 기분이 틀어질 때면 종종 고개를 내밀었다.

재영은 젖은 손으로 천천히 내 셔츠를 풀어주었다. 차가운 손이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려가며 목을 타고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몸을 움츠리자 재영이 금세 내 상태를 눈치채고 미소 지었다.

“추워서?”

“응.”

“여기선 안 돼?”

재영이 다시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재영은 내 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겨주기 위해 욕실 바닥에 무릎을 반쯤 굽혀 앉은 상태였다. 내 시야의 아래쪽에 자리한 재영의 눈은 나와 마주치자 다시 아이처럼 맑게 깜박거렸다.

“네 손 때문에 내 셔츠 다 젖었어.”

“어차피 세탁할 건데.”

재영이 바지를 끌어 내리며 허벅지를 따라 통이 넓은 브리프 안을 기웃거리며 들어왔다.

“혹시 다른 데도 젖은 거 아냐?”

“욕실은 안 돼. 이전에 나 무릎 엉망으로 멍들었던 거 기억하지?”

“…응.”

재영의 손가락이 브리프의 입구에서 내전근을 따라 주욱 선을 그리며 나갔다. 기분 좋은 느낌에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재영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낮추고 내 허벅지와 무릎을 보던 재영이 시선을 나와 맞추며 물었다.

“서서는? 그것도 너무 피곤해서 안 돼?”

한숨과 함께 재영을 흘겨보았다. 줄곧 진지한 얼굴로 날 보던 재영의 눈이 미세하게 휘어졌다.

“일 그만두라고 하면 또 나랑 종일 말 안 할 거면서.”

재영의 목을 끌어다 볼에 입술을 붙였다.

“그건 이제 말도 꺼내지 말라는 거네.”

잠시 미소 짓던 재영이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셔츠를 풀어 바닥에 흘렸다.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도 재영의 시선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욕조에 걸터앉은 나를 향한 시선이 민망할 정도로 분명하고 올곧았다. 벨트를 풀고 버클을 풀던 재영이 다시 상체를 숙여 내 입술을 살짝 핥았다.

“일하고 오면 너한테서 딴 새끼들 냄새나.”

“잘 모르겠는데.”

“안다고 답했으면 나 진짜 화낼 수 있었는데.”

단추가 모두 풀어진 셔츠 사이로 재영의 손이 매끄럽게 들어왔다. 허리를 감싼 손이 내 몸을 자연스레 일으켰다. 발목까지 떨어진 바지를 발로 벗겨내고 재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재영의 내면에는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심해 속 재영이 있다. 평생 심해에서 아가미를 달고 뻐금대며 수표 위로 고개를 내밀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존재. 그 존재는 중력의 힘을 믿어 언제든 재영과 내가 자신이 있는 심해로 떨어질 거라 믿는다.

내게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고 싶어 하던 어린 재영을 나 스스로 종종 떠올리기도 하지만, 어떨 땐 정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그가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도 끝은 늘 망각으로 몰린 내가 자신을 선택했을 때 재영이 보인 눈물이었다.

재영의 실체와 내면 속 진짜 그의 존재가 두렵고 무섭다가도 그날, 내 볼에 자신의 뺨을 비비며 안도하던 재영을 떠올리면 나는 결국 재영이 측은해지고 만다.

“둘만 있을 때, 그러니까 내가 안전하고, 너도 스스로가 안전하다고 느낄 때는 네가 바랐던 네가 하고 싶은 말, 네 속에서 들끓는다는 그것들을 다 표현해도 돼.”라는 말에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영은 재깍 눈을 굴리며 내 심중을 읽으려 노력했다.

몇 차례나 도망가지 않겠다는 확답을 듣고서야, 재영은 우리 두 사람의 안전한 때를 제 나름 규정했다.

“너희 회사에 있는 개새끼들은 냄새도 다 좆같아.”

지금 이런 순간, 재영은 심해에 있던 자신을 끌어올려 나를 응시한다. 분명 짙고 검은 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탁하고 흐리다.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지만 나를 바라보는 고개는 삐딱해져 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지금은 안쓰러운 탁한 눈동자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씻겠다고 한 거야.”

재영의 손을 끌어 내 허리 뒤에 밀착시키고 욕조 안으로 발을 디뎠다. 와중에도 재영은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다급히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허리를 안은 손을 빼 내 뒤통수를 감쌌다.

“거봐. 개새끼들 냄새나는 거, 너도 알고 있었네.”

재영의 손이 브리프 뒤를 파고들었다. 손가락 끝에 고인 열감이 뒤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묵직하게 뒤를 짓이기며 어르는 손길에 척추에 들었던 힘이 풀리며 두 다리를 비척댔다.

“흣.”

여물게 닫힌 뒤를 조심히 풀어내는 손길을 느끼며 재영의 입술을 핥았다. 재영의 살에 내 살을 겹겹이 붙이고 덧대어야 발을 딛고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벅지에 간신히 걸려있던 속옷이 완전히 탈의 되자, 재영은 딱딱하게 무르익은 자신의 혀를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으며 볼을 할짝였다.

“으응, 흐…….”

내 목구멍에 차있던 숨이 모두 빠져나가며 단번에 숨이 가빠졌다. 재영은 자신의 바지와 브리프를 마저 벗어 욕조 밖으로 내던졌다.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던져진 옷더미에 고개를 돌리자 턱을 잡은 재영의 손이 단단해졌다.

“딴생각하는 버릇, 아직도 못 고치지.”

“딴생각, 흐, 못 해.”

내 말이 꽤 만족스러운 답이었는지 재영은 모든 숨을 흡입할 듯 몰아붙이던 입술을 벌려 틈을 내주었다. 이를 세워 내 볼을 살짝 깨물고 멀어지더니 곧 목과 귀를 잇는 부위에서 혀를 굴리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스물에 처음 몸을 나눌 때만 해도 재영은 전희에 크게 공을 들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눈빛은 느긋하고 차분했지만 행동은 다급한 쪽이라 시작부터 삽입까지 큰 시간을 할애하진 않았다.

그런 재영이 달라진 건 영국에서 완전히 같이 살게 되고 몇 달이 지나고부터였다. 그때부터 재영은 삽입 때보다 그 전과 후에 더 끈질기게 나를 빨아댔다. 마치 나를 감싼 모든 피부를 이로 뜯어갈 것처럼 입술이 닿을 수 있는 살갗이란 살갗은 샅샅이 찾아 애무했다.

목 언저리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연한 살을 빨아대던 입술이 곧 아래의 유두를 덥석 물었다. 재영의 단단한 혀가 돋은 돌기를 입안에서 굴리며 유린했다. 입술은 두 돌기를 한 번씩 음미하듯 빨아올렸다. 뜨거운 타액이 점철된 유두는 더욱 날을 세워 고개를 들었다.

“흣…….”

재영은 발기하듯 돋아난 돌기를 다시 물어 혀끝으로 꾸욱 누르고 다시 호흡을 들이마셔 빨아댔다. 입술이 멀어지며 쩍, 소리가 났다. 동시에 재영이 머금고 있던 유두가 빨갛게 부풀었다.

재영은 샤워기 부스의 버튼을 눌러 세지 않은 물줄기가 발에 고일 수 있게 했다. 와중에도 입술은 끈질기게 선을 그리며 유두 옆의 늑골 사이 틈을 짓누르며 파고들었다. 두 손으로 재영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호정아…….”

무게 실린 엄지가 사타구니를 지그시 누르며 다리 사이를 벌렸다. 다리가 벌어지자 재영의 혀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사타구니 사이를 파고들어 와 하얀 살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읏, 아, 아파… 아파, 재영아.”

여리고 무른 살을 이가 살짝 물어 피를 고이게 했다. 재영이 입술을 뗄 때마다 입술이 붙었던 부위가 멍처럼 붉게 올랐다. 보랏빛이 도는 붉은 타원의 홀이 허벅지 안쪽 선을 타고 흐드러지게 피었다.

“조여울이랬나?”

눈을 찌푸렸다. 느닷없이 불린 이름을 곱씹는 사이 재영의 혀가 음낭의 뒤를 부드럽게 휘감았다가 멀어졌다. 잠시 허리를 떨며 재영의 어깨를 억세게 붙들었다. 재영의 혀는 잠시의 틈을 느끼다가 발기한 내 성기를 움켜쥐고 혀로 밑면을 완전히 감아 빨아댔다. 허벅지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무릎에서 막힌 것처럼 두 무릎 사이가 자꾸만 붙으려 했다. 재영의 어깨를 붙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상체가 앞으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서 있기 힘겹다는 생각이 들 때쯤 성기를 입에 물고 있던 재영의 숨은 좀 전보다 더욱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네 입에서 다른 새끼 이름 나올 때마다… 너무 견디기 힘들어. 호정아. 내가 조심해달라고 했었잖아.”

재영이 뜸을 들이며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축축하고 눅진한 숨이 성기 전체를 둘렀다.

“하아, 하.”

성기의 끝으로 끈끈한 액이 차올랐다. 재영의 손이 성기의 끝에서 귀두를 둘러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과 성기의 다른 살성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욕실을 적나라하게 메웠다. 재영은 사정 직전인 성기를 쥔 채 압박감을 주며 휘청대는 내 몸을 돌렸다. 재영의 새끼손가락이 성기의 뿌리를 슬며시 어루만지는 듯하더니, 엄지 끝이 요도의 입구를 끈덕하게 눌렀다.

기운 없이 촉촉한 물방울이 흩날리는 샤워기 아래의 벽을 짚고 허리를 좀 더 아래로 숙였다. 재영은 내 골반을 잡아 바로 세웠다.

“네가 숙일수록 더 깊게 들어가.”

재영은 내 골반을 잡아 자신의 아래와 밀착할 정도로 바짝 붙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허리를 조금 위로 세우자, 재영의 손이 아직 열감이 남은 배를 따라 오르더니 늑골을 지나 유두를 긁었다. 손가락 끝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좀 전의 애무 때문인지 유두 끝이 쓰라렸다.

재영은 상체를 숙여 자신의 배와 내 등을 겹치게 안았다. 목 뒤부터 뜨거운 숨이 차츰 이슬처럼 맺히기 시작했다. 목선을 따라 내려가던 혀는 척추 사이사이에 파인 홈마다 이를 세워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살짝 깨물어 살이 부풀면 그 부푼 살을 혀로 감아 빨아올렸다. 아픔 뒤에 느껴지는 쾌감에 후들대던 무릎이 자꾸만 욕실 벽에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 하, 하아…….”

“이러면 앉아서 했을 때처럼 무릎 다 까져.”

