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下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온 민재가 재영과 호정의 가운데 섰다. 민재는 재영의 손에 들린 자신의 가방에 미간을 좁혔다. 그 품에 마치 물건처럼 안긴 호정을 흘깃 쳐다볼 때도 미간에 들어간 힘은 풀리지 않았다.
어깨뿐 아니라 꽉 쥔 주먹까지 부들대는 꼴이 안쓰러웠다. 뭐가 저렇게 무서워서. 주인이라는 게 예쁜 짓 하면 간식 주는 놈이 아니라 나쁜 짓 할 때 벌을 주는 주인이었냐고 묻고 싶은 걸 한숨으로 대신했다.
“뭘 또 그렇게까지 떨어. 재미 하나도 없다.”
민재는 장난치듯 툴툴대는 목소리로 호정에게 말하며 재영의 손에서 자신의 가방을 가져갔다.
“애들이 너보고 이 새끼 따까리라는데. 계속 그렇게 살래?”
호정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더 장난기를 담았다. 그런데도 호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묵묵히 재영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이지도 그렇다고 젓지도 않았다. 고요하고 일정한 숨을 그저 기계처럼 내뱉기만 했다.
“하아.”
민재가 좀 전보다 진해진 한숨을 내뱉었다. 호정은 당장이라도 고개를 들어 저 말을 들은 재영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다. 괜히 민재가 끼여 더 화를 부추긴 건 아닐까, 지레 겁이 났다.
“전학 첫날 우리 담임이 그러던데. 왕따시키는 건 쓰레기나 하는 짓이라고.”
민재는 호정의 어깨와 손을 쫓던 시선을 재영에게로 옮겼다. 겉보기엔 온화한 미소였다. 속을 보이지 않는 미소였지만, 저런 속이야 그 속이 무엇이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냐. 이 쓰레기 새끼야.”
민재가 재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고 싶지 않은 속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예상한 속이 맞다면 재영은 자신이 두드린 어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거다. 속이 뒤틀리고 역겨워 당장이라도 내 손을 분질러버리고 싶을 거다. 민재는 호정의 머리와 떨리는 어깨를 마저 쳐다보았다. 재영은 그런 민재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때맞춰 수업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들렸다. 민재는 뒤꿈치에 힘을 주고 방향을 돌렸다. 돌아서 가려는 민재의 걸음을 붙든 건 재영의 다음 말이었다.
“너. 호정이 불쌍해 보이지?”
무덤덤하게 변화 없는 목소리에 민재는 돌아섰던 걸음을 멈추었다.
“근데 우리 호정이 불쌍한 애 아니거든. 나, 똑똑하게 키웠어.”
“씹. 하나도 안 궁금해. 네들 사정.”
민재가 비아냥거리며 답했다. 운동장 바닥을 끄는 슬리퍼 소리가 운동장에 울리는 음악보다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호정은 재영의 가슴에 뺨을 붙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우는 꼴은 재영에게 보이는 것만으로 족했다. 그 외엔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영이 그랬으니까. 우는 걸 자신 아닌 타인에게 보이는 건... 절대 안 된다고 했었으니까. 그건 어떤 벌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거라고 했었으니까.
“갔어. 호정아. 무서웠지?”
호정은 움칠하며 숨을 죽였다. 재영의 품에 붙인 뺨이 시큰거렸다. 눈물로 젖었던 뺨이 셔츠에 쓸린 탓이었다.
“이제 걔 안 보여. 고개 들어도 돼.”
지금쯤이면 고개를 들어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고개 들어 재영을 보아도 재영이 용서해줄 것 같단 기대감이 든 탓이었다. 호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재영아.”
재영이 호정을 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평소에 자신을 바라봐주던 그 미소와 같아 마음이 놓였다.
“우리 호정이 욕하는 사람 무서워하는데. 그렇지? 좀 전에 무서웠겠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나른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재영의 말대로 방금까지 제 마음을 아프게 조여오던 두려움과 무서움이 모두 소멸하는 듯했다. 자신을 무섭게 하던 민재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은 욕하는 사람을 무서워하니... 까.
“......하, 씨발.”
