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35)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라고. 장석민은 현재 자신이 B와 D 사이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다.

"……병신과 또라이 사이의 천치잖아."

으, 하고 신음을 삼키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어떤 선택을 해도 그 후폭풍은 감당할 수 있을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자하르 왕자의 폭탄선언이 궁에 퍼지기까지 두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이곳에 머물면서 지켜본 결과 온 나라에 퍼지기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석민은 자신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하일과 다른 왕자들의 귀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겠지. 그 빌어먹을 하일의 얼굴이 구겨졌을 생각을 하니 고소하긴 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그날 지하실에 있었던 것은 자신이다. 범인들은 모두 사라졌기에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일한 목격자인 자하르는 장석민의 예상대로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을 도운 사람을 '가녀린 여자'라고 지목한 것이다.

장석민은 절대로 전면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자하르가 비의 자리를 내걸고 사람을 찾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만나서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그게 문제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하일이 보낸 선물이다. 그놈이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에 자하르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자하르를 도와준 사실을 솔직히 털어놔야 했다.

딜레마였다.

진실을 털어놓고 속셈을 모르는 남자와 붙어먹을 가능성을 열어두느냐, 입을 다물고 남자의 인품에 호소하느냐.

병신이 되느냐. 또라이가 되느냐. 그 사이에서 천치처럼 고민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사막의 성자가 자하르의 본모습이 맞는다면 당연히 후자를 택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장석민은 본 게 있다. 아무리 본인을 해하려던 사람이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깨를 잘라버린 데다 총알을 막기 위한 방패로 삼기까지 했다.

그날 자신에게 했던 말이 아랍어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썩 좋은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 그르 덜컥 믿고 생명을 맡기자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지."

장석민은 중얼거리며 복도 앞을 서성거렸다. 계단을 오르내리길 수십회. 평소였으면 경호원들이 출입을 막았을 공간이지만 자하르 왕자의 특명이 있었기에 그를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의 대리석 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 장석민은 주먹을 쥐었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가자."

결심을 굳힌 후에 그는 과감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또 마음이 바뀌기 전에 차라리 저질러버리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여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장석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빗자루 여자다. 자신에게는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장석민은 제 맘대로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눈물이 가득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뛰어오고 있었다. 우는 여자오 정면으로 마주치자 장석민은 당혹감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우는 여자 따위, 대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우는 모습을 들켰다는 수치심 때문인지 그녀는 장석민을 노려보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내가 울린 거 아닌데……."

장석민은 쓴 입맛을 다시며 그녀가 나온 방향을 확인했다. 자하르가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알려준 방이었다.

"후우……."

마음이 열 배는 더 무거워졌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한 명의 후궁이 또 울면서 뛰쳐나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젠장. 이십 배다.

누군가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장석민은 문 앞에 섰다. 심호흡하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던 자하르가 장석민을 보고 눈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장석민은 지금이라도 달려들어 전화기를 빼앗아 달아나고 싶은 욕구를 꾸욱 누르며 소파에 앉았다.

통화를 마친 자하르가 장석민의 맞은편에 앉았다.

「비르마 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네? 제가요? 뭘요?」

찔리는 구석이 많은 장석민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듯 되물었다.

「저를 위해 며칠 간 쉬지 않고 아즈나둔을 하셨다고요.」

「아, 그거요.」

그때는 그것만이 살 방법이라 여긴 것이다. 잠시였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이유를 간접 체혐한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도움이 되었던 사람이기에 장석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흘렸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설마 네가 나를 도와준 가냘픈 여성은 아닐테고, 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 일을 보고 난 후라 그런지 장석민은 전처럼 자하르가 자애롭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옷자락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차를 드릴까요?」

「아? 예, 감사합니다.」

자하르가 테이블 위에 있던 다기에서 차를 따라 건넸다. 장석민은 두 손으로 황송하게 찻잔을 받아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러니까 하일 왕자님께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일의 이름을 꺼내자 자하르가 뭔가 생각났는지 일어서서 뭔가를 가져왔다.

