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Ghosts & Roses (2/6)

2. Ghosts & Roses

눈을 떴을 때 주변은 환했다. 여과 없이 찔러 들어오는 햇빛은 차라리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암흑뿐인 상자에 갇혀 있다 밖으로 나온 동물이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자 그 사이로 물기가 스며 나올 정도였다. 

‘내가 살아있나?’

지한은 다시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잠에서 깨어났다기보다, 짧은 죽음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꿈조차 없는 혼절 같은 잠에서 깨어난 후였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마비가 된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의 모든 신경이 끊긴 듯 무섭도록 감각이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엔 사라지지 않은 앙금 같은 혼란이 남아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무슨 일이 있어서 자신이 이 모양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하기 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모든 것이 느리게 천천히 돌아왔다.

-형……. 

귓가에 들리는 이명에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모두 일으키지도 못한 채 휘청 이며 팔을 짚어야 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자 둔하게 느껴지던 통증이 칼날처럼 뼈를 파고들었다. 지독했다. 지독한 기분이었다. 눈을 옮겨 바라본 주변의 풍경은 더욱 지독했다. 피 자국이 남아있는 시트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 그것으로 이제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토록 꿈이길 바랐건만, 여기 이렇게 증거가 남아있었다. 

지한은 남자와, 그 남자와 섹스를 했다.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에 자신의 의지가 없었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 남자’ 라니. 대체 그 남자는 누구일까? 사실 지한은 누구와 했는지도 모르겠다. 몸을 결박당한 채 정신을 할퀴며 억지로 밀고 들어온 욕망은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미친 남자의 것인가, 죽은 동생의 것인가. 어느 쪽도 반갑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울컥 눈가가 뜨거워졌다. 여전한 통증 때문에, 새삼 아침 햇살 아래 드러난 수치심 때문에?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는 그냥 모든 것이 싫었다. 끔찍했다. 이건 아니라고, 싫다고 떼를 쓰고 싶었다. 

지한은 그런 어린아이 같은 기분으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목 놓아 울지 못한 것은 웬일인지 목이 꽉 잠겨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목이 터질듯 아프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끅, 끅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만 마른 목구멍 사이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많이 아파?”

지한은 눈물을 멈추고 흠뻑 젖은 얼굴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문을 열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문과 약간의 근심을 담은 표정이었다. 김이후였다. 어젯밤엔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파서 우는 거야?”

“…….”

“약이라도 줄까. 아니, 일단 씻는 게 먼저인가. 도와줄게.”   

서슴없이 다가오는 손을 곧바로 물리쳤다. 지한 본인도 자신에게 그런 힘이 남아있는지도 몰랐다. 이후는 붉은 자국은 남은 손등을 힐끔 내려다보더니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는 물러나는가 싶었더니 불쑥 다가와 지한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엔 때릴 수 없도록 두 팔을 모두 붙잡은 채였다.

“이봐요. 내가 한 게 아니니까, 미워하지 마.”

뻔뻔한 소리를 태연하게 흘리는 얼굴을 지한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럼 정말 그게 윤민한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간밤의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김이후’가 아닌 ‘윤민한’이라고. 자신을 형이라 부르며 지한을 비참하게 억누르고 안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자신이 그러냐고 말할 줄 알았나.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거야?”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의 뻔뻔함에, 뻔뻔함을 넘은 이상한 태연함에. 그러나 그는 전처럼 웃지 않았다. 오히려 미간을 찌푸린 채 지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곤란함과 심각함을 담은 얼굴이었다. 

“나도 본의 아니게 즐기긴 했지만, 성격이 이 모양이라도 강간하는 취미는 없어.”

“말도 안 되는 연기 집어 치워. 내가 속을 줄 알아?!”

“나 연기 잘해? 음, 그럼 연기자나 될 걸 그랬나.”

얘기를 사이 느슨해진 손을 뿌리치고 주먹을 날렸다. 그래봐야 별 타격은 없었다. 스친 것만도 못한 충격이 고작이었다.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턱을 내밀었다.  

“그래. 때리고 싶으면 때려봐. 그래서 화가 풀린 다면 얼마든지 맞아주지.”

나를 놀리는 건가. 주먹을 쥐는 대신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던졌다. 그것이 무언인지 알게 된 것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였다. 광대뼈 언저리가 붉게 물들었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분명 아팠을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묵직한 라이터였다. 그렇다고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지한이 느낀 아픔이나 충격은 이 남자가 느끼는 것보다 더 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냐. 남이 몸속에 들어왔다 나가면 어떤 기분인줄 알아? 알리가 없지. 아무리 생전에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안 좋아. 무지 찝찝해.”

“……그런 건 내 알바 아냐.”

이후가 아무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해도 믿을 수 없는 지한이었다.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을 어떻게 믿으란 건가. 차라리 지금 자신의 곁에 귀신이 있다고 말한다면 믿겠다. 그렇지만 자신이 윤민한이라 말하는 남자의 행동은 지독한 거짓말, 혹은 정신이상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옷가지가 떨어져 있는 바닥을 노려보던 지한은 결심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몸이 닫는 순간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몸이 곤두박질쳤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해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 근육이 경련하고 허리가 부러질 듯 아팠다. 팔에도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바로 옆으로 이후가 다가와 있었다.

“도와줄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욕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의 지친 표정이 눈에 들어와 잠시 멈칫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지한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싫어도 할 수 없잖아? 기어서 나갈 것도 아닐 테고.”

그런 힘이라도 남아있다면, 혹은 자존심이라도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까지 담대한 인간은 아이었다. 보통 사람정도의 강함을, 아니 보통사람보다 못한 나약함을 가진 인간일 뿐이었다. 지한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이 팔을 허리를 감싸고 어깨를 스칠 때 마다 어젯밤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났다. 그 아픈 행위, 농밀한 움직임, 꿈같은 열기와 고통들이.   

결국 지한은 이후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입었다. 게다가 그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출근은 포기해야만 했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얼굴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의 몸과 마음은 엉망이었다. 

겨우 회사에 전화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기도할 뿐이었다. 차라리 이 순간 영원히 잠들어도 상관없다고, 아니 분명 자신은 그런 일을 바라고 있었다.

*

지한은 어린 시절, 방학의 대부분을 할머니 집에서 지냈다. 일로 바쁜 어머니가 아이 둘을 돌볼 시간이 없었던 탓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사실 어머니는 그때만이라도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다면 동생은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너무나 뻔한 변명이었다. 

할머니의 집은 근처에서 제일 넓고 깨끗한 집이긴 하였으나 썰렁하고 심심했다. 주변에 또래의 아이도 거의 없었으므로 지한은 숙제를 하거나 홀로 논밭을 거닐며 시간을 죽여야 했다.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는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그립단 생각을 했다. 동생 또한 보고 싶었다. 함께 있을 땐 귀찮은 존재, 또는 시기하며 미움을 가지기도 했던 동생이었지만 떨어져 있으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매달리는 손길 같은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전날, 동생은 어떻게 알았는지 시골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아마 어머니가 알려준 것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전화를 했나 신기하기만 했다. 게다가 동생은 겨우 전화 거는 법을 배워 서툴고 작은 손으로 전화를 거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형, 언제와? 몇 밤 자면 와? 보고 싶어. 

지한은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도 네가 보고 싶다고. 집이 그립다고. 눈물을 흘리느라 차마 말해주지 못했다.

그나마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며칠 내로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었다. 그러나 그 며칠조차 어린아이에겐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루함을 죽여보고자 멀리 있는 초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녀오니 어느새 하늘 저편에 구름이 몰려와 있었다. 당장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싶어 걸음을 서둘렀다. 멀리서 희미한 천둥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마당에 들어서던 지한은 마루 밑에 놓여있는 신발을 발견했다. 설마, 벌써 자신을 데리러 왔나. 지한은 기대로 한껏 부풀어 마루위에 올라섰다. 발을 내려놓은 방문 사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봐요. 내가 뭐라고 했어. 친자식처럼 기른다고? 그 여자가? 행여나……. 지금 하는 거 보면 모르겠어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얼핏 보니 몇 번 얼굴을 본적 있던 고모였다. 실망감에 그 자리에 섰다. 하긴 벌써 자신을 데리러 올리는 없었다.

지한은 마루 끝에 앉아 할머니가 나오길 기다렸다. 어쩐지 싸우는 듯한 목소리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한은 두 사람이 무슨 얘길 하는지 알 지 못했다.

-우리 지한이만 불쌍하게 됐잖아.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어리둥절하게 느껴졌다. 아이는 이야기 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마루위에 올라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와 마룻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더웠다. 비가 내리기 직전이었음에도 8월의 더위는 지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오빠도 그 여자도 천벌 받을 거야.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조강지처를 버려? 그 여자도 그렇지. 돈 많고 능력 있으면 총각을 꼬실 것이지 왜 부인 있는 여자를 꼬여내서 사람 인생을 망쳐놔. 게다가 애까지 뺏어선. 올케언니 병 걸린 것도 그래서 아니겠어? 애는 뺐지 말았어야지. 

-다 내 죄다. 내 죄. 

내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무거운 한숨 같은 말을 뱉어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말을 하는 얼굴을 왠지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비난을 멈추지 않는 고모의 표정역시.   

-죽기 전에 자기 아들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래. 그런데도 그 여잔 눈 하나 깜짝 안 한대지. 그렇다고 귀하게 키우는 것도 아니잖아. 애를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아 놓고, 그러면서 제 아들은 보모까지 붙여서 애지중지 하지. 진짜 재수 없는 여자라니까. 

지한은 어리고 무지했다. 그들의 대화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순 없었다. 그래도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고모를 화나게 하고 할머니를 죄책감에 한숨짓게 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어렴풋 알았다. 

‘어머니.’

그때까지 자신의 어머니임을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었다. 당연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다른 어머니는 없었다. 당연한 듯 엄마라 불렀다. 아무리 자신에게 차갑게 굴어도 매정하게 자신을 밀쳐 내도 당연히 그렇게 불렀다.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없이.

