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35)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공책을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을 복도를 걸어가며 장석민은 일부러 소리내어 투덜거렸다. 도서관 입구에서 본 지기는 여전히 음산하고 무서웠다. 숙제를 아예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 어제까지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일이 찾아와 이상한 약이 든 와인을 내밀기 전까지는.

"이게 다 하일 때문이야. 외국인 우대 안 해줄 거면 노동자 우대라도 좀 해달라고 해야지, 원."

장석민은 그날 책을 꺼냈던 책장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갔다. 간신히 4구역의 8번째 책장을 찾은 장석민은 성인의 몸통만 한 경전을 꺼내 책상을 펼쳤다.

주변이 사위스러운 고요가 묵직하게 내리 앉았다. 펜이 종이를 가볍게 긁는 소리만 까작까작 울렸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앉아 경전을 쓰고 있으니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런 효과를 노리고 비르마 선생은 벌을 내린 모양이었다. 과연 사람이 이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괴발개발 글씨를 써내려갔다. 팔목이 마비되기 직전까지 써댔지만 결국 반도 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노트를 옆에 끼고 장석민은 팔을 주무르며 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 지기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여전히 시체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두려워져 장석민은 들고 있던 노트 끝으로 지기를 쿡, 한번 찔러야 했다. 시커먼 지기의 얼굴에서 흰자가 희번덕 움직였다. 장석민은 도망치듯 인사를 남기고 계단을 내려왔다.

아직 짐을 옮기기 전이었기에 장석민은 원래 묶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경전쓰기는 일 회가 는다는 사실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래도 괜찮다. 나에게는 한국으로 돌아갈 표가 있으니까.

가슴에 품고 있는 계약서를 문지르며 장석민은 발랄하게 걸어갔다. 문을 열고 처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장석민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들어 와.」

울상을 짓고 그는 다시 안으로 들어섰다. 사이프가 장석민을 안으로 잡아당기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하일이 턱짓을 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기에 장석민은 쭈뼛거리며 앞으로 다가섰다.

「와인은?」

「자하르 왕자님께 드렸지만 딱 한 모금만 마시고 남기셨습니다.」

「나머지는 네가 처먹었다고?」

알면서 대체 왜 묻는 것일까. 장석민은 힘없는 어투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자하르 왕자님께서 술에 이상한 것이 섞여 들어갔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셨습니다. 남은 술은 증거 인멸로 제가 마셨습니다.」

아무리 아버지 배경으로 입사했다 하더라도 장석민은 변호사였다. 말로 벌어먹고 사는 그의 재간에 하일도 강하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말라쿤 상을 세운다?」

내가 세우는 거 아니라고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장석민은 가슴 속에 품은 한국행 티켓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10미터짜리 황금상을 세워준다지?」

「네? 황금, 잠깐,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었다. 장석민은 손을 내저었다.

「와전됐습니다. 그냥 동상입니다. 그것도 3미터요.」

「10미터라던데.」

그건 그냥 자신이 한 말일 뿐이었다. 장석민은 맹렬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리고 황금도 아니에요. 그냥 돌로 만든 상일 겁니다. 철이거나, ……구리일 수도 있고요.」

하일의 앞에서는 자신의 공을 최대한 깎아내려야 한다.

「에드문트 회장이 기껏 쇳덩이로 만든 동상을 보내면서 그렇게 생색을 낼 것 같아?」

하일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장석민은 억울했다. 그놈의 동상, 본인이 세워달라고 한 적도 없건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 동상이 세워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아는가?」

「모, 모릅니다.」

장석민은 딱 잡아뗐다.

「모든게 자하르의 공으로 돌아간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하일의 옆에 있는 반달 모양의 칼집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장석민은 울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날은 저 때문에 하일 왕자님도 목숨을 구하셨잖아요. 그럼 하일 왕자님께도 좋은 거 아닌가요? 말라쿤의 기운이 하일 왕자님께도 깃든 거라고 주장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하일의 탐욕스러운 눈이 번들거렸다.

