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카의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장석민의 물음에 사이프가 귀찮다는 듯이 120만이 조금 넘는다. 하고 대꾸했다.
「농담하지 말고 진짜로 말씀해주세요.」
「내가 왜 너하고 농담을 해야 하지?」
사이프가 대번에 인상을 쓴다. 장석민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일어난 의심은 쉽게 종식되지 않았다.
장석민은 자신이 탄 배가 호수에 떠 있는 호화 여객선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땅에 있는 것처럼 흔들림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리 없었다. 그 착각은 선상과 연결된 문을 연 후 산산조각 박살이 났다.
배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컸다. 몹시 컸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큰 컨테이너선이었다. 유학 생활을 통해 외국물을 먹을 만큼 먹은 장석민이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장관에 서울에 처음 올라온 시골 쥐처럼 한참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듣자하니 배에 선적해두었던 컨테이너를 하역하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동물 우리에서 벗어난 장석민은 다행히 그 하루를 기다리지 않고 내릴 수 있었다. 항만의 규모 또한 어마어마했다. 인구 120만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위엄이 아니었다.
하일은 중요한 회의가 있다며 은색 마이바흐를 타고 사라졌다.사이프가 장석민의 감시를 맡았다. 검은색 벤트리에 태워진 장석민은 사이프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일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하르 님께 보내질 거다.」
「언제요?」
「오늘 저녁에.」
자하르라는 놈에게 가기 전에 이곳을 탈출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차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으려나.
장석민은 차창 밖을 흘끔거렸다. 서류를 보고 있던 사이프가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를 던졌다.
「혹시라도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냥 지금 여기서 죽여주마.」
장석민은 즉시 몸을 바로 했다.
차가 달리는 내내 사이프는 장석민에게 시선 한 번 돌리지 않았다.그가 자신을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장석민은 단박에 알아챘다.
「저기……, 뭣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켜 하건 아니건 궁금한 것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ㅑ. 사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적어도 닥치라는 말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기에 장석민은 용기를 내어 질문을 시작했다.
「자하르 님은 어떤 분입니까?」
「훌륭하신 분이다.」
사이프가 모시는 사람은 2왕자인 하일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는 것은 8왕자인 자하르가 정말, 훌륭하다는 뜻이었다.
장석민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대단히 실례되는 질문인데 혹시 자하르 왕자님은 신체적으로 불편한 부분이…….」
그가 주저주저하며 잇는 말에 사이프가 단호하게 끊어냈다.
「없다. 신체 건강하신 분이다.」
고자설이 와해되었다.
「여자를 싫어하는 분이신가요?」
「오래된 종교적 전통을 몸소 실천하시려고 그러시는 것일 뿐.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삿된 이유는 없다.」
몸도 정신도 문제가 없는데 여자를 거부한다니.
「……남자를, …….」
모기 같은 목소리로 가장 가능성 높은 이론을 제시하려던 장석민은 자신을 죽일 듯이 쏘아보고 있는 사이프를 보고 합, 입을 다문다. 사이프가 서류로 시선을 돌리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동안 자하르 왕자님께 순결한 처녀만 바쳐진 게 아니다.」
많은 맥락을 담고 있는 한마디였다.
하젤이라는 신분이 후계자 선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일이 동생인 자하르의 결혼을 추진하기까지 얼마나 지대한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부분이었다.
끝내주게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렸구나.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며 차분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왕위 계승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선왕의 지목이다.」
한마디로 왕으이 마음에만 들면 장땡이라는 뜻이다.
「하젤이라는 전통은 어찌하여 생긴 것입니까?」
장석민은 하일의 이야기 중에 하젤이 오랜 전통이라는 부분이 떠올라 물었다. 하젤을 그리 중하게 여기는 배경을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이프는 동양인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만 밝히다 인생을 그르치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질문들이 의외로 날카롭다.
「타르카 왕국의 시조가 되시는 위대한 아나크 왕의 고사(古事)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아나크 왕은 나라를 세우기 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기 위해 술과 육식, 여자를 금하고 푸른 사막에서 기도를 하셨다. 신은 아나크 왕의 기도에 응답하여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과 기름진 영토를 내려주셨다. 그리하여 위대한 아나크 왕은 타르카 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로만 전해지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 전통이라는 뜻이었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제외한 다른 후계자들이 느낄 짜증과 답답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이 되면, 그러니까, ……해도 됩니까?」
「위대한 아나크 왕은 나라를 세운 이후에 유일한 신에게 선물 받은 열 명의 처녀와 열흘 밤낮을 보내시어 열 명의 후계자를 낳으셨다.」
「…….」
자하르는 정말로 왕이 되고 나서 총각 딱지를 뗄 모양이었다.
신체 건강한 남자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미녀를 마다하고 오직 전통에 의해 순결한 삶을 유지해온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희귀한 일이었다. 희귀한 만큼 미친 짓이었다.
장석민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자하르에 대한 편견이 무럭무럭 쌓여갔다. 분명 책이나 읽고 공부나 하는 샌님, 범생이 같은 놈일 테지.
「자하르 왕자님은 학문에 뜻이 많은 편이신가요?」
「타르카 왕국 최고의 석학이자 세 명의 왕을 교육하신, 무하마트 엘 하페즈 님께서 인정하신 수재시다.」
역시나, 꽉 막힌 공부벌레구나.