-쟤는 지 친엄마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더라. 하긴 워낙 어릴 때 헤어졌으니까. 그런데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신을 차린 순간, 지한은 이미 집밖으로 나와 있었다. 하늘에선 굵은 빗줄기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무작정 뛰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피해서 달아났다. 듣지 못한 것이 나았을 것이다. 사실을 몰랐다면, 지금의 어머니가 자신의 진짜 어머니가 아닌 것을 여전히 몰랐다면 불행할지언정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지한은 비를 맞아 꼬박 이틀을 앓았다. 바깥에는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방안의 아이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다. 그리고 추위보다 더한 슬픔이 가슴을 짓눌렀다. 할머니는 내내 지한의 곁을 지키며 기도처럼 중얼거렸다. 

-불쌍한 것. 불쌍한 것. 

열로 인사불성이 되어 헛소리를 해대자 지한의 할머니는 서울의 아들에게 전화를 해 얼른 내려오라고 성화했다. 결국 그들이 내려온 것은 이틀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후였다. 지한은 이미 열이 내리고 몸을 회복했다. 마음의 병은 그때부터 시작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영원히 계속될 병증이 생겨나고 말았다.

차 소리가 들려 방밖으로 나가니 멀리서 익숙한 차가 보였다. 아마도 단란한 가족이 타고 있을 차였다. 자신만 없으면 완벽할 가족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지한의 존재는 불필요할 것이었다. 오로지 자신을 찾는 것은 동생 뿐. 그러나 지한은 동생의 손길이 반갑지 않았다.

-형! 

차에서 내린 동생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그 뒤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이제 저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물론 앞으로도 지한은 그녀를 어머니라 부를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 의미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보고 싶었던 마음도 그리웠던 마음도 없었다.

지한은 자신을 향해 작은 손을 내미는 동생의 환한 얼굴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이를 밀쳐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아이가 울지도 않고 지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눈 안에 두려움이 의아함이 떠오르다 천천히 눈물이 차올랐다. 왜 네가 우는 거지? 지한은 울고 있는 동생을 향해 중얼거렸다. 정말 울고 싶은 것은, 울면서 무섭다고 외치고 싶은 것은 자신이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주변이 캄캄하단 것만이 대충의 시간을 알려줄 뿐, 날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단 회사에 전화를 걸었던 것은 기억이 났다. 지한은 평소와 다른 긴장을 느끼며 애써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고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안심하고 긴장을 놓았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거야?”

민혜였다. 이 집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야 그녀뿐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한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약해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작 문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다니. 

“왜 왔어?”

“할 말이 그것뿐이야. 약속도 펑크 내고, 전화도 안 받고……. 회사는 결근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약속.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 그녀의 어머니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었다. 사실 기억하고 있었다고 해도 갈 수 있었을 리는 만무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무엇보다도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민혜의 존재였다. 지금은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악몽 같은 밤이 잊히지가 않았다. 여전히 그 기억이, 흔적이 몸 구석구석 뇌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조금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미안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성의 없이 사과 한마디를 던졌다. 몸은 어느새 민혜를 피해 침대 반대편으로 슬그머니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사고 때문에 그래? 다치지 않았다며.”

“그런 거 아냐.”

“그럼?”

“피곤하니까, 나중에·····.”

민혜의 손이 지한의 어깨에 닿으려 하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비틀었다. 속에서 발끈하는 음성이 튀어나왔다. 

“머리 아프니까, 그만해!”

민혜는 차갑게 쏘아보는 눈길과 이상한 동요에 되레 놀라고 말았다. 아연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지한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설명해야 했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납득시키고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하나. 어떤 미친놈에게 강간당했다고? 그런 말을 이 여자에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차라리 혀를 깨물어 죽고 말지.

“미안해. 내가 예민했나봐.”

“괜찮아. 나 별로 화난 거 아냐.”

“…….”

“그래. 아프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귀찮게 굴었겠지.”

민혜는 화가 나 있었다. 화를 내도 당연했다. 자신의 행동은 지나쳤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로 신경 쓰는 일이 많을 그녀였다. 양쪽 집안의 눈치를 보며, 동생의 죽음에 정신 차리지 못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얼마나 속을 썩고 있었을까. 마음속의 울화가 지금까지 터지지 않고 견뎌낸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애를 썼다고 봐야한다.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녀의 죄는 그런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밖에 없었다.

“민혜야.”

“대체 난 언제까지 참고 기다리만 해야 돼?”

“글쎄,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듣냐구. 그래,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영원히!”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몸을 가까스로 일으켜 문밖으로 나가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이번엔 민혜가 지한의 손을 뿌리쳤다.

“왜? 혼자 있고 싶은 거 같아서 가주려는 것뿐이야. 잘 있어.”

문이 닫히고 지한은 다시 홀로 남았다. 그는 그대로 현관문 앞에 주저앉았다. 그는 닫힌 문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런 게 아냐. 난 혼자 있고 싶지 않아. 무서워. 무서워 미칠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고 자신에게로 그대로 돌아왔다. 끔찍한 기분에 그대로 무너지고 싶었다.

*

지한은 아침에 문을 연 핸드폰 매장을 들러 새로운 핸드폰을 구입했다. 자신의 핸드폰은 어젯밤 수조 속에 들어가 고장이 났다. 배터리를 빼놓으면 되었을 것을. 그는 먹통이 되어 버린 핸드폰을 가방 속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금붕어 먹이로 주어 버린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너무나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후는 집전화로 전화를 해왔다. 집 전화까지 알고 있으리란 생각을 못했으므로 무의식적으로 받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왜 전화 안 받아? 걱정했잖아. 

즉시 전화 코드를 빼놓았다. 걱정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정말 걱정한다면 자신을 찾지 않아주길 바랐다. 지한도 자신이 이렇게 겁을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폭력의 기억때문인가, 아니면 그 남자가 하는 말을 정말 믿기라도 하는 건가. 믿지 않는다. 아니, 절대 믿을 수 없었다. 믿는 순간 악몽은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 

핸들에 손을 올리고 정면을 응시 했다. 햇살이 눈을 찔러 들었다. 다시 찾아온 아침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바람일 뿐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을 지라도 자신은 변한건지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상사에게 불려가 잔소리를 들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심하지는 않았다. 가벼운 꾸중 정도였다. 아마도 한바탕 하려던 생각이었던 것 같았지만 본부장은 지한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 정도로 한심한 몰골이었나 보다.

“사장님까지 참석한 자리였는데 팀장인 자네가 빠지니 뭐가 되겠어. 그래도 밑에 사람들이 어떻게 잘 메웠으니 다행이었지.”

“죄송합니다.”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그것은 지한 자신보다도 그의 상사가 더 잘 알고 있을 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벌써 몇 번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치러내 회사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사람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도 실수를 하는 법이니 심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사람이 변한다고, 결혼을 앞두고-그가 누구와 결혼하게 되는지는 회사 내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였다-사람이 해이해 질까 싶어 일부러 혼을 내려고 불러낸 것이었다. 그렇지만 얼굴을 보니 하려던 말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됐어. 죄송한 줄 알면. 몸 좀 챙겨. 몸 관리도 일이야. 젊은 사람이 내일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들어오니 내가 할 말이 없군 그래.”   

지한은 자리에 돌아와 억지로 밀린 서류를 마주하고 키보드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였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다른 생각이 살아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은 쉴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지나던 여직원이 겸연쩍은 얼굴로 물어왔다. 표정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슬쩍 밑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의 옷차림을 유심하게 바라보았다. 

“덥지 않으세요? 긴팔 입으셨네.”

지한은 괜스레 손목을 움켜쥐고 책상 밑으로 내렸다. 셔츠 소매부리 안에는 붉은 낙인 같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묶여 있던 흔적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이상하고 흉측한 상처라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몸 곳곳에 차마 바라보고 싶지 않은 상흔들이 수없이 남겨져 있었다.

“감기라, 추워서 그렇습니다.”

“이 여름에 감기라니 힘드시겠어요. 차라도 내올까요?”

“아뇨. 됐습니다.”   

그녀의 친절은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성가지고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지한은 재빨리 대화를 단절시키고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책상 밑에 숨겨둔 팔이 신경 쓰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넋을 놓고 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전화벨소리 때문이었다. 벨소리만 들려도 몸이 절로 경직되었다. 전화는 다른 직원이 받았다, 하지만 자신을 찾는 전화였다. 로비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손님이 오셨는데, 올려 보낼까요? 

“손님이라니, 누구시랍니까?”

-동생분이시라는데요? 

지한은 놀랐지만 곧 누구의 소행인지 알았다. 그 남자다. 그 남자의 짓이 분명했다.

“저는 동생이 없습니다.”

-예?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한은 전화를 곧바로 끊었다. 회사까지 찾아오다니, 아니 지난번에도 그는 회사 근처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집이며 회사며 전화번호 그리고 또 다른 것들까지. 동생은 그에게 무슨 얘길 했던 걸까. 무슨 얘길 얼마나 많이 했기에 이리도 자신을 꼼짝할 수 없게 옭아매는 걸까.

힘든 하루였다. 일은 많고, 신경을 써야 할 일은 더욱더 많았다. 지한은 일하는 중간, 중간. 내내 전화기와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새로 산 핸드폰이었으므로 이상한 사람이 전화를 해 올리는 없었다.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는 단체 문자를 보내니 몇몇이 알겠다고 문자를 보내왔을 뿐이었다. 그중에는 우섭의 것도 섞여 있었다.

‘얼굴 좀 보자. 시간 나면 전화해.’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더 할 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얘기라면 지한 또한 많았다. 너무 많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돌아간다 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진 않았지만 적어도 신경 써야 할 일이 한가지쯤 줄어 들 테니 나쁘진 않았다. 