「그래. 그거 나쁘지 않겠군. 말라쿤의 현신을 내가 가지면 되는 거잖아. 하하하하.」

제 무덤을 제가 파고 관까지 짠 격이었다. 장석민은 3초 전으로 돌아가 자신의 주둥이를 묶어버리고 싶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옆에 있던 사이프가 입을 열었다. 하마터면 장석민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사이프에게 절을 할 뻔했다,

「뭣이?」

「아시다시피 선물한 것은 주인이 내치기 전에 빼앗아 올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취하시려 한다면 도리어 하일 왕자님의 평판이 나빠질 것입니다. 숙고해주십시오.」

잘한다. 사이프.

장석민은 주먹을 쥐고 그를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다가 사이프에게 호되게 걷어차였다. 하일의 표정이 다시 살벌해졌다. 자신이 장난감처럼 던져준 동양 놈이 자하르에게 유용하게 사용된다는 사실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터다.

「잘 들어라.」

하일이 장석민의 얼굴을 매섭게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말라쿤의 현신이니 뭐니 하는 헛소문 따위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너 같은 놈이 이믈라쿤에 영향을 줄 리 없으니까.」

「…….」

조금 전까지는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냐고 방방 뛰던 놈이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말라쿤의 현신이라고 소문이 났던 네놈과 자하르가 더러운 추문에 휩쓸린다면 그건 영향을 주겠지.」

하일이 장석민의 어깨에 두꺼운 손을 얹었다. 갑작스럽게 전해지는 손아귀 힘에 장석민은 윽, 하고 신음을 삼켰다.

「네가 자하르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나는 그날로 네 목숨을 거두러갈 것이다. 알겠는가?」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외치려다 점점 더해지는 손아귀 힘에 장석민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갖 욕설을 섞은 협박을 몇 마디 더 날린 다음에 하일은 사이프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

하일과 자하르의 요구를 적당히 수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예고하는 서막이 시작되었다.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나요?」

맞은편에 앉아있던 자하르가 묻자 장석민은 얼른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부은 눈으로 차가운 손이 최고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배운 그였다.

「어제, 경전을 베껴 쓰느라…….」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경전을 베껴 쓰다 돌아왔는데 빌어먹을 하일 놈이 협박을 남기고 돌아간 터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다.

밤새도록 고민하던 장석민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지내다가 조용히 한국으로 사라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비르마 님이 매우 엄하시죠.」

자하르가 이해된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옆에 있던 비서에게 서류를 건네받은 그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그의 모습에 장석민은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라는 게 누가 보지 않으면 적당히 느슨해지는게 당연한데 자하르는 늘 구김 하나 없는 옷에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이믈라쿤이 끝나도 저런 사람이 여자랑 자기는 하는 걸까."

한국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하르가 슬쩍 시선을 올린다. 장석민이 아닙니다, 하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오늘 오전부터 차출되어 이동 중이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장석민은 말없이 창밖을 주시하다가 이따금 자하르와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자하르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그를 대했다. 비서는 남자 러마디가 자하르 왕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멈추고 비서가 서류를 정리했다. 먼저 내려봤자 할 일도 없는 장석민은 꾸물거리다가 마지막에 차에서 내리게 되었다. 자하르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석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장석민은 잠시 고민하다 손끝으로 자하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자하르가 보지 않는 사이 닿았던 손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장석민은 고개를 돌렸다.

금색의 건축물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장석민은 저거 금은 아니죠? 라고 물었다가 비서의 싸늘한 눈길을 받았다.

「모두 금입니다.」

「……. ……저게 다요?」

어림짐작 저 지붕 한 짝만 뜯어 팔아도 3대가 평생을 호사롭게 지낼 수 있는 크기였다.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호화로운 금장식이 여기저기 보였다.

「여긴 뭐하는 곳인가요?」

「국빈들을 대접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정원을 지나며 장석민은 자신이 이런 곳에 와도 되는가 하는 생각에 걱정이 들었다. 자하르가 자신을 중요한 장소에 대동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하일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다.

