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上
※[비정상인들] 본편과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호정은 발가락 끝까지 힘을 줘 계단이 꺾어지는 곳을 더듬거렸다. 달달 떨리는 작은 발가락은 앙다물어진 채 계단을 더듬어 한 층씩 내려온다. 재영은 흥분감을 감추려 느리게 침을 삼켰다. 호정이 한 계단씩 내려올 때마다 눈을 가린 검은 천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바람이 부는 탓이다. 혹은 여리고 조심히 움직이는 호정 탓이다.
계단 모서리마다 핥듯이 촘촘하게 발로 문지르며 내려오던 호정이 별안간 계단참에 우두커니 섰다. 또 저러네. 재영은 미간을 좁혔다. 발가락 끝이 파들파들 떨리며 계단 모서리를 바짝 감싸는 게 보였다. 호정은 앞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재영을 불렀다.
“재영아. 재영아아. 앞에 있지?”
재영은 계단의 아래에 서서 미소 지었다. 보일 듯 말 듯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눈초리는 미동조차 없었다. 자신의 앞, 한 계단 바로 위에 호정이 서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자신의 품이었다.
“응. 한 계단 남았네. 호정아. 두 발자국이면 돼.”
“진짜? 한 계단?”
호정이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되물었다. 말하면 말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믿어라, 수차례 말해줬는데 되묻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재영은 안쪽 볼을 혀로 훑었다.
“응. 거의 다 왔어.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오면 내가 뭘 준댔지?”
“드리프트 RC카 준댔어. 어제 나온 거!”
호정이 비장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재영은 계단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RC카를 떠올린 호정의 마음이 급해졌을 테니까 분명 눈앞의 보이지 않는 계단도 단번에 내려오려 할 거다. 남은 건 두 계단이니 휘청대며 앞으로 고꾸라져버릴 수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좀 전과 달리 지어내지 않았는데도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래. 그거 줄게.”
“응!”
재영의 예상 그대로였다. 호정은 앞을 향해 있던 손을 허리춤에 두고 한걸음에 폴짝 뛰어올랐다. RC카를 떠올린 이상 계단 끝을 더듬던 조심성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재영은 미소 띤 얼굴로 그 앞에 팔을 양껏 펼쳤다. 비틀대며 앞으로 쓰러지는 호정을 받쳐 안을 때는 자칫 소리까지 내며 웃을 뻔했다.
“읏.”
호정을 안은 재영이 바닥에 등을 부딪치며 떨어졌다. 호정은 가까스로 신음을 삼켰다. 자신이 앓는 소리를 내면 줄곧 다정하던 재영마저 단번에 눈을 세모로 떠 노려보기 때문이었다. 작은 손바닥부터 등허리와 무릎까지 모든 부위에 통증이 일시에 일었다.
“아파... 으응...”
호정이 울먹댔다. 목울대가 시큰거렸다. 바닥에 곤두박질친 팔꿈치가 욱신댔다.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발꿈치가 퍽 소리를 내며 지체 없이 바닥을 찧었다.
호정은 두 눈을 가렸던 끈을 풀었다. 그제야 늘어진 자신의 몸 아래, 바닥과 등을 맞댄 채로 자신을 안고 있는 재영이 보였다.
“재영이가 한 계단 남았다고... 그래서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에 재영은 입을 앙다물고 호정을 외면했다. 호정이 다급한 손길로 재영의 팔뚝을 끌었다. 앓는 소리를 참고 또 참았는데도 억울한 마음에 울음이 나려 했다.
“재영이가... 분명 한 계단... 남았...”
“난 두 발자국 남았다고 했어. 그렇지?”
재영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정은 재영의 손가락을 당겨 제 손에 걸었다. 마음이 급했다. 재영의 화를 풀어주고 싶었다. 재영이 눈썹을 굳히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재영은 분명 두 발자국이라고 일러주었었다. 똑똑한 재영이 미리 두 발자국이라고 말해주었는데도 성미가 급해 냅다 뛰어오른 건 자신이었다. 곱씹을수록 자신의 잘못이었다.