몸보다는 머리가 무거운 기분이었다. 아침에 어떻게 운전을 해서 회사에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고친 차인데 또 사고를 낼까봐 걱정되었지만 아침보다는 상태가 좋아 그냥 타고 가기로 했다.

“늦었네.”

이후는 불쑥 앞을 가로막거나 뒤에서 덮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둠의 사각지대에 서 있어 뒤늦게 눈치 챘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지한의 심장을 멈추기엔 충분했다. 손에 든 차키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지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아까 왜 모른다고 했어?”

“다, 당신 여길 어떻게 왔어?!”

“기다렸어. 지난번에도 기다렸는데 또 기다렸어. 내가 기다리는 거 무지 싫어한다고 말했었나?”

이후는 허리를 굽혀 지한이 떨어뜨린 차키를 주어 들었다. 그는 지한의 표정을 알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더니 짙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사람에게 짓는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잔인한 웃음이었다.

“소리라도 지를 것 같네. 걱정 마. 안 잡아먹어.”

결국 그때부터 지금까지 기다렸단 소리인가. 확실히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지한은 분명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꼴도 보기 싫다고. 그러나 상대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포기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말 뿐인가, 하물며 힘으로 이길 수도 없었다. 미친놈을 보통사람이 이기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그젯밤, 뼈저리게 알았다.

“여긴 왜 왔어?”

“볼일이 있어야 오겠어. 우리사이에.”

“경찰에 신고 할 거야. 꺼져.”

“험한 말도 할 줄 아네. 형.”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지 마!”

일부러 그런 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소리가 커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남자가 그 말을 할 때 마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의 고통이, 두려움이 살아나고 있었다. 끔찍한 기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비켜.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협박이라고 하기엔 미약하나 지한이 할 수 있는 방어란 그것이 전부였다. 이정도면 충분히 신고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스토킹에……그리고 할 수 있다면 강간죄목까지 붙여 집어 처넣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고? 하지만 이거 알아두는 게 좋을걸.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내가 당신 약혼녀를 먼저 만날 수도 있어.”

“뭐?”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귀띔해 줄 수도 있다고.”

지한은 그가 자신을 도발하고자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곤 너무나 자신만만했다. 놀란 마음을 감추고 애써 차분히 말하려 했다. 차분하려고 노력했다.

“증거도 없으면서 어쩌려고. 분명 미친 소리라고 생각할걸.”

“어떻게 없다고 단정하지?”

“…….”

“가면서 얘기하자구.”

협박인지 허풍인지는 모르지만 지한은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이후를 차에 태우고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운전을 하고 있지만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습관처럼 신호를 읽으며 겨우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지한의 옆을 이후의 시선이 내내 따랐다.

“그만 도망쳐. 나 화나면 무슨 짓 할지 몰라.”

협박치고는 온화하게 들려왔다. 목소리는 분명 그러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한의 옆모습을 핥듯이 쳐다보는 시선은 뱀처럼 차가웠다. 기다리는 걸 어지간히 싫어하는 사람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는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글쎄.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당신,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이 남자는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단순히 지한이 재수 없었던 탓이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 끈질겼다. 전화를 먼저 건 것은, 만나자고 했던 것은 지한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치밀하고 완벽하게 물어버렸다. 이대로라면 곧 자신의 숨통을 물어 죽일게 분명했다.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냐. 그 애가 원하기 때문이라구.”

“그만 좀 해.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러니까 날 좋아한다고 말해도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었겠어.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도 꿈을 꾸는 동안의 고통은 계속되는 법이다. 꿈 안에서는 숨통을 조이는 고통과 깊은 절망이 실재하는 것이다. 지한은 정말로 괴로웠다. 자신의 괴로움만은 현실이니까. 그러니까 믿는 척을 하라면 할 것이다. 이 고통이 끝날 수 있다면. 기꺼이. 

“혹시, 정말, 만약에 진짜라면. 진짜 민한이가 당신 옆에 있다면, 그렇다면 얘기 해줘. 난 충분히 힘드니까, 그냥 떠나면 안 되겠냐고 말해줘. 부탁이니까.”

아까의 협박이 무색하게 지한의 입술에서 힘겹게 흘러나오는 말은 울먹임에 가까웠다. 애원하고 용서를 구해서 이 악몽이 끝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복수하려고 그런다고 생각해?”

“그럼 아니란 거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

이후는 지한의 퀭한 눈가와 마른 뺨, 그리고 핸들을 쥔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의 떨림을 바라보던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감싸 쥐었다. 

“자국 남았네.”

“건드리지 마.”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당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 하지 않아?”

“걱정도 하면 안 되는 건가.”

“그래. 기분 나쁘니까 걱정하는 척도 하지 마.”

신호가 바뀌어 지한은 그의 손을 재빨리 뿌리치고 핸들에 손을 가져갔다. 필사적으로 핸들에 매달렸다. 놓으면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엇이든 쥐고 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후는 다시 지한을 건드리진 않았지만 시선을 거두진 않았다. 

“있지. 녀석하고 할 때, 나도 사실 똑같이 느꼈어.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진짜 하는 것 같은 기분이더라.”

무엇을 말하는지, 퍼뜩 알지 못했다. 하지만 깨달은 순간엔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울화가 토할 것처럼 밀려 올라왔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한 일이잖아!”

“아까는 믿는다고 했잖아?”

“안 믿어. 당신은 연기 하고 있는 거야. 거짓말 하는 거라구.”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지한은 여전히 갈팡질팡 했다. 어쨌든 모두 비정상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귀신이냐, 정신병자냐의 문제가 다가 아니었다. 둘 중 하나가 결론이 나면 그다음에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한이 고민을 하든 말든 이후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지후의 흔들리는 턱 아래, 마르고 긴 목과 셔츠 안의 몸을 훑고 있었다. 노골적이고 저열한 눈길이었다. 

“누가 들어와 있는 건 기분 나빠. 싫어. 그렇지만 그때는 기분 나쁘지 않았어. 엄청 좋았어. 녀석이 당신을 얼마나 원하고 참았는지, 알 것 같더군. 당신 다리를 억지로 벌리고 들어갈 때, 미친 듯이 조이는 열기에 델 것 같았어. 정말 뜨거웠지.”

“그만해. 말하지 마.”

“거기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면서 내 페니스를 밀어내려고 안간힘 쓰고 있었거든. 뜨겁고 아프고 근지럽고 미칠 것 같았어. 어떻게든 들어가 흔들고 싶어 죽겠더란 말야. 당신 허리가 휘고 숨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리며 꿰뚫릴 땐 쾌감이 머리끝까지 울려서 정신이 없었지. 죽을 것처럼 좋다는 게 이런 건가. 아니, 이미 녀석은 죽었으니까 이건 틀린 말인가. 어쨌든 좋았어. 하아……. 정말 좋았단 말야.”

목소리에 더운 숨결이 섞여 든 것을 뒤늦게 눈치 챘다. 의식하자마자 기묘한 열기가 바로 곁에서 느껴졌다. 뭘까, 대체. 이상하단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 지한은 하마터면 급정거 할 뻔했다. 팔차선도로의 한복판이었다.   

“당신, 뭐 하는…….”

이후는 지한의 옆에서 바지 앞섶을 풀어 헤치고 속옷안의 물건을 꺼내 흔들고 있었다. 그는 도로 한복판에서 자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한을 강간했던 소감을 태연히 늘어놓으면서. 지한은 겨우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하지 마. 당장 그만둬!”

“왜, 내가 당신을 덮친 것도 아니잖아?”

“말도 안 돼. 미쳤어. 제정신이 아냐.”

말을 하는 사이에도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떨구며 입술을 깨물었다.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 졌다. 그는 정말로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싫으면 보지 마. 읏……. 앞을 보고 운전이나 하라구.”

시선을 돌린다고 모든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얼핏 본 그의 페니스는 속옷 안에서 발기해 있었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가에 뚜렷한 흥분이 떠올라 있었다. 자동차 소음 사이로 희미하게 살이 부대끼는 소리와 발정한 남자의 거칠어진 숨결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한은 싫어도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젖은 혀가 몸 구석구석을 핥고 지나가고 그 위를 정체를 알 수 없는 손길이 따라갔다. 울부짖는 몸을 벌리고 남자의 페니스가 몸을 가르듯 들어왔다. 그 불쾌한 이물감, 믿기지 않는 열기. 무력하게 흔들려야 했던 그 패배감. 눈을 뜨고 있음에도 눈이 가려진 것 같았던 두려움.    

“흣…….”

절정의 한숨은 길었다. 한껏 팽창했던 열기가 차안으로 미지근하게 퍼져나갔다. 이후는 말없이 눈을 감고 멈춰 있었다. 흥분의 여운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듯. 

지한의 차는 어느새 멈춰있었다. 어떻게 차를 세워뒀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주정차 금지 구역이라는 팻말이 얼핏 보였지만 견인된다 해도 더 이상 갈수가 없었다.  

“왜 그래, 우는 거야?”

핸들에 고개를 기댄 채 일어날 줄 모르는 지한을 향해 이후가 물었다. 지한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여전히 들지 않은 채로.

“그럼?”

지한은 울지 않았다. 그저 절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절망의 깊은 곳은 눈물 한 방울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지한은 쏟아낸 감정이 빠져나가 황량한 얼굴로 이후를 바라보았다. 절망이 아무리 깊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포기를 하든, 계속해서 저항을 하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내가 찾아다니기 전에 스스로 와. 별로 어렵지도 않지?”

그의 표정엔 여전히 나른함이 섞여 있었고, 눈빛은 여전히 불순했다. 하지만 지한에게 그것들이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왜?”

“못 알아들었어? 윤민한이 당신을 찾으니까, 원하니까.”

“그러니까, 지난번 같은 일을 나보고 계속 참으라는 소린가.”

지한의 목소리는 내내 차분해 보였으나 어떤 부분에선 희미하게 떨리고 찌푸려졌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말을 하며 어쩔 수 없이 지난번의 일을 떠올렸다. 그 강제적인 행위와 이상한 욕망을. 그것을 억지로 몸에 품어야 했던 밤을.  