「괜찮습니다.」

상대의 낯빛에서 근심을 읽었는지 자하르가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별다른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자하르의 말대로 장석민에게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국빈들을 맞이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모두 자하르가 맡았다. 장석민이 한 일이라고는 사람들과 한번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장석민은 외따로 떨어져 앉아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구경하다 밖으로 나왔다. 정원을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일을 마친 자하르가 그를 데리러 나왔다.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덕분에요.」

장석민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은 저기 정원 연못에서 물고기 숫자를 센 것뿐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최대한 있는 둥 마는 둥, 조용히 지내야 한다. 자신에게 공이 돌아오는 것만큼은 한사코 막고 싶었다.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인가요?」

「아니, 몇 군데 더 들를 곳이 있습니다. 피곤하신가요?」

장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따라다니는 일만 하는 거라면 밤새도록 할 수도 있다. 자하르가 감사인사를 했다. 미안했다. 준 것도 없이 받기만 하니 영 미안한 기분이 들어 장석민은 마음이 썩 편치 않았다.

그날 자하르를 따라 장석민은 총 세 번의 자리 이동을 했다. 그때마다 자하르는 장석민을 인사시키고 자신의 볼일을 보았다. 장석민은 멀뚱멀뚱 주변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였다. 자하르가 모든 업무를 마치고 나니 결국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꼼꼼하게 서류를 읽고 있는 왕자의 모습에 장석민은 차라리 능력으로 왕을 선출했으면 이 사달이 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피곤하세요?」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피곤해 보입니까?」

「피곤하실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자하르가 말없이 웃었다.

「스트레스 해소도 못 하실 텐데 힘드시겠어요.」

포도주가 아닌 술을 마실 수 없다고 들었다. 여자도,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데 대체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혹시 스트레스를 아예 안 받는 성격인가요?」

가끔은 있다. 그런 성격이. 매사를 저 좋은 대로 생각하고 남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서 세상이 마냥 편한 행복한 이기주의자들. 장석민의 둘째 형이 그랬다.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자하르라면 다른 의미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하르가 읽고 있던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저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해소도 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적당히, 라고 말하는 투에 웃음이 묻어났다.

「운동 같은거 하시나요?」

「그런 셈이죠.」

며칠 전에 자신을 힘들이지 않고 번쩍 들어 올리던 것을 떠올리면 운동을 취미 수준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운동을 주로 하시나요? 저도 운동 좋아하는데, 언제 한 번 같이?」

차 안이 하도 썰렁해서 던져본 농담이었다. 자하르가 물끄러미 장석민의 얼굴을 훑었다. 이전에도 한 번 느꼈던 시선이다. 피부를 뚫고 서늘한 감각이 지나간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혹시 굉장히 무례한 발언을 한 것인가. 장석민은 어, 그게,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자하르가 웃으며 말했다.

장석민은 손바닥에 밴 식은땀을 옷에 문질렀다. 차가워진 손끝을 얼굴에 대었다. 천천히 피가 돌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긴장했다. 요즘 계속 상황이 좋지 않아 지나치게 신경이 곤두선 탓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추고 비서가 자하르에게 말을 건넸다. 인사를 한 후 비서는 차에서 내렸다.

「저분은 어디 가시는 건가요?」

「집으로 갑니다.」

「같이 궁으로 가시는 게 아니고요?」

「라겔은 궁 밖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장석민은 저런, 하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밤중에 차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려면 제법 힘이 들 텐데…….

「……저 포르쉐가 설마 라겔의 차는 아니겠죠?」

방금 차에서 내린 비서가 붉은색 포르쉐에 올라타는 모습에 장석민은 중얼거리듯 물었다.

「저번 달에 새 차를 받았으니, 아마 라겔의 차가 맞을 겁니다.」

「지급? 누가 저런 차를 지급해줍니까?」

「나라에서 해줍니다. 한 가구당 세 대의 차가 지원됩니다. 라겔 같은 경우에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 소유로만 세 대까지 가능합니다.」

장석민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나라에 돈이 그렇게 많습니까?」

최대로 순화한 표현이었다. 국민에게 한 가구당 세 대의 차를 지원해주려면 돈이 얼마나 소요될지 어림직작으로 계산해보고 뱉은 말이었다. 돈이 썩어 넘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네.」

겸양의 미덕을 보일 거라고 믿었던 자하르에게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장석민은 눈을 크게 치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광산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장석민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남아프리카? 아니, 러시아 아닌가요?」

얼마 전에 일었던 신문기사를 떠올리며 답했다. 다이아몬드 가격 하락을 우려해 채굴도 하지 않은 채, 비밀을 유지하고 있던 광산이 러시아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현재는, 그렇습니다.」

현재는, 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눈치 빠른 장석민은 대번에 알아챘다.

