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35)

「그러니 오늘은, ──듣고 계십니까?」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눈을 저쪽으로 돌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 자하르가 고개를 돌려 장석민과 눈을 마주했다. 불에 덴 사람처럼 장석민은 후다닥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자하르가 묻는다.

「아, 아닙니다. 그냥, 좀, ……네, 감기 기운이 있는 것도 같고.」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빨갛군요. 약을 준비해두라고 이르겠습니다. 추우시면 이걸 덮으세요.」

 자하르가 외투를 벗어 장석민의 무릎에 올려주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지만 다정하고 셈세한 처사에 장석민은 한층 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시발, 미쳤어.

 이렇게 착한 사람을 상종 못 할 놈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런 짓에 그런 짓에, ……젠장.

「죄송합니다. 몸이 좋지 않으신 걸 알았으면 오늘은 그냥 쉬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늘도 자하르는 장석민을 대동하고 일을 협의하러 가는 중이었다. 어제 하루는 쉬었으니 처리할 일이 산처럼 쌓였다는 농담을 하며 자하르는 장석민에게 일정을 알려주었다. 차마 거기에 대고 장석민은 난 오늘 진짜 죽도록 당신이랑 다니기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열이 많이 나시나요?」

 얼굴이 아직도 붉은 채였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하르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어제의 그 몹쓸 꿈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미칠 지경이었다.

「어제 창을 열어두고 주무셨나요?」

 상냥한 물음에 장석민의 얼굴이 굳었다. 분명히 자하르가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밖으로 기어나가지 않았다면 그 독한 술을 안 마셨을 테고, 그러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취하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까지 취하지 않았다면 그런 꿈을 꾸지 않……, ……다 술이 문제다.

「그, ……그때 물에 빠진 이후로 감기가 잘 안 떨어지네요.」

「아무래도 강바람이 차갑긴 하지요.」

「……네.」

 더 이상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지 않길 바라며 장석민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어제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자하르의 물음에 괜스레 찔린 장석민이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그냥 맥주 몇 캔만 마시고 바로 잠들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꿈도 꾸지 않고 정말 죽은 듯이 잠만 잤습니다.」

 죽은 듯이 잠만 잤다고 말을 하면서 눈을 부릅떴다. 눈이 마주치자 자하르가 웃음을 삼킨다.

「잘하셨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는 되도록 혼자 돌아다니는 일은 삼가세요. 이믈라쿤이 끝나기 전까지는 안전한 곳에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장석민은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며 무뚝뚝한 어투로 대답했다.

「리문에만 있으라는 건가요?」

「수업은 들으러 나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장석민이 기분전환을 위해 종종 수업을 들으러 나간다는 사실을 자하르도 알고 있었다.

「여러모로 안 좋은 시기입니다.」

 안 좋은 시기에 하일이라는 최대 난적을 갖고 있는 장석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왕자님도, ……위험할 수 있습니까?」

「그렇군요. 저도 얼마 전에 위험한 일이 한 번 있었으니.」

「두 번 아닌가요? 그 크레인이 무너진 것은 사고로 판명됐어요?」

 장석민의 질문에 자하르가 잠시 놀란 듯이 눈썹을 치뜨더니 이내, 웃음을 되찾는다.

「아직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정말 여러모로 힘드시겠네요.」

 여기저기에서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누가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니, 몇 배는 더 신경이 쓰이겠지.

「누가 그랬는지라도 좀 알면 좋을 거 같은데.」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에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려면 꼭 그분을 찾아야 할 텐데요.」

 장석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 그분이 뭘 알고 있을까요?」

「글쎄요. 적어도 저보다는 뭔가 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장석민은 탑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솔직히 별로 이야기할 만한 사실은 없다. 남자들이 자하르를 공격했고 자하르는 그들을 제압했고 마지막에 총질을 하다가 자신이 끼어들어 판은 끝났다.

 정말, 차라리 툭 까놓고 말을 해버려? 눈이 마주쳤다. 자하르가 말을 하라는 식으로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장석민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아닙니다,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하르는 연애도 한 번 해본 적없는 숙맥이다. 저를 두 번이나 구해준 상대가 나라는 사실을 알면 감정이 깊어질 수도 있다. 긁어 부스럼이다.

「하하하. 그분이 나타나시고 후계자가 되시면 바로 결혼하시겠네요? 겹경사네요. 겹경사.」

 장석민은 일부러 밝게 말했다. 자하르는 같이 웃을 거라 계산한 터다. 그러나 자하르는 미묘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 좋겠군요.」

 몇 초간 뜸을 들인 침묵 뒤에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빨리 나타나 주셔야 일을 정리하고 저도 기쁜 마음으로 비로 맞이할 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마치 들으라는 투였기에 장석민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 그, 아무래도 암살자를 보낸 것이 누구인지 아는 게 중요하신가요?」

「그렇습니다.」

「……꼭 그걸 이믈라쿤 전에 아셔야 하나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편지를 쓰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후계자 지정이 끝나기 전에 알아야 합니다. 그게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기에 좋습니다.」

 자하르가 말을 덧붙였다.

「후계자의 후보를 노리는 것과 후계자를 노리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일은 그 전에 처리하는 편이, 저를 위해서도 그쪽을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관대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숨은 뜻이 실로 냉정하고 현실적이었다.

「……암살하려는 쪽을 찾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옆에 둘 것입니다.」

「네?」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가만두지 않겠다, 죽이겠다, 등의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한 터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옆에 두어야 하는 법입니다.」

「보통은 없애지 않나요?」

「보통은, 그렇겠지요.」

 다정한 음성이었지만 장석민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어제 꿈에서 보았던 무표정한 자하르가 떠오른 터다. 꿈속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던 것은 혹시 예지몽이 아니었을까.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해하면 안 됩니다. 위에 선 자는 관대함을 보임으로써 아랫사람들을 굽어살피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주어진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나 나올 법한 상냥한 말에 스며들었던 한기가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래, 예지몽은 얼어 죽을. 개꿈이다, 개꿈. 피로 발기랑 비슷한 거다. 술을 너무 퍼먹어서 피곤하니 그런 개꿈을 꾼 거지.

「자하르 왕자님 칭호는 누가 지었는지 정말 잘 지으셨네요.」

「네?」

「사막의 성자, 말입니다.」

 자하르가 서류철을 든 채로 웃음을 삼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자태였다. 왕자가 아니었다면 종교에 귀의해 성직을 택해도 어울릴 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자신을 직시하며 그렇게 묻기 전까지, 장석민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자하르가 서류철에 손가락을 얹은 채, 대답을 기다렸다. 어제 자신의 몸 위에서 팔다리를 누르며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모습과 겹쳐져 장석민은 그, 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농담입니다. 저에게는 당연히 과분한 칭호입니다.」

 자하르가 웃음 섞인 말을 할 때까지 장석민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늘은 일정이 조금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좀 쉬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장석민은 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자하르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저기요.」

 자신의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수행원을 돌아보며 장석민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장석민의 표정이 구겨졌다. 자하르가 자리를 떠나기 전에 러마디님이 혼자 어디 가지 않도록 잘 보살피라는 말을 남긴 게 화근이었다. 한 번만 이야기했으면 수행원도 적당히 알아듣고 거리를 두었을 텐데, 웬일인지 자하르는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이다. 덕분에 정석민이 잠깐 일어나 산책을 할라 쳐도 수행원은 금붕어 똥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그를 감시했다.

「화장실을 같이 간다고요?」

 여자도 아니고 그게 무슨 짓이냐고 따져 물으려다 장석민은 에휴, 손을 내저었다. 대신 방향을 틀어 상대를 공격했다.