“그래.”

이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마땅하고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것조차 자신은 그냥 참아야 하는가 보다.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 말하고 있었다. 지한은 화내지 않았다. 다만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 녀석이 만족할 때까지, 그만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대체 그때가 언제인데, 오기는 오는 걸까? 지한은 그 말을 그대로 삼켰다. 어차피 그는 친절한 대답을 건네줄 리가 없었으므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그저 개체일 뿐이었다. 원하고 행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었다. 

지한은 여전히 김이후를, 이 남자의 말들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는 얼핏 포기한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차라리 냉정해지기로 했다. 이 남자가 이러는 목적을 알기 전까지는 순응한 체 하자고. 물론 지한의 냉정함은 그저 태풍 속의 고요함처럼 일시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 자신조차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알 수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와락 등 뒤를 덮쳤다. 그리고 열기가 아닌 실체가 저항하는 몸을 열고 들어왔다. 또 다시 몸을 두 동강 내는 것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전보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라고 해도. 원치 않는 행위가 고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같은 남자이니 발기한 페니스가 가라앉으려면 어떤 과정과 시간을 거쳐야 할지 잘 알았다. 

등 뒤에 자신의 몸을 기대고 진입하려는 이는 긴장한 몸이 자신의 성기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자 목이며 어깨, 허리 따위를 부드럽고도 집요하게 쓸어내렸다. 몸을 만지는 단단한 손끝은 피부 안까지 파고들 것만 같았다. 소름끼치는 감각에 몸이 한순간 힘을 놓자 그 사이를 틈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아, 으읏·····!”

충격에 허리가 휘고 지탱하고 있던 팔이 풀썩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상대는 아랑곳 않고 안에서 더욱 크게 움직였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충격이 몇 번이고 계속 댔다. 살과 살이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 집, 김이후의 집에 들어올 때부터 기분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그늘이 많은 집이었다. 단순히 밤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텅 빈 공간이 지나치게 많았지만, 뭔가 가득 차 있다는 기분이었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등 뒤에서 덮쳐 왔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옷이 벗겨지고 입술이 막혔다. 얼핏 눈을 마주쳤을 때, 그의 얼굴은, 표정은 바뀌어 있었다. 전에 본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그 얼굴은, 며칠 전 이 집에서 본적이 있었다.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며 몸을 옭아매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자신을 향해 형이라고 불러왔다. 

그저 잠깐 눈을 감고 있으면 된다. 지한은 자신을 향해 몇 번이고 그 말을 들려주고 또 다짐을 받아냈다. 어차피 스스로 허락한 일이었다. 협박과 압력이 있었다고 한들, 이제 와서 싫다고 뿌리칠 수는 없었다.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아무런 감정도 욕망도 없는 행위였다. 상대의 일방적인 자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잠깐 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면 그만. 

“형.”

하지만 자신의 몸에 발정한 남자가 가끔 욕망에 젖어 뱉어내는 말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머리위로 찬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그대로 멈춰 설 것 같았다. 분명 그것임 김이후의 목소리임에도 미세한 울림이나 말의 길이와 분위기가 윤민한과 꼭 닮아 있었다. 흉내를 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얼어붙은 몸 위에 계속해서 애무와 삽입이 이어졌다. 목이며 어깨 따위에 입술을 부비는 그는 굶주린 사람 같았다. 안을 오가는 페니스는 성난 짐승처럼 진정이 될 줄 모르고 움직였다. 

“형, 나는 정말 기분 좋아, 좋은데·····.”

“아, 으, 아·····!”

말을 하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봐주는 법 없이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흉한 소리뿐이었다. 

“형은 아니지? 괴로워 미치겠지?”

허리를 뒤로 물렸던 그가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꿰뚫었다. 마음의 동요와 별개로 몸은 그것에 반응했다. 아픔과 이상한 열기가 허리 아래에서 넘실댔다.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벽이 멋대로 그것을 조이고 자극했다. 민한은, 아니 이후는 그 숨 막히는 압박감에 치를 떨며 허리를 잘게 움직였다. 짙은 쾌감에 잠긴 목소리는 계속해서 듣기 괴로운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난 형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아. 왜냐하면.”

움직임이 더욱 격렬해 졌다. 그는 지한의 허리를 붙잡고 더욱 세게 박아 댔다. 페니스가 오가는 곳은 이미 끈적한 액체로 질척거렸다.  

“왜냐하면 어차피 형은 살아 있잖아. 난 죽은 사람이잖아?”

“그…그만. 흐흑, 제발…….”

제발. 그만해. 그렇게 말하지 마. 형이라고 부르지 마. 진짜인 것처럼 말하지 마. 

비명과 신음사이로 애원해보지만 그에겐 조금도 닿지 않았다. 세게 감은 눈꺼풀 사이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흘러내렸다. 벌린 입가로 괴로운 신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런 가운데에도 김이후인지, 윤민한인지 모를 남자는 여전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이미 벌어진 곳을 더욱 무자비 하게 붙잡아 벌리고 흔들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목소리는 어쩐지 슬프게 울렸다. 

“어차피 그 여자랑 행복해 질 거잖아. 내가 없어도…….”

절정에 가까워진 몸짓은 묵직하고 거셌다. 커다란 파도가 안을 휩쓸고 나가고를 반복하는 듯 했다. 마침내 그가 깊고 단단히 안으로 파고들며 사정했다. 그대로 빠져나가지 않을 것처럼 몸을 옭아매고 안을 빈틈없이 메운 채였다. 정액이 안을 매우고 급기야 꾸역꾸역 밖으로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지한은 괴로움에 울먹였다.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힘겨워서. 

“없어도 상관없어. 그렇지 형?”

결합부 사이로 넘치는 액체는 불투명한 흰색이었다. 그러나 지한의 눈에 그것은 붉은 피로 보였다.

눈을 떴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었다.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남자 곁에서, 죽은 동생의 망령 같은 남자 옆에서 어떻게 잠들 수 있을까. 지한은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뜨려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 팔을 힘겹게 집어 들었다. 

침대도 아닌 맨 바닥이었다. 현관에서 그대로 쓰러졌던 기억이 있었으므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난번보다는 덜 했다고 해도 결코 낫지도 않았다. 팔꿈치며 무릎, 어깨 등에 긁힌 상처가 남아있었다. 이것은 지난번의 것이 아니라 오늘 생긴 것들이었다. 지한은 그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서둘러 옷을 입었다. 손이 떨려 단추를 잠그는데 한참이 걸렸다. 

‘괜찮아.’

또 주문처럼 그 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은 이 남자에게, 혹은 망령의 말에 굴복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참고 있을 뿐이었다. 몸을 일으켜 반라로 누워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잠든 얼굴은 죽은 듯 고요했다. 어떤 광기도, 귀기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얼굴. 어떤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지한은 담요를 찾아 그의 몸 위에 던지듯 덮어주었다. 그저 변덕이었을 뿐이었다. 진심은 사실 잠든 남자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담요 끝을 붙잡고 있던 손이 어느새 그의 얼굴위에 다가갔다. 손끝에 미지근한 숨결이 닿았다. 단단한 턱을 스친 손이 목 줄기에 조심스럽게 머물렀다. 그의 피부는 뜨거웠다. 

섹스 하는 중에는 이상하게 차갑던 피부였다. 내벽을 가득 채우던 페니스는 그토록 뜨겁게 살아있었으나 이상하게 몸에 닿는 피부는 차갑게 느껴졌었다. 그 상반된 느낌은 더욱 끔찍했다. 마치 지한의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분을 떠올리게 했다. 

오르내리는 목울대를 가만히 바라보던 지한의 눈앞에 무언가 어른거렸다. 꿈이었나. 자신은 어린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지한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땀이 슬쩍 밴 목으로 향한 시선. 

그래. 여기서 너를 죽인다면, 너를 죽이면 내 모든 고통은 끝날 텐데.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아도 될 텐데. 너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난 행복했을 텐데. 분명 그랬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린 두 손이 동생의 목을 눌렀다. 온 힘을 다해서, 진심으로. 

“나를 또 죽이고 싶어?”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방금 전까지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면 때문에 놀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일 것이었다. 잠든 줄 알았던 얼굴이 문득 눈을 떴다. 그리고 지한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이미 한번 죽인 사람을 또 죽이고 싶은 거냐구.”

“아, 아니. 그게 아냐.”

지한은 변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변명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이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당연했다. 자신은 살인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잠시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단지 상상일 뿐이었다. 

“떨지 마. 추워서 그래?”

눈을 뜬 남자는, 김이후인지, 동생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겁에 질린 지한을 바라보던 차가운 얼굴이 이내 다정하게 변했다. 분명 그것은 동생의 얼굴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처연하고도 상냥했던 웃음이 낯선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리와. 따뜻하게 해줄게.”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지한을 끌어 당겼다. 춥지 않았다. 당연했다. 한여름, 새벽이라고 공기는 텁텁하고 미지근했다. 그러나 지한의 몸은 혹한을 만난 듯 떨리고 있었다. 

“형은 추위를 잘 탔지. 여름에도 찬물로 샤워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이불을 차고 자서 감기에 걸린 적도 많았어. 그럼 나까지 감기에 걸려서 어머니는 짜증내기 일쑤였고……. 기억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하진 않았다. 억지로 갇혀 있는 어깨는 빳빳이 굳어 있었고 차마 감지 못한 채 열려 있는 눈은 남자가 연기하는 얼굴을 긴장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둘이 앓아누워 하루 종일 붙어 있었잖아. 난 아파도 좋았어. 형이 내 옆에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정말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그때는 그래도 형이 날 덜 미워했는데. 조금밖에 미워하지 않았는데…….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건 연기일 뿐이야. 너무 완벽해서 부정하기 힘든 연기이긴 해도 그저 그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질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 

“날 미워하지 마. 형. 나를…….”