「……석유도…….」

시찰단과 같이 갔던 플랜트 현장은 석유와 관련된 사업이었다. 그 독일 놈도 세계 굴지의 정유회사 회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석유의 매장량은 다이아몬드보다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국토의 어디를 파도 석유 아니면 다이아몬드가 나오는 나라라니.

「여기 이민 받습니까?」

자하르가 웃음을 삼키며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좋겠네요. 이 나라 사람들은. 일하지 않아도 돈이 땅에서 나오니까.」

말해놓고 나니 약간 비꼬는 투가 된 것 같아 아차, 싶었다.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자원은 기간 내에 생산되는 양이 한정적입니다. 여러 가지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채굴 가능 연수도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의 문제 역시 생각해둬야만 합니다.」

남자의 사려 깊은 어조에 장석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런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국민들은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하나만 여쭤 봐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

「어째서 왕이 되고자 하십니까?」

머릿속에 계속 맴돌던 질문이었다. 성품이 훌륭하고 성자처럼 인지하다는 사람이 왕위 계승을 위해 그렇게까지 집착을 보인다는 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큰 뜻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그 개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만큼 장석민은 머리가 나쁘지도 둔하지도 않았다.

「잘 되면 좋겠네요.」

내가 살 나라도, 이민 올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누가 되든 알아서 잘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모든 것은 신이 뜻대로 순조롭게 흘러갈 겁니다.」

자하르의 목소리가 사뭇 경건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눈 붙이세요. 아직 한참 더 가야 할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내일 어떤 이야기가 퍼질지 알 수 없지만 되도록 자신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길 바라며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음──.”

 장석민은 입을 다문 채 소리를 냈다. 지나가던 시종들이 옷자락을 만지고 가는 횟수가 늘었다. 썩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꽃을 꽤나 받았다. 전에는 문 앞에 두고 가더니 지금은 처소를 옮긴 탓인지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하면 사람들이 꽃을 건넸다. 이 역시 유쾌한 전조가 아니었다.

 한 다발 정도 모인 꽃을 손에 달랑달랑 들고 장석민은 늘 앉던 테이블에 앉았다. 하캄이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네? 밥 먹으려고 왔는데…….」

「리문에서 드시지 않고?」

 리문은 자하르가 머무는 건물의 이름이었다. 장석민이 제가 왜요, 하고 되물었다.

「처소를 거기로 옮기셨으니 당연히 그쪽에서 드셔도 됩니다.」

「여기가 더 편해서요.」

 장석민은 시종이 가져온 빵과 과일을 먹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는 사람이 너무 없더라고요.」

 그곳은 자하르 왕자 한 명을 위한 건물이었다. 시종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자하르는 출타 중일 때가 대부분이라 실질적으로 축구장만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은 장석민 하나뿐이었다.

 그런 곳에서 혼자 앉아 식사하는 것은 아무리 곱게 자란 판사 댁 막내아들이라도 부담스러웠다.

「어제 러마디 님이 동행하신 일은 모두 잘 해결되었다지요.」

 빵을 먹던 장석민이 그래요? 하고 되물었다. 어제 사람들을 만났던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는 일절 묻지 않았다. 적당히 술렁술렁 지내다가 이곳에서 사라지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모두 좋은 성과가 있다고 합니다.」

「……음, 그렇군요.」

 다행이라고 덥석 말하기엔 뒷감당이 어렵다. 하루는 잘 풀렸으니 하루는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서 공을 쳐야 하나.