「제가 아무리 남자긴 해도 러마디의 신분인데, 그런 사적인 공간에 어딜 따라오신다는 건지.」

「…….」

「참 무시당하는 기분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행원이 그럼, 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휠체어에서 발딱 일어섰다. 안쪽으로 나있는 길을 걷는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화장실이 급한 것이 아니었다. 장석민은 안쪽을 확인했다.

“있다!”

 아까 어슬렁어슬렁 정원을 산책하던 장석민의 눈에 공중전화가 들어온 것은 기적이었다. 장석민은 재빨리 공중전화가 놓인 곳으로 달려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손에 쥔 돈은 없지만 신용카드의 번호를 외우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며칠 뒤면 이믈라쿤이 끝나 한국에 갈 수 있었지만 공중전화를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많은 건물을 돌아다녔지만 공중전화기가 놓인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일단은 이중삼중으로 보험을 들어두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전화 옆에 사용 방법이 영어와 아랍어로 적혀 있었다. 장석민은 천천히 숫자를 누르고 교환원의 아내를 기다렸다. 기계음과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안내원이 신용카드 번호를 물었다. 장석민은 차분하게 자신의 카드 번호를 불렀다. 뚜, 뚜, 하는 신호음이 들린 다음 원하는 전화번호를 누르라는 멘트가 들려왔다.

“한국, 한국 국가번호가, 82, 그리고…….”

 119에 전화를 걸지 112에 전화를 걸지 고민을 하다가 그보다 더 믿음직한 대상의 번호를 떠올렸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를 누르며 장석민은 초조하게 신호음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제발, 제발, 제발 받아요.”

 딸칵, 하는 소리 뒤에 여보세요, 하는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와락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누구십니까.」

“아빠, 나, 석민이요!”

 전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장석민은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몇 번 더 간절하게 상대를 불렀다.

「보이싱 피싱은 금융거래 위반 법에 의해 처벌을 받습니다.」

 이 와중에도 법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 때문에 장석민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더불어 속도 같이 터질 것 같았다.

“아빠, 나라니까, 나! 장석민. 장성문 씨 막내아들. 장! 석! 민!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빠가 아끼는 고려청자 깨놓고 찰흙으로 붙여놓은 막내아들이요!”

「……, 석민이?」

 그제야 조금 믿는 눈치였다. 장석민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 나 지금…….”

「이놈! 너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어디에 처박혀서 여자랑 그 짓을 하느라 지금까지 전화도 안 하고! 어!」

“그 짓이라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요, 아니, 잠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지금요, 여기가 어디냐면…….”

 뚝.

 통화가 끊어지는 소리에 장석민은 여보세요, 하고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심한 기계음이었다.

“이게 왜 이러지.”

 장석민은 전화기를 들고 고개를 돌렸다가 힉, 하고 숨을 삼켰다. 고급스러운 남색 옷을 입은 남자가 공중전화의 코드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오, 이게 누구신가.」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장석민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네 번째 왕자였다. 장석민은 얼른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다.

「어제 잘 들어갔어?」

「네? 아, 네. 예.」

「그래. 어제 잘 들어가셨다고.」

 카힌이 팔을 뻗어 장석민을 전화 부스에 밀어 버렸다. 전화기를 들고 장석민은 이 나라의 경찰을 부르려면 몇 번을 눌러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놓고 너는 멀쩡하시다?」

 카힌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의 뒤통수에 손바닥만 한 거즈가 붙어 있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나름 조심스럽게 걱정을 해줬건만 돌아오는 것은 욕설이었다.

「건방진 동양인 새끼가! 어제 네놈을 데려간 것이 누군지 당장 말하지 못해!」

「네? 무슨, 저는 그냥 제 발로…….」

 카힌이 장석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네놈이 자하르의 총애를 받으니 지금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인데, 난 이 나라의 네 번째 왕자다. 왕족의 목숨을 노린 네놈이 무사할 줄 알았느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장석민은 눈만 휘둥그레 뜨고 넷째 왕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서 네놈을 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못하겠느냐!」

「저는 정말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혼자 왔습니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카힌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장석민은 이를 물고 눈을 감았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있었지만 차라리 맞아주는 편이 지금으로서는 낫겠다는 생각이 든 터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얼굴에는 어떤 타격감도 전해지지 않았다.

「──?」

 천천히 눈을 뜨자 자하르가 카힌의 팔을 붙든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형님께서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자하르가 웃으며 자신의 형을 말렸다.

「자하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하르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 러미디입니다. 제 사람입니다.」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석민을 자하르가 방금 자신을 지칭했음을 알아챘다.

「네 러마디가 나에게 어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카힌이 화를 내며 제 머리를 가리켰다.

「저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제 러마디가 형님께 이런 짓을 한 것인가요?」

 자하르가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저놈이 아니라 저놈을 데려간 놈이 뒤에서…….」

 카힌이 말을 맺지 못했다. 사정을 다 얘기하려면 본인 입으로 불명예스러운 일을 모두 밝혀야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말씀해주시면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하르가 진심으로 제 형이 걱정된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자세한 건 네가 알 바 아니다. 나는 저놈이랑 이야기하면 그만이니까. 저리 비켜라.」

 카힌이 자하르의 손을 떨쳐내려고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자하르는 잔잔한 웃음을 띤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손, 놓으라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제 사람입니다.」

 자하르가 일부러 영어로 말했다는 사실을 장석민은 알고 있었다. 제 사람, 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한 뉘앙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갈등했다. 그래도 날벼락을 막아주니 일단은 감사히 받자고 마음먹었다.

「남자 러마디 따위 네가 언제부터 신경을 썼다고?」

「지금은, 제 궁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신경을 쓰고 돌봐줘야 하는 사람입니다.」

 장석민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왕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넷째 왕자가 갑자기 나타나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하일도 벅찬데 거기에 저 넷째까지 더해질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하르가 웃는 낯으로 꿈쩍도 하지 않자 카힌이, 눈가를 좁히며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네놈이 지금 이러는 이유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은 아닐 테지?」

 카힌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빤했다. 장석민도 알아들으라는 것이다.

「이믈라쿤이 끝날 때까지 며칠 남지 않았는데 설마 하젤의 신분을 버린 건가?」

 카힌이 자하르가 아닌 장석민의 몸을 아래위로 훑었다. 징그러운 그 시선에 장석민은 몸에 벌레가 기는 듯한 혐오감을 느꼈다.

「내가 그리 알고 아버님께 말씀드려도 되는 것이냐.」

 카힌의 말에 장석민이 저도 모르게 안 됩니다, 하고 소리쳤다.

「뭐라고?」

「아, 아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왕자님하고 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을 하면서도 자꾸 꿈속의 일들이 떠올라 장석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본 카힌의 낯빛이 점점 탐욕으로 물들었다. 저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 자극을 받으면 얼마나 선정적으로 변하는지 어제 직접 확인한 터다. 재미를 보려던 차에 방해를 받아서 감질이 더 했다. 오늘 자하르가 회담에 참석한 것을 보고 혹시나 해서 둘러본 것이 그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어떻게든 저 동양 놈을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카힌은 입맛을 다셨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자하르가 장석민의 앞을 가로막으며 영어로 대답했다. 카힌의 시선이 그제야 장석민이 아닌 자하르에게 향한다.

