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 흐흐……, 하.”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길 수 번.
유난히 눈이 부신 푸른 하늘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뒤에서 장석민의 휠체어를 밀어주던 수행원이 괜찮냐고 물었다.
장석민은 기침을 두어 번 한 후에 괜찮다고 대충 손을 흔들었다.
최소한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것을 사람들이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자하르의 그 말을 들었을 때 장석민은 물개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방구석에 잇을게요. 저 그거 잘합니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장석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장석민은 물었다. 설마 저도 가야 하는 건가요?
더 이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자하르가 다 차린 밥을 숟가락만 얹어 칭송을 받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하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다 차린 밥상을 장석민의 앞으로 내밀었다. 은인이 내미는 밥상을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장석민은 울면서 숟가락을 얹어야만 했다.
결국 장석민은 휠체어를 타고 자하르의 뒤를 따랐다. 발작을 일으켰음에도 타르카 왕국의 발전을 위해 허약한 몸을 불사르는 인물로 그날의 역할을 성공리에 마쳤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룰루랄라 두 발로 걸어나가려는 그의 앞을 꼴보기 싫은 하일이 가로막아 선 것이다. 그는 느물느물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팔팔해 보이니 아바마마께 같이 찾아가서 노래나 한 곡조 하라고. 수청을 들라고 염병을 떠는 변 사또가 따로 없었다. 장석민은 결국 다시 자하르의 손에 이끌려 발작을 일으켜야 했다.
그리고 지금이다.
“후우…….”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자하르가 보기로 한 업무가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꼴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발작이 일어날 것 같으면 말씀하십시오.」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장석민은 네, 하고 힘없이 대답했다. 이럴 때 아니면, 겨울에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건강체가 언제 휠체어를 타보겠는가.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자.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휠체어에 몸을 기댔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하는 일 없이 앉아만 있는 것이 지루해 견딜 수가 없었다.
두어 시간 뒤에 드디어 회의를 마쳤는지 걸어 나오는 자하르의 모습이 보이자 장석민은 반가움에 벌떡 일어섰다. 자하르가 앉아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휠체어에 앉으면서 장석민은 헛웃음을 삼켰다.
살다 살다 남자를 보고 이렇게 반가워하는 날이 올 줄이야.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자하르가 수행원 대신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장석민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저……, 뛰어가도 될 것 같은데요.」
「알고 있습니다. 주차되어있는 곳까지만 이렇게 가시면 됩니다. 오늘 만나신 분 중에 하일 형님의 외숙부 되는 분이 계십니다.」
장석민은 일부러 저쪽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하일과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발을 걸치고 싶지 않았다.
주차된 리무진 앞에 도착한 장석민은 최대한 힘없이 비틀거리며 차 안으로 들어갔다. 자하르가 탄 후에 수행원이 차 문을 닫아주었다.
「오늘은 비서분은 안 오셨나요?」
「일이 있어 바로 퇴근하기로 했습니다.」
그날 보았던 빨간색 포르쉐가 때마침 옆으로 지나갔다. 장석민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아우디를 팔고 나도 포르쉐나 한 대 사볼까. 빨간색은 너무 눈에 뛰니 흰색도 괜찮겠지. 문득 웃음이 났다. 며칠 전만 해도 죽네 사네 하는 고민을 하다가 지금은 차의 색을 고르고 있다니.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어김없이 오늘도 서류를 정리하던 자하르가 물었다.
「인간의 적응력과 망각이 주는 이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결론이 나왔습니까?」
「좋은 결론이 나왔습니다.」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웃음을 삼킨다. 그는 무슨 이야기에도 바로 웃음을 터트리거나 하지 않는다. 웃는 모습도 우아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장석민은 창가에 얼굴을 기대고 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금요일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불금인데, ……남자랑 둘이 이게 뭐하는 건지.”
장석민이 한국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하르가 눈썹을 올렸다.
「비서님이 부러워서요.」
「라겔 말씀입니까?」
「네. 주말인데 좋은 시간 보내고 있겠네요.」
「그렇겠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자하르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리문에서 요 며칠 자하르를 지켜본 결과 그는 일, 기도, 일, 기도가 일상의 전부였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살면 과연 재미가 있을까 싶었다.
장석민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자하르가 시선을 들었다.
「왜 그러시죠?」
「가끔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지는 않습니까?」
자하르가 글쎄요, 하고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제 일상에 만족하고 있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 나이에 저 정도면 중증의 병이다. 장석민은 자하르를 안타깝게 여기며 말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고, ……친구 있어요?」
고개를 숙인 채로 자하르가 웃었다.
「일반적인 의미의 친구를 말씀하시는 것이면 없습니다.」
역시, 내 저럴 줄 알았다.