「오늘은 국왕 전하까지 뵈신다 하시니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우유를 마시고 있던 장석민은 그대로 희뿌연 액체를 뱉어냈다. 쿨럭, 쿨럭, 기침하는 그의 등을 하캄이 다정하게 다독여주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국왕 전하라니요? 누가요? 내가 만난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왜요?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왜!」

「일전에 있었던 에드문트 사의 일도 그렇고 어제의 회담도 성공리에 마무리가 잘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얗게 질린 머릿속에 피가 도는 데 한참이 걸렸다.

「……내가 국왕 전하를 만난다는 사실을 누구누구 알아요?」

 하일의 귀에 이 사실이 들어가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다. 하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글쎄요, 하고 대답했다.

「일단 저는 압니다.」

「누구한테 들었어요?」

「정원사에게 들었습니다.」

「……정원사는 누구한테 들었을까요?」

 하캄이 저 멀리서 물통을 가지고 지나가는 남자를 보며 큰소리로 외쳐 물었다. 남자가 물통으로 저 멀리서 비질을 하는 시종을 가리켰다. 아랍어를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장석민은 그들이 나눈 대화를 상황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봐, 이분이 국왕 전하를 만나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나? (고래고래)

 -나? 그 러마디가 국왕전하를 만난다는 얘기? 저기 저놈! (고래고래)

 하캄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서 비질을 하는 후무라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후무라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물어봐 드릴까요?」

「……아니에요.」

 이런 식이라면 10분도 되지 않아 궁내의 모든 사람에게 퍼질 것이다. 장석민은 빵 하나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못 본 걸로 해주세요.」

 온종일 도서관에 처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전을 베껴써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면 그 비밀통로에라도 들어가 있으면 그만이다.

「누구한테 그렇게 전해드릴까요?」

「누구든, 저 찾는 사람한테.」

「저분들이요?」

 하캄이 가리킨 곳에 자하르의 수행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못 본 척 돌아서서 빠르게 걸음을 옮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팔을 붙들리고 말았다.

「잠시만요. 저 잠깐 갈 데가 있어서 그러는데요.」

 장석민이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수행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이라니까. 잠깐만, 잠깐이면 됩니다.」

 장석민이 아무리 사정하고 빌어도 소용없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장석민을 끌고 갔다.

「참으로 죄송하고 송구한 말인 줄 아는데…….」

 연녹색 타브를 입은 자하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했다. 유난히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의 뺨에 혈기가 돌았다. 드물게 보이는 앳된 미소였다. 이번 알현은 자하르에게 좋은 징조였다.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장석민은 알아챘다. 그런 자하르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저는 국왕 전하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면 체할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만남이 자하르가 청한 것이 아니라 국왕이 직접 마련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되도록 장석민은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차만 마실 것입니다. 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 걱정을 저는 떨칠 수가 없습니다. 말도 안 통할 텐데…….」

「국왕께서 뭔가를 물어보실 때 제가 눈을 한 번 감으면 그렇다고 답하시고 두 번 감는다면 아니라고 답하시면 됩니다.」

 그럴 거면 왜 데려가는데! 차라리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된 녹음기를 건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불퉁한 얼굴로 복도를 걷던 장석민은 그런데요, 하고 말문을 열었다.

「어제 일은 어떤 회담이었기에, 국왕 전하께서 친히 말씀을 전하겠다고 하시는 건가요.」

「원유 시추권 문제로 근방 소수 민족과 수십 년간 영토 분쟁이 있어왔습니다. 어제 하나가 그에 관련한 회담이었고 그리고…….」

 말만 들어도 가슴이 턱, 막힐 만큼 막중한 일이었다.