「너답지 않게 워낙 끼고 다니니 걱정이 되어서 물어본 것이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도 감사하지 않은 목소리로 자하르가 말했다. 장석민은 그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가 쟝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카힌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 말라비틀어진 동양 놈에게 말라쿤이 깃들었다고? 하하하.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라.」

 카힌이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상징으로써 이용하는 것일 테지.」

 자하르는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상징으로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자하르가 그걸 부정하지 않자, 장석민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이놈도 어차피 내보낼 거 아니냐.」

 카힌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보낼 놈이니 나한테 넘겨라. 물론 네 체면을 생각해서 이믈라쿤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주지. 이놈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다른 볼일도 있으니.」

 무슨 개소리를 저렇게 정성스럽게 하고 지랄이야. 장석민은 발끈해서 대답하려다 자하르의 눈짓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뭐?」

「신께서 쟝을 카힌 형님께 보내고자 한다면 제가 굳이 그렇게 하지않더라도 보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신께서 그걸 원치 않으시면 제가 어떤 말로 약속을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너, ──!」

 억지고 궤변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자하르의 말을 반박했다가는 신을 부정하는 셈이었다. 카힌이 시근덕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하르가 카힌의 손을 그제야 놓아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어. 이놈을 데려간 놈이 내 머리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건 물어봐야겠다! 뿐인 줄 아냐. 쿨루는 심하게 얻어맞아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당장 어제 누가 너를 데려갔는지 말하지 않는다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카힌이 장석민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포악하게 소리 질렀다. 자하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심약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제가 따로 자리를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자하르가 장석민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아챈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하르가 손을 슬쩍 흔들며 눈짓을 했다. 장석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자하르의 품속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하일 때문에 몇 번 하다 보니 연기력이 늘어있는 터라 굳이 손목의 급소를 누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나오는 자세였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단단히 안아 붙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하고 묻는 목소리가 언뜻 듣기에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장석민은 대답하지 않고 자하르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쪽팔려 죽기 직전이지만 넷째 왕자에게 끌려가는 것보다 이게 백배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카힌이 뭐라고 말을 걸기도 전에 장석민을 안아 든 자하르가 성큼성큼 걸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자하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석민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내려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을 했었는데.」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이 움칫 어깨를 떨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화장실은 그 방향이 아니지 않습니까?」

「길을, ……잃어서…….」

 자하르가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수긍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차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혼자 돌아다니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네.」

「쟝을 걱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건성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목소리에 언뜻 엄격함이 스민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저 좀 내려주세요.」

 자하르가 다정하게 웃었다. 등 뒤로 비추는 태양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눈이 부셔 오래 바라볼 수 없는 미소였다.

「어제, 바로 주무셨다고요?」

「…….」

 장석민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바로 주무셨다고요?」

 침묵으로 대신하는 대답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자하르는 거듭 물었다.

「……기억하기로는…….」

 자하르가 저런, 하고 혀를 찼다.

「많이 취하셨나 보군요.」

 취하셨군요. 자신을 내려다보며 비스듬히 웃고 있던 자하르의 얼굴이 겹쳐졌다. 장석민의 얼굴이 동시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 내려주시면──, 제발, 내려주세요.」

 자신의 몸에 닿은 자하르의 손과 몸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려줄 기미가 안 보이자 장석민은 발버둥을 치며 내려달라고 말했다. 자하르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가만히 계셔야죠.」

 화를 낸 것도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나긋하게 어르는 듯한 그 목소리를 듣고 장석민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 본능적으로 몸이 굳은 것이다.

「저기 차가 보이네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하르는 장석민을 놓아주기는커녕 허리와 몸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싹 얼은 상태로 안겨 가면서 장석민은 어제의 꿈을 떠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그 소리를 들은 장석민은 처음으로, 자신이 꿈과 현실을 혼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지금 이것이 꿈이길 장석민은 진심으로 바랐다.

「도와드리죠.」

 일정을 마치고 차에서 내릴 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하르가 손을 내밀었다. 장석민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무시하고 차에서 내렸다.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을 바라보다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문을 열어주면서도 계단을 오를 때도 자하르는 몇 번이고 손을 내밀었다. 장석민은 그 손을 무시하느라 식은땀을 흘렸다.

「땀을 흘리시는데 몸이 많이 좋지 않으신가요?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자하르는 장석민을 부축해주려고 손을 뻗었다. 장석민은 정색을 하며 그의 손을 내리쳤다.

「돼, 됐습니다.」

 장석민은 아차 싶었다. 너무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뒤에서 따라오던 수행원이 낯을 찌푸릴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자하르 왕자님 명예에 누가 될까 그랬습니다.」

 장석민은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이믈라쿤도 며칠 남지 않았고 남들 이목도 있고, 그리고, ……그리고, …….」

 어제 꿈속의 일이 자꾸 현실처럼 느껴지기 시작해서 손이 닿는 것도 무섭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목 안으로 꿀꺽 삼켰다.

「걱정해주시는 마음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자하르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고작 계단을 오르는 일이었다. 장석민은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저는 어차피 떠날 사람입니다.」

「──.」

「자하르 왕자님께서 잘해주시는 건 고마운데 저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임기웅변으로 나온 말이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변명으로 사용하기에는 최선의 내용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장석민은 자하르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올랐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장석민은 무시하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날렸다.

“……. …….”

 한참을 멍하게 있던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주변을 서성거렸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옷도 분명히 입고 있었고, ──그럴 리가 없지. 하하하하, 신경과민이야, 신경과민.”

 애써 꿈속의 장면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색채를 갖고 선명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

“아니라니까!”

 장석민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어제의 마지막 기억은 누각에 기어 올라간 것이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고, 잠이 와서 그대로.

“……잤지.”

 이후의 기억은 지우개로 지워놓은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기억에 다시 등장한 장면은 침대 위의 자하르와 자신이다.

“꿈이네. 하하하. 당연히 꿈이잖아.”

 장석민은 큰 소리로 웃으며 어깨를 뒤로 젖혔다. 그런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자신이 남자랑 그런 짓을 할리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하르는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남자는커녕 그렇게 아리따운 후궁들이 주변에 있는데 손끝 하나 대지 않는 독한 놈인 것이다. 그런 놈이 뭐 볼 것 있다고 자신이랑 그 짓을 하겠는가. ……물론 내가 좀 멋있긴 하지만. 백 보 양보해서 내가 저를 구해준 것을 눈치채고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어 그 짓을 했다 쳐도 꿈속의 자하르는 말도 안 된다.

“하하, 맞아. 말도 안 돼.”

 자신의 몸을 강제로 누르고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자하르를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하르와는 영 반대되는 인간이었다. 만약 꿈속의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의 형과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남자도 자하르가 내리쳤다는 얘기가 된다.

“하하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꿈속의 자하르가 실존 인물이라면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자하르 왕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마호가니로 만든 짙은 밤색의 책상 앞에 앉았다. 모든 것은 명확한 게 좋다. 불확실한 것에 얽매여 불안해하고 있는 시간에 확실성을 조금이라도 늘리는 편이 낫다.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은 하자.

 장석민은 펜을 들어 차분하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많이 안 좋으신가요?」

 문 앞에 선 자하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장석민은 마른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에, ……감기가 심해진 것 같습니다. 열도 나고, 몸도 안 좋고.」

 자하르가 손을 뻗어 장석민의 이마를 만지려 했다. 시트를 몸에 둘둘감고 있던 장석민은 정색을 하며 몸을 뒤로 뺐다. 갈 곳 없어진 자하르의 손이 어색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감기 옮습니다.」

「그 정도로는 옮지 않습니다.」

「이믈라쿤도 얼마 남지 않은 이런 중요한 시기에 왕자님 건강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

 장석민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기침을 두 번 반복했다. 자하르가 저런, 하고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그냥, 침소에 머무는 편이 여러모로 나올 것 같습니다.」

 일생일대의 연기였다. 자하르가 올라오기 전까지 장석민은 물구나무를 선 채 피가 머리로 몰리도록 하여 얼굴의 열을 올렸으며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아 초췌한 낯을 꾸며냈다.