“전에 내가 호정이 거짓말하는 거 싫다고 했었는데.”
호정이 입술을 옹크려 가운데로 모았다. 자신이 또 재영을 화나게 했다는 자각이 일자 심장이 쿵쿵 목덜미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불안감에 손톱을 조물댔다.
“응응. 재영이가 싫댔어. 호정이 거짓말하는 거.”
호정은 재영의 손가락 사이사이 제 손을 끼웠다. 평상시에 이렇게 손을 잡으면 재영이 예쁘다 칭찬해주던 행동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재영이 자신의 손을 뿌리치며 거부했다. 호정은 멀뚱히 그 자리에 섰다. 서러웠다. 멍청한 자신이 기어코 재영의 말을 듣지 않아 모든 걸 망쳐놓은 탓이었다.
“재영아... 잘못했어... 호정이, 또 거짓말해서... 재영이 화나게 했어...”
호정은 주먹을 꼭 쥐었다. 엄마가 내년이면 호정도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는 건 어린이가 된다는 걸 의미했다. 어린이는 아가와 다른 거다. 어린이는 아가처럼 시시때때로 울면 안 됐다. 재영도 울지 않는데. 자신은 아직도 조그만 일에도 곧잘 울음이 터졌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느라 벌써 볼이 발갛게 익었다.
“흐잉... 응...”
“벌 받는 중에 울면 또 벌 받지. 내가 몇 번 알려준 건데. 호정이는 또 그러네. 재영이 미워? 나 미워서 내 말 안 듣고 자꾸 그러는 거야?”
“아니야... 아닌데... 진짜 아니, 흐응, 미안해. 호정이가, 내가 또 잘못했어.”
호정이 고개를 젖히고 눈을 꾹 눌러 감았다.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더 눈이 뜨거워졌다. 어린이는 울면 안 되는 건데. 하지만 어린이가 되려면 아직 1년이 남았으니 지금은 울어도 괜찮은 게 아닐까. 영악한 마음이 고개를 드밀었다.
“으응, 흐...”
울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젖혔다. 그런데도 결국 볼이 축축하게 젖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져서 눈꺼풀이 무거울 지경이었다. 빨개진 볼이 부풀었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았다.
보통 이쯤 되면 재영이 봐주기 마련이었다. 처음엔 울지 말라며 표정을 굳히지만 그래도 내심 호정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벌을 받다가도, “알았어. 지금이라도 잘하면 상 줄게.”라는 달콤한 말로 자신을 달래주기 마련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울어대도 다정한 손길 하나가 없었다.
“재, 재영아.”
호정은 젖혔던 고개를 내리고 눈을 끔벅였다. 코가 시큰거리고 목구멍은 따가웠다. 흣흣 소리는 내며 입술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떠서 보니 재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화가 난 듯 보였다. 호정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려다 이전에도 한 번 물러서는 행동으로 재영을 화나게 했던 일이 생각났다.
“흐응...”
발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재영이 일러준 대로 했어야 했다. 두 발자국을 걸었어야 했다. 재영이 말한 대로 했다면 잘했다고 상도 주고 예쁘다고 손도 잡아줬을 텐데. 속에선 후회가 반복되고 서러움에 코끝이 시렸다.
“호정아. 나랑 이제 친구 안 하려고 이렇게 우는 거야?”
호정은 쭈뼛대며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와중에 재영이 좀 전에 뿌리쳤던 손가락을 살금살금 더듬어 제 손을 쥐어주는 것에 안도했다.
“아냐... 흐응... 흐... 호정이 재영이 친구 해...”
호정은 재영의 손가락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끌어안아 볼을 부볐다. 눈물이 또 왈칵 솟구쳤다.
“울지 말고.”