장석민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치는 것을 눈치챈 사이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놈은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분이다. 자하르 님은 고고하고 성스러운 분이다. 괜히 사막의 성자(聖者)라 불리시는 게 아니다.」
「그쪽은 하일 왕자님을 모시고 있는 거 아닙니까?」
장석민의 질문에 잠시 헛기침을 하던 사이프가 하일 왕자님은 몹시 지략이 뛰어나시고 언변이 훌륭하시며 너 같은 놈에게 기회를 주실 만큼 관대하고 훌륭한 분이라는, 무성의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장석민은 사이프가 마음속으로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살짝 엿본 듯했다.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기던 사이프가 아무튼,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기대하고 있겠다.」
「네?」
「한 달 뒤에 네 녀석이 어떻게 죽을지.」
장석민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는 모습을 본 사이프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0이 빠졌어. 분명히 두어 개 빠졌어."
사이프의 안내를 받아 궁에 도착한 장석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사스럽다는 표현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건축물이 있을까.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과 벽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벽에 금색으로 새긴 장식이 실제 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장석민은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는 돌들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죄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궁이었다.
"대체 세금을 얼마나 걷는 거야."
세수도 얼마 되지 않는데 왕족이 이만큼 사치스런 삶을 유지하려면 세율이 엄청나다는 결론뿐이었다. 뼈 빠지게 벌어 결국 왕족들 사치하는데 돈을 써야 하는 국민이라니.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다행이지."
장석민은 한국의 사회 풍토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녀관계에서 쓸데없는 신의를 챙기는 것도 그러했고,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부분도 그러했고 특히나 군대 문제가 그러했다. 그래도 여기에 비한다면 우리나라가 좋다.
백 배, 천 배, 만 배 낫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유학시절에는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 나라에 들어선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장석민은 애국심이 무엇인지 통감하게 되었다.
저 사람도 알고 보면 엄청나게 노동착취를 당하겠지. 앞서 걷고 있는 사이프를 보며 장석민은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다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자각했다.
오지랖은.
한 달 뒤에 내가 어떻게 죽을지 기대된다는 사람이다. 세금을 99.999%를 떼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나 자신뿐, 복도를 지나며 장석민은 혹시 전화나 컴퓨터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꽃과 음식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장석민은 사이프에게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자하르 님의 스물여섯 번째 생신이시다.」
「……. 26년간…….」
사이프의 삭막한 시선을 받은 장석민은 고개를 숙였다. 한국 나이로 하면 스물일곱 살이다. 우스갯소리로 스물여섯 해 동안 섹스를 하지 않으면 마법사가 된다고 하던데. 오늘 중동 마법사를 만나게 되겠군.
「하일 님께서 자하르 님의 생신에 맞춰 혼인을 추진 중에 계셨다. 네 덕분에 허사가 되었지만.」
「…….」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한 경우에 처해있는지 완벽한 논리로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 있었지만, 머리가 좋은 장석민은 침묵을 택했다.
「오늘 하일 님께서 널 자하르 님께 생신 선물로 드릴 것이다.」
「받으실까요?」
선물이야 주는 사람 마음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존재할 것이다.
「받으실 것이다. 윗사람이 주는 선물은 거절할 수 없다.」
「최소한 제 얼굴의 상처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안 될까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심산이었다.
사이프는 뒤를 돌아 장석민의 울긋불긋한 얼굴을 확인하고 흠, 하고 생각에 잠긴다.
「조치가 필요하긴 하겠군.」
한 줄기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다. 사이프가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세웠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로 뭔가를 지시하자 시종이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시종에게서 사이프는 흰색 천을 건네받았다.
「받아라.」
「이게 뭡니까?」
「니캅이다. 눈을 제외한 얼굴을 모두 가릴 수 있는 베일이다.」
중동의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장석민은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여성들이 사용하는 의복의 형태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죄송한데, ……이거 여성분들이 사용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
「남자도 사용합니까?」
「아니. 수치스러운 일이지.」
「…….」
「너는 명예를 알지 못하니 상관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자는……. ……쓰겠습니다.」
장석민은 고분고분 사이프에게서 베일을 받아들였다.
「포장이라도 그럴듯해야지.」
사이프의 혼잣말에 장석민은 울컥해서 대꾸했다.
「선물은 모름지기 받는 사람을 위해서 주는 거 아닙니까. 이거 때문에 여자인 줄 알고 받으셨다가 화를 내시면 어쩝니까.」
사이프가 픽,웃음을 삼켰다.
「어차피 뭘 드려도 포장도 뜯지 않을 분이시다. 넌 그냥 한 달간 얌전히 있다가 죽으면 된다.」
장석민은 예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사이프를 싫어하게 될 것임을.
「여기서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
복도 끝, 구석진 방 앞에서 사이프가 말했다. 방을 들여다본 장석민은 이거, 하고 말끝을 흐렸다.
「창고다.」
「왜 하필 창고에서 기다립니까.」
상황을 보아하니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굳이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에 자신을 가둬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넌 자하르 님께 가게 될 물건이기 때문이다. 물건은 창고에 있어야 하는 법.」
방금 예감은 틀렸다. 자신은 사이프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좆나, 싫어하게 될 것이다.
사이프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라. 자하르 님의 생신 연회로 경계가 삼엄하여 외부인은 허락 없이 돌아다니다 발각되면 즉시 총살이다. 한달 일찍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장석민은 대답도 하기 전에 사이프는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저 나쁜 새끼가."