「……말만 한 거죠? 해결되거나 하지는 않았죠?」

 혹시나 하는 기대에 장석민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덕분에.」

 덕분에, 라는 표현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날아 들어와 장석민의 정수리에 꽂혔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다 해결해두시고 저만 일부러 데려가신 거 아닙니까? 국왕 전하께 그렇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일의 성사는 모두 신이 계획하신 대로입니다. 인간은 신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다 니가 세운 공이잖아! 왜 말을 못해! 니가 그간 다 밑 작업해서 구워놓은 케이크에 체리만 얹은 거라고 왜 말을 못하냐고! 장석민은 그 자리에서 자하르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고 싶은 것을 참아내느라 힘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이 일이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하일의 귀에 들어갈 텐데. 그때는 대체 뭐라고 둘러댄단 말인가. 그래. 중도를 지키지 못할 거면 차라리 깔끔하게 이편에 서고 리문에서 나오지 말자. 그러면 된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국왕이 기다리고 있는 알현실로 들어섰다. 장방형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장석민은 힉, 하고 뒷걸음질쳤다.

「늦었군.」

 하일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전 자하르의 생일 연회에서 본 왕자들이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원망스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장석민의 상황을 알 리 없는 자하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무슨 일이냐고 눈짓을 할 뿐이었다. 장석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앓느니 죽지.

 자하르는 장석민의 의자를 내어주고 자신 역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홉 명의 왕자와 한 명의 동양인 청년이 앉아있는 기괴한 상황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묘한 긴장이 흘렀다.

『남자 후궁을 데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이었군.』

 하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석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하일과 자하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일 형님의 말씀대로 자하르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을지도 모르는 거지요.』

 장석민은 테이블에 앉은 순서를 세어 보았다. 방금 말한 것은 넷째.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남자 비를 들이는 것도 방법일 것 같습니다.』

 저건 여섯째.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여덟, 아니 자하르다. 오가는 대화가 썩 좋은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한마디만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에 문이 열리고 타르카 왕국의 국왕 리아드 빈 무크라르가 걸어 들어왔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뒤뚱거리며 상석의 왕좌에 앉을 때까지 모두 시선을 내리고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무크라르 국왕이 손을 두어 번 흔들어 모두 착석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둥그스름한 배 위에 놓인 보석으로 장식된 요대가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손가락마다 끼고 있는 반지에도 눈깔사탕만 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들었던 열 손가락에 다이아 반지.

 장석민은 입을 떡 벌리고 땅만 파도 석유와 다이아몬드가 쏟아져 나오는 나라의 왕을 구경했다.

『모두 오랜만에 모이는구나.』

 근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서로 기뻐하며 축하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장석민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가시방석 같은 자리인데 알아듣지도 못하는 대화가 오고가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모두들 알다시피 하일과 자하르가 큰일을 성사시켰다. 나라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알아들은 것은 자하르와 하일뿐이었다. 에드문트 사의 일을 거론 중인 것 같았다.

『어제는 선왕 하룬 리아드 때부터 이어지던 숙원이 해결되었다.』

 국왕의 시선이 자하르에게 머물렀다.

『이 또한 자하르의 공이다.』

 일순 앉아있던 왕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장석민은 무크라르 국왕이 대놓고 자하르를 칭찬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모든 것이 위대하신 무크라르 전하와 신의 은총입니다.』

 자하르가 대답했다. 물 흐르듯이 유려하고 담담한 어투였다. 자하르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평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는데도 장석민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분의 도움이 매우 컸습니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던 장석민은 일제히 왕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음을 깨달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말라쿤의 현신이라고?』

 국왕의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장석민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뭔지 모르겠지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가 돌 뿐입니다. 전하.』

 하일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목숨까지 구했다지?』

 국왕의 질문에 하일이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우연히 그리되었습니다.』

『우연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신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무크라르 국왕의 단호한 어투로 말하며 장석민을 가리켰다.

『일어나 보아라.』

 장석민이 놀라서 저요? 하고 자신을 가리켰다. 자하르가 낮은 목소리로 일어나세요, 하고 속삭였다.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나자 왕자들이 자신을 향해 얼마나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단박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름이?」

 하일보다 더 알아듣기 힘든 영어였다. 장석민은 최대한 공손한 어투로 쟝입니다, 하고 대꾸했다.