재영의 손이 애무하듯 유두의 고른 형태를 더듬었다. 꼬집듯 유두를 바짝 쥐었다가 느리게 푸는가 싶으면 유륜을 따라 호선을 그렸다.

허리가 자꾸만 앞으로 숙여졌다. 달뜬 숨으로 뺨과 이마에 뜨거운 열이 끼쳤다.

“매일 봐야 안심돼.”

자조적인 말끝에 재영의 배와 맞붙었던 등이 서늘해졌다. 재영은 내 둔부를 잡아 벌리고는 벽을 짚고 선 내 뒤에 앉았다.

“뭐, 뭐하게…….”

어색하게 몸을 떨었다. 설마 하던 걱정은 뒤의 촘촘한 근육을 지그시 누르는 혀의 감촉을 느끼고서야 경악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도 재영이 몇 번 혀로 뒤를 풀어주려 한 적은 있지만 절대 싫다며 거절했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싫다는 의미로 발끝을 세워 벽으로 몸을 당길 때였다.

“하읏.”

재영의 단단한 팔이 그대로 허벅지를 잡아 더욱 세게 자신의 혀를 뒤와 붙여 핥았다. 도리질하며 손끝에 힘을 들였다.

“하, 하지, 마… 싫다니까.”

재영은 말없이 그저 내 뒤를 애무하는 것에 집중했다. 긴장감과 불편함에 오므라든 근육의 틈을 핥고 타액으로 축축해진 혀로 반동에 흔들리는 고환의 뒤를 빨았다. 뱀의 비늘처럼 젖었지만 끝은 까끌까끌한 살덩이가 아래를 훑을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전류가 흘렀다. 재영은 볼이 홀쭉하게 파일 정도로 음낭을 입에 머금어 굴렸다.

“으응, 하, 하아, 응.”

방심하느라 느슨해진 뒤로 재차 재영의 혀가 찾아들었다. 좀 전보다 입속이 더 뜨거웠다. 용암처럼 들끓는 내벽의 타액과 유려하게 뒤를 누르며 틈을 벌리는 혀 놀림에 가까스로 지탱하던 무릎이 오므라들었다. 휘청대던 발끝에도 힘이 풀어졌다. 넘어질 뻔한 나를 재영이 움켜 안아 일으켰다.

“우리 애기, 안 해본 건 꼭 다 싫다고 하지.”

재영은 나의 엉덩이를 양쪽에서 꽉 잡아 쥐어짜듯 벌렸다. 울컥대며 쏟아진 액이 배로 튀어 나와 욕조에도 흩뿌려졌다.

“흐으, 윽…….”

삽입도 전이었다. 사정감은 있었지만 요의처럼 다급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작 뒤를 핥아준 걸로 참지 못하고 사정하고 말았다. 허벅지를 타고 희뿌연 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묘한 수치심에 두 뺨이 하얗게 상기됐다.

“씻… 고 싶어.”

웅얼웅얼 말했다. 새된 소리가 절로 났다. 재영은 세면대에 두었던 콘돔을 입에 물어 한 손으로 찢었다. 탄실하게 솟은 재영의 성기에서 뜨거운 열이 올랐다. 씨근덕대며 더욱 바짝 끝을 올린 성기 끝으로 콘돔이 천천히 씌워졌다. 방금까지 재영의 혀가 드나들던 뒷구멍이 긴장감으로 일렁거렸다.

“나 하나여야만 해.”

“아흣.”

뭐가, 라는 질문이 목구멍에서 턱 막히며 가쁜 신음이 뱉어졌다. 성기의 입구가 좁은 입구를 주먹으로 으깨듯 꾸욱 누르며 들어오려 했다. 주체하지 못한 밭은 신음은 막상 한번 뱉어지기 시작하니 누수된 수도관의 물줄기처럼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하아, 아으, 흑… 흐응.”

엉덩이를 조이고 벽을 짚은 손을 주먹 쥐었다. 꽉 움켜쥔 주먹이 벽을 밀어냈다.

“또 다 안 물고 혼자 가려 하지.”

재영은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내 허리를 꽉 잡아 허리 짓을 멈추게 했다. 엉덩이 위로 재영의 손바닥이 짧게 착, 소리를 내며 붙었다가 멀어졌다. 시큰하게 아린 엉덩이에 입술을 깨물었다.

“윽.”

동시에 입구를 비집고 선 팔뚝같이 단단한 살덩이가 한 번 더 지그시 입구의 주름을 쓸며 들어왔다. 좀 전보다 더 깊게 들어온 뜨거운 살의 느낌에 어깨와 추골 아래까지 전류가 흘렀다.

재영의 손이 내 턱을 쓸어 목을 잡아 바로 세웠다. 한참 아래로 숙어지던 상체가 들리는 순간을 노려 재영의 두꺼운 성기가 더욱 깊게 내벽을 찌르며 들어왔다.

“하흐… 응…….”

이제는 적응할 만도 한데 재영의 성기가 처음 진입할 땐 여전히 하체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통증이 수반됐다. 앓는 소리를 내며 벽을 밀어내던 주먹을 더욱 세게 쥐었다.

“나만, 호정아… 평생 나만 보는 거야… 네 이런 표정은.”

재영이 내 목을 움켜쥐고 얼굴을 올렸다. 거울에 내 얼굴에 비쳤다. 열감과 흥분으로 벌어진 입술, 팽창된 동공이 고스란히 보였다. 수치심인지 모멸감인지 섹스 중인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 단순한 불편함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재영은 이런 식으로 내가 불안해하고 불편해할 때를 즐겼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섹스 중이면 내가 스스로 뒤를 풀게 하거나 수음하는 나를 감상하며 내 얼굴이 수치심에 일그러지는 순간을 기다릴 때도 있었다.

“예뻐. 너무…….”

재영은 무르익은 내 뺨에 츠읍, 하고 늘어지게 입을 맞추었다. 간절하게 기다리던 부위에 정확히 내리꽂힌 성기에 골반이 파르르 떨렸다.

“아읏, 흣, 흐읏, 응.”

재영은 내 아랫배에서 시작해 배꼽의 오른쪽 표면으로 불뚝하게 솟으며 드러난 자신의 성기 형태를 더듬어 만졌다. 잘게 떨리는 근육을 느리게 음미하던 재영의 성기는 조금 빠져나갔다가 다시 음모가 맞붙을 정도로 깊숙이 뒤를 헤집으며 들어왔다.

“아윽!”

수백 번을 쑤셔 박힌 것 같은데도 여전히 재영의 아래가 뿌리 끝까지 들어오는 첫 순간은 아찔할 정도로 큰 고통이 수반됐다. 고통 뒤에 곧이어 찾아오는 쾌락을 더욱 간절히 좇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재영이 자신의 둔부에 힘을 주고 더욱 성기를 밀어붙여 넣었다. 윽박지르듯 들어온 성기가 배를 가득 채우며 팽창했다. 내벽의 촘촘한 홈으로 짙은 물이 배었다. 진득한 움직임을 위한 윤활유처럼 내벽에 들어찬 물은 성기가 드나드는 움직임에 맞춰 처억처억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성기는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빠르게 들이받혔다. 벽으로 점점 몸이 밀려 쏟아지려 했다. 추삽질이 빨라지며 상체가 벽으로 쏠렸다.

“빼지 마.”

재영의 뜨거운 손이 골반을 재차 당겨 밀착했다. 성기가 드나들 때보다 더 깊게 박히며 뱃속으로 알 수 없는 파도가 일었다. 부들부들 몸을 떨며 상체를 곧추세워 재영에게 온전히 기댔다.

“아흑, 흣, 응, 흐으… 으읏.”

“하아…….”

거울에 비친 건 내 얼굴뿐이 아니었다. 내 턱을 잡은 재영의 얼굴 역시 적나라한 내 얼굴 뒤로 비쳤다. 재영의 얼굴을 찬찬히 하나씩 뜯어 관찰했다. 물기 젖은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뒤로 쓸어 넘겨졌고, 입술은 곡선이 아닌 곧은 직선이었다. 잘근 깨문 입술과 고통과 충족된 욕망으로 범벅되어 좁혀진 미간은 희락에 젖은 내 얼굴만큼이나 숨김이 없었다.

허리가 위에서 아래로, 재영의 성기가 들고 나는 박자에 맞춰 움직여졌다. 두 살성이 쩌억쩌억 맞붙는 소리가 물줄기 소리에 맞춰 욕실 가득 울렸다.

“하아, 하아, 아읏.”

뻑뻑하게 뒤를 긁던 콘돔의 질감도 잊힐 정도로 성기는 매끈한 액으로 점철되어 뒤를 짓눌렀다. 재영은 처음보다 느리게 성기를 거의 끝까지 빼내었다가 내 골반을 당겨 제 성기를 쑤셔 넣었다. 재영이 들어온 게 아니라, 내가 엉덩이를 붙여 성기를 받는 움직임에 두 눈을 감고 밭은 숨을 뱉어냈다.

“아윽, 흐.”

비안개가 내려앉은 듯 거울이 금세 습기로 하얗게 물들었다. 서로의 얼굴이 가려진 틈으로 살색의 두 형상이 엉켜 움직이는 형태만 아스라이 보였다. 고개를 뒤로 돌려 재영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재영은 내 턱을 더욱 세게 잡아 입술을 붙여 혀를 밀어 넣었다. 내벽을 핥고 어루만지는 혀의 움직임이 거셌다. 세찬 턱 힘이 느껴질 정도로 재영은 내 혀를 끌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붙들었다. 두 혀가 뒤얽히는 감각을 느낄 새도 없이 다시 뒤로 성기가 뿌리 끝까지 박혀 들었다.

“읏.”

허리를 움찔하며 몸을 뒤채는데도 재영은 끝까지 내 입술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재영의 혀가 눅진하게 달라붙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저릿한 감각을 느끼며 몸을 떨자, 재영의 손이 내 아랫배를 감싸 큰 호선을 그리며 어루만졌다.

“내 새끼, 우리 호정이. 내 거 맞죠?”

엉긴 혀가 벌어진 틈에 재영이 확인하듯 나를 재촉하며 물었다. 선생님이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말투지만, 표정은 한없이 냉랭하게 얼어 있었다. 대답을 입맞춤으로 대신하려 하자, 재영이 아랫배에 호선을 그리며 어루만지던 손길을 거두려 했다. 재영의 손을 끌어 다시 내 배 위에 두고 절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도 다 알아야 하는데. 우리 호정이 내 새끼인 거.”