성질 같아서는 쌍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제 목숨이 얼마나 귀한지 몇시간 전에 깨달은 그는 시근덕거리며 화를 삭였다.
장석민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창고를 둘러보았다. 몸을 기댈 곳이 필요했다. 창고의 기둥 뒤에서 의자를 찾았다. 의자는 더러운 새 둥지 같았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럽고 비좁은 의자 위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처지라니.
"머리 아파죽겠네."
배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두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다. 이토록 부정적인 감정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적이 없던 터다.
장석민의 인생은 비단 위를 걷는 것처럼 보드랍고 쉬웠다.
소리를 지를 필요가 없었다.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해도 판사님 댁 막내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많았다.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물건이 망가지면 새로 사면 그만이고 인간관계가 틀어지면 새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인생의 큰 고민도 없었다.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 앞에서 우는 소리를 좀 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아버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상대를 불러보았다.
아버지는 해결사였다. 늦둥이 아들이 우는소리를 하면 엄한 아버지는 알면서 속아 넘어가 주시곤 했다.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만 할 수 있다면.
인구 120만도 안 되는 나라의 왕자 따위, 고소를 진행하면 끝이다. 국제적 여론으로 뭇매를 맞겠지.
폭력, 납치, 감금, 협박, 살인미수, ……매춘 알선 혐의.
장석민은 하일에게 물을 수 있는 죄목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약간, 복수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게 다진 고기처럼 너덜너덜한 정신 사이로 잠이 스며든다. 이대로 잠들면 위험한 거 아니야. 그냥 창고의 짐처럼 가만히 있으면 된다 했잖아.
한국 대사관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내지?……몰라, 일단 자고 일어나서, …….
현실과 수면의 경계 사이에서 정신이 오르내리는 사이,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랍어다. 이상하다. 사이프가 분명 이곳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 창고라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흡사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몸과 정신이 분리된 느낌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 사이로 한 단어가 유난히 반복되어 들렸다.
엘시시. 신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처럼 경건한 동시에 열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다. 기도라도 하는 것인가. 영화를 보면 중동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것 같……, 어라. 저런 식으로 기도를 하던가. 분명히 그 기도는 중얼거리면서, ……아니구나.
신을 부르는 듯 경건하던 목소리에 조금씩 가쁜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여자는 달뜬 목소리로 계속 같은 이름을 불렀다.
엘시시, 엘시시, ……엘시시.
그에 화답하는 듯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들은 여자의 숨소리가 한층 더 거칠어진다. 잠결에도 장석민은 저 내용이 분명 범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에 점점 열기가 더해졌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살갗이 비벼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장석민은 지금이라도 일어나야 하는가 고민했다. 가만히 계속 듣고 있자니 상황이 너무 민망했고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기척을 내자니 타이밍을 놓쳤다는 기분이었다.
이러다 들키면 변태로 오인당해. ……아, 여자 목소리 진짜 죽인다. 죽네. 죽어. 세상에, 이젠 우네. 남자가 얼마나 잘하면, ……누굴까.
엘시시,엘시시.
여자가 흐느끼면서 이름을 부르자 남자의 움직임이 한층 거칠어졌다. 여자가 절정에 이르러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야, 저놈 누구인지 술 한 잔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좀 나누고 싶구나. ……세상에. 또 하는 거야?
여자는 이제 남자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잠결에도 장석민은 기둥 뒤 엘시시라는 사람에게 같은 남자로서 찬탄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 와중에 잠기운이 다시 썰물처럼 밀려드었다. 안 돼. 다시 잠들면. ……저 놈이 누구인지는 보고, ……아, 졸리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길 부분에 여자의 목소리가 열락에 젖어 그 이름을 불렀다.
엘시시.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부름이다.
"──!"
장석민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눈을 뜨니 하일이 그의 멱살을 쥔 채 뺨을 후려치려고 막 손을 치켜든 상태였다.
「기다리고 있으라 했지 누가 자고 있으라 했나.」
하일이 장석민을 의자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괜한 트집이었다. 장석민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을 껌뻑거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모습도 남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뭘 찾는 거지?」
「사람이, ……있었는데.」
꿈이었나.
장석민은 뺨을 긁적였다.
꿈이라고 하기에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꿈 내용 한번 참.
황홀경에 젖어 상대의 이름을 부르던 여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장석민은 입맛을 쩝, 다셨다.
「무엄하다.」
사이프가 장석민을 보며 대번에 낯을 구겼다. 또 무슨 트집인가 싶어 장석민은 덜컥 겁이 났다.
「미개하고 천박한 이교도 녀석. 당장 예의를 갖추어라.」
뭘 어떻게 예의를 갖추라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해 장석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일과 사이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일의 혐오 어린 시선이 자신의 다리 사이에 머물러 있음을 깨달은 장석민은 얼른 고개를 내렸다.
헉. 그는 숨을 들이켜며 얼른 옷자락으로 앞을 가렸다. 하늘하늘한 옷은 신체의 불거진 부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사이프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혀를 내찼다.
「아, 이건, 그러니까 분명히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구차한 변명 필요 없다. 그래, 그런 몸뚱이로 자하르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일의 비아냥거림에 장석민은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분명히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
「여자가 있었다고?」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다. 여자랑 남자가 관계를 맺는 소리를 듣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가 오해를 풀기는커녕 변태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런데 정말 꿈이었을까. 피곤하면 야한 꿈을 꾼다고 하지만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나라도 좀 심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신음. 내 상상력이 그 정도로 좋았던가.
