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하르의 목에서 탁한 숨소리가 올라왔다. 성기를 끝도 없이 당기는 구멍에. 입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아,──,아, 하아,…….」
장석민의 숨소리가 금세 흐트러졌다. 눈가와 뺨이 촉촉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자하르가 입술을 축였다. 절경이었다. 미끈거리는 체액으로 젖은 성기를 힘 있게 훑어 올리자,
장석민의 목이 뒤로 꺾였다. 손바닥에 뜨끈한 액체가 팍,하고 터졌다. 좁은 구멍이 숨을 쉬듯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자하르가 늘어진 장석민의 허리를 붙들고 거칠게 성기를 밀어 올렸다. 뻐끔거리는 구멍 안으로 끝까지 박아올린 순간, 자하르의 욕정도 분출을 시작했다.
「──,──.」
자하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정감을 느끼는 사이 장석민은 눈을 감았다. 사정 뒤의 탈력감과 수치심으로 도저히 눈을 뜨고 자하르를 바라볼 수가 없던 것이다. 벌어진 아래가 아프고 속이 좋지 않았다. 안을 잔뜩 적신 자하르의 정액 때문에 배가 더부룩했다. 자하르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장석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그만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걸 자하르가 못 알아들을 리 없다.
「……,…….」
그런데 어째서 아래가 전보다 조금 더 빠듯하게 맞물리는 느낌일까, 장석민은 눈을 깜빡거리며 자하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자하르가 이런,하고 쓰게 웃었다.
「──,──!」
장석민이 흠칫해서 어깨를 떨었다. 찰박, 하는 소리가 아래에서 울렸다. 단단한 성기가 아래를 작게 쳐올린 것이다.
「한 번만, 하신다고……」
그렇게 말하는 장석민의 입술이 파들, 떨렸다. 자하르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린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장석민의 손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제 기준의 한 번은, 잡념이 사라지기 전까지입니다.」
「그런 게,──!」
그런 게 어디 있느냐는 항의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소리 없는 비명이 그 자리를 채웠다. 기둥 끝까지 박아올린 자하르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석민이 눈을 부릅뜨며 자하르를 노려보았다. 자하르가 속삭였다.
「그런 눈으로 보시면, 없던 잡념까지 생깁니다.」
속삭임 끝에 예의 그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장석민은 알수 있었다. 진정한 불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괜찮으신가요?」
장석민은 하마터면 그렇게 묻는 자하르의 얼굴을 주먹으로 칠 뻔했다.
다행스러운 건 밤새 기절을 거듭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지금 내키는 대로 행동을 했다가는 왕족 모독죄로 즉각 처형을 당하고도 남는다.
「제가, 걸어가겠습니다.」
「그러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역시 때리고 싶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주먹을 쥐어보지만 자하르의 얼굴에 닿기 전에 잡힐 확률이 99.9퍼센트에 육박했다.
기도를 올리기 전에 잡념을 떨치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성교는 밤이 새고 날이 밝아도 계속되었다. 울다 지친 장석민이 제발 자하르에게 기도를 하라고 빌었을 정도다. 결국 자하르가 아스와드 신전에서 기도를 한 시간은 삼십 분도 되지 않았다. 아래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비틀거리는 장석민의 몸을 흰색 천으로 감싸 안고 자하르는 아스와드를 나왔다.
「……기도를,그것밖에 안 해도 되는 건가요?」
듣기에는 온 종일 해야 한다고 했다. 장석민이 보기에는 모두 미신이었지만 타르카 왕국의 사람들은 종교적 관습을 몹시 중요시했다.
「기도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점잖다 못해 성스럽다. 어제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장석민은 쟈하르의 그런 썩은 면모를 쉽게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지금까지,……」
많은 의미가 함축된 한마디였다. 자하르가 평연하게 대답했다.