「그대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는가?」

 장석민이 불안한 얼굴로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자하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렇다고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장석민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신께서 머나먼 나라에서 온 그대를 특별히 아끼시는 것 같군.」

 그건 아니지! 당신네 신이 지금 나를 얼마나 엿 먹이는 줄 알아! 그간 먹은 엿 때문에 배가 터질 지경이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 세상을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근래 몸으로 잘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장석민은 겸손한 낯짝을 꾸미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대는 말라쿤이 아니크 왕을 도와 이 아름다운 사막에 나무가 자라고 풀이 돋아나는 기적을 이루게 한 것처럼 앞으로도 좋은 일들을 이어지게 하라.」

 국왕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장석민은 울상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자하르가 그의 앞으로 찻잔을 밀어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받아들고 공중에 들어 올렸다. 국왕이 차를 마시고 나자 모두들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자, 이제 차를 마셨으니 돌아갑시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눈짓을 했다. 여기 더 있어봤자 좋은 꼴은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하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 말라쿤의 현신이라는 저 동양의 청년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오, 그런가?』

『말라쿤에 관련된 아름다운 와디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한 번 들어 보기로 하지.』

 왕자들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좋지 않다, 심히 좋지 않은 느낌이야. 장석민은 자하르를 향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하르의 표정이 사라졌다.

 시발. 좆 됐다.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잔느?」

 국왕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에 장석민은 그 얄미운 꼬마 놈이 떠올랐다. 저 이름으로는 두 번 다시 불리고 싶지 않았는데.

「잔느라고 했지.」

「그게…….」

 자하르가 장석민의 소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토를 달지 말라는 의사 표현임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었다.

「노래를 불러라.」

 장석민은 네? 하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 개소리를 뭐 그렇게 근엄하게 하는 건데?

「말라쿤의 노래를 불러라.」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장석민의 자하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에 난색이 스쳤다. 

 설마 지금 그 빌어먹을 와디를 부르란 뜻은 아니겠지?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지금 나한테 그거 부르라는 건 아니죠?」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석민이 이를 악물고 하일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가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빌어먹을 개놈의 중동 놈이 뭐라고 지껄인 거야!

「어서.」

 무크라르 국왕이 장석민은 재촉했다. 장석민은 울고 싶었다. 아버지가 아끼던 고려청자를 깨트렸을 때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확신할 수 있다. 열 손가락에 다이아 반지를 끼고 느슨하게 앉아있는 무크라르 국왕 앞에서 말자지 타령을 불렀다간 이 자리에서 즉각 참수다. 이건 쪽팔림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곳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이요.

 잠시 생각하던 자하르가 죄송합니다, 하고 들릴 듯 말듯하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장석민의 손목을 잡았다. 징그럽게 뭐하는 짓이냐고 버럭 하기 전에 장석민은 억, 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하르가 한 손으로 풀썩 쓰러지는 장석민의 몸을 받아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 장석민의 손목을 눌렀다. 장석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헐떡거렸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금세 그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몸을 뒤로 젖혔다. 여전히 손목을 누르고 있는 채로.

“허, 윽──, 뭐──.”

 눈앞이 핑핑 돌아 이대로는 죽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하르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장석민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여전히 손목은 누른 채였다.

『죄송합니다. 잔느가 워낙 몸이 약해서 조금만 긴장을 하면 이렇게 쓰러지곤 합니다.』

『저런.』

 무크라르 국왕이 혀를 찼다.

「괜찮으신가요?」

 자하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장석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손을 놓아달라고 요구했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자신이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손, ……, ……좀…….”

 그러나 자하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으신가요.」

“시……, 바……. 손…….”

 자하르가 말 그대로 쥐면 깨질 듯이 연약한 새끼 새를 대하듯 장석민을 안아 올렸다. 물론 외투 안쪽으로는 손목을 으스러질 듯이 누르고 있었다.

“이, 새, ……끼, 이, …….”

「먼저 물러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하르가 국왕에게 퇴궁을 요청했다. 무크라르 국왕이 어서 가보라며 손짓을 했다. 장석민은 그렇게 자하르의 외투에 안긴 채로 알현실을 나왔다. 복도 모퉁이를 돈 후에야 자하르는 외투에서 손을 빼냈다.

 물에 빠졌다 건져진 사람처럼 장석민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하아, ……하아, ──하아.”