「오늘이 마지막인데요.」

 자하르가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모레는 무크라르 왕이 백색 종이를 접어 상자에 넣고 봉인해 신의 제단에 올리는 의식을 치르는 날이었다. 내일은 모든 왕자가 기도를 올리며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는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결국 자하르가 장석민을 상징으로서 데리고 다니는 날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자하르가 마지막 날을 위해 어떤 일들을 준비해뒀는지는 몰라도, 제법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사실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모두 계산에 넣어 두고, 장석민은 꾀병을 부리는 중이었다.

「끝까지 돕고 싶었는데, 제가 괜한 욕심을 부렸다가 왕자님께 폐가 될까 두렵습니다.」

 종이에 적어서 세 번이나 연습한 말이었다. 닭살이 돋긴 했지만 전보다 자연스럽게 장석민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줄줄 뱉어냈다.

「그리고, ……저도,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이젠 이 나라를 떠나야 하니까, ……왕자님과 영원히 이별하고, 그러니까 마음의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대사가 가장 어려웠다. 연습할 때도 혼자 사레가 들려 애를 먹었던 부분이었다. 어차피 떠날 몸이니 정리를 하고 싶다는 말이 아예 거짓은 아니었다. 장석민은 자신의 상황을 최적으로 만들어 놓고 여기를 뜰 생각이었다. 물론 가장 솔직한 심정은 자하르가 꿈속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도 무서웠고 그런 의심을 품는 것 자체도 괴로웠다.

 장석민은 고개를 숙인 채, 자하르의 대답을 기다렸다. 목덜미에 그의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침묵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알겠습니다.」

 침묵을 깨고 선선한 대답이 돌아왔다.

「쟝의 도움 덕분에 그간 많은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쟝을 제게 보내 주신 것도 모두 신의 뜻입니다. 그동안의 모든 일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하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장석민은 머뭇거리다가 시트에서 꾸물꾸물 손을 꺼냈다. 그동안의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말에 양심이 쿡쿡 찔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았다. 가벼운 악수였다. 닿았던 온기가 멀어지고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손은 차가우시군요.」

「……원래 다른 곳보다 찹니다.」

 장석민은 얼른 손을 시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진땀이 났다. 얼굴에는 열이 나는 것처럼 꾸몄지만 손까지는 미처 생각 못 한 것이다. 당황해서 허둥거리느라 시트가 어깨 아래로 내려왔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자하르가 시트를 꼼꼼하게 장석민의 몸에 둘러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모쪼록 방에서, 편히 쉬고 있었으면 합니다.」

 요약하면 싸돌아다니지 마, 였다.

「알겠습니다.」

 장석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쉬세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더없이 상냥했다. 문이 닫혔다. 혼자 방에 남게 된 장석민은 발자국이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시트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나가려면 기회는 지금뿐이다.

 준비해둔 편지를 품에 안고 문을 연 장석민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미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수행원 하나가 돌아보며 묻는다. 장석민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한 후 문을 닫았다.

“……용의주도한 중동 놈 같으니.”

 그 사이에 보초를 세워둔 자하르를 원망하며 장석민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창가로 달려가니 자하르가 차를 타고 리문의 정문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확인했다. 남은 시간이 썩 여유롭지는 않았다. 장석민이 머물고 있는 방은 4층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높이를 가늠했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암벽타기 실력만 믿고 벽을 타다간 반신 불구되기 딱 좋은 높이였다.

 고민하던 장석민의 눈에 캐노피를 드리운 침대 옆의, 그것이 들어왔다. 자신을 아래까지 안전하게 모셔줄, 아주 고마운 말라쿤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간접 경험이 중요한 거야.”

 시트를 쥔 채로 장석민은 중얼거렸다. 장석민은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수녀원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을 떠올려서 재구성했다. 침대의 캐노피와 시트를 엮어 밧줄을 만들어 황금상의 다리에 묶은 것이다. 침대 다리에 묶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지만 침대의 프레임은 대리석으로 만든 터라 장석민이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은 황금상이었다. 무엇보다 양옆으로 날개를 넓게 펴고 있는 황금상이 넓이가 창틀보다 약간 넓어 만에 하나 쓰러진다 해도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석민이 머물고 있는 방은 두 방향으로 창이 나 있었다. 인공 호수 방향으로 나 있는 창문 아래로는 인적이 드물었다. 당연히 장석민은 그쪽으로 밧줄을 던졌다. 밧줄이 아슬아슬하게 2층 난간에 닿았지만 거기까지만 가면 별문제는 없었다.

 장석민은 능숙하게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파이룬으로 향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빗자루에게 미리 써둔 편지를 건넸다. 당연히 빗자루는 본 척도 하지 않고 장석민의 옆을 지나갔다. 예상했던 바였기에 장석민은 당황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빗자루가 앙칼지게 눈을 치뜨고 장석민을 노려보았다. 장석민은 편지를 내밀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하르 왕자님에 대한 것입니다. 읽으셔도 되고 버리셔도 됩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빗자루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장석민은 편지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성격을 고려해보았을 때, 편지를 읽을 가능성은 90퍼센트를 웃돈다. 문제는 그 편지의 내용을 과연 그녀가 믿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됐다. 어차피 여기까지가 자신의 몫이고 그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렸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밧줄을 타고 잘 올라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방을 정리해 두는 일뿐이다.

 장석민은 밧줄을 손에 쥐고 성큼성큼 벽을 타고 올라갔다. 3층 높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일부러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창틀에 다리를 걸치고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완벽했음을 되새기고 있을 때, 문에서 우악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장석민은 식겁해서 얼른 몸을 방으로 굴렸다. 문밖에서 다시 쿵쾅거리는 노크소리가 울렸다.

“잠깐만요.”

 저도 모르게 한국말을 외쳤다가 다시 영어로 기다려주세요, 하고 말했다. 황금상에 묶인 밧줄을 회수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재빨리 밧줄을 잡아당겼다. 황금상에 묶인 매듭을 풀려는데 조급함에 손이 떨려 쉽지 않았다.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흡사 문을 두들겨 부술 기세였다. 장석민이 알기로 궁내에서 저딴 식으로 문을 두드리는 놈은 하나였다.

“시발, 왜 하필, 젠장.”

 매듭을 푸는 것을 포기하고 장석민은 황금상을 최대한 창문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밧줄은 대충 황금상의 목에 둘둘 감아놓고 창문을 닫았다.

「갑니다.」

 장석민은 바로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하일과 무표정한 얼굴의 사이프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내가 지금 안녕해 보이는가?」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하일이 장석민을 밀어내고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사이프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수행원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문을 닫고 싶지 않았지만 장석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행원들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장석민은 문을 닫았다. 소파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하일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장석민을 불렀다.

 장석민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너를 자하르에게 보낸 목적이 무엇이냐.」

「네?」

 장석민의 옆으로 유리잔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벽에 부딪힌 유리가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났다.

「두 번 묻게 하지 말고 물으면 묻는 대로 대답해라.」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고약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장석민은 하일의 심사가 단단히 뒤틀려 있음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보내신 목적은, ……명예를 더럽히라고.」

「그랬지. 그런데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은 내 아무리 봐도 자하르를 돕는 일이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은 없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장석민이 침묵을 지키고 서 있자 하일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놈이 지금 나를 가지고 놀아?」

 그가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 들었다. 장석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두어 대 얻어맞을 각오는 했지만 하일이 다짜고짜 칼을 빼어들 줄은 몰랐다. 이곳은 자하르의 침소가 있는 리문이었다. 거기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제아무리 하일이라 할지라도 곤란한 결과를 가져올 게 분명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군.」

 진한 수염이 꿈틀거리며 잔인한 미소를 지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인데. 장석민은 하일을 과소평가, 아니 과대평가한 자신을 탓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네놈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하르가 널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그, …….」

 이 물음에도 할 말이 없었다. 자하르가 자신에게 잘해주기는 했지만 특별하게 대해준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그는 자신을 상징으로 이용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를 한국행 티켓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면 자하르는 애도를 표하겠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입맛이 썼다.