「원래 사람들은 믿고자 하는 대로 봅니다. 그 믿음을 만들기가 어렵지, 그 이후로는 쉽습니다.」
이 정도면 국민이 이 사람을 상대로 사기죄로 고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알려지면……,사람들이,실망을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언제 어떻게 알려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
침묵하는 장석민의 얼굴에 비난의 빛이 어리자 자하르가 눈을 가늘게 접는다.
「쟝은 저를 믿었습니까?」
그 물음에 장석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어물어물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자하르의 뒤를 밟아 결국 그 장면을 목격한 것도, 자신이 그를 믿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쟝이 나를 신뢰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어차피 보내버릴 생각이었으니까요.」
어디로 보낸다는 말은 없다. 장석민은 뒷덜미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목격한 폭력성을 미루어 본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저, 왜 안 죽이시나요?」
자하르가 재미있다는 듯이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죽여 드릴까요?」
장석민은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시죠?」
장석민은 당황했다. 크레인이 무너진 일까지 의심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뭔가 다른 걸 보셨습니까?」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아니요,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유는 몰라도 그날 밤 아래에서 자신이 자하르를 구했다는 말은 절대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만나게 되었죠?」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은 뜨끔했다.
「그게, 그러니까, 잠이 오지 않아서 잠깐 나와서 산책을 하다가……왕자님이 가시길래, 그냥 저도……」
장석민은 머리를 굴려 변명을 쥐어짰다. 자하르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그가 자신의 말을 믿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뒤를 따라왔다?」
장석민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지 않았을 텐데.」
「여,열리던데요? 그냥 열어보니까 열렸습니다. 고장 났나 봅니다.」
도서관의 비밀 통로를 타고 그 안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장석민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 될지 모르는 길이었다.
「고장이라, ──손을 봐둬야겠군요.」
「……그걸, 왕자님이 다 만드신 건가요?」
미로처럼 이어지던 지하의 통로를 떠올리며 장석민이 물었다.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였군요.」
「아, 아니요. 그냥 어떻게, 그게……신기해서.」
장석민은 쩔쩔매며 대답했다. 전이었으면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자하르의 말들이 이제는 날카롭게 꽂힌다. 웃어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탑의 지상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문은 제 지시 하에 만든 것이 맞습니다. 나머지 길은 원래부터 있었던 겁니다.」
자하르의 지문으로 열리던 철문이 떠올랐다. 그를 둘러업고 수많은 계단을 오르던 그날의 기억도 함께. 장석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웃는 사이 자하르가 말을 이었다.
「궁의 건물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로 하루를 보냈지요. 궁에 틀어박혀 사는 것은 영 취미에 안 맞아서,말입니다.」
평범한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이중생활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를 자하르는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용케 잘 따라오셨군요.」
「……네.」
「왜 그러셨습니까.」
「네?」
자하르가 길을 걸어가니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저마다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하일 때문에 장석민의 발작을 꾸민 일이 몇번 있었기에[자하르가 장석민을 안고 가는 모습을 보고도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다.
「왜 제 뒤를 따라오셨나요?」
조용하게 묻고 있지만 장석민은 대답 여하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왔다갔다 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자하르라면 일단은 제욕심을 채우고 죽일지 살릴지 결정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그 밤중에,왜 제 뒤를 따라오셨을까?」
자하르가 혼잣말처럼 되뇌는 말에 장석민은 손끝이 차가워졌다. 쓰레기통 옆에서 무릎을 굽힌 채 느꼈던 공포가 다시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아스와드와 연결된 정원을 지나 리문과 이어지는 복도로 들어서자 그들의 곁을 지나가는 시종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고요한 사위가 스산하게 느껴졌다.
「할 말이,있어서……」
「무슨 말이요?」
자하르가 묻는다.