안타까운 속삼임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동생을 안쓰럽게 여기거나 반성하는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지한 또한 민한과 같이 그때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때, 아무것도 몰라 동생을 사랑할 수 있었을 때. 그때가 너무나 멀어 지한의 손에는 잡히지 않았다. 

*

  

민혜는 며칠째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일이 바쁜가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었다. 자신과의 관계를 신경 써 회사를 그만둔 그녀는 어머니의 가게를 돕고 있었다. 그냥 작은 가게가 아닌 규모가 제법 있는 숍이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돕는 것뿐이라 출근도 비정기적이라 놀러 다니는 일이 일쑤였다. 그런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 다는 것은, 피하고 있다는 것밖에 정답이 없었다. 

-뚜르르르.

벨소리만 지루하게 이어져 결국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지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얘기하고 싶어 전화를 걸었음에도 전화를 받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막상 얼굴을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감정을 숨기려 해도 연인에게 까지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라면 자신의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챌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또 물을 테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또 싸우고 상처 입힐 것이었다. 그런 일을 당장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다행이라는 것이다. 

일단 며칠만 더 두고 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어선 안 되었다. 안 그래도 결혼이 늦어 불안해하는 그녀였다. 헤어지고 싶은 게 아닌가 하고 오해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 오해를 해선 안 되었다. 지한은 그녀를 잃는다면 돌아갈 곳이 없었다. 가족이라 해도 그에겐 안식이 되지못한지 오래였고 이런 상황에 그녀의 존재마저 없다고 생각하면 지한은 더욱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전화 받아줘. 전화를 해주면 더 좋고……. 저기,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결국 지한이 선택한 것은 음성 메시지였다. 조금은 연기 할 수 있고 숨길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자신의 미안한 마음은 연결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팀장님 사모님이랑 싸웠다면서요?”

일하는 내내 눈이 마주 칠 때마다 뭔가 말하고 싶을 눈치였던 한대리는 기회를 잡자 곧바로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 다른 직원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안 그래도 방금 전, 한대리가 말하는 사모님과 흡연실에서 전화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소식 빠르네.”

“술친구 해줬거든요. 아,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 둘이 마신 거 아니고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지한은 한대리가 급하게 덧붙인 말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웃는 것 같았다. 그동안은 웃을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래. 잘했어.”

“아직 화해 안하셨어요?”

“응. 전화를 안 받네.”

그는 솔직한데다가 예의도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또한 깊었다. 그래서 지한은 그가 편했다. 편하면서도 가끔 삐딱한 마음은 이 같은 사람을 시기하려 든다. 이런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아무래도 좋은 집에서 사랑받고 자라야겠지.

분명 동생도 이런 성격이었다. 다만, 자신의 앞에선 늘 한발자국 물러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 대리처럼 스스럼없이 농담을 걸고 웃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전부 지한의 탓이었다.  

“전화를 안 받으면, 꽃이라도 사들고 찾아가 보세요. 고전적이긴 해도 여자들한테는 직방이거든요.”

“그래. 참고할게.”

하지만 오늘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지한은 남자의 집에 가야 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째 지한은-일 때문에 빠진 하루 정도를 제외하곤-다른 집으로 퇴근을 했다. 그때마다 섹스를 한건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얼굴만 보고 돌아가라 한 적도 있었다. 그, 이상한 징후는 항상 나타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오늘은 오지 마. 

막 차에 시동을 걸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인건 알았지만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니 당황할 수밖에. 하긴 그의 성격이라면 무슨 이상한 행동을 해도 어울릴 법 했다. 이유를 묻자 의외로 상식적인 대답이 나왔다.

-일해야 해. 그동안 너무 쉬어서 혼났거든. 

지한으로선 아쉬워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일이 바쁘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냥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왜 갑자기 말투가 돌아갔어? 

“우리가 언제는 편한 사이였습니까?”

별것을 다 지적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지한은 그의 말에 진지하게 발끈해버렸다.

-그래. 그렇지. 마음대로 해. 

이후는 웃었다. 가벼운 듯하나 이상하게 끝을 끄는 웃음이었다.

전화를 끊고 행선지를 잃은 지한은 쉽게 출발하지 못했다. 좋은 일이지만 그다지 기쁜 기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인에게 갈수도 없었다. 지한은 며칠 전 받았던 친구의 문자를 생각해 냈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었지. 지금 막, 지한에게도 우섭에게 할 얘기가. 부탁할 것이 떠올랐다. 지한은 우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당을 소개해달라고?”

고기를 굽던 우섭이 기름이 튀었는지 눈썹을 찡그리며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는 그러고도 한참을 기름이 튄 자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시선만은 지한의 담담한 표정을 향해 있었다. 그는 친구의 표정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지한의 얼굴은 너무 아무것도 없어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지한은 눈에 띄게 야위었고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게다가 마른 어깨는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툭하고 넘어갈 것 같다. 마르고 야위고 어두워졌다. 전부터도 그리 밝은 인간은 아니었지만 이정도면 병이라고 할 수도 있을 수준이었다. 

“꼭 무당이 아니라도. 그런 쪽 전문가면 좋겠어. 난 그런 거 문외한이지만 넌 나보다는 잘 알거 아냐?”

우섭의 의문이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한은 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물어왔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고기를 열심히 구워봤자 자신 외엔 먹는 사람도 없었다. 지한은 그것을 손도 대지 않고 내내 골똘히 앉아 있다가 불쑥 이 같은 엉뚱한 말을 꺼낸 것이었다. 결론은 단 한가지였다. 

“너 혹시 김이후 그 미친 새끼 때문에 그러냐?”

“응.”

우섭이 이후의 얘길 꺼내는 것을 싫어하고, 수없이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경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런 얘길 하고 싶지 않았다. 지한은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종교조차 없었다. 더군다나 귀신 따위 믿지 않고 무당이나 점쟁이 따위는 더더욱 불신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라도 필요했다. 지한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살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 참. 오랜만에 만나자고 해서 나왔더니, 피골이 상접해서 나와서는 대뜸 무당 찾고…….”

“내가 이상해보여?”

“그래. 이상하다. 일이 힘들었냐. 아니면 그 놈 헛소리 때문에 앓았냐.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우섭을 만나지 않은 요 얼마간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일들은 약혼녀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우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경고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지한은 우섭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의 말대로 김이후에게 접근하면 안 되었다.  

“뭐야, 너도 진짜 민한이 귀신이라도 봤냐?”

“본건 아니지만 확인하고 싶어서.”

뜨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우섭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놀랍겠지. 아마 자신조차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괜한 얘기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그래도 하는 수 없다 여겼다. 지한도 자신이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 지금이 싫었다. 믿기지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지한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유가 모호한 후회를 했다.

“일어나.”

한참 말이 없던 우섭이 불쑥 말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집지 않은 고기가 불판위에서 타고 있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아까와 같지 않았지만 보통 때의 그와는 조금 달랐다. 

“가자. 보니까 밥도 안 넘어가는 모양이니까.”

“우섭아.”

화가 난건가. 싶었다. 자신의 얘기를 무시하고 이후를 만난 것도 그렇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도 그렇고. 화를 낼 법도 했다. 하지만 지한의 생각과 달리 우섭은 달리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한에게 그는 고개를 저어 자신이 화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화내는 거 아니다. 소개해달라며? 가자고.”

“지금?”

“그래.”

일이 어쩌다 이렇게 속전속결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상의를 할 생각이었고, 무속인을 소개시켜 준다고 해도 진짜 만나러 갈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냥 고민하다가 만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섭은 자신과 다른 진취적인 인간이라서 인가, 대뜸 그 자리에서 소개를 시켜 주겠다며 끌고 나와 놀랐다. 

그 역시 귀신 따위 개소리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보기에도 그런 존재를 믿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우섭 역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렇게 순순히 앞장서다니.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지한은 잠자코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맞아?”

지한은 차를 세워놓고도 어리둥절했다. 번화가의 한복판이었다. 카페와 술집 옷가게 등이 즐비한 곳으로 젊은 사람들이 화려한 차림으로 지나고 있었으며 최신 유행 음악이 시끄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딜 보아도 점집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평범한 가정집조차 보이지 않았다.

“응. 조심해서 올라와. 여기 계단 좁다.”

그가 지한을 끌고 온 곳은 지극히 평범한 카페였다. ‘피에타’ 라는 이름의. 출입문 곁에 조그맣게 ‘사주, 타로 점 봅니다.’ 라는 말이 적혀 있기는 했다. 여전히 떨떠름한 기분으로 지한은 우섭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는 조명이 조금 어두웠고 넓지 않은 홀에 편안해 보이는 소파가 몇 개 있었다. 손님은 적었으며 음악은 나른하고 조용했다. 

정말 평범한 카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한은 점점 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오는 사이에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것도 아니었는데.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가 보지도 않고 인사를 했다. 삼십대 초반, 중반쯤 되어 보이는 미인이었다. 화장이 조금 진한 편이었지만 진한 화장이 잘 어울렸고 경박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난 또 누구라고. 우섭이구나.”

그녀는 조금 늦게 우섭을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인사조차 생략할 정도의 친숙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누님. 혜석이 어딨어요?”

“어디있긴. 저기서 영업한다.”

그녀의 손질한 빨간 손톱이 가리킨 곳은 창가 쪽 테이블이었다. 앳된 여학생의 무리에 남자 한명이 섞여 있었다.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에 피어싱을 한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함께 어울려 있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오빠, 진짜 잘 보는 거 맞아요?”

그들은 한창 얘기에 빠져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아마도 이 청년이 점을 봐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카페 앞에 쓰여 있는 문구 그대로. 그런 가게는 요즘 흔했기 때문에 이채로운 장면은 아니었다.  

“맞다니까. 아가씨는 서른 전에 남자가 한명도 없어. 그냥 포기하고 열심히 돈이나 벌어두는 게 어때?”

