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Ⅰ(4) (4/11)

비록 거짓된 운명이라 할지라도 Ⅰ(4)

처음으로 알렉은 레너드와 알몸을 겹치고 있었다.

레너드의 피부는 뜨거웠지만 하반신의 욕망은 그보다 더 뜨겁고 사나웠다.

온몸에 입을 맞춘 레너드가 성기까지 입에 넣고 애무하자, 알렉의 입에서는 갈라진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성기가 흐물흐물 녹을 때까지 입과 혀로 농락하던 레너드의 입술이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입구로 옮겨갔다.

“…앗.”

생각지도 못했던 곳을 핥아 올리는 바람에 알렉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놀랄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자 알렉은 거의 패닉에 빠졌다.

레너드가 어째서 그런 곳에 손가락을 넣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레, 레너드….”

겁이 나서 레너드를 부르자, 레너드는 알렉이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몇 번이나 키스를 퍼부었다.

키스를 하면서 가르쳐주었다.

“여기로, 알렉은 나와 하나가 되는 거야.”

“하, 하나… 앗, 으읏….”

몸속에 있는 레너드의 손가락이 딱딱한 입구를 마사지하듯이 앞뒤로 움직였다. 가끔 손가락을 구부려 아무런 대비도 되지 않은 연약한 주름을 살짝 쓰다듬기도 했다.

손가락이 몸 안을 쓸어 올릴 때마다 어째선지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으음…, 후….”

가볍게 등을 뒤로 젖힌 알렉에게 레너드가 속삭였다.

“연결되는 거야, 알렉. 여기로….”

“아… 그런….”

꽉, 하고 손가락을 머금은 내벽이 오므라들었다.

레너드의 손가락 형태가 뒤쪽 입구로 느껴지자 알렉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거기로, 레너드의 것을…?

화아악, 하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그제야 알렉도 상황을 파악했다.

남자끼리도 몸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두려웠다.

애초에 지금 레너드가 손가락으로 풀고 있는 부분은 배설 기관이지 남자의 성기를 삽입하는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따금 다리에 닿는 레너드의 수컷은 알렉의 상상 이상으로 크고 단단했다.

정말로 레너드가 바라는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앗… 으응, 레너드….”

“괜찮아. 봐, 입구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어. 손가락을 하나 더 넣어도… 아아, 들어갔어, 알렉.”

조금씩 손가락 개수를 늘려가며 뒤쪽 입구를 넓혔다.

“싫어… 무서워….”

하지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레너드의 욕정으로 젖은 눈동자를 보면 알렉의 거부감도 수그러들었다.

―난… 레너드를 위해 태어난 거야.

부모님과 형들에게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고, 유일한 친구라고 믿었던 미즈키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지금의 알렉에게는 레너드의 목소리만이 현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무엇보다 미즈키라는 친구가 생기기까지의 길고 긴 시간 동안 레너드와 단둘이서 지내왔던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레너드는 알렉의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단순한 동생으로서 귀여워해 줄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바란다는 사실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사랑이나 애정 같은 진부하고 약한 것이 아니었다.

더 깊고 강한 연결 고리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 행위는 두 사람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너드… 좋아해.”

애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알렉에게 레너드도 나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래. 내가 진심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너뿐이야, 알렉.”

“…읏.”

이윽고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알렉은 부끄러울 만큼 다리를 활짝 벌린 자세가 되어 위로 올라온 레너드에게 매달렸다.

레너드의 뺨에 기쁨의 미소가 떠올랐다.

“귀여운 알렉, 넌 나만의 것이야. 나만의….”

레너드의 말, 기뻐하는 얼굴.

이것만으로 알렉은 살아갈 수 있었다.

알렉의 가슴도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자신들이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도, 거부감도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은 희열의 행위였다.

“응… 레너드. 난… 레너드만의 것이야… 아, 아앗―…읏.”

다음 순간, 뜨겁고 단단한 욕망이 아직 다 피지 못한 알렉의 꽃봉오리를 헤집었다.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열기를, 알렉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받아들였다.

아픔, 그리고, 열―.

레너드가 정성 들여 알렉의 몸에 준비 작업을 했지만, 파열하는 듯한 고통은 충격적이었다.

크고 단단한 레너드의 성기가 내벽을 한계까지 벌리면서 빈틈없이 파고들어 왔다.