장석민의 머릿속에서 치열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밤중에 왕자의 뒤를 따라갈 정도로 긴히 해야 하는 말이 있다면, 그 말의 무게는 묵직해야 할 터다. 자신이 갖고 있는 비밀은 두 개. 살레하와 관련되어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와 탑 지하에서 있었던 일. 둘 중 어느 것이 폭탄과 연결된 뇌관인지 생명연장의 열쇠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쟝.」
자하르가 꾸짖듯이 장석민을 부른다. 주저하던 장석민은 입을 열었다.
「꿈에서……」
「꿈에서?」
「자하르, 왕자님하고, 제가, ……했는데.」
장석민이 주절주절 이어붙이는 말을 자하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듣고 있었다.
「했는데요?」
「꿈이 아닌 거 같아서, 그래서 그게 사실인지 물어보려고,……」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장석민이 자하르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그 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뒤를 쫓은게 아니라 한국에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몰래 숨어들었다가 마주친 것이지만,
「사실인지 꿈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따라오셨다고요?」
「……네.」
「원래 비밀 통로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요?」
장석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었다. 온몸의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런 것은 정말 처음 봤습니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장석민은 자신이 비밀 통로의 초행자임을 주장했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저 같은 외국인이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그냥, 그냥, 정말 물어보고 싶어서 뒤를 따라간 겁니다.」
자하르가 그렇군요, 하고 중얼거린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그가 하세요,하고 말한다.
「네?」
「저에게 물어보신다고 하셨잖습니까.」
파리하게 질려있던 장석민의 얼굴에 점점 붉은 기가 몰려든다. 굳이 묻지 않아도 무엇이 사실인지 판명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몹시 궁금하셨을 텐데,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인자하게 웃고 있던 자하르의 모습을 보며 장석민은 저 얼굴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여 온 것일까.
자하르가 얼른 물어보라는 듯이 장석민에게 눈짓했다.
「……꿈인가요?」
「무엇이 말입니까?」
「제가, 왕자님과, ……그런 짓을, …」
「정확히 말씀을 해주셔야 대답할 수 있습니다.」
장석민은 입술을 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
「……왕자님이 손으로 저를,……한 거 말입니다.」
「뭘 했다는 건가요.」
「수음을,……」
자하르의 눈이 웃었다. 끝이군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단호했다. 장석민이 눈을 부릅뜨며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네놈이 어디서 사기를 치느냐는 힐난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쟝은 어쩌면 정말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소리를……」
「일종의 예지몽을 꾼 거 아닌가요.」
자하르의 손목에 길게 긁힌 상처가 장석민의 눈에 들어왔다.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장석민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뻔뻔한 미치광이에게 잡혔음을 깨달았다.
리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침대였다. 아스와드 안에서 자하르가 뒤처리를 해주긴 했지만, 몸이 찝찝해서 샤워를 꼭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금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장석민은 침대에 눕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시트를 잡아당겼다. 바로 나갈 것으로 생각했던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저는 오늘 떠납니까?」
「오늘 가실 건가요?」
「……최대한 빨리 가는 편이 서로 낫지 않겠습니까.」
장석민의 말이 사실이었다. 나바툰 의식은 내일이고, 원하던 대로 자하르는 장석민을 한 번 먹었고, 장석민의 존재는 유용하지 않다. 죽이지 않을 거면 보내는 것이 맞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자하르의 눈이 장석민의 얼굴을 훑는다.
「오늘 비행기 없을까요? 새벽 비행기라도 상관없는데,……경유라도 상관없습니다.」
자하르가 대답하지 않자, 장석민이 우물거리다 말을 잇는다.
「내일 있을 의식까지는 곁에 있어주셨으면 합니다.」
「왜요?」
장석민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말라쿤으로서의 효용가치는 이미 다한 셈일 텐데.
「하일 형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무슨 인사를요?」
「보내 주신 선물 덕분에 여러모로 감사하다는 인사말입니다.」
「……」
성격 참 나쁘다. 일부러 하일을 열 받게 하려는 거잖아.
