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기도하고 있는 남자의 너른 등을 보며 장석민은 잇새로 중얼거렸다. 흰색 전통복을 입고 기도하고 있는 자하르는 사막의 성자라는 칭호가 완벽하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무크라르 국왕의 회복을 빌기 위한 기도회가 진행되었다. 자하르 왕자가 중심이 되어 사람들이 모였다. 장석민은 구석에 앉아 자하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사기꾼, 진짜 사기꾼. 말도 안 돼."
몇 시간째 묵묵하게 반듯한 자세로 손을 모르고 절을 올리고 기도하는 자하르는 어젯밤 장석민이 보았던 남자가 아니었다. 기도하기 위해 모인.사람들은 저마다 자하르 왕자의 경건한 자태를 칭송했다.
장석민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자하르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양심도 없는 중동 사기꾼에게 장석민은 온 마음을 다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미친, 대체 몇 번을 한 거야."
세 번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섹스를 좋아하는 장석민도 하룻밤에 그렇게 많은 횟수를 해본 적이 없다. 그건 남자의 정력문제를 떠나서 상대방에 대한 예의였다.
결국 장석민은 오늘도 자하르에게 안겨 신전으로 오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사람들은 장석민의 몸이 안 좋아지자 신동력을 발휘하고 난 후유증일 것 이라고 입을 모아 숙덕거렸다.
이전에 두 왕자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홉 왕자의 목숨까지 구하자 장석민에 대한 이야기가 심상치 않게 펴지기 시작했다. 여덟 명의 왕자들 모두 장석민의 앞으로 선물을 보냈다. 내켜서 보내는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다들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자하르의 손바닥 위에서 지랄발광을 한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장석민 역시 그 선물을 받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포장을 풀지도 않고 방구석에 선물을 차곡차곡 쌓아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크라르왕이 병중이었기에 자하르가 연회를 열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말라쿤 님의 은혜로운 선견에 감사합니다.」
중년의 남자가 장석민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장석민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이게 벌써 다섯 번째다. 기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저마다 앞을 다투어 장석민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그 와중에 장석민은 자신을 말라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제 이름은 그게 아니라고 정정을 해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상징을 최대한 이용해 자하르를 돕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젠장, 언제 끝나는 거야 ."
장석민은 허리를 두드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세시간이 넘게 기도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먼저 리문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제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허리를 두드리며 국민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는 그의 앞으로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신의 목소리를 들어 형제들을 도운 그대의 선견에 감사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랍어였기에 장석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헉,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왓다.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복식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만큼, 아름다웠다. 길로 진한 속눈썹 아래 자리한 호박색 눈동자가, 약간 우음울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완벽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사람이었다.
정석민을 바라보던 남자는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안쪽으로 사라졌다. 장석민은 머리르 긁적였다.
혹시 저 사람도 남자 후궁이나 그런 것이었을까. 저런 외모라면 분명히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혹할 테지. 혹시 자하르의,후궁인가?
장석빈은 고개를 빼어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미 남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라, 그 사이에 어디로 간 거지.
뺨을 긁적거리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의 앞으로 기도를 마친 자하르가 다가왔다.
「끝났습니다.」
그가 장석민에게 손을 뻗었다. 됐다고 손을 내치려는 순간 자하르의 눈빛이 서늘해지 는 것을 발견하고, 장석민은 하는 수 없이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하신 거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네.」
누구 때문에 피곤한 건지 몰라서 묻는 거냐고 맞받아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목숨은 귀하고 소중하니까, 장석민은 불퉁하게 입을 다문채, 자하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오늘 많은 인사를 들었습니다.」
자하르가 입을 열었다.
「쟝이 왕자들을 위험해서 구한 것처럼 무크라르 전하께 닥친 위험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들 하더군요.」
「……그게 가능할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불가능하겠지요.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뭐,그렇겠지만,……나중에 저한테 전하의 병을 고쳐내라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해주시면 그때는 제가 쟝에게 비가 되어달라고 청할 수도 있겠군요.」
장석민이 정색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만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당연히 그래야죠.」
장석민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자하르가 묻는다.