재영은 금세 무섭게 얼어 있던 표정을 풀고 시무룩해진 얼굴로 뒤를 쳐댔다. 둔부는 재영의 움직임에 밀렸다가 다시 뒤를 조이며 재영의 성기를 물어 당겼다. 쫀쫀하게 엉기는 성기와 뒤의 마찰 소리에 시야가 흐려졌다.

재영은 느린 움직임으로 성기를 빼고 치닫다가, 점차 그 속도를 올렸다. 팔꿈치까지 완전히 벽에 붙을 만큼 몸이 쏠렸다. 재영이 내 손을 끌어 뒤에 선 자신의 목을 감싸게 해도 소용없었다.

“하응, 응, 읏.”

물 젖은 소리가 울리던 욕실에는 이제 느리게 퍼억, 들어가는 살 소리가 더욱 꼼꼼히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짙고 강렬한 쾌감에 두 눈이 빨갛게 익어들었다. 재영은 내 턱을 잡은 채로 절정에 치달은 내 표정을 지그시 응시했다. 뜨거울 정도로 빳빳하게 나를 몰아붙이던 단단한 살덩이가 뒤의 주름을 밀며 빠져나갔다.

“하아… 아읏.”

액으로 젖은 콘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뜨거운 열이 남은 재영의 성기는 이제 내 둔부 사이와 척추를 긁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건 액이 내전근을 따라 줄줄 흘러내림과 동시에 내 등줄기에도 재영의 정액이 끈적하게 쏟아졌다.

“남들도 다 알게 할까? 호정아.”

재영은 미소 띤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 거울의 습기를 지웠다. 무지개처럼 반원으로 지워진 거울에 붉게 익은 내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 * *

주말 아침부터 은하윤의 기자회견으로 뉴스를 비롯한 모든 매체가 시끄러웠다. 기자회견에서 은하윤이 한 말은 모든 문장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매체의 헤드라인으로 나오며 끝도 없이 다음 기사, 다음 기사로 이어졌다. 무심히 튼 화면 속엔 또 은하윤의 기자회견 VCR이 반복되고 있었다.

「…손신아 씨와 저는 제가 결혼하기 전까지,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10년이 넘게 활동하면서도 단 한 번 보인 적 없던 은하윤의 초췌한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됐다. 어느새 옆에 온 양이가 앞발을 들어 나의 허벅지에 올렸다. 양이는 작은 발로 조곤조곤 내 허벅지를 번갈아 눌렀다. 양이의 턱을 부드럽게 긁었다. 음료와 연고를 들고 오던 재영이 소파에 앉은 내 볼을 톡 건드렸다.

“뭘 그렇게 집중해서 봐?”

턱까지 괴고 화면 속으로 들어갈 듯 기울어진 상체를 일으켰다. 소파가 출렁하게 몸을 기댔다.

“손신아랑 은하윤, 기사 봤어?”

“어.”

재영은 익히 아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심드렁하게 답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런 일에는 관심을 가질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양아. 혼자 놀아.”

재영의 말에 양이가 폭 고개를 떨구더니 창가로 몸을 돌렸다. 재영은 내 무릎 사이를 벌려 허벅지로 이어지는 곳에 천천히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멍든 부위마다 재영의 손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모였다가 멀어졌다.

“심지어 은하윤은 작년에 결혼도 했대.”

손신아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면서 왜 다른 남자와 결혼까지 한 걸까. 궁금한 얼굴로 재영을 내려다보았다. 내 몸을 구석구석 살펴 약을 바르던 재영이 소파 옆자리에 기대앉았다. 털썩 소리가 나며 소파에 작은 반동이 일었다.

재영은 연고를 테이블에 올리고 테이블에 두었던 음료 캔을 들었다. 내 등 뒤로 손을 뻗어 제 쪽으로 나를 당기는 움직임을 따라 몸을 기댔다. 허리가 한 팔에 감겨 안겼다. 몸을 기울여 안긴 채로 재영이 내민 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결혼이라는 게 참 유용하잖아. 진짜 둘이 연인이었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해도 이미 한쪽이 결혼한 상태니, 가타부타 변명할 필요도 없었겠지.”

재영은 내가 마신 캔을 가져가 남은 음료로 자신의 목을 축였다. 화면엔 은하윤의 기자회견 장면이 계속됐다. 종이를 쥔 은하윤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고 어깨 역시 그에 못지않게 추처럼 흔들거렸다.

「신아 언니의 마지막 유언장을… 공개하려고 합니다. 언니는 이 편지가 공개되길 원했습니다. 유가족 분들이 원하지 않으신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저는… 언니의 생전 부탁을 거절했던 죄인인 저는… 이번만큼은 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언니가 바랐듯이 부디 많은 분들이 이 유언장을 듣고, 읽게 되길… 그래서 더욱 많은 분들이 한 번이라도 죽음의 끝자락에 섰던 신아 언니의 그 심정에 공감해주시기를… 미약하게나마 우리를, 언니를… 이해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품에 기댄 채로 재영의 얼굴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재영은 무심한 얼굴로 캔에 남은 음료를 마저 마셨다. 상체를 숙여 테이블에 컵을 놓는 것까지 하나의 흐름처럼 자연스러웠다. 재영은 자유로워진 손을 내 티 안으로 밀어 넣어 배를 여리게 쓰다듬었다. 윗배에서 시작해 아랫배로 둥그런 선을 그리며 도는 손바닥이 따뜻했다.

「손신아입니다. 저는 18살에 우연히 김주학 대표님의 눈에 띄어 데뷔를 했습니다. 회사에서 꼼꼼하고 체계적인 연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덕분에 너무나 감사하게도 데뷔 직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고 더불어 여러분들의 따스한 사랑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사랑해주신 것을 잘 압니다. 제 마지막 걸음을 가장 더디게 만드는 존재 또한 저를 응원해주신 여러분들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을, 제 단점까지 안아주신 팬 분들을, 제 작품을 봐주시고 응원해주신 시청자 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고, 아이는 그 부모를 사랑하고, 친구로 연인으로, 각기 다른 존재와 관계 속에서도 타인을 사랑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두고 살아가듯이…….

저는 그 사랑을, 여러분들이 제게 보내주신 사랑과 추호도 다르지 않은 그 감정을 하윤이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여자이지만, 여자인 은하윤 씨를 사랑했습니다. 하윤이가 미혼이었을 땐 같은 아파트의 다른 층수에 살면서도 스케줄이 없으면 늘 서로를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1분이라 할지라도, 저희에게 그 1분은 천금의 시간처럼 소중하고 따뜻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그 감정은 정신병일 뿐, 사랑이 아니라 한다 해도…….」

감정이 격해진 모양인지 말을 멈춘 은하윤이 고개를 숙였다. 부들대는 손가락이 잠시 클로즈업되었다. 은하윤은 한동안 감정을 추스른 후에야 유언장의 가장 앞 장을 테이블 위에 내렸다.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해도, 저는 한번 경험한 그 감정을 부정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그 감정을 외면하고 회피한 채 살아가야 한다면 저는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은하윤이 입술을 잘근 물었다. 은하윤의 얼굴 위로 섬광 같은 플래시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결혼한 하윤이를 이해해주세요. 그녀는 저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도 그랬지만, 그녀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와 결혼이라는 책무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발화된 법의 제도권 내에서 다만, 안정적이고 싶었습니다.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숱한 인간적 성장을 이루고 싶었습니다. 희생과 이해와 관용, 헌신, 포용이라는 감정을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둘 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탓에, 저희는 늘 자유를 갈망했고 동경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제 정체성에도 허락되지 않는 머나먼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하윤이를 사랑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제도 내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자유이자 권리였지만 그럼에도 아직 하윤이를 간절히 사랑합니다. 그녀가 부디 행복하길 바랍니다. 하윤이와 함께하고 싶었던 제 자유는 욕심이었고, 탐욕이었던…….」

은하윤은 쥐고 있던 종이를 꽉 움켜쥐었다. 파들대던 종이가 구겨지고 은하윤이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서러움에 마른 어깨가 들썩거렸다. 은하윤의 마른 몸 위로 플래시의 빛이 퍼부어졌다. 통곡으로 들썩이는 등이 마치 플래시의 화살촉에 맞아 너덜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화면 속 안경을 낀 기자가 손을 번쩍 들어 마이크를 쥐었다.

「은하윤 씨. 질문 있습니다. 손신아 씨가 결혼의 책무를 하고 싶다고 적었는데, 사실 결혼의 가장 큰 책무는 아이를 낳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어차피 동성혼은 결혼의 책무를 다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 해보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아이를 가질 수도 없으니 연애만 해도 충분한데,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하신 건지… 궁금해서요.」

은하윤은 기자의 질문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람들 몇이 웅성거렸다. 여전히 플래시 빛은 잔인할 정도로 은하윤을 향해 쏟아졌다.

기자의 질문이 끝나고 한참 더 시간이 지나서야 은하윤이 고개를 들었다. 주춤거리며 마이크를 다시 쥔 은하윤이 벌겋게 부은 눈으로 두리번대며 질문을 던진 기자를 찾았다. 자리에 앉은 기자가 다시 손을 들었다. 자신을 알아봐달라는 의미 같았다.

「언니와 저는… 기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어요. 기자님이 이성애자라는 가정 하에 묻겠습니다. 기자님은 길을 지나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나면 어떠신가요? 말을 걸까, 번호라도 달라고 해볼까… 이름이라도 물어야겠다, 생각하시나요? 연애를 하게 되면 어떨까요. 데이트 고민도 하시겠죠. 연애하다 확신이 들면 결혼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겁니다. 아주 자연스럽게요. 언니와 저는 그런 고민을 할 선택권조차 없었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그게 아닙니다. 아이요. 아이는 어차피 낳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은하윤이 눈을 깜박였다. 눈에 금세 가득 차오른 눈물이 다시 발갛게 익은 뺨을 타고 테이블 위로 흘렀다.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에게 그런 질문을 하실 수 있나요? 결혼 후에 불임이라는 판정을 받은 부부에게 아이를 낳지 못해 사회적 책임을 할 수 없으니 이혼하라는 말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결혼의 궁극적 목적과 책임이 아이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관용이라면… 흐읍… 윽… 언니는 그저 외롭지 않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기자님과 같은 일상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

은하윤이 휘청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가 은하윤을 지탱했고, 플래시의 번쩍임은 이제 아예 화면을 하얗게 만들 정도로 쏟아졌다.

「굳이 결혼까지 하게 해달라고 하면서 인정을 바랐던 이유는 뭔가요?」

비틀대던 은하윤이 테이블을 잡고 섰다. 눈의 초점도 맞지 않았다.