“아…아, …아.”

알렉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레너드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잔뜩 굳어 있던 알렉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알렉.”

“읏… 응, 후… 레너드, 아.”

절박한 레너드의 신음에 억지로 벌어져 있던 알렉의 입구가 부드럽게 풀렸다. 알렉은 흐느끼듯 숨을 헐떡이며 레너드를 꼭 끌어안았다.

몸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 따위 이제 알 바 아니다.

아무리 잘못된 행동이라 해도, 음란한 행위라 해도 레너드가 알렉을 원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아니, 해주고 싶다.

레너드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라 해도 알렉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가슴 가득 복받쳐 오르는 사랑스러움 쪽이 절실했다.

“아…아…아아.”

“으읏… 전부, 들어갔어.”

괴로울 정도로 깊숙이 들어온 레너드가 알렉을 끌어안았다.

만족스러운 알렉의 숨소리가 귓불을 간질이며 알렉을 채웠다.

그렇게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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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을 연결한 뒤쪽 입구에서 레너드의 성기가 두근두근 맥박치는 것이 전해졌다.

온몸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믿을 수 없는 기쁨이 알렉을 휘감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로 이어진다는 말의 의미를, 몸과 마음 양쪽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열에 들뜬 것처럼 알렉은 자신의 감정을 속삭였다.

“레너드… 아아, 굉장해… 몸 안에서 레너드를 느낄 수 있어…. 나… 나, 레너드와….”

“그래, 이걸로 우리는 하나야. 오래전부터, 이렇게 알렉의 모든 것을 내 걸로 만들고 싶었어. ―움직여도 될까, 알렉?”

고개를 들자 레너드의 이마에 땀에 배여 있었다.

그래서 레너드가 사실은 당장에라도 허리를 밀어붙이고 싶은 충동을 알렉이 익숙해질 때까지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중하게 대해주고 있다.

이렇게 알렉과 하나가 되는 일은 레너드에게도 특별한 일인 것이다. 그것을 실감하자 알렉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레너드에게 사랑받고 있다니 자신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응… 괜찮아.”

알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며칠 동안, 레너드가 손으로 늘 기분 좋게 해주었던 것처럼 레너드도 자신의 몸으로 기분 좋아지길 바랐다.

쾌락을 느껴주길 바랐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느끼고 싶었다.

“알렉… 정말, 정말 귀여워.”

“아…아아, 레너드…!”

천천히 시험하는 것처럼 레너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단한 욕망이 알렉의 몸속을 깊숙이 찔렀다가 빠져나가고, 완전히 빠지기 직전에 다시 파고드는 움직임으로 변했다.

“아, 아, 아… 레너드….”

아픔은 분명히 있었다.

알렉의 여린 곳은 레너드같이 커다란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일 정도로 여물지 못했다.

그렇지만 레너드의 낮은 신음과 뒤쪽 입구를 쳐올릴 때마다 커지는 아찔한 쾌감에 알렉은 아픔보다 사랑받고 있다는 기쁨을 훨씬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 아, 이런 식으로 느끼다니….

원래 남자를 받아들이는 장소가 아닌 곳이 벌어지는 고통,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풀어놓은 내벽을 쓸어대는 쾌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몸 위에서 쾌락에 신음하는 레너드의 목소리가 괴로움을 잊게 만들었다.

좀 더, 좀 더, 알렉의 육체로 레너드가 기쁨을 느끼길 바랐다.

“아…아…앗, 레너드….”

“알렉… 읏.”

알렉은 레너드에게 매달리면서 금지된 욕망의 깊은 곳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읏… 레너드… 아.”

아직 몸의 열기가 식지 않은 알렉을 끌어안고 레너드는 온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알몸으로 안긴 채 알렉은 레너드와 나란히 숲 속 비밀 장소에 누워 있었다. 온몸이 레너드로 가득 차 있었다.

“괜찮아, 알렉?”

사랑스러운 듯이, 걱정스러운 듯이 레너드가 물었다.

레너드의 단단한 수컷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렸던 몸은 뻐근하고 아팠지만, 그보다 달콤한 기쁨이 더 컸다.

알렉은 아직 땀에 젖어 있는 레너드의 가슴에 코끝을 물고 응석 부리듯 대답했다.