「뭔가요?」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 진 편지봉투를 받아드는 장석민은 눈빛이 불안스레 흔들렸다. 봉투는 실링 왁스로 밀봉되어 있었다.

「혹시 찾아오시면 형님께서 전해주라 하시던데요.」

「네? 언제요?」

「오늘 오전에 사이프가 전해주고 갔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하일의 친필 서신에는 딱딱한 영어발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우아한 필기체로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도망을 친다면 다리를 자르겠다

빨간 잉크로 숫자까지 적어 놓았다.

짧고 강렬한 협박이었다.

편지를 받아든 장석민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는 것을 본 자하르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치떴다.

자하르가 묻자 정신을 차린 장석민이 황급히 종이를 접어 다시 봉투함에 넣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부 편지였습니다.」

「그런가요.」

상대가 둘러대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하르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하일과는 다르게 그는 품위를 아는 신사였다. 어째서 이런 남자가 그날은 그렇게…….

장석민은 피를 뚝뚝 흘리며 자신의 목을 조르던 악귀 같던 남자를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힘드시겠군요.」

자하르의 목소리에 장석민이 고개를 들었다.

「고향에서 먼 곳까지 오셔서 많이 힘드실 것 같습니다.」

꿀처럼 달콤한 위로 하마터면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장석민은 뻘게진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아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 나이 먹고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매일 밤 울면서 잠든다는 말은 절대로 못하는 것이다. 잔소리만 하던 형들도 보고 싶고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미여이, 경희, 선하, 영진이, 수지, 진경이, 리사, 아키코, …….

……돌아가고 싶어.

「이믈라쿤이 끝나면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

「남자 러마디 님들은 보통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혹시 원하신다면 더 머무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끝말은 미소로 흐렸다. 있으나마나 너는 평생 독수공방일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그, 그러면 그, 그냥 이믈라쿤 전에 갈 수는 없을까요?」

이믈라쿤이 끝나면 어차피 장석민은 죽은 목숨이다. 자하르가 지금 내민 것은 소용없는 티켓이었다.

「그러고 싶으십니까?」

「네!」

자하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형님께서 말씀하시길, 제 사진을 보고 후궁으로 들어오시길 자처하셨다고요.」

「……아, 그…….」

「실제로 보니 썩 흡족하지 않던가요?」

농담처럼 던지던 질문에 뼈가 실려 있었다. 하일이 생뚱맞은 동양인 청년을 보낸 의도가 선의가 아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흐, 흡족합니다. 완전 흡족, 아니, 그러니까. 잘생기셨습니다.」

상대가 여자라면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상대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쏟아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랑 같은 물건이 달린 남자에게 있지도 않은 호의를 표현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듣던 대로 관대하시고, 아, 그리고, ……음, 신사적이고 영어도 능숙하시고, 키도 크시고요.」

자하르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장석민은 등 뒤로 서늘한 한기가 스몄다. 자하르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장석민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좋으신 분 같습니다. 또, 뭐냐. 그래요. 하젤도 잘 지키시니 신념도 건강하시고요. 물론 신체도 건강하시죠. 완전 강하시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장석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찻잔에서 입을 뗀 자하르가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위험한 눈빛이다. 직감의 목소리가 장석민에게 속삭였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 하셨죠.」

자하르가 찻잔을 손에 쥔 채로 장석민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얼굴에서 목으로 손으로, 몸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으로 그가 인간 장석민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장석민은 재빨리 정신을 수습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

「네. 저,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뭔가요.」

「자하르 왕자님이 찾고 계신 분에 대한 것입니다.」

자하르가 짧게 웃었다.

「오늘따라 그분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많이 찾아오는군요.」

장석민은 아까 울면서 뛰쳐나간 여자 둘도 그 일과 관련이 있음을 확신했다.

「정말로, ……정말로 찾으시면 비로 맞이하실 겁니까?」

「그렇습니다.」

「……왜요?」

예상을 빗나간 질문이 날아오자 자하르가 차를 머금은 채 눈을 치떴다.