「보통 후궁으로 들어온 이유는 비가 되고자 함일 텐데, 쟝은 욕심이 없는 분이군요.」
「그, 그런가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장석민은 식은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어떻게 말머리를 돌릴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까,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을 봤습니다.」
자하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장석민은 주절주절 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키는 이정도 되고, 눈동자는 호박색인데,처음에는…….」
웃으며 말을 하던 장석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하르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왜지, 내가 뭔가 실수했나.
「말씀하세요.」
장석민은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왠지 계속했다가는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콕콕 찔렀다.
「오늘은 그럼, 이대로 끝난 건가요.」
일 초라도 빨리 침대로 돌아가 눕고 싶었다. 밤새도록 자하르에게 시달린 탓에 허리 아래가 찌근거려, 걷는 것도 힘들었다.
「잠시 들를 데가 있습니다.」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의 얼굴에 불만의 빛이 스쳤다. 그렇다고 불만을 입 밖에 낼 처지는 아니었기에 그는 말없이 자하르의 뒤를 따랐다.
진땀이 흘러 더 이상은 못 걷겠다는 말을 꺼내려던 찰나에, 자하르가 여기입니다,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장석민은 멍한 얼굴로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다 자하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어째서……?」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장석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하르가 장석민을 데리고 온 곳은 마사였다. 대체 말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마사 안으로 들어서자 여러 마리의 말들이 깨끗한 마방에서 한가로이 사료를 먹고 있었다.
「되게 크네요. 생각보다,」
말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장석민은 놀라서 중얼거렸다.
「가까이 가면 물립니다.」
자하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말 한마리가 푸르르,하며 장석민의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헉,하고 뒷걸음치는 장석민의 어깨를 자하르가 받쳐주었다.장석민이 한층 더 기겁을 하고 자하르에게 떨어졌다.
자하르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장석민은 어깨를 떨면서 죄송합니다.하고 사과했다.
「안 다치셨나요?」
「네,괜찮습니다.」
장석민은 자하르의 손이 닿는 것이 무섭고 어색했다. 두 번 했으니까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운 것이다.
장석민은 손바닥으로 어깨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진짜 여기는 왜 온 건가요?」
자하르는 말없이 마사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장석민도 그의 뒤를 따랐다.문을 나서자 펜스에 둘러싸인 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펜스 앞에는 관리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의 고삐를 쥐고 자하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흑갈색 털을 가진 말은 문외한인 장석민이 봐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방에 있던 말들도 모두 멋져 보였지만 단연 이 말은 그 생김새나 품위가 으뜸이었다. 장석민은 입을 벌린 채, 커다란 말의 모습을 살폈다.
「마음에 드십니까?」
자하르가 물었다.
「네? 아,……멋있네요.」
말이 내 마음에 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장석민은 일단 칭찬을 했다.
「잘생겼네요. 그놈 참.」
「경주마 최고의 계보인 스톱캣의 2대 자마(子馬)인 라이언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혈통이구나 싶어서 장석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브리더즈컵 경주에서 세 차례나 우승한 경주마입니다.」
장석민은 그렇군요, 하고 메가이 없는 호응을 해주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예?……아니요. ──아니, 그게, 왜 물으시는 건가요?」
「선물을 받고도 썩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장석민은 자하르의 얼굴과 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네? 하고 되물었다.
「선물입니다.」
장석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하고 헛웃음을 삼켰다.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나머지 여덟 명의 왕자가 선물한 거야, 워낙 형식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이니 그렇다 쳐도 이놈은 왜 이런단 말인가.
「왕자님.」
장석민이 목소리를 낮추어 그를 불렀다. 관리인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선물은 생략하셔도 됩니다.」
자하르가 장석민에게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제가 그걸 생략해야 하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제가 구해드린 게 아니잖아요.」
목소리를 더 낮추어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자하르가 그래서요,하고 답한다. 장석민의 눈이 커다래진다.