“…괜찮아.”

“다행이다.”

레너드가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온몸을 가득 채운 충족감에 알렉은 만족스러운 한숨을 토해냈다.

시작하기 전에 그렇게나 겁이 났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자신의 전부가 레너드의 것이 되었다는 생각에 알렉의 마음은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뒤 레너드는 알렉을 안아 들고 냇물로 온몸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몸속에 손가락을 넣어 긁어낼 때는 참지 못하고 버둥거렸지만, 레너드가 힘주어 붙잡고 있는 탓에 도망칠 수 없었다.

“이건 안은 쪽 남자가 해야 할 일이야.”

그렇게 말을 하니, 남자끼리의 행위조차 알지 못했던 알렉은 레너드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서로 몸을 씻어주고 나서 레너드가 가져온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아니, 식사를 했다기보다 그저 음식을 씹고 삼켰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미 닭이 병아리에게 먹이를 주는 것처럼 레너드는 알렉에게 입을 벌리게 하고 음식을 넣어 주었던 것이다.

어린아이 같아서 어쩐지 창피했지만, 레너드가 즐거워 보여서 알렉은 뺨을 붉힌 채 입을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홍차를 마시고 싶다고 말하자 입으로 옮겨주었다.

모든 것이 꿈결처럼 달콤하고 기분 좋았다.

“내일도… 괜찮을까?”

레너드를 받아들인 것은 한 번뿐이었지만 첫 경험이었으니 부담이 컸다.

몸은 아프고 뻐근했지만 알렉은 망설이지 않고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알렉.”

레너드의 품에 안기면 그가 원하는 해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라고 생각하며 알렉은 레너드의 품속에서 손톱을 깨물었다.

“레너드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알렉보다 딱 10살 위인 레너드는 오래전에 대학을 졸업했다.

매년 알렉의 방학 동안에는 가능한 링컨셔의 매너하우스로 돌아오지만 두 달 내내 여기서 지내는 일은 없었다.

레너드가 매너하우스에 온 지 벌써 열흘 가까이 지났다.

랭스턴 백작가는 세인트 올즈리 후작가와 마찬가지로 사업을 하고 있었다.

랭스턴 백작가의 당주인 레너드에게 그리 오랫동안 휴가를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렉은 알고 있었다.

알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했던 레너드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사업에 참여했다.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어엿한 후계자로서 친척이 경영하는 회사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렉을 레너드가 무릎 위에 앉혔다.

레너드와 마주 보고 앉은 자세가 된 알렉의 코에 레너드가 가볍게 쪽 입을 맞췄다.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앞으로 2, 3일 정도일 거야. 하지만 너만 좋다면 런던에 돌아갈 때, 함께 가지 않을래?”

“…어?”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알렉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런던의 펜트하우스로 초대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레너드는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가능한 한 오래 알렉하고 같이 있고 싶어. 런던에 함께 가도 나는 일을 해야 해서 별로 같지 있어 주지 못할 테고, 지루할지도 모르지만… 난 알렉과 함께 있고 싶어. 조금이라도 오래.”

“레너드… 괜찮아? 정말로 가도 돼?”

일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알렉은 망설였다.

그러나 레너드는 사랑스러운 듯이 알렉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키스했다.

“당연히 괜찮지. 세인트 올즈리의 두 분도 내가 부탁을 드리면 너를 데려가는 걸 허락해주실 거야. 여름 방학 동안 쭉 같이 있고 싶어, 귀여운 알렉.”

“기뻐… 고마워, 레너드. 정말 기뻐.”

쭉 레너드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알렉은 행복해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레너드와 육체관계를 가지고 말았다는 죄책감도 행복함 앞에서는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거북하기만 한 저택에서 벗어나 정말로 좋아하는 레너드와 함께 있을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이 기뻤다.

“아… 레너드….”

키스가 점점 더 농밀해졌다.

알렉은 기쁨의 절정에 취해 있었다.

주말에 부모님이 돌아오시면 당장 부탁을 드리기로 했다. 그때는 레너드도 후작가로 오겠다고 말해주었다.

알렉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들뜬 마음에 용기를 얻어, 자신이 먼저 미즈키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숨을 내쉬며 열었을 현관문을 기분 좋게 열었다.