「너무 일만 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좀 여유롭게 생활하시면 많이 생길 것 같은데…….」
장석민의 위로 섞인 말에 자하르가 슬쩍 입술 끝을 당겼다.
「왕은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아래에는 사람을 두되 그 옆으로는 사람을 두지 않습니다.」
의외였다. 장석민은 자하르라면 낮은 곳을 굽어살피는 성군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말하고 있는 군주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이었다.
「제 옆으로는 아홉 명의 형제가 있지만, 형제와 친구는 같을 수 없습니다. 다들 그래서 친구가 없군요.」
장석민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친구가 없다 하니 안됐다고 말은 해줘야 할 텐데, 그 이유가 재수 없어서 쉬이 그 말이 나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왕자 옆으로는 왕자뿐이란 얘기 아닌가?
「후에 비를 맞이한다면 옆에 사람이 생기긴 하겠군요.」
자하르가 농담처럼 덧붙이는 말에 문득 잊고 있었던 인어공주가 떠올랐다.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자하르에게 물었다.
「그, 저……, 그때 그분은 찾으셨나요?」
사실 누구라도 좋으니 그날의 은인이 자신이라고 부득불 우겨 잘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질문을 들은 자하르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정을 읽기 힘든 얼굴이었다.
「……기억이 안 돌아오시나요?」
「어렴풋이 생각날 뿐입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이, 기억나시나요?」
위험한 질문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꾸었던 꿈이 매우 흐릿하게 떠오르는 정도입니다. 내가 꿈을 꾸었다, 라고 알고 있지만 어떤 꿈을 꾸었는지 모르는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장석민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경우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너무 무리하게 떠올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분도 사정이 있겠죠.」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하르가 그렇습니까, 하고 대꾸했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옆얼굴이었다.
설마, ……목격자를 찾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랑에 빠진 거냐. 얼굴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이놈이라면 가능할지도.
장석민은 작게 혀를 찼다.
이십여 년간 목석처럼 지내온 숫총각이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게 처음으로 연심을 갖게 되었는데, 은인은 나타나지 않고…….
90년대 하이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진부하고 흔한 스토리다. 사막의 성자라 불리던 남자를 그 설정 속에 던져버린 사실에, 장석민은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게다가 자하르 왕자는 사람들 앞에서 그 은인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비로 맞이하겠다고 공표한 상태였다. 온 나라에 소문이 파다한데 아직도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는 공개적으로 바람을 맞은 것과 다름없었다.
「저기, ……자하르 왕자님.」
큰 결심을 한 장석민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떻습니까?」
「네? 아, 진짜 좋네요.」
「다행이군요.」
자하르의 옆을 따라 걷던 장석민은 방금 저 질문은 자신이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본의 아니게 숫총각의 마음에 못을 박게 된 장석민은 그런 그를 위로해 주자는 생각에 조심스러운 제안을 했다.
오늘은 궁으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잠깐 바람을 쐬는 건 어떨까요.
그 말을 하고 나서 장석민은 자신이 방금 자하르에게 수작질 비슷한 것을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땀을 흘리며 그는 뒷말을 덧붙였다.
사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가끔은 기분전환을 하시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건강에 좋으면 국민을 위해서도 좋고, 또, ……또.
또, 를 다섯 번쯤 반복했을 때 자하르가 그럴까요, 하고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가끔은 기분전환도 필요한 법이지요, 하고 덧붙은 말에 장석민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자하르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장석민에게도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검은색 슈마그를 건넸다. 어두운 밤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시키는 대로 얼굴에 천을 둘둘 두르고 자하르의 뒤를 따라 나섰다.
거리로 나가 몇 걸음 걷지 않아 장석민은 자하르가 천을 건네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하르 역시 눈을 제외한 얼굴을 천으로 모두 가린 채였음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었다. 확실히 자하르는 눈에 띄었다. 큰 키와 천으로는 가릴 수 없는 비범함도 그랬지만 눈을 끄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궁에서는 휘황찬란한 건물 배경에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는데 지금 보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오롯이 혼자 존재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몇 걸음쯤 떨어져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장석민은 차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옆으로는 사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저런 의미였을가.
「걷는 게 힘드신가요?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도 괜찮습니다.」
자하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석민이 아니요,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자하르의 옆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질문을 해놓고도 민망함에 목덜미를 긁적였다. 내리자고 한 사람은 자신인데 지리를 모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저 안쪽으로 가면 전통 시장이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장이 서니 볼만할 겁니다.」
「잘 아시네요?」
「가끔은 나와서 둘러보곤 합니다.」
아무리 봐도 성군이 맞는데…….