「그게 제 선물을 거절할 이유가 되는 겁니까?」
「아니, 거절하는 게 아니라,…….…….」
자하르가 이미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뒀지만 그마저 자신에게 선물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니, 줄 것이면 상식적인 선에서 끝낼 것이지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장석민은 허허,하고 웃으며 펜스에 몸을 기댔다. 말이 푸르르,하고 움직였다. 관리인이 고삐를 쥐고 있긴 했지만 워낙 거대한 놈이라 관리인도 불안한 얼굴이었다. 장석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을 주면 대체 나보고 어디다 쓰라는 거야.
「마음에 안 드시나요?」
자하르가 부드러운 어조로 거듭 물었다. 장석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보다는, 이걸 어디다 써야 할지, …….」
장석민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자하르가 건넨 말은 현역 경주마였다. 그 몸값만 백억에 가까웠고 은퇴를 한다하더라고 종마로 최소 수백억의 가치를 가져올 말이었다.
그걸 장석민은 처치 곤란한 골칫덩이를 대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럼, ……환불하시면…….」
장석민이 조심스럽게 자하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받아 봐도 쓸 데도 없고 자신이 키울 수도 없는 동물이니 환불이 가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터다.
자하르가 웃는 낯, 그대로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장석민은 사람의 웃는 얼굴이 그토록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여기서 알게 되었다.
……조금도 기쁘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자하르가 관리인에게 뭐라고 말을 건네자 관리인이 쥐고 있던 고삐를 그에게 넘겼다.
「타보시겠습니까?」
자하르의 물음에 장석민은 제 청각을 의심했다.
「네?……누구요?」
「선물 받은 말이니 한 번은, 타보셔야죠.」
입을 대면 사르륵 녹아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어투였지만 장석민은 그 안에 선 날을 느꼈다.
「아니,……저는, 괜찮──.」
관리인이 장석민의 옆으로 다가와 어눌한 영어로 말을 건넸다.
「선물은, 반드시, 받고, 쓰십니다.」
선물을 받은 것은 반드시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장석민은 이전에 자신이 건넨 와인을 깨름칙해하면서도 마셨던 자하르를 떠올렸다. 거절을 할 도리가 없는 셈이다.
황석민은 자하르를 바라보며 진실된 호소를 시작했다.
「저 말 탈 줄 모릅니다.」
「알려드리죠.」
「──.」
그게 아니잖아. 걷기만 해도 식은땀이 흐르는데, 그런 나보고 말을 타라니. 이런 빌어먹을 중동 놈이.
「저, ……말을 타는 게 무서워서 그럽니다.」
남자로서 자존심도 버렸다. 제발, 한 번만 넘어가 달라고, 관리인만 없었으면 두 손을 모으고 빌었을 것이다.
자하르는 여전히 무심한 듯 웃을 뿐이었다. 장석민은 눈짓으로 말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인간이라면 저것을 보고 반추할 수 있는 게 있을 터, 장석민은 관리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열심히 자하르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자하르가 슬쩍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 웃었다. 그러고는 말고삐를 관리인에게 넘겼다. 장석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중인격자인 짓은 확실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구나. 맞아, 인간이면 저런 말거시기 같은 걸로 어젯밤 그런 짓을 해놓고, 저 위에 올라타라고 할 수는,──.
"으악."
장석민이 비명을 질렀다. 자하르가 등 뒤에서 장석민의 허리를 안아 발안장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야. 이, 미친,──."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자하르가 발판에 발을 걸어 그 뒤에 올라탔다. 장석민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뒤에서 고삐를 쥔 채로.
「가볍게 한 바퀴만 돌겠습니다.」
「네? 왕자님, 잠시만, 잠깐.」
장석민이 자하르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자하르의 발이 말의 배를 걷어찬 후였다. 말이 앞다리를 들고 콧김을 내뿜었다. 장석민은 비명을 내지르지도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라이언은 완벽한 경주마였다.