 하일이 비열한 웃음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널 당장 여기서 죽여 버리고 싶지만, 죽이지 않을 것이다.」

「──?!」

 하일이 드디어 개과천선을 한 것인가.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에 장석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카힌이 제안을 해왔다.」

「카힌, ……그분이 누구십니까?」

 장석민이 조심스럽게 묻자 뒤에 서 있던 사이프가 넷째 왕자님이다, 라고 대답했다. 장석민은 자신의 멱살을 쥐고 소리를 지르던 넷째 왕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네놈을 카힌에게 보낼 것이다.」

「네? 그게 무슨, 저를 왜 그분에게 보냅니까?」

 장석민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카힌이 너를 받고 싶다고 했다. 너를 보내면 마즈둔 서쪽 광산의 채굴권을 나에게 넘긴다고 말했다.」

 장석민은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대체 그러는 법이, 하일 왕자님은 분명 저를, 자하르 왕자님께……. 처음에 이런 이야기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는 장석민을 보고 하일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자하르의 명예를 제대로 더럽힐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너 같은 놈은 버린 장기 말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걸 어떻게 사용하든 내 마음에 따른 것이다. 기왕 버리는 거 채굴권이랑 바꿀 수 있으면 다행인 거지.」

「말도 안 됩니다. 왜 저를──, 싫습니다. 왜 내가──.」

 하일이 칼등으로 장석민의 뺨을 후려쳤다. 장석민이 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간 좋은 말로 했더니 내가 만만해 보이던가?」

 하일이 장석민의 등에 발을 얹고 물었다. 잔인한 눈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눈이었다.

「그게 싫으면 네가 자하르와 더러운 추문을 만들면 될 거 아니냐.」

 본인도 거기에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방금 말해놓고 대체 뭐라고 떠드는 건가 싶었다. 장석민은 울컥해서 외쳤다.

「불가능하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하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게 뭐냐는 대답이었다. 장석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놈의 턱을 후려갈길 수만 있다면 명줄이 반으로 줄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힌이 이르길 자하르가 너를 좀 특별하게 대하는 거 같다던데. 설마 둘이 비밀리에 정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장석민이 질겁해서 대답했다. 뒤에 서 있던 사이프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니겠지. 카힌은 남자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니 쓸데없는 말을 꾸몄을 테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자하르가 널 특별하게 여긴다면 그 애틋한 감정을 만천하에 알려 놈의 명예를 더럽히면 되는 거고 아닌거면 넌 그냥 카힌에게 던져주면 된다.」

 장석민은 눈물이 치솟았다. 자하르라면 백번 천번 양보해서 눈을 감으면 어떻게 해본다 하더라도 그날 봤던 카힌은 도저히 머릿속에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소름이 돋는 정도가 아니라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싫습니다, 전, 그분, ……싫습니다.」

 하일이 다시 장석민의 어깨를 내리쳤다.

「난 네 의사를 물어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래도 전……!」

 죽을 각오를 하고 대들려는 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하르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 당황한 것은 장석민뿐만이 아니었다. 하일도 그의 등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지금 이 시간에 웬일이냐.」

「일정이 변경되어 일찍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자하르의 시선은 하일이 아닌 장석민에게 머문 채였다. 그가 장석민의 앞으로 걸어와 손을 뻗었다. 장석민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잡아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신가요?」

 장석민은 얼른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자하르 앞에서 질질 짜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괜찮습니다.」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목소리를 듣고도 자하르는 고개를 숙여 장석민의 얼굴을 확인했다. 뺨에 남은 자국을 보고 그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예의범절을 알지 못해 가르치는 중이었다.」

 하일이 뭐라고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도 장석민은 그가 빤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예의는 차차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관대함을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하르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단호한 태도였다. 하일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당연했다.

「궁에 들어온 지 한 달이 되어 가는데 예의범절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제가 가르칠 테니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그럴 필요 없다.」

 하일이 장석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믈라쿤이 끝나면 저놈은 카힌에게 가기로 했으니까. 카힌이 잘 가르쳐 줄 것이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장석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카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봐선 아까 했던 헛소리를 자하르에게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장석민이 작게 말했다.

「하일 형님. 방금 그 얘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자하르가 대답했다. 장석민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쟝은 제가 받은 선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은 없습니다.」

 장석민은 하마터면 자하르에게 큰절을 올릴 뻔했다. 이런 좋은 인간을 잠시라도 의심했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었다.

「남자 러마디를 계속 데리고 있겠다고?」

 하일이 물었다.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미소 지었다.

「어차피 너는 남자에는 관심도 없지 않느냐. 말라쿤의 현신이다 뭐다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도 이믈라쿤이 끝나면 끝이겠지. 손도 대지 않을 놈을 평생 궁에 처박아 두는 것도 불쌍하지 않겠나? 쓰지도 않을 거 카힌에게 주는 것도 방법이지. 그 녀석이라면 정말 제대로 쓸 테니까.」

 장석민은 자신을 징그러운 눈으로 훑어보던 카힌을 떠올리고 욕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손도 대지 않는다──, 라.」

 자하르가 하일의 말을 입안에서 중얼거리고는 웃음을 삼킨다.

「왜? 설마 벌써 손을 댔나?」

「안 댔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사이프와 장석민이 동시에 외쳤다. 하일이 사이프에게 살벌한 눈길을 보내자 사이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쓰지도 않을 놈을 데리고 있어봐야 뭐하겠어. 카힌에게 저 녀석을 양보해라. 자하르.」

 하일이 턱짓으로 장석민을 가리켰다. 장석민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믈라쿤이 끝나면 더는 볼일도 없고 쓸모도 없어진다.

「쟝은 제가 좋다고 했습니다.」

「──!」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 싶어서 장석민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제가 너무 좋아서 먼 나라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본인 입으로 한 말이었기에 하일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의 후궁으로 보내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넌지시 웃어 보였다. 장석민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자하르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부터 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쟝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 장석민은 손을 내밀었다. 급소를 누를 타이밍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싶었다.

 장석민의 손을 잡은 자하르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은, 그 방에 있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중 사이프의 얼굴이 제일 파르라니 질렸다. 장석민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하일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등에 이마를 댄 후, 고개를 들었다.

「쟝이 제게 보여준 신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손등에 입을 맞춘 후, 이마를 대는 것은 타르카 왕궁에서는 상대에 대한 맹세를 뜻했다. 자하르는 지금 하일 앞에서 장석민을 지켜주겠다고 선언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시는 겁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나는 네 녀석이 싫다.」

 하일이 너무나 솔직한 속내를 말해버리는 바람에 자하르가 놀란 듯이 눈을 치뜨며 웃었다.

「신의? 관대함? 그런 것이 얼마나 갈지 어디 두고 보도록 하지. 성인군자인 척 구는 네 녀석의 가면을 벗겨주도록 하마.」

 하일이 방을 나서기 전에 장석민을 노려보았다. 살기와 짜증이 섞여 있는 날카로운 눈빛에 장석민은 힉,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일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자 사이프는 자하르에게 반듯하게 인사를 하고 그 뒤를 따라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도 하일의 욕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자하르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장석민의 뺨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처를 보여주세요.」

「……괜찮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턱을 쥐었다. 놀라서 얼른 고개를 뒤로 빼려 했지만 자하르가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턱뼈를 부서트릴 것 같은 악력에 장석민이 윽, 하고 비명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가만히 계세요.」

 자하르의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턱을 쥔 손의 힘은 여전했다. 하일에게 얻어맞은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을 참느라 힘들었다.