「누가 여기 들어왔다는 것이냐?」
하일의 물음에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앞이 이제는 조금 죽어 옷으로 거의 가릴 수 있었다. 장석민은 손으로 옷자락을 내리는 것을 보며 사이프가 혀를 내찼다.
민망하긴 했지만 장석민은 약간 뿌듯함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토록 꿋꿋할 수 있다니.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면.
「준비해라.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된다.」
사이프의 말에 장석민은 베일을 얼굴에 둘둘 두르고 눈만 내놓았다.
「그건 뭐지?」
하일이 베일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이프가 얼굴의 상처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아무리 자하르 왕자님께서 관심 없다 하시더라도 최소한 도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주는 선물이다. 아우라면 그게 무엇이든 받아야 해.」
사이프의 지나친 예의에 하일이 언짢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벗거라.」
장석민은 사이프와 하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실, 누구를 편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베일을 쓰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터다.
「벗으라 했다.」
장석민이 주저하며 베일을 벗지 않으려 하자 하일이 베일을 잡아당겼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하일의 우악스러운 힘에 장석민은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그가 베일을 손에 든 채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무엇이든 줄 수 있다. 나는 타르카 왕국의 첫 번째 후계자다.」
「……두 번째 아니십니까?」
하일이 사나운 눈으로 장석민을 노려보았다. 장석민은 깨갱하고 고개를 숙였다.
『왜 내가 자하르 따위의 눈치를 살펴야 하지?』
사나운 아랍어가 빠르게 이어졌다.
『난 저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건네줘도 된다. 안 그런가?』
『물론 그렇습니다.』
사이프가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저는 하일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뭐?』
『이런 수준 낮은 선물을 하면, 자칫 다른 사람의 눈에 안 좋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살레하 공주님과의 혼인 문제로 무크라르 전하의 심기가 좋지 않습니다.』
긴 대화 속에서 장석민이 알아들은 단어는 살레하뿐이었다. 살레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하일의 표정이 대번에 굳는다. 역린인가? 장석민은 앞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살레하에 관한 언급은 금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봐도 저건 너무 격이 떨어집니다. 이교도인데다 외모도 최상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것이 하일 왕자님께 폐가 될까 두렵습니다.』
사이프의 간곡한 청에 하일은 욕설을 중얼거리다 발로 의자를 걷어찼다. 발길질을 몇 번 더 반복하고 나자 의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서졌다. 장석민은 이 나라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하일만큼은 왕위 계승권을 잇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써라.」
하일이 장석민에게 다시 베일을 집어 던졌다.
"변덕은."
장석민이 한국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하일이 허리춤의 칼을 빼어들었다.
「경고한다. 다시 한 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가 네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일이 그제야 칼을 내렸다. 울고 싶어졌다.
혼잣말도 한국말로 하지 말라니. 대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는가.
건네받은 베일을 얼굴에 둘둘 두르고 장석민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라리 아랍어를 배울까.」
창고를 나서려던 하일이 장석민의 중얼거림을 듣고 비웃음을 날렸다.
「왜?」
「네? 그거야 말이 통하면 그, …….」
제 입으로 자하르를 타락시키겠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어 장석민은 입술만 달싹였다. 옆에 있던 사이프도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한 달 뒤에는 죽을 텐데.」
하일이 비웃는 투로 말하고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울컥했다. 사이프는 그렇다 쳐도 일을 벌인 장본인인 하일만큼은, 최소한의 신뢰를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제가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앞서 걷던 하일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장석민은 움찔했지만 이미 뱉어놓은 말이니 끝맺음은 하자고 마음먹었다.
「제가, 그러니까, 그 자하르 님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1퍼센트다.」
「네?」
「네가 성공할 확률.」
하일이 손을 뻗어 베일 채 장석민을 움켜쥐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난 그저 널 커다란 판 위에 던지는 것이지.」
돌을 던지는 듯한 손길로 장석민을 놓아준 후, 하일은 걸음을 옮겼다.복도 위에 던져진 장석민은 멍하니 있다 입술을 깨물었다.
1퍼센트의 승률에도 최선을.
장석민이 다니는 백승 로펌의 10가지 신조 중 제1조였다. 그는 손으로 베일을 고쳐 쓰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난 회사도 아버지 아니면 못 들어갔잖아. 1퍼센트인데 어떻게 이겨. 아마, 안 될 거야."
시끄러운 연회장에서 베일을 쓰고 구석에 서 있는 장석민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일과 사이프의 비웃음을 차례로 듣고 전의를 불태우며 연회장에 드어섰다. 나름대로 은수저 물고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오늘은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입에 물고 있던 은수저가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창고로 가는 동안 그가 봤던 궁의 화려함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연회장의 규모와 장식에 기가 죽은 장석민은 구석에 처박혀 애꿏은 장미꽃만 잡아 뜯고 있었다.
자하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인사만 해도 세 시간이 걸렸다. 그들이 가져온 선물은 조금도 거짓 없이 천장에 닿을 만큼 쌓여갔다. 시종들이 카트로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르는 중이었다. 각종 보석은 물론이고 미술품과 자동차 열쇠, 심지어 간간이 여자도 보였다.
사이프가 선물의 급에 대해 걱정을 한 것이 괜한 염려가 아니었다.선물로 보내지는 여자들의 미모가 가히 그림책에서나 볼 듯한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제 입장을 잠시 잊은 장석민은 여자들이 하나둘 진상될 때마다 속으로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와, 죽인다.