호정이 놀라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아닌 자신의 뒤, 건물 쪽을 향한 재영의 시선이 꼿꼿했다. 방금 자신이 들은 게 정말 재영의 목소리가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재영이 아니라면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나른하고 다정한 재영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좀 전 그건 누구의 목소리지. 호정은 불안정한 눈으로 달싹대는 재영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았다.
“호정아. 쟤가 너 불쌍하다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호정은 묵묵한 시선으로 재영을 보았다. 자신이 정답을 말하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호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재영이 자신의 턱을 잡아 조물조물 어루만졌다.
“내가 너 똑똑하다 했잖아. 맞지?”
“......응.”
호정은 여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하지?”
“...응.”
재영의 말은 그게 무엇이든 맞았다. 여태 틀린 적이 없었다. 그건 재영의 말을 의심하고 믿지 않았을 때, 그때 돌아오던 결과가 말해주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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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는 가방끈 한쪽을 손에 쥐고 계단 앞에서 숨을 골랐다. 수업이 끝나고 우르르 복도로 몰려나온 아이들의 소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가방을 들어 지퍼를 내렸다. 가방이 흔들리며 안에 가득 넣어두었던 사탕이 모래알처럼 자글자글 끓는 소리를 냈다.
“하나도 못 먹겠네.”
저 빌어먹을 쓰레기 때문에.
민재는 운동장 쪽을 노려보다 가방끈을 세게 움켜쥐었다. 아침에 호정에게 사탕을 건넸을 때 이미 눈치로 가방 안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건 알았다.
이 가방이야 당연히 어제 버스 정류장에 버렸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는데, 결과는 방금 확인했듯 아니었다. 호정은 자신의 빨간 가방을 챙겨서 갔고 과정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이건 한재영에 의해 다시 돌아왔다. 중간과정이 텅 비어버린 채로 시작과 결과만 보이는 격이었다.
민재는 어려운 게임에 참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결과가 자신이 이길 게 분명하다는 확신, 그 확신이 있어야만 비로소 흥미를 끌었다. 질 가능성이 크다면 그래서 자신이 지는 게 명백해지면 흥미는 금세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런 건 재미가 없었다.
그럼 지금 이건 뭐지. 재미가 있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끝내기엔 아쉽다.
“씹, 진짜!”
기분 더럽네. 민재는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가방끈을 조여 복도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복도 벽에 부딪힌 사탕이 알알이 깨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온전한 제 모양을 지키고 있는 게 하나 없는 듯 보였다. 민재는 가방에서 떨어져나오는 사탕을 응시했다.
‘우리 호정이 불쌍한 애 아니거든. 나, 똑똑하게 키웠어.’
“하아...”
민재는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던진 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흐트러진 채 바닥에 떨어진 제 가방을 주워 먼지가 묻은 곳을 털어냈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발로 밀어 한 곳에 몰았다. 쓰레기를 모아 버리듯 가방에 다시 사탕을 담았다. 민재는 참을 수 없이 솟구치는 화를 제어하기 위해 어금니 안이 시릴 정도로 물었다.
“씨발. 지가 뭐 이호정 아빠라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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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은 집으로 가는 내내 재영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곧 집으로 가는 골목의 입구였다. 차를 운전하는 윤 비서의 손끝이 제발, 제발 자신의 집 방향인 오른쪽으로 꺾이길 바랐을 때였다.
“오늘은 우리 집이야. 호정아.”
호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핸들을 쥔 윤 비서의 손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왼쪽으로 꺾이는 게 보였다.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잘못을 했으니 벌을 받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호정은 좀 전까지 자신이 오늘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위해 재영이 많은 걸 포기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면 영국으로 진학하려던 재영을 붙든 게 바로 자신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였다. 부모님도 안 계신 이곳에서 재영도 없이 혼자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영은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호정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한국에 남아 주었다. 모두 호정,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자신은 오늘 재영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재영을 속이려 거짓말을 했고, 심지어 그 거짓말을 들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자신은 왜 오늘만은 재영이 용서해줄 거란 기대를 했던 걸까.
“호정아.”
“...응.”
호정은 머리를 숙여 재영의 허벅지에 뺨을 붙였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으로 답하고 나서 깊은 호흡을 내쉬었다. 재영의 손가락이 호정의 입술선을 따라 움직였다. 간지러움에 호정이 뺨을 옅게 일그러뜨렸다. 입술선의 굴곡을 따라 움직이던 재영의 손가락이 호정의 입술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왜 오늘 너한테서 단내가 날까.”