「자국이 남을 것 같네요.」

「괜찮습니다. 며칠 지나면 사라집니다.」

 장석민의 얼굴을 살피는 자하르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가 손을 놓고 나서야 장석민은 제 손으로 턱을 문지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곳에는 다른 사람의 출입을 일체 막도록 하겠습니다.」

 자하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일을 막으려면 난감해질 수행원들을 생각해 괜찮다고 말을 하려다가 장석민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서는 자하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저는, 저는…….」

 장석민이 주저하다 말문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저는, 정말로 카힌 왕자님께 가고 싶지 않습니다.」

 장석민은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원치 않습니다. 그런 건, ……싫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쟝은 저를 좋아하신다고 했으니까요. 저는 쟝이 저를 위해 해준 모든 일에 신의를 지킬 것입니다.」

「──!」

 자하르의 발언에 장석민은 아까 그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을 떠올렸다. 동시에 꿈속에서 아랫도리를 주무르며 느슨하게 웃던 남자의 모습까지. 덕분에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 귓불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거기서 그걸 왜 떠올리고 지랄이야, 미친놈아. 자책을 해봐도 얼굴로 몰린 피는 쉬이 도로 내려가지 않았다. 자하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직도 열이 나나요, 하고 물었다.

「아, 네, 조금…….」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럼 누워서 쉬세요.」

「예, 아, 저기 제가 알아서…….」

 침대의 시트를 죄다 꼬아서 밧줄을 만들어 놓은 터라 장석민은 당황해 손을 휘두르며 자하르의 앞을 막아섰다. 자하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장석민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황금상의 목에 걸린 침대 시트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뭔가요?」

「아, 저기……, 그, ──.」

 하일까지 쳐들어와 죽이네 살리네 하는 이 와중에 밖에 나갔다 왔다고 할 낯짝이 없는 것이다. 장석민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말라쿤을 탔습니다.」

「네?」

「저걸, 그러니까 고삐처럼 이렇게 둘러서 타봤습니다.」

 장석민이 말을 타는 시뇽을 하며 이랴, 하고 중얼거렸다.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을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시발, 쪽팔려.

 장석민은 손을 어색하게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하르가 그렇군요, 하고 말문을 연다.

「재미있었습니까?」

「……네.」

「보기와는 다르게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구석이 있으시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떻게 그걸 변명이라고 떠올렸는지 스스로 한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자하르가 테이블에 있던 종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시종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짧게 뭔가를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새 시트를 가져와 침대에 깔기 시작했다. 침대 정리를 마친 시종이 밖으로 나가자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말했다.

「누우세요.」

「네?!!」

 장석민이 깜짝 놀라 외쳤다. 어제의 꿈 때문인지 자하르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고 나가겠습니다.」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격하게 장석민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자겠습니다.」

「오늘 보니 어린애가 맞는 것 같은데요.」

 웃음기 어린 자하르의 시선이 시트가 걸린 황금상에 닿았다. 장석민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본인의 어른스러움을 성토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시인해야만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비척비척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자신보다 어린 상대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수치스러웠지만 모두 자처한 일이었다. 장석민이 침대에 반듯하게 눕자 자하르가 의자를 가져와 그 옆에 앉았다.

“아, ……쪽팔리네.”

 장석민이 한국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자하르가 눈썹을 휘며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오늘 일은 잘 마무리하셨나요?」

「쟝이 없으니까 일이 영 안 풀리더군요.」

「설마요.」

「정말입니다. 일정도 하나 취소되어 일찍 들어온 것입니다.」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하일마저 자하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으니까. 교활한 하일이 자하르의 일정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이곳에 찾아올 리는 없었다.

「……앞으로는 잘되겠지요.」

 장석민은 시트를 손에 쥐고 웅얼웅얼 말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몹시 낯선 경험이었다. 시선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손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난감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면 좋겠군요.」

「잘될 겁니다. 일도, 후계자 문제도, 다 잘되실 겁니다.」

 장석민이 손에 힘을 주고 그렇게 말하자 자하르가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습니다. 쟝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될 것 같군요. 힘이 됩니다.」

「제가 한 것도 없는데요, 뭘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쟝이 제게 보여준 신의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석민은 진심으로 자하르에게 고마웠다. 기댈 곳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타인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잠시나마, 악몽에 등장했다는 이유로 의심하고 꺼려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니 이제 그만 주무세요.」

 자하르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머리맡에서 울렸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아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의문이 장석민을 수면 밖으로 몰아냈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저기,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카힌 왕자님은 왜, 저를, ……. ……. 그럴까요?」

 하일의 말에 따르면 어디 광산의 채굴권까지 넘기겠다는 말을 한 모양인데 장석민은 도저히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한 번도 남자에게 어필하는 외모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 터다.

 글쎄요, 라고 대답하는 자하르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울렸다.

「그날도 갑자기 저한테 그러시고,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억하심정이 아니라 욕정입니다.」

「──!」

 자하르의 입에서 나올 만한 단어가 아니었기에 장석민은 감았던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쟝에게 욕정을 갖고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물이 흐르듯 담담하고 유려한 목소리였다. 장석민은 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자하르가 침대 기둥에 어깨를 기댄 채, 비스듬히 장석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카힌 형님께서 원래 가지고자 하는 것은 꼭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입니다.」

 장석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자신을 훑어 보던 눈빛이 그런 의미였단 말인가. 언제 봤다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하르의 눈매에 웃음이 스쳤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따스한 마음이 들게 하는 웃음이었다.

「저도 손에 쥔 것은 엔간해서 놓지 않는 성격이니까요.」

「예, 감사합니다……, …….」

 뭔가 턱, 하고 가슴에 걸렸지만 자하르가 시트를 덮어주며 어서 주무세요, 하고 속삭이는 바람에 장석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자하르를 의심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자신에게 내려온 유일한 동아줄이었으니까. 사실 그럴 정신적 여력도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젠 그냥 믿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됐어. 잠이나 자자. 내일의 태양은 내일 뜬다 했으니까.

 눈을 감으려면 장석민의 시야에 자하르의 소매 아래에 붉은 자국이 언뜻 들어왔다.

「다치셨어요?」

 장석민의 물음에 자하르가 팔의 상처를 확인하고 웃는다.

「고양이에게 긁혔습니다.」

 자하르가 키우는 고양이가 궁에 있던가. 장석민의 눈빛에 의아함이 차오른다.

「어제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났거든요.」

 자하르의 설명에 장석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몸을 숙이고 고양이를 어르는 자하르의 모습을 떠올리니 바로 납득이 되었다. 잘 어울린다. 한 폭의 그림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무셔야죠.」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은 웃으면서 시트를 목까지 끌어당겼다.

「되게 큰 고양이였나 보네요. 그 정도 상처를 남기려면, ──.」

 몸을 뒤척거리며 모로 누우려던 장석민은 말을 맺지 못했다. 그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작고 가는 고양이였습니다. 제법 귀여웠죠.」

「…….」

「주무시나요?」

 장석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내는 숨소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길 눈을 감은 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등 뒤에서 웃음을 삼키는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자하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럼 좋은 꿈꾸시길.」

 상냥한 인사말이 귓가에 닿았다. 장석민은 웅숭그린 채 눈만 감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자하르의 발소리가 멀어지기 전까지, 장석민은 눈을 뜨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장석민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그의 얼굴 앞으로 진실을 내밀었다.