「마무리는 하시는 편이 대외적으로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정상적이고 그럴듯한 이유가 붙는다. 하는 수 없이 장석민은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침대 앞에 선 자하르가 그런 장석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점점 집요하고 날카롭게 변하고 있음을, 장석민은 알아챘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살갗이 따끔거린다. 시선이 느릿하게 몸을 훑는다. 똬리를 틀어 먹이를 단단히 감아올린 후 잡아먹을 적기를 계산 중인 뱀의 눈과 같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젯밤 자하르의 아래에서 몇 번이고 당하면서 몸으로 깨달은 터에, 장석민은 숨죽인 채 그 시선이 자신을 비껴가길 기다렸다.
이윽고,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주무실 건가요?」
「……네? 아, 네.」
설마, 한 번 더하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 그럼 난 죽을 텐데.
장석민은 잔뜩 겁을 먹은 눈으로 자하르를 올려다보았다. 자하르의 손이 어느새 장석민의 얼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
본능적인 경계심에 장석민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자하르의 입매가 잠시 뒤틀린다. 이내 부드러운 곡선을 되찾은 그의 입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붙어 있어서 떼어드렸습니다.」
그의 손에 베개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보이는 흰 깃털이 들려 있었다.
장석민은 무안함에 얼굴을 붉히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그럼 좋은 꿈 꾸시길.」
자하르의 인사말이 머리위에 닿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장석민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발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 같으면 좋은 꿈 꾸겠냐."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말을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장석민은 도로 침대에 누웠다. 날개를 펼친 황금상과 눈이 마주치자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자위했다.
그날 밤, 장석민은 꿈을 꾸었다.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새가 자신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꿈을,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한없이 날고 또 나는, 아름답고 기이한 꿈이었다.
"굉장하구나."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고요한 공간에 울리자 앞에 서 있던 몇이 대변에 인상을 쓰고 돌아본다. 장석민은 합, 하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나바툰.
상자에 이름을 적은 종이를 넣으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식은 뜻밖에 복잡했다. 왕이 뭔가를 할 때마다 제단 아래에 서 있는 왕자들은 기도했다.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그 자태가 사뭇 장엄해서 장석민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바툰 의식을 지켜보았다.
무크라르 왕이 종이를 반으로 접어 히룬으로 불리는 상자에 넣었다.
금은보화로 장식되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히룬은 예상외로 낡고 오래된 나무 상자였다.
무크라르 왕이 종이를 넣고 상자를 봉하자 왕자들이 한명씩 돌아가면서 상자에 손을 얹고 신에게 올리는 맹세의 말을 했다. 여덟 번째 왕자인 자하르가 상자에 손을 올렸을 때, 장석민은 무크라르 왕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8번 당첨이구나.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저 상자가 열리면 모든 것이 끝이 난다.
물론, 상자를 열기 전에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겠지만, 한국에서 누가 후계자가 되는지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으려나, ……됐다. 알게 뭐야. 훗날, 이십여 년쯤 지나서 구글링이나 한 번 해보면 될 테지.
장석민은 제단을 내려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서 길을 걷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이게 현실이지.
약간 씁쓸한 기분을 느낀 장석민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씁쓸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속이 다 시원하구만.
제단을 내려온 자하르와 눈이 마주쳤다. 웃어야 할지 눈을 돌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자하르가 고개를 돌렸다.
"……, ……"
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이거.
장석민은 눈을 깜빡이며 자하르를 보다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하일을 발견하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나바툰이 시작되기 전에 자하르가 자신을 옆에 끼고 이런 좋은 보물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에, 하일의 심기가 계속 저 모양이었다.
참, 성격 안 좋단 말이지.
장석민은 봄날의 햇살처럼 온화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의식은 삼십 분가량 진행되다 상자가 신전에 봉인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장석민은 생각했다.
나바툰이 끝나고 리문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하르는 말이 없었다. 장석민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건네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꼬투리를 잡힐까 두려웠다.