「아, 아니. 그러니까. 오래 기다려오셨는데 그런 걸로 비를 막 정해도 되는 건가 싶어서요.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동산 숫총각 따위 누구랑 결혼하든 알 바 아니다. 그 의중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막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하르가 소맷자락을 걷어 어깨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아직은 덜 아문 상처가 뱀이 기어간 자국처럼 흉하게 남아 있었다. 독을 빼내기 위해 장석민이 되는대로 상처를 낸 흔적이었다. 장석민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완벽한 예술품에 균열이 생긴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 터다.

「이건 신의 은총입니다.」

「네?」

「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자하르가 상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제 목숨은 신이 주신 것입니다. 거두시는 것도 신이죠. 그리고 이것도 신이 제게 주신 말씀입니다. 앞으로 계속 이 축복된 삶을 살아가라는 허락인 것이죠.」

무신론자인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제게 새겨준 이가 그분입니다.」

그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

자하르의 손가락이 찻잔의 테두리를 따라 움직였다. 장석민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어떻게든 그분께 은혜를 갚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 ……그분이 그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꼭 후궁이라는 증거도 없고.」

말을 해놓고도 장석민은 자신의 혀를 매우 치고 싶었다. 명색이 변호사라는 놈이 그따위를 질문이라고 한 거냐.

「증거는 있습니다.」

「──!」

「그날 제 상처를 동여맸던 천은 후궁들에게만 지급되는 옷감이었습니다. 안쪽에 자수가 놓여있습니다.」

장석민은 하하, 웃으며 슬쩍 자신이 입고 있는 옷자락을 들쳐 확인했다. 자하르의 말대로 안쪽에 은색 실로 새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타르카 왕국의 상징인 말라쿤입니다. 아나크 선왕을 도와 사막에 씨앗을 전해준 새입니다. 지금의 타르카 왕국이 있게 도운 신수라 정해집니다. 아름다운 새죠.」

옷자락을 다시 덮는 장석민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후궁 중 한 분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군요.」

「어떤 이유에서 앞으로 나서지 않는지 궁금하지만, 저는 그분을 반드시 찾을 겁니다.」

반드시, 에서 느껴지는 결연한 의지가 결코 반갑게 들리지 않았다. 장석민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입을 열었다.

「그날 그분에 대한 기억은 없으십니까?」

얼굴에는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자하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 나서지만 않으면 들키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도 괜히 벌집을 들쑤시는 꼴이 되면 어쩌지 싶어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자하르가 이 소리를 듣고 괜한 오해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자하르의 눈매에 수심이 어린다. 그가 음,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날의 기억은 없습니다.」

만세.

손이 절로 올라가는 것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장석민은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는 그렇군요, 하고 대꾸했다.

「이믈라쿤 기간에 궁에 자객이 침입했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입니다.」

담담한 말투였다. 사람을 설득하는 직업을 가진 장석민은 자하르가 가진 목소리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민감한 문제입니다. 자칫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많은 것들을 놓쳤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자하르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그 모습에 장석민은 일순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다. 이 나라 사람들이 8왕자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실 기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

호감 취소. 경계경보.

「아주 희미한 것들이 아슬아슬하게 기억의 수면을 오르내리는 상황입니다.모든 일을 바로잡으려면 그분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거구나.

자하르는 자신의 은인을 찾는 게 아니라 그날의 목격자를 찾고 있었다.

「아, 예……. 모쪼록 잘 해결되시면 좋겠습니다.」

우물우물 중얼거리며 장석민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저는 왕자님이 걱정되어서 그냥 찾아온 것입니다. 중요한 시기인만큼 몸조심하시고, 그리고, 그리고, ……혹시 이믈라쿤이 끝나기 전에 제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간신히 오늘의 목적을 내놓았다. 자하르가 글쎄요, 하고 뜸을 들인다. 장석민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못을 박기 위해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왕자님께서 다른 후궁과 결혼을 하시면, 그것도 저에게는, ……슬플 것 같아서요.」

슬프긴 하다. 이 세상에 다시는 손을 댈 수 없는 여자가 하나 늘 테니까. 목적어 없는 두루뭉술한 말을 던져놓고 장석민은 조마조마 자하르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 건은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장석민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생각해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하일 때문인가. 그 망할 중동 놈이 여기까지 훼방을 놓고 사라진 것인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놈이 그분일지 어찌 아느냐는 반문이었다. 장석민은 강하게 반론을 펼치고 싶었지만, 썩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분을 찾으신다면, ……저는 돌아갈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패를 던졌다. 자하르가 눈을 내리감은 채 찻잔을 만지며 물었다.