자하르가 안내하는 대로 길을 걸으며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르카 왕국에 도착해서 궁이 아닌 곳을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억지로 납치를 당해 오게 된 나라에서 왕자와 한밤의 야시장을 걷게 되다니.
장석민은 힐끔 자하르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하자고 말을 꺼냈으니 뭔가는 해야 할 텐데. 책임감을 느낀 장석민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 찾고 있는 게 있나요?」
자하르가 물었다.
「뭐, 재미있는 게 있을까 해서요.」
재미있는 것이라, 자하르가 장석민의 말을 중얼거리듯 따라 했다. 술도 담배도 여자도 멀리하는 수도승 같은 남자와 어떻게 하면 금요일 밤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느라 장석민의 머릿속은 시끌시끌 복잡했다.
「시장 쪽으로 가면 제법 볼만한 것이 있을 겁니다.」
「하하하, 네.」
결국 다 큰 남자 둘이 기분전환을 위해 시장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장석민에게는 조금 부끄럽게 다가왔다. 여기 어디 클럽이나 분위기 좋은 바가 있으면 내 전공을 살려 뼈와 살이 녹는 밤을 보낼 수 있을 텐데. 그러려면 얘부터 처리해야 할 테지만.
힐끔거리며 쳐다보다가 또 눈이 마주쳤다. 장석민은 배시시 웃으며 어색함을 무마했다.
모퉁이를 돌자 시장의 불빛이 아른아른 나타났다. 자하르가 말한 대로 야시장은 활기차고 아름다웠다.
「마실 것을 사다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여기에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자하르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장석민은 우두커니 서서 그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대로 도망을 간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했다. 수중에 가진 돈은 없다. 지리도 알지 못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어디에 한국 대사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이 아닌 밖으로 나올 기회는 흔치 않다. 게다가 지금은 혼자다. 마음만 먹는다면 떠날 수 있다.
장석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하자 손끝이 다시 차가워진다. 한순간의 선택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지금 여기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장석민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무난한 것을 골랐습니다.」
장석민은 웃음을 삼키며 음료를 받아 들었다. 조금 전까지 식은땀을 흘려가며 도망을 칠지 고민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 터다. 불확실성에 도박을 거는 것은 절박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이다. 자하르는 이믈라쿤이 끝나면 자신을 한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를 백 퍼센트 믿을 수는 없지만, 수중에 동전 하나 없는 지금 이곳에서 도망을 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마터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 뻔했군.
자조 어린 미소를 띤 채 장석민은 빨대를 입에 물고 차를 한 모금 빨았다. 독특한 차양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맛……, 있네요.」
씁쓸한 끝 맛이 좋았다. 장석민은 마음 놓고 빨대를 쭉쭉 빨면서 웃었다.
「러리이라는 차입니다. 타르카 왕국에서만 나는 차와 커피를 섞은 음료입니다.」
「집에 갈 때 좀 싸서 가져가면 좋겠네요.」
쾌활하게 한마디 덧붙였다가 장석민은 아차,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서 이곳을 추억할 만한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한테는 오늘 밤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밤이 될 테니까요.」
억지로 비통함을 짜냈다.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랑, 그것도 일국의 왕자랑 밤길을 걸은 날을 어찌 잊겠는가.
「원하신다면 넉넉히 챙겨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석민은 음료를 마시며 시장을 구경했다.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눈을 끄는 신기한 물건들도 제법 있었다. 색다른 것을 발견할 때마다 눈을 빛내는 장석민과는 달리 자하르는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십여 분을 걷자 누가 누구의 기분을 전환시켜주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재미있으세요?」
이번엔 장석민이 물었다.
「네?」
「저랑 이렇게 다니는 거, ……진짜 재미없을 거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자신이야 죄다 처음 보는 것들이니 신기하고 색다르겠지만 자하르는 숱하게 봐오던 것들이다. 게다가 옆에는 아리따운 여자도 아니고 남자.