“진짜예요? 진짜? 아, 진짜 어떻게 서른 전에 남자가 한명도 없냐구요. 내 나이가 몇인데. 오빠 사이비죠?”

“뭐야? 너 그러다 혼난다.”

“그러게. 듣는 사이비 기분 나쁘게.”

설마 했는데, 아마도 우섭은 이 청년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청년이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으로 우섭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웃는 얼굴이 귀여운 인상이었다. 아가씨들이 맘에 들지 않는 점괘에 핀잔을 주면서도 계속 웃고 떠드는 이유를 알 법했다. 그 또래 아가씨들이 좋아할 만한 인상과 분위기였다. 

“미안한데, 사이비 좀 빌려 갈게요. 아가씨들.”

우섭은 그들의 대화에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고는 웃으면서 청년의 팔을 끌어 당겼다. 

“참나. 사람을 듣보잡이 취급 하냐. 진짜배기를 몰라보고들…….”

“장사를 그렇게 해서 쓰냐. 좋은 말도 섞어 가면서 해야지.”

“흥. 그렇다고 아닌 걸 기라 말해? 근데 넌 왜 갑자기 왔어?”

“지난번에 말했던 친구 데려왔어.”

“아아. 그?”

지한은 그들이 대화를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섭과는 막역한 사이 같았는데-아무리 봐도 연하인데 너 라고 까지 하는 걸 보니-지한으로선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섭과는 고등학교 졸업 후 소원히 지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둘 사이 자신의 얘기가 오갔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우섭은 이 사람에게 왜 자신의 얘기를 했을까. 하지만 일단은 통성명이 먼저였다. 인사를 해야 할 듯한 분위기였다.

“윤지한이라고 합니다.”

“됐어. 동창인데 말 편하게 놔.”

지한이 평소의 버릇대로 깍듯이 인사를 하자 우섭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말렸다. 고개를 드니 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청년으로부터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나 몰라? 아무리 같은 반인 적이 없어도 그렇지. 나 학교에서 유명했는데.”

지한은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알겠다. 지한에게는 어차피 길게 사귄 친구가 몇 없었다. 우섭이 고등학교 동창 중 유일하게 연락이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학교 때도 친구가 많지는 않았으니 동창이라고 해도 얼굴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지만 동창이란 말이 여전히 어색하고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대여섯 살은 어려 보였다. 아직도 수다 떨기에 여념이 없는 여대생들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런데 동창이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우리 학교 나온 사람 중에 나 모르는 사람도 다 있네. 별일이다.”

“얘는 모범생이었으니까. 공부만 해서 모를 거다.”

“야, 나도 열심히는 다녔어.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그랬지.”

“그래. 그러냐.”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에도 지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봐도 어려 보이는데. 심한 동안인 걸까. 

“근데 정말 내 이름 안 들어봤어? 양혜석.”

“전혀.”

지한이 그의 어려보이는 외모에 의문을 갖는 것처럼, 그 역시 지한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의아한 모양인지 또 다시 물어왔다. 또 한 번 모른다는 대답을 듣자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듯 했다. 그래도 어쩐지 아쉬운 표정. 그는 다시 지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반가워, 동창. 앞으로 잘 부탁해.”

무엇을 부탁한다는 말인지는 몰랐지만 지한은 그가 내민 손을 엉겁결에 붙잡았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었다.

*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이놈이 뭐라고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나 이상한 사람 아니거든.”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지한은 지금의 상황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놀라운 점도 여러 가지였지만 어디를 중점으로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어색함과 달리 나머지 두 사람-우섭과 혜석은 어떤 긴장도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우섭은 전화를 받는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다.   

“아……. 네.”

“거참. 말 놓으시라니까요. 학교 졸업장이라도 보여줘야 말을 놓으시려나.”

아무리 봐도 동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제일 의문스러운 점은 왜 자신이 혜석과 마주 하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동창이기때문에 일부러 소개하려고 데려온 것은 아닐 테고. 짚이는 거야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일단 시원한 거 마시고 할까. 이집은 차 종류가 맛있거든. 우리 누나가 하는 가게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진짜 맛있어.”

“야. 가게 홍보 하지 말고, 대충 가져와.”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우섭이 지한의 옆에 앉으며 대신 대답해주었다. 지한은 그가 돌아와 차라리 반가웠다. 상대는 붙임성이 좋은 편인 듯 했지만 지한은 그렇지 않았다. 예의상이라도 말을 붙일 수는 있었지만 요즘은 그런 여유도 없었다. 

“알았어. 그동안 저 친구 긴장 좀 풀어줘. 뭐라 한 거야 대체.”

혜석은 우섭의 어깨를 툭 치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긴 했지만 둘 사이는 각별하고 친밀해 보였다. 카운터에서 지한과 우섭을 맞아준 여자와 혜석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누나라는 걸 보니 가게의 사장과는 남매간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지한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우섭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던 거 아니냐. 일부러 피해줬더니 왜 입 다물고 있어?”

우섭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쪽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말뜻을 지한은 늦게 알아들었다.

“그럼 저 사람이·····.”

“맞아. 그런데 무당은 아니고, 뭐 얼추 비슷한 거야.”

분명 아까 아가씨들의 운세를 봐주고 있긴 했지만, 사실 그런 것이야 별 능력이 없이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지한은 그를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납득하지 못하고 멍한 채 멈춰있는 얼굴을 향해 우섭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저 녀석 외할머니가 유명한 무당이었거든. 대대로 그 집 딸들이 신기를 물려받는데 엉뚱하게도 외손자한테 왔다고 하더라. 그래서 쟨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걸 보고 이상한 말을 했어. 학교에서도 유명했고.”

지한이 그런 쪽에 가지고 있는 지식은 지극히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섭의 설명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 얘기는 한번쯤 들어보곤 하는 일들이었다. 대를 물리는 신내림 같은 것. 간혹 설명 안 되는 일을 겪는 사람들. 

“그래. 힘들었겠네.”

할 말이 없어 그저 성의 없는 대꾸만 하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은 여전했다. 유명함의 의미가 그런 것인가. 지한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얼핏 무언가 떠오를 듯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없었다. 그는 어차피 그런 가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성적을 유지하는 일만으로도 빠듯했다. 아니, 사실 일부러 성적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다. 다른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감히 왕따도 못시킬 정도로 대단했거든. 양혜석 머리털만 건드려도 어딘가 부러진다는 말까지 있었으니까.”

제법 무시무시한 얘기를 하면서도 우섭의 표정은 여유 있었다. 마치 어떤 무용담을 얘기하는 듯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지한의 어깨 너머로 향해 있었다. 얼핏 보니 혜석이 아까의 아가씨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말해두겠는데 난 귀신이니 뭐니 안 믿는다. 난 그런 거 본적도 느낀 적도 없고……. 정말 있다 해도 그냥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하게 변해서 엄포를 놓는다. 물론 세상엔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여기 까지 데려와서 하는 말치고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럼 날 왜 데려왔어?”

“귀신은 안 믿지만 양혜석이는 믿으니까.”

모순투성이의 말이었지만 어쩐지 이해가 갔다. 이상하게도.

“국화차는 불면증에 무지 좋다.”

혜석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불면증이란 말에 흠칫해 고개를 드니 그는 지한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마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밤에 못자는 거 같아서, 아냐?”

“맞긴 한데……. 고맙습니다.”

“진짜 고지식하시네. 또 존댓말.”

어떻게 알았을까. 얼굴에 표시라도 나는 걸까. 내민 차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쉽게 넘어가질 않았다. 그의 눈은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면서도 속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어쩐 일인지 우섭마저 당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맞았다. 둘이 얘기 하란 뜻인 것 같았다. 

“있지. 그쪽 얼굴, 사흘밤낮을 뛰어온 사람 같아.”

마음의 틈을 슬그머니 벌리고 있던 손길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그의 말과 함께. 지한은 놀라서 혜석을 바라보았다. 그 말은 불면증에 대해 말할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피부 속을 파고들었다.

“꼭 쫓기는 사람 같다구.”

“…….”

“괜찮아. 여기엔 ‘아무도’ 오지 않아. 마음 놓고 얘기 해봐.”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지한도 우섭과 역시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거짓을 말하고 있거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짜였다. 무엇의 진짜라고는 딱히 알 수 없었지만.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남자는 나와 동생 사이에 있던 일들을 너무나 상세하게 알고 있었어. 정말 본 것처럼, 아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지.”

지한은 그에게 천천히 얘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얘기 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만 추려서. 그렇기 때문에 지한의 목소리는 느리고 신중했다. 어느새 지한의 말투는 한결 편하게 변해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말하는 내용은 불편한 것들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잘 하는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분명 다른 얼굴인데 표정이 정말 죽은 동생 같단 느낌이서, 자꾸만 동생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난 동생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 

그때의 느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목소리가 떨려왔다. 얼굴 근육이 경련하고 가슴이 뻐근하게 저며 왔다. 그 소름끼치는 충격은 몇 번을 마주해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마 다음번에 마주하게 되더라도 자신은 똑같은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었다.    

“들어봤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걸 보통 ‘빙의’라고 하거든. 근데 그게 그렇게 흔한 일이 아냐. 단순히 귀신을 본다는 것하곤 또 틀려서,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얘기를 모두 들은 혜석의 얼굴은 처음보다 무겁게 변해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가벼운 느낌이 중화되어 그는 모호한 색을 띠고 있었다. 하는 말 역시 정확한 것은 없었다. 당사자가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나도 진짜로 본적은 몇 번 없고, 봤던 것도 엄청 오래전이거든. 말로만 들어선 잘 모르겠어.”

“아, 그래.”

지한은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저 얘기 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마음의 무게가 덜어진 기분이었다. 적어도 혜석은 지한의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지한이 하는 얘기는 보통사람에게라면 절대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한에게는 혜석이 얼마나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거짓말 같은 얘기를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지한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해결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근데 이상하단 말야. 빙의가 되더라도 그런 건 좀 힘들다고 보거든.”