「제가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인가요?」

「네! 네! 네! 당연하죠. 미칠 것 같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진짜 미쳐버립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자하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장석민은 다시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남자를 상대로 작업을 걸어본 적이 없으니 모든 것이 서툴기만 했다. 여자라고 자신을 세뇌해도 소용없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데다 어깨는 옆에 서기 싫을 만큼 넓다. 얼굴이 아무리 아름답다해도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힘드실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배려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찾는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그분을 찾게 된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말은 공증을 받아야 하는데, 녹음기라도, 아니, 계약서를……. 지장이라도 받을까?

그의 불안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이 자하르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제가 한 말은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자하르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장석민은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았다. 자하르의 손가락이 장석민의 손을 움켜쥐고 두어 번 흔들었다.

장석민은 이것이 계약서와 같은 약속의 증표임을 알아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던 자하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원래 손이 차가운 편이신가 봅니다.」

「아, 조금 그런 편입니다. 긴장하거나 하면 더 차가워져서 약을 먹기도 했는데 좀처럼 낫지를 않네요.」

겨울에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장석민에게는 나름의 콤플렉스였다.

자하르가 그렇군요, 하고 혼잣말을 되뇌었다.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나려던 장석민을, 자하르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장석민은 눈을 깜빡였다. 이곳에 있으면서 누구도 자신에게 이름을 물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은 터다.

「장, 석, 민, 입니다.」

천천히 발음했다. 외국인이 발음하기엔 어려운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이름은…….」

「쟝, 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외국인들의 귀에 한국의 장씨가 Jean으로 들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장석민은 쓴 입맛을 다셨다. 심지어는 가운데 글자인 석을 Suck으로 알아듣고 짓궃게 놀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게 아니고, ……아닙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내도록 납으로 불렸으니 뭐라 불린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자하르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장석민은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찾으면, 돌려보내 준다고 했으니까."

장석민은 누구라도 좋으니 거짓 인어공주 노릇을 성공적으로 해주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에 울리는 차가운 발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그의 뒤를 따랐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장석민은 거울에 큼직하게 쓰여 있는 숫자를 보고 자조 어린 혼잣말을 했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되는 하일의 협박에 이제는 오기가 생긴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베일을 쓴 후 처소를 나왔다. 자하르에게 한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터라 전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물론 조건부였지만

"누가 좋으려나."

어떤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은인 역활을 해줄지에 대한 고민이 어젯밤부터 계속되었다.

거짓말을 완벽하게 하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자신의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믿는 정신병자형. 그리고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어 꼬리를 잡히지 않을 천재형.

"이 경우에는 둘 다 적절하게 갖추고 있으면 좋겠는데."

장석민은 머릿속으로 후보 몇을 추려 보려 했지만 적당한 상대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장석민은 자신을 납득시키며 걸었다. 오늘 수업은 야외에서 한다는 전언이 있었기에 파이룬의 정원 안쪽에 있는 커다란 정자로 향했다.

장석민이 나타나자 몇 명이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차피 나가게 될 남자 러마디가 끈질기게 수업을 나오자 썩 좋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장석민은 괘념치 않고 대충 뒤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적당한 상대를 물색하기 위해 관찰을 하러 온 것이다. 쓸데없이 후궁들과 마찰을 빚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마음껏 눈으로 훑자, 여자를 눈으로 즐길 여유가 생긴 그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저기요.」

빗자루다.

예쁜 여자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놓아 미안하긴 했지만, 마땅히 부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어요?」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자신을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내가 개도 아니고 장석민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확인 좀 할 게 있어서요.」

두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가 되자 여자는 말을 시작했다.