 장석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한밤중에 도서관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이것이 잘하고 있는 짓인지는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마치 자신의 뒤를 따라붙는 것 같아, 걸음을 옮기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 확인했다.

 한 번 마음속에서 의심이 일기 시작하자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석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친놈. 제 복을 발로 걷어차는 놈. 왜 그래. 왜.”

 가만히 모른 척하고 있으면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괜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꿈속에서 본 자하르의 모습이 실제라면? 하는 생각이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그렇게 되면 머릿속에 떠다니는 의심이 딱딱 들어맞는 것이다. 카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는 사람도 누구인지 설명이 된다. 자신을 강제로 내리누른 채 나른하게 웃던 꿈속의 자하르의 모습이 지우려 할수록 선명하게 떠오른다. 무엇보다 꿈속에서 자신이 자하르를 밀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은 위치가 자하르의 팔에 난 상처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장석민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 밤중에 다시 황금상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감행한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자 그 자리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신의를 지키겠다고 약속한 자하르가 나쁜 놈이라면? 그가 자신에게 주겠다고 한 티켓이 한국행 티켓이 아니라면? ……애초에 하일이나 카힌, 자하르 모두 같은 피가 아니던가.

“하캄의 말이 맞아. 궁에서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지.”

 그는 바닥에 엎드려 책장 안으로 손을 뻗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헤쳐 손가락에 걸리는 부분을 찾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일어나 확인하니 벽에 비밀 문이 나타났다.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리고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보험 들러 가는 거야.”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밝은 투로 말해보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장석민은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계단이 끝나고 단단한 문 앞에 섰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자하르와 한 계약 따위는 그대로 날아가 버린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장석민은 결심을 굳히고 발치에 놓여있던 돌을 힘주어 밀어냈다. 문이 열리고 자하르의 서재가 나타났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도서관과 연결된 문을 발견한 이후로 처음 들어오는 서재였다. 재빨리 컴퓨터를 켜고 장석민은 0000에서부터 차례대로 비밀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패스워드가 틀렸다는 문구가 뜰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괜찮아. 자하르가 머물고 있는 3층 방을 확인했을 때 분명히 불이 꺼져있었으니까 자고 있는 거야.

 장석민은 이를 사리물고 초조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드디어 앞자리 수가 0에서 1로 바뀌었다. 밤새도록 두들기면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하면 이번에야말로 한국에 어떻게든 연락을 해서 자력으로 탈출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칫, 하고 움직임을 그쳤다.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불안감이 만들어낸 환청이라고 여겼는데 점점 그 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다.

 장석민은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책상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누군가 지하실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저 철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자하르다.

 그는 불을 켜지 않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행히 장석민이 있는 방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장석민은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감 잡을 수 있었다. 자객 사건이 있던 날, 자하르가 걸어 들어왔던 지하 계단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던 장석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성은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지만 빌어먹을 본능은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고 외쳐댔다.

 분명히 이쪽으로 걸어갔는데……. …….

 장석민은 기억을 더듬어 그날 자신이 이곳으로 걸어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어둠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장석민은 걸음을 옮겼다.

 그날 자하르를 먼발치에서 발견한 통로에 다다랐을 때, 장석민은 이곳이 동시에 문이 열리는 교차로임을 알아챘다. 그날 자신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방향에서 이쪽으로 들어오던 자하르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문은 두 개였다. 자하르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모두 열린 채였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시간이 제법 지연되는 시스템인 듯했다. 장석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숨을 내쉬었다.

 신이 원한다면 결국에는 그의 뜻대로 행해지기 마련입니다. 자하르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렸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남지 않았다.

 문.

 문 앞에 선 장석민은 문이 주는 수많은 의미 중에 좋은 것들만 떠올리려 노력했다. 새로운 세계와 통하는 매개, 희망, 또 다른 도전. ……그리고 죽음으로 이르는 길.

“하아…….”

 비밀 통로가 끝나는 곳은 작은 집 안이었다. 그리고 그 집 밖으로 나가는 문 앞에 서서 장석민은 이마를 댄 채 고민했다. 얼마나 의미없는 고민인 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숨은 하나니까.

“젠장. 죽기밖에 더해.”

 장석민은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더 이상 자하르를 믿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장석민은 커다란 눈을 껌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 한참 걸렸다.

「뭘 보는 거야, 재수 없게.」

「꺼져. 볼 거면 돈을 내고 보든가.」

 벽에 선 채로 엉겨 붙어 있던 남녀가 장석민을 발견하고 진득한 욕설을 퍼부었다. 장석민은 엉겁결에 죄송합니다, 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힉.”

 저쪽에서는 한층 더 진한 장면이 연출 중이었다. 남녀 간에 벌어지는 은밀한 일이야 그간 수없이 직접 경험해온 터라 익숙한 그였지만 공공연한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을 가도 그렇고 저곳을 가도 그랬다. 그제야 장석민은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이 밖이 아니라 건물 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것도 홍등가의 건물 안이라는 사실을.

“왜 하필, ──미치겠네.”

 한 번도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였다. 장석민은 낯 뜨거운 장면들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취객과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넌 뭐야.」

 험악한 반응에 장석민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부딪쳐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고 갈 생각이냐? 건방진 새끼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드럼통만 한 몸을 가진 남자가 장석민의 팔을 움켜잡았다. 아랍어라고는 인사말조차 알지 못하는 그였기에 입만 뻥긋거리며 당황스러워했다.

「사과도 안 할 거냐! 이 새끼가 죽고 싶어?」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진다는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장석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점점 이쪽을 보는 시선들이 늘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다.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입이 붙었어? 아가리를 내가 찢어줄까?」

 남자가 솥뚜껑만 한 손을 뻗어 장석민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의 소란은 막아야 한다.

 장석민은 있는 힘껏 다리를 차올렸다. 퍽, 하고 질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아래에서 울렸다. 같은 남자로서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조용히 시킬 방법은 이뿐이었다. 장석민은 남자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남자의 짐승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정확히는 몰라도 저놈 잡으라는 말이 섞여 있음이 분명하다. 주변에서 하나둘 어슬렁거리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봐선.

 장석민은 미로처럼 이어지는 복도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복도 옆으로는 손님을 받는 방들이 주르륵 놓여 있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와 매음굴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섞여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장석민은 그중 열려 있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찾는 남자들이 욕설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장석민은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어졌다. 장석민은 문을 열고 빠끔히 복도를 확인했다. 헐벗은 여자 두엇이 담배를 피우며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은 여기를 벗어나야 한다. 복도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궁 밖으로 나왔으니 대사관을 찾아서 한국에 연락을, …….

“──!”

 복도 저쪽에서 언뜻 보이는 덩치 큰 남자의 모습에 장석민은 기겁을 하고 주변을 살폈다. 아까 나온 방으로 들어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가장 가까운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숨겼다. 불행스러운 일은 커다란 방 안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행스러운 일은 그 사람 중에 장석민에게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남자가 지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장석민은 최대한 문 앞에 바싹 붙어서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숨넘어갈 듯한 여자의 교성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돌아갔다. 이런저런 19금 모드에는 익숙하다고 여겼는데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장석민은 헉, 하고 놀라고 말았다.

 대체 몇 명이랑 하고 있는 거야.

 국부만 간신히 가린 여자들이 뱀처럼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장석민은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의 숫자를 헤아리다 그만두었다. 그 안에 여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챈 터다. 여자 남자 가리지 않는 난교라니. 게다가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지 다들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장석민을 쯧, 하고 혀를 내찼다. 개인 취향으로 치부하기에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인가 궁금해졌다. 침대 가운데에서 교성을 지르고 있는 여자는 개처럼 엎드린 채 울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나마 수치는 있는지 얼굴은 베일로 가린 채였다. 생각보다 멀끔한 남자의 뒤태에 장석민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멀쩡하게 생겨서, 할짓이 없어서 저런 짓을…….