자하르가 가만히 눈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재미있다가 아니라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하시는 거 없어요? 걷는 거 말고요. 아무거나 다 괜찮습니다.」
한층 미안해진 장석민은 그렇게 물었다. 길을 걸어가던 자하르가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회색 눈동자에 머물렀다. 천으로 가려져 있어 정확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탐색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상하리만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기분전환 삼아 가끔은 매사냥을 나가곤 했습니다.」
자하르가 말문을 열자 켕기던 공기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매사냥이요? 사막으로요?」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사나흘 나갔다가 오는데 지금은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군요. 생각난 김에 이믈라쿤이 끝나고 한 번 다녀와야겠습니다.」
장석민의 머릿속에 손목에 매를 얹고 있는 자하르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디 화보에서나 볼 법한 그림이 되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그냥 매를 풀어주면 잡아오나요?」
개도 아니고 새가 사냥감을 물어온다는 것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엄격하게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훈련받지 않은 매는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완전히 내 것이 되기 직전까지 놓아주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매를 소유하게 되는 순간을 알아야 합니다. 매사냥에서는 그 순간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후에는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설명을 들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아 장석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스포츠니 매사냥에 참여할 날은 오지 않겠구나 싶었다. 문득 서늘한 바람이 불어 장석민은 두르고 있던 천을 여미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쪽으로 걸어오니까 더 추워지네요.」
「저 안쪽으로 걸어가면 강이 보입니다. 밤이 되면 강바람이 붑니다.」
「강이요?」
「바닷물이 들어와 강을 이룹니다. 강을 기준으로 수도가 반으로 나뉩니다. 가보시겠습니까?」
슬슬 시장 구경에도 물리던 차였기에 장석민은 기꺼운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하르의 말대로 얼마 걷지 않자 별빛을 받은 검은색 물이 굼실거리는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의 근처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저 위쪽을 아브하라고 부릅니다.」
자하르가 가리킨 곳에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전통과 현대적인 배경이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름답네요.」
장석민이 솔직한 감상을 내뱉자 자하르가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사람들은 근심걱정이 없겠네요. 자원도 풍부하고, 국가에서 지원도 잘해주니까. 물론, 나중에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당연히 있지만요.」
재빨리 자하르가 전에 했던 말을 덧붙였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면 얼마나……, ……이크.」
장석민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쪽은 보지 마세요. 좀 분위기가 안 좋네요.」
이런 나라에도 홍등가가 있다는 사실에 장석민은 놀랐다.
「제이둔이군요.」
의외로 자하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장석민이 자하르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돈을 주고 사는 행위는 썩 좋아하지 않아서요. 필요에 의한 수요라는데, 이해도 안 되고.」
장석민의 여성편력을 아는 친구들이 그나마 그를 인간 취급해주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억지로 하는 것 같잖아요. 음, 역시 별로야.」
장석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자하르가 그런가요, 하고 묻는다.
「당연하죠. 원래 관계는 상호 합의하에 이뤄져야만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은 경우는 미성숙하달까, 미개인 같다고 해야 하나…….」
장석민은 단어를 고르다가 천박하죠, 하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앞으로 같이 살 여자만 수십 명을 소유한 왕자니 당연히 그럴 리 없겠지만 장석민은 인생선배로서 금쪽같은 조언을 해주자고 마음먹었다. 뭐든 초반의 개념정리가 중요하니까.
「여자는 소중하게 다뤄야 해요. 꽃처럼.」
여성에 대한 그의 인생관이었다. 만남의 지속시간은 비록 짧아도 매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했다.
「꽃?」
되묻는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만큼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거죠.」
합의하에 꺾이는 꽃이 있던가, 하며 자하르가 가만히 중얼거린다. 강바람 소리에 그 말을 듣지 못한 장석민이 네? 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래서 쟝은 여자를 소중히 여기는 겁니까.」
「네. 당연하죠. 저런 건 그래서 다 없어져야 하는데.」
장석민은 웃으며 제이둔이 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자하르가 왕이 된다면 저런 곳을 없애주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도 살짝 실려 있었다. 그러나 자하르에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인간의 탐욕은 당연합니다.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에 신이 만든 것입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서술이었다.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온유하여 장석민은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되도록……, 어.」
장석민이 입을 벌리고 제방 근처에 사람이 모여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싸움났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고성이 오갔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어감만 듣고 판단하자면 저건 필시 쌍욕이었다.
장석민이 자하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나선다면 싸움의 중재가 가능하겠지만 구태여 그걸 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랑 단둘이 이런 곳을 거닐고 있다는 소문이 썩 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터다.
「안 말려도 되겠죠?」
「큰 싸움은 아닐 겁니다. 근처에 경찰서도 있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장석민은 마음을 놓고 몸을 돌렸다. 이제는 슬슬 궁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는데 고함에 섞여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울고 있는 여자가 싸움하는 무리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장석민의 표정이 대번에 굳는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자하르와 자신을 제외한다면 싸움을 말릴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늦을 것 같았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고 자하르에게 말을 건넸다.
「죄송한데, 잠시만 여기 계시면 안 될까요?」
자하르가 대답하기 전에 다시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울렸다. 장석민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하르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방파제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남자들끼리 치고받는 것이야 알 바 아니지만, 여자를 괴롭히는 것은 그의 기준에서 용납하지 않았다.