「배제되고 싶지 않아서요……. 늘 그렇게 말했었어요.」

거의 쓰러지다시피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는 은하윤의 모습 아래로 ‘故 손신아, 제도권 내 배제 바라지 않아…’라는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음…….”

재영이 비스듬하게 꺾었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래도 아직은 무리일 거 같은데.”

내 말에 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영은 작게 하품하더니 이내 내 뺨을 당겨 츠읍, 늘어지는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그래도 여론은 좀 바뀌겠지.”

“그런가?”

뉴스 화면은 금세 스튜디오로 넘어갔다. 은하윤의 기자회견을 분석하려는 정신과 전문의와 동성애자 인권활동을 해온 변호사가 등장하는 화면을 보던 재영이 TV를 끄고 내 몸을 당겨 안았다.

여론이라는 재영의 말에 언젠가 뉴스에서 아동을 성폭행한 남성이 고작 3년이라는 형량을 받은 것에 분개했던 게 생각났다. 재영은 화내는 나를 보며 “법이 원래 그래. 여론 때문에 다른 해석을 하고 판결할 수는 없는 거야.”라고 했었다. 재영은 불만으로 볼록해진 내 볼을 건드리며 웃었다. “그래도 재밌는 건 법은 여론 눈치를 안 봐도 그 법의 근간이자 상위개념인 헌법은 여론 눈치를 본다는 거지.” 그 말을 하는 재영의 표정이 꽤 즐거워 보였었다.

“너는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어떨 거 같아?”

“아이?”

줄곧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던 재영이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

“결혼은 좋지만, 아이는… 싫은데.”

재영은 진지한 얼굴로 답하고는 못내 짜증스러운 얼굴로 좁혀진 눈썹을 긁었다.

“나 닮은 새끼가 네 젖꼭지 빠는 거 싫어.”

“야!”

허리를 감싼 재영의 손을 재빨리 빼냈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자, 재영이 피식 웃으며 다시 내 볼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진심이야. 상상만으로 진짜 죽여 버리고 싶어졌어.”

재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미소 띤 얼굴로 돌아왔다. 부드럽게 등을 다독이는 움직임을 느끼며 숨을 고르게 들이마셨다.

재영의 말대로 은하윤의 기자회견 후로 여론은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찬반이나 이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동성혼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방송에선 동성혼 관련 토론이 일주일에 몇 번이나 채널을 달리하며 이어졌고, 각종 플랫폼의 영상에서도 동성혼이 인기 동영상 상위에 랭크되었다.

덕분에 성공적인 선수 트레이드로 각종 보도 자료를 정리한 게 소득도 없이 밀려났다. 메인 기사는 다시 은하윤과 손신아로 북적였다.

“하아… 집 가고 싶네.”

카디건의 단추를 풀어 의자에 걸쳤다. 굳은 어깨를 풀었다. 오전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탓에 휴대폰도 한 번 보지 못했다.

“호정 씨.”

휴대폰을 보려는데 나와 1년 차이인 이상목 선배가 옆으로 다가왔다. 커피를 건네기에 상체를 무릎에 닿을 정도로 숙이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며 깔깔대며 웃어댔다.

“아. 호정 씨도 은하윤 기자회견 봤지?”

“네. 안 볼 수가 없던데요.”

고개를 끄덕이자 선배의 눈이 금세 안쓰러운 눈길로 변했다.

“너무 딱하더라… 사실 우리야 결혼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잖아. 우린 결혼도 그냥 할까, 말까 선택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그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아예 신청조차 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심지어 나는 여태 손신아, 은하윤 둘 다 관심도 없었는데. 너무 불쌍해서 기자회견 보면서 좀 울컥하더라.”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선배는 깊고 큰 숨을 내쉬었다.

“요즘 일 너무 많지?”

“네. 제 일 좀 가져가 주시면 안 될까요?”

“일 가져오는 건 수명 값을 반납하는 거와 같은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선배는 자신의 말에 만족한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한 손으로 휴대폰을 보며 잔잔히 웃던 선배가 멍한 눈으로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려 할 때였다.

“왁씨……. 와… 대박… 와… 어떡하냐.”

“왜요?”

회사 내 이슈라도 터진 게 아닐까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배가 내민 휴대폰 화면을 가까이했다.

“은하윤 자살…….”

선배가 미간을 확 좁히며 눈앞의 휴대폰을 다시 가져갔다.

“와 어떡해… 아… 새벽에 청원 글 올렸던데… 그게 마지막 유언이 된 거네.”

선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믿기지 않는 사람처럼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시려다 만 커피를 책상 위에 내렸다.

“청원이요?”

“아직 못 봤어?”

일회용 컵의 겉면을 손으로 긁었다. 이런 사건이 사회적으로 도드라지는 사건이 있을 때나 동성애를 주제로 한 영화가 관심을 받을 때마다 괜한 두려움이 들었다.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물려다, 재영이 싫어하는 버릇이라는 게 떠올라 한숨으로 대신했다.

선배가 휴대폰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잡아 보려는데 선배가 휴대폰을 쥔 채로 내 뒤로 와 화면 속 청원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은하윤입니다. 저는 공무원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선생님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4살엔 중학교를, 17살엔 아주 평범하게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법학과에도 진학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고, 대학 표지 모델로 스물에 우연히 데뷔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 영재라거나 천재라는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주 평범하게, 지극히 정상적으로, 늘 적정선의 성적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런 제가 남들과 다르게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걸 깨달은 건 23살이었습니다. 같은 작품에서 만난 신아 언니를 보는 순간 언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른 채로 저는 그저 그녀에게 내 인생의 전부를 내어줘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헌법 36조 1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재판관들은 이 항목에 제시된 ‘양성’이라는 표현을 이유로 늘 동성혼을 막아왔습니다. 이는 결혼을 양성 간의 결합으로 국한한 것일까요, 아니면 동성과 양성의 구분 없이 그저 모든 성의 화합과 평등을 의미하는 확장의 의미인가요.

헌법 제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 국가가 제게 확인하고 보장한 저의 행복과 불가침이라는 기본적 인권에 왜 언니와 저 같은 사람의 사랑은 배제되었던 것일까요.

헌법 제 11조 1항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국가가 헌법으로 정의한 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무엇인가요. 제가 선택하고 행하고자 하는 것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고 사회적 윤리적으로 해가 된다는 명백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언니와 저의 자유는 멸시되어야 했던 걸까요.

마지막으로 헌법 제 69조에 따른 대통령의 취임 선서를 적습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대통령님께 간곡히 청원합니다. 국민이라는 울타리 안에 저희를 넣어주세요. 신아 언니와 저를 비롯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내 등을 감싸고 청원 글을 읽은 선배가 몸을 일으켰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도 멀어졌다. 남긴 커피로 마른 목을 축였다.

“솔직히 결혼까지는 오버라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 이제는. 호정 씨는 어떻게 생각해?”

“아… 글쎄요.”

어색하게 웃었다. 방금 커피를 마셨는데도 금세 목이 말랐다.

재영은 오늘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며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퇴근 시간에 맞춰 지하로 내려가니 차에 기대 있던 재영이 오른손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면 안 돼?”

차에 타기도 전이었다. 빠르게 던져진 질문에 놀라 멀뚱히 쳐다봤더니 재영이 차 문을 열어주며 민망한 듯 웃었다.

“내가 너무 급하게 물었어?”

“자도 되긴 한데, 엄마한테 말은 해야 하니까.”

“응. 가면서 전화로 물어봐.”

차에 타 시동을 켜자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혼자 있을 땐 노래를 듣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의아하게 바라보니, 재영이 볼을 긁으며 내 손을 잡았다.

“오늘 좋은 일이 있었거든. 네가 이전에 틀어줬던 거 들으면서 왔지.”

“좋은 일?”

재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고등학교 하키 팀에서만 U18 국대로 뽑힌 애가 다섯이야.”

“와, 진짜?”

재영의 손을 꽉 움켜쥐고 되물었다. 재영은 졸업 후 재단으로 들어가며 스포츠 팀 양성과 역량을 가진 선수를 영입하는 것에 가장 열을 올렸다. 있는 집 자제들만 진학하는 학교에 체육 특기생은 물을 흐린다는 이사진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재영은 끝내 아이스하키 팀을 창설했다. 재단에 스포츠 팀을 만듦으로써 학교 위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피력한 시간이 처음 기획안을 제출한 때로부터 2년이나 흘렀었다.

있는 집 자제 중 실제로 체육과 음악 특기로 대학을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과 국내 재력가의 자제들이 모인 곳에서 지원하는 스포츠 팀에 대한 국내의 관심이 높아질 거란 점을 역설했다. 결국 재벌 집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운동인 아이스하키와 검도가 최종안에 올랐고 마지막으로 선정된 게 아이스하키였다.

“덕분에 학교 문의도 꽤 많아졌고. 팀 애들 팬클럽도 있다나 봐.”

스포츠와 음악 전문 재단을 분리해 설립하고자 하는 재영의 계획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는 것 같아 나도 뿌듯해졌다.

“기분 좋은 날엔 좋은 일만 생겨. 정말 신기할 정도로.”

재영은 흥얼대며 흘러나오는 노래에 목소리를 얹었다. 손톱만큼 열어놓은 창문으로 가을의 저녁 바람이 스몄다.

며칠이 더 지났다. 영입한 선수 홍보자료를 배포해 팀의 투자처를 확장해야 하는 업무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중요한 일이라 프로젝트팀 자체에 연차가 높은 사람들로만 구성되다 보니 결국 내가 팀의 막내가 되었다. 선배들이 여러 방면에서 어떻게 처리하면 될지 방향성을 잡아주고 도와주긴 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거의 모든 마무리 업무가 내 몫이 되어있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쯤엔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녹초가 된 상태였다.

집으로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엄마가 좋아하는 맥주와 나와 재영이 즐겨 먹는 맥주, 두 종류를 모두 골라 담았다. 계산을 마치고 아파트로 들어가는데 누군가 휘적이는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라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이호정 씨.”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들어 보니 재영이 나를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으레 입던 정장이 아니었다. 흰색 티와 연한 색 청바지를 입은 편한 복장이었다. 언젠가 내가 예쁘다고 칭찬했던 청바지였다.

“이호정 씨. 전화도 안 받으시네요.”

“전화했었어? 못 봤어. 이거 들고 오느라.”

양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재영은 내가 들어 보인 비닐봉지를 가져가 한 손에 쥐었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게?”

“아니. 자고 가지는 못할 거 같아. 그냥 오랜만에 어머니 보고 싶어서.”