 입을 벌리고 한참을 숨을 몰아쉬고 난 후에야 얼굴의 혈색이 제 상태로 돌아왔다. 머리 위에서 자하르의 죄송합니다, 하는 사과가 들렸다.

「대체, 뭘……, 어떻게…….」

「손목 아래에 하와라는 급소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누르면 호흡이 힘들어집니다.」

 듣도 보도 못한 급소였다. 그러나 손목을 들어 확인해볼 힘도 없었다. 아직도 온몸이 저릿저릿해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자하르가 깍듯이 사과했다. 호흡곤란으로 치밀었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장석민은 그가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제정신이 돌아오고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자 그의 머리에도 수치라는 감정이 점점 고개를 들었다.

「이제 걸을 수 있습니다.」

 저번에는 약에 취해 본의 아니게 쌀부대처럼 어깨에 매달려갔다지만 이번엔 그도 아니다. 한 손으로는 장석민의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 아래부근을 받치고 있어, 아무리 좋게 본다 한들, 우정 어린 이동이라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보는 눈이 많습니다.」

「네?」

「긴장하면 쓰러지는 연약한 체질이라고 말해두었습니다.」

「누가요? 제가요?」

 장석민은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리 자신이 자하르보다 머리 하나는 작다 하더라도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옷을 입으면 언뜻 말라 보였지만 근육 때문에 보기보다 몸무게도 제법 나갔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연약하다는 말을, 하하하, ……다들 믿어요?」

 알현실 안에서는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물음을 듣고 자하르가 애매하게 웃었다.

「글쎄요.」

「저라도 안 믿을 것 같은데요.」

 그나마 자하르가 급소를 눌렀기 때문에 장석민이 실제로 호흡곤란을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연약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따랐다.

「작은 몸이긴 하지요.」

「……네?」

「쟝은 작고 가는 몸입니다.」

 장석민은 허, 하고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상대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수치라는 것이 있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 평균 신장에서 5cm는 큰 키였다. 장석민이 허허로운 웃음을 짓다가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숫총각 주제에…….”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빨리 사람 없는 곳으로 가야겠네요. 자하르 왕자님께 안 좋은 소문이 들까 봐 죄송스럽습니다.」

 자신을 살려주었으니 장석민은 중도를 가장한 8번 파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윗사람이 당연히 가져야 할 미덕입니다.」

 병자를 돌보는 나이팅게일 같은 성스러운 자태였다. 안겨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죄책감을 느끼게 할 만큼.

「죄송합니다. 여자도 안아보지 않으셨을 텐데 저 같은 남자를 먼저, ……말이 좀 이상한데, 아무튼 죄송합니다. 제가 자하르 왕자님을 더럽히는 기분이 드네요.」

 더럽힌다는 표현이 어폐가 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석민으로서는 자하르에게 건네는 공손한 유감의 표시였다.

「──.」

 또다.

 장석민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신가요.」

「아닙니다.」

 분명히 들었는데. 분명히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한 생각이다. 조금 전에도 자신을 도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인데. 신경이 너무 곤두서서 별것이 다 거슬리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마음을 너르게 먹자고 다짐하며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안고 가실 겁니까?」

「차가 준비된 곳까지는 이러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불편하신가요?」

 고개를 내저었다.

「불편한 게 아니라, ……, 아닙니다.」

 남자끼리 닭살이 돋아서 진땀이 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설정상으로 자신은 자하르에게 이루지 못할 연심을 품고 있는 러마디였으니까.

「힘 빼세요. 어색해 보입니다.」

 저 멀리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자하르가 낮게 속삭였다. 장석민은 최대한 그의 가슴에 얼굴이 닿지 않도록 노력을 하며 힘을 풀었다. 축 처진 성인 남자의 무게를 한손으로 지탱하며 자하르는 힘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팔과 가슴이 너른 바위처럼 단단했다.

 이런 몸으로 섹스한다면 여자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잠시 머릿속을 스친 불경한 생각에 장석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당분간은 좀 힘드실 것 같습니다.」

「네? 저 말입니까?」

「구색을 맞춰야 하니까요.」

 장석민은 그때까지도 자하르의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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