세상에, 저 여자 좀 봐. 엉덩이가 장난 아니잖아.
오, 주여, 저런 여자랑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겁니다.
옆에 서 있던 사이프가 그의 발을 지그시 밟지 않았다면 장석민은 자신이 마지막 여자에게 다가가 핸드폰 번호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다가 오늘의 주인공을 흘깃 바라보았다.
"1퍼센트라……."
하일을 다시 보았다. 그는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후한 점수를 내린 것이다. 사이프가 득의만만한 웃음을 짓고 그분은 절대로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것이 자하르.
전통복에 흰색 오트라를 쓴 그는 넉넉한 웃음을 지은 채 앉아 있었다. 하일을 비롯해 왕을 중심으로 차례대로 앉아있는 타르카 왕국의 왕자들은 전형적인 중동꼐 남자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선이 진하고 수염이 짙고 피부색이 어두운, 소위 석유냄새가 날 것 같은 미남들.
자하르 역시 누가 봐도 그 출신을 알 수 있는 외모였다. 하지만 다른 왕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증거로 장석민은 왕자들 사이에서 한눈에 자하르가 누구인지 골라낸 것이다.
사막의 성자.
왜 그가 그렇게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꼿꼿하게 앉아있는 그 자태가 한 떨기 수선화처럼 성스럽고 고고하다. 그렇다고 꽃처럼 유약해 보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눈을 반쯤 내리감으며 미소 짓는 그의 옆모습에서 강철처럼 단단한 의지를, 누구라도 읽을 수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경건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옷매무시를 고치게 만드는 남자였다.
자하르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반듯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맞이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장석민은 유학 시절, 미술을 전공하는 여자를 따라갔던 박물관에서 본 그림들이 떠올랐다. 성탄일을 기념하여 성경과 관련된 미술작품을 전시했던 곳에서 보았던 미소를, 장석민은 지금 이곳에서 보는 중이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띤 자하르의 모습은 그의 성자와 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짤막하게 감사인사를 할 때 들리는 목소리는 정중하고 우아했다.
그는 존재 자체로도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두어도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8왕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일이 그렇게 열폭할 만도 하군.
장석민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는 왕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면면들이 보였다. 속이 시커먼 너구리드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었다.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하일은 차라리 반감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니 개중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회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이제 친족들이 자하르에게 선물을 건네는 순서가 돌아왔다. 구석에 죽은 듯이 서 있는 장석민은 그제야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손발이 흥건하게 젖어갈 무렵, 하일의 차례가 되었다. 하일은 의자에 비스담히 앉은 채로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가져오라 명했다. 사이프가 장석민을 앞으로 데리고 갔다. 두 계단 아래쯤에 무릎 꿇게 된 장석민은 숨을 죽인 채로 자하르의 말을 기다렸다.
모두 심드렁한 얼굴로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하일이 그럴듯한 선물을 가져왔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감사합니다. 형님.』
자하르가 하일에게 인사하며 선물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
『내 너를 위해 특별히 골랐으니 잘 사용하도록 해라.』
『그래. 살레하처럼 도망가지 않도록 자하르 네가 노력을 좀 해야지.』
자하르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내가 그리 말하자 하일의 표정이 삽시에 굳어진다. 장석민이 알아들은 것은 살레하라는 이름뿐이었지만 그게 하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일이 매서운 눈으로 장석민을 쏘아보았다. 지금이라도 하일이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의 목을 베어버릴 것 같아 장석민응ㄴ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죄송합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대사를 그르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자하르의 음성이 냉랭해진 분위기를 어루만졌다.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가 하일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자하르를 왕으로.
투표권이 있다면 그에게 아낌없이 한 표 던지리라 장석민은 마음먹었다. 그때 문득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고개를 들고 그를 훔쳐보던 장석민이 흠칫, 놀라 눈을 부릅뜨고 굳어버렸다. 베일 안의 눈을 보고 그가 중동계가 아님을 알아챈 자하르가 하일에게 물었다.
『저분은 어디에서 오신 분입니까?』
『글쎄, 네가 지밀한 곳에서 물어보면 되겠지. 그럴 수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하일의 비아냥거림에도 자하르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짓으로 장석민을 가리켰다. 선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사이프가 장석민을 일으켰다. 연회장을 나서던 장석민은 뒤를 돌아, 자하르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
「빨리 걸어라.」
장석민이 자하르를 보는 것조차 불경스럽다는 듯이 사이프가 장석민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까 저기서 뭐라고들 하신 겁니까?」
「네 알 바 아니다.」
회색 옷을 입은 시종들이 사이프의 앞에 섰다. 자하르의 앞으로 온 선물을 나르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저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장석민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어보았다. 잔나툰. 사이프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사이프가 장석민을 회색 옷을 입은 시종에게 건넸다.
사이프가 좆나 싫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나마 말이 통하는 유일한 상대였다. 장석민은 불안한 눈망울을 굴리며 사이프에게 매달리다시피 물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낙원(樂園)이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놀란 장석민의 입에서 한국말이 튀어 나왔다.
"설마 여기서 지금 죽인다는 겁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 할 일을 마친 사이프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회색 옷을 입은 시종이 장석민의 팔을 잡았다. 커다란 문 앞에서 선 장석민은 이 문이 닫히면 다시는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외쳤다.