“응.”

재영이 우리 엄마를 챙기는 말과 행동을 할 때는 본래의 재영을 완전히 잊게 된다. 아주 평범하고 다정한 남자처럼 느껴지는 기분이 좋아서 나는 재영이 이런 식의 말을 할 때마다 그의 허리를 감싸고 몸을 붙이기도 한다. 재영은 내가 그렇게 안기는 순간이면 내 어깨를 붙들어 더욱 단단히 자신의 품에 담았다.

재영이 미리 엄마에게 얘기를 드린 것인지, 입구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귀찮아 자주 하지도 않던 갈비와 갖가지 반찬들에 왜 나만 있는 평소에는 안 해주냐고 놀리자 엄마가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엄마가 TV 뉴스를 틀었다. 재영은 엄마가 TV를 켜는 사이 엄마가 꼬집은 내 볼을 슥슥 문질렀다. 오늘도 역시나 손신아와 은하윤 관련 뉴스가 첫 번째로 흘러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차분한 가을입니다. 갑작스러운 배우 손신아 씨의 사망으로 동성혼이 화두로 떠오른 지도 2주가 지났습니다. 대규모 집회가 곳곳에서 일어나며 사회 분위기가 흉흉합니다. 이에 헌법에 대한 논쟁 역시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이번 논쟁만큼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이번 주 광화문 앞 역시 집회로 소란스럽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이정희 기자 연결해보겠습니다.」

밥을 먹던 동작을 멈추고 엄마가 틀어놓은 뉴스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은 동성혼 찬성을 외치는 사람들과 이를 반대하는 종교단체의 몸싸움 장면으로 채워졌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 안 됐어.”

“응…….”

엄마의 말에 동의하듯 답하고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재영이 피식 웃으며 젓가락 쥔 내 손을 끌어 반찬으로 이끌었다.

“먹고. 호정아, 먹고 봐.”

“아, 어…….”

젓가락으로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아무 반찬이나 집어 입에 넣었다. 다시 소란스러운 장면이 전송되는 화면을 응시했다. 회사에서 선배가 소란스레 읊어대던 은하윤의 유언 같은 청원 글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사람들이 화가 많이 났나 봐요.”

재영이 엄마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몰랐는데 몇 년 전에도 재판관 아홉 중에 여덟이 반대했다더라.”

“네.”

재영과 엄마의 대화를 듣는 사이 화면에는 생전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토크쇼의 장면이 자료화면으로 나왔다.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것이라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기 전이라면 그저 친한 친구로만 보였을 텐데, 둘의 관계를 알고 보니 저건 명백히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재영이 고기를 내 밥 위에 올리고 느리게 턱짓을 해 보였다.

“잘 먹어야지. 호정아. 어머니. 호정이 일하기 시작하면서 살 빠진 거, 느끼시죠? 요즘 부쩍 살이 빠졌어요.”

“봐. 나만 느끼는 거 아니지? 내가 몇 번이나 말해도. 재영아, 얘가 요즘 아침도 제대로 안 먹어.”

“그래요?”

재영은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고기 하나를 더 들어 내 숟가락 위에 얹었다. 조금 전보다 더 커진 고기를 보고 재영을 올려보니, 재영은 언제나처럼 잔잔한 미소를 띤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많이 먹어.”

“응…….”

재영이 나를 보는 눈빛 또한 TV 속 그녀들이 보인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 재영이 올려준 고기를 입에 넣어 우물댔다. 조각이 큰 탓에 한참을 씹어도 목을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저렇게 화내고 싸우는 거 보면 내 일이 아닌데도 무섭고 싫더라.”

엄마가 반찬을 재영과 내 쪽으로 밀며 말했다. 나 역시 엄마와 같았다. 내가 있는 곳과 동떨어진 공간,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도 싸우거나 화내는 사람을 보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편한 상황은 언제나 마찰이 있는 상황에서 발화됐다. 엄마의 말을 듣던 재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좋은 일인 거 같아요. 사회가 바뀌는 건 여론 때문인데, 그 여론이 사회를 바꾸려면 동정과 분노라는 두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동정, 그 다음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그 동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의 분노.”

“어머. 그래?”

엄마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도 어디서 들었어요.”

재영이 미약하게 웃으며 다시 고기를 들어, 내 밥 위에 올렸다. “그만. 나 배불러.”라는 말에도 재영은 흘깃 나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옅게 저었다.

“안 돼. 더 먹어. 너 지금 너무 조금 먹었어.”

재영은 무심한 눈으로 내 손목을 끌어 나 대신 숟가락으로 밥을 펐다. 손목이 잡힌 상태라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한 숟가락을 더 입에 넣었다. 꾸역꾸역 많은 양의 밥을 오물대며 씹었다. 재영은 뿌듯한 얼굴로 턱까지 괸 채 고기를 씹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가 이상하게 생각하기라도 할까 봐 나머지 손으로 재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는데도 재영은 꿈쩍하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님 눈에도 호정이가 먹을 때가 가장 예뻐요?”

“호정이?”

“네. 먹을 때 너무 예쁘죠?”

엄마가 보지 못하게 입만 벌려 “미쳤어?”라고 물었다. 재영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엄마가 나와 재영을 번갈아 보더니 재영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지. 엄마는 원래 자기 새끼 입에 뭐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고 예뻐 보이니까.”

“그러니까요. 저도 그래요.”

저녁 식사가 끝나자 재영은 엄마의 앞에 봉투 하나를 내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때문에 자고 가지 못해 서운하다는 말을 하는 재영을 보는 내가 더 괜한 서운함을 느꼈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재영의 옆에 섰다. “아파트 앞까지만.”이라고 중얼대자 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뭐야?”

엄마가 재영이 내민 봉투를 들어 무엇이 들었는지 물었다. 재영은 “저 가고 열어보세요.”라는 말을 하며 웃었다. 봉투 안을 보려는 엄마의 손을 잡아 말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재영이 문득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당겼다. 주먹 쥔 손이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꼭 감싸 쥐더니 재영은 눈까지 감았다.

“대체 언제 안 헤어져도 되는 거지?”

재영이 시무룩한 말투로 속삭였다. 재영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올려다보았더니 생각보다 표정이 진지했다.

“나랑 또 같이 살고 싶어?”

“질문이라고 해?”

재영이 새초롬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다시 눈을 감고 주먹 쥔 내 손등 위와 그 위로 도드라진 뼈마디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자리마다 서운함이 깃들었다.

“영국에서 진짜 좋긴 했지.”

덩달아 시무룩하게 답했더니, 재영이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며 내 손을 펼쳤다. 재영은 펼쳐지며 드러난 손바닥에도 제 입술을 차례로 붙였다.

“같이 살고 싶어. 곧 되겠지, 곧, 조만간, 하던 게 몇 년인 줄 알지?”

“응.”

재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엄마를 혼자 두는 게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회사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집을 두고 굳이 재영과 함께 살겠다고 엄마를 설득할 자신이 없는 게 더 큰 이유였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서른이 되면 같이 살자 한 약속이 어느새 코앞이었다. 재영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내 볼을 두 손으로 감싸 문질렀다.

“가을이다. 호정아. 너 가을 좋아하잖아.”

재영의 눈은 가끔 이유 없이 촉촉하게 젖어 들 때가 있었다. 지금도 물기가 오른 재영의 눈에 내 모습이 가득 찼다. 나 또한 재영과 헤어지고 만날 날을 곱씹고 기다리는 게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누가 먼저 마치더라도, 그 사람의 일정과는 상관없이 밤이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아침을 같이 맞이할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일 뿐인데 이렇게 과거의 한 순간으로 떠올리기 시작하면 아득한 옛날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가을이 좋겠다.”

어느새 아파트 입구에 주차된 차 앞이었다. 재영이 낮게 읊조리며 내 볼을 한 번 더 문질렀다. 서늘한 바람이 불며 머리를 어질렀다. 좀 전 뉴스앵커의 말처럼 그 어느 가을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라는 게 실감 났다. 차에 오르려는 재영의 손을 끌어당겼다.

“같이… 같이 갈까?”

“그래도 되겠어?”

재영이 고개를 들어 엄마가 계신 집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같이 있고 싶어서.”

쭈뼛대며 재영의 팔을 끌었다. 재영은 망설이지 않고 나를 반대편으로 데려가 반대편 차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타자 문을 닫아주려던 재영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문의 윗면을 한 팔로 감쌌다. “왜?”라고 물어도 재영은 답이 없었다.

“내가 아니라 양이 보고 싶은 거 아니야?”

“너랑 있으면서 양이도 보는 거지. 그렇게 생각해.”

차에 탄 나를 빤히 보던 재영이 웃으며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네가 할 때가 있어. 그때 내 기분이 어떤지 넌 모르지.”

“어떤데?”

재영이 빙긋 웃으며 상체를 숙였다. 두 입술이 금세 맞물렸다. 늦은 밤이라고는 해도 아파트의 입구다 보니 오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재영의 가슴팍을 약한 힘으로 밀어내자, 재영이 뒤로 물러나며 다시 내 뺨을 진득하게 핥았다.

출근 시간에 맞게 맞춰둔 알람에 눈을 떴다. 응접실에선 재영이 틀어놓은 듯한 TV가 나오고 있었다. 반쯤 눈을 감고 비척대며 나가자 부엌에 서서 TV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재영이 보였다. 재영이 보고 있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불어 혼인이 양성의 결합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으며 입법 조치가 없는 한 현행법상의 해석만으로는 동성 간의 혼인이 허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결입니다. 이에 입법부와 사법부의 책임 떠넘기기식의 판례가 아니냐는……」

재영이 다가와 엉망으로 뻗친 내 머리카락을 넘겼다.

“일어났어?”

“아. 어. 아직도 저 뉴스네.”

“그러게.”

재영은 화면을 끄고 미소 지었다.

“어머니랑 있을 땐 안 먹어도, 나랑 있을 땐 아침 먹자.”

내키지는 않았지만 재영의 손이 당기는 대로 식탁 앞까지 끌려갔다. 재영은 턱을 괴고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 위에 밥과 반찬을 올렸다.

“사육인 거지?”

“사랑인데.”

재영이 볼을 부풀리며 웃었다. 영국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재영은 무엇이든 못하는 게 없었다. 요리도 마찬가지였다. 한 그릇 가까이 비우고 나자 오랜만에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 한국에서 결혼은 안 되겠다. 아직도 저렇게 미적거리니까.”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오히려 미소 지은 채 날 보던 재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재영의 굳은 표정에 나도 웃음기를 거두었다. 어색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날 느낀 재영이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도 곧이야.”