그래, 용기가 시들기 전에 미즈키에 전화를 걸어 다음 주부터 런던에 있는 레너드의 펜트하우스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분명 레너드는 바쁠 테니까 거의 밤에만 만날 수 있을 테지만,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 알렉은 가슴이 설레었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전화를 걸기 위해 알렉은 전화기가 있는 거실문을 열었다.

그때, 집사의 정중하지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지만, 알렉산더 님은 외출 중이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미즈키 님. 실례합니다.”

“…잠깐 기다려!”

통화를 끊으려 하는 집사를 알렉은 황급히 불렀다.

하지만 집사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다시 걸어야 해, 알렉은 수화기를 들려고 했다.

“안됩니다, 알렉산더 님.”

“뭐?”

집사가 알렉의 손에서 수화기를 가로챘다.

“글램스코트 백작가의 아서 미즈키 님에게서 온 전화는 바꿔 주지 말라는 후작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바꿔 주지 말라니, 설마….”

알렉은 얼이 빠져서 냉담한 집사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미즈키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전화를 했던 걸까?

“…미즈키가 전화를 건 게 이걸로 몇 번째야?”

알렉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손이 부들부들 떨릴 것 같았다.

집사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렉산더 님이 돌아오신 다음 날부터니까 조금 전 전화까지 몇 번째일까요. 오늘은 오전에도 한 번 왔으니 두 번째가 아닐까요.”

“두 번째라니….”

미즈키는 방학 다음 날부터 알렉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알렉을 바꿔 주지 않는데도 몇 번이나.

그랬는데도 자신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다니 너무하다.

아무리 알렉이라도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미즈키는 알렉을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은 집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기 내놔! 미즈키한테 걸 거야!”

“안 됩니다, 알렉산더 님.”

“…그럼 됐어. 다른 방에서 걸면 돼!”

알렉은 그렇게 소리치고 거실을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집사에게 팔을 붙잡혔다.

“이거 놔! 무슨 짓이야!”

“후작님으로부터 엄명을 받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까지 방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더니 알렉을 질질 끌면서 방으로 데려가려 했다.

“싫어! 이거 놓으라니까!”

알렉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런 식으로 저택의 사람에게 거역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처럼 미즈키가 전화를 걸어줬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처럼 된 게 분하고 화가 났다.

미즈키는 알렉을 잊지 않고 있었다. 친구로 지내주려 했던 것이다. 그런 친구를 떼어내려 하다니, 너무 잔인하다.

“알렉산더 님, 얌전히 계십시오. 후작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나중에 후작님께 벌을 받게 되셔도 좋으십니까!”

“…!”

알렉이 흠칫 떨면서 저항을 멈췄다.

싸늘한 아버지의 눈. 무시를 당할 수도 있고, 채찍으로 손등을 맞을 수도 있다. 어쩌면 레너드와 함께 런던에 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알렉은 입술을 깨물었다. 레너드와 런던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벌을 내리신다면…. 손이 떨렸다.

미즈키, 레너드….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알렉은 눈을 감았다.

―미즈키… 미안해.

저항할 힘을 잃은 알렉을 집사가 방으로 데려가 밖에서 문을 닫고 잠가버렸다.

알렉의 방에는 전화기가 없다. 당연히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알렉은 콧물을 훌쩍거렸다.

겁쟁이인 자신이 싫어졌다.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지도 못하고, 소중한 친구를 감싸지도 못하는 자신은 정말로 겁쟁이였다.

“레너드….”

알렉은 훌쩍훌쩍 울었다.

이런 알렉을 용서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레너드뿐이었다.

레너드라면 미즈키에게 전화를 걸어선 안 된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텐데…. 미즈키의 좋은 점을 알아줄 텐데….

“그렇지….”

알렉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레너드라면 미즈키와 통화를 해도 화내지 않는다. 분명 허락할 것이다.

알렉에게 친구가 생긴 것을 그렇게나 기뻐했으니까.

가족은 이해해주지 않지만, 레너드라면 이해해줄 것이다.

“레너드라면….”

알렉은 쓱쓱 눈물을 닦았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살짝 레너드의 저택으로 가서 전화 한 통만 걸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미즈키와 통화를 하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울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괜찮아.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미즈키는 변함없이 내 친구이고, 레너드 또한 누구보다 나를 아껴주고 있어.