「축하, ……드립니다.」
그나마 통상적인 인사는 해야지, 하고 축하 말을 건넸다. 생각에 잠겨있던 자하르가 네? 하고 되물었다.
「이믈라쿤이 무사히 끝난 것 말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상자를 열고 종이에 나타나는, 물론 미리 적어놓은 것이겠지만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종이에 누구의 이름이 적혀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군요.」
이제는 하젤의 신분도 벗고(물론 이미 훌렁 벗은 지 오래겠지만), 좋은 비를 맞이하라는 가식적인 말을 하려던 찰나, 자하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봤는데──.」
천천히 뒤를 끄는 모양새가 썩 좋게 들리지 않는다. 장석민은 바싹 긴장을 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자 자하르의 눈동자색이 진해진다. 장석민은 불안이 술렁술렁 마음을 뒤흔드는 감각을 맛보았다. 저 눈을 알 것 같았다. 어제 밤새도록 자신을 안으면서 보였던 눈이다. 끝난 것이라 생각하면 다시 달려들어 제 욕심을 채우던, 탐욕스러운 남자의 눈.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자하르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려고 하는 찰나,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며 자하르의 이름을 불렀다. 자하르의 얼굴이 굳었다. 시종이나 수행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자를 앞에 두고 달려선 안 된다는 것이 궁중의 예법이었다.
「자하르 왕자님.」
그가 무너지듯이 자하르 왕자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몰아쉰다. 자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급히 두 손을 모은 채, 시종이 전언을 말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장석민은 점점 변해가는 자하르의 표정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리문으로 먼저 돌아가 계세요. 시종이 길을 안내해줄 겁니다.」
리문으로 돌아가는 길은 장석민도 알고 있었다. 굳이 시종에게 안내를 받으라는 자하르의 말이 이상하리만치 불길하게 들렸다.
「네? 무슨 일인데……」
자하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늘한 얼굴을 하고 그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걸어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본궁으로 향하는 하얀색 길이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장석민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침대 주변을 돌았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방문을 열었다. 경비병이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저기요.」
장석민은 불렀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간절한 부탁에도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장석민은 다른 말로 그를 회유했다.
「전화가 안 된다면 정말로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하일 왕자님을 뵐 수 있을까요? 5초면 됩니다.」
대답은 역시 돌아오지 않는다. 장석민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이며 3초 라고 말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안 되겠다는 생각에 문을 나서려 하자 경비병 둘이 여지없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선다.
「나가실 수 없습니다.」
수십 번은 더 들은 말이었다. 말로 달래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 봐도 마찬가지였기에 장석민은 포기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치겠네."
장석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장석민은 뭔가 일이 단단히 틀어졌음을 눈치챘다. 시종에게 전언을 듣던 자하르의 얼굴이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자하르가 다른 사람의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리문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석민은 하캄을 찾았다. 그나마 가장 말이 통하는 상대였던 터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는 장석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으아, 진짜 미치겠다."
다시 소파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던 장석민의 눈에 황금상이 들어왔다. 아직도 꼬아놓은 시트가 그 목 위에 고삐처럼 걸려 있는 채다. 이 몸으로 벽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여기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장석민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가 제 눈을 의심했다. 호수 쪽 길로는 경비병이 서 있었다. 누가 지시를 내렸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하르, 이 무서운 중동 놈."
장석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차라리 리문에 들어 오기 전에 죽을 각오를 하고 탈출을 했어야 했다. 경비병이 삼엄해지기까지 이렇게 짧은 시간이 걸릴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건만,
시계를 확인했다. 자하르가 본궁으로 간 지 세 시간가량이 지났다.
이제 슬슬 그가 나타나면 자신은……
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장석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하르가 사람을 물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다.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이 떠나자 자하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몇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자하르의 낯빛이 눈에 띄게 안 좋아져 있었다.