「그날 아무것도 못 보고 처소로 돌아간 게 맞나요?」

그날이 정확히 언제를 가리키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현재 후궁들 사이에서 자하르를 구하고도 나타나지 않는 미지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대체 어떤 년이야!

빗자루는 아무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인 청년을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신전으로 가는 계단에는 왜 오신 거였어요?」

「청소를 하러…….」

「보통 청소는 시종들이 하는 겁니다.」

장석민은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당신도 하고 있었잖아,라고 반론을 펼치고 싶었지만 여자를 상대로 몰아붙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목요일에는 기도를 드리러 그곳을 지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라이, 모르겠다.

장석민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줄줄이 내뱉었다.

「그래서 혹시 먼 곳에서 옷자락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새벽에 나가 계단을 청소했습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것 같은 거짓말을 늘어놓았는데도 빗자루는 장석민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럼 어제는 왜 자하르 왕자님께 찾아간 거죠?」

어제 자하르의 방 앞 복도에서 마주친 이유를 묻는 것이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구나. 장석민은 뜻밖에 날카로운 그녀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몸이 괜찮으신지 찾아 뵈러 갔었던 겁니다.」

「그뿐인가요?」

「네. 그뿐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여색을, 더불어 남색도 멀리하는 자하르 왕자에게 후궁들이 직접 찾아가서 말을 나눌 기회는 드물었다. 아니, 어제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철옹성 같은 그곳의 방문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는데 문을 두드리지 않을 후궁이 없는 것이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제처럼 직접 뵙고 말씀을 나눌 기회가 드물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가 뵈었던 것입니다.」

「그렇군요.」

빗자루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대답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터다. 여자를 상대로 하면 말을 이렇게나 잘하는데.

자하르 앞에서 바보처럼 버벅거리고 헛소리를 날리던 자신을 떠올리며 장석민은 혀를 내찼다.

「그런데, 어제 속상한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이번엔 자신의 차례였다. 장석민이 복도에서 마주친 일을 언급하자 빗자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있으셨나 걱정이 되어 여쭈는 겁니다.」

「제 걱정을 왜 갓 들어온 러마디 님이 하시는 겁니까. 눈에 먼지가 들어갔을 뿐이라고요.」

빗자루가 당당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놓고 되레 장석민에게 타박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자하르 왕자님을 볼 기회가 적다고 해도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는 분을 찾아가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빗자루가 오만하게 턱을 쳐들었다. 장석민은 그녀가 평생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일 거라 확신했다.

성격은 나쁜데 머리는 좋은 편인데다, 외모와 몸매도 일등급이다.

장석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빗자루를 훑어보았다.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빗자루를 마음속 후보 1번으로 올려놓고 장석민은 짤막하게 사과를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빗자루가 알면 됐어요, 하고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자리를 떠났다.

"적당히 말이 잘 통하면, 괜찮겠는데."

좋은 후보를 발견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장석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 왔는지 비르마가 후궁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백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서 비르마의 종이를 받아들었다.

「제가 돌리겠습니다.」

「그런다고 시험 성적을 올려주는 건 아닙니다.」

「……시험 봐요?」

금시초문이었다.

「모든 수업이 시험입니다. 모르셨나요?」

비르마가 다시 장석민의 손에서 종이를 건네받으려 했다. 장석민이 아니요,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건 원래 남자가 하는 거니까요.」

몸에 밴 예의였다. 장석민은 종이를 모두에게 나눠준 후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비르마가 그런 장석민을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어차피 쫓겨날 러마디가 쓸데없이 열심히 구는 모습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와디에 대해 공부할 것입니다. 와디는 타르카에 내려오는 전통 시입니다. 와디는 가락에 붙여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만드는 시입니다. 아시다시피 트리티는 아나크 왕의 고시를 시로 만들어 가락을 붙인 가장 유명한 와디입니다.」

노래에는 자신이 있는 장석민은 비르마의 설명을 들으며 흐뭇하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오늘은 다들 와디 한 편씩을 지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가장 훌륭한 와디는 나이마 비 전하께 들려드리는 영광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장석민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여자가 좋아한다는 모든 기술을 갈고닦아 연마했지만 유일하게 미지의 분야로 남겨두었던 것이 시였다. 읽고 암송하고, 소리내어 읊어보아도 장석민은 시라는 장르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시를 지어보라니. 안 되겠다. 작전상 후퇴다.