“응, 응! 안 울, 흐윽... 호정이 안 울어!”
또 재영이 손을 빼갈까 다급히 손가락을 끌어 꽉 깍지꼈다. 재영이 나머지 손을 들어 호정의 젖은 볼을 감쌌다. 용서해주겠다는 의미였다. 호정은 진득한 안도감을 느꼈다.
“RC카 받고 싶지?”
“응...”
“그래. 줄게. 빨간 거. 호정이 빨간 거 좋아하지?”
호정이 눈물 자국으로 가득한 볼을 비비며 해맑게 웃었다. 아직도 볼엔 열기가 남았다.
“응. 빨간색, 좋아.”
앞으로는 재영이 하라는 대로만 해야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재영이 화내지 않을 테니까. 호정은 그런 다짐을 하며 볼을 들썩거렸다. 마침내 지지부진한 이 징벌의 답을 찾은 듯했다.
그건 너무나 명징한 답이었다. 복종은 가진 걸 잃게 하는 게 아니었다. 가지지 못한 걸 얻게 하는 현명함의 산물이었다. 복종하려면 명확하게 자세를 낮추고 복종해야 했다. 그래야 얻을 수 있었다.
“호정아.”
볼을 감싼 재영의 손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그래도 벌은 받아야지. 그래야 우리 호정이 두 번 다시는 거짓말 안 할 거잖아.”
“...응. 알았어.”
호정은 차가운 재영의 손바닥에 볼을 깊숙이 붙였다. 예전에도 아니, 원래부터 재영의 손은 차가웠던 것 같기도 했다. 호정은 부은 눈을 감았다. 바닥에 널브러졌던 검은 천이 다시 재영의 손에 들렸다. 검은 천은 다시 호정의 눈을 천천히 감싸며 덮었다. 세상이 암전되는 순간 호정은 울먹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흑색의 세상에서 손에 잡히고 느껴지는 건 오직 재영의 차갑고 시린 손뿐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내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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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교실 앞 의젓한 교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로 갈색 머리를 한 전학생이 나타났다. 밝은 갈색의 머리였으나 염색을 한 것처럼 보이는 색은 아니었다. 보기에도 천연으로 색이 옅은 머리였다. 갓 맞춘 어색한 교복 위에 김민재라는 이름이 파란 자수로 적혀 있었다.
“자. 민재 잘 챙겨주고, 선생님은 우리 애기들이 가련한 전학생에게 왕따, 폭행 등등을 하는 쓰레기들과는 거리가 먼 애기들이길 바란다.”
“네에!”
호쾌하게 웃는 아이들 사이, 장난기 하나 없이 밍숭한 얼굴 하나가 불쑥 시선을 끌었다. 민재는 멍한 눈으로 자신 뒤의 칠판을 보는 호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슬쩍 눈빛이 얽히려 들자 호정이 대뜸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피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눈길을 붙들었다.
가련한 왕따는 내가 아니라, 이미 이 반에 있었네. 어릴 때부터 늘 저런 것들에 눈이 갔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을수록 더욱 탐스러웠다.
“보다시피 빈자리가 많아. 원하는 데 앉도록.”
선생님의 짧은 지시에 민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호정의 옆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가 내려다보니 파란색 자수로 적힌 이호정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었다. 아무도 앉지 않은 듯 보이는 옆자리처럼 흰 셔츠는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고 자수의 색은 유별나게 선명했다.
“옆에 앉아도 되지?”
학교에서 교복 셔츠의 가슴 주머니에 자수를 박는 건 누구에게도 빌려주지 말라는 의미와 같았다. 이 셔츠는 오직 이 자수의 이름만 사용해야 한다는 알림이자 경고였다.
“싫어. 다른 자리 가.”
제 말을 마친 호정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다신 벌어지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생긴 것과 달리 건방지네. 민재는 픽, 웃으며 옆자리를 파고들어 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