호정은 아침에 민재가 준 사탕을 재빨리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단내의 원흉인 입을 닫고 싶은데 자신의 입 안을 헤집는 재영의 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호정은 혀를 움찔대며 두 손으로 재영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혀의 아래와 입술 안, 빨갛게 익은 잇몸을 어루만지던 재영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좆같은 단내가 나는 곳이 여기야?
재영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호정은 자신의 입술 사이에 물린 재영의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재영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린 성인이 되어야 할 수 있어. 재영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되씹으면서도 호정은 재영의 손가락을 촘촘히 핥고 또 핥았다. 친구라는 관계는 성인이 되어야 깨질 수 있는 거라고 했었다.
호정은 자신의 가시지 않는 갈증의 근원을 알고 있었다. 늘 목을 갑갑하게 하는 통증은 재영이 아니면 해갈될 수 없는 것이었다. 호정은 재영과의 친구라는 관계, 더 이상의 관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늘 불안하고 괴로웠다.
“안 된다고 했지. 다 클 때까지는.”
“...응... 으응...”
재영은 우물대는 호정의 양쪽 뺨을 한 손으로 잡아 벌렸다. 입술이 벌어진 틈으로 미끄덩하게 젖은 손이 빠져나왔다.
“후. 호정아.”
재영은 학교에서 봤던 전학생을 떠올렸다. 김민재. 그렇고 그런 이름. 흔하디흔한 이름. 이름만큼이나 흔한 생김새. 금방 잊힐 무난한 이목구비. 별다를 특징이랄 게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 기억에 남지 않을 고저를 가진 목소리의 톤까지. 온통 제 기분을 망치는 요소들로 가득했다.
“걔가 첫날부터 너한테 말 걸었니?”
호정은 눈을 굴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전학 온 게 정확히 언제야?”
언제였지. 한 달이나 되었나. 아니, 한 달까지는 아니다. 수요일 모의고사를 치기 하루 전이었으니 화요일. 호정은 더듬대며 입술을 뗐다.
“20... 20일 정도...”
“정확히. 호정아.”
“......”
호정은 다시 눈을 깜박거렸다.
“22일 된 것... 아니, 22일 됐어.”
“그래.”
재영이 낮게 22라는 숫자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리 강아지가 날 속인 게 22일이란 소리네. 재영은 비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22일간 너 못 보겠는데.”
그게 벌이야. 재영은 호정의 볼을 문질렀다. 재영의 허벅지에 볼을 붙이고 있던 호정이 상체를 빠르게 일으켜 재영을 마주 보았다. 처음 겪는 벌에 놀란 게 분명한 눈이었다.
“나 잘못한 거 많아서... 나 못된 짓 해서... 그런 거 아는데. 그래도 나 너 그렇게 오래 못 보면... 힘들... 나 못 살아... 재영아.”
호정이 참지 못하고 다시 울먹대기 시작했다. 재영은 호정을 지그시 응시한 채로 운전 중인 윤 비서를 불렀다.
“네. 도련님.”
윤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답했다. 호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미러를 통해 윤 비서와 호정의 눈길이 얽혔다. 호정은 자신만 보고 있는 재영에게 다시 눈을 맞추었다.
“별채에요. 한 달 정도 지루하지 않게 지내려면 뭘 더 넣어야 할까요?”
재영이 무덤덤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호정은 다급하게 말을 붙였다.
“학교... 학교는? 너 학교 안 나오면... 대학...”
마음이 급했다. 윤 비서가 답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내가 학교를 왜 안 나가, 호정아.”
“......”
재영이 피식 웃으며 호정을 어루만졌다. 호정은 얼떨떨한 얼굴로 재영을 응시했다. 차는 어느덧 재영의 집 차고에 들어서고 있었다.
“네가 안 나가는 거야.”
“......”
“22일 동안.”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재영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재영의 눈이 마치 호정아, 넌 똑똑하지? 그렇게 묻는 듯했다. 호정은 아래로 푹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응.”
위아래로 작게 흔들리는 고개에 재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IF 특별 외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