“곧?”

재영은 날 보던 시선을 유지한 채로 물을 마셨다.

“우리 같이 사는 거.”

“아… 이제 2년도 안 남았네.”

“무심하게 말하지 마. 나 그날만 기다리는데.”

어이없을 정도로 귀여운 말에 웃음이 번졌다. 재영은 그런 나를 따라 웃었다. 재영은 여전히 자주 웃는다. 나는 이따금 그가 웃는 나를 흉내 내어 웃는 것인지 진심으로 행복해 웃는 것인지 헷갈린다. 헷갈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재영이 가진 웃음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재영이라면 내게 자신의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곧장 말해줄 사람이기 때문에.

“호정아. 진짜 얼마 안 남았어. 어머니도 이제 많이 괜찮아지셨잖아. 너 곧 이직한다고 해도 그쪽 일에는 어느 정도 적응했고.”

“그러게. 진짜 얼마 안 남긴 했다.”

“예쁘네. 저거 입고 출근하면 될 거 같은데.”

재영이 소파에 걸쳐둔 옷을 가리켰다. 옷을 챙겨 나오지 않은 것을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재영은 내가 언제와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늘 구비해두었다.

“재영아. 넌 손신아랑 은하윤 일, 어떻게 될 거 같아?”

“누구?”

재영은 눈을 깜박깜박 움직이다가 이내 “아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연예인들? 이미 죽었는데, 뭐.”

“결혼 말이야. 다들 난리니까.”

“음…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재영은 눈을 굴리다가 소파에 걸쳐둔 새 옷을 가져와 내 몸 앞에 대었다.

“잘 어울린다. 호정아. 너는 남색, 흰색, 하늘색이 어울려.”

빙긋이 웃는 얼굴에 나도 맥없이 웃고 말았다. 소파에 누워있던 양이가 몸을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마치 재영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양이가 몸을 바짝 세워 내게 다가왔다. 종아리에 몸을 비비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웃음이 났다.

동성애를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사람도 연일 쏟아지는 뉴스에 지금은 이 소식만 듣고 있을 터였다. 세상이 동성혼에 난리인데도 재영의 눈엔 오직 나뿐이었다. 이리저리 옷을 더 대어보던 재영이 내 볼에 입술을 붙이고 자신의 볼을 비볐다.

“내 집에만 있으면 좋겠어. 어디 가지 말고.”

“한재…….”

재영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품을 벗어나려 몸을 비틀자 재영이 더 센 힘으로 나를 안았다.

“알았어. 이런 말 안 해. 앞으로도 안 할게.”

허리를 파고든 팔이 단단했다.

* * *

시즌이 마무리되고 구단의 선수들 모두 동계훈련 전 재정비 기간에 들어가면서 여유가 생겼다. 일에 여유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이전에 제안 받은 이직을 생각하게 되었다. 손실을 따져보는 게 당연했다. 지금 하는 일에 적응하면서 일은 바빠도 일 처리가 수월해진 건 사실이었다. 새로운 회사로 가게 되면 물질적인 부분에선 나아질 테지만 일적인 면에선 적응 기간이 필요할 거다.

“아, 어렵다. 진짜.”

복잡한 머리를 긁었다. 점심시간에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마실 요량이었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자 마침 점심을 먹으러 가던 상목 선배가 창가에 앉은 나를 발견했다. 선배는 가던 길을 멈추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 식사는요?”

“여기서 샌드위치 대충 먹으면 돼. 너랑 할 이야기도 있고.”

앉으라는 의미로 앞자리의 의자를 빼내 주었다. 선배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러 간 사이 재영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어. 재영아. 선배랑 카페… 그냥 간단하게 먹게. 응, 주말에? 당연히 되지.”

주말이면 재영과 함께 보내는 게 당연한 일과인데도 주말에 함께 있자는 재영의 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볼을 부풀렸다가 주문을 마치고 트레이를 들고 오는 선배의 모습에 입가의 웃음을 거두었다.

“나 나중에 연락할게. 응. 나도. 안 떠나. 주말에 봐.”

선배가 계속 통화해도 된다는 듯 눈썹을 달싹였지만 이미 통화를 마친 후였다. 자리에 앉은 선배가 테이블 위 내 휴대폰을 보며 물었다.

“여자 친구?”

“아… 아뇨.”

샌드위치 포장을 뜯는 선배의 손가락을 보다 다시 빨대에 입술을 붙였다.

“통화하는 표정이 회사에선 본 적 없는 얼굴이라서. 이런 거 너무 오지랖이지?”

“오지랖은요.”

미소 짓던 선배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휴대폰을 테이블 아래로 끌어내려 감추었다.

“근데. 나 오지랖 하나 더 부려야 할 거 같은데.”

“네.”라고 간결하고 답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선배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려운 이야기인가 싶어 상체를 앞으로 숙였더니 선배는 샌드위치의 반을 갈라 내게 내밀었다.

“아, 전 괜찮아요.”

또, 어색하고 미묘한 표정이 시야에 들었다. 불편한 감각에 목 뒤를 쓸었다.

“음… 혹시 FK 쪽에서 제안 들어온 거 있지 않아?”

“아…….”

선배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물렸다. 허벅지에 둔 휴대폰을 바지에 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저번 달에 이직 제안이 한 번 왔었어요.”

“그럴 줄 알았어. 거기서 우리 쪽 사람 다 빼가려고 해. 실무진 다 빼가는 중이라 나한테도 저번 달에 왔는데, 너한테 연락 안 갔을 리는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호정 씨 생각은?”

“전 아직 고민 중이요. 선배님은요?”

선배는 흠, 하고 낮게 숨을 내쉬고는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난 기다리면 더 좋은 기회 올 거 같아서 기다리는 중.”

“네.”

머쓱해졌다. 볼을 살짝 긁고 선배를 보았다. 샌드위치를 막 베어 문 탓에 선배의 볼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FK에서 실속만 빼먹고 버린다잖아. 전에 최주한 과장 1년 채우기 전에 나가리 됐다는 소문도 돌았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묵묵히 커피만 휘적댔다. 최주한 과장이 누구였지, 생각하는 사이 입안의 샌드위치를 마저 삼킨 선배가 내 팔을 끌었다.

“목경에서 내년부터 대학까지 전부 스포츠 쪽 신설한다며. 본격적으로 밀어줄 모양이던데 그쪽에서도 여기저기 컨택할 거란 소문도 돌고. 야구도 할 거래. 하긴 야구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목경이요?”

재영이 일러준 대로 그가 책임지는 목경 그룹의 재단인 고등학교 하키 팀 실적이 좋았다. 성과가 좋은 부분이니 이를 재단 전체로 확대하는 건 당연했다. 재영이 이끄는 재단이 스포츠 마케팅까지 이렇게 빨리 손을 뻗치게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었지만, 재영이라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시점에서 주저하진 않을 거다.

“아직은 카더라니까.”

“네.”

선배가 아차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참. 호정 씨도 목경고 나오지 않았어?”

“네. 집이 보암동이라서요.”

보암동에 산다고 해서 다 목경고를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선배도 내심 그걸 몰라 묻는 건 아닐 터였다. 겉보기엔 부잣집 자식들만 다니는 목경고에 영국의 대학까지 나온 내 스펙이 대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허접한 내 실상을 아는 나로선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부끄러웠다.

“이번 주말에도 집회하려나. 지난주엔 아예 길이 꽉 막혔던데.”

민망하게 웃는 나를 눈치챈 선배가 재빨리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집회요?”

“하나는 동성결혼 합법하자, 하나는 뭔 미친 개소리냐. 요즘 광화문 그 두 쪽으로 다 난리잖아.”

“아… 뉴스 봤어요.”

“난 별생각 없긴 했는데, 확실히 손신아랑 은하윤이라서 그런가. 그냥 하게 해주지, 뭘 저렇게 반대하나 싶긴 해.”

미약하게 미소 지었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덜 어색할까. 목 뒤쪽까지 돋아나는 불편함이 가시처럼 등줄기를 찔러대는 느낌이었다.

“결국 다 기각이라 남은 건 헌법 개정인데, 곧 선거철이잖아. 대통령이 나설 것 같진 않고. 결국 두 여론 중에서 어디 쪽이 더 표가 셀 것인가, 국회의원 놈들 눈치싸움이지.”

“그렇죠.”

“또 누가 소송 걸면 모를까.”

커피에 꽂힌 빨대를 빼 트레이에 두었다. 컵 째로 커피를 마시고 입에 문 얼음을 와드득 소리가 나게 씹었다.

재영의 집에도 내가 입을 옷이야 늘 있지만, 엄마에게 재영의 집에서 자고 오겠다는 이야기도 할 겸 집에 들러 옷을 챙겼다. 옷을 챙기는 나를 보러 방까지 들어온 엄마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들. 너 재영이랑은 싸운 적도 없지?”

픽, 웃음이 났다. 재영과 내가 악을 써대며 서로에게 날 선 말을 쏟아댔던 예전을 안다면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없지.”

“참 좋은 친구야. 민재도 그랬지만.”

어금니가 시큰할 정도로 이를 꽉 다물었다. 민재는 여전히 마음속 커다란 멍울이었다.

“…응.”

가까스로 답하고 다시 가방에 옷을 마저 집어넣었다.

“재영이가 준 봉투에 상품권 들었던데. 이제 엄마한테 용돈 그만 주라고 해.”

“응.”

“아들. 재영이랑 같이 살고 싶어?”

“아니… 무슨.”

엄마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옷가지를 담은 가방 안을 살폈다.

“주말에 재영이 집에서 자고 오잖아. 집에서도 주말만 기다리는 표정이고.”

“주말 안 기다리는 직장인이 어디 있어서.”

“아들. 엄마는 못 속여.”

쭈뼛대며 입을 말았다. 엄마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지만, 입꼬리 끝이 떨리고 있었다. 가방을 쥐고 있던 아귀힘을 풀었다. 엄마를 향했던 시선도 아래로 내렸다. 무거운 압박감이 머리를 덮으려 했다. 손가락을 반대편 손으로 긁었다.

“재밌게 놀다 와.”

“응.”

분위기를 읽은 엄마가 내 어깨를 다독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던 엄마가 머뭇대다 뒤돌았다.

“호정아. 엄마 이제 외할머니랑 살까 해.”

“부안에 내려간다고?”

“응. 엄마도 엄마랑 살고 싶어. 이해해줄 거지?”

갑자기. 느닷없이. 난데없이. 별안간.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 게 무리는 아니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눈길에도 엄마는 말없이 미소만 지은 채로 내 방을 빠져나갔다. 이유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엄마를 따라 나갔다.