「오늘도 가장 못하는 사람은 경전을 베껴 써야 합니까?」

장석민은 손을 들고 물었다.

「당연하지요.」

비르마의 대답에 장석민은 들었던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앓는 소리를 냈다.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딜!」

비르마의 노기 어린 음성이 장석민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수업에 참석하는 것은 자유에 맡기지만 일단 참석하면 끝나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서릿발 같은 비르마의 기세에 눌린 장석민은 깊은 시름을 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경전을 베껴 쓸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백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났다. 비르마가 앞에서 해주는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경전을 어떻게 쓰지? 대신 돈이라도 주고 시동에게 써달라고 해볼까, ……내가 돈이 어디 있어. 하일에게 작전상의 비용청구를 해볼까. ……잘도 주겠다.

장석민은 한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다 마주친 눈동자에 놀라 그대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괜찮으신가요?」

자하르가 장석민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장석민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른 후궁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비르마가 황급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되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이 궁의 주인은 자하르 왕자님이십니다. 원하신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오실 수 있습니다.」

자하르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장석민은 살짝 배알이 뒤틀렸다. 자신보다 어린놈이 이 많은 여자를 거느린 것도 모자라 원하면 어느 침소에도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부러운 놈.

「늘 바쁜 시간에도 파이룬에 모여서 배움에 정진하신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자하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앉아있던 후궁들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장석민은 쳇, 하고 투덜거리며 턱을 괴었다.

「궁금해졌습니다. 언젠가는 제 옆에서 평생을 함께하실 분이 계실테니.」

그 한마디에 다들 난리가 났다.

장석민은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철옹성이라 불리는 자하르 왕자의 방문이 열렸다. 그런데도 그가 찾는 은인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자하르는 직접 목격자를 찾으러 오늘 수업에 참석한 게 분명했다.

그가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르마가 수업을 시작했지만 다들 잿밥에만 관심이 쏠린 상태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비르마가 몇 번이나 앞을 보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쳐도 소용없었다. 하얗게 센 그녀의 눈썹이 몇 번 꿈틀거렸다.

「설명이 필요 없으신 것 같으니 다들 그럼 직접 와디를 써서 제출하도록 하세요. 시간은 15분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시험에 다들 화들짝 놀라 펜을 집어 들었다. 턱을 괴고 앉아있던 장석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비르마를 바라보았다.

「뭐하세요? 14분 남았습니다.」

「아니, 그래도 뭘 좀 알려주셔야…….」

「와디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러마디 님이 느낀 타르카 왕국에 대한 느낌을 그대로 쓰면 되는 겁니다.」

「……외국인 우대 없어요?」

비르마가 씁, 하고 혀를 찼다. 장석민은 풀이 죽어 펜을 집어 들었다. 백지를 열심히 노려보았지만 애초에 있지도 않은 시상이 떠오를 리 없다.

그래. 일단 모국어인 한글로 작문하고 영어로 옮기자.

"……제목부터."

장석민은 종이에 큼직하게 글자를 써내려갔다.

사막을 나는 새.

어제 자하르로부터 타르카 왕국의 상징이라는 말라쿤에 대해 들은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멋진데."

제목을 지었으니 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에 장석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흐뭇한 미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말라버렸다. 그 이후로는 한 줄도 써내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장석민은 베일을 쥐어뜯으며 고뇌했다. 다른 후궁들도 힒들어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장석민만큼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10분 남았습니다.」

비르마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여기저기에서 펜이 종이를 달리는 소리가 울렸다. 장석민은 울상을 지은 채 종이만 노려보았다.

뭐라도 써야 하는데, 뭐라도……. 이 나라에 관련된…….

"──!"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장석민은 놓았던 펜을 집어 들었다. 비르마가 2분이 지날 때마다 남은 시간을 알려주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대충 한글로 써 갈긴 다음에 그걸 영어로 옮겼다.