「제발, 그만 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여자가 울면서 남자들을 뜯어말리고 있었다. 바닥에는 의식을 잃은 남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시비가 붙은 상대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그를 말리려던 여자도 몇 대 얻어맞은 터라 옷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 장석민은 일단 뛰어들어 발길질을 하는 남자를 밀어냈다.
「너는 뭐야!」
발길질을 하던 남자의 일행이 사납게 소리를 지르며 장석민의 팔을 붙들었다. 싸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말리려는 생각이었기에 장석민은 두 손을 위로 올려보였다. 나는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 따윈 깡그리 무시되었다. 바로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장석민은 가볍게 주먹을 피하며 난색을 표했다.
“싸우자는 게 아니라, 아, 젠장.”
이번에는 다른 놈이 장석민에게 발길질을 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헛, 예쁘다. 못 말리는 본능으로 잠시 한눈을 판 틈에 등 뒤로 다가온 남자가 장석민의 등을 각목으로 내리쳤다.
“야, 너…….”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각목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젠장.”
각목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남자를 장석민은 하는 수 없이 걷어차 버렸다. 제법 덩치가 큰 남자가 공중으로 부웅 떠서 떨어지는 것을 본, 일행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한층 험악하게.
그들이 욕을 퍼부으며 일제히 장석민에게 달려들었다.
좆 됐다.
장석민은 일단 달렸다.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하나씩 처리를 하는 게 효율적이기도 했고 놈들은 여자에게서 떨어트리는 것도 중요했다.
달리기는 나도 자신 있……, 헉.
“──!”
바로 등 뒤로 다가온 남자가 장석민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장석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윽, ……으.”
두 번이나 연달아 등에 충격을 받은 장석민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뒤따라 달려온 남자들이 장석민에게 무자비하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장석민은 그중 한 명의 발목을 잡아채어 간신히 바닥에 쓰러트렸다. 놈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몸을 일으켰다.
어깨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장석민은 어깨를 돌리며 놈들의 숫자와 상태를 파악했다. 넷, 그중 셋은 완전 팔팔하다. 놈들이 점점 장석민을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거 어쩌지 하는 생각에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짭짭할 피 맛이 입안에 번졌다. 싸움은 영 취향이 아니었지만 격투기를 배우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상대의 기세를 제압하려면 우두머리를 눌러버려야 한다.
장석민은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를 눈으로 골라냈다.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 남자의 가슴팍을 어깨로 부딪쳤다. 그러고는 그대로 남자의 옷자락을 잡아 등 뒤로 완벽하게 넘겨버렸다.
깨끗한 한 판.
심판이 있었으면 호쾌하게 깃발을 들고 호루라기를 불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십여 킬로는 더 나갈 남자를 내던진 후, 장석민은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더 늘었음을 알아챘다. 자하르다.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맞은편에서 자하르는 장석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 ……아니, 저쪽으로…….」
괜히 왕자를 싸움에 휘말리게 했다가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어서 저쪽으로 가 있으라고 눈짓을 했다. 그러나 자하르는 서늘한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석민은 몇 번 더 눈짓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의 팔을 잡고 붙들었다.
「어서 저쪽으로 피하세요.」
장석민의 손이 닿자 자하르가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본다. 눈빛은 더 서늘해진다.
「뭐야. 한 패거리야?」
「너도 이 녀석이랑 같은 패거리냐?」
장석민은 으, 하고 신음을 삼켰다. 하필 수행원도 없이 나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 새끼랑 너도 한패냐고 물었잖아! 그렇다면 네놈도 같이 죽여주지.」
각목을 쥐고 있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자하르가 그제야 시선을 장석민에게서 돌려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유감이군. 불가능할 것 같은데.」
자하르의 말에 남자들의 표정이 일제히 일그러졌다. 대체 뭐라고 한거야. 장석민은 자하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이 공주가 아닌 왕자라 할지라도 문제를 일으킨 것은 자신이니 마무리도 자신이 해야 했다.
「물러나세요.」
자하르가 장석민을 내려다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치실 수 있습니다. 물러나세요.」
「구해주실 겁니까?」
「네?」
장석민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저를 구해주실 건가요?」
자하르가 다시 물었다. 급작스러운 순간에 이해되지 않는 질문을 하는 자하르 때문에 장석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놈들이 지금 우리를 무시해?」
화가 난 남자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대답은 나중에 해야겠다고 싶어 장석민은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옷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동시에 자하르는 이쪽으로 달려드는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눈 깜짝할 새였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실력에 입이 떡 벌어졌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었다. 상대를 제압하고 공격하는 정확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날 탑의 지하에서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박력이 한층 더 했다.
다른 놈이 달려들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힘껏 그를 뿌리쳤다. 그러나 자하르는 장석민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손 좀, 잠깐만요.」
장석민이 말했지만 자하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개중 한 놈이 자하르의 등 뒤로 달려왔다. 장석민의 시야에 놈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들어왔다.