「국왕 전하는……」
장석민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하르가 눈썹을 휜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의미다.
「하, 하캄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낮다. 자하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장석민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장석민은 두 걸음 물러섰다.
「왜 그러시죠?」
자하르가 물었다. 뒤를 돌아 도망치고 싶은데 장석민은 등을 보일 수 없었다. 홍등가에서의 그날과 같다. 등을 보이는 순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오, 오지 마세요.」
장석민은 잡히는 대로 손에 쥐었다. 자하르의 시선이 장석민의 손에 닿는다. 그가 웃는다. 장석민은 젠장.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하필 잡는다는 것이 물병을 쥔 것이다.
「물을 따라주시려는 거면 저기 컵이 있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뒤를 가리켰다. 장석민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건가요?」
자하르가 한 발자국 또, 다가온다. 뒷걸음치던 장석민은 테이블에 걸려 다리가 꼬였다. 자하르가 다가와 장석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장석민이 기겁하여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이거 놔!」
자하르가 장석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을 급소 부근에 대고, 그,가 속삭이듯 말한다.
「쟝은 지금 이 자리에서 조용히 시키는 방법이라면 이것 말고도 수십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 …….」
자하르가 장석민을 놓아주며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병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가만히 있는게 좋을 겁니다. 지금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니니까.」
유쾌한 기분이 아니라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자하르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자하르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무크라르 전하는, ……그럼, …….」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자하르가 짧게 대답했다.
무크라르 왕이 쓰러졌다. 갑작스럽게 호흡곤란을 일으켜 쓰러진 그는 바로 왕실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캄의 말에 따르면 무크라르 왕이 쓰러진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병세가 악화하였다는 말도 있고 독살에 대한 소문도 떠돌았다. 후계자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병실 안에는 왕자들의 출입까지 금하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지병이 있긴 했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과 나바툰 의식을 완료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냥 상자만 열면 되는 거 아니냐는 물음에 하캄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크라르 왕의 손으로 상자를 열지 않는 이상, 나바툰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고 의식불명에 빠진 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장석민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자하르는 좆 됐구나, 였다.
열 명, 아니 그중 하나는 거의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니, 아홉 명의 왕자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사람이 자하르였다. 다른 왕자들이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건 분명했다. 왕이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아홉명의 왕자가 누구를 밀어내려 할지는 외부인인 장석민이 봐도 빤했다. 그리고 자하르에게 현재 장석민은 최고로 위험한 지뢰였다. 상자만 열면 후계자가 되는 상황에서는 장석민을 살려둘 여유가 있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장석민은 깨달았다. 지금 자하르가 좆 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세야말로 좆 오브 더 좆이었다.
「쟝.」
자하르가 장석민의 이름을 불렀다.
「죽이지 마세요!」
장석민이 다급하게 오히쳤다. 그 말을 듣고도 자하르는 웃지 않는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자하르는 여유가 없어졌다.
「죽,죽이지 마세요. 돌려보내 주신다고, 그렇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신 말씀을 지키셔야죠.」
「그랬죠.」
자하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린다.
「그런데,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
시발. 역시 내가 좆 된 거잖아. 장석민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자하르가 경비병을 물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놈이 다짜고짜 한 번 하자고 했을 때, 아니, 홍등가에서 그냥 쭈그려있지 말고 도망을,…… 젠장. 애초에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당장 바로, 한국으로 보내 주시면 되잖아요!」
장석민이 외쳤다. 자하르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스친다.
「현재 타르카 왕국은 국가 안전 조치가 내려진 상태입니다.」
「네?」
「국가 비상 시 국가의 안녕과 치안유지를 위해 내려지는 조치입니다. 아마, 이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자하르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시계를 볼 때마다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절대 좋게 해석할 수 있는 몸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쟝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보낼 수 없다면 자하르가 장석민을 관리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장석민의 얼굴이 파르라니 질렸다.