그날 장석민은, 브라더스컵에서 세 번 우승한 경주마의 위용을, 굳이 누군가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좋을 만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타르카에서 윗사람이 내리는 선물을 거절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알게 된 장석민은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누웠다. 방구석에 쌓여있는 선물더미를 보자 서러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스스로 자하르의 방패가 되어주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힘든 고난의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자하르가 까다로워 자신에게 더 이상은 그걸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두 번이니까 참았지 세 번 하라고 했으면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장석민은 몸을 뒤척이다가 으,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본인도 아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자하르는 차원이 달랐다. 하룻밤에 몇 번이나 사정하고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아래를 세우던 자하르는,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 놈이 그간 성자니 뭐니 하며 사람들을 속여 왔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그날 홍등가에서 난교를 즐기던 자하르의 모습이 떠오르자, 장석민은 하루라도 빨리 무크라르 왕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런 놈이 본성을 언제까지 억누르고 있단 말인가.
"절대로 오래 못 가지."
장석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감았다. 잠이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기억은 나는데, 어느새 의식이 혼곤한 수면 안으로 젖어들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한참을 꿈과 현실을 오가는 사이에 장석민은 인기척을 느꼈다.
꿈이겠지, 설마, 이 방에 들어올 사람이 나 말고 누가…….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몽롱했던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그의 예상대로 테이블에 자하르가 앉아 있었다.
「──!」
「깨셨습니까.」
장석민이 몸을 일으킨 기척을 느꼈는지 자하르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한다.서류를 읽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장석민은 허벅지를 슬쩍 꼬집어보았다.아프다, 하지만 아픈 꿈이라는 것도 있을 터, 마지막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 장석민은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여전히 자하르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체 왜!
절규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장석민은 저기, 하고 자하르를 불렀다.
「왜 그러시죠.」
아무리 이 궁의 주인이 본인이라 할지라도 남의 방에 한밤중에 들어와 하는 말이 저런 것이라니,
「여기,……4층입니다.」
자하르가 묵는 방은 3층이었다. 정확히 리문 전체가 자하르가 사용하는 건물이었지만 그의 침실은 3층에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가 방을 헷갈렸을 수도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이 공중에 스러졌다.그래도 방에 들어와 있는 이유는 알아야 했다. 그래야 쫓아버릴 수 있을테니까.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서류를 읽고 있던 자하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보니 온유하고 반듯한 자태, 그대로다.
「현재 전하께서 쓰러지시고 후계자는 정해져 있지 않은 터라,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여러가지 준비들을 해둬야 합니다. 몹시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러시군요.」
「그래서 쟝과 상의하겠다고 해두었습니다.」
「네? 저요? 제가 왜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상의하겠다고 주변에 말을 한 것이지, 상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장석민은 자하르가 자신의 방을 찾은 이유를 그제야 알아챘다.
「감사합니다.」
중요한 조언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자하르가 장석민의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있는 셈이었다.
「인사 듣자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필요한 일이니까 하는 겁니다. 알고 있었다. 자하르는 필요가 없다면 자신을 살려두지도 옆에 두지도 않을 테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장석민은 패기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 작업이라면 분류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테이블 위에 놓인 꼬부랑글씨를 본 순간, 조금 전의 패기는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장석민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엉거주춤 서 있자 자하르가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아랍어를 배울 걸 그랬습니다.」
변명처럼 중얼거린 말을 듣고 자하르가 나직하게 웃었다.
「엄격히 말하면, 탁륵카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아랍어와 다릅니다. 문자는 같은데 단어나 발음에 차이가 있습니다.」
「네?!」
「타르쿤이라 하는데, 아랍어의 방언 형태로 보시면 됩니다. 배우기 어려우실 겁니다.」
자하르가 딱 잘라 어렵다는 말을 했다. 장석민에게는 타르쿤과 아랍어가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그에게는 너무나 높은 장벽이었다.