그래,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어째서인지, 레너드에게 안긴 뒤 알렉의 몸속 깊숙한 곳에 단단한 심지가 생긴 것 같았다.

이리저리 휘둘리고, 울고, 도망치기만 했던 자신에게 마음을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싹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였다면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의 알렉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좋아, 해보는 거야.

알렉은 방을 둘러보고 침대 시트를 벗겨냈다. 가위로 적당한 폭으로 찢어서 한 줄로 길게 이었다.

그것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잘라버린 시트를 대신할 것은 미안하지만 레너드에게 받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속여 넘기면 알렉이 방을 빠져나가 레너드의 저택에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집안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높다….”

알렉은 베란다에서 지면을 내려다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려워지는 높이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알렉은 예전의 나약한 알렉이 아니었다. 레너드가 있는 것이다.

알렉은 2층 자신의 방에서 직접 만든 밧줄을 타고 빠져나왔다.

“―레너드 님, 세인트 올즈리 후작가의 알렉산더 님이 오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서재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레너드는 고개를 들었다.

“알렉이?”

“예, 다치신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레너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창밖을 보니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오늘 알렉을 안은 사실을 들켜버린 걸까? 그 무례한 집사나 다른 고용인에게.

하긴 만약 그렇다면 집사를 처리하면 그만이다. 수습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레너드는 빠른 걸음으로 알렉에게 갔다.

알렉은 거실 소파에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손과 다리에 찰과상이 생긴 것이 보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저택을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빨리 상황을 파악해서 알렉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어야 한다.

레너드와 달리 귀여운 알렉의 마음은 비눗방울처럼 위태로우니까.

“어떻게 된 거야, 알렉?”

“레너드…!”

레너드를 본 알렉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더니 곧바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와락 매달리는 알렉을 레너드는 사랑스러운 듯이 끌어안았다.

여기까지 뛰어온 탓인지 알렉의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 달콤한 냄새가 레너드의 야성을 자극했다.

레너드를 자극하는 상대는 옛날에도 지금도 알렉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낮에 처음으로 안았던 몸이다.

지금 다시 정복할 수는 없었다.

알렉은 그저 욕망을 쏟아낼 뿐인 놀이 상대와는 달랐다.

애태우지 않아도 알렉은 레너드의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시간을 들여서 애정을 쏟았다.

“레너드, 미즈키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계속 전화를 걸었는데 아버님의 명령으로 바꿔 주지 않았던 거야…. 처음 생긴 친구인데….”

분한 듯이 하소연하는 알렉의 머리카락을 레너드는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가엾게도, 알렉. 모처럼 친구가 전화를 했는데 바꿔 주지 않는 건 너무한걸. 정말이지, 너희 집 사람들은….”

새삼 질렸다는 듯이 레너드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응… 맞아, 레너드.”

상냥한 공감의 말에 알렉이 안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레너드만큼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알렉의 모습에 레너드는 미소 지었다.

―정말 넌 어쩌면 이렇게 귀여울까, 알렉.

어딘가에서 넘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알렉의 얼굴은 지저분했고 군데군데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런 모습도 레너드에게는 사랑스러운 천사 같이 보였다.

귀여워서 참을 수 없어진 레너드는 알렉의 더러운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알렉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나, 너무 더러운데….”

“왜? 네 몸에는 더러운 곳 같은 거 없어. 전부, 예뻐.”

안경을 살며시 벗기고 입술에도 키스를 했다. 그리고 품 안에 가두듯이 꼭 끌어안았다.

“자, 샤워하고 다친 곳을 치료하자. 한숨 돌리고 나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 돼.”

빙긋 미소 지으며 말하자 알렉은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이 벗겨진 탓에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알렉의 손을 잡고 욕실로 데려갔다.

―역시,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오늘 낮에 처음으로 남자를 알게 된 몸을 보며 레너드는 옷 벗는 것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남몰래 불씨를 키우고 있었다.

불순한 마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알렉을 품에 안는 날만을 기다려 왔던 것이다.

소망이 이루어진 뒤,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평생, 이 품속에 가둬두고 싶을 정도로.

욕실에서 또다시 레너드에게 안긴 알렉은 그 황홀함에 미즈키에게 연락하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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