「위험, ──.」
장석민은 급한 대로 자하르를 끌어안고 몸을 잡아당겼다. 나이프를 피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장석민이 자하르의 옷자락을 발로 밟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균형을 잃었다. 뒤로 넘어진 장석민은 그대로 방파제 아래로 떨어졌다. 물론 자하르도 함께였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물속에서조차 자하르는 장석민의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았다.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갔을 때, 사이렌 소리가 들여왔다. 방파제에 있던 놈들이 사이렌 소리를 듣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왔다.
장석민의 얼굴이 굳었다. 야밤에 남자 러마디와 단둘이 나와서 싸움을 하다 경찰에게 발각된다. 이거야말로 하일이 원하던 추문이었다. 젠장,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이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장석민은 뒤에 있던 자하르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장석민은 죄송합니다, 하고 외치고는 자하르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대로 물 아래로 첨벙, 잠겨 들었다.
『여기 갈아입을 옷이요.』
『감사합니다.』
자하르가 인사를 건네자 여자가 얼굴을 붉힌다. 옆에 서 있던 장석민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구해준 건 난데 인사는 자하르가 받는구나.
경찰이 가기 전까지 물속에 잠겨 있던 장석민은 숨이 넘어가지 직전에 방파제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채로 덜덜 떨고 있던 장석민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민 것은 그 여자였다.
한사코 사양하는 장석민에게 여자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했다. 도움을 받았으니 꼭 포도주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그렇게 몇 번이나 말하며 눈물을 닦았다. 헛, 우니까 더 예쁘다. 장석민이 여자의 얼굴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물 밖으로 나온 자하르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장석민은 그 순간 알아챘다. 여자의 시선이 자신을 넘어 등 뒤로 향해있음을.
여기요. 여기에도 사람이 있답니다.
순식간에 병풍이 되어버린 장석민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뒤를 돌아본 그는 깜짝 놀랐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물에 젖은 자하르의 외모는 몇 배는 더 고혹적이었다. 미남일 줄 알았지만 저렇게 심각한 상태인 줄은 몰랐는데.
넋 놓고 자하르를 바라보던 장석민은 재채기를 시작했다. 젖은 몸에 강바람은 치명적이었다. 이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자하르 왕자는 저런 상태로 궁으로 갈 수 없었다. 장석민은 여자에게 부탁해 포도주는 되었으니 갈아입을 옷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물론이요, 물론이고말고요.
그렇게 대답하는 여자의 시선은 여전히 자하르에게 머문 채였다. 다행히 여자의 집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자하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무서워서 장석민은 그에게 차마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다친 데는 없으신가요?」
문이 닫히고 단둘이 남게 되자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미친 짓도 유분수가 있지. 하마터면 자하르 왕자까지 위험에 빠트릴 뻔한 것이다. 이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아닙니다. 국민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제 의무입니다.」
그나마 자하르와 함께 물에 빠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일이었다면 네놈의 목을 치겠다는 말이 백 번쯤은 나왔을 텐데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장석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자하르가 두르고 있던 슈마그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장석민도 주섬주섬 물에 홀딱 젖은 슈마그와 타브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었다. 걸어오면서 물을 몇 번이고 짜냈는 데 아직도 물기가 뚝뚝 떨어진다.
바닥이 다 젖겠는걸. 가기 전에 닦아 놓기라도 해야 할 텐데. ……자하르만 아니면 이 여자 연락처라도 받아두면 좋을 텐데.
「쟝은 정의로운 사람입니까?」
「네?」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장석민이 눈을 치떴다. 정의롭다는 말과 자신이 어떤 식으로 결부되는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 불의는 적당히 눈을 감기고 하는 편이었다. 오늘 같은 일은 여자가 맞고 있어서 끼어든 것뿐이었다.
「그럼 어떤 사람인가요.」
이상했다. 왜 이제 와서 자하르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는지 장석민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하르는 지금까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 곤란한 질문을 한 적도 없고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다. 모두에게 그렇듯이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적당히 자신에게 맞춰주고 있음을 장석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갑작스러운 질문이라니.
「대답이 듣고 싶은데요.」
자하르가 장석민을 직시했다. 대충 무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시 고심하던 장석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고집이 좀 세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괜히 막내아들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호랑이처럼 엄했지만 늦둥이인 장석민에게는 유난히 약했다. 장석민은 자신이 귀여움을 받는 입장인 것을 십분 활용해 왔다.