「배우실 생각이 있으면 선생을 붙여드리죠.」
자하르의 말에 장석민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어차피 왕자님 말고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것도 아닌데요.뭐,」
장석민의 말에 자하르가 서류를 읽고 있던 것을 멈추었다. 장석민은 머뭇거리며 자하르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또 말실수를 했나?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내일 다시 회의가 있을 겁니다. 장관들과 왕자들이 모여 중요한 안건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자하르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쟝을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제가요?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때야 자하르가 일부러 판을 벌이려고 억지로 데려간 것이지만 내일 있을 회의는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테러가 있었던 직후라 다들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꺼렸지만 쟝을 데려간다 하니, 수락을 하더군요.」
「…….」
태중의 세뇌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그런데, 법대로 일을 결정하면 안 되나요?」
「타르카 왕국은 의회가 없습니다.」
「……법은 있잖아요.」
「국왕이 입법,사법,행정,종교의 수장을 맡고 있습니다. 자문위원회가 있지만 정책을 심의,권고하는 수준입니다. 」
한마디로 모든 결정은 왕의 말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나라의 모든 일이 마비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냥, 상자 열면 안 됩니까?」
하캄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자하르가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면 저도 이 고생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그냥 제가 열어버릴까요? 사람들 보는 앞에서,」
「사형입니다.」
「네?」
「국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 봉인된 히룬에 손을 대는 경우, 사형입니다.국가 반역죄로 다스려 재판 없이 즉각 처형입니다.」
「……. 절대로 안 만지겠습니다.」
장석민은 마치 눈앞에 히룬이 있는 것처럼 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자하르가 그래야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내일 있을 회의에도 또 이상한 일을 꾸며놓으신 건 아니죠? 뭔가 일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방탄유리를 들이박은 어깨가 아직도 욱신거렸다. 정신이 나가 한국대사를 부르짖던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이번만큼은 그런 지랄발광은 피하고 싶었다.
「내일은 소소합니다.」
「……!」
거봐, 역시 있었잖아. 안 물어봤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이 미친 이중인격자.
「……제발, 부탁하는데, 미리 언질 좀 해주세요. 왕자님을 도와드리면 제 입장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늘 필요합니다.」
「내일은 간단한 겁니다. 누군가 쟝에게 질문을 할 거고, 그에 대한 답을 제가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차에서 건네 드리죠.」
뭔가 터지고 부서지는 일은 다행히 아닌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쉬던 장석민은 그런데, 하고 슬쩍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일 하시다, ……걸리면 어쩌십니까.」
명백한 테러였다. 에드문트 회장이 왔을 때 일어난 사고까지 자하르가 벌인 일이 맞는다면 이런 일에 도가 튼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꼬리가 잡히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 일이라니요?」
자하르가 되물었다.
「그,……터지고,……폭발하고.」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봐, 장석민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목소리를 낮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1층 위로는 사람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제가 부르지 않는 이상.」
장석민의 불안을 종식시켜주려는 말이었지만 장석민의 머리에는 또 다른 불안이 자리 잡았다.
……왜 사람을 또 내려보낸 거야. 아니겠지.
장석민은 애써 몽글몽글 솟아나는 불안을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걸리면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사고를 예견하게 해 달라 부탁은 했지만 다짜고짜 왕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폭탄을 터트릴 줄은 몰랐다. 이게 알려지면 자하르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네? 분명히…….」
「타르카 왕국에도 크고 작은 테러가 많이 일어납니다. 보통은 국경 지역과 인접한 소수민족과의 이권문제나 종교문제이죠.」
「…….」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기구가 그런 일을 조사하기 때문입니다. 위험을 알아두는 것이 최고의 방어이자 최선의 공격이 될 수 있으니까요.」
등골이 오싹했다. 결국에 그 일도 제가 벌인 게 아니라, 그 일이 벌어지게 뒷공작만 했다는 얘기였다.
서류를 읽고 있는 남자는 나라의 일을 걱정하며 불철주야 일을 하는 훌륭한 왕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속 시커먼 남자의 모습을 그 누가 알고 있을까, 저 껍데기를 유지하는 것도 참 용타.
