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中 (3)
빨간 가방. 호정은 자신의 모든 감각이 일순간 얼어붙는 걸 느꼈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재영과 그의 손에서 떨어진 가방 사이. 그 공백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재영이 던지듯 내린 빨간 가방은 자신이 아침에 신발장 아래로 밀어 넣었던 민재의 가방이었다. 질문은 이제 저 가방이 왜, 어떻게 재영의 손에 있는지로 이어졌다. 하나같이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전에 내가 호정이 거짓말하는 거 싫다고 했었는데.’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재영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호정은 창에 붙었던 몸을 무르고 뒷걸음질 쳤다.
“하아.”
짙고 둔탁한 숨이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호정은 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그다음 순간부터 호정이 기억하는 건 온전한 기억이 아니었다.
반응은 순차적이었다. 뒤돌아 화장실을 벗어났고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층계를 두 개씩 밟아 내려갔다. 턱 끝까지 숨이 찼고, 무릎은 덜컹대며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전화를 미처 끊지 못한 휴대폰을 쥐고 운동장까지 단걸음에 뛰어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선 안 됐다.
“하아, 하아. 후... 흐...”
눈앞에 재영이 보이고서도 호정은 뜀을 멈추지 않았다. 달려가 그대로 재영의 품에 엉겨 붙었다. 눈을 감고 재영의 목에 입술을 붙여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줘, 내가 미안해, 내가 거짓말을 했어. 쏟아지던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했고 단순한 만큼 허술한 것들뿐이었다.
“내려와.”
“재...”
재영은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호정의 손을 힘줘 끌어내렸다. 손가락 마디마디, 손톱이 끝나는 지점까지 잔뜩 힘을 주고 있던 호정의 손이 재영의 명령에 점차 힘을 잃어갔다.
“내려와.”
한 번 더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호정은 눈을 비비며 재영의 앞에 간격을 두고 섰다. 느릿느릿 떨어지던 발걸음은 이제 완전히 바닥에 들러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안함에 손가락은 자꾸만 힘없이 주먹 쥐듯 오므라들었다. 호정은 두 손을 자신의 등 뒤로 가렸다. 시선을 내리니 재영의 옆에 맥없이 쓰러진 민재의 가방이 다시 시야를 채웠다.
“미안해...”
호정의 말을 들은 재영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호정은 침을 꼴깍 삼키고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가방. 별거 아니라서 말 안... 한 거야.”
“아. 이거?”
재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민재의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재영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뭉근하게 스민 미소의 의미를 호정은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네가 아침에 신발장 밑에 차 넣은 이 가방 말하는 거야?”
호정은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우리 반 친구가 맡긴 건데. 다시 가져오려니까 귀찮아서... 학교 마치고 그냥 버리려고 했어.”
“흠.”
재영은 생각에 잠긴 듯 목을 한 바퀴 느리게 돌렸다. 재영의 고개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오고 시선도 다시 호정에게로 돌아왔지만 호정은 쉽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이라 마주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인지 실망한 것인지 모르기에 마땅한 답을 찾기 더욱 어려워질 것 같아서였다.
“그거 아니잖아.”
호정은 민재의 가방을 응시하던 눈을 꼭 감았다.
다른 거... 다른 잘못. 화나고 실망하게 한 일이자 동시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다른 일. 이미 엉킨 실타래로 복잡한 머릿속에 엇박자로 울려대는 박동까지 더해지자 생각은 더더욱 제대로 되지 않았다.
“...운동화 더럽다고 거짓말했어.”
“그것도 아니고.”
호정은 입술을 깨물고 잇새로 한숨을 내쉬었다. 목구멍을 지지듯 뜨거운 숨이 훅 끼쳐 올랐다. 뜨거운 숨은 금세 뺨을 타고 눈시울까지 올랐다.
“가방 숨겼어... 거짓말하고... 아침에 네 말 안 믿고 되묻고... 지금 또 수업 안 들어가...”
“말고.”
호정은 입술을 깨물고 울먹였다. 재영은 다시 뒤로 한 걸음을 물렀다. 호정은 뜨거워진 눈을 비비며 재영에게 손을 뻗었다가 황급히 거두었다. 눈앞에 어릴 때 보았던 아득한 층계가 쌓이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을 내밀면 당장 발을 헛디뎌 절벽 같은 아래로 고꾸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흐으...”
재영에게 용서를 구하고 안기고 싶은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누군가 얄따란 실을 제 발목에 묶어 뒤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발바닥이 뒤로 질질 끌리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다시 생각해.”
재영은 뒤로 물러서는 호정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덕분에 좀 전까지 뒤로 끌려가던 호정의 걸음이 멈춰졌다.
“......”
“다시, 호정아.”
지금껏 말한 것들 외에 잘못한 게 뭔지 모르겠다고 하면 어떨까. 호정은 단 한 번 떠올려 본 적 없던 의문을 숨겼다.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어느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면 넘어가 줄까.
호정은 비릿하게 고인 침을 삼켰다. 재영의 물음에 모른다 답하는 건 일종의 회피다. 재영은 단 한 번도 이런 식의 회피를 눈감아준 적이 없었다. 지금도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정답이 뭘까. 호정은 시선을 떨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서 생각을 아무리 더 더한다고 해도 자신이 그 답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호정은 굳은 표정을 애써 풀고 눈을 깜박였다. 시선을 들어 재영을 마주 보았을 땐 어쩌면 자연스런 미소 정도는 지어졌을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