「호불호가 강하고, ……매우 강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온갖 잡기에 능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부분을 제외하면 평범한 축에 속합니다.」
친구도 적당히 있고 회사에서의 관계도 원만했다.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 사내연애는 하지 말자고 다짐한 터다. 그날, 이태원에서 만난 그 여자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나름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을 것이다. 장석민의 대답을 들은 자하르가 그런가요, 하고 말했다. 의미 없는 혼잣말임을 장석민은 알아챘다.
「저, 그럼 옷 갈아입겠습니다.」
장석민은 뒤를 돌아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타브 안에 입고 있었던 셔츠의 단추를 끌렀다. 물에 젖은 피부가 공기에 드러나자 소름이 돋았다. 손바닥으로 문질렀지만 온기가 바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
「상황에 의해 필요하다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성격인가요?」
자하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팔뚝을 문지르던 손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었다.
「어떻습니까?」
정확한 의도는 모른다. 그런데도 불안감에 다리가 떨린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간다. 장석민은 입술을 몇 번 물었다 놓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보통의 사람, 이라고 되뇌는 소리가 들린다. 몹시 초조해진 장석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목을 다듬었다.
「저는 보통 사람이니까요…….」
「그렇군요.」
자하르의 목소리가 그제야 느슨하게 풀린다. 장석민은 다시 그가 이상한 질문을 할까 두려워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그래도 오늘 재미있었네요. 시장 구경도 하고, 바깥바람도 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런 곳을 구경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모조리 쏟아냈다.
「자하르 왕자님도 기분전환이 되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매사냥이 아니라서 안 되셨을라나. 하하하하. 마지막은 물에 빠지기까지 해서, 기분전환은 아니더라도 머리는 좀 식히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이 얼마나 머저리 같은 말들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아까 구해준 아가씨가 자하르 왕자님이 너무 잘생기셔서 계속 쳐다보던데요.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볼 일이에요. 물론 여자는 예쁘고 볼 일이고.」
누가 내 입을 좀 틀어막아 줬으면 좋겠다고 머릿속에서 이성이 비명을 내질렀다.
「감기에 걸리겠습니다.」
자하르의 음성이 뒤에서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가 커다란 수건을 장석민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장석민은 간신히 입을 닥칠 수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손가락 끝이 차갑다. 자하르가 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설마 하일이 자신을 더러운 추문을 만들라고 일부러 보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일까. 아니면 살레하의 일을?
그도 아니면…….
장석민은 단추를 모두 끄른 셔츠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새 옷을 집어드는 손끝이 벌벌 떨렸다.
「추우신가요?」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저도 모르게 옷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야 하는데.
장석민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옷을 집어 들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그때와 같은 시선이다. 사람의 가죽을 꿰뚫고 샅샅이 훑어 내리는 듯한.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보다 몇 배는 더 끈질기고 집요하게 온몸을 훑고 있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비늘을 가진 커다란 뱀이 온몸을 감아 오르고 있는 착각을 느꼈다. 장석민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들키지 않았어. 자하르는 그날의 기억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그냥 짐작하는 것뿐이다.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도 이리저리 캐묻는 것이다. 범인을 최조할 때 검사들이 그랬다. 상대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겁에 질린 범인은 켕기는 것을 털어놓기 마련이다. 큰형이 자신에게도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정확한 증거는 없다. 침착해야 한다.
새 옷을 몸 위에 걸쳤다. 단추를 잠그는 것이 어려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를 구해준 그분이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저는 그분을 꼭 찾고 싶습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담담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새 옷을 입었지만 물속에 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차가운 한기가 스몄다.
“에취.”
장석민이 재채기를 하자 앞에 앉아있던 후궁들이 뒤를 돌아본다. 무안해진 장석민은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앞에서 역사에 대한 책을 읽어주던 비르마가 혀를 내찬다.
「몸이 약하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요.」
「그게 아니고…….」
강하게 반발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자신을 바라보는 후궁들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조금만 트집을 잡아도 소문이 어떤 식으로 돌지 알 수 없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처소를 옮기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위험요소는 안에 있었다.
「남자 러마디인 게 천만다행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렇게 허약한 몸으로는 왕의 자손을 낳지 못합니다.」
비르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위대한 왕가의 피를 잇게 하는 몸이 되려면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오, 셋째도 건강이라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장석민은 코를 훌쩍거리며 자신과 관련 없는 출산 이야기를 들었다. 물에 빠진 이후로 자하르가 조금 변했다. 자신을 볼 때마다 뭔가 생각에 잠기는 듯 입을 다무는 일이 종종 생겼다.
무엇보다 그 시선.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핥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 가끔 자신의 뒤를 따랐다. 혹시라도 그날의 기억과 자신을 연관시킬까 봐 장석민은 밤잠을 설치다 역시 대타를 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자하르가 뭔가를 기억해내기 전에 대타를 구해서 안기고 얼른 도망가야 했다.