시선을 느낀 자하르가 고개를 돌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좀 피곤하겠다, 싶어서요.」
「무엇이 말씀입니까.」
「그, 성격, ……, 그러니까 참고 지내시는 거요.」
말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이후로, 장석민은 처음으로 언어적 한계를 느꼈다. 어떤 단어를 사용해도 좋은 어감이 아니었다. 미친 이중인격을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단 말인가.
자하르가 아, 하고 웃는다.
「그럭저럭 지낼만합니다.」
「하, 하긴. 뭐든 수련을 통해 잘 갈고 닦으면, 익숙해지죠.」
참 바보 같은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르도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하하, 수련이라,──갈고 닦으면 뭐든 익숙해지기 마련이죠.」
장석민은 그의 시선이 섬뜩하게 날카로워지는 순간을 목도했다.
이거, 안 좋은데.
「그런데 열심히 수련을 해도 영 안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저도,」
장석민은 의자의 손잡이를 쥔 채로, 언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지 적기를 계산했다.
「며칠은 적당히 참을 생각이긴 했는데, 수련이 모자라 그런지──.」
자하르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지금이야, 지금 일어나서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하고 침대로 가는 거다, 그래, 지금!
장석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하르가 일어선 장석민의 팔을 움켜쥐었다.
「영 찌뿌듯하단 말입니다.」
「……다녀오세요.」
어딜 다녀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자하르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제게 지금 아버님의 의식을 찾지 못한 이 상황에서 매음굴로 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아버님을 생각해서 자제하라는 말을 한 것은 쟝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의미로 자제를,…….」
「게다가 무엇보다 문이 고장 났으니, 당분간은 그 통로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 문은 엄청나게 멀쩡하다구요. 절대로 안 열릴 테니까 마음껏 다녀오세요!
……입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말들이 가슴 속에 쌓여갔다. 장석민은 한국인 고유의 정서인 한(恨)이 어떤 것인지, 타지에 나와서 배워가는 중이었다.
「차차 고치면 되니까 일단은, ──아쉬운 대로 해결합시다.」
자하르가 장석민의 팔을 붙들고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장석민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저는, 아쉬운 것이, ──헉.」
눈앞에 드러난 흉악한 그것의 존재에 장석민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자하르가 손가락으로 장석민의 턱을 쓸어내렸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받치자 장석민이 흠칫, 하고 입을 다물었다.
손가락이 장석민의 입술에 닿았다. 엄지로 턱을 누르고 입술 사이를 검지로 문질렀다. 자하르가 나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입 벌리지 않으면 아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
장석민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자하르가 잘했어요, 하고 그를 다독였다.
「제가 이 서류를 다 읽을 때까지, 끝내주시면 됩니다.」
자하르가 자신의 살덩이를 쥔 채로, 평연하게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자하르의 낯짝이 몹시 금욕적으로 보여 장석민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싫증 안 나십니까?」
제정신으로 하기에 힘든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분명히 안 한다고 해놓고, 왜 자꾸 다른 말을 하는 거야.
「글쎄요. 입으로는 아직 하지 않아서, 모르겠군요.」
「──!」
자하르가 읽고 있던 서류 한 장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구음에 자신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느긋하신 걸 보니.」
「해본 적 없──,──!」
자하르가 장석민의 머리통을 쥐고 그대로 앞으로 끌었다. 입으로 살덩이가 밀려들어 오는 느낌에, 장석민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직 힘을 받지도 않았는데도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입안이 가득 찼다.
「처리할 일들이 많습니다.──잡념이 사라질 수 있게 해야죠.」
자하르의 커다란 손이 장석민의 뒤통수를 누른 채로,힘을 주었다.울먹울먹하는 장석민의 눈이 자하르에게 항의의 뜻을 표했다. 까슬한 음모 위로 장석민의 뺨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하르의 아래에 빠듯하게 피가 몰렸다. 자하르는 장석민의 목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쟝이 도와주셔야 합니다.」