 여자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장석민은 그의 다리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살덩이를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저런 것으로, ……, …….

 남자는 기절한 여자를 옆으로 던지고 이번에는 남자의 머리통을 움켜쥐어 엎드리게 했다. 배려도 없이 밀고 들어가는 무지막지한 삽입에 장석민은 으, 하고 신음을 삼켰다.

 아래 깔린 남창은 울면서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에 올라탄 남자는 무자비하게 움직일 따름이었다. 퍽퍽, 하고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남창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속이 메슥거렸다.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려고 뒷걸음질을 치던 장석민의 눈에 미친놈의 손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맷자락 안에 감추어져 있던 팔뚝이.

 힘줄이 도드라져 있는 팔에 선명한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장석민의 얼어붙은 시선이 천천히, 달팽이가 기어가는 속도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 중 유일하게 베일에 가려지지 않은 회색 눈동자가 서늘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 …….”

 장석민은 자신이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챘다. 목구멍에서 바람 빠진 풍선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안쪽에서 이미 인기척을 눈치챈 후였다.

「누구냐.」

 자하르의 목소리에 장석민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더 이상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1초도 머물러선 안 된다.

 장석민은 뒤로 손을 더듬어 문을 찾았다. 필사적으로 문고리를 찾아 손을 움직였다. 등을 돌려 달려나가면 그만인데 그랬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남자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운만 걸친 그의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빨리.

 그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장석민의 입에서는 급기야 딸꾹질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빨리, 빨리, 제발

 장석민의 손에 문고리가 닿았다 그는 그대로 복도 밖으로 내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잡히면 그대로 죽는다는 생각에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달렸다. 도중에 그를 잡으려고 돌아다니던 남자들과 마주쳤지만 장석민의 눈에는 이제 그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너 이 자식! 거기 안 서!」

 장석민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2층이다. 이 정도면 뛰어내려도 죽지는 않는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그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1층에 세워져 있던 차양에 한 번 걸려 충격이 완화되었지만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 만큼 등이 아팠다.

“윽,…….”

「저기 있다!」

 창밖으로 몸을 내민 남자들이 장석민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장석민은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어두운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 쭈그려 앉았다.

 골목 옆으로 남자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이 떨렸다. 장석민은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릎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덜덜 떨렸다. 방금 안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가 금세 무서워져 고개를 내저었다.

 그 안에 있던 남자는 누구였을까. 그건 자하르가 아니다. 사악한 웃음을 띠고 제 욕망을 채우는 잔인한 남자에게서, 자하르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막의 성자도, 일국의 왕자도, 하젤의 신분을 지키고 있는 스물여섯의 청년도 아닌, 소름 끼치는 미친놈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공포에 젖은 머리가 평범하지 않은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말들과 장면들이 떠올른다. 자하르는 애초에 자신이 변호사라고 했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실질적인 도움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그 중요한 자리에 자신을 데려간 것일까. 그날 유난히 거듭 시계를 확인하던 자하르의 모습이 스쳤다. 설마. 아니겠지. 장석민은 고개를 흔들며 방금 머릿속에 머물러있던 생각을 떨쳐냈다.

“…….”

 아슬아슬했죠.

 그렇게 말하던 자하르의 표정이 어땠던가.

“……. …….”

 크레인이 무너졌을 때, 자하르가 없애려고 한 상대가 과연 누구였을까.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속이 좋지 않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심호흡을 거듭하는 중에 딸국질이 시작되었다.

 히끅.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딸국질은 계속되었다.

 히끅ㅡ.

 어쩌지. 어쩌면 좋단 말인가. 대사관으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까. 아니, 사람을 풀기 전에 나가야 하는 거 아닐까. 대사관은 어디로…….

 히끅──.

 딸국질 소리에 놀란 장석민은 어깨를 움츠렸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수 있다는 것에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자하르는 분명 큰 타격을 입을 터. 자하르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여기 있었어요?」

「──!」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그가 쓰고 있던 베일을 내렸다. 아름다운 얼굴에 상냥한 미소가 걸려 있다.

 장석민은 하얗게 질려 벽에 몸을 붙였다.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의 앞으로 허리를 굽히고 앉았다.

「한참 찾았습니다.」

「……. …….」

 머릿속이 하얗게 번져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자하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안에서 있었던 일을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믿었을 그런 모습이었다.

「어, 어떻게……. …….」

 자신은 자하르를 보았지만 분명 자하르는 자신을 보지 못했다. 자하르가 입매를 휘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새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하르의 손이 땀으로 젖은 장석민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어루만지듯이 셈세한 손길이었다.

 장석민은 숨이 가빠왔다. 하일이 칼을 겨누고 죽이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하일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지만 자하르는 그 속을 알 수 없어 두려움이 더했다.

「말, 아, 안 할, 절대로, 아무한테도, …….」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히 그래야죠, 하고 대답했다. 긴 속눈썹을 드리운 눈매가 뱀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더는 그 미소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린 장석민의 입에서 히끅, 하는 딸국질이 다시 터져 나왔다. 자하르가 웃음을 삼켰다.

「아까 정확히 세 번 딸국질한 거 아십니까?」

「…….」

「덕분에 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하르는 손으로 여전히 장석민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겨주고 있었다.

「정말 쟝은 말라쿤의 현신일 수도 있겠네요.」

 히끅, 딸국질 소리가 답을 대신했다.

「이번에도 세 번 울어, 나에게 위험을 알려준 거잖아요.」

 장석민은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자하르가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이었다. 그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정으로 보인 것은.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네?」

「쟝은 무슨 말을 해도 누구도 믿지 않을 겁니다. 내가 여자든 남자든 가리지 않고 구멍만 있으면 닥치지 않고 박아대는 인간이라는 얘기를, 누가 믿겠어요. 괜한 소리를 하면 왕족에 대한 모욕죄로 목이 잘릴지도 모르죠.」

 자하르의 손이 장석민의 목덜미를 스쳤다.

 떡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석민은 그것이 자신의 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입을 벌리고 크게 숨을 쉬려 했지만 벌어진 입으로 공포가 허연 손을 쑤욱 내밀 것만 같아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잘 됐어요. 어차피 보내기 전에 한 번은 맛을 볼 생각이었으니. 조금 일찍 먹는 셈치죠.」

「네?」

 장석민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겁이 질린 눈만 껌뻑거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석민은 그 손을 잡지도 뿌리치지도 못했다.

「갑시다.」

「…….」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자하르가 손목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

「뭘, ……, 왜, 뭘…….」

 뻐끔거리는 장석민의 손을 자하르가 움켜쥐었다.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는 장석민을 잡아끌면서 자하르가 대답했다.

「아까 하던 것을 마저 해야 하거든요. 제대로 안 빼고 나왔더니 찌뿌듯해서.」

 소년처럼 해사한 얼굴을 한 채,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쟝이 저를 도와주셔야겠군요.」

 장석민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자하르가 손에 힘을 더했다. 컥, 하고 숨이 막히는 느낌과 동시에 장석민의 몸이 앞으로 넘어갔다.

 자하르가 저런, 하고 장석민을 받아들었다. 이내 장석민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자하르의 팔이 소중한 것을 쥐듯이 장석민의 몸을 끌어안았다.

「좋은 꿈 꾸시길.」

 다정한 인사말이 멀어지는 의식 속으로 젖어들었다. 장석민을 어깨에 걸친 채, 자하르가 검은색 베일을 얼굴에 둘렀다.

 달도 보이지 않는 검은 밤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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