“어떤 게?”

“그렇게 자주,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말야. 보통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을걸. 그 사람 괜찮아? 어디 아프거나 하지 않아?”

술에 취해 쓰러진 적은 있지만 아픈 일은 없었다. 아프긴커녕 힘이 넘치는 듯 했다. 그 힘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휘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빗속을 뚫고 걸어오고도 떨지도 않을 정도로 건강한 건 분명했다. 얼핏 마른 듯한 몸도 실제로 만지거나 가까이서 보면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것 같진 않은데, 평소엔 그냥 멀쩡하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자식은 뇌에 문제가 있잖아.”

가만히 듣고 있던 우섭이 고까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혜석이 그런 그를 불만스럽게 노려보았다.   

“넌 좀 빠져있어. 그리고 또 뭐 없어?”

“없어. 그냥 평소엔 별다른 게 없어서, 게다가 기억도 있다고 했던 것 같고…….”

“빙의된 동안의 기억이 있다고?”

그런 것 같았다. 본인이 그렇다고 말했으니까. 그것은 마치 하나의 몸에 두개의 인격이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다. 혜석은 기막힌 듯 잠시 웃었다. 그러나 그의 기막힘의 이유를 알 길은 없었다. 묻고 싶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혜석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일종의 전문가라 할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섣불리 아는 체를 하기도 먼저 물을 수도 없었다. 사실 말하면서도 지한은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모두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만나게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들은 걸로는 정확히 모르겠어.”

“보면 알 수 있는 건가.”

“아무래도. 그렇지만 본다고 해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 내가 퇴마사 같은 것도 아니고 하니까.”

혜석은 겸연쩍은 듯 말하며 웃었다. 지한도 딱히 그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영혼의 존재를 불신하는 그에게 그런 일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다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이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님 정말 인지 안다면, 똑같은 불행이라고 해도 아는 편이 좀 더 대처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 지난번엔 잘 한다고 큰소리치지 않았냐.”

얘기가 끝나가는 기미가 보이자 내내 입이 근지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우섭이 한마디 했다. 혜석도 지지 않고 맞받아 쳤다.  

“누가 이런 건 줄 알았나. 난 이런 건 잘 못해. 무섭단 말야.”

“무섭긴. 남들은 널 더 무서워한다.”

시간이 늦어 지한은 먼저 일어나기로 했다. 우섭은 더 있다 갈 생각이라고 했다. 지한은 끝까지 그를 기억하진 못했다. 같은 학교에 다녔다고 해도 행동반경이 다르면 모르고 지내는 사람도 많은 법이었다. 

이런 상황에 만나지 않았다면 혜석은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오히려 그는 지한이 아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욱 좋은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연락처를 알려주며 언제든지 필요할 때 불러내도 좋다고 했다. 헤어지기 전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몇 마디 덧붙였다.

“내가 보기엔 둘 중 하나야. 그 사람이 엄청 강한 영매체질이던가. 아니면 정말 완벽한 거짓말을 하고 있던가. 아니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해.”

혜석은 식어 버린 차를 후르륵 마시곤 손도 대지 맞은 편 자리를 바라보았다. 기껏 권한 차를 마시지도 않고 떠난 손님을 생각해 보며. 안타깝게도 지한은 그를 기억못한다고 했지만 혜석은 그를 몇 번 스친 적이 있었다. 우섭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 친분이 전부임에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인상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보통 아이들보다 채도가 무거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라 정말 까맣게 보였다. 그 까만 그림자 때문에 보고 싶은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혜석의 곁에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남자가 자신의 누나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섭섭아. 니 친구 말야.”

그는 누나가 손님을 맞으러 일어나길 기다려 우섭에게 말했다. 속으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 심각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아들만 내리 다섯인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그의 아버지가 농담처럼 섭섭해서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것을 들은 혜석이 이후로 부르는 별명이었다.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싫어하는 걸 알기 때문에 일부러 놀리기 위해 부르기도 했지만 지금 것은 그저 습관성이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내가 나이가 몇인데…….”

험악한 표정으로 불만을 말하는 것을 무시했다. 별로 무섭지도 않고. 혜석은 그보다 다른 것이 더 신경이 쓰였다.

“니 친구. 좀 위험한 것 같아.”

본인이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아닌 듯 태연하게 대했지만 그는 지한이 이 가게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얘기를 하고 눈을 마주 하고 있을 동안 그 예감은 더욱 명확해 졌다. 우섭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혜석을 바라보았다. 조금 진지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 심각한 얼굴도 아니었다. 

우섭도 사실 궁금한 점이 많았다. 그라고 친구가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요 몇 달 사이의 변화를 꾸준히 지켜본 그였다. 본인에게서 들을 수 없어서 차라리 혜석에게 데려온 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약간의 기대와 걱정을 숨긴 채 그는 일부러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 뭐라도 보이든?”

“그게, 그러니까 잘 안 보여.”

우섭은 김빠진 기분을 얼굴에 여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혜석은 실망한 표정을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안 보이니까 더 걱정된다구. 무서워.”

*

초저녁이긴 했지만 대문은 열려 있었다. 지한이 이 집을 오간 며칠 동안, 매번 그랬다. 올 사람이 있어서 일부러 열어놓은 것일까. 열려있는 대문을 닫고 작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들어갔다. 지한의 본가는 더욱 넓은 정원이 있었지만 이 집처럼 음침하진 않았다. 아마도 전혀 손질을 하지 않은 탓이리라. 하긴 이 집 어디에 자신이 마음 편하게 생각할 만한 게 있기나 할까.

긴장한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면 늘 그랬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문을 열자마자 달려든 적도 있으니 당연한가. 게다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썰렁한 거실엔 초저녁의 햇살이 짙게 들어서 있었다. 짙은 주황빛 바닥 위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감정 없는 딱딱한 목소리였다. 이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걸음을 옮겨 거실에 완전히 들어선 후에야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았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후는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파에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텔레비전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한은 그의 곁에 다가서지도 돌아서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아는 체를 하기도 하자니 상대가 너무 집중한 채였다. 무엇일까. 미약한 호기심에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엔 당분간 아무소리도 없이 하얀 눈밭이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카메라는 답답할 정도로 그 하얀 공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티끌 없는 눈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하얗다. 이윽고 카메라는 위로 올라가 회색빛 하늘을 비추었다. 다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화면 밖에선 얼핏 매미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제야 지한은 그것의 정체를 어렴풋 알았다.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그것은 아마도 민한이 만든 것이 틀림없다 생각되었다. 고작 오지의 눈밭을 촬영한 화면이었지만 그런 느낌이 선명히 떠올랐다. 한없이 고요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지한의 심장은 자꾸만 빠르게 뛰었다. 겨우 이런 것에 동요하는 자신이 싫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남자의 얼굴은 표정이 없는 듯 했으나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눈물이 표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이상한 남자의 눈물을 보는 게 벌써 두 번째인가.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인간이었다. 그것이 병적일 정도로 보이는 사람. 지한에게는 죽어도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었다.

“멍청히 서서 뭐해?”

물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의미를 잃고 사라졌다. 이후는 대충 얼굴을 훔치고 붉은 기운이 남은 눈으로 웃었다. 그는 자신이 조금 전까지 울고 있었단 사실을 딱히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 지금은 없으니까. 안심하라구.”

무엇이 없는 지에 관해서는 금방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대로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지한에게는 그의 존재 또한 불편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뭘 보고 있었어?”

지한은 알면서도 질문했다. 여전히 화면을 움직이고 말하고 있었다. 이후는 다시 그 화면을 바라보았다.   

“엄청 추웠어. 강원도 어디 산골이었는데, 이름도 까먹었군. 괜히 따라 나섰다가 돌아와 감기를 일주일이나 앓았어. 망할……. 그래도 더럽게 멋있긴 했지. 좋았어.” 

말은 거칠지만 목소리는 제법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눈에 아까와 달리 눈물은 없었다. 어느새 눈물이 사라진 자리에 오히려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평소 보았던 비릿함이나 광기가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모르겠어.”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당신하고 민한이 사이를 잘 모르겠다구.”

이후의 시선의 그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그 질문에 답하듯 지한은 망설이던 말을 뱉어냈다.

“녀석은 이 집에 자주 찾아왔지. 정말 자주. 난 열쇠를 주는 대신 문을 열어놨어. 버릇이 되어서 찾아올 사람이 없는 지금도 문을 열어놓고 살아.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야.”

항상 문이 열려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였나. 하지만 지한이 물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의문스런 표정을 무시하고 그는 자신의 얘기를 했다. 

“난 걔가 찾아오는 게 좋고 즐거웠는데, 사실 녀석에겐 내가 도피처였어. 평생을 누구하나만을 지독하게 짝사랑했거든. 윤민한은 자기 형에게 상처 받고 힘겨울 때면 날 찾아왔어. 말은 안했지만 나중엔 알겠더군.”

민한은 자신의 앞에선 늘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울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라고 감정이 없는 사람일리 없는데 말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지한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난 사실 윤민한의 형이란 사람을 무작정 미워했어. 녀석은 한 번도 원망의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아니 그래서 그런 마음을 품었는지도 모르지. 답답하고 짜증나고 화가 났어. 얼굴도 본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괜히 투기를 한 거지.”

그럼, 질투했다는 소린가. 나를 질투해서……. 지한의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질투가 아냐. 난 녀석이 누구를 좋아해도 상관없었어. 그렇다고 나에게 소홀했던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싫었던 거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당신은 그저 동생을 싫어했을 뿐인데. 하지만 난 그런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거든. 왜 난 이렇게 좋아하는 인간을 당신은 찬밥 취급하나. 부당하다고만 생각했던 거야. 당신이 나한테 전화를 했을 때만 해도 난 당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어. 난 그러려고 당신을 만나러 갔는지도 몰라.”