「그만.」

비르마의 엄한 목소리가 떨어지자 여기저기에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펜을 놓으세요. 어서요. 거기!」

거기, 장석민이 울상이 되어 펜을 놓았다. 시녀가 주변을 돌면서 펜만 거두어갔다.

"……잔인한 노인네."

장석민은 누가 들을세라 조그만 목소리로 비르마를 원망했다.

「오늘은 자하르 왕자님께서 오셨으니 종이를 걷지 않겠습니다.」

8번. 8번. 행운의 숫자 8번.

장석민은 마음속으로 열심히 자하르를 연호했다.

「대신 한 명씩 차례대로 자신이 지은 와디를 읽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가 지목하는 순서대로 일어나서 읽으세요.」

"왜죠!"

저도 모르게 한국말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장석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최대한 차분하고 느긋한 목소리로 항의를 이어갔다.

「그냥 평상시대로 비르마 님께서 읽고 판단하시면 안 됩니까.」

장석민은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좌중을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한 후궁이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닥쳐. 동양인.」

서러움에 하마터면 장석민은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비르마가 장석민을 가리켰다.

「좋습니다. 거기 러마디 님부터 읽으세요.」

「네? 누구요?」

장석민은 펄쩍 뛰며 되물었다.

「지금 서 계신 거기 말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못 들은 척했다. 비르마가 지팡이로 장석민을 정확하게 가리키며 거기, 라고 거듭 외쳤다.

「쟝이라고 했었죠.」

자하르의 말에 좌중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저를 위해 읽어주실 수는 없을까요?」

자하르가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내가 미쳤냐. 남자를 위해 시를 읽게! 이 왕자 새끼야,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장석민에게 주어진 목숨은 단 하나였다.

장석민은 종이를 펼쳐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시기 어린 눈빛이 날아들어 왔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사막을 나는 새.」

자신이 쓴 시 중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을 읽고 나자 장석민의 손끝은 차갑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비르마가 눈을 부릅뜨며 다음 구절을 재촉했다. 장석민은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찬찬히 다음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펄펄 나는 저 말라쿤.」

저쪽에서 억눌린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비르마가 정숙을 외치며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다.

장석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많은 여성 앞에서 이런 식으로 수치를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건만. 젠장. 이왕 하는 거 최대한 멋있게나 하자.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음 줄을 읽기 시작했다.

「암수 서로 정다운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배우는 시조인 황조가였다. 중동 놈들이 황조가를 알게 뭐야 하는 마음에 장석민은 대놓고 황조가를 표절했다.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 그러니…….」

장석민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임이여 그 사막을 건너지 마오.」

이번엔 공무도하가였다. 물만 사막으로 바꾼 것이다.

주입식 대한민국 교육이여. 영원하라.

「임은 기어이 그 사막을 건너시어 그에 사막에서 길을 잃으시네.」

치켜 올라갔던 비르마의 눈이 아래로 내려온 것을 확인하고 장석민은 안심할 수 있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그는 심혈을 기울여 쓴, 자신의 남은 시구를 읽었다.

「엘시시여. 엘시시여. 어이한단 말인고.」

엘시시를 떠올린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여자가 애타게 부르짖던 그 이름이 장석민의 머리를 스친 것이다. 전통적인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와디는 전통 시이니 이런 부분이 꼭 필요할 거라 여겨 청자를 구체화시킨 작법이었다.

「사막을 나는 새여 나의 엘시시에게 날아가거라.」

사위가 고요했다. 다들 깊은 감동에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리라. 낭독을 마친 장석민은 뿌듯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상하리만치 딱딱하게 굳은 자하르의 표정이었다. 다음은 눈에서 불을 뿜고 있는 비르마. ……그리고 후궁들의 경악한 얼굴.

「……독창적인 와디군요.」

긴 침묵을 깨고 자하르가 뱉은 한마디였다. 그는 갑자기 일이 떠올랐다며 어색한 웃음을 띤 채 양해를 구한 후, 사라졌다.

「거기.」

비르마의 음산한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장석민은 예감했다.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은 하일의 손이 아니면 비르마의 손이 될 것임을.

맑았던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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