「주, 죽이지 마세요. 네? 뭐든지 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빌어먹을 이중인격자야!
장석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무표정한 자하르의 얼굴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생각하는 것이 고스란히 얼굴에 보이는 하일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는 맹세코 생각해본 적 없거늘.
「──조금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하르의 눈이 장석민의 몸을 훑었다. 그로서는 의외롭게도 한 번쯤 더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이곳에 오면서도 장석민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생각했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결론은 처음부터 내려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미 내린 결론을 내키지 않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약속하셨잖아요.살려주시기로, 그래서, 그것도 했, ……젠장. 살려주시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자하르는 물끄러미 장석민을 바라보았다. 겁을 먹은 새카만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자하르의 커다란 손이 장석민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결이 좋은 피부가 손끝에 닿는다. 이게 얼마나 부드럽게 감겨오는지, 밤새도록 맛을 본 기억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뒤로 미루지 말고 진작 맛볼 것을, 하는 쓸데없는 후회가 들었다.욕심이 진득하게 들끓었다. 차라리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지하 감옥에 가두어 놓을까.혼란이 정리될 때까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어두는 것도 방법이 될 텐데.하지만 차가운 이성은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임을 내도록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몹시 아쉽긴 하군요.」
자하르가 아랍어로 불쑥 중얼거리자 장석민의 불안은 한층 심해졌다.
장석민의 얼굴이 파르라니 질렸다. 힘으로는 그를 당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장석민이 잠깐만요, 하고 외쳤다.
「제가 돌아가지 않으면 한국에서 분명히 문제가 제기할 겁니다.」
자신이 이곳에 끌려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한국에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을 자하르도 모른다.
「국가 간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정말로 민간인 하나 때문에 국가 간 외교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장석민은 냉큼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자하르는 누구보다 외교에 대해 빠삭했고 장석민 역시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장석민은 호소문의 방향을 틀었다.
「제, 제가 왕자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네가 나를 돕는 길은 세상에서 사라져주는 것이라고 다정한 눈이 말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게요. 뭐든, 어떻게든, 저는 한국에서 변호사였고 어떻게든 황자님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필사적으로 자신의 유용함에 대해 피력했다. 자하르는 장석민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죽는다.
장석민은 눈을 부릅떴다. 먼발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구세주와 눈이 마주친 것도 그와 동시였다.
「잠깐만요!」
자하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장석민의 목덜미에 자하르의 손이 닿았다.
「잠깐, 날, 이용하면, ……말라쿤으로──.」
장석민이 필사적으로 내뱉는 말을 듣고도 자하르의 손은 장석민의 목을 감싸 쥔다.
「말라쿤으로, 절 이용하시라고요!」
자하르의 눈동자에 한숨이 섞였다.
「설마 그걸 진심으로 믿으신 겁니까?」
어디까지나 상징의 문제였다. 짧은 기간이라면 상관없지만 자하르는 그 상징을 길게 끌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걸, ──믿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도저히 무시할 수 없게끔 하면, 되잖아요.」
자하르의 손에 들어갔던 힘이 풀린다. 장석민은 그 사이에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손바닥으로 목을 쓸어내리며 젠장, 하고 중얼거렸다.그 짧은 시간에 저 세상을 본 것만 같다.
「믿게 만든다고요?」
어디 더 해보라는 승낙처럼 들려 장석민은 말을 이었다.
「제가 말라쿤의 현신이라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자하르가 눈을 감았다 뜬다.
「쉬울 것 같습니까?」
「왕자님도 사람들을 상대로 그렇게 사기를, 힉──, 아,아니요. 그러니까 왕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저 좋을 대로 믿고 싶어 한다고요.」
자하르의 무시무시한 눈과 마주한 장석민이 황급히 말을 고쳤다.
「그래서요.」
「지금 왕자님은 물론이고 국민들 역시 몹시 당혹스러운 상황이라는 거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