당신을 죽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하는 사람도 있던가. 다행일지 몰라도 그것은 과거형이었다. 죽이고 싶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도 그래?”

그래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건가. 지한은 그런 생각을 당연하게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해가 갔다. 이후가 자신에게 했던 일들. 그리고 그 모호하고 괴상 쩍은 행동들. 그러나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지금은 안 그러니까. 지난 일이야.”

지난 일이라고 해도 고작 한 달도 안 된 일이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변했다는 건지 지한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처음에도 별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러 나왔다는 사람 같지 않았던 것이다. 

“여하튼 놈은 내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자 애인이었어. 라고 하면 설명이 돼? 난 그런 사람을 잃었어. 슬프다는 말론 설명이 안 돼.”

질문에 대한 답을 늦게 하는 것은 여전했다. 들어도 알 수 없는 답인 것도 여전했고. 그는 텔레비전 전원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등 뒤로 들어온 빛으로 그의 얼굴엔 온통 짙은 그림자가 덮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고 움찔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는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가. 오늘은 별로 안 내켜.”

지한의 옆을 비켜 걸어가던 그가 잠시 비틀거렸다. 손을 뻗어 어깨를 붙잡았다니 확 느껴지는 열기에 놀랐다.  

“괜찮아?”

“괜찮지 않은 게 더 좋지 않나.”

지한이 내민 손을 가만히 떨쳐내며 그는 웃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웃음. 아니 이쪽이 원래 그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멀리 있을 땐 몰랐으나 가까이 있으니 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손목을 통해 느껴진 열기만 해도 분명. 열이 있는 건가. 문득 지난번 혜석이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보통 그런 식으로 죽은 사람을 받아들이면 몸도 정신도 남아나지 않을걸. 

심각하고 진중하던 목소리였다. 진짜라면……. 오지 말라고 했던 그 며칠간, 사실은 몸이 좋지 않았던 걸까. 좋지 않은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열이 있네. 일단 가서 눕지 그래?”

그다지 걱정 하고 싶은 인간은 아니었지만 앞에서 비틀대고 있으니 외면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나누던 얘기도 신경이 쓰였다. 다시 팔을 붙잡았을 땐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지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신경 쓰여 손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 날 죽여 버리고 싶지. 죽이고 모든 걸 끝내고 싶지?”

죽이기 전에 먼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그는 웃고 있었다. 지한은 그의 말을, 시선을 외면 한 채 그를 부축해 침실로 들어갔다. 

대충 시트를 덮어주고 창가에 다가가 커튼을 쳤다. 제대로 말을 하는 걸로 봐서는 병원을 갈 정도의 위중한 병은 아닌 모양이었다. 끽해야 몸살 일 테니 쉬면 나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약이라도 사다주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지한은 이후를 방에 눕히고 어지러운 방안을 대충 치웠다. 그리고 주방에 들어가 물병 채로 가져와 침대 협탁 위에 놓았다. 열이 있는 사람은 물을 찾기 마련이었으므로. 문득 보니 이후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움직이는 내내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신 오늘은 좀 평범한 것 같아.”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 꺼낸 말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보통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그저 짧은 감상이었을 지도. 그는 놀라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래? 고맙군.”

그것은 죽이고 싶은 눈도, 죽여주었으면 하는 눈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 매달리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렇다고 민한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후의 집을 나오는데도 그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차피 또 와야 한다는 실망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자신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걱정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잘 됐다고 생각해도 당연한 것을. 차에 오르기 전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알았다. 전화는 아니고 문자 수신음이었다.

‘말로만 그럴 거야?’

민혜였다. 며칠만의 답장이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화가 풀렸다는 신호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등 뒤에 두고 온 일들은 생각하면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제자리,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체일 뿐이었다.  

지한은 누군가의 조언대로 꽃을 사서 그녀의 집근처로 갔다. 장미꽃 다발. 가끔 생일이나 기념일 따위에 꽃을 산적은 있었지만 아직도 그는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한다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익숙한 남자 쪽이 더 이상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자신은 보통일 것이다. 

조수석에 놓여있는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자니 반성과 감상이 동시에 떠올랐다. 벌써부터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별일이네. 진짜 꽃을 다 사오고. 역시 싸움도 가끔 해줘야 하나봐.”

원래도 잘 웃는 여자였지만, 지금 눈앞의 웃음은 정말 화사한 웃음이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무표정한 표정이었던 민혜는 지한이 손에 든 물건을 발견했을 때부터 느슨해지더니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건넸을 때는 이윽고 함박웃음으로 변했다.

“너도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럼. 꽃 안 좋아하는 여자가 어딨다구.”

또래의 여자들보다 더욱 어른스러운 마음 씀씀이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련된 외모나 매너를 보면 더더욱. 하지만 민혜는 지한의 의문을 한마디로 해결해주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나 배경에 비하면 겸손하고 평범한 여자였다. 그런 평범한 여자를 어렵게 생각하는 자신이 이상한 것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지난 며칠 동안 하지 못했다니,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들어갈래?”

“아니. 됐어. 늦었으니까.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해.”

“뭐야, 여기까지 와서.”

자고 가면 더욱 완벽한 화해모드가 조성되겠지만 아쉽게도 내일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게다가 지한은 얼마 전부터, 그러니까 김이후란 남자와 이상한 관계가 되고 부터는 그녀와 섹스 한 적이 없었다. 한밤중에 찾아왔을 때도 술에 취해 쓰러져 잠든 게 고작이었다. 

의식적인지도 모르고 일부러 일수도 있었다. 아무리 마음에 없는 일이었다 해도 그는 그 때문에 그녀에게 떳떳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의 떳떳함은 언제 지울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다. 절망이라기보다는 그저 막연한 회의가 느껴졌다.

“대신 주말에 근사한데 가자.”

“좋아. 대신 취소하면 나 또 화낼 거다? 그땐 꽃 한 다발로는 안 돼.”

“화 풀린 거야?”

표정이나 태도를 보아 분명히 알 수 있었지만 지한은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 민혜가 지한의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이런 거까지 받았는데 화 풀어야지 어쩌겠어.”

“고마워.”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처럼 답답하고 우울한 인간을 좋아해주어서, 곁에 있어주어서,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믿어주어서.  

“그렇지만 앞으로는 나한테 말 좀 많이 해줘. 자긴 너무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 물론 성격인건 알지만 서운해 질 때가 많아. 앞으론 한마디 할 거 두 마디, 세 마디로 해줘. 결혼할 사람들이잖아 우리.”

그녀의 말은 모두 옳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한은 이 관계의 위험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민혜라면 분명 어떤 남자와 있어도 잘 해나갈 것이었다. 

“다음에 우리 어머니 뵈러 갈래?”

“어머니라면……. 집에 계시잖아?”

“아니. 날 낳아준 어머니.”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다.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와 상의를 했을 때도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쉽게 수긍했다. 하지만 지한은 지금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모두 말할 순 없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하고 싶었다. 

“그래. 그랬구나.”

의외로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약간 표정이 경직되어 있다 금세 풀어졌다. 성격 탓인지, 아니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건지. 오히려 당황한 쪽은 지한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살짝 웃었다. 

“사실 나 조금 눈치 채고 있었다고 하면 어쩔래?”

“그랬어?”

“응. 자기 어머니랑 사이가 단순히 나쁜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어. 말해주지 않아서 그냥 기다리자 한 건데……. 드디어 말해주는구나.”

다른 사람에게도 보일 정도로 자신과 어머니의 골이 깊은지 몰랐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정말 친 모자간이라도 심각하게 사이가 좋지 않은 집도 여럿 보았기 때문에, 게다가 적어도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자신에게 차갑지 않았다. 그런 척을 해왔다.

“미안해.”

“됐어. 결혼하기 전에라도 말해준 게 어디야. 난 사실 자기가 끝까지 말 안 할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거든.”

괜찮다고 해도 괜찮지 않았을 것이다. 말하지 못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지한은 그녀에게 괜한 고민을 안겨준 것이, 그리고 앞으로 더 만들어 줄 것을 알기에 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친 어머니는 어디 사셔? 정말 내가 만나도 돼?”

“돌아가셨어. 아주 오래전에.”

그래도 그녀는 저토록 다정하게 웃어준다. 슬픈 얼굴을 한다.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털어놓아 마음이 가벼워 해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집으로 들어가는 민혜에게 흔들던 손을 내려놓자 잠깐 곁을 머물던 따듯한 기운은 끊겨 버렸다. 그리고 마음의 무거운 이유를 생각해 냈다. 

그 남자 괜찮으려나. 괜한 걱정이란 생각은 여전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스스로 거는 일은 다시없을 거라 생각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저 확인이나 하고 싶었다. 살아있나. 죽을병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혜석에게 들은 말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다. 

전화를 했다. 신호가 여러 번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단순히 귀찮아서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럴법한 사람이었다. 아니면 그대로 잠이 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루한 신호음을 당분간 듣고 있던 지한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째서인지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깜짝이야.”

별로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남자는 서 있었다. 지한은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전화도 받지 않기에 나와 보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났을 때와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서 있기가 힘든 듯 벽에 팔을 기대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얼굴엔 웃음이었다.  

“간 줄 알았는데 웬일이야?”

“놓고 간 물건이 있어서.”

급조된 변명이었다. 지한은 다른 질문이나 말이 따라올까 싶어서 그대로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다행일지 몰라도 이후는 그를 잡지 않았다.

이후는 지한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그의 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이윽고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완전히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 켜지 않은 거실엔 미약한 불빛조차 없었다. 다만 그의 두 눈이 조용히 밖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이후는 방안으로 들어가기 전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약국로고가 박혀 있는 종이 봉투였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 문득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후의 손이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니, 그 곁에 떨어져 있는 작은 종잇조각 같은 것.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만져보고 한참을 들여다 본 후에야 알았다.

“꽃잎인가.”

붉은 장미 꽃잎이 유령 같은 남자의 손바닥 안에 가만히 내려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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