「영어를, 대사관에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 죽이지 마세요! 한국 대사관 가져오라고!」
장석민의 다급한 외침은 육중한 문 뒤로 갇히고 말았다.
"잔나툰.……낙원이라."
장석민은 복도에서 사이프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입안으로 곱씹었다. 장석민이 끌려온 곳은 감옥이 아니라 다행히 자하르가 머무는 궁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사람들이 잔나툰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낙원이지. 낙원. ……그래."
오늘도 어김없이 종이 한 번 울린 후에 차려진 아침 식사를 앞에 두고 장석민은 중얼거렸다. 신선한 과일과 우유,치즈와 부드러운 빵이 전부였지만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훌륭한 수준이었다. 점심은 거기에서 몇 가지 과일이 더해지고 저녁은 요리가 더해졌다.
먹고 자고 산책을 한다. 그것이 장석민이 이곳에서 와서 하는 일의 전부였다. 처음에 장석민은 사흘간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누군가 갑자기 그의 방에 들이닥쳐 노예처럼 일을 시키거나 채찍질을 해대는 꿈을 꾸다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도 그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시간을 어떻게 보내건 오롯이 그의 자유였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을 수 있는 곳. 현실에서 탈출하기 원하는 대한민국의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은 꿈꿔봤을 낙원이다. 물론 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꼬실 수 있는 여자가 없었기에 장석민에겐 무용지물인 낙원이었다.
시종이 가져다준 포도를 한 알 떼어 입에 넣으며 장석민은 이 삭막한 낙원에 갇혀 늙어 죽기 전에 자신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휴대전화만 손에 쥐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시종들과는 의사소통도 힘들었다. 드물게 영어를 알아듣는 시종이 있긴 하지만 휴대전화나 컴퓨터에 대해 물어보면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행동에 큰 제약이 없다고 해서 자유로운 신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장석민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궁의 주인인 자하르가 보장하는 범위 내서였다. 게다가 그 기간은 궁 밖의 하일이 정해놓은 상태였다.
장석민은 포도를 한 알 더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머리가 아프다.
"……어쩌냐."
자하르의 명예를 더럽히라는 명을 받고 궁에 들어오긴 했지만 처음 본궁에서 그를 본 이후로 자하르의 머리카락도 보지 못한 채였다. 그를 욕보이기는커녕 이대로 가다간 자하르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한 달을 채우고 죽임을 당할 것 같다.
장석민은 포도 한 알을 더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달고 시원하다. 그동안 내가 먹었던 포도는 분명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진짜 맛있네."
먹어야 머리가 돌아가니 일단은 먹어치우자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도의 심만 남게 되자 장석민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나가는 시종을 붙들고 포도를 부탁할 심산이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늙은 시종이 눈에 띄었다.
「저기요.」
시종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장석민은 속으로 럭키를 외쳤다. 시종 중 영어를 알아듣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포도를 더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나이 든 시종이 지나가는 젊은 시종을 불러 아랍어로 지시를 내렸다. 장석민은 그들의 대화 속에서 반복되는 단어를 알아듣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러마디가 무슨 뜻입니까?」
그의 질문에 나이 든 시종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귀하신 분의 은혜를 기다리는 분들은 그 신분에 따라 지칭을 하는 말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타르카 왕국의 전통 언어입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의 설명이 이어진다.
「왕자님의 가장 큰 총애를 받는 분은 마시드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다이아몬드입니다. 그 아래로, 다하분, 아시미, 하디르가 있습니다. 금, 은, 동을 가리킵니다.」
장석민은 늙은 시종이 알려주는 말을 열심히 머릿속에 새겨 넣고는 그럼, 하고 말문을 열었다.
「러마디는 무슨 뜻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시종이 납입니다, 하고 답했다.
「……, 납.」
장석민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붉게 물들자 시종이 바로 말을 덧붙였다.
「이 궁에 머물고 계신 대다수 분들은 러마디 계급입니다.」
「……그렇군요.」
하긴. 자하르가 이십여 년째 독수공방을 유지 중인데 그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위인 사람이 두 손을 모으고 그렇게 말하자 장석민은 왠지 미안해졌다. 시종이 그럼, 하고 자리를 뜨려 하자 장석민은 그를 붙들었다. 시종 중 이렇게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하고는 안면을 터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장석민의 질문에 시종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하캄입니다, 하고 답했다.
「여기에서 오래 일하셨나요?」
「나고 자랐습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석민에게 필요한 것은 이곳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조력자였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장석민이 그렇게 운을 떼자마자 하캄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하르 님에 관해 여쭈시려는 것이라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그분은 알려진바, 그대로입니다.」
아무래도 하캄을 붙들고 자하르에 대해 알려달라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장석민은 그게 아니고요, 하고 말을 이었다.
「이곳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네? 이곳이요?」
하캄이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치뜨고 되물었다. 장석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잔나툰.
장석민에게는 살아서 걸어나가야 할, 지옥의 이름이었다.
"천국이야."
방에 들어선 순간 자하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마디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여자들이 일제히 그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석민은 얼른 베일을 고쳐 쓰고 묵례를 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책을 뒤적거리는 척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쁘다. 하나같이 예쁘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여자를 골라 모아온 것일까.
베일 안에서 침을 꿀떡꿀떡 삼키며 장석민은 자세를 바로 했다. 장석민은 하캄에게 이곳의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물었다. 적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배경에 대한 공부가 필수적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할 방법을 알아내야 했다.