장석민은, 눈을 빛내며 수업을 듣고 있는 후궁들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모두들 특색 있고 아름다운 얼굴들이었다. 얼굴도 중요하지만 이 경우에는 역시 성격과 두뇌 회전이…….
빗자루와 눈이 마주쳤다. 장석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하자 그녀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싫은 티를 냈다.
아……. 역시 쟤가 적임자인데. 오늘 어떻게 다시 말이라도 건네 봐야겠다. 그래야 발 뻗고 누워 잠을 자지.
그날 궁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계속 몸이 떨려서 돌아오던 차 안에서 자하르가 옷을 벗어 덮어줄 정도였다.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장석민은 전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생각해보면 자하르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협박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은인을 찾으려는 이유도 고마워서 비로 맞이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목격자의 증언도 필요할 테고. 그렇다고 목격자를 조지겠다는 의도는 없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차라리 까놓고 이야기를 할까. 이러이러해서 그날 앞에 나서지 못했다고. 그리고 봤던 것에 대해 다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속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힘들어진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논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이성을 육감이 뜯어말린다. 정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자고 말하고 있다.
이성과 본능적인 육감 사이에서,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수업이 끝나고 비르마가 주의사항을 말하고 있었다.
「……하니까 오늘은 다들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평안한 하루를 보내기 바랍니다.」
평안한 하루라는 말에 장석민도 노트를 챙겼다. 비르마가 그런 장석민을 가리키며 한마디를 던졌다.
「한 회 추가입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챈 장석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밤낮으로 짬짬이 경전을 쓰고 있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요즘 공사가 다망하여…….」
옆에서 누군가 재수 없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심장에 길게 흠집이 생겼지만 장석민은 할 말을 이었다.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제발 경전을 써오는 벌을 거두어주세요.」
오늘 수업을 들어온 목적 중 반이 사실, 이것이었다. 장석민은 외까풀의 커다란 눈에 진심을 담아 비르마를 응시했다. 그간 마음만 먹으면 꼬여내지 못한 여자가 없었고 어떤 여자라도 자신과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는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비르마가 장석민을 바라보다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가에 짙은 주름이 이는 것을 보며 정석민은 됐다, 하고 좋아했다.
「그럼 이 회 더 써오세요.」
「네?!!」
「내일 뵙죠.」
비르마가 지팡이를 짚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장석민은 믿을 수 없는 충격에 입을 떡 벌리고 선 채로 굳었다.
「원래 비르마 선생님은 벌을 거두어 달라 간청하면 벌을 더 주기로 유명합니다. 모르셨어요?」
빗자루가 득의만면한 채로 와서 말을 건넸다. 놀리려고 일부러 말을 건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석민은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었다.
「바쁘신 와중에 경전을 쓰시느라 힘드시겠군요.」
「네. ……저, 혹시 바쁘지 않으면 드릴 말씀이 있는데…….」
빗자루가 코웃음을 친다. 감히 네까짓 게 나한테 무슨 할 말이냐는 태도다.
「자하르 왕자님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후궁들은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말을 건넸다. 빗자루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절대로 해가 될 얘기는 아닙니다. 들으신다면 분명히…….」
「관심 없다니까요.」
빗자루가 옷자락을 날리며 사라졌다. 다른 후궁들도 대부분 교실을 빠져나간 후였다. 지하철에서 아무도 사지 않을 허접한 물건을 파는 잡상인 된 기분을 느끼며 장석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장석민을 알아보고 하캄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또 뭐요?」
이제는 소식, 소문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덜컥 겁이 났다.
「에드문트 회장님께서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합니다.」
「아아, 동상인지 뭔가 하는 거요?」
동상이야 알 바 아니었다. 상징이니 뭐니 하며 하일이 개지랄을 했지만 일단 그 건은 자하르와 하일, 두 사람을 동시에 살렸으니 어떻게든 넘길 수 있었다.
「제 것도 아닌데요, 뭐.」
장석민이 시퉁하게 덧붙인 말에 하캄이 네? 하고 반문한다.
「당연히 러마디 님에게 보내시는 선물이잖습니까?」
「에이, 아니에요. 무슨 사업적인 상징이라던데. 저하고는 별 상관없습니다.」
목숨을 구해준 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 해도 실질적으로는 자신과 관계없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게끔 해야 한다.
「별 상관이 없다니요? 무슨 소리십니까. 러마디 님의 앞으로 도착한 선물입니다. 러마디 님의 것입니다.」
마음 구석에서 불안감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 장석민이 하하, 웃으며 하캄을 바라보았다.
「……그거 지금 어디 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