“갑자기 왜.”

식탁 위의 컵을 들던 엄마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냥 뉴스 보다가… 호정아. 엄마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도 다 이해해. 알지?”

“아까부터 진짜 무슨 소린데.”

짜증을 가까스로 삼키며 흐른 머리를 넘겼다.

“재영이랑 재밌게 잘 있다가 와. 서울도 재미없고, 너희 아빠 빚도 다 갚았고. 이제 엄마도 좀 쉬고 싶어. 할머니도 살날 얼마 남으셨겠어. 내가 옆에 있어주고 싶어. 네가 엄마 걱정하는 게 엄마는 더 불편해. 너랑 재영이가 무슨 사이든… 엄마는 다 이해해.”

가장 마지막 문장에 생각이 갇혔다. 긴 서두는 맨 뒤에 온 진심을 가리기 위한 장막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무슨.”

언제부터 재영과 나 사이를 눈치챘던 것일까. 엄마는 내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빙긋이 웃었다. 마음을 놓이게 해주려는 다정한 미소였다.

“요즘 한창 그런 뉴스만 나오니까…….”

엄마는 쥐었던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담대한 척하고는 있지만, 컵을 쥔 엄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엄마. 미안, 미안해.”

엄마가 미소 지었다. 다가가 뒤에서 엄마를 안았다. 엄마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기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국 동성혼을 허가해달라는 김 씨의 소송이 2심에서도 1심의 손을 들어주며,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역시나 기각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다만, 여권 내 유력 대권후보인 이학청 국회의원이 금주 내 시민결합법 안건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시민결합법은 동성, 단일부모, 단순한 친구 사이에도 시민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가족으로 인정받아 살 수 있게 해주는 제도로 결혼과 동일한 법적 혜택 및 책임을 진다는 면에서…….」

재영의 집으로 가는 동안 택시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들었다. 세상이 온통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뿐이니, 엄마도 그간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오던 재영과 나 사이에 의문이 들었을 거다. 엄마는 이해한다고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두터운 모래알이 목구멍과 가슴을 잇는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느낌이었다.

재영의 집에 도착했다. 아직 재영이 회사에서 돌아오기 전이었다. 인기척에 양이가 현관까지 나왔다. 마중 나온 양이를 안고 볼을 비볐다. 재영처럼 양이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났다. 냉장고에서 재영이 손수 만들었다는 수제 간식을 꺼내자 양이가 골골 소리를 내며 꼬리를 바짝 세웠다.

“오늘 아빠 바빠서 늦으니까, 양이는 나랑 놀고 있을까?”

양이는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꼬리 끝을 느리게 흔들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한국에 들어오고 본격적으로 재단에 뛰어들면서 재영은 더욱 바빠졌다. 내 앞에서는 바쁘다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이렇게 문득 재영이 부재한 그의 공간에 들어서면 재영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가방을 소파에 두고 샤워부터 했다. 씻고 나왔을 때도 재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휴대폰을 확인하고 덜 마른 머리를 털며 소파에 앉았다. TV라도 켜서 보려다 결국 또 그 이야기뿐이겠지 싶어 관두었다.

재영은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졸음이 쏟아져 소파에 기대 가물가물한 눈을 끔벅댈 때쯤이었다. 재영은 돌아오자마자 달려와 나를 안고 내 목과 볼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었다. 바람 빠진 웃음이 터졌다.

“뭐야. 들어오자마자.”

“보고 싶었어.”

재영은 충분히 낯간지러울 법한 말을 무덤덤하게 할 수 있었다. 재영의 볼을 잡아 간극을 벌렸다.

“밥은?”

“사람들이랑 대충. 넌?”

“엄마랑 먹고 왔어.”

재영은 잘했다고 말하며 다시 몸을 붙였다. 입술은 몸 이곳저곳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재깍 다른 부위에 붙어 여린 살을 물었다.

“오늘 회사 선배가 너희 재단 이야기를 하던데.”

“우리 재단? 왜?”

“스포츠 쪽 확장할 거라고.”

재영이 무심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가는 눈초리가 휘어지더니 웃음이 묻어났다.

“어. 하키 애들 성과 난 거 보더니 다들 야구도 최대한 당겨서 하자고 해서. 마케팅 쪽도 필요하긴 할 거야.”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내 뱃속에서 지글대던 불편감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구렁이 하나가 몸을 꼬고 뒤채는 것처럼 속이 거북했다.

“표정.”

재영이 내 볼을 주물렀다.

“어?”

“오해하지 마. 이제 재단 쪽은 거의 다 제안서 올라오는 거 승인만 해. 내가 처음부터 기획해서 한 건 아이스하키가 마지막이었고.”

“오해 안 해. 너무 일이 순조롭게… 그러니까 전부 하나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면 불안해서 그래.”

재영의 입술이 진득하게 아랫입술에 맞물렸다.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혀의 감촉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고개를 살짝 젖힌 채로 재영의 혀를 받으며 몸을 소파에 붙였다.

“마케팅 쪽에서 인원 끌어온다면 당연히 너도 오는 게 나로선 좋겠지만. 어쨌든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니까.”

입술을 붙인 채로 재영이 읊조렸다. 간지러움에 몸을 비틀자, 재영의 손이 단단하게 허리를 붙들어 고정했다.

“엄마가 곧 외가로 내려가실 거 같아. 너랑 같이 살아도 된다는데… 아무래도 우리 사이 눈치채신 거 같아.”

“그래서 표정에 불안이 가득했던 거야?”

“모르겠어. 엄마가 이해한다는데 그 말이 더 불편하고 거북해.”

재영이 내 볼에 입을 맞추더니 곧장 아랫입술을 빨아 당겼다. 도톰하게 부은 입술이 튕기듯 나오자마자 다시 재영이 입술을 물어 빨았다. 두 손을 뻗어 재영의 목을 감쌌다.

“그래도 서른까진 엄마랑 살겠다고 했어.”

잠시 입술을 떼고 말했다. 재영이 연한 미소를 지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너 나한테 심술 그만 부려.”

재영은 한숨과 함께 내 목을 단단히 잡아 붙들었다.

“네 선택에 내가… 나만 있으면 좋겠어. 호정아.”

“…응.”

“그러니까 나 좀 그만 괴롭혀. 오늘부터 같이 살아도 나한텐 늦은 거야.”

입술을 뭉개 말았다. 가만히 올려보자 재영이 두 눈을 감고 웃기 시작했다.

“애기야. 입술.”

재영이 목을 당겼다. “입술 줘.” 하는 말이 투정 부리듯 들려 결국 나도 웃고 말았다. 웃음이 터지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재영이 입술을 붙이며 셔츠를 풀었다.

* * *

몇 달이 더 지나고 해가 바뀌었다. 엄마는 본인의 말 대로 짐을 정리해 외가로 내려갔다. 부안까지 재영이 직접 운전해 엄마를 배웅했다. 바쁠 테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간단히 옷만 넣은 가방을 들고 내려오니 입구에 재영이 서 있었다. 외가까지 가 외할머니를 뵙고 호정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인사를 할 때도 재영은 어색함이 없었다. 으레 어른들이 그렇듯 외할머니 역시 재영을 마음에 들어 했다.

“연락 자주 할게요. 어머님.”

재영의 마지막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재영은 나보다 더 살뜰히 내 엄마를 챙길 거고, 나보다 더 자주 엄마의 안부를 물을 거다. 엄마가 재영의 어깨를 다독였다. 재영의 어깨를 다독이던 손은 곧 내 손으로 내려와 손마디 위를 매만졌다. 울퉁불퉁한 마디마다 엄마 손에 담긴 따스함이 배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던 재영이 말간 눈을 깜박였다.

“회사? 집?”

“집. 일, 없어.”

이직은 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이직을 할 필요도 없었다. 회사가 목경재단에 흡수합병 되며 회사 이름도 ‘SE’에서 ‘MK’로 변경되었다. 단일 야구팀 하나만 마케팅하던 회사는 이제 아이스하키부터 시작해 야구팀도 목경 재단의 중고교 및 대학교의 야구팀으로 몇 년 내로 창단하게 될 프로팀까지 맡게 되며 오히려 확장되었다.

연봉협상에 혹시나 재영이 있을까,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회사가 합병되고도 여태 단 한 번도 회사 내부에서 재영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재영의 사무실이 있는 본사로 이전한 게 아니라 기존 쓰던 회사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늘 하던 일을 똑같이 했고, 거기에 몇 가지 비슷한 부류의 일만 더해졌을 뿐인데 이전에 이직 제안을 받았던 곳보다 더 높은 급여를 책정 받았다.

운전 중인 재영을 물끄러미 보다 턱을 쓸었다.

“재영아.”

“응.”

앞을 보며 운전하던 재영이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네 계획은 아니지?”

“어머니?”

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회사.”

“하.”

재영은 실소를 머금으며 다시 나를 흘깃 보았다. 멀뚱하던 눈에 웃음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러면 좀 어때서. 재영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까 살짝 등을 움츠렸다.

“호정아. 아니야.”

재영이 손을 펼쳐 내 머리통 위를 덮었다. 슥슥 문지르는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볼을 살뜰히 핥으며 지났다. 재영이 속도를 낮췄다. 세차던 바람이 여려졌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여전히 한쪽 벽엔 그림이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낙서가 걸려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 그린 낙서였다. 몇 년을 봐도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었다.

양이가 다가와 그림과 나를 한 번씩 보았다. 양이는 익숙한 자세로 내 옆에 앉아 허벅지에 제 몸을 비볐다.

무의식적으로 켠 TV 뉴스는 아직도 동성혼과 그에 따른 부수적인 기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나라에 이런 유의 뉴스가 이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적이 있던가 생각할 정도로 사람들은 끈질기게 이 화두를 곱씹어댔다.

재영의 말처럼 사람들은 그들 중 일부가 소송을 내고 그 소송이 기각될 때마다 더욱 불타올랐다. 심지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기름을 붓는 건 법이었다. 분노로 가득한 광화문 광장이 연일 첫 뉴스에 올랐다.

“애초에 무리니까.”

여태 저런 뉴스가 나와도 줄곧 무관심하던 재영이었다. 덤덤하게 뱉은 재영의 말에 고개까지 돌려 재영을 쳐다봤다. 재영이 손등으로 내 볼을 톡 건드리더니 이내 손을 뒤집어 볼을 감쌌다.