장석민은 하캄을 붙들고 필사적인 눈으로 제발 부탁드립니다, 알려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 필사적인 눈빛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하캄은 지금 이곳에 남자 러마디 님은 혼자이십니다, 하고 그를 위로했다.
그 말을 들은 장석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일의 말에 따르면 분명 이전에도 자하르는 남자를 선물 받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장석민의 표정을 읽은 하캄이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이전에 자하르 님에게 남자 러마디 님들이 몇 번 선물로 들어오긴 했지만 정중하게 사양을 하시거나 후에 돌려보내 주셨습니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러마디 님도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하캄이 그렇게 말한 순간 장석민은 소리를 지르며 만세를 부를 뻔했다.
자하르를 만날 수만 있다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굳이 한 달을 채울 필요도 없다. 하일 모르게 샤바샤바 입만 잘 맞추면 바로 출국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석민은 연회장에서의 자하르가 떠올랐다. 그래! 그날 연회장에서 본 자하르라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분명 자신을 한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이다.
장석민의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여기를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하는 고민도, 자하르를 자빠트리는 상상을 하다 헛구역질을 하는 일도 이젠 끝이었다.
장석민은 하캄에게 자하르를 언제쯤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캄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처럼 미천한 사람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그래도 한 달 안에는 오죠? 덜컥 겁이 난 장석민이 그렇게 묻자 하캄이 당연하죠,하고 대꾸했다.
됐다. 됐어.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자하르를 만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잘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먹고 자고 산책을 하는 것 외에 장석민은 우선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일을 떠올렸다.
장석민은 자신 외에 러마디들을 따로 만날 수 있는지 물었다. 하캄은 고개를 내저었다. 장석민의 눈빛이 금세 실망감으로 가득 찼다. 먼 곳에서 온 동양인 청년의 외로움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읽은 하캄은 진심으로 그를 동정했다.
그리고 그가 가르쳐준 것은 바로 이곳이었다. 하루에 한 번, 이곳에 머무는 후궁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가 마련되는데 궁에서 지켜야 할 법도나 예절, 예의 등을 배우는 수업이라고 했다. 궁에서의 예절이나 기본 법도를 배우는 후궁이라면 모두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에 유일하게 이 시간에만 남녀 후궁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남자 러마디들은 얼마 있지 않고 모두 출궁 조치 되었던 터라 남녀가 같이 교육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모이는 것은 여자 후궁들뿐이었다.
여자들만 있는 곳에 가려면 꼭 베일을 쓰셔야 합니다. 그것이 궁에서 남자 러마디 님이 지켜야 할 예절입니다.
하캄이 알려준 대로 장석민은 머리에 베일을 뒤집어쓴 채로, 수업에 참석했다. 이곳에 끌려온 이후 여자와 말을 섞어 보기는커녕 제대로 구경조차 하지 못한 그였다. 생존권이 보장되었으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장석민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베일을 쓰고 있음에도 장석민이 남자임을 알아챈 여자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힐끔거렸지만, 그는 태연하게 앉아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백발의 노파가 들어와 자신을 비르마라고 소개했다. 후궁으로 들어온 여자들의 출신이 각양각색이어서 비르마의 연설은 다행히 영어로 진행되었다. 자하르 왕자님의 생일이 지난 후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보인다며 비르마는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하르 왕자님의 훌륭한 성품과 인격에서 시작한 연설은 그의 은혜를 기다리는 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품위를 거쳐 신을 모시는 자하르 왕자님의 성스러운 행동에 관한 찬양으로 이어졌다.
"……종교가 따로 없네."
구석에서 턱을 괴고 앉은 장석민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물 다섯 해 동안 숫총각 딱지를 떼지 않은 것이 뭐 그리 자랑이라고. 신체 건강한 남자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비르마의 자하릉 왕자님 찬양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분의 은혜를 입게 되는 처녀는 대대손손 기록될 만큼 성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늘 노력, 정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석민은 베일 아래서 열심히 눈을 굴려 여자들의 얼굴과 몸을 스캔했다. 모조리 상급이다. 개중 앞줄에 앉은 몇 명은 평생에 한 번 볼까 싶은 최상급의 미녀였다. 저런 미녀들을 두고도 동정을 유지하고 있다니.
"미친 거지."
장석민의 낮은 중얼거림에 주변에 있던 여자 몇이 그를 돌아보았다. 비르마의 날카로운 시선이 바로 뒤따랐다. 장석민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위대하신 아나크 왕의 뜻을 기리며…….」
점점 비르마의 칼칼한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장석민은 턱을 괴고 주변의 미녀들을 눈으로 훑었다.
아무리 여자를 좋아해도 똥오줌 정도는 가렸다. 이 여자들을 어떻게 하겠다는ㄴ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눈으로나마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맨 앞줄에 앉은 갈색 머리의 미녀는 연회장에서 보았던 여자이다.
저 여자를 보고 잠시 처한 상황도 잊은 채 마음속으로 진심 어린 박수를 쳤었는데. 신이여. 저런 여자를 세상에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거리는 옷 안에 감춰진 육감적인 몸매를 눈으로 따라 그리며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여자를 그냥 두는 것은 남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자하르는 정말 모르는 건가.그날 보아하니 완전히 맛이 간 놈은 아니던데.
……오히려 좋은 놈처럼 보였지. 언제 기회가 되면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봐도 좋으련만. 같은 남자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아. 그래. 엘시시.
본궁 창고에서 여자가 필사적으로 부르던 이름이 떠올랐다. 장석민은 남자를 상상 속의 회합에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꿈결이긴 했지만, 남자의 위용은 대단했다. 우리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 자하르도 좀 배우는 게 있을 텐데. 셋이 친해지면 같이 고급 클럽에라도 가서…….
탁.
자신의 앞에 놓인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에 장석민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지팡이를 든 비르마가 매서운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장석민이 눈을 깜빡거리자 그녀가 딱딱한 영어로 앞의 칠판을 보라고 말했다. 거기에는 자하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 ……어.」
뭘 어쩌라는 것인지 몰라 장석민은 사진과 비르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 말을 못 들었나요?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겁니까?」
잠시 생각하던 장석민은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비르마가 한숨을 내쉬며 옆에 서 있던 시종에게 지시를 내렸다. 시종이 앞에서 종이와 연필을 가져와 장석민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영어를 못합니까?」
아랍어도 못하고 영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주제에 네가 어떻게 여기 앉아있느냐고 힐난하는 말투였다. 장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하는 겁니까. 그리지 않고.」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 사진 속의 자하르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왜죠.」
이 많은 미녀를 두고 혼자 동정을 지키고 있는 덜떨어진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요구를 이해하지 못한 장석민은 그렇게 물었다.
「자하르 님을 모셔야 할 분이라면 그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응당 모든 덕목을 고루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잘 그린 사람에게는 상이, 그러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이 돌아갑니다.」
장석민의 눈에 비르마가 들고 있는 지팡이가 들어왔다. 벌이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하는 겁니까. 어서 그리라는데.」
장석민은 얼른 연필을 스케치를 시작했다. 대충 형태를 잡고 선을 긋는 시늉을 하자 비르마는 그제야 장석민의 곁을 떠났다.
책상에 앉은 여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자하르는 유력한 후계자인 동시에 아직 비도, 총애하는 후궁도 없는 상태였다. 모두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여자들 사이에서 살벌한 경쟁구도가 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불꽃이 일 정도로 집중해서 연필을 움직이고 있는 여자들을 둘러보며 장석민은 쓴 입맛을 다셨다.
뭐, 나하고는 상관없지.
장석민은 연필을 쓱쓱 움직였다. 자하르의 사진을 보는 척하면서 여자들의 얼굴과 몸을 훔쳐보았다. 손은 기계적으로 종이 위를 경쾌하게 움직였다.
장석민에게는 많은 취미가 있었다. 골프나 테니스 같은 평범한 취미도 있었지만, 요리나 그림, 마술처럼 보통의 남자들은 하지 않는 독특한 것들도 여러 개 배워두었다. 여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림 그리는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다가 종이에 적당히 슥슥, 여자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면 여자들 대다수는 그에게 호감을 보이곤 했다.
남자를 그리는 것은 석고상을 그릴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지만 장석민은 어렵지 않게 그림을 그려 나갔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저녁 식사시간이었다. 보통은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해도 같은 처지인 러마디끼리 모여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면, ……사형이려나.
하아, 꺾지도 못할 꽃들이 저마다 활짝 피어 이토록 향기롭게 흔들리고 있는데 나는 사내새끼 상판이나 그리고 있어야 한다니.
안타까움에 탄식을 흘리며 장석민은 대충 초상화를 그려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비르마가 그만 하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여자들은 연필을 놓지 않았다.
시종이 책상에 놓인 그림을 거두어갔다. 수업시간이 끝날 때가 된 것이다.
장석민은 이 고귀한 면면들을 언제 한 번 더 볼까 하여 눈에 힘을 주어 여자들의 얼굴을 모조리 살폈다. 앞줄의 여자들은 특별히 두 번 더 살펴보았다.
그림을 하나하나 보던 비르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훌륭한 솜씨를 가졌군요. 자하르 님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는 거기에 들어맞는 조건을 가져야 합니다.」
저 여자 진짜 예쁘다. 저 옆에 여자도, 헉, 저 옆에 여자도 가만 보니까 되게 매력적인데. ……굳이 고르자면 왼쪽 세 번째가, 아니 두 번째인가. 아, 너무 어렵잖아. 어떻게 한 명만 고른단 말인가.
고급 잡지를 펼쳐놓고 사지도 못할 물건들을 고민하는 사람처럼 장석민이 끙끙거리고 있을 무렵 비르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 말이 안 들리나요?」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막 다디단 꿈에서 걸어 나온 장석민은 앞을 바라보았다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요.」
비르마가 물었다. 장석민이 어, 그게, 하고 주저하다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비르마의 손에는 장석민이 그린 그림이 들려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쪽인가요?」
앉아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석민에게 몰렸다. 상황이 완전 다르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아름다운 여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기분이 좋아진 장석민이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비르마가 왜 자신의 그림을 갖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장석민의 입가에는 웃음이 금세 날아갔다. 비르마가 그림을 든 채로 입을 열었다.
「아주 훌륭한 그림입니다. 다들 이 그림을 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자하르 왕자님은 특히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런 솜씨들은 그대들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 될 것입니다.」
장석민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차가워졌다.
이게 아닌데…….
비르마 장석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한 대로 가장 잘 그린 사람에게는 상을 내릴 겁니다. 앞으로 나오세요.」
「장석민은 뺨을 긁적거렸다. 원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상을 준다니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벌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자위하며 장석민은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