“자식이 마음에 안 드는 새끼를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말이야. 부모라면 당연히 반대할 거잖아.”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재영을 응시했다. 재영의 엄지손가락이 내 볼을 더듬더듬 주물렀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싸우다 보면 애새끼들은 그럼 결혼 전에 동거라도 할게요, 이러거든. 그럼 그건 엄청 흔쾌히 허락해준다?”

엄지손가락이 볼의 중심부를 지그시 눌렀다. 말랑한 안쪽 살이 치아에 맞닿았다.

“처음부터 동거할게요, 했으면 안 됐을 텐데.”

“그렇지. 아무래도 첫 제안보다 쉬운 느낌이니까.”

동의하듯 답했다.

“근데 그 애가 바란 게 애초에 동거까지일 수도 있는 건데.”

재영이 나를 보던 눈을 뗐다. 재영은 곧 리모컨을 가져가 TV를 껐다. 검은 화면에 재영과 내 모습이 그림자로 일렁였다.

“너희 회사 올해 안에 옮겨질 거야. 우리 재단이랑 외할아버지 유통, 스포츠 팀까지 전부 다 묶어서 신사옥에 같이 두려고.”

“어디 쪽?”

“지금이랑 가까워. 이제 매일 볼 수 있어.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재영은 피곤한 눈을 끔벅이며 웃었다. 바빴던 탓에 피곤했을 거다. 세 시간 거리인 지방까지 혼자 운전해 엄마를 배웅했으니 당연했다.

“오늘 고마워. 덕분에 엄마 편하게 모셨고.”

“응. 나 기특하지?”

“어. 우리 재영이 예쁘고 기특해.”

재영이 피식 웃는 얼굴로 내 가슴 중앙에 머리를 비볐다. 착한 일을 했으니 칭찬해달란 의미였다.

“호정아. 오래 걸렸어.”

“어쨌든 예상한 서른보단 전이잖아.”

맥 빠진 웃음이 가슴 아래에서 들렸다. 재영의 어깨가 떨렸다. 아마도 어깨를 달싹대며 웃고 있는 듯했다.

그날 새벽 손바닥이 간지러워 눈을 떴더니 재영이 내 왼쪽 손바닥을 종이에 대고 손가락을 따라 선을 그리고 있었다. “뭐해?”라고 물어도 재영은 답이 없었다. 달빛이 스치는 얼굴이 진중해서 나도 더 묻지 않고 다시 베개에 볼을 기대 잠들었다.

재영이 틀어놓은 TV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시민결합법을 포함하는 개정안이 결국 국회 본회의로 넘어가지 못하고 최종 무산되었다는 뉴스였다.

언제부터 짓고 있었는지 모를 신사옥은 가을에 완공되었다. 건물만 총 여덟 채로 목경 그룹을 이루는 각 팀이 한 군데 모인 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재단의 행정팀과 마케팅팀을 비롯해 백화점과 마트를 전담하는 유통, 우리 회사가 속한 스포츠 마케팅, 어패럴 뉴스를 발간하는 팀이 한 건물로 배치됐다.

신사옥으로 회사 전체가 이동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가장 위층과 그 바로 아래층은 재영과 재영의 아버지, 이사직 이상의 임원급이 사용한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그 두 층을 누르는 버튼만 겉면이 깨끗했다.

“호정 씨.”

정신없이 오전 업무를 마감하고 고개를 들었다. 자동문 입구에 선 재영이 해맑은 얼굴로 날 불렀다. 팀장님과 직원들이 모두 쭈뼛쭈뼛 일어나 나와 재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회사에서 재영이 나를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호정 씨랑 같이 밥 먹으려고요.”

재영은 이럴 때 눈치 없는 척을 했다. 재영의 방금 발언은 사람들 눈에 뜬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기는커녕 더 많은 물음표만 낳게 하는 말인 셈이었다.

“점심?”

어영부영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로 걸어갔다. 팀장님께 먼저 나가보겠다는 의미로 인사했지만 사무실에서 나오는 내내 뒤통수가 따가웠다.

“이사장님. 반갑습니다. 전 야구 마케팅팀 이상목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우리 옆으로 상목 선배가 붙었다. 선배는 재영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었다. 번개처럼 빠른 인사가 지나고 고개를 든 선배가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호정 씨… 맞네. 목경고에 동갑이니까… 그러네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선배가 짧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친구인 게 당연한 건데.”

중얼대는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다.

“호정이랑 저, 같이 살아요.”

“네? 어… 생각보다 더 친하시네요. 호정 씨가 그런 이야기를 아예 안 해서 친구인 줄도 몰랐습니다.”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셋이 함께 들어섰다. 1층 버튼을 누르며 재영의 심기를 살폈다. 재영은 나와 대화 중일 때 타인이 끼어드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재영의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따금 자신의 어머니가 내게 과하게 말을 붙이면 재영은 먹던 숟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밥맛이 떨어졌다는 의미였다.

“아뇨. 같이 삽니다.”

재영은 자신의 뒤로 나를 감추듯 몸을 돌렸다. 선배의 표정이 어떨지 가늠됐다. 몇 달이나 세상을 시끄럽게 하던 법 개정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본회의에도 오르지 못하고 무산된 법안은 사람들에게서도 곧 잊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람들의 인식이 이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는 것 정도였다. 나와 재영을 번갈아 보던 선배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먼저 시선을 비켰다. 이제야 방금 전 재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듯했다.

“아… 아. 몰랐습니다. 전혀… 몰, 아니.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몸을 비틀어 재영을 비켜났다. 재영은 다시 티 나지 않게 몸을 돌려 나를 가렸다.

“아직은 보통 다 그렇죠. 그래도 간단히 설명되는 세상이 와서 좋네요. 편하고.”

도착 음이 들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재영이 먼저 큰 보폭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고 선배와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앞서가는 재영이 듣지 못하게 선배의 옆에 붙어 속닥였다.

“선배님.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 좀 놀랐긴 했는데. 죄송할 건 아니고.”

뜻 없이 웃는 얼굴에 마음이 놓였다. 재영이 손을 까닥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선배에게 인사하고 재영의 옆에 붙었다. 재영은 먼 시간 떨어져 있던 사람처럼 내 손을 당겨 깍지 꼈다. 재영은 내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얼굴 가득 불쾌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말한 네 회사의 개새끼 냄새가 저거였어.”

재영이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이상목, 입은 어때?”

“입?”

재영이 고갯짓을 해 보였다. 위아래로 정갈하게 한 번 움직이는 동작에는 군더더기라고는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싼 편이야?”

그랬던가. 확실히 말이 많은 타입이긴 했다. 이전 카페에서도 그렇고, 따지자면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니었다. 재영은 고개를 돌려 회사 뒤편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선배를 쳐다봤다.

“입이 싼 개새끼면 좋겠는데.”

저음으로 들릴 듯 말 듯 중얼대는 소리에 재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재영. 말.”

재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응. 나쁜 말 안 할게.”

재영은 양손을 얼굴 옆에 들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명백한 항복 표시였지만 표정만은 장난기가 다분했다.

“나 사랑하지?”

내가 엄해지거나 표정을 굳힐 때, 재영은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 그 상황을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것도 행동의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보단 한 번 떠났던 내가 다시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난 너 안 떠나. 그러니까 말.”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냐는 재영의 물음에는 떠나지 않겠다는 게 내 답이 될 수밖에 없다.

“알았어. 조심할게.”

재영이 상체를 기울여 숙였다. 나와 동등하게 맞춘 시야엔 여전히 내가 가득하다.

“안아줘.”

아이 같은 얼굴과 표정이지만, 점심시간이 되어 건물을 빠져나오는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노린 행동이라는 걸 안다. 재영이 재차 손을 뻗으며 나를 종용했다.

“어서.”

주변을 살폈다. 엘리베이터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

“호정아. 나 사랑하지?”

재영이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미세하게 내렸다. 시무룩해지는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다가가 재영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재영은 큰 몸을 구겨 내 품에 안겼다. 어깨를 다독이고 등을 쓰다듬었다. 사람들이 우리 곁을 지나며 쳐다보는 걸 알지만 재영을 밀어내지 못했다. 내가 안은 힘보다 더 센 힘으로 재영이 내 허리를 안고 있는 탓이었다.

등 뒤로 재영의 깍지 낀 손이 느껴졌다. 재영은 더욱 단단하게 손을 옭아 나를 당겼다.

“호정아. 나.”

“안 떠나. 그만 불안해해.”

“응.”

재영이 자신의 볼을 내 어깨에 폭삭 기댔다. 뭉근하게 어깨뼈를 짓누르는 볼이 따뜻했다.

“나 너 사랑해. 알잖아.”

재영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었다. 빗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아는데, 네가 나만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이라도 네 마음 알아야겠다 싶은 거지.”

킁킁대며 내 목 냄새를 맡는 게 느껴졌다.

“난 너만 사랑하니까.”

재영이 하는 말 중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이라는 걸 안다. 머리칼을 빗던 손을 내리고 내 허리를 단단하게 붙든 재영의 손도 끌어 풀어냈다. 재영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겨우겨우 내게서 몸을 뗐다.

“잘못된 건 아니잖아?”

투정을 부리는 말투에 나도 재영처럼 재영의 왼쪽 뺨을 감싸 어루만졌다. 재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 손바닥 가득 재영의 뺨이 동그랗게 고였다.

“이건 못 고쳐줘. 난 너만 사랑해. 그럴 수밖에 없어.”

검은 눈동자에 혼탁한 잿빛이 일순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알아. 이리 와.”

이번엔 내가 먼저 재영을 안았다. 손에서 벗어난 재영의 뺨은 재깍 내 어깨를 파고들며 안겼다. 재영이 어깨에 볼을 비볐다. “또 사랑한다고 해줘.” 낮게 울리는 목소리와 뱉어진 뜨거운 숨이 목으로 끼쳤다.

“사랑해.”

재영은 평생 나를 놓지 않을 거다. 나 역시 나를 놓지 않는 재영을 놓지 못할 거다. 서로를 옭아매는 유일한 존재라는 걸 아니까.

“사랑해. 호정아.”

재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더욱 꽉 안았다. 재영이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내 약지에 끼웠다. 맞춘 듯 꼭 맞는 치수였다.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호정아. 가을이다. 좋지?”

사이코패스에게 평생이라는 건 정상인이 어렴풋하게도 예상하지 못하는 억겁의 시간, 영원의 시간과도 같다. 지독할 정도로 기나긴 시간 속 재영은 그보다 더 지독한 끈질김으로 나를 사랑할 거다. 만약 재영에게 실제 억겁의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그건 변하지 않을 터였다.

<비정상인